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소식이 있다. 울금밭 파종 준비를 한다. 당종려나무 꽃이 피었다. 아직도 고사리가 올라온다. 둑에 풀을 베어주었다.
예수와 화목 하라
1986.8.16. 오북환 장로
항복할 때 그러고 아주 잘못했다고 내 탓이라고 내가 어리석어서 그랬다고 용서하라고 서로 손 붙잡고 그럴 때 은혜가 내린단 말이야. 그런데 전부 불순종해. 불의가 판치도록 내버려두었다. 또 모임에 대해서도 이야기 해야지요. 모임 예배는 꼭 모여서만 예배 보는 줄 알아, 혼자서도 예배 본다고요. 혼자서도 그러면 동기가 있으면 같은 뜻을 가진 사람이 있으면 둘이보고 셋이 보고 그러지 두 사람 단 두 사람이 모인 곳에도 나는 거기에 같이 있겠다. 그러면 무엇이든지 구하는 대로 이루어준다.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해서 구하면 무엇이든지 이루어 준다. 그러니까 두 사람의 합심이 있어야지요. 이 단체도 지금 몇 명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좌우간 백 명 안짝이지 몇 십 명이 이라고 해도 두 사람이 없어요. 합할 수가 없어요. 그러면 사람으로는 없지요. 거의 없지요. 하지만 내 마음하고 예수님 마음하고 합하면 된다는 거야. 그런 사람끼리는 예수님 마음하고 합한 사람은 몇 만 리 떨어져도 합할 수 있다. 영으로 통하니까 그렇지만 몸을 탁 대고 한방에 먹고 자고 그래도 외국 사람이야. 외국사람, 탕자와 탕자의 형과 사이는 외국사람 아니야? 한집에 살아도 한 배속에서 나온 형제라도 달라, 탕자는 돌아와서 눈물 흘리면서 감격하는데 형은 부아가 나서 아버지도 밉고 동생은 이미 그렇지만 그런 놈을 받아준 아버지도 밉다. 내가 법이 아니면 양심이 거리끼지만 아니면 죽여 버리겠다만 거리껴서 못 죽이겠다. 그런 것 아니요? 제자들도 어땠습니까? 예수님을 환영을 안 하니까 하늘에서 불을 내려서 죽여 버립시다. 예수님이 너희들이 할 말이냐? 용서를 하셨지요? 16절, 그러면 왜 불의가 판치도록 놔두시는가? 그런데서 정의를 지킨 사람 또 뭐라고 할까요? 고린도전서 11장 17절서 19절까지 보면 제가 볼게요. 주님의 성전 그런데 이번에는 칭찬할 수 없는 일이 한 가지 말씀드리겠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모여서 하는 일이 이익보다는 해를 자아낸다는 것입니다. 그저 무조건 모이면 좋은가? 해로운 것도 있다. 무엇보다도 여러분이 모이는 교회 안에 당파가 생겼다는 말을 들었는데 나는 그것이 전혀 헛소문만은 아니야.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당파 모임인데 당파가 있으면 되겠느냐? 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한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서 왜 당파가 있냐? 하기야 여러분 가운데서 진실, 진실 진실한 사람들이 드러나려면 분파도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한 가지 증거는 이 분파는 없앨 수가 없어요. 있는데 거기서 하나 증거는 그 축에 안 들어간 사람 진실한 사람 예수하고만 짝한 사람 진리 안에만 있는 사람 그는 불의를 보고 내 책임이다. 그 불의는 내 책임이다 하지. 그 불의를 따지거나 그러지 않아. 하나님이 내버려 두시니까 깨닫도록 내버려 두시니까 자각을 해야지. 사람이 그것을 막 고치려고 하고 그래서는 안 된다고 하고 법으로 하고 그래도 되는가 말이야. 안 된다. 사람은 무엇 하는가? 내 문제다. 내 탓이다. 하고 하나님 앞에 기도할 것뿐이지 하나님이 역사해 주실 것을 바랄 것뿐이고 자기가 회개할 것뿐이지, 가서 말로는 안 된다고 화목 시킬 수도 없어요. 자기가 지금 예수하고 불화되어 있는데 어떻게 화목해요? 모이면 다 좋은 것이 아니야. 진실이 드러나야 되어요. 어디든지 진실한 모임이 되어야 된다. 서로 사랑하기 위해서 모여야 돼. 서로 물고 뜯기 위해서 모여서는 안 된다고. 전도서 3장 17절 사람이 무슨 생각으로 무슨 일을 하든지 다 하나님께서 때를 정하시고 누가 옳고 누가 그른지 심판하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 결과는 드러날 것이에요. 사람이란 본디 짐승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밝히 보여주신다는 생각이 들었다. 솔로몬은 그렇게 들었어요. 사람의 운명은 짐승의 운명과 다를 바가 없이 사람도 짐승도 같은 숨을 쉬다가 같은 죽음을 당하는 것을 이렇게 모든 것이 헛되기만 하는데 사람이 짐승보다 나을 것이 무엇인가? 사람이 사람 되어야 짐승보다 낫지, 사람이 하나님 닮아야 사람이에요. 사랑 덩어리가 되는 것이 사람이야. ‘아담아’ 그 말은 무슨 말이야? ‘사람아’ 그 말이야. 국문으로 쓰면 사람하고 사랑하고 무엇이 다른가요? 사랑은 동글 뱅이가 있지요? 원만하다. 원불교처럼 모가 없어. 어디를 가나 통해 하나야. 사람은 미음이 있어. 입구(口) 미음(ㅁ)이 아니요? 한문으로 입구(口)자인데 미움이거든. 먹었어, 안 먹을 것을 먹었어. 나쁜 마음을 먹었어요. 사탄의 마음을 먹었어요. 정욕에 따라갔어요. 거기서부터 미움이 생겼어요. 전쟁이 생겼어요. 타락한 사람이야. 온전한 사람이 아니에요. 예수와 같은 사람이 아니에요. 예수와 같은 사람이 참 사람이에요. 디모데전서 2장 4절 5절에 있지 않아요? 참사람 중보 20절 봐요. 다 같은 데로 가는 것을 다 티끌에서 왔다가 티끌로 돌아가는 것을 사람의 숨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숨은 땅속으로 내려간다고 누가 장담하랴! 나는 안 간다고 장담할 사람이 누가 있냐? 그러니까 여기 21절에 판가름이 났어요. 다 사람이야. 여기 짐승도 저런 짐승이 아니라 몸은 똑같은 사람이야. 사람인데 이목구비가 다 있고 똑같은 사람인데 행위가 마음이 날마다 향락적인 생활을 하는 사람 짐승 같은 삶을 사는 사람 음탕에 빠져있는 생활을 하는 사람 그 사람은 어디로 가냐? 땅 아래 음부로 내려가지 않습니까?
