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일

수선화가 피다 : 귀일원 태동과 초기 이야기

mamuli0 2020. 3. 9. 12:37

 십여년 전에 진도에서 가져온 수선화가 피기 시작한다. 사랑초와 제비꽃 석산 부활꽃 순이 힘차게 돋아 나고 있다. 코로나19가 아직도 극성을 부린다. 자연에서 희망과 생명을 바라보자.



 신앙간증 출가 (나와 귀일원) 

 

1998.01.04. 복은순 원장


 그런데 저희 원에서는 작은 축에 들어갑니다. 옛날부터 제가 어려서부터 학생반이라는 그런 칭호를 받았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제 마음은 애기거든요. 그런데 순종이 제사보다 더 낫다는 말씀 의지하고 나왔습니다. 귀일원을 잠깐 소개해 주라는 부탁이 있으셔서 나왔습니다. 처음이에요. 어른들이 이런 자리를 안 주셨어요. 옛날부터 이런 자리를 나와서 이렇게 할 수 있도록 해 주셨다면 제가 이 시간에도 잘할 건데 좀 떨리거든요. 그러지만 떨리지만 어린애기로 봐 주셨으면 감사 하겠습니다. 



 저는 고향이 바로 밑에 마을입니다. 저희 어머니가 제가 뭐라 하면 안 될 것 같은가 들어가 버리셨네요. 제 바로 밑에 마을이 제 고향이고요. 저희 4남매가 아버지하고 같이 생활 했었어요. 그래서 제가 그때 8.15 해방 그때 갔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이렇게 보면 가끔 이상하신 분들이 오세요. 바로 저희 옆에가 지금 큰언니도 계시는데 큰어머니께서 계셨어요. 그래서 어머니께서 큰어머니의 전도를 받으시고 이 선생님을 만나시기 전에 10년 동안을 남원교회를 다니셨다고 그래요. 저는 요즘 들었거든요. 솔직히 어려서부터 출가를 해 나와 가지고 어렸을 때 어쨌다는 것을 전혀 어머니한테 여쭈어보지 않았어요. 그랬는데 여쭈어 봤더니 10년 전에 큰어머니의 전도를 받고 여기는 교회가 없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믿는 분들도 아주 적으셔가지고 어머니 외에 큰어머니하고 수장언지 몇 분만 교회를 다니셨던 것 같아요. 다니시다가 이 선생님을 만나시게 되었지요. 그래서 가끔 오셔가지고 저희 큰 어머니 집에 가셔서 말씀도 하시고 그랬던 것 같아요. 그런 때는 어머니가 제 막내 동생을 두고 예배드리러 가시면 계속 우니까 저는 그것이 아주 힘들었습니다. 애기를 보느라고 그리고 가끔 그 가끔이 아니라 그때부터 아마 갈보리가 있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어머니가 토요일이면 막내 동생을 업고 교회를 다니셨어요. 그러니까 토요일에 가시면 언제나 일요일에 오시더라고요. 그러면 어머니가 안계시면 항상 아버지께서 밥을 해 주셨어요. 어머니께서 저희 집 바로 앞에 지금은 각 집에 우물이 있지만, 옛날에는 집 앞에 공동 샘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어머니가 부끄러우신지 저한테 다른 거는 못해도 꼭 밖에 가서 물만 길어다가 아버지를 드려라. 그러면 아버지가 밥을 하셔도 동네사람들이 욕을 하지 않게 그렇게 부탁을 하시는 대도 저희 아버지께서 너무 좋으셔가지고 저한테 한 번도 물 길으라고도 않고 밥을 해주셨어요. 그것 먹고 그랬거든요. 그리고 또 한 사건은 어머니가 갈보리로 예배드리러 가시면 저희 동네가 복 씨가 많습니다. 제가 복 씨인데요. 복 씨들이 많아가지고 남자어른들이 저희 아버지 사랑방으로 다 모여가지고 엄청나게 아버지를 힘들게 하세요. 그 여편네 다리를 분질러 버리라는 둥 내쫒으라는 둥 죽여 버리라는 둥 하여튼 엄청나게 아버지한테 그렇게 참 그 동네 어른들이 그렇게 하셔도 저희 아버지만 한마디도 말씀을 안 하세요. 또 어머니가 오셔도 그것에 대해서 말씀을 안 하세요. 그래서 저는 어렸을 때부터 저희 아버님을 무척 존경 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너무 불쌍했습니다. 제가 크면 아버지한테 효도를 하리라. 굳게 마음먹었는데 효도한 번 못 받으시고 일찍 세상을 뜨셨어요.



