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일

오월 초하루 : 예수를 아는 지식

mamuli0 2023. 5. 1. 06:59

 오월 초하루 아침 연산은 날씨가 좋았다. 들깨 씨앗도 뿌렸고 토종 오이도 심었다. 수선화 모종도 했다. 마늘쫑이 올라온다. 입하가 다가 온다. 서쪽궁 새(소쩍새)가 밤마다 울고있다. 한번도 본적이 없다.

 

 

예수를 아는 지식

 

1985. 5.11 오북환 장로

 

이기주의나 가정주의 가족주의가 어디서 생기느냐? 마태복음 12장 46절,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형제냐? 예수께서 아직 군중에게 말씀하시고 계실 때에 예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밖에 와 서서 예수와 말씀을 나눌 기회를 찾고 있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예수께 선생님 선생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선생님과 이야기를 하시겠다고 밖에 서서 찾고 계십니다. 하고 알려드렸다. 예수께서는 말을 전해준 사람에게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형제들이냐 하고 물으셨다. 그리고 제자들을 가리키시며 바로 이 사람들이 내 어머니이며 내 형제들이다. 제자들에게 어머니라고 이 사람들이 내 어머니이며 내 형제들이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다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다. 하고 말씀 하셨다. 이거 거짓말이겠어요? 거짓말 했겠어요? 어떻게 제자들이 어머니가 되느냐? 그런데 어머니라고 그러지 않았어요? 제자들이 예수를 낳았다. 그 말 아니거든요. 그러니까 이건 예수의 가족에 들어가면 천국, 여기 빌립보 3장 목표를 향한 달음질, 12절서부터인데 우리가 읽습니다. 나는 이 희망을 이미 이루었다는 것도 아니고 또 이미 완전한 사람이 되었다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나는 그것을 붙들려고 달음질 할 뿐입니다. 이 희망이 무엇인가 희망을 봐야 합니다. 이 희망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6절서부터 봅니다. 옛 사람으로 말하면 교회를 박해했던 사람입니다. 율법을 지킴으로서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을 받는다면 나는 조금도 흠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나에게 유익했던 이런 것들을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장애물로 여겼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나에게는 모든 것이 다 장애물로 생각되고 나에게는 내 주 예수를 아는 지식이 무엇보다도 중대합니다. 예수를 아는 지식은 있어야 할 것 아니요? 예수를 아는 지식은 있어야 돼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있어야 돼요. 무조건 지식이면 무시해서 되나요?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무엇보다 존귀합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모든 것을 잃었고 그것들을 모두 쓰레기로 여기고 있습니다. 예수를 알아놓으면 세상 물질적인 것 쓰레기야 쓰레기, 똥과 같이 배설물로 여긴다 그거야. 그것은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그리스도를 얻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얻었어요. 창조주가 아버지란 말입니다.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하나가되면 모든 것이 쓰레기로 여겨질 만큼 그리스도가 알아진 만큼 그렇게 되는 것 아니냐 그 말입니다. 그리스도에 대해서 모르니까 예수보다 다른 것을 더 사랑하고 귀하게 여기는 것 아니냐 말입니다. 내가 율법을 지킴으로서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얻는 것이 아니라, 아니라 말이야. 자기가 잘해서? 자기 선행으로? 아니란 말이야. 내가 그리스도를 믿을 때 믿음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나를 당신과의 올바른 관계에 놓아 주시는 것입니다. 믿음, 왜 개인주의에서 못 떠나느냐? 왜 가족주의에서 못 떠나느냐? 믿음이 없음이라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없어요. 그리스도에 대해서 무식해 성경에 대해서 무식해요. 하나님께서 나를 당신과의 올바른 관계에 놓아 주시는 것입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알고, 그리스도를 알고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을 깨닫고 그리스도와 고난을 같이 나누고 그리스도와 같이 죽는 것입니다. 11절, 그러다가 마침내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기를 바랍니다. 요게 희망이에요. 이것이 목표란 말이야. 목표를 향한 달음질, 나는 이 희망을 이미 이루었다는 것도 아니고 또 이미 완전한 사람이 되었다는 것도 아니다. 다만 나는 그것을 붙들려고 달음질 할 뿐이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를 붙드신 목적이 바로 이것입니다. 형제 여러분 나는 그것을 이미 붙들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나는 내 뒤에 있는 것을 잊고 과거사를 다 포기해 버리고, 버려 버리고 앞에 있는 것 예수 앞에 있는 것만 바라봅니다. 예수만을 목표로 합니다. 누구 사람도 아니에요. 사람 목표를 했으면 틀려요. 예수만 목표에요. 신앙에 있어서는 예수뿐입니다. 다만 나는 내 뒤에 있는 것을 잊고 앞에 있는 것만 바라보면서 목표를 향하여 달려갈 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 나를 부르셔서 높은 곳에 살게 하십니다. 그것이 나의 목표이며 내가 바라는 상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성숙한 사람은 바로 이와 같은 마음가짐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만일 여러분이 어떤 문제에 관해서 다른 생각을 품었더라도 주님께서는 그것까지도 분명히 가르쳐 주실 것입니다. 어쨌든 우리가 이미 이룬 것을 바탕으로 해도 다시 앞으로 나갑시다. 형제여러분 나를 본받으십시오. 대담하지요. 사람 본받으라는 말 아닙니다. 나를 본받으시오, 라는 말은 그리스도를 본받으시오, 하는 말과 똑같을 수 있어요. 어째서 그래요? 바울사도가 나를 본받으시오, 하는 그 말은 그리스도를 본받으시오, 하는 말과 같다는 말이에요. 어째 그래요? 고린도전서 11장 1절 보세요.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처럼 여러분도 나를 본받으십시오.’ 그러니까 바울사도는 그리스도를 본받았거든 그리스도와 같이 나를 본받으라니까 여러분도 그리스도를 본받으시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은 것 같이 여러분도 그리스도를 본받으시오. 그 말 아닙니까? 바울사도 자신을 본받으라는 말 아니거든요.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았다. 그것을 여러분도 본을 받으라. 그 말이야. 그리스도를 본받은 그것을 본받지, 그리스도 없는 것을 본받으라는 말은 없어요. 사람 자랑하고 사람 따라가다 보면 그 사람을 본받으려고 하지 그 사람 속에 계신 그리스도를 본받지 않아요. 그것이 문제가 된다고. 어떤 인물 이 세종, 이 세종 또 이 현필 선생 하더라도 그분만 본받으려고 한다면 예수하고는 멀어져 버린다고. 그래 이 현필 선생님 살아계실 때에는 제 귀에 듣기에도 몇 번 그런 말을 했어요. 나 본받지 말라고 나 본받지 말라. 그래서 한번 저기 해방 후던가 육이오 후던가 그 쯤 되는데 이 선생님 한번 남원읍에서 수지로 나가 한 이 십리 되요, 한 절반쯤 앞에 가셔 그때는 인제 짚신인가 짚신일거예요. 짚신이나 고무신인가 모르겠어. 들고 앞에 가셔 그러면 나는 뒤 따라 가지요. 뒤 따라 가는데 저 만큼 가시더니 뒤를 돌아보시고 왜 신 벗었냐고 호통을 쳐, 그런 책망 비슷하게 하신다고, 그때 그대로 내가 대답한다면 왜 당신은 신 벗었소? 나는 당신 하는 대로 하려니까 나도 신 벗었지 않소? 그렇게 따지겠는데 그분이 하신 말씀은 무슨 뜻이 있다고 그렇게 보니까 무슨 뜻일까? 그때 알아듣기로는 사람모양 행동만 본받지 말라. 그렇게밖에 못 알아들었어요. 그래서 인제 신 신었던가? 기억이 없지만 물론 신었겠지요? 왜 신을 벗었냐고 했기 때문에 신었겠지요. 그렇지만 무슨 뜻일까? 당신은 또 신었든가 모르겠어요. 벗고 가니까 나도 벗고 간 것인데 왜 신을 벗었냐?

