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농사

누어버린 봄보리 : 순임금 이야기

mamuli0 2019. 5. 28. 05:55

 오월 마지막 주 월요일 비가 종일 내렸다. 목마른 식물에 단비였으나 익어가는 봄보리는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모두 누어벼렸다. 강풍으로 항공기와 선박이 결행했다는 소식도 있다. 가깝게 지냈던 홍재철 형님이 노환으로 인천 계양한림병원에 입원하셨단 소식을 전철상 형님이 전화 주셨다. 이세상에서 이별이 가까워진듯 하다.


 


 순임금 이야기 


1981.01.04. 김준호 선생


 그래서 인제 본원에 가기 전에 어머니 찾아가서 제가 생각해 보니 참 잘못 했어요. 라고 빌고 용서를 받고 들어가려고 그랬는데 딱 날짜가 되어 갖고 그렇게 안 됩디다요. 차가 있으면 곡성으로 돌아가려고 마음먹었는데 그렇게 안 되어요. 그래서 본원으로 가버렸지요. 그러고도 이제 어머니를 만나서 말씀을 드려야겠다. 그랬거든요. 그래 설명은 제가 안했지요. 제가 참 불효자식입니다. 잘못했어요. 그랬습니다. 뭘 그래요? 제가 잘못했습니다. 그러시드고만요. 그럼 그렇게 된 사실을 두고 한 가지 그 일을 보시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그렇게 된 결과를 어떻게 해야 되냐? 어떻게 그러면 치료를 할 것이냐? 본보기로 맹자님을 그래서 제가 역시불로 광주에 책이 없기 때문에 전주로 찾아갔어요. 전주에 책을 빌려가지고 봤습니다. 맹자 아버지가 그렇게 술을 많이 잡수시고 허랑방탕하시고 그렇게 아들을 아 맹자가 아니지요. 맹자가 말씀하신 맹자의 책 가운데 요임금 순임금 요 순 임금에 대해서 실화가 나와요. 순 임금에 대해서 맹자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그 이 경우가 제가 이번에 말씀할라는 경우와 같아요. 순 임금은 아버지를 그토록 효도하려고 했습니다. 애쓰는데 아버지 고수라는 아버지가 도저히 아들의 효심을 이해를 못해요. 오해를 해버려. 아무리 아버지를 효도해도 아버지가 오해하기 때문에 아버지를 미워한다. 나를 싫어한다. 이렇게 오해를 해버리거든요. 평생 아버지한테 그 오해를 못 풀었다 했어요. 그런 이야기 하나 있기 때문에 참고하려고 맹자를 찾아봤지요.


 


여기 보십시오. 맹자의 책 가운데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맹자의 제자 만장이 있어요. 만장이 있는데, 본문 봅니다. 만장은 물었다. 순 은 밭에 나가서 하늘을 부르면서 소리쳐 울었다는데 무엇 때문에 소리쳐 울었답니까? 이렇게 선생님께 묻는 장면이 나옵니다. 순 임금은 밭에 나아가 쟁기질 하다가요. 눈이 뚱뚱 붓도록 울었다. 이런 소문이 들리는데 순 임금 연대는 4천 한 몇 백 년대 사람이에요. 예수님은 2000년 전 사람이고 모세 한 5000년 전 사람 아닙니까? 모세 시대와 비슷한 시대 사람이에요. 순 임금이 그러니 어째 밭에서 쟁기질 하다가 울었다. 그럼 뭔 뜻으로 울었습니까? 이렇게 물은 장면이 이에요. 맹자가 대답하기를 원망하고 사모하여서이다. 그러니까 아버지에 대해서 말이지요. 그럼 아버지를 원망했다는 말인가? 만장이 묻기를 선생님 부모가 사랑할 때는 기뻐하면서 잊지를 말고 부모가 미워할 때는 두려워하면서 원망하지 말라고 도덕경에 쓰여 있었는데 그렇다면 순은 순 임금은 불효자식 마냥으로 원망을 하였겠습니까? 이렇게 물었습니다. 이제 한 예를 들어서 옛날 누가, 누가 아무개, 아무개라는 말인데 장식이라는 사람이 공명보 라는 사람에게 말하기를 순 임금이 밭에 갔다는 것은 들어서 우리가 수천 년 동안 아는 말 입니다마는 그런 뜻으로 옛날에 순 임금이 밭에 나가서 일하다가 울었다는 말은 우리들이 알고 있는 말입니다마는 하늘과 부모를 부르면서 소리쳐 울었다고 하니 그 순 임금은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어째 성인이 되어가지고 하늘을 우러러보고 울었다 하니 그 왜 울었어요? 그 이해가 안 됩니다. 하고 묻자, 공명보라는 사람이 말하기를 그것은 네가 알 리가 있나? 하고 말했다. 이것은 공명보가 효자의 마음은 그토록 근심 없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해서 말한 것이다. 효자가 되어봐야 효자 마음을 알지, 어찌 우리가 효자 마음을 알겠는가?


 


그때 왜 울었는가를 우리가 어떻게 말할 수 있냐는 말입니다. 즉 나는 힘을 다하여 밭을 갈아 자식 된 직무를 다 할뿐이다. 부모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나한테 무슨 책임이 있으리오? 하고 말해서는 안 된다. 이건 그렇게 말하면 못쓴다는 말이지요. 자식 된 도리로서 나는 힘껏 효도했는데 내 부모가 내 성의를 몰라보니 나 무슨 책임이 있냐? 그렇게 해서는 효자가 아니다. 그런 말이지요. 순 임금 후에 요 임금이 자녀 9남과 2녀에게 맡긴 임금님 국사를 자기 자식에게 맡기지 않고 말이지요. 우량 그리고 창궐을 갖추어가지고 다른 남의 자식 순을 농막에서 섬기게 하니 그 일해 먹던 땔 나무군 순을 자기 아홉 아들과 두 딸을 전부 맡겨버려요. 그리고 재산 전 재산을 그 남한테 다 줘버리고 천하의 선비들이 그에게 따라가는 자가 많거늘 요 임금은 천하를 살펴보고서 그에게 위를 넘겨주려고 했다. 그래 아들이 아홉이 있어도 임금 자리를 안주고 딸이 둘이 있어도 임금 자리 안주고 딴 농인 아무도 없는 일 해먹는 땔 나무꾼 순 이라는 청년에게 국사 임금 자리를 줄라고 한다는 말씀이야. 왜 그러냐 말씀입니다. 그러나 그는 부모에게 기쁨을 사지 못하였기 때문에 마치 궁한 사람이 거지가 잠잘 곳이 없어서 슬퍼하는 것 같이 살았다. 그 말은 임금 자리를 주고 그 요 임금이 자기 아들딸 전부 권리를 자기에게 양보했어도 항상 슬퍼했다는 말이에요. 왜 자기 아버지 마음을 편케 못했다는 서러움이 있었다. 그 효자의 마음은 그런 거라는 말입니다.


 


어째 요 임금이 순 임금에게 천하를 맡기고 그랬는데도 어째 기뻐하지 않고 울었냐? 그거에요. 그것은 천하의 권리를 다 얻고도 아버지 마음을 편케 못해준 것이 서러워서 울었다. 그 점인 것입니다. 오직 효자가 아니냐? 그 말씀이지요. 천하의 부를 차지하였으되 기뻐하지 아니하고 천하의 귀한 임금 자리를 얻었어도 기뻐하지 아니하고 그 천하에 미인이라 하여 그 요 임금 딸이 미인인데 옛날 혼인법이기 때문에 야곱도 자기 삼촌한테 딸을 둘을 얻지 않았습니까? 그래 옛날 혼인법이기 때문에 요 임금의 딸을 둘을 순한테 다 주어버렸어요. 천하에 미인을 다 얻었어도 왜 기뻐하지 않았냐? 그거에요. 임금도 되고 부자도 되고 천하의 미인을 아내로 둔 사람이 어째서 울었냐? 그것은 아버지 마음을 편케 못해드려서 울었다. 그러니 효자가 아니냐? 그 말씀이지요. 그래서 나는 순 임금을 위대한 효자라고 말한다. 이런 글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러면 어째서 원망했다는 말이 나오느냐? 이 해설이에요. 주자라는 학자는 원 자라는 말을 이렇게 풀이합니다. 오천년 전 이야기를 지금 풀어보니까 오해를 하지 않아요? 글자에 대해서, 원망하라는 원 자를 부모에게 기쁨을 사지 못하는 자기를 원망 했다는 뜻이다. 그랬어요. 아빠 아버지를 원망했다는 그 말이 아니고 나는 어째 덕이 모자라서 우리 아버지 마음을 편케 못해드리는고 하고 자기 덕이 없음을 원망했다. 그 말이에요.


