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일

꽃들이 활짝 : 숨은 성자 이세종

mamuli0 2020. 3. 25. 18:24

 춘분 지난지 오일 째 꽃들이 활짝 피었다. 비트와 양배추 정식을 마치고 토란을 심고 있다. 군청에 가서 상수도 신청을 하고 왔다. 코로나19로 군청 출입구에서 민원인이 대기하고 담당직원이 나와 일을 본다. 마스크 구입 주간 해당자 요일을 게시해 놓았다. 오는 길에 자동차 공업사에 들려 수리를 약속하였다.


  


 숨은 성자 이세종


  2004.08.18. 이덕주 교수


 두 분이 만났습니다. 1937년에 만났습니다. 그래서 이 두 분이 만났는데 그 만남을 중심으로 해서 한번 제가 글을 써봤습니다. 이 글은 제 독창적인 글은 아닙니다. 이것은 정 경옥 선생님께서 이 세종 선생님을 만나기전 만난 후 이분이 두 편의 글을 쓰셨는데 그 두 편의 글을 오늘 여러분과 함께 제가 읽으려고 나왔어요. 저는 사실 목사가 돼서 설교를 하기는 합니다만 목사가 너무 말을 많이 하는 것 때문에 이거 문제가 많은 것 같아요. 그래서 예수님도 누가복음을 보면 첫 번 설교를 하실 때 이사야 두루마리를 가지고 오라고 그래서 그 두루마리를 갖다 드렸더니 그 두루마리 가운데도 60장을 찾으셨지 않아요? 이사야 두루마리가 그 66장이 전체인데 그 60장을 찾으려니 요즘 같은 책도 아니고 이 두루마리를 풀어가지고 60장을 찾으려니 그게 얼마나 시간이 걸리겠어요? 저는 그 장면을 이렇게 머릿속으로 상상하면서 많이 반성을 합니다. 그러니까 두루마리를 60장을 찾기 위해서 두루마리를 풀고 한쪽에서는 감고 그 시간이 상당히 걸렸을 거예요. 두루마리가 이만하니까요. 그 동안에 교인들은 뭐했을까? 뭐 할 일 없겠지요? 그냥 기다리는 수밖에, 저는 이게 좀 우리 개신교에는 너무 약하지 않은가? 은혜를 기다리는 인내, 말씀을 기다리는 그 자세, 눈 감자마자 그냥 터져 나오는 기도, 예수님께서 물론 의도적으로 그러셨는지 모르지만 일부러 그러셨는지, 그 두루마리 안쪽에 깊숙이 감추어져 있는 60장을 찾아서 그거를 읽으셨지요? ‘가난한 사람에게 복음이 전해졌습니다. 이제 묶였던 사람들이 풀려날 것입니다. 보지 못하던 사람들은 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갇혔던 사람들도 다 해방 될 겁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해가 드디어 임했습니다.’


 


그러고 난 다음에 성경을 보면 그걸 그대로 갖다 놓으라고 그랬어요. 그 자리에 그러니까 푸는 시간만큼 감는 시간도 또 걸렸을 거 같아요.  또 그럼 그때는 뭐했을까? 교인들이 아까는 말씀을 기다리는 기다림 이었다고 하면 이번에는 주신 말씀에 대한 명상, 반추, 스스로 그 말씀에 비추어 자신을 조명하라는 그런 시간이겠지요? 아마 그 시간 그 기간에 이미 교인들은 은혜를 나름대로 받았던 거 같아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그것 다음에 정작 설교 시간에는 오늘 이 말씀이 여러분에게 응했습니다. 조금 쉽게 풀이하면 오늘 여러분에게 이 말씀을 드립니다. 그리고 끝이었거든요. 그게 설교 다입니다. 말씀 외에 내가 뭘 여러분에게 드릴수가 있겠습니까? 거기에 군더더기가 붙는 거는 그저 인간의 사설일 뿐이지요. 저도 목사이기 때문에 설교를 합니다만 참 갈등이 많을 때가 있어요. 말을 너무 많이 하는 게 아닌가? 그래서 오늘 이 두 번째 시간에는 제 이야기 보다는 정 경옥 선생님이 1937년에 쓰신 글, 그거 한번 여러분과 같이 읽어가면서 그분이 만난 이 공(空), 또 이 공(空)을 통해 그분이 만난 예수, 그거를 한번다시 확인 하는 걸로 제 이야기를 마칠까 합니다. 자료집을 가지고 계신 분들은 35쪽 이하에 있습니다. 참고로 정 경옥 선생님을 먼저 좀 소개를 하면, 이 분은 일제강점시대 때 장로교 신학계나 장로교 교계 지도자들로 부터는 자유주의 신학자, 신신학자, 좌파, 그래서 굉장히 위험한 그래서 심지어는 이단시되던 그런 신학자입니다.


 


 보편적으로 장로교 신학보다 감리교 신학이 조금 진보적이거든요. 사회참여 부분이라든지, 성경 해석이라든지, 이런 부분에서 조금 자유주의적인 취향을 가지고 있는데 그 중에도 제일 대표적인 분이 정 경옥 교수였습니다. 그래서 장로교에서는 박 형용 박사가 있다면 감리교에서는 정 경옥 교수가 양극의 그래서 한분은 아주 근본주의적인 보수 신학을 이야기 하셨다면 한분은 전위적인 제일 첨단의 진보적인 신학을 말씀을 하셨어요. 그러니까 장로교 쪽에서는 정 경옥선생 하면 아주 위험한 인물로 보는 거지요. 성경의 권위도 부정하고 동정녀 마리아 탄생도 부정하고 이런 식으로 해서,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그런 정 경옥 선생님이 이 세종 선생님을 만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그분이 처음으로 한국 교계에 ‘조선의 성자’라는 칭호를 이분에게 붙여서 글을 쓰신 겁니다. 그러니까 오늘 우리 읽는 이 자료는 사실 이 공(空) 선생님에 대한 지금까지 글은 엄 두섭 목사님께서 호세아를 닮은 성자라는 책을 쓰시기 전까지는 그저 구전으로 입에서 입으로만 전해 내려오던 거지요. 그러다가 이제 이 현필 선생님의 제자들보다 더 없는 더 희박한 자료를 가지고 그나마 ‘호세아를 닮은 성자’를 쓰셨는데 그것도 알고 보면 이 공(空) 선생님이 돌아가신 뒤에 60년이 지나고 후에 쓴 책이지요.


 


그러다보니까 아까 제가 주 기철 목사님 자료를 가지고 이야기 했을 때에 이제 세월이 지나다 보니까 사람의 기억이라고 하는 것이 잘못 될 수도 있고 잘못되는 건 그래도 괜찮아요. 과장 될 수도 있고 또 곡해 될 수도 있고 이런 게 많아요. 그런 면에서 이 공(空) 선생님에 대한 신화적인 이야기들이 어떻게 보면 다른 사람들이 보면 야, 나는 위대하지만 나는 그렇게는 못해. 이런 자괴감을 갖게 한다. 이 말이에요. 주 기철 목사님에 그 영화를 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그 불 못에 걸어가는 그 목사님, 그러면서 못 판위를 걸어가면서도 의연하게 찬송을 부르는 그 모습을 보면서 거의 대부분의 교인들이 거기서 엄청난 충격을 받지요. 눈물을 흘리지요.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무슨 생각이 드느냐하면 아휴, 나는 못해. 내가 저 자리에서면 나는 저렇게 못해. 그렇게 자괴감을 갖고 그러면서 소위 말하면 영웅사관이라고 그럽니다. 우리 역사신학 쪽에서 영웅으로 만들어 놓으니까 우리는 도저히 흉내도 못내는 사실, 예수님이 그걸 깨트리려고 인간으로 오신 거 아니겠어요? 그걸 깨트리려고, 그래서 너희들도 할 수 있어. 너희들도 돼. 사실 이 공(空) 선생님이나 이 현필 선생님이 우리들에게 보여주신 게 그거거든요. 우리도 돼. 너희도 할 수 있어. 그러니까 절망의 근거로서가 아니라 희망의 근거로서 이 공(空) 선생님이나 이 현필 선생님이 우리들에게 제시되어야 되는데 보통 동광원 다녀온 사람들은 아, 훌륭하기는 하지만 나는, 나는 못해. 나는 그렇게 살라면 못해. 이렇게 돼서, 굉장히 거리가 멀어진다는 거지요.


