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일

백중과 처서 사이 : 지지리와 독배 답사기

mamuli0 2024. 8. 20. 10:57

 제9호 태풍 종다리가 올라온다고 한다. 월동무 농사 준비를 하고 있다. 포장 주변 풀베기 추가 로터리 퇴비 준비등 일이 많다. 저녁 마다 창으로 보름달을 바라본다.

 장수 지지리와 전주 독배 진달네집 답사를 올린다.

 

장수 지지리, 전주 진달네집 답사보고서

 

정리 : 이영우

 

답 사 단 : 김용숙 수녀님, 김마리아수녀님, 김종북 장로님, 이영우

답사지역 : 장수 지지리, 전주 진달네집

이 동 : 김종북 장로님이 자신의 차를 손수 운전하심

일 정 : 2014년 6월 17일 07:00~16:00

07:00 무등산 예수의소화수녀회 출발

09:20 장수 지지리 도착(바위목 피정의집)

10:35 지지리 출발

11:20 전주 독배마을 진달네집 도착

11:40 전주 진달네집 도착

13:10 진달네집 출발

13:30 금산사 주변 식당에서 중식

15:30 예수의소화수녀회 도착

16:00 정리말씀 청취 후 일정 종료

 

 

지지리 가는 길의 대화

 

★ 주로, 김종북 장로님이 묻고 김용숙 수녀님이 회상하신 말씀을 정리함

 

무등자활원

1966년 8월 18일, 김준호 선생님을 대표자로 하여 사단법인 무등자활원을 등록(제14호)하였다.

김준호 선생님께서 무등산 일대에서 제자들과 함께 결핵환자를 돌보시던 중, 1967년 무등산에 제4수원지가 생기면서 상수원 보호 필요성이 대두되었고, 1972년 5월 무등산 일대가 도립공원이 되면서, 결핵환자 요양소들이 모두 철거됨으로서 새로운 거처를 찾아야만 했다.

무등산에서 김준호 선생님과 제자들이 돌보던 결핵환자는 무등원에 70~80여명이었고, 개원사와 다른 곳을 합하면 100여명에 이르렀다. 그런데 무등산의 모든 요양소가 철거되어버렸다. 지원도 중단되었다. 그동안 큰 도움을 주시던 제중병원의 고허번 원장이 과장으로 강등되면서 도움을 주실 수 없게 되어버렸고, 1970년부터 기독교세계봉사회의 식량 지원도 끊어졌다.

환자들 중 연고가 있는 이들은 돌려보냈지만, 남은 이들이 70여명이었다. 이들이 세 곳으로 옮겨 살게 되었다. 남반은 소망실(지금의 봉선동 소화자매원 자리)로, 중환자들은 골매(지금의 지원동 부근)로, 병증이 가벼운 환자들은 좁은동(현‘겨자씨교회’식당 부지-귀일원 소유)으로.

그동안 도움을 주던 손길이 끊어져서 자립을 모색해야만 했다. 그렇지만 자립 모색은 쉽지 않아서, 그 어려움이 말로 다 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

그러는 와중에 무등자활원 원장이 Y장로라는 분으로 바뀌면서 어려움이 가중되었다. 그분은 고허번 원장의 신임을 받아 제중병원 원목대행도 하셨던 분인데, 선생님과 의논 한마디 없이 스스로 원장이 되었다. Y장로는 원장이 된 이후 가족들이 먹고사는 문제 등 책임질 일은 하지 않고, 땅문서 등 권리 행사에만 관심이 있었다.

또 다른 어려움이 돌출하였다. 총무가 땅을 내놓으라며 집요하게 선생님을 물고 늘어진 것이다. 당시 총무를 맡아하던 사람이 ‘나도 그동안 무보수로 일을 했으니 골매, 좁은동, 소망실 중 한 곳을 달라’고 선생님께 요구하였다. 땅을 주지 않으면 선생님을 고발하겠다고 협박했다. 당시 구호물자를 더 받기 위해 사람 숫자를 부풀린 일이 있었는데, 그 일을 총무가 했었다. 이를 구실로 협박을 한 것이다. 달라는 사람에게 원하는 것을 주어버릴 수도 있는 일이겠지만, 원장은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절대로 안 된다’며 반대했다. 물론 땅은 공동체 가족들의 삶의 터전이니 줄 수도 없는 일이었다.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는 답답한 상황에서 선생님은 머리가 터질 것 같고 온 몸이 불이 나서 병이 나셨다. 그러던 어느 날 선생님이 총무에게 170만원을 주겠다고 약속하고 친필로 써 주었다.

그 총무는 심장병을 앓던 이로 세상에서는 어떤 일도 하기 힘든 이였다. 어려워서 공동체에 들어온 이였고, 배운 사람이라 하여 총무를 맡기에 이르렀던 것인데, 공동체 모르게 여자를 만나 살림을 차리면서 돈이 필요했고, 그동안에는 돈을 달라고 하면 선생님이 천자 어머니에게 말씀을 하여 총무에게 지급해주곤 했었다.

당시 무등자활원 빚이 3백만 원에 이르렀다. 총무에게 주기로 한 170만원에, 매달 생활비 부족액(월 2십만 원씩) 쌓인 것을 합하니 그리되었다.

무등자활원에 위기가 겹겹으로 몰아닥친 것이다. 가족들이 나날이 살아가기도 힘든데, 빚은 쌓이고, 문제 해결에 앞장서야 할 양원장은 무등자활원 소유 토지에만 집착하였다.

동광원의 정인세 원장에게 좁은동, 골매, 소망실을 300만원에 인수해달라고 말씀드렸다. 처음에는 긍정적이었지만, 내부 논의 결과 결렬되었다. 땅과 환자들만 남고 건강하고 젊은 일꾼들이 나가버리면 짐만 되리라는 것이었다. 동광원과 무등원이 하나가 될 수 있는 기회였지만 그렇게 되었다.

