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제주 미로 공원 : 싻뿌리

mamuli0 2019. 2. 3. 09:04

 제주 만장굴 구경을 나와 점심을 성게 미역국으로 현지 음식 맛을 보았는데 기대 보다 미치지 못햇다. 나오다 손자가 하고 싶은 미로공원에 들어 갔는데 마지막 코스에서 조금 헤매다가 성공했다. 기념품과 선물을 구입하여 해안도로를 보면서 성산항으로 갔다.



 



 싹 뿌리

 

1992.06.28. 김준호 선생


 사도신경을 같이 하십시다.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한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시다가 저리로서 산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성령을 믿사오며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죄를 사하여 주는 것과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아멘.



 



성경말씀은 이사야 53장을 보십시다. 이사야 53장,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버린다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 우고 보지 않음을 받은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 하였도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멸시를 받아서 징벌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 시키셨도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으며 마치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 하였도다. 그가 곤욕을,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갔으니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산자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을 인함이라 하였으리요? 그는 강포를 행치 아니하였고 그 입에 괴사가 없었으나 그 무덤이 악인과 함께 되었으며 그 묘실이 부자와 함께 되었도다. 여호와께서 그로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 하사 질고를 당케 하였은즉 그 영혼을 속건 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그 씨를 보게 되며 그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의 뜻을 성취하리로다.’



 



 찬송가 135장 부릅시다.
제가 이사야 11장 1절 말씀을 읽어 드리겠습니다.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나서 결실할 것이요.’그런 말씀이 있어요.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우리는 예수님을 사모하고 기억할 때마다 또 예수님의 가장 사랑을 받던 우리의 스승 이 현필 선생님을 또 생각 합니다. 그런데 그 부모가 무슨 뜻으로 지어줬는지, 이 선생님이 애기 때 아이 때 이름을 지었는데 ‘싹뿌리’라고 지었다고 그래요. 싹뿌리, 이 싹뿌리, 여러분은 아십니까? 이 선생의 애기 때 이름이 싹뿌리 인데 저는 우연히 지금 발견 했습니다.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그런 말씀이 있다는 거 평소에 공동번역을 봤기 때문에 안보다가 오늘 여러분이 이 책을 보기 때문에 처음으로 보는데,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이 예언은 예수님을 두시고한 역대의 예언서지만 두 번째로 또 한국에 이 선생님을 두고도 한 예언도 되겠습니다.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그럼 우주적이라 할지 인류 역사상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 결실 이지요? 우리도 그분의 결실입니다. 또 아울러서 이 공동체로 말하면 그 싹뿌리의 그 영성이랄지, 그 신앙의 결실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같이 기념으로 읽어 주십시오.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그 다음은 들어보세요. ‘여호와의 신, 여호와의 신은 하나님의 영 하나님의 성령 하나님의 성령 여호와의 신 곧 지혜와 총명의 신이요. 모략과 재능의 신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이 그 위에 강림 하시리니 그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을 것이며 그 눈에 보이는 대로 심판치 아니하며 그의 들리는 대로 판단치 아니하며 공의로 빈핍한 자를 심판하며 정직으로 세상의 겸손한 자를 판단할 것이며 그 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며 입술의 기운으로 악인을 죽일 것이며 공의로 그 허리띠를 삼으며 성실로 몸의 띠를 삼으리라.’하신 말씀이 있고 또 10절 보겠습니다. 같은 이사야 11장  10절, 그날이 그 날에 그날에 이새의 뿌리에서 한 싹이 나서 만민의 기호로 설 것이요. 열방이 그에게로 그 거한 곳이 영화로우리라. 그날에 이새의 뿌리에서 한 싹이 난다. ‘한 싹이 난다’그러셨지요?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난다. 이 말씀은 인류 역사를, 역사를 이렇게 내다보는 토인비랄지 영원을 내다보는 역사학자들은 이 한 싹이 무엇이냐? 예수신데, 그러면 그 싹은 어디서 나는 것이냐? 이새의 줄기에서 나온다. 이새라는 말은 할아버지 이름인데 다윗의 아버지지요. 그러면 상징적으로 이새는 농사하는 사람이요. 학자도 아니고 영리한 사람도 아니고 정치가도 아니고 그냥 산 속에 숨어서 논을 갈고 밭을 갈고 그냥 순수 농사하던 사람이야. 그 농군의 아들 다윗이 임금이 되지요? 그러나 여기서 보이는 말씀은 이 아담의 자손 가운데서 예수님이 태어난다고 하는 예언서입니다. 이마에 땀이 나도록 일하던 아담의 후손 가운데 상징적으로는 다윗이 나오고 그 혈통에서 성모 마리아가 태어나시고 그 처녀 품속에 예수 애기가 잉태하심으로서 그 애기는 어떻게 세상에서 크느냐? 아까 53장에 우리가 봤지요?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그 이새의 뿌리에서 한 뿌리가 난다고 그랬는데 그 뿌리에서 애기가 났는데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볼품이 없어요. 농사 해놓은 자식이야. 농사꾼의 자식 일해 먹는 사람의 자식인데 연한 순 같고 마른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계보로 봐서는 이름 있는 자손이 아니다. 그것이야.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은 살아생전 자기 엄마가 마리아가 아니냐? 그렇게 이야기 했어요. 그런 시골뜨기 마리아 아들이 무슨 하나님의 아들이냐? 그렇게 비난을 했지요? 그런데 예수님을 우리는 기억하는 시간이지만 예수님께 충성하며 예수님께 몸을 바쳤던 아들 또 이 현필 선생님을 같이 기억 하면서 그 모양도 없다. 고운 모양도 없다. 풍채도 없다. 흠모할만한 아름다움도 없었다. 그 점입니다. 그럼 이 선생님을 가르치신 스승은 이 공님이신데 그야말로 그분은 산속에 태어나시고 일찍 조실부모 하시고 10세 이전부터 남의 집을 사시고 머슴으로 사시고 그 공부를 못했지요. 하늘나라 가기까지는 세상공부를 못하셨습니다. 그런데 결실로 말하면 그분의 영적 자손으로 말하면 참 하나님께서 사랑함직한 바로 우리들이지요. 우리들, 그러니까 예수님의 족보를 생각해 보고 이 세종 선생님의 족보를 생각해 본다면 이 세상에서는 연한 순 같고 마른땅에서 나온 줄기 같고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고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버린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그럼 이 시간에 이 성경 말씀을 우리에게 적용 시키고자 하는 것은 지금 한 자매가 여기 오셔서 하나님을 같이 섬기다가 임종이 가까워요. 지금, 그 얼굴을 보면 참 볼품도 없어요.