 


그런 면에서 이 공(空) 선생님이 살아계실 때 이 공(空) 선생님을 직접 뵙고 그리고 나서 바로 직후에 정 경옥 선생님이 쓴 증언록이라고 하는 점에서 좀 더 생생하게 그 분의 모습을 우리가 읽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서 이 시간에 여러분에게 이번 기회에 소개를 하려고 왔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이 공(空) 선생님을 소개하면서 정 경옥 그 자유주의 신학자가 뭐라고 표현했냐하면 조선의 성자 숨은 성자를 찾아 이렇게 글 제목을 붙였던 겁니다. 한국 교회사에 조선의 성자라는 칭호를 붙여서 책으로 글로 인쇄된 게 딱 두 분이 있는데 한 분은 전주 배 연희 목사님이 쓰신 조선의 성자 방애인 소전 그때 조선의 성자라는 말을 방애인 처녀로 24세 때 돌아가신 진짜 성녀 같은 분이 있었습니다. 걸인 문둥병자와 같이 기전여학교 선생님이었는데 처녀의 몸으로 그렇게 거지들을 고아들을 돌보면서 업고 다니면서 너무 불쌍해서 그 나병환자 손을 꼭 잡고 눈물을 흘려 기도를 했는데 그 눈물이 떨어진 그 자리에 상처가 나았다는 그런 전설적인 분이 있습니다. 그 분이 방애인 이라는 분이 있습니다. 이 분이 이제 1936년에 돌아가시는데 이 분의 전기를 배 연희 목사님 전주 서문교회 계셨던 전주 서문교회 배 연희 목사님이 쓰시면서 조선의 성자 방 애인이라는 그런 제목을 붙이셨어요.


 


그분이 성자라는 칭호를 받고 그 다음에 정 경옥 선생님에 의해서 이 공 선생님이 조선의 성자라는 칭호를 받게 됩니다. 정 경옥 선생님은 너무도 일찍 돌아가셨어요. 1944년도 4월 5일 날 돌아가셨으니까, 이 분은 1903년에 진도에서 출생 하십니다. 진도 향교아래 교동이라는데 거기 엄청난 부자 집이에요. 생가가 지금도 남아있거든요. 얼마나 의리 의리한지 모릅니다. 39년에 지은 기와집이 지금도 남아있어요. 솟을대문으로 만들어질 정도였으니까요. 그 할아버지 때부터 엄청난 부자였습니다. 그래서 그 부자 집에 맏아들로 태어나서 이 분이 진주에서 소학교를 마치시고 경성고등보통학교에 입학을 하십니다. 훗날 경기고등학교지요. 그러니까 진도에서 출생해서 경성고등보통학교를 들어갔으니까 일제강점시대 때 이건 뭐 굉장한 천재지요. 그런데 이 분이 경성고등학교 3학년 재학 중 삼일운동을 만나서 거기서 학생시위에 참여합니다. 그러다가 제적을 당해서 고향으로 내려와요. 그리고 고향에 내려오셔서 거기서 박 석현 박 종현 김 인수 이런 분들이랑 또 고향 단 이라는 걸 만들어 가지고 또 비밀 독립운동을 하다가 또 감옥에 가요. 그래서 목포 경찰서에 잡혀갑니다.


 


이때 같이 감옥에 갔던 분들이 옥중에서 전도를 받아요. 감옥에서 예수님 믿는 장로님한테 전도를 받아서 기독교인이 되는데 이 분들이 다 진도읍교회 창립교인이 됩니다. 1920년에 진도읍교회 지금 진도중앙교회 인데요. 이 박 석현 목사님은 6.25때 순교하신 분이지요. 영암에서, 그 일가족이 다 광주 양림교회 목회를 하시다가 영암에 가서 피난 중에 순교를 하셨는데 어쨌든 이렇게 해서 정 경옥 선생이 경성보통고등학교에 다니다가 제적당해서 교향으로 내려갔다가 또 독립운동에 참여했다가 또 목포 경찰서에 갔지요. 그러니까 이건 집안에서는 실망이 컸지요. 출세를 할 걸로 생각을 했는데 그런 운동에 참여해서 결국은 제적되어 집에 왔으니까, 그래서 이분이 다시 경성고등보통학교에 못가고 서울로 올라와서 YMCA영어 학관에 들어가서 영어를 배웁니다. 그리고 나서 집이 부자니까 일본 유학을 보내줘요. 동경에 있는 아오야마 학원에 감리교계통 학교입니다. 그래 거기 가서 신학을 공부해요. 그런데 공부도중에 23년도에 그 유명한 관동 대지진이 일어나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때, 동경유학생들 조선인들이 학살당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때 정 경옥 선생님도 결국 살해 위협을 당하다가 탈출해가지고 귀국하지요.


 


이때까지는 다 실패입니다. 학교도 제대로 졸업하지 못하고 독립운동도 그렇게 하고 유학도 못하고 그러던 중에 지금 제가 몸담고 있는 감리교 신학대학, 그때는 협성신학 이었는데 거기 들어오신 겁니다. 그리고서 28년도에 졸업을 하셨어요. 이분이 이때부터 졸업을 하셨는데 일등으로 졸업 하셨습니다. 워낙 뭐 천재라 그랬으니까요. 저희 감리교회 3대 천재 중에 한분입니다. 이 분이, 얼마나 머리가 뛰어난지 몰라요. 인물도 아주 잘 생기셨습니다. 졸업하면서 졸업 논문을 제출하신 거 같은데 기독신보라고, 우리 개신교 기독교 신문이 있었는데 거기에 사랑이라는 주제로 한 6개월 6회에 걸쳐서 긴 논문을 발표해요. 사랑입니다. 주제가, 그러니까 이미 이때부터 이분은 뭔가 사랑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싸우신 거지요. 그리고 나서 미국 유학을 가십니다. 남들은 5년 6년 걸리는 거를 이분은 3년에 다 끝내고 와요. 그래서 31년 9월에 귀국을 해서 32년 봄 학기부터 저희 학교의 교수로 강의를 하십니다. 그분에게 배웠던 분들 또 그분을 알고 있는 분들은 그분을 혜성과 같은 신학자라 그랬어요. 얼마나 뛰어났는지 강의도 얼마나 해박하게 잘하시는지 또 글도 참 잘 쓰시고 또 설교도 잘 하셨대요.


 


 보통 글 잘 쓰는 분이 설교 잘 못하는데 이분은 설교까지 잘 하셨대요. 그래가지고 불과 한 3-4년 사이에 엄청난 저작들을 냅니다. 책도 그는 이렇게 살았다. 기독교의 원리라고 하는 교리 해설서를 쓰고요. 여기저기서 강의 부탁도 받고 그럽니다. 그런데 이분이 1937년 5년만인 봄 학기를 앞두고 갑자기 학교 교수직을 사임하고 내려가 버리셨어요. 진도로 항상 그분의 생애를 정리할 때 이 대목에서 궁금했어요. 왜 그만 뒀을까? 그 잘나가는 교수직을 왜 그만뒀을까? 여기저기서 원고청탁 들어오지요. 강연 해달라고 그러지요. 또 뭐 강의실은 학생들이 막 미어터지지요. 학생들한테 인기가 얼마나 폭발적이었는지 모른대요. 그런데 갑자기 신학교 교수직을 포기하고 내려간 겁니다. 그래 이 대목에서 지금까지 설마 있었어요. 그분이 하는 가르침이 너무 진보적 이어서 보수적인 교단 지도자들이 결국은 교수직을 그만두라고 압력을 넣었다. 뭐 이런 설, 둘째는 좀 부끄러운 이야기 이지만 교수 사회가 그렇게 깨끗하지는 않아요. 예나 지금이나, 너무 그분이 인기가 좋으니까 그리고 그분 강의실에만 계속 인기가 있으니까 다른 교수들이 시기하고 질투해서 그래서 왕따를 시킨 거지요.


