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농사

기해년 소만 연산 : 이현필 스승의 행적

mamuli0 2019. 5. 22. 15:25

 울금은 아직 올라오지 못했고 토란은 모두 올라왔다, 좀 늦었으나 ㄸ또아리 호박도 가까스로 심었다. 비바람에 쓸어진 보리가 고개를 ㅊ들고 햇볕을 받는다. 곳곳에 사랑초가 꽃밭을 이뤘다.


 


 이 현필 스승의 행적


  1981.01.01. 김준호 선생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비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으로서 내가 너희를 낳았음이니라. 공동번역 문으로 읽겠습니다. 여러분의 신앙생활을 지도해 줄 교사는 얼마든지 있겠지만 아버지는 여럿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하여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교인으로 태어나게 한 사람은 바로 나입니다. 인제 사도 바울 선생께서 고린도 교인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이 성경 말씀을 읽고 싶었던 것은 내일부터 이제 모임이 있고 우리 본 식구들이 이 선생님을 생각하면서, 특별히 저는 그렇습니다. 이 선생님이 저를 위해서 믿도록 인도하신 분입니다. 대다수가 그런 분이 많아요. 또 그래서 이 시간에는 이 선생님을 그렇게 늘 생각하는 뜻으로요. 이 성경말씀 보고 또 찬송도 혹은 노래도 이 선생님 살아계실 때 노래도 좀 부르고 이 선생님께 관한 노래도 좀 부르고요.  그렇게 해서 내일  손님도 오시고 그러는데 그 선생님의 따뜻한 느낌이 우리들 가슴에 스며들도록 그렇게 마음 준비 하는 것이 떳떳하겠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여기 나왔습니다. 한번 따라서 읽으십시다. 개역 말씀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비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으로서 내가 너희를 낳았음이라. 고린도전서 4장 15절 말씀.’


 


 그 이 선생님의 살아가신 발자취를 한 10년 전에 어느 수녀님이 와서 들으시고요. 이렇게 말씀 하셨어요. 아, 그 선생님은 무아의 희생을 하신 선생님이십니다. 무아의 희생이라고요.  완전히 자기를 희생해서 제자들을 위해서 희생해 주셨다고 그렇게 말씀하신 걸 들었습니다. 대체로 여기 모인 대다수는 그 이 선생님은 예수님의 제자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로서 예수님이 지니셨던 심장을 품으셨습니다. 그래서 완전히 우리 영혼 하나하나를 예수님 앞으로 인도하기 위해서는 자기 생명을 아낌없이 받쳐주신 것은 우리가 잘 아는 바입니다.  그래서 그 사랑에 녹아나서 여기 모여 있는 사람들이 오늘 밤에도 모여 든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게 생각해 볼 때 그 선생님의 선생님 이 세종 선생님이나 또 이 선생님의 생각은  예수님만 바로 제자들에게 나타내고 싶었던 것이 본심이었습니다. 대체로 두 분이 다 유언하신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 세종 선생님도 내가 죽은 후에 내 이름은 완전히 잊어버리고 행여 라도 내가 뭔 말 했다는 말은 말아다오. 성경 말씀에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해서 믿습니다. 그러지, 이 누구한테 배웠다. 그 말은 말아달라는 것이 유언 이었답니다. 또 그분의 제자니까 이 선생님도요. 그 분 소원도 말씀으로나 행실로나 예수님의 말씀이어서 여러분들이 잘 믿고 구원 받았다고 그러지, 내게 배웠다는 것은 완전히 무로 돌리십시오. 그렇게 해서 자기가 평생에 남보다 더 잘 믿었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있었습니다. 그런 것은 본인이 완전히 허물어 버렸습니다. 완전히 자기가 허물어 버리고 영으로 돌아가시고 세상을 떠나신 것은 그 선생님을 내세우라는 뜻은 없습니다.


 


그러니까 그 선생님의 피 속에 거듭나신 그 분의 영혼 속에 예수님의 성령이 같이 하셨고 예수님의 종으로서 그 예수님의 참 모습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선생님입니다. 그런 뜻으로 선생님을 기념하자는 것은 아닙니다. 아니 선생님을 욕심으로 생각하자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을 잘 믿게 해주신 분으로 생각함으로 훨씬 예수님이 더 우리 가슴에 가까이 오시고 예수님이 훨씬 우리에게 더 바로 나타나신 점입니다. 그러니까 선생님을 늘 생각해 보는 것은 예수님을 더 깊이 우리가 배우고 모셔 들이기 위한 방법입니다. 그렇게 이해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그럼 이 선생님의 그 심장이랄지 그 분의 사랑은 온 우주를 품에 안은 가슴입니다. 어느 국경을 초월하고 민족을 초월하고 또 이 예수교를 초월하고 아니 종파를 초월하고 누구한테 조금치도 하우하박이 없습니다. 특별히 이 동광원 사람이라 그래서 더 사랑한건 아닙니다. 그렇게 보여 집니다. 같은 한길 가는 하나님의 아들딸로서 가까이 계셨을 뿐이지요. 특별히 이 모임을 더 두둔한 것은 없는 것으로 아닙니다.


 


그 선생님이 세상을 떠날 무렵에 무척이나 국경을 초월하고 싶었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나를 보내신다면 외국 가서 전도하고 싶다고 그리고 선언 이렇게 했어요. 나를 도와주는 분들은 동광원 안에 살지만 나는 동광원 사람은 아니다. 그 뜻은 동광원을 사랑 안한다는 말씀이 아니고 동광원을 초월해서 동광원 안에 있는 친구들을 동기들을 존경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동광원 밖에 있는 누구든지 똑같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랑 하신다. 친필로 쓴 일기를 본 사람은 봤을 란지 몰라요 주님 저는 죄의 못자리올시다. 그건 겸손이라 할까요? 참회라 할까요? 그 속마음이 라 할까요? 저같이 죄 많은 자식을 예수님이 이렇게 피로 사셔서 감사 합니다. 주님의 은혜를 저는 무엇으로 보답해 드릴까요? 그러니까 본인은 세계 사람이 죄가 있다면 선생님 자신을 제일 많이 죄가 있는 사람으로 그렇게 본인을 투시하셨습니다. 그렇게 깨달았습니다. 그럼 여러분은 제 말이 아니니까 일기를 친히 보시면 아시겠지요. 그럼 제일 자기를 낮추시고 자기를 철저히 회개를 하신 점, 그 점이 예수님의 참 제자십니다. 