그런데 인제 어느 날인가 오빠가 4학년인데 안보여요. 전혀 어머니가 저희들한테 그런 의논이나 말한 것이 아니고 어머니 혼자 아버님의 승낙도 없이 거의 어머니 혼자 하셨던 것 같습니다. 아버지가 너무 순하셨기 때문에 그랬는데 오빠가 안보여요.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니까 그때 서리내 에서 처음 성경공부를 시작할 때 아마 오빠를 데리고 가신 것 같아요. 그래서 4학년 다니는 오빠를 어머니께서 데리고 가서, 그것도 요즘 제가 물어 봤어요. 오빠한테, 지금 오빠가 광주에서 사시거든요. 그때 어떻게 해서 서리내로 가셨냐고 했더니 어머니가 서리내를 데리고 가더니 하룻밤 주무시더니 어머니만 오셔버리더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 어린것을 거기다 떼어놓고 오신 거예요. 그래서 인제 어찌되었든 그렇게 가셔가지고 오빠가 서리내에서 공부하시고 광주로 가셨는데 광주에서는 그때 아마 어머니 있는 학생들이기 때문에 방학을 시키더라고요. 방학을 오면서 아까 장로님 말씀하신대로 옴을 갖고 오셨어요. 오빠가 선물로, 그래가지고 진짜 그 옴은 장로님 말씀처럼 머리부터 발끝까지 성한 것이 없을 정도로 그렇게 심한 옴이었어요. 그런데 누구보다도 아버지께서 제일로 심하게 아프시더라고요. 그런데 옆에서 지켜보지만, 한 번도 오빠에 대해서 그 말씀하신일이 없으세요. 그렇게 생활을 하고 있는데 제가 2학년을 마치고 제가 지금도 키가 작지 않아요? 키가 너무 작아가지고 10살에 학교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2학년을 마쳤는데, 그때 아마 남원에서 광주에 가시는 일행이 있었던 거 같아요. 그때 저를 딸려보낸 거예요.



아직 옴도 낫지 않았는데 그래도 집에서는 어머니가 닦아주고 다 해주셨는데 그때 12살 이지만 키가 엄청나게 작아가지고 애기나 마찬가지인데 보내세요. 그래서 또 갔지요. 그런데 어머니가 가라고 하니까 갔어요. 처음에 간 것이 양림동으로 갔습니다. 양림동에서 살다가 얼마 지나니까 그 무등산 골짜기로 보내시데요. 그런데 보니까 제일로 밑에가 그 최 흥종 목사님께서 계시고 거기 이 선생님 계셨고  그때 중간 중간 집이 있는데 거기서 얼마 살다가 아니 살고 있는데 또 그 해인지 다음 해인지 제 밑에 여동생이 올라오는 거예요. 그래서 또 인제 같이 살았지요. 그렇게 살다가 50년도 초에 그렇게 무등산에서 사는데 어떻게 배가 고픈지, 진짜 배가 고파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생각해요. 아침저녁으로 묽은 쑥 죽 한 그릇이에요. 그것이 전부거든요. 그러니까 그래도 집에서는 생활이 넉넉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밥은 먹고 살았지 않아요? 그러니까 눈만 감아도 밥, 눈을 떠도 밥, 집에서 먹었던 밥 생각 콩고물에다 먹었던 밥 생각 누룽지 생각 온전히 그 밥 생각뿐이에요. 신앙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갔다 놔서 살기는 사는데 그래서 너무 배가 고팠어요. 그래도 참고 사는데 이 선생님께서 가끔 오세요. 매일 계시는 게 아니라 보면 가끔 오시더라고요. 오셔가지고 인제 그 저희 위에 언니들한테는 꾸중도 하시고 여러 가지로 말씀하시는데 저한테 오시면 항상 어째 어머니 아버지 보고 싶지 않아? 그러시면 안보고 싶다고 하면 제 엉덩이를 막 두드려 주시는 거예요. 그래서 그런 위안으로 살았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살다가 저희들이 지금 귀일원 본부가 있는 방림동으로 가게 되었어요. 그런데 거기로 갔는데 거기서는 어떻게 되었는지 밥을 주더라고요. 그 죽이 아니라 밥이에요.  그런데 밥을 주는데 도저히 그 자리에서 밥을 먹을 수가 없어요. 너무 아까워 가지고 그러니까 그 자리에서 다 먹어도 되는데 이런 손수건을 챙겨가지고 언니들 안 보게 몰래 담아요. 절반 먹고 절반 담아가지고 바로 그러니까 지금 산이 없지만 산이 있었어요. 그놈 가지가 산에서 먹으면 밥이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어요. 그러고 그 명절이 돌아왔어요. 설이 돌아온 것 같아요. 설이 돌아오면 그 어른들이 떡을 얻으러 가시더라고요. 저희들은 떡을 얻으러 가는 그 날은 산에 올라가서 하루 종일 기다리는 거예요. 얻어오면 그놈 먹으려고 그러면 저녁 늦게까지 얻어 가지고 오시면 먹고, 그렇게 생활 했거든요. 그러다가 50년 초에 해남 정 한나 어머니의 따님 집으로 너희들이 가게 되었어요. 1년 가서 사는데 육이오가 났어요. 그때는 인제 저희 공동체 식구들만 있는걸 보고 저희들이 갔는데 육이오 그 해는 저희들이 목포까지 어떻게 해서 늦게 사 목포는 왔는데 광주는 그 다음해에 들어온 것 같아요. 와서 보니까 고아원이 설립되어 있더라고요. 그래서 이 선생님 책을 보니까 50년도 초에 아니 50년도가 아니가 48년도에 이 선생님께서 그 서울 능곡에 계시면서 하신 말씀이 지금 전라도 여수에 피비린내 나는 지금 처참한 환경이 일어나가지고 고아들이 많이 발생했는데 우리가 이렇게 있을 때가 아니라 얼른 가서 우리가 그들을 도와줘야 된다고 내려오셔 가지고 김 준호 선생님하고 도암 그 산골짜기에 가셔가지고 거기서 고아 다섯 명을 기르셨더라고요. 49년도에 저희들이 고아원이 싹이 튼 걸로 저희들이 봅니다. 그래서 그 동안에는 공동체 식구들만 살았지만 49년도 그때부터 49년도이기 때문에 2009년이면 저희들이 60년도가 되거든요. 그래서 지금 귀일원 60년 행사를 하려고 저희가 준비하고 있는데요.



