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일

스레트 뜯는 날 : 총고백서

mamuli0 2020. 5. 27. 08:49

 모내기가 시작 되었다. 토란이 모두 올라왔다. 울금은 아직 보이지 않는다. 금년에는 스레트 뜯는 작업이 일찌기 끝났다. 코로나 감염병이 이어지고 농촌 일손도 영향을 받아 빈 밭이 아직도 있다.

 

총 고백서

 

저희의 일이 절대 자비행이었지요. 그리고 사도직에 속한 일이요. 그리고 사리(私利)가 없는 주님의 성가족이요. 예수 그리스도가 주인이시오, 저희들은 주님의 종이요, 병든 어린 양들은 곧 예수님의 몸이요, 지체였습니다. 그래 주님께서는 떠나가신 고허번(Herbert A Codington) 원장님을 시켜 이 병든 양들을 먹이고 입혀 왔습니다. 고허번 원장님이 떠나가 버리신 후 저 는 당황했습니다. 저는 겁을 잔뜩 먹고 어떠한 지혜를 얻어 달아나려고만 정신을 썼습니다.

 


마침 병이 들어 좋은 구실이 오게 되었습니다. 혹, 그래 제가 병이 나 죽어버리면 될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도피를 해버리면 그만이라고 생각 했습니다. 그래 고아가 된 어린 양들을 누구에겐가 대리로 맡길 이를 생각해 봐도 보이지가 않아 공포심만 앞을 가렸습니다. 이 사람을 생각해 보아도 양들이 안심이 안 되고, 저 사람을 생각해 보아도 양들이 안심이 안 되고, 그러니 결국 ‘만일 주님께서 모든 장애되는 일만 없애주시면 별수 없이 제가 짐을 져야겠습니다.’하고 서원했습니다.

 


그런데 그 때부터 걷잡을 수 없는 공포와 불안과 걱정과 밖에서 오는 감당할 수 없는 침해를 이겨나갈 능력이 없음을 알게 되고 무서운 공포심에 빨려 들어갔습니다. 그 아프고 쓰린 희생을 단 하루도 못 견디겠다는 생각에 겁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 모순이 되는 일만 정리하면 할 수 있지 않느냐는 희망도 가져 봤습니다. 그 모순은 곧 땅이나 재산이 사람들의 불화의 원인인 것이 사실이니, 그 재산만 나누어주면 환자들이야 욕심낼 사람이 없을 것이니 같이 눈물을 흘리며 같이 죽으면 되지 않느냐는 결론까지 얻어 희망을 품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계시를 주셨다고 기쁨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그런지 하룻밤에 재산을 다 주어버리고 돈을 다 나누어 준다 해도 화친은 될 수 없다는 절망감에 사로 잡혔습니다. “물질로는 해결이 없다. 물질로 뜻을 산다면 더욱 끝없이 물질의 노예가 되어 굶어 죽어가는 병든 양을 보호할 수 없게 된다.”그러자 길은 꽉 막히고 절망뿐 이였습니다. 그때 숨이 막히고 가슴에 불이 타고 결국 이 불쌍한 병든 양들을 다 죽게 하는 사람은 재산을 욕심내는 다른 사람 때문이라고만 알고 그것이 용서 못할 실덕이라고 느껴지자 저는 가슴에 불이 나 죽게 되었습니다.

 


홍해 앞에 선 이스라엘 사람같이 진퇴양난인 절망과 분심과 발광에까지 이르러 영과 육이 참으로 죽을 만큼 불덩이가 되었을 때, “용서 못할 그 사람이 너다” 하실 때 깜짝 놀라 “저올시다.”하고 자복하고 나자 그 때야 비로소 하느님이 무서워져 “하느님 잘못했습니다. 다른 사람 탓이 아니라 제가 제일 잘 할 수 있다는 교만 병인 마귀의 수중에 붙들려서 이렇게 되었습니다.”하고 고백하였습니다.

 