 


누구든지 회개하고 내게로 오라. 회개하고 구원을 받으라. 예수님은 그러시면서 누구든지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어주마. 네 죄는 내가 책임 져주마 그러고 거듭나서 새사람이 되어라  고 말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러므로 세계 누구든지 이 선생님의 교훈을 받으면 인류가운데 한 사람도 낙심할 사람이 없습니다. 이 선생님이 가르쳐준 예수님을 믿으면 천하에 아무리 죄인이라도 나는 죄 있어서 예수를 못 믿겠다. 그렇게 낙심할 사람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런 점은 성화를 받으신 성현들의 심정과 똑같다고 봅니다. 성인 프란치스코 같은 분도 자기는 항상 죄 많은 벌레라고 눈물을 흘리고 그러셨어요. 사도 바울 같은 분도 나는 가장 죄 많은 사람으로서 왕이다. 죄의 괴수다. 그런 말씀이나 순수 우리 한국말로 외국말 아니고 나는 죄의 못자리올시다. 농사해 본 분들은 잘 아실 것 입니다. 그러므로 형제자매가 죄를 지었다면 내 잘못이오. 이 못자리가 옮겨 갔으니 이 노릇을 어떻게 합니까? 그러고 본인 자신을 회개 하셨습니다. 형제의 죄를 주지 않았습니다. 형제에게 죄를 정하지 않았습니다.  왜 죄지었냐고 미워하지 않았습니다. 나 때문에 저 사람이 죄 지었구나 하고 대신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의 사랑에 깨어난 사람입니다. 그러신 겸손하시고 따뜻하시고 거듭나신 이 선생님을 만나서 우리가 전도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순수한 예수님을 가르쳐준 선생 이라고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깨끗한 깨끗하게 아무 보태지 않고 예수님을 바로 가르쳐준 전도사님 이었다 그렇게 믿습니다. 그래서 이 선생님의 그 면모를 아는 사람들은 자기가 어떤 교파에 소속되어 있던지 일치감을 느끼는 것입니다. 전혀 남 같지 않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자기가 어떤 교파에 예속되었든지 이 선생님의 생활 그 믿음을 볼 때에는 같은 성령이 역사하지, 남이다 하는 생각이 없습니다. 다른 신자다.


 


그런 선생님을 선생님으로 모셨으니까 우리들의 설 자리도 우리가 설 자리는 예수님의 심장의 자리입니다. 소화 테레사 성녀는 그렇게 말씀 했어요. 내가 설 자리는 성 교회의 심장입니다. 그러고는 아마 어느 교파를 생각했었는지 알 수 없어요. 나는 성 교회의 심장이 되겠습니다. 심장 안에는 사랑이 불타고 있습니다. 나는 사랑의 어머니가 되어서 모든 헤매는 양들에게 예수의 피를 그 얻어서 주겠습니다. 그랬지요. 그게 전도한다는 뜻이겠지요. 그러니까 그럼 그런 성녀가 성 교회의 심장이라고 그랬다면 참 이 선생님쯤 되는 신앙관은 성 교회라기 보담도 전 인류를 향한 예수님의 심장으로 사셨다고 그렇게 봐집니다. 땅위에는 아무도 남이 없고 다른 사람이 없고 다른 집이 없고 다른 단체가 없이 모두 내 사람이다. 모두 내 식구다. 모두 하나님의 자녀다. 모두 우리 형제간이다. 그렇게 자기 사랑을 완성하시고 가신 분이다. 그렇게 느껴집니다. 아니 그렇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런 뜻으로 우리들이 설 자리도 모든 사람을 사랑 할 수 있는 마음, 아무도 차별 없이 그 누구든지 봉사 할 수 있는 사랑의 어머니가 사랑의 천사의 자리가 되리라. 바라는 것이 그 점입니다.


 


 구체적으로 말씀하면요. 어떠한 병에 쓰러졌던지 무슨 종교를 믿던지 아니 무슨 교파에 소속되어 있던지 천하를 두루 다니다가 쫓김을 당해 살수 없는 사람이 있다면 여기 와서는 따뜻하게 임종 할 수 있는 곳이다.  여기까지 오신다면 제일 낮은 자리요. 제일 따뜻한 자리요. 제일 겸손한 자리요. 제일 희생적인 자리요. 제일 무아경지 아니 무아의 희생을 해준 선생님의 제자들이니까 누구든지 하우하박 없이 예수님의 사랑으로 감싸주실 그런 간호원들이 모인 곳이다. 그런 하나님의 종들이 모인 곳이다. 우리가 설 자리는 그런 자리에 설 사람들이 이 선생님의 제자로서 여기서 공부하고 있다. 그렇게 알아집니다. 그 일기 이 선생님의 일기를 그냥 곡만 부친 것이 하나있지요. 이 선생님의 일기를 그냥 낱말을 곡을 붙인 말씀이 계명산에 진달래라고 계명산에 이 선생님이 묻혔으니까 그런 그 곡만 부쳤지 실상은 이 선생님의 일기입니다. 이 선생님의 일기를 뜯어보시면 그런 말씀이 깨알같이 쓰여 있어요. 그걸 아시는 분들이 같이 부르십시다.