한 집에 살았어. 거지와 부자는 한 집에 살았는데 반대로 거지는 대문간에 부자는 따뜻한 방에 좀 높은데 내려다만 보고 끼니때 밥도 안주고 그런데 거지는 제일 천한자리에서 발길에 채이고 개한테 개하고 장난하고 그랬는데 죽은 뒤로는 반대란 말이야. 구렁은 어제 봤습니다만 나중에 보십시오. 잠언 22장 14절하고 23장 27절에 음녀는 깊은 함정이라. 그 말이 있어요. 그러니까 부자 스스로가 파는 거예요. 오도 가도 못하는 구렁을 파놓았어요. 따라서 기도하는 것을 배운다는 것은 귀를 기울여 듣는 것을 공부하는 것이다. 어떻게 귀를 기울이고 들어야 하는가를 아는 사람은 매우 적다. 하나님과 사람의 대화란 거의가 서로 상치된 독배에 불과하다. 쓴잔이야. 쓴잔, 독한 잔이야. 사람의 요구가 우리 사람 안에서도 개인 안에서도 영적요구와 육적 요구가 다르지 않아요? 그러면 예수님의 기도 가운데도 그것 하나 있어요. 어디에 있어요? 겟세마네 동산에 기도한데도 있지만 ‘가능하시면 이 잔을 제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또 요한복음 12장 27절에 있단 말이야. 어디 한번 읽어봐요. ‘내가 지금 이렇게 마음을 걷잡을 수 없으니 무슨 말을 할까? 아버지 이 시간을 면하게 하여 주소서 하고 기원할까 아니다. 나는 바로 이 고난의 시간을 겪으러 온 것이다.’ 예수님이 오신 목적이 고난의 시간 십자가 지러 오셨는데 그 목적인데 이 고난의 시간을 면하게 해줄까? 그렇게 한번 해보셨어요. 그건 진정일까요? 몸을 가졌다는 표일까요? 육신을 가졌다는 표에요? 그럴까요? 무엇일까요? 이 책에서는 예수님도 그런 기도는 하셨다. 하셨지요? 그러나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 그 말은 깊이 반성한 후에 아 이것이다. 그렇게 했다고 그래요. 저는 그렇게 약하게 보고 싶지를 않아요. 중보시니까 물론 몸은 가졌지만 중보시니까 인간 편에 그리스도 하나님 편의 그리스도 가운데서 소개해요. 소개 쟁이에요. 예수님은 우리를 우리 죄 짐을 당신이 책임을 지고 하나님 앞에 소개해요. 이 죄는 전 인류의 죄는 내가 책임질 테니까 용서해 주십시오. 그러라고 예수를 보고 우리가 용서하지 우리가 무엇을 잘해서 용서해 줘요. 중보시거든요. 그러니까 인간 대표로서 한번 말해보는 것이에요. 인간은 타락한 본성은 다 이것이 요구다. 이 고난을 겪기 싫어하는 것이 본능이다. 그것을 증거 하는 거라고, 그러나 내가 온 목적은 이것이 아니다. 그러고 결원한 것이에요? 예수님이 그렇게 약해서 되겠습니까? 못 이겨서 그때야 깨닫고 아니다. 그렇게 했는가? 아니라는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이 아니지요. 하나님이신데 솔로몬이 지혜를 찾았을 때 왕상 3장 12절, 하나님은 그에게 타인의 말을 경청하는 마음을 부여하셨다. 경청 기울일 경(傾) 귀를 기울여 들어, 경청하는 마음을 주셨어요.
우리는 그렇지 않아요? 누가 말하면 경솔히 얼른 자기 판단으로 딱 누가 이 말하면 아니야. 그냥 들어보고 말은 그렇지만 그 속에 하나님의 뜻이 어디가 있는가? 그것을 뜻해. 그 말은 물론 아니야. 반대되는 말이지만 그 반대되는 말속에 하나님이 내게 그 말을 통해서 어떤 교훈을 하시는가? 그것을 들어야 할 텐데 그 사람의 말로만 들어버려. 그러니까 막 쿡쿡 찔러 받아버려. 그냥 자기 비위에 틀리면 막 거슬려 버린단 말이야. 너무나 불신앙의 태도라고 사람하고 대화할 때 그 사람끼리 얼굴과 얼굴만 그 사람만 보고 주고받고 하는 것은 안 된다. 그 말속에 그리스도를 모시고 사람들의 대화 속에 그리스도를 모시고 이 사람 예수께서 직접 말씀 안하시니까 간접으로 누구를 통해서 말씀하시니까 직접 들을 자격이 없거든. 아직 그러니까 간접으로 하셔. 사람의 말을 사람의 입을 빌려가지고 소리는 엉뚱한 소리를 해서 욕을 한다거나 무슨 저주를 한다고 해도 거기서 인제 말씀을 들을 줄 알아야 한다. 아 이것은 동으로 가라하는 말은 서로 가라는 말이구나. 그렇게 알아들어. 그것이 하나님 말씀이에요. 부자 되라는 것은 아 가난하라는 말이구나. 그렇게 알아듣고 거꾸로 알아듣는다고 구약을 구약은 사실이니까 구약에서 부를 말한 것은 신약에서 예수를 말해서 부를 말한 것인데 그냥 그대로 부를 말하니까 신약시대에 와서도 모두 부(富) 부(富) 그래. 예수님의 첫 팔복에서 첫 번이 가난한자 복이 있다는 말을 딱 말했는데 아 예수 믿는 사람은 부자라야 된다. 가난하면 안 된다. 밤낮 거지노릇을 해야 되겠냐 그래. 예수 말씀하고 틀려버려. 천국이 없을 테니까 가난한 사람이 천국일 텐데 그래. 하나님이 공평하시지 않아? 사람과 대화중에서 예수님을 중보로 모시고 이제 그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을 통역하는 것으로 들어. 통역은 잘 못해도 내가 알아듣기를 잘 알아들으면 된다. 반대로 통역해. 당신은, 우리는 말이야. 타인의 말을 경청하는 사람인가 아니면 지껄이는 입을 가진 사람인가? 저보고 물어보면 지껄이는 입이다. 과연 이것은 시간 없으니까 그만둡시다. 부부간에도 그렇고 부자간의 문제 또 자녀들의 말을 듣고 크게 뜻을 비록 자녀의 입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느냐? 그것을 들어야 돼. 그 사람의 말로만 들어버리면 오해뿐이란 말이야. 나는 많은 크리스챤이 낙담해서 말하는 소리를 들었다. 참 기가 막혀 내가 기도할 때는 언제나 나 혼자서만 말하고 하나님께서는 대답해주시지 않는다. 우리 대답 들어봤어요? 기도해가지고? 하나님 나 무엇 좀 어떻게 해주시오. 오 너 이래라. 저래라. 들어 봤어요? 혼자만 했지요? 혼자 했지. 대답 하나도 못 들었단 말이야. ‘나는 들었는데 못 들었다고 그러네.’ 하는 분도 있을지 몰라. 그러나 사탄의 대답을 들었을지 몰라. 무슨 대답을 들었을는지 모르는데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여러분은 기도할 때에 이방인들처럼 빈말을 되풀이 하지 마십시오. 빈말, 여기 디모데전서 1장 6절에 있는 말씀입니다. 무근지설이라는 말이 있어요. 그전 천주교 성경에 근거가 없는 말, 뿌리 없는 말 무근지설 또 6장 20절에는 속되고 세속적이란 말이야. 속된 무근지설과 허명무실 이름이 비었어. 예수의 이름이 없어요. 허명무실의 소위 인식이라는 것에 반론을 피할지니라. 이런 말이에요. 이방인들처럼 이름은 예수의 이름 하나님의 이름은 없다. 예수의 이름 가운데 하나 보고 지나갑시다. 빌립보 2장 쭉 보면 좋겠지만 5절서 여러분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지니셨던 마음을 여러분의 마음으로 간직하십시오. 이것입니다. 우리 마음은 예수의 십자가에 같이 장사지내버리고 예수의 마음이 믿는 사람의 마음이 되어야 된다고. 예수의 마음 그러면 이것은 사랑뿐이지 아니겠어요? 예수의 마음 예수께서 지니셨던 마음을 여러분의 마음으로 간직하십시오. 그리스도 예수는 하나님과 본질이 같은 분이셨지만 굳이 하나님과 동등한 존재가 되려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의 것을 다 내려놓고 종의 신분을 취하셔서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셔서 죽기까지 아니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순종은 죽는 것이 순종입니다. 자기를 완전히 부정하는 것이 순종이에요.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도 그분을 높이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입니다. 이것이 예수 이름으로 모이는 것입니다. 이런 모임이 되어야 되요. 죽기까지 순종하는 모임이야. 완전히 자기 부정이야. 모든 이름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하늘과 땅위와 땅 아래 있는 모든 것이 예수의 이름을 받들어 무릎을 꿇고 모두가 입을 모아 이제 입을 다 모아 우리는 지금 몸만 모았지 마음은 안 모아졌지요. 입을 모아 예수 그리스도가 주님이시라 찬미하며 하나님 아버지를 찬양하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가 주님이시라. 여기는 인제 온전히 마음과 뜻과 모든 것이 하나요. 