 

 

나중에 곰곰이 생각하니까 말입니다. 본받는 것을 책망한 것이 아니고 밤에 할 소리가 있거든요. 어두운 밤은 아니에요. 아주 캄캄한 밤은 아닌데 해가 저물어서 어두워지려고 요새 같으면 일곱 시 몇 분에 넘어간다고 여덟시 쯤 되었을지 여덟시 조금 넘어갔을 런지 모르지요. 어제 저기 갔다가 해변에 가서 너무 저물어 그때쯤 돌아올 때쯤 되었는가봐, 왜 발에 신을 벗었나? 마음은 깜깜한데 행동만 보면 되냐 그 말이야. 마음이 먼저 그 사람의 받은 성령 그 사람의 마음을 알아볼 수 있는 것이 문제이지 행동만, 모방은 행동만 모방한다. 행동만 모방해서 무엇 합니까? 성극이라 해서 예수님 십자가 지니까 나도 십자가 지고 걸어서 됩니까? 행동으로 십자가 져, 마음의 십자가는 안지고 몸에만 그때 가서 십자가 지고 자랑하면 되요? 그러면 다 구원이 확실하게 되려면 십자가 다 장사지내야 하지 그러면 되는가? 날마다 십자가 지라고 그랬지 뭐 한번, 한번 몸만 잠깐 십자가 지는 거 아니거든요. 날마다 십자가 지라고 어제 청년들 십자가 졌어요. 몸으로는 했지 마음으로는 몰라요, 마음으로 십자가가 더 크거든요. 몸이야 젊은 사람이면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것 아니에요? 저는 어제 해봤어요. 큰 바위 같아, 이런 큰 바위 같은 것을 리어카에다 싫고 끌고 밀어 댈 때 조금 서너 발 가면 아이고 겁에 질려버렸다고요. 조금 지고 나 몸살이 나서 누워버렸어요. 생전 처음으로 힘써버리니까 있는 힘을 다 빼요. 어디 몸이 아프냐고? 아니 괜찮다고, 일도 하기 싫은 마음으로 하면 수월한 일도 지쳐버려요. 그러나 마음으로 기분 좋으면 그거 다 문제가 아니야.

 

 

형제 여러분 나를 본받으시오. 또 그리스도를 본받으라는 말과 같다는 말이 갈라디아 2장 19절 20절, 그건 다 외워야 되는 건데 외우시지요. 어디 한번 외워 보세요. 갈라디아 2장 19절, (다 잊어버렸어요.) 벌써 잊어버려? 안 외우니까 외우라고 할 때만 조금 ‘너는 이미 율법의 손에 죽어서 율법의 지배에서 벗어나 하나님을 위해서 살게 되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달려 죽었습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사시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것은 나를 사랑하시고 또 나를 위해서 당신의 몸을 내어주신 하나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네 그만 봐요. 그러면 그리스도를 율법을 행해서 죽어버렸으니까 바울사도도 죽었어. 없어. 20절 보면 그렇지 않지요? 살고 있기는 있지요. 그러나 누가 살아요? 나는 율법에서 죽었다는데 또 누가 살아요? 그리스도가 살아있어요. 그리스도가 살아있단 말이야. 그러니까 바울사도 옛 사울은 없고 이제 바울로서 그리스도와 같이 사는, 산다는 말이야. 그러니까 그것이 개인주의 가족주의를 초월한 것 아니야? 그 믿음, 그러니까 왜 이기주의를 초월하느냐? 믿음이 없어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없단 말이야. 나를 믿고 재산을 믿고 자녀를 믿고 자신의 힘을 믿지 그리스도를 안 믿어. 내가 있어. 내가 내 가족을 믿고 또 사람을 의지하고 누구를 믿고 자기를 믿지, 자기 자랑을 믿지, 그리스도를 안 믿어요. 자기가 있어 율법의 손에 죽지 않았어, 옛사람이 있단 말이야. 그래 개인주의 이기주의는 옛사람이에요. 옛사람 그대로 아담의 성품 독사의 성품 땅에 속한 성품 그대로 갖고 사는 거야. 그래 그 당파심이 있어요. 자기는 율법의 손에 완전히 죽고 자기는 없어야 되고 자기 안에 그리스도만 있어야 한단 말이야. 말하자면 사랑만 있어야 돼요. 원수도 없고 누구나 자기 몸같이 사랑하는 것 그것이 그리스도가 있는 거란 말이야. 누구를 대하나 예수와 같이, 어제 낮에 새롭게 하소서. 시간에 그 여자 참 믿음이 좋습디다. 남의 첩으로 가는데 재취로 가는데 그 본처에서 낳은 딸하고 이해가 안 맞아. 제일 그 문제가 크다고 자기 친구 하나가 그 이야기를 하는데 그런데 친구에게 하는 말이 이제 그 딸이 둘인데 그 딸을 이제는 예수로 알고 모셔라 그거야. 그러면 해결이 되어도 그렇지 않으면 해결이 안 될 거라. 그렇게 권면했다는 거야.

 

 