그 다음해에 오니까 고아원이 있어요. 그래서 저희들도 그때까지는 고생했지만 고아원에 오니까 저희들도 고아가된 거지요. 어리니까 거기서도 큰 어려움 없이 고아원이 되니까 밥도 배불리 먹었고 살다가 한 3-4년 지나니까 고아원이 폐지되었어요. 저희들도 고아로 있었기 때문에 거기서는 넉넉한 생활을 했는데 폐지되면서, 하여튼 그 마당에 있는 연탄까지도 다 가져가 버리고 온전히 빈 아무것도 없이 살림하나 없이 제가 알기로는 거의 살림살이조차 다 가져가지 않나 싶을 정도로 가지고 가니까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먹을 것도 없고 그것은 저희 고아들이 살던 집이 시에서 운영했던 집이기 때문에 저희들은 다시 방림동으로 가서 생활을 하는데 방림동에 가서 진짜 먹을 것이 진짜 없지요. 그때부터 저희들이 이때까지는 연탄으로 해서 방에 불을 땠는데 그때부터는 나무를 해 때는 거예요. 그런데 광주 시민이 거의가 나무를 때는 때라 무등산에 가도 나무가 없어요. 지금 광주 사시는 분들은 아무 중봉 거기까지 올라가야 만이 저희들이 억새 같은 나무를 해가지고 오거든요. 그래서 아침에 이만한 가루를 낮밥이라 해서 뭉쳐가지고 가면 저희들이 낮에까지 기다릴 수 없어서 산에 올라가기 전에 다 먹어 버려요. 그리고 산에 가서 나무를 해가지고 오면 거의 저녁이 되는 그런 고생스러운 삶을 쭉 살았습니다. 그때가 54년도 그때쯤 된 것 같아요.



그때부터 아까 말씀 목사님도 말씀 하셨지만 저희들이 감 동산을 아마 저희들에게 세를 주었는지 어쨌는지 모르지만 감 동산에 시내에서 인분을 퍼 다가 길러서 그걸 팔아가지고 겨우 연명을 하는 생활을 했거든요. 그러다가 저희들이 60년도 초부터 지금 옛날에 제중병원 이지만 지금 현재는 기독병원입니다. 거기 가서 저희들이 꽃밭을 가꾸고 또 매점을 저희들이 귀일원 저희들한테 병원에서 맡기신 것 같아요. 그래가지고 저희 김 은연 총무님께서 매점을 하시고 그렇게 하다가 저희들 몇 명이 그 기독병원에 보조 간호사로 가서 일을 했습니다. 그래서 거기에서 저희들이 얼마 되지 않지만 거기서 벌어온 돈으로 아마 그때 생활을 했다고 김 준호 선생님께서 여러 번 말씀하시는 걸 들었거든요. 그렇게 하다가 63년도에 매년 1월 달이면 수양회가 있는데 그때 귀일원을 이 선생님께서 설립을 하신 것 같습니다. 63년도 3월 18일 소천 하셨기 때문에 1월 달에 그것을 하시고 그러니까 아마 저희들의 생각에는 이 선생님이 저희들의 앞을 내다보시고 저희들의 살길을 신앙으로 산다고 하지만 무엇이 없으니까 힘들더라고요. 그래도 저희 귀일원을 설립하면서부터 저희들이 병원에 72년도까지 다녔거든요. 몇 사람이 거기에 저희들이 얼마 안 되지만 그 월급하고 또 인가가 나서 거기서 나온 식량하고 해서 어려움이 없이 살게 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아까 또 말했지만 50년대에 고아원  고아원이 명칭이 그때까지 그 전까지는 저희 공동체의 명칭이 없었던 것 같아요. 고아원을 동광원이라고 했는데 그 동광원이 없어지니까 어른들께서 아마 동광원 이라는 이름을 저희 공동체 이름으로 해서 지금까지 동광원이라는 이름이 된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때 당시 정 인세 원장님하고 김 은연 그 어머님, 정 인세 원장님께서 원장님 하시고 김 은연 어머님께서 총무로 일하셨는데요. 정 인세 원장님은 서울 태생으로서 듣기에는 천석꾼 아드님이라고 들었어요. 그렇게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셔서 서울 선린고등학교를 나오시고 또 평양신학교를 다니시다가 일제 강점기 때 아마 그 학교가 폐지되면서 그만두셨고 그동안에 또 Y에서 서울 YMCA에서 그 학생으로서 배우다가 광주에 아마 Y 총무님으로 부임을 하신 것 같아요. 그 정 인세 원장님께서 참 키도 크시고 참 여러 가지 또 스피아 고등학교 교감으로도 계셨고 또 그때당시 덴마크 체조감독도 하셨더라고요. 단장님도 하셨고 유도가 2단 이시고 그런 분이 이 선생님을 만나시면서 머리 깎으시고 거지 옷을 입으시고 그 저희들은 그 원장님을 볼 때 너무 존경스러웠습니다.



