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일

헌집뜯기 : 계명산 초기생활(A)

mamuli0 2020. 3. 17. 20:05

스레트집 지붕 개량으로 헌집을 헐낸다. 굴삭기로 헌집을 헐어내고 바닥을 고르고 다졌다.


 


 계명산 초기생활(a)


2001.01.25. 박공순, 한영우


사) 2001년 1월 25일, 계명산에서 한 집사님 지내셨던 이야기입니다. 
박) 1983년에 왔어요.
한) 그러니까 내가 그럼 그 다음해가 되고 84년도나 여기 살았는지 몰라요. 그런데 그것이 문제가 아니거든요. 원래는 저 아래 남반에서 산 그것이 먼저지, 계명산 쪽 먼저 이야기를 하려면 거기서 먼저 살았는데 몇 년도에 살았는지를 몰라.
박) 양근 씨.
한) 예, 그 양반 살 때 같이 살았어. 그 양반 밥해주고.


 


박) 양근 씨 그때부터 그러니까 양근 씨 산 것이 안 적혀 있어. 양근 씨 세상 뜬 것은.
사) 그러니까 남반 있을 때 먼저 와서 사셨고, 그 이후에,
한) 예, 그 이후에 여기 와서 한나 씨 어머니 방에 옆에 와서 한 일 년인가 살았고. 그리고 그 중간에는 또 저기 갈월 이라는 거기 남반이 있었는데 거기 맨날 밭 갈아주고.
박) 양근 씨가 여기 와서 한 2년 3년 살았는데요. 3년 살았는가? 4년 살았는가? 모르겠네. 양근 씨가 여기 와서 세상 뜬 거만 적혀있어. 1968년도에 세상 떴어.
한) 68년에? 그럼 그 전에 그러니까 한참 전이야. 내가 살 때는 그러니까 한참 전 이니까
박) 이 선생님 세상 뜨시고 오셨잖아요? 세상 뜨시고 난 뒤에.
한) 예, 그랬어요.


 


박) 차근차근 여기 보면요. 갈월 남반 시작한 것도 있어. 어디가 그런 게 다 나온다고.
한) 거기서 된 것은 한참 뒤고, 내가 여기서 더 먼저 살았고
어머니 세상 뜬 그런 중심 사업은 알아. 나 그때 살았거든.
박) 우리 어머니가 64년도에 이 선생님 가셨는데 65년도에 가셨어. 
한) 이 선생님 64년에 가셨을까?
박) 예, 64년에 가셨어요. 집사님이 65년도에 가셨어요. 그래 거기 떡 번지서 쟁기질하고 사셨지 않아요?


 


한) 그래 거기 살았다니까, 어머니 세상 뜨고, 그럴 때 여기 살았어.
사) 예, 4월 24일 날, 그러면 대충은 나오겠네요.
박) 남반에서 그때 소 기르고 그때 같이 사셨구나.
사) 그때는 남반이 몇 명 정도 있었나요?
박) 그건 환자들도 요러고 다리가 잘라져버렸는데도 얻어먹는 습관이 되어가지고 나갑디다. 우리가,
한) 그때 나 살 때는 나 하나하고 누구 최 뭣이냐? 
박) 한 집사님 있을 때 환자들 있었지 않아요? 여나 뭇 명 있었어.


 


한) 아니 없었어. 나 있을 때는.
박) 누가 데리고 있었을까? 그러면?
한) 몰라. 그때 나.
박) 우리가 새벽송도 가고 그랬는데
한) 누구였는가? 몰라도 내가 살 때는 그 대기 라든가? 그 사람 같이 살았어요. 그 사람 하나하고 같이 살고 중성이가 같이 살다가 나간 뒤에든가 그 사람 왔든가 몰라. 근식이가 살고 양근 씨 그 양반이 밥해주고 또 물건내밀이라고 그 양반 거기 살았고 그런 적이 있는데 그런 이야기를 쓰자고 이야기 하자는 거 아니고
사) 여기서 살 때 이야기를 주로 한번 해보시지요.


 


사) 그러니까 그거지요. 84년도
박) 요 아래서 살으셨거든요. 요 아래 산을 팔았대요. 시내버스 있는데 아 그때는 혼자 계셨어요. 남자로서는
한) 예, 남자는 아니 이제 한사람 있었는데 그 사람 살다 나가버렸고 인제 혼자 있었지요. 나중에는 그런데
박) 68년도에 이 양반이 세상 뜨시니까 한 1967년 
한) 어머니 세상 뜨신 그 해로 잡으면 돼. 내가 묘지 썼으니까 
박) 65년, 1965년이에요. 처음 오셨을 때 
한) 저 아래 남반에 살 때, 남반 시작했을 때
사) 예.


 


한) 이제 그 전일이야. 한나 씨 어머니 막 칠 때 와서 막을 치기는 쳤지. 능곡에서 짚이니 뭐니 가지고와서 쳤어.
박) 한 집사님도 그때 오셔서 막 치셨어요?
한) 그러지. 저 안에 흥순이 그런 사람들 같이 짚이랑 뭐이랑 짊어지고 와서 막 쳤지. 그때 맨 처음에 한나 씨 어머니가 혼자 칠 때는 작게 혼자 쳤었고, 거기 계셨었고. 그 다음에 조금 크게 인제 거기서 갖고 와가지고 쳤어요.
박) 아 그러면 처음에는 그럼 한나 어머니 혼자 쳤을까?


 


한) 혼자 쳤지. 혼자 와서 여기 찬물만 먹고 산다고 들어가 가지고  동냥 좀 얻어다 먹고 그러고 살다가
박) 그때가 65년이야. 그게 65년 가을이야. 그러다가 나중에 희옥 씨 어머니 오셨지요. 아, 65년이 아니라 56년 가을이야.
한) 이 선생님 훨씬 세상 뜨기 전이야. 그럴 때 와서 막 쳐주고 가고 그랬고. 여기서 살지는 않았고.
박) 거기는 인제 한나 어머니가 65년도에 66년도지. 아니 56년 이렇게 왔다 갔다 한다니까  56년에 가을에 오셔서 거기서 한 달인가 두 달인가 사셨답니다. 
사) 이 안에요? 


 


박) 막을 쳐가지고, 조그만 막을 겨우 쳤었어요. 56년도에 오셔서 막을 쳐가지고 맨 처음에는 어떻게 되었냐하면 여기 이 산을 어떻게 알았냐 하면요. 인제 YMCA 현 총무님 하고 정 인세 원장님 정 한나 어머니 그렇게 세분이 여기 산을 보러 오셨대요. 무슨 이유로 보러 오셨냐하면 여기 난지도 고아원을 여기로 옮기려고 여기가 물이 좋으니까 여기다 막고 여기를 막고 수영장을 하려고 그러려고 그 큰 고아원이지 않아요? 난지도 고아원 그걸 여기로 옮기려고 현 총무님하고 두 분이 보러 오시는데 한나 어머니가 거기 껴서 오셨는지, 이 산을 보고 아주 반해버리셨대요. 반해 버리셔. 이 깊은 산에 항상 여자들만 살 수 있는 그런 꿈을 꾸셨어.


 


그래가지고 남자 없이 여자들만 이렇게 독립해서 살 수 있는 꿈을 꾸시고 계셨었는데 오셔가지고는 이 산을 보니까 그런 생각이 있으신데 이 산을 보고 반해 버렸대요. 한 마디로 그러니까 항상 마음에 두고 계시다가 고아원을 안 쓴 것은 미군에서 미8군단이 와서 보고는 일선이 가깝다고 그냥 취소해 버리고 그래가지고 홀트 고아원이 생긴 거래요. 홀트 고아원 원장님도 여기 오셨었어요. 그래가지고 한나 어머니가 항상 이 산을 마음을 두고 계시다가 56년도에 당신 혼자 여기 와서 막을 쳤어요. 막을 치고 가을에 어떤 할머니 한분 데리고 오셔서 두 달인가 사셨다고, 그래가지고 또 하나 이 선생님이 수족같이 했거든요. 여기 분원에도 다 다니면서.