그래 그 말을 듣고 눈물을 흘리고 그랬다고 하는데 그거에요. 예수를 알기 전에는 원수 시 하던 사람을 예수로 믿어지기 전에는 화목이 안 된다고, 그것 생각으로만 그렇게 되냐? 신앙으로 해야지. 자기가 예수 되어야 되지요. 그러니까 그러지 않아요? 저 무학 대사라는 사람이 있는데 이 성계가 왕이 되어가지고 그전에는 무학 대사가 스승인데 자기가 왕이 되니까 교만해져 가지고 한번 농담을 걸었다는 거예요. 만나가지고 무학 대사를 만나가지고 농담을 했어요. ‘그대는 주린 개가 먹이를 찾으러 다닌 것 같다.’ 태도가 그렇게 주린 개가 먹을 것을 찾는 행위 같다. 그러니까 무학 대사가 하는 말이 ‘아 임금은 당신은 부처님이 어디에서 설법하는 태도와 같소.’ 부처로 부처님 같다 이렇게 존칭하는 말을 했다. 그러니까 놀랬어. ‘나는 그대를 개라고 하는데 나를 부처라고 하느냐?’ 옳게 모두 맞은 것 같거든. ‘예, 부처 눈에는 부처밖에 안 보이는 것이고 개 눈에는 개 밖에 안 보이는 겁니다.’ 그렇게 말했어. 그러니까 부끄러워 죽겠지. 우리도 예수 화 되어야 모든 사람을 예수로 당신 눈으로 볼 것 아니요? 예수가 되어야 예수가 보이지 당신 몸으로 예수로 치면서도 예수를 머리로 안모시거든요. 내가 머리지 내가 머리지 예수는 머리고 우리는 지체인데 그렇게 이야기 안 해. 내가 머리가 되어버려. 두 사람만 모여도 서로 머리가 되려고 그래. 그러니까 시끄럽지. 가정마다 왜 시끄럽냐? 왜 큰소리가 나냐? 서로 머리가 되려고 그래 아내가 머리냐 남자가 머리냐 남자가 머리인데도 아내가 머리된 데가 많거든. 그러니까 그런 말도 있거든. 여자의 소리가 울 밖으로 넘어가면 벌써 그건 알아본다. 내 주장이 늘고 그리스도만 머리가 되요. 그리스도만 남자거니 여자거니 그리스도 안에서는 그리스도에게 있어서는 신부니까 그리스도만 신랑이지요. 아까 빌립보 3장 몇 절까지 봤지요? 17절, 형제 여러분 나를 본받으시오. 그 말은 그리스도를 본받으라는 말과 같다. 어째서요? 두 번째 했지 않아요? 나를 본받으시오 라는 말은 그리스도를 본받으시오 라는 말과 같다는 말이에요. 사람 본받으라는 말 아니고 바울사도 껍데기 사람 본받으라는 말 아니고 내 안에 그리스도를 본받으십시오. 그 말 아니에요?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살았다. 그러니까 그리스도를 본받으라는 말과 같다는 말이야. 또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 같이 여러분도 그리스도를 본받으십시오. 그랬으니까 그리고 여러분과 같이 우리를 모범으로 삼고 따르는 사람들을 눈여겨보십시오. 그리고 여러분 우리를 모범으로 삼고 그리스도를 모범으로 삼고 따르는 그것을 모범으로 삼고 따르는 사람들을 눈여겨보십시오. 내가 벌써 여러 번 여러분에게 일러준 것을 지금 또 눈물을 흘리며 말하는 바이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가 되어 살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원수, 십자가의 원수 몸만 기리는 것은 십자가의 원수야. 누가 수사도 누가 십자가의 원수 노릇을 잠깐 드러냈습니까? 어떤 태도를 태도가 십자가의 원수로 나는 마음에 없어도 그와 같은 태도가 어디에? 수제자, 마태복음 16장 23절에 있지 않아요? 예수님 죽지 마십시오. 그러니까 사탄아 나를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다. 그거 원수 아니요? 사탄아 수제자보고 사탄이라고 그랬단 말이야. 원수란 말이야. 사탄은 원수가 아니요? 네가 원수다. 내 원수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다. 그 십자가의 원수란 말이야. 죽기 싫어요. 육의 본능이란 말이야. 육은 죽기 싫어한단 말이야. 그러니까 아까 그 대학생 다른 사람을 살리고 자기가 죽었다. 그 죽음을 승리하지 않았어? 승리, 자기 육을 이겼단 말이야. 친구를 살리기 위해서 자기는 원수인 자기를 자기 몸을 버렸단 말이야. 그래 승리했다. 이겼어.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가 되어서 살고 있습니다. 육의 본능에 따라서 사는 것이 원수야. 십자가의 원수야. 친구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는 것은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다. 큰 사랑을 실천했어. 친구를 위해서 목숨을 버렸어. 그들의 최후는 멸망입니다. 그들은 자기의 배속을 하나님으로 삼았어요. 의식주에 매여서 살아요. 의식주를 더 사랑해 자기의 배속을 하나님으로 삼고 배 채우는 것을 하나님으로 삼고 자기의 수치를 오히려 자랑으로 생각하며 세상부귀영화는 하나님 앞에서 수치스러운 겁니다. 수치스러운 것 수치를 자랑으로 생각하며 세상일에만 마음을 쓰는 자들입니다. 세상일에만, 육적인 일에만 마음을 쓰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늘의 시민입니다. 천국 시민이에요. 예수의 가족 속에 들어있어요. 그러나 우리는 하늘의 시민입니다. 우리는 거기에서 오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고대하고 있습니다. 21절, 그리스도께서는 만물을 당신께 복종 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오셔서 우리의 비천한 몸을 아까 나사로 비천한 몸 아닙니까? 비천하고 천하고 거지 사람이 알아주지도 않아요. 식구로도 알아주지 않아, 부잣집 대문간에 놔뒀으니까 개는 식구로 대했지만 끈이 끈이 개는 밥을 챙겨줬어도 나사로는 떨어진 부스러기도 얼마나 부자니까 많은 부스러기가 떨어졌겠어요? 개들이 먹다가 서로 더 먹으려고 싸우다가 이렇게 떨어진 부스러기겠지요? 밥상에서 얼마나 떨어진 부스러기가 있겠어요? 당신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형상으로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아브라함 품에 있을 때 얼마나 변화되었겠어요? 능력을 갖으시고 오셔서 우리의 비천한 몸 거지같은 천한 몸 비천한 몸을 당신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형상으로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하늘의 시민권까지 천국 시민권 개인주의 가족주의 사회주의를 초월했어. 아주 초월해. 이것이 신앙이야. 그리스도 안에 사는 신앙 그러니까 간단하게 다시 말한다면 모인다. 모이는 것을 계속 보겠습니다만 모인다. 