겹겹이 쌓인 문제들을 해결할 방안을 다각도로 모색해야만 했다.

1977년 5월 위기극복을 위해 이사회가 조직되었다. 천자 어머니가 여학교 은사이신 조아라 여사를 찾아가서 이사장으로 모셨고, 임종례 등 어머니의 친지들을 이사로 위촉하였다. 이사회가 열렸다. 조아라 이사장은 ‘대책도 없으면서 뭐하려고 돈을 준다고 각서를 써주었느냐’등의 말씀을 하시며 선생님을 야단치셨다.

총무가 그동안 개인적으로 인출해간 기록을 검토하여, 170만원에서 제하고 나니 60만원이었다. 천자 어머니가 못 먹더라도 그 돈을 갚겠다고 조아라 이사장에게 말씀드리니 ‘너희가 무슨 돈이 있고 능력이 있다고 갚겠다고 하느냐’하고 야단을 치셨다. 그래서 이사회 승인을 받고자 궁리를 한 후 양원장과 가족들이 반반씩 갚겠다고 이사회에서 말을 맞추고 실제로는 가족들이 다 해결하겠다고 양원장을 설득하여, 이사회의 승인을 받았다.

원장에게 찾아가 빚을 갚으려면 담보를 맞기고 대출을 해야 한다고 설득하여 땅문서를 받아왔다. 이후 방림신협에서 60만원을 대출하여 총무에게 지급함으로서 총무와의 관계는 마무리되었다. 대출금 60만원의 원리금 상환은 가족들이 염소, 돼지 등을 키워서 마무리했다.

300만원의 빚 중 나머지는 후원음악회, 마늘장사, 이사님들의 도움 등으로 해결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천자 어머니가 친구인 임종례 이사와 상의하여 여러 방식으로 수습해가셨다. 그러는 과정에서 빚을 일단 임종례 이사님이 전부 해결하고, 그 대신 좁은동, 골매, 소망실의 모든 땅문서가 임종례 이사에게 넘어가기도 했다. 빚 상환을 모두 마치자 땅문서가 돌아왔다. 임종례 이사님이 천자 어머니를 도와 많은 역할을 해주신 것이다. 그러한 모습을 보시고 선생님이 소화자매원(무등자활원의 후신) 초대 원장을 임종례 이사로 하라고 말씀하시고, 천자 어머니도 그리하라고 하셨으나, 임종례 이사가 사양하여 천자어머니가 초대원장이 되셨다(1977년 5월 6일).

 

좁은동 시절

자립 모색은 굉장히 어려웠다. 도움의 손길은 끊어졌는데, 사람들은 굶더라도 같이 있겠다고 하였다. 다행히 거처는 ‘한미재단’에서 지어주었다(그 사진이 현재 소화자매원 기념관에 있음).

그 시절 김용숙 수녀는 누가 오라고 하지 않았지만, ‘제 마음이 절실히 그리하고 싶어서 좁은동으로 갔다’. 한 번도 해본 일은 아니었지만 김 선생님이 시켜서, 염소 관리를 맡았다. 좁은동 살림도 거의 다 맡게 되었다. 당시 좁은동 살림의 책임자는 천자 어머니이셨는데, 김 선생님의 건강이 악화되자 수종에 전념하시게 되면서, 염소 관리에 이어 좁은동의 살림도 모두 김용숙 수녀의 몫이 되었던 것이다.

새벽 3시에 일어나 김권사님과 둘이서 젖을 짜면 4시가 되었다. 한사람(A자매들)은 우유병을 중탕 소독하여 어젯밤에 짜놓은 양유를 1홉씩 병에 담아 50병을 자전거로 배달 보냈다. 새벽에 짠 양유도 병을 소독해서 담아 5시에 초등학교 소녀, 소년들에게 10병, 15병, 20병씩 지고 가서 집집마다 배달하게 했다. 우유장사를 한 것이다. 1병에 120원에 팔았다.

염소 먹이로 두부공장에서 비지를 사서 먹이고, 소망실 부근까지 가서 풀을 베어 먹였다.

어느 날 젖소 1마리를 어떤 신부님께서 사주셨는데 젖소가 새끼를 한 마리 낳기도 하였다. 그 무렵 김용숙 수녀는 장수로 가게 되었고, 다른 사람이 그 일을 맡았는데, 나중에 김용숙 수녀가 와서 보니 젖소는 팔아버리고 없었다.

소망실의 남반(최창익 선생 등)은 제중병원에서 구정물을 받아다가 돼지를 길렀다. 돼지 사육은 돈이 되어 무등자활원 살림의 한 축을 감당하였다. 나중에는 빚을 얻어 돼지우리를 크게 짓고 마릿수도 늘리고 하였는데, 덩달아 돼지 값이 폭락하면서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다.

어쨌든, 당시 살림의 근간은 좁은동의 염소와 소망실의 돼지 사육이었다. 외부 지원도 더러 있었다. 극빈자용 밀가루가 들어오면 보리쌀로 바꿔 먹고, 골매 환자들이 불쌍하다고 쌀 한 가마 가져다주시면 역시 보리쌀로 바꿔 먹었다. 그렇게 살았다.

좁은동 시절, 장수 지지리에 새 터를 잡아 집을 짓고 강원도에서 거점을 모색하는 등 또 다른 활로를 모색했지만, 그 부분의 살림은 좁은동과 별개였다. 선생님 뒷바라지도 광주에 계시지 않으셨기에 역시 좁은동과 별개였다.

좁은동은 나중에 빚을 갚기 위해 팔았다. 남은 돈으로 장성 땅을 샀다.