 


한) 그러니까 맨 처음에 한나 씨가 어떻게 되었냐하면 애초에 여기 와서 살았어요. 능곡서 한참 살았는데 거기서 이렇게 찬물만 먹고 살아야겠다고 여기를 들어오셨답니다. 그래가지고 인제 여기 땅 보는 영감님 계셨어. 저기 위편에 사시는데 아니 저 건너인가? 그 영감님한테 막을 하나치겠다고 말을 하고 거기다 막을 쳤다는 것이야. 맨 처음에 그래서 그 이듬해 봄인가 우리가 능곡에서 더 크게 나랑 짚이랑 짊어지고 갖고 와서 더 크게 집을 지어버렸어. 
박) 그런데 그것은 한참 집을 지은 뒤인 거 같아요.
한) 그러니까 더 지나서


 


박) 56년도에 그렇게 해가지고 두 분이 할머니들 두 분이 도토리 주워서 잡수고 동냥해 다가 잡수고 그렇게 사시다가 또 이 선생님이 부르시니까 광주로 내려가셨는데 거기 내려오셔 가지고 같이 올 때는 우리 자유 반을 열두 명을 또 뽑았어요. 서울 어머니하고 열두 명을 뽑았는데 그 속에 내가 끼어.
한) 아 쫌 순서가 바뀐 것 같아. 그 서울 어머니가 애기 데리고 능곡 와서 살았어요.
알아요. 그러니까 그것이 내가 왜 그것을 아냐 하면 내가 굴에 살았거든. 서울 굴에 살았는데 최 씨 어머니하고 그 양반하고. 
박) 나는 지금 계명산 들어온 이야기만 하려고 그래요.


 


한) 그때 능곡에 인제 뭣이냐 하면 현 총무님을 안다고, 그래 옛날에 서울 어머니랑 그러니까 거기를 한번 가보자 하고 거기를 가보니까 한나 씨 어머니랑 와서 살아. 거기 능곡에서 그렇게 사는 것을 봤어. 그런 저기를 하고 인제 그 손자를 기르는데 그놈을 키우기 위해서 천막을 사왔어. 사가지고 와서 살면서 나중에 한나 씨 어머니가 인제 거기서 여기를 한나 씨 어머니가 혼자 들어와서 살았는지 살다가 그 애기를 데려다 주라고 해버렸어. 눈물이 눈에 뚝뚝 떨어지라고, 서울 어머니.
박) 손자를 치마에 싸서 길렀는데 그걸 떨려니까 그냥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아. 데려다 줘버리라고.


 


한) 그러니까 데려다 줘버리고, 뒤에 서울 어머니하고 들어온 거예요. 
박) 아니 서울 어머니 들어온 건 나하고 같이 들어왔어.
한) 그러니까 그 양반이 들어와서 뒤를 댔지. 그러니까 한참 뒤에야 내가 한 이야기는
박) 그래서 한나 어머니가 나가셨다가 제 2의 반을 뽑아가지고 같이 열두 명이 올라왔어요. 서울로, 능곡으로.
사) 그게 57년 인가요?
박) 56년이에요. 


 


사) 그게 56년이에요?
박) 예 56년에 그 한나 어머니가 여기다 막치고 한 두 달인가 사시고는 인제 그 다음에 56년에 우리가 11월 달에 왔어요. 11월 달에 와서 능곡서 정착해 가지고 자립 반으로 살고 있어. 두 반이나, 일회 자립 반은 건너 방에 살고, 우리는 큰방에서 살고 때가 많아서 남반은 원집에서 살고, 그러고 사는데 능곡에서는 한 겨울이면 그해 먹을 것이 없어서 우리도 농사지어 놓은데 와서 얻어먹고 사는 게 미안한데 눈이 이렇게 왔어요. 여기 어디 지금 원당 근방 거기까지 날마다 눈 속에 빠져가며 솔방울을 따러 다녔어. 솔방울을 따다가 때고 보리 겨를 사다가 죽을 끓여 먹어가면서 거기서 쌀 좀 얻은 것은 누가 양배추 그해에 실패했다고 마차로 실어다가 산언덕 밑에다 놔두고 가면 막 얽어놓고 그것에다가 썰어서 쌀 한줌 넣어서 밥이라고 먹고, 보리 겨 넣고 죽 끓여서 먹고 사는데 한나 어머니가 막 치고 여기 계시다가 나오셔서 항상 못 잊어.


 


그러니까 서울 어머니보고 당신 거기 가서 살라요? 당신이 못 사니까 당신 거기 가서 살라요? 서울 어머니도 처음에는 싫어 하셨어요. 나 동광원 식구들하고 같이 살면서 우거지 주워 다가 살란다고 우거지 주워 다가 준다고 우거지 주어다 줄란다고 그렇게 살라고 들어왔다고 그래도 자꾸 한나 어머니가 여기 계명산을 몇 번 오시데요. 서울 어머니를 데리고 그러는데 자꾸 못 잊어. 인제 여국(女國), 나라를 만드시려고 그래가지고 능곡에서 식구들이 사는데 두 반이 모여서 사는데 다 싫어해요.


 


 고생자리를 다 싫어하고 누구 하나 찾아보라고, 서울 어머니가 한나 어머니보고 그때 서울 어머니도 그때 처음 들어 오셔가지고 우리하고 같이 들어오셔서 우리하고 솔방울을 따러 다니는데 뭘 할 줄 알아요? 그러면 이렇게 가면서 이야기를 하면 서울 어머니가 내가 광주에서 살면서 이 선생님 밑에서 농사를 감 밭에서 지은 일이 있거든요 그래서 이 선생님 하라는 대로 하고 그러니까 이 선생님 체구가 나풀나풀 잘하면 선생님 나와서 솎아주고 일하는 사람들 나와서 같이 솎고 그러시더라고 그러는데 선생님 이야기를 많이 했어요. 거름도 어떻게 하면 좋다고 거름을 인분을 재에다 섞으면 그건 효과가 없다고 서울 어머니하고 자꾸 이야기가 돼서 이 서울 어머니가 가만히 듣고 들어보기만 했나 봐요.


 


그러니까 한나 어머니더러 공순 씨가 이렇게 선생님을 보고 굉장히 존경을 하고 선생님한테 순종을 하고 그러는 것 같다고 공순 씨 데리고 가면 어쩌겠냐고 했다고 그래. 그러니까 한나 어머니가 그럼 데리고 가소. 그래가지고 사람 다 모여 놓고 계명산에 누구 따라 갈려 고 하니까 아무개 하고 둘이 가면 쓰겠다고 한나 어머니가 그러셨나봐. 그러니까 그 사람은 막 반대를 하더라고, 나는 그런데 안 간다고 그러니까 인제 그러면 둘이 가라고 그래서 능곡에서 나왔는데 그때는 차가 없어요. 차가 없어가지고 녹번리에 가서 쑥 보따리 하나 그때 쌀 한말 얻고 쑥 보따리 하나 얻고 뭔 통 얻고 그야말로 마루 밑에서 도시락 뚜껑 마루 밑에서 주워서 다 닦고 그래가지고 인제 오는 거예요.


 


 짐 보따리가 몇 개 되는데 그걸 가지고 걸어올 수 없으니까 녹번동에 나왔어. 녹번동에 나와서 그 추운데 하루 종일 기다리니까 이맘때나 되니까 차가 문산에 가는 차가 한 대 오데요. 그래서 그걸 타고 대자리에 와서 내렸어요. 대자리에 와서 내려가지고 조금 오다가 짐을 저기다 가져다놓고 내가 이만치 가져다 놓고 또 가서 가져오고 짐 거기 놔두고 좀 오다가 가서 받아가지고 오고 그러고 들어왔는데 딱 여기오니까 해가 딱 졌어요. 그런데 그 동네 아는 사람이 있어서 거기 들어가니까 식은 밥을 한 숟가락 끓여 주데요. 물은 한 그릇이고 밥은 요만큼 이지요. 밥 요만 큼 있는 것, 식은 밥을 퍽퍽 끓여서 서이 요만큼씩 그래서 김치하고 그걸 줘서 따뜻하니 그걸 마시고 화로를 얻어가지고 밤에 재에 올라간 거예요. 그때가 봄이에요. 봄이 아니라 3월 5일이야.


