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일

비트 심은 날 : 계명산 초기 생활 (B)

mamuli0 2020. 3. 19. 14:06

 창고 기초 공사한 날 포장 준비하고 다음 날 두사람을 얻고 산들이와 고요가 도와주어 육묘한 비트 모종을 동백밭에 정식했다. 다하지 못해 다음 날도 가족이 심었다. 진달래 현호색 꽃이 피기 시작한다. 수선화를 뒷산에 옮겨 심었다. 지난밤 부터 바람이 세게 불고 있다. 비닐이 벗겨져 물을 뿌려준다.


  


 

계명산 초기 생활 (b)


 2001.01.25. 박공순, 한영우


사) 두 번째네요. 2001년 1월 25일. 두 번째 테이프 에요.
아까 이야기가 그래서 전부다 끝나고서, 육이오 끝나고, 가 아니라, 데리러 왔다가 능곡에 와서 다 데리고 피난 데리고 내려가셨다. 이 선생님께서 그런 이야기 말씀 하셨지요?
한) 그때는 다 데리고 내려가 가지고 인제 광주에서 조금 계시다가 진도로 갔어요. 그 사람들, 학생들이 다. 
사) 다 진도로 내려갔어요?
한) 예, 그때는 서울 학생들, 오 장로님이 진도로 데리고 가고 거기 가서 무슨 저기 그것도 얘기 하려면 한참이에요. 진도도, 그런 것인데 대충으로 한다면 거기 가서 농사를 짓는다고 하며 참외 같은 것 서울에서 종자 가지고가서 다 심어 놓았더만, 그래가지고 한참 오 장로님이 애들 데리고 사는데 이 선생님이 나오라. 그러고 장로님한테 그래가지고 장로님은 나오시고 서울 학생들은 거기서 살고 그랬어요. 
사) 능곡은 그때 이후로 몇 년 동안 비었겠네요?


 


한) 예, 비었다가 또 올라왔어요. 나중에 그 사람들이 아니고 딴 사람들이.
사) 한 3-4년 지난 다음에 다시 올라왔어요?
한) 몇 년이 되었는지?
사) 전쟁이 끝나고 올라왔겠네요?
한) 아니 그때도 전쟁이, 안했지만 어찌되었든 몇 년 쉬었다가 왔어요. 3년 쉬었는가? 몇 년 쉬었는가? 쉬었다가 다시 올라왔어요. 그때 그 사람들 아니고 다른 사람들 데리고 올라왔었어요. 
사) 예.
한) 그때 아까 능곡에 오셨다는 말이 그때 오셨다는 거야. 인제, 
박) 아니, 그 앞에 우리 앞에 여자반이 또 자립반이 올라왔어. 맹 선 씨 기순이 양순양  선임씨 우리 앞에 올라온 반이고, 그 반은 우리가 두 번째 올라오고, 남반은 언제 올라왔는지 모르겠어. 우리 오니까 있습디다. 
한) 우리 처음 그 사람들 올라올 때 같이 올라왔다니까 기차타고 애기들 데리고 같이 올라왔어요. 맨 처음에 
사) 한 3-40명?
한) 3년 후인가? 몇 년 후인가? 모르겠는데.
사) 3-40 명, 가량?
한) 그렇게 많지는 않아요.
하여튼 여기 강원도 쪽에 가까운 사람들 고향 찾아 갈수 있으면 찾아가라. 그런 식으로 왕 목사도 그때 같이 데리고 왔어요. 아 그때 청운이 또래 성식이 그런 사람들은 저쪽 사람이지만 이쪽 있는 사람들 데리고 왕 목사도 그때 집을 찾았고 능곡 와서 있으면서 그때 당시에 올라왔었어요. 몇 명인가 잘 모르겠고


 


사) 그때 오 장로님도 그때 올라오셨나요?
박) 아니 뒤에요. 그 때는 같이 안 왔어요. 그러니까 56년도에 제가 올라왔는데 그이들은 한 55년도에나 한 맹순언니 같은 그런 언니들은 1년 전에 온 것 같아요. 한해 농사를 지었으니까 55년.
사) 그래서 그때부터 그 능곡은 언제까지 몇 년도까지 계속 되었지요?
박) 능곡은 한
한) 여기 식구들이 살면서 모두 심어주고 그랬으니까. 상당히 거기도 시간이 오래 살았어요.
사) 70년이나
박) 70몇 년도에 아마 없어졌나 봐요. 
사) 자, 70몇 년도까지 그럼 그때 거기 3-40명씩 와서 살면서
한) 그렇게 많이 살지 않았어요. 여기만 많이 살았지 거기는 그렇게 많이 살지 않으니까 모 심으러가고 그랬지.
박) 논이 있고, 여기 사람들이 거기 모내러 한 번씩 가면 저는 여기서 계속 광주서도 시꺼먼 보리 겨만 사다가 끓여 먹었는데 여기 와서 계속 서울도 그러니까 사람들이 모두 가도 저는 안 보내줘요. 어머니들이 안 보내줘서 능곡 가고 싶어도 못 갔어요. 
사) 능곡에요?
박) 예, 능곡에 가고 싶어도 못 가는데 사람들이 갔다 와서 뭣도 해줘서 먹고 뭣도 해줘서 먹고 그런 사람도 있고 그랬는데 왜 저는 한 두 번인가 갔었어요. 갔는데 가서 쌀밥을 한 수저 먹고 나면 이 속이 저려요. 아주 속이 불이 나고 못 먹겠어요. 그래서 어떤 사람은 쌀밥을 넣으니까 불이 벌벌 타요. 속이 그냥 경험 안 해본 사람은 모를 거예요. 몇 번 갔어요. 쌀밥을 얻어먹고 오면 사람들이 전부 파김치가 되요. 여기서 그렇게 못 먹고 오래있다 가니까, 그런데 저는 더해요. 불이 펄펄 타요. 가슴에서 불 질러 놓은 것 같아. 쌀밥이 그렇게 독한가? 그래가지고 그런데 가서 좋은 것 먹을 팔자도 못되데요. 속이 불이타서.
사) 그렇게 해서 70몇 년까지 있다가 없어진 거예요? 그때 무슨 사고가 나서 다 이렇게 넘어가고 그랬다는 말씀 이지요? 그러면 여기 아까 계명산에 대해서 이야기 하셨지 않아요? 계명산에 한 2-3년 지나다 보니까 50명가량 됐다는 말씀 이었지요? 그러니까 60년까지는 계속 개간하고,
박) 식구는 많았어요.


 


사) 그때 이후를 죽 한번 생각나시는 대로 초기 2-3년 지나고 50명 됐다고 그러셨고 그러다가 1959년이나 1960이나 그랬을 거 같은데 60년대 그 이후로 여기 집 지으신 게 65년 이라고 그러셨지요?
박) 여기 집이 66년도에 지었어요. 저 위에 방은 68년도에 지었고. 
사) 그 중간에는 계속 사람들이 많이 와서 개간하고 그랬다는 말씀이지요? 그때는 이 밑에를 개간 했나요? 
박) 68년 69년은 계속 떡 번지 개간하고, 58년 59년은 계속 떡 번지 개간하고 한해에 다 팠는데 68년도에
사) 58년도에
박) 예, 58년도에 이렇게 정신이 왔다 갔다 하니 뭔 말을 하겠어? 58년도에 거기는 개간했어요. 개간을 해가지고 너무 오 집사님 하고 공순 언니하고 장로님은 나무를 많이 쳤거든요. 공순 언니하고 오 집사님을 잡아가 버렸어요. 그때는 오 집사님 이라고 그랬어요. 장로님을 잡어가라고 했어요. 배는 고프지, 땅은 파야지. 그러니까 그 착한 사람이 얼마나 하셔 그러니까 알았습니다. 하데요. 그래가지고 58년도에 개간해 가지고 무 심고 그 해에는 풀이 안나요. 개간 하니까 산이라 놔서 나무뿌리 이파리 낫 가지고 다니면서 깎고 베기만 하는데 그런데 이쪽에다가 작은 떡 번지 큰 떡 번지 그러는데 작은 떡 번지에서 한나 어머니가 학생들을 집 지으라고 하면서 저 큰 떡 번지 너머에 가서 그거를 나 혼자 다 베래요. 그 떡 번지 거의 한 2천 평도 넘는데 거기를 낫을 가지고 이파리를 나 혼자 가서 베래요. 그 외진데 가서 가슴이 두근두근하면서도 하라하니까 해야 해요. 부리나케 그 산속에 가서 혼자 그러고 하려면 좀 안 됐데요. 한사람이라도 붙여주시지, 혼자만 보내.
사) 사람들도 많은데?


