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8월 다녀온 보길도 답사기를 올려본다.
(2) 보길도 수도처 답사 보고서
정리 : 이영우
참 가 자 : 김용숙 수녀, 김마리아 수녀, 김종북 이사장, 장경선 수사, 이영우
답사지역 : 전남 완도군 보길면 수도처들
이 동 : 김종북 장로님이 자신의 차를 손수 운전하심(육로) / 여객선(바다)
일 정 : 2012년 8월 12일(일) 06:00~18:00
06:00 예수의소화수녀회 출발(장경선 수사 차량 이용)
08:30 해남 땅끝 도착(75T급 여객선)
09:00 해남 땅끝 승선, 차량 도선 포함
09:30 완도군 노화읍 산양진항 하선
10:30 완도군 보길면 보옥리 공룡알 해변 도착
11:10 중식(준비해 간 도시락 / 보옥리)
11:30 완도군 보길면 선창리 수도처 도착
13:30 박영림 목사님 거처 도착
14:30 완도군 노화읍 산양진항 승선/출발
15:00 해남군 땅끝에서 광주로 출발
17:30 예수의소화수녀회 도착
18:00 다과 마치고 일정 종료
보길도 연락처
관계자 : 박영림 목사
주 소 : 전남 완도군 보길면 선창리 8-1
전 화 : 061)553-6529
보길도 수도처 개요
수도처 마련
김준호 선생은 십 수 년 전 호남 서남부 여러 곳을 둘러보며 수도처를 찾으셨다. 선생은 포크레인 기사이자 인근에 살던 박성백 씨를 대동하고 배를 빌려 1주일간 서남해의 수많은 섬들을 돌아보시고 보길도에 수도처를 마련하기로 마음을 정하셨다고 한다. 장수군의 지지리에 있는 수도처의 경우 산이 깊어 자매들이 거처하기 어려워, 자매들이 머물기 쉬운 바닷가 적당한 곳을 물색하신 것이라고 한다.
수도처 마련을 위해 필요한 돈은 무등산에서(김용숙 수녀님 등) 준비하였다. 김준호 선생은 사업을 함에 있어서 뜻을 세우고 말만 하시지 돈은 없었다(대부분 단체를 만들어 키우고 단체가 커지면 사업을 하는 데, 선생은 늘 사업이 먼저였다고 한다). 초창기에는 천자 어머니 등이 돈을 비롯하여 여러 가지 뒷바라지를 해주셨는데, 천자 어머니 돌아가신 후 뒷바라지 해줄 사람이 없었다. 그때는 결핵환자들의 자립 모색단계여서 어떻게 뒷바라지를 할까, 자매들의 교육 뒷바라지는 어떻게 할까 하는 자립의 과제가 중요하였다. 김준호 선생은 해결책을 찾고자 강원도 여러 곳을 돌아다니기도 하였다.
천자 어머니 돌아가신 후 최창익 선생도 지지리에서 나오고, 장수(지지리)에 일할 사람이 비게 되어 김용숙 수녀는 장수로 들어갔다. 온갖 농사를 지어 목포 등 여러 곳에 내다 팔아도 자립이 되지 않았다. 식량은 자매원에서 가져다 먹었다.
시간이 흐른 후 무등산에서 죽염을 구워 팔았는데, 그때부터 여유가 생겼다. 그 여윳돈을 김준호 선생이 필요하실 때 언제든지 드리고 아프시면 치료도 하려고 저축을 해두었다. 그 돈으로 보길도의 땅을 사고 수도처를 마련하고 장수 등지의 수도처 정비도 했다.
보길도 안에서 다시 지역을 정할 때에도 사람들이 붐빌 소지가 적고, 조용하고, 가난한 곳을 물색하셨다 한다. 여반 수도처는 선창리에 남반 수도처는 정자리에 마련되었는데, 그 위치가 마을 가장 뒤편이어서 마을의 보호를 받을 수 있고 산자락에 푹 쌓여 있어서 조용하고 아늑하다.
수도처가 있는 선창리와 바로 옆의 보옥리, 정자리를 둘러보고 각각의 수도처를 가보았더니, 그러한 기준에 따라 수도처 입지가 결정되었다는 사실을 바로 확인할 수 있다. 선창리를 기준으로 하면 보옥리는 왼쪽에 있는데 공룡알 해변, 망월산, 보족산 등 경관이 좋고 어업활동도 활발한 마을이고, 정자리는 오른쪽에 있는데 부자들이 사는 마을이다. 수도처들은 마을 가장 뒤편에 자리하여 마을의 보호를 받으면서도 조용하고 산자락에 푹 쌓여 있어서 아늑하였다.