 


그렇게 주자님이 풀었다 그랬어요. 이렇게 해석이 옳지 않겠습니까? 그래 똑같은 말을 이렇게 잘못 풀면 별 수 없어. 순 임금이라도 애비가 나쁘니까 원망했다. 그렇게 풀면 풀어지는 것이지요. 그런데 주자라는 대 학자는 그렇게 표현 안합니다. 아무리 아버지 마음을 편케 해드리려고 해도 아버지가 편치 못하니 자식 된 내가 덕이 없는 것을 원망했다. 그렇게 설명했노라. 그렇게 주석이 써져 있습니다. 여기 보십시오. 만장이 맹자님 공자님이 모두 그렇게  설명하지 않습니까? 맹자하고 선생님하고 제자하고 지금 물어보고 대답하는 말입니다. 만장이 다시 말해요. 부모가 순에게 창고의 지붕을 손보게 하고서는 사닥다리를 치우고 고순은 창고에 불을 질렀답니다. 이제 자기 선생님한테 만장이 하는 소리야. 옛날 고사를 들어보고 그럼 부모가 얼마나 악질이냐 그거에요. 고순 아버지인데 아들더러 지붕 잇자 하고는 아들이 지붕에서 짚 섶을 매고 있는데 아주 이층 높은 집이었던가 봐요. 참 부잣집이고 그러니까 밑에 가서 사닥다리를 탁 치워버렸어. 떨어져 죽으라는 거지요. 그래 살인 미수지요. 그것이 죽으라고 사다리를 툭 치워버렸어. 그렇게 아버지가 했고 또 그래도 안 죽으니까 또 한 번 우물을 파게하고서는 한 열자나 열 길이나 깊게 팠던가 봐요. 그리고 인제 그 순 임금을 내려가라. 우물 속에 내려가라. 이러고서는 아버지가 그대로 돌을 던져버렸어. 던져 버렸지요. 아들을 우물을 파게하고서는 그가 나오는데 그대로 묻어버렸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그럼 그 배다른 아들 있지요? 상이라는 아들이 있는데 상하고 아버지하고 둘이 형을 우물을 파고는 형님이 나오기 전에 묻어버렸지요. 돌로, 상은 형을 묻어버리고 꾀를 낸 것은 아버지 다 내 공로요. 형님이 죽어버린 줄 알고 아버지하고 그 배다른 부인의 아들 상이라는 아들하고 둘이서 하는 거지요. 그 둘째아들 상이 말하기를 형님이 이번에 죽은 것은 내 공로요. 그렇게 이야기하고 우양과 참 골은 아버지에게 두고 방패와 창과 거문고와 활을 그리고 내가 가지고 두 형수는 내가 잠자리를 돌보게 하렵니다. 그러니까 얼마나 아버지하고 배다른 동생이 악하냐? 그 말이야. 형하고 샘을 파자고 하고는 샘을 묻어버리고 와서 아버지하고 그 두 번째 부인 아들이지요. 상이라는 아들하고 둘이 하는 소리지요. 아버지 내가 형을 죽인 것은 내 공이요. 소와 양과 창검은 아버지께서 술값 하시고 형님이 쓰던 방패와 창과 거문고와 활은 내가 갖고 두 형수는 내 잠자리를 하고 돌보겠습니다. 그래 아버지하고 둘째 아들하고 하는 소리를 보세요. 그런 분이라고 하였답니다. 그런데 상이 순의 집에 가보니 순은 병상에서 거문고를 타고 있으므로 이에 놀라움에 그러니까 이 비밀한 지혜와 총명이 있고 예수님이 그랬어요. 내가 너희를 세상에 보냄이 유순하기는 비둘기같이 해야 할 것이고 지혜는 뱀같이 하라. 그러셨거든요. 뱀 이라는 것은 지혜 상징한다.


 


앞으로 큰 나라 임금 될 만한 청년인데 순 임금이 뱀보다 더 지혜가 있지 않겠어요? 동생이 돌과 흙을 던질 때 살아 나올만한 사람은 지혜 있는 사람이에요. 자기가 아무래도 그렇게 암살할 기미가 보이니까 우물을 팔 때 비켜날 수 있는 구멍을 파 놓았다는 거예요. 미리 땅속에 들어가서요. 그래서 안 죽고 살아나왔지요. 해가 진 다음에 가만 가만 이제 흙과 돌을 옆으로 치우고 기어 나왔겠지요. 그래서 살아난 사람이에요. 그러니 인제 형님 형수는 자기가 갖겠다고 형 집을 가보니 형님이 살아계시고 거문고를 키고 계셨다. 그 점이에요. 그러니 이렇게 말해요. 참 사람이 거짓말을 그렇게 해야 하는 법이요. 형님이 죽은 줄 알고 살아있으니까 형님 생각이 간절해서 찾아왔습니다. 그래요. 옛날이야기 같지요. 나하고 똑 같지요. 저도 그럽니다. 형님 생각이 간절해 찾아왔습니다. 하고 부끄러워하지를 않아요. 부끄러워 했다고 하네요. 부끄러워하자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그 말이 아닙니다. 부끄러워하자 순 임금은 아주 순진하고 아주 거짓이 없고 아주 자비심이 많아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성품을 가진 사람이지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지요. 천자라면 하늘 천(天) 아들자(子) 천자,  옛날 임금은 천자거든요. 하나님의 아들이거든요. 순은 마침 잘 왔네. 동생을 보며 마침 잘 왔네. 그리고 큰 동생을 그렇게 알뜰히 환영했답니다. 그래서 후인들이 그거예요. 그렇다면 순은 거짓말로 기뻐했냐? 뻔히 자기를 암살하려는 동생이었는데 어서 오게. 잘 왔네. 그랬다니 그러면 순은 체면으로 거짓말로 그렇게 동생이 왔을 때 기뻐했습니까? 그렇게 물어본다고, 그래서 이 말이야. 아니다. 참 마음이 어질고 그렇게 덕이 많은 사람은 두 마음이 아니에요. 아까 된 일은 다 접어서 생각해 버려요. 사람이라는 것은 그럴 수 있다. 그거에요. 사람이라는 것은 그렇게 될 수 있는 것이고 나도 그럴 수 있는 사람이다.


 


 아까까지는 사람이 다 그럴 수 있는 것이야. 그러니까 칼로 물 베기야. 다 용서 해버렸어. 다 용서해버려.  그리고 반가운 것뿐이야. 동생이 살아온 것이 만일 가룟유다 같이 형을 죽이려다가 자살을 한줄 알고 벌벌 떨었겠지요. 형님 생각은요. 만약 내 동생이나 아버지가 나 때문에 만일 절망하고 자살하면 어쩌나 그 가슴을 조이고 있다가 동생이 그렇게 찾아오니 감사해서 그렇게 말했겠지요. 어서 오게 기다렸네. 내가 기다렸네. 그게 본심에서 한 소리지 거짓말로 말했다. 그 말은 아니라는 것이에요. 그렇다면 순 임금은 거짓말로 동생이 온 것을 기뻐했겠습니까? 아니다. 옛날에 어떤 사람이 정 다산에게 산 물고기를 선사하거늘 다산은 연못지기를 시켜 연못에다 넣어 기르라고 하였었는데 연못 지기는 이것을 삶아먹고 돌아와서 이렇게 대답 말하였다. 인제 어제 그 고기 잘 살려줬냐? 그렇게 물어봤겠지요? 처음 놓아주니 어릿어릿 그렇게 시달려 가지고요. 고기가 어릿어릿 하더니 조금 있다가 생기를 차려 꼬리를 바짝 치면서 물속으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그렇게 대답했어요. 그 연못 지기가 와서, 이때 다산이라는 학자는 제 곳으로 갔구나. 제 곳으로 갔어. 하고 기뻐하였습니다. 오 제 곳으로 갔구나. 제 곳으로 갔어. 고기가 살았다는 말을 듣고 기뻐했어요. 이 말을 들은 연못 지기가 물러나와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누가 다산을 학자라고 하겠는가? 누가 다산을 믿음이 있다고 하였는가? 누가 다산을 성인이라고 하겠는가? 내가 삶아서 먹어버렸는데 내가 가서 거짓말을 했더니 제 곳으로 갔구나. 제 곳으로 갔소. 하고 기뻐하니 말이다. 그렇게 설명하고는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 천자는 하나님의 아들은 그러므로 군자를 속이는 데는 도리어 맞는 말을 가지고 할 수 있으나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을 속여먹는 말을 많이 있어요. 어떻게 말하든지 다 곧이듣거든, 그러나 하나님은 속일 수 없지요. 순 임금이 형을, 형님을 그리워서 찾아왔습니다. 혹시 그 말은 거짓말이어도 좋아요. 그러나 순 임금이 동생을 보고 잘 왔네. 어서 오게. 나는 자네를 기다렸네. 그 말은 참말이다. 그 말이에요.


 


그 말조차 거짓말이라고 해서는 안 된다. 순 임금의 덕을 믿어준다. 그 말씀이에요. 그 말이에요. 똑 같은 말이지만 한사람은 거짓말을 하고 한 사람은 참말을 해요. 그런 그 고사 옛이야기의 책을 더듬어 봤습니다. 이것은 그대로 번역한 거예요. 한문을 그대로 번역한 것이기 때문에 해설한 것은 많지요. 두툼하니 해설 해놨습니다. 해설한 말은 말이 많아 해석을 안 해도 다 알아 듣겠지요. 그래 그 말이에요. 가사 제가 대주 어머니를 만나서 입에 붙은 말로 어머니 제가 불효자식입니다. 그렇게 말 할 수도 있어요. 속으로는 엄마를 미워하면서 그래도 진실로 어머니 없는데서 그저 어머니 없는데서 혼자 내가 실덕했다. 내가 어머니 마음에 내가 이렇게 상처를 드렸구나. 왜 내가 진즉에 말을 못했을까? 왜 내가 따뜻한 말을 못했을까? 하고 많이 뉘우치고 마음속에서 어머니 제가 잘못했어요. 했다고 합시다. 그건 참말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어요? 그러자 어머니는 속으로는 용서 안 되면서 아이고, 내가 잘못했다. 그럴 수 있어요. 그러나 또 어머니도 후회 많이 하셨어요. 아이고, 내가 그냥 내가 너무 그냥 박정하게 내가 참 말을 잘못했다. 어머니도 많이 애통 하셨겠다고 그러니까 두 쪽이 딱 말이 맞지 않소. 두 쪽이 다 회개했어요. 그리고 딱 만나보니까 서로 맘이 따스워요. 사람 마음이 딱 풀어져요.  안 풀어진 건 할 수 없어. 둘이 마음이 안 풀어요. 너 어째 둘이 앉으면 그 말하지 모든 식구한테 다 소문 내 버렸냐? 그래가지고 둘이 걸린다 합시다. 둘이 잘못했다고 해도 안 풀어져요.