 


박) 예, 사람들도 많은데 아랫집에서 일하고 그 사람들 집 짓는데 일하고 혼자만 웬만한 어려운 일은 혼자만 하라고 그래요. 그럼 나는 또 꼼짝 없이 해야지요. 수도한다는 말은 많이 들었거든요. 그동안 살면서, 여기 수도원에서는 요만한 골무 하나도 버리라고 해야 버리지.  수도원 원장이 버리라고 해야 버리지, 절대로 못 버린대요. 그런 이야기 많이 듣고, 또 제 자신이 어른한테 반항하기는 싫고 그러니까 하라고 하면 하는 대로 해요. 아주 무서워요. 정신없이 뛰고, 사람이 하라는 대로 그렇게 해왔어요. 그런데 웬만한 일은 다 한나 어머니가 그렇게 하고 또 제가 혹시 눈치가 너무 힘든 일을 그러고 계속 막 시키고 그러면 어떤 때는 좀 안 좋은 때가 있어요. 그러면 막 야단을 쳐대요. 사람이 형제가 들어오면 싸래기 하나라도 똑 분질러서 해야 한대요. 말씀을 그렇게 하세요. 싸래기 하나라도 형제 한사람이 들어오면 똑 분질러서 나눠서 먹어야 한 대요. 그럴 사람이 그러느냐 그거에요. 내 기분이 조금만 나쁘면 훈계를 맞으니까 꼼짝을 못해요. 한번은 참외를 요 앞밭에다가 죽 심어놨는데 그해 참외가 얼마나 잘되었는데 참외가 이만씩 해가지고 내일 모레면 익어요. 그런데 그게 식구가 많다 보니까 그게 사건이 붙었어요. 사건이 붙었어. 그래가지고는 한나 어머니가 화가 나가지고 서울 어머니는 어디가고 안계시고 한나 어머니가 화가 나가지고 그걸 뽑으라네. 사람 미치겠어. 내가 이 일을 해야 하나? 안 해야 하나? 그런데 나를 끌고 가서 세워놓고 서서 이렇게 지키니 막 지키고 서서 그놈 뽑으라는 거야. 아주 죽겠어 안 뽑고는 사람이, 사건이 있었는데, 누가 따 먹었겠지요. 따먹지 먼저 먹자고 했던가? 따서 어른 대접을 했는지, 하여간 무슨 사건이 있었어. 그 참외를 다른 형제가 불평했다고 참외 그걸 뽑아버리라는 거야. 그런데 왜 나만 끌고 가서 나만 죄짓게 만드느냐? 이거야. 내가 안 뽑고 서있으니까 빨리 뽑으라고 막 그러는데 안 뽑고 이걸 어떻게 견뎌요? 내가 어디로 내빼 버렸으면 하는데 나는 순종한다는데 그놈의 것 순종하는 거 생각하면 그래가지고 서울 어머니가 서울 갔다 오셨네.


 


사람들도 다 억장이 무너지고 나도 사람이 마음이 괴로워서 미치겠고 내가 그때 같으면 이 세상 안 살고 싶어. 얼마나 마음이 괴로운지 재에 저 밭에 가득 심었어요. 그런데 노랗게 곧 익어가요. 그런데 조금 더 익어야 먹을 텐데 그놈 싹 뽑아 버렸네. 와 서울 어머니가 어디 갔다 오시더니 벼락이 난거에요. 나만 벼락이 유구장상 이제 마음은 가룟 유다가 이만큼 괴로웠냐 싶어. 아주 그냥 가룟 유다가 이만큼 마음이 괴로웠을까? 왜 순종한다고 나보고 그래 저 위에 고랑 물에 눈이 침침하도록 물로 씻어 가면서 울었어요. 어디로 가든지 죽어버리든지 못살겠다. 세상에 나는 지금도 한나 어머니가 그렇게 뽑으라고 한 걸 이해를 못하겠어. 지금도 이해를 못하겠어. 그래가지고 너무너무 야속하고 내가 그 사람들 볼 낮도 없고 서울 어머니는 야단을 해대지, 미쳐서 죽어버리는 줄 알았어. 그래가지고 뭔 일만 나면 사람들이 많으니까 여기서 쿡 찍고 저기서 쿡 찍고 일만 나면 소리 듣는 사람은 나야. 그럼 나는 그 사람들 말을 한나 어머니한테 할 수도 없고 서울 어머니한테 할 수도 없고 그냥 혼자 참으면 목이 오르락내리락 했다가 어디 가서 그걸 참아내려니까 죽겠어. 사람이 한번은 한나 어머니가 뭣을 해라고 오라고 하더라고 내가 너무 기분이 나빠 가지고 있어서 오라고 그래 밥을 비벼놓고 밥을 먹으라고 그래. 속으로 그때 그랬어. 내가 사람들은 못 먹는 밥을 내가 그 밥을 먹어? 그래가지고는 그냥 서 있다가 와버렸어. 와버렸더니 얼마나 혼을 내던지, 기가 막혀 죽겠어. 내가 세상을 이러고 살아야 돼? 그래가지고 너무너무 울다가 내가 사는 것도 뭣하니까 어떻게 못살겠어. 죽어버리든지 어디로 가버리든지 못살겠어. 예수님도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 십자가에 달려 못 박아. 내가 살수가 없더라고 그래도 참고 사는데 말씀이 위로가 되지.


 


그런데 참 수도원에 가면 내가 고생을 각오를 하고 이 산속에 들어왔는데 이것쯤 못 참아? 그러고는 옛날 수녀들 이야기를 많이 들었어. 그걸 명심을 해가지고 테레사 성녀 같은 분도 그 많은 수녀 같은 분들 그 많은 조화를 시켜가지고 사시는 걸 생각하고 그런데 그 대목을 넘겼어. 밭에다 모든 씨를 뿌려서 놔둔 걸 한나 어머니가 지내면서 보이는 일을 와서 밭을 다 둘러보고 내가 씨를 뿌려놓으면 둘러보고 참 잘 뿌렸다. 아주 잘될 것이다. 그러더라고요. 그러니까 모든 사람들이 나 하나 내가 얼마나 못됐으면 그런 일을 당하고 나 하나를 위해서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다고 생각이 되요. 보리를 이렇게 식구들이 그렇게 배가 고프고 막 쓰러질 정도로 그런 상황에 보리를 저런 떼쟁이 까지 개간을 해가지고 다 그냥 보리를 심어가지고 보리밥이라도 먹겠다고 밭 구석까지 다 개간을 하고 흙 한줌이라도 있으면 다 밭에다가 묻고, 한나 어머니가 나보고 저 사람은 흙에 환장한 사람이라고 어디 가서 흙 한줌 보면 밭에 갖다 집어넣고 그래가지고 땅을 파고 그러고 사는데 너무너무 사람한테 시달리고 하니까 어느 때는 마음이 그럴 때가 있어. 그러면 어째 어려운 일도 혼자 많이 할 때도 있고 내가 광주서 살면서 이 선생님한테 공부는 많이 못했어요. 밖에 가서 사느라고 그런데 친구가 있어. 그 말씀을 적어서 보내줘. 그럼 그걸 보고 그랬는데 그 말씀에서 땅 파는 것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우거지 밥 먹는 것은 기도라고, 그런 말씀도 여기 와서 늘 사람들하고 먹고 사는데 너무 고달파. 일에만 치중을 하다보니까 그 말씀도 못 봐. 나는 성경도 못 봤어요. 성경이 보고 싶어도 못 봐. 밤이면 한시 두시에는 나와야 되고 나와서 그 식구들 먹을 거 준비해야 되고 식 번들이 있어서 준비 하지만, 일찍 나와서 해야 할 것은 해야 하니까 생전 책 들여다볼 새가 없어.


 


그래서 그 말씀도 다 잊어버리고 살다가 하루는 진흙을 막 파 대끼는데 둘이나 서이나 해도 힘들 건데 이 사람들 기다려도 아무도 안와 그래 그걸 진땅을 한나절을 혼자 다 파고 보니까 식구가 그렇게 많아도 산으로 가고 어디로 가고 다 가고 그것을 한 서넛이 할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들이 시험 중에 있어가지고 어디 산에 가서 앉아있네. 오지를 않더라고 그래가지고 나 혼자 죽겠다고 힘이 없어 죽겠는데 그 진흙땅을 그걸 다 파, 혼자 어른들은 그걸 둘이나 서이나 한줄 알거야. 그걸 혼자 하고 나니까 너무너무 힘이 들어가지고 그래도 내가 그 사람 숨겨 줄라고 혼자 했다는 말을 안했어. 다 해놓고 했는데 그래가지고는 나도 참 젊은 시절에 나도 좀 배워가지고 남들처럼 전도하고 활발하게 살고 싶고 그런 생각도 나서 속에 시험에 들데. 그래서 또 한 번은 큰 밭에 가서 혼자 땅을 파고 있어, 땅을 혼자 파잖아? 앞에 나가서 다른 사람 쉬는 시간에 꾹 파면서 그때 무슨 생각을 집중을 하고 있는데 속에서는 그런 생각 하지 말라고 이런 생각이 마음에서 솟아나요. 생전 듣도 보도 못한 말씀 같아. 그랬는데 그 땅을 파고 있는데 땅 파는 것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고 우거지 밥을 먹는 것은 기도다. 그런 게 내 속에 가슴속에서 우러나오더라고 음, 이것 봐라. 그러면서 그때부터 기쁨이 솟아난 거야. 이거를 내가 선생님한테 들은 것 같은데 정말로 그래 내가 고생을 각오를 하고 이 산에 들어와 가지고 내가 이 시험을 못 이기고 나가면 나는 이제 그만이라는 생각이 들어가. 나를 죽이는 거야. 아주 이게 그러니까 나 죽이는 거라고 그때 그런 걸 깨달았어. 이거를 하면 총칼에 맞아 죽는 거만 순교인줄 알았는데 아 이게 순교다.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 너무 참기 어려운 걸 참으니까 이게 순교다. 남이 못 참을 일 참아주고 내가 많은 사람을 포섭하고 살 생각을 해야지. 내가 남을 의뢰하고 다른 사람한테 의지하고 살 것이 아니다. 그런 생각이 항상 들고 참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남모르는 눈물로 기도 하셨다는데 이야기가 잘 안 나오네. 왜 옛날을 뒤집어 내가 못 믿었던가? 눈물이 나와.


