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일

기해년 봄 토목공사 : 상한 마음

mamuli0 2019. 3. 4. 08:32

 기해년 초봄 들판 주변에 토목공사가 시작 되었다.


 상한 마음


1994.05.21. 김준호 선생


 돌아가시면서 한주일 사신 영적 이야기를 하십시다. 아삽의 노래 753쪽
하나님께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말씀 하신다. 하나님께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말씀 하신다.  해 뜨는 곳에서 해 지는 곳까지 온 세상을 부르신다. 더할 수 없이 아름다운 시온에서 하나님 환하게 비추신다. 우리 하나님 거동하신다. 잠자는 것도 쉬지 않고 23절에 본뜻이 있지요. 고마운 마음으로 나 하나님께 감사 제물을 바치고 또 23절에도 내게 감사 제사 바치는 이는 나를 영광스럽게 하는 일이니 이런 말씀이 있지요.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제물은 소도 아니고 양도 아니고 피도 아니고 젖도 아니고 물질이 아니다. 고마운 마음으로 나 하나님께 제사지내 감사 제물을 바쳐라. 내게 감사제와 감사제사 바치는 이는 나를 영광스럽게 하는 사람이다. 그런 말씀이 고마운 마음으로 나 하나님께 감사 제물을 바치고 내게 감사 제사 바치는 사람은 나를 영광스럽게 하는 사람이다. 라고 되어있지요. 감사제사 감사 제물을 바친다. 그동안 일하시고 감사하시고 고생하신 말씀을 또 마음에 깨닫는 말씀을 해주세요.



 



 (형제 소감)
 ‘제가 지금까지 지금 이 시간에 제가 살아있는 것 자체 제가 숨 쉬고 움직이는 자체가 곧 큰 은총이고 은총 안에서 살아온 것인데 마리아와 나하고는 어떤 점이 다른 가? 그런 의미에서 생각해 봤는데요. 인제 그 분은 참 은총에 감격하고 감사하는 생활 자기의 전 생명을 하나님께 바쳐지는 그러한 생활이었다. 하는 생각이 들어졌어요. 오늘 우리 352장 찬송 불렀는데 그 은혜에 감격해서 사는 생활, 그 삶이라야 감사하는 삶이되어지고 감사가 넘치는 그런 삶이 됐다. 하는 것을 이론으로는 알겠는데 은혜 속에 살면서도 은혜인줄 모르고 은총을 많이 받고 살면서도 은총을 받은 줄 모르기 때문에 불평이 생기는 것이 아닌가? 알았더라도 아담 때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그 타락 성 그 인간의 본성, 악한 성품들이 악한 나쁜 버릇들이 아직 나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참 생명이 있는 삶을 살지 못하는 것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해봤습니다. 51편 17절에 보면 하나님께 드리는 나의 제물은 찢어진 이 마음 갈기갈기 찢어지고 터진 이 마음뿐이오니 업신여기지 마소서. 50장 14절하고 51장 17절을 오래전에 말씀 받았거든요. 공동번역에는 하나님께 드릴 제사는 감사하는  마음 뿐 이렇게 감사하는 마음이요. 하나님께 드릴 제물은 상처 난 마음 뿐 그렇게 되어있을 거예요. 감사하는 마음이요. 하나님께 드릴 제물이다.



 



 그럼 내가 드릴 것 아무것도 없거든요. 내가 드릴게 뭐가 있겠는가? 다 받은 건데 다만 감사하면서 사는 것. 그게 진짜 감격에 넘쳐서 사는 삶이 아닌가? 어떤 책에서 보니까 감사는 믿음의 표현입니다. 그런 글귀가 있었어요. 감사하고 사는 사람이냐? 불평하고 사는 사람이냐? 따라서 그 사람이 믿음이 있는 사람이냐? 믿음이 없는 사람이냐? 그게 달라진다고 있습니다. 여기 와서는 지금 이번에는 아무 생각 없이 잠만 막 잤어요. 또 어머니께서 저를 어떻게 따뜻하게 해주셨던지 자고나면 피곤이 싹 풀려버려. 그냥, 방바닥이 뜨끈뜨끈 해가지고 참 감사 했고요. 아직 제 이론은 이런데 이게 내 생활 속에서 아직 어떻게 이어져 나가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이 과제로 남아 있습니다. 생명 있는 약동하는 감격에 넘치는 생활이 어떻게 표현 되어야 할 것이냐? 이 점이 그 분께서 주시리라 기대를 갖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2절 부르십시다.


 



 (자매 소감) 
‘얼마나 기뻐했는가? 또 그다음에는 자신이 자신을 용서해야 한다. 그런데 하나님의 그 용서는 선교사의 말이 구약 신약에 많이 있는데 특별히 로마서에 확실히 받아지는데 그런 만큼  또 내가 내 죄와 용서와 제가 더 마음 쓰거든요. 그런데 어떻게 용서가 되나 내가 나를 용서를 못해요. 슈바이처는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들이고 자기가 자기를 용서하고 그러고 다른 사람을 용서한다. 그리고 인제는 말하자면 양심이 안 된다. 죄가 너무 크니까 그렇지만 그걸 스스로 위로를 받으려고 성경을 상고해 보면 분명히 용서를 했는데 어째서 스스로 고집을 하냐? 그런 싸움입니다. 그러니까 그런데서 진정한 감사가 나와요. 참으로 죄에서 해방을 받으려면 체험을 확실히 해야 감사해야 할 것이고 자기가 자기를 용서해야 할 텐데 그럼 다른 사람도 용서가 되나 그러셨는데요. 다른 사람을 참 예수로 보여 지기 전에는 차마 용서할 수 없다. 요새는 워낙 그런 게 있어요. 영의 눈을 떠야겠다. 영의 눈을 뜨지 않으면 안 되겠다. 또 영의 눈이 떠있으면 다른 사람 속에서도 어떤 역사를 알아 볼 거다. 내가 내 마음도 몰라. 그러니까 방황하나 요새 보는 책이 참 감사하다. 그거에요. 책 볼 시간이 제가 목적은 도서볼라고 왔어요. 가망이 없어. 그런데 조금 허전하기도 하고 말씀을 듣는 것만이 내게 너무 과분하지만 그걸 잘 소화하지 못해도 감사해요. 그러니까 그게 그렇습니다. 아무리 말씀을 듣는 기회는 허락해도 받아질 그릇이 문제라는 거예요. 준비가 되었는가? 그러니까, 그러니까 준비가 된 만큼 들어지는 거지, 들을 귀가 있어 들어져야 듣는 거지. 듣게 하셔야 들어지는 거지, 욕심으로 안 된다. 그러나 기회는 허락했으니까 감사해요. 다했습니다.’
 

 



 내일은 주일이고 성일인데 그렇지요?  꽃길 자매님 또 파랑새 자매님 말씀할 때 제가 그때 그날 스물두 살, 세 살 먹을 때 그때 된 일을 또 한 번 말씀하고 싶은데 사연은 교회에서 누가 오라는 사람도 없고 종소리 듣고 한번 찾아갔고 인제 목사를 본다든지 교회 신자를 본 게 아니야. 지금 생각해 보면 참 성령의 움직이심으로 생각하지요. 주일날 예배를 봤는데 어떻게도 강단이 너저분한지 해방 후니까 누가 소제를 않아요. 그런데 제가 어떻게 부끄럼을 잘 타는 사람이든지 사람하고 대화를 못해요. 남자지만 그런데 그 소제를 하려면 도구를 찾아야 할 텐데 물어볼 수가 있어야지. 부끄러워서 그런데 인제 몇 주일 갔는데 그 걸레와 도구가 어느 귀퉁이에 있더라고요. 나중에 딱 봐뒀다가 밤중에 캄캄한 밤중에 가서 인제 물도 받아놓고 그 성당 크지는 않아요? 강단이니까 말하자면 예배당 이지요. 마루 판자로 된 예배당인데 그런데 불을 쓰면 부끄러우니까 캄캄한데서 소리 없이 그 마루를 다 닦고 어떻게 마음이 감사한지 감격스럽고 기숙사에 있으니까 마을로 들어가 버렸고 그래 주일 밤은 몇 번 그렇게 하다보니까 참 기뻐요. 그러자 겨울이 되어버렸으니까 눈이 많이 오고 또 차츰차츰 성당은 말하자면 예배당 이니까 하나님의 집이고 아버지 집인데 어떻게 아버지 집을 그냥 훌훌 떠날 수 있을까? 그런 감정이 일어나가지고 분명히 목사님이 주인이고 목사님 사택이 안에 계신데 그렇게 인간 대화를 못해요. 부끄러우니까