고린도전서 11장은 당파심 이기심 개인주의 서로 다른 당을 치는 것 역시 자기 당이 옳다고 고린도전서 3장에 있지 않아요? 나는 바울 파다. 베드로 파다. 아폴로 파다. 또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 파다. 그리스도 파라고 주장하는 자체는 그것도 파야. 파는 파 이것도 가짜에요. 그리스도파라 어제 낮에 신앙상담 했지요? 어떤 여자가 무엇을 물어, 그러니까 대답을 또 다른 사람들이 전화를 걸어서 대답을 줘요. 답을 해줘요. 그런데 어떤 여자가 자기 남편이 외국에 가서 돈벌이하러 갔는데 그동안에 돈 보내주는 것 가지고 집을 사고 돌아온다는 말을 듣고는 이제 그 집을 자기 명의로 고쳐버렸다고 남편 명의로 처음에 했다가 고쳐버렸다고 남편의 명의로 하려다가 자기명의로 했다든가 그리고 시어머니하고 불화해요. 그런데 시어머니는 그 무슨 이단 종교에 속해가지고 물질 돈을 갖다가 써버려. 거기다가 그러니까 시어머니가 싫어요. 그렇게 뼈 빠지게 돈 벌어다 집도 장만했기는 했지요. 돈을 많이 벌었던가봐. 그랬는데도 헛되게 갖다가 써버리니까 그 시어머니가 종교인이 아니기 때문에 기독교인이 아니기 때문에 그럴 것 아니에요? 그런데다 헛되게 쓰냐? 그래 싫어해. 남편이 돌아오자, 이래저래 다 보고를 해. 그 여자 이혼해 버려야겠다. 기어이 이혼을 했다는 거야. 그래 이 여자는 애기가 몇이나 있고 그러니까 애기나 남편을 위해서라도 될 수 있으면 이혼을 안 하려고 하나 자기가 이혼을 당할 조건을 만들어 버렸단 말이야. 살림을 쓰고 집도 자기 명의로 해버리고 그렇게 자기 마음대로 써버리고 시어머니를 존경 안 해버리고 무시하고 그래 남편은 당연이 너하고 안 산다. 이혼 해. 이혼 당해가지고 또 어디 교회를 갔든가 그 목사가 다른 남자 하나 상처한 남자인가 몰라. 자녀를 놓고 그 사람 죽었든가 홀아비하나 소개를 해줬어. 심심하니 같이 지내보라고 정식 재혼도 안하고 지냈든가 몸은 다 뺏겨버렸지요. 그래놓고 이제 어떻게 하느냐 그런 질문을 했단 말이야. 그런 어지러운 행실을 모두 대답해 주는 사람이 당신 바르지 못해요. 그런 질문을 할 문제도 아니다. 그렇게 섣불리 해놓고 그런 것을 물으려고 하느냐? 그렇게 여러 가지로 대답을 어떤 사람은 또 그 남편을 위해서 영혼을 위해서 될 수 있으면 참으시오. 참으시오. 그래 그것도 필요 없단 말이야. 정식으로 아까 그 해답이 그 여자는 그런 이야기도 해. 자기 친구 하나가 그런 비슷한 사건이 당했는데 본처를 낳은 딸이 둘이 그렇게 사이가 원수지간이야. 그래서 그렇게 대답해줘. 예수라고 생각하라. 예수 그러면 원만히 될 것이라고 그런데 그 권면이 그렇게 본인은 예수로 알아 지려는지 모르지만 권면한 사람은 그 이론은 그래도 실제는 그렇게 될 수가 있는 것이 아니다. 말은 옳은 거야. 진리야, 그렇지만 예수로 알게 될 때는 혼인 자체도 할 필요도 없다. 예수로 안다면 혼인 할 거예요? 예수 같이 살았어야지 혼인 한 자체가 벌써 땅에 속한 것이거든요. 거기서 무슨 문제가 원만하게 해결하는 자체가 틀린 거예요. 안 되는 거예요. 원리가 틀려버렸는데 원리원칙에서 벗어나 버렸는데 거기서 어디서 원만하게 되느냐 그거야. 될 리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거역해 버렸는데 그러니까 이것인데 저는 어디 소속한 교인도 아니지만 구교와 신교가 다른 것이 무엇이냐? 신교는 날로날로 이 파당 분쟁 당파 갈라지는 것이 장땡이야. 파당이 생겨 한 교회 안에서도 파당이 생겨요. 이 사회의 정부도 그렇지 않아요? 정치 안에서도 한 신민당 안에서도 그 안에서도 파당이 있다고 그래 누구를 중심으로 하는 파 누구를 중심으로 하는 파 그러니 그것이 잘 안된단 말이야. 완전히 하나로 되어야 할 텐데 거기서 또 분파가 있어요. 나는 누가 대통령이 되어야 되겠다. 다른 사람들은 못 할 테니까 파가 있지요. 그런데 구교는 나타나기는 내용은 조금씩 있을 지라도 그렇게 파당 경쟁심은 없거든. 파당이 없어요. 파당이래야 교황하나 지시아래 한 교황의 지시 하에 있다고 성공회가 그전에 구교에서 갈려나왔지만 그것도 성공회도 올바르지 않아. 다른 것이 무엇이야? 똑같지요. 그러니 인제 성공회가 인제 신부도 가정을 가질 수도 있고 그것만 다르지요. 그러니까 심지어는 원리원칙에서 벗어난 만큼 파당이 생기는 것이고 구교는 지도자들에 있는 분들은 원리원칙만은 지킵니다. 교황으로부터 추기경으로부터 대주교 주교 신부 수녀 다 원칙 예수님같이 독신이거든 그런 만큼 겉으로 파당이 안 갈라집니다. 신교는 그렇지 않아요. 원칙이 그래 노니까 자꾸 날로날로 갈라져, 그리고 갈라진 만큼 당파심이 있어요. 뭐라고 그랬지요? 19절에 고린도전서 11장 19절에 유익한 점 파당이 없을 수는 없으나 진실한 사람이 드러나기 위해서는 없을 수 없다. 그 말은 무엇이냐 하면 아무 파당에 소속되지 않은 사람이 드러나 버려. 나는 구교다. 나는 어느 파다. 어느 당에 속했다. 그런 것이 없어요. 초월해 버린 사람, 그런 사람이 드러나기 위해서는 파당이 없어야 한다. 이 동광원은 파당이 아닌데 아무 교파도 아닌데도 스스로 자기가 파를 만드는 것뿐이지 나는 이것이 옳다. 스스로 자기가 만든 것이지 이건 파당이 아니거든요. 교파가 아니거든요. 교파가 아니야. 의식도 여기 딱 규정이 되어있는 의식도 없어요. 어느 집회에 가게 되면 그 집회에 그대로 따라가요. 나 어느 집에게 갔는데 누가 박자를 치면 나도 따라 치겠는데 속으로만 쳤네요. 그런 것도 대개 모이면 열심히 하거든요. 나는 또 그대로 하는 거예요. 나는 이런다. 고집을 피울 것이 아니야. 파당이 아니야. 그쪽 모임에 가면 그쪽 모임을 존경을 하고 그대로 하는 거지요. 그대로 안하려면 뭐 하러 가요? 뭐 하러? 히브리 11장은 어떤 마음으로 모이냐? 그걸로 끝나고 히브리 10장에서는 어떤 모임으로 끝 나냐? 22절 19절부터 믿음을 굳세게 믿음으로 모이는 거지요. 그러므로 형제 여러분 예수께서 피를 흘리심으로서 우리는 마음 놓고 지성소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지성소, 그래 인제 담대한 마음이에요. 예수께서는 지성소의 휘장을 뚫고 새로운 살길 새로운 살길을 발견합니다. 살길을 우리에게 열어 주셨습니다. 이런 정신으로 모입니다. 새로운 살길, 그 휘장은 곧 그분의 육체의 십자가야. 예수님의 십자가에요. 육신이라는 말입니다. 몸이에요. 몸 그 휘장은 곧 그분의 육신이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집을 다스리시는 최고의 사제, 제사장 사제가 계십니다. 22절 우리의 마음에는 그리스도의 피가 뿌려져서 나쁜 마음씨가 없어지고 우리의 몸은 맑은 물로 씻겨 깨끗해 졌으니 이제는 확고한 믿음으로 모여 확고한 믿음 내 죄를 사했다고 하는 확고한 예수님은 

