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일

들판의 오월 : 이 세상을 본받지 말라

mamuli0 2023. 5. 10. 15:30

 벼 모내기가 시작되고 아카시아꽃이 활짝 피었다. 진도에서 김제 들판에 들려 곡성에 왔다. 화창한 봄날 나들이를 한셈이다. 들판에는 할머니가 심은 꽃 창포가 저수지가에 활짝 피고 사랑초와 옥잠화와 패소가 잘 크고 있다.

 

 

이 세상을 본받지 말라
1979. 8. 14
 로마서12장1절
 '그러므로 형제 여러분, 하느님의 자비가 이토록 크시니 나는 여러분에게 권유합니다. 여러분 자신을 하느님께서 기쁘게 받아주실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 그것이 여러분이 드릴 진정한 예배입니다.' 

 2절
 '여러분은 이 세상을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하여 새사람이 되십시오. 이리하여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그 분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를 분간하도록 하십시오.' 
 
 다시 한 번 보겠습니다. 1절 그러므로 형제 여러분 그러므로 이 말은 11장에서 연속된 말이죠? 그러므로 형제 여러분 하느님의 자비가 이토록 크시니 나는 여러분에게 권유합니다. 여러분 자신을 하느님께서 기쁘게 받아주실 거룩한 산 제물 거룩한 산 제물, 아주 순결한 깨끗한 제물 흠 없는 제물, 하느님께서 기쁘게 받아주실 제물 이 말씀이 로마서 15장16절에도 있죠? 바울사도의 사명, 자기 사명을 발표하면서 내 사명은 이것이다, 바치십시오. 그것이 여러분이 드릴 진정한 예배입니다.'

 


 로마서 15장16절
 '그 사명은 내가 이방인들을 위한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으로서 하느님의 복음을 전하는 사제의 직무를 받아 성령으로 거룩 하게 된 이방인들을 하느님께서 기쁘게 받아주실 제물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나의 사명입니다.'

 이방사람들로 하여금 믿게 해서 성령으로 거룩하게 되면 하느님께서 기쁘게 받아주실 제물이 된다. 그렇게 하는 것이 나의 사명이다. 
거기 다른 것 없어요. 그것뿐이야. 이방사람들이 회개해서 복음을 받아들여 가지고 성령 따라서 거룩히 된다. 또 거룩한 사람 성령의 열매는 결과는 사랑이니까 성령께 순종해서 맺어지는 결과는 사랑이니까 그러니까 거룩한 사랑, 사랑 속에 사랑 속에 거룩이 없는 것은 진짜사랑이 아니에요. 못 가겠냐? 그러면 우리 사람 다 몸 지니고 여기 나오셨습니다. 몸 지녔습니다. 뼈가 없으면 어떻겠습니까? 몸은 살은 있는데 뼈가 없으면 이렇게 앉겠습니까? 못 앉죠? 뼈가 없으면 비실비실해 일으켜 주어도 그냥 자빠져버려요. 뼈가 없으면 모양은 사람인데 사람구실을 못한다 말이야. 움직이지를 못해요. 자기가 어디로 걷거나 서거나 그러지를 못해요. 그런 사람은 그건 커서 살아봤던들 남의 짐뿐이지. 뭘 아무것도 못해요. 떠먹여 주면 먹고. 떠먹을 수도 없어요. 밥을 또 뼈만 있고 살이 없으면 송장이지. 송장, 그와 마찬가지로 사랑은 살이라면 거룩은 뼈와 같아요. 깨끗 순결 성령의 열매는 사랑인데 거룩한 사랑.

 


 다시 갑니다. 14절서부터 
 형제 여러분 나는 형제여러분이 더할 나위 없이 마음이 너그럽고 지식이 풍부하여 서로 충고할만한 능력이 있다고 확신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는 지식은 있어야 된다. 다른 지식은 없더라도 하느님의 뜻을 분별할 수 있는 지식은 있어야 해요. 참된 지식을 가져요.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가? 
나는 여러분이 더할 나위 없이 마음이 너그럽고 지식이 풍부하여 서로 충고할만한 능력이 있다고 확신합니다. 그러면은 뭐 다시 권유할 것이 없어요. 그런데 그렇게 확신이 있으니까 권유해요. 다른 사람을 풍부한 지식이 있어서 다른 사람을 권고 할 수 있는 실력이 있으니까 인자 거기다가 권고해요. 그렇지 않으면 소귀에다 경을 읽기나 마찬가지다. 아 그런 사람에게는 별 말해도 소용이 없어요. 