아버지만 찬양해. 하나로서 그리고 감사 찬송 한마음 한뜻이란 말이야. 그 예수의 이름이야. 빈말을 되풀이 하지 마십시오. 예수 이름 없는 모임이나 말 하지 마십시오. 그런 기도 하지 마시오. 그들은 말을 많이 해야만 하나님께서 들어주실 줄 압니다. 즉 인간의 말에 의한 힘으로서 인간의 말의 힘으로서 자기가 말한 것을 들어 주시리라생각하는 사람은 이교도입니다. 하나 어디다 대 볼까요? 사도행전 7장 21절 보십시다. 모세가 애급문화를 다 통달하고 40이 되었는데 자기 능력을 한번 발휘 해 봤어요. 나를 통해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실 것이다. 나를 믿어줄 것이다. 그러고 한번 시험해본 결과에요. 턱도 없어요. 누가 너를 법관으로 세웠느냐? 어제는 이방사람들 애급사람을 죽이더니 또 오늘 나를 죽이려고 하느냐 그 말 하는 것이 사람을 죽인 것이 애급 사람을 죽였으니까 바로 왕에게 들리면 자기 죽거든. 탄로가 나니까 미디안으로 도망가서 또 40년, 80년 그러니까 80년 동안 완전히 자기 인격 시련을 겪었습니다. 그래서 영혼을 인도할 자격자야. 그때서야 그래서 그 뒤로 40년 일백이십 년을 살았어요. 40년 교역했어요.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했어요. 그럼 우리는 꼭 그 시간 모세가 40년 했다면 나 같은 것은 80년 해도 모자라지요. 그렇지만 하나님이 주신 능력이 있단 말이에요. 암만 나보다 못한 사람도 큰 은혜를 받으면 시련이 철저한 시련을 겪어서 그런 은혜를 받으면 할 수 있다. 하나님은 똑같이 주시니까 똑같이 공평하게 사랑하시니까 제일 자기 인격, 자기를 제일 약함을 의식한 영혼에게 주신단 말이야. 거기 한번 볼까요? 몇 절인가? 다니엘 4장 17절이요. 제가 읽지요. 이는 순찰 자들의 명령대로 거룩한 자들의 말 대로이니 곧 인생으로 지극히 높으신 자가 인생으로 지극히 높으신 자가 인간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며 또 지극히 천한자로 그 위에 세우시는 줄을 알게 하려 함이니라 하였느니라. 누가 받느냐? 그 위에 올 사람이 누구냐? 지극히 천한 사람 세상에서 똑똑한 사람이 아닙니다. 아주 제일 낮아진 사람 만물의 때와 같이 된 사람, 바울사도와 같이 그런 사람 낮아진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없이는 결코 기도할 수 없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으면 기도할 수 없다. 성령의 역사가 아니면 기도할 수 없다. 성령에 이끌려서 성령을 힘입어서만이 기도할 수 있다. 그리고 주의 기도, 주의 기도나 성모송과 같은 기도는 하나님 말씀이다. 우리는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바를 들을 수가 있을 정도로 긴 시간동안 조용히 그러한 기도들을 되풀이해야 될 것이다. 우리가 자연스럽게 기도할 때는 무슨 소리든지 말하기 시작한다. 무슨 말을 하기 시작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진정으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에 귀를 기울이고 있노라면 당신이 원하지 않는 곳, 이것은 요한복음 21장 18 절이지요. 당신이 원하지 않는 곳에 인도되고 만다. 감정이 원하는 곳이 아니에요. 영이 원하는 곳이지, 우리는 다만 기도의 말을 앞세울 뿐 자기가 무엇을 어떻게 말씀드려야 할지 이에 대해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으로부터 부여해 주시는 섬세한 감지력, 감화력 감지력을 필요로 한다. 성령께서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조차 모르는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아버지께서는 무엇이 우리에게 유익한가를 우리들 자신보다 더 잘 아시고 우리 영혼에 무엇이 걸리는지는 나보다 하나님이 더 잘 아신다고, 아시고 계신다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상기하라. 그분은 사람의 마음을 보고 사람의 마음을 보고 그 내부에까지 들어가신다는 뜻에 있어서 마음을 꿰뚫어보신다. 그리고 우리가 자신이 진정으로 고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최후에 가서 알게 되도록 가르치시고 인도하신다. 자기가 진정으로 구하는 것을 알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보통 처음에 말하던 것과는 다르다. 자기가 원하던 것은 사실은 본래 원치 않던 것이고 영원히 원치 않던 것입니다. 성령에 거슬리는 것입니다. 자기가 원치 않던 것이 바로 자기가 본래 원하는 것, 영원히 원하는 것입니다. 본래 원하던 것임을 체험하려면 아주 근본적인 문제로 파고들어가야 한다. 다시 한 번 성령께서 구하시는 것, 성령이 우리에게 권고하여 구하게 하는 것, 그것이 하나님께서 주시고자 원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사는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로마서 8장 14절이요. 성령의 감동을 받지 않고는 기도할 수 없다. 그것은 15절이고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기도하는 것이 아니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도 아니며 상속자도 아닐 뿐 아니라 기도도 들어 허락되지 않는다. 허락 못 받아요. 우리는 그 성령에 힘입어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우리는 진정으로 아버지 하고 부르기 위해서는 우리가 주의 기도를 첫 구절을 외울 때 성신의 감동을 받아 성자의 마음을 품지 않으면 안 된다. 성신의 감동을 받아 성자의 마음을 품지 않으면 안 된다.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말씀을 되풀이하는 사람에게는 최초로 그 말씀을 한 사람과 똑같이 최초로 그 말씀을 한 사람과 똑같은 은혜가 필요한 것이다. 성경 즉 영감을 받아 저작된 서적은 성경은 살아있는 성령의 인도하심이 있는 연후에야 비로소 이해할 수 있다. 성령에 이끌려서 써진 성경은 성령에 이끌려야만 이해된다. 성령의 인도하심이 없으면 성서는 공허한 글이야. 비었어, 아무 뜻 없는 글이야. 세상 도덕설에 불과해. 또 세상 도덕설이라면 그것보다 더 좋은 도덕설 안 쓰였어요? 성서가 가지는 진정한 의미를 완전히 상실한 글로 화해버릴 것이다. 성령의 인도하심이 아니면 말입니다. 성서의 말을 쓰도록 유도하는 것과 똑같은 성령은 성서에 말이 우리에게 말을 걸도록 끊임없이 그 말에 새로운 생명과 은혜를 불어넣어 주시고 계신다. 성서에 말이 우리에게 말을 걸도록 끊임없이 그 말에 새로운 생명과 은혜를 불어넣어 주시고 계신다. 그래서 같은 말을 경청하는데도 입으로 말하는데도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우선 그것은 인간의 말 즉 우리의 말로서 말할 수 있다. 자기의 원이를 생각하면서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소서라고 말하는 것, 크게 있을 수 있는 일이다. 혹은 어떻게 말을 해야 할까를 가르쳐 주실 때도 있다. 성경에 성령의 감동에 의해서 성경을 보면 우리 생활 어떻게 생활하라. 그런 것도 다 가르쳐 주신단 말이야. 생활 방식이지요. 실상은 성경말씀은 이렇게 살아라. 하는 교훈이거든요. 가르쳐주실 때도 있다. 성령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우리 마음에 증언해 주신다. 성령은 무슨 역사를 하시는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다. 그것을 확인시켜 주신단 말이야. 너는 틀림없이 하나님의 자녀다. 그 고백록에도 있지 않아요? 자녀다. 우리 마음에 증거 해 주신다. 하나님의 자녀라고, 그런데 그 증거를 못 받았으니까 항상 마귀의 자녀노릇밖에 안 해요.