 

 

진실한 마음 어디 진실은 사람이 없다고 했지요? 진실 있어요? 없어요? 무엇을 봐서 없다는 증거가 어디 성경을 봐서 없다는 증거가 드러나요? 진실이 없다는 것 그 대답은 갈라디아 4장 15절 16절을 보면 시간이 없으니까 빨리빨리 봐요. 갈라디아 4장 15절 16절, 진실이 없다는 것 그때에 여러분은 어디로 갔습니까? 분명히 말하지만 그때에 여러분은 만일 가능하기만 했다면 눈이라도 뽑아서 내게 주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이제 내가 진실을 말한다고 해서 여러분들이 나를 원수로 여기는 것입니까? 예, 그때 갈라디아 교인들이 바울을 어떻게 했냐하면 병들었는데 병들어 누워있었는데 그런데 어떻게 대해줬냐? 예수와 같이 하나님과 같이 천사와 같이 그렇게 대해주고 또 가능하기만 하면 의사의 말대로 바울사도는 무슨 병이 있냐하면 안질 눈에 병이 있었단 말이에요. 그 눈이 못쓰게 되었다면 다른 사람 눈 하나 빼서 꽂으면 되겠습니다. 의사가 그런 판단을 했다면 그 사람들이 아 그러면 내 눈 빼서 쓰십시오. 내 눈 빼드리겠습니다. 그럴 정도로 사람의 편에서는 진실이에요. 그랬는데도 그것이 순수한 진실이 아니기 때문에 진실을 말하니까 원수가 되어버렸다는 거예요. 감정적인 신앙 정도가 있지 않아요? 감정적인 신앙은 눈이라도 빼어줄 만한 열성과 진실을 나타냈는데 아 진리를 말하니까 원수가 되었단 말입니다. 바울사도만은 그리스도를 본받았고 그리스도를 전하니까 진실이 있지 갈라디아 교인들은 그렇게 까지 열성을 부렸어도 진실이 없다는 말입니다. 없어요. 그러면 우리는 어떻겠어요? 갈라디아 교인들보다 더 열성을 한다고 하더라도 예수로 대하고 지도자를 예수로 대하고, 그렇게 눈이라도 빼어줄 사람이 어디 있냐 말이요. 참으로 몸을 아끼지 않고 빨래 다해주고 밥해주고 별별 수호를 다해줘도 나중에 공치사를 한다. 허물을 드러내고 그러면 뭐하려고 봉사를 하느냐? 스스로 죄를 짓지 않냐? 봉사는 힘껏 희생 것 다해놓고 다른 사람에게 칭찬을 받아놓고 어렵다. 다 해놓고는 그리고는 내용으로는 빗나간다고 그러면 자기 욕심 따라서 한 것 아니냐 말이야. 자기 욕심 따라서 그런 것 아니냐 말이야. 그래야만 자기 이득이 올 테니까 그래놓고는 비난해 버리니 그것 뭐야? 맑은 물로 씻기어 깨끗해 졌으니 이제는 확고한 믿음과 진실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갑시다. 우리에게 약속한 축복을 주시는 분은 진실한 분이시니 우리가 고백하는 그 희망을 굳게 간직하고 서로 격려해서 사랑과 좋은 일을 하도록 마음을 줍시다. 사랑과 사랑으로 모이고 좋은 일을 하도록 사랑과 좋은 일을 하도록 서로 모이는 것과 봉사를 하도록 배우는 일이거든 봉사 하는 것은 훈련하는 거야. 서로 존경하고 서로 높이고 도와주고 사랑과 좋은 일을 하도록 마음을 씁시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처럼 같이 모이는 일을 피하지 말고 서로 격려해서 자주 모입시다. 21절에서 예가 되어가지고 모임인데 22절 양심의 가책 자책하는 양심의 자책하는 마음을 깨닫고 모여야 되요. 우리 무엇이 양심에 자책하는 것이냐? 이것은 양심이 다 증거 하는데 하나님 앞에 떳떳한 것이냐? 하나님 앞에 떳떳한 일 같으면 사람 앞에 비밀이 있겠어요? 없겠어요? 없겠지요? 사람 앞에 사람의 양심 앞에서 떳떳해져. 그렇지만 사람 앞에도 내놓을 수 없는 일, 그런 일은 하나님 앞에 못 내놓을 것 아니요? 그러면 양심을 어긴 일 아니요? 하나님 앞에 죄라는 것 아닙니까? 사람한테 부끄러운 일이라든가 육이오 때 도암서 그랬다고 그래요. 빨치산들이 선량한 부인을 데려다가 취조를 합니다. 네 남편 어디다 숨겼냐? 바른말 하라고 그러면 내가 뭐 아니 바른말 하지 않으면 내가 꾀를 벗겨버린다. 나는 바른말 했다. 그 이상 나는 말 못한다. 그러니까 참말이냐고 그러면 아랫도리 꾀 벗어라. 그러니까 속옷도 싹 벗어버렸어. 하체를, 그러니까 자기들이 그렇게 해놓고 허허 웃어. 자기들이 오히려 더 부끄럽지. 그러니까 부끄럽지 않아? 그러니까 사람이 사람 앞에 부끄럽지, 짐승 앞에 개 앞에 꾀 못 벗겠냐? 짐승 앞에 부끄러움은 무엇이 부끄럽냐? 사람 앞에 부끄럽지, 우리말로 하면 믿는 사람 말로 하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하나님 앞에 나오는 우리는 지금 옷을 입었거나 무슨 상관있어? 우리 마음을 보고 우리 마음에 계시는데 하나님을 어떻게 속여요? 사람의 눈가림이라니까요. 옷은, 얼굴만 할 수없이 내놓지 눈만 내놓지 손발이야 손이야 내놓는 것이지만 야만인도 법이 없는 사람을 잡아먹는 야만인도 그전에 야만인도 하체는 가린다는 거야. 그렇지만 양심이 있다는 거야. 하체는 가리는데 아주 나체로 내놓고 사는 데가 있다는데 거기는 남녀가 따로 산답니다. 꾀 벗고 사는 데는, 그거 양심이 있답니다. 야만인도 사람을 잡아먹는 야만인도 그 양심의 법은 지켜요. 나체면 아주 꾀벗쟁이면 남녀가 따로 살아. 그러면 어떻게 번식 하냐? 그럴 때는 하나 잡아다가 번식을 한다. 그것이 양심이 있다는 거예요. 야만인도 그런데 오늘 양심 문명의 나라일수록 오히려 남자보다 여자가 더 살을 많이 내놓고 다니지 않아요? 여름이라고 겨울에도 그러고 싶지만 추우니까 할 수 없지 운동선수들이야 물론 할 수 없지만 그래요. 그러니까 인제 복잡한 시내에서도 착 나체로 다니는 사람 참 대단합니다. 부끄러운 줄 모르고 남자 청년들이 농촌에서도 그러지만 탁 손잡고 청년들이 남녀 청년들이 손잡고 극장에도 가고 요리 집에도 가고 그 양심은 마비되어 버렸어. 마비 부끄러운 줄 몰라요. 저번에 저기 가면서 버스 안에서 운전기사가 허허 참 어떤 사람은 얼마나 좋으면 내외간에 차타고 다닐까? 만인이 볼 것 아니요? 내외간에 같이 앉지도 않고 애기만 하나 데리고 있지 친구 인가봐, 자기 농담 하느라고 무슨 내외간이 어디 가냐 말이야. 애기 데리고 있고 부인은 저기 뒤에 타고 있는가봐 그랬는데도 비웃음을 하더라고 요새 국빈으로 가면 대통령들을 부부간에 가지요. 그전에야 어디 그랬습니까? 그전에 동양 예법이야 자기 아버지 앞에서 자기 아들 안고 까부는 것 그런 무례한 짓 안 해. 또 아버지 에게나 부모가 초상이 나서 죽으면 3년 동안 집안에 못 들어가요. 그런 점이 문제라 그건 꼭 지켜야 한다는 말이 아니고 부끄러운 것 양심의 가책 그것은 사람 앞에 못하는 것 사람 앞에도 못하는 것을 하나님 앞에 죄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말씀은 양심에 씌어져 있거든요. 양심에 자책하는 죄를 깨달아야 돼. 누구 남의 것을 훔쳐왔다 그것이 죄가 아니고 그것은 살림의 문제이지 하나님 앞에는 그런 것이 아니에요. 아니고 그 양심 말씀을 어기는 것이라고 말라는 것 하나님이 말라는 원칙을 이제 그것을 순종하는 거예요. 그걸 순종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냐? 죽어야 돼. 옛사람은 장사지내야 돼. 그것이 순종이야. 충성도 죽기까지 충성하라. 죽어야 충성한다는 말이야. 순종은 십자가에 죽기까지 죽어야 순종이야. 옛사람은 죽어야 순종이고 또 충성은 옛사람은 죽고 그리스도만 그리스도 안에만 충성이 있어요. 진실이 있어요. 그리스도만 진실이야. 그러니까 진실한 마음으로 확고한 신앙을 가지고 양심에 자책하는 죄를 깨닫고 맑은 물로 씻고 모여야지, 모였다 헤어졌다가 또 가정 가서 싸우고 밤낮 그런 것 마날 그 짓해요. 하나 유익하지 못해요. 영적인 모임이 아니에요. 그러니까 모일 집(集)자가 새조(鳥)밑에 나무 목(木)자이고 나뭇가지에 새가 앉았다가 훅 날아가고 어느 나뭇가지에 내가 앉았다. 기억이나 하겠소? 인제 닥치는 대로 앉고 싶으면 아무데라도 앉았다가 날아가고 그러는 거지. 그런 모임인 것 같다. 참 모일 집(集)자 달감(甘) 밑에 살필 심(審)자 또 이쪽에다 열십(十)자 십자가를 짝하고 달게 모인다. 십자가를 짝하고 달게 모인다. 그러니까 새 마음으로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예수님의 마음으로 양심의 자책하는 죄를 깨닫고 모이는 것 그것이 바른 모임이다. 확고한 신앙을 가지고 찬송합니다.