 다만 그런데, 그런데 인자 권고할 것은 무엇이냐? 다만 내가 이 편지에서 가끔 지나칠 정도로 강조해서 말할 것은 하느님께서 내게 은총으로 주신 사명을 다하기 위해서 여러분의 기억을 새롭게 하려는 것입니다. 늘 새로 날로 새로워져야 한다. 기억이 새로워져야 한다. 많이 새로워짐에 따라서 기억도 새로워지고 늘 새로운 힘을 받아야한다. 
겉 사람은 날로 부패하지만은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져야 한다, 그것이 신앙입니다. 신앙은 자라는 것이지. 항상 고대로 있는 것이 신앙이 아닙니다. 생명이니까.
 기억을 새롭게 하자. 그만큼 남을 충고할 수 있는 지식과 실력을 가졌기에 사랑이 있기에 거룩한 사랑을 지녔기에, 기억을 새롭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 사명은 내가 이방인들을 위한 그리스도의 일꾼으로써 하느님의 복음을 전하는 사제의 직무를 받아 성령으로 거룩하게 된 이방인들을 하느님께서 기쁘게 받아주실 제물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전에 공동번역 전에 나왔다는 거 구교에서 봤던 성경이죠.  
 로마서 12장2절
 형제들아 나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시사, 시사 미리 보여준다. 시사하야 너희에게 권고하노니 너희의 육신을 생활하고 살아계시고 거룩하고 하느님께 의합한 하느님의 뜻에 딱 맞는 의합, 뜻에 맞는 합을 합친, 의합한 희생으로 바칠지어다. 이는 하느님께 대한 너희의 정신적 봉사니라. 봉사, 일사(事) 자가 섬길 사(事)자여. 여기는 맡을 섬길 사(事)자가 되겠구만요. 봉사니라.  

 2절이 쪼끔 더 내요 다른 것 같아요. 같은데 더 중요 목적 이 세속을 모방하지 말고 이 세계를 본받지 말고 말이 달라도 같은 것 아닙니까? 모방한다. 본받는다는 이 세상은 고대로 따라하지 말라. 그러면 거룩이 아니다. 순결이 아니다. 타락한 생활이다. 이 세속을 모방하지 말고 본받지 말고 이 세계를 본받지 말고 오직 하느님의 성의 성의란 말은 정성이란 말 아니고 거룩한 뜻 거룩 성(聖) 뜻 의(意), 성, 하느님의 성, 거룩한 뜻 아주 깨끗하고 순결한 그런 뜻, 아주 고귀한 뜻, 엇다 비할 수 없는 순수함, 하느님의 성의와 선의와 진짜 선, 선은 하느님 한 분 뿐이죠? 예수님이 증거하신대로, 인간에게는 선이 없어요. 선을 하라 하는 것이지, 어떻게 선을 그러니 죄는 무엇이냐? 믿지 않는 것이 죄라, 믿는 것이 선이죠? 믿는 것이 무엇이냐? 예수 되는 거여. 예수 화(化) 되는 거여.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 것이 믿음이니까 하느님의 사랑을 깨달아서 자기도 사랑하는 것이 선이야. 하느님의 성품을 가져야 선이에요. 하느님만이 선이니까. 

 


 그리스도의 아벨의 성령을 지녀야, 받아야 성령이라고 하느님의 아들, 그러지 않으면 그걸 지니지 않았는데 선하라고도 못하고 자기도 선도 못하는 것이고. 또 누구를 사랑하라고도 못하고 자기도 사랑도 없고 쓸데없는 소리여. 허황한 소리여 무근지설이에요. 근거 없는 소리입니다.  
오직 하느님의 성의와 선과 성의에 하느님의 거룩한 뜻에 합할 것과 완전한 것이 무엇인지를 음미, 음미 그 목적의식이 한 것입니다. 하느님의 그 선과 선의의 합한 것과 완전한 것이 무엇인지를 음미, 맛, 맛 미(味)자야. 읊어보고 생각해 보고 사색을 해보고 그 맛을 안다. 음미, 음미하기 위하여, 그러니까 이것이 목적이죠. 정신이 새로워지는 것도 목적이라고 쓰지만은 새로워지지 않은 것이 목적이 아니라 역으로 보면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가 하느님의 거룩한 뜻이 무엇인가 하느님이 내게만 요구한 것이 무엇인가 그걸 알아야 한다. 말입니다. 우리의 기도란 건 무조건 내 뜻, 채워주시오. 한 것뿐이요. 내부를 해부해 보면 그것뿐이지. 뭐 다른 거 없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가 하는 사람은 자기 뜻은 포기를 해야지. 두 가지 뜻을 어떻게 이루어집니까? 두 주인을 섬길 수 없고 재물과 하느님을 겸할 수 없는 것인데, 내 뜻도 이뤄지고 하느님의 뜻도 이뤄지고 그건 안 된다. 말입니다. 뜻은 하나에요. 하느님의 뜻이 자기 뜻이 돼요. 
성도란 자기가 없으니까 믿음이란 이미 세상에서는 죽었으니까 예수님의 뜻만 이뤄져야 될 거 아니냐? 그러니까 그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선하시고 완전하신 것이 무엇인지를 맛보기 위해서는 일신, 새로워져야 한다. 옛사람 가지고는 안 된다. 어떤 방법을 배워가지고는 안 된다. 새로워져야 한다. 새로워지자는 것은 목적은 하느님의 뜻을 음미하려니까 하느님의 기뻐하시는 뜻이 무엇인가를 알라니까 알라면 새로워져야만 된다. 

 


 우리는 맨날 방법만 고칩니다. 또 그것만 듣습니다. 또 뭐 해가 잘 안 되면 또 요렇게 해보고 또 요렇게 해보고 늘 그럽니다. 그거뿐이지. 법도 없고 방법도, 만 번 고치자 소용없는 거여. 아 이거 안 된다. 하는 경험, 결론은 그 것뿐이여. 그것이나 하는 것뿐이지. 사람의 힘으로는 안 된다. 나는 죄인이다. 그것뿐이지. 

