그때 그일

제헌절 또아리 호박 : 침묵의 기도

mamuli0 2019. 7. 17. 10:17

 기해년 제헌절 또아리 호박 작황을 돌아보았다. 장마철 일기 예보가 빗나갔다. 무밀기에 호박꽃은 꿀벌들이 즐겨 찾는 꽃이다. 공터와 보리밭 가에 심은 호박이 힘차게 자라고 있다.


 


 침묵의 기도


1978.01.22 정인세 원장


 마태복음 6장 5절 6절 말씀 먼저 읽습니다. ‘기도할 때에도 위선자들처럼 하지 마시오. 그들은 남에게 보이려고 회당에서나 큰길 모퉁이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합니다. 나는 분명히 말 합니다. 그들은 받을 상을 벌써 다 받았습니다. 당신은 기도할 때에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보이지 않는 당신의 아버지께 기도하시오.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아버지께서 다 들어주실 것입니다. 여러분은 기도할 때에 이방인들처럼 빈말을 되풀이 하지 마시오. 그들은 말을 많이 해야만 하나님께서 들어주실 줄 압니다. 그러니 그들을 본받지 마시오. 여러분의 아버지께서는 여러분이 청하기도 전에 벌써 여러분에게 필요한 것을 알고 계십니다.’ 


 


 7장으로 가서 7장 7절서부터 더 봅니다. ‘구하시오. 받을 것입니다. 찾으시오. 얻을 것입니다. 문을 두드리시오. 열릴 것입니다. 누구든지 구하면 받고 찾으면 얻고 문을 두드리면 열릴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 아들이 빵을 달라하는데 돌을 줄 사람이 어디 있으며 생선을 달라는데 뱀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여러분은 비록 악하지만 자기 자녀에게 좋은 것을 줄줄 아는데 하물며 하늘에 계신 여러분의 아버지께서야 구하는 사람에게 더욱더 좋은 것을 주시지 않겠습니까?’ 거기까지만 읽었습니다. 기도에 대한 문제를 조금 생각 하려고 하는데 특별히 침묵. ‘침묵 속에 사는 사람들’ 말없이 사는 사람들을 본받으면서 같은 기도라도 묵상 기도에 대해서 조금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침묵하는 거 말을 많이 하는 거보다 침묵을 지키는 게 더 귀하다는 것은 동서고금에 성인들이 우리에게 많이 가르쳐주신 말씀 이지요 어떻게 말을 잘하는지 그의 입을 가르쳐서 황금입이라는 일컬은 크리스톰스 라는 양반이 있었지요.


 


그분은 참 물론 세상 말이 아니라 진리에 대해서 설교지요. 요새말로 하면 설교를 잘해서 그 입을 황금 입이라고 칭찬을 받으신 양반인데 크리스톰스라는 양반은, 그 양반은 이런 말을 했지요. 웅변이 은이라면 말 잘 하는 걸 은에다가 비유한다면 침묵은 금이라고 그렇게 비유 했습니다. 그렇게 말을 귀하게 잘하는 양반도 침묵이 더 귀하다고 그래. 침묵은 금이요, 웅변은 은이라고 그렇게 한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 현대를 가르쳐서 말 많은 시대라고 그러고 한국 기독교인들은 말 많은 사람들 이라고 그렇게 세상 사람들에게 일컬음을 받습니다. 아마 여러분 중에서는 참 침묵을 지키면서 사는 분들도 계신 줄 압니다. 저는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말 많은 사람이지요. 말 많은 사람에게는 몇 가지 괴로움이 있지요. 뭐냐 하면 말 하고나서 첫째 후회를 하게 됩니다. 말 하고나서 후회하는 것이 말 하고나서 잘했다 하는 거 보다 더 많습니다. 대개 그럽니다.


 


 또 말 많은 사람은 한번 입에서 쏟아져 나온 말은 주워 담지도 못하고 ‘네 말이 너를 심판할 것이다.’ 그러셨지요. 그 말을 심판을 받을 말을 많이 하게 됩니다. 그러나 한번 엎질러 진물이라 자기 말로 자기가 심판 받을걸 생각을 하면 기가 막히지요. 그러나 어떻게 할 도리가 없습니다. 그런 과오를 범하지요. 그렇지 않더라도 꼭 진리에 대해서 좋은 말만 하는 수가 거의 없지요. 혹시 그런 경우가 있다 해도 언제든지 말 하는 사람에게는 유익보다 손해가 많습니다. 여러분 중에서 좋은 말만 골라서하고 진리에 대해서 말만 하는 분이 계시다 하고 스스로 말한 뒤에 자기를 살펴보면 자아공허를 느낍니다. 내 속에 담겨있는 하나님의 은혜 아주 귀한 진리 그건 증거 아니할 수 없지요. 할 수 없어서 말을 하게 되서 한 뒤에도 자기 속에 있는 보화를 다 털어 내놔버렸기 때문에 속은 빕니다. 그 공허감이 옵니다. 설교를 아무리 잘하고 나서도 설교한 뒤에 만족감을 느끼기보다 공허감을 느낄 때가 더 많습니다. 말 하는 사람은 대개 손해를 봅니다.


 


그래서 말을 하는 것 보다 안 하는 게 더 좋고 귀하다. 물론 할 때는 해야지요. 나팔을 불지 않으면 저주를 받는다고 그랬으니까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화가 있다고 그랬으니까 할 때는 해야지요. 그러나 말을 하는 사람일수록 침묵하는 시간을 더 많이 갖는 것이 지혜입니다. 부득이해서 말을 많이 하는 책임이 있는 사람도 반드시 문을 닫아걸고 침묵하는 시간이 많아야 하는 것은 아주 절대적 조건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침묵에 대해서 단순하지가 않습니다. 침묵이라는 것이 말이 한문 글자가 돼서 어려운거 같지만 입 다물고 말 안 하는 건 침묵이라고 그쯤은 다들 아시지요? 침묵, 침묵 말 없는 거 그런데 그 침묵이 말만 안하는 것이 침묵이냐 하는 조금 어려운 문제, 오늘 이 시간에는 조금 어려운 이야기가 됩니다. 그러나 믿는 사람에게는 꼭 필요한 이야기니까 우리가 알아둬야 할 문제를 이야기 하려고 그럽니다. 그러면 입을 다물고 말만 안하면 침묵이냐? 목소리로 들리는 소리는 하지 않아도 사람 귀에 들어가는 소리는 하지 않아도 내 마음속으로는 말을 많이 할 수 있지 않습니까?