 


이 마음속에서 진심으로 겸손해 지면 겸손해 지면 안 풀어도 풀어진다고요. 딱 둘이 만나서 어머니 잘못했다고 말 안 해도 마음에서 이미 풀어져 버리면 풀어진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문제는 이거에요. 말로는 안 풀어져요. 아무리 좋은 말로해도 안 풀어져요. 이 선생님의 고민을 알겠어요. 혼자 살았으면 무난하게 살 텐데 괜히 모여 살다보니 서로 걸려 버리지 않아요? 본심이 아니에요. 우리가 사랑하자고 모였거든. 목적이 사랑인데 살다보니 서로 걸린다. 도저히 본심이 아니라고 본심이 아니야. 절대 그렇게 안하려고 살았는데 어디가 서로 걸렸냐는 거예요. 어디서 이것이 걸렸냐? 네 탓도 아니고 내 탓도 아니고 성경에서부터 잘 못 푼 탓이다. 그렇게 한번 떼를 써보는 거지요. 그러니까 성경에서부터 이것이 고쳐서 풀어야 이것이 풀어지기 시작하지 우리 둘이 풀어서는 안 되겠다. 사람끼리는 안 풀어진다. 성경에서 왜 풀어야 하냐? 성경 말씀 안에 예수님이 계시거든. 성경 말씀 안에 성령이 계시고 성경 말씀 안에 하나님의 영이 계세요. 그러니까 성경말씀에서부터 이것이 바로 풀리기 시작하면 성령이 오셔야 각자의 마음에 겸손한 영을 주시고 서로 잘못했다고 서로 빌고 풀어지겠다. 그런 그 열쇠가 있습니다. 이 병을 고칠 약은 성경에 있습니다. 성경 말씀에서부터 풀어져서 우리 사이에 맺힌 것이 풀어집니다. 하는 효과 구체적인 치료하는 약이 성경말씀에 있습니다. 그런 확신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보십시오. 이 사람이라는 것이 주장을 오래하다 보면 깨끗해 졌습니다. 제가 알아듣게 쉽게 이야기 해 드리겠습니다.

 


유 영모 선생님께서 젊어 소시에 주장이 그거랍니다. 밥은 피가 되기 위해서 먹는 것은 아니다. 그 피땀 흘리고 농사한 쌀과 보리를 꿀떡 삼키는 것은 그것은 은혜를 배반하는 것이다. 소화가 안 되고 지내다 보니 피가 안 되니 농사꾼한테 너무 죄를 짓는 것이다. 그러니까 도시 사람들은 농사한 사람들의 은혜를 생각하고 잘 씹어서 피가 되도록 먹어라. 그 교훈하시는 교육이지요. 그렇게 교육 하셨답니다. 그래서 그러세요. 이 원장님이 젊은 소시에 들어보니까 밥 한 수저를 오십 번 구십 번 백이십 번 씹어서 물이 되어서 삼켜야 한다. 그렇게 가르쳐 주셨대요. 그 이야기를 일 년하고 십년하고 오십년을 듣던 현 동완 선생님께서 결론을 봤어요. 현 동완 선생님이 하는 소리야. 선생님 안 계실 때, 자기는 강당 빌려주니까 몇 십 년 동안 음식은 잘 씹어 먹어라. 이러시는 분이 오늘 둘이 겸상하여 밥을 먹다 보니까 자기는 이빨이 없으니까 꿀떡 삼켜 버리더라고, 그러니 자기주장이 자기가 평생 주장하던 것을 자기가 버려버리지 않습니까? 자기 법을 자기가 범해버려요. 그럼 어떻게 되는 거예요? 밥을 꿀떡 삼키는 것은 농부한테 죄를 짓는 것이다. 꿀떡 삼키는 것은 큰 잘못이다. 잘 씹어 먹어라. 백번 백이십 번 씹어 먹어라. 그렇게 부탁 하시던 분이 자기 자신이 늙어서 이빨이 빠져버리니까 한 번도 안 씹어 오물오물해서 꿀떡 삼키고 꿀떡 삼키고 그러니 자기가 죄인이 되어버렸어. 그러니 어쩔 거야? 그러면 이빨이 없는데 어떻게 씹어요? 그래 당신 왜 씹어 먹으라더니 꿀떡 삼키오? 그러고 제자들이 걸린다 합시다. 왜 선생님 안 지키오? 왜 그 말을 못 지키오? 그렇게 따지면 한도 끝도 없지 않냐? 그렇지 않아요? 이해를 해야지. 선생님이 젊어서는 주장을 했지만 자기 본인이 늙다보니 이빨이 빠져버렸구나. 선생님이시더라도 이제는 할 수없이 삼키신다. 하고 이해해 드리고 용서해 드리고 그걸 서로 그렇게 하고 마음에 섭섭한 것이 없어야지. 왜 자기가 주장하더니 자기도 실천 못하고 꿀떡 삼키냐? 그렇게 따져 가지고는 한도 끝도 없지 않냐? 그거에요. 그렇지 않겠어요? 이치가,


 


 그럼 이제 동정을 지켜라. 그 주장을 동광원 식구라면 누가 제일 강하게 주장하신지 아시오? 이건 참 말씀을 직접 않고는 안 됩니다. 곡성 어느 장로님이야. 자나 깨나 동정, 자나 깨나 동정. 애기들이 몇 남매 있는데 애기 때부터 학교 보내면 장가간다고 학교도 안보내주고 동정 지켜라. 동정 안지키고 하나가 내빼가지고 몰래 학교 다녀 버리지요. 둘째가 몰래 아버지 몰래 둘째는 몰래 이불을 쓰고 속에다 전기 불을 두고 공부했다. 그래가지고 그냥 탁 취직 했어. 아버지 몰래  셋째도 그러고, 다 그래버리지 않습니까? 아 그러니 뭐  닭 쫒던 개 모양으로 말이야. 동정, 동정 하다가 다 내빼서 다 어디 가서 그냥 없거든. 그러니까  손녀들 더러 손자 손녀가 한 스무 개인가? 몇 개 되지요? 이놈 쫒아 다니고 저놈 쫒아 다니고 동정, 동정, 자꾸 한 다리가 멀어. 아들도 말 안 듣는데 손자 손녀가 들어주겠어요? 이리 피하고 저리 피하고 그러니까 하도 욕심이 나니까 강제로 하나씩 이 시간 오늘 시간에는 하나씩 공출해라. 세 개를 공출 받아가지고 동광원 수련회 왔더라고. 그러니 찔찔 울어. 서이 공출 와가지고는 말씀 들으라니까 안 듣고 다 내빼 버리니까 아이고 허허. 아이고 허허. 계속 한숨을 쉬면서 아 그러니 자기가 주장을 하다하다 한사람도 말을 안 들어주니 그럼 자기는 어떻게 하겠소? 결국은 어떻게 하겠는가요? 결국 자기가 주장을 하다가 자기주장이 하나도 안 되었는데 그래, 역시 문제는 무언지 압니까? 물론 그 주장이 나쁘다. 그건 아니에요. 어디가 밥을 씹어 먹는 것이 좋지 꿀떡 삼키는 것이 좋겠습니까? 좋기는 하나 그렇게 안 되는걸 어떻게 하냐? 그거에요. 그렇지 않아요? 모든 법이 그렇지 않냐는 겁니다. 법이 좋기는 하지만. 주장하는 사람부터도 지키지 못해요. 그 법대로 살지를 못해요. 그러니 젊은 나이에 주장하면 독이야. 사흘 닷새 일 년이 지나요. 길게 봐둘수록 안 되어버려. 안 되는걸 어째하냐? 그거에요. 모든 법이 그래요. 그래 이제는 이해 할 때가 되었다는 그 말씀입니다.


 


이제 와서까지 기어이 씹어 먹으라고 주장하면 어떻게 하냐? 이 선생님 살아계신다면 이빨은 빠졌어도 말은 바로 해야 한다. 씹어 먹자. 씹어 먹자. 그래놓고 자기는 꿀떡꿀떡 삼키면서 그러니까 모든 것이 법이라는 것은 주장은 옳은 것이지요. 그러나 그대로 이행이 안 되어요.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이냐? 용서밖에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인류가 이렇게, 이렇게 인류들이 자기 법에 걸리고 옛날 법에 걸려서 이렇게 슬퍼하기 때문에 모순에 빠졌기 때문에 예수님이 오신 것은 네 탓 내 탓 할 데가 없어요. 모두 내 탓이다. 그랬어요. 예수님이 네 잘못 내 잘못해도 다 내 잘못이다. 그러고 자기가 죽어버린 것 아닙니까? 책임을 지시고, 무조건 용서 할 수밖에 없어요. 이 무조건 사랑으로 감싸주고 용서할 길 밖에 없지 않습니까? 모든 천하만사가 그래요. 형편이, 그래 인제 성령을 받기를 자비를 받아야지요. 이 자비심을 받아야 해결이 나지. 아무리 말씀을 대도 한도 끝도 없어. 알기만 잔뜩 알아. 먹기만 잔뜩 먹어가지고 낑낑대고 무거워서 절절매지 않습니까? 마음만 무겁고 영혼만 괴롭지. 그러니까, 이 용서의 능력을 받아야 하는데 용서하는 능력은 성령입니다. 사람 몸속에는 그 힘이 없어요. 사람 피 속에는 그 피가 그렇게 되어먹지 않았어요. 용서할 힘이 없어.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판단 말라고 했지요? 누가복음 6장에 그 말하지 않아요? 판단하지 마라. 판단하면 안 된다. 마태복음 6장인가요? 어디가 있지요? 판단 말라. 그랬어요. 왜 판단하면 또 판단을 받지 않습니까? 우리가 어느 규모에 서있는지 아십니까? 이 단체 규모가 판단에다가 기초를 두고 있어요. 이것은 안 되어요. 물론 초기에는 되었지요. 식구가 적을 때는 판단을 해야 되니까 그런데 식구가 많다보니 판단을 해봐요. 그래 속으로 판단하니까 서로 정죄만 당하지 않아요? 서로 죄만 드러나지. 아무것도 찾은 것이 없어. 그래 인제 거기다 더 커진 것은 미움까지 동하지 않습니까? 미움, 그럼 어떻게 할까요? 이것 참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그럼 한집에 둘이 안 산다. 이런 결론이 나오는데 그러니까 이것이 초창시기에는 좋아요.