그 원장님께서 고아원 설립을 하셔서 운영을 하셨고 또 김 은연 어머니께서도 그 남편 되시는 분이 순경이신데 여순 반란 사건 때 순직 당하시고 어머니께서도 순경하시다가 아마 육이오 때 순경 이셨기 때문에 아마 그 이 선생님께서 피난 하셨던 데로 같이 하셨나 봐요. 피난 가셔서 선생님의 그 말씀에 감화를 받으시고 가정을 버리시고 오셔가지고 귀일원 초창기부터 91년도까지 두 분이 그런 희생이 없으셨어요. 저희들의 어머니도 되시고 아버지도 되시고 저희들의 가족들을 사랑하셨는지 그 사랑은 저희들은 잊을 수가 없어요. 어떤 부모가 그렇게 자식들을 사랑할 수 있을까? 그 정도로 저희 가족들을, 환자들을 너무 사랑하셨거든요. 그랬는데 두 분이 이렇게 가셨기 때문에 두 분이 같은 해에 하늘나라 가셨어요. 그래서 저희들은 그 동안에 어른들 밑에서 조금 있었지만 어른들이 가시니까 어쩔 수 없이 지금은 저희들이 지금은 이어받아 가지고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현재 귀일원에 귀일원이 처음 설립할 때는 폐질 불구 시설 명칭이 불구폐질 시설 이었어요. 폐질 이라는 것은 버린 폐품 이지요. 버릴 수밖에 없는 분들, 참 길에서 저희들이 돌보지 않으면 돌아가실 분들만 섬기자는 그런 뜻에서 이 선생님께서 설립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두 분이 많은 신앙으로서 귀일원을 이끌어 주셨기 때문에 지금 귀일원은 많은 분들이 알아주는 그런 귀일원이 되어서 저희들이 운영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현재 지금은 저희들이 99년도 까지는 귀일원 이라는 명칭 하에 시설 명칭으로서 쭉 지냈었어요.



그랬는데 정신장애 정신지체 여러 가지 장애를 가지신 분들을 무의무탁자들은 저희들이 다 받았기 때문에 여러 부류의 가족들이 계셨거든요. 그래서 한때는 80년대 70년대 까지는 거의가 200명이 넘을 정도로 많았습니다. 그러지만 국가에서 이렇게 직원 정원은 12분, 13분밖에 안 됐어요. 그래서 지금 현재 묻히신 어머님들 현재 남원에 계신 어머님들이 다 광주에서 거의 봉사를 하실 수밖에 없었어요. 그때 당시는 그 보조금이 넉넉하지 않았기 때문에 다 옷도 기워서 입혀야 되고 여러 가지 채소도 다 심어서 해야 되고 그러기 때문에 그렇게 많은 동광원 회원들이 거의 귀일원 가족들을 돌보는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저희들이 1999년도 10월 달에 정신지체 시설하고 정신장애 시설을 둘로 갈랐어요. 그러면서부터 국가에서 보조도 넉넉했고 직원 티오도 그때부터 많아졌기 때문에 저희 외부직원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현재 정신장애 시설과 정신지체 시설이 있고 또 이용 시설로서 귀일향기 일굼 터 세시설이 있습니다. 귀일정신 요양원에는 정원이 120명에 현인원은 110명 직원은 22명이고요. 귀일 민들레 집은 정원이 90명에 80명이고 직원은 33명이고 귀일향기 일굼 터는 원장님까지 해서 세분이 일을 하고, 그렇게 운영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동광원이 저희 귀일원 모체이지요. 동광원에서 설립을 하셔서 저희 귀일원이 운영되고 있습니다. 각 분원에서 어른들께서 기도해 주시고 염려해 주시고 하시기 때문에 저희들이 하고 있거든요.



