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일

현이 졸업하는 날 : 우리의 사명

mamuli0 2019. 2. 14. 19:02

 현이 고등학교 졸업식ㅇㄹ 보려고 평택에서 하루 밤을 자고 안중고등학교에 가서 보고 돌아왔다. 교회 동생들도 와서 축하해 주었다. 식을 마치고 점심을 함께 먹고 내려왔다.



 



 우리의 사명


1993.01.25. 김준호 선생


 요한복음 20장 17절
 ‘예수께서는 마리아에게 내가 아직 아버지께 올라가지 않았으니 나를 붙잡지 말고 어서 내 형제들을 찾아 가거라. 그리고 나는 내 아버지이며 너희의 아버지 곧 내 하나님이며 너희의 하나님이신 분께 올라간다고 전하여라.’
 (나는 이 사람들뿐만 아니라 장차 이들의 증거를 듣고 내게 와서 나를 믿을 사람들을 위해서도 기도드립니다. 그 모든 사람들을 위한 내 기도는 마치 아버지와 내가 하나인 것 같이 이들도 하나가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이들도 우리 안에 있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을 세상이 믿도록 하게 하려한 것입니다.) 
 20장 17절 보십시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나를 만지지 말라. 아직 내가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않았다. 이제 너는 네 형제들을 찾아가서 내가 내 아버지이며 너희의 아버지 곧 내 하나님이며 너희의 하나님이신 분께 올라간다고 말하라.’그 말씀이 예수님이 하늘나라 가시지요. 여기서 말씀을 보자면 너는 형제들을 찾아가서 그 말씀 이지요. 형제들을 찾아가서 이 말씀을 지금 묵상 하면서요. 제가 육이오 전이고 또 최 흥종 목사님 별장에서 이 선생님이 이제 거의 인수 받았어요. 마음대로 쓰라고, 그래서 거기서 초기 몇 사람이 살림을 시작 하셨습니다. 그때 돌아가신 그 김 이사가 자기가 쓰기위해서 집 한 채를 지었다가, 별장 오른쪽에 동광원에 기증했어요. 공동체서 쓰라고, 그래서 인제 한나 어머니는 자매들을 데리시고 거기서 기숙하시고, 이 선생님은 주로, 꼭 계신 것 아니니까 오시면 별장에서 며칠 주무시고 완전히 목사님은 집을 비우시고 떠나셨고. 그 무렵이야. 거기에 김 준호 선생의 목장이 있는 거기 옛날에 절이 있었습니다. 암자 그래 독신 남자 중이 한명 살았어요. 거기 있는데 전망대인가 절이 있었어요. 거기를 이제 올라가게 되었습니다. 그때 제가 따라갔습니다. 그때 이 선생님의 옷 모습이 거지 중에 거지지요. 허수아비도 그런 옷은 안 입었을 거예요. 그래 걸리면 쭉 찢어지니까 올라가시다가 허벅다리가 살이 나왔다고요. 쭉 찢어져 버리니까 그러니까 사찰에 들어갈 때는 손으로 이렇게 거머잡아서 이렇게 살이 안보이도록 이라고 올라가시는데 그때 그 주지스님이 남자 중으로 한 30대에요. 이 선생님도 한 37세, 그 무렵이니까 아 그냥 부처님 이상 공경을 하신다고요. 그 옷을 보고 얼굴보지 않았어. 그냥 그 옷에다 자기 뺨을 대고 막 우는지 감격해서 그냥 무릎 박을 보듬고 그냥 꽉 보듬고 다시 말하면 이성을 잃더라고요. 감격해서,



 



내 집에 왔으니까 못가십니다. 못가십니다. 주무시고 가셔야 합니다. 그 끌려들어갔다고요. 잠깐 구경 갔는데 못 가게 해요. 자기 집에 왔는데 주무시고 가시라고. 그렇게 하니까 인제 말만 절이지, 그게 해방 후에 지은 집이라. 아주 허술하다고요. 사찰 같지가 않아. 이름만 절이지. 그래서 인제 큰방으로 들어가시자고. 어떻게 해요? 앉아계시지. 그래서 인제 선생님 성질에 밥을 주셔도 안 잡수시지 않아요? 그래 인제 해가지고 여름이니까 아이고, 경치 좋다고. 아주 높지요. 거기 지대가, 뭐 광주 시내가 다 보이는데 꽃바닥이야. 그때 지금도 꽃이 많아 아 전기불이 차 다니는 게 보이는데 ‘선생님 저기 보십시오. 구경하십시오.’의자를 내드려 앉아 보시라고 그 스님은 자기 손님이 많이 와 계시니까, 손님 오셔서 가보겠습니다. 들어가셔 스님이 들어가 버리고 혼자 앉아 계셨습니다. ‘나는 저 불빛이 좋지 않아.’그러시데요. 그래 인제 주지 스님은 그렇게 좋다 하는데 나는 좋지 않아. 그러시며 한숨을 쉬시는 것 같아. 관이 다르더라고요. 그때 제가 불경을 받은 뒤라 부처님의 심성과 같더라고. 인제 6년 고행 후에 성도하시고 7년째 되던 해에 인제 제자들을 수백 얻었지. 수백 제자들을 거느리고 환고향 하는 것이지. 고향 돌아가는데 그때 인제 히말라야 산을 고개를 넘으니까 가비라성의불빛이 그렇게 보였거든. 어떻게 찬란한지? 그 불빛 도회지니까 그래 인제 제자들이 벌떡벌떡 뛰면서 우리 선생님의 고향을 보라. 저 영광스러운 저 불빛을 보라 얼마나 찬란한가? 그때 부처님이 내 눈에는 곱지 않다. 그 말했거든 내 마음이 기쁘지 않다. 저 불빛마다 사람의 가슴이 불타고 있다. 고뇌의 바다지요. 정신 고통은 다 거기 있는데 저 불빛 아래 사람의 가슴이 불이 된 거라. 그게 지옥 아니냐? 그거에요. 너희들 눈에는 좋지만 내 눈에는 슬프다. 그렇게 제자들한테 설법을 하니까 자기들이 큰 실수를 했지. 좋다는 생각을 했던 것이 그렇게 말하니 이제 제자들의 마음이 완전히 견해가 달라지지요.



 



 아 선생님 마음이 슬프구나. 저 불빛이 좋게 보일 리가 없구나. 그렇게 뜻을 다 말씀하신 다음에 나와 더불어 저 불빛아래 저 눈에 보이지 않는 불에 타고 있는 그 가슴에 불난 불을 누가 끄러 갈 사람이 있느냐? 그렇게 질문했다고 그래요. 그때 세 사람이 손들었어요. 제가 가겠습니다. 그게 초기 소위 말하면 너는 내 제자가 아니다. 이제는 형제지간이다. 그 말했다고, 이 시간 까지는 너희들이 뜻을 모르니까 내가 가르쳤지만 너와 나는 동지다. 사람의 가슴에 불이 든 걸 깨달았으니까 불을 끄러 가는 거다. 이제는 너희들은 이제는 나와 똑같은 스승이다. 형제지간이다. 말했다고, 옛날에는 내가 너희를 제자로 가르쳤지만 오늘부터는 형제지간이다. 그 말씀이나 이 지금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나 원 뜻은 같다고요. 열두제자를 말하면 인류가슴에 불이 타고 있는데 불을 끌 사람들이거든요. 그래서 이제 너는 내 형제들을 찾아가서 제자가 아니고 내 동지들을 찾아가서 내가 내 아버지이며 너희의 아버지 이건 소위 말하면 계급평등 아니에요? 아버지는 우리들의 아버지이고 우리는 형제지간이다. 그래 예수님의 생각으로 사람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고 사람은 평등이지만 또 계급도 평등이고, 그 모든 영광도 평등 이지요. 하늘나라에 가서 누릴 수 있는 지위도 평등 이지요. 그게 형제지간이야. 예수의 말씀으로도, 에누리가 없지 않아요? 허풍을 말한다면 허풍스러운 말이 아니지요. 말씀 그대로 참이니까 이제 너는 형제들을 찾아가서 내 아버지가 네 아버지다. 그 말 이지요. 또 내가 내 아버지이며 너희의 아버지, 또 내 하나님이며 너희의 하나님, 예수의 하나님이 아니다. 우리들의 하나님이다. 그렇게 소위 말하면 천국을 같이 소유할 수 있는 형제지간 이지요. 천국이 물론 세분의 것일 런지 몰라요. 삼위일체라고 그러니까 그러나 그날부터는 예수와 형제 된 사람들의 나라라고 공변된 나라에요. 너희 하나님이신 분께 올라간다고 말하라. 그게 인제 이것이 제 1번이거든. 선언할 때 법률 제1조,  천국복음을 펼 때 제 1조 시거든.