 


요새말로 하면, 그래서 견딜 수가 없어서 내려갔다. 또 심지어는 이분이 그때 첫째 부인이 돌아가셨어요. 미국 유학하는 도중에, 그러다 보니까 35세거든요. 이분이 돌아오셨을 때가, 그러니까 한참 나이에 설교 잘하고 교수직에다 강연 잘하고 글도 잘 쓰고 그러다보니까 여자들이 좀 몰리는 거지요. 여자 제자들이 좀 많았어요. 그러다보니까 스캔들이 일어나가지고 결국은 교수직을 그만뒀다. 뭐 그런 설까지, 그러나 어느 하나도 정확하지 않습니다. 갑자기 그만둬 버리신 거예요. 저도 늘 그분에 대해서 쓰다가 왜 그만두셨을까? 이분이, 그런데 또 2년 후에 또 오시거든요. 1939년에는 또 감신 교수로 오십니다. 2년 후에, 그럼 도대체 이 2년 사이에 뭔 일이 일어났는가? 굉장히 궁금했어요. 왜 그랬을까? 그 잘나가던 교수가 왜 그만뒀을까? 그러던 중에, 제가 아까도 이야기 한 것처럼 주 기철 목사님 자료를 막 찾다가 30년대에 잡지를 뒤적뒤적 하는데 30년대 잡지 중에 대표적인 것이 전 용택 목사님이 내시는 ‘새사람’ 이라는 잡지가 있었습니다. 이 전 용택 목사님은 감리교 목사님인데 이분은 문인이지요. 소설가, 이분이 성 프란치스코를 그렇게 좋아하는 분입니다. 전 용택 목사님이 그래서 이 새사람 이라는 잡지를 보면 그 성인들에 대한 이야기가 계속 나와요. 프란치스코 전기도 거기다 하시고 그래서 이 전용택 목사님이 발행했던 ‘새사람’이라고 하는 잡지가 30년도에 창간이 됐는데 그거를 우연히 뒤적뒤적 하다가 그 37년 7월호에 이 정 경옥 교수가 쓴 글이 눈에 띈 거예요.


 


 제목이 뭔가 하면 위기· 흙· 나, 이거 수필입니다. 위기 흙 나, 그래 제가 그 글을 접했어요. 그게 1937년 7월호에 실렸으니까 낙향한지 두 달 만에 쓴 거지요. 원고를 미리 보내니까요. 3월 달에 낙향했으니까 두 달 동안 진도에서 뭘 하고 지냈는가 하는 걸 쓴 겁니다. 이 전 용택 목사님이 느닷없이 갑자기 잘나가던 신학교 교수가 아무런 이유 없이 교수직을 포기하고 진도로 내려가니까 교계에서 술렁술렁 하는 거지요. 그러니까 이 편집자가 궁금한 거지요. 자기도 도대체 당신 진도에 내려가서 뭘 하느냐? 아마 그렇게 원고청탁을 했던 거 같아요. 그랬더니 이 분이 그 답으로 보낸 것이 위기· 흙· 나, 이 글은 읽지를 않겠습니다. 다만 요약해서 제가 말씀을 드릴게요. 글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사람들은 내가 왜 진도로 낙향했는지 궁금해 할 거다.’ 사실 진도에 교회자리가 나서 간 것도 아니거든요. 뭐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 간 게 아닙니다. 그냥 시골로 내려간 거예요. ‘뭐 내가 낙향 이후에 이런저런 이야기가 돈다는 것도 내가 알고 있다. 사실 몸도 많이 지쳤다. 몸도 많이 지쳤다. 또 모함도 받았다. 터무니없는 시기와 질투도 당해봤다. 그러나 그것이 내게 근본적인 이유는 아니었다.’ 이 대목은 제가 한번 읽을게요. 38쪽에 있어요. 참 요 대목이 제게 굉장히 저를 때린 구절이기 때문에 38쪽에 그 본문이 있는데요. 위에서부터 하나 둘 셋, 네 번째 단락입니다.


 


 ‘신학교에서 교편을 잡은 지 5-6년 동안에 나는 무엇을 하였는가? 봄이 되면 봄 과정을 가을이 되면 가을 과정을 그리고 겨울이 되면 겨울 과정을 해마다 같은 노트에 같은 방법으로 기계를 틀어놓은 것 같은 강의를 반복하는 동안에 해마다 말은 잘하나 생명은 죽어서  스스로 독서도 하지 않고 연구도 그치고 생활에 이 반성이 없으며 창작력이 진하였다. 날마다 사는 것이 외부에 있어서 광대하고 내면에 있어서 위축하는 생활이었다. 나의 영은 나날이 황폐의 여정을 밟고 있었다. 기도를 하여도 마음속에 솟아나오는 기도가 아니었고. 노래를 불러도 혼이 들어가 있는 노래가 아니었다. 이것이 끈임 없이 괴로웠다. 누가 뭐라고 말하는 이는 없으나 나로서는 쓴잔을 마시는 것 같이 괴로웠다. 내 몸이 세상에 알려지고 칭찬하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나는 더욱 괴로웠던 것이다. 내가 무슨 염치로 다른 사람을 비평하고 다른 사람을 책망하랴. 내가 왜 환경과 시대에 책임을 돌리랴. 내 주위에 여러 가지 조건보다도 나 자신이 더 약하였고 이 시대보다도 나 자신이 더 병들어 있었다. 좀 더 참되게 살아보자. 좀 더 굳세게 움직이자. 한걸음 걸어도 혼이 들어있는 걸음을 걷자. 한마디 말을 하여도 생명이 들어있는 말을 하자. 내게는 혼도 열도 성의도 없다. 생의 값이 값없는 것이라면 더 엄숙하여야 한다. 보다 더 진지하여야 한다. 이러한 생각을 하면서도 나는 그대로 5-6년 이라는 세월을 지내오고 있었다.’ 


 


 학교에서 교수노릇을 하던 교회에서 목회를 하던 제일 위험한 것이 이런 타성이지요. 습관적인 기도 습관적인 설교 그저 습관적인 강의 정 경옥선생이 이게 제일 두려웠던 겁니다.  노래를 해도 혼이 들어가지 않고 기도를 해도 그분의 임재가 느껴지지 않고 주변에서는 ‘잘나가는 교수’ ‘와, 뜨는 교수’ 뭐 이러지만 밖에서 더 광대할수록 속으로는 더 위축되는 자기, 결국은 자기 자신을 속일수가 없어서 그는 더 이상 참다못해 갑자기 사임을 하고 내려왔다는 이야기. 이게 그가 쓴 첫 번째 단어 위기입니다. 위기, 그가 말한 위기는 경제의 위기도 아니고 권력의 위기도 아니요. 명예의 위기도 아니요. 지식의 위기도 아니라 영적인 위기 이지요. 영적인 위기, 그건 자기만이 확인할 수 있는 거지요. 그래서 그 위기 속에서 자기는 결국 자기 자신을 더 이상 속일수가 없어서 봄 학기 봄 과정 노트가지고 올라가려다가 중단하고 내려왔다는 이야기지요. 학생들이야 매년 바뀌니까, 옛날 강의 노트 가지고 가더라도 학생들에게는 새로운 거지만 가르치는 교수는 자기 자신을 속일수가 없었던 거지요. 내려와서 뭘 합니까? 교회자리가 있는 것도 아니고 집안에서는 그 할아버지가 그때까지 살아계시는데, ‘또, 도망질 했다네.’ 농사를 지으려니 농사꾼 인가요? 농사도 못 짓습니다. 진도가 바닷가니까 어부노릇을 하나요? 그물질도 못합니다. 학문적인 서적을 볼 생각은 더 없지요. 겨우 두 달 동안 자기가 한일은 흙을 밟는 것 밖에 한 일이 없습니다.