수도처 주거공간은 처음에 헌 자재를 구하여 지은 움막이었다. 나중에 샌드위치 판넬, 합판 등을 구하여 집 꼴을 갖추었다.
선생이 땅이나 집을 알아볼 때는 마음 가는 마을의 가게나 정자에 가서 마을 주민을 만나 물어보시고는 하셨는데, 이곳 보길도 선창리에서도 그리하셨다 한다. 선생은 마을 가게에서 우연히 만난 노인과 이야기를 나누시다가 그분이 밭 한 필지를 소개하자 돈을 주어 그 밭을 사게 하고 그분 명의로 이전도 해놓으라고 맡겼다. 몇 년이 지난 뒤 찾아가니, 그 노인이 3일 전에 돌아가셨는데, 생전에 선생을 무척 기다리셨다고 하더란다. 그분의 부인 및 한마을에 사는 형제들은 사정을 잘 아는지라 이전해 주겠다고 하는데, 출상 직후이고 그 노인 댁이 너무 가난하여 밭 이전해달라는 말 꺼내기가 어려워서 그날은 그냥 돌아왔다. 그 후에 연락하니 자손들은 밭 이전에 대해 다른 태도를 보였다고 한다. 이 일화에서 알 수 있는 것은 김준호 선생은 낯선 사람도 잘 믿으셨고 믿는 대로 일을 맡기셨는데, 그이들 역시 선생의 믿음에 부응해주었다는 것이다(후손들은 다르지만).
수도처 현황
김준호 선생은 자매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취향과 바람을 수도 과정에서 극복할 과제로 치부하지 않고, 심사숙고하여 배려하고자 하셨다고 한다. 그래서 수도처를 마련하면서도 그렇게 각자 다른 자매들의 바람과 취향을 고려하여 (여럿이 거처할 곳과 홀로 거처할 곳을) 마련하셨다고 김마리아 수녀님이 말씀하셨다.
보길도 여반 수도처는 일반 민가 3채(큰 집 1채, 작은 집 2채)로 이루어져 있었다. 한 골목에 위아래로 큰 집을 가운데로 거의 연이어 있었다. 골목을 오르다가 처음으로 만나는 수도처(작은 돌담 안 초가집)는 현재 무너져서 사용이 불가능한 상태이고, 두 번째 집(큰 집 : 4간 겹집)과 세 번째 집은 사람이 들어가면 바로 살 수 있는 상태였다. 약 2년 전부터 지금까지 박영림 목사가 자신의 수도정진 및 신자들의 회합 장소로 활용하면서 관리해왔는데 최근에는 비어있다. 얼마 전 박영림 목사의 신자가 이사를 가면서 내어놓은 주택이 아랫마을에 있어서 그곳이 수도처와 신자들의 회합 장소가 되었기 때문이다.
자매들의 수도처에서 조금 떨어진 산자락(정자리)에 남반 거처가 별도로 있어서 남자들의 보길도 수도생활을 뒷받침하였다. 현재 마을 노부부가 살림집으로 사용하고 있다.
여반 수도처와 남반 거처 옆에는 상당한 면적의 밭이 있어서 채소를 비롯한 밭작물을 재배할 수 있어서, 먹거리 자급과 노동수도의 바탕을 이루고 있었다.
시간이 좀 흐른 이후 약 10 여 년 전부터는 수도를 위해 찾는 이들이 점점 줄어들었다. 지금은 대부분 비어있거나 마을 분들이 살림집으로 이용하기도 하고, 가끔씩 수도를 위해 찾는 이(다른 수녀회에서도)들이 쉬어가거나 한 달 혹은 보름씩 머물며 수도하기도 한다. 또한, 여름철에 실무진들이 내려와 하룻밤 묵으면서 청소를 하고 수련을 하고 있다.
수도처의 수도자들
장수 살던 한 자매가 김준호 선생을 찾아와 수녀 되기를 바랐다. 그 자매가 보길도 수도처의 첫 수도자였다. 몇 년을 보길도 수도처에 기거하며 일과 수도에 전념하였다.
수도처가 마련된 이후 여성숙 언님을 비롯한 많은 이들이 보길도 수도처를 찾았다. 자매들은 개개인이 장기간 머물면서 수도정진을 하거나 여럿이 단체수련을 하기도 하였다.
아가다 수녀도 이곳에서 수도를 하였다.
보길도 수도처 답사기
8월 12일 일요일 아침 6시경, 예수의소화수녀회에서 출발하였다. 차량은 장경선 수사님의 차를 이용하였고, 일행은 5명이었다.