 


그런데 옛날에는 어떻게 추웠는지 57년도 3월 5일 그때가 저 막은 56년도에 쳐가지고 한나 어머니가 사시고 한해 겨울에 비워놨다가 57년 3월 5일 날에 여기 들어오는데 그때 한강이 얼었어요. 영하 17도로 내려가고 한강이 얼어서 한강도 걸어가고 그랬는데 그날따라 얼마나 추운지 뜨거운 물을 좀 얻어 마시고 화로를 하나 얻어왔어요. 요만한 화로를 얻어서 그래서 이고 지고 갖고 오는데 산속으로 들어가니 가을에 쳐놨던 풀막이 요렇게 생겼어요. 기어들어가는 거적 대기 요러고 들어가고 닫아. 내리면 덜렁덜렁하고 밀려버리고 들어가고 그랬는데 한나 어머니가 얼기설기 방을 놔놔서 연기는 들어와도 불을 때면 요만큼 두 사람 앉을 만큼 그런데 아주 밤에 불을 좀 때고 거기 앉았는데 세상에 뼈가 저려서 죽겠어요.


 


이불이 있을까 뭐가 있을까 옛날에는 내복도 없이 목 받을 해서 요만큼 한 것하고 막 그때는 옷도 없어요. 입고 벗고 딱한 벌 손에 들면 한 벌 입어서 한 벌 손에 들면 그만이야. 전라도는 따듯하니까 그렇게 살았는데 서울 오니까 어떻게 추운지. 서울 어머니 동생이 탄일이라는데 그 아래 56년도에 탄일이 돌아왔는데 우리 식구들 버선을 한 켤레씩 해준다고 그래요. 그래서 나는 벌리기 어려운 입을 벌려서 나는 몸빼 하나, 옷이 없어서 몸빼 하나 해줬으면 쓰겠다고 했어요. 몸빼 하나 해줬으면 쓰겠다고 했더니 버선은 그만두고 발은 얼던가 말든가 버선은 그만두고 입어야 사니까 그래서 광목 몸빼 하나를 얻었지요.


 


다른 사람은 버선 얻어 신는데 그래가지고 그 몸빼 하나 얻어 입고 여기 들어와 가지고 그것만 입고 아주 이 막 속에서 이런데서 바람이 들어와서 뼈가 저려요. 아무것도 뭣도 못해. 어찌 추운지 그때 걸인들 생각을 많이 했어요. 그때야 걸인들 동정을 한번 해봤어요. 그때 하루저녁 뿐 아니야, 계속이야, 아무리 나무 해다 불을 때도 바람이 들어오니까 너무 추운 데라서 눈은 그해따라 3월 달인데 어떻게 많이 오는지 눈이 풍풍 빠지고 아이고 세상에 어머니들이 그 이튼 날 서울 어머니가 서울 가서 이불하나 얻어다가 그 커다란 어머니들이 두 분이 이불하나 덮고 아랫목에 누웠으면 나더러 누우라고 하는데 그때는 어머니들이 얼마나 어려운지 요러고 손도 못 넣겠어요.


 


 얼마나 어려운지 어머니들이 두 어머니들은 참 엄해요. 그리고 내가 워낙 어른들한테 함부로 안하는 사람이 되어가지고 어른들 조심을 얼마나 했던지 손만 이불 끝에 요러고 넣고 밤새도록 앉아있는 거예요. 잠을 못자고 너무 추워서 잠을 못자고 그런데 어머니들은 따뜻하니까 조금 주무셔. 그러면 그 막에서 가만히 앉아있어. 밤새도록 그러기를 한 눈 거의 다 올 때까지 그렇게 떨었어. 그래도 춥다는 말 한마디도 못하고 낮 되면 날이 새면 산에 가서 나무나 하고 또 해 가지고와서 불이나 때고 먹을 것이 없으니까 쑥 한보따리 얻어갖고 간 거 그거 삶아서 너무너무 도랑에 가서 씻으면 손이 달아나 버리려고 그래요.


 


주걱하고 바구니하고 가지고가서 이렇게 흔들어서 하고 그 쑥만 밀기울 사다가 쌀도 다 떨어져 버리니까 서울 가서 밀기울 옛날에는 왜 그렇게 밀기울 밀가루(말분)이였나 모르겠어요. 까끌까끌한 밀가루를 사다가 그 쑥국을 끓여놓으면 아휴 세상에 짐승도 안 먹을 거예요. 그런 걸 한 숟가락 씩 먹고 그 하도 그러니까 어디 동네사람 따라가서 하루아침에 나가서 저녁에 밤에야 들어왔어요. 콩 한말 팔러가 가지고 지금 저 광탄인데 걸어가서 동네사람 따라가서 콩을 한말 사다가 그것을 벤또 뚜껑에 불때가지고 볶아서 딱 한자 반 씩 그것도 먹고 그러고 한나 어머니는 조금 살고 이 선생님이 불러서 나가버리고 셋이 그렇게 살다가 


 


한) 누구하고 셋이?
박) 한나 어머니하고 혜옥씨 어머니하고 나하고 셋이 살다가 팔일 사니까 이 선생님이 오시라고 하면 가셔야지요. 한나 어머니 나가셔 버리고는 한나 어머니 나가시기 전에 눈이 엄청 많이 왔는데 동네 깡패가 들어왔다고 그래요. 깡패가 들어왔다고 그래요. 그 산속에 사람이 있다는 소리를 들었는가 하루는 눈이 펑펑 쏟아지는데 깡패가 한사람 노래를 부르면서 올라오데요. 그래서 나는 인제 어머니들이 계시니까 막 속에 가만히 이불 둘러쓰고 앉아있는데 서울 어머니가 나가셔서 별소리를 다 물어보고 그래서 서울 어머니가 대답을 하다하다 한나 어머니보고 나가시라고 한나 어머니가 말씀을 잘하셔서.


 


인제 그 사람은 돌아갔는데 그때 한나 어머니가 나가시기 전에 저 때문에 공순이 때문에 저 아래다 땅을 사서 집을 지어야겠다고  그러시데요. 집을 지어야겠다고 그러시면서 그때 또 저도 나이는 얼마 안 먹었지만 그때  배워진 건 서울 어머니가 이야기를 하다가 들어오셔서 한나 어머니한테 나가서 말씀 하라고 하시니까 나가서 말씀하시고 간 다음에 보내놓고 들어와서 서울 어머니를 어떻게 야단을 하시는지 자기 일은 자기가 책임져야 한다고 그때 그래서 많이 생각 했어요. 많이 배웠지요. 저런 어른들도 저렇게 했는데 참 기도하는 마음이 많이 있었어요. 그런데 그 산속에 가서 사는데 한나 어머니 나가시고 서울 어머니 서울에 가시면 그 산속에 저 혼자 산속에가 있지요.


 


그런데 이 동네 사람들이 그때 가난해 가지고 산에 나무를 다 깎아 팔아먹어 버린다고 남자 청년들이 전부 나무를 하러 들어오는데 그런데 어쩐지 하나님이 이 산속에다가 나를 하나님이 품고 있는 것 같아. 그때 아주 하나님이 나를 버리시지 않고 딱 안고 있는 그런  기분이 지금도 못 하겠데요. 그런 생각은 하나님이 나를 탁 안고계신 것 같아. 원장님도 그러셨답디다. 광주에서 설교하실 때 세상에 젊은 사람을 시베리아 벌판 같은데 갔다가 거기가 어디라고 놔 두냐 고 뭐라고 했다더만 그랬는데 하나님이 나를 싸준 것 같아. 하나님이 그래서 그 청년들이 우리 막 친 데가 양달이라고 양지쪽으로 점심 먹으러 오데요. 그럼 바짝 막 옆이에요.