그렇게 생각하고 아 여기(남원 대산)에도 여기는 80년도에 정 인세 원장님께서 가실 때가 얼마 안 되시니까 저희 거기서 수고하는 직원들이 퇴직 하게 되면 장소를 당신께서 마련해 주시고 싶으셨나 봐요. 그래가지고 많은 답사 끝에 여기를 80년도에 답사를 하셨습니다. 그래가지고 거의 10년 아니지만 몇 년 동안을 매주 여기를 오셔서 진짜 고생 많이 하셨어요. 지금처럼 큰길에서 여기가지가 진짜 비포장도로로서 얼마나 힘든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원장님께서 진짜 그 많은 세월을 여기를 다 감당하시고 또 돈도 없기 때문에 아까 말씀 하셨지만 옛날에 서울 아현교회 같은데서 시무하시던 교인들을 항상 매달 찾아가시더라고요. 매달 그 분들을 심방 하셔가지고 그 분들이 조금씩 주신 돈으로 항상 여기다 부담을 하셨어요. 그래서 돈이 생기는 대로 그 원장님의 정신은 어떠냐 하면 절대 백 원도 빚을 지면 안 된다. 하는 강한 신념이 있었어요. 그래서 저희들도 그것을 지키고 있습니다. 그래서  집을 짓다가 돈 없으면 끝인 거예요. 그리고 또 어디서 생기면 짓고, 짓고 해서 지금 이렇게 좋은 터가 되었고 또 정 인세 원장님께서 그렇게 집을 짓고 해 놓으신 다음에 길도 진짜 험했어요. 어쩔 수 없이 험했는데 오 북환 장로님께서 그때부터 집을 지어놓고 하니까 오 북환 장로님께서 오셔서 이 교회 조경이나 길을 진짜 매년 몇 년 동안 수고하셔가지고 길도 좋게 올라갈 수 있게 하셨고 조경도 저 많은 조경을 90세가 넘을 때까지 소나무위에 올라가셔서 조경을 하셨습니다. 그 정도로 나무를 사랑하셨고 잘해 주셨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가 이렇게 좋은 수련회도 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제가 한 가지 아까 차 종순 총장님께서 그 동광원이 고 허번 원장님이 다 이렇게 해주셔서 기반으로 해서 이렇게 귀일원 동광원이 생겼다고 그렇게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그런데 고 허번 원장님께서 계실 때 아까처럼 이 선생님께서 무료로 입원하셨고 저희들을 받아주셨고 그런 정신적인 것은 저희 동광원에서 도움은 받았지만 그 지금 조금 동도 총장님께서 잘 못 생각하신 것 같은데 지금 옆에 소화 자매원이 있거든요. 소화 자매원은 동광원에서 김 준호 선생님하고 김 은자 어머니께서 저희하고 같이 동광원 멤버로서 생활을 하다가 이 선생님께서 이렇게 결핵환자들을 참 너무 사랑하시고 걸인들을 사랑하셨기 때문에 김 준호 선생님한테 그 임무를 주셨어요. 보자면 구제하는 사업, 그분들 돕는, 그래가지고 김 준호 선생님하고 김 은자어머니께서 이렇게 결핵 환자들을 돌보기 시작해가지고 지금 소화 자매원이라는 큰 시설이 되었거든요. 그래서 직접적인 조금동 땅을 구해주신 거나 그 저기 땅도 구입해 주셨는가 봐요. 저희들은 잘 모르지만 구입해 주심으로 지금 소화 자매원이 설립이 되었거든요. 저희들은 직접 받은 것은 아닙니다. 저희들은 백 춘성 장로님이라고 하시는 분이 이 선생님께 전 재산을 바치셨어요. 신안동에 있는 논 밭 집 전체를 상당히 많은 그 양인데 그것을 다 바치셨어요. 그래서 그때 당시도 법인을 하려면 지금도 그러지만 얼마만의 재산이 있어야 법인이 되거든요. 그 백 춘성 장로님께서 다 내놓으셨기 때문에 그것을 기반으로 해서 저희 귀일원이 설립 되었습니다. 아까 차 종순 총장님께서는 그것을 저희들을 주신 것으로 착각하신 것 같아요. 지금 조금동 땅도 소화자매원 땅인데 저희들이 84년도에 그 동산 하나있는데 남반들이 살고 있었는데 아파트가 생기기 때문에 그 땅을 저희들이 처분하고 그 땅을 저희들이 84년도에 구입해가지고 저희들이 건축을 해가지고 지금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그런 것은 잘 모르시고 할 것 같아서 제가 해명을 해드립니다. 혹시 궁금한 것 있으면 말씀해 주십시오. 