 

 

순례자의 노래 다윗지음, 이다지도 좋을까 이렇게 즐거울까 형제들 모두 모여 한데 사는 일 형제들 모두모여 한데 사는 일 아론의 머리에서 수염타고 흐르는 옷깃으로 흘러내리는 향긋한 기름 같구나. 헤르몬 산에서 시온 산줄기를 타고 굽이굽이 내리는 이슬 같구나. 그곳은 야훼께서 복을 내리는 곳 그 복은 영생이로다. 우리 믿는 사람들을 다 형제에요. 세계에 형제라고 그럽니다. 너희는 다 형제라. 여기 마태복음 12장 46절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형제이냐? 예수께서 아직 군중에서 말씀하고 계실 때에 예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밖에 와 서서 예수와 말씀을 나눌 기회를 찾고 있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예수께 선생님, 선생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선생님과 이야기를 하시겠다고 밖에 서서 찾고 계십니다. 하고 알려드렸다. 예수께서는 말을 전해 준 사람들에게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형제이냐? 하고 물으셨다. 그리고 제자들을 가리키시며 바로 이 사람들이 제자들, 성도 다르고 고향도 다른데 그리고 제자들을 가리키시며 바로 이 사람들이 바로 내 어머니이며 내 형제들이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다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갈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라야 천국에 간다. 마태복음 7장 21절 이하, 그랬단 말이야. 아버지 뜻대로 살지 않고 이적 기사를 행해도 예수와는 상관없다. 그 말씀 있지 않아요? 한번 봐야지요. 마태복음 7장 21절, 나는 너희를 알지 못 한다. 그런 제목이 붙어있습니다. 나더러 주님, 주님 하고 부른다고 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아니다.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간다. 뜻이 무엇일까? 그날에는 많은 사람들이 나를 보고 주님, 주님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또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행하지 아니하였습니까? 행하지 않았습니까? 하고 말할 것이다. 예언 했어요. 그러나 그때에 나는 분명히 그들에게 악한 일을 일삼는 자들아 악한일, 악한 일을 회개하지도 않고 주여, 주여 한다고 되냐? 악한 일을 일삼는 자들아 나에게서 물러가거라.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고 말할 것이다. 그거에요. 실제 당한 것이 아니라 앞으로 그렇게 될 것이다 하고 미리 말한 거예요. 예언했어요. 지금도 그러지요. 지금도 주여, 주여 한다고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고쳐야지 악한 일을 불법을 행했다고 그랬는데 개역에는 불법이야. 법이 아니야. 악한 일을 일삼는 자들아 그러면서 입으로 주여, 주여 한다고 되냐? 독사의 족속들이란 말이야. 악한 일을 일삼는 자들아 나에게서 물러가라. 나는 너희를 도저히 알지 못한다고 할 것이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이 무엇이냐?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려면 이적 기사 안 해도 좋고 그런 것 상관없고 이적 기사는 보이는 육체에 대한 병이 낫고 그런 것이 이적이라고 하나 그건 의사도 고칠 수 있고 내버려둬도 괜찮고 그러다가 천국가고 나사로가 병을 고쳐가지고 천국에 갔다는 데는 없지 않아요? 그런 비유지만 그런 말은 없거든요. 그대로 병이 있는 채 전신이 종기가나서 개들이 핥고 그래도, 그래도 병원에 갈 돈이 있겠습니까? 있더라고 그럴 필요가 없어요. 병이 있는 대로 좋다. 병이 있으니까 고생은 더 했거든요. 고생했기 때문에 천국에 가서 살지 않냐? 물론 고생했기 때문은 아니겠지요? 믿었기 때문에, 무엇을 믿었냐? 하나님은 공평히 하신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에 지금 불행하면 나중에 행복하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에 지금 육적으로 행복하면 영적으로 불행하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에 부자는 육적으로 행복을 찾다가 영적으로는 불행이 되어버렸단 말이야. 환난의 떡인데 반대로 살았단 말이야. 실제 육의 행복을 찾았단 말이야. 영적인 행복을 찾지 않고 육적 행복을 찾아버렸어요. 그래 영적으로는 불행해 버렸어요. 악한 일을 일삼는 자들아 나에게서 물러가라.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고 말할 것이다. 암만 이적 기사를 행해도 별별 병이 낫고 앉은뱅이가 걷고 소경이 눈을 뜨고 별별 이적을 행했다 하더라도 소용이 없다. 자기 마음이 고쳐져야지 그것 무엇 하냐 말이야. 누가복음 17장에 보면 열 명의 문둥이가 다 고침을 받았지요? 나았지요? 그런데 사마리아 사람 하나만 사례를 하러왔지요? 주님 앞에 감사합니다. 유대인 아홉은 몸에 병만 나았지 마음병은 낫지 않았어요. 여전히 마음은 나병이야. 나병, 나병이라는 말은 감각이 둔한 것을 말하는데 부모도 못 알아보고 자기 의를 모르고 감각이 둔해요. 나병은 감각이 둔해요. 추위와 더위를 잘 몰라요. 걸어가다 발에 신이 벗어졌는지 신어졌는지도 몰라. 마찬가지로 양심이 둔한 것을 나병이라고 그래요. 특별히 나병은 무슨 병이냐 하면 제일 추한 병이기 때문에 사람하고 접촉을 못하는 병이기 때문에 그러니까 사람은 하나님을 접촉할 수 없는 것은 말씀에 의한 죄에요. 특별히 색을 탐하는 죄란 말이야. 이건 전 인류가 아담의 자손이라면 아담 하와에게서 나왔다면 다 형제 아니겠는가? 형제인데 형제를 몰라봐요. 그런데 친형제끼리 혼인하는 경우가 어디 있어요? 없거든요. 한국 법은 조금 예법을 지킨다고 해서 될 수 있으면 먼데, 먼데 걸리지 않은 데로 혼인한다고, 그러나 어떻게 안 걸려요? 사돈의 팔촌까지 따지만 안 걸릴 사람 하나도 없다고 하는데 다 아담의 자손 아닌가? 그러니까 벌써 그것이 나병이에요. 감각이 둔해. 그러니까 지금은 형편상 그러지만 가족계획을 해서 식구를 많이 불리지 말자. 자녀는 꼭 둘만 낳아라. 하나 낳아도 좋고 둘만 낳아라. 셋까지 낳지 마라. 그랬는데 그것 상관없어요. 많이 낳으면 복이라고, 참으로 양심이 바른 사람은 천사와 동등이 되니까 무엇이 매이겠는가? 자유란 말이야. 매일 것이 없어. 자기 몸만 풀리면 아무것이 매일 것이 없어. 사람은 각자 자기 몸에 매이는 것인데 자기 몸에 매이니까 살림에 매이거든. 자기가 중심해서 자기에 매이지 않은 사람은 아무것에도 매이지 않거든, 단지 주님께만 매여야 되요. 주님의 종이 되어야해요. 주님의 것이니까 주님이 쓰시는 대로만 순종할 것뿐이지 어디다 매일 것이 없어요. 진정한 자유이지요. 24절 보면 그러므로 지금 말씀을 듣고 실행하라. 그러지 않아요? 그러므로 지금 내가 한 말을 듣고 그대로 실행하는 사람은 반석위에 집을 짓는 슬기로운 사람과 같다. 비가 내려 큰물이 밀려오고 또 바람이 불어 드려쳐도 그 집은 반석위에 세워졌기 때문에 무너지지 않는다. 그러나 지금 내가 한 말을 듣고도 실행하지 않는 사람은 모래위에 집을 짓는 어리석은 사람과 같다 비가 내려 큰물이 밀려오고 또 바람이 불어 드려 치면 그 집은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 것이다. 여기 모임에 대해서 말 계속 하는데 모임이 있지 않아요? 모임 제자들이 모여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데 또 어머니와 또 다른 형제가 찾아와서 이야기를 나누겠다고 그러면 그 모임에서 조금 나와 달라고 우리들도 이야기를 할 일이 있단 말이야. 아들이라고 자기 아들이라고 찾아왔어. 그런데 예수님은 누가 내 어머니냐 말이야. 누가 내 어머니냐?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내 어머니요, 내 형제와 내 자매다.