차량 운전은 장경선 수사님이 하셨다. 차 안에서 이현필 선생, 김준호 선생, 여성숙 수녀, 이준묵 목사 등에 대한 이야기가 김종북 장로님, 김글라라 수녀님, 장경선 수사님을 중심으로 잔잔하게 이어졌다.
여성숙 언님은 제중병원 흉부외과 전문의이셨는데, 이현필 선생님과 김준호 선생님이 병원에 입원하셨을 때 담당 주치의이셨다. 두 분 선생님께서 치료를 제대로 받았으면 회복되어 좋은 일 많이 하셨을 것이라며 늘 안타까워하셨다 한다. 평생을 독신으로 생활하셨고, 당신 소유의 땅도 하느님 역사를 이 땅에서 이루고자 하는 일에 기꺼이 내어놓으셨다. 목포 입구에 결핵환자 요양소인 한산촌을 만드셨는데, 이 한산촌이 안병무 선생의 정신적 지도와 여성숙 언님의 헌신으로 지금의 디아코니아로 자리매김 되었으니, 여성숙 수녀님은 디아코니아의 대모이시다. 디아코니아는 목포에서 출발하였는데, 모원은 천안의 아우네에 있다. 목포의 디아코니아에서는 현재 노인요양원이 운영되고 있다.
차가 해남 송지 간척지를 지나갈 무렵, 수녀님들과 김종북 장로님이 연신 창밖을 둘러보며 옛 기억을 되살려 말씀을 이으셨다. 이현필 선생이 광주에서 거지들을 모아 여러 곳으로 보냈는데, 해남 송지 간척지로 보낸 일행의 인솔 책임자가 김준호 선생이셨다. 거지들은 일하기 싫어서 도망가 버리기도 하였고, 농사를 잘 지으면 그 땅을 준다고 하였는데……. 어쨌든 거지들과 간척지를 일구어 농사를 지어 자립을 도모했고, 그 과정에 김준호 선생의 선친께서도 합류하셨다.
이준묵 목사께서 해남읍교회 청년회에서 활동하던 어느 날 해남읍교회를 방문한 이현필 선생, 오북환 장로 등을 만났다. 이전에 이준묵 목사님은 독신전도단에서 이현필 선생 등과 함께 활동하기도 하였다. 이후 해남읍교회 목사로 재직할 때는 지역사회 지도자의 위치에서 여러 가지 일을 하셨는데, 그 하나가 등대원이라는 고아원 운영이다. 해남읍교회 출신인 오영석 한신대학교 교수가 초등학교 시절 ‘공부하고 싶다’는 소원을 적어 하느님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우체국에서는 고민을 하다가 이준묵 목사에게 그 편지를 전달하였고, 그 소원대로 이준묵 목사가 오영석을 돌보아 소원이 성취된 훈훈한 일화도 소개하셨다.
김경재 교수는 한신대학교 원로교수이신데 동광원 사상에 호의적이라는 말씀도 하셨다.
동광원 수양회는 현재 년 2회 개최되고 있다. 년 초에는 수도회 내부 수양회로 총회를 겸하고 있고, 8월 15일에 시작되는 수양회는 재가 신자를 포함하는 범동광원 수양회라 한다. 8월 15일 남원에서 개최되는 수양회에 김종북 장로님이 참가를 권유하셨다. 아직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아 조심스럽게 거절하였다.
땅끝에 도착한 시간이 08:30, 바닷가를 서성이다가 09:00에 출발하는 배를 타고 보길도로 향했다. 이야기는 땅끝에서 보길도 길목인 노화도(산양진항)로 가는 선상에서도 이어졌다.
장경선 수사(1955년 목포 출생)님에게 떼제공동체에 대해 들었다. 장경선 수사님은 참 신앙을 갈구하는 과정에서 동광원을 만나, 수양회에 참석하기도 하고 여러 장로님과 수녀님들을 찾아뵙고는 하였다(장경선 수사가 동광원을 찾던 시기는 이현필 선생 사후). 어느 날 김준호 선생이 장경선 수사에게 떼제공동체에 들어가라고 권유하여 그리했다고 한다. 수사님은 떼제공동체에서 18년 동안 생활하셨다. 떼제(Taize)공동체는 1940년 프랑스 동부 지역의 작은 마을에서 로제 수사가 ‘어릴 때부터 나는 공동생활이 하느님은 오직 사랑이심을 보여주는 징표가 될 수 있다는 직관을 한 번도 잊어버린 적이 없습니다. 언제나 서로를 이해하고 화해하기 위해 전 삶을 바치기로 결심한 남자들의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는 확신이 차츰차츰 내 안에서 자리를 잡았습니다. 인자한 마음과 단순 소박함이 모든 것의 중심에 있는(로제 수사 “하느님은 오직 사랑이시다” 중에서)’ 그러한 공동체로 설립한 것이다. 떼제공동체는 기독교, 카톨릭 등의 종파를 넘어서 있다. 세계의 많은 이들이 서로의 거리감이 전혀 없이 이곳을 찾아, 휴식을 취하고 신뢰와 희망을 찾고 또 고스란히 안고 각 나라로, 지역으로, 자신의 일상으로 돌아간다고 한다. 그런데 떼제공동체의 수사들은 공동체를 찾는 이들이 너무 많아서 휴식을 취하기도 어려울 만큼 바쁘다 한다.