어떻게 무엇이 마귀의 자녀에요? 미워하고 시기하고 죽이고 미워하는 것은 벌써 죽이는 것이거든요. 살인이거든요. 그것은 마귀의 자녀인데 하나님의 자녀라고 뽐낸다고 미워하는데 무엇을 하나님의 자녀가 그럴 수가 있는가? 하나님의 자녀는 원수라고 사랑하는 건데 어째 그럴 수가 있는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말을 말아야 되요. 나는 마귀의 자녀라고 솔직히 그러고 하나님의 자녀는 완전히 성령에 이끌림 받아야 된다고 자기부정하고 완전 회개해야 된다. 그러기 전에는 마귀의 자녀에요. 하나님은 지금 당신 자녀로 여기고 있어요. 예수님이 당했으니까 예수님이 책임지시고 다 사해주셨으니까 하나님은 당신 자녀로 보되 실상 우리는 마귀의 자녀노릇을 하고 있어요. 자녀임을 마음에 증언해 주신다. 하나님의 자녀임을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입장을 취했다는 것 바꾸어 말하자면 우리는 이미 반항하는 자도 아니며 고아도 아니다. 또 아버지로부터 해방되기 때문에 야생아도 아닌 사생아도 아니고 자신을 흔들어 일깨워 아버지 하고 부르는 소리가 우리 마음속으로부터 용솟음친다는 것을 성령이 증거 해 주신다.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기도하는 것을 배운다는 것은 하나의 독자적인 공부이며 예술이다. 생각건대 자기가 하고 있는 이 일의 의미라든가 그 훌륭한 등등을 알지 못하고 또한 생각하려 하지도 않는 얕은 생각들은 우리의 최대의 죄악이다. 자기 하고 있는 일도 무의미하게 심심하게 하고 있다고 그것 죄악이에요. 웬만한 죄악이 아니라 최대의 죄악이라고 그랬어요. 하나님의 자녀답지 않은 생활이야. 항상 감격에 넘쳐서 그냥 감격에 넘쳐서 남원의 어떤 분 아 이런 좋은 모임에 왜 안가요? 나 이제 나중에 갈라요. 나중에, 나중에 간다는 거야. 무슨 일이든지 감사 기쁨이지, 털끝만큼도 탓이 없어.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분은 예수 믿기 전에도 어렸을 때도 탓했다는 것을 하나도 못 들어봤어. 동서가 자기를 미워서 밥도 그냥 찰밥을 해도 자기는 꽁보리밥도 그거라도 자기는 많이 줬으면 좋겠다. 그래 조금이라도 따로 밥을 한 솥에다가 두 가지를 하는데 딱 덮어가지고 쌀 못 들어가게 그래가지고 그것을 주는데 그것도 조금 주니까 그래도 감사해. 그래도 감사해서 죽게 길쌈도 다하고 배가고파 죽겠지만 베 짜고 베를 짜니까 배가 더 고파. 그래도 하나도 동서가 밉지 않았다고 그것이 믿는 것이지, 예수 믿기 시작해서 믿는 거예요? 아니에요. 창세전에 주신 은총이에요.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그런데 우리는 믿는다. 교회 다니면서 학습 받고 세례 받고 그때 믿는 줄 알아요. 그때도 안 믿는 거예요.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소서. 그들은 자기들이 하는 일들이 무엇인 줄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23장 34절 말씀은 우리를 변호하심도 되지만 비난이기도 하다. 특히 계시의 은총, 성령으로부터 빛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는 비난이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비난이다. 나는 성령 받았다. 그리고 비인격적인 생활을 해, 사랑은 없어. 어느 시인은 인생은 노래로서 불러지지 않으면 안 된다. 노래라고 말했다.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필요한 것은 자기 인생의 의미를 아는 것이에요. 맛을 아는 거라고 사람은 무엇이냐? 사물에 아름다움, 사물에 아름다움 살아있는 것들의 존재 하는 것 모든 살아있는 것들 가장 둔감한 인간까지도 구하는 인생의 무한한 풍부함 그것은 그가 사랑을 받고 존경을 받는다면 맛볼 수 있는 일들이다. 이것을 나타내는 일이다. 시 음악 예술이라는 것이 없다면 인생은 단순한 공의적 이기주의에 매여 산다. 그거야. 공의적인 견딜 수 없는 것이 될 것이다. 오늘의 시인과 작곡가는 그러한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그들이 할 수 있는 한의 일을 하고 있다. 즉 그들의 노래는 우리의 목적인 진실한 삶을 표현하지만 불투명한데가 있다. 거기에는 그들의 향수와 절망이 섞여져있다. 세상의 음악이나 세상에서 이런 시인의 하는 것은 근본까지는 터득을 못 하겠다. 왜 그러냐? 헛된 철학은 세속원리에 기초를 둔 것이고 그리스도를 기초로 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을 그 정도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인생은 기도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하는 편이 보다 진실한 삶일 것이다. 기도하는 일이 없다면 우리는 결코 하나님의 계시 놀라운 은혜를 알지 못할 것이다. 또한 자기는 쓸모없는 자 임에도 불구하고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죄인인데도 그런데도 하나님께서 얼마나 훌륭 하신가를 결코 알지 못했을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 안에 계시듯이 우리 안에도 계신다. 우리 마음 안에 계신다. 아무리 악한 사람 속에도 계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생각하고 기도하고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듣기위해 귀를 기울이기를 기다리고 계신다. 하나님이 먼저 당신이 하신 말씀을 듣기를 바라시고 귀를 기울이기고 기다리고 계신데 나는 엄한데다가 귀를 기울인다고, 우리가 그렇게 함으로서 하나님은 우리 (끊김)
가장 평범한 일상생활에 온갖 사랑을 쏟을 수 있도록 자신의 인생을 노력해야 할 것이며 또한 기도해야 할 것이다. 기도는 우리의 행위를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이제 행위 들어가요. 마음으로 입으로만 믿는 것 아니고요. 기도는 체험이에요. 체험, 몸소 행해요. 기도는 우리의 행위를 하나님과 관계를 갖고 생각하게 해준다. 기도는 우리의 행위를 예수그리스도와 관계를 갖고 생각하게 해준다. 즉 기도에 의해 우리의 행위는 사랑과 자유, 참 자유에요 여기에서는 참 자유, 그 영혼이 원하는 대로 착착 이루어지는 자유에요. 감정적인 자유가 아닙니다. 여기에서 사랑과 자유 원수라도 사랑할 수 있는 자유, 이 세상을 변화시켜가는 희망과 크나큰 흐름과 연결되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듣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것 또 문제에요. 어떻게 해야 할까? 당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신다 하였고 또 하나님의 기쁨은 우리 안에 계시면서 당신을 우리에게 알리시는 일이라 하였지요? 그러면 질문을 한다고, 반문을 한번 해봐. 그러나 우리에게는 당신이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이 들리지 않습니다. 우리 다 그렇지요? 암만 기도해봤자 이래라. 못 들어봤어요. 못 들어봤어. 들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까 이야기 하던 그런 자매는 어렸을 때 다 양심에 들었어요. 그때는 무슨 소리는 안 들었어요. 소리는 귀로는 안 들었어도 양심이 들었기 때문에 그대로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교회를 몇 해 동안 다녔어요. 한 30리 근 40리 되는 데를 새벽밥을 먹고 다 식구들 점심 까지 먹을 것 다 해놓고 이제 애기하나 업고 달음 질 칩니다. 그러면 여러 부락을 지나지요. 순창읍까지 오는데 여러 부락을 지나오는데 막 애기 고개가 떨어지나마나 달음질을 쳐요. 마을 사람들이 여보 당신 애기 고개 떨어져요. 고개 떨어져, 떨어지나 마나 나 모르요. 그러고 달려가면, 거반 마쳐버렸어요.