 



그래 전혀 허락도 받지 않고 요 이불을 갖다가 예배당에서 자기 시작했는데 그래 인제 목사님도 지금 살아 계시다고 팔십 몇 세, 그분도 무던한 분이지요. 일체 묻지를 않아. 이름도 안 물어보고 왜 강단에 자냐는 말도 안하고 그런데 그때 사모님이 첫 아이를 낳았든가 업고 낮에 떡을 좀 갖고 오시더라고, 낮에 눈이 와서 앉아있으니까 저를 선생이라 부르데요. 아이고, 선생님 밤에 마루를 닦으시는걸 알고도 내가 같이 나와서 해야 되는데 못했다고 얼마나 부끄럽던지 아주 부끄러워요. 그래 시간 있으면 눈이 많이 오는 겨울날 주일날 아닐 때 그 요하고 이불은 한쪽에 뒀으니까 그래 가서 책을 보고 있는데 이 승학 국회의원 되었지요. 그 다음에는 초대 국회의원 그 어르신이 장로인데 검소하데요. 아주 찾아와서 저는 아주 젊은 소년이고 그 분은 높은 어른인데 무릎을 딱 꿇고 청년 우리 보면 낙심 할 것 입니다. 목사나 우리 장로나 집사 우리들 보지 말고 예수 믿으십시오. 실상 우리나라에도 잘 믿는 분 있습니다. 그 분들이 광주에 사시는데 목수요. 목수를 하시는 분인데 그 분들이 잡수시는 것은 미군 깡통 이지요. 한 되 들어가는 그 깡통을 철사를 끼워가지고 달아놓고 목수들 이니까 대패 밥을 때서 그 깡통 안에는 된장 하고 호박잎 풀 통보리를 푹 소죽같이 고아가지고 한 술씩 잡수시고 그 목수하시면서 사시는 분들입니다. 그런데 그 분들이 우리 교회 한번 오실 것입니다. 그렇게 잘 믿는 분계시니까 그런 분 보시고 낙심하지 말라고 그렇게 아주 겸손하게 꼭 천사를 만난 듯이 그렇게 아주 겸손하게 말씀하고 나가시데요.



 



그 말 들을 때가 엄동설한 이니까 가을에 오신다고 그래요. 원하고 바라고 기다리시던 젊은 분들이 오신다고 그러시는데 어느 가을날 오신다고 그러대요. 해방 후니까 이 버스가 아직 없어요. 한국에, 아직 광주서 해남까지 버스는 없고 한 달에 한 세 번 네 번 버스가 오고가고 하면 손님이 얼마나 많던지 탈수 없지요. 아주 기회가 없고 그래 트럭을 타고 오시데요. 해가 저무는데 그렇게 바라던 분이 오신다는데 동구 밖에 나가봤더니 근35세쯤 되는 두 분이 두 분 다 머리 깎고 조끼도 안 입고 바지저고리 홑바지지요. 맨발 벗고 내리는데 한 분은 일본사람이 지는 니꾸사꾸지요. 거기 톱이 하나 쭉 보이더라고요. 니꾸사꾸를 지고 톱을 짊어진 분이 그때 오 장로님이시지요. 한분은 그냥 참 살이 하나도 없는 바짝 마른분인데 그 벌써 일 년 전부터 말을 들었기 때문에 잔뜩 호기심이 있어가지고 첫눈에 낙심이 가버리데요. 나는 근사한 분이 오시는 줄 알았는데 오메 거지가 나타났어. 아이고, 볼품도 없이 아이고, 저런 사람이 뭐 예수 믿는가 싶습디다. 전혀 눈에 안보여요. 영안이 없으니까, 내일 아침에 말씀 한다고 물론 제가 강단에 자니까 자연스럽지요. 그런데 여자 집사님도 한 20명오시데요. 새벽에 세시나 두시나 되었는데 이 분은 강대상이랄지 이런 좋은 책상을 기피하신다. 밥상을 갖다 놓더라고요. 일부러 밥상을 딱 갖다놓고 국화꽃을 꺾어다가 꽃병에 놨더라고요. 이 선생님이 성경을 들고 보시는데 묵시록이야. 아마 지금 생각하면 묵시록이야. 처음 듣는 말이니까 나 예배당에 다닌 지도 얼마 안 됐으니까 흰말이 뛴다하고 검정말이 뛴다하고 그렇게 들리지 뭔 소린지 성경말씀은 전혀 모르겠는데 성경 말씀하시기 전에 새벽 아주 가을 공기가 차겁지요. 쓸쓸하고 첫 음성이 나오는데 꼭 여자소리야. 남성 소리가 아니야.



 



 지금 생각하면 굶어서 그러신 것 같아요. 꼭 여자소리로 조그맣게 나오데요. 말이 음성이 국화꽃을 이 죄인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꺾어다 놓으셨는데 이 국화꽃은 꺾지 말고 거기 두고 보셨어야 합니다. 어찌 이렇게 그러는데 그 소리가 들어 가버려요. 말이 안 나와 버려요. 그 감성 그 음성이 어떻게 부드럽고 따뜻하고 자비가 서려있어요. 그러니까 국화꽃이 꺾어진 것이 아니고 요새 말하자면 아주 10대 20대 소녀들이 유혹해 가지 않습니까? 어떠한 범법을 한 영혼이 그 참 너무 마음이 아파서 숨이 막힐 것 같은 그 감성이지요. 그 어른들이 꽃을 손으로 보거든요. 이 꽃은 손을 대지 말고 멀리서 봐야하는데 그대로 봐야 할 텐데 아 이 죄인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이런 꽃을 꺾어 오셨어. 말이 쏙 들어가는데 어떻게 간절한지요. 마음에 쏙 그 말씀이 들어오더라고요. 그 인격을 아 저런 분이라면 저도 앞으로 세상을 살아가야 하니까 이 땅위에서 앞길이 막히고 마음이 답답하다면 저분이 어디 살고 계시던지 쫒아가서 내 신상문제 내 인생 문제를 같이 의논할 만한 분이시다. 그렇게 느껴지더라고요. 어떻게 국화꽃에 대한 자비심 이지요. 불쌍히 보는 마음이 대단히 마음에 등불이 되었지요. 아주 꽃다운 등불이야. 향기가나. 그 말씀이 어떻게 그 말씀이 좋던지 그 국화꽃을 한 송이 꺾어가지고 일기장에다가 일기를 쓰면서 넣어두었지요. 그러자 5년 후에 육이오가 일어나지요. 육이오 때 벌써 이 선생님이 한식구가 되었으니까 그 일기장을 꼭 갖고 다녔다고요. 등허리에 지고 다녔어. 육이오 때는 성경도 땅에다 묻어놓고 다녔다고요. 도구박골에 묻어놨었지요. 그 묻어놓고 항상 그 일기장이랄지 국화꽃이랄지 그게 지금도 안 썩었을 것 같아요. 느낌이, 영원히 살아있어요.