 

 

가족을 초월해요. 개인주의 가족주의를 초월하는 것이에요. 초월해, 여기서 저번에 김 선생님 말씀에 그랬어요.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선행이 아니야. 선을 행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초월해야지. 선행 정도로는 안 된다. 사람의 지혜로는 몇 시간이나 가냐? 무슨 성이 어디 있냐? 인간에게는 죄 뿐인데 무슨 선이 있냐? 가식으로 자기가 만들어가지고 자기 힘으로 선을 했다. 또 자기가 참겠다. 얼마나 참느냐? 그거야. 그래서는 안 된다. 초월해야 한다. 원수를 사랑할 수 있는 그런 마음이 되어야한다. 말이야. 원수가 곧 나다. 그렇게 믿어지기까지 변화를 받아야지. 아담 성품 가지고 무슨 참는 정도로 되냐? 전혀 불가능이다. 그랬어요. 여기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냐? 뜻을 실천한자가 내 어머니이고 내 형제다. 자매다. 뜻이 무엇이냐? 한군데 설명이 있어요. 여러 군데 뜻이라는 말이 많이 있지만 여러 군데 있어요. 뜻이라는 말은 그중에 한군데 볼까요? 데살로니가전서 4장입니다. 여기는 동광원에서는 요절로 알고 있지요? 이건 다 동광원 사람치고는 이 말씀 모르는 사람이 없다고, 그 말씀을 모르면 동광원 사람이 아니라고 할 정도니까 데살로니가전서 4장 3절서인데 1절서부터 읽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생활, 우리는 믿는다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생활을 해야 할 것 아니요? 사람만 기쁘게 해드리는 게 아니고 남편만 기쁘게 할 것이 아니고 아내만 기쁘게 할 것이 아니야. 자녀만 기쁘게 할 것이 아니고 또 부모 부자간에도 그렇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 서로 심령을 기쁘게 해드림이 된단 말이야. 부모의 심정 형제의 심정 아내의 심정 남편의 심정 마음을 기쁘게 해드리는 것이 된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지 않고 하는 것은 가짜란 말이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생활, 교우여러분 마지막으로 주 예수의 이름으로 부탁하여 권고합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살아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릴 수 있는지 우리에게서 배웠고 또 배운 대로 살고 있습니다. 살고 있는데 또 말씀을 한단 말이야. 그러니 앞으로 더욱 그렇게 살아가십시오. 더욱 그렇게 살아가도록 권면하는 거란 말이야. 전혀 생활이 다른데 권면을 못하거든요. 뜻도 다른데 어떻게 권면이 받아져요? 그러니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에게 권면을 해요. 여기에 대해서 다음에 대 보겠어요. 진리를 아는 사람들에게 진리를 말합니다. 전혀 진리를 모르는 사람에게 진리를 말 못해요. 또 성인이라야 성인을 알아본다고 하거든. 우리가 예수를 참으로 알라면 예수가 되어야 예수를 알아요. 그러니까 지금 예수를 모르는 것이거든요. 내가 예수를 몰라. 왜 그러냐하면 예수를 아직 예수 같은 심정을 안 가졌기 때문에 예수를 몰라요. 위에서도 말씀드렸지만 그 무학 대사가 당신은 부처와 같소. 부처가 어디서 사원에서 설법하는 태도와 같소? 어째 나는 그대를 개라고 하는데 그대는 나를 부처라고 하느냐? 개 눈에는 개밖에 안 보이는 것이고 부처 눈에는 부처밖에 안보입니다. 그 무학 대사는 부처의 마음을 가졌어요. 누구든지 부처로 봐요. 욕을 하건 무엇을 하건 상관없어. 그래 자기가 개의 심정을 가졌으면 개 같은 심정을 가졌으면 다 자기 외에는 개지 자기만 개 아니고 그렇게 밖에 안 보인다고, 자기가 예수의 마음을 가졌으면 한 몸이니까 예수의 지체니까 사람은 당신 몸으로 봐버려요. 그것이 사실이야. 개는 개를 알아보고 사람을, 사람을 알아볼 것 아니에요? 개가 사람보고 개로 안 여길 테지요? 사람이라고, 예수님은 모두 예수로 볼 수밖에요. 만물이 당신 지체니까 자기 몸으로 알아요. 그러니 앞으로 더욱 더 그렇게 살아가십시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생활을 살아가십시오. 여러분은 우리가 주 예수의 구원으로 여러분에게 지시해주는 것들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원하시는 것은 예수의 마음을 가지면 모두 예수로 알아보고 개의 심정을 가졌으면 다른 사람도 개로 보인다고 자기가 개니까 그러니까 진리를 아는 사람에게 진리를 말한다. 진리를 전혀 반대되는 사람에게 어떻게 말하느냐? 그것에 대해서 요한1서 2장 20절, 그러나 여러분은 그 거룩하신 분에게서 성령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모두 참된 지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참된 지식, 거룩한 분에게서 성령을 받았어요. 그러나 여러분은 그 거룩하신 분에게서 예수님에게서 성령을 받았어요. 성령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이 성령 받은데 어디 있지요? 사도행전 2장 몇 절이지요? 33절 보세요.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로서 성령을 받아가지고 사도들에게 주셨단 말이야. 사람은 성령을 못 받아요. 예수님의 손을 거쳐서 받아요. 하나님은 예수님을 믿고 주시지 사람은 믿을 수 없어요. 안 믿어요. 신용 안 해요. 어디 읽어봐요. 사도행전 2장 33절, 하나님께서는 이 예수를 높이 올려 당신의 오른편에 앉히시고 약속하신 성령을 주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아버지께로부터 받은 성령을 모두에게 부어주셨습니다. 