 너희 정신을 일신, 한 일(一)자 새로울 신(新)자 일신함으로써 스스로 혁신 가죽 혁(革)자는 혁명 고칠 혁(革)자는 자기 정신을 뜯어 고쳐 새롭게, 고치려면 지금까지 한 것 부셔 버리려면 부셔 버려야지. 의사가 수술을 할 때 아닌 건 칼로 잘라 내버리든지 말이야. 그래서 인자 새살이 나오고. 그걸 두고 어떻게 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썩을 고름밖에 안 되듯이 싹 베어 내버려야 돼. 혁신이야. 혁신. 일신하려면 혁신을 해야 돼. 자기에서 혁명이 일어나야 돼. 그러면 인자 이 어떤 성경에는 그랬지만은 요 이이 절에, 요대로만 돼버리면 그에는 뭐 요래라 저래라 할 것이 없어요. 그대로 고 내용을 이렇게 혁신이 된 사람은 자 요렇게, 요렇게 생활이 되는 것이다. 하는 것뿐이에요. 이렇게 하라는 강요가 아니고 정신만 새로워지고 대낮에 밝은 빛에 뭣을 캄캄한 밤에는 별소릴 이렇게, 이렇게 해봐도 무엇이 분별이 있어야 말이지. 어디가 어딘지 방향을 알아야지. 동쪽으로만 가라하는데 어디가 동쪽인지 알 수가 있어야지. 캄캄한 밤에, 태양이 떠봐야 아 저쪽이 동쪽이구나. 넘어가는 데는 아 저쪽이 서쪽이구나. 하듯이 자기마음이 새로워지고 밝으면 누가 이래라 저래라 해서 하겠습니까? 
 대충대충 가는 것이지 형제가 넘어지면 가서 동정해주고 일으켜서 해주어야지. 왜 그랬냐? 책망하겠습니까? 무엇을 탓하겠습니까? 아아 내가 내 탓이다. 내가 빛을 못 비춰주어서 그랬다. 아 아 형제여 용서하시오. 내가 잘못했다. 아 그러면 그쪽에서 미안해서, 미안해서 아이고 어째 이럴 수가 있습니까? 제가 어두워서 그랬죠, 그러지만. 왜 넘어졌냐? 아 내가 넘어지고 싶어서 그리됐나? 잘 안 넘어 질라고 했는데 어쩌냐? 말이야. 안보여서 자빠졌다. 따질 꺼아니냐?

 그러니까 목적은 하느님의 거룩하시고 완전하시고 기뻐하시는 뜻이 무엇인가 그걸 분별 하려면 혁신, 일신, 혁신해야 한다. 새로워져야 한다. 그래야 시대를 본받으면 결과가 어떻게 될 것인가 빨리 안다. 그 결과는 어떻게 된다. 성경에는 있죠? 결과가 있지만은 믿지를 안 해요. 믿지를 안 해. 그래도 그 믿어지지 않으니까 그것을 원해요. 두 사람 비유로서 결과가 있지 않습니까? 나사로 결과 부자 결과, 부자는 입술로만 주여, 주여 했지. 마음으로는 안 믿었으니까 회개 안했다 말이야. 시대를 본받았다 말입니다. 이 세상사람 다 부자 되기를 좋아한 거. 그 인간이 육체가 인간으로서 본능 아닙니까? 그걸 따라갔다고요. 가난한 것이 좋고 복이라고 하는 사람 어디가 있겠습니까? 믿는다고 해봐. 가난이 복이라고 믿어진 것이 그것이 은혜죠. 그 말은 외어도 믿어지진 않아요. 그래도 부자 되려 해요. 돈이 있어야 뭣이 어쩌고, 아, 필요하죠? 

 


 천국이 저희 것이라 해도 가난한 자의 천국이라 해도 믿어지지 않으니까 부자청년 어쨌습니까? 나만 따라 오면 하늘에 보화가 있다 해도 안 믿어지니까 근심하고 돌아갔죠? 아 믿어진다면야 그 뭐 탁 돌리고 오지, 못 따라갑니까? 안 믿어져 그것을 그 말씀대로 하면 아침부터 끼니가 없겠는데 많은 식구들이 부자니깐 많은 식구가 있을 텐데 다 굶어 죽게 말이야.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말이거든. 신앙이 아니니까 믿어지지 안 해. 언자 믿어진다는 것이 의외여. 그러니까 믿어지기까지 무조건 믿어야지. 그렁게 제자들도 형제를 얼마든지 용서해주라. 또 죄를 안 짓게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죄를 짓는 자는 다 못 들어간다. 그 말을 듣고는 우리 믿음을 주셔야 되겠습니다. 믿음을 주십시오. 믿음 없이는 못 올 걸 알았으니까. 
제자들이 다 벌벌 따라 댕기는 제자들이었지만은 그 말씀을 듣고는 아이 구, 그럼 어떻게 믿음을 주십시오. 
또 한군데요. 
 고린도후서 6장7~
 진리의 말씀과 하느님의 능력으로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진리의 말씀과 하느님의 능력으로 살고 있습니다. 두 손에 정의의 무기를 들고 정의는 자기에서만 실천할 것이 정의에요. 다른 사람에게 강요할 문제가 아니요. 
 이리하라, 이래야 된다. 그건 다른 사람에게 강요할 문제가 아닙니다. 그 정의는 자기, 정의는 하느님의 심판이니까 불의에 대한 대가를 치룬 것이니까 자기에서 줄이어야 된다. 치러진 만큼 상대 형제에게는 생명이 약동한다. 내게서는 죽음이 설치고 상대편에서는 생명이 약동한다. 그것이 복음이요. 복음을 전하는 태도, 형제의 잘못을 내가 당하니까 그 게 사랑이요. 두 손에는 정의의 무기를 들고 영광을 받거나 수치를 당하거나 비난을 받거나 칭찬을 받거나 언제든지 하느님의 일꾼답게 살아갑니다. 칭찬을 받으면 더 좋다. 아직 핍박, 욕을 얻어먹으면 더 좋다. 왜 그래요? 영적으로는 더 좋아. 왜 그럴까요? 
 