 



그 정이 말이야. 한 십년 후에도 아 거기 안 썩고 있겠지, 그렇게 착각이 일어나요. 안 썩고 있겠지. 그건 마음이지요. 마음, 저렇게 국화꽃을 저렇게 불쌍히 보고 꺾인 것을 애절하게 생각하는 저 마음은 자비심인데 아 내 영혼이 상처 입었을 때는 저렇게 애타게 사랑하고 걱정해 주시겠다. 그렇게 받아들였기 때문에 그리고 인제 갈렸지요. 성경말씀은 무슨 뜻인지 모르고 국화꽃 사연이 영적인 이제 소위 말하면 접선이 되는 것인데 그 스승 만나기 전에는 제가 이제 병원에서 있다가 왔으니까 학문적으로 의학을 했으면 했어요. 그래 학교를 입학했으면 요새 같으면 고시 준비 하지요. 시험 준비하고 있었는데 그런 것들이 다 멀리가 버렸어. 의사 되어 봐도 천하에 유능한 의사가 되어 봐도 그러면 약이 좋고 의술이 좋으면 병이 없어지는데 다 병이 없어질 텐데 그러면 병이 없으니까 백 살 이백 살 삼백 살 그때 늙어서 수명이 다할 때는 약이 없지 않냐? 그러니까 결국은 의사 질을 하는 것은 백년 이백년 생명을 연장 시키는 것에 불과하지 근본적 해결이 없다. 어떻게 허무한지, 의학을 해서 의사가 되어서 천하에 유명한 의사가 된들 그러면 생명을 연장하는 것에 불과하지 근본적으로 사람을 안 죽게 할 수 없겠다는 절망감, 그렇다면 구태여 의학 공부는 할 필요가 없더라고요. 안 죽게 하기 위해서 뭐 영업이 아니니까 생명을 영원히 살리기 위해서 하는 학문이라면 이 공부는 허무하다. 그러면 영원히 죽지 않는 학문이 있을까? 그때 생각은 신학이라고, 신학만 바로 해 놓으면 사람이 영원히 죽지 않을 수 있는 의사가 될 수 있겠다.



 



그렇게 소위 말하면 예배당에서 자면 추우니까 잠이 안 오니까 아주 곰곰이 생각해. 그렇다면 역시 영적인 빛을 비추려면 학교를 다녀야 할 것이 아니라 그 이 선생님을 내가 찾아가야 하겠다. 그런 결론에 이르러 가지고 인제 이 선생님을 찾아 나셨지만 한 일 년 동안 찾지 못했어요. 행방불명이야. 광주 올라와서 객지에 와서 돈이나 뭐 조금 가지고 온 것 다 떨어지고 참 걸인 되다시피 했지요. 매일 행방불명인데 오늘이나, 오늘이나 오실 줄 알았지요. 그래 일 년이 가버린 다음에 객지에서 한 일 년 있으니까 옷도 아주 더러워지고 참 추리하게 되어가지고 그래 YMCA 그 청년기숙사 고학생들 청년 기숙사가 있기 때문에 YMCA 홀을 찾아가서 거기서 잤지요. 밥은 친구들한테 얻어먹고 참 객지에서 과객인데 객지에서 밥 얻어먹고 이리 갔다, 저리 갔다, 그렇게 세월을 보내다가 바야흐로 선생님이 오셨어요. 그때도 2월 달 추운 초봄인데 그때 정 인세 원장님이 YMCA총무로 계셨고 일본 사람들이 다 쓰던 관사이기 때문에 불 때는 방이 없어요. 다다미방인데 이 선생님 거기와 계시다는 정보를 듣고 가서 뵈었어요. 그래 어떻게 나는 남자도 아닌가봐. 그렇게 일 년을 기다렸으면 인사라도 해야 될 거 아니에요? 말로 뛰뛰 하니 앉았어. 인사도 않고 옆에 앉아있어. 그러니까 왜 방에 들어왔냐고 묻지도 않아. 내버려둬. 그분도 무던한 분이야. 옆에 있건 말건 놔두시고 그래 인데 추우니까 정 원장님이 그때는 연탄을 때지 않을 때야. 무등산 나무 갖다 땔 때니까 장작을 때서 불을 때서 밥을 해 잡수시고 누른 밥을 해 드릴 때야. 안 잡수시고 그 화로에다 불을 담아드렸습디다. 장작불,



 



그걸 이렇게 불을 찌르시는데 그 불이 다 흰 재가 남았더라고. 그 불살이 있지요? 불 수저 불 쇠로 만든 불 수저로 불이 안 꺼지도록 여미지요. 가득하니 재만 남아있어요. 그러니까 한 시간이나 흘러가지요. 방안에 고요한 공기만 찬데 처음으로 들리는 소리지요. 이화로 속에 있는 불이지요. 불 이것만 안다면 이것만 안다면 혼자 하시는 말씀이지요. 아 이것만 안다면 천하만사를 다 알 수 있을 텐데, 불을 따북 따북 여미며 이것만 안다면 천하만사를 다 알 텐데, 혼자 하시는 말인지 옆에 있는 사람 들으라고 하는 말인지 그 가슴에 꽉 박히더라고요. 한 시간을 침묵하다가 그 소리 하니까 꽉 박히지요. 그렇게 살게 되었다는 거고 그래 제가 그동안에는 인제 선생님이 안계시기 때문에 그 동안 많은 분을 찾아뵈었지요. 젊은 날에는 막 몸을 아끼지 않고 일을 해줘버리면 누구하고든지 한 식구가 되어버립디다. 그러니까 최 흥종 목사님을 찾아가면 불때주던지 심부름 하면 아이고 여기 같이 살자, 별장에 계시거든 허 백련 선생이라고 허 의제 선생 동양화가지요. 그분도 접속이 되었는데 불때드리고 밥해드리고 하면 나하고 천년만년 같이 살자. 그래요. 절대 어디 못 가게 같이 살자. 한 식구가 되어버려. 그래 조석으로 많은 것을 가르쳐주고 그림을 가르쳐주고 그 밑에 있으면 유명한 사람 되겠지요? 그 밑에 있으면 그 철학가 조선 철학가 부자이신데 김 천배 선생이라고 그 분하고 있는데 조금 일해 드렸더니 그분 아주 한 식구가 되어가지고 아무데도 못 가게 해. 같이 살자고 공부하고 싶으면 학교도 보내주고 공부를 하라고 막 장려를 해요. 나이가 젊으니까 공부 하라고 그래서 인제 증심사 암자 하나를 빌려가지고 둘이 살았다고요.



 



철학부 교수하고 그분은 출근하시고 저는 집지키고 그러니 객지에 나와 가지고 귀족대접을 받았어. 이 선생님 기다리는 동안에, 그러다가 선생님 오셨다는 소리를 듣고 찾아갔어. 선생님을 보니까 그건 상관이 없단 말이야. 아무것도 없어. 손바닥 딱 벌리고 앉아계신데 아까 말씀대로 다 일본사람 쓰던 집이라. 불 때는 방이 없어요. 아무데도 그래 제가 이렇게 물었다고 지금 김 천배 선생님하고 같이 사는 것은 학문을 해야 하니까 학교를 가야하니까 그 분하고 같이 살다 왔는데, 김 천배 선생님이 같이 살자 하시면서 같이 있었습니다. 대기는 만성이다. 큰 그릇으로 느껴진다. 는 말이야. 대기는 만성이니 청년은 공부를 하라. 이렇게 말씀합디다. 그랬어요. 이 선생님은 이래요. 똑같은 소리해요. 대기는 만성이니 먼저 마음에 평안을 얻어라. 대기는 만성이니 공부를 하라. 저쪽은 그러시고, 대기는 만성이니 먼저 마음에 평안을 얻어라. 말이 달라져 버리더라고 상당히 생각했지요. 한 석 달 그래서 아 역시 이 선생님 말이 옳다. 대기는 만성이니 공부를 부지런히 하라. 그 말보다는 대기는 만성이니 먼저 마음에 평안을 얻어라. 학문은 필요하면 늦게라도 할 수 있다. 그래 인제 이 선생님 말씀이 훨씬 제게 맞았어요. 그래서 가사 이 선생님을 인제 따라서 사는 것은 거지가 되어버리는 것뿐이고 아무 소용없이 다리 밑에 사는 거고 저 어른들 따라 사는 것은 이제 황금이 앞에 보이지요. 취직해가지고 돈 벌고 영달하는 길이니까 그쪽을 생각하면 마음이 괴로워요. 아주 마음이 불이나. 이 선생을 생각하면 고생스러워도 마음이 평안해. 역시 선생님을 따라가야 하겠다. 그래서 선생님을 찾아갔는데 그 분이야 아무것도 없지 않아요?