 


그러면 나는 그 안에서 성경을 보다가 앉아있는 게 안 되겠다. 나가서 나무라도 가져오자하고 산으로 저쪽으로 올라가서 보면 청년들이 어쩌다가 노래를 한자리씩 불러요. 그렇게 노래도 심한 노래도 안 부르고 그래서 그때 하나님이 그 입을 막아주시고 말이라도 나쁘게 한자리도 안하고 그래서 내가 하나님이 품고 있다고 느꼈어요. 말을 낳으면 제주도로 보내고 사람은 서울로 보낸다더니만 과연 전라도에서는 아니꼬운 것도 어렸을 때 많이 보고 그랬지만 젊은 사람 지나가면 그냥 안 지나가지 않아요. 괜히 시비를 걸고 그러는데 그 산속에가 그렇게 젊은 사람이 혼자 있는데 그렇게 안하는걸 봐서 하나님이 나를 품고 있고 과연 서울 사람은 서울 사람이다.


 


내가 그런 걸 느꼈어요. 그리고 사는데 그래가지고 그 몸뻬 하나 얻어 입고 들어간 거는 꼬랑지 안으로 위로 집을 지으려고 일본 사람들이 옛날에 밤나무 심는 사무실을 했다고 바위 돌도 이 것 만씩 해. 그런 것이 척척 걸쳐서 쌓아놓은 담이 33년 되었데요. 그 담이 그런데 그 담에다가 인제 조금 흙 이기고 아카시아를 그 담에다 걸치지요. 그렇게 해가지고 그걸 지으면서 그 막에 살면서 나라 땅에 그걸 지으면서 동네 청년 둘을 얻어서 아카시아 베어다가 걸치고 지붕을 만들어 달라고 해. 그걸 하는데 내가 다 독 쓸어다주고 흙 이겨주고 물을 여기서 퍼서 거기까지 올려야 되요. 저기 도라지 밭을 거기 올려서 다 해주고 내가  못 다해 주면 그 사람들이 우두커니 앉아있어요.


 


도와줄 생각도 안하고 그리고 자기들이 할 일만해, 하고는 내가 미처 못 하면 다 해주도록 기다려. 그래가지고 여기다가 집을 풀 위에다가 이고 아카시아 해서 살다가 그 막 속에서 살 때에도 하루 저녁에는 어머니들 두 분이 한나 어머니는 광주 가시고 해남 어머니라고 그분이 오셔서 서울 어머니하고 마을에 나가셨는데 밤 12시가 넘어도 시계도 없으니 12시인 줄 몰랐는데 12시가 와서 보니까 12시라고 그러대요. 서울 어머니가 손목시계가 그때까지 산속에 있어요. 그래도 무서운 걸 모르겠어요. 하나님이 싸준 것이 그때는 그렇게 믿어질 수 없어요. 이 안에다 집을 지어가지고 맨 처음에 어린 학생들이 한반 들어왔어요. 여기 내려와서 살 때 정 원장님 딸이 어린 학생들 맨 처음에 한반 데리고 들어오고 그리고 그 다음에


 


사) 어린 학생들 올 때가 그때가 몇 년도 인가요? 
공) 57년 가을인가 된 것 같아요. 그런데 학생들이 먼저 들어온 거 어린사람들이 먼저 들어온 것도 같고  조금 더 위에 학생들이 모여들은 것도 같고 여름에 왔는데 열 몇 명이 들어왔는데 그 사람이 여기 금순 언니 또래인데 막이 집이라고 지어놨는데 여름에 비가 오면 위에서 비가 오면 방에서는 큰비가 와요. 보따리 하나를 이리 옮겼다. 저리 옮겼다. 그리고는 쑥을 끓여서 모두 바가지니 그릇도 없으니까 바가지니 뭐니 들고 비 안 새는데 가서 이러고 붙어 서서 마셔요. 죽을, 그러고 좁은데서 살면서 그래가지고 인제 살면서 저 혼자 있을 때는 그 몸빼 하나 얻어 입은 것이 다 몸에서 녹아서 가버렸어. 어디로, 그때 꾀매다 꾀매다 못해서 몸에서 다 녹아져 없어져 버렸어.


 


이 동네는 남자들을 하나도 안쳐다봐서 누가 누군지 모르는데 그것은 인제 뒤에 일이고 그래가지고 한명 두 명 그렇게 모인다는 것이 한 4-50명 되어요. 어떤 때는 50명도 더 되어요. 서울에서 식구들이 모두 권사 집사 그런 분들까지 오면 우리식구들 원 식구만 한 40명 되어요. 그런 분들도 오셔서 자고 그러면 한 50명도 되고 그 집은 없어서 그렇지, 사람들이 와서 자고 그래가지고, 요 아래 또 집을 지어가지고 위에서는 그렇게 살면서 맨 처음에 제가 개간한 것이 이거에요. 밤 밭 밤나무 서있는데 거기가 다 산이었거든요.


 


그래서 나무 큰 것 치고 그걸 개간해서 닥을 심어가지고 그렇게 하고 학생들 들어와서 먹을게 없어가지고 고양동에 가서 그 돈은 서울 어머니한테 돈이 옛날에 가정에서 사시면서 믿는 사람 오는 사람 밥 해주려고 두주머니를 찼대요. 그래서 집안 가족들 중에서도 저 여자는 두 주머니 찼다고 그런 말도 듣고 그랬는데 두 주머니를 차고는 내가 언제인가 잘 믿는 사람들 길거리에다 집을 짓고 갈데없는 사람들 밥을 해 주겠다고 그 돈을 모았는데 당신 돈을 보태가면서 수가 워낙 많으니까 죽을 먹어도 30명이라도 하루에 90그릇인데 이 동네사람이 감동을 해요. 동네 사람들이 봄만 돌아오면 배급받아 준다고 난리에요.


 


우리가 못 먹는지를 한 홉에서 반 홉씩 절제해가지고 동네사람들 나눠주고 그랬어요. 굶어 죽는다면 그 죽는다는 집에 먼저 쫒아가서 한바가지 갖다 주고 그렇게 하고 어디를 가려다가 잊어버렸네.
사) 그러면 그 이야기는 조금 있다가 다시 하시고요. 한 집사님 여기 오셨을 때가 몇 년도라고 그러셨어요?
한) 65년도, 어머니 세상 뜨던 날. 
공) 그해지요. 그해 사셨잖아요? 소 기르고 남반에서


 


사) 중간에 건너뛰어서 안 되겠는데 한 집사님 만나 뵐 기회가 많지 않으니까 한 집사님 여기 그때 오셨을 때 그 이야기를 먼저 할까요? 지금  한 집사님 이야기를 먼저 할까요?

박) 한 집사님 소 키우고 남반에서 산 이야기를 한번 하시지요.
한) 인제 그것이 어떻게 되었느냐하면 여기 이야기만 하려니까 그렇지. 능곡 이야기부터 할까요? 능곡 아니 지금 남반에 와서 살 때는요, 능곡에서 살다가 내려가 함평에 가서 살다가 그 어디냐 하면 군대 갔다 와서 함평에서 살다가 내가 함평에서 지쳤다고 할까? 애기들하고 한 40명 식구가 살았었는데 지쳤는가? 쉬러온다고 왔어요.