사람만을 무섭게 알던 그 50년 묵은 뱀이 기어 나가면서, 하느님이 무서워졌습니다. 아니 그 때 저를 살리려고 하느님께서 제 가슴에 쏜살같이 뛰어드신 것을 본 마귀가 무서워하던 순간이었지요. 그와 때를 같이 하여 마귀가 무서워하던 그 찰라, 제 영혼 속에 숨어 있던 위선이 똑같이 무서움을 알게 되었어요. 그때 마귀란 남이나 사람이나 그 무엇이 아니고 바로 내 자존심이, 결국 알고 보면 마귀도 저요, 원수도 저요, 단체를 괴롭히는 모순도 다 자신의 자고심, 자애심, 자기의 사업욕에서 오는 갈등이요, 실력은 전혀 없으면서 자기를 과신하고 일을 감당 못할 만큼 크게 벌여 놓은 부작용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 제 영혼 안에는 한 사람의 영이나 육을 지도할 수 있는 힘이나 능이나 자격이나 실력이 없음을 자각하게 하셨나이다. 결론으로 타인의 방해만 제거하면 제가 제일 예수님 뜻을 받들어 잘 할 수 있다는 맹목적인 꿈과 욕심과 호기심으로 가득했으나, 이제야 가능성이 전무한 아무런 자신이 없는 허무임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첫째, 절대 자비행이라는 일인데 제게는 자비심이라고는 전무합니다. 동기도 없습니다. 진정한 사랑으로 해야 할 일인데 사랑이라고는 티끌만큼도 없는 제가 어찌 그 같은 주님의 사도직을 생각이나 해 보겠습니까? 저는 할 수 없습니다. 완전히 두 손을 번쩍 들고 항복했습니다. 주님 홀로 참 자비를 주시는 주인이십니다. 저희 목장의 주인은 오직 주님 한 분 뿐이로소이다. 지금까지도 주님이 친히 하셨나이다. 그것을 모르고 자기가 한다는 그 의지가 곧 주님의 도적이요, 반역이었나이다.

 


그 때 하느님이 저의 마음의 성에 입성하시고 승리의 선포를 외치시는 첫 말씀이 “듣거라. 너는 사람 무서운 줄만 알고 사람의 종이 되었고, 나 하느님 두려운 분이심을 전혀 몰랐느니라.” 하셨습니다.

 


“예, 죽여주십시오, 과연 옳은 말씀입니다.”(마태 16:2-28) 또, “나 이제 내 아들의 피와 대속의 은총을 생각하여 용서해 주는 것이니, 앞으로는 사람을 무서워 말고 나 하느님을 무서워하고, 진실한 마음과 사랑으로 네 어리고 병든 양들을 먹이고 보살피라” 하면서 우셨습니다.

 


저도 그 후부터 같이 울었습니다. 생각만 해도 너무나 감사해 눈물이 났습니다. 이제 앞으로의 모든 일은 굶든지 먹든지 주님의 사랑하심을 믿고 찬송과 감사를 올리는 것이 저의 할 일이로소이다.

 


그 때 제가 거느리던 저의 새끼 사탄들인 자고심, 자애심, 자만심, 교만심, 자기 의지, 자기 감정, 자기 지성들인 명장들과 총대장인 본능을 앞세우고 정과 욕과 탐심, 진심(嗔心), 사업욕, 호기심, 애착심, 미련심, 추억과 꿈과 허영과 허욕과 터무니없는 자기 망상과 자기 과대 신용들을 거느리고 십자가 위에 뚝뚝 떨어지는 주님의 대속의 핏방울 밑에 엎드려 절대의 자비에 무릎을 꿇고 항복하였나이다.

 


“저를 불쌍히 보시옵소서. 저는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로소이다.”
4월 27일 0시로부터 3시를 거쳐 7시 사이에 완전히 두 손을 들고 저는 아무 것도 할수 없는 허무요, 먼지요, 벌레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자아를 포기했습니다. 이제 앞으로는 모든 일을 주님이 친히 하십니다. 일이 되는 것도 주님의 뜻, 안 되는 것도 주님의 뜻, 제가 드릴 일은 감사와 찬송뿐이옵나이다. 예수님 이름으로 감사기도 올립니다. 아멘.

 


전 인류의 아픈 마음을 자기 마음으로 알고 사랑하고 같이 고통 할 때 곧 빛이요, 신격이요, 인격이요, 자유인이요, 성인입니다.

 


예수님께서 전 인류의 모든 고통을 다 한 몸에 지고 죽어 줄 때만 참 평안과 평화가 그 가슴에 왔습니다. 다시 말하면 부활은 아니 올 수 없는 천리(天理)였습니다.

 


우리들의 평화도 똑같이 자기 개인 홀로 서만의 평화가 있다면 그것은 자기욕심의 만족이요, 가짜 평화입니다. 참 평화는, 자기와 연대 책임이 있는 전 인류와 전 단체와 전 형제자매와 공동으로 얽혀진 연대적인 범법이나 죄나 상처나 불공평이나 부덕이나 불애(不愛) 등이 통째로 자기에게 책임이 있음을 자각하고, 십자가에 죽어 주는 작은 예수가 되는 찰라, 곧 죄의 권세에서 해방되고 초성은총의 사랑을 입어 자유인이 되는데 있습니다.

 


그 마음속에는 모든 욕이나 탐이나 분이나 미련이나 매임이나 부딪침을 초월한 가난한 마음 자리를 얻어 주셨기 때문입니다(마태 5:1-5).