 


유 영모 선생님의 교훈도 젊어서야 어디 좋습니까? 씹어 먹어야지요. 밥은 그럼 늙으면 어떻게 할 것이냐? 접어 생각하고 용서하고 덮어주고 불쌍히 보고 서로 사랑하고 이래야 되지 않겠어요? 그래 법은 원리가 다 그렇다는 말입니다. 모든 법은 다 원리가 같아요. 이러쿵저러쿵 그러기 때문에 제일 급선무는 거듭 나는 거 아니겠습니까? 옛사람은 죽고 새 사람이 되어야해. 누구누구는 빼놓고 아무개 아무개는 거듭나 그럴 수 없어요. 전식구가 애로부터 어른까지 다 거듭나야해. 새 출말해야해. 새 출발 이왕 지내온 것도 잘 살았지만 이것 가지고는 안 되겠다. 재출발해야해. 과거는 다 그냥 영으로 돌리고 옛사람은 죽여 버리고 그렇게 말하던지 십자가를 진다든지 똑같은 말 아니겠습니까? 옛사람은 십자가에 죽었다. 이렇게 정해버리고 새 출발이야. 오늘부터 새 출발 새살림 새 시작, 이제는 이것은 자비의 법이야. 사랑 예수의 계명이라. 그거에요. 내가 너희들을 다 용서하고 대신 죽은 것처럼 너희도 서로 대신죽고 용서하고 사랑해라. 그 말 아니에요? 내가 형제를 대신해 죽은 것처럼 너희들도 서로 형제를 대신해 죽고 서로 내 탓이오. 내 탓이오 하고 대신 희생을 하고 서로 용서하고 서로 감싸주고 살아라. 그 말씀이거든. 새 계명은 이제는 새 계명으로 살 때가 되었거든. 새 계명으로 살아야 우리가 소망이 있고 구원받지요. 옛 계명으로는 안 되어요. 옛 계명은 그럼 옛 계명이 나쁘냐? 아니에요. 옛 계명이 성스럽지 않습니까? 옛 계명이 거룩해요. 새 계명으로 살지 않으면 구원이 없어. 구원이 없어. 너도나도 저주야. 너도나도 정죄를 받고 판단해서 누가 죄인이 나 죄인 아니다.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보십시오. 늘 성경 볼 필요가 뭐 있겠습니까마는 아까 그 말씀 다시해요. 아까 성경 세군데 봤지요 어떠한 관점으로 성경을 보느냐는 것이야. 어떠한 사람의 심정으로 성경을 보느냐? 똑같은 예수님의 심정으로 쳐다본 두 청년 두 십자가에 박힌 사람인데 서이다 못에 박혔지요. 예수님 가운데 섰지요? 서로 쳐다보지요. 어떠한 마음자리로 예수님을 쳐다보는가? 그런데 예수님을 원망하는 태도로 쳐다볼 것이냐?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고 자비에 호소함으로 볼 것이냐? 예수님 살려주십시오. 그러고 예수를 쳐다볼 것이냐? 예수님을 원망하면서, 당신도 살리고 나도 살려보시오. 그렇게 쳐다볼 것이냐? 마음자리 마음태도이지요. 우리 사람은 한사람은 예수를 판단하지 않아요. 그렇게 해서는 안 되겠어요. 무조건 자기는 죄인 인줄 알고 예수님 나를 살려주십시오. 주님께서 낙원에 가시거든 나도 기억해 주십시오. 이 죄인을 기억해 주십시오. 그 마음자리가 우리가 얻어야 할 가장 급한 마음자리이지요.


 


그러면 또 아까 고린도후서 12장 7절 다시 보겠습니다. 내가 굉장한 계시를 받았다 해서 잔뜩 교만해 질까봐. 그러면 우리 한사람, 한사람 어쩝니까? 우리가 개인 개인이 자랑한다면 굉장한 신앙 역사가 될 것입니다. 한분, 한분 들어보면 참 눈물겨운 경우가 많지요. 감격스러운 것도 많고 굉장한 계시를 참 한분, 한분 받았기 때문에 그러면 한분, 한분에 대해서는 어떻게 할 것이냐? 하나님께서  행여 라도 잔뜩 교만해 질까 봐요. 하나님께서 우리 가슴에 우리 몸에 가시로 찌르는 것 같은 병을 하나 주셨다. 이 말이 응했어요. 알겠어요? 알겠습니까? 지금 한분, 한분 저도 그럽니다. 말은 안 해도 가시로 찌르는 것 같은 병을 하나 얻었거든요. 이것이 마음병이라 해도 좋고 육신 병이라 해도 좋아요. 병은 두 가지지만 어찌되었든 자기가 누구한테 말 못할 그런 괴로운 것 하나 있습니다. 각자가요. 저는 저대로 누구한테 말 할 수 없는 부끄러움이 하나씩 있어요. 있는데 이건 하나님이 주셨다. 이렇게 보는 것이 좋겠어요. 좋고, 그러나 그것은 실상 내 잘못이다. 하나님이 주셨다하면 거룩하게 그것은 실상은 내가 하나님을 거역했더니 내가 죄를 지어서 그렇게 되었다. 저만은 저를 잘 압니다. 제게 대해서는 제가 잘 알고 있어요. 하나님이 주신 것이 사실일라나 몰라도 제가 저를 생각 할 때는 제가 세상에서는 말 못할 범법을 했기 때문에 이렇게 내게 병을 주셨다. 그것은 알고 있어요. 그것은 사탄의 하수인으로서 나를 죽이고 괴롭혀 왔습니다. 이것은 사탄이라고 하는 사탄을 등장 시키는 이유가 그것 같아요. 자기로서 자기 잘못이라고 느낍니다. 하나는 하나님이 은혜로 주셨다고 풀기도 하지만 실상은 내가 죄를 지었기 때문에 내가 벌을 받았다. 자기 자신은 죄책감이 있거든요. 그게 있어요. 확실히 있어서 그 효과는 무엇이냐? 교만 병이라 그거에요. 효과는 무엇이냐? 교만에 빠지지 않게 되었습니다. 효과는 교만의 병을 없애기 위해서 이 병을 주셨다 이거거든요. 그런데 하나님이 주신 것도 사실이지만 실상은 이 병은 내 잘못이다. 이건 사탄의 벌이다. 그렇게 해설 하신점이 우리가 이 성경말씀을 받아들임으로 우리 개인의 번민 고민 걱정 교만 병이 없어지겠다. 이 말씀입니다. 치료법 치료약, 나는 그 고통이 내게서 떠나게 해 주시기를 주님께 세 번이나 간청했습니다. 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너는 이미 내 은총을 충분히 받았다. 내 권능은 약한 자 안에서 완전히 드러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리스도의 권능이 하나님의 은총이 겸손한 덕이 내게 머무르도록 하려고 더없이 내 약점을 기쁜 마음으로 내 약점을 기쁘게 생각한다. 자랑한다. 그랬습니다.


 


 그렇습니다. 율법적인 판단을 받을까봐 벌 벌 떨고 말 못 한 것뿐이지. 은총에 귀화된 천사들만 모였다면요. 자랑할 것은 죄밖에 없어요. 그것밖에 내 재산은 없는 거예요. 자기가 죄를 범했다고 하면 그것밖에는 가슴에 평화를 주는 게 없어요. 제 나름으로 결론을 내린다면 잘했다는 것은 다 위선이야. 누구를 사랑했다. 뭐 밥을 해줬다. 국을 끓여줬다. 고기 국을 끓였다. 이건 전부 위선이거든. 본심으로 사랑 없이 한 것뿐이고요. 진짜다. 할 만 한 것은 내가 범죄를 지었습니다. 여사, 여사 내가 언제 어느 때 이렇게, 이렇게 죄를 저는 지었어요. 그건 확실한 참말이거든요. 그 인정 잘 못했어요. 그 마음이 들어올 때 어떻게 마음에 평화를 주는지요? 예수님의 사랑이 감사하고 아이고 예수님이 안계셨으면 나는 어떻게 될 뻔 했을까? 내게는 아무것도 선이 없는데 만약에 내가 천국 간다면 예수님의 덕 밖에 없겠다. 예수님의 공로밖에 없겠다. 인정이 그 교리가 이제는 인정이 되요. 그 교리가 남의 것으로 살 때는 번민했는데 어느 목사가 말 했던지 예수 공로로 구원받는 다는 그 말이야말로 참 말이로구나. 그 교리가 내 것이 될 때는 생명이 되요 아주 영혼이 기뻐요. 아 살았다. 이제 살았다. 예수님의 공 예수님의 사랑 예수님의 은총 예수님의 자비 그러기 때문에 이런 결론이 나옵디다. 제가 죄를 짓기 전에는 예수님도 모르고 하나님도 모르고 은혜를 성령도 오해했습니다. 그러나 제가 죄를 범한 후로는 그때 예수님의 공을 깨달았고 예수님의 사랑을 깨달았고 예수님의 은총을 제가 받았습니다. 죄인을 사랑한다는 그 말씀이 믿어집니다. 그런데 죄를 짓기 전에는 문제도 없고 예수도 모르겠고 사랑도 모르겠고 모든 것이 의심스러워 모두 도둑놈이고 모두 거짓 말 쟁이고 모두 위선자고 남만 보여 남의 죄만 보이더니 자기 자신이 죄를 짓고 보니 부끄럽기 짝이 없고 하늘을 볼 수 없고 사람을 볼 수도 없고 그냥 오나가나 부끄럽고 머리를 못 들겠고 그때야 예수님의 은혜가 감사하고 하나님의 은혜도 감사하고 예수님 이제는 성령도 믿어지고 예수님이 나를 위해 대신 죽었다는 말씀도 믿어집디다. 그 보고밖에는 할 것 없더라고 그런 소감을 저는 가졌어요. 다른 분은(끊김)