 하늘에 무엇이 있다고요? 상입니다. 상, 오히려 칭찬은 까닥 하면 속아 넘어가 떨어진다. 말이야. 시험에 낙제가 된다. 칭찬은 시험이지. 진짜는 아니에요. 사탄에 지금 사탄이 그 이용하는 무기가 된다 말이야. 칭찬은, 사탄은 아닌 것이 다 칭찬을 해가지고 막 유혹을 한다. 
 칭찬을 받거나 언제든지 비난을 받거나 칭찬을 받거나, 사람은 참으로 바로 믿으면 미쳤다는 소리도 듣고. 이단이란 말도 듣고. 비난을 받게 돼 있습니다. 또 반면에 칭찬도 받고.
 그 칭찬은 비교적 안 믿는 사람 사이에서도 양심적인 사람입니다. 보통사람은 저 개화도 생활이요. 밖에서는 뭔 소리가 들려오는가? 더러 귀 귀우려 보죠. 처음 먼데서 들리는 소리는 개화도에 뭐 이상한 사람들이 사교가 있다고 하는데 기독교는 기독교라 이름은 있는데 자기들만 믿고 또 예수님 믿으란 말도 안하고 예배도 예배당도 안가고 자기 집서 모두 예배를 보고 그런 곳이 있다면서 이장님이 들에 가니까 저 뭐 한 십리 떨어진 마을에서 와가지고 들은 한 들에서 농사를 지으니깐 돌아가 사방 지금 꽥꽥 거리더라. 야. 이거 우리 소문이 그렇게 났는갑다 하고는 모른 척 했다고 그럽니다. 그래서 저도 알아요. 그런가 하면은 마을사람 아 참 수도원은 다르구만. 그 집안이 깨끗해. 그, 그런 것도 없어요. 내가 보기는 찌지리해. 뭐든지 이런, 언제나 점점 담장이 깨끗하게 가야하는데 정신이 지져 분하니까 이 모두 살림도 찌지분하다. 그런데 그 사람도 그렇게 또 어떤 사람은 야 이거 당체 담을 쌓아놓은걸 보나 무슨 일을 좀 봤는데 이 사람들이 뭐하는 사람들인가? 그리 농사만 짓고 경운기나 타고 다니고 저리 다니고 그 이상하다.  자기들이 수도원이라 이름을 붙이고 또 그래요. 언제 와서 말씀을 좀 들어보고 얘기도 해봐야지. 그런 사람도 있고 또 게 잡은 사람 아 우리 뭐 간데요. 언제 뭐 오십 원씩인가 얼마씩인가? 천 원씩인가 다른 사람은 그렇게 돈을 받는데 우리 식구만은 얼마인가 물어보지 않고 해주고, 그래지고는 가서 잡아도 주고 또 많이 잡으면 무거워 들 수도 없거든. 그 막 들어서 배에다 싫어도 주고. 내려다 주고. 그렇게 친절하니 엮어졌단 말이요. 그렁께 여러분 한 번 소풍오라 말해요. 고런데 한 번 따라 가면은 좋다고요. 진짜 굉장할 것이요. 다른데 소풍가는 것보다 한 번. 



 그럼 그럴수록 더 놀래서 주의를 해야 한다. 그렇게 보는데 성령께서 보여 진 것이지. 실지 자기 본 그 양심이 아니고 본 정욕적인 눈으로 봤어야 그러겠냐 말이야. 
눈은 사람에게 눈이 영의 눈이 있고 육의 눈이 있지 않겠습니까? 감정적인 눈이 있고 영적으로 보는 눈이 있지 않겠습니까? 
 이에 칭찬을 받거나 비난을 받거나 비난을 받아도 태연한 사람은 칭찬을 좋아하는 거 아니에요. 칭찬은 오히려 두려움이요. 그렇게 되라는 하느님의 축복이다 면 받아야죠. 인제 그렇게 되라는 하느님의 예언 저기로 봐야지. 지금 현재는 그렇게 안 된 것이, 안 됐다는 거다. 아직도 멀었다. 칭찬을 받아 버리면 교만해져가지고 사탄의 밥이 되어 버려. 
그러니까 비난을 받을수록 기뻐한 사람이 칭찬을 받을 때는 그건 사탄의 유혹이 떨어지지 않느냐고 조심한다 말이야. 속지 안 해. 
 칭찬을 받거나 언제든지 하느님의 일꾼답게 살아갑니다.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진실한 감정으로 볼 때는 이 저 저 속이는가? 우리 신앙의 교제라도 우리 성도 안에 교제라도 그래요. 한 예를 들면 제가 김 선생님의 신앙을 존경을 하죠. 아래 참 말씀을 참으로 말씀을 깨닫는 분이라 그리 존경을 하죠. 어떤 때는 거짓말 있게 해요. 아무 때 이렇게 합시다. 해놓고는 딱 안 하고. 아무 기별도 없어요. 