 

천자 어머니

천자 어머니는 은자 어머니의 동생이며 4남매의 어머니였다. 1958년경부터 언니인 김은자 마리아에게서 동광원 이현필 선생을 소개받은 후 이현필 선생의 말씀과 위력에 감화를 받아 동광원을 자주 찾았다. 이현필 선생이 선종(1964년 3월 18일)한 후 김준호 선생을 정신적 지도자로 모시고 살았다. 무등산에서부터 김준호 선생 모시고 많은 일을 하셨다. 사회에서 고등학교까지 다니셨고 다재다능하신 분이셨다.

혈압, 간디스토마 등 여러 지병으로 건강이 매우 나빴다. 그렇지만 그 몸으로도 김 선생님 수종을 다 들었다. 그러면서도 거의 내색을 하지 않아서 선생님도 천자어머니의 지병이 그렇게 심한지 모르셨다고 한다.

천자 어머니는 선생님이 원하시는 일이라면 어떻게 해서라도 성사시켰고, 선생님이 위독해지시자 늘 곁에서 병구완을 하셨다. 어지간한 일은 선생님이 말씀하시면 그날 중으로 다 끝내셨다. ‘내가 내일 일어나지 못할 지도 모르니 오늘 다 하자’하고 그날그날 최선을 다하셨다고 한다.

1978년, 무등산 수녀원 건물이 사이비종교시설이라고 지목을 받아 철거명령이 떨어졌다. 이를 해결하고자 백방으로 돌아다니시던 어느 날 뇌졸증으로 쓰러지셨고, 좁은동에서 돌아가셨다. 1979년 3월 19일이었다.

천자어머니는 천주교 묘역에 묻혔다가 진달네집 묘소에 안장되었다.

 

※ 『수련의 고백』 천자 어머니가 함평에서 김 선생님 수종들면서 선생님의 말씀과 느낌을 기록한 것을 펴낸 책

 

지지리 터 잡기

좁은동을 중심으로 하는 무등자활원의 자립모색도 쉽지 않은데, 내부의 여러 문제가 겹쳐서 매우 어려운 상황에 처했다. 그러한 어려움을 해결해나가는 과정에서 김 선생님의 건강이 악화되고 갈등도 심화되어 광주에 계실 수 없어서 함평 등지에 계셨다. 그러면서도 선생님은 가족들의 살 길을 걱정하셨다. 몸이 약한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궁리하시다가 벌을 키우면 좋겠다고 생각하셨다. 그 적당한 곳을 찾아다니는 과정에서 지지리를 만나고 강원도도 가신 것이다.

1978년 어느 봄날, 김준호 선생님이 천자 어머니와 함께 정처 없이 길을 나섰다. 함양 쪽의 비구니 사찰에서 하룻밤을 주무시고, 다음날 아침에 부근의 산을 오르셨다. 병약하셔서 거동이 불편하셨지만, 목포 여성숙 원장님의 ‘움직여야 산다’는 말씀을 순종하여 죽을 각오로 오르셨다 한다. 너무 힘들면 쉬고 조금 기력이 모아지면 다시 오르고 하셨다. 산등성이에 겨우 올라앉아서 건너편을 바라보니 저 아래 계곡 사이로 사람과 집이 보였다. 건너편 계곡으로 내려가서 할아버지 한 분을 만나게 되었다. 그 할아버지(용목씨 아버지) 집에서 삼일을 묵으셨다. 그 할아버지가 계곡 주변에 밭도 있고 한봉도 몇 통 줄 것이니 집 짓고 살아보라고 권하셨다. 그 곳은 차도 다니지 않는 첩첩산중이었다. 당연히 전기도 없어서 호롱불을 켜야 했다. 그렇지만 요양도 가능하고 벌도 키울 수 있는 좋은 자리였다.

천자 어머니가 5월에 최창익 선생을 보내 집을 짓게 했다. 최창익 선생은 강원도에서 한봉을 키우다가 들렀는데, 지지리에 가보고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그냥 가려하였지만, 천자어머니가 설득하여 집을 짓게 하였다. 흙집을 지으면서 중간에 무너지고 하여 고생을 많이 하였다. 1978년 가을에 집이 다 지어졌다. 이듬해 3월 19일 천자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좁은동 살림을 위해 최창익 선생은 광주로 나오고 김용숙 수녀가 지지리로 들어왔다.

1980년에 계곡에 홍수가 나서 이때 지은 집과 나중에 지은 집 한 채가 떠내려가 버렸고, 다른 한 채도 반이 파손되었다. 그 와중에 집 안에 있던 선생님의 일기 및 살림살이 등도 모두 쓸려가 버렸다.

 

지지리 생활

1979년부터 선생님이 이곳에 거처를 정하시고 1999년 ‘예수의소화수녀회’가 설립될 때까지 20년 너머 기거하셨다. 여러 곳을 순행하기도 하셨으나 거처는 지지리였다. 처음에 할머니 두 분이 선생님을 모시고 2~3년 살면서 밥을 해주셨는데, 한 분은 태평 할머니이고, 한 분은 말을 못하는 분이셨다.

태평 할머니는 이 장로님을 모시고 살던 분이다. 이 장로님은 서울 ○○교회 장로님이셨는데, 오 장로님을 존경하셨다. 한 때는 경북 영주에서 사셨는데 그 인연으로 동광원 가족 일부가 영주에서 살기도 했었다.

생활필수품은 김용숙 수녀가 광주에서 드나들면서 공급했다. 이때 장작도 준비해드리고 하며 며칠씩 머물렀는데 많을 때는 보름 정도 있기도 했다. 태평 할머니 다음에는 마리아 수녀님이 선생님을 모셨다. 자매들이 한 사람, 두 사람 들어가 살았는데, 많을 때는 5명이 넘기도 했다. 주로 아가다 수녀님(박청자), 마리아 수녀님, 곤솔라따 수녀님, 유아네스 수녀님, 문히아따 수녀님(당시에는 수녀 되기 전) 등이었다.