 


 제가 지금 입을 다물고 앉아서 온 천하의 꿈도 꿀 수 있고 속으로 누구를 욕도 할 수 있고 미워할 수도 있고 시기도 할 수 있고 내 속에서는 뭐 삼차대전이 일어날 수도 있거든요. 그러니까 그걸 이 외적 침묵은 해도 내적 침묵은 죽이지 못한다. 그래 침묵에는 외적 침묵이 있고 내적 침묵이 있거든요. 그러면 입으로 말을 안 해도 속으로 말을 하는 건 침묵이 아닙니다. 시간이 짧으니까 간단하게 쪼개서 말을 하는 수밖에 없어요. 그러면 정말 침묵이라는 건 외적 침묵도 지켜야하고 내적 침묵도 지켜야 그게 참 침묵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외적 침묵 이라는 것은 입 다물면 되는데 단절을 하는 거지요. 바깥세계와 나를 끊어 버리는 거지요. 그래서 골방에 들어간다든지 산중에를 간다든지 그래서 어떻게 하든지 또 귀를 막고 눈을 감고 아마 여러분 기도할 적에 눈을 감는 건 그것도 있지요? 시선을 통해서 들어오는 외적 세계와 나를 끊어버리기 위해서 눈을 감고 기도하는 거거든요. 인제 그렇게 해서 외적 세계와 나를 끊어버리는 연습을 자꾸 하는 거지요.


 


 그것은 내가 바깥세상에서 오는 모든 유혹과 시험을 끊어버리기 위해서 단절을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러면 그건 했다 해도 그러면 내적세계의 침묵을 어떻게 이룩하느냐 하는 건 참 어려운 문제이지요. 그건 마음을 다스려야 하니까 그래서 내적으로 침묵을 지키는 것에 대해서는 성경도 구약에서부터 신약까지 많이 가르쳤지요. 잠언에서는 아주 말 많은 거에 대해서 굉장히 경고를 많이 했거든요. 그렇게 그런데 내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그 말 마음으로 하는 말 그거를 다스려서 잠잠하게 소리 없이 그렇게 만들기 위해서는 그 다음에 내적 투쟁을 합니다. 그래서 인제 거기서 소극적인 면이 있고 적극적인 면이 있지요. 내 적으로 침묵을 지키는데 인제 소극적인 면은 안하면 되는 거지요. 그런 생각을 안 하면 되지 않습니까? 그러면 인제 내가 아무 생각도 갖지 않으려고 별 방법을 다 쓰지요.


 


 가령 불교에서 이렇게 선을 하는 거와 같이 하기도하고 또 무아의 경지에 들어간다고 나를 잃어버리고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 그런 무아의 경지, 또 공허하게 속을 다 비워버리고 공허하게 만들어 내 마음을,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그리고 무슨 생각이 들어오려고 그러면 그걸 털어버려 자꾸 내쫒아 버려 좋은 생각이고 궂은 생각이고 생각이 내 속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자꾸 마음에서 내쫒아. 아마 그걸 연습해 본분들은 그것도 쉽지 않다는 걸 아실 겁니다. 예수님을 사랑하고 하는 그 적극적인 것을 받아들이기 전에 먼저 내 마음을 비우려고 애 쓰지요. 그러면 인제 내 마음을 비우려고 애쓰면 두 가지 면에서 자꾸 침투 되는 게 있지요. 마음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뭐냐 하면 하나는 악한 생각과 선한 생각이 같이 들어오게 되는데 빈 마음으로 물결쳐 들어오듯이 들어오는 것이지요. 무엇이 들어오는 고 하니 노골로 구체적으로 이야기부터 한다고 그랬어요. 죄악에 대한 생각이지요.


 


자기 잘못이 그렇게 조용해지고 골방에 앉아서 자기 마음을 다스리려고 그러면 자기 잘못했던 거 죄 정욕에 빠졌던 거 욕심에 빠졌던 거 누구를 미워했던 거 시기했던 거 무슨 욕심 부리던 거 교만했던 거 모든 자기 잘못이 그때는 생각이나, 그건 좋은 현상이지요. 그건 정말 비우기 위한 좋은 거지요. 여러분이 집안을 깨끗이 하려면 소지를 해서 쓰레기를 치워버려야 깨끗하듯이 내 마음을 정말 침묵을 지키려고 하려면 내 마음속에 있는 쓰레기를 치워버리는 거니까 대단히 그건 좋은 현상이지요. 그걸 반드시 치워버려야 깨끗이 침묵이 되는 겁니다. 알고 보면 쓰레기를 그대로 놔두고 침묵을 지킨다는 것은 속에다가 썩은 물건을 넣어놓고 껍데기만 슬쩍 덮어놓는 거와 같지요. 그래서 침묵이 될 리도 없고 그건 좋은 현상이 아니지요. 그래서 인제 자꾸 안에 내 속에 있는 것을 자꾸 치워내는 거 이건 내적 침묵을 지키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공허하게 빈 마음을 갖는 그거 자체보다 더 중요하고 반드시 해야 될 문제지요. 과제지요.