   



제일 처음으로 천국 가시기전에 부탁한 말씀이야. 이 말씀이나 또 우리 봤지요 히브리서 2장 11절  찾아보십시다. 사람을 거룩하게 해주시는 분과 거룩하게 된 사람들은 모두 같은 근원에서 나왔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거리낌 없이 형제라고 부르시고 형제라고 불렀다. 2장이지요. 2장 11절 보십시다. 사람을 거룩하게 하시는 분과 또 거룩하게 된 사람은 모두 한 하나님에게서 나왔습니다. 예수께서 거리낌 없이 우리를 형제라고 부르시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그렇게 의역이니까 말이 쭉쭉 나가지요. 구두체로 본래는 예수님만 거룩했지요. 피조물은 부정하지 않아요? 예수님만 나비고 우리들은 누에 신세라고 그랬던 것을 예수님의 사랑으로 누에가 될 수 있도록 특은을 베푼 것이지요. 은총을 베풀었기 때문에 이제는 예수님의 은덕으로 나비가 되는 것이지요. 그럼 나비로서 동등이지요? 나비로서 형제지간이 된 거지요. 언제까지든지 예수님만 나비고 우리는 벌레는 아니라는 거예요. 사람을 거룩하게 하시는 분, 은총을 주시는 분이고 또 우리는 벌레의 신분인데 그건 하나님의 초능력으로 나비가 되는 것이지요. 우리가 새사람이 되는 것이니까 거룩하게 된 후로는 이것이 형제지간이지 사제지간이 아니야. 거룩하게 된 사람은 모두 뿌리가 같다. 성령이 같다는 말이지요. 성령의 역사가 같다. 하나님의 은총이 같기 때문에 하나님에게서 나왔습니다. 예수께서 거리낌 없이 우리를 형제라고 부르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그래 예수님과 형제지요. 형제지간 옛날에는 형제가 아니지요. 은총을 받은 후에는 형제지간이다. 그렇게 하신 말씀은 여기서 두 말씀을 발견하는 것은 예수님이 힘을 주어 말하는 것은 우리는 형제지간이다. 그럼 그 자체가 자유고 영광이고 해방이고 영생이고 부활이고 천국이지 무엇이 천국이 무엇인가? 천국 내용이 무엇인가? 예수가 형제가 되는 것이 천국이지. 그러니까 나는 네 속에 있고 너는 내 속에 있고 또 우리는 하나님 속에 있다고 삼위일체가 아니야. 사위일체 아니야? 우리까지 합해서 형제지간이니까 그 그렇게 해 주시고 싶어서 오신 분들이시니까 그렇게 되지 않고 평화가 있겠습니까? 천하에 거기만 평화가 있겠지요? 거기만 안식이 있고 거기만 자유가 있고 거기만 사랑이 있는 것이지요. 그렇게 생각을 해봤습니다. 어찌되었든지 이 선생님이 떨어진 옷을 입었기 때문에 이 선생님이 그 누군지 모르는 분이에요. 단지 그 옷이 떨어진 것만 보고 감격했지요. 외모만 보고 그렇더라도 이 선생님은 광주 시내의 불빛을 보고 슬퍼 하셨다. 지금도 그러실 거예요. 기뻐하시지 않아 그러니까 벌레로서 인생길이 너무 고달프지 않아요? 이건 허물 벗고 나비가 되어야지. 그래야 자유롭고 해방을 얻고 평화를 얻고 하늘나라 갈 사람이 되기 때문에 그것을 선교라고도 하고 전도라고도하고 또 종교를 전한다고도 하고 영원한 참된 평화를 입도록 평화를 얻도록 길을 열어주는 것이다. 전도는 도를 전한다는 말이지요. 길을 전한다는 말이지요. 그렇게 생각해 봤습니다. 찬송 한 장 부르십시오. (끊김)
잘 찾았으면 읽어보십시오. 22절부터 36절까지.
이스라엘 동포여 (끊김)

 



 평소에 구약 성서라든지 시편을 익히 많이 보신 분이시다. 그래서 시편 16편 8절로 11절을 인용 하셨습니다. 25절. 그분에 관해서 다윗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주께서 내 오른편에 계시고 나는 항상 주님을 가까이 뵈오며 내 마음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내 마음은 기쁨에 넘치고 내 혀는 즐거워 노래하며 이 육신마저 희망 속에 살 것입니다. 당신은 내 영혼을 죽음의 세계에 보내지 않으시고 당신의 거룩한 종을 썩지 않게 지켜주실 것입니다. 당신은 나에게 생명의 길을 보여주셨으니 나는 당신을 모시고 언제나 기쁨에 넘칠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시편을 인용하시면서 ‘형제여러분, 나는 여러분에게 우리의 선조이신 다윗에 관해서 분명히 말씀드려야겠습니다. 그는 죽어서 묻혔고 그의 무덤은 오늘날까지 우리 땅에 남아있습니다. 다윗은 예언자로서 하나님께서 자기 후손가운데 한 사람을 자기 왕좌에 앉혀 주시겠다고 하신 맹세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부활을 내다보며 하나님께서는 그를 죽음의 세계에 버려두지 않으시고 그의 몸을 썩지 않게 하셨습니다. 그 말씀 이지요. 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바로 이 예수를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셨으며 우리는 다 그 증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예수를 높이 올려 당신의 오른편에 앉히시고 약속하신 성령을 주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아버지께로부터 받은 성령을 지금 여러분의 보고 듣는 대로 우리에게 부어 주셨습니다. 
 이것을 보니까 베드로 사도께서 시편을 보시고 바로 이 시편을 예수에 대한 예언이다. 그렇게 지금 증거를 하십니다. 이런 증언을 할 때에도 자기 민족은 다 박해되었고 급기야는 베드로도 죽이지요. 그럼 인제 오늘날 2천 년 전 이야기인데 지금은 흔들림 없는 이 말씀이 성서에 써져있고 우리가 봅니다. 이걸 거울삼으면 그런 생각이 납디다. 모든 것이 과불요불급을 피해야 되겠다. 과해도 안 되고 미치지 못해도 안 되고 그래 인제 중용이라고 중용 무엇이든지 과한일로 피하고 또 이렇게 희미하게 믿지 못하겠다는 것은 가사 이 선생님께 성령이 심부름하신일이 이 날까지 하셨는데 이 선생 태도지요 그 부흥회가 되고 모든 운동이 일어날 때 얼마나 구름떼같이 끌려가지 않아요.