김용숙 수녀가 지지리 드나들던 어느 날을 회고하셨다. 그때는 광주에서 버스를 타고 남원으로 온 후, 남원에서 버스를 갈아타서 지지리 부근 광대등에서 내려 한참을 걸어야 지지리에 도착했다고 한다. 어느 날, 광주에서 장을 봐서 남원으로 갔는데, 지지리 부근으로 가는 3시 차를 놓쳐버렸다. 7시 차가 있는데, 7시 차를 타면 캄캄한 밤에 도착할 것이니 밤 길 걸을 생각을 하니 암담하고, 광주로 돌아가자니 장을 봐 온 짐이 있고……. 망설이다가 7시 차를 탔다. 그 때는 학생들이 많이 버스에 탔었다. 광대등에 내리니 밤 9시 무렵이었다. 캄캄하여 어디로 가야 할 것인지 막막한데, 손전등을 들고 계신 아저씨를 만나 삼거리까지 같이 걸었다. 짐 보퉁이가 5개였는데, 이고 들고 걷는데 손전등 아저씨 만나 길 따라 오는 것이 좋아서 무거운 줄도 몰랐다. 중간에 잠시 쉬었는데, 쉬고 나니 짐이 무거워서 짐 일부를 길옆 집에 맡기고 삼거리까지 왔다. 손전등 아저씨가 자기 집에서 자고 가라고 하였지만, 손전등을 빌려 내처 걸어 지지리에 도착하니 밤 12시 무렵이었다.

광대등에서 삼거리는 지금 거리로는 20여리 되고, 삼거리에서 지지리는 15분 정도 거리이다. 지금은 길이 반듯하게 정비되어있고 포장도 되어있지만 그때는 거친 산길이었다.

 

벌 키우기와 꿀 장사

처음에 지지리에서 한봉 3통을 할아버지 집에서 샀는데, 흐지부지 없어져버렸다.

1978년 8월 어느 날, 선생님이 최창익 선생의 이야기를 듣고 천자 어머니와 김용숙 수녀와 함께 강원도로 갔다. 강원도 나전 부근이었는데, 개척교회를 하다가 비어있는 집을 얻어서 몇 개월을 살았다. 두 수녀가 광주를 왕래하면서 번갈아서 선생님을 모셨다. 그곳에서 양봉 50통을 사서 키웠는데, 질이 좋지 않아서 고생만 하고 보람이 적었다.

그러던 중 천자 어머니가 돌아가셨다(1979년 3월 19일). 선생님이 최창익씨와 강원도에 가서 월동준비를 해놓았던 벌과 짐을 정리하여 내려오셨다.

벌은 주로 지지리에서 키우고, 무등산에도 몇 통이 있었다. 벌 키우는 일은 주로 김아네스 수녀님이 감당하였고, 김용숙 수녀는 벌통 이동과 판매 등을 협조하였다. 무등산 수녀회 뒤편 바위에 빈 통을 놓아두면 한봉 벌이 몇 통 들어왔는데, 지지리에 갖다 주기도 하고 무등산에서 키우기도 하였다. 그때 선생님이 ‘제자들 가르치려는데 뒷바라지를 해야 하니 꿀을 주십시오’ 하고 기도를 하셨다. 그해 무등산에서 꿀을 2말이나 수확하였다.

꿀을 따면 몸 약한 이들에게 먹이고, 남은 것은 팔았다. 당시 한봉이 제법 가격이 나갔다. 한봉 장사는 강원도 시절부터 시작되었다. 홍 수녀님이 사람 소개해주면 3만원에 사서 가져다주면 5만원을 받고 하였다.

당시에 선생님이 자매들 공부를 시키셨는데, 선생님 수발하고 자매들 공부하는 경비조달을 주로 꿀로 했다. 선생님이 함평에 계실 때부터 선생님의 살림은 자매들이 전담하였다.

지지리(현 ‘바위목 피정의집’) 가는 길

지지계곡은 장수의 장암산과 백운산 사이에 있는 계곡이다. 김준호 선생이 연고 없이 발길 닫는 대로 가시다가 거처로 정하시고 사시던 곳이 그 계곡 한 자락에 있는데, 이곳을 편의상 ‘지지리’라 부른다. 선생님이 터 잡으신 곳에는 현재 ‘예수의소화수녀회 바위목 피정의집’이 자리하고 있다.

남장수IC에서 번암을 거쳐 지지계곡으로 들어서니 ‘동화호’가 나왔다. 호변 길을 지나 계곡을 거슬러 10여분을 달리니 계곡 사이 곳곳에 민가가 나오고, ‘동화분교’가 길옆에 자리하고 있다. 동화분교를 지나 한참을 달리니 ‘바위목 피정의집’이 나왔다. 이곳 윤 데레사(윤남임) 원장수녀님께서 반갑게 맞아주셨다. 주변 숲은 소나무를 비롯한 여러 가지 나무와 풀들이 우거져 푸르고, 계곡으로는 맑고 깨끗한 물이 시원하게 흐른다. 계곡 옆 채소밭은 정갈하고 자연스럽다.

 

 

바위목 피정의 집에서

 

★ 윤남임 수녀님이 주로 말씀하시고, 김용숙 수녀님과 김종북 장로님이 함께하셨다. 김마리아 수녀님은 주로 주변을 둘러보셨다.