 



그런데 이 땅위에 태어나서 어제까지 안 것으로  말하면 나이가 50이 가깝지요? 어떻습니까? 60이 가까우세요. 이 땅위에 태어나셔서 아직 결혼을 안 하셨어요. 아직 처녀시고 그런데 중풍이 걸렸지요. 그래 많이 고생 하시다가 이제는 우리보다 훨씬 먼저 하늘나라 가게 되는 것입니다. 어찌 보면 멸시를 당하고 우리도 귀히 볼만한 것이 하나도 없어요. 그러나 영적 세계에 있어서는 영적 나라에 있어서는 그 영혼은 참 예수님의 결실이고 또 이 공님의 결실이고 또 이 현필 선생님의 결실이고요. 열매라. 그 말이야. 열매, 아울러서 우리들의 가지들 이지요. 우리들의 형제지간인데요. 그런 뜻으로 우리는 위로가 되는 것입니다. 그 부모가 넉넉하고 유명한 사람이 아닌 예수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난다. 또 우리의 계보도 아무 종파도 없고 뿌리가 약해요. 이름 누구다 아는 삶이 아닌 땔나무꾼의 영적 자손들입니다. 그냥 성경도 잘 모르고 믿었던 어른의 신앙적인 자손들이 모여서 이 땅위에서 버림당한 지금 죽어가고 있는 그런 자매를 섬기도록 일을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똑똑해서 섬기는 것 아니지요. 피차 못났지만 피차 이름 없는 농군의 자식들 이지만 예수님의 딸과 아들이 되어서 그렇게 땅위에서 예수님이 부탁하신대로 지극히 적은 자, 땅위에서 버림당한 한 사람 한 테 해준 것은 바로 나한테 해 준 것이다. 하신 예수님의 계명을 따라서 우리가 오늘도 여기서 예배를 보며 세상을 하직하고 떠날 영혼을 위해서 빌고 있습니다. 그런 뜻으로 이 글을 이 성경 구절을 택했습니다.