 


곧, 그 자리가 공의 자리요, 대자대비의 마음자리요, 예수님의 마음자리요, 성령님의 마음자리입니다.
“제 영혼을 하느님이 창조하셨기 때문에 제 영혼이 하느님 품안에 안긴 후에야 평안을 얻었나이다.”
이 말씀은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이 고백이었나이다. 오! 하느님의 영은 자비의 영이요, 사랑의 영이옵니다. 하느님이 그냥 하느님이 아니오라, 참 사랑이신 아버지십니다. 자비의 사랑이신 하느님께서 제 영혼과 제 마음속에 자비의 사랑 한 조각을 두셨나이다. 제 가슴에 임재하시는 하느님의 친 영이신 자비의 사랑은 신비롭게 초성(超性)의 은총으로 제 몸속에 머무시는 시간만 제 영혼이 기뻐 뛰나이다.

 


그러나 그 신비체인 그리스도 예수에게 나타내 보여주신 그 참 사랑이 제 가슴에 같이 살으실 때만 제 영혼은 평화를 얻사옵니다. 그리고 제가 조금만 방심하고 하느님 아닌 피조물에 대한 미련이나 집착에 시험이 드는 시간은 그 평화의 영이신 자비의 사랑이 비껴나시고, 평화가 흔들리고, 정과 욕이 동하고, 자비의 사랑이 쫓겨나고, 그 대신 상대적 사랑인 애증으로 되돌아가고 맙니다.

 


이것이 곧 제 가슴의 시험이요, 불이요, 세상 구경이요, 세상 맛이였습니다. 세상이 어떻다는 것을 그 고통을 통하여 성령이 일깨워 주시는 놀라운 체험을 하도록 해주셨나이다. “저 불덩어리를 네 손으로 만져 보아라. 얼마나 뜨겁더냐?” 예! 너무 뜨거워 두렵고 떨리나이다.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1베드 2:25).

 


주님의 사랑은 계명의 완성을 뜻합니다. “내가 너희를 자비의 사랑으로 사랑한 것같이 너희들도 서로 자비의 사랑으로 사랑하여라. 이것이 나의 계명이니라. 내 할 말은 이 말 한마디니라.”

 


오! 주님의 성심이 곧 자비의 사랑이시오니 제 영혼이 그 성심 안에 안기어 자비의 사랑에 동화되고, 그 자비의 사랑이 초성의 성총으로 제 가슴 속에 와 계신 후에 제 몸을 빌려 주님이 제 속에서 형제자매를 자비의 사랑으로 사랑하시는 그 순간, 제가 능히 형제자매를 자비의 사랑으로 사랑할 수 있었나이다. 그래 아우구티누스 성인의 그 체험이 그 경지인가 하였습니다.

 


오! 주여, 저의 영혼을 주님의 자비의 사랑으로 창조하셨기에 제가 아담의 애증의 상대적인 사랑을 부인하고 십자가에 정과 욕을 못 박은 후 곧 기적의 역사가 진행하여 제 가슴에 자비의 사랑이 임재 하셨나이다. 그 때에 제 영혼이 주님의 사랑 속에 안겨져 아이같이 안심하고 평안하였나이다.

 


참 기쁨은 어디서 옵니까? 예수님의 계명을 순종할 때 옵니다. 참 기도는 어디서 울려 옵니까? 예수님 계명에 따라 성심을 따를 때 기도가 늘 됩니다. 참 감사는 어디서 우러나오는 것입니까? 예수님의 계명대로 희생할 때 옵니다. 하느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순결한 참 사랑으로 자비를 위하여 희생하는 게명의 완성입니다. 곧 예수님의 계명을 따를 때, 곧 하느님의 성령에 순종할 때, 곧 성령의 불에 타서 사랑의 희생을 행할 때 참 기쁨, 참 기도, 참 감사를 주십니다. 이 참 기쁨과 참 평화를 주시기 위하여 새 계명을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계명을 지키는 것은 수단이요, 목적이 아닙니다. 사랑, 기쁨, 감사, 평화가 곧 저의 영혼의 안식입니다.
내가 이 말을 하는 것은 내(예수님 계명의 기쁜 희생과 사랑의 체험) 기쁨을 당신들도 같이 나누고 또 마음껏 누리게 하려는 것입니다. 내가 당신들을 사랑한 것처럼 당신들도 서로 사랑(참 자비의 희생)하십시오. 이것이 나의 계명입니다. 벗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는 희생의 아가페 사랑보다 더 큰 사랑(참 사랑의 희생)은 없습니다. 항상 기뻐하십시오. 늘 기도하십시오.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여러분에게 예수님의 희생의 사랑을 보여주신 하느님의 뜻(자비)입니다.