 


사) 지금 그때 참기가 어려워서, 그때 누구한테 이야기를 하시지를 못하셔서 그게 마음에 있으셔서 지금 그 이야기 60년대 초반까지 뭐 60년 70년 그렇게 사신거지요?
박) 예, 그냥 계속 57년도부터 사람이 들어오기 시작하고 계속 그렇게 많은 식구가 살았지 않아요? 그러는데 한나 어머니가 자꾸 그런 말씀 잘하세요. 사람들이 다 잘못하면 저만 데려다가 뭐라고 그래요. 그러면 그 어머니는  뭐라고 하면 세상에서도 큰며느리는 하늘이 내리는 거야. 막 그러면 그래가면서 야단을 치지요. 다른 사람 잘못한 것을 왜 다른 사람 잘못을 내가 그런 생각도 속으로 반항이 났다가도 아 그런 것이 아니겠지 하고 
사) 한나 어머니는 몇 년도까지 계셨지? 사셨지요?
박) 한나 어머니 사신지는 정 한나 씨 어머니가 1984년에 세상 뜨셨네. 
사) 예, 그리고 원장 하신 거는 몇 년도까지 하셨나요?
박) 그 어머니는 원장도 아니고 그냥 서울 어머니가 계속 원장을, 밖의 일 하시고, 이 어머니는 고문이시지요. 어른으로 앉아계셔서 사람들 심령 다 살펴주시고 잘못한 사람 데려다가 야단도 쳤다가 위로도 했다가 일이 그것이고. 그 어른은, 이 밖 내부의 일은 서울 어머니가 다 하시고. 


 


사) 예, 그러면.
한) 서울 어머니 이 양반 농사 할 줄 몰랐으니까 그 어머니가 다 하셨지요.
박) 그 어머니가 지도를 다 하셨는데 그 어머니도 농사 할 줄 몰라요. 한나 어머니도 농사 안 해보셨지, 모르는데 믿음으로 다 하시는데 이러고 일을 하면 저도 생전 집에서 일하나 안 해봤거든요. 어른들이 저를 절대로 일을 안 시키세요. 시골에 안 살게 한다고 집에서 부모들이 한 것만 보고 이렇게 동광원에 들어와서 집에서 어떻게 하더라. 하더라. 그 생각을 봐놨던 걸로 하고 살았어요. 농사 같은 것도 그러고 그런데 인제 1년 동안 광주서 씨앗 뿌리고 그런 거 그전에도 했지만 그렇게 씨앗 귀한 거 몰랐지요. 그런데 이 선생님이 이러고 나 씨앗 뿌리면 나오셔서 음 씨앗 아까운줄 알아야지, 그러시면서 선생님 저는 잘 못 뿌리겠네요. 그러면 선생님이 이러고 들고 가르쳐 주신다고 이러고 뿌린다고, 그러면 인제 보는 것이 있어가지고 그런 것은 해요. 보이는 일을 본대로 해. 그런데 선생님이 가르쳐 주셔서 서울 올라와 가지고 했고, 한나 어머니는 이런 농사일을 못해. 이런 사람이 저것은 이렇게 했으면 쓰겠는데 그래도요. 절대 당신의 주장에 복종해야 돼. 안되면 되든가 안 되든가 그 양반 하라는 대로 해야 되요. 그래도 대개는 잘 되어요. 그 양반 하라는 대로 하면 되기는 되는데 어떤 때는 그런 일 있으면 너무너무 안 되는 일이 있으면 좀 우리가 삐지지요. 그러면 천벼락이 나. 할 수 없어 해야지. 그리고 하는데 서울 어머니는 서울 살아서 농사에 녹두 나물을 몰랐대요. 서울 장안에서만 살아서 아무것도 모르는데 서울 어머니는 많이 저보고 하라고 그래요. 그리고 저를 하는걸 봐서 모르면 몇 개만 하는데 어느 면으로는 서울 어머니가 너그러운 편도 있고 어느 면은 인제 사람 포섭하는 데서는 한나 어머니가 좋은 면도 있고, 좀, 그런 어른들 밑에서 살다 보니까요. 좀 이런 면 저런 면 조금 틀리는 점이 있어요. 그래도 그 안에서 잘 되던가 못 되던가 절대 복종해야 돼. 절대 복종, 그 절대복종이 수도를 하려면 그리한다더라. 그래서 내 의견 다 무시해 버리고 잘 되던가 못되던가 하라는 대로 해야지요. 그렇게만 했어요.
사) 사람들은?
박) 그러면 사람들은 얼마나 총을 놓는지 알아요? 나한테, 언니는 좀 반대도 하고 좀 아닌 것은 아니라하고 그러지, 딱 그러고 있다고 미워라 할 적이 많아요. 막 총이 왔다 갔다 해. 아주 나한테 큰 애기들도 소화 자매원 자매들, 큰 애기들도 다 여기서 자랐는데 그 사람들 얼마나 똑똑해? 막 나한테 총을 놔요. 그냥.


 


사) 나이는 원장님이 제일 많았나요? 두 어머니 다음으로?
박) 예, 그러지요. 제일 많았지요. 내가 비슷비슷해도 제일 많았지요. 금선언니 또래가 많고 또 선미엄마 또래고.
사) 그런데 그때 이제 60년도 이후로도 계속 20년 30년 쭉 있었는데 사람들은 계속 바뀌는 거 아니에요? 몇 년도까지 살았어요? 4-50명이,
박) 안 바뀌고 인제 4-50명 산 것은 잠깐이고, 살다가 가기도하고 그런 사람도 있고 여기서 살다가 나간 사람도 있고 여기서 들어온 사람도 많고 그런데 그런 사람들 계속 사는데 한 40명 되던 해, 30명 되던 해, 35명 되던 해는 한참 사람이 안 없어지데요. 얼마동안 그래 인제 거기에서 다 개화도 생기면서 데려가고.
사) 개화도요? 부안?
박) 부안 거기서도 한동안 살았거든요. 거기 사람 몇 명 뽑아 가면서부터 그 뒤에 남원 생기고 남원으로 생길 때 뽑아가고,
사) 개화도 생길 때가 몇 년도지요? 1970년?
박) 78년.
사) 예, 그때까지는 한 35명 되었었군요 80년까지 그러다가 한 30명 되다가 그때부터 조금씩 줄기 시작해 가지고,
박) 예, 줄기 시작해가지고 다 남원으로 가고 광주로 가고 그러고는 이 세나 하고 청자하고 둘이 남았었어요. 마지막에, 한 82년도까지 남아있는 것 같아. 그랬는데 그 사람들이 둘이 남아가지고 2년인가?
사) 배씨 어머니가 온 걸 보면 알겠구나.
박) 한 10년 되셨지요? 10년 정도, 배씨 어머니가 지금 88인데 69에 오셨어요. 20년 전에, 
사) 80년대 초에 80년대 초 까지군요.
박) 배씨 어머니 온 뒤에까지, 그 사람들이 살았거든요. 그 사람들이 살아가지고 사람들이 그렇게 막 다 갔는데 한 집사님 그것 좀 아시는가? 사람들이 막 내려가는 거?
사) 그러면 60년대부터 60년 70년 80년 별로 큰 차이 없이 개간하고 집 짓고 살고 뭐 그래가지고 모여 살았던 거네요?
박) 66년도에 집 짓고 계속 집짓고 이 집도 몇 번 담만 이렇게 쳐지면 그런 땅을 사가지고 계속 방도 고치고 맨날 겨울 돌아오면 이 손이 마를 새가 없어요. 솥 고치고 방고치고, 그건 내 몫이니까. 계속 하고 여기 뒤에 좁은 집에서 다들 그렇게 살고 개울에다 막 늘어놓고 고구마를 한 150가마했어. 너무 배고프고 그러니까 저 큰 밭을 사가지고 거기다가 고구마를 가득 심었었어요.
사) 큰 밭은 언제 사셨어요?
박) 큰 밭은 60년도에나 샀는지, 그랬을 거 같아요. 고구마 심어서 그렇게 먹고 그 다음에 보리해서.
사) 그때 보리 할 때가 몇 년도였지요?
박) 77년도, 77년도 75년이든가 저기 있는데 방문 앞에 표도 하나 있어요. 75년인가? 77년인가?
사) 중간에 장로님들 몇 년 사셨지요?
박) 오래 사셨어요. 개화도로 가시면서 가셨지요. 장로님이 58년도에 그때 개간 같이 하시고 집 지으시고 장로님 때문에 위로를 많이 받고 살았어요. 장로님이 그렇게 통 말씀이 없이 그렇게 우리하고 똑같이 일하시고 그리고 예배 시간도 있고 그러니까. 
사) 58년부터 몇 년 사셨어요?
박) 여러 해 사셨어요. 한 60년도.
한) 개화도 가시면서 그때 가셨어요. 개화도 생기면서 그리 가셨다니까요.
박) 그랬어. 그렇지 않으면 여기서 계속 사셨을 텐데.
사) 개화도가 언제 되었는데요? 70년도쯤 된 거 아닌가요?
박) 하여간 이 선생님 세상 뜨실 때 64년도에 떠나셨는데 그때만 여기 안계셨어. 장로님이,
사) 그럼 세상 뜨시고 나서도 여기 계셨어요? 오 장로님이, 
박) 아니요. 안계셨어요. 아니 계셨어요. 
계셨을 거예요 그 뒤에도 오셨어요. 