 



자 따라 읽으십시오.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저는 믿기를 저 자매님이 이제 얼마 없어서 하늘나라 가실 텐데 하나님은 얼마나 사랑하시며 아 사랑하는 내 딸아, 그동안 고생 많이 했다. 또 저 영혼 때문에 대신 피를 흘리고 죽으신 예수님, 자기 사랑하는 제자가 하늘나라 왔을 때 얼마나 사랑 하실 것이며 또 이 선생님 또 정 원장님 또 김 원장님, 이 공동체를 담당하시고 하늘나라 먼저 가신 분들이 자기의 자녀가 오니까 하늘나라에 얼마나 하늘나라에서는 환영을 하실 것이며 기대에 차요. 슬프지가 않아요. 땅위에서는 섭섭하지만 영계에서야 큰, 그 일 년 열 두 달 농사해서 가을 하듯이 가을에 과실 따듯이 한 영혼이 익어가지고 결실을 해가지고 천성에 입성할 때 얼마나 거기서는 감격하며 기뻐하실까? 그런 점도 같이 생각해 봅니다. 그래 우리 족보가 자랑할 것이 없다. 그 말입니다. 이새의 뿌리라는 게 그거에요. 너 누구 자손이냐? 아버지를 내세울만한 건지가 없어요. 그래서 못난 사람들 끼리 예수님을 섬기다 간 족보 그것밖에 없고 그런데 사랑이 결실을 했어요. 남남이 모여서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끼리 모였는데 병들어 가지고 오갈 데 없었을 때 방 하나를 용납하고 그 방에서 임종 할 때 까지 어떠한 의미에서 안정을 받은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하나 길거리에 쏟아져 가지고 남의 집 문전에서 밥을 얻어먹어 봤다는 그 사실을 알아요. 누구 집을 찾아간들 누가 환영을 합니까? 삼밭실에서 돌아가신 한 영혼인데요. 그분은 이 선생님의 직접 은혜를 받은 분이라 하겠는데 이 선생님이 제중 병원에 입원해 계실 때, 어느 자매가 복도에서 그때만 해도 모기가 많은 시절 농약이 광주 시내에 약을 안 뿌렸기 때문에 제중병원 복도에 모기가 어떻게 많은지 복도에서 밤을 새우며 계신 분, (끊김)



 



 누구든지 6개월 되면 좋으나 궂으나 퇴원을 당하니까 그렇게 퇴원을 했는데 갈 곳이 없어서 거기 복도에서 잠을 자더라. 그래요. 그런데 거기도 잘 수가 없어요. 한국 땅에 누구 집을 간들 쫓겨난 여자인데 왜 결핵 환자니까 다 죽어가는 지금 목숨이 생명이 왔다 갔다 하는 죽어가는 사람인데 광주시내 어디를 간들 용납을 안 해요. 그래 결국은 퇴원당한 그 병원으로 다시 찾아와서 그 복도에서 용납을 받은 것이지요. 그런데 그 복도에도 한 이틀 뿐이에요. 용납이 안 되어요. 간호사들이 못 자게 해요. 그래서 다리 밑으로 갔어요. 요 양림 다리 밑에 거기서 죽지를 않아요. 죽어지지 않아요. 그래서 얼굴이 모기가 물어가지고 퉁퉁 부었다. 그래요. 얼굴이, 그래도 모진 목숨 죽지 못하고 다시 이 선생님 입원해계신 복도에서 하루 밤을 잤든가 봅니다. 그래서 당신 소원이 뭐요? 물어봤어요. 거기 들락거리는 자매들이 어디 가서 용납한다면 이 죽을 순간 까지만 참으로 자기 집 처마 밑에서 죽으라고 어디 가서 내 임종할 때 까지 그 처마만 빌려준다면 그것이 소원이라고, 죽어야 하겠는데 죽을 데가 없다고, 이 유명한 병원에 와서 죽으려고 했지만 아직도 죽지 않고 또 퇴원을 당하고 죽으려고 다리 밑에 있어 봐도 죽지를 않고 왜 이렇게 모기는 물어대고 이렇게 얼굴이 퉁퉁 부었지만 아직도 죽지를 않으니 어디를 가면 평안히 누워 죽을 데가 있을까? 그거지요. 어제도 그 자매님 방에 들어가 봤어요. 모깃불도 피울 수 있어요. 모기가 있으면 임종하기 까지는 알맞은 곳이에요. 고요한 방인데 그런데 이 선생님이 그 소식을 들으셨어요. 그 병실에서, 그 언니가 소원은 임종할 만한 그 처마가 없다고 합니다. 그러면 그 자매를 업어다가 삼밭실에 누이라고, 삼밭실에 결핵 환자들이 쳐놨던 막 한 칸이 있었기 때문에 송등원 형제들이 쳤다고 그래요.