 


쉽게 말하면 회개지요. 죄를 회개하는 거 그런데 그 죄를 회개하는 것도 소리를 지르고 떠들썩하게 하는 회개는 진정한 회개가 대개는 못됩니다. 그것도 회개가 되는 건 돼요. 울면서 소리를 지르면서 하는 건 회개가 돼요. 그러나 그건  100퍼센트 회개는 안 됩니다. 모르겠어요. 해본 분은 알거에요. 진정한 회개는 소리 없이 내 속에서 내 영혼 깊은 속에서 아주 뼈 속에서 아파하고 슬퍼하고 아주 참 정말 다시는 그 죄과를 범하지 않도록 뉘우치는데서 진정 회개가 나오는 겁니다. 정말 회개는 목소리가 없어요. 저 거기서 조금 우리가 예를 하나 들어보지요. 정말  슬퍼 본 일이 있습니까? 여러분 외식하는 슬픔은 막 소리를 치고 야단을 합니다. 그러나 정말 슬픈 것은 울음이 안 나와요. 눈물도 안 나와요. 정말 슬픔이라는 건 정말 슬픔을 경험해본 이는 아마 드물 겁니다.


 


정말 회개라는 것은 소리 없는데서 회개가 되는 것이에요. 어떻든지 그 속에 있는 그 침묵하지 못하게 하는 거지요. 죄가 속에 가서 막 구데기 끓듯 하고 있으면 침묵이 될 겁니까?  안 되지요. 그러나 어떻든지 그것을 퍼버리는 거예요. 내 속에 있는 그래서 열심히 회개를 이렇게 하고나면 그 다음에 내 마음이 복잡하던 마음이 괴롭던 마음이 자꾸 그렇게 속에서 일하던 모든 여건들이 없어져 버리니까 내 마음 깊은 데서부터 고요가 올 것 아닙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가령 흐르는 물이 있어서 막 물결이 치는데 그 개울 바닥을 보면 돌맹이가 있어서 그 돌맹이에 부딪쳐서 물결이 치는데 밑에 돌맹이를 다 치워버리면 물이 그 다음에는 잔잔하게 흐르듯이 내 마음속에서 내 마음을 시끄럽게 하던 그 죄악성이라는 걸 다 쏟아버렸다 합시다. 그러면 내 마음이 일단은 평온할 것 아닙니까?


 


이렇게 병자가 진통을 몹시 겪는 병자가 진통제를 주던지 어떤지 약을 먹어서 통증을 가라앉히면 그저 슬그머니 잠이 들듯이 아프다가 아파서 괴로워 하다가 아픈 증세가 없어지면 조용하게 가라앉아 버리듯이 내 영혼도 일단 그런 걸 경험 할 겁니다. 그런데 그 뒤에 무엇이 올 겁니까? 공허가 오는 것이지요. 그건 진정한 의미에서 공허지요. 아무것도 없는 공허지요. 그러면 그것이 참 침묵일까? 그러면 그 속에서 죄악성이 떠들고 요란을 치는 동안에는 침묵이 되지 않지요. 입응 다물고 도저히 골방에 앉아서도 입을 꼬매어도 침묵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인제 그걸 일단 다 그 속에 악한생각 죄 되는 생각 내 잘못을 다 쏟아놓았다 하면 그러면 그것은 공허인데 그것이 진정한 의미에서 침묵일까 그것이 그 다음 문제입니다. 그럼 우리는 어떻든지 일단 공허 상태로 들어가는 거예요.


 


그런데 그것은 사람을 여러 가지로 나쁜 길로 끌고 가는 유혹이 될 수가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있어요. 보기 싫은 것 안보고 보기 싫은 것 안보고 하기 싫은 말 안하고 모두 사람하고 접촉하지 않고 그러기 위해서 막 금식을 하고 골방으로 들어가고 산골짜기로 들어가고 또  굴속에 들어가서 평생을 사는 이도 있고 그런데 그렇게 공허한 것만 가지고 빈자리만 가지고는 그건 완전하지 않은 겁니다. 예수님의 비유가 있지요? 어떤 사람이 집을 깨끗이 쓸어놨더니 그 다음에 일곱 마귀가 들어와서 아 여기 살기 좋구나 하고 들어와 살았다고 악이 들어와서 살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가능성이 있지 않소? 또 악한 것이 들어올 수 있다. 그 말이지요. 그러니까 완전히 변한 것만 가지고는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가장 귀한 것은 못되는 거예요.


 


반드시 그런 건 한번 경험을 해야 하는데 그 빈자리 마음이 완전히 빈자리로 들어가는데 거기는 여러 가지 폐단이 생깁니다. 악이 들어올 가능성이 있지요. 물론 선도 들어올 가능성도 있지만 악이 들어올 가능성도 있는 동시에 정신적인 안일에 빠져요. 게으름 증에 빠져요. 그것이 좋거든. 가만히 누가 건드리지도 않고 쓸데없는 생각도 하지 않고 그러니까 그냥 사람이 혼자 있으면 편하다고 그러고 산골짜기에 혼자 사는 사람들 많지요. 그래서 잘못하면 영적 안일에 빠지기 쉬워요. 게으름 증 영혼이 낮잠 자는 거라고 그러지요. 그러니까 그럴 수 있지 않아요? 그래 그것은 아주 또 해로운 거거든. 거기는 무엇이 되겠소? 영적으로 받아들이는 것 선한 일을 받아들이지도 않고 또 영적으로 성장하는 것도 없고 그대로, 그대로 살면 아무것도 아니지요.


 


이렇게 알아듣기 쉽게 말하면 천국도 아니고 지옥도 아니고 그걸 성경에는 도리어 꾸짖은 데가 있지요. 묵시록 3장에 보면 라오디게아 교회를 꾸짖으면서 너희가 차라리 덥든지 차던지 하라. 덥지도 않고 차지도 않고 미적지근하면 내가 토해서 뱉어버리겠다고 그건 아주 동서고금 인들이 아주 나쁜 것이라고 지탄한 것입니다. 그 영적 게으름 증, 그렇게 되기도 어려워요. 실제로는 어렵고 좋은 건줄 알지만 그것만이 그러면 그것도 침묵 상태 아니요. 아무 소리가 없으니까 조용하니까 내적으로 그래 그것도 침묵 상태라고 그래요. 그러나 그것은 그렇게 공허한 상태의 침묵이라는 것은 그건 대단히 위험스러운 거지요. 나쁜 병에 걸릴 수도 있고 또 게으름 증에도 빠지고 그 외에  많은 잘못을 저지를 수 있는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영적 침묵 이라는 거 또 하나님이 원하시는 자리도 아닙니다.