 


형제자매는 불쌍한 내 영혼의 동생임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깨닫고 보니 불쌍한 형제자매이기 전에 제게는 수도 성소를 재촉해 주시기 위하여 주님이 주신 저의 은인입니다. 그 은인의 은혜를 갚아 주시옵소서. 제게도 기회를 주시어 그 은혜의 만분의 일이라도 구원받아 최선을 다하여 보답할 기회를 주시옵소서. 다만 그 영혼이 구원받아 주님의 참 제자가 되게 하시는 길이로소이다. 불쌍히 보시고 구원하여 주시옵소서.

 


감사를 올립니다. 찬송을 올립니다., 저의 은인은 한 형제요. 한 자매이옵니다. 제가 허욕에서 헤매며 사업의 미련에서 헤맬 때 그 얼마나 큰 불안과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는 양 갈래 길에서 울어야 했습니까? 지금 제 영혼 깊은 속에 수도의 진정한 성소를 깨우쳐 주신 이는 곧 주님이십니다. 그리고 제가 주님 소리를 들을 마음의 귀가 없기 때문에 한 형제, 한 자매를 어떻게 하면 그 영혼과 몸을 기쁘게 해줄 길이 없을까 하고 10여년을 제 지혜와 정성과 힘을 기우려 머리를 다 짜 봐도 해결의 길이 안 보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갑자기 한 형제, 한 자매의 일이 급한 것이 아니라 곧 자기 영혼 안정이 절대의 급선무가 된 것입니다.

 


이대로 가면 내가 완전히 폐인이 되느냐 아니면 용서함을 받고 새 사람이 되어 성인이 되느냐의 이 갈림길에서, 수도의 성소가 탄생하도록 자극을 주시고 외공(外功)에서 마음이 멀어지고 동광원 밖에서 일어나는 흔들려진 미련을 끊게 섭리하셨습니다. 곧, 자기로서는 전혀 안 보이는 형제자매의 영혼의 평화와 형제자매의 몸이 살아갈 길에 대한 어떤 근심걱정 보다도 내 할 일은 그 일이 아니라 주님 친히 원하시는 뜻, 곧 영혼이 평안해지는 걸로 보여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곧 수도소명이요, 성소로 총 집약이 되어 뚜렷한 단일 목적으로 굳은 뜻을 주시며 소망을 안겨 주면서 소망을 이루어 주신다는 믿음과 사랑을 완성하는 길이요, 이 길만이 모든 것의 해결이요 완성됨을 깨닫게 하셨나이다.

 


이 때 저는 그렇게도 무서웠던 모든 일들과 불안과 공포와 절망과 고통을 함께 묶어 생각해 보니, 곧 그것이 주님의 섭리요, 매요, 권고요, 깨우침이요, 축복이 되어 어제 오후에 1데살 5:16~18절을 보고 “항상 기뻐하십시오, 늘 기도하십시오.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 하십시오” 하신 말씀의 뜻을 깨달았습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여러분에게 보여주신 하느님의 뜻입니다”라는 말씀을 묵상하는 중 마음에 감사의 정이 통하며 하느님의 뜻이 곧 자비의 사랑의 완성이라고 생각 할 때 소망과 희망이 꿈틀거렸습니다. 그런데 그 묵상을 하면서 말씀을 외던 중 갑자기 “제게 근심 걱정이 된 형제나 자매가 곧 제 은인입니다”하고 마음이 확 열렸습니다.

 


마음이 열리기 시작하고 기뻐지고 감사가 되고 이제 알려주신 대로 곧 “그 형제자매야말로 저의 은인입니다”라고 외쳤습니다. 이 세상의 호기심이 마음속에서 쫓겨나면서 이렇게 세상을 모르는 문둥이 살 같은 무감각한 마음을 아프게 깨우쳐주고, 세속적인 애착과 미련을 끊는데 큰 자극을 직접으로나 간접으로 제게 깨우쳐 준 형제자매들이 저의 은인이라는 생각이 미치자, 그렇게도 섭섭하던 생각이 눈 녹듯이 없어지고 “오, 저의 은인이여!”하고 오히려 감사하게 되었습니다.

<그분께 드리는 고백> P67-P78

 

Logos. Atman. 道. 말슴. 꿈틀긔림. [요 1:1] 맨 첨에 말슴(로고스)이 계시니라.이 말슴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슴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맨 처음 우주가 생기기 이전에 태극이 있었다. 이 태극은 무극無極과 함께 있었다. 이 태극은 곧 무극이다. 무극이 태극, 맨 처음에 아들이 있었다. 아들은 아버지와 같이 있었다. 아버지와 아들은 일체다. 부자유친이다.
- [요 1:1] 맨 첨에 말슴(로고스)이 계시니라. 이 말슴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슴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