장경선 수사는 떼제공동체 생활을 18년 만에 중단하고 귀국하였는데, 공동체 생활 중에 병을 얻어 공동체 생활 자체가 어렵게 되어서였다. 장수사가 귀국한 것은 2002년 8월경이다. 귀국한 이후 5년여 동안 외부 활동 없이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며 건강 회복을 위해 전념하였다 한다. 처음에는 자율신경이 망가져서 차도가 없다가, 2004년 어느 날부터 자연치유가 되기 시작하여 어느 정도 회복이 되었고, 지금은 온전한 건강상태는 아니지만 이겨내면서 떼제공동체에 대해 소개하는 일, 윤공부 목사와 젊은 목사들이 주도하는 2개월 1회 계명산 관상집회(20여명 참석)의 마지막 집회 지도, 광주 소화자매원 월 1회 방문 등 여러 가지 활동을 하고 있다고 한다.
김종북 장로님께서 다석 유영모 선생에 대한 말씀을 주셨다. ‘선생께서는 가문(家門)도 신분제도도 모두 타파하신 분이시다. 과거는 묻어버리고 하느님과 통하여 바로 오르자고 하셨다. 종교는 자신이 그 자리에서 살아갈 때 계승되는 것이요, 스승과 경전 이야기만 하는 것은 과거를 팔아먹는 짓이다. 예수는 하느님을 믿은 이이다(⇒ 인간 예수). 예수의 길을 따르는 것이 예수를 믿는 것이지 예수 기념하는 것은 믿는 것이 아니다. 좋으면 자신이 그리 사는 것이지, 남에게 잘 살아라 하는 것은 바른 종교가 아니다. 동광원은 바로 실천하는 신앙이다. 참이다’.
수도처로 가는 길
09:35에 노화도(산양진항)에 도착하여 배에서 내렸다. 차를 타고 보길도로 향했다. 창밖으로 보이는 섬 주변은 가두리 양식장의 부표들로 뒤덮여 있었다. 각종 생선과 톳을 비롯한 해산물을 키우고 있는 바다어장인 것이다.
노화도에서 보길도 사이의 바다는 연륙교로 이어져있었다. 보길도 들어가서 오른쪽 방향으로 해안도로를 달렸다. 10:10경 수도처가 있는 정자리, 선창리 등이 나왔다. 해안도로를 달려 조금 더 가니 ‘망끝전망대’가 나왔다. 보옥리다. 보옥리 뒷산(망월산 望月山)은 크지 않은데도 둥실하면서도 바위와 계곡과 적송 숲이 장관을 이뤄 범상치 않아보였다. 마을 앞은 몽돌이 펼쳐진 공룡알 해변이고, 해변 가에는 수백그루의 동백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다.
마을 앞에 차를 세우고, 쨍쨍 내리쬐는 햇살 속을 걸어 공룡알 해변에 이르렀다. 김마리아 수녀님께 ‘단체 수련을 와서 밤에 여반 수도처에서 이곳 해변까지 걸어와 밤바다를 바라보며 기도를 하곤 했었다……. 그때 이곳 보옥리를 마을 사람들은 ‘뻐레기’라고 하였다’는 등의 회고의 말씀을 들었다. 파도에 씻기고 구르면서 몽글몽글해진 몽돌 해변에서 바다를 바라보니 가슴이 후련하다. 잠시 몽돌 위를 돌아다니다가 동백 숲 아래 둘러앉아 점심을 먹었다. 이른 점심이었지만 두 분 수녀님께서 정성으로 준비하신 음식들이어서 모두들 맛있게 먹었다. 점심식사를 마치니 11:10이다.
11:10 점심 식사 후 여반 수도처로 향했다. 수도처 길목에 사시는 할머니 댁을 찾아뵙고 할머니에게 안부를 묻고 김종북 장로님이 준비하신 작은 선물을 드렸다.