 


 계명산 속에 피어난 진달래 성결한 덕을 사랑했소.
깨끗이 살도록 가르치신 것은 주를 따르는 길이었소.
마지막 숨이 질 때까지 깨끗이 살라 빌어주었소.
영원한 문이 열릴 때에 오직


 


네, 모든 말이 만 마디 말보다는 한 가지 역사적 사실이 우리 영혼에게 실제 교훈이 되지 않습니까? 실제 피가 되는 것입니다. 이 선생님이 이렇게 이런 때 이렇게 하셨다 그런 증언을 하나 하겠습니다. 사람의 본심은 비상시에 드러나지 않습니까? 죽느냐 사느냐 할 때, 무상시에야 누구든지 사랑 할 수 있지요. 육이오 동란 때 이야기인데요. 눈이 오는 때이니까 그 날도 눈이 오는 때고요. 요새 그 느끼기가 좋겠습니다. 문바위 그 깊은 산속에 막을 치고 광주 쪽으로 오시기 한 15일 전인지요? 20일 전에 눈이 왔었습니다. 물론 막은 쳤지만 눈이 막으로 새어드니까 새어든 눈이 이불속으로 들어오면 털어버리고 그런 막입니다. 그럼 인제 불이라고 때더라도 낮에는 못 때기 때문에 깊은 밤중에 불을 때던지 따뜻한 물을 끓여 먹던지 그런 때입니다. 깊은 밤중에 문도 없이 쌔(풀) 집인데 개가 개구멍으로 가는 거 보셨지요? 캄캄한 밤중에 언제든지 이렇게 인민군이 잡으러 오려는가? 불안한 때니까 사람이 무섭기가 참 무서울 때입니다. 그런데 문이 있지만 밤중에 사람이 얼굴을 부스럭 부스럭 이렇게 머리를 대고 들어옵니다. 막으로, 얼마나 무섭겠습니까? 직접 당해보세요. 이제 아 나 잡으러 온다. 나 잡혔다. 그러지 않겠어요? 숨어있는데 깊은 그 산중에 찾아올 이는 인민군뿐이거든요. 그러니 그 믿음이 없으면 겁이나 죽어버리지 않겠습니까?


 


그래도 가만히 기도하시고 죽은 듯이 가만히 숨을 죽이고 심판을 바라고 있는 거 잡아 가려면 누군지 모르는데 부스럭 부스럭 막을 뜯어 거의 부수면서 뛰어 들어와 갖고는 후후 숨을 쉬고 들어와서 앉는데 그 사람은 같은 인민군 끼리 인제 알고 보니까요. 자기들끼리 의심을 받았어요. 그래 이 사람을 죽이기 위해서 인제 데리고 가는데 인제 살고 싶으니까 옷을 활딱 벗어버렸어. 그리고 도주를 했는데 자기가 여기에 옛날 이 선생님이 이곳에 산다더라. 그걸 한 석 달 전에 알아버렸어요. 그 지방 사람인데 그 지방 유격대지요. 그런데 저희들이 밤중에 물을 끓여 먹었던지 캄캄한 밤중에 그러니까 그 참 몰려드는 겁니다. 저기 한 1키로 밖에 인지 거기까지 들렸어요. 똑똑 소리가요. 그 처량한 밤중에 그러니까 어디가 살아있는지 모르지만 이 골짜기에 사람이 있다 하고 그렇게 찾아온 겁니다. 그 사람도 안심하고 찾아온 겁니다. 거기만 가면 나는 산다. 이 현필 씨라는 분이 이 골짜기에 숨어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 막만 찾으면 내가 살겠다 싶었거든요. 그 분이 이제 거기 오래 있을 수 없으니까 같이 잡히니까 그분도 쫒기는 사람이고 우리도 쫒기는 사람이니까 이제 떠나서 절대 서로 비밀 지키기로 이야기 했지요. 가시기는 가시는데 이 선생님이 누구를 찾아가라고 아무개 아무개를 찾아가면 길이 있어. 선생님이 신 한 켤레 검정 고무신 있었어요. 그걸 양보했습니다.


 


그냥 눈 속에 어떻게 옷 같은 것은 그런 때니까 자기는 옷은 버려버렸지만 다른 옷을 모두 주워 입었지요. 거기까지는 좋지요. 내일 일은 모르는 시대니까 신은 양보해 버렸지만 막상 이제 떠나실 때 광주 쪽으로 그분이 신고 온 신이라는 것이 있기는 있었어요. 짚신인데 날이 다 나버렸습니다 그 끌고 온 것이 있었는데 짚신을 신으려면 날이 빠지기 때문에 인제 그날 밤도 눈이 요새같이 왔어요. 무릎까지 왔어요. 그 산중에서 이제 광주 쪽으로 오자해서 떠나는데 짚신이 허물어져 싸니까 걸레로 또 싸맸습니다. 짚신 위에다가 싸매가지고 이제 다른 이야기는 생략하고요. 내려오셨지요. 문바위로 내려 오셨는데 문바위 그 마을 있는데 오니까 벌써 우르르하니 쏟아져 버려요. 짚신이 그냥 이 날만 남고 그냥 전부 빠져버려. 그러니까 이제 짚신은 벗어버렸지요. 그래 인제 헝겊으로 한 벌 쌌는데 헝겊이 새 헝겊이면 오래같이 딱 되는데 그것이 걸레라놔서 그것도 무너져버려. 걸레가요, 그럼 그 시간부터 그 걸레가 발에가 붙어있기나 하나 한 이삼일 그날 밤새 인제 춘양역까지 내려오게 되지요. 그 남 밤에 등광리로 해서 심실 쪽으로 빠졌다가 다시 천태산에 올라가서 천태산에서 하루 밤을 넘기고 그 이튼 날 오후까지 기다려가지고 인제 다시 밤으로 한천까지 빠지는 밤인데요. 천태산을 오르는데 땅에 발이 뻣뻣해져버린단 말이에요.


 


천태산은 아직 삼분의 일 밖에 안 왔어. 천태산을 올라가야 살게 되었습니다. 왜 천태산에서 보니까 저를 잡으러 전부 유격대로 이렇게 경비를 하고 있어요. 산에서 보니까 그러니까 광주로 빠지는 길이 막혀 버렸어요. 그러니 그러십디다. 그 날 밤에 아무리 가고 싶어도 포기하자고 우리가 갈 길은 문바위로 다시 가는 거다. 그러시더라고요. 그래서 문바위에 가도 굶어죽으니까 할 수없이 광주 쪽으로 오시게 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니까 천태산에 올라가서 이 밤을 새어야 우선 안 들키니까 내일 저녁까지 기다렸다가 광주로 가는 거다. 그 요령을 딱 붙잡으셨지요. 이렇게 길이 험하고 길이 막히면 산꼭대기로 올라가면 사는 것이다. 그 점이 그분의 지혜에요. 지혜지요. 우리 같으면 마을로 가면 살겠어요. 배고프니까 마을로 가면 죽는다. 그 지도자가 없으면 저는 우리는 그 날 밤에 죽지요. 그 바른 지도를 하신 거예요. 그래 천태산에 올라가서 오늘 하루 밤을 자야 하겠는데 천태산 삼분의 일이나 올라가고는 거기 등광리 뒷산이니까요. 발이 이렇게 지금같이 눈이 많이 왔다고요. 눈이 이렇게 무릎까지 왔는데 두 다리가 얼어가지고 그 불능 사용불능이에요. 뻣뻣하니 서버려요.