 



사방에 참 그동안에 그런 광경을 많이 봤는데 그런데 끌려가지 않으셨지요. 혹하지도 않으시고 참 덤덤하니 냉수와 같이 사셨는데 그것이 옳은 태도였다. 또 그렇다고 해서 아주 뒤떨어진 것도 아니시고 이 선생님 태도가 중용 이었다. 그래 뭐이든지 먹고 입는 것도 그래요. 남이 한다고 혹하고 달라 들어도 안 되고 너무 지나치게 따라다녀도 안 되고 그렇다고 그걸 무시하고 경솔하게 생각해도 안 되고 하여튼 지나치고 좀 미지근한 것은 다 도태가 되지요. 다 쓰지를 못하고 항상 가운데를 붙들어서 조용히 사는 것 그것만은 영원하다. 영원하다. 주께서 내 오른편에 계시오니 나는 항상 주님을 가까이 뵈오며 내 마음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이 시를 다윗이 지었다고 그랬는데 그것은 다윗은 예언을 하셨고 이 말씀은 자기 것으로 삼은 분은 베드로 사도지요. 이 시편이 우리 손에 있는데 시편 16편 8절로 11절 말씀. 우리는 이 성경을 봐도 그렇게 깨닫지 못했거든요. 그 베드로사도만은 이 말씀이 예수에 관한 말씀이다. 그러기에 내 마음은 기쁨에 넘치고 내 혀는 즐거움을 노래하며 이 육신마저 희망 속에 살 것입니다. 그럼 베드로 사도가 예수께 대해서 이 시편 우리 예수께 대한 약속이고 구절이다. 실상은 베드로 선생님의 사도의 믿음이지 이 말씀이 절대 예수께 관한 말씀이 아니다. 또 반론이 일어나도 어쩔 수 없는 거지요. 예수님이 직접 하늘나라에서 오셔서 증거는 안하실 테니까. 당신은 내 영혼을 죽음의 세계에 버려두지 않으시고 당신의 거룩한 종을 썩지 않게 지켜주실 것입니다. 이 말씀을 변증하는 것은 부활을 두고 하신 말씀 이었다. 자기가 눈으로 보고 믿었으니까. 당신은 나에게 생명의 길을 보여주셨으니 나는 당신을 모시고 언제나 기쁨이 넘칠 것입니다.



 




자기 설명이 그렇지 않아요? 형제 여러분 나는 여러분에게 우리의 선조이신 다윗에 관한 말씀을 분명히 드려야겠습니다. 그는 죽어서 묻혔고 오늘날까지 우리 땅에 남아있습니다. 다윗은 예언자로서 이 말을 했다. 예언자로서 다윗의 시가 아니라 예언자로서 이 시를 읊었다. 하나님께서 자기 후손가운데 한 사람을 자기 왕좌에 앉혀주시겠다고 하신 맹세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부활을 내다보며 하나님께서는 그를 죽음의 세계에 버려두지 않으시고 그의 몸을 썩지 않게 하셨습니다. 하고 말했습니다. 썩지 않게 하신다는 말은 아까 시편에 나왔지요? 당신의 거룩한 종을 썩지 않게 지켜주실 것입니다. 그 시편이 그렇게 많은 글인데 꼭 한자리 거기 무슨 말씀이 있는데 그 말씀 깨닫고 아 이 말씀이 예수께 대한 예언이다. 그렇게 붙들어주셨지요? 그래 우리들이 이 선생님 모시고 귀로 들은 사람도 있고 전전 기별로 들은 사람도 있고 그런데 저로서는 이 선생님 말씀을 한자리도 기억 못하고 있어. 그렇게 수박 겉 핧기로 살았는데 이 선생님 말씀이라고 책이 나오거든 앞으로 참 신비해요. 누가 그런 말을 들었으며 어떻게 기억 했던가? 그런데 이렇게 이제 저랑 같이 살면서도 저도 모르는데 그 말씀이 맞춰 준다는 거예요. 그런 글이 많지요. ‘순결의 길’이라는 책도 글이 많은데 우리한테 필요한 것은 한자리뿐일 거예요. 이렇게 베드로 사도가 시편을 다 봤지만 썩지 않게 하신다는 그 말씀 붙들고 믿거든. 가사 성경을 본다고 많이 보는 것도 지나친 것이고 그렇다고 아주 안 보는 것도 안 되고 또 일 도 그래요. 일 하라했다고 새벽부터 밤까지 하는 것도 지나친 것이고 또 그렇다고 아주 않고 놀아 버리는 것도 지나친 것이고 음식도 그래요. 가만히 식구들 사는 것 보면 몸에 좋다고 너무 많이 먹어도 안 되어요. 그렇다고 아주 또 믿지 않고 비웃어 버리고 안 먹는 것도 안 되어요. 그냥 있는 듯 없는 듯 아무도 모르게 평범해야해. 평범하게, 중용 이라는 것이 얼마나 진리인가?



 



그래서 모든 사람한테 그것이 발견 되어요. 세월이 많이 흘러가니까 또 저같이 말도 그렇지요. 말 하라한다고 늘 말하는 것도 지나쳐요. 그렇다고 전혀 안 해버려. 그것도 미치지 못하는 거예요. 올해는 말씀은 해야 해. 한 달에 한 번씩이라도 매를 맞던지 욕을 먹든지 쫓겨나든지 말씀은 해야 해. 중용을 지켜야 어요. 뭐이든지 과하지 않게 그 중용이라는 책에 그렇게 쓰여 있어요. 남 앞서지도 말고 뒤서지도 말고 가운데로 가야하지 않냐? 확실히 인제 우리가 시편을 봤어도 베드로 사도같이 이 말을 꼭 집어서 못 봤거든. 그런데 오늘 보니까 있어 그럼 아침 지금 봤지요. 나 그전에는 안 봤어요. 여기 오시기 전까지 70년 세월을 살았어도 여기 안 봤어. 아침에 처음 봤어. 아침에 처음 본거예요. 들어오시니까. 확 가슴에 들어온다고. 아 베드로 사도가 성경을 연구한 것은 전부 오 장로같이 본 것은 아니다. 말씀 하나 붙들었구나. 탁 예수는 왜 부활했냐? 다윗이 예언했다. 예언의 말씀이 이루어졌다. 예수부활을 믿는 것이 전능이고 영생이고 또 평화고 기쁨이고 총 희망이지. 뭐 다른 게 있겠어요? 그래 성경은 많이 보고 많이 외울 것도 아닌 것 같고 주신 말씀 붙들고 사는 것이다. 주께서 내 오른편에 계시오니 나는 항상 주님을 가까이서 뵈오며 내 마음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내 마음은 기쁨에 넘치고 내 혀는  즐거워 노래하며 이 육신마저 희망 속에 살 것입니다. 그 이 말은 다윗이 시를 읊었거든. 다윗은 무슨 말인지 모르고 써놨어. 그런데 이 말씀을 받아들인 사람은 베드로 사도라고. 그러니까 실상은 그래요. 이 선생님 말씀이 땅에 떨어지지 않고 많이 지금 글로남아 있게 되는 모양인데 그걸 볼 거예요. 누구든지, 그 말이 다 불필요 하더라고 꼭 한 말씀이 거기에 있어요. 그 한 말씀 그 말씀 붙들고 우리가 살 거니까 본보기로 말씀 베드로 사도가 이 말씀 붙들고 예수님 믿었다면 우리도 글이 있으니까 글이 쳐져 있기 때문에 그 글을 늘 자꾸자꾸 보는 동안에 성령으로 그 말씀을 붙들게 하시고 한 말씀만 하소서. 내 영혼이 곧 산다고 그런 말씀인데 내 영혼이 곧 산다. 한 말씀, 아침에 좋은 시를 우리한테 주신 것인데요.