 


 그래서 두 번째가 흙이 나옵니다. 자연으로 돌아간 거지요. 무위가 된 겁니다. 말 그대로 할 일이 없어진 거예요. 어디 설교부탁도 안 들어옵니다. 강의 부탁도 안 들어옵니다. 원고 청탁도 안 들어옵니다. 그러다 보니까 무위가 되다 보니까 자연 속에서 농사짓는 거 구경하고 고기 잡는 거 나가서 거들어 주기도하고 보리밭 밟기도 하고 뭐 이러면서 지냈다는 거예요. 그러면서 비로소 나를 찾기 시작 했습니다. 이 이야기야. 그래서 마지막 단어가 나가 나온 겁니다. 요게 두 달 동안에 이루어진 이야기에요. 위기·흙·나, 동광원이 좋은 것 은 사실 이 자연을 그대로 보전하고 자연과 함께 오는 공동체를 만들어 주어서 여기 오는 사람들을 자연을 그대로 접할 수 있게 해준 것이 얼마나 좋은 건지 몰라요. 그러나 인위적인 건물들이 자꾸 들어서는걸 보니까 해야만 되는 거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조금 좀 껄 끄름직 한 게 없지 않아 있어요. 위기·흙·나 결국 이분이 진도에 내려와서 한 일은 그저 하는 일 없이 하는 일이 있었다는 거지요. 그거는 자기를 찾는 일이었다는 겁니다. 나를 찾는 일 그때에 바로 이 공(空)을 만납니다. 이 공(空) 선생을 만나요. 내려오자 만난 거 같아요. 이분이 왜냐하면 바로 위기· 흙·나 라는 글을 발표한 그 잡지에 이 공(空) 선생님을 만나고와서 쓴 글이 똑같이 실리거든요. ‘조선의 성자를 찾아서’라는 그 글이, 그러니까 이 공(空) 선생이 아마 정 경옥 선생이 나를 찾는 일에 큰 역할을 도움을 주었던 거 같아요. 그건 왜 그러냐하면 이분이 일 년 이내에 다시 서울로 올라오거든요. 올라간다는 이야기는 찾았다는 이야기지요.


 


이분이 다시 이 진도를 떠나게 된 계기는 1938년 평양에 있는 광성고등보통학교라고 있습니다. 감리교 계통학교인데요. 이 광성고등보통학교에서 학생들 신학기를 맞이해서 부흥회를 일주일 하는데 와서 사경회를 해달라고 했대요. 진도에 있는 정 경옥 목사님한테, 이분이 올라간 겁니다. 올라갔다는 건 뭔가를 찾았다는 거지요. 일 년 전에 낙향할 때 심정 가지고는 못 올라가지요. 그런데 올라가십니다. 올라가서 일주일동안 사경회를 했어요. 그런데 그 사경회를 했을 때 그 주제가 뭐냐 하면 ‘그는 이렇게 살았다’ 그겁니다. 그는 이렇게 살았다. 그 사경회 참석했던 정 지강 목사님이라는 분이 있습니다. 평양에서 고아원 하시던 분인데 나중에 대전까지 내려와서 돌아가시는데 그 정 지강 목사님이 그 사경회에 은혜를 받아가지고 ‘그 원고 책으로 만들자’해가지고 그것이 39년도에 ‘그는 이렇게 살았다’라는 책이 나옵니다. 아주 얇은 책이에요. 뭐 부흥회 일주일 동안 한 거 그거니까요. 학생들을 놓고, 중고등학교 학생들을 놓고 부흥회 일주일 동안 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그는 이렇게 살았다. 그 내용이 뭔가 하면 예수 이야기입니다. 다른 거 하나도 없어요. 예수 이야기입니다. 전부 8장으로 되어있는데 제 1장은 현대와 기독, 둘째는 구유 말구유의 기독, 셋째는 강변 요단강변의 기독 그리스도,


 


넷째는 광야 시험받는 기독 그리스도, 다섯째는 산상의 기독 산상수훈, 그 다음은 노방의 기독 길 위에서 전도하시는 기독, 그다음은 정원의 기독 이거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는 기독, 마지막으로 십자가의 기독, 그러니까 일주일동안 학생들한테 태어나면서부터 십자가를 지시기까지 예수 이야기만 죽 하신 겁니다. 이게 학생들을 감동 시켰어요. 일 년 사이에 정 경옥 선생님의 고갈되었던 영생의 샘에 물이 터진 거지요. 아브라함의 우물을 다시 판 겁니다. 그래서 나, 위기 속에 나를 찾기 위해서 몸부림 쳤는데 거기에서 성경을 읽으면서 이 공(空) 선생님을 만나면서 결국은 나를 찾는 게 예수를 다시 만난거지요. 목포 형무소에서 처음 만났던 예수, 그분 다시 만난 겁니다. 그러니까 감격이 회복된 거지요. 다시 평양에 올라와서 사경회를 한 거지요. 그러니까 학생들에게 다시 재발견한 예수를 일곱 시간에 걸쳐서 현대 기독은 해설입니다. 그냥 조목조목 탄생한 예수 이건 겸비한 예수입니다. 낮아지신 예수에요. 겸손하신 예수입니다. 땅으로 내려오신 예수에요. 마지막 십자가 예수까지 그냥 그 책을 읽어보면요. 그게 60년대까지 계속 현대말로 나왔습니다. 신학자들이 한국에 예수전이 없다고 많이 한탄을 해요. 외국에는 유명한 웬만한 신학자들은 마지막으로 다 예수 전을 쓰거든요.


 


그런데 왜 한국 학자들은 왜 예수 전을 안 쓰는가 하는데 저는 정 경옥 선생이 예수 전을 썼다고 보는 거지요. 참, 우선 학술적인 논문이 아니니까 주 하나도 없어요. 말 그대로 부흥회 중고등학교 학생들한테 설교하는 걸 그대로 이걸 원고로 만들었기 때문에 아주 쉬운 말로, 그래서 그분이 예수를 재발견 하니까 감격이 회복이 된 거지요. 그래서 다시 신학교로 와서 교수가 된 겁니다. 아마 이 공 선생님을 만나지 않았으면 그가 나를 찾는 기간이 더 길어졌을지도 모르겠어요. 역사에서는 물론 가상은 없습니다만 물론 성경을 읽으면서도 독자적으로 또 기도하시면서 예수를 찾을 수도 있겠지만 이분이 쓴 이글 조선의 성자를 찾아서 라는 이 글과 그 다음에 그는 이렇게 살았다는 책을 자세히 읽어보면 이 공 선생님에게서 상당한 영향을 받은 거 같아요. 소위 예수를 찾는데 이 공(空) 선생님이 굉장히 도움을 많이 준거 같아요. 그는 이렇게 살았다는 부분에 한 부분에 이 공(空) 선생님 이야기가 본문에 나오거든요. 그런 면에서 1937년 3월부터 5월 사이에 있었던 이 공(空) 선생님과 정 경옥 선생님의 만남, 정 경옥 선생님이 도암까지 갔어요. 글을 읽어보면 도암까지 가서 거기서 등광리 까지 가서 거기서 만나셨어요. 그 만나고 와서 이제 자기가 왜 진도에 내려왔는지 위기·흙·나. 글을 쓰면서 같이 원고를 써서 보낸 겁니다. 이것도 기회가 되면 같이 실어주시오. 이런 거지요. 왜냐하면 이 새사람이라는 잡지의 전 영택 목사님이 뭐 성 프란치스코를 비롯해서 베르나르도 성 요한 굉장히 성인들의 소개를 많이 하니까 조선에도 이런 성자가 있소이다. 이런 걸 이제 정 경옥 선생님이 전 영택 목사님에게 원고를 같이 보내요. 그래서 보통 잡지에 한사람의 원고가 두 번 실리기 어렵거든요. 그런데 두 편의 원고가 같이 실립니다. 한번 그 이 세종 선생님의 방문기를 제가 읽겠습니다. 46쪽부터 있습니다. 제목은 숨은 성자를 찾아 이렇게 됩니다.