 그러지만 나는 거짓말로 믿지를 안 해요. 거기 가는 준비, 마음태세가 됐냐? 그러니 내 탓이지. 그 그분이 어째 허망한 소리를 그렇게 하면 믿을 수 없다. 그렇게 안 된다. 말입니다. 어이고 내가 거기 갈 준비가 안됐구나. 또 꼭 가자는 것도 아니고 그 뜻이 무엇인가 내가 못 알아듣는 것이지. 가자는 뜻이 무슨 뜻인가? 그래 이제 오해냐? 왜 그냐? 그 인격이 신앙이 믿어지니까 오해할 것이 없다. 우리는 신앙 교제에 있어서 오해가 많습니다. 그 많은 거 왜 그러냐? 그의 그 인격 그 안에 신앙 안에 성령의 역사 그것이 믿어지지 않은 것은, 

 그전에 동광원 청년들이 그런 말이 있었어요. 뭣을 이렇게 한다. 그래서 딱 거절 안 해요. 동광원 일인데 그렇게 하려고 했다가도 안 될 수도 있지만은 그 때 그 말이 하느님과 나와의 관계에서 들어야지. 꼭 그 사건과 그 사람과 이렇게 상대만 하면 오해뿐이에요. 언제든지 내게서 그 준비와 마음태도가 되지 안했다는 것만 알아야지. 그 환경이나 다른 사람 탓을 해서는 안 된다. 사람과 약조를 했다가 안 되더라도 내게서 뭣이 그 약조대로 안 됐다는데서 하느님께서 어기게 되었다. 그렇게 봐야지. 그 사람이 해야 그런가? 그렇게는 안 돼. 그 사람이 고의적으로 어겼다 하더라도 그래요. 우리는 그래야 사람들의 교제는 원만한 거여. 아무리 잘못해도 그럴 수 있는 것이다. 용납을 해요. 사람이다. 
아까 몇 절까지 봤습니까? 

 다시 9절 봅니다. 
 이름이 없는 자 같으나 유명하고 죽은 거 같으나 죽은 거 같으나, 나사로 다 죽었죠? 거 진, 거지니까 죽음 시(尸) 밑에 열 십(十) 보는 거 입 구(口)한 거 이거 살 거(居)자 아닙니까? 이는 이미 죽었다는 증거 아닙니까? 
 산다는 것은 바로 산다는 것은, 바로 산다는 거는 뭣이 죽었다는 거야. 죽고자 하는 자는 산다. 살고자 하는 자는 죽는다. 

 


 육적으로만 살고자 하는 자는 영적으로 죽는다. 영적으로 살고 싶은 사람은 자기가 자기 스스로 다 포기한다. 죽음에다 내 논다. 그것 아닙니까? 살 거(居)자 자체가 거기다 고렇게만 쓰냐하면 세 가지로 쓰는데 주검 신이 된다. 기댈 상 기 자도 살 거자입니다. 기댄다. 딱 기댄다. 신앙 의지한다. 신뢰, 하느님의 뜻에 탁 맡겨버린다. 그게 사는 거여. 바로 선거 그런 인자 자기 뜻은 죽었죠? 
 또 죽을 시(尸) 밑에 설 립(立) 한 것도 살 거자여. 그러면 인제 죽고자 했으니까 영이 살았다. 섰다. 말 섬입니다. 말 섬, 요 번역에는 모두 말씀이라 안 하고 말 섬이라 그랬습니다. 섰어, 말이 섰어. 권위가 있어, 살았다. 그래, 말이 산거여. 이 성경 구역, 구역은 말쌈이여. 살았어. 마니까 산다고 했어. 육은 마니까 영이 살았다. 겉 사람은 날로, 날로 부패해 가는데 속사람은 날로, 날로 새로워진다. 살아요. 사라진 만큼 살아진다. 사라진 만큼 죄가 사라진 만큼 영이 살아진다. 
 죽은 거 같으나 이렇게 살아있습니다. 정신은 살아있습니다. 믿음이 살아있습니다. 신앙은 생명이요. 살았어. 살아야 돼. 

 또 아무리 심한 벌을 받아도 죽지 않으며 이게 신앙입니다. 아무리 심한 벌을 받아도 죽지 않으며 슬픔을 당해도 늘 기뻐하고 슬픔을 당해도 늘 기뻐하고, 이거 진짜 기쁨 아닙니까? 육적으로 감정적으로 볼 때는 다른 사람이 보기도 저런 슬픔을 어째 견뎌내는고? 동정으로 그러겠죠? 
 그럴 정도지만은 아아 늘 심령은 기쁘다. 슬픔을 당해도 늘 기뻐하고 가난하지만 많은 사람을 부유하게 만들고 가난한데 많은 사람을 부유하게 만든다. 말이야. 그게 물질로 물질로는 아무것도 없어요. 자기 몸뚱이 하나밖에 없다는 말이야. 바울사도, 없지만은 영적으로 신령한 것으로는 많은 것을 소개해 준다. 받은 은혜를 다 나놔준다. 믿음이 부족한 사람은 믿음이 강하게 해준다.
 