예, 아버지께로 받은 성령을 주셨어요. 예수를 통해서 주시지 그냥 주시지 않아요. 그러니까 여기 보십시오. 그러나 여러분은 그 거룩하신 분에게서 성령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모두 참된 지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지식까지 부인해버리면 되겠습니까? 참된 지식인데 내가 이렇게 여러분에게 편지를 써 보내는 것은 21절이요, 여러분이 진리를 몰라서가 아니요. 모르면 편지를 쓸 수가 없어요. 지혜의 이름으로 진리를 알고 있기 때문이고 또 진리로부터 거짓말이 결코 나오지 않는다는 것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 편지를 쓰는 거예요. 진리를 알고 있기 때문에 쓰지, 진리를 모르면 편지를 못 써요. 쓸 필요가 없고 소귀에다가 경 읽기란 말이야. 진리를 모르고 대화 이야기를 한다. 서로 이야기를 나눈다. 서로 통하는 것이 있어야 이야기를 하지, 소하고 사람하고 이야기를 하겠소? 개하고 무슨 말을 하느냐 말이야. 여기 쪼끄만 개, 키는 작아도 나이는 많아 가지고 그 개하고 무슨 이야기를 해? 그러니까 다시 베드로전서 4장 여러분은 우리가 주 예수의 이름으로 여러분에게 지시해준 것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잘 알고 있으니까 말을 한단 말이지요. 예수의 구원으로 여러분에게 지시해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더욱 더 그렇게 살아가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원하시는 것은 개역은 하나님의 뜻은 그 말이에요. 하나님의 뜻은 뜻대로 행한다. 그 말이야. 하나님의 뜻은 그 말이에요. 개역에는 그렇게 말했거든요. 하나님의 뜻은 여러분이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에요. 거룩하게 살기를 워하시는 거야. 또 그렇게 하시는 분도 하나님뿐이시고 예수님뿐이고 우리를 거룩하게 살기를 원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시고 또 거룩하게 하실 분도 하나님이에요. 예수님이시란 말이에요. 이것은 히브리 2장10절 11절 보세요. 하나님은 만물을 창조하신 분이시고 만물은 그분을 위하여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당신의 많은 자녀들이 영광에 참여 할 수 있도록 그분의 구원의 창시자를 고난을 통해서 완전하게 한다는 것은 극히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사람을 거룩하게 해주시는 분과 사람을 거룩하게 해주시는 분, 그리스도입니다. 거룩하게 해주신 분과 거룩하게 된 사람들은 모두 같은 근원에서 나왔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거리낌 없이 그들을 형제라고 부르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형제다. 내 형제다. 거룩하게 해놓으시고는 내가 당신의 이름을 내 형제들에게 선포하며 회중 가운데서 당신을 찬미하겠습니다. 회중 가운데서 모임이란 말이야. 회중 모일 회(會) 모을 집(集) 그러거든. 회중 가운데서 집회라, 집회(集會)가운데서 당신을 찬미하겠습니다. 또 나는 그들을 그분을 신뢰하겠습니다. 하고 말씀하셨고 또 다시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자녀들이 나와 함께 여기 있습니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자녀들은 다 같이 피와 살을 가지고 있으므로 예수께서는 그들과 같은 피와 살을 가지고 오셨다가 죽으심으로서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악마를 멸망시키시고 한평생 죽음의 공포에 싸여 사는 사람들을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천사들을 보살펴 주신 것이 아니라 분명히 아브라함의 후손들을 보살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분은 모든 점에서 당신의 형제들과 같아지셔야만 했습니다. 형제들과 같아, 그래서 자비롭고 진실한 대 사제로서 하나님을 섬길 수가 있었고 따라서 백성들의 죄를 없이 할 수 있었습니다. 그분은 친히 유혹을 받으시고 고난을 당하셨기 때문에 유혹을 받는 모든 사람들을 도와주실 수 있으십니다. 거룩하게 하신 분 예수님이 거룩하게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에게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뜻은 곧 이것이니 여러분이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거룩한 사람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거룩하게 되는 것이고 또 거룩하게 하시고 하나님만이 예수님만이 우리를 거룩하신 분으로서 우리를 거룩하게 하신다. 거룩하게 하시도록 우리는 맡겨야 한다. 믿어야 한다. 의지해야 한다.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거룩하게 되는 것은 어떤 것이냐? 여러분은 음행을 피하고 각각 존경하는 마음으로 거룩하게 자기 아내의 몸을 대하고, 이거 다 5절이 그래요. 4절이 각각 존경하는 마음으로 거룩하게 자기 아내의 몸을 대하라 그랬어.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에요. 이것이 거룩이에요. 거룩이라는 것은 구별, 나눈다는 거예요. 구별, 구역, 구역 나와 있지 않아요? 세상과 구별되게 성별되게 거룩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