 



YMCA 홀을 하나 빌려가지고 전 식구가 사는데 아이들이 한 10여명 소년들, 여덟아홉 열 열한 살 먹었는데 다 출가한 애기들, 지리산에서 살다온 애기들인데 갑자기 객지에 와가지고 먹을 것이 없다고. 그런데 그때 박 갑주 집사라는 분이 보리 한말을 드렸든가 통보리 그리고 소금 한 되를 주셨던지 굵은 소금에다 통보리 그것을 이렇게 삶아가지고 그것을 나눠 먹더라고요. 그래서 하루 한 끼나 두 끼 어린 소년들이 그러니 부모 슬하에 있던 애기들이 객지에 나와 석 달이 되니까 옷을 누가 빨아주는 이가 없다고요. 아직 이 공동체 형성이 되지 않을 때니까 어머니들도 안계시고 이가 생기기 시작하는데 겨울이니까 어떻게 이가 막, 그런데 여러분 아실라나 몰라. 그러니 해방 후니까 이불이 솜은 없고 헌 누더기 주워가지고 이불을 크게 만들었어. 이렇게 크게 한 십여 명이 덮어도 이불이 하나야. 이가 많으니까 근지러워서 잘 수도 없고 전부 꾀를 벗자고 그래요. 그건 어쩔 수가 없어. 상수야 꾀를 다 벗고 방이 추우니까 소년들은 발을 딱 모아놔 열 개를 발이 스무 개 아니야? 어떻게 뜨거운지 발이 이불속이 후끈후끈해요. 저는 덕 보지요. 이이들 덕 보지요. 그렇게 해서 그냥 옷을 다 벗어놓고 잠자는데 밤중에 몇 달이 지났든가 젊은 사람은 잠이 깊지 않지요? 어떻게 해서 잠을 깨서보니까 불을 전기를 딱 켜놓고 그 옷에 열사람 옷이니까 우 아래 스무 개 아니야? 전부 자치면서 이를 잡고 계시더라고 그때 이를 죽이지 않는 분이야. 성냥갑을 딱 갖다 놓으시고 이가 굵거든. 전부 주워 담아. 이렇게, 이렇게 그러니까 매일 밤 오셔서 그랬던가 봐요. 나는 몰랐지. 원체 잠이 깊어가지고 알았어, 알고 그러니까 불을 탁 꺼버리데요.



 



이 선생님이 제가 아니까 소리 없이 앉아있어. 제가 잠을 안자고 부시럭, 부시럭 하니까 혼자 말씀하십디다. 저 들으라고 쥐 에게다 말 구루마 말 수레 말이 끌고 가는 달구지지요. 그러니까 소달구지라고 쥐에게 소달구지를 채워서 끌고 가라 하면 잘 갈수 있을까? 혼자 하시는 말씀처럼 하신다고, 또 쥐가 끌고 갈 만한 달구지를 만들어 가지고 소에게 끌고 가라 하면 끌고 갈수 있을까? 그러니 균형이 안 맞지요. 안 들리니까, 그렇게 자문자답 하시는데 저 들으라고 하시는 거야. 그러니 제가 예수를 믿고 싶다는 사람이 너무 허영이 들떠가지고 뭐 의사가 되고 싶고 박사가 되고 싶고 그러니까 그 격에 맞지 않는 욕심을 버리라는 뜻인 것 같다. 그렇게 해석을 했어. 아 나 허영을 버리라는 말씀이구나. 그렇게 인제 혼자 하신 말씀이지만 받아들여요. 그거에요. 또 그러니 딱 앉혀놓고 훈시 안하셔. 혼자 하시는 것 같이 말씀 안하셔. 혼자 하는 것 같이 비단 요를 딱 깔아놓고 고름이 나는 문둥이가 드러누워서 자고 있으면 그게 행복할까? 문둥이가 고름이 뚝뚝 떨어지는데 비단 요를 깔아놓고 덮고 있으면 그것이 행복할까? 그래 꼭 나 들으라고 하는 거를 혼자 하셔. 아 저분이 나 들으라고 하는구나. 듣고 있지. 해설은 안 해주시니까 그 말씀이 늘 가슴에 배기는 거예요. 뭐 이 선생님이 여간 성경을 안보세요. 여간 인색한분, 성경말씀 별로 안보시고 인제 아주 몸이 건강하고 가난한 청년이지만 몸이 건강해서 뙤약볕에 가서 흙을 판다. 꿍꿍 일을 하면 얼마나 좋을까? 아 그러면 좋겠다. 듣는 사람은 차라리 문둥이 되어가지고 비단 요 깔고 노는 것이 좋은 것이 아니고 건강한 몸으로 뙤약볕에 가서 일하는 것이 좋겠다. 스스로 마음에 탁 새겨 지더라고요.


 



그래 오래 설교하시면 자버려요. 설교는 전혀 취미가 없고 성경말씀 하면 아주 피곤하고 그냥 자버리고 그런 격언 말씀하실 때는 속으로 새기지요. 그런 거예요. 같이 살지도 않았어. 잠깐 한 이틀 삼일 사시면 또 출타하시거든요. 서울로 뭐 목포로 부산으로 전도여행 가시면 안계시고 아이들을 맡겨 놓으셨으니까 그렇게 쭉 살아왔지요. 쭉 그럼 아까 왜 이야기를 하냐하면 그 이 상학 장로님이 우리보고 믿으면 낙심한다고 우리보고 예수 믿으면 안 된다고 우리보다 예수 잘 믿는 사람 있소. 그런 분은 보고 청년은 낙심하지 말고 본받고 믿으라고, 그 분이 오 장로님하고 이 현필 선생 이었어. 훗날 보니까 소개를 해 주셨어. 소개, 아까 꽃길 언니가 동광원 소식을 들었다고 나는 그렇게 들었어. 예수 믿는 분들이 미군 깡통하나 걸어놓고 된장하고 호박잎하고 통보리하고 소죽같이 쒀가지고 한술 잡수시고 찬송가 부르고 목수일 하고 있다고 그렇게 나는 들었거든. 그때 아주 호기심이 일어났어. 그때, 야 한번 만나봐야 쓰겠다. 정작 만나보니까 실망이야. 거지같은 사람이 뭔 예수 잘 믿을까? 이상하다. 눈으로 안 봤을 때는 그렇게 마음이 끌렸는데 정작 봐버리니까 전혀 모르겠더라고요. 그런 나를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어떻게들 듣고 아시는가? 몰라도 또 이 선생님이 소개를 해요. 나는 말 뿐이고 예수는 그때 오 집사에요. 오 집사가 예수를 잘 믿소. 오 집사를 본받으시오. 말 잘 안 해요. 벙어리 같은 오 집사를 뭣이 잘 믿어? 전혀 시선이 안가요. 그때 선생님이 괜히 한 말이다. 세월이 가니까 그 말이 그렇데요. 말 잘 하는 것은 가짜고 말없이, 오 장로가 진짜 예수꾼이로구나. 오래 살다 보니까 그때 조금 믿어지더라고. 그 젊은 나이는 전부 외적인거 그것이 눈에 보이더라고. 너무 시간 많이 썼네요.  209장 다시 부르십시다.(끊김)



 



 이스라엘을 가르치시다. 내가 오늘 여러분에게 명한 모든 계명을 그대로 지켜 행하십시오.  그래야 여러분이 살아남아서 번성하게 되고 여호와께서 여러분의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땅에 들어가 그것을 차지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고집을 꺾기 위해서 수난 고난을 주신 것이다. 또 교만해져서는 안 된다. 그런 말씀이 나옵니다. 2절부터 보면 여러분이 하나님의  여호와께서 지난 40년 동안 저 광야에서 여러분을 인도해 주신 그 여정을 모두 되돌아  보십시오. 그 목적은 여러분의 고집을 꺾어  (끊김)
 2절부터 보면 여러분들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지난 40년 동안 저 광야에서 여러분을 인도해 주신 그 여정을 모두 되돌아보십시오. 그 목적은 여러분의 고집을 꺾어 고집을 꺾어 (끊김)



 