 고 10절 요절로 우리 외우면 좋죠? 요절 외죠? 
 ‘슬픔을 당해도 늘 기뻐하고 가난하지만 많은 사람을 부유하게 만들고 아무것도 가진 것 없지만 사실은 모든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육안으로 보는 물질적인 것은 몸뚱이 하나뿐이지만 영적인 것은 모든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거에요. 영적으로 부자가 되어야 돼요. 영적으로, 우리는 영육 간에 가난하죠? 그러나 육은 부자 될 수 있으나 부자 돼도 영은 가난할 수 있습니다. 

 시편 106편15절
 '여호와께서 저희의 요구한 것을 주셨을지라도 그 영혼을 파리하게 하셨도다.' 
 저희들이 여호와께서 저희들이 요구한 것을 주실지라도 나 떡 주시오. 밥 주시오. 고기 주시오. 다 주실지라도 그러면 그럴수록 영혼은 파리하게 하신다. 말 짝 쇠약해. 그 인자 살고자 하니까 죽었어. 시방 영이 죽어. 파리해져, 죽고자 해도 아 이건 언제 죽어도 한 번, 한 번 낳으면 한 번 죽게 돼 있는 것이 인생이니까 일생일사 아닙니까? 했으니까 기왕이면 예수님의 뜻에 순종하고 맡기고 죽자, 신앙은 일단 모험이니까 죽음을 무릅쓰고 나서는 것이 신앙이니까 육도 잘살아보자 그런 태도로는 아직 신앙의 태도가 아닙니다.
 

 


 죽음을 각오하고 나서는 것이 신앙이야. 언제든 죽을 것이니까 주의 뜻대로 살아보고 죽자, 주께 일 분 일 초라도 한 번 순종해 보고 죽어야 한다. 주님의 뜻에 불편해도 막살아보고 그게 순종하고 죽어야 한다. 그래야지 매일 평생 캐내보면 다 헛되다. 하는데 무엇에 순종했냐? 자기 욕심에 순종하다가 뭣을 주겠다. 죽겠다. 그러다가 죽어. 그게 인간이여.  
 우리 살아본 결론은 죽겠다. 밖에 없어요. 아 죽기야 그 말 하나마나 죽는 것 아니요? 죽는  거예요. 근데 그 뭐 내용인즉 아이고 영혼도 죽겠다. 그래요. 육은 언제든지 죽을 것이에요. 그렁게 영은 죽는 법이 없죠? 부자 어디 죽었습니까? 영이, 영이 살아있으니까 음부에 와서 고통을 느꼈죠. 영은 죽는 거 아니에요. 그러니까 그 심판의 부활이에요. 부활만 받으면 다 진거 되는 거 아니라 말이에요. 심판이 부활, 인자 부활해가지고 심판을 받아, 땅에서 미리 나사로같이 심판을 안 받아버리니까 죽은 뒤에 심판을 받는다 말입니다. 

 나는 여러분을 내 자녀처럼 생각하고 말합니다. 여러분도 우리와 같이 마음을 활짝 여십시오. 
아 여기 보았구만요. 10절 봤는데 11절 안 읽고.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지만 사실은 모든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10절이요. 한 번 쫌 시간은 가깝지만은 10절 요절이니까 한 번 같이 따라 읽어갑시다. 그러면 쪼금 기억에 남을 런지.

 "슬픔을 당해도 늘 기뻐하고 가난하지만 많은 사람을 부유하게 만들고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지만 사실은 모든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왜 거짓말해요? 무엇을 아무것도 없는데 무엇을 가지고 있어? 신령한 거 물질적인 건 아무것도 못 될 뿐이여. 그러지만은 영적인 것은 모든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우리도 여기 나온 것은 영적인 은혜를 받아보고 싶어서 나온 거 아닙니까? 

 11절
 '고린도 교우여러분 나는 여러분에게 숨김없이 다 말하였고 내 마음은 여러분에게 활짝 열려 있습니다.' 
 우리 지금 모처럼 요렇게 떨어져 있다가 모였어도 그 통사정 활짝 열어놓고 얘기 못해요. 하라 해도 부끄럽고 어쩌고 그런다. 마음 활짝 열어놓고, 하아 여기 살아보니까 어떤 문제에 걸려서 참 고민했는데 그런 건 어떻게 풀어야 돼지요? 아 그런 거 해야지. 어떤 문제를 풀어 보려다가 참 못 풀었다고, 그런 문제는 어디 성경이고 어디 대답 해 주겠습니까? 그런 질문들을 하셔야지요. 언자 거룩히 되는 길 다음에는 뭣이 문제죠? 뭔 문제? 벌써 잊어버렸죠? 성경도 미리 다 알려드렸죠? 모두 다 오기는 왔습니다. 질문하니 와 그런데 인자 발표는 해야 하는데 어떨지 모르죠? 하기 싫어도 해야죠? 

 '고린도 교우여러분 나는 여러분에게 숨김없이 다 말하였고 내 마음은 여러분에게 활짝 열려있습니다. 여러분을 대하는 우리의 마음이 옹색한 것이 아니라 여러분이 자기마음을 스스로 옹색하게 만들었습니다.' 
옹색하게 만들었습니다. 이거 7장이다. 요거 7장보면요. 
자기들이 잘못을 뉘우치면서 만나보기를 갈망했다는 거 얼마나 마음이 넓습니까? 우리의 잘못을 뉘우치면 자꾸 어디로 숨고 그러는데 말이요. 피하고 안 오고 그러는데, 잘못을 느끼고 뉘우칠수록 하이고 만나봐서 어서 사과를 하고 다른 신령의 은혜를 또 받아야 할 텐데, 사과로 내 잘못을 고하고 그래서 만나보기를 갈망했다. 