 


 저는 죄를 지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얻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받게 되었습니다. 예수님 참 저는 이 죄밖에는 드릴 것이 없습니다. 그러고 죄를 바칠 때 예수님이 눈물을 뚝 뚝뚝 흘리면서 면류관을 탁 바꿔가지고 내 면류관하고 바꿔 쓰자. 죄하고 예수님의 면류관의 은총하고 맞바꿔졌다. 그게 믿어져요. 결론적으로 천국 가서는 사람을 자랑한 죄 밖에는 없습니다. 그 심정이 소화 테레사의 심정이었구나. 그래서 마지막 하신 말씀. 언니 제가 이제는 글을 쓸 수도 없고 마지막 글은 언니가 대신 써주십시오. 내가 이 세상에서 이 소원을 품었다고 말해 주세요. 제가 이 땅에서 범할 수 있는 죄는 천사 만사한 사십억이 지을 수 있는 모든 죄는 이 소화 이 소화 혼자 다 범했다. 하더라도 저는 물 한 방울이 이글, 이글 타는  화로불속에 떨어져 있는 것처럼 내 죄는 흔적도 없어지리라는 것도 믿고 예수님 품으로 날라 갔다고 예수님 품으로 날라 들어갔다고 제 대신 언니가 이 결론을 내려주십시오. 내 말귀 알아듣기 위해서 피렛인 가요? 파렛인가? 중년에 타락하고 그 회개하고 죽은 죄녀 이야기를 제 심정이라고 덧 부쳐 주십시오. 그게 소화 테레사의 자서전 끝에 그 이야기가 나와 있지 않아요? 어느 죄녀가 타락해서 회개하고 임종했다고 하는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그 심정으로 죽는다고 그 이야기를 해요. 그 심정이 이제는 제 것이 되었다고 남의 것이 아니에요. 제 것이에요. 그러면 사도바울 감격한 장면이 그거에요. 아무리 죄를 안지으려고해도 맨 죄만 따라다니고 피 속에 죄가 있고 마음속에 죄가 있고 뇌 속에 죄가 있고 그러더니 자기가 감사합니다. 죄 많은 곳에 은혜가 많습니다. 그런 결론이 내렸거든. 자기가 죄가 많이 있다고 자복하니까 은혜가 있더라고 저는 죄가 많이 있습니다. 하고 항복하니까 거기 은혜가 있더라고 그 보고서 아닙니까? 사도바울 자신도 자기가 죄를 안 지으려고 법을 지킬 때는 무작, 무작 죄로 빨려들어가더니 저는 죄인입니다. 그런 거기에는 해방이 오더라고,


 


예수님의 뜨거운 사랑, 자비 은총 평화가 왔습니다. 그런 보고서 그런 보고서가 있듯이 그 사랑의 편지 핵심 심장부말이 그것 아닙니까? 내가 내 무능을 손으로 만져봤을 때 가장 그리스도의 자비를 끌어안았다. 거기 물리적으로 말하면 공이에요. 허무에요. 그러나 도덕적으로 말하면 사도바울 말이 있지 않아요? 죄인의 괴수지요. 말은 똑같은 말이에요. 내가 가장 나는 허무하다. 나는 아무것도 없다. 내 속에는 사랑은 눈곱만큼도 없다. 그걸 깨달았을 때 하나님의 자비를 가슴에 안아 들인다. 은총을 자기가 가슴에 품어드렸다. 나는 사랑이 아무것도 없다. 그렇게 자기가 항복했을 때 하나님의 사랑이 자기 가슴에 들어왔다. 그 말씀이야. 나는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 그런 결론을 냈을 때 하나님의 은총이 자기를 엄습했다. 자기 영혼을 위로하고 구원해 줬다는 말이야. 구원했다는 말이나 평안했다는 말이나 똑같거든요. 마음이 구원받으면 평안하지 않아요? 나는 죄인입니다. 했을 때 죄 사함이 있어. 죄가 없어진다고 참 묘한 이치에요. 나는 죄가 없습니다. 하면 무작, 무작 죄가 살아나. 변소에 가면 죄가 따라오고 밥 먹으러 가도 죄가 따라오고 산에 가도 죄가 따라오고 여기가도 죄가 따라오고 기도해도 죄가 따라오고 저는 죄인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너는 의인이다. 너는 거룩하다. 너는 무죄다. 너는 내 딸이다. 너는 내 아들이다. 너는 천국 시민이다. 너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그러고 축복하시거든요. 그 피맺힌 감사의 정이 편지들 아닙니까? 사도바울의 편지들, 감사 오나가나 그 소리 대표하고 있거든요. 그 편지라는 것이, 그래서 예수님이 단 한번 죽으심으로 우리는 모두 거룩한 사람이 되었다는 결론이나 예수의 피로서 우리는 깨끗함을 받았다는 말이나 나의 내 허물을 자각했을 때 하나님의 자비를 내가 끌어안았다는 말이나 표현은 똑같거든요.


 


죄인을 구원하러 왔다는 말씀이나 뜻은 똑같아요. 죄 많은 곳에 은혜가 많다는 말이나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로 구원받았다는 말이나 사랑을 가슴속에 피 속에 영혼 속에 이렇게 충만히 받은 사람들의 보고서지요. 내 속에 사랑이 없는데 어떻게 남을 사랑합니까? 어떻게 용서합니까? 우리 결심으로는 용서가 안 되어요. 저사람 죄가 용서가 안 되어요. 결국은 나는 죄인입니다. 하고 갈기갈기 자기가 빠개져 버려야되어요. 자기가 빠개져 버려야 됩니다. 여러분 조용기 목사님 말로하면 자기가 깨져버려야 해. 자기가 깨져버려야 그래야 성령이 와요. 완전히 그 야곱이 완전히 깨진 순간은 환도 뼈가 부러진 순간이다. 그렇게 설명하시지 않아요? 한 가닥 희망이 마지막 깨져버렸다는 그때 내게는 이제 아무 힘이 없다고 하는 그 마지막 희망이 마저 없어질 때가 환도 뼈가 턱 부러진 시간이야. 자기를 믿었던 순간이 완전히 무너지는 순간이라고 그렇게 말씀하십디다. 완전히 깨질 때 이스라엘이라는 성명이 왔다. 너는 이스라엘이다. 하나님의 축복이 임했다. 이 말씀, 그 말씀이 그 말씀인데 우리 한 사람 한사람이요. 완전히 깨질 때 겸손해 지거든요. 하나님의 은혜에 감싸이거든. 하나님의 은혜에 감싸이고 그럼 결론을 이제 제가 내리는데요. 부흥사가 이렇게 말씀합디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이 죄를 지었다하자. 그럼 그 사람은 그렇게도 예수님이 사랑스럽고 예수님이 믿어지고 예수님이 그렇게 둘도 없이 하나가 된답니다. 예수님을 참으로 믿는 사람이 죄를 범했을 때 그때는 예수와 자기가 하나가 되어요. 둘이 아니야. 예수와 같이 죄를 짓고 예수와 같이 부활했다. 그런데 믿음 없는 사람이 죄를 지었다 하자. 완전히 절망이야. 완전히 절망이고 완전히 그것은 지옥이야. 죄가 있냐? 없냐가 아니야 똑같은 죄를 지었을 때 믿는 사람은 거기서 구원을 받아요. 그 죄 때문에 그런데 믿음이 없는 사람은 죄 때문에 망해요. 집으로 가버려요. 그럼 두 여자가 맷돌을 매는 다는 말이 뭔 말이야. 우리 한나 어머니 맷돌은 다 깨져버리고요. 쪼금 남았어요. 다 깨져버리고 귀주 어머니 맷돌은 다 마저 깨져버리고 가짜를 만들어 딱 껴놔요. 이빨 이빨이 다하도록 사는 것이 맷돌 아니겠어요? 말하자면 일평생 하는 동안에 하나는 천국가고 하나는 지옥 간다고 믿는 사람은 아무리 죄가 많이 있어도 구원받아요.