그렇게 갔다고, 그런데 한번은 조금 더 일찍 갔던가? 이런 말을 들었대요. 오늘 예수님이 재림하신다면 여기에 꼭 맞이할 사람 하나나 혹 둘이 있을까 모르겠다고, 그 말 밖에 기억이안 나, 점심을 갖고 갔는데 부끄러워서 밥이 험상스러워서 부끄러워서 못가지만 오라는 말도 안하더라는 거야. 그리고 돌아오다가 그 말 밖에 안 들었는데 마음에 생각에 예수를 믿으면 추하고 부끄러운 짓은 안해야 할 것 아니냐? 그것 참 말씀이야. 그래서 인제 부부생활을 끊은 거예요. 어디서 말 들은 것 아니야. 사람한테 들은 것 아닙니다. 하나님께 들은 겁니다. 그것을 싸우려니까 이제 막 몇 번 죽음을 당했어도 기뻤지요. 여기 인제 너 이년, 내 말 안 들으면 죽여 버린다. 막 머리 끌고 잡아갑니다. 따라가지요. 여기 파라 집어넣어 버리려니까 파라. 막 파지요. 그러면 이제 들어가라. 들어가지요. 묻어버릴까? 너 항복 할래? 아 묻어버리시오. 발길로 팍 차. 아이고, 한 번 더 차시오. 시원하니, 그럴 정도에요. 이거 안 되겠거든. 묻으면 자기가 아쉽거든. 아쉬우니까 또 끌고 가 막 작대기로 다리를 분질러 버렸어요. 그래도 좋아. 시원하더라는 거예요. 그것다 주신 것이란 말이에요. 기절해서 넘어져버렸으니까 놀래가지고 방에다 업어다놓고 약을 지어온다 무엇을 해 준다. 이제 더 바빠 죽겠지요. 닭 모이 줄라, 돼지 밥 줄라, 소 밥 줄라, 바빠요. 일 가려고 인제 혼자 다하게 생겼어. 아이고, 어서 나아야 쓰겠다. 약 줘도 안 먹어버리고 받아놓고 없애버리고 열흘 만에 딱 걸었다는 거예요. 그런 기적이 나타난다고. 그래도 갖가지 시험을 해도 안 돼. 야, 이년 나가라. 아 기쁜 소식이에요. 나가라니까 좋지, 처음에는 조금 아찔하더라는 거예요. 그럴 때 애기가 있거든. 셋이, 하나는 마침 그럴 때는 그 업고 다니던 애기는 죽어버리고, 데려가 버렸어. 죽은 것이 아니라 하늘로 아버지께서 데려가 버렸어. 너 여기까지는 짐 못 지겠다. 내가 데려간다. 데려가 버리고 여섯 살 아홉 살 둘 남았어.
그 정을 조금 생각하니까 눈이 캄캄하더라고 그러나 하나님께서 또 그때는 들었어. 그때는 영안으로 들었어. 영의 귀로 들었어. 가라, 가라. 그 말을 듣고 발을 떼니까 공중에 날아버리더라는 거예요. 날아버려. 발이 땅에 닿았겠지만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닿았지만 그냥 날더라고. 어찌 기쁜지 그냥 조금 밖에서 나오니까 또 계시가 나와. 잠깐 비켜라. 비켜라. 어째 그런가? 하여간 무슨 뜻인지 모르고 그쳤어요. 어디 울타리에 잠깐 숨었어. 그러니까 남자가 가라니까 참으로 갔네. 이 계집이 다리 더 분질러 버려야겠다. 그러고 작대기를 질질 끌고 가니까 여섯 살 난 것이 아버지 어디가? 어디가? 나도 가, 나도 가. 그러더니 어디로 벌써 도망가가고 안 보이거든요. 그런데 이렇게 보면 보일 텐데 못 보더라는 거예요. 눈을 가리어 버렸어요. 이리 보면 보일 데야. 그냥, 거기서도 못보고 그냥 들어가 버리더라고. 옳다 꾸나 들어간 뒤에 막 달음질해서 지금 광주까지 왔지요. 그것이 말씀이에요. 계시에요. 하나님의 말씀 여러분들이 돌아가서 봐요. 콘솔라따 책 307페이지 하반에 보면 예수님이 말씀으로 나타나시기 위해서는 성모의 배를 통했어요. 성모의 배를 통하는 것이 말씀이에요. 하나님의 말씀하시는 것을 들리지 않습니다. 우리는 기도하지 못 합니다. 잠시 동안 조용히 생각하고 있노라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정말 피곤하구나 하고 생각하는 정도뿐입니다. 들리는 것은 침묵 소리뿐 아무리 들으려고 해도 괴로운 것뿐이지 아무 소리도 안 들려, 느껴지는 것은 쓸 사람뿐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당신 사랑하신다고 믿는다면 어찌하여 아직도 당신이 하나님이 당신에게 말을 걸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 있단 말인가?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믿음이 없다는 거예요. 사랑한다는 것은 말을 거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을 하시기 위해서 말을 걸어요,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 예수님이 말을 걸었어요. 무슨 말을 그렇게 구수하니 하고 갑니까? 나도 한쪽 들어주시오. 즉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하신다면 하나님은 당신에게 말씀 할 것이다. 계시의 사실 자체가 하나님의 목적을 명시해 주고 있다. 만일 하나님이 나에게 말씀해 주신다는 것을 가르쳐주시면 나는 이미 하나님의 무엇을 말씀하시는가를 안다. 아까 그 자매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어요.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거예요. 무엇을, 물론 의당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고 계시다는 사실 어째 하나님은 나만 사랑하실까? 나같이 아무 쓸모없고 쓸데없는 죄인인데, 가장 보잘것없는 큰 죄인인데 어째 이렇게 사랑하실까?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시고 계시다는 것을 확신하면 나는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고 계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직접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은 사람의 말을 들을 필요가 없어요. 성경 봐요. 물론 요한복음 6장 45절도 있고, 요한1서 2장 20절과 27절, ‘그러나 여러분은 그 거룩하신 분에게서 성령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모두 참된 지식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으로 말하자면 그리스도께서 열어주시는 성령이 여러분의 마음속에 살아계시는 한 아무에게도 가르침을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부어주시는 성령은 여러분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십니다. 그리고 그분은 진실하셔서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그 성령께서 가르쳐주신 대로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가시오.’ 성령께서 가르쳐 주신다고 사람에게는 배울 필요가 없어요. 들을 것이 없다고요. 그러나 사람에게 한가지만은 들을 것이 있대요. 어디에 있어요? 한 가지, 히브리 5장 11절 12절, ‘이것에 관해서는 하고 싶은 말이 많지만 여러분의 귀가 무디어져서 알아듣도록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여러분은 벌써 오래전에 남을 가르치는 사람이 되었어야 할 터인데 하나님의 말씀이 첫 번째 원리를 남에게서 다시 배워야할 처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가장 초보 되는 원리를 사람에게서 들어야 한다는 말이야. 말씀의 초보 하나님의 말씀에 가장 초보, 성령이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서 말씀하신 것을 되풀이해서 들려주고 또 말씀에 관한 깊은 예를 언제나 우리에게 부여하기 때문에 믿는 것이 아닌가? 만일 하나님이 당신에게 말씀하시지 않으면 다른 누구에게도 안 하신다. 만일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아무도 사랑하시지 않으신다. 또 하나님이 당신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믿는 것 믿는다는 것만으로 부족하다. 그것을 체험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말씀을 들었으면 그것을 체험해야 한다. 그를 체험하지 않으면 안 된다. 신앙은 체험에 기초를 둔다. 하나님을 체험하지 않고 어떻게 믿겠는가? 여기 어디 본문에는 성경을 대지 않았어요? 그러면 하나님을 체험 한다. 그것 하나 성경을 어디다 대는가?