 

바위목 피정의 집

선생님 돌아가신 이후 수녀들이 함께 이곳으로 수련회를 왔다. 옛날 선생님 거처가 허술하여 수리하려고 하는데, 마을 이장이 새로 지으라고 권하셨다. 선생님의 자취를 간직하면서, 우리들의 수도처로 삼고, 선생님 생전에 종교간 벽을 넘어 스님, 목사님 등과 왕래하셨는데, 그 정신을 계승하는 수도처로 이어가자는 취지로 피정의집을 마련하였다.

공사비는 수녀회에서 감당하였다. 처음에 3억 원으로 시작했는데, 3층 올리고 오지여서(공사기간 차량비만 7백만 원) 경비가 추가되고 하여 총 5억 원이 들어갔다. 다행히 공사업자를 잘 만나서 공사는 순탄하게 진행되었다. 약 1년이 걸렸다.

피정의집은 아주 정갈하고 시설이 잘 되어있었다. 손님은 그렇게 많지 않지만 7~8월에는 많이 오신다고 한다. 유지관리비는 별도의 예산 없이 피정의 집 사용료로 자립하고 있다. 경비는 주로 전기세와 손님들 식재료비인데, 전기세만 1년에 1천여만 원이 들어간다고 한다. 전기세 경감대책을 고심 중이라고 하시자, 김종북 장로님이 방법이 있을 것이니 알아보자고 하셨다.

수녀회의 재원

초창기 수녀회의 재원은 수녀들이 각 시설에서 일하며 받은 월급과 퇴직금을 모은 것이다.

지금은 은퇴자가 많아서 수입이 줄었다. 그리하여 교육 등 용처에 쓰기 위해 수녀 1인당 3명의 후원자를 모아 재원 조달을 하고 있다.

현재 수녀회 소유 부동산은 장수 지지리 바위목 피정의집, 장성 땅, 전주 독배의 진달네집, 무등산 예수의소화수녀회, 해남 땅, 보길도 수도처 등이다.

 

담양 금성산성에서

1960년~1965년 담양군 금성산성에서 공동체 생활이 시작되었다. 구도의 뜻을 갖고 출가한 자매들과 급성결핵이 치유된 많은 젊은이들이 이곳에서 함께 살았다.

김준호 선생은 공동체 식구들이 늘어나 구호식량에만 의존하여 생활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젊은 청년들과 부모와 떨어져 생활하는 청소년들을 담양에 있는 금성산성 안으로 파견하여 농사를 짓고 뽕나무를 가꾸어 누에치기를 하면서 자립생활과 영성생활을 하도록 하였다(논과 밭이 있었음).

흙담집 3동에 남여 30~40명이 공동체 생활을 하였다. 새벽 4시 아침 예배로 하루를 시작하여 저녁 예배 시간까지 고된 노동을 하면서도 깊은 기도와 예배 중심의 생활을 하였다. 최창익 베드로 형제를 비롯하여 몇몇 자매들은 가끔씩 하루 일식으로 거친 음식을 먹으면서 성인들의 삶을 본받고 하느님을 섬기는 일에 열심을 다하였다. 농사를 지어 광주 본원의 공동체 식구들을 도와 살게 하려는 의지와 자립의 열정으로 힘든 노동을 감내하였다.

 

(소화설립 50년사 P.118~119)

 

그 시절에 담양의 금성산성에는 20대 초중반의 젊은이들 4~5명이 뽑혀서 황무지 일구고 봉사하며 살았다.

 

독배(진달네집) 생활

금성산성에서 독배로 갔다(윤 데레사 수녀). 금성산성은 기틀이 튼실하여 그대로 유지하고 나와 3사람이 독배로 옮겨진 것이다. 네 사람의 이름은 윤 데레사 수녀(윤남임), 장 로사 수녀(장영자), 이 프란체스카 수녀, 그리고 한영희 님이다. 이 4명이 독배생활 최초 구성원이다. ‘현숙’이란 이름의 고아 한명이 함께 살았다.

주변 마을은 가난하여 아이들이 방치되어 있어서 그 아이들을 모아 주일학교를 열었다. 아이들과 놀아주고, 한글 교육을 하고, 독서클럽도 조직했었다. 잘 되지 않았지만 그래도 열심히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시험에 들었다. 힘은 들고, 우리들은 젊고, 100% 꽁보리밥만 먹으며, 우리끼리만 있었다. 마을 옆에 금광이 있었다. 마을 사람들이 그곳에 일을 다녔는데, 호기심에 따라 나섰다. 일을 하다가 밥 먹을 시간이 되어 싸가지고 간 꽁보리밥을 먹고 있는데, 금광 주인이 하얀 쌀밥을 먹고 있다가 우리에게 한 그릇을 퍼주었다.

하루에 130원을 주었는데, 8백 몇 십 원을 벌었다. 그 돈으로 함께 사는 고아 아이 옷 지어주려고 옷감을 사러 갔다가, 소매치기를 당해 돈을 전부 잃어버렸다. 옷감은커녕 애초에 사와야 했던 소금마저 살 수가 없었다. 안타까운 마음에 경찰서까지 찾아가보았지만 잃어버린 돈은 찾을 수 없었다. 왕복 6십리 길을 빈 수레를 끌고 왕래하다보니 밤이 되었다. 물방앗간 옆에서 쉬는데, 달빛은 교교하고, 물방아 돌아가는 소리가 ‘인생은 괴롭다’, ‘인생은 괴롭다’ … 이렇게 들렸다. 거처에 돌아와 형제들 사랑을 받으니 다 풀어졌다.

독배에서 젊은이들이 살고 있는데, 어느 날 선생님께서 유영모 선생님께 감사의 편지를 보내라고 해서 편지를 써 보낸 일이 있다. 그랬더니 유영모 선생님으로부터 답장이 왔는데, ‘꽃다운 글을 받았다’고 하셨다. 그 말씀이 좋아서 일기에 옮겨 적어놓았다.