 



송등원 형제들이 쳐놨던 거기 깊은 산속인데 거기 업어다 놓고 거기서 처음으로 죽은 사람입니다. 이름은 모르겠습니다. 그 죽을 공간을 얻어가지고 죽었으니 얼마나 행복 하겠어요? 임종하기 까지 용납을 안 하는 세상입니다. 이 세상은, 더러운 병이 들고 보기 싫은 병이 들면 자기 부모도 허락을 안 해요. 자기 친척도 허락을 안 해요. 병원도 허락을 않기가 쉬워요. 그런데 참 이 선생님의 사랑의 결실로 그 운동이 곧 이 공동체가 생긴 것입니다. 죽으려야 죽을 데 없는 사람, 많은 이 동광원 사람들이 그 일을 해야 한다. 그거에요. 무슨 세상 사업같이 하라는 뜻은 아니고 그래서 귀일원의 첫째 사업이 그겁니다. 여기 의사와 간호원이 이 선생님께 와서 말씀 들을 때에, ‘선생님 우리는 어떻게 해요? 우리는 참 딱한 일을 봤어요.’‘무슨 일이요?’‘대학 병원에 입원한 청년인데 부모도 없고 머슴으로 살다가 전신 불수가 되었는데 그 사람이 온 몸은 다 나았지만 두 다리가 뻣뻣해서 얻어먹더라도 앉아야 얻어먹을 텐데 누워서야 누가 밥을 줍니까? 그래 병원 당국에서 불쌍하다고 생각 되어서 다리 하나를 기억자로 꺾었습니다.’니은자죠. 니은자로, 그런데 그것이 병원 경비 그 입원 소위 말하면 치료 병원 경비가 모자란단 말 이예요. 그러면 다리 하나를 기억자로 꺾었으니까 한 다리마저 꺾어놔야 누구집 앞에 문전에 가서 앉아 있어야 밥을 줄 텐데. 다리 하나는 뻣뻣하고 하나는 꺾어 놨는데 병원 당국에서 예산이 모자라니까 오늘 내일 퇴원을 한답니다. 퇴원 할라는데 갈 곳이 없어요. 주인집에서 쫓겨났는데 고향에 가 봐도 용납을 안 하니까 이제는 병원 당국에서 리어카 꾼을 불러다가 내일 가만히 간호원이 비밀로 들어보니까 내일 리어카 꾼을 사 가지고 그냥 무조건 실어다가 여기요 광주천에 내버리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불쌍한 청년을 어떻게 해요? 그 말을 이 선생님이 들으셨어요.



 



얻어먹을 수도 없이 다리 하나를 더 꺾어놔야 얻어먹을 텐데 반쯤 누워있고 반쯤 앉아있고 딱한 사정이 그러면 그때 우리는 아주 생활이 곤란했어요. 먹을 것이 없는 때 인데 우리가 방을 용납해 드릴 테니까 당신들이 밥을 매일 갖고 오시오. 날마다 밥을 먹을 때 한술씩 덜먹고 갖고 오신다면 우리는 방을 용납하겠소. 그거에요. 그렇게 해서 매일 밥을 한술씩 모아가지고 갖고 올 수 없으니까 그것 보고 뭐라 합니까? 십시일반이라고, 열 사람이 밥을 한 수저씩 덜 먹으면 한 그릇 그러니까 간호원 의사들이 열 사람이 한술씩 밥을 덜먹고 그 퇴원한 청년을 밥을 식비를 대자. 그래가지고 한 달 월급에서 가사 일원씩 십 원씩 떼어가지고 모아가지고 한 이십여 명이 달 달이 삼천 원씩 그때 한 달 먹을 쌀 팔수 있는 금액인가 모르겠어요. 한 달 양식 값으로 가지고 왔지요. 그렇게 해서 그 형제가 이 용납을 받아가지고 김 원장의 아들 홍석 씨방에 그때 고등학교 학생인데 용납했지요. 그리고 똥은 신문지에 누면 꼭 밖에 던져 버리기도 하고 땅에다 묻어주고 그렇게 했습니다. 그렇게 달 달이 간호원과 의사는 양식을 가져오고 그렇게 된 것이지 사업은 아니었거든요. 그러니까 인제 죽으려야 죽을 곳이 없고 앉아서 얻어먹고 싶어도 발이 하나가 수술이 안 되어 가지고 들어 누워 있어야 하고 그 무렵에 시작한 것이 귀일원입니다. 귀일원, 그게 귀일원의 시작이지요. 처음부터 이 선생님이 시작한 것은 사랑의 결실이고 사랑의 열매가 열린 것입니다. 뭐 두 사람 열사람 살리자는 것도 아니야. 그 청년 한사람 죽을 때 까지 집을 용납하고 방을 용납하자. 그랬던 것이지요. 그게 씨앗이지요. 그 씨앗이 떨어져 가지고 이제 여러분까지 같이 살게 된 거지요. 그러면 아까 그 자매요. 죽으려야 죽을 곳이 없다고 그렇게 죽을 장소를 찾던 분이 삼밭실에서 죽은 거지요. 이 현필 선생님도 그 방 그 자매가 죽은 방, 거기 가서 피를 토하고 안정하셨지요. 결핵병이 심했기 때문에 거기서 안정하고 치료하신 적이 있어요. 그런 것은 자비에요. 자비. 사랑이지 사업은 아닙니다. 예수님이 원하시던 사랑,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서로 사랑하여라. 사실은 사랑을 하는 곳이지 사랑을 하는 장면에 불과하지 이렇게 모여 사는 것은 아니지요. 그게 결실이지요.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그걸 말한 거지요. ‘천국은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할 것이 아니요. 마음속에 있다.’하는데 죽으려야 죽을 곳이 없고 내 방을 용납 하겠습니다 여기 와서 임종 하세요. 그걸 봐주는 것이고 감당하는 것이고 그걸 용납하는 것이고 사랑하는 것이니까 그게 결실이지요. 예수님이 왔다 가서 뭐라고 하겠어요? 사랑을 했기 때문에 예수님은 결실이 있는 것이지요. 예수님이 오셔서 한 일은 두드러지게 역사적으로 남는 것은 막달라 마리아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죄 지어서 올데갈데없고 용납이 안 되니까 예수님의 품으로 용납했던 여자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하늘나라에 계신 아버지를 그 여자한테 상속을 시킨 것입니다. 내 아버지가 네 아버지다. 얼마나 그런 영광스러워요? 