 한 시험길 인생 일생이 시험이지요. 한 시험 길을 주시는 것은 고집을 꺾고 겸손하게 하시려는 섭리시다. 그런 말씀 되겠습니다.
고집을 꺾고 여러분들에게 순종하는 마음이 있는가를 시험 하시려고 굶주리고 목마른 고생길로 인도하셨으나 이것은 나중에 여러분에게 복을 주시려는 것이었습니다. 16절로 요절로 합시다. 따라 읽으십시오. ‘광야에서 여러분에게 여러분의 조상들도 모르는 만나를 먹여주셨습니다. 주께서는 여러분의 고집을 꺾고 여러분에게 순종하는 마음이 있는가를 시험하시려고 굶주리고 목마른 고생길로 인도 하셨으나 이것은 나중에 여러분에게 복을 주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신명기 8장 16절 말씀.’문헌상 책을 보면 예수님께서 사랑하는 제자에게 나타나셨을 때 그리고 사랑하고 존경하고 참 의지하던 주님이 목전에 나타났을 때 하고 싶은 말이 다 있겠지요. 사람, 사람이 그럴 때는 그 하시는 말씀을 들어보면 한 말씀 해 주십시오. 그런 부탁을 했어요. 한 말씀만 해 주세요. 한 말씀만 해 주시면 내 영혼이 구원을 받겠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는 미소를 띠우시면서 아무 말씀도 안하시고 나, 그러셨다고 그러지요. 나, 그 말씀을 알아들을 수가 없어서 뜻을 모르니까 그 무슨 뜻입니까? 다시 발음하시기를 나, 그러셔요. 그래도 못 알아듣겠습니다. 그 무슨 뜻입니까? 또 나, 그러시더라고 그래도 그 뜻을 못 알아듣겠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네 번째도 나, 그 말씀 하시고 이제 홀연히 온데간데없으셨지요.



 



네 번 말씀 하셨어. 나, 똑같지요. 이 말씀 고집을 꺾고, 겸손해 져야 한다. 살아계실 때 하시던 말씀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나, 그 다음 말을 하셨지요. 살아계실 때 나를 버리라고 하셨지요. 평소에 하시던 말씀이 나를 버리라. 또 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 그리고 나를 쫒아오라. 그 말씀을 회상시키신 것 아니겠어요? 회상, 나를 따라오려거든 너를 죽이라. 너를 부인하라. 너를 십자가에 못 박고 나를 따라오라. 그렇게 인생은 나를 성화시키는 시험의 길이니까 나를 천지만물이 다 그래요. 그 채소벌레가 다 컸나보지요. 얼마나 시련을 겪고 모진 겨울날 어디에 알이 숨어 있다가 봄날 까가지고 그동안 풀잎을 먹고 커서 이제는 처마 밑을 기어 올라가서 나비가 될 준비를 해요. 벌레를 보더라도 그 생명이 알에서 까나가지고 나비가 되도록 까지 시련이에요. 시련, 사람 같으면 고생이지요. 비가오고 바람이 불고 밤에는 영하로 내려가기도 하고 참고 모질게 죽지 않고 완성이 되지요. 생명이 다 컸지요. 보리를 보나 사람의 일생은 또 씨를 심었지요. 가을에 새 순을 심었는데 겨울에 죽지 않고 시금치가 되어요. 모질게 죽지 않고 커서 화로 속에 이제 새 봄을 만나가지고 그때는 다 크지요. 저는 이 선생 처음 만났을 때 불을 여미면서 이것만 알면 모든 것을 다 알 것이다. 살아가는 인생이라는 것이 많은 불과 물의 시험을 주시지 않아요? 밤에는 불기둥으로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시련을 주시지요. 그걸 체험하므로 겪음으로서 천지만물은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되는 거지요. 어느 시인의 말 ‘너 작은 꽃아, 네 몸이 비록 적을 지라도 내가 너를 아는 날 나는 하나님도 알고 하나님 마음도 알고 또 사람이 내가 무엇인지도 알고 또 하늘땅을 만드신 모든 뜻이 무엇인 것을 다 알 수 있겠다.’꽃 한 송이만 안다면 성경을 알 수 있을 것이고 하나님의 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또 내가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을 다 알 수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산에 와있는데 또 오늘은 산을 또 가는 것이 깊이 들어가는 것이니까 역시 시험길 인데요. 넘어지려는지 또 고생이 되겠지요? 그러나 그 고생길은 자기를 성화시키는데 응용이 되지요. 자기를 겸손하게 하는 거지요. 그래 결국은 길이니까 길 오르는 길을 가는데 올 때는 얼마나 쉬울까요? 내려오니까, 그래 더러 이번에 금년도에 우리가 처음으로 만나게 된 정신운동 가운데 터널을 우리가 배웠거든요. 터널, 예수님 말씀과 똑 같습니다. ‘나는 길이다.’나는 항상 그 나는 무슨 말씀을 하시는가 하니 진리의 길은 나는 진리인데 진리는 무엇이냐? 나는 진리다. 길이다. 나는 길이요. 나는 길이요. 예수님 하신말씀 선은 길입니다. 그렇게 되어 있어요. 길은 진리다. 선도 진리를 추구하는 일종의 정신 운동이니까 이 정신 운동은 길입니다. 진리를 추구하는 길입니다. 참을 발견하는 길입니다. 생명의 원리를 깨달아가는 길입니다. 심복 마음의 복을 배우는 길입니다. 그런데 이 길은 영원한 길입니다. 영원한 길 끝이 없는 길 예수님도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생명이야말로 영원한 것이지요. 생명이 끝나버리면 생명이 아니지요. 죽음이니까 예수의 길은 영원한 생명이다. 영원한 생명 일 년이 가도 십년이가도 백년이가도 천년이 가도 만년이 가도 억 억만 년이 가도 끝나지 않는 것이 생명 길이다. 영원히, 영원히 가는 길이다. 끝없이 가는 길이다. 사람이 제일 슬픈 게 끝나는 거지요. 죽을 때 다 울지 않아요? 끝났다고 착각하는 것이니까 허물이 벗어지는 것을 몰라보고 끝났다고 믿기 때문에 모두 울지요. 본인도 서러워하고 타인도 서러워하고 그러나 참 영원한 길은 끝이 없는 길이다. 무한한 길이다. 영원한 길이다. 마음 길이 그렇다는 거지요. 선이 그렇다는 건 아닙니다.



 



그러니까 선이라는 말은 외국 말이니까 남의나라 말이기 때문에 우리말로 번역하면 고요한 마음이다. 고요한 마음 또 깨끗한 마음을 말한다. 깨끗한 마음과 고요한 마음은 영원한 것이다. 영원히 가는 길이다. 끝이 없는 길이다 영원한 길이다. 생명의 길이다. 나는 생명이다. 나는 진리다. 이 말은 참말이다. 거짓말이 아니다. 참말이다. 영으로 가는 길은 영원한 길인데 이것은 참된 말이다. 참된 길이다. 영원하다. 예수님이 나 나 네 번 한 뜻은 거짓 나를 허물을 벗으라. 거짓 허물을 벗으라. 참 생명이 나타날 수 있도록 껍질을 벗으라. 거짓말을 죽이라. 그래 벌레를 알면 나를 안다. 그 말은 벌레가 일곱 번 허물을 벗어요. 자꾸 나를 죽여. 그렇게 함으로 나비가 되는데 생명을 완성하는 거지요. 그건 계시지요. 계시, 우리에게 편지를 주시는 것, 사람의 생명은 이와 같이 껍질이 자꾸 벗어짐으로서 완성이 되는 것이라고 하신 편지를 써주신 것이다. 천지만물은 계시되어 있지요. 계시 하나님의 말씀이 나타나있지요. 우리가 산에 가는 것도 산을 관찰한다. 산을 사랑한다. 산을 맛본다. 산을 걸어간다. 다 인생길 아니겠어요? 인생이 가는 길 퍽 반가 왔던 것은 여기 십년이 다가도 산에 사는 사람들은 산에 눈을 뜨지 않았어. 항상 부엌에만 있어. 얼마나 안타까워 산에 왔으면 산에 올라가야 할 텐데 전혀 동심이 아니야. 마음이 눈을 뜨지 않아 금년에 눈을 떴어. 아 산에 가봐야겠다. 집에서 벗어나야겠다. 얼마나 큰 성장해요. 얼마나 영혼이 컸어요? 이제는 알속에서 까 가지고 벌레가 되어 기어 나왔어. 기어 올라가 봐야지. 얼마나 올라갈지 왔다 갔다 하면 나중에 허물이 다 벗어지면 나비가 되겠지요? 훨훨 날라가지고 주님 계신 나라 천사계신 나라로 날라 갈 날이 오겠지요.