 


일평생 그런데 믿음이 없는 사람은 일평생 죄 지은 것으로 지옥가지 않아요. 사람이라는 것이 하루를 살았다고 합시다. 그러면 죄 뿐이에요. 열흘을 살았다. 죄 뿐이에요. 80년 살았다. 죄뿐이에요. 무엇하나 있겠습니까? 그런데 믿은 사람은 예수님이 제해 버려요. 예수님이 대신죽고 예수님이 살아 그 속에서 내가 아니야. 그 사람은 예수라는 말씀이야. 믿음이 없는 사람은 예수가 없어. 자기야 자기 혼자 죄짓다 자기 혼자 지옥에 가. 그럼 절망 아닙니까? 그 믿음으로 구원받는 다는 말씀 옳은 말씀이야. 미쁘도다. 이 말이여, 예수님이 죄인을 구원하러 왔다는 것은 옳은 말씀이다. 참으로 옳은 말씀이다. 그러니까 누가 죄가 있냐? 없냐? 그런 계산이 아니야. 누구든지 일평생 사는 것은 죄에요.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믿은 사람은 구원을 받는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멸망을 받는다. 그런 아주 소박한 교리가 이제는 믿어진다. 겸손한 마음으로 받아들여야겠습니다. 보편교리 그 교리는 교파가 없어요. 이백 교파가 있어도 그 교리는 통일이야. 똑같아요. 어느 교파도 그 교리는 통일이에요. 좀 다른 것은 다 교만 덩어리지요. 우리교파는 무엇이 다르다. 그건 자기들 자랑 아닐까요? 자기들 자랑, 그런 뜻으로 받아들여지더라. 그 말씀이고요. 여러분들은 그렇게 안 되어지려는가 몰라도 저는 그렇게 되었습니다. 제 믿음이 옳다는 것도 아니고 그래 저는 어떠한 이유로든 참 평안해요. 제가 왜 이렇게 병이 나았는지 아십니까? 이제는 병이 많이 나았는데요. 그 정죄의식에서 해방되어 그 정죄가 되었기 때문에 병이 든 것도 사실이에요. 그러니 너 나가 없습디다. 제가 맡고 있는 형제가요. 결혼하면 그렇게 죽겠습디다. 그렇게 자주가 없어요. 그래 내가 이 배주 어머니 속을 알았거든요. 딸과 배주 어머니 둘이 아니야. 배주 어머니 딸이 결혼한 것이 배주 어머니의 저주가 되요. 그럼 저는 저대로 내 아들 딸은 아니지만 제가 책임지고 있는 형제가 결혼했을 때 이건 내가 비밀을 폭로하는 건데 그 동안 제 병은요. 죽고 싶어요. 못 살겠어. 부끄러워 어디가 낮을 못 들겠고 너나가 아니라니까. 저사람 딸이고 나는 아니다 가 아니야. 책임자니까, 책임자니까 그렇게 용서가 안 되어요. 미워 죽겠어요. 미워 죽겠어요. 그냥 그 사람이, 자나 깨나 미워 죽겠는데 이놈의 피가 끊어지지 않아서 그러니 자기가 병이 들어버려. 용서를 하려니 용서가 안 되어요. 죽자 사자 용서하자. 기를 쓰고 용서 안 되니 이놈의 신세를 어떻게 합니까? 왜 결국은 예수피를 믿게 될 때 예수님이 나를 위해 죽었다하는 죄를 죽였다하는 그 믿음이 와서야 해방이 되더라니까.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을 항복하고 나서야 왜 원망합니까? 어째 다른 딸들은 다 지켜주는데 왜 우리 딸들은 안 지켜 줬어요? 하고 하나님을 원망해. 아이고, 다른 집 딸들은 잘 따르더니만 어째 내 딸은 안 지켜 줬을까? 하나님도 무정하지, 하나님도 무심하지, 내가 이렇게 10년을 이렇게 기도했는데 하나님도 어째 내 기도 안 들어줄까? 그 강도 두 사람이라면 어떤 강도겠소? 예수하고 같이 십자가에 박힌 강도 두 사람 중 어떤 강도겠어요? 원망 강도 아니겠소? 그럼 그 마음병이 어떻게 나을 수가 있냐는 거예요. 경성한 강도 본받아야겠다. 예, 저는 죽을죄를 지었어요. 딸 죄가 바로 제 죄입니다. 주님 저는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불쌍히 봐주십시오. 그때 구원이 하나님 불쌍히 봐 주십시오. 저는 죄인입니다. 불쌍히 봐주십시오. 그 기도가 바리새교인 기도가 아니고 그 세리의 기도 아닐까요? 자비하신 아버지 불쌍히 봐주십시오. 그렇게 기도했지요. 그 기도가 제 것이 될 때에 어떻게 영혼이 감사하고 해방이 오는지. 용서가 되어버려. 판단이 없어져. 이제는 판단이 안 되어요. 그걸 생각만 하면 불쌍하고, 불쌍하고 용서가 되어버리고 아이고 저는 죄인입니다. 할 말은 그것뿐 무슨 할 말이 있어요? 저는 죄인입니다. 저를 불쌍히 봐주십시오. 그것뿐이에요. 기도하면 그 말뿐이 할 말이 없어. 그렇게 되는 것은 자기 심정이 아닙디다. 성령의 역사에요. 새로 받은 영이야. 그 성질은 새로 주셔서 받은 영혼이지 옛날 오기가 아니야. 옛날 혈기가 아니에요. 옛날에 주장하던 혈기가 아니에요. 불쌍히 봐주십시오. 저는 죄인입니다. 불쌍히 봐주십시오. 그 소리 할 때는 마음이 늘 피가 깨끗해요. 마음이 깨끗하고 영혼이 깨끗해지고 병도 낫고 잠도 오고 밥도 맛있고 소화도 되고 나 그래 요새, 요새 누가 소화가 안 되는 사람 있지요? 부끄러운 게 손도 안 들어. 거짓이 있어. 그래 용서가 안 되면 소화가 안 됩니다. 저 사람을 정죄하고 판단하고 용서가 안 되면 소화불량이 생겨요. 인제 그 내가 잘못 했소. 하고 울어버려. 그렇게 되면 인제 소화가 되기 시작해. 제가 잘못했습니다. 모든 것이 내 탓이야. 바로 제가 그 괴수입니다. 죄인의 괴수입니다. 하고 자기가 겸손해질 수 있도록 은혜를 받아가지고 항복을 하면 이제는 소화도 되고 잠도 오고 살도 찌고 살도 찌고 그렇게 꼭 그렇게 될라나 합니다만 그렇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마음에 무슨 병이 나서 소화불량이 된 사람 있지요? 그러나 결국은 그렇게 체험을 했다. 그 말씀입니다. 참고해 보세요. 그러면 죄 많은 곳에 은혜가 많다는 말은 그런 체험을 할 때 그런다. 그 말입니다. 내가 죄를 지은 담에 있겠습니까? 하나 생각해 봐요. 제가 그런 이야기 했습니다만 똑같은 유곽에서 살았다합시다. 같은 유곽에 있는 식구라 합시다. 그러면 서로 용서 될 것 같지요? 안 되어요. 죄가 있다고 해서는 용서가 안 되어요. 죄를 지었으니까 자기도 죄를 용서할 것 같지만 용서 안 되어요. 성령을 받기 전에는 용서가 안 되어요. 그리고 내가 의인이니까 용서 안 된다. 그 말도 역시 옳은 말이 아니에요. 은혜를 받은 의인은 죄인을 용서 할 수 있지요? 그러면 같이 죄인이면 용서 하냐? 용서 안 해요. 은혜를 받은 죄인이라야 죄를 용서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피 뿌림이 없이는 죄를 지었어도 겸손한건 아닙니다. 하나님의 성령을 받은 죄인 이 라야 죄인을 용서해요. 그러면 의인은 죄를 용서 못하냐? 그것도 아니에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의인은 능히 죄를 용서해요.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못한 의인은 죄인을 용서하지 않거든. 확실히 두 부류에요. 그래 제가 이야기 했지요? 