언젠가 진달네집에서 며칠에 걸쳐 집회가 열렸는데, 집회가 끝나고 다 떠나고 유영모 선생님만 남아계셨다. 내가 새끼를 꼬고 있는데 다가오셔서, ‘그 새끼가 왜 꼬아지느냐?’고 물으셨다. ‘짚인게 꼬이지요’ 라고 말씀드렸더니, ‘그것이 아니라 팔에서 힘이 나니 꼬이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그 말씀을 듣고 ‘철학이란 원인과 결과가 있는 것이로구나!’ 하고 생각했었다.

젊은이들 4명과 고아 1명이 몇 년을 살았다. 독배에 은자 어머니, 김용숙 수녀, 정향례 님 등이 왔을 때는 윤 데레사 수녀, 김 아네스 수녀가 있었는데, 김용숙 수녀가 오자 윤데레사 수녀는 다른 곳으로 옮겨갔다. 그 다음에 은자 어머니가 오셨다. 정향례 님은 독배에서 살다가 돌아가셨다.

윤 데레사 수녀는 충주 농아학교(수녀원)로 가게 되었다. 그곳에서 카톨릭으로 개종을 했고, 기숙사 보모로 일했다. 선생님이 수녀님들 밑에서 잘 배우라고 보내신 것 같다고 윤 데레사 수녀는 회고하셨다.

정향례 님은 폐가 나빠 무등산 개원사터(은혜실)에서 몇 년인가를 살았다. 건강이 어느 정도 좋아져 집으로 돌아가 살아보려고 고향(영광 백수)으로 돌아가 3년을 사셨다. 무슨 일을 해도 잘 되지 않고 한해(가뭄)가 들어서 힘들고 하여 무등원으로 돌아오셨고, 은자 어머니, 김용숙 수녀, 정향례 3사람, 소녀들이 함께 소임 받아 진달네집으로 갔다. 정향례님은 매사에 성실하고 봉사에도 성심을 다하였다. 성녀 소화데레사 님께서 말씀하셨던 ‘쓰러진 자리가 주님의 품이다’라는 말을 동생에게 말하고 죽었다. ‘성녀처럼 참 잘 사시다가 가신 분이다.’라고 김용숙 수녀님이 회고하셨다.

나중에(2003년경) 김용숙 수녀가 독배에서 살면서 복지시설 인가를 받았다. 그 전에는 미인가인 상태로 어려운 이 몇 분을 모시고 살았었다. 김용숙 수녀가 담당하여 시설 인가를 받았고, 초대 원장은 박청자(아가다) 수녀님이다.

은자 어머니가 진달네집에 계실 때 임낙경 목사, 변재갑 님 등도 함께 살았다. 엠마누엘 수녀님(이영희)이 출가하여 들어오셨는데, 나중에 계명산에 가서 오 장로님 밑에서 5년 동안 공부한 후, 오랫동안 총무역할을 감당하셨다.

 

선생님이 수녀회 탄생시킨 이유-소화의 꽃

선생님은 사회복지사업을 계속하면서도 이는 ‘물질적인 부분이다’라고 하셨고, 여러 어려움에 부딪칠 때면, ‘복지사업도 수도자들이 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늘 수도가 기본이요 중심이라고 생각하셨다. 그래서 수도회를 만드신 것이다.

지금도 수녀회에 젊은 수도자가 이어지고 있어 좋다. 복지사업은 줄이려 해도 오히려 늘어난다.

 

김용목씨 아버지 집

피정의집에서 찻길 따라 조금 내려와 옆길로 빠지니, 작은 집이 반쯤 허물어져 풀숲을 이루고 있다. 이 집이 예전에 선생님께서 만나셨던 용목씨 아버지가 사시던 곳이고, 선생님께서 3일 동안 지내시며 지지리 생활을 구상하셨을 그 집이다.

바로 옆에 나중에 지어진 제법 규모 있는 집이 있었다. 식당을 하던 집을 어떤 목사님이 거처로 삼아 살고 있다고 한다. 그 목사님의 딸 부부가 와서 풀베기 등 집 주변 정돈을 하고 있었다.

그 부근에서 건너편 산등성이를 쳐다보면서 잠시 선생님을 회고하시다가 길을 재촉하신다.

 

 

진달네집 가는 길의 대화

 

★ 김종북 장로님이 말씀하시고, 이영우가 듣다. 김용숙 원장수녀님과 마리아 수녀님은 조용히 계셨다.

 

점심밥을 먹고 가라고 권하시는 윤 데레사 수녀님과 인사를 나누고 피정의 집을 출발하였다. 들어온 곳과 반대편으로 계곡 길을 내처 달리니 장수IC가 나왔다. 부근에서 차에 기름을 넣은 후 고속도로에 진입하여 전주 소양IC에서 전주 시내로 들어선 후 외곽을 달려서 서전주IC로 진입하였다. 금산사IC에서 나와 잠시 길을 헤매다가 독배마을에 도착하였다.

 

이현필 선생님, 김준호 선생님께서 약을 먹지 않은 이유

이현필 선생님과 김준호 선생님, 두 분은 결핵 환자들을 돌보시다가 당신들도 결핵에 걸리셨다. 여성숙 원장님 등이 치료를 권해도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않으셨고 평생을 약도 먹지 않고 살다가 가셨다.

이는 첫째, 병을 받아들이신 것이다. 질병, 고통, 죽음까지도 넘어선, 다툼과 전쟁도 없고, 구분과 구별도 없는, 너와 내가 없이 한 생명, 한 뿌리, 한 사랑이니 진정한 평화가 늘 함께한다. 병을 받아들이신 것은 그러한 마음이고 경지이신 것이다.