 


그렇게 빈자리 빈 마음이다. 빈자리다. 그럼 말이 그 말이 좋게 해석되는 수도 있지만 나쁘게 되는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것을 지금 이 시간에 이야기 하려고하는 것은 아니지요. 그러나 한번은 거기 들어가야 하는 거야. 우리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이 영적생활을 하는 사람이 마음을 한번 깨끗하게 쏟아버리고 그걸 더 알아듣기 쉽게 말하면 금식들을 더러 하지요. 금식을 더러 하는데 이제 처음에는 조금씩 먹다가 안 먹다가 자꾸 줄이면 인제 속에 있던 게 다 나가버리고 그리고 인제 비지요. 나중에는 물도 안 먹고 그럼 어떻게 되느냐? 내 배속이 싹 비어버리거든. 내장 속에 아무것도 없이 보통으로 음식물이 48시간이면 대장 직장까지 한번 지나가 버립니다.


 


그런데 또 48시간이라고 깨끗해지는 건 아니지요. 그러나 한 3-4일만 금식을 하면 웬만한 건 다 빠져버리지요. 몸에서, 그럼 이제 그렇게 해서 몸이 맑아진 때는 대단히 좋거든요. 육신이 육적으로도 배 속이 편하고 하듯이 일단은 그렇게 한번 비워보는 거예요. 우리 내장을 싹 비우듯이 우리 영적 상태를 그렇게 완전히 한번 빈 그릇이 되도록 비워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요. 그게 그렇게 마음대로 잘 되지 않지만 그 비워가지고 거기다가 인제 선한 진리의 말씀 하나님의 진리를 받아들이면 이상적인데 꼭 그렇게 되지는 않지요. 대개 공기가 이런 방에 들어올 적에 이 방에 공기가 탁하면 문을 열고 더러운 공기는 내쫒아 버리지요. 내쫒아 버리면 여기 진공상태가 되요. 그러나 그렇게 안 되거든요. 맑은 공기가 들어오면서 더러운 공기가 나가면서 그러지요.


 


이렇게 문을 열면 이 따뜻한 공기 더러운 공기는 가벼우니까 위로 솟아오릅니다. 그러나 찬 공기는 밖에서 들어온 공기는 차니까 유리 창문을 조금만 열어놓으면 위로 더운 공기는 나가고 아래로 찬 공기는 들어오고 이렇게 하거든요. 우리 영적으로도 들어오고 나가는 게 대개 그런 작용을 많이 하거든요. 한쪽에서 예수님을 사랑하고 자꾸 그런 마음이 생기고 예수님을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그러고 사랑하는 말 안하고 속으로 그렇게 예수님을 사랑하려고 애쓰면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생기는 동시에 자기 죄가 자꾸 또 기억이 나지요 그래서 예수님의 사랑을 배반하는 그 더럽고 악하고 한 생각이 나기 때문에 예수님의 사랑이 흘러 들어오면서 내 속에 악하고 더러운 생각이 쫓겨 나가고 공기가 신선한 공기가 들어오고 탁한 기가 흘러나가듯이 실제로는 그런 작용을 많이 하지요.


 


 많이 하는데 이상적인 것은 완전히 빈자리에 새것이 들어오는 것이 그게 원리지요. 원칙은 그렇게 되요.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 했지요. 새 가죽부대에다가 새 술을 담아라. 헌 부대에다가 새 술을 담지 못한다. 또 새 옷감을 헌 부대에 갖다 대고 깁지 마라라. 그러면 헌것이 더 찢어진다. 그러면서 부분적으로 조금 고치는 거 조금만 고치는 거 우리는 그런 얼룩 신앙을 많이 가지고 있지요. 완전히 회개를 하지 않고 좋은 말씀을 조금만 헌 옷에다가 새 옷감 갖다가 깁듯이 그렇게 예수 믿는 게 대부분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저도 그렇고, 그러니까 옛날 악한 습관 나쁜 생각을 그대로 다 버리지 않고 갖고 있으면서 또 좋은 것도 조금 가지고 있거든요. 그래 노니까 우습지요. 그냥 옷을 누덕누덕 기워 입은 옷과 같아서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그런 얼룩 신자 얼룩신자들은 거의가 그렇지요. 대부분이 그러니까 이상적인 것은 못 되요. 못 떠나. 만일 살아있다면 그 영혼이 살아있고 그 사람의 정신이 살아있다고 그러면 자꾸 새것을 받아들이면서 새것이 흘러 나가는 거 헌것이 자꾸 나가면서 새것이 들어오는 거 그게 살아있는 상태이고 정상 이지요.


 


여기다 지금 내가 문을 열고 탁한 공기를 내쫒고 새 공기를 받아들일 적에 빈자리를 만드는 재주는 없습니다. 원 보통으로는 그냥 한쪽으로 나가면서 한쪽으로 들어오고 그러면 그거다 흐르고 있지요. 움직이고 있지요. 들어오는 공기도 움직이고 있고 나가는 공기도 움직이고 있듯이 우리 영적 교류작용도 실제로 움직이고 있을 거거든요. 자꾸 어떻게 우리 영혼이 빈자리를 지키고 가만히 있으려고 해도 잠깐은 되지요. 그러나 오래 지속되기가 실제로는 어려운 것이지요. 어려운 것이니까 무엇이든지 흘러 들어오려고 애쓰지요. 빈자리니까 자꾸 흘러들어와, 악한생각이 흘러들어오려고 하든지 선한 생각이 흘러들어오려고 하든지 무슨 생각이든지 잠깐은 머물고 있어도 다시 그 생각이 무엇이든지 들어오려고 이렇게 하고 있거든요. 그래서 이제 이 상태가 인제 우리 침묵과 관련을 시켜봅시다. 아까 그 침묵 속에서 하는 깊은 기도를 이야기 하자고 그랬어요. 여기서 기도가 정말 기도가 나와야지요. 이런 상태에서 이제는 내 마음을 비우는데도 하나님한테 기도를 하고 참 은밀한 중에 골방가운데서 내 마음을 비우는 일에 대해서 하나님과 열심히 노력을 하면 한쪽으로는 하나님의 은혜가 도움이 되어가지고 반드시 은총이 없이는 도움이 안 되니까 은총이 도움이 되가지고 내 악한생각 잘못된 생각 더러운 생각 그런 걸 자꾸 이렇게 쫓아내주는 동시에 하나님의 은총으로 또 선한생각이 한쪽으로 내게 흘러 들어오지요. 자꾸 움직여 사실은 거기가 기도지요. 정말 기도는 거기 들어가야 그때부터 기도한다고 이렇게 할 수 있지요.