 


‘전남 광주에서 여수로 가는 기차를 타고 한 시간 쯤 가면 능주를 지나 춘양이라는 정거장이 있다. 여기서 내려 서쪽으로 십 오리 산골짜기 좁은 길을 타고 올라가면 오육십 호 밖에 되어 보이지 않는 마을이 보인다. 여기가 화순군 도암면 등광리, 길이 멀고 험하여 별로 찾아가는 사람이 드문 궁벽한 산촌이다. 그러나 도암에 영기가 있었든가 혹은 이 마을이 우리의 등대가 될 것을 미리 옛 임이 미리 아셨던가? 도암면 등광리라는 이곳에 놀라울만한 성자 한분이 계시니 그의 이름은 이 세종이다. 우리는 흔히 이 세대에 참된 구도자를 찾아 볼 수 없다고 한탄한다. 이 땅에 종교를 논하는 자는 많으나 참으로 도를 구하고 참으로 도를 즐기는 자 그 몇 사람이나 되는가? 현대인의 생활 기구와 이상은 진정한 신앙생활을 곤란케 한다. 이제 우리들의 신앙은 생명 전체에 대한 최종의 결단인 것 보다 감각적인 욕구를 채우려는 일시적 수단에 까지 타락하고 말았다. 우리는 참된 믿음을 소유하기 전에 벌써 현대문명의 원리인 쾌락주의와 유물사상을 고집하고 우리는 그리스도의 구속을 논하기 전에 적당한 적당히 조절한 본능을 가졌다. 이 시대가 암울 한 탓인가? 혹은 너무 지나치게 냉랭한 탓인가?


 


우리는 이러한 모순을 그대로 선전하고 그대로 예찬하고 있는 것 같이 보인다. 이제 기독교는 막다른 골목에 다다랐다. 이러한 위기를 당하여 우리는 이 공(空)과 같은 인물을 가졌다는 것이 무엇보다도 기쁘고 기쁘다고 할 것이다. 그는 과연 자기를 이긴 사람이요. 참된 사랑의 사도이다. 그에게는 간디의 정책도 없고 선다싱의 이론도 없고 내촌 씨의 지식도 없다. 그러나 나는 간디보다 선다싱보다 내촌씨보다 이 공(空)의 인물을 순경하여 마지아니한다. 나는 이러한 위인들보다 그를 이 세상에 자랑하고 싶다. 물론 그는 설교가도 아니요. 신학자도 아니요. 경리가도 아니요. 사업가도 아니다. 그러나 나는 오히려 그의 가장 없는 인물을 존경한다. 공(空)은 몸 갈키가 호리호리하고 키는 다섯 자도 되지 못한다. 그의 목소리는 옆 사람이 겨우 알아들을 수 있으리만치 적고 부드럽다. 나는 소박하고 순호한 성자를 대할 때는 마음에 넘치는 감격을 금할 수 없었다. 공(空)은 화순 땅에 나아서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의지할 곳 없는 고아로 자랐다. 고아가된 공(空)은 어려서부터 가난과 싸우며 이집 저집 품팔이를 하며 호구의 책을 구하였다. 남에게 눌림을 받아 바른 것은 바르다고 말 한마디 크게 하지 못하고 먹을 것 입을 것 없이 굶주리고 헐벗어 눈물과 외로움으로 날을 보내고 해를 거듭하였다.


 


그는 골수에 사무치도록 고를 맛보았다. 공(空)은 고를 통하여 인간을 이해하였고 고로서 사람을 동정한다. 공(空)이 가정을 이룬 다음에 굳은 결심으로 십년을 작정하고 재산을 모아보기로 하였다. 그가 한번 뜻을 정하면 변하는 일이 없다. 공(空)은 신앙의 사람이 되기 전부터 벌써 의지의 사람이었다. 십년이라고 정하였으면 참으로 십년을 의미하는 것이요. 재물을 모으리라고 결심하였으면 재물을 모으는 것이었다. 공(空)이 이러한 결심을 한 후로는 십년을 하루같이 밤과 낮을 헤아리지 아니하고 땅을 파고 곡식을 가꾸었다. 그는 시기를 엿보아 이익이 되는 것이면 아니한 것이 없었다. 목화를 심어서 돈을 만들고 금융조합의 빚을 내어 땅을 샀다. 고리대금도 하였고 등짐장사도 하였다 말하자면 어디서든지 벌고 아무에도 쓰지 아니한다는 철칙을 세웠다. 이렇게 예정한 십년이 지난다음에 자기 것이라고는 한 푼도 없던 그가 사십여 두락에 토지를 장만하고 촌살림으로는 남부럽지 않게 유족한 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감각은 만족을 모른다. 식에 대한 공황이 없어지자 성에대한 새로운 욕구가 강열하여졌다. 불행히 그에게는 자녀가 없었다. 아들 낳지 못하는 것이 무엇보다 원통하고 분하였다. 왜 내게는 아들이 없나? 세상에 하고많은 사람 중에 하필 내게만 일점의 혈육도 없는가? 이렇게 그는 운명을 저주하며 감각을 선호하고 있었다.


 


오냐, 내게 정성이 부족한 탓이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니 내 정성을 다하여 보리라. 그는 동네 뒷산에 올라가 날마다 정성스럽게 산제를 지내기 시작하였다. 맑은 물로 몸을 씻고 깊은 산속에서 혼자 무릎을 꿇고 신령님 아들을 주시옵소서. 성주님 내게도 아들이 있게 하여 주소서. 이렇게 여러 날 여러 달을 쉬지 않고 정성을 드렸다. 그러는 동안 어느 날 동네에 내려왔더니 마침 어느 점쟁이 집 하녀가 별안간 미쳐서 소리를 지르며 이런 짓하면 안 된다. 하나님을 믿어야해. 하며 뛰어 돌아다니고 있는 것을 보았다. 다른 사람들은 이것을 구경을 하고 다 미친년이 헛소리 한다고 했으나 이 공의 귀에는 이 미친 사람의 말에도 깊은 뜻이 있기에 귀를 기울였다. 이런 짓을 하여서는 안 돼. 하나님을 믿어야지, 하나님을 믿어야해. 그는 어느 날 등광리 에서 칠십 리 길을 걸어 광주 어느 선교사를 찾아갔다. 하나님을 공경하는 도를 배우려고 선교사를 만난 것이다. 그러나 그 선교사는 산골 농부를 환영해주지 아니하였다. 오히려 교만하고 냉정한 태도를 가지고 진리를 배우려고 헤매는 그를 상대하여 주지 않았다. 사람을 사람으로 여겨주는 것 같지 않았다. 그는 할 일 없이 선교사 집에서 쫓겨나오다시피 문간을 나서서 길거리로 발걸음을 옮겨 놓았다. 그의 마음에는 의혹과 번민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다.


 


서양사람 이들이 여기까지 와서 도를 전하려고 왔다면 왜 그렇게 행동할까? 내가 비록 걸인이나 광인이라 할지라도 오히려 더 불쌍히 여기고 영접할 것이 아닌가? 내가 그들에게 진리를 구하나 그들은 나를 배척함이 웬 일인가? 공은 이런 생각 저런 생각으로 산란하여진 마음을 가다듬으며 그대로 거리를 걷고 있었다. 그의 발걸음은 끝까지 신중하였다. 그러나 아직도 진리를 찾으려는 마음이 불타고 있는 것을 본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그는 우연히 길거리에서 어느 전도 인을 만나 창세기와 시편과 잠언을 얻었다. 하나님의 말씀, 그는 이 책을 얻는 것이 미칠 듯이 기뻤다. 마치 보화를 얻은 사람처럼 뛰는 가슴을 억제하며 집으로 돌아왔다. 그는 곧 하나님의 말씀을 읽어보고 싶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이때껏 한글에 상식까지도 없었다. 이때부터 그는 동네사람들에게 한글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며칠이 못되어 한글을 깨쳤다. 그는 이제 새 세계에 눈을 뜨게 된 것이다. 성경을 손에 들고 한글자 두 글자 말을 붙여서 읽어 내려갈 때에 그는 경이 환희 영감에 도취되어 참으로 날이 가는 줄 모르고 읽고 또 명상하였다. 공(空)은 성경을 읽은 후 곧 산당을 헐고 창세기에 있는 대로 하나님의 제단을 돌로 쌓고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다. 이렇게 얼마를 지내고 난 다음에는 어떤 사람이 사도신경을 사도행전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보고 그 책을 얻어다가 읽었고 나중에는 신약전서라는 책이 있는 것을 알게 되어 비로소 신약전서를 사가지고 밤낮을 헤아리지 않고 읽었다.