 



시편 16편 8절로 11절 어디 시편 없지요? 구약성경 찾아보세요. 시편 16편 8절로 16절. ‘야훼여 언제나 내 앞에 모시오니 내 옆에 당신 계시면 흔들리지 않을 것이옵니다.’공동번역 이지요? 개역.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심으로 내가 요동치 아니하리로다. 이러므로 내 마음이 기쁘고 내 영광도 즐거워하며 내 육체도 완전히 거하리니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않으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지 않게 하실 것임이니이다. 주께서 생명의 길로 내게 보이시니 주의 앞에는 기쁨이 충만하고 주의 우편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거기까지 공동번역에는 이 맞고 어찌되었든지 당신의 거룩한 종을 썩지 않게 지켜주실 것입니다. 그 말씀을 지금 꽉 붙들고 예수님의 부활을 입증하는 것이지요. 그리스도의 부활을 내다보며 하나님께서는 그를 죽음의 세계에 버려두지 아니하시고 그의 몸을 썩지 않게 하였습니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바로 이 성경 예언이 이 예수를 두고 한 말씀이다.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셨으며 우리는 다 그 증인입니다. 실상 이 줄거리가 예수가 아닙니까? 예수가 부활을 못했다면 예수교가 형성이 안 되거든. 또 다른 증거가 도덕률 또 참아라. 또 모든 도덕률이라는 것이 다 있지 않아요? 예수님 말씀 아니고도 ‘참는 것이 복이다.’그런 도덕률은 많거든. 부활 부활을 내다보면 하나님께서는 그를 죽음의 세계에 버려두지 아니하시고 그의 몸을 썩지 않게 하셨습니다. 그렇게 지금 이번에도 여행 중에 느낀게 그 점인데요.



 



 이 선생님의 존재라는 것은 어디다 내놓고 믿어줘야 이야기가 되지 내 놓을 것이 없어요. 가사 무슨 불교 아무개 그럴 수도 없고 천주교 아무개 그럴 수도 없고 장로교 아무개 그럴 수도 없지 않아요? 무엇을 보고 그분을 믿으려고 하느냐? 이 현필 선생을? 아무것도 없지 않아요? 세계 역사 내놓고 누구다. 그럴만한 아무것이 없어요. 단지 이 살아있는 사람들이요. 몇 사람이 그 분은 하나님의 종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충실한 제자였습니다. 그 소리거든요. 아까 말씀도 다행히 본인이 썼다고 하려는지 제 삼자가 들었다고 하려는지 하신 말씀이 성문이지요. 책이 나온단 말이지요. 그러면 책이 나온다면 그 책이 썩지 않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 뜻이 그 말씀이 그것이 그 씨가 되고 등불이 되고 빛이 되어서 모든 중생한테 필요 하겠지요? 그것이 남는 것이지요. 그 말씀이 남는 것이지. 그 부처님 당대에 그것을 말한 겁니다. 부처님을 너무나 숭상해 가지고 수만 명이 아니야. 수백만 명이야. 우러러 그 많은 수도원을 지었거든 인도에다가 절을 지금은 하나도 없다고 그래요. 전부 쑥대밭이야. 그 말씀은 살아있단 말이야. 그래 동남아로 모든 다른 나라로 와서 있거든 말씀이 불경이 한국에도 있고 예언서지요. 말씀 말씀이 있어요. 살아있고 제가 이번에 진도 가서 그 느낌을 받았어요. 거기서는 동광원의 기도를 외우시더라고 지금도, 외우자 하니까 외우데요. 한분도 빠지지 않고 이 선생님 기도를 외웁시다. 그건 못 외워요. 그 말씀이 살아있구나. 예수님 것을 기도해라. 지적해 주는 거지요. 그 말씀이 살아 이 선생님이 공이 인정 되지요. 공이 그 분이 하신 말씀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요.



 



그럼 같이 살았다고 해서 이 선생님한테 나는 도움이 못되더라고 이 선생님 말씀을 옮기지 못해요. 그럴만한 그 은혜가 없지요? 그 말씀은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고 선다고, 그런 뜻으로도 내가 그랬어요. 마지막 말씀 하라고 그래서 여기 와서 보니 참 희망이 있습니다. 저는 부끄럽고 광주서는 그 말 외우지 않거든. 그러니까 건물을 짓는다든지 사업을 한다는 건 그건 우거지고 김치는 속 밑에 것을 먹지. 우거지는 보라고 놔두는 거라고 다른 잡균이 침범하지 못하도록, 실상 영화한 날에는 광주는 아무것도 없을라나 몰라요. 정신이 없어, 우거지야. 불편한 거예요. 전부 땅이 있으면 뭐하고 집이 있으면 뭐하고 사업하면 뭐하겠어요? 말씀이 살아 움직여야지. 말씀이, 그 희망이 있어요. 어디 가서 딱 말씀이 떨어져. 그래 참 죽어라하고 말씀을 믿고 살거든. 말씀을, 의지하고 위로를 받고 그래. 시편이 지금까지도 내려오고 있지만 유대 사람들은 이거 안 믿거든. 유대 사람들이 수백만이 믿지 않아. 베드로사도 혼자 믿지 않아요? 한분이 믿어. 그런 뜻으로 진리는 땅에 떨어지지 않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영원하고 수효에 있지도 않고 양에 있지도 않고 그렇게 생각이 됩디다. 하나님의 뜻은 성취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 일을 누가 본받을 수도 없고 욕심 낼 수도 없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니까 어찌되었든지 이 공님을 하나님께서 쓰시고 이 현필 선생님을 하나님께서 쓰시고 그 분들을 쓰시는 것은 이건 사업체도 아니야. 종파도 아니야. 그 아무 이름도 성도 없는 분들인데 하나님의 말씀을 심으셨다. 하나님의 말씀을 뿌렸다. 그 분들을 통해서 그 말씀이 이제는 모든 사람에게 빛이 될 것이며 또 힘이 될 것이며 구원에 이르게 하는 선물이 된다고 하셨어요. 예수님께 예수님을 자꾸 드러낼 수 있는 심부름꾼이었지요. 그러니까 인제 그 두 분의 줄거리는 거룩하게 살아라. 그 말씀 하셨어요. 그 분들의 주제는 거룩하게 살아라. 어떤 설명을 어떻게 했던지 그 말씀이거든. 성경이 번역이 현대어 성경까지 번역됨에 따라서 그 분들이 예언 한 것이더라고요. 그 전 성경은 아주 희미하지 않아요? 옛날 성경을 봤을 때. 구역, 지금은 어떻게 그렇게 확실하게 되는지. 여기 요새 적었거든. 와 그 어른들이 핍박을 받고 반대를 받으며 주장하신 말씀.



 





아이 성경이 이제는 어느 종파나 어느 교파도 이제는 그 어른들의 증언을 무시 못 하게 되더라고요. 요새 족보에요. 찾아봤어요. 요한복음 10장 36절 상 반절. 이건 공동번역이야. 요한복음 10장 36절 상 반절. 다른 성경으로 보면 그렇게 안 되어있어요. 공동번역만 보면 그렇게 되어있어. 읽으십시오. 찾으신 분 공동번역. 아버지께서는 나에게 거룩한 일을 맡기시고 나를 세상에 보내주셨습니다. 그 말씀이에요. 여기 이 말도 성경이 지금 마태복음부터 계시록까지 있는데 이 말씀 한자리거든. 베드로 사도같이 요걸 붙인 거예요. 예수님이 자기 직접 하신 말씀 내 사명 은 무엇인가? 아버지께서 나에게 거룩한 일을 맡겨 세상에 보내주셨습니다. 그러니까 이 핵을 붙든 분이 이 공님 이시고 이 선생님이시거든요. 예수의 일이 무엇인가? 거룩한 일을 맡겨가지고 세상에 보내셨다는 고백입니다. 예수님의 총 사업 이지요. 요 일하러 오셨다는 거지요. 그러니까 인제 현대어 성경이 아니고는 그런 말이 없어요. 디모데후서 1장 9절 상 반절. 현대어성경 보세요. 디모데후서 1장 9절. 모두 지나친 거예요. 과해버렸어. 넘어 버렸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해 주시고 거룩한 일을 맡기도록 우리를 선택하셨습니다. 이렇게 제자가 직분이 확실한 것이 없다고, 무엇 때문에 예수 믿게 했냐? 우리를 무엇 때문에 부르셨는가? 거룩한 일을 맡기시려고 우리를 선택했다. 그랬거든 그전 성경은 그렇게 안 되어있어요. 뭔 뜻인지 몰라. 이렇게 오래 살다 보니까 이 공님 주장, 이 선생님 주장이 딱 성경말씀에 이제 다 (끊김)