 


사) 능곡으로?
한) 아니 여기 남반으로, 65년도 그래가지고 거기 와서 농사하면서 여기 소를 밭 갈아주고 그런 일 했지요.
박) 아니 65년도인가? 그게  선생님 64년도에 가셨으니까 65년도  맞아.
한) 그래가지고 사는 이야기하고 또 떡 번지, 그런 거 되면서 크게 만드는 일도 하고 왔다  갔다하면서 1년을 살았지요. 여기서 그러다가 1년 살다가 또 함평으로 내려갔어요. 그 다음해 또 뒤에 그 다음해 윤 씨 온 다음에 여기 와서 또 1년 살았어요. 한나 씨 어머니 방에서 농사하면서 호박도 심고 저 건너 논에다가 채소심고 그런 그 다음해니까 윤 씨


 


박) 1983년이야. 1984년도에 오셨어.
한) 네, 그때 와가지고 여기 한나 씨 어머니 방이라고 떠내려갔어요. 그 방에 가서 자면서 한 1년 살면서 농사 했어요. 큰 밭에 호박도 심고 또 저쪽 공동묘지 밑에 논 서마지기 있는데 거기다 채소도 심고 그래가지고 채소를 그때 7월 8월달 그럴 때 뽑아서 팔라고 했는데 서울에 나갔다 오니까 수해가 나가지고 다 논 가운데로 채소가 다 떠내려가 버리고 없데. 나는 팔려고 강원도 길이 막혀가지고 못하니까 그걸 팔려고 왔더니 싹 날아가 버리고 그런 일을 당하고 그랬지요. 그 다음으로 내가 맨날 왔다 갔다 하면서 일을 해줬지요. 서울 올라올 때마다 그런 저기하고 어떻게 나를 저기를 잡아서 이야기를 못해요. 


 


사) 그때 생각나시는 거, 여기서 생활 하시면서 보신 거라든가 뭐 그때 소를 한 마리 길렀습니까? 
한) 예, 여기서 소를 한 마리 항상 길렀고 여기서 일은 쟁기질은 왔다 갔다 하면서 해주고
공) 남반에서 기를 때 김 선생님이 있었지요. 
한) 내가 살 때는 그랬고 내가 갈월에서 살 때는 왔다 갔다 하면서 쟁기질 해줬고. 그런데 인제 무엇이라 할까? 식구가 여기서 많이 살 때는 실을 사다가 쑥떡 베, 그걸 내다가 팔고 그랬어요. 식구가 많을 때는 아현 교회 김 현봉 목사님 한복을 입으니까 거기서 베를 많이 사다가 쓰고 나머지는 최 씨 어머니라고 그 양반이 저 광탄 어디로 해서 가지고 다니면서 팔고 그런 게 있었고 그런 걸 내가 봤다고. 


 


사) 그때 예배 같은 건 어떻게 보셨어요? 
한) 예배를 꼭 하루에 두 번씩 드렸지요. 저녁에 하고 아침 새벽에.
사) 저녁하고 새벽에요? 새벽 다섯 시 하고?
한) 네 시에요. 일요일 날은 세 번이고.


 


네 시에 드려요. 일 하려니까 네 시에 드려요. 여섯시에 밥 먹었어요. 군대식 이었어요. 
박) 그렇게 드리는 건 할머니들이 딱 네 시면. 네 시에 드리고, 저녁에 드려 .
한) 몇 시라고는? 꼭 저녁에 드렸어요. 몇 시라고 불수는 없어요. 일을 하니까요. 아주 뼈 빠지게 일을 하니까
박) 일찍 끝나든가 늦게 끝나든가 일이 끝나고 그 식구가 다 식사가 끝나야 되니까 
사) 그때 예배인도는 누가 했어요?


 


한) 돌아가면서 해요. 우리 이 예배 인도자가 없어요. 선생님들이 오시면 하고 각자가 사는 식구의 한글을 알던 모르던 자기가 찬송을 선택하고 성경을 어디 읽자고 하면 돌아가면서 읽도록 딱 해놓고 그럼 다음 순서로 읽으니까, 그런 식으로 했지요. 선생님들 오시면 선생님들 말씀 듣고 
사) 그럼 예배는 한 30분 정도 드리겠네요?
한) 때에 따라서는 수가 많을 때는 한 시간도 좋고 보통 한 시간이고 식구가 적을 때는 30분이면 할 적도 있지만 거의가 한 시간 이에요. 
사) 그럼 말씀 읽고서 설명도 하시고요?


 


한) 아니 설명은 거의가 없지요.
박) 그때는 옛날에는 두 어머니들이 게시니까 이제 당번이 돌아가면서 예배를 드리면 옛날에는 사람들이 순진해 가지고 사는 생활이 그 깨끗해 가지고는 그렇게 각자 예배 당번이 돌아오면 잘하던 못하던 누구는 보면 특별히 찬송 성경을 적당히 잘 하시고 참 은혜스러워요. 그럼 인제 그때 당번이 돌아가면서 찬송을 부르고 성경을 보고 그러고 나면 어머니가 설교를 하세요. 성경 뜻을 가르쳐주고 정 한나 어머니 씨가 .
한) 그리고 각자 돌아가면서 때에 따라서 각자 오늘 뭐하고 살았는지 이야기하고 생각도 같이 나누고 그럼 낮에는 점심때는 예배를 안 드리고.


  


사) 예, 식사는 세 번 아침 점심 저녁 하시고요?
박, 한) 세 번, 두 때먹고 살 때도 있었고.
한) 세 번 식사를 한다고 해야 지금 반 끼니 먹는 만큼도 못할 거예요. 
사) 원장님 계속 말씀 하시겠어요? 그런데 여기에서 능곡 이야기도 같이 포함되어야 할 것 같아요. 능곡 이야기를 누가 할 사람이 없을 것 같아요. 원장님 오시기전에 능곡은 벌써 있었던 거지요?
박) 예. 


 


사) 몇 년 전에? 처음부터? 
한) 육이오 전부터 있었지요. 육이오 전부터 오 장로님 애기들 데리고 살았어요. 서울 학생이라고, 우리가 저쪽에서 말하기를,
사) 육이오 전부터요?
한) 예, 육이오 아주 직전이 아니고.
사) 맨발의 성자에 나오던데, 능곡으로 오게 된 이야기가 잠깐 나오던데. 
한) 예, 그 현 동완 선생님 그 집을 어떻게 선교사라던가 어떤 사람이 그 집을 사 줬다 던지 그래가지고 그 집을 근거로 해서 왔지요. 맨 처음에
사) 그게 육이오 한 2년 전쯤 되나요? 
한) 1년 전인가 2년 전인가 잘 모르겠어요. 그것을
사) 그런데 육이오 전에 거기 한참 살았나요?
한) 육이오를 거기서 만났어요. 오 장로님이랑,
박) 그거 아는데, 육이오 전 전에 한참 살았는가 모르겠어.
한) 한참 살았지. 왜냐하면 금남 언니랑 대충 알거에요. 금남언니랑 와서 밥 얻으러 다녔대.
사) 아 그 탁발수도 하던 그때?
한) 예, 그거지요. 거기서 했지요. 그러니까 그런 분들은 몇 년도인가 알려는지 몰라.
사) 그 이후로 한 집사님이 몇 년도에 능곡에 오셨어요? 
한) 나는 육이오 후에 한참 후에 왔어요.


 


사) 그때도 남반 따로 있었나요? 육이오 후에 능곡에 따로 계시다가 여기 가끔 오셔서 도와주시고요?
한) 예, 그것도 그랬지만. 나는 그때 가서 육이오 후에는 어떻게 되었냐하면 인제 광주에서 걸인 애기들을 좀 데리고 있었어요. 신입반이라고 원장님이 이름을 지어줘 가지고 그 사람들을 데리고 여기를 오는데 따라왔습디다. 시내로 나가서 극장 앞에서 어디 담요를 뒤집어쓰고 밤을 모르고 그렇게 살았는데
사) 왜 밤을 지냈어요?