 



그 희망, 그런데 몸을 갖고 있는 동안에는 고생을 주신다. 왜 껍질을 벗기 위해서 그리고 영혼이 있기 위해서 여러분의 고집을 꺾고 여러분에게 겸손한 마음, 겸손함을 주기 위해서 겸손한 마음이 되도록 시험하시려고 굶주리고 목마르고 목마른 고생길로 인생을 인도 하시는 것이다. 결코 아버지께서는 미워서 그러는 것이 아니고 사랑해서 그러는 것이다. 인제 영원한 나라 영원한 아버지 나라에서 평화를 주시려는 것이다. 나중에 여러분에게 복을 주시려는 것입니다. 신명기 8장 16절은 곧 편지 아니겠습니까? 인생길이 고달프고 아프고 또 공포심도 있다고 그러지요? 무섭기도 하고 놀래기도 할 수 있지만 그런 과정을 겪음으로서 고집이 없어지고 영혼이 이것으로서 겸손해 지는 날  곡식이 익듯이 또 나비가 다 커서 하늘을 날듯이 결국은 생명의 완성 영적 평화를 주시려 하는 것이다. 그 말씀이 옳지요.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인생을 40년 주기로 40년 살면 40이지요. 다시 살면 80살 이지요. 또 다시 살면 120살, 40주기를 주시고 우리를 여러 가지 시련을 훈련을 시켜 저 광야에서 여러분을 인도해 주신 그 여정을 모두한번 생각해 보아라. 한 20이 넘어가면 공포심이 있어야지, 두렵고 떨려야지, 인생이 너무 알 수 없는 길을 처음으로 가기 때문에 항상 불안해요. 그 목적은 여러분의 껍질을 벗긴다 말이에요. 고집을 꺾어. 고집을, 고집을 꺾고 영원히 익어가요. 겸손하게 그렇게 살이 찌도록 겸손하게 낮추어 지도록 또 얼마나 컸는지 스스로 깨달아 지도록 여러분이 과연 하나님의 아들딸이니까 하나님의 아들 딸 답 게 살 수 있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는 그것을 하나님께서 바라신다.



 



여러분의 마음을 한번 알아보시고 싶어서 그러신다고 다 컸는가? 많이 큰가? 더 큰가 덜 큰가? 잘 큰지? 시험 하시려고 알아보시는 것입니다. 주께서 여러분의 고집을 꺾으실 때 그럼 어떻게 해서 껍질이 벗겨지고 자기가 부정되고 자기 영혼이 커 가냐? 굶어도 봐야한다. 굶주리고 꼭 밥만 굶어야 한다는 게 아니에요. 영적으로 서러움, 영적 고독, 영적 아픔이지요? 마음 아픔 마음쓰리고 아프게 해주신다고 굶주리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때까지 여러분도 그러면 꼭 하나님이 나를 미워서 그러는지 나를 왜 때리시는가? 그건 알 수 없어요. 실제는 영적 양식을 주기 위해서 마음의 양식을 주기 위해서 그러시는 거다. 영원한 생명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그런 것이다. 부모도 모르고 또 선생님도 모르고 모든 사람들이 몰라요. 왜 이렇게 내게는 시련이 부닥치는지 왜 내게는 고민이 오는지, 내게는 왜 고독이 오는지, 나는 왜 이렇게 마음이 초조해 지는지, 그 이유를 몰라요.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이다. 만나를 주시기 위해서이다. 만나는 이것이 무엇이냐는 뜻이라지요. 밤중에 내리는 이슬 이니까 그걸 구해다가 먹었다. 참 생명, 참 깨달음, 마음이 열려지라고 그러신다.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참 밥을 참된 양식 참된 음식 하나님의 뜻을 깨닫기 위해서 그런 것이다. 만나를 주시려는 것이다. 하나님의 음식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시련과 역경과 불안과 고통과 고독과 쓰린 마음을 주신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만나를 주신 목적은 사람은 밥으로만 하나님이 주신 밥이라는 것은 사람이 먹는 밥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살라고 깨달으라고 그러시는 것이다.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마음으로 깨달아지는 것이 인생이 커가고 여물어 가는 것이지 입으로 먹는 밥만으로 그러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음성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영이지요. 영적 사람은 영혼이 커야 사람이 아니겠어요?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주께서 여러분에게 가르치시려는데 있습니다. 역시 그 말씀이 되지요. 인생 일생이 내 마음대로 안 되는 것은 너를 미워서 안 되는 것이 아니다. 영혼이 크라고 만나를 먹으라고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으라고 그렇게 인생 일생에 여러 가지 시련이 부닥치는 것이다. 산에 오르는 것도 일종의 시련입니다. 시험 길이에요. 보통길이 아닙니다. 성숙하기 위해서 좀 어려운 길을 가보는 거지요. 190장 찬송입니다.  



 



 주신 말씀 가운데 길이다. 동양 사람들은 한문을 했기 때문에 길이라고는 못 알아들었어요. 저 사람 도(道) 군이라. 길도(道)자에 한문으로 말해요. 도(道) 군이라. 뭔 도(道)요? 나는 예수도(道)요. 예수라고 하는 사람이 가르쳐준 길이라는 거야. 당신은 뭔 도해요? 나는 불 도(道) 한다. 당신은 뭔 도(道) 믿소? 나는 공자 도(道) 믿소. 길, 길을 간다. 그 뜻이지요? 한문으로 풀었지요. 그러면 그럼 무슨 길이요? 마음길이요. 마음 마음길이라는 거예요. 우리를 지도하시던 유 영모 선생님은 고요할 정(靜), 천국이 고요하지 않아요? 천국은 고요한 곳인데 고요해야 마음이 편안하지요. 한문 글자로 푸를 청(靑) 옆에다가 싸울 쟁(爭)을 했다. 얼마나 푸르냐? 그걸 싸우는 것이 고요함이다. 그렇게 풀어서 한문 글자니까 도는 길이고 고요함은 푸르른 것은 싸우는 것이다. 그것이 고요함이다. 무엇이 푸르느냐? 나무지요? 나무, 누가 더 파란지 경쟁합시다. 그럼 나무가 형성 되는 것은 씨가 햇빛을 받아가지고 크지요? 무슨 나무든지 생명의 씨가 햇빛을 머금은 쭉쭉 키가 커가요. 일 년 십년 삼십년 크지요? 그러니까 저 나무는 바로 햇빛을 머금고 있는 것이다. 열, 열을 머금고 있어. 그건 물리 작용이니까 나무는 햇빛의 아들이야. 열의 저금통장 이라는 말이에요. 햇빛을 저금해놓은 것이란 말이야. 그 이치가, 그러니까 불을 만나면 그 저축해 놓은 것을 써 써먹어. 소화를 한다고, 그러니 해가 하늘에 있는 해가 나무속에 와서 숨어 있다가 불이라는 물리 이치를 얻어 가지고 자꾸 태우는 거, 자기를 부인하는 거지요. 그럼 재가 되지요? 재,



 