 우리 잘못한 거 있으면 아이구 이 요번에 못가겠다. 누가 그 좋은 것 같지만 좋은 거 아니다. 저도 그런 그 제가 태도가 그랬어요. 하이고 나는 좀 그것을 식구들끼리 실력 없고 부끄러우니까 거기 가서 뭔 말 하냐? 다 해봤던들 되지도 않을 거, 그런 생각 가졌다. 
 여러분을 대하는 우리의 마음이 옹색한 거, 좁은 것이 아니라 여러분이 자기마음을 스스로 옹색하게 만들었습니다. 어째서 옹색, 스스로 옹색을 만들었는가? 스스로 자꾸 피하고 숨고 자기 마음을 열어놓지 안 하고. 이 만나면 그런 말도 안하고 자꾸 숨으니까 할 수 없어요.
 쪼금 자기 맞지 않은 사람은 올까 무섭고 오면 탁 때려버리고 그냥 무작정 맞아요. 다 필요 없어. 갈 데가 없어. 이런 넓은 천지라도 몸 하나 엇다 좀 잠깐이라도 안정 누리고 있을 데가 없다는 말이요. 내 마음이 좁으니까. 아 넓은 사람은 만물이 초목이 아이고 어서 오십시오. 초목이 만물이 하느님의 자녀가 나타나길 고대한다고 했습니다.
 마음이 활짝 열린 사람은 대자연도 환영을 할 텐데 말이야. 아 사람끼리 서로 환영을 못 받고 아 여사람 앞에서도 환영을 못 받고. 어디다 숨으려고 해봤던들 그럴 수는 없다 말이요. 쪼그라졌다. 마음이 넓지 않다. 
 그러니까 이 감정적인 욕망을 채우려고 하면 할수록 영적인 것은 좁아진다. 이 스스로 옹색한 것은 자기 그, 자기 뜻, 자기 고집, 자기 하고 싶은 것, 그것 때문에 좁아진다. 
 육체 욕망 채우려고 하면 할수록 영은 좁아져. 여호와께서 다 그 요구를 응해 주셨을지라도 심령은 파리하게 만드신다. 
 그러게 사도들의 탓이 아니에요. 사울은 어디까지나 다른 사도 대할 때 원수거니 누구든지 그 쪽에서 용납만 하기를 바라는 거야. 다 문 나가 있으면 갈 수가 없어요. 사랑이니까 저쪽에서 못하게 하면은 할 수가 없어요. 

 여러분을 대하는 우리의 마음이 옹색한 것이 아니라 여러분이 자기마음을 스스로 옹색하게 만들었습니다. 나는 여러분을 내 자녀처럼 생각하고 말합니다. 여러분도 우리와 같이 마음을 활짝 여십시오. 활짝 여십시오.
 다른데 그 구역에는 그게 나의 사랑을 가두십시오. 개역에는 보답하는 양으로 마음을 넓히라. 그랬나요? 보답. 그래 우리도 원 안에서 동광원 통해서 혹시 내가 은혜를 받았으면 동광원에 지금 여 폐질환자 사회사업을 한다. 아 그럼 그이들에게 뭐 필요한 거 내 갚아야 한다. 성의가 나타나겠죠? 은혜를 받았으면 그러면 그럴수록 넓어지는데 은혜는 받았다 하면서 교제가 끊어집니다. 우리 동정심 없습니다. 또 그냥 주어버려야 한다. 자기 욕심만 채우면 안 되고 그냥 줘버려야 된다. 자꾸 주면 줄수록 마음이 넓어진 거예요. 자꾸 모아 들일라고만 하면 자기만 욕심 챙기면 무장 쪼그라져요. 그런 것 아닙니까? 텅 빈 마음에다 욕심으로 꽉 차버리니까 숨을 못 쉬죠? 영이 기가 맥 힐 웅덩이죠? 기가 맥 힐 수렁이죠? 

 


 시편 40편1~3절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예 기다리고 기다렸다.’ 그러면 어떻게 기다리느냐? 가만히 암 것도 안 하고 먹지고 안 하고 기다리는가? 일도 안 하고 기다렸단 말은 부르짖었단 말이에요. 무엇을 부르짖었는가? 또?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 
기다린다. 한 게 막연히 가만히 여기 이렇게 다 하느님이 해 주시겠지. 아니라 부르짖었어요. 부르짖어. 그 말을 들어주셨어. 하느님이 그 부르짖은 소리를 기다리고 기다리면서 기다린 것은 하느님의 능력이 나타나기를 기다린 거여. 그 수렁에서 이제 심령을 건져 주기를 기다림과 동시에 자기를 건져주시오. 부르짖었다 말이요. 