 


박) 장로님이랑 같이 땅 개간하면서 장로님도 평생 백두산 가기를 원하셨대요. 그랬는데 이 산을 보고 한 풀었다고 그러셨거든요. 산이 좋으셔 가지고 그래가지고.
한) 50대 잘 쓰셨어요. 장로님 50대에 나 군대 갔다 휴가 왔더니 막 괭이질을 겁나게 잘 하시더라고 같이,
박) 장로님이 저한테 그러셨어요. 한나 어머니가 한번은 소금 가마니를 넣는데 내 의견에는 그때는 많이 뭐 콩만 심고 하니까 두부도 해먹고 뭐 먹는 게 많아요. 소금 가마니를 딱 높이 침대를 놓고 그 위에다 소금 가마니를 가운데로 이렇게 흐를 수 있게 해 놓고 가운데다 이렇게 그릇을 고인다고 간수를 받아야 해요. 소금을 몇 가마니씩 들여놓으면 한번은 장로님은 방앗간에서 일을 하시고 바로 그 앞에서 이제 한나 어머니 내가 소금 가마니를 사람들이 놓으려고 하는데 내가 내 마음대로 소금 가마니를 놓으려고 하니까 이제 소금 가마니는 물로 끌고 들어가라고 하면 녹을 줄 알면서도 끌고 들어가라는 거지요. 말씀이 그만큼 복종하라는 말씀인데 이렇게 놓는데 제가 무슨 고칠 것이 있어서 한나 어머니가 자꾸 반대를 하셔. 그런데 한나 어머니 하라는 대로 하면 안 되겠어. 그래서 어머니 이렇게 해야 하는데 그 말 한마디 했더니 벼락이 나버린 거야. 그래서 그냥 어머니 하라는 대로 했어. 그러니까 그때 장로님 보시고 저를 칭찬을 하신거야. 칭찬은 보이는데 안하시고 그전에도 전라북도 남원 가서 핍박을 많이 받고 살고, 그러니까 장로님이 소감 이야기 하라고 하셔서 소감 이야기 하니까 그럴 때도 그렇게 핍박 많은데도 가서 살고 그랬다고 어디 가서든지 말없이 살아온 사람이라고 더러더러 그 말을 장로님도 내 맘을 알고 나는 장로님을 의지하고 그랬는데 그때도 장로님 보시고는 그렇게 생각을 해주시고 그러니까 내가 그걸 희생을 했다는 말이 아니라, 그렇게 죽 살아오면서 역사를 살아오면서 참 그런 생각은 제가 스스로 했어요. 종교는 희생의 종교인데 희생의 사람이 없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자꾸만 들어요. 내가 불쌍한 사람 도와주고 남을 포섭을 하려면 내가 희생을 해야 되겠다. 희생의 종교인데 내가 바라면 안 되겠다는 그런 생각도 많이 했고요.
한) 그럼 공부 반은 몇 년도에 왔는지 알아요?
박) 아니요.


 


한) 열 명씩 해서 오 장로님한테 공부하러 와가지고 매년 열 명씩 이렇게 또 하고 가고 각 지방에 있는 사람 싹 다 관계있는 사람들, 열 명씩 해서 차례차례 해서 열 명씩 전부다 왔어. 
사) 장로님한테 배웠군요. 그게 언제쯤 부터에요?
박) 예, 일 년씩 일 년씩 그런 거 다 어디 적어져 있을 텐데 생각이 안나. 
사) 대략 언제쯤 인지?
박) 이 선생님 세상 뜬 뒤에 광주에서, 그러니까 하여간 이 선생님 세상 뜨고 70년 못되어서 양성반이 시작되고 왜냐하면
한) 광주 와서 보니까 원장님 혼자서 힘이 들거든. 참 반항기지요. 이 선생님 세상 떠버리고 정 선생님께 반항이지. 막 공순 언니한테 반항 하듯이 그런 식의 하나야. 여기도 저기도 혼자 다스리기 힘들어요.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 다스리기 힘든 것처럼 한나 씨 어머니가 몇 년 동안 안 왔어요. 왜냐하면 머리를 깎아 버렸다고 해서 조금 이상하게 생각하려니까 오시지도 않았어. 그래 인제 광주가 그렇게 생겼으니까 오시라고 해가지고 수양회 때 볼 때는 안 되겠어.
사) 한나 어머니가 가서 보니까.
한) 예, 그래서 가서 열 명씩 열 명씩 해서 일 년에 열 명씩 해서 일 년씩 와서 공부 반을 해야 된다. 그렇게 해서 그대로 해가지고 광주도 조용히 되고.
박) 한 7반까지 모였어요.
한) 아니 1년 씩 했다니까 그러니까 7년 동안 했다는 말이지. 지방 사람들 다 와서 일 년씩 와서 하고 갔어요.
박) 그러니까 우리 기관 안에 사람들하고 외부에서 사는 사람들 더러 한 번씩 끼우고 해서 열 명씩.
사) 그걸 양성반 이라고 합니까?
한) 공부 반. 일회 양성반이라고 했어. 양성 반 아니야, 양성 반은 그냥 원 안에서 결혼도 안하고 그런 사람들 양성 반을 시켰어요. 양성 반을,
박) 1회 2회 양성 반.
한) 그럼, 그런 사람들 그렇게 시켰고요. 그 사람들은 공부방 이라고 해버렸다니까 그냥 아무라고 지방에서 사는 사람들 싹 다 열 명씩 채워서 보냈어요. 나이가 많던 적던 나이가 많은 어머니들도 누구도 싹 다 왔어요. 저 아래 사람들 다 왔어.
사) 그럼 공부방에서 훈련시키는 내용은 어떤 거였어요?
한, 박) 성경공부 했지요. 장로님한테.


 


사) 보통 하루에 몇 시간?
박) 일도하고, 아니 일은 잠깐 잠깐 나와서 하고 저 윗집에서 아주 공부를 자기들 나무 해다 때고. 
한) 여기 일이 아주 많이 밀려있다고 하면 그때 와서 잠깐 도와주고 그런 식으로 한편으로 쉬면서 공부하라는 그런 식의 훈련의 하나라고 했지. 거기 안 갔다 오면 안 될 정도로 다 했지요.
사) 나이가 그럼 몇 살 정도? 스무 살도 있고 서른 살도 있고 그렇습니까? 
한, 박) 40, 50, 60 상관없이 지방에 책임 있는 사람 다 왔어요.
사) 책임 있는 사람 다요? 어린애들은 빼고.
한, 박) 예, 어른들 30대 부터서 한 60대까지 모였을 거예요. 나이 많이 잡수고 지방 책임지고 있는 사람들 분원에 책임진 사람들 다 여기 왔었어요. 
사) 그럼 공부 많이 했겠네요?
한) 아니, 많이? 일 년씩 했는데 뭣이 많이 해요?
사) 그래도 성경공부를 그렇게 했으면 많이 했는데. 
한) 일 년 해 가지고 많이 할 수 있어요? 4년 5년 6년 그렇게 해야 되어?
사) 성경만 공부하니까 다른 거 안 하고.
한) 그래도요. 나 같은 경우는 장로님 말씀해도 자버릴 때가 많아요. 나한테 깨달아진 거 나 혼자 성경 봐가지고 탁 깨달아진 거 그것이 남아있지. 남한테 들은 것은 별로 저기 한 거 안 같아요.


 


사) 이렇게 많지 않았던 거 같은데 그러니까 이 개미가 많네요. 전에 이렇게 많지 않았던 거 같은데,
박) 날이 추우니까 더 한 거 같아. 그러니까 요를 깔고 자면 덜 올라오니까 제가 요를 잘 안 까는데 이불 하나 깔고 덮고 자요. 막 물어대요. 자면 개미가 물어. 편안하게 개미라도 물어뜯게 해야지. 
사) 그렇게 공부반이 있었고 그러면 그 경제생활은 신앙생활이지 않아요?
박) 뭐 이렇게 먹고 입고 사는 것에 중점을 안두고, 원은 믿음으로 인제 예수님하고 가까이 살자는 것이지요.
한) 그래서 인제 여기 식구를 싹 다 남원으로 내려가기로 했었어요. 왜냐하면 군인 부대가 들어와 가지고 여기가 지역이 안 되겠다고 해서 싹 다 그럼 어째서?
박) 그것도 아니야. 한 집사님은 모르는 거야. 
한) 내가 말 듣기로는 그러는데,
박) 핑계가 좋군. 그것도 아니야.
한) 그래서 한나씨 어머니 내려가셔 버리고 한나 어머니 내려가셨어요. 예, 그때 내려가 버렸어요.
박) 한나 어머니가 그때 인제 왔다갔다는 하셨어요. 그런데 거기 여기서 살던 큰 애기들이 남원에 가서 사니까 거기 가서.
한) 조금 진도 사람 거기 모이고 싹 모였다니까 
박) 거기 가 계시다가 병이 나서 가셨지. 세상을 뜨셨어요.
사) 아, 남원에서요?
박) 예, 거기에 가서 조금 계셨어요. 여기는 왔다 갔다 하시고.
사) 아, 80년대 남원이 생기고?
한) 남원이 생겨 가지고요.
사) 남원이 몇 년도에 생겼지요?
한) 나 그것도 몰라요. 그런데 생겨가지고 진도도 땅 내줘 버리고 다 거기 모였어.
박) 한나 어머니가 가신 게 84년도니까
한) 세상 뜨기 그 전에 남원으로 모였다니까. (끊김)


 