 


한) 집이 없으니까. 그놈들이 나가자고 하는 거예요. 얻어먹던 습관이 되어서 농촌에서 일 안하려고 나가자는 거예요. 그래가지고 나갔어요. 같이, 그래가지고 다 어디로 흩어져버렸어. 도로 광주로 내려가 버렸어. 광주가 좋으니까 그래서 나 혼자 굴에서 살았지요.
사) 어디 굴이요? 
한) 신촌 굴. 신촌에 쌍 굴이 있었는데 그때는 육이오 때 폭격을 해버려 가지고 그 가운데가 무너져버렸어. 하나밖에 사용을 못해. 제가 그 굴을 찾아가가지고 거기서 저기를 했는데 거기서 인제 뭐이냐 하면 얻어다 먹는 것이 아니고 광주에서 고 슬빈 씨라고 그분이 채소를 주워다 먹어요. 그리고 치즈라고 깡통에 담아서 내놨는데 그것을 먹다가 그것이 곰팡이가 나면 탁 엎어버려요. 그러면 노란 게 나와요. 그놈 가지고 채소 주어다가 고놈 넣고 끓여버리면 아주 고급 뭐가 되어버려요. 그런 것도 주워다 먹고 그때는 밥덩이를 내다 버렸어. 흰 밥 덩어리를, 그러니까 땡땡 얼어가지고 서울은 그러니까 그런 거를 주어다가 넣고 콩나물 꼭지 주어다 넣고 그런 거 끓여먹고 서울 신촌 굴에 사는데 그때 겨울이야. 추울 때 얼마나 춥던지 잠이 안와요. 그럼 가마니 떼기 하나 주어다가 뺑 돌려 쳐놓고 숯덩이 하나 주어다가 깡통에다 불 피워놓고 가만히 있어. 발 시려 우니까 헝겊 데기 주어다 동여매, 무릎도 동이고 그때는 통행금지가 있으니까 네 시만 되면 막 돌아다녀요. 그런 식으로 그때 지내다가 나중에 움막을 가마 데기로 주어다가 쳤어요. 움막을, 들어가지도 않았는데 어떤 나환자들이 들어와 가지고 찾아왔어요. 그때는 나환자를 수용할 때야. 그런데 무엇이냐? 그 사람들을 거기다 재웠어요. 재우면서 예배를 보고 그랬어요. 그 사람들 어디 수용소에서 왔답디다. 그 사람들이 하는 말이 피가 같으면 자기들하고 같이 살았으면 좋겠다고 했어요. 나는 그런 사람들하고 같이 살라는 목적이 아니고 예수님이 나환자를 낫게 해 준 데를 읽어주면서 그랬지. 그런데 인제 나보고 아침마다 춥지 않느냐고 문안을 와요. 그러면 애기들 딸 둘이 졸졸 따라다니고 그래요. 그러고 거기서 한참 살았는데 애기들이 구정이 돌아왔는데 둘이 옷을 좋게 입고는 세배를 한다고 왔어요. 이놈들 거지한테 세배하는 법이 어디가 있냐고 하니까 거지라도 세배하니까 괜찮아요. 내가 전부 구정이 돌아오니까 그러고 나와 있어. 그런데 아주 좋아가지고 가마떼기만 주어다 쳐놓으니까 좀 낫데요. 그래서 그 다음에는 뭔 사람들이냐고 이만저만 해서 있다고 보내라고 하데요. 굴지키는 사람이 나는 괜찮지만 그 사람들이 있으면 자기가 걸린다고 그래서 가라고 그러고 한참 사는데 희옥 씨 어머니가 최 씨 어머니가 능곡을 찾아왔다가 내가 거기 산다하니까 거기로 찾아왔어. 두 분이 그때 처음으로 봤었지. 그래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데 거기서 살다가 한참 살다가 깡패를 만나버렸어. 학생 깡패라고 학생복 딱 입었데요. 그런데 때리면서 성경책도 다 뺏어가 버리고 또 꼬마들도 내가 많이 데리고 있어서 주위에서 동냥시켜서 먹는 줄 알고 앵별이 몇 명 잡았냐고 해서 하나도 없다고, 그러고 나니까 거기 살기가 싫어요. 그래서 내가 여기 가야지 못살겠다고 그 사람들한테 두들겨 맞아서, 희옥 씨 어머니하고 최 씨 어머니하고 동대문 그쪽으로 가면 굴이 있다고 가보라고 그래요. 그래서 거기를 한번 가봤어요. 가보니까 누가 하나 살고 있어 버리고 마땅치 않아. 그래서 도로 가는 거예요. 도로 내 가고 같은 거 짊어지고 가다가 종로 경찰서에서 잡혀 버렸어요. 기피자라고 머리를 이만큼 길렀는데 거기서 머리를 빡빡 깎아 가지고 군대를 보낸다고 보내버렸어. 그래서 종로 5가에서 걸려버렸는데 거기서 며칠간 살았지. 기피자 잡힌 사람들 하고, 그런데 전부다 신사들이고 나 같은 사람은 한명이나 두 명이나 되는 것 같아. 나는 금식을 해버렸지. 위장이 약해서 밥을 못 먹는다고 그리고 성경책을 딱 들고 갔지. 인제 그 사람들에게 뺏겨버렸는데 나중에 다시 사가지고 가니까 신체검사를 한다고 그래요. 며칠간 밥 못 먹으니까 순경들 마음대로 해. 이 환자가 밥을 못 먹고 있는데 죽이라도 끓여야지. 나중에 큰소리치면서 순경들 마음대로 해. 방송이고 어디 그런 사람들이 와가지고 그래가지고 아 나 이번에 군대 가서 큰 차 몰고 어쩌고저쩌고 하더니 신체검사 성동경찰서가서 일부 했어요. 훈련 가기 전에 그렇게 하니까 나는 거기서 다 그 사람들 떨어져 나가지요. 말만 그러지, 그때는 자유당 시대라 조금만 손써버리면 다 빼주고 그래요. 그런데 나도 거기서 떨어졌어요. 뭐냐 하면 떨어져 가지고 보낼까 말까 하다가 어떻게 나가라고 그러더라고. 그래서 나오니까 종로 경찰서 계장이라든가 순경이 성경책 들고 다니면 다냐고 회개를 해야지. 큰소리를 치데요. 나가가지고 도로 그리로 가가지고 인제 그 굴에서는 살수가 없어서 그 굴지키는 양반한테 어디로 옮겨 갈라는데 이만 저만 신촌 쪽에 나가면 기차 대가리를 거기 가보셨소? 이 선생님 인제 거기에서 살아요. 거기서 한참 살았어요. 
사) 그 생활을 한 1년 가까이 하셨나요? 그 굴에서 사시고 그런 게?
한) 1년 더 살았는지 몰라요.
사) 그때는 신앙생활은 어떻게 하셨어요? 
한) 나 혼자 성경보고. 
사) 예배드리거나 자체예배?
한) 그런 것도 없고 혼자서 능곡이나 가면 주일날이나 가면 혹시 가끔 다니니까 그러면 몰라도 나 혼자 성경보고 뭐 일요일 따로 없어요. 항상. 
사) 그런데 신앙생활하고 그 굴속에 사는 것하고 어떻게 관계가 있습니까?