 


그러니까 그런 때는 말도 서로 못하지요. 오십시오. 말도 못하고 멀찍하니 안 오셔서 가만가만 가봤더니 발이 말을 안 듣는다고, 그러면 이 북풍 떼기니까 조금 열 발만 가면 바위가 있어요. 조금 의지하고 하루 밤을 새야겠는데 저기 바위 있어요. 저기 만큼 가실 수 없을까요? 기도 많이 하시고 조금 기다려 봅시다. 그래 거기 주저앉아가지고 거기 눈에서 한 시간이나 기다려 가지고 조금 발이 피어져서 이제 엉금엉금 이렇게 하고 바위 밑으로 가셨거든요. 그럼 물론 그 날 밤에 산 것도 하나님의 보호하심이고 그런데 마침 이불을 짊어졌기 때문에 이불로 두 사람을 쌓았지요. 이불로 두 사람을 싸버리니까 막 얼었던 눈이 얼음이 녹아내리니까 물이 그냥 바지저고리가 흥건하니 척척해 버려요. 녹으니까, 그래도 두 사람이니까 꽉 두 사람이 싸버리니까 후끈 후끈하지요. 녹아버렸다고, 그러니까 어느 새에 그 그런 이야기해야 쓰겠는가? 모르겠습니다. 고구마 다섯을 얻어왔거든요. 그 등광리에 들어가서, 그러니까 몸이 풀리니까 밥 먹은 지도 벌써 참 오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속은 비어있고 아까 그 감자 있냐고 그래서 예 있어요. 하나씩 먹읍시다. 생고구마 조그마하지만 그것은 만나가 그렇게 맛있으려는지 모르겠어요.


 


그것은 땅위에 있는 음식은 아니겠지요. 참 감보다 더 달고요. 그 천상음식이지요. 천상 음식, 거기 흙이 묻었는지 그건 상관없어요. 그냥 껍질 상관없고요. 그 하나 먹으니까 그건 먹으나마나 그렇지 않습니까? 그럼 또 하나 나눠 먹자고 또 하나 나눠 먹었지요. 하나 있어요. 거기서 참 웃음이 있고 세상말로 유모가 있어요. 나 하나 혼자 먹어도 괜찮아? 그래? 예, 하고 드렸어요. 조그만 해. 개수만 다섯 개지 그러고 기쁨이 충만하지요. 감자먹었으니 오죽 좋겠어요? 이따 죽는 거 아무것도 없어요. 내일 해가 뜨면 문제야. 내일 인제 계획은 새벽에 해가 뜨기 전에 거기 이동해야 됩니다. 바짝 앞에가 마을인데 거기 지키고 있어요. 유격대들이 그냥 올려 보이거든요. 그래 사람 계획에는 훨씬 더 올라가야 되요. 한 이키로는 더 높이 올라가야 숨을 텐데 거기 앉아버렸으니 어떻게 합니까? 그래 요새 같으면 종치는 무렵에 네 시 반이나 일어날 텐데 그런데 보십시오. 원체 굶고 고생하고 돌아다니다놔서 따뜻하니까요. 어머니 품 가슴속 같이 따뜻하니까 한숨 잤는데 내일 열두시가 되어버렸습니다. 해가 중천에 떠버렸어요. 그래 이불을 요렇게 열어보니까 큰일 나 버렸어요. 저 앞에 모두 그 인민군들이 눈 위에 누렇게 서있단 말이야. 막 앞에 그러니 인제 자꾸 총을 놀 거 같이 공포심이 일어났어. 보이니까, 그렇게 멀지 않은 거리야.


 


아주 가깝지 않아도 아득하니 보이는데 눈 위에 군인들이 왔다갔다 다 보여요. 그런데 인제 이불을 풀고 가만히 빠져나가야 올라가야 할 텐데 둘이 눈 속에 기어 올라가면 보일 거 아닌 가요? 북풍 따지니까 그 샘마실 쪽이거든요. 그래서 그러니 늦었지만 어떻게 합니까? 이불을 그대로 다 던져 버렸지요. 매미 허물 벗듯이 싹 던져버리고 몸만, 성경만 둘이 짊어지고 엉금엉금 밤에 풀어졌으니까 올라가시더라고요. 다리는 맨발로 눈 위를 맨발로 걸레는 붙어있어요. 발목에 다행히 아침도 아니고 밤도 아니고 낮이니까 막 해가 떠서 눈이 녹읍디다요. 양지 같아. 천태산 양지 같아. 둘이 앉아서 해가지도록 몸이 물이 질질 흐르던 것이 다 말랐어요. 따뜻하니 다 말랐어. 그 응달에는 적설 눈이 있지만 양달에는 깨끗이 다 녹았어. 그런데 선생님 보십시오. 다시 등광리로, 아참 그 정신은 참 사람의 용기는 그럴 수 없어요. 역시 문바위 다시 가자. 문바위 가면 굶어 죽을 텐데 제가 따라가겠습니까? 젊은 청년이, 그냥 눈물을 뚝뚝 흘리고 눈물을 흘리고 안 흘리고 속으로 울면서 인제 등광리로 가자할까 봐요. 해가질 무렵에는 무작정 막 밑으로 내려가요. 제가 거저 뒤돌아보지도 않고 무작정 밑으로 한 오리나 내빼 버렸어요. 저 밑으로 그러니까 저를 찾느라고 할 수없이 내려오고 또 내려오고 또 내려오고 해서 도곡면 쪽으로 빠지지요.