한) 그 반대지, 그러니까 그런 것을 보고 감화를 받는 거예요.
박) 이 선생님 앞에서 인간적으로 내가 창녀 노릇을 했으면 창녀다. 그러고 가서 말하겠어요? 자신도 모르게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 앞에서 다 벗어지듯이 그렇게 되어버린다고요. 자기가 어디가 무슨 죄를 지었으면 죄지었다는 말까지 다 그 자리에서 말해버리는데,
한) 그러고 맨 처음 만난 어머니들한테 어떻게 해서 이 선생님 알았소. 그러고 물어보니까 자기는 집에서 어떻게 하면 잘 믿을까? 그렇게 마음을 먹었는데 잘 믿는 분들이 온다고 하더라. 그래서 만나보니까 그 양반 앞에 서 집사님 이라는 분 있는데 그 양반을 처음에 만났다는 것이야. 그리고 그 양반이 소개하기를 말씀은 다 같은 말씀이지만 어디가면 은혜를 보따리로 공것으로 싸 갔고 온다고 해서 가셨대요. 가시니까 평소에 그 양반이 교회에 다니니까 교인들을 데리고 갔지. 다투면서 바리새인 어쩌고저쩌고 했는데 생전 처음으로 만났는데 거기서 ‘자기가, 자기가 바리새인이면서 남더러 그 말 해버리데요.’ 그러니까 꼭 사마리아 여자하고 예수님하고 만나서 말한 말을 동네에 가서 내 전생의 일을 다 알아 맞히는 분이 있으니까 이렇게 와보라. 이렇게 하는 식으로 그렇게 가서 감화를 받아버렸어. 생전 처음 만났는데 우리가 우리끼리 다투는 말을 아시는가? 그런 식으로 감화를 받아버린 것이야. 맨 처음에 만난 사람은 이 사람은 이렇게 해서 감화를 받고 저 사람은 저렇게 해서 감화를 받고 그렇게 해서 감화를 받아버렸다고 나는 맨 처음에 그 양반 볼 때 그 이 선생님 고향 거기에 빨치산이 많아 가지고 저녁에는 그 사람들이 와서 야단이고 낮에는 대한민국이 와서 잘 지키라고 그 사람들 오면 보고하라고 그러는데 여기도 못하고 저기도 못해. 보고를 했다가는 밤에 이 사람들 와서 다 죽여 버리니까 못하고 또 낮 되어도 못하고 밤에 와서 그 사람들이 죽여 버리니까 여기도 저기도 못하고 그런 사연에 하나에요. 맨날 우리들한테 와서 대고 말해요. 우리더러 기업인이라고 하지, 남쪽 사상을 자유로이 살 수 있는데 남에게 기어 지낸다고 그런 식으로 저기하고 맨날 공산주의에 대해 말했어요. 그래도 나는 거기 인제 내가 저기는 안했지요. 그 사람들한테 저기를 내가 될 수 있으면 안 넘어 갈라고 했어요. 마음을, 왜냐하면 나같이 무식한 사람이 가면 심부름밖에 더하겠냐? 그런 마음으로 절대 그 사람들한테 귀를 안 귀우렸어요. 그렇게 저기를 하고 있는데 이 선생님을 딱 만나보니까 당신은 간판 없는 공산주의요. 내 생각에, 느낌이 그렇게 느껴지더라고, 그렇게 자기들이 생각한 바가 있고, 이 선생님 만났을 때 그렇게 감화를 받은 거지. 무슨 설교를 있는가? 저기 있는 것 아니에요. 지금 오 장로님 계속 말씀 했지만 그런 말씀도 계속 안 해줬어요. 그러지만 사람 만나서 이야기하는 가운데 위로도 받고 감화를 받는 저기가 생겨버리는 거지.
사) 어떻게 집사님은 어떻게 해서 만나셨어요?
한) 그러니까 아까 그 영감님이 가라고 해서 가서 살고 있는데 이 선생 오셨더라고요. 그래서 처음에 만나보니까 내 느낌이 그렇게 들더라고 간판 없는 공산주의요. 그게 느껴지더라고


 


사) 그게 좋은 뜻인가요? 나쁜 뜻인가요?
한) 좋은 뜻이지요. 아 공산주의는 남의 것 뺏어다가 편히 잘살자는 건데 이 양반은 공평하게 살아버리지 않아요? 그것을 내가 봐버렸다는 말이야. 공평하게 사는, 그러니까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무슨 뜻으로 그걸 생각 했는지 몰라요. 나도 
사) 그래가지고 보고서 그런 생각을 하면서 감동을 받아서 그때부터 거기 쭉 살기로 한 거예요?
한) 예, 그리고 인제 함평이라는데 넓은 땅이 있었는데 처음에 만나서 얼마 안 되었었는데 그것도 일절 나 그보다 더 일찍 그 다음에 그때 처음에 만나서 그런 생각했고 그 다음에 함평 어디서 살다가 또 왔어요. 인제 한번 육이오 후에 육이오 직전에 육이오를 동광원 와서 났거든요. 그러니까 육이오 후에 함평에서 살다가 와서 저기하는데 불타는 동광원 이라고 있어요. 어디냐 하면 도에서 그때 건물 줬는데 육이오에 폭탄 맞아서 타버렸어. 그래서 우리가 육이오 후에 거기다 나무 데기 걸치고 가마 데기 갖다가 얼기설기 해놓고 거기서 살아요. 거기 이 선생님 거기 계신다고 그래요. 거기를 왔어요. 오니까 다 떨어진 옷 입고 사실 때야. 이 선생이 나를 보더니 가서 밥을 얻어가지고 오라고 그러세요. 당신 윗도리 탁 벗어 던져 주면서 아직 잘 알지도 못하는 사이야.
사) 광주에서?
한) 예, 광주 시내서
사) 겨울이었나요?
한) 겨울쯤 되었을 거예요. 


 


사) 추울 때
한) 예, 그런 적이 있는데 아 옷을 탁 벗어서 던져주면서 밥 얻어가지고 오라고 그래. 그 안 간달 수도 없고 간달 수도 없고 나는 그때까지는 한 번도 안 해보고 건강한 사람은 얻어 안 얻어먹는 줄 알았어. 아픈 사람이나 저기한 사람이나 얻어먹지, 건강한 사람이 밥 얻어먹는 줄 몰랐어요. 그때까지 전혀 그런 저기를 했는데 그렇게 하길 래 이거 안갈 수도 없고 어려운 처지라. 그 양반 앞에서는 안 어렵게 생각 할 수가 없어. 그래서 그런가 마음이 그냥 난리가 난거야. 난리가 났어. 그래가지고 어떻게 어딘지 모르게 그거 주워 입고 깡통 들고 밥을 얻으러 가는데 광주시내 사람들의 시선이 다 나한테 온 거 같아. 그래 아무데도도 못보고 땅만 보고 가는 거야. 어떻게 해가지고 밥을 얻어가지고 왔어요. 그래가지고 밥을 얻어갖고 왔더니 가지고 오니까 내가 먹어야지. 그럽디다. 이 선생이 배가고파 그런 일이 있었어요. 그런데 나만 그런 게 아니야. 거의 다 김 준호 선생도 그렇게 시켰다고 그리고 다른 사람도 그렇게 시켰는데 안 가버린 사람도 있다는데 그 사람 말이 내가 그때 그 순종했더라면 요렇게 안 되었을라나 말하는 사람도 있대요. 그런데 잘했다 못했다가 아니라 내가 처음 엔 그런 것을 당했다.
사) 그럼 형님은 지금 계시는 형님께서는 더 먼저 가셨어요? 동광원에 더 먼저 들어 가셨어요?
한) 아니요. 나중에 오셨지요.
박) 이 양반을 데리러 오셨지요. 
한) 육이오를 지났는데 소식이 없어. 나는 남원에서 사는데 그때 육이오를 함평에서 나가가지고 남원에서 살고 있는데 나를 찾으러 왔는데 남원에 살고 있다고 그러니까 육이오 때 그 사람들한테 당해가지고 정신이 좀 이상이 되었는지 집에서 한약방이 있는데 동광원 잘 아는 한약방이야. 거기서 있고 어쩌고 하는데 때로는 누가 쫒아온다고 난리를 부리고 그러더래요. 그런데 동광원에 와서 괜찮아 졌다고요. 그 전에 육이오 전에 내가 볼 때도 그런 형님이 아니었고 또 내가 볼 때 아무렇지 않아요. 우리 동광원 제매라고 농사짓고 사는데 또 나이가 같은 사람이 있어. 육이오 때 함평에서 같이 만난 사람, 그 사람하고 같이 산다고 하는데 아무렇지 않아요. 그래서 어떻게 정신이 어찌 되었다는데 괜찮구나. 했는데 나중에 한참 동광원에서 잘 살았어요. 잘살다 남원 서리내라고 동광원 식구들이 살았던 집들이 있고 거기 가서 수양한다고 혼자 살다가 도져가지고 지금까지 안 나서 버린 거지. 나중에 오셨어요.
사) 예, 그러셨군요. 원장님은 어머니께서 들어오시면서 같이 오셨다고 그랬지요?
박) 아니요. 저는, 


 


사) 결혼하시고서?
박) 결혼해가지고 육이오 전에 광주 산중에서 시끄러우니까 광주 시내 나와서 그 사람이 먼저 살았거든요. 사는데 그 사람이 어떻게 사냐하면 거기 저하고 혼인하기 전부터 이 선생님을 늘 봤어요. 복희씨 어머니가 시댁의 안채에서 사셨어요. 아래채에서 3년을 사셨다는 것 같아요. 그 방에 누구 방이 됐냐하면 내 방이 되었어. 복희씨 어머니 살고나간 방이 내 방이 되었어. 그래가지고 그 집이 인제 아들이 일본에를 갔는데 일본에서 재로 나왔어. 그래가지고 이 선생님이 그 아들 때문에 노인네가 자꾸 통곡을 하니까 옛날에 희귀한 사과를 사가지고 와서 복희씨 어머니가 이 선생님이 오셨다데. 그래가지고 사과를 사가지고 와서 깎아서 그 양반을 드리면서 입에다 넣어드리기까지 했대요. 막 그러면서 그 사람은 그때 학생 때고 그런데 어렸을 때부터 이 선생님을 자주 봤는데 그래가지고 그 양반을 위로를 해주고 큰아들이 죽어서 재로 나왔는데 이 선생님이 그렇게 그 양반한테 고맙게 하셨대요. 그 집이 의인의 발걸음이 끊이지를 않았어. 그래가지고 저도 그 집에를 들어가게 됐는데 자꾸 세상을 못살게 돼. 꼬여, 그랬는데 그러자 저러자 얼마 안 되어서 인제 해방 되어가지고 육이오가 터져가지고 육이오가 터지기 전이지요. 빨치산이 마을에 퍼져가지고 사람이 청년이 살수가 없어. 
한) 여수순천 반란사건 이후로. 
박) 청년들 마을에 똑똑 한 청년들은 다 끌어가려고 그래. 이 빨치산들이, 밤이면 와가지고 막 지리산 빨치산들이 다 퍼져가지고 거기를 하루저녁에 왔다 갔다 한 대요. 지리산 춘양이라는 데를 하루 저녁에 왔다 갔다 한 대요. 비호같대요. 그 근방 똑똑한 청년들은 다 빨치산 따라갔대요. 그래가지고 그 친구 친구를 대가지고 자꾸 와서 지르는 거예요. 아주 저녁마다 와요. 살수가 없어. 그러니까 그 똑같은 친구들인데 어째 그래가지고 광주로 나와 버렸어요. 광주 나와서 살면서 이 사람이 어떻게 됐냐하면 그 안에 그러데요. 나는 장차는 이 선생님 따라서 동생만 조금 자라면 동생한테 어머니랑 같이 살라고 하고 나는 이 선생님 따라 간다고 그래요. 그래도 나는 그때 나이도 얼마 안 되고,
한) 이 선생님 모르고?