한) 밑바닥 인생 공부. 그때 당시 내가 돈을 벌었다하면 벌었는데 ‘돈은 일만 악의 뿌리다’라는 그런 것을 동광원에 와서 배웠어요. 그 전에 돈을 벌어야 하는데 배우지를 못해서 돈을 벌어야 된다는 머리를 갖고 내가 노력 하다가 이 동광원을 만나가지고 돈을 벌면 안 된다는 거야. 못쓴다는 거야. 인제 물들어 버렸어 내가 그때 땅을 샀다면 하루 열 평도 사. 하루 천원도 고물 주워서. 그런데 땅 한 평에 백 원씩 했어요. 그때 아현동에 그런데 그걸 못 쓴다는걸 알고 안 해버렸어요. 일절, 그래가지고 하고 있는데 거기서 얼마큼 살다가 인제 광주에서 한바탕 살았고. 또 서울에서 한바탕 사니까요. 부산을 한번 가고 싶어요. 부산을 갈라고 머리를 이만큼 길러가지고 갈라고 생각을 하고 능곡에 가서 말해버리고 부산으로 간다고 말하러 가니까 이 선생님이 와계세요. 후두 결핵 걸려가지고 말도 못하고 거기 계신데 필담으로 인제 은현 씨라고 총무님이 있었어요. 그 양반이 필담으로 말을 잘 받아써요. 속필이라. 그 양반한테 써 가지고 가자는 거예요. 이 선생님 오신 거 생각도 못하고 말하러 왔다가 엉뚱한 다른 일이 생겨버렸지요. 한마디로 말하면 거기서 역전이 상당히 멀어요. 능곡에서 어떻게 해서 당가를 만들어야 한다고 어쩌고 그런 걸 떨쳐버리고 내가 업고 갔어요. 업고 능곡역에 가서 거기서 신촌 역에 와가지고 신촌역에서 굴이 상당히 멀어요. 거기까지 업어다가 모셨지요.
사) 그게 몇 년도였지요?
한) 그걸 내가 모른다니까 그것을.
사) 돌아가시기 훨씬 전에?
한) 예, 훨씬 전이지요. 그걸 잘 몰라요. 그때 당시 굴에 오셔가지고,
박) 55년이나 되겠소. 내가 56년도에 올라왔는데 신촌 계실 때가 55년 54년 그 근방이야.
한) 거기 오셔가지고 무엇이 문제가 되었냐하면 아주 열이 불덩이같이 올라버렸어요. 얼음을 넣으면 녹아 버리고 녹아버리고 그랬어요. 그런 적이었는데 무엇을 알아냈냐하면 파계를 했지. 고기 같은 거 안 먹고 약도 안 먹고.
사) 그게 그때에요?
한) 예, 그게 그때에요. 내가 인제  심부름 했어요. 맨 처음에 예, 거기 오셔가지고 나를 희옥 씨 어머니가 돈을 댔어요. 그때 여기 계시다가 오셔가지고 무엇이냐 하면 꽁다리를 사가지고 온 거야. 조기 말라버린 거, 그것을 사다가 깡통에다 솥단지도 아무것도 없으니까 깡통 시꺼먼 깡통에다 끓여가지고 그놈을 놓고 기도를 하셨다는 것이야. 하나님의 뜻이면 넘어가게 해주시고 뜻이 아니면 머금고 나를 데려가 버리시오. 기도를 하고 먹었는데 넘어가버렸어. 그러니까 또 살았어. 지금 같으면 그 양반이 다 못 먹게 한다고 하는데 그걸 갔다가 의심하나도 없어요. 어딘지 모르게, 그래가지고 사람은 살고 나중에 몇 번 사오고 소 등심을 사오라고 하시더만 등심을 사가지고 조금 끓여서 마시고, 마시고 조금 수월해지는 것이 생겼어. 그래가지고 나는 원장님이 오시니까 동광원에서 나를 쫒아 내라고, 그러기 전에 거기 있는 사람한테 다 말을 다져봤어요. 인제 지금까지 고기 못 먹고 약도 못쓰게 했는데 그런 일을 해버렸으니까 필담으로 다 받아봐 그래서 다른 사람은 어떻게 말했는지 몰라. 나는 사람보지 않겠습니다. 그랬어. 성경 볼 줄 알고 믿은 줄 알았으니까 어디가도 하나님 계신 거 알았으니까 그 믿고 살겠습니다. 그런 뜻으로 했어. 다른 사람은 어떻게 말했는지 몰라요. 그런 저기를 했는데 원장님이 오시니까 나를 동광원에서 쫒아내라고 하십디다. 정 인세 원장님이 오시니까 이 선생님이 나를 동광원에서 쫒아내라고 그런 이야기를 하시면서 뭔 말씀 하시는가 하면 나를 김 상돈 장로님이라고 그전에 마포구 국회의원이었거든요. 그 교회를 보시게 되었어요. 원장님이 김 상돈 장로님 교회도 맡아서 보시게 되니까.
박) 새 가정교회.
한) 새 가정교회, 그 교회를 맡아서 보셨어요. 그러니까 말을 해가지고 땅을 빈터 하나 사가지고 나를 그곳으로 옮겨주라고. 그래서 거기 천막치고 옮겼어요. 오 장로님도,
박) 산 7번지. 
사) 여기 어디에요?
박,한) 서울 아현동, 다 없어져 버렸지요. 지금은, 그때는 올라 다니지도, 신촌역에서 가면 이렇게 깔막으로 올라가요. 산꼭대기. 그런 저기로 거기다 옮겨가지고 거기다 천막을 치고 방을 드리고 거기서 한바탕 살았어요. 갈보리 어머니 금남 어머니 하고 한바탕 살았어요. 원장님이 그때 거기 교회 볼 때, 거기서 밥도 해드리고
사) 한 1년이요?
한) 교회는 몇 년 보셨을 거예요. 내가 살기로는,
사) 이 선생님 사신 게?
한) 이 선생님은 안사시고 그렇게 내가 살았다니까요. 내가 갈보리 어머니하고 나하고 살다가 갈보리 어머니 가시고 나 혼자 거기서 살다가 나중에 누가 살았냐하면 교회 집사님이 있었어. 이 집사님 이라고 그 분이 그 집에 살았어. 내가 한참 살고, 그런 저기를 하면서 문제를 제기하시고, 그때당시에 김 준호 선생이 같이 있었어요. 그때 굴에 그런 환경 목격 다 하고, 오 장로님도 오셔서 계시고 한나 씨 어머니도 와서 조금 계시고 왔다 갔다 했어.
사) 신촌 굴에요? 
한) 예, 거기 말했던
사) 서울어머니도 같이?
한) 예, 모두 와서 왔다 갔다 하시면서 했지. 그리고 거기서 저리 옮겨 가가지고 거기서 김 준호 선생을 서울 어디에다가 입원을 시키려고 안식교 인천에 무슨 병원이 있던지 결핵 환자 수용 안 받아 준다고 또 입원실도 없다고 광주로 빨리 연락을 해서 제중병원에 되어가지고 그때 내려가서 같이 입원 하셨지. 지금까지 인제 그 고기는 그렇게 해주면서 우리의 공로로 구원받는 거 아니고 예수의 피로 이렇게 구원받는다고 그런 하시면서 지금까지 내가 잘못했다는 식으로 그 아픈 사람들은 고기도 먹고 약도 써야 하는데 그 춥고 보대끼고 하는데 그 잘못했다는 식으로 하시면서 내려가셔 가지고 파계를 하셨지요. 그런 저기를 뭘 어떻게 이야기를 해야 하는가?
사) 아현동 사시다가  동광원으로 다시 들어가셨어요?
한) 나요? 그렇다고 봐야지요. 능곡에 가서 한 1년 살다가 또 내려갔다가 여기 온 거는 군대 갔다가 한참 뒤에 라니까요. 군대 가기 전에 그렇게 왔다 갔다 한 거예요. 기피자 시절에, 
사) 능곡에 한 1년 사셨어요?
박) 아니요. 56년도 11월 달에 올라와 가지고 그해 겨울 지내고 그 이듬해 3월 5일 날 여기에 왔지요.
사) 아 능곡으로 57년 3월 5일 날 계명산에 들어오시고 예,
박) 세 두 어머니 모시고 같이 들어와서 살다가 아까 이것 말하려다 여기다가 막처럼 하나 지어놓고 여기 내려와서 사는데 그 4-50명 식구가 어떻게 식구가 많아가지고
사) 그게 1년 뒤에 식구가 4-50명 된 거예요?
박) 아니요, 금방 금방 사람이 불었어요.
사) 어떻게 그렇게 불었지요?