 


그래서 인제 이 기도라는 건 살아있는 것이고 움직이는 것이고 하나님과 내가 영적으로 서로 교류작용을 하는 거지요. 교류작용, 그런데 그것은 뭐 목소리가 약간 나도 괜찮겠지만 사실은 정말은 큰 침묵가운데서 그 교류가 이루어지지요. 저 프란치스 성인이 밤새도록 기도를 해도 아버지여 불쌍히 여기소서. 그러지 않으면 ‘오, 주여’ 그러지 않으면 ‘나의 모든 것이여’ 그저 그 세 마디밖에 그것도 곁에 사람이 몰래 들었지요. 듣지 못했다고 그러는데 그때 이 프란치스 성인이 ‘나의 모든 것이여’ 그럴 적에 그 ‘모든 것이여’ 하는 말 가운데에는 우주가 다 들어있을 것 아니야? 하나님 전부를 내 영혼 안에다 보듬어 넣으려고 하는 그 상태거든요. ‘나의 모든 것이여’ 그럴 적에 굉장히 큰 기도지요. 그러면 거기다가 일만 마디나 백만 마디 말로 그걸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 전부를 끌어안으려고 하는 마음인데 그럴 수도 있지요. 그게 다행인지 불행인지 나의 모든 것이여 라는 말로 소리로 나와서 그렇지. 만일 프란치스 성인이 그때 그 목소리도 내지 않았다면 누가 알았을 거야. 누가 아무리 곁에 귀를 귀우려도 아무소리 없으나 그의 마음은 하나님을 나의 모든 것이여 하고 마음으로 목소리 없는 영의 영음이라 그러지요. 그걸 영적 소리로 받아들였을 것 아닙니까? 그런데 사실 그것이 제일 큰 거거든요.


 


거기 대한 건 조금 이야기가 어려워지니까 뭐하지만 어떻게 알아듣기 쉽게 이야기를 할 수가 있을까요? 지금 우리가 저는 이렇게 말을 하고 있지요. 그 말이라는 건 언어라고 그러지요. 그런데 이 언어라는 건 아주 불완전한 것입니다. 나의 모든 것이여 프란치스가 그래도 정말 모든 것을 가르칠 수 있는 모든 것이란 말은 없다. 그 말입니다. 가령 우리가 쉽게 하나 이런 이야기를 합시다. 여러분에게다가 이 색깔을 보이면 보일지 몰라도 이 위에 것을 빨간 것이라고 그러지요. 여러분들 보고 그 무슨 색깔이요? 그러면 그 빨간색깔이요. 그럴 거야. 요건 무슨 색깔이요? 그러면 그건 노랑 색깔이요. 그럴 거예요. 그런데 이게 빨간 겁니까? 붉은 겁니까? 붉으레한 겁니까? 빨간 것도 여러 가지 백가지는 될 텐데 붉은색 가운데 어떤 종류의 붉은 겁니까? 그걸 말로 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아주 빨갛지는 않고 조금 그저 빨간데 가깝습니다. 아주 여러분이 설명을 하려고 애써도 요 색깔을 그대로 설명을 못해요. 노랑이 한 가지만 있어요? 노랑도 여러 가지 색깔이 있지요? 황색 가운데 그러니까 무엇이든지 물건을 설명할 적에 제대로 설명을 못하는 거야. 우리말로는 세종대왕이 반드시 소리가 있으면 글자로 나타내야 된다고 그래서 표음문자로 우리 한글을 만들었지요. 지금 우리 한글이 암만 저는 언어학자가 아니에요.


 


그러나 유 영모 선생님은 그 말하지요. 세계에서 우리 한글 같은 게 없다고 그 양반 언어학자거든요. 그렇게 잘 된 거예요. 그래도 다 못해 그렇지요? 가령 무슨 저렇게 여러분이 산에 가서 보면 참 새 소리가 별소리가 다 많은데 그거 다 글자로 나타낼 수 있소? 어떤 사람은 방울 같이 울고 어떤 사람은 귀뚜라미같이 울고 그냥 그렇게 우는데 그거 다 글자로 못 나타내요. 그런데 세상 소리도 제대로 못 나타나는데 어떻게 하나님의 음성 영적소리를 다 나타내겠냐? 그 말이야. 내 영적 체험은 글자로나 말로는 다 못 나타내는 거예요. 말이라는 건 불완전한 것이라는 걸 알아야 해요. 아주 이런 이야기를 하면 밤새도록해도 끝이 안날 이야기지만 말이에요. 못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러기 때문에 그 하나님에 대해서나 영계에 대해서 그런데다가 우리 언어라는 건 몰라요. 지금 우리가 쓰는 언어가 보통으로 영어 제일 잘하는 사람이 영어 삼만 개아는 사람일지 몰라. 모르지 보통 삼천 개 가지고 써먹거든요. 중고등학교 영어들이라는 게 삼천 개 가지고 써먹는데 삼만 개 가지고 써 먹는다. 삼만 개 가지고 도저히 소리를 다 표현을 못하는 거예요. 글자로 어떻게 말을 할 거에요.