 ★-질의응답- (원경선 선생 질문하고 복 은순 원장 답변)

 조금 그 말씀하시는 중에 제가 아는 대로 하고 조금 미불명하는 데가 있어서 물어보는데요. 한번 고아원 어느 때 인지 모르겠어요. 고아원 창립을 할 때에 정 선생님이 저희 부천에 왔어요. 와서 오늘 보사부에서 승인을 받았습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29명을 우리 동광원에서 다 먹는 것도 동광원에서 십일조내서 먹이고 사람도 동광원 식구가 나가서 하고 그래서 하기로 승인을 받았습니다. 하는 이야기를 내가 들었어요. 그런데 그거하고 어떻게 되는지?



 그러니까 지금 고아원을 말씀 하시는가요? 귀일원을 말씀 하시는가요? 

 그걸 제가 잘 몰라요. 하여튼 29명을..

 아 그러면 그것은  귀일원 이라고 생각 합니다. 저희가 아까 말씀드렸듯이 해남 갔다 오니까 엄청난 많은 고아들이 고아 사업을 하는데 양림동하고 지산동하고 아주 몇 백 명이 있었거든요. 그러니까 그 고아원은 아까 제가 말한 대로 49년도에는 도암에서 시작했지만 50년도 초에 광주 유지들이 여순반란사건 때 많은 고아들이 생기니까 유지들이 발기를 해가지고 의논해 가지고 그 중에서 누가 이것을 맡을 것인가 의논하다가 정 인세 원장님이 하시는 것이 좋겠다. 그분들이 그렇게 유지들이 의논해 가지고  했다고 들었거든요. 



 제가 질문 하는 것은 출발이 관에 의지하지 않고 땅에서 의지하지 않고 사람도 동광원에서 십일조를 내고 먹는 것도 십일조를 내서 한다. 그 말씀을 했기 때문에 여러분이 그 내용을 잘 모를 것 같아요. 사람도 십일조, 또 먹는 것도 십일조 내서 자력으로 29명이라고 내가 기억해요. 그 정신이 알려졌으면 좋겠어요. 지금 말씀하는데 그런 게 없는데 동광원 자체가 정 인세 선생님이 절대로 빚 안지는 그런 주의로 갔는데 그것도 원조나 관의 보조 그것 보다는 사람 십일조 내고 먹을 거 십일조 내서 동광원의 힘으로 하도록 한다는 정신을 좀 알려줬으면 해서 제가 묻는 거예요.

 그러니까 원장님이 64년도에 설립해 가지고 65년도에 인가가 났거든요. 그러니까 아마 이 선생님 원장님께서 이렇게 고아들은 바로 그 몇 명을 수용하다가 인가를 받았기 때문에 그 인가 받기 전에 말씀을 하신 거, 인가 받기 전에 저희들 십일조와 헌금으로 또 저희 동광원 식구들이 한 것이기 때문에 귀일원 설립 때 한 거 같습니다.



 그거는 인가 받고 나와서 나한테 이야기 한 건가?

 귀일원 인가 받기 전에 말씀인거 같습니다. 

 이름은 모르지만 그래서 내가 지금 질문 하면서 이야기 하는 것은 동광원에서 그런 동기, 우리 힘으로 사람도 우리 힘으로 또 먹는 것도 우리 힘으로 먹이도록 하자는 정신이 거기에 들어가 있다는 것을 좀 알았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그 다음에요. 이 관에서 얼마든지 우리가 집도 지어주고 그리 할 테니 받아다오. 그런데 그것은 동광원에서 하는 일이 정말 사랑으로 하기 때문에 그것을 자꾸 거절해 나간다는 하는 이야기를 내가 들었어요. 동광원이 처음부터 모든 것 비용도 그렇지만 사랑으로 잘해 나가기 때문에 관에서도 그저 될 수 있으면 받아 다고, 받아 다고, 그런 이야기를 한다고 하는 걸 그러나 우리는 여러 가지 어려움에 저거 때문에 그대로 관에서 해주겠다는 걸 못 받는다. 그런 이야기를 제가 들었어요.