 



 항상 우리가 봤던 말씀. 그 공동번역이 좋아요. 1장 16절. 평소에도 내가 거룩하니 너희들도 거룩하게 되라.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까? 주께서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똑 떨어지게 번역했거든. 현대어 성경에, 하나님의 소원이야. 이건 구약에 있는 말씀인데 베드로선생이 이걸 발견 했어. 야, 예수 제자 구경, 예수 제자 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느냐?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아 이 말씀 이었구나. 부활한다는 뜻은 그 뜻이야. 거룩해 진다는 뜻 부활을 했지. 몸통아리만 부활해가지고 거룩하지 못하다면 낙제지. 하늘나라 못 들어가지 않겠어요? 거룩하다는 말은 무슨 말이냐 하면 그걸 경험상 우리가 알아지는 것은 나비가 된다는 것이야. 벌레로 있는 동안에는 거룩하지 못해요. 속되. 그래 누에를 키워 봐도 번데기 까지는 속되다고. 허물을 벗고 날아가야 거룩하다고. 초자연 자연을 초월해. 하나님께서 거룩하시니까 너희도 거룩하라고 말씀하셨다. 베드로사도의 깨달으신 본분이라는 말씀입니다. 또 찾아 봤어요. 히브리서 12장 10절 하반 절. 공동번역으로, ‘우리를 낳아준 아버지는 잠시 동안 자기 판단대로 우리를 견책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익을 주며 우리를 당신처럼 거룩하게 만드시려고 견책하시는 것입니다.’애기 때부터 늙어 죽도록 고생하지 않아요? 용서도 고생이고 받은 것도 고생이야. 남은 것도 고생이야. 고생 자체가 견책이거든. 사람을 살피시는 거예요. 자꾸 옆에 앉아서 자꾸 꾸지람을 하시는 거예요. 일평생, 그건 거룩해지라고 그러는 거라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익을 주기 위해서라고 우리를 당신처럼  하나님처럼 거룩하게 만드시려고 거룩하게 되라고 견책하시는 거라고




 



그러기 때문에 어머니도 여기 와계시지만 그거에요. 다른 거 없어요. 거룩하게 되라고 견책 하시는 거라고 모든 것이 뜻대로 되지 않는 거 그게 견책이지요. 내 마음대로 안 되어요. 그게 견책이에요. 왜 그러시냐? 거룩해지지 못하면 낙제 아니냐고? 누에 키워가지고 허물을 벗지 못하고 죽어버리면 뭐해? 결국은 허물 벗고 나비가 되어야 성공인데 나비가 되게 하기 위해서 섭리 하신다고. 하나님께서 중도에서 탈락하면 안 되니까 거룩하게 만드시려고 견책 하시는 것이다. 그러니까 몸 고생은 몸이 아픈 것이고 마음고생은 마음대로 안 되는 것이 고생이라고. 고생이 견책이라고. 고생이, 저도 그렇지요. 일평생 몸을 아프게 하신 것도 견책이에요. 그거는 거룩하게 만드시려고 견책 하시는 것이다. 가사 제가 이 구절을 발견한 사연이 있어요. 길음동 성당에 가서 3년 전에 고해 성사를 봤거든. 년 말 년 초에 아주 인제 부제인데 갓 신부가 되신 젊은 분인데 ‘그러시면요. 히브리서를 전부보세요.’그러시더라고 그러니까 나이 많은 신부는 그렇게 지도를 안 해. 그냥 형식이야. ‘성모경 몇 번 외시오.’형식인데 이 분은 진실해. 젊은 신부가 갓 되어가지고 아주 진실해. 그래 히브리서를 쭉 보시면 됩니다. 아주 그렇게 진실하게 그러더라고. 그래 정성을 다해 1장 1절부터 끝장 끝 절까지  읽었는데 이 말씀이 탁 불거지더라고. 그 신부가 부탁을 안했으면 건성 이지요.



 




또 히브리서를 건성 봤을 거예요. 천주교 성당에서 받은 교훈이 이거에요.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익을 주며 우리를 당신처럼 거룩하게 만드시려고 견책하시는 것이다. 히브리서가 글이 많은데 이 말씀이 탁 쳐지더라고 자꾸 몸이 아프니까 우리 국장이 자꾸 몸이 아픈데 뜻을 오늘 아침에 깨달아야해. 거룩하게 만드시려고 견책 하시는 거예요. 또 현대어 성경으로 히브리 12장 14절입니다. 모든 싸움은 피하고 정결하고 거룩한 생활을 추구해 나가십시오. 그렇게 하지 아니하면 우리도 주님을 만나보지 못 할 것입니다. 천국은 누구다 다 가겠지요? 그러나 나비가 되지 아니하면 예수님을 못 만나봅니다. 벌레로서 거룩한 생활을 추구해야지. 그렇게 되지 아니하면 누구도 주님을 뵐 수 없다. 헛고생 아니겠어요? 어찌되었든지 병이 들던지 사업이 안 되던지 정신 고통을 당하던지 거룩한 생활이 되어야지. 거룩해지고 하늘나라 가야지. 사업만 잘되면 거룩해지지 못되거든요. 속되고 야욕적이고 영웅적이고 투쟁적이 아니에요. 사업을 잘 하려니까 거룩한 생활을 추구해요. 제일 투쟁적인분이 주아나 여사에요. 끝까지 우리 원장님하고 투쟁했거든. 네가 잘 하냐? 내가 잘 하냐? 그건 거룩한 생활이 아니야. 사업이지, 그러니까 거룩한 생활을 추구해야해. 그렇지 않고는 누구도 주님을 뵐 수 없습니다. 그런 것입니다.



 




또 요한복음 17장 19절. 이건 개역으로 보십시다. 개역 성경마다 다릅디다. 말이 공동번역은 그렇게 안 되어있어요. 개역만 그렇게 되어요. 17장 19절 개역. 또 저희를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저희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이 똑 떨어지게 이야기 하거든. 예수님이 거룩하게 사는 본을 끼치는 목적이 무엇이냐? 제자들도 자기를 본 받아가지고 거룩하게 살게 하기 위해서 내가 거룩하게 살았다. 그러니까 게가 그런다지요? 바로 걸어라. 바로 걸어라. 자기는 옆으로 가면서 게가 옆으로 걸어가지 않아요? 아이 이놈아 바로 걸어, 바로 걸어. 엄마가 옆으로 걸어가니까 새끼들도 옆으로 기어간다. 하지 않아요? 예수님도 자기도 거룩하게 살면서 자꾸 우리더러 거룩하게 살라고 하지 않아요? ‘저희를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저희도 진리로 거룩하게 하려 함입니다.’그랬어요. 같은 요한복음 17장 17절 현대어 성경으로 보십시오. ‘아버지의 진리의 말씀이 이들을 진리를 가르쳐서 이들을 순결하고 거룩하게 하소서.’이건 최후의 기도거든. 하늘나라 가실 때 최후의 기도 그 예수의 자나 깨나 기도가 뭐에요? 제자들을 키우는데 아버지의 진리의 말씀으로 이들을 가르치셔서 이들을 순결하고 거룩하게 하옵소서. 이 기도가 이 공님 기도이고 이 현필 선생님의 기도지요. 그 주제가 그거에요. 그 분들, 그러니까 어느 교단의 사람은 아니에요. 종파에 사람도 아니고 낱알이야. 하나님의 종으로 일하셨지요. 아주 성경에서 멀지 않아. 성경에 준해서 성경에 중용을 했다는 말이에요. 지나치지도 않고 기울지도 않고 꼭 성경에 준해서 꼭 성경대로 일생을 살다가 가셨다고 가운데를 붙들어가지고 그러니 고린도 후서 7장 1절 개역으로 보십시다. 하반 절 이에요.