하나님을 체험한다. 데살로니가전서 1장 9절, ‘우리가 여러분에게 갔을 때 여러분들이 우리를 어떻게 받아들였으며 또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 마음을 돌려서 살아계신 참 하나님을 섬기게 되었는지를 오히려 그들이 말하고 있습니다.’ 예, 그것 체험 아니에요? 살아계신 참 하나님을 다시 봐요. 우리가 여러분에게 갔을 때 여러분이 우리를 어떻게 받아들였으며 또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그러면 우상을 버렸다는 말은 자리를 버리고 자기 자신이 우상이에요.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마음을 돌려서 살아계셔, 살아계신다는 것을 체험한 거예요. 하나님은 분명히 살아 움직이고 역사를 하신다. 내게 이런 역사를 하셨다. 살아계신 하나님은 내게 이런 죽음의 고비에서 나를 건져주셨다. 그런 체험이에요. 참 하나님을 섬기게 되었는지 오히려 여러분이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들이 증거 한 것이 아니라 사도들의 말을 듣고 자신들을 완전히 버린 사람들이 그 살아계신 하나님을 체험했다. 또 데살로니가전서 4장 9절 봅니다. 교우를 사랑하는 일에 관해서는 이상 더 쓸 것이 없습니다. 여러분은 직접 하나님께로부터 사랑 자체이신 하나님께로부터 사랑하라는 교훈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그 교훈을 실천해서 마케도니야 온 지방에 있는 모든 교우들을 사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우 여러분 여러분은 더욱더 그렇게 사랑하시기를 권고합니다. 그거에요. 또 하나 디모데후서 1장 9절서부터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해 주시고 우리를 부르셔서 당신의 거룩한 백성으로 삼아주셨습니다. 이것이 성소(聖召)야, 성소(聖召), 거룩한 부름 이것은 우리의 공로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야. 율법을 행해서가 아니에요. 자기가 잘해서가 아니에요. 공로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과 은총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이 은총은 천지창조 이전에 벌써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우리 구세주 그리스도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심으로서 이제는 분명히 드러났습니다. 은총이 드러났어요. 드러난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죽음의 권세를 없애버리시고 복음을 통해서 불멸의 생명을 환하게 드러내 보이셨습니다. 나는 이 복음을 위해서 전도자와 사도와 교사로 임명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지금 나는 이런 고난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나는 내가 믿어온 분이 믿어온 분이 어떤 분이신지 잘 알고 있습니다. 또 그분이 내가 맡은 것을 그날까지 지켜주실 수 있다는 것을 확신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증거에요. 확실히 들어서 확실히 믿는 거예요. 확실히 체험한 거란 말이야. 그러기 때문에 제일 바울사도같이 고난을 떡과 같이 여기고 자청하고 그렇게 자랑한 결과가 무엇이냐? 자기가 제일 죄인이었던 것이 깨달아진 만큼 제일 큰 은혜를 받았어요. 무슨 은혜를 받았냐? 어떤 환난이든지 더 달게 받을 수 있는 환란일수록 더 기쁘게 달게 받을 수 있는 은혜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그런 점에서는 어떤 사도보다 떨어지지 않다는 것이에요. 예수를 핍박할 때는 몰랐을 때는 사도라 일컬을 자격도 없지만 은혜 안에서는 은총을 받은데 있어서는 누구보다 떨어지지 않아. 그러니까 그 용감히 그런 환란에 노래 부르고 춤추고 기뻐 뛰었지요? 예수께서 사도 도마에게 말씀하신바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참으로 행복합니다. 요한복음 20장 29절에 있지요? 이 말을 우리는 오해한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 반대로 어디 있냐? 반대로는 요한복음 4장 48절에 있거든요. 48절에서 53절, 예수께서는 그에게 다시는 기적과 신비한 것을 보지 않고서 결코 믿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하고 말씀하셨다. 도마는 선생님 제가 죽기 전에 다시 받으십시오. 하고 말했다. 예수께서는 집을 떠나시어 당신의 아들은 살 것이오. 하고 말씀하셨다. 그는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고 떠났다. 그가 집으로 돌아가는 도중에 그의 종들이 마중 나와 그의 아들이 살아났다는 보고를 해주었다. 그가 종들에게 자기 아이가 병이 낫게 된 시간을 묻고 종들은 오후 한시에 열이 떨어졌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 아버지는 그 시간이 바로 예수께서 당신의 아들이 살 것입니다. 하고 말씀하신 그 때였다는 것을 그래서 그와 그의 온 집안이 예수를 믿게 되었다. 그러면 그것은 무슨 기적입니까? 무슨 기적이 나타났어요? 무슨 기적? 나 갈 것 없다. 네 아들은 살았다. 그 말을 믿고 떠났어요. 믿고 나 같으면 안 믿어. 아 수고스럽지만 조금 가서 안수도 하시고 조금 기도해주시오. 살려주십시오. 그랬는데 살았다 하는 그 말을 믿고 떠났다고. 가라. 그것이 기적이에요. 믿어진 것이 기적이요. 또 그 말을 믿고 와보니까 살았다 하는 그 시간에 열이 떠났단 말이야. 그 기적을 보고 온 집안 식구가 믿었다는 말은 전 세계 인류가 다 믿었다 그 말이에요. 온 집안 식구, 세계의 인류가 다 그렇게 믿으면 된다는 거야. 그 집안 식구 뿐 아니에요. 누구든지 믿으면 그것이 기적이에요. 그 말씀이 믿어진 것이 기적이에요. 어떻게 믿어질까?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된단 말이야. 어떻게, 살았다. 그 말을 어떻게 믿어? 가서 약을 주고 진맥을 하고 침을 주고 이래야 할 텐데 하다못해 안수라도 해야 할 텐데 하나님 앞에 기도도 하고 그래야 할 텐데 그냥 살았다. 가봐라. 그 말이 탁 믿어진다고 신앙같이 기적이 없어요. 믿어진다는 것 같이 기적이 없어요. 그것 사람의 힘으로 안 되니까 은혜지요. 믿게 하셔야 믿어지는 것이지 스스로 믿고 싶다고 믿어지는 것 아니란 말이에요. 책임은 안 믿어지면 사람이 책임져야지 하나님이 믿게 안했으니까 못 믿었다. 그럴 수는 없어요. 다 믿을 수 있게 보여줬어요. 그런데 자기가 안 믿은 거예요. 보지 않고 말씀하신바 보지 않고 믿는 사람은 참으로 행복합니다. 나는 비난이 그때의 해석되었기 때문에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이 혼미하게 되었다. 그들은 그것을 마치 적게 볼수록 그 믿음이 공로가 큰 것처럼 적게 볼수록 공로가 큰 것처럼 해석하고 보지 않도록 하려는 권위라 생각하였다. 이것은 개념을 혼란시켜 믿음을 가볍게 만드는 통로를 만들고 있다. 그리고 확실히 이것이 바로 도마가 해야 할 일이다. 그는 그리스도를 잘 알고 있었다. 도마도 그리스도를 잘 알았어요. 그리스도 옆에서 오래 동안 생활했으며 그 생활이야말로 자기가 하고 싶었던 일, 아주 행복하고 좋으며 아주 놀랄만한 일임을 알았다. 그는 이미 믿을 수 있을 만큼 모든 것을 다 본 후에 일이다. 신앙은 체험에 기초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크리스챤이 당면하고 있는 문제는 대개의 경우 그들이 신앙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자기네 스스로가 체험을 하려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들은 타인의 신앙을 믿고 있는 셈이다. 