 


공(空)은 신약을 통하여 예수를 배웠고 참 종교의 진수를 깨닫게 되었다. 그는 신약을 읽고 놀래어 산에 올라가 제단을 헐고 은총의 세계를 명상하기 시작하였다. 이때부터이다. 공(空)은 감각의 세계를 벗어나 영의 사람이 되고 말았다. 그는 동네 뒷산 깊은 암자에 들어가서 성경을 읽고 진리를 명상하는데 몰두하였다. 교회 전통이나 교파의 신조나 제도의 구속을 벗어나 그의 적나라한 영은 하나님의 말씀과 직면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는 어느 유명한 학자에게서 계통 있는 사상의 체계를 전수한 것도 아니요. 어떤 성경학자의 주석이나 비판을 참고한 것도 아니다. 그는 성경에 손을 들고 자기 독특한 해석을 알고 성경을 통하여 자기 독특한 영감을 받았다. 공(空)이 성경을 연구하고 진리를 명상하는 동안 그는 자기를 잊어버리고 시절이 바뀌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철을 따라 옷을 바꾸어 입고 때를 따라 음식 먹는 것을 잊었다. 어느 때는 암자에서 명상에 빠져있다가 동네를 내려오면 소를 몰아 논을 갈고 있는 것을 보고서야 자기가 산으로 올라갈 때는 길가에 눈이 허옇게 덮였었는데 이제 벌써 봄이 되었나보다 하였고 어느 때는 어린애들이 밭에서 참새를 날리고 있는 것을 보고서야 비로소 가을이 된 것을 알았다고 한다. 이렇게 한 것이 몇 해가 되어 지났는지 그때부터 자기도 자기 나이를 잊어버렸다고 한다. 옛적에 글을 좋아해서 가죽 책 갈이가 세 번이나 헤어진 분이 있다고 하더니 진리에 탐하여 해가는 것을 잊은 사람이 이 시대에도 있었던가? 학위를 간판삼고 신학을 직업 술로 여기는 속의 사람들에게는 공의 존재가 오히려 이해할 수 없는 수수께끼가 되지 아니할까 두려워한다.’


 


사실 이 대목에서 제 자신 제일 마음이 아팠습니다. 학위를 간판삼아 신학을 직업 술로 여기는 속계의 사람들 그건 바로 이 자리에 있는 저의 모습이기도 했고요. 또 이 글을 쓸 때 정 경옥 선생의 모습이기도 했었지요. 
 ‘공(空)이 이같이 산당에서 명상에 빠져있는 동안에 공(空)의 부인은 간부를 두어 말없이 집을 떠나고 말았다. 공(空)이 상당에서 돌아온 후 이것을 알고 즉시 간부와 같이 자는 자기 아내를 찾아갔다. 공(空)은 그러나 공(空)은 벌써 속계의 사람이 아니었다. 그의 자비로 세상을 덮을 수 있었고 그의 성품은 눈같이 희었다. 공(空)은 자기 아내와 간부를 한곳에 불러 앉히고 권고하고 전도를 하였다. 그리고 돌아온 후에 자기 아내가 쓰던 가구와 의류를 다 싸서 보내며 이것을 가지고 잘 살기를 바라나 이것이 바르게 사는 것이 아닌 만큼 아닌 것은 깨달으라고 했다. 그 후 일 년쯤 있다가 그의 아내는 간부를 버리고 다시 옛집을 찾아 돌아왔다. 공(空)은 아무 말 없이 그의 아내를 받아들이고 예전과 같이 한집에 살았었다. 그러나 이때부터는 서로 부부의 관계는 맺지 아니하고 서로 사랑하는 친구로 방을 달리하였다. 공(空)은 항상 그 여자를 위하여 기도’ (끊김)
 ‘동네 사람들은 그를 비웃었다. 그러나 공(空)은 언제나 그 여자를 옹호하고 자기 사랑하는 친구로 여기고 같은 집에서 살고 있다. 공은 지금도 늘 말한다. 사람의 일 사람은 사람의 일을 모른다. 사람의 운명과 선악의 판단은 오직 하나님 에게만 있다.


 


나는 끝까지 그 여자의 영혼을 불쌍히 여긴다. 나는 그를 보살펴줄 책임이 있다. 앞으로 세상일을 누가 아는가? 그가 구원받고 내가 타락할는지 모른다. 그가 잘못된 길로 나간 것도 나의 책임이 중하다. 그로 인하여 나도 하나님께 심판을 받을 것이다. 예수를 믿은 후로 공(空)은 물질적 욕망에서 완전히 벗어나 극기의 생활을 계속한다. 만물은 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것이다. 그러나 나더러 소유하라는 것은 아니다. 나 자신도 내 것이 아니다. 나를 내 것으로 여길 때에 사람은 가장 큰 배역을 행하고 말 것이다. 모든 것은 다 하나님에게 속하였다.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의 충실한 종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공(空)은 언제나 홑바지 저고리로 지낸다. 추운 때나 더운 때나 같은 옷을 입는다. 그도 사람인지라 따뜻하고 부드러운 의복이 싫을 리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언제나 걸인과 같이 떨어진 베옷을 기워 입고 구멍 뚫린 모자를 쓴다. 얼핏 보아서는 너무 심한 것도 같고 일부러 극단을 취하는 것도 같다. 혹은 중세기의 걸식제도를 모방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불교의 삼야신도 모르고 아씨스의 프란치스코도 모르는 사람이다.


 


공(空)의 심경을 이해하지 않고는 그를 오해하기 쉬울 것이다. 공은 왜 그렇게 차마 먹지 못할 음식을 먹고 의복 같지도 않은 홑 누더기를 입느냐고 물으면 그는 좋은 옷을 입거나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 마음이 황공하고 괴로워서 견딜 수 없다고 대답한다. 그는 천박한 절제를 가르치지도 아니하고 소극적인 금욕주의를 믿지도 아니한다. 그의 자비심은 세상을 덮을 만큼 넓고 크다. 공(空)은 불쌍한 사람을 생각하고 밤에 이불을 차마 이불을 덮고 잘 수가 없어서 절반만 걸치고 잔다고 한다. 그는 고를 안다. 그의 사랑은 고로서 고를 이해하는 것이다. 혹 걸인이 공(空)의 집에 찾아가면 자기는 땅에 앉아서 먹고 걸인에게는 좋은 상에 차려서 대접한다. 그는 참으로 요구되는 것이면 구하는 자에게 물리친 때가 없다. 몇 번이고 달라고 하기만 하면 자기 손에 있는 것이면 즐거운 마음으로 준다. 공은 이런 말을 하였다. 나는 하나님께서 내게 맡긴 것을 어려운 사람에게 나누어 주지 않으면 마음이 괴로워 살수가 없다. 그들이 악한 마음으로 내게 와서 무엇을 청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판단할 일이 아니다. 나의 책임 나의 책임은 있는 것을 나누어 구제하는 것이다. 이 세상은 있는 사람에게 주는 것을 즐겨하고 없는 사람은 돌보지 아니한다. 불쌍한 사람이 내게 오면 내게 있는 것으로 나누어 준다. 이것은 내게 덕이 될 것이 없다. 하나님께서 내게 맡긴 것이니 하나님께 돌려보내는 것이다. 지난번 수해 구제 때’ 사실 1933년과 36년 이때에 이 전라도 지역에 엄청난 수해가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 전라남도에서만 그때 십만 명이 이재민이 나가지고 이 만주로 이주로 갔다는 그런 동아일보 기사를 제가 확인 할 수가 있었습니다.