 



고린도후서 7장 1절. 개역.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라. 이건 권고 권고의 말씀이야. 편지니까 사도로서 권고의 말씀을 하는 거예요. 그 주된 핵심적인 교훈은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라. 그런 성경말씀 찾아보니까 거의 다 그러지요. 어디를 찾아봐도 있지만 인제 번역문이 여러 가지 나왔으므로 그 말이 종합되더라. 그 말이지요. 개역만 죽 봐버리면 매번 안 나와요. 그런 말이 안 나와요. 공동번역만 봐버려도 안 나오고 현대어 성경에 나오므로 그 번역함에 있어서 뜻이 통일 되더라. 저는 그 말씀이에요. 현대어 성경 아니고는 그 말이 없어요. 히브리서 10장 10절 인데요. 현대어 성경 보시지요. 이 새로운 개혁아래 우리를 위해 단 한번 죽으신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우리는 죄를 용서받아 거룩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손뼉을 칠만한 죄를 용서 받아가지고 거룩한 사람이 되라고 그랬어요. 이건 보편적인 사랑인데 무조건 거룩해 지라하니까 여간 막연해 지더라. 그거에요. 내가 죄가 있는데 어떻게 할까? 어제까지 산 것이 죄가 이렇게 많이 있는데 나는 어찌할까? 거룩한 사람이 아닌데. 그러고 이제 자책이 되고 정신 고통이 일어나고 죄를 용서 받아서 거룩한 사람이 된다고 그랬어요. 해명이 되었거든. 현대어 성경이 아니고는 이 말이 안 들어가. 왜? 현대어 성경은 의역이니까 뜻을 따라 뜻을 보태버리거든. 직역이 아니고 이것은 성경에 없는 말씀이 더 들어갔어요. 이거는 풀어서 썼기 때문에 우리가 알아들어.



 



그러니까 무조건 예수가 죽었으니 너희도 거룩하라. 아이고, 아직도 거룩하지 못한데 그런 숙제가 남았거든. 언제는 죄를 용서 받은 다음에 거룩하라고 그래. 이 말씀이 근본적으로 확 불을 일으키고 힘을 붙들어 주더라고요. 새로운 계획아래 예수님의 은총이지요. 옛날 구약 성경이 아니라 예수님이 새로 맺어줘요. 새로운 계획 아래서 우리를 위한 단 한번 죽으신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우리는 죄를 용서받아 거룩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막달라 마리아 같은 신분은 예수 만나기 전에는 너무 거칠지요. 사람이, 죄라고 할 것도 말 것도 없고 완전히 엉망으로 산 사람인데 예수님이 용서를 해주었기 때문에 거룩한 성녀가 되었다. 용서를 해준 다음에는 자기가 너무 자기를 못 믿으니까 산속에 혼자 살았거든. 사막에서 혼자 살았어. 자기 신분이 거칠어 가지고 도저히 예수님 안 계신 세상에서 혼자 살 실력이 없으니까 대중과 어울릴 실력이 없어요. 나는 혼자 살게 해 달라고 외경에 보면 성모님이 그걸 인정하시고 베드로 사도의 인가를 얻어서 이 여자는 아직 젊으니까 혼자 살게 한다. 그래서 인정을 받으시고 허락을 받으시고 은둔했다. 하지 않습니까? 용서 받은 것은 주님이 살아계실 때에 용서 받았으니까. 그러면 죄를 용서 한다는 뜻이 무엇인가? 요한1서 1장 7절 하반 절. ‘그러나 하나님께서 빛 가운데 계신 것처럼 우리도 빛 가운데 살고 있으니 우리는 서로 친교를 나누게 되고 그분의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의 모든 죄를 깨끗이 씻어 줍니다.’용서했다. 용서했다. 어떻게 예수가 용서하느냐? 자기가 무엇이 관대 내 죄를 용서하느냐? 자기 피가 예수의 피가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한다. 대신 죽는 거지요. 정의에 입각해서 자기가 지불해 준거지요. 내 죽음을 대신해서 자기가 죽은 거지요. 피가 난 거지요. 그런데 피는 왜 그러냐? 사랑이다.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자기가 피를 흘리신 것이다. 말로 용서한 것 아니고 피를 흘려서 나를 용서하신 것이다. 피, 그래서 인제 현대어 성경이 좋다는 것은 같은 글이지만 알 수 있도록 번역해줬다. 알아듣기 좋게 번역이 되었다.



 



그러면 고린도후서 5장 15절 상반 절. 현대어성경 보십시오. 고린도후서 5장 15절 상반 절. 그리스도께서는 전 인류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거기까지 예수 믿는 사람만 덕 봤다고 해 싸니까 그것도 못 마땅하더라. 그거에요. 그럼 하나님쯤 되신 분이 큰아들이나 되신 분이 쩨쩨하게 다른 종교 믿고 예수 안 믿는 사람은 그럼 그냥 전혀 모르는 듯이 하실 것인가? ‘그리스도께서 전 인류를 위해서 죽으셨다.’당파 예수당 당파에 무슨 구원이 있겠는가? 너무 야속해. 예수 안 믿으면 불교 신자는 막 저주해버리고 예수 안 믿으면 그냥 유교 신자는 사람으로 안 봐버리고, 얼마나 독선적이냐? 예수 신자들은, 부처님이 자기 극기를 하시고 초근목피를 잡수시고 거룩하게 살려고 얼마나 흔적이 많지 않아요? 자기 아내와 별거하시고 자식을 만나서 내 아들이라고 부르지 못하시고 그렇게 거룩하게 사시려고 피나는 투쟁을 하신 부처님을 보고 마귀라고 그래버린다고. 얼마나 그 예수의 가슴에 서러움을 주시는가? 젊은 여자들이 머리 싹싹 깎아버리고 남자 바지를 입고 남자 고무신을 신고, 자기를 이기기 위해서 그렇게 피나는 투쟁을 하는데 아이고 그 사람들 마귀 자식이라고 그럴 수가 있겠는가? 그러니까 그리스도께서 전 인류를 위해서 죽으셨다. 그러니까 현대어 성경이 아니고는 이렇게 안 되거든. 우리 우리를 위해서 죽었다. 그럴 테지. 예수교 신자들이, 전 인류를 위해서 죽었다. 한말 들었으면 천말 알아듣지. 예수님이 그렇게 죽었다고 선언했는데 제자들이, 다른 말이 있을 수 없어요. 우리만을 위해서 죽었다. 그게 족보싸움 아닙니까? 큰아들, 계보는 정 손이다. 결혼한 자손이니까 정식 자손이고 계모의 자식이라. 저 쪽은, 결혼식도 안하고 후처다. 그 자식은 절대 인격으로 그건 인정하지 않는다. 그 쌍놈이지요. 쌍놈, 천하가 족보싸움 아닙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정 손이다. 하나님의 진짜 아들이다. 다른 놈들은 다 서자도 못되고 첩의 자식들이고 마귀자식들 전부 당파싸움이지. 예수님의 사랑을 본받은 사람들은 아닙니다. 가만히 보면, 예수님은 사랑의 왕이신데, 가사 사랑의 왕 되신 예수님이 그렇게 파벌을 가리시고 차별하시고 그런다면 똑같은 유대교 아니겠어요? 그들도, 그래요. 유대인들은 현재도 그렇지 않아요? 자기들이 자기들만 하나님의 자녀라고 우리만 하나님의 자녀고 다 개의 자식들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나 똑같이 않아요? 그렇게 생각이 듭디다. 그 말이지요.