 


박) 나는 모르고, 자기는 알고 그랬는데 이 공 조카가 거기 있었지 않아요? 그러니까 자기도 모르게 영혼이 물이 들었던가 봐요. 그래 가지고 자꾸 나하고도 안살라고 그래요. 이 공 어른의 막둥이 조카가 그 동네에서 살지 않아요? 자꾸 그 사람만 쫒아 다녀요. 그러면서 막 그 전에는 그 전에 살았다고 해야 한 1-2년 이지. 뭐 그런데 겨울에 소설책을 많이 봐요. 그런데 그때 빨치산이 돌아다니면서 자꾸 성경을 보데요. 신구약 합부도 보고 책도 금방금방 잘 봐요. 보더니 자기 동생 찬송성경 사다가 주고 그러고는 광주로 나와 버렸어. 혼자 그런데 소문을 들어보니까 혼자 그렇게 살고 있는데 직장을 하는 것도 아니고 무등산에 가 이 선생님 계신데 거기 쫒아 다닌다고 하더라고. 무등산으로, 이 선생님한테 그래가지고는 혼자 있는데 인제 집안에 우리 어머니 외사촌 동생이 있는데 아주 세상에서만 이러거든요. 그 양반이 아주 무서워, 그런데 그 양반이 나를 데리러 왔어. 8월 달에 데리러 와서는 혼자 시골에서 고생만 하고 있다고 데려다가 광주다가 줬어. 광주다가 주니까 뭔 방을 하나 갖고 있는데 간다는 것이야. 이 선생님한테 그래가지고 한번은 안 되었는가 나보고 어디 좀 가자고 그래. 그런 소리 생전 처음 들었어. 얼마 살지도 않았지만 처음 들었어. 그래서 따라 가니까 뭔 산으로 끄떡 끄떡 끌고 올라가데요. 산속으로 데리고 가나 속으로 그랬는데 가서보니까 최 목사님 이 그때 말씀 못하시고 이 선생님 설교를 그냥 희열이 넘쳤어. 그렇게 설교도 잘하실까? 그런데 뭔 말씀인가? 나는 그때 처음이야. 무슨 말씀을 하는지 모르는데 찬송 소리가 그렇게 좋고 이 선생님 설교 하는 눈빛이 반짝 반작 그냥 희열이 넘쳐가지고 설교를 하시는데 이 세상사람 안 같아. 그때 그런 기분이 들더라고, 그래서 인제 예배 끝나고 아들하고 어머니하고 사는 집에 하지 감자를 쪘다고, 한나 어머니가 막 이파리를 그릇이 없으니까 앞앞이 놓고 하지감자를 몇 개인가 놔주더라고, 그걸 먹고 가운데 집에 뭘 했다고 점심들 먹고 거기 내 앉았다가 한나 어머니랑 이야기를 하는데 뭔 이야기인줄 모르고 가만히 듣고 앉았어. 그러다가 해가 너울너울 질라는데 이 아래를 내다보니까 이 선생님은 여기 앉아계시고 자기는 이 선생님 무릎 앞에가 앉아서 하여간 그렇게 사랑스레 앉았어. 보기에 나 보기에 지금 그때 철이 없어서 그런지 지금 상상해 보니까 얼마나 좋은가? 이 선생님도 사랑하고 자기도 이 선생님이 좋고 그런가봐. 그런데 요렇게 내다보니까 이 선생님이 나를 먼저보지. 그 사람이 이렇게 하고 앉아있으니까 그래가지고는 가보라고 하니까 고개도 안 떠드리고 가라고 그래서 나 혼자 내려오는데 그때 철딱서니 없는 생각에 이 선생님이 이상해. 이 선생님이 보는 감이 뭐라고 희열이 넘치는 것이 뭐라고 그냥 표현을 할 수 없더라고, 참 이상한 감이 들어. 그래서 이 선생님이 사람이 아닌 것 같고 말을 어떻게 표현을 못 하겠어. 내가 나를 지켜 주실까? 어쩔까? 그런 감도 들고 이상하더라고요. 그래가지고 아 그런 사람을 좋아하나보다 그런 생각을 하고 예수 믿으면 어떻게 한다는 대강 들었어요. 그 사람한테 자기는 이 세상은 이 선생님한테 들었는지 어쨌는지 이 세상 앞으로 되어가는 그런 이야기도 하고 유언 비슷하니 했어. 그런 이야기를 다 하더라고요. 그래서 나는 듣고만 있었지. 그런데 지내놓고 보니까 자기가 갈라고 그런 이야기를 다 한 것 같아요. 그래가지고 육이오가 딱 닥쳐버렸지요. 그 사람은 육이오 전에 죽어버리고. 


 


한) 어째 육이오 전에? 그 사람하고 전에?
박) 광주에 와서 사는데 그 빨치산들이 와서 가족이 시골에 있지 않아요? 빨치산들이 밤이면 찾아와서 성화들을 해 싸고 낮에는 군인들이 와서 성가시게 하니까 막 군인들이 들어와 가지고 총칼로 들이밀면서 아들 어디 있냐고 아들 내 놓으라고 빨치산 따라가지 않았냐고  그 식구들이 다 봤거든. 그러니까는 집에서 어머니가 말을 한다는 게 그때만 넘어가 아무 말도 말아 버렸으면 됐을 텐데 저기 우리 아들 살아있는데 무슨 빨치산 따라갔지요? 어디 갔냐고 그래가지고 광주로 데리고 가서 그 사람들이 춘향 지서를 습격해 버리고 막 그랬는데 죄가 있든 없든 그 춘향면 에서 산 사람은 가서 자수를 해야 돼. 그런데 오늘 가니 내일 가니 그러다가 시간이 늦어져 버렸어. 그래가지고 자기네들이 체포하는 거시기로 그때는 조금만 죄 없어도 조금만. 
사) 군인들한테 죽었군요?
박)그랬지, 조금만 어쩌면 트집을 잡고 그렇게 사람을 잡아다 죽이기도 하고 그러니까 그때 들어와서 바로 그날 저녁으로 경찰서로 넘어가고 면에서는 그 친한 친구도 있었거든. 그랬는데 그날 저녁으로 넘어가니까 그 친구가 차에 같이 따라 갔었데요. 화순 경찰서, 같이 따라갔었는데 그 사람이 친구한테 무슨 말을 일렀을 거 같은데 그 사람이 맘이 아프니까 말을 안 해. 그 친구는 지금까지 살았는데, 그래도 그때는 너무 급한 판이 되어가지고 죄가 있거나 없거나 조금 잡아버리면 죽여 버려가지고.
박, 한) 자기네들 저기한다고 하면 벌써 그쪽 사람들은 다 그런 사람들이다. 그렇게
박) 저녁으로 새로 밤 한시에 갔다가 쏴버렸대요. 그랬는데 한 달 만에 가서 찾았거든요. 땅에다가 묻었는데 다른 사람들은 전부 늘어졌어. 무엇이고 짐승들이 다 파놓고 옷들이 벌거니 피가 묻어가지고 그 산에 쫙 늘어져 버렸어. 그냥 한 달 만에 눈도 그때 동지 달인데 눈이 그냥 막 이만치씩 빠져요. 그런데 동네 이장을 가서 찾아가서 거기를 찾았어요. 찾았는데 이 사람들은 다 다른 사람들은 묻어주면 걸리고 그러니까 이 사람들 여섯은 이상하게 그 이장이 서둘러가지고 묻었대요. 묻었다고 아홉이야. 아홉, 아홉을 요만치씩 파고 묻어놨대. 