그럼 그건 흙이지요? 흙, 흙에서 올라오면서 흙이 묻어왔기 때문에 불이 다 나가버리면 흙가루가 남는 거지요. 재, 그러니 불교에서는 그걸 봤다고, 몸은 흙하고 불하고 만난 것이다. 또 코로 숨이 들어가는 것 보니까 바람이 들어가는 것이다. 살이 물렁물렁 한 것 보니까 아 물이 들어가 있구나. 그래 네 가지가 모여 있는 걸 몸이라고 그러거든. 나무가 우리 몸은 나무토막이 나무는 뭐냐? 이 물리 법칙이 이거 네 가지 요소가 모였다. 그렇게 봐버렸어. 지금은 현미경으로 보니까 120원소 많은 원소가 모여서 몸이지요. 그러나 옛날에 볼 때는 눈으로 볼 때 네 가지 열, 햇빛이 들어오고 흙이 들어오고 몸속으로 또 물이 들어오고 바람이 들어왔다. 그래 한문 글자로 지수화풍(地水火風)이라. 흙 물 불 바람 네 가지가 몸에 들어와서 딱 모아놨구나. 나무나 사람이나 똑같아. 그 원리원칙이, 그러면 불을 만났어. 이 선생님이 이것을 안다면 모든 걸 알 텐데. 그 말이지요. 나무가 불에 타고 있고 숯이 나무가 남아서 아직 있기 때문에 이것을 알라. 이 몸이라는 것 왜 있느냐? 내 몸이 왜 생겼냐? 지수화풍(地水火風)이야. 네 가지 원소를 모아놔서 열이 나고 있다고, 우리가 밥은 뭣입니까? 나무를 때지 않아요? 햇빛을 먹는 거예요. 푸른 채소를 먹는다. 햇빛이 많이 든 것을 수분을 많이 섞어가지고 엑기스로 먹는다. 전부 불을 먹거든. 햇빛으로 먹고 햇빛하고 물하고 섞어서 마시는 게 엑기스야. 청채를 짜서 먹으면 몸에 열이 많이 나와. 같은 나무라도 참나무를 먹으면 몸에 열이 나지요? 그냥 풀을 때면 열이 덜나요. 될 수 있으면 많은 파란 것을 짜가지고 먹자. 파란 것은 햇빛이지요. 햇빛, 그런 원리 이론은 똑같다는 말이지.



 



 이 불을 네가 안다면 다 알 텐데 예수도 알고 하나님도 알고 예수도 알고 세상도 알고 뭐 다 알 텐데 이 선생님은 도(道)를 다 아니까 길을 가던 사람인데 젊은 청년이 찾아와서 앉아있는걸 보시고 하는 거지요. 이것만 알면 다 알 텐데. 그 어려운 말이 아니었다고 지금 생각해 보면 이걸 알자고 몸을 갖고 있지 않아요? 이 몸을 왜 주셨을까? 이거 이것이 뭐냐? 이거 하나 알아보자고 몸을 주셨어. 그래서 그럼 푸르름을 쌓아놓은 것이 고요함이다. 누가 더 푸르르냐? 누가 더 햇빛을 많이 몸으로 가져? 햇빛을 빨아드려 가지고 내 놓느냐? 말이야. 내놓아. 그것이 곧 자연의 이치 아니겠어요? 자연의 숙명, 순종을 해. 원리에 순종했을 때 세상이 조용하지요? 원리를 거슬리면 난리가 나지요? 몸의 법이나 마음의 법이나 원리에 순종하는 것, 그것이 고요함이다. 그것이 천국이다. 고집을 꺾는다. 시련을 주신다. 그래야 평화가 온다. 껍질을 자꾸 부닥치게 해 가지고 없애야지. 자기를 부인하지, 나를 죽이라. 자기를 꺾으라. 고집이지요? 고집, 자기를 버리라. 그래 불에 타는 것과 똑같지요. 몸이 불에 타. 그래 고집이 없어지지요. 재가 남아 마음이 조용해지지요. 거슬려, 자꾸 거스르니까 마음이 괴롭고 불안하지요. 하나님의 음성 하나님의 말씀을 거스르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마음이 평안해요. 조용해지고 마음이 기쁘고 그럼 거스르는 것은 나쁘냐? 그것도 아니야. 부처님은 그걸 깨달았어. 번뇌 즉 해탈이라고, 마음이 괴로워야 마음이 편해질 수 있다. 나쁜 것이 아니에요. 죄는 무엇이냐? 고생이라. 고생이 죄야. 고생이 써. 쓴 것이 죄야. 그러니까 왜 마음이 괴로우냐? 죄를 지었단 말이야. 하나님을 거스른다. 그건 교만하다는 뜻이지요. 교만, 영혼이 교만하니까 불안한 거야. 그러면 고생하면 어떻게 되느냐? 겸손해져. 마음이 없어져. 찌꺼기가 없어진다 말이야. 찌꺼기 타버려.


 



고생을 해야 찌꺼기가 탄단 말이야. 불안하다. 죄가 있다. 마음이 괴롭다. 왜 마음이 괴롭냐? 교만하다. 교만하니까 마음이 괴롭다. 거역, 원리를 거역해. 말씀을 거역해. 순종을 안 해. 그러니 마음이 괴로워지지요. 즉 괴로운 것이 해탈이야. 괴로운 것은 우리는 괴롭지요? 그러나 그것은 윤리로 말하면 죄란 말이야. 죄 죄를 지으면 괴로워. 마음이 괴롭다. 마음이 아파. 그러니까 쓸 고(苦)자가 허물 죄(罪)자나 뜻이 같아. 뜻이 같아. 그러면 마음이 괴롭다. 마음이 아프다. 나는 죄를 지었다. 그러면 나쁘냐? 나쁜 것이 아니야. 아직은 안탔으니까 탈라면 탈이나요. 나무가 있는 것은 타라고 있는 건데 타버리면 평안할 텐데 안타니까 괴롭지 않아요? 미숙한 거 아직 안 익었으니까 그런 뜻으로 알고 보면 고생도 거룩하고 죄도 거룩하고 죄도 예수님을 알게 하고 예수님을 사랑하게 하고 다 아름답다. 다 좋다. 아무것도 버릴 것이 없구나. 그렇게 소위 말하면 해석하는 거 아니에요. 해석, 그러니까 신명기 8장이 그 말하는 거 아니에요. 고생이 나쁘지만 너를 사랑해서 고생을 시키는 것이다. 결국은 하나님께서 네 영혼을 영원한 길로 하늘나라로 인도하시기 위해서 그러시는 거니까 깨달으라. 깨달으라. 지혜를 주시면 고집을 꺾고 겸손을 입으라고 그러는 것이다. 영혼을 입으라고 그러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해 보면서 가사 산에 온 것은 고요하기 위해 찾아왔다. 우연히 고요해지는 게 아니에요. 싸워야해. 누가 더 푸르냐? 누가 더 먼저 속히 찌꺼기를 없애느냐? 그게 싸움이야. 시험받는다는 말이야. 시험 받는다.



 



 누가 더 먼저 천국에 가느냐? 누가 더 먼저 고요해지냐? 평화를 얻느냐? 그래 인제는 시험이라. 시련 부닥친다. 갈등이 일어난다. 그럼 뭐 아까 선(禪)을 가르쳐 주신 어른이 신부님인데 그럼 내가 할 일은 무엇이냐? 선(禪) 자체는 기림에 영원하다고 그랬으니 그럼 나 개인은 어떻게 하냐? 내가 할 일은 무엇이냐? 그것은 현실에 충성하라. 순간순간 찰나찰나, 숨을 한번 쉴 때마다 그때 자기는 최선을 다한다. 그러니까 숨을 쉬는 걸 가르쳐 줬어요. 숨이 들어간다. 숨이 나간다. 하나씩 세어라. 하나 숨이 들어갈 때 하나 나갈 때 둘 세어라. 열까지 세어라. 숨을 다섯 번 쉬고 나면 열이 되지요? 열하나 그럼 복잡해지니까 다시 하나로 돌아가라. 열까지 자꾸 숨을 쉬어라. 하나 둘 만 세어도 좋지만 너무 단순 하니까 잡념이 들어오기 때문에 열까지 세어라. 그래 열까지 세고 그러노라면 숨을 세지 않아도 마음이 조용해진다. 그 요령을 가르쳐 주셨어요. 숨을 쉰다. 숨을 들이마실 때 하나 숨을 내쉴 때 둘 다시 말하면 숯이 타라고 숯이 다 타버려야 열이 꺼지지요. 화병이 없어지지요. 마음이 안 아프지, 공포심도 없어지지, 그러니까 이 선이라는 것은 앉아서만 숨을 쉬는 것이 아니다. 하늘나라 오를 때에도 숨은 쉬어야 하거든. 그것이 선이다. 마음이 고요한 길이라는 말이지요. 올라갈 때도 숨을 쉬고 내려갈 때도 숨을 쉬고 그 자체가 인생길 이라는 말이야. 인생길 선(禪)은 종교도 아니고 학문도 아니야. 곧 생명의 길이다. 길이라. 숨을 쉬는 것이다.