 


절 있는 골짜기 지금도 뭔 절이 있지요? 은주사라고, 뒤돌아보면 다시 문바위로 가자고 할까봐 그렇게 떼를 쓰고 둥글러 버리니 어쩌겠어? 따라오세요. 그렇게 내려오는데 인제 거기서부터 제가 이야기 하려는 건데요. 거기는 백 미터 거리를 지키고 있어요. 사람들이 지키고 있어요. 유격대들이, 인민군들이 춘양까지 춘양 쪽으로요. 그러니까 그 사람들 사이를 끼어 간다는 건 기적이지요. 비 오는 날 비 안 맞고 간다는 거와 똑같아요. 조금가면 앞에 사람 있으면 엎드려서 숨고 자꾸 이리피하고 저리피하고 그렇게 빠져나가요. 자꾸 지금 생각하면 하나님이 지켜줬지. 늘 붙잡혀요. 늘 그러니까 선생님은 지혜가 있는 분입니다. 물로 그냥 들어가 버려, 냇물로 냇가 새로 냇가 새로 가시니까 선생님은 몇 번 그분들 안 만났는데 저는 청년이니까 맹이야. 맹목적으로 혈기가 많으니까 발 안 시럽고 좋은 길로 갈라고 신작로로 가니까 자꾸 사람을 만난다고, 자꾸 나타나. 그렇게 됩디다요. 그런데 인제 물가에 둘이 만나가지고 냇가에 선생님 가신 길로 인제 제가 귀화했지요. 제가 지고 선생님 뒤따라 가보니까 참 선생님 가시는 길은 참 탄탄대로여. 아무 거리낌이 없어요. 사람이 안다니는 물가 세니까 사람을 만나지가 않습디다요.


 


 그런데서 선생님의 그 높은 지혜가 인간적인 지혜인지 모르지만 참 영적인 지혜지요. 선생님을 처음부터 뒤따랐으면 그렇게 사람을 안 만났을 텐데 길로 갈라다가 저는 많이 만났거든요. 그래 서로 피차간에 구사일행 만났는데 거기서 부터는 인제 선생님 뒤따라오셔서 뒤따라가 보니까 그렇게 발이 얼어버렸어. 가야할 길은 많은데 발은 얼었으니까 이렇게 한 걸음, 한걸음 쫒아 오시는 것 같지만 아무리 쫒아 올라 해도 이렇게 띄엄, 띄엄 꼭 황새 거름처럼 그렇게 젊은 사람 걸음으로는 한 시간이면 될 것을 댓 시간이나 걸렸지요. 물가를 빠져나오는데 한천 쪽으로요. 그 물 따라 나오니까 동뜰 때가 나옵디다요. 그 물로 건너니까 한천으로 건너갔습니다. 아침 미명에 훤할 무렵에 들어갔지요. 그러니까 그 물속에서 맨발 벗고 발이 얼었는데 포기를 안 해. 생명을 다해서 걸었는데 전 힘을 다해서 걸었는데 아무 거기에는 공포심도 없고 누구를 원망하는 것도 없고 누구를 미워하는 것도 없고 참 무아경지에요. 무아경지, 그 마음자리 참 완전한 자유라 할까 이 선생님의 자유 평화 기쁨 또 축복 찬송 그것뿐이에요. 그러면 우리가 그 경지를 들어가려면 한 백년 살아야 들어갈 수 있을까요?


 


그렇게 은혜 받은 분의 가슴을 어떻게 들어갑니까? 그러면 한 일주일 전에 한 며칠 전에 한 삼일 전엔가 그 신만 양보 안했으면 걸어오실 길이에요. 척 척척 걸어오실 길이에요. 고무신만 양보 안했으면요. 쉽게 걸어올 길이거든요. 그 고무신을 그 불안에 떨고 있는 형제한테 양보했음으로 대신 맨발벗고 걸어가는 길은 참 한 걸음 한걸음 참 피맺힌 길 아닙니까? 참 희생의 길이야. 희생의길 무아 어느 수녀님 말씀같이 다시 말하면 무아의 희생 내가 이 고무신 신어야겠다. 내가 신어야지 그런 것 없어요. 그때 당하면 무조건 자기는 양보해 버려요. 그 생활이 전체적인 것 아닙니까? 하루하루 여기 오셔서 평생 그렇게 사신 거예요. 사람이 하루에 아침저녁 굶으시고 밤 잡수시는데 얼마나 배가 고프고 밥이 먹고 싶겠어요? 그러나 누가 면회 오시면 딱 밥 덮어버리고 다 이야기 하지요. 흔연하게 꼭 면회 온 사람이야. 뭐 구속합니까? 종일 굶으시고 진지 잡수시는 속을 누가 알겠어요? 그러나 그 사람의 문제가 너무 심각하면 걱정만 하지. 저녁에 밥 안 잡수세요. 굶어, 굶는 것이 아닙니다. 밥 먹을 시간이 있어야지. 그 사람이 안가고 이야기 하는데 우리 같으면 불평하지 않겠어요?


 


나 밥 안 먹었다고 어서 가라고 그런 생각 그런 말 아니 그런 마음도 없어요. 어떻게 하면 이 사람을 위로해 줄까? 그 몰두만하고 계시지 자기가 그날 밥 안 먹은 것도 망각하고 계시다고 그런 마음을 갖으신 분이지요. 그러니 그 심장이 예수심장으로 불타고 있어요. 예수님은 한번만 십자가에 죽으셨지만 그런 분은 시시각각으로 어떠한 의미에서 순교지요. 자기 포기라는 말씀입니다. 자기희생, 그래서 아 그 선생님의 일생은 무아의 희생이었다고 그 말은 얼른 말해서도 바로 본 것 같아요. 아 그분 무아의 삶을 사셨군요. 쪼금만 이야기 들어봐도 아 그 분은 나 자기가 없이 희생하셨다고 무아의 희생을 하셨다고 그렇게 말씀한 말이 옳지 않냐? 그렇게 생각하고 여러분은 눈으로 안 봤으니까 몰라요. 오늘밤에도 제가 말하면서도 보여요. 그 물가에 그 강가에서 맨발을 벗으신 분이 엉금엉금 뒤에서 쫒아 오는데 곧 오면 잡힐 텐데 태연 태연도 아니지 발이 그것 밖에 움직이지를 못해. 항 정진, 정진 정렬한다 할까? 꾸준히 걸어간다고 그 힘을 다해서 다리를 옮겨가지고 앞으로 전진을 해. 꾸준한 전진이지요. 참 용기 또 희생 희망 사랑 믿음 전부 거기에 함축되어서 나타난다고, 그 발걸음에요. 또 참 예수님의 사랑, 그래 사람을 만나서 봉사 한다는 생각 보다는 혼자 있을 때 혼자 걸음을 걸을 때에도 생명을 다해서 필사적으로 하나님께 봉사하는 거예요. 그렇게 왔으니 그 날 밤에 마음이 약하면 모두 잡혀 죽지요. 내 생명 내 생명 하지도 않고 내 생명은 예수님의 생명이다. 제일로 그 분이 걱정했던 것은 가다가 잡히면 내가 죽는 것은 아무 그 아까운 것이 없다 그런데 나를 죽인 사람들을 어떻게 할까  나를 죽인 다음에 그 사람들의 영혼은 어떻게 될까 그것만 걱정 하셨어요. 그날도 내가 오늘 가다.(끊김)