 



 ‘그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그 결실이 무엇이냐? 예수님의 그 싹인데 그 뿌리에서 난 싹인데 결실한 장면 아침에 봤어요. 요한복음 20장이지요.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이새의 삐리에서 싹이 난다는 그대로 나왔지요. 그런데 볼품이 없어 엄마는 처녀요 가난하고 극빈가정에 태어나 가지고 죽을 때는 죽을 데가 없어서 십자가상에서 임종을 하지요. 태어나서는 날 방이 없어서 남의 집 외양간에서 태어나시고 삼밭실에서 죽은 자매보다도 예수가 더 불쌍하지요? 어찌 되었든지 자비의 결실이라는 것은 무엇이냐? 사랑의 결실, 그 아침에 봤습니다. 다시 한 번 보겠습니다. 그 예수님이 부활하셔 가지고 그 여자를 만나서 한 소리이지요. 17절, 20장 17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 올라가지 못 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네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이 말은 열두 제자한테 하시지 않았어요. 가장 불쌍하고 갈 곳이 없고 용납 받지 못하고 버림당한 여자, 가장 땅 위에서 불쌍한 여자 마리아에게 내 아버지가 네 아버지다. 그거지요. 그러니까 하나님 아버지를 이 여자한테 주신 것 이지요. 내 아버지가 곧 너의 아버지다. 또 내 하나님이 곧 너의 하나님이다. 천국, 천국의 주인 하나님 아버지를 이 부인한테 준 것입니다. 이 부인이 누구냐? 하면 지금 50억인데 50억 가운데 가장 불쌍한 여자지요. 가장 버림받은 여자, 가장 윤리도덕에 의해서 용납 못한 여자, 가장 죄 많은 여자 가장 불쌍한 여자한테 예수님은 자기 아버지와 하나님을 주셨습니다. 따라 읽으십시오.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고 하라.’성경이 여기 이 말씀이 여기뿐이에요 다른 데는 그 말이 없거든요.



 