 


사) 화순이 원래 고향이셨던가요? 
박) 네, 화순군, 그랬는데 면은 다 달라도 화순군 이지요. 전라남도 화순군 
사) 예수 믿으시고 나서 이 선생님을 만나신거예요? 만나시고 나서 믿으신 거예요?
박) 저는 어렸을 적에 뭐 예배당에 몇 번 갔는데도 뭔지 모르고 갔고, 그래가지고 그냥 부모들이 안 믿으니까 그대로 살다가 그 집에 가서야 그런 소리를 그 사람한테 많이 들었지요. 예수 믿는다. 소리를 그런데 이런 현대 교회를 믿는 게 아니고 이 공 어른의 말 듣고  그 사람 또 거기 살면서 수레기 어머니를 자꾸 찾아가요. 수레기 어머니, 항상 그런 이야기를 해. 이렇게 이 선생님 따라 살라면 혼자 살아야 한다고, 그런 이야기를.
한) 결혼을 몰래 했겠고만?
박) 자기도 모르게 자기 어머니한테 못 이겨서 했겠지요.
사) 그래가지고 들어가신 거지요? 신랑 잃은 다음에?
박) 그 무등산에 가는 것이 이 선생님 처음 보는 거예요. 무등산에 그 사람이 데리고 갔을 때 처음보고는 그래가지고 나와 가지고는 한방에 잠도 안 자려고 그래. 그래가지고 어머니도 막 흉을 보고 그랬어. 그랬는데 나보고 또 도로 시골로 가라는 거야. 그러니까 우리 큰집 오빠가 거기서 그 밑에서 살았거든요. 하루아침은 불러다가 네가 뭐하려고 시골로 가려고 하냐고 그냥 거기서 살게 하려고 가지 말라고 절대로 뭐 그 오빠 말을 들어요? 이 사람 말을 들어야지. 말 안하고 짐 싹 싸놓고 가래요. 가라는데 어떻게 안가고 배겨? 그래서 가버렸지. 시골로 가버렸는데 그 뒤따라서 집에서 말을 잘못해가지고 나 거기 있을 때 말을 잘못했어. 그래가지고 그렇게 잡혀다가 그길로 가버리고는, 이제는 이 선생님 생각이 자꾸 나데요. 내가 이 선생님 생각이 나도 그때 무등산에서 잠깐 봤는데 그 사람한테 들은 말은 있고, 내가 일생을 동정 지키고 살라면 이 선생님 만나야겠는데 못 만나면 어떻게 이 선생님을 찾을 수 있을까? 그런 생각만 하는데 이제 육이오 나기 직전에 이 선생님 금남 언니 차남 씨 어머니 막 순교당한 어머니들이랑 수레기 어머니랑 다섯 분인가 여섯 분인가 오셨데요. 
사) 화순에, 그 동네에?
박) 예, 


 


사) 그러니까 이 선생님하고 같은 고향?
박) 같은 고향이지요. 
한) 면만 다르지.
박) 면만 다르지, 잔등사이에요. 춘양하고 도암하고 그런데 이 선생님 오셔서 나를 오라고 그러셨나봐. 그 이야기를 듣고 오라고 그러셨는데 이 공 조카며느리가 데리러 왔더라고, 그래서 가니까 그 날 머리칼을 끌러버리고 갔어. 갔는데 이 선생님 만나니까 얼마나 눈물이 나는지 내가 부모를 만났나? 그런 눈물이 얼마나 눈물이 나오는지 말씀을 못 들었는데 그때 부른 성가는 다 기억이 나. 맨 성가만 부르라고 그러 시더만 그래가지고 부르고 이제 밖에 나와서 뭐라고 그러시냐하면 가시려고 하면서 마당에서 나를 찬찬히 쳐다보셔 이렇게 문 앞에 나가시면서 그러면서 저기 시베리아 벌판에 그 나무하나 없고 그 사막에 가서 그 한가운데 나무가 하나 섰다고 나무가 하나 섰는데 거기서 쉬어가면 얼마나 좋겠냐고 그러세요. 그 말씀은 기억이 생전 안 사라져. 그 말씀이 무슨 말씀인지 모르고 동광원에 와서 기쁘게 살기만 했지 않아요? 그런데 인제 선생님 살아계실 때 그런 이야기를 하면 막 웃으시는데 어쩌다가 소감 이야기를 하라고 할 때 이야기하면 막 웃어. 좋아라고 그러셔. 그런데 세상 뜨신 뒤에 그 이야기가 바짝 생각이 나네. 아 너는 내 그늘 밑에서 와 쉬어야 할 거다. 그때에 그 말이 증거를 하신 것 같아. 그리고 동광원에 들어와서 아 육이오 전에 이 선생님 갈려버려 가지고 못 찾았지요. 그러다가 집에 나와서 있는데 어머니가 능주 교회 갔다 오시더니 능주 교회 한나 어머니 다니던 교회를 다니셨거든요. 교회 갔다 오시더니 야, 내가 어떻게 고민에 빠져가지고 있으니까 내가 교회에 갔다 와서 교회가자고 그래도 안가고 교회에 갔다 오더니 광주는 광주 어떤 데는 그 안에서 길쌈하고 베 짜고 막 여자들만 산다더라고 그 안에서 야채도 심어먹고 어디하나 사는 데가 여자들만 사는 데가 있다더라고 어머니가 와서 그래요. 그래서 그 다음주일날 내가 교회를 나갔지요. 나가서 귀가 반짝 떠져요. 그런 데가 어디 있을까? 아무래도 시골서는 못 살겠어. 내가 도시에 가서 예수 잘 믿으면서 그 사람한테 들은 말 기억하고 내가 일생을 동정을 지키고 살라면 아무래도 시골서는 흔드는 사람이 많아서 못살겠다 싶어서 도시에 가서 잘 믿으면서 공장 생활을 해 숨어 살아야겠다. 시골은 못 숨으니까 도시에 가서 숨어야겠다. 그러고는 마음을 먹고 나왔어요. 복희씨 어머니에게 물어보니까 당신 사람 되었소? 그런 걸 다 물어볼 줄 아요? 그러 더만 그런데 인제 복희씨 어머니가 나를 다른 데로 데리고 갈라고 마음먹은 것 같아. 신앙, 그런데 하나님이 막으셨어. 광주 어디 와서 자고는 돌아다니다가 수피아 정문 앞에 해가 떠올라가지고는 그 양지쪽에 서계세요. 정문 앞에가 바람벽에.


 


사) 누가?
박) 이 선생님이, 거기에서 만났어. 세상에 이 선생님이 육이오 전에 만나가지고 나를 슬퍼하는걸 보고는 가시다가 못가시고 재 너머에 가서 앉아 가지고 도로 가자고 그러더래. 나 때문에 가서 위로해주고 하루 밤 자고 가자고 그러다가 너무 시간이 없으니까 심방해야 하는데 그 집에 그냥 갔다고 그래 금남언니 말 들으니까. 그래서 이 선생님도 기다렸다는 듯이 얼마나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쳐다보고 나는 정말로 이게 꿈인가 생신가 그리고 이 선생님 만나가지고는 꿈인지 생시인지 잘 모르겠어. 정말 그래 내 방으로 가자고 그래가지고는 데리고 가서 그길로 살았어요. 그 길로 사는데 아주 세상에 누가 뭐 흔드는 사람 없고 참 내 세상이라고 그렇게 기쁘게 사는데 그때는 강당으로 사람들이 하나씩 앉아서 남녀 반으로 앉아서 예배를 드리는데 남반도 한쪽이고 한쪽은 여반 앉았고 그러는데 나를 성경도 못 읽고 제일 바보지 않아요? 그런데 이 선생님이 예배를 드리면서 하루아침에 나보고 고린도전서 13장을 택해가지고 나보고 읽으래. 그날 아침에 그 사랑 장을 주셔서 내가 그거 항상 그거 내가 잊지 않고 그 말씀을 볼 때마다 생각이 나고 그런데 읽을 줄도 모르는데 웬일로 그 날 아침에 더듬지도 않고 성경을 읽었어요. 그 많은 사람 중에.
사) 그러니까 그때가 동광원으로 들어가셨을 때가 53년도에 나 아마.
박) 아니에요. 스물한 살, 나는 4월 달에 들어왔어요. 


 


사) 그러면, 51년 ?
박) 51년 되자 들어왔어요. 네, 50년도에 육이오가 났지 않아요? 우리 스무 살 때. 
사) 51년, 저는 5월 달에 태어났는데 그래서 51년 동광원에 들어가셨다가 거기서 56년까지 계셨다가 서울로 올라온 거지요?
박) 그 동안에 남원 가서도 살고 남원 가서 살면서 막 들어오자마자 이리가라하면 이리가고 저리가라하면 저리가고 그러고 살다가 남원 가서 살면서 동냥도 하러 다니고 광주서도 살면서도 그때는 광주서 살면서 강변에 밤이면 가서 막 쳐놓고 들어오고 오늘 저녁에 가서 막 쳐놓고 내일 저녁에 한번 나가고 또 오늘 저녁에 막 쳐 가지고 내일 저녁에 한번 나가고 그러면 어이 휴, 광주 도청에서 나와 가지고 원장님한테 욕을 하는 거, 징 하게 세상에 이놈 저놈하고 욕을 하고 외국에서 사람 오면 남부끄럽게 한다고 어떻게 욕을 하고 그래서 거기에서 또 뽑아서 저기 어디 지방으로 보내고 그러면 거기서는 살면서 고아들은 한쪽에서 살고 한쪽은 우리 몇 사람 고아들 껴안고 먹는다고 시장에 가서 콩나물 대가리 이만씩 한 거 감자 잘라 내버린 거 그런 거 무 꼬리 잘라버린 거 그것 줍고 비지도 못 얻으면 그것만 소금 좀 얻어다가 그것만 삶아 먹는 거예요. 쌀 한주먹도 없이 옆에 고아들은 다 밥해주고 그것만 삶아 먹고 그것도 안주으러가면.
한) 왜냐하면 인제 고아들만 학교에 안보내고 고기 안 먹이고 그런다고 해서 폐지를 시키려고 인제 도청에서 주는 건물을 싹 내놓으라는 거야. 그러니까 강변에다가 막을 친 거야. 낮에는 못 치니까 밤에 그냥 수수 대 준비해놨다가 막치고 그리 나가는 거예요. 그래가지고 폐지하려고 할 때 그런 소식이 오니까 원장님이랑 오 장로님이랑 오시라고 해가지고 지금까지는 하나님께서 우리 동광원이 필요해서 놔두시지만 필요치 않으면 치우신다고 이 사업을 안 하면 원장님이 아쉽겠고 오 장로님이 아쉽겠소? 내가 아쉽겠소? 바람 부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살아버리면 되겠습니다. 그렇게 하셨어요. 그래가지고 그리 나가서 있으니까 그냥 그 자기네들이 내준 놈 가져간다고 하고서는 그냥 경찰들을 내세우고 십일조 굉장히 많이 모아졌어요. 왜 그러냐하면 외국에서 온 식량인데 만약에 어떤 풍랑이 일어난다 하던지 이것이 다 없어져 버리면 갑자기 한꺼번에 굶어 죽는다. 그러니까 십일조를 열 개하면 하나씩 떼서 모아라. 그래서 십일조가 굉장히 모아졌어요. 다른 시설에서는 그 배급 주는 것이 모자라서 인원을 더 늘려가지고 해도 모자라. 그러지만 이런 집안에서 농사도 짓고 또 십일조 떼고 그래서 많이 밀려가지고 있어. 그런 저기를 다 실어가는 거예요. 그 사람들이 구호물자도 못 입게 했어요. 직원들은 다 그렇게 입고 그렇게 사니까 그 사람들이 와서 그 어떤 사람이 지도자인지 어떤 사람이 수용자인지 모르겠다는 거야. 똑같이 옷 입고 고무신 신고 그러고 사니까 그런 식으로 생활을 했는데 그렇게 하니까 고아들도 다 실어갔어요. 싹 실어가고 보모 이런 사람들만 남겨놨어요. 큰 사람은 보내봐야 거기 가서 안 살 것이고 그러니까 어린 사람들은 싹 실어가고 다시 거기 가서 울고 도망 나오고 어쩌고 또 모아져 가지고 그냥 그때는 자급자족하며 사는 것이 그때 또 한 번 고생 했어요. 여기서 고생한 것만으로 고아원 폐지 한 뒤로 싹 실어가 버리고 다시 한 번 고생 했어요. 