 


그러니까 어느 날 그러십디다. 산속에서 굶고 있을 때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죽음은 아사라고 굶어 죽는 것이라고 왜 타인에게 아무 거리낌을 주지 않는다고 맞아 죽던지 박해로 죽으면 죽인 사람이 불행하지 않냐? 그러니까 곰곰이 생각해 보니까 우리 요새 굶는데 굶어서 죽는다면 얼마나 행복하냐? 젊은 사람은 반항이나 하지요. 안 죽고 싶으니까 어서 가서 밥  먹고 싶은데 선생님은 그것이 아니야. 더 굶을 수만 있다면 하나님께서 더 굶을 기회만 준다면 굶어 죽으면 우리는 얼마나 행복한가. 아무도 누구한테 해롭게 하지 않고 가장 행복한 죽음이라고, 그러나 배가 부르면 여러 가지 시험이 오니까 배부른 것 보다 얼마나 좋은가? 자꾸 그렇게 말씀해싸요. 오늘도 우리가 배가 부르면 다른 생각 할 텐데 오늘도 종일 배가 고프니까, 배고프다. 그 시험뿐이라고 이 배고픈 시험이 얼마나 행복한가? 그러셔요. 나는 배고프기 때문에 오늘 아무 잡념 없었어, 배고프다. 그 생각뿐이었다고 그러셔요. 배고프다. 라는 이 시험 당하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 시험인가 아니 얼마나 축복받은 시험인가? 그래서 배고픈 이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름을 받을 것이라.


 


 어찌되었든지 하루하루 사시면 이 사람들과 살면서 희생한다는 희생 보다는 홀로 있으면서 자기 생명에 충성 하신 분, 배가고프거나 병들거나 자기 자신에 대해서 그렇게 행복해요. 아무 병이나 아픔이나 배고픔이나 아무 그 마음을 흔들 수가 없어. 너무 행복해 하시니까 병에 대해서도 너무 병에 대해서 감사했다. 사람이 병들어 죽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가? 사람이 병이 들었기 때문에 얼마나 하나님을 사모하며 예수님을 그리워하는가? 사람이 병들었기 때문에 얼마나 사람의 사정을 알게 되는가? 배고픈 사람의 사정 병들어 아픈 사람의 사정 얼마나 알게 되는가? 내가 병 안 들어 죽었다면 인생의 반도 못 알고 죽었겠다. 그랬어요. 내가 병들었으므로 주님께서 인생의 반쪽을 보충해 주셨다. 나는 반쪽을 하마터면 손해보고 죽을 뻔 했는데 이렇게 아프게 하심으로 나는 인생의 반쪽을 다시 주셨습니다. 내가 병 없이 죽었으면 속없이 죽었을 텐데  병이 들었으므로 속이 들었습니다. 이 축복받은 병이여 그러니까 그분이 배고프면 배고픔이 축복이 되어버리고요.


 


 오, 축복받은 이 배고픔이여 또 그분이 병이 들면 오 축복받은 병이여, 그러니까 아무것도 해칠 수가 없어요. 배고프나 병이 들거나 그 선생님은 해로운 것이 없어요. 피해 아무 피해를 받지 않아. 오히려 배고프기 때문에 모든 인류의 서러움을 이해하게 되고 병들었기 때문에 모든 병든 인류의 그 슬픔을 그 같이 같이 슬퍼하시고 감사했습니다. 그런 점, 그런 점이 무아적인 희생이라는 말이야. 내 몸둥이라는 생각이 전혀 없었어요. 이 몸은 이미 주님께 바친 몸 이 몸은 주님의 것입니다. 병이 들던지 아프던지 배고프던지 주님이 원하셔서 하신 것이니 찬송할 따름입니다. 감사합니다. 더 주십시오. 제가 복이 있다면 굶어죽게 해 주십시오. 만일 이 복을 빼앗아 가신다면 저는 괴롭습니다. 그렇게 배고픈 것을 감격하시고 찬송하시고 지지하시고 자원하시고 그렇게 원했지만 그 시간에는 다시 광주 나오셨지요. 그래 밥을 잡수셨지요. 아프신 때도 그랬다는 말씀 입니다. 병이 나을까봐 오히려 병 자체가 자기 영혼을 이렇게 그 성화시키는 천사인데 이 병 때문에 나는 얼마나 예수님을 닮게 되었는가? 얼마나 예수님의 깊은 사랑을 깨달았는가? 그래서 고마워라. 내 자매 형제여 행여 라도 내 병이 나를 떠나면 나는 섭섭하다. 그렇게 일기에 써놓지 않았어요? 그건 어떠한 시가 아니라 자기 본심이라는 말씀입니다. 본심,


 


그 인생의 모든 그 모든 인생이 앓는 병을 앓으시고 모든 인생이 그 굶주리는 배고픔을 대신 받으심으로 모든 사람에게 배부르게 하시고 모든 사람에게 병을 낫게 하셨다는 이사야 53장의 예수님의 심장으로 사셨다고 예수님의 마음씨고 이 세상을 사셨다고 그러므로 그 선생님을 잘 배우는 것은 예수님을 잘 가르쳐 주기 때문에 우리 선생님이라고 그랬다고 말씀했습니다. 그분은 당을 싫어하시고 파를 싫어하시고 나만 어찌 기독교인이냐고 기독교를 싫어하시고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로서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앞에 귀화해서 죄를 회개 받고 구원받게 전도하시던 하나님의 전도사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전도사였어요. 예수님의 심부름꾼 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선생님의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은 어느 교파에 예속 되었든지 감격하고 예, 감사합니다. 그러지, 남이라 보지 않는다는 말이야. 남의 식구다. 그렇게 생각을 하지 않아요. 심지어 예수 안 믿는 사람도 남이라고 보지 않아요. 우리 선생님, 또 나를 생명으로 인도하신 분이다. 그렇게 보지요. 그런 점이 참 무아의 희생을 하신 분이다. 이름도 성도 아무근거도 없이 예수님의 심장을 대단히 잘 나타내신 분이었다. 그렇게 생각이 듭니다.