 


 귀일원으로 생각 됩니다. 그러고  또 귀일원에 제가 뭐 자랑은 아니지만 초창기, 90년도 들어와서 국가에서 보조가 이렇게 조금 좋아졌지요. 90년도 전까지는 거의 2000년 전까지는 아까도 말했지만 거의 200명 다되지만 국가에서 직원 12명 13명 12명 13명 갖고는 할  수가 없는 그런 사정이잖아요. 다른 시설들은 참 이렇게 지금 많은 분들에게 족쇄를 채우고 가두어놓고 그렇게 생활 한다고 그런 보도도 많이 되고 국민들도 그렇게 알고 계시지만 저희들은 그렇게 안하기 위해서 거의 35명이 공동체 지금까지 같이 합해서 했고 또 국가에서 나온 12명 인건비도 저희들이 솔직히 거의 500원 천 원 정도를 쓰고 그렇게 쓰면서 저희들이 우리가 봉급 받았으니까 내 것이고 가족들은 보조금으로만 해야 된다는 생각이 지금도 없습니다. 그래서 저희들은 저희들 봉급을 2001년도 까지는 법인 부담 지금도 법인 부담금이 얼마나 많이 들어가는데 또 어른들이 그 후원금을 받지 못하게 하세요. 그것도 빚이다. 빚을 지는 거다. 그래서 저희들이 후원회를 못하기 때문에 저희들의 봉급이 들어가지 않으면 운영을 할 수가 없어요. 방에 불을 때줄 수가 없고 우물이 고장 나도 고칠 수가 없고 집이 새도 고칠 수가 없어요.


 


 너무 국가에서 나오는 것은 작기 때문에 그래서 저희들은 참 저희들 봉급을 바친다. 그런 생각도 없이 이 분들을 예수님으로 모시고 내 형제로 모시자는 그 뜻에서 설립 하셨기 때문에 저희들은 그런 선이 없이 생활을 했습니다. 99년도 10월 달부터 외부 직원들이 많이 해서 우리가 12명 했던 것을 같은 인원을 가지고 지금 60명이 되잖아요? 많은 직원들이 필요 하는데 지금은 많은 티오들이 되었고 그동안에 봉사자로 했던 우리 이모님들이 99 년도부터는 지금 17명의 직원들이 있습니다. 공동체 직원들이 60명에서 그러니까 삼분의 일이 저희 공동체 식구들이지요. 그래서 2001년도 까지는 그래도 저희들이 건축을 하나 모든 것을 저희들이 봉급을 안내어 놓을 수가 없어요. 내어 놓는다는 단어를 제가 쓰지만 저희들은 의례히 이분들을 위해서 쓰는 것이 당연하다. 해서 썼고 2001년도부터 조금 모아진 돈으로 지금 여기 밑에 두 동을 할머니들이 너무 고생하시고 불 때시는 모습을 볼 때마다 얼마 남지 않은 세월 할머니들이 좀 편안하게 사시다 가시면 좋겠다. 싶어서 그 동안에 조금 모아진 것을 두 동을 저희들이 지어드렸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되었고.


 


 ★편집자 첨부의 글★
 위의 질문에 관한 증언(동광원 수양회 1995년 1월 3일 김 준호 선생) 일부(불구폐질시설 귀일원 이 시작되게 된 이야기)를 추가합니다.

 제일 땅에서 버림받는 사람을 옆에다 두고 살아라. 그것이 예수님을 찾아가는 길이다. 실상 이 선생님 계실 때에는 양로원 가실 수 있는 사람은 다가요. 노인이니까, 고아원에 갈 수 있는 애기들은 다 가버려요. 또 나병이면 라구회(최흥종)에 찾아가요. 해당이 안 되는 사람이 동광원에 찾아와요. 해당이 안 되어. 국가 혜택을 받을 수 없는 사람이, 다시 말하면 완전히 버림당한 사람이지요. 여기 용납하라. 그 사람 데리고 살아야한다. 자꾸 말합니다만 귀일원의 제일은 어른들 오셨으니까 귀일원은 여럿이 살라는 곳이 아닙니다. 한사람 살라는 겁니다. 한사람 선생님을 존경하던 처녀 의사가 있었어요. 또 처녀 간호원이 있고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늘 찾아와서 보고, 한 몇 년 사귀었지요. 그런데 하루는 와서 울어요. 둘이, 왜 우냐고? 우리가 보는 환자 하나가 지방 촌에서 올라왔는데 무의무탁한 사람인데 병이 전신불수, 다시 말하면 몸이 모두가 굳어있는 병에 걸렸는데 병원 당국에서 얻어먹도록 해주자. 앉아있도록 해주자. 이래가지고 다리 하나는 수술해가지고 리을(ㄹ)자로 만들었었답니다. 앉도록 해주었답니다.