 


 그러니까 말이라는 건 아예 불완전한 거예요. 그러기 때문에 침묵 속에서 하나님과 영적으로 교제하는 신비 그 비밀이라는 것은 말로 표현을 못하는 거예요. 벌써 말로 표현했다 하면 거짓이 붙던지 가짜가 붙는 거야. 가짜가 들어가지 않을 수가 없어. 소리로나 그런데    지르니 우습지 않소? 사실은 그게 진짜로 영혼에 내 영혼이 하나님한테 호소하는 상태를 소리로 나타낼 수가 없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 소리로는, 그래서 아마 그 실버스톤이라는 프란치스의 제자 같은 이는 찬송을 부를 적에는 곡조도 없이 가사도 없이 불렀답디다. 어떻게 불렀을까? 유 영모 선생님 같이 그렇게 이---이 하면서 불렀을까? 비둘기 우는 소 같이 들렸다고 그래요. 이렇게 고개를 들고 꾸르륵 꾸르륵 했답디다. 실버스톤의 찬송소리는 아마 그게 진짜 찬송일라든지 모르지. 아주 기뻐서 영혼이 기뻐서 하나님한테 찬송을 부를 적에는 그렇게 불렀다고 표현 할 수가 없으니까 또 우리가 그런 예는 많이 들 수가 있다.


 


 구약에 에스겔서라든지 그런데 보면 무슨 소리를 하는지 당최 에스겔서 제대로 푸는 사람이 없을 거예요. 다 그 묵시록은 조금 참 알아듣기 쉽지만 그렇게 이상스러운 것을 말하려니까 힘이 들어서 그렇게밖에 할 수 없었거든. 그러니까 그렇게 한 거야. 그러니까 인제 그 세계를 더듬는 건 침묵 속에서 밖에 안 된다는 거지요. 정말 하나님하고 진정한 교제를 하려면 말 풀어내기, 되지도 않는 거짓깔 많고 음란이 사람 목소리에는 음란이 꽉 쩔어 있어요. 아무리 거룩하고 깨끗하게 사는 사람 목소리에도 정과 욕이 묻어있습니다. 목소리에 가서 묻어 나와요. 그래 이렇게 맑은 영혼이 들으면 그 목소리가 더럽거든. 대개 그런 거야. 그것 가지고 하나님과 거룩한 교제를 어떻게 형용을 해서 표현을 할 수가 있겠어요? 오늘 이야기는 좀 까다로 워 진다고 그랬어요. 어떻든 그런 거야.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침묵하는 가운데서 하나님과 영적으로 깊은 교제를 하는 걸 지금 배우기 위해서는 껍데기에서부터 침묵으로 우선 들어가는 거지요. 들어가서 이제 깊은 상태에 들어가면 빈자리 공허한 자리까지 어떻게 도달했다 해도 거기 머물러 있을 수도 없거니와 있어서도 안 되는 거지요. 공허에 가서 머물러있으면 안되고 그 다음의 상태를 여기 몇 가지 이야기 했어요. 이건 대단히 어려운 책인데 이건 십자가 요한 성인의 사랑과 관상이라는 책입니다.


 


그런데 거기 이런 말이 더러 나옵니다. 오로지 하나님만을, 하나님만을 더 없이 사랑하며 그 거룩하신 뜻에다 마음을 몽땅 기울인 영혼이 이제 그 속에서 그렇게 되었다 합시다. 깊은 침묵 속에서 하나님만을 더없이 사랑해. 성경에도 그런 대목이 많이 나왔지요. 요한1서 1장 15절 이하에도 그게 그런 거지요.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자랑하지 말라고 그런 대목 아래 있는 절수가 모두 그런 거예요. 하나님만을 더없이 사랑하며 이제 그것이 정말 영혼이 아주 원하고 안정 상태에 있는 것이지요. 그때 가서는, 그때는 말이 없지요. 뭐라고 말해? 어머니가 어린애 들여다보고 웃듯이 어린애 영혼이 어머니 품에서 어머니 눈만 바라다보고 웃듯이 그저 그렇게 더없이 하나님만을 더없이 사랑하며 그 거룩하신 뜻에다가 그 거룩하신 뜻에다가 마음을 몽땅 기울인 영혼이 있다고 하자. 이제 그게 관상상태이지요. 내 영혼이 하나님의 사랑에다가 몽땅 내 사랑을 쏟아 부은 상태가 있다고 하자. 그런 영혼이 있다고 하자. 이런 경우 하나님의 온 의지가 하나님의 큰 뜻 전부가 그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으시며 움직이심으로서 그렇게 돼. 내가 전 영혼과 사랑을 다 기우려서 하나님께 몽땅 다 바치면 또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전 의지를 다 집중시키셔서 그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아버리신다는 거야. 그것이 영적이지요. 그래서 마음을 사로잡으시어 움직이심으로서 한결같이 하나님의 뜻을 따르려는 하나의 경향이 생기게 된다. 그 다음에는 이제 하나님이 하라는 대로 마음대로 움직이게 된단 말이야.


 


 내 마음이 마음대로 움직이게 돼. 그래서 그냥 죽어라 하면 죽고 살아라 하면 살고 뭐 이러고저러고 내 사사로운 생각은 있을 틈이 없지요. 어디 가서 끼일 틈이 없지요. 그렇게 되는 거지요. 사실 이것이 우리가 신앙의 극치거든요. 그런데 거기 들어가기 위해서 침묵을 지키는 거예요. 말하자면 그 상태에 들어가면 무엇으로 표현을 하겠소? 표현할 필요도 없고 그래서 경향이 생기게 된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는 모두 이러한 경향이 있어야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면 다소라도 이런 경향에 띄기 시작을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처음에는 침묵 가운데서 조금씩, 조금씩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연습을 하는 거지요. 그러다가 나중에 몽땅 사랑을 하게 되고 몽땅 사랑을 받게 되는 것이지요. 종종 피조물에 대한 사랑이 우리 의지를 움직여 그런데 자꾸 방해를 놓는 게 피조물이야. 좀 그러려고 하면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던지 또 시끄러운 생각이 속에서 자꾸 일어나든지. 그래서 피조물은 피조물에 대한 생각이 자꾸 여기에 대해서 방해를 한다고 그랬지요. 그래서 우리가 이거 잘 아는 데지만 여기 비교해 보면서 여러분은 세상이나 세상에 속한 것들을 사랑하지 마십시오.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그 마음속에 아버지를 향한 사랑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합시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계속 예수님만 사랑하게 되냐 하면 그렇게 안 돼. 자꾸 세상에 대한 사랑이 들어와요. 내가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랑이 조금만 희미해지든지 약해지면 그 틈바구니를 타고 자꾸 세상의 사랑이 흘러들어온다니까요. 자꾸 들어와 그런데 그것이 여기 골칫거리라고 말하고 있어. 자꾸 말해.