그러면 예수님의 말씀이 바로 결실입니다. 사랑의 결실,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무슨 결실이냐? 사랑의 결실, 사랑의 과실, 예수 33년 생활에 이런 결실이 없었다면 그 뜻이 무의미하잖아요? 무엇 때문에 예수가 오신 것입니까? 병든 자를 찾아서 고쳐주시고 버림당한 죄인을 하나님 품으로 데려가는 거 그게 예수님의 결실 이지요. 그런데 그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난다는 말씀은 예언서인데 한 인격이 오면 그런 뜻이 됩니다. 한 인격자가 오시면 인류역사는 완성이 된다. 하나님은 나무 하나를 역사라는 나무를 심어놨는데 과실이 열려야 할 텐데 그 과실은 사랑입니다. 사랑인데 누가 사랑을 하냐? 한 사람은 사랑을 하고 한 사람은 받아야 되요. 사랑은 받을 사람이 없으면 사랑은 형성이 안 돼요. 과실이 열리지를 않아요. 그렇게 해서 예수를 사랑을 했고 막달라 마리아를 받아들인 사랑입니다. 두 분이 사랑을 완성 했어요. 그러니까 막달라 마리아는 우리를 대표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내가 되는 것입니다. 내가 바로 막달라 마리아가 되는 것입니다. 내가 올데갈데없고 용납 받지 못하고 죽을 곳이 없이 헤맬 때 방을 용납하고 여기 와서 임종 하세요. 방을 용납했다면 그게 사랑 이지요. 그럼 임종이 되었다면 그게 결실입니다. 결실, 그러니까 이 나무에서 열린 과실이 지금 익었지요. 지금 임종이 가깝지요. 과실이에요. 가지에서 열매가 열렸어요. 사랑으로 용납 했어요. 방이 많으니까 방 하나 줬나보다. 뿌리는 이 성생님이 삼밭실에 막을 쳐놓고 죽어가던 결핵 환자를 용납한 것은 거기서 죽으라고 방을 주어라. 그게 시발점 이라고, 길거리에서 얻어먹도록 발 하나를 수술해가지고 하나를 못한 청년이 올데갈데가 없으니까 여기 와서 살아라. 죽을 때까지 살아라. 용납한 것이지요. 그게 사랑의 결실 구체적인 결실이라 하겠습니다.



 



 사랑이 막연한 것이 아니라고 인제 그런 뜻으로 우리가 성경을 볼 텐데요. 고린도후서 13장 9절입니다.  한 인격이 오시면  한 인격이 오시면 사랑은 완성될 것이고 역사는 완성되는 것입니다. 예수가 왔기 때문에 벌써 아무리 세상이 떠들고 싸워도 역사는 완성 되는 것입니다. 그 결실이 있을 것이니까 그러면 공동번역으로 보셔야 그 뜻이 살아납니다.  고린도후서 13장 9절인데요. 그 인격이 완성 된다. 그런 뜻인데 개역으로 보면 완전한 사람이 된다고 그랬어요. 완전한 사람, 인격이라는 말로 번역을 안했습니다. 그런데 고린도후서 13장 9절 공동번역으로 보면 그렇게 번역이 되어있어요. 참 잘되어 있어요. 제가 읽어드리지요. 우리는 약하더라도 여러분이 강하면 우리는 기쁩니다. 가사 우리의 스승 이 선생님이나 정 원장님이나 김 원장은 전염이 되어버렸어요. 죽어버렸다. 몸이 썩어서 죽었지요. 그 순에서 끝에 가서 꽃이 피고 열매가 열린다면 사랑을 하신 분들은 자기가 썩기를 원합니다. 나는 약해서 죽어야 한다. 스승이니까 바울선생님의 생각인데 우리는 약하더라도 여러분이 강하면 우리는 기쁩니다. 먼저 돌아가신 분들은 기쁘게 죽었어요. 이 젊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하고 살 걸 생각할 때 자기들의 몸이 무너지고 병이 들어 죽어갈 때도 희망을 가지고 돌아 가셨습니다. ‘우리는 약하더라도 여러분이 강하면 우리는 기쁩니다. 우리가 기원하는 것은 여러분의 인격이 완성되는 것입니다.’먼저가신 선배들이 어른들이 세상을 떠날 때 그분들이 떠나실 때 그분들의 기도는 우리들의 인격이 완성되는 것을 원하셨습니다. 인격의 완성 인격자가 있어야 사랑을 하지요. 인격자가 있어야 사랑을 완성하지요. 그래 이 사도바울의 뜨거운 선언입니다. 제자들이 자기를 반대하고 물러가고 배신한다 하더라도 부모의 심정으로는 그 제자들이 회개하고 돌아와서 사랑을 완성해 주기를 비는 것입니다. 이 심정은 이 현필 선생님의 심정이고 정 원장님의 심정이고 김 원장님의 심정이지요. 그래 우리는 그런 것을 눈으로 봤고 목격한 사람들입니다. 가사 정 원장님은 이 죽어가는 환자 방 하나를 짓기 위해서 뭐 어떻게 했느냐? 자기 부인의 사랑을 희생 했지요. 자기 아들의 사랑을 희생해 버렸지요. 자기 딸의 사랑을 희생해 버렸어요. 자기도 부인한테 사랑받고 자식한테 사랑받고 며느리 사랑을 받고 싶지만 그거를 전부 희생하시고 그 철없는 고아들 불쌍한 환자를 데리고 평생을 자기 생명을 바쳤지요. 그거지요. 예수님의 사랑을 위해서 인격이 오신거지요. 이 공동체도 인격이 왔다 가신 흔적이 있어요. 인격 인격은 자기 하나가 폭탄이 되어서 죽더라도 많은 사랑이 꽃피도록 하신 것입니다. 자기 영달이나 자기 이득을 구하지 않았어요. 자기의 성공이나 자기의 영달을 포기하시고 이 약한 사람 갈 곳이 없이 죽어가는 사람한테 방을 만들어주고 또 양식을 대주고 평안히 죽을 수 있도록 평안히 하늘나라 갈수 있도록 그 일을 위해서 몸을 바친 것입니다. 그 일이 우렁찬 사업은 아니었어요. 한 사람이지요. 한 사람, 따라 읽으세요. 우리는 약하더라도 여러분이 강하면 우리는 기쁩니다. 우리가 기원하는 것은 여러분의 인격이 완성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기도도 이 기도를 본받읍시다. 우리들의 기도는 그럽니다. 우리들이 지금 우리 스승들이 우리를 예수의 사랑으로 이렇게 열매를 맺어놓으시고 떠난 지가 모두 얼마 안 되지만 제2의 공동체를 위해서 희생해줄 꽃이 펴야지요. 젊은 구도자들이 같이 살아서 우리들이 세상을 떠나면 이 일을 계승할 제자들이 있어야 해요. 후배가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젊은 구도자들이 항상 우리들을 찾아와서 같이 살아야 합니다. 그러려면 용납을 해야 해요. 좋은 꼴 궂은 꼴 다 봐주고 사랑하고 우리가 뒤를 뒷받침 해야지요. 우리들이 20대에 시험에 들었을 때 이 선생님이나 가사 김 원장이나 정 원장이 얼마나 한숨을 쉬고 잠을 못 잤다고요. 우리들도 이 젊은 사람들을 용납하고 시험이 들고 흔들릴 때 마다 같이 밥을 굶고 고생하고 기도하고 그래서 후배를 양성해야 해요. 인격을 완성해야 합니다. 인격자를 용납해야 합니다. 인격자를 용납해서 키워야 합니다. 인격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지요. 모든 식물이 비를 마시고 물을 마시고 크듯이 선배들의 사랑을 먹고 커야 되요. 먼저 온 언니들이 뒤에 온 젊은 사람들을 자꾸 양육해야 해요. 그 인격자를 길러내는 것 이지요. 인재를 길러내야 해요. 우리의 기도는 한 인격자가 나오기를 바란다. 우리의 기도는 한 인격이 완성되기를 바란다. 그 점을 우리가 요령을 얻어야겠습니다. 우리의 농사는 이 땅에다가 씨를 심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농사 안 해도 자연히 먹도록 되어있어요. 우리의 씨는 사람의 씨를 받아야 합니다. 젊은 후배들을 받아가지고 길러내야 해요. 이 일은 많아졌는데 우리가 어떻게 이 일을 다 감당 합니까? 젊은 사람들을 늘 용납하고 길러지기를 바라는 뜻 그게 이 기도지요. 선배로서 원하는 것은 뭐 호강하는 것이 아니다. 여러분의 인격이 완성되기를 바란다. 하시던 그 기도를 우리가 같이 하십시다.