둘째, 그 시절에는 약이 부족했다. 자신들 보다 다른 환자를 먼저 생각하는 배려의 마음이셨다.

자기 통일이 우선이다. 자기감정을 부정해야 한다. 그리하여 이웃과 뭇 생명, 세계와 우주와 온전히 하나가 되어야 한다.

 

우리나라 최초의 사회복지시설

동광원이다. 여순반란사건 이후 김준호 선생이 화순 청소골에서 몇 사람 데리고 산 것이 시초이다. 화순 청소골은 귀일원으로 이어졌다.

그 시절은 지금의 복지사업과 달리 그대로 공동체요 한살림이었다.

 

 

진달네집에 가다

 

진달네공동체 유래

거기 산(무등산)에 있는 환자를 돌아보고 내려오시면서, 선생님(유영모 선생님)은 눈이 내리는 2월의 무등산을 자꾸 되돌아보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큰 산 밑에 영혼들이 쉬어갈 수 있는 구약성서의 도피성같이 국경과 종교를 초월한 은둔소가 있으면 참 좋겠습니다.”라고 하셨습니다.

스승님(유영모 선생님)께서

“죽은 사람은 죽지만 이곳저곳에 가보면 아주 젊은 사람들이 간호해주고 도와주는 보모들이 있는데, 젊어서는 좋지만 늙어서는 어떻게 하느냐?”하며 걱정하셨습니다.

이곳저곳에 가보면 청춘을 바쳐 봉사하는 분들이 있는데 그 젊은 분들의 노후가 걱정된다고 하시며, 인재들이 모여서 보호받을 수 있는 공동체의 필요성을 느끼셨습니다. 그 뜻이 좋고 불쌍한 사람도 많지만, 빛도 없이 이름도 없이 봉사하는 사람들의 장래에 대해 책임을 느끼며, 일은 많은데 일꾼이 적은 이 때에 젊은 구도자들의 교육을 걱정하셨습니다.

선생님의 그 뜻을 알고 있던 그때 제가 전주 모악산 기슭에 절터가 있다는 말을 듣고 산 4만 평과 대지 6백 평이 나왔다고 말씀을 드리자 집과 땅을 사주셨습니다.

바로 <진달네 공동체>입니다.

그리고 그 땅을 사도록 협력하신 분이 그 지방에 사셨던 박효균 선생님과 박중근 선생님이셨습니다.

 

(김준호 엮음, 저 꽃들이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해 보아라

<진달네>를 심은 까닭. P.225~P.226 발췌)

 

독배 진달네집

전주시 용복동 산 218-1. 이곳에 절집이 있었는데, 그 집이 초창기 진달네집이다. 이곳에서 아이들을 모아 주일학교를 운영하였다.

구불구불한 마을 안길을 지나서 뒤편에 있었다. 집 입구에 차를 세우고 둘러보니 바로 뒷집에 ‘산소리숲속학교’라는 팻말이 붙어있다.

이 진달네집에는 현재 前광주카톨릭대학교 총장신부님이 기거하고 계신다. 이 신부님께서 진달네집의 미사도 집전하신다고 한다. 많은 공간은 풀이 무성한데, 앞뜰은 살뜰하게 가꿔져 각종 채소와 곡식이 자라고 있었다. 오랫동안 방치되어 풀이 지붕 높이로 자랐던 것을 신부님이 들어와 사시면서 손을 보아 이만해졌다고 김용숙 수녀님이 설명해주신다.

신부님과 한 분 여신도님께서 뜰에서 일을 하고 계셨다. 집 둘러보고 신부님께 인사드리고 산자락의 진달네집으로 향했다.

 

산자락 진달네집

독배마을 앞을 지나는 도로 건너편에 작은 계곡이 있고 그 옆 산자락에 또 하나의 터전이 있다. 크게 보면 모악산 자락이라 할 수 있는 곳이다. 그곳에 묘소가 있고, 수녀원 소유의 집과 밭이 있고, ‘소화 진달네집’이 있다.

자매원 가족들이 나들이를 가셔서 여자 선생님 한분만 계셨다.

차를 세우고 묘소에 들렀다. 묘소에 목례를 하고 수녀님들과 장로님이 잔디밭 사이로 자라난 풀들을 쥐어뜯으시는데 손놀림이 매우 빠르셨다.

묘소의 윗자리에는 김준호 레오선생의 묘비가 서 있는데,

 

예수의소화수녀회 창립자

우리의 성소는 사랑입니다

라고 쓰여 있고, 묘비의 뒷면에는 선생님의 일대기가 간략히 정리되어 있었다.

 

1924. 8. 20 출생

1956. 3. 16 사회복지법인 소화자매원 설립

1976. 5. 5 세례

1983. 5. 21 견진

1999. 1. 18 조비오 몬시뇰과 예수의소화수녀회 공동창립

2010. 10. 27 선종

 

 

묘소 아래편에는 김은자 마리아 어머니와 김천자 세라피나 어머니의 묘비가 나란히 모셔져 있다. 김은자 마리아 어머니의 묘비에는

 

소화자매원 창설 협력자

 

김천자 세라피나 어머니의 묘비에는

 

예수의소화수녀회 창설 협력자

 

라 소개되어 있었다.

그 옆에는 김은자 어머니를 따르던 이들의 묘비가 있었다. 묘역에 빈자리가 많다. 선생님을 따라 수도하고 봉사한 분들의 사후 안식처일 것이다.