 


또 그렇게 압니다. 그런 뜻으로 오늘 밤에 우리가 선생님이 여러분 다 믿겠지요? 어디가 있던지 자기 가르침을 위해서는 선생을 만날 수 있어요. 많은 선생을 만나서 배웠지요. 그러나  아버지는 하나뿐이시다. 아버지는 하나뿐이지요. 누구든지, 선생님은 일만이 있을 수 있지만 아버지는 하나 고린도 교인들이 많은 전도사 목사가 와서 가르쳤지만 이 신자들을 하나님 앞에 인도하신 분은 바울 선생님 자신이었다. 그 말씀인데요. 우리들의 선생님은 일만이 있을 수 있지만 우리 영혼을 예수님 앞으로 지도하신 분은 이 선생님 이었다. 그 점입니다. 이 모임은 역시 그렇게 성스러운 아버지를 스승으로 모신 제자들의 모임 인 것은 사실입니다. 이 분위기가 말씀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배우시고 여기서 믿음을 가진 분들은 어디 가서든지 어디 가서든지 나다 그것이 없고 우리다 그것이 없고 우리 패다 그것이 없고 우리 당이다 그것이 없단 말씀이에요. 왜 그 가르치기를 그렇게 가르친 사람들이니까? 그러므로 그 분들이 유언 한 것은 나 때문에 내 말을 오해해 가지고 우리를 내세우고 나를 내세우고 우리 패를 내세운다면 안 되겠다. 그래서 유언 하신 것이지요. 내가 죽은 다음에 내 말이라고 말을 말아다오. 내가 해온 것은 다 수치 뿐이다.


 


 죄인이라는 수치뿐이고 선 것은 예수님의 피, 예수님의 자비 예수님의 구원뿐이니까 예수님의 말로 전해다고 그렇게 선생님들은 유언하고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면 이 제자들도 어디 땅 끝까지 가서 봉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더라도 그 사랑 그 자비 그 피 그 눈물 그 순수한 예수님의 사랑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교훈을 이렇게 받으신 분들은 세계일치, 참 교파일치, 또 인류일치를 위해서 심부름 할 수 있는 그런 가르침을 받으신 분들이다. 그렇게 여겨집니다. 만일 그렇게 못되었다면 선생님을 잘 못 배운 것이지요. 잘 못 배웠다는 것입니다. 오해한 것이지요. 그런데 끝으로 한 말씀 더 드리겠어요. 제 나름 대로요. 임종하실 때 기쁘시다 고 노래 부르셨다고 그랬지요? 임종 하실 때 ‘아 기쁘다. 아 기쁘다.’하고 그냥 그 찬송을 부르시면서 임종을 했다. 그런 이야기 안 들으셨어요. 그런데 여기 제가 오기 전에 한 삼일 전에 그때 임종 하루 전에 보신 자매님 말을 들었어요. 임종 하루 전에 뵈었는데 얼굴이 광채 나기가 참 모세가 광채 나 듯이요. 참 말은 못했지만 참 그냥 어떻게 얼굴이 광채가 나 던지요? 그 말씀할 때 환 하시더라. 그래요. 물론 의학적으로는 열이 오른 지도 몰라요.


 


그 몸이 열이 났는가 모르지만 그 말씀할 때 태연하신데 얼굴이 그냥 환히 꽃이 핀 것같이 그렇게 해가지고는 훤하니 빛이 나시더라고 그런데 뭐라고 하시냐? 기쁘다고 그러시더라고, ‘아 기쁘다’말씀 안 해도 얼굴이 기뻐하시고 말씀할 때 기뻐하셨다고, 그런데 그 이튼 날 임종하실 때 한 십분 전 까지도 ‘아 기쁘다. 아 기쁘다.’이거 전라도 사투리로 ‘오매 못 참겠네. 아이고, 기쁘네. 기뻐,  아이고, 너무 기뻐 못 참겠네. 오매.’그렇게 기뻐서 그냥 가슴이 터질라고 하시니까 얼굴이 환하니 진땀이 나시고 땀이 나는데 기쁘다고 그러면 대개 듣는 분들이 그러거든요. 그 기쁨이 무슨 기쁨이냐? 하늘나라 가서 알겠지요? 그런데 이렇게 풀었습니다. 자기가 그저 참 이 믿음가운데 여러 가지 덕이 있지만 정절의 덕을 사모하신 분 아닙니까? 그분도 결혼 했지만 그래서 이 정절을 지킨 것이 이렇게 행복하다. 그래서 서울 네거리 가서 이 정절 지키라고 전도하고 싶다. 그래서 기뻐했는가? 그렇게 해석이 왔어요. 그렇게 해석해 왔는데 요새 한 삼일 전에 그 증거를 듣고 제 나름대로 아주 새로운 아, 역시 그 기쁨이다. 그렇게 저로서 감사 했습니다. 그래서 말씀을 드리고 싶은데요.