산에 가서 아 배는 고픈데 어떻게 그 무엇입니까? 산에 다래가 많이 열렸기에 꿀떡꿀떡 삼켰어. 어떻게 많이 열렸던지 조금 있으니까 막 속이 불이나기 시작하는데 찾아가 보니까 개다래야. 개다래, 참 다래가 아니야. 열매도 같고 연줄기도 같고 잎사귀도 같고 개다래야. 속이 불이나 갖고 죽겠어. 나 개다래한테 속았다. 처녀는 안 그러지요. 하나는 참 처녀, 개 처녀가 있다. 같이 처녀가 있는데 하나는 어떻게 남의 죄를 용서를 잘하는지 그건 성령 받은 처녀고 같은 처녀라도 어떻게 남의 흉을 잘 보는지 그건 개 처녀야. 똑같이 처녀라도 은혜를 받은 처녀 있고 받지 않은 처녀 있어. 똑같은 죄인이라도 은혜 받은 죄인이 있어. 그 사람은 자비심이 많아. 그러나 은혜 받지 않은 죄인은 어떻게 교만한지 그러지 않아도 죄인이 그러지 않아도 죄 많은 것이 더 교만한데 그러니까 죄를 범했다고 겸손하냐? 그것이 아니라 죄가 없다고 교만하냐? 그것이 아니라는 거예요. 은혜 받은 자가 겸손하고 또 은혜 없는 은혜를 못 받은 죄인이 교만 하더라. 그겁니다. 그러니까 문제는 예수의 피예요. 의인도 죄인도 예수님의 피를 받아야 되어요. 예수님의 피로 거듭나야 되어요. 예수와 같이 죽고 새로 나야 의인도 겸손하고 죄인도 의인 되었으니 겸손해요. 우리가 제일로 급한 문제는 내 믿음을 십자가에 못 박아 버리고 예수의 믿음을 받아야하겠습니다. 제가 이렇게 말씀을 어느 정도 했지요. 말은 똑같은 말은 아니지만 말은 쑥떡같이 해도 찰떡같이 알아들어야겠습디다. 말귀를 잘 알아듣는 사람이 있습디다요. 그렇다고 해서 교만한지 몰라도 제가 개화도에서 그런 일이 있습니다. 이런 투로 말한 일이 있지요. 하니까 주인장가 들어보고 저는 말 한마디도 안한 말로 딱 돌려서 이야기 하더랍니다. 저는 이번에 아무개 말을 들어보니까 동광원 처녀들은 자기 정절을 지키니까 예수님이 주시는 정절로 바꾸라는 뜻으로 들었습니다. 그러더라니까요. 그럼 말이 어떻게 되었던지 어떻게 찰떡같이 들었던지 같이 정절을 지켰어 도요. 내가 지킨 사람은 누구냐 그러니까 땅으로 가는 사람이야 교만해요. 같은 동정녀 라도요. 은총으로 받은 사람 예수님의 은혜로 지킨 사람은 겸손해요. 그래 천국에 갑니다. 마음이 평안해요. 그런 말이거든. 동광원 정절은 자기정절로 지켜왔으니까 그 정절 보다는 예수님이 주신 은혜로 지키라는 말로 들었습니다. 아 그렇게 말하게 나는 그런 말 한마디도 안했는데 저렇게 말을 알아들었을까? 참 은혜스러웁디다. 저는 기억 안나는 말인데 어째 우리 식구들이 평화가 없냐? 예수님의 은혜의 말을 내가 지켰거든요. 내가 스스로 공을 땄어요. 그러니까 마음에 평화가 없어 공으로 은혜로 얻은 것이면 자랑을 않지요. 뭔 자랑할 것이 있겠어요? 은혜로 얻었는데 너무 자랑을 못하지요. 천주교에 관한 성인들이 그렇게 말해요. 순결과 겸손은 자매지간이다. 그렇게 표현하는 말 똑같아요. 순결과 겸손은 자매지간이기 때문에 순결 없이 겸손도 없고 겸손 없이 순결도 없다. 이것이 갈려버리면 안 된다는 겁니다. 교만한 순결은 하나님 것이 아니야. 또 겸손 없는 순결도 하나님 것이 아니야. 똑같은 말이지요. 겸손한 순결을 가져야지. 교만한 순결을 갖는 것은 하나님이 합당치 않다. 그런 말씀이 되겠습니다. 여기서 바울 선생님의 부탁은 그것입니다. 말 할 때는 자기말로 말고 예수님이 주신 은혜로 말하라. 또 선행 자선사업 우리가 자선사업 하지 않습니까? 구제할 때는 예수님이 주신 자비심으로 하지, 자기 자비로 하지마라. 사도바울의 결론은 꼭 그렇게 내리거든요. 말 할 때는 주신대로 하고 무슨 행실 행동을 할 때는 주신 힘으로 하라. 자기 힘으로 하지마라. 대체로 우리들이 자기가 강했지요. 우리 힘으로 지켜오고 우리 힘으로 믿어왔어요. 그것이 우리에게 무리가 왔었다. 그거에요. 교만할 수 있는 병이 거기서 왔다. 그러니까 우리가 시정하고 개혁 새 출발 하려면 내 것은 십자가에 못 박고 예수님이 주신 은혜로 깨끗하게 살아야 할 것이고 예수님이 주시는 은혜로 밥도 하고 불쌍한 사람 눈물도 씻고 구제를 해야 하지 않냐? 은혜로 되기를 바라야 할 것입니다. 내가 한 것을 자랑하는 것이 교만한 것은 문제가 심각합니다요. 이것은 참 천국을 못 간다고 하는 무서운 결과가 나오거든요. 내가 한다는 거 그렇지 않아요? 말만하고 뭐 말하는 게 아니거든요. 톡톡히 이 무서운 이것을 어떻게 시정할 것이냐? 숙제로 남는 거 내가 동정을 지켰다. 내가 정절을 지켰다. 내가 불쌍한 사람을 도와줬다. 내가 금식했다. 가사 내가 박토를 개간했다. 그런 생각, 그것이 완전히 무너지고 예, 주님 저는 죄인입니다. 주님이 오늘까지 보호해 주셔서 이렇게 살아왔습니다. 그렇게, 겸손해 지기 위해서 사도바울이 병이 들었다고 하지 않습니까? 따라 읽으십시다. ‘내가 굉장한 계시를 받은 굉장한 계시를 받았다 해서 잔뜩 교만해 질까봐 하나님께서 내 몸에 가시로 찌르는 것 같은 병을 하나 주셨습니다. 그것은 사탄의 하수인으로서 나를 줄 곳 괴롭혀 왔습니다. 그래서 나는 교만에 빠지지 않게 되었습니다. 고린도후서 12장 7절 말씀.’ 이 사도바울의 심정을 한번 가져 보십시다. 권고의 말씀이지요. 어찌 보면 하나님 은혜가 어찌 보면 사탄의 저주 같고 확실히 그러거든요. 그런데  둘 다 옳아요. 둘 다 옳은데 효과는 교만해지지 못하게 그렇게 해줍니다. 교만 빼시려고 이렇게 하시는구나. 만일 그 은혜를 알아서 살 것 같으면 아 살았다. 나를 사랑해서 이렇게 병을 주셨구나. 그러면 병도 감사하고요. 또 감사하면 소화도 되지 않아요? 음식도 소화되고 이제는 잠도 자고 그렇게 되요. 은혜를 받게 될 때 그래 은혜를 받는 것이 급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원망이나 오해하지 말자는 거예요. 자기 병에 대해서요. 오해를 말아요. 받아들여야 해요. 이 교만 병을 고쳐주려고 나에게 병을 주셨다. 가사 꼭 그대로 받아들여도 좋지 않겠어요? 몸에 병이 없다면 마음에 고민이 있지 않아요? 교만 병인데 마음에 병이 있는 것은 나 다 라는 그것이 있으니까 마음에 병이 있지 않아요? 몸은 건강한데 왜 이렇게 마음이 괴롭소? 나다 그러는 교만 병이 들어서 그래요. 그러니까 왜 그렇게 내 맘이 괴롭냐? 그거에요. 그게 병인데 그 교만해지지 않기 위해서 주신 사탄의 가시는 찌르는 가시는 가시도 되고 하나님께서 주신 은총도 된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된다. 원망도 말고 불평도 말고 받아 들여야 되어요. 이건 내게 큰 하나님의 축복임과 동시에 사탄의 가시다. 그런데 나를 이 교만 병을 고쳐주시려고 주신 것이다. 확실해요. 확실한 말씀입니다. 끝으로 한 말씀 보겠습니다. 야고보서 3장  평화의 씨를 심는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평화의 씨, 읽으십시오.
(잡음에 안 들림)