 하느님의 손이 역사하기만 기다리고 자기가 할 일은 자기가 부르짖었어. 여기서 건져주십시오. 내 심령이 지금 숨이 막혀 죽겠습니다. 시편은 다윗의 글이 많습니다. 다윗의 시죠? 많고, 다른 사람들이 있지만은 다윗을 그리스도라 합니다. 그리스도, 그리스도께서 그리스도를 다윗의 아들이라 그런 말은 다윗이 곧 그리스도의 상징이라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께서 모든 심령이 지금 수렁에 빠져 있거든요. 게 모든 심령을 대표해서 부르짖는 소리여. 다윗을 예수로 본데가 어디냐 하면은 시편 22편18절 에 있습니다.

 옷을 제비뽑아 나눈데.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 뽑나이다. 그 다윗이 먼저 그런 일이 있습니까? 언제 십자가 지고 뭐 그 옷을 누가 나눴습니까? 그러니까 그 모든 심령들이 수렁에 빠진 줄 모른다 말이요. 기가 막힌 심령이 기가 막힌 웅덩이에 빠져 있는 걸 몰라요. 그래 거기서 건져 주시라고 예수님이 지금 기도하신다. 그 말이에요. 그래서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위에 두 사, 자 반석위에 끌어올려 주셨습니다. 기도를 들어 주셨습니다. 이것이 진짜 기도입니다. 내 심령이 지금 어디 빠져 있는걸 알고 의식하고 여기서 끌어 주십시오. 부르짖고, 울부짖고, 기다리고, 기다리고, 그랬더니 반석 우에다 튼튼한 반석 우에다가 발을 절대안정, 불안 공포는 없습니다. 그래서 그 뿐입니까?

 내 걸음을 견고케 하셨도다. 견고케 했습니다. 새 노래 곧 우리 하느님께 올릴 찬송을 내 입에 두셨으니 입에 두었다. 하느님께 올릴 찬송을 그 새 노래 새 노래 입에 두었다. 또 많은 사람이 보고 두려워하여 찬송을 노래를 봅니까? 듣습니까? 그런데 본다고 했어요. 생활을 보는 것이여. 정신이 새로워졌고 새로워진 생활이 이를 도왔다. 그래서? 보고. 어떻게? 두려워하여 여호와를 의지하리로다. 여호와를 의지한다. 많은 사람들이, 사람들이 나와요. 그게 전도입니다. 전도, 자기 새로운 생활만 보여주니까 나와요. 

 저 부안 개화도 생활은 아직 뭐 마을사람들이 한 사람 나오기는 나와요. 그러나 또 어떤 집사 부인이 나왔을 때는 이 말씀 들으려고 나왔을 때는 가야지 말하지 않았다고 김 선생이 그럽디다. 올 사람이 와야지 아무라도 와도 안 된다. 그가 간 뒤에 말했습니다. 내가 보기에도 무안 합디다 요. 어찌 말씀 들으면 좋아하시면서 말씀안하시고 말 안하겠다. 그이가 가야한다. 그 막 곁에 와서 앉아있는데 기도하고 있는데 가란 태도여. 긍게 다른 요구에 의해서 왔거든요. 나중에 그에게 우리 모 솎아 가라 했는데 인제 김 집사는 그거 모르고 솎아 갈 거 없다고 보내버렸다. 긍게 괘씸하게 생각했어. 그렁게 오해가 생겨, 저나 이 장로님은 아 그 좀 솎아주었으면 쓰겠다. 아 그리 솎을 일이라서 놉을 삼십 명이나 얻었거든요. 아 그러니 그저 솎아간다는데. 어서 솎아가라 해야지. 돈 안 들게 솎게 했는데 안 주었으니까 솎아야해. 지금 그렇게 안 솎아 논께 지금 모 병이 걱정이여. 걱정이라니까 좀 사람들은 욕심 있으니까 아까워서 못 솎가요. 
 저는 속으로 울고 있어요. 조금만 뿌려라 해도 막 주먹으로 뿌려버려요. 그러니 그 솎을 일이 얼마나 일거리 욕심, 욕심 좀 인색하지만은 쫙 갈아버리고 하나만 둬 버리면 고놈이 영글게 퍼진다 말이요. 짱짱 혀. 고놈만 수확하면 짱짱하고 좋다. 그 약 쓸 것도 없다. 
돈 많이 들이고 거름 많이 들고 또 약이나 하고 수확은 적게 하고 걱정이다.  
지금 잘 됐지만 안심은 못해요. 수확을 할 때 봐야 한다. 지금 몰라요. 
갚아야 한다. 갚아, 마음을 여는 일은 갚는 일이요. 모든 것을 버리면 모든 것을 얻는다. 그 말 아십니까? 버리면 버리는 것이 아니라 얻는 것이에요. 왜 그래요? 가령 논 한 다랭이가 내 것이다 하면 ‘내 논이다’의 범위를 못 벗어나죠. 고 내 것에 갇혀 있는 것이다. 내 몸이다 하면 내 몸에 매여 사는 것이 인간이다. 이건 주님의 것이다. 하고 주님의 뜻대로 쓰는 사람이 낼게 없죠? 주께서 알아서 하실 테니까. 병을 들게 하시든지 건강하시든지 약하게 해야 되는지 살게 하시든지 죽게 하시든지 아 주님 당신의 몸이니까 당신이 알아서 하십시오. 걱정할거 없단 게 어디 있죠? 

 고린도전서 6장13절
 음식은 배를 위해 서있고 배는 음식을 위해 서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는 하느님께서는 이것도 저것도 다 없애 버릴 것입니다. 몸은 음행을 하라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을 섬기라고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