그러니 그것은 사람을 믿고 있는 것이다. 사람의 말만 믿고 있는 그 사람을 믿고 있는 셈이야. 예수의 하신 말씀은 안 믿어요. 성경의 무슨 교리나 그 어느 교파에서 작정해놓은 그런 규칙을 믿어요. 그리스도께서 직접 하신 말씀은 아니다. 그러니 그것은 사람을 믿는 것이지 하나님을 믿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하나님에 대해서 남의 말을 듣는 것만을 믿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 자신을 믿는 것은 아니다. 아주 많은 크리스챤들이 자기의 부모나 자기 본당의 주임신부 자기종교 종파를 믿고 있다. 그리하여 그들은 바로 그것 때문에 그들이 믿을 수 있을 만큼 하나님을 더 잘 알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나는 다 알았다. 그릇된 교리에 탁 자리해 놓으면 새로운 것들은 도저히 안 들어간다고,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에 의하지 않고는 안 된단 말이야. 아주 교회도 안다니는 사람들, 순수한 사람들 그런 사람들은 쉽게 들어간다고 하지만 확실히 우리는 타인을 통해서 밖에 하나님을 알 수 없지 않아요? 하고 당신은 반문할지 모른다. 사람을 통해서 아까 한가지만은 알아야하지 않아? 바로 맞는단 말이야. 그 말은 맞아, 사람을 통해서 그러나 타인을 통해서 알게 된 것이 진정한 하나님이신가? 아닌가를 어떻게 판단하느냐? 하는 것은 역시 각자 자신이 분별해야 돼. 누구 말 들어 가지고 분별하는 것은 항상 흔들려요. 온 세계 인류가 다 아니다 해도 자기가 확신을 가졌다면 아 이것은 옳다. 이것은 기다. 또 온 세계 인류가 이것이 진리다 해도 자기가 아닌 것을 확신했으면 아니다. 그래야지, 모두 많은 사람이 아니다 하니까 그런가? 또 기다 하니까 그런가? 그건 밤낮 흔들리는 거예요. 다수를 따라가. 하나님의 인정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그래요. 성령의 인침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들의 말에 흔들린단 말이야. 당신은 하나님을 알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하나님은 당신에게 말씀을 하시는가? 당신은 하나님으로부터 말을 걸어왔다는 체험이 있는가? 당신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해 오신 체험이 없다면 하나님께서 말씀을 거신다는 것은 믿을 자격이 없어요. 하나님께서 내게 말씀을 걸어왔다고 믿을 자격이 없어요. 하나님께서 말씀해 오심을 자기가 직접 들은 적이 있기 때문에 만이 하나님께서 언제나 말씀을 거시고 계심을 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말씀해 오심을 듣지 못했다면 그것은 당신은 자신이 귀를 기울이고 있지 않았다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한번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으면 즉 당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다면 누구나가 들을 수 있도록 기쁜 소식을 모든 사람에게 전해 주어야 한다. 그러면 여기다가 하나 증거를 더 다른 사람의 증거이고 제가 체험은 아니고 가령 고백록에도 보면 말씀을 들은 증거는 무엇이냐? 회개가 이루어졌고 회개가 이루어진 만큼 마음에 형언할 수 없는 평화와 기쁨이 있다. 그건 기쁜 소식이거든. 그것을 사람에게 전한다. 사람에게 전한다. 저는 방법이 어떻게 전하냐? 그것이 문제거든. 그냥 아무라도 가서 막 소식을 전한다는 게 아니에요. 풋 열심, 처음에 전도 받아서 예수 믿는 열심은 사람은 풋 열심이라고 한다고 성경도 모르면서 가서 막 증거 해. 차간에서나 어디서나 막 증거 해요. 그것도 좋기는 해요. 그렇지만 그런 증거는 아니에요. 듣자니 그렇지 않습니까? 막달라 마리아 전도 다닐 때 어땠습니까? 일곱 마귀 들렸던 여자 예수님 전도하러 다닐 때 따라다녔어요. 안 따라다녔어요? 앞장섰어요. 그래 예수님이 전도하시니까 앞장서고 총 재산 다 바치고 모든 것 다 바치고 그렇게 했어요. 그러나 부활하신 뒤로는 그렇게 안했다고 방법이 달라요. 고요히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자기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서 자기 생활이 참다운 생활로 그러므로 성령이 역사해요. 사도행전 2장 끝 절 말씀과 같단 말이야. 주께서 믿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자기 본분대로 자기 사명대로 충성을 다한 결과로 주께서 역사를 하셔 전도는 성령이 하신 거예요. 그래도 사람을 통해서 해요. 통해서 하는데 어떤 사람을 통해서 하느냐? 가서 입으로 증거 하기도 했지만 초대시대는 그랬지만 인제는 그럴 필요가 없는 거예요. 다 양심이 하나님을 알게 되어있으니까 새겨져있기 때문에 마음에 새겨져있기 때문에 인제는 알라 할 필요가 없다. 입으로만 전도할 필요가 없어요. 이제는 꼭 자기가 생활로 보여주면 되는 거야. 생활로, 그리스도 신자는 하나님께서 말씀을 해주신다는 사실을 증거 하는 사람들이다. 이것이 곧 크리스챤이라는 정의다. 크리스챤이 무엇이냐? 크리스챤이라는 정의를 내린다면 자기가 받아진 대로 거저 받았으니 거저 준단 말이야. 은혜를 받았으니까 거저 줘, 돈 받고 주는 것이 아니라 삯 받고 주는 것이 아니라 자기 목숨까지 생명까지 다 바쳐. 육체의 생명까지 다 바쳐서 준다고. 그러니까 어디 가서 주냐? 필요한데 준다. 몸으로도 필요하면 몸으로도 봉사하고 마음으로 하고 성경에 개역으로 보면 빌립보 3장 3절 한절만 개역으로 봅니다. 무엇으로 봉사하는가?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 당이라. 네 성령으로 봉사합니다. 성령으로 하나님의 말씀 들어서 그 말씀대로 살아지는 것이 곧 봉사에요. 마음으로 줘요. 마음으로 사랑하고 줘요. 기도로만 해요. 축복만 해. 하나님으로부터 성소를 받은 자 하나님으로부터 말씀을 받은 자로서 그리스도를 믿고 언제나 기쁘게 투쟁하며 예언적인 사명을 띤 사람들이다. 크리스챤이란 하나님의 언행을 본받겠다는 열망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람이다. 하나님 하나님의 언행 말씀과 행위 예수님의 생활 또 하나 본다면 에베소 5장 1-2절이에요. 한번 읽어봐요. 여러분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녀답게 하나님을 닮으십시오. 하나님을 닮으라고 본받아라. 사랑을 받는 자답게 또 그리스도를 본받아 여러분은 사랑의 생활을 하십시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신 나머지 우리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바치셔서 하나님 앞에 향기로운 예물과 희생제물이 되셨습니다. 예, 그러니까 그 생활이야. 그걸 본받아, 언행을 본받아, 예수님의 생활 그대로 본받아 사랑이야. 사랑 사랑의 생활을 하는 거야. 희생 제물이 되는 거예요. 이제는 말씀을 실행할 때지 항상 들을 때만 아니에요. 요 며칠 듣고 가서 실행해야지 또 가서 들어야겠다. 그건 안 된다고 실행할 때야 사랑의 희생제물이 되는 거예요. 언행을 본받겠다는 열망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람 하나님께서 당신이 좋아하시는 자들 가난한 사람 겸손한 사람 약한 자 박해받은 자 그리고 정의와 자비와 이웃들이 좋아하는 사람 좋아하는 삶을 배운 사람들이다. 하나님께서 좋아하시는 것을 알았다면 그것은 당신에게 아주 중요한 것이며 그밖에 다른 것을 얻으려고 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것은 얼마나 황홀한 체험이냐? 찬송합시다.