 


 그 평화의 씨를 심는다는 말이 있어요. 평화를 위해서 일하는 사람들은 평화의 씨에서 정의의 열매를 거두어들입니다. 평화를 위해서 일하는 사람들은 평화를 심는다. 이 평화는 성령입니다. 성령의 씨를 심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마음이 평안해. 성령은 용서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성령은 자비입니다. 사랑, 무조건 사랑이야. 그 씨를 심으면 그 영혼이 평안해. 그 씨를 심지 않고는 여러 가지 골치 아파요. 금식해도 많이 고쳐 봐도 편치 않아요. 갈라디아서 5장 22절. 사랑의 씨가 성령 아니시겠어요? 성령께서 내려주신 은혜는 사랑 기쁨. 뭐 복잡한 말 없어. 성령께서 심어주시는 씨가 있어요. 맺어주시는 열매는 열매나 씨가 씨를 심으면 열매가 열리지 않겠습니까? 씨를 심으면 열매가 열리는데 성령을 받은 결과지요. 하나님의 성령을 받은 열매는 사랑이에요. 결국은 평화겠지요. 평화, 사랑 안에 평화가 있어요. 기쁨 평화 이세가지만 하나님이 주신거지요. 그 밖의 것은 사람이 갖고 있는 것이니까 그러니까 하나님이 직접 성령의 씨를 주는 사람은 열매가 사랑이에요. 기쁨이고 평화에요 성령의 씨가 바로 평화입디다. 사람의 몸에는 이 힘이 없어요. 사람의 정신에는 이것이 없어요. 불안 고민뿐이에요. 이것은 사랑 기쁨 평화 그리고 이 몸을 다스려가지고요. 몸을 지킨다. 정절을 지킨다. 동정을 지킨다. 금식을 한다. 여러 가지 계명을 지킨다. 할 때는 육정입니다. 육정을 압박하고 육정을 십자가에 못 박는 운동이기 때문에 투쟁이에요. 투쟁, 사랑이 없어요. 자나 깨나 싸움이지요. 투쟁 아닙니까? 그건 성령이 아니거든요. 성령을 받은 사람들이 이제는 순결하게 살아요. 의지해서 하나님이 눈동자같이 지켜주세요. 오나가나 찻길인데 우리가 무사히 여기를 찾아왔으면 배려입니다. 하나님이 지켜주셔서 여기까지 무사히 온 거예요. 하마터면 차에 갈릴 뻔해요. 그와 같아요. 우리가 순결하다면 무서운 시험에서 지켜주신 것뿐이에요. 하나님이 지켜 주셨어요. 이 시간까지 은혜에요. 은혜 은혜로 갖고 있는 것이지 지켜서 갖고 있는 것 아니거든요. 지켜서 갖고 있는 것은 완전히 이것은 전쟁 이라는 거예요. 자기가 지키는 거는 평화가 없어요. 그러니까 물론 지켜서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요. 그러나 법도 거룩해요. 그러나 은총을 받아야해. 은혜를 받아서 평화가 와요. 은혜를 받음으로 용서할 수 있어요. 하나님의 은총을 받아들일 때는 이제는 사랑이 되요. 무조건 사랑할 수 있어요. 그러니까 우리 힘으로 할라는 것도 고맙지만 이제는 제게는 허무입니다. 영입니다. 그래서 이 수사마냥으로 제게는 능력이 없어요. 항복을 해야 돼, 완전히 항복입니다. 소화 테레사의 경우도 똑같지 않아요. 나는 막달라 마리아가 무릎을 굽혀 대답한 것처럼 완전히 허무에 이르러서야 예수님의 은혜를 받았다. 그 말씀이나 이 수사님이 나는 완전히 허무를 장악했을 때 하나님의 자비를 알았다는 말이나 또 사도바울이 나는 죄인의 괴수다. 그렇게 깨달았을 때 자기가 예수님의 은혜를 받았다는 말이에요. 우리들이 모두모두 제 탓이에요. 형제들이 이렇게 고생하는 건 다 제 탓입니다. 이랬을 때 영혼이 평안 한다는 말이에요. 똑같아요. 저는 어머니 말로 하지만 어머니 들으라는 말 아니에요. 한나 어머니 말씀하고 배주 어머니 말씀하고 귀일 어머니 말씀하나 본인들과는 아무 관계없는 거예요. 이 말이 성경 말씀이 너무나 막연하지 않습니까? 하늘과 같아서, 구체적으로 실제 우리가 그렇게 생각해 봄으로 우리가 효과 있게 받아들인다. 그런 뜻이거든요. 확실히 그 여러분도 다 알거에요. 이 선생님이 돌아가시기 전 2년 반 근 2년 전 부터는 하늘과 땅같이 그 영혼에 능력이 달라졌다. 돌아가시기 전 2년 전만해도 무서웠어요. 옆에 가면 살기가 있었어요. 옆에 잠을 못자. 무서워서요. 돌아가시기 2년 전 부터는 어찌 형제와 같이 다정스러운지 무섭지가 않읍디다요. 그러고 아무리 꾸지람해도 무섭지 않고 사랑스럽고 안심해 안심이 되드만요. 확실히 성령 받으셨어요. 이 성생님이 돌아가시기 전 2년 전에 성령 받으셨어요. 물론 그 전에도 성령이 계셨지요. 그러나 은총을 확실히 받으신 것은 돌아가시기 2년 전이에요. 확실히 옆에 앉아보면 달라요. 눈에 안보이지만 느껴져요. 영혼이 느껴졌어. 확실히 자비가 느껴졌거든. 용서하는 능력이 있으시고 판단하시고 확실히 그랬고 한나 어머니 거년 가을부터 그래요. 꼭 이 선생님 그런 거 같아. 제가 한나 어머니를 무서워했습니다. 조금만 잘못하면 어머니한테 꾸중 들을까봐 벌벌 떨었는데 1년 전 가을부터 그렇지 않습디다. 어머니 옆에 가면 훈훈해요. 따스워요. 무섭지가 않아요. 확실히 어머니도 성령 받으셨다. 자유의 성령 받으셨다. 그렇게 느껴집디다요. 모르겠어요. 여러분들은 그렇지 않은지? 그래서 지금 여기 와서 앉아계신 한나 어머니는 계명산 한나 어머니가 아니에요. 계명산 한나 어머니는 죽었고, 돌아가셔 버렸고 여기오신 한나 어머니는 새 어머니, 은총의 어머니 복음의 어머니 평화의 어머니로 오셨어. 그래 나 아주 원장님이 계신데 미안하지만 원장님이 옛날 할머니로 아시더라니까 옛날 한나 어머니인줄 아시고 일전에 말씀하시지 않아요? 장로님께서 어머니가 윗집에 계시니까 안심해 버린다고 어머니 규모대로 잘 아실 테지 그러시더라고, 아 원장님 지금 한나 어머니를 오해하고 있구나. 옛날 한나 어머니는 죽었고 지금 와 계신 분은 옛날 어머니가 아니신데 우리 원장님이 지금 옛날 어머니로 아시는 것은 조금 모르고 그러신다. 그런 생각을 했어요. 어머니 윗집에 계셔도요. 옛날같이 전혀 여러분한테 꾸중 안할  거예요. 그럴 것 같아요. 확실히 우리 어머니가 승리 했어요. 이제는 은혜를 확실히 받으셨어요. 그러니까 한나 어머니 성공이 우리 성공이야. 오전에는 귀주 어머니 실패가 우리 실패라고 했지만 귀주 어머니가 소망이 없다는 말이 아니거든. 결국은 그 법을 기어이 놓게 하시기 위해서 사탄이 찌르지 않소? 가시가 되어서 귀주 엄마를 콕콕 쑤시거든. 지금 병이 나가지고 항복하라고 내 공으로 구원받지 않고 예수님의 사랑으로 구원받습니다. 깨닫고 하늘나라 데려가시기 위해서 그 모진 병이 들었어도 안돌아 가시지 않아요? 그래 하나님의 은혜로 되는 거예요. 이것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현장  살아계신 하나님의 운동을 뭐 보듯이 지적을 해야 되지 않아요? 옆에 사람이 그럼 죽은 성경 말씀이 아니라는 말이에요. 살아 움직이시는 성령이 우리 사이에 머물고 계세요. 그걸 우리가 알아봐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은혜를 감사해야지. 그렇게 해서 우리 사이가 뜨거워 져야겠어요. 이번에 성령 받으세요. 오신 분들이, 그러면 이제 보시지만은 이번에 오신 분들이 한 달 15일 동안에 성령을 받았다는 소문이 나기만 하면요. 서로 봐달라고 여기서는 인제 배가 불러져요. 서로 안 받을라고 서로 못 오게 여기는 짱짱하게 서로 못 오게 하고 그렇게 해서 여기 와줘야지. 그렇게 해서 안 되겠습디다. 몰려가지고 딸들아, 딸들아 어서 은혜 받아라. 억지로 등을 밀었어. 가서 받으라고 그렇게 아쉽게 어디 가르치겠어요? 우리 장로님께서 이제는 못 오게 해야지.  그러고 은혜 받았다고 오라 그래야지. 그러면 문제는 그래요. 이번 공부하신 분들이 문제를 받아가지고 우리 한나 어머니는 옛날 어머니가 아니더라. 우리 장로님 옛날 장로님이 아니고 은혜가 충만한 어머니하고 장로님 계시더라하고 여러분이 이제는 받은 은혜를 가서 소문을 내야해요. 그때 이제는 부흥이 일어나지. 여러분이 한나 어머니도 몰라보고 장로님도 몰라보고 그냥 간다 합시다. 그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렇게 되면 은혜가 안 일어나지요.  제가인제 방학이 되면 안 갈라고 그래야지. 아주 여기가 좋다고 한나 어머니도 따숩고, 장로님도 따숩고 우리가 여기를 떠나면 쓸쓸해서 못 살겠어요. 찬바람불고 눈이 오고 안 갈랍니다. 여기가 좋아요. 하고 서로 안 갈라고 울음바다가 되었다는 소문이 들려야 모두 오지 않겠어요? 그렇게 될 거에요. 확실히 그렇게 됩니다. 인제 그렇게 되라고 여기가 되어있지 않습니까? 끝으로 말씀하나 더 드려요. 이것은 다른 사람 말은 목사가 하시고 어떠한 의미에서 신부가 하시고 전문가가 하시는 성경 말씀 이지만 제 말은 우리 원 이야기 아닙니까?  우리 식구 이야기니까 다른 사람이 들으면 쓸데없어도 우리는 들어야 해요. 이 선생님의 축복과 기도가 우리들에게 내리고 있어요. 우리들한테 내리고 있어요. 지금 어떻게 내리고 있냐? 야곱이 기도한 것이 자손한테 임했지요. 아브라함이 기도한 것이 자손한테 응했지요. 아브라함이 기도할 때 에서는 이렇게, 이렇게 되라. 야곱은 이렇게, 이렇게 되라. 꼭 그대로 되었거든요. 야곱이 열두 아들한테 이렇게, 이렇게 되라. 꼭 그렇게 되었어요. 그런데 이 선생님도 하나님의 종인데 기도 한 대로 그대로 되어가고 있어요. 꼭 그대로 기도해 주신대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내려 주시거든요. 이것은 이야기가 아니고 실제에요. 실제 한 가지 생각납니다. 이 선생님이 어떤 기도 하셨냐 한번 이야기 드렸어요. 여기 몇 분 계실 때 우리 복음은 이런 말씀이 복음이에요. 예수님이 계실 때는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복음 아닙니까? 우리들은 우리 어른들이 하신 말씀이 우리들에게 복음이에요 복된 소리라는 말씀입니다. 육이오 전이지요. 해방 후에 장로님께서 소재라는 마을에서 장롱을 짜시고 삯을 받아서 우리 식구가 살았지요. 몇 사람이 살았는데 이 선생님은 도구박골 왔다 갔다 하시면서 낯에는 도구박골로 들어가셨어. 밤에는 반드시 소재로 들어오셔서 주무셨습니다. 한 한 달인지 반달인지 그 다음에는 심방가시고 서울 가시고 심방 가시지만 거기 와계실 때 이야기니까요. 저는 그때 나이가 23살 아닙니까? 막 고향에서 와서 처음으로 장로님 뵙고 이 선생님 뵙고 장로님 그 목수 간에 저더러 심부름하고 있으라. 해서 가있었거든요. 여름이지요. 밤에 꼭 두 분이 가만 저는 전기도 없고 불을 안 쓰세요. 두 분은 해 뜨도록 한 이야기신데 가만히 누워서 부시럭, 부시럭 소리를 들어보면요. 두 분이 새벽한 네 시나 세시면 꼭 일어나십니다. 두 분이 말도 안하세요. 그런데 띄엄, 띄엄 더러 이 선생님만 말하시면 장로님은 절대 말이 없지요. 숨소리도 안 들려요. 그런데 이 선생님이 이렇게 한번 말씀 하세요. 새벽에 세시인가 세시반인가 두 분이 일어나 앉은 것 같아요. 그날 아침에 캄캄한 밤이지요. 캄캄한 밤에 두 분이 앉아계신데 이 선생님이 이렇게 말해요. 이 골채기 저 골채기 양들을 키우고 한 사람은 꼴을 베어오고 한 사람은 양을 지키면 좋겠어요. 그랬어요. 이 골채기 저 골채기 양들을 키우면서 한 사람은 꼴을 베어오고 한 사람은 양을 지키면 좋겠습니다. 조금 비슷하게 말을 떼어 볼까요? 한 사람은 이 골채기 저 골채기 양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