 


 정부 예산이 없어가지고, 의사들이 돈이 없어가지고, 울면서 내일 퇴원시킨다. 이거에요. 퇴원하면 갈 데가 없다고, 그래 할 수 없으니까 리어카 하나 구해서 실어다가 공원 땅에 내버려라. 그랬다. 자기가 담당 의사고 간호원이 야. 선생님 이일을 어떻게 할까요? 우리 이렇게 합시다. 우리도 그걸 전부 무마할 수 없어. 왜 양식이 없어 피죽을 ... 강냉이죽도 없는데 풀뿌리 캐먹고 하던 때인데 두 분이 밥 먹을 때 한술씩 덜먹으시오. 그럼 두 수저 친구한테 말하면 열이면 한 그릇 됩니다. 십시일반 그러니까 간호원 의사들이 의논해 갖고 이 사람이 하루 세끼 먹으면 밥만 가져오시오. 그럼 우리는 잠자리는 드리겠소. 똥을 못 가리니까 똥은 우리가 쳐드리겠소. 그때는 인가가 없지요. 귀일원 인가가 없고 하니까 은연자매님이 불러서 어떻게 할까? 나 밥해줄 수 있소? 아들 홍석씨가 있었어요.  남자는 하나뿐이었어요. 여자동산이니까, 남자는 너 하나뿐이다. 이 사람 남자인데 어떻게 할까? 그래 용납해가지고 잠재워 주기로 하고 방내주기로 하고 그것이 이 선생님이 허락한 일입니다. 그것이 일작운동인데 밥을 갖고 오는 건 어려우니까 밥을 할 때 쌀을 떼어서 가지고 오라. 그거에요.


 


그 소문 듣고 일작씩 많이 가져왔어요. 멀어서 할 수 없게 되면 돈으로 하루에 천원, 세 사람이 모이면 삼천 원, 그래 제자삼아 이 선생님이 말씀하시는 건, 그것뿐입니다. 그 일하라. 이거에요. 그런 사람을 용납안하면 우리 영혼이 타락한다 말이에요. 아까 그랬지요? 가슴에 눈을 품고 살아라. 예수님이 원하는 일을 하며 살아야지 우리만 좋아서는 안 되겠다. 그러니 요 뒤에 보모님이 계세요. 아침마다 예배 보러 오는데 자기 남동생인가 올 데 갈 데 없고 버려있다 이거에요. 간질만 가져온 게 아니라 정신병에다 간질에다가 여러 가지 병이 겹쳤기 때문에 또 온다 말이에요. 그 사람이 와있는걸 보고 자기 동생도 어떻게 할까요? 거절 못했어요. 들어왔어요. 그래 두 사람이지요. 또 두 사람이 있는걸 보고 또 사정해요. 세 사람 네 사람 그래 결국 우리는 실력대로 해야겠다. 스물두사람만 데리고 있자. 곡성 함평 진도 거기서 양식을 가져오도록 이 사람들 먹도록 해줘야지, 하신 것이 소위 말하면 귀일원의 시작이지요. 전혀 이렇게 모여서 사업하려는 뜻은 아니었고 그 때 그때 어쩔 수 없는 예수님들, 우리가 모시고 살아야한다.


 


아까 법대로 하면 여기도 남자 환자 용납 못하지요. 여자들 동산이니까 용납해야 한다. 그건 지극한 거야. 사업이 아니야. 그럼 어쩔 수없이 생명 법을 초월한 것이지요. 그렇게 시작을 했어요. 시작은 남자를 용납 안 한 것이 비상한 용납이었지요. 비상한 용납 그래서 여기는 이사회에서 결의를 여자반만 해야 된다. 왜 남자를 용납 못해? 남자 수종 군이 없지요. 남자를 수종들 수 없잖아요? 그래 남자는 십여 명 있어요. 있기는 그때 시작된 사람들이 그렇게 해서 역사가 시작된다. 정신원의 역사가, 그럼 역사를 아시는 분이 현동완 선생 유영모 선생이다. 그럼 자비의 운동 사랑의 운동이지요. 그 지극한 사랑의 운동을 예수님이 시작을 했고 그 두 어른이 볼 때는 한국도 사랑이 있다. 이거에요. 이공님한테 있다. 그걸 봤어요.


 


 성가
 광고
 감사합니다. 광고말씀 드리겠습니다. 이번 참석하신 참석자 주소록을 저희가 나누어 드리려고 했는데 여기 복사가 여의치 않아서 그걸 정리를 해서 귀일원 홈페이지에 등재하겠습니다. 이번 참석하신 분들의 명단이 궁금하신 분은 귀일원 홈페이지에서 다운 받으면 되겠습니다. 그리고 광고 부탁을 받았는데요. 엄 두섭 목사님 주최로 이 세종 선생님 이 현필 선생님의 영성 훈련과정을 2박3일 정도해서 우선 남자들만 대상으로 20명 정도 이렇게 경기도 계명산 벽제동에서 할 예정이라고 합니다. 이거 역시 확정이 되면 귀일원 홈페이지에 안내 글을 올릴 예정입니다. 참고 하시면 되겠고요. 여러분이 가지고 계신 동광원 성가 모음집은 이건 또 내년에도 사용해야 될 거거든요. 잘 쓰시면 여기 예배 실에 다 놓고 가시면 되겠습니다. 저녁 진지는 다섯 시에 있습니다. 맛있게 드십시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