 


그래서 그 피조물에 대한 사랑이 우리 의지를 움직이는 탓으로 하나님의 뜻에 맞는지 돌이켜보지도 않을뿐더러 도리어 하나님 뜻에 아주 어긋나는 수가 생겨나 어느 틈에 보면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는 마음이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변해져 버렸어. 바꿔져 버렸어. 그래서 여기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 육체의 쾌락과 눈의 쾌락을 좆는 것이나 재산을 가지고 자랑하는 것은 아버지께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고 세상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걸 자꾸 경계하라. 세상 사랑으로 세상 것에 대한 애착이나 사랑이나 미련으로 마음 기울이지 않도록 조심하라. 그러고 인제 다 읽으셨으니 드문드문 막 띄어가 봅시다. 불완전한 꼴 즉 하나님만이 우리 사랑을 깡그리 차지하지 못하셨다는 그거 불완전하다. 하나님만이 우리를 깡그리 차지하지 못하면 그런 불완전한 상태에 빠지게 된다. 그때에는 자애심 자애심도 분류를 하면 여러 가지가 나오지요. 자애심 때문에 다른 것을 사랑하고 자기만족을 찾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해야 영혼은 깊은데서 만족을 얻고 성장을 하고 완성으로 들어가는 것인데 자꾸 다른 사랑이 들어와서 그 자리를 차지해 버렸어. 그럼 그것으로 만족을 해. 안주를 해버려 육은 좋거든. 세상사랑 쪽으로 딱 그게 세상에서 모두 육적 사랑 아니요? 거기 만족하게 돼. 그래서 그때에는 그 자애심 때문에 다른 것을 사랑하고 자기만족을 찾게 된다. 이처럼 다른 사랑의 대상들도 우리 마음을 사로잡아 버린다. 자꾸 우리 마음을 그래서 사로 잡혀있다. 사로잡혀있다. 이게 지금 세상을 혼란하게 만드는 거지요. 세상 사랑에 사로잡혀서 결국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또한 이생 것도 사랑하는 것이다.


 


그래 우리 사랑이 둘로 갈라져버려, 하나님의 뜻에서 비롯한 힘과 함께 자기에게만 사로잡힌 의지에서 나오는 사랑이 있다. 자기에게 사로잡혀, 제일 마지막가지 끈질기게 들러붙어서 나로 하여금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하게 하는 자애심, 자기 나, 나라는 거 아주 그 나라는 것이 마지막까지 거머리같이 파고들어서 나를 놓아주지 않거든요. 그러므로 때를 따라 이리저리로 흔들리다가 마침내 두 의지로 갈라져버립니다. 그래서 그 아래 가보면 참으로 그때에는 다른 모든 것을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랑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 이런 경우에는 하나님의 뜻이 유일한 힘인데 이기적인 인간의 의지는 쓰러지고 하나님의 온전히 다다르게 되는 하나님의 뜻에 전적으로 따르는 일에 방해를 받고 있다. 예를 들면 이런 말을 했지요. 그런데 이 수도회에 대한 침묵의 가르침 가운데는 그래서 이런 교훈을 해 나왔어요. 이것도 우리가 이런 말이 옛날에 어떤 수도원에서는 침묵 속에서 속죄행위를 하는데 침묵 속에서 아까 말했지요? 침묵 속에서 속죄행위를 하는데 그런데 거기 또 침묵 속에서 축제의 행위도 한다. 하나님으로 더불어 내 영혼이 축제를 잔치를 해. 그 침묵 속에서 하는 거지요. 즐겁다. 즐겁다 하는 건 가짜 즐거움이고 정말 내 영혼이 속에서 하나님으로 더불어 즐거워하는 축제의 행위도 했다. 가장 깊은 침묵을 지키는 날은 가장 깊은 침묵 깊은 침묵이 뭐에요? 깊은 침묵을 지키는 날은 축제의 날이었고 형제가 죽은 날에도 침묵을 지켰다.


 