  




 숨 잡념이 없이 수를 세어보아라. 하나 둘 셋 열까지 세지 않더라도 곧 생명은 길이다. 순간, 순간 최선을 다하는 것이 선(禪)의 공부이다. 그 산길을 오르는 것이 도라고 그랬지요. 오늘 바위 끝에 가던지 나무 끝에 올라갈지 발을 한발자국 잘못 디디면 추락해 떨어지지요. 그럼 큰 고생할 텐데 넘어지니까 그래 순간, 순간에 충성을 다하는 것 그게 선(禪)이야. 선(禪)이 따로 있는 게 아니고 그게 숨 쉬는 게 길이야. 그래 발로 걸어가는 길이다. 산으로 오르는 것이 선(禪)이다. 선(禪)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산을 올라갔다가 내려오는 것이 선(禪)이다. 다시 말하면 길이라는 거지요. 길도(道)다. 도(道), 도(道), 너는 예수 도(道)를 하느냐? 불도(道)를 하느냐? 예수가 가르치는 길을 가는 것이다. 예수가 가르치는 길을 가는 것이다. 예배가 따로 없어. 오늘 등산하는 것이 예배시간 아니에요? 도를 닦는 것이 아니에요? 길을 가는 것이 둘이 아니다. 예수 믿는 것 하고 등산 하는 것 하고 둘이 아니야. 하나야. 숨 쉬는 것하고 밥 먹는 것하고 대패질 하는 것이 둘이 아니야. 그게 길이야. 길, 인생길이고 신앙이고 믿음이고 찬송이야. 생활과 신앙이 둘로 돼서는 안 된다. 이원론으로 생각하면 안 돼. 하나다. 하나로 생각하라. 죄와 선(善) 둘로 생각하면 안 된다. 하나로 생각하라. 잠자는 것과 일하는 것을 둘로 생각하지 말라. 하나로 생각하라. 잠을 자야 일을 하지. 일만 일이냐? 잠도 일이라는 거예요. 걸어가는 것도 일이다. 꼭 일만해야 일이냐? 둘로 보지마라. 그럼 마음이 편치요? 지금 변소 짓는다고 바쁜데 등산도 변소 짓는 거예요. 아 등산하면 시간 모자라는데 가지마라. 그건 오해에요. 오해, 인생을 모르고 하는 거예요. 굶는 것이 밥 먹는 것이지 굶어야 밥을 먹지. 밥만 먹으면 어쩌겠어? 배가 터져버리지. 그러니까 등산도 다 일하는 거예요. 주일은 쉬어라. 오늘 주일을 봐야 내일 월요일이 오는 것이지 둘로 보지마라. 하나다. 그래 선(禪)을 공부하는데 하나로 보라. 둘로 보지마라. 온통 하나다. 길이다. 길이야. 그렇게 그 그렇게 생각하라고 배워왔거든요. 우리가 삼일 반 사일반이야. 그때 삼일 반에서 15만원 받더라고 그렇게 돈이 비싼 것도 아니야. 생명 길을 배웠으니까 150만원 줬더라도 뭐 비싼 건 아닐 테지요? 그래 욕심이 그래요. 이번에 어른들 목사님도 그랬어. 여기서 우리가 한번 시험공부를 해보고 싶은데 여기서는 무전 돈 없이 한번 해보고 싶다. 15만원하면 가난한 사람은 못하지 않아요? 돈 일전도 없는 사람도 선(禪) 공부를 한번 하시도록 길을 열어봤으면 좋겠다. 이렇게 생각 해봤는데요.
 주기도 올립시다. 







계속 들으신 분들은 들었지요. 6절 7절. 
하나님께서는 세례요한을 증인으로 보내 예수그리스도가 참 빛이라는 사실을 증거 하셨다.  요한은 빛이 아니었고 다만 그 빛을 증거 하러 왔을 따름이다. 그가 온 후에 참 빛이 세상에 들어왔다. 이 빛은 모든 사람을 비추는 빛이다. 여기까지 밖에 나가있다가 거기 조금 들었습니다. 요한은 빛이 아니고 반사하는 빛 이었다. 빛은 예수에게 있었고 요한은 빛이 없는 사람이고 예수의 빛을 반사한 빛이었다. 그 말씀을 하시면서 우리도 빛은 없다. 옛날부터 우리가 생각해 온 거지요. 말씀을 하니까 그 확신이 옵디다. 그럼 태양계에는 태양만 빛이 있다. 다른 별들은 다 빛이 없지요. 반사하는 빛이다. 달도 반사하는 빛이고 가사 명왕성이니 별들이 있지요. 그 지구 그러니까 반사하는 빛이다. 그 반사 태양계에는 태양만 빛이 있다. 다른 별에는 빛이 없다. 빛은 반사하는 빛이다. 그렇게 이치를 말씀 드릴 때 밝아지는 것은 분명 별은 같은 별인데 빛이 있는 별이 있고 빛이 없는 별이 있다. 그럼 우주에 그런 원리가 있다면 영계에도 마찬가지다. 예수에게는 빛이 있고 예수 영혼 안에는 빛이 있고 모든 별들 사람들 이지요. 이 빛은 본래 없는데 반사되는 빛이다. 그러니까 세례자 요한은 빛이 없었고 예수의 빛을 반사한 빛이었다. 요한은 빛이 아니었고 다만 그 빛을 반사하는 빛이다. 증거 하러 왔을 따름이다. 그렇게 말씀하시면서 목사들이 말씀하는 말은 절대 빛은 없고 예수의 빛을 반사한 말씀이다. 그렇게 하신 말씀을 들었을 때 본인은 피조물의 빛이,  아무리 빛이 있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사람에게서는 반사하는 빛과 같다. 사람은 착각을 해가지고 자기에게서 빛이 발하는 것 같이 그렇게 실수를 한다는 말이지요. 큰 잘못을 범하게 됩니다. 어제도 겸손과 겸손이 아닌 것 교만해 질까 두렵다. 겸손하다는 것은 반사한 빛이라는 것을 알지요. 내게는 빛이 없고 주님의 빛이 반사한 빛입니다. 그렇게 깨달은 사람은 겸손한 사람일 것이고 그걸 망각한 사람은 자기에게서 빛이 난 것같이 자꾸 착각을 일으키고 사는 것은 그때부터 교만한 빛이다. 교만한 사람이 되어버린다. 







구약 성서에 있지 않습니까? 임금님이 영광을 받고 통치가 잘되고 국민들이 순종을 잘하니까 자기가 하나님같이 착각했다. 그러니까 밤사이에 하나님께서 벌을 내려가지고 죽어버렸다. 하나님의 영광을 그 임금이 자기가 무슨 영광이 있는 것 같이 착각해 가지고 하나님이 보응을 내려 밤사이에 죽어버렸다. 빛이 아니라고 그런 교훈도 있는걸 보면 참 두려운데 하나님께서는 세례 요한을 증인으로 보내 예수 그리스도가 참 빛이라는 사실을 증거 하셨다. 요한은 참 빛이 아니고  빛이 아니고 다만 그 빛을 증거 하러 왔을 따름이었다. 그가 온 후에 참 빛이 세상에 들어왔다. 이 빛은 모든 사람을 비추는 빛이다. 그래 인제 공자님은 귀동냥으로 들은 한 마디가 있는데 사람은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아는 사람이 있다. 또 태어난 다음에 후천적으로 살면서 배워서 깨달은 사람이 있다. 학이지지(學而之知)지요. 상당히 깨달아 지는 것 같아요. 그 배우지 않고 알았다는 것은 몸에 빛이 있다는 건데 애기 때부터 그럼 예수님이 아니에요.  학이지지 배워서 아는 사람이 있다. 그거에요. 세례자 요한 그런 배워서 아는 사람 예수를 보고 깨달은 사람 또 해설자들 예수에 대해서 해설한 사람들 종교 지도자들 이지요. 그런 그렇게 생각 할 수 있다. 학이지지(學而之知) 그다음에 하나 더 있다. 고이지지(苦而之知)라 고생을 많이 하고 깨달은 사람이 있다. 아주 피나는 인생 서러움을 당해가지고 말씀을 깨달은 사람이 있다. 그렇게 말씀 했어요. 그렇다면 이 성경 요한이 쓰신 복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