 


 참 절대 무아의 희열이다. 거기는 남자도 없고 여자도 없고 정절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 거야. 그 임종 직전에는 그 예수사랑에 그냥 아주 반한 사람이야. 반했어. 뭐 죽니 사니 나니 사니 죽니 배고프니 땅위에서 나는 배부르니 기쁘다. 나는 죽은 사람 만나서 기쁘다. 가사 나는 정절 지키니 기쁘다. 그건 아니다. 그렇지만 이건 생과 사를 초탈했어. 초월 해가지고 몸은 아직 땅위에 있지만 마음은 생각은 영이란 말이야. 영, 영화 되었단 말이야. 해방 성령의 기쁨 성령의 열매는 사랑 평화 기쁨 자유 평화 희열 성령의 은총의 기쁨이다. 그래서 아 그것은 은총을 받은 기쁨이다. 그렇게 파악됩니다. 정절을 지키니 기쁘다. 그건 상대적이에요. 육신의 이야기에요. 나는 죽은 사람을 만나서 기쁘다. 그건 육신에 있을 때 기쁨이거든. 그거는 사람의 몸에서 나는 기쁨이 아니에요. 사람의 결심이나 수도나 뭔 계명을 지켜서 오는 기쁨은 평소에 있는 것이고 그 기쁨은 은총의 기쁨 이었다. 그 사람은 할 수 없는 기쁨이야. 사람으로서는 믿을 수 없는 기쁨이라는 것입니다. 초자연에 예속된 기쁨이야. 아니 그냥 몸 열이 42도 4도 올라가지고 숨이 턱턱 끊어지는 불이 나는데 몸에서, 거기에 무슨 기쁨이 있겠습니까? 고통뿐이지 몸이 막 터지려고 하는데 아파서 거기서 그렇게 기쁘다고 황홀해서 하는 말이 오매 못 참겠네. 기쁘다. 라는 그 경지는 그 육에 속한 기쁨이 그건 성령 은총 이었다. 초자연의 속한 기쁨 이었다. 은총에 속한 기쁨 이었다.


 


그럼 평소에 그렇게 생명을 바쳐서 그렇게 몸을 자기부정을 하고 살았기 때문에 상으로 하나님께서 죽기 전에 영원한 그 기쁨을 땅위에서 맛보게 하셨다. 그렇게 파악되어요. 프란치스코 말년을 보나 같아요. 그렇다면 그 기쁨 내용이 달라짐에 따라서 우리 원의 선생님이 되어버리는 거예요. 정절을 잘 지키는 우리 선생이다. 그러면 당이 되어 버려요. 그러나 그 기쁨을 확실히 국경을 초월하고 단체를 초월하고 교파를 초월하고 인생을 초월해서 천상적인 기쁨 이었다고 우리가 받아들인다면 제자들도 모두 우리 없어지고요. 당이 없어지고 편협이 없어지고 그런 그 참 무아의 희생, 참 자비의 희생 참 그리스도의 사랑 때문에 인류에 봉사할 수 있겠다. 그 기쁨은 우리 것이 아니라 인류의 것이다. 천군천사의 것이다. 삼위 하나님의 것이다. 전 인류를 그 전 인류가 우리 선생님 이라고 바라볼 수 있는 그런 상대를 초월한 기쁨을 기뻐하신 분이시다. 그렇게 받아 집니다. 확실히 그렇습니다. 그 점입니다. 그럼 한 3일 전까지는 육신을 가졌기 때문에 상대적인 기쁨을 가졌는가 알 수 없어요. 그러나  돌아가시기 전 한 이틀만은 그 자기의 평소의 신앙을 주춧돌로 해서 완전히 그 상승의 기쁨 이지요. 영원한 기쁨 이지요. 영원한 사랑 이지요. 영원한 황홀 이지요. 영혼을 초월한 대 우주적인 희열 이었다. 기쁨 이었다. 모든 인류가 다 위로 받을 수 있는 그런 울타리를 초월한 기쁨 이었다. 그렇게 받아들여져요. 해석을 아니 해석이 아니에요. 그렇게 믿어질 수가 없어요. 그 인물 됨됨이가 말씀입니다. 그래서 이 선생님은 우리 식구들의 선생님이 아니고 모든  인류의 스승이 되셔서 세상을 떠나주셨다. 말로 그렇게 하는 말이 아니고 그분 됨됨이, 그분의 인격이 그분의 신앙이 그분의 완벽이 그분의 사랑이 완전에 예속된 분이시다. 완성을 하신 분이시다. 그렇게 믿습니다. 그 이 선생님의 노래하나 있지요? 부르십시다.


 


 추도가


 저 서산에 해동산위에 달떠오니 우리주님 따라가신 스승생각 새로워라.
 그 물속에 비친 저 달 내 마음과 흡사하네.
 백합 같은 그 순정을 그리스도에게로만 십여 년을 하루같이 말씀하신 그 비밀은
 그 피 속에 스며들어 귓전에 사무치네.
 샛별 같은 네 동정을 주님께만 바치라고 그 피땀이 다 진하고 그 숨결이 다하도록
 못 잊어서 다시 말씀하시었네.
 네 정절을 주께 봉헌 하겠느냐 물으실 때 예 말하고 대답하니 다시 말씀 하시기를
 너 지극히 작은이를 섬기라고 하시었네.
 그 귀향이 다 풀리고 주님 앞에 가시던 날 감격함을 못 이기고 오, 기뻐라. 오, 기뻐라.
 말하시던 그 음성이 지금 같이 들려오네.
 십자가에 달리셔서 목마르다 하시던 임 그 사랑이 목이 말라 부르짖던 그 음성이
 가시던 임 연상하면 또 다시만 들려오네.
 그 순결과 가난함과 그 순명의 복음삼덕 우리주님 앞서시고 저의 스승 따르시니
 그 사랑에 의지하고 저희들도 따릅니다.





    주님 마음(동광원 영성)
산의 여우 굴이 있고 나는 새도 집 있건만 우리주님 세상 와서 집 한 칸을 못가지고 아픈 다리 끌으시며 이리저리 다니시네. 고대광실 화려한 궁 우리 주님 원치 않고 죄인들의 마음속에 성전 꾸며 살기 위해 문 밖에서 두드리며 애처롭게 부르시네.
엄동설한 추운 밤에 내 맘 문간 찾아와서 밤새도록 두드리니 그 머리에 서리 앉아 검은 머리 희게 되고 손에서는 피 흐르네. 불원천리 너를 찾아 몇 번이나 왔건만은 사랑하는 나의 벗아 모진 잠이 그리 들어 내 소리를 못 듣고서 잠꼬대만 하고 있나. 사랑하는 나의 주님 용서하여 주옵소서. 인비목석 인비목석 주님 마음 몰라주고 무정하게 굴었으니 죽을죄를 지었어요.
- 저의 마음 추하오니 주님 피로 닦으시고 성신 불로 소청하사 성전 꾸며 살으시고 불초한 종 수종들어 주님 섬기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