 


 ‘지난번 수해 구제 때 공은 자기 식량 전부를 이재민에게 나누어 주었다. 공(空)은 눈물로서 이재민을 동정하려고 했던 것이다. 동네사람들은 너무나 공(空)의 뜻에 감격하여 그를 위하여 자선 비를 만들어 세운일이 있었다. 공(空)이 이 소문을 듣고 자기를 위하여 세운 자선 비 앞에 가서 벌 벌 떨며 울고 있었다. 다른 사람을 구제하였다고 칭송 받으려는 그가 아니다. 그는 이것이 너무 황공스러워 마음이 괴로웠던 것이다. 인간에게 감사할 것이 있으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사람에게 예찬하는 것은 무엇보다 심하다고 말하였다. 동네 사람들은 공이 너무 괴로워하는 것을 보고 그 자선 비를 뽑아 없이 하였다고 한다. 공(空)은 때를 따라 교회 예배에 참석한다. 그러나 교회 절차를 따라 제도의 구속을 받으려 하지 아니한다. 예배는 순종이다 순종하는 삶을 탐구하고 묵상하는 것이 곧 예배이다. 그는 이렇게 청교도적인 자유주의를 취한다. 그러나 그는 교회나 예배 형식을 반대하지 아니한다. 다만 어떤 형식을 갖춘 것만이 예배가 아니요. 어떤 일정한 형식을 통하여서만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을 주장한다. 안식일은 일주일간의 생활을 검사받는 날이다. 우리 생명 전체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날이다. 그러므로 순종하는 생활을 한 사람에게는 가장 기쁜 날이요. 순종치 아니한 사람에게는 가장 괴로운 날이라고 한다. 공(空)은 주일이면 혹 교회 주일 집회에 참석하기도 하고 혹 전도나 구제하러 나가기도 하고 혹 혼자 산으로 올라가 명상하기도 한다. 그는 한번 어느 사경회에 참석하여 본 다음에 여기서 하나님은 나타나지 아니하고 사람만이 서로 자기를 자랑하고 있는 것을 보고 낙심하였다고 말하였다. 공(空)은 굳은 의지를 가지고 실행제일 주의를 그날, 그날 흠 없이 살려고 힘쓴다. 만사에 시비를 당하지 아니하려고 아니하도록 하라는 성경 말씀이 그의 생활표어와 같이 되어있다. 그리스도인이 물질을 잘못 씀으로 세상 사람이 시비를 많이 당한다. 주님을 따르는 사람은 먼저 자기를 이기고 이 세상을 이겨야 한다. 오늘날 교회는 소리는 많으나 빛이 없다. 교역자 자신이 먼저 충성하지 않으면 안 된다. 사람이 하나님의 영광을 취하는 것 보다 더 큰 배신은 없다. 오늘 우리는  그리스도의 성품을 나타내고 주님이 원하시는 대로만 살아야 된다. 공은 성경을 거 진 외우다시피 잘 알았다. 무슨 말을 하든지 성경 말씀을 인용하였다. 그의 성경 해석에는 너무나 상징적인 것도 없지 아니하고 세밀한 잡기에 억매여 대의에 어그러지는 것도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가 아무에게도 지도를 받지 아니하고 단독으로 받은 영감이 비범한 것은 부인할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는 학자가 아니다. 성경의 전문적 지식을 가진 사람이 많을 것이다. 그는 신학자가 아니다. 신학 상 이론으로 공의 박식을 비웃을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는 설교가도 아니요. 정책가도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말을 잘하는 사람이 아니요. 정책을 쓰지 않기 때문에 그를 경외하는 것이다. 성경을 학문으로 배우려고 하지 아니하고 신학을 이론으로 꾸미려하지 아니하기 때문에 그를 존경하는 것이다. 그가 받은 영감을 누가 부인하랴. 그가 그의 엄숙한 신앙을 누가 거역하랴. 공의 얼굴은 창백하나 눈에는 밝은 빛이 비추이고 그의 눈은 초췌하나 영은 산기운이 있다. 기자는 (정 경옥 자신입니다.) 기자는 길거리에서 그와 손목을 나누었다. 그는  걸인이라고 밖에 더 볼 수가 없다. 구멍 뚫린 모자 누더기 베옷 헤어진 고무신 모두가 거지보다 나을 것이 없다. 공은 여전히 부드러운 목소리로 뚜벅뚜벅 힘을 들여 내게 말하였다. 자기는 기억력이 부족하여서 한번 본 사람을 어디서 다시 만나더라도 무심히 지나치는 때가 많으니 언제든지 다시 만나거든 먼저 아는체 하여주기를 바란다는 것이었다. 그는 정을 구하고 친구를 찾는다. 공은 의지의 사람이면서 정의의 인물이다. 그러나 이 거칠고 쓸쓸한 세상에서 공(空)의 친구가 되어줄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나는 길모퉁이로 사라지는 그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서있었다. 신앙은 고독이오니 성자의 길은 외로울 진저.’


 


 결국 이 세종 선생을 만난 게 성경 읽는 것과 같이 어울리면서 정 경옥 선생이 위기를 탈출하고 나를 발견하고 예수를 재발견하면서 고갈되었던 영성의 샘이 다시 뚫리는 그 과정이 아마 이 사건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저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면서 결국 그가 성경을 읽으면서 다시 예수를 발견했는데 그 예수의 화신이 결국은 이 공(空) 선생으로 그것이 중첩이 되면서 바로 살아서 움직이는 예수의 모습을 결국 이 공(空) 선생님에게서 봤기 때문에 이분이 1938년도 평양에 올라가서 그는 이렇게 살았다. 그 내용은 알고 보면 이 공 선생님 이름은 한 번도 밝히지 않았지만 구유의 예수님으로부터 십자가의 예수에 이르기까지 결국 이 공선생의 삶의 모습 그게 바로 제일 첫 장이 현대와 기독인데 여기서 이야기 하는 건 뭐냐 하면 과거 2천 년 전의 예수가 아닙니다. 오늘 지금 당장 이 조선 반도에 예수가 바로 예수입니다. 이걸 이야기 한 거거든요. 그게 바로 이 세종 선생을 은밀하게 소개한 거고, 그러면서 그는 이렇게  살았다는 제목으로 붙인 게 아닌가? 이렇게 생각됩니다. 그러면서 그는 구체적으로 곤고의 기독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설명할 때 제일 마지막 장에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여러 가지로 설명을 하는데 제일 앞서서 고독의 그리스도 이 십자가의 그리스도는 고독해야 된다. 이 시대는 고독하지 않고서는 참 도를 구할 수 없다. 이게 정 경옥 선생의 결론입니다. 고독 하지 않고 어떻게 도를 참 도를 깨달았다고 하겠는가? 사람들에게 박수 받고 명예 훈장 받고 뭐 이 박수 받는 그거는 자기가 보기에는 참 도가 아니다. 그러니까 참 도를 찾는 자는 고독해야 되는 게 당연하다. 이렇게 하면서 고독을 이야기하고 그 다음에  곤고의 그리스도라는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면서 이름은 밝히지 않지만 이 공(空) 선생님을 다시 한 번 그는 이렇게 살았다는 책에서 소개합니다. 그 부분을 한번 또 읽겠습니다.   52쪽입니다. ‘남한지방 화순이라는 곳에 이상한 사람이 한분 계신다. 그는 학식도 지위도 없는 산골에 사는 농부이다. 그러나 그가 그리스도의 사랑을 배운 후로는 그리스도를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인고를 즐겁게 받고 있다. 그는 음식을 먹어도 사람이 차마 먹지 못할 것을 먹고 있다. 아무리 좋은 음식을 드려보아도 결단코 먹지 아니한다. 그는 불쌍한 거지나 어려운 생활들을 하는 빈민들을 생각하면 부드러운 밥이나 맛있는 반찬이 목에 걸려 넘어가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는 잘 때에 이불을 덮어도 몸을 절반만 가리고 잔다. 왜 다 덮지 않느냐고 물으면 추운 때 잘 곳이 없이 길가에서 떨고 있는 사람들을 생각하면 차마 이불을 끌어 덮기 어려워 손이 떨린다고 한다. 우리는 그의 미숙한 사상이나 독단적인 이론을 반박할 수도 있고 그의 기괴한 생활형식을 배격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그가 이단인지 정통인지 그것조차 심판하여 보려고 하지도 아니하였다. 나는 다만 그의 순진한 사랑과 그리스도의 곤고를 본받아 실천하여 보려는 열성만을 존경하고 사표로 삼고 싶은 것이다.’