빌립보 1장 6절서 11절까지 보겠습니다. 여러분들에게 훌륭한 일을 시작한 하나님께서는 그 일을 계속 하실 것이며 마침내 그리스도 예수께서 다시 오시는 날 완성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나의 신념입니다. 여러분 내가 갇혀있을 때나 복음을 수호하고 입증할 때에 나와 함께 은총을 나누어 받으며 고생을 같이해온 사람들로서 항상 내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으니 내가 여러분을 그런 생각으로 대하는 것도 당연한 일입니다. 내가 그리스도 예수의 지극한 사랑으로 여러분을 그리워하고 있다는 사실은 누구보다도 하나님께서 잘 알고계십니다. 내가 여러분을 위해서 기원하는 것은 여러분의 사랑이 참된 지식과 분별력을 갖추어 점점 더 풍성해져서 가장 옳은 것이 무엇인지를 가릴 수 있게 되었으면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순결하고 나무랄 데 없는 사람으로서 그리스도의 날을 맞이하게 되고 또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올바른 일을 많이 하여 하나님께 영광과 찬양을 드릴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27절,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은 사람다운 생활을 하십시오.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은 사람다운 생활을 하십시오. 그리고 내가 여러분을 찾아가서 만나게 되든지 이렇게 떨어져 있든지 간에 나는 여러분이 복음의 교리를 위하여 한마음 한뜻으로 굳게 서서 분투노력하며 반대자들이 무슨 짓을 하더라도 조금도 겁내지 않는다는 소식을 듣고 싶습니다. 그러한 용기가 그들에게는 멸망의 징조가 되고 여러분에게는 구원의 징조가 될 것입니다. 구원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사람의 노력에 있는 것 아니고 하나님의 선물이에요. 구원은 하나님의 역사에만 있다. 은총의 역사에만 있다. 삼위가 하나님의 은총이시니까 삼위의 역사에 있지 인간의 노력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노력으로서 구원을 이루는 것이 아니고 은총이다.
선물이다. 인간이 할 것은 없습니다. 회개는 인간의 책임이에요. 구원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믿을 특권뿐만 아니라 그분을 위해서 고난까지 당하는 특권 곧 그리스도를 섬기는 특권을 받았습니다. 여러분은 내가 전에 그리스도를 위해서 싸우는 것을 보았고 또 지금도 계속해서 싸우고 있다는 것을 듣고 있을 터이지만 지금도 계속해서 싸우고 있다는 것을 듣고 있을 터이지만 지금 여러분도 같은 싸움을 하고 있습니다. 복음에 합당한 생활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은 사람다운 생활을 하십시오. 그리고 내가 여러분을 찾아가서 만나게 되든지 이렇게 떨어져있든지 간에 나는 여러분이 복음의 교리를 위하여 한마음 한뜻으로 굳게 서서 분투노력하며 반대자들이 무슨 짓을 하더라도 조금도 겁내지 않는다는 소식을 듣고 싶습니다. 요새 무슨 말씀 제가 증거 해드린 말씀이 무슨 말씀이었습니까? 하도 많이 말을 해서 무슨 말인지 기억이 안 되지요. 무슨 말이에요? 무슨 말씀 드렸어요? 제가 하나 기억이 안나 그러니 이제 할 용기가 안 난단 말이야. ‘기도에 대해서’ 기도, 기도를 쭉 나왔어요. 그런데 여기 네 번째 제목이 무엇이냐 하면 기도인데 그러면 저도 기도에 체험이 있느냐? 체험, 기도의 응답을 받아봤냐? 최근에 아주 최근에 어제 저녁에 말씀하시기 전부터 제가 말씀 드렸거든요. 김 선생님이 말하면 나는 말 못한다. 할 말이 없다. 왜 그러냐? 결론 내려버린 것을 또 무슨 말을 하면 또 말이 더 방해된다. 그랬거든요. 그랬는데 이제 말씀을 어제 하셨거든. 아 이제 말을 그만했으면 쓰겠다. 그만해야 쓰겠다. 그런데 아침에 원장님이 하시겠다고 해서 아 기도 들어주셨다. 그런데 또 시간이 하려면 시간이 없다고 해서 옳다. 그러면 다 하셔야 되겠다. 그러면 나는 뭐할까? 다 하십시오. 낮 시간 다 드릴 테니까 그런데 하라는 거야. 거기까지는 안 이루어졌고 시간이 모자란다고 그래서 다 드려야겠다. 그럼 어제 저녁에 들은 말씀이 무슨 말을 들었냐? 무슨 말을 들었기에 그러냐? 저는 이제 이 말이에요. 누가복음 7장에 맨 끝 절이요. 뭐라고 그랬어요.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저는 내가 잘 믿는다는 내 믿음이 내 믿음이 네 병을 더 들게 했다. 그렇게 받아야 쓰겠다. 병이 낫는 게 아니라 자꾸 증거 하면 증거 할수록 자꾸 교만해 지거든요.
'그때 그일' 카테고리의 다른 글
들판의 오월 : 이 세상을 본받지 말라 (2) | 2023.05.10 |
---|---|
계묘년 어버이 날 : 완전한 자유 (0) | 2023.05.08 |
오월 초하루 : 예수를 아는 지식 (2) | 2023.05.01 |
사랑초 뽑아내다 : 영혼문제가 급선무 (0) | 2023.04.27 |
곡우날 연산 : 아빠 아버지 (1) | 2023.04.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