 



 또 아울러서 암담한 역사의 시절에 이 예수님이 오시기전 천년 이천년 전에 그걸 바라신 거지요. ‘이새의 뿌리에서 한 싹이 날 텐데 그 분이 인격자다. 한 인격이 오시면 역사는 완성될 것이고 사랑은 결실이 될 것이다.’그 예언서를 우리가 봤지요. 그러면 보십시오. 누가 한절 봐주세요. 요한복음 12장 24절, 그럼 한 사람의 인격이 완성 된다는 것은 밀알 하나와 같은 것이다. 우리는 그걸 익히 봤기 때문에 해설을 안 해도 알아요. 이 세종 선생님의 일생이 밀알이었고 이 현필 선생의 일생이 밀알이었고 또 정 원장님 일생이 밀알 이었지요. 예수님을 본받았으니까 첫째 밀알은 예수시고 그 다음은 또 김 원장님도 그랬지요. 자기 일평생 얻어진 행복을 다 포기하시고 여기 남아 있는 우리들 때문에 희생이 되신 것입니다. 밀알이 돼서 썩어졌으니까 그 결과로서 우리들이 남아있는 것입니다. 후배들이 아까 그래서 그 말씀을 본뜻이 거기 있다는 겁니다. 이사야 53장 10절이 아까 요절 이었지요. 아까 본문 말씀은 53장 10절을 우리가 한번 따라 읽을 말씀입니다. 제가 읽고 따라 읽으십시오. ‘여호와께서 그로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 하사 질고를 당케 하였은즉 그 영혼을 속건 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그 씨를 보게 되며 그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의 뜻을 성취하리로다.’이건 참 직설적인 해설이니까 용납하시고 이해하십시오. 그럼 이 현필 선생님이 교파가 아니지 않습니까? 파벌이 없고 뿌리도 없고 가지도 없고 하늘에서 뚝 떨어진 운동인데 이 선생님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걱정이 컸겠지요? 정 원장님도 나이가 많고 이제 장래를 내다볼 때 어떻게 하나? 우리의 전통은 학문을 부인했습니다. 기억 니은 일 이 삼 사 세상 공부를 안 시켰거든요.