 


사표라는 말을 여기서 썼습니다. 그래서 이제 이 공(空) 선생이 결국은 그는 이렇게 살았다고 하는 거기서 정 경옥 선생이 소개하려고 하는 예수님 그 구체적인 오늘의 모습으로 이 공(空) 선생님을 소개를 한 거지요. 1937년 7월에 이 두 분이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 후에 두 분이 더 만났는지는 확인을 못했어요. 그러나 이미 두 분의 만남으로 더 이상의 만남은 의미가 없지요. 이미 영맥(靈脈)이 통했기 때문에 한번 아브라함의 우물을 다시 파가지고 이 샘 줄기를 찾았던 이삭이기 때문에 이제는 어디 가서 우물을 파던 거기서 샘이 솟는 거지요. 그러니까 이 공(空) 선생님과 만나서 고갈되었던 영성의 우물에 다시 샘이 솟아나니까 이분은 이제 그 후로 이 공(空) 선생 다시 안 만나도 스스로 자기 우물에서 자기 물을 길어 마실 수 있는 그런 영생의 샘을 정 경옥선생도 확보한 거지요. 그래서 이분은 1939년에 다시 감리교 신학교 교수로 오셔서 강의를 하시는데 그때 강의를 들으셨던 분이 지금 생존하신분이 두 분 계세요. 이 분들의 증언에 의하면 2년 만에 돌아오셨는데 그렇게 다를 수가 없었다는 거예요. 그래 뭐가 다르냐? 처음에 내려갈 때는 하이칼라 미국유학을 마치고 온 신진 멋쟁이 신학교 교수였는데 올라올 때는 초라한 시골 할아버지 시골 농부의 모습으로 그렇게 소박하게 오셨다는 거지요. 그리고 내려가기 전까지는 해박한 지식에 달변에 날카로운 비평에 그냥 사람들을 현혹시키는 그러한 달변의 강의를 했는데 올라오실 때는 말씀도 더듬더듬 하시고 제일 큰 변화는 머리로 지식을 가리키는 선생이었는데 올라오실 때는 가슴으로 진리를 가르치는 선생님이 되었다. 그러면서 그 제자들이 두 가지를 항상 기억해요. 하나는 뭐냐 하면 성경 66권을 삼봉(三峰)으로 설명을 하시더라는 거야. 삼봉(三峰), 삼봉(三峰)은 뭐냐 하면 창세기 1장 1절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이것보다 더 큰 복음은 없다. 두 번째는 요한복음 3장 16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치 않고 구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마지막으로는 요한 계시록 21장 20절 이것을 증언하신 분이 너희에게 이르시기를 속히 오리라.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이것이 성경의 삼봉(三峰)이다. 이게 복음이다. 창조하신 목적 타락했던 인간을 구원하시는 하나님 그 구원을 완성하시기 위하여 재림하시는 예수그리스도. 그래서 그 다음부터는 얼마나 쉽게 말씀하시는지 이분이 신학교에서 일 년 밖에 또 못하십니다. 40년 1년 후에 총독부에서 이 신학교를 폐교시켜 버려요. 그래서 또 신학교 교수를 내놓으십니다. 그래서 저 만주 사평에 가, 거기에 가서 거기 감리교 계통 선교사 여자 선교사가 하는 신학교가 있었어요. 그 신학교 교장으로 가서 거기서 한 2년 하시다가 그걸 또 만주국이 그걸 폐교시켜 버립니다. 그래서 또 진도로 내려오셨어요. 그래 진도에 내려와 계시면서 이제 코흘리개 어린애들 돈 없어서 학교가지 못하는 그런 학생들을 데려다가 집에서 가정교육 시키는 겁니다. 그러다가 대동아전쟁 일어나기 전날  일본 경찰이 예비검속을 했어요. 미국유학을 갔다 왔다는 이유로 미국 스파이라고 그래서 9개 월 동안 옥고를 치루십니다. 갖은 옥고를 치루시고 그때 병을 얻으세요. 그리고 요양을 하고 계시는데 광주 중앙교회 장로님들이 오신 겁니다. 그건 장로교회입니다. 이 장로교회 광주중앙교회 장로님들이 진도까지 오셔가지고 감리교 제일 진보적인 자유주의 신학자라고 누명을 써가지고 장로교에서는 이단이라고 치는 그분한테 와가지고 우리 교회 좀 맡아주십시오. 그런 거야. 내가 장로교인데 감리교 목사가 왜 거기를 가느냐? 지금 장로교 감리교를 따질 때가 아닙니다. 다른 건 몰라도 청년들이 불쌍합니다. 그래 그 말씀에 이분이 그럼 가야지. 해서 나간 거예요. 그래서 광주중앙교회 목사님이 그분이 마지막 목회를 하십니다. 그러니까 일제 말 이니까 일장기 걸어놓고 신사참배 하고 그럴 때입니다. 그러니까 이분이 외견상으로는 협조하는 척 하면서 이분이 아침 새벽 네 시부터 저녁까지 청년들을 별도로 모아가지고 자기 사택에서 가르치셨다는 겁니다. 그때 가르침을 받았던 분들이 김 천배 선생님 조 선출 선생님 서 남동 선생님 조 아라 선생님 뭐 성 갑식 목사님 김 학중 선생님 신 성철 선생님 이런 분들입니다. 이분들도 다 최 흥종 목사님 제자들이라고, 다 통하는 분들이에요. 그래 이 분들이 새벽마다 이목이 미치지 않는 그 새벽에 모여가지고 거기서 성경을 배운 겁니다. 그러면서 제자들에게 유언으로 계속 하시는 말씀이 늑막염으로 돌아가시는데 하신 말씀이 새벽은 다가온다. 새벽은 다가온다. 너희들은 할 일이 많으니 건강 조심하라. 곧 새벽이 온다. 그리고 마지막 숨 거두시면서 내 뱉으신 말씀, 이거는 인제 39년에 서울 감신에 오셔서 학생들한테 하신 말씀입니다. 두 가지라고 하는데 하나는 이 삼봉(三峰) 말씀을 하셨고 또 한 말씀은 이 말씀이에요. 교훈의 말씀인데, 이건 광주에서도 그 새벽마다 모이는 학생들한테 그냥 말씀하시고 돌아가시면서 운명하시면서도 혼수상태에서도 제자들에게 토해낸 말씀이랍니다. 그게 뭐냐 하면 복잡에서 단순으로, 복잡에서 단순으로 이상 마치겠습니다.

 (광고말씀 드리겠습니다. 이 덕주 교수님께서는 오늘 강의 마치심으로 또 일이 바쁘신 일이 계셔서 저녁 11시 반 차로 또 서울 올라가시게 되었습니다. 너무 섭섭하고 또 감사했습니다. 개인적으로 생각할 때 내년에도 모셨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내일 아침 새벽기도회는 마찬가지로 아침 5시에 시작해서 6시 30분가지 엄 두섭 목사님 예배로 내일 일과가 시작되겠습니다. 이상입니다. 편안한 저녁 되시기를 바라고 주기도문으로 폐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