 


박) 인제 이렇게 동정 지키고 사니까 간데 마다 남의 가정 파괴하고 다니는 것 같더라고 막 그래요. 나는 그렇게 강변에서 살다가는 거기 강변에서 인제 분원으로 나가게 되었어요. 나가게 되었는데 남원으로 갔는데 그때 두 번째 가게 되었네요. 남원으로 두 번째 가니까 이 고아원이 해산 되었다고 신문에 났지 않아요? 그 동네 통장이 얼마나 좋은가 일어나서 동광원 해산되었다고 신문에 났다고 그 신문을 갖다가 마당에다 던져줘.
 이거 차근차근 안 되네. 떡 번지 개간해 가지고 법에 걸렸지요? 그런데 다 사람들이 하나님이 막아주시는데 거기를 개간되어가지고 나무 베고 땅파기 전에 검불을 다 모아가지고 한 요 방에서 저기만치 다 사방을 긁어 넣었어요. 그래가지고 갈잎을 불을 지르는데 연기가 나니까 가슴이 뛰고 그냥 아주 그래가지고 저는 너무 무서워서 위에로 올라갔더니 연기가 이렇게 숨이 막혀서 죽을 번 봤어. 너무 겁이 나서 산으로 불이 간 것 같아. 혼자 막을 거예요? 너무 겁이 나서 연기 속으로 뛰어 들어가서 숨이 막혀서 죽을 번 봤어요. 헤쳐 나오느라고 그런데 그걸 여기 경찰서에서 다 봤대요. 저 산에 불났지 않냐 고 막 그러니까 불났다고 그러니까 경찰들이 올라오려고 하는데 여기서 막아주는 사람이 있었어요. 수녀원에서 모닥불 태운다고 그랬대요. 그래서 안 왔지. 아주 연기가 동수레 같이 산꼭대기에서 나니 막아주셨으니까 그렇지 아마 쫒아왔을 거예요. 땅을 파기 시작했는데 경기도 산림계에서 산을 재러 왔어. 그래가지고 봤어요. 보고는 산꼭대기에서 막 다 가지 말고 거기 서라고 잡아 죽일 듯이 악을 써요. 막 왜 땅을 파냐고 막 그러더니 장로님은 슬금슬금 지게지고 내려오세요. 막 거기 있으라고 악을, 악을 써요. 산꼭대기에서 도에서 나와 가지고 경기도 산림계에서 나와 가지고 그래서 거기 한나 어머니가 이러고 산골로 올라가시는 것처럼 하니까 막 우리가 학생 따라 가라고 따라 가라고 쭉 가는데 그 사람들이 내려왔더라고 그러면서 내려와 가지고는 왜 땅을 파냐고 우리가 이래저래 해서 땅을 판다고 한나 어머니가 이야기를 하니까 이 사람들 이만치 키웠으면 훌륭하다고 다 내보내라고 다 내보내래. 그래가지고 들켜가지고 자꾸 서울 어머니가 불려가지 않아요? 그 땅 판 죄로, 자꾸 불려가는데 마지막에는 자기네들이 다 이야기 듣고 하루는 재판소에 넘어간다고 보호자를 하나 데리고 오라고 했대요. 그때는 산림계가 서울 운동장 앞에가 있어요. 거기 있는데 그날따라 비가 많이 오는데 서울 어머니하고 나하고 갔어. 서울 어머니는 나 말 잘 못 할까 무서워서 얼마나 걱정을 하고 가는데 맨 꼭대기 7층에 올라가서 그 양반들 있는데 가서 이야기를 하고 여러 가지 이야기를 다 하고 서울 어머니 이야기 하라고 하고 나보고 이야기 하라고 하고 그랬는데 내가 이야기를 몇 마디 했어요. 그랬더니 자기네들이 그 서류를 꾸며준 것을 읽어줍디다. 그때 읽는데 아주 잘 썼어. 그렇게 잘 쓸 수가 없어. 이만한 종이에다가 가득 쓰더니 그 역사를 땅 판 이유를 다 썼는데 다 우리를 도와서 썼더라고요. 우리더러 도장만 찍으라고 도장만 찍고. 인제 우리 둘이 한 이야기 적고 그래가지고 도장 찍으라고 돈 천오백원만 내라고, 천오백원만 내라고, 지금은 돈도 아니지. 그전에는 큰돈이나 봐.
한) 그때 천오백원이면, 
박) 재판소에 마지막 넘어가는 서류를 천오백 원을 내라고 떡 번지 답을 그렇게 많이 먹고 돈 천오백 원 냈어. 
사) 그게 한 60년도쯤 되었나요? 


 



박) 그러니까 개간을 해가지고 2년쯤 되어서니까 60년도쯤 되는 거 같아. 서류 꾸며서 넘어 갔지요. 
사) 떡 번지는 어떻게 해서 찾게 된 거지요? 
박) 저기 풀무원 원 선생님이랑 여기그때 자주 오셨어요. 예배도 드리시고 장로님은 그 안에 이렇게 산을, 약수터도 찾아 거기서 하루저녁 주무시고 내려오시고 그러고 인제 원 선생님 나 또 몇사 람 따라갔어요. 장로님이랑 약수터 그 산꼭대기 밭 많은 위에서 예배드리고 둘러보시고 장로님 거기다가 개간을 생각을 하시고 원 선생님이 듣고 괜찮다고 그러시데요.  그래가지고 그렇게 했어요. 이 동네사람들이 거기가 옛날에 절터라고 절터인데 옛날에 하도 떡이 절터에 떡이 많아 떡 번지라고 그러더라고, 기와장이 척척 잠겨 져 있데요. 
사) 그 당시는 나무가 있었는데, 나무 베어버리고?
박) 네, 아주 울창했어요. 그때는 미사일 부대도 안 들어서고, 이 선생님이 오셔가지고 그런 말씀을 다해요. 비행기가 이 산에 가라앉고 그런 예언을 다 하셨어요. 그런데 얼마 안 되어서 미군들이 밀고 들어오데요. 사람들은 상상도 못해요. 저쪽 길로 이러고 올라오면 울창한 산으로 와요. 그런데 개간 한데 밀고 들어오데요.


   


사) 초막이 그쪽 부근에 있었나요? 떡 번지 부근에?
박) 예, 집을 그렇게 비워놓고 내려왔는데 군인들이 뜯어놨는가 흔적도 없데요. 올해는 가보니까 그러니까 남은걸 우리가 작은 떡 번지 나무를 심었어요. 식구들 다 간 뒤에 안 되겠으니까 나라에서 나무 달라고 해서 그 나무가 이만큼 컸어요. 가을로 봄 돌아오면 산에 가서 나물이란 나물을 다 뜯어오고 나무라는 나무는 다 때고 평평해. 그동안에 실 이어서 베 짜서 팔고 또 가을 돌아오면 도토리를 얼마나 많이 주어다가 가마니를 해서 고구마 밭 지키면서 옛날에는 고구마가 귀하니까 도둑을 잘 맞아. 고구마 밭을 지키면서 밤새도록 도토리 까지요. 그러면 인제 큰 사람들만 교대해가면서 지키고 조금 어린사람들은 저녁에 배낭으로 하나씩 그 많은 사람이 따온 것을 양재기로 나누어 줘요. 그러면 가위도 없으니까 막 입으로 이렇게 막 해. 비호같아. 금방 까 와요. 한 두 그릇씩 세 그릇씩 노나 주면 식구가 많으니까 아무리 많이 주워도 많이 나누어야 양재기로 세 개씩 나눠주면 금방 해 와요. 가만히 있지. 그럼 그걸 다 갈아서 도토리 묵 가루를 한해는 가마니로 했어요. 그런데 그걸 녹말이라서 방도 없으니까 말리지도 못하고 한데다 말리는데 텐트를 깔고 그 위에다 사료 포 종이를 다 깔고 널면 그런 공이 없어 그런 묵 가루를 다 해서 상자로 팔고 녹말가루로 팔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