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일

부처님 오신 날 : '진달네'를 심은 까닭

mamuli0 2020. 4. 30. 16:03

 부처님 오신날은 날씨가 30도 까지 이르렀다. 키위 꽃도 피고 둥글래 싸리 꽃도 피었다. 산소에 수선화를 심었다. 장독대 옆 맥문동 화단에서 노란 수선화 묘종을 캐어 옮겨주었다.


 

 


진달네」를 심은 까닭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자 제자들이 곁으로 다가왔다. 예수께서는 비로소 입을 열어 이렇게 가르치셨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 5:1-3)"
 
  
  


 약 70여 년 전, 예수님의 산상복음의 마음이 가난하게 사는 것이 복되다는 말씀을 받고 전라남도 화순군 도암면 등광리에 사시던 이세종이라는 분은 천태산에 은둔소를 짓고 입산하여 수도를 하셨는데 그분을 이공(空)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분은 해방 전에 돌아가셨는데 해방 후 YMCA의 현동완 선생님이, 세계의 성지를 찾아 돌아다니셨던 분으로, 우리 한국에도 성인이 살던 은둔소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천태산 은둔소를 찾아 온 일이 있었습니다.


 

 


  그 후 그 이야기를 들으시고 서울에 계신 유영모 선생님께서 현동완 선생님과 같이 천태산 은둔소를 찾아오셨습니다.
 그 때 이세종 선생님의 제자였던 이현필 선생님과 세분이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만남으로 두 분은 정월과 팔월에 일 년에 2회씩 이세종 선생님의 제자들을 중심으로 일주일씩 종교교육을 지도해 주셨습니다.

 한번은 1월달에 말씀하러 오셨던 현동완 선생님께서 "도와드리고 싶은데 소원을 말하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광주에는 결핵전문 무료병원인 제중병원이 있는데 서울 이하에 있는 무의무탁 결핵환자들이 소문을 듣고 죽기 전 마지막으로 입원하는 병원으로 입원하는 환자들은 6개월이 지나면 퇴원하기로 되어 있습니다. 생명이 아무리 위독해도 약속에 의해서 그리고 새로 들어올 환자들을 위해서 퇴원을 해야 합니다.


 

 
 그때 오덕환 이라는 환자가 있었습니다.
 연령이 23세 되었는데 퇴원 날짜 통지를 받고 절망하여 잠을 못자고 식사를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던 삼일 후 갑자기 식사를 하는 것을 보고 옆에 누워 있던 제가 '어떻게 마음을 안정 하시고 식사를 하십니까? 라고 물었더니, 그는 '각오를 하였더니 잠이 오고 식사가 됩니다.' '무슨 각오를 하였습니까?'라는 질문에 그는 자기 가슴깊이 넣어 두었던 약봉지를 '탁탁'치며 '6개월 전에 여기에 입원이 안 되면 먹으려고 했 던 독약이 있지요. 저는 하룻밤 잘 곳이 없던 나그네로서 6개월 동안 천사 같은 사랑을 받고 살았습니다. 그 동안 참으로 행복했습니다.
그러나 나갈 일을 생각하니 앞이 캄캄해서 밥을 못 먹었는데 마음속으로 다리 밑으로 내려가서 약을 먹을 생각하니 아주 마음이 편해졌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저는 병원 당국에 호소했고 특별히 6개월 더 연장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다시 6개월이 다 되어가니 그 환자의 앞날이 제일 큰 걱정입니다."라고 현 선생님께 말씀을 올렸습니다.

 그 말씀을 심각하게 듣던 선생님은 병원에 가셔서 칼링톤 원장 선생님을 만나 뵙고 모든 사정을 아신 후 오덕환씨 이야기를 글로 적으라고 하시기에 글로 적어드렸습니다.


 

 


 그 사연을 가지고 서울에 가셔서 그 때 자유당 정부의 국회의장이었던 이기붕의장을 만나 뵙고 환자의 딱한 사연을 말씀하시고
 당신도 젊어서 결핵 환자였고 저도 젊어서 결핵 환자였는데 이 사람을 도와주십시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의장께서 "내 개인으로 성의를 올리겠습니다." 하시며 도움을 주셨습니다.
 요양소 이름은 이공님의 고향 등광리(燈光里)에서 '등(燈)자 하나를 정하고 이기붕 의장의 호 '만송(晩松)'에서 '송(松)'자를 따서 '송등원(松燈院)이라 이름을 지었습니다.

  송등원 자리는 무등산 기슭에 있는 '파크호텔' 바로 옆에 있었는데 주민들의 반대로 철거를 당했습니다.
 

 

 


 한겨울에 광주에 들르신 유영모 선생님께서 '송등원'환우를 찾아가서 하룻밤 말씀해 주시고 주무시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곳에서 6km를 걸어서 무등산 '삼밭실(원효사 골짜기에서 1,700m 지점)'이라는 골짜기에 살고 있는 여자 환자들을 찾아보았습니다.
 거기 산에 있는 환자를 돌아보고 내려오시면서 선생님은 눈이 내리는 2월의 무등산을 자꾸 되돌아보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큰 산 밑에 영혼들이 쉬어갈 수 있는 구약성서의 도피성같이 국경과 종교를 초월한 은둔소가 있으면 참 좋겠습니다."라고 하셨습니다.
 스승님께서


 

 


 "죽은 사람은 죽지만 이곳저곳에 가보면 아주 젊은 사람들이 간호해 주고 도와주는 보모들이 있는데 젊어서는 좋지만 늙어서는 어떻게 하느냐?"하며 걱정하셨습니다.
 이곳저곳에 가보면 청춘을 바쳐 봉사하는 분들이 있는데 그 젊은 분들의 노후가 걱정된다고 하시며 인재들이 모여서 보호받을 수 있는 공동체의 필요성을 느끼셨습니다. 그 뜻이 좋고 불쌍한 사람도 많지만 빛도 없이 이름도 없이 봉사하는 사람들의 장래에 대해 책임을 느끼며 일은 많은데 일꾼이 적은 이 때에 젊은 구도자들의 교육을 걱정하셨습니다.


 

 


 선생님의 그 뜻을 알고 있던 그 때 제가 전주 모악산 기슭에 절터가 있다는 말을 듣고 산 4만평과 대지 600평이 나왔다고 말씀을 드리자 집과 땅을 사주셨습니다.
 바로 <진달네 공동체>입니다.
 그리고 그 땅을 사도록 협력하신 분이 그 지방에 사셨던 박효균 선생님과 박중근 선생님이셨습니다.
 
<저 꽃들이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해 보아라> p222-p2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