그리고 형제가 죽어서 이 대목이 좋아서 한 두어서너 번 여기를 읽어 보면서 자꾸 생각을 해봤어요. 보시오. 형제가 죽어서 묻히기까지 며칠 동안은 모두가, 모두가 보다 깊은 침묵의 신비로 들어가서 여러분 사람이 죽은 때 무슨 말 나옵디까? 나는 초상집에서 떠들 썩 하는 건 그건 장사꾼들이고 장꾼들이고 정말 점잖은 초상집에 가면 조용하지요. 상객들도 와서 저 이거보세요. 시간은 없는데 초상집에 가서 인사하는 법 그전에 나 배웠어요. 한참 되어 가르치기도 하고 인사하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보통 상주들이 딱 서서 손님들을 맞지요. 그럼 상객이 가서 뭐라고 인사하는 줄 아시오? 뭐라고? 당신 아버지 노인이 잘 돌아갔어요. 그럴 거요? 얼마나 슬프시오? 그럴 거요? 참 그 말 같이 어려운거 없거든. 그래서 이렇게, 이렇게 가르칩니다. 상사의 말씀은 무슨 말씀을 하오리이까? 그게 점잖은 인사법이야. 그게 무슨 말이야? 슬프단 말도 아니고 좋다 잘 됐다는 말도 아니고 상사의 말씀은 무슨 말씀을 하오리이까? 그것도 똑똑하게 들리게 하면 안 된다는 거야. 우물쭈물 하라는 거야. 그래서 입속으로 상사의 말씀은 무슨 말씀을 하오리이까? 이러고 하는 게 그게 예법이야. 그렇게 하는 거야. 원 초상집에 가서 하는 법은 그런데 정말 죽음에 대해서는 엄숙한 말이거든요. 그 장면을 여기다가 이렇게 이야기 했어요. 침묵이 죽음 앞에서는 신비로움에 들어가서 이 세상의 종말과 다가올 시기에 대해서 묵상을 하게 된다. 그래본 일이 있어요? 이 죽은 시체 앞에서는 말세 말세의 현상 또 자기의 죽음 마지막 그 마지막 순간을 묵상하게 된다. 그렇게 된다는 거지요. 수도자의 참 침묵의 중요한 기능은 단순이 기억이상 하나님에 대한 의식을 계속 보전하는 것이다. 내 의지와 하나님의 의지를 곽 잡아매가지고 절대로 끊어지지 않고 약해지지 않도록 계속 그걸 의식을 보전하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완전한 인식이며 깨달음이다. 이것은 침묵과 반성 고독과 어떤 문란함이 없이는 결코 불가능한 것이다. 완전한 고독에 빠지고 큰 침묵에 들어가지 않고는 이 하나님에 대한 인식 가운데 내 생각을 고정시키기는 불가능한 것이다. 이런 시간을 한번이라도 가져 볼 적에 그 영혼은 사는 것이다. 한 번도 이런 걸 경험 못했다면 쭉정이 신자야. 껍데기 신자야. 기도를 한번 한다고 하면 기도가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이야. 암만 40일 금식기도를 해도 인식 하나님과의 인식의 휴대를 끈을 아주 강하게 잡아 매어놓고 그렇게 그걸 탈 혼이라고 그러고 입신이라고 그러지요. 가령 예를 들면 이제 그러기 위해서지요.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침묵으로 한번 나를 몰아넣어본다. 그걸 참 느껴요. 저 지금 못해요. 못하는데 그래서 어찌되었든지 이 환경을 바꿔보고 끊어보고 여러분들도 그래야 되요.


 


물론  앞으로도 그런 걸 사실은요, 저 위에다가 방 한 몇 개 비어놨지요? 그런 걸 위해서 그런 거야. 거기 가서 누구든지 금식하고 종일 있으면서 꼼짝도 하지 말고 하나님과 한번 결혼을 해봐라. 그런 방도 하나 둘쯤은 있어야 하지 않느냐? 남원도 방을 여럿 드리는 것도 목적은 하나 거기 있었지요. 밀실을 만들어 놓자. 몇 개, 서울서도 일반서도 누구든지 와서 하나님과 연결을 하고 싶다는 사람 있으면 그 방을 빌려주자. 아주 그렇게 안 되어 있어요. 그런 사람도 아직은 나타나 있지도 않고 그런데 그게 꼭 필요한 거야. 만일 하나님과 이렇게 영적 교제가 깊이 맺어진 게 있다면 하나님이 심판을 못하시게 되는 거예요. 어떻게 거기를 치실 거예요? 못 치시지. 그러는 동안에는 하나님이 놔두고 보실 수밖에 없어. 그 상태를 그게 제일 귀한 거거든. 이 기독교가 8백만이 되어도 그런 게 하나도 없다면 그건 물위에 뜬 부평초와 같아서 세상이 흔들리면 함께 흔들리고 하나님과 이렇게 절대적인 관계가 깊이 맺어지고 있을 때만이 그걸 보전하는 것이지요. 그건 필요한 거야. 우리 개인 신앙도 반드시 그리 나를 몰아넣으려고 애쓰는 것이 아주 필요한 거야. 아주 필요한 거야.


 


그러니까 여러분이 바쁘게 사무를 봐야하고 여러 가지 일을 해야 할 때가 있지요. 필요 이상으로 돌아다니고 쓸데없는 말하는 것 같이 어리석은 게 어디 있을까? 필요 있는 것만 해도 우리가 침묵에 방해가 되는데 필요도 없는데 괜히 왔다갔다하고, 쓸데 있는 말만 하는 것도 깊은 침묵에 방해가 되는데 쓸데없는 말을 종일 너불거리고 돌아다니는데 얼마나 어리석은 거야. 그래 잠언에 보면 말이 많은 사람은 어리석은 자라 그랬지요? 어리석은 입술은 화를 불러들인다고 잠언에 그래. 우리는 될 수 있으면 깊은 침묵의 시간을 조금 갖는 게 좋겠다. 시간이 다 지나 이 시간에는 그만큼만 생각 하도록 합시다. 침묵에 필요성을 조금 이야기 한 것입니다. 거기에 대한 성경은 나중에 시간 있으면 찾아봅시다. 여러분이 구약을 들춰보면 한 장 건너씩 거의 침묵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침묵에 대한 말에 대한 입조심 하라고 말조심 하라고 그런 이야기가 많이 나오지요. 찬송 부릅시다.

    임께 가시는 길 - 원달 산중에서 - 정인세
마음 길 가시는 나그네여 그대 가시는 길 첩첩도 하오. 샅샅이 헤치고 깎고 찍고 다듬고 가시오리. 고달프나 꾸준히 가시노라면 먼저 간 이 발자국도 찾으며 때도 있으려니
혹 잘못 없나 두루 살피면서 방향도 틀림없나 배암에 물릴 새라. 이리에 덮칠 새라. 겸손히 기도하며 쉬지 말고 가오리.
- 행여나 눈 팔까 피곤타 낙담 말고 낮잠도 말고 우리 주님만 바라보고 가시덩굴 골고다 길 희생을 짊어지고 딴 짓 말고 가야하는 길 가오리다. 가오리다. 임 가시는 길 가오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