묘소에서 내려오면서 김용숙 수녀님이 죽염을 만들던 작업장, 직접 지은 흙집 등을 둘러보았다. 작업장은 방치되어있고, 밭은 작물을 재배하는 곳이나 하지 않는 곳이나 모두 풀에 덮여있었다. ‘경건하고 사랑 가득한 분들이 떠나시거나 늙어지니, 정성스런 손길이 미치지 못하고 공동체의 꿈도 가뭇하구나!’하는 생각에 가슴이 먹먹해지고, ‘나는 지금 무엇을 찾아 이리 두리번거리는가?’라는 회한이 스친다.

점심 식사

금산사 입구에서 산채비빔밥으로 늦은 점심을 먹었다. 두 분 수녀님은 아침 식사도 하지 않으셔서 많이 시장하셨을 것이다. 피정의집에서 이른 점심을 먹을 수 있었는데, 내가(이영우) 오후에 광주에서 다른 일정이 있다고 말씀드렸더니, 내 일정을 고려하다보니 이리 되었다. 죄스럽다.

소나기가 제법 내렸다. 가뭄이 심하던 차라 반갑기만 하다.

점심 식사 이후 고속도로를 달려 무등산 수녀회에 도착하니 3시 남짓이다.

 

 

무등산 예수의소화수녀회에서

 

★ 기도실에 자리를 잡음. 주로, 김종북 장로님이 묻고 김용숙 원장님이 회상하신 말씀을 정리함

 

무등산 수도원

김준호 선생님이 현 무등산 수도원 자리 부근을 지나시다가, 현재 수도원의 허드렛물 쓰는 자리에서 기도를 하셨다. 10여 년 동안 그 주변을 지나실 때마다 그 자리에서 기도를 하셨다. 좁은동 시절 어느 날, 그 곳에 움막 하나 지으면 좋겠다고 천자 어머니에게 말씀을 하셨다고 한다. 천자 어머니도 ‘지친 영혼들이 쉬어가는 자리로 삼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셨다.

천자 어머니는 선생님 말씀이라면 무조건 순종하시는 분이셨다. 천자 어머니께서 홍 권사님(개신교 신안교회 신자, 선생님을 존경하셨음)을 찾아가 의논을 하였다. ‘선생님께서 10년 전부터 무등산에 보아둔 자리가 있는데 그곳에 움막을 짓고 싶어 하신다, 선생님은 200년에 선생님은 200년에 한번이나 왔다 가시는 분들 중 한 분이시다, 우리 두 사람(천자어머니와 홍 권사님)이 힘을 모아 조그마한 움막집이라도 지어보자.’고 말씀드렸다. 홍 권사님은 그 말씀을 듣고 남편과 의논하겠다고 하셨다. 홍 권사님의 남편 박 장로님은 건설업을 하는 이였는데 협조해 주시기로 했다. 그 시절에는 충민사 당산나무까지만 물자운반이 가능했다. 그곳에서 이 자리까지는 지고 메고 하여 자재를 운반하여 집을 짓기 시작하였다.

시설 돈이나 물자는 일체 쓰지 않고, 그렇게 두 분의 힘이 합해져서 무등산에 집이 지어지게 된 것이다.

이곳의 윗집 선생님이 기거했던 바로 그 집을 1974~75년경에 지었다. 지금 건물은 터와 벽은 그대로이고 나머지는 모두 새로 고쳤다.

선생님은 터를 잡을 때 꼭 물이 있는 곳에 잡으셨다. 이곳 터에도 물이 있었지만 잡목과 가시덩굴이 우거져있었다. 박 장로님이 가시밭이라 공사하기 힘들다고 난색을 표하기도 하였다.

무등산에 집을 짓는 데 대하여 반대하는 목소리가 많다고 천자 어머니가 선생님께 말씀드리자 ‘내가 그 자리에서 죽으면 되지 않소.’라고 하셨다.

농사지을 땅은 지금 밭으로 경작하는 3마지기(그 당시는 계단식 논이었음)가 있다. 그 땅을 구입한 사연은 이러하다. 그 무렵 홍 수녀님 부탁으로 김용숙 수녀와 장 로사 수녀님, 김 아네스 수녀님, 세 사람이 서울 흑석동 성모병원 주방에서 2년간 일을 했는데, 그 인건비 적금 넣은 돈을 선생님께 드렸더니, 귀한 돈을 함부로 쓸 수 없다고 하시며 땅 3마지기를 사신 것이다.

집이 지어진 후 건강한 자매들 몇이 들어와 기도도 하고 농사도 지으며 살았다. 당시 이곳을 사람들이 말하길 ‘기도하는 곳’이라 하였는데, 집 짓고 4년이 흐른 1978년 어느 날, 사이비종교시설이라고 지목을 받아 철거 명령이 떨어졌다.

천자 어머니가 병약한 몸으로 마을, 도청, 시청을 비롯하여 온갖 곳을 돌아다니며 전말을 설명하고 해결하고자 하셨지만 쉽게 되지 않았다. 선생님이 ‘집보다 사람이 중하니 포기하자’고 만류하시자, ‘집이 아니라 집을 지은 정신입니다.’하며 쫓아다녔다. 한 달 동안 들어간 경비가 10여만 원에 달할 정도로 애를 쓰고 다니셨다. 백방으로 돌아다니시며 해결의 길을 찾으시던 어느 날, 지병이 심해져서 쓰러지셨다. 정신 차리고 일어나시면, ‘도청에 가야지’, ‘시청에 가봐야 돼’ 하시며 길을 나서려 하셨다. 기동하기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자신 손으로 그 문제를 매듭지으려 하신 것이다. 철거 철회 확인을 못하시고 1979년 3월 19일에 돌아가셨다.

선생님이 자매원에 이곳과 진달네집은 넣지 말라고 하셨는데도, 자매원 소유로 다 들어가 버렸다. 그 이후 수녀님들 월급 모아서 다시 사서, 현재 소유주는 예수의소화수녀회이다.

 

https://youtu.be/aUvgkgQWh8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