 




 골로새 2장 13절로 14절인데 현대어 성경으로 보십시오. 골로새 2장 13절로 14절. ‘여러분이 전에는 죄에 가득 찬 욕망을 끊어버리지 못해 죄 가운데서 죽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런 여러분에게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생명을 나누어 주셨습니다.’이건 피를 흘렸다는 말이지요. 또 읽으세요. ‘여러분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여러분이 하나님의 율법을 어긴 사실을 기록한 명세서를,’차용증서지요? 돈 빌린, ‘지워 버리신 것입니다.’더 보세요. ‘하나님께서는 이 제목을 적은 명세서를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못 박아 무효로 만드셨습니다.’아 세상에 이럴 수가 있어요? 빚이 백만 원이 아니라 천만 원 일억 십억 백억을 졌더라도 그걸 빚 문서를 불태워 버리면 그건 무죄 아니야? 빚을 안 갚으면 되지 않아요? 안 갚을 수 있지 않아요? 문서 문서상으로 계약된 문서를 무효로 만들었다. 평생 성경은 모든 설명할 때 각도가 다르지 않아요? 사회생활 경제적으로 증명하는 것이고 또 순수한 종교적 의식가운데 피로 증명한 것이고, 그래 무슨 죄가 있던지 소 한 마리 잡아 바치면 그건 죄가 없어지거든. 옛날 규범으로 보면, 피를 흘렸으니까 그건 종교적인 해석이지. ‘깨끗하라’그 말은 빨래 철학이지 빨래 삶으면 깨끗해지지 않아요? 그러니까 비유지 상징이고 비유고 암시이지 그 말은 실상은 엉뚱하다고요. ‘용서 했다’는 말은 윤리적인 말이지요. 부모형제 친척 간에 살아보면 용서가 되지 않아요? 윤리라는 말이야. 깨끗하다는 것은 이것이 어떤 물질적인 해석 아니겠어요? 위생적인 말 아니겠어요? 건강해졌다. 빚을 갚으라는 말은 경제적인 말 아니겠어요? 빚을 다 갚아줬다. 그렇게 성경 말씀이 아침에 제가 말씀 드리려는 것은 한 말씀인데 이것을 꽉 붙들듯이 말이야. 이 공님은 붙잡은 것이 거룩한 생활이야. 과거에 처자가 있니 자식이 있지 그것을 말한 것이 아니야. 새 출발 함에 있어서 이 선생님도 그거지요. 이 공님의 뜻을 처음에는 의심하고 반대 해봤단 말이야. 살아보니까 그것이 아니더란 말이야.



 



그래 나중에 회개하시고 역시 이 공님의 말씀이 옳다. 그리고 거룩한 생활 하도록 이렇게 이제 묵시한 것이지. 자기 몸으로, 또 우리들도 가사 어제 밤 까지는 이 선생님의 뜻을 몰랐더라도 좋아요. 오늘부터 알면 따라가는 것이지요. 항상 사람은 그런 것이니까. 일찍 터진 사람이 있고 늦게 터진 사람이 있고 그래 한 집에 살아도 전혀 모르고 살지 않아요? 전 식구들이, 그래 뭐 나눠먹고 사는가보다. 불쌍한 사람들한테 간호하고 사는가 보다. 그것은 위생 사업이지 구령사업은 아니거든. 그럼 경제, 경제적으로 도와주는가 보다. 어느 때든 그것을 깨닫거든. 아 이것이 근본 말씀이다. 썩지 않는 다는 말이나 부활한다는 말은 뜻은 같거든. 썩는 다는 말은 인제 물질이 부패되니까 그 소리고, 부활 한다는 말은 몸을 벗고 예수님 하늘나라 가셨다. 그 말이지. 말은 다 달라. 그 뜻을 밝히는 말에 불과하지 무슨 뜻을 밝히시기 위해서 형용을 하는 것이지. 그 말 자체는 그 뜻을 몰라도 좋고 그런 말, 안 썩는다. 부활했다. 거룩하다는 말이 그 말이지요. 살아서 나비가 되었는데 뭐라고 표현할까? 그건 거룩하다고 해야 한다. 영이라 해야 한다. 영, 하나님은 영이시니 영으로 예배를 보라고 하시지 않아요? 그래서 제일로 쉬운 말이 새로 난다. 그 말이야. 예수님이 요한복음 3장에 새로 나라. 새로 낳기는 나야하는데 누에가 새로나 봐도 두잠 자거든. 한번 갖고는 안 되어. 새로 나는데 석 잠자야 돼. 그래도 누에야. 또 자고 일어나도 그래도 누에야. 또 새로 나면 번데기야. 그래도 그것도 벌레야. 그게 소위 말하면 관이라는 말이야. 예수가 3일 동안 들어 간 게 널 속에 들어간 거 아니야? 벌레지. 그래도 그것도 거룩하지 못해. 다섯 잠 다 자고 마지막 허물 벗었을 때 나비가 되거든. 그게 부활이지. 부활하라. 그 말이나 새로 나지 아니하면 그 말이나 같지요. 부활해야 천국을 간다. 새로 나지 아니하면 하늘나라 못 간다. 예수님도 그걸 봤지요. 벌레가 허물 벗고 나비가 되는 것을 봤으니까 그 말하신 것이지. 소리만 들어버리면 뭔 뜻인지 모른다고, 또 거기에 붙잡혀 고집을 부리면 교리가 되지. 교리를 한번 정해놓으면 죽어라고 싸우지요? 다른 말 하면 또 이단이야. 그래 원 뜻을 모른단 말이야. 항상 원뜻을 모르고 헤맨다고 나비가 되어야 뭐 자유를 하지요. 산으로 훨훨 날아가지. 벌레가 아무리 지가 벌레라도 몇 번 허물을 벗었기로 벌레지. 그 새로 나야 된다는 말은 한번만 아니에요. 날마다 새로 나야해. 시시때때로 새로 나야해. 천번만번 억 만 번 새로 나야 그때그때 새로운 것이지.



 