박) 그래가지고는 여기 광주서 오기도하고 그래가지고 58년도에 떡 번지 개발했지요. 식구가 갑자기 몰려들기 시작하니까 인제 먹고 먹을 게 없어요. 그러니까 처음에는 몇 식구 모여서 사는데 먹을 것이 너무 없으니까 감자를 사다가 하지감자를 사다가 빵에다 쪄서 한쪽씩 먹고 죽으로만, 죽으로만 살고 그런데 차차 30명 40명 되는데 그것은 어떻게 먹느냐 하면 여기 서울 어머니 동생이 서울에서 합판 집을 하는데 부자거든요. 그 집에서 어떻게 우리 식구를 존경하는지 세상에서는 내 노라하고 사는 양반이 이집에 오면 요러고만 앉아 있어요. 그래가지고는 그 집에서 십일조를 한 달에 70만 원씩을 냈답니다. 그래가지고 그걸로 쌀 팔아서 조금씩 보태서 죽이라도 끓여서 먹고 보리도 그렇고 그래가지고 그 많은 식구가 식량이 너무 부족하니까 그렇게 먹고 살아도 쓰러지는 사람도 있고 개간을 시작을 했어요. 58년도에 개간을 저 산에다가.
사) 58년 봄부터요?
박) 예, 개간을 하기 시작해 가지고 금방 옛날에 절터라는데 4천 평을 개간을 하는데 나무를 막 쓰러뜨리고 개간을 했는데 거기다가 옥수수를 처음에 많이 심고 콩 팥 심어서 그걸로 주식에다 보탠 거예요. 쌀 조금 팔아다 놓은 거로.
사) 산도도 심고?
박) 예, 산도는 그 후에 몇 년 뒤에 심고 잡곡을 심고 그 해에는 옥수수를 많이 심어서 옥수수로 주식을 하고 그걸 말려놨다가 찧어서 도토리하고 같이 겨울에 밥처럼 그릇에 담아먹고 또 고구마는 심을 데가 없으니까 저런 밭 에다가 조금씩 심으면 아침에는 우거지 죽, 낮에는 우거지 밥이라고 해 놓은 것이 데굴데굴 밥 티 알은 어쩌다 보이고 저녁에는 고구마 하나씩 두 개씩 많이 먹어야 그렇게 먹고 잡곡만 하다가 한해에는 거기다가 4천 평에다가 벼를 심었어요. 산자락에 심어서 한 40가마니해서 내려오고 그렇게까지 못 먹어도 남의 도움 안 받고 죽만 먹으면서도 거기서도 또 절제하고 또 절제하고 거기서도 또 떼고, 떼고 떼어서 서울 삼각지 그런데 아는 집사님이 사는데 겨울이면 그런데서 배고파 죽는다고 난리데요. 옛날 세상에서는, 그것을 절제를 해서 모아서 놔두면 그런 사람들 갖다 주라고. 한번은 식사 당번이 화가 난거예요. 식구는 못 먹이면서 그렇게 한다고 화가 나서 그리 안 갈라고 미지 적 거리고 얼마나 혼이 나게 때리는지 그냥 해가 이렇게 다 넘어갔어. 그런데 서울 어머니하고 이 복순 언니하고 나하고 서이 그걸 이고 나간 거예요. 그 사람들 갖다 준다고 배고파 죽는다니까 갖다 줄라고 막 잔뜩 이고 나가요. 이녁 식구는 못 먹는 거 밤에 이고나가서 찾아가요. 거기가면 주 집사님이 사시더만. 이걸 배고파 죽는 사람들이 있다니까 줄라고 가지고 왔다고 시방 끼니를 못해서 굶고 앉아있는 사람도 있다고 그러고 막 반가워해요. 그러고 그걸 갖다 주고 집으로 돌아오고 그때는 한 40명 식구가 많은데 식량을 보리쌀 한 사람 앞에 반 홉씩 이지요. 그것을 주면 거기서 또 뗀다고요. 십일조를 그래가지고는 그걸 떼어가지고 주면 너무, 제가 창고에서 내지만 밑에 사람들이 식모 둘 데리고 식감이 있지요. 그 사람 둘은 매일 설거지하고 거기서 막 도랑가에서 장관이에요. 우거지를 쪼느라고 그러면 막 쪼는 소리가 난리에요. 그때는 도랑물을 그냥 먹었어요. 너무 식구들은 해주고는 싶고 먹을 것은 없으니까 한번은 곡식 내준 것을 부엌 앞에다 다 버려요. 화가 나서 남도와 준다고요. 먹을 거 없다고 이렇게 적게 준다고 먹이고는 싶고 화가 나니까 나한테 화풀이를 하는 거예요. 내가 곡식을 내주니까 내가 그럴 때 마다 내가 같이 그러니 저러니 하면 싸움이 되지요. 그러니까 그럴 때마다 하나님이 저에게 좋은 마음을 주셨지요. 내가 안 참으면 누가 참아 주겠어요? 어머니들 몰래 어머니들 나오기 전에 다 땅에서 줍고 했다고 그럼 누가 보고 와서 주어주는 사람도 있어요. 다 주워주고 어쩌겠냐고 하자고 그러지요. 그러면 자기도 그래놓고 후회를 하지요. 그렇게 해서 살고.
사) 그때 훈련 받았던 거예요? 40명 되는 사람이 와서?
박) 그렇지요. 전부 못 먹고 못 입고 밥만 먹으면,
한) 자기 집에서 아무것도 안하는 사람도 광주서 중학교 나오고 그런 사람도 여기 와서 나뭇짐하고,
박) 지게지고 산에 가요. 아침 먹으면 산에 가요. 그래가지고 너무 틈이 없으니까 산에 가서 바느질 할, 그때는 목면 옷을 입으니까 헤어지기도 잘해요. 그래가지고 바늘하고 헝겊하고 갖고 간대요. 산에 거기서 나무 얼른 해놓고 앉아서 꼬맨 데요. 꾀매 면 그러고 저 같은 사람도 그래요. 그때는 하나님이 잠을 안주셨는가 한시 두시면 다 깨요. 저녁에 11시까지 실 잇고 그래도 두 시간 자고 많이 자야 세 시간 자고 깨면 그때부터 일어나서 이것 꼬매 입어야 해요. 꼬매 입어야 일을 하지. 그 시간 아니면 할 수가 없어.
사) 초롱불 켜놓고?
박) 예, 초롱불 켜고 그 시간 아니면 할 수가 없지. 딱 시간이라는 건 그 것뿐이 없지. 새벽에는 네 시에 한동안은 한나 어머니가 완덕의 길이라고 이 선생님이 해 놓은 말씀이 있어요. 그걸 공부를 해. 그러면 세시에 일어나지요. 세시에 일어나서 한 시간 동안 예배시간까지 학생들 일어날 때까지 그 공부 한 시간 하고
사) 몇 명이요?
박) 큰사람들만 하니까 한 20명 되려는가? 학생들 어린사람들은 좀 더 자고 4시에 일어나. 일어나면 그때부터 또 실 잇는 거예요. 실이어요. 그리고 밤 11시까지 또 실 잇고.
사) 실 이어가지고 베 짜는 겁니까?
박) 예, 직접 짜지요. 실을 처음에는 삼도 심어서 그 삼도 한쪽에 있어요. 삼 심어서 솥에다가 세워놓고 저런 데서는 굴에다가 삶는데 솥에다가 해놓고 다발로 삶아가지고 삼베를 한동안 놨었지요. 그리고 목화 심어서 그것 가지고는 해당이 안 되니까 방직공장에서 목실 그런 거 한발씩 되는 거 그런 걸 남산 밑에 거기 옛날에는 찌꺼기 실을 파는 집이 있었어요. 남산 밑에 거기 가서 사다가 그것을 사러 가면 열 몇 관씩 스무 관씩 그렇게 사가지고 오면 그걸 다 풀어서 이어가지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