 



그러니까 밀알이 나와야 할 텐데, 자기는 지옥을 가더라도 공부를 해가지고 일 이 삼사 도 알고 살림을 해 줄 사람이 나와야 할 텐데 어떻게 하나?  그렇게 해서 기도를 많이 하신 다음에 우리들이 열 살이나 스무 살 먹었을 때 몇 십 년 후를 내다보고 공부를 하면 타락하고, 하더라고요. 대학을 졸업하면 타락하고 영혼이 타락한다고 공부를 안 시킨 마당에 이 살림살이를 할 사람을 어떻게 하냐? 학문을 가르쳐야 하겠는데 그럼 그 사람은 희생자지요. 밀알이 되고 썩어서 죽을 사람인데 참 야속하지요. 인간적으로는, 선택을 하는 거지요. 그렇게 해서 몇몇 사람을 가르쳐라. 이 선생님이 그랬어요. 몇몇 사람을 가르치십시오. 그처럼 그야말로 참 눈물겨운 이야기입니다. 그 살림살이를 가르친 사람이 희생이 되는 거예요. 살림을 알게 되면 세상에 타락하기 쉬우니까 살림은 돈이 필요하거든. 돈은 이거 일만 악의 뿌리가 아니요? 돈을 세고 살림할 사람을 가르치는 것이 죽기보다 어려운 일이었다고요. 그래 생명과 죽음을 내다보면서 이 사람이 영혼이 세상에 빠지지 아니하고 또 결혼도 하지 않고 돈도 모르면서 이 살림을 누가 할까? 그것이 벌써 한 50년 전의 걱정 이었어요. 어른들은, 세상 사람들 보십시오. 사업하고 돈 달아보면 반드시 세상에 빠져 버립니다. 물을 걸어가기보다 어려운 일이에요. 물은 걸어갈 만한 기적이 있어도요. 젊은 사람들이 돈을 세고 살림하는데 세상에 안 빠지기는 그런 큰 기적이, 기적이 아니고는 안 되어요. 그런데 우리 어른들은 사업을 원치 않았거든요.



 



그래 사람이 불쌍한 사람들이 모이다 보면 그것도 일종의 살림을 해야 하니까 참 눈물겹게 일 이 삼사를 가르치게 되었어요. 그러니까 지금 보십시오. 지금 귀일원에 원장 총무가 선발 되었어요. 그건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소와 같은 것입니다. 죽으려고 선택 되어 있어요. 영혼이 실족하면 타락해서 망할 것이고 육체가 건강 하더라도 욕만 얻어먹어요. 살림 잘못한다고 사방서 흉보고 그걸 누가 할라고 하겠소? 월급을 누가 줍니까? 누가 칭찬을 합니까? 뭐 영광이 있습니까? 앞으로 출세할만한 여지가 있습니까? 무조건 밀알이 돼서 썩어 내려앉는 자리인데요. 우연히 된 것이 아니라고 하나님께서 그래서 한 인격이 오기를 바라요. 그 인격을 키웠단 말이야. 그 어른들이 세상 떠나기 전에 한 몇 사람이라도 인격자를 키워야 한다. 자기 생명을 포기하고 대를 위해서 희생될만한 밀알이 있어야 한다. 그 희망을 품고 다 하늘나라를 가셨어요. 그래서 정 원장님이 그랬습니다. 이 젊은 사람들한테 살림을 다 맡기기가 너무 괴로워 그러니 김 은현 엄마라도 나이가 많으니까 내가 죽은 다음에 한 10년 30년은 버티고 아마 살림을 해 주겠지 그리고 계획적으로 김 은현 어머니를 가르쳤어요. 젊은 처녀들을 아끼기 위해서 그런데 하나님 뜻은 그걸 용납을 안했어요. 김 원장이 먼저 세상을 떠나 버려요. 그러면 정 원장님의 계획이 전부 수포로 돌아가 버린 겁니다. 계획이 무너졌어요. 그래 정 원장님은 그래서 울었어요. 김 원장이 돌아가서 세상을 떠나