여반 수도처
전체적으로 뒷산이 자락을 펼쳐 여반 수도처가 있는 마을을 품에 안고 있는 듯하다. 수도처는 마을에서도 가장 뒤편에 위치하여 산자락에 닿아있었고, 마을의 일반 민가처럼 별다른 표가 나지 않았다.
첫 번째 집은 작은 돌담 안에 있는 초가집인데, 지금은 무너져 사람이 살 수 없는 상황이었다. 텃밭에는 누군가가 가꾸는 채소들만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다. 아가다 수녀님이 수도하던 곳이라 한다.
두 번째 집은 여반 수도처 중 가장 큰데, 현재는 슬레이트 지붕에 벽은 합판으로 처리된 4간 겹집 한옥이고, 집 옆에는 밭(400여평?)이 있었다. 집의 내부 구조는 아래 그림과 같다.
방 | 방 | 방 | 부엌 |
거실 | 화장실 |
식수는 뒷산 샘을 활용하여 수도배관 공사가 되어 편리하고, 화장실도 수세식이었다. 이곳의 집터는 제3자 소유이다. 2년 전부터 박영림 목사가 수도와 신자들의 회합장소로 사용해오다가 지금은 비어있는데, 박목사가 가끔 들러본다고 한다. ‘말씀과 기도의 수도원’이라는 표기가 눈이 띈다. 박영림 목사는 ‘이곳에서 바라보는 낙조가 아주 아름답다’고 말씀하셨다. 박 목사는 기독교장로회 목사님인데, 정농회 등에서 활동하셨고, 집은 괴산이라고 한다. 주변이 관광지가 되면서 소란스러워져서 고요한 수도를 할 수 없었단다. 하느님께 기도하다가 김준호 선생을 만나 이곳을 소개받았다고 한다. 이곳에 와서 처음 6개월여 동안은 혼자 깊게 파고들었다. 그런데, 마을 분들이 한두 분 올라오고, 아이들이 오면 노래를 가르쳐주고 하다 보니 이곳이 교회가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집 부근에 멧돼지가 출몰하고 독사도 있고 하여 무서웠다. 그러던 어느 날 신자 한분이 서울로 이사를 가면서 집을 내어주셨다. 하여, 그 집을 거처 겸 예배당으로 삼고 이곳은 발원지로 생각하고 있다고 한다.
헛간 | 방 | 마 루 |
방 | ||
부엌 |
세 번째 집은 박영림 목사가 거처로 삼아 살다가 지금은 비어있었다. 수도처로 아주 그만이다. 뒷산과 주변 나무들이 어우러져 아늑하고, 집 또한 그러하였다. 원래의 조그만 오두막 집 외관(처마끝)을 판넬로 둘러쳐놓았다. 그 구조는 옆 그림과 같다.
남반 수도처
남반 수도처는 여반 수도처의 옆마을 위편에 뒷산과 바다로 이어지는 언덕에 덩그라니 앉아있었다. 마당에서 보니 바다가 눈앞에 시원하게 펼쳐져 있었다. 집 옆 산자락에는 수도자들이 일구던 밭도 있다. 지금은 늙은 할아버지가 살림집 삼아 살고 계셨는데 마루에는 빨간 고추가 한가득 널려 있다.
방 | 부엌 | 방 | 방 |
마루 | 마루 |
집의 구조는 옆 그림과 같은데, 작고 낡은 오두막집이다. 마당은 좁고 돌담이 집을 둘러싸고 있는데 백하수오 덩쿨이 돌담 위에 푸르다.
폐교 방문
남반 부근에 폐교가 있어서 둘러보았다. 김준호 선생은 보길도에서도 학교에 관심이 많으셨다고 한다. 이 폐교는 삼육그룹에서 사서 사원 교육장 및 휴식공간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기존 건물과 나무 등을 그대로 둔 채 개보수만 하고, 나무와 꽃 등을 잘 가꿔놓아서 보기가 좋다. 이곳도 수도처로 그만이다고 수녀님, 장로님들이 이구동성으로 말씀하셨다.
13:30(오후 1시 30분) 아랫마을에 있는 박영림 목사님 댁에 들렀다. 이곳은 목사님의 거처이자 예배당이다. ‘ㄱ’자 집인데 아주 집이 크고 좋았다. 박목사가 준비해준 다과를 먹으며, 박목사의 보길도 수도처와의 인연 등에 대한 말씀을 나누었다.
14:30에 산양진항에서 토말항으로 출발하다.
토말항에 도착하여 차를 몰아 무등산의 예수의소화수녀회에 도착하니 17:30(오후 5시 30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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