이 선생님은 그래요. 무엇이 깨끗하냐? 그 순결철학에 있어서 누가 깨끗하냐? 그러니까 처녀들은 세수를 하되 물로 닦으면 시원치 않으니까 비누로 닦고 비누로 닦아도 시원치 않으면 두 번 닦고 그것도 시원치 않으면 박박 긁는다고. 더, 더, 더 깨끗하라고, 그러면 깨끗하냐? 그러셨다고. 아니거든. 잠자고 봐라. 또 더럽다는 거예요. 날마다 새로 닦아야 깨끗해지는 것이지, 하루만 지나면 깨끗하지 못해. 시간이 더러워 시간 자체가 더러워. 바울은 시대가 악하다고 그랬지. 시간이 악하다고 시간 자체가 더럽다고. 살다보면 때가 묻어. 오늘 거룩한 사람이 되었다. 내일 봐. 속된 사람이 되어버려. 죄인 오늘 아주 깨끗해졌다. 한 달 후에 봐. 속된 사람이지. 영원히 사람은 부정하니까 영원히 새로워 져야지. 한번만 어떻게 허물 벗고 나비가 된다. 그것은 편지에 불과하지. 허물 벗을 수 있다. 가능성에 보여 진 것이지. 계시에 불과하지. 그래 동양 경서는 더 좋은 글이 있어요. 일신일신우일신(日新日新又日新), 한문 글자에요. 날로 새롭고 날로 새롭고 또 날로 새롭고 일신일신우일신(日新日新又日新), 자꾸 사람이 새로워져야 새사람이지. 오늘 회개했다. 내일은 또 다시 회개해야지 하루 동안에 얼마나 죄가 많아? 그래 임종할 때까지 사람은 새로워지는 것이다. 그렇게 보는 거지요. 임종 전에는  죄인이다. 그거에요. 시간이 흘러가는데 똑딱 벌써 죄가 묻었어요. 그런데 무슨 놈의 성인이냐? 죽은 후에는 완성이다. 나비가 되었으니까 그렇게 보는 것이 거룩함을 보는 평가거든요. 살아서는 성인이 없다지 않습니까? 죽은 후에 성인이 있는 것이지 백년이 흘러가야 성인이 성인되거든. 죽은 후에도 죄가 늘 발견되거든요. 백년 되어버려야 다 그것이 끝이 나지. 인제 그러니까 사랑이 있어서 저는 그럽디다. 자식이 열이면 아홉은 효자고 자식 하나가 불효  자식이라면 어떻게 미워하겠냐? 친 부모라면, 의부모가 아니라면 부모자식 간에 더 사랑하지요. 더 걱정하지요.



 



천하에 인류가 50억 이라는데 예수교 신자가 몇 억 이라면 한 십억이라면 그럼 효자들인데 불효자식은 미워하겠냐? 하나님 안 믿는 백성이 있다면 마음을 보시는 아버지신데 그럼 불교신자가 예수교 신자보다 더 악 하다. 더 선하거든 오히려 그럼 인류가 하나님 자손인데, 어디까지 하나님의 자손이라고 통제할 수 있는가? 하늘나라에서, 그런 뜻으로 화목해야겠다. 그런 생각이 들어요. 그 떼제의 원리는 화목일체야. 화목해야 한다. 인류는 종교 이전에 종교가 있기 전에 원시인으로서 화목해야 한다. 그 다음에 종교 믿는 것 좋고. 그래 화해. 떼제 운동은 목적이 화해거든. 화해하면 하나가 되지 않아요? 한 형제가 화해일치. 역시 동광원의 길은 좁고 도 좁고 도 그런 좁은 길이 없겠습디다. 한두 사람이 동지가 있고 그렇게 살아갈 운동이지. 천사같이 나비같이 살자는 교훈인데 그게 어디 하나 둘 나올 일이지. 대중이 나올 수 없지 않아요? 대중은 벌레로서의 생활을 하고 있는데 벌레로서 출세를 하고 있는 세상인데 나비같이 살자. 거룩하게 살자. 그래 인제 구경은 그렇게 되겠지요?



 



다 이건 대중운동은 되지 않아요. 한 두 사람이 살고 나타나시고 글이 쳐져 있는 게 그래서 그 말이에요. 이 공님 이랄지 이 선생님의 말이 쳐지기 때문에 백 년 만에 하나씩 나와도 동지는 있다. 등불은 켜질 거라고 그래 인제 결론을 이야기합니다. 그렇다면 이 공님의 발자국이 화학산에 있다고. 글은 있으니까 그분의 발자국이 없으면 이건 신비가 다시 말하면 이건 공중에 떠버려요. 이건 사람이 아니다. 귀신인가보다. 옛날에 천사가 나타났다 갔나보다. 실제로 그 분이 사람이었다. 한 천 년 후에 그럼 어디서 살았냐? 어디서 도를 닦았냐? 화학산에서 닦았다. 그 분의 무덤이 어디 있냐? 무덤을 옮겨서는 안 되겠대요. 마음 같으면 요새 깊이 생각해 보니까 그 확실한 증거가 있어야 돼. 거기서 돌아가셨다. 거기서 은둔하시고 돌아가셨다. 경솔하게 그거 빼다 옮기면 안 돼. 그 분 제자 이 선생 어디서 죽었냐? 계명산에서 돌아가셨다. 거기 있어야 돼. 뼈가, 그걸 재앙스럽게, 아 동광원 선생님 이라고 파다가 옮긴다는 거예요. 남원으로, 그건 큰 뜻을 모르고 하는 소리야. 동광원의 선생이 아니야. 인류의, 그러니까 하나님이 이렇게 딱 벌려놓지 않아요? 그 이북가지도 중국까지도 빛이 되어야 되어요. 선생님 살아계실 때 그 말했지요? 그 말이 기억이 나요. 나는 동광원 사람이 아니야. 나는 앞으로 중국에서 내가 필요하다면 거기 가서 살 사람이고 소련에서 내가 필요하다면 거기 가서 살 사람이지. 나는 여기 살 사람이 아니요. 



 



그 말을 귀로 들었어요. 직접 들었어요. 평화를 사모한다는 거 진리를 그리워 한다는 제자가 거기 있으면 거기 살 사람이지. 여기서는 왜 있냐? 몇 사람이 필요한 사람이 있다. 그 말씀이 필요해서 내가 있는 것이다. 거룩하게 살아라. 이 말씀은 많은 종교 있지만 그걸 주장하지 않으니까 나를 통해서 그 말씀을 들을 사람이 동광원에 몇 사람이 있으니까 있는 것뿐이지, 나는 동광원 사람이 아니다. 그렇게 이야기 하셨어요. 그래서 인제 그 흔적이 계시기 때문에 크게는 못하더라도 이 선생님이나 이 공님을 존경하고 참 스승으로 하는 몇 사람이 있다면 발자국을 남기면 좋겠다. 발자국 그 화학산 일대에 뭐 큰 행사는 못하더라도 조촐하게 조그마하게 기도실이라도 몇 개 해 놓으시고 뜻있는 사람들은 가서 기도하시고 살림하고 살 것도 아니고 기념할만한 무엇이 있으면 좋겠다. 소원 했으니까 누구든지 하시겠지요. 그런 소원을 주신 것도 다 하나님이 주신 것이니까 이만큼 시간 마치고 다음에는 다른 사무직 일을 봅시다.  찬송가.




 






    동체대비(同體大悲) (동광원 영성)
절대자 하나님에 대한 사랑으로 무지무욕의 청빈 생활이 나오게 되었고, 일하는 것이 기도라 생각하여 모두 노동으로 협동하고 서로를 정직하고 진실하게 섬기면서 바른 농법으로 버려진 땅을 옥토로 되살려 자급자족하였으며, 세상에서 버림받은 고아들과 병자들을 형제자매로 받들어 돌보지 않을 수 없었기에 고아원을 운영하고 복지법인을 세우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와 같은 동광원의 영성을 한마디로 동체대비(同體大悲) 사랑의 영성이라 해봅니다. 진리의 사랑은 무아의 덕입니다. 욕망을 초월한 사랑은 무상입니다. 복음 삼덕 중 가난이란 태양의 빛같이 우주적 사랑의 계시입니다. 참된 가난은 우주와의 합일을 뜻합니다. 완전히 자기 의지의 이기심이 녹아져서 우주와 하나 될 때 하느님과 하나 됩니다.
이런 동광원의 모습을 두고 김흥호 선생은 다음과 같이 찬송했습니다. 기심청정여허공(其心淸淨如虛空) 기의부동여지리(其意不動如智異) 그들의 마음은 빈 하늘처럼 깨끗하고 그들의 뜻은 지리산의 반석처럼 굳세고 단단하여라
- 기심청정여허공(其心淸淨如虛空) 기의부동여지리(其意不動如智異)그들의 마음은 빈 하늘처럼 깨끗하고 그들의 뜻은 지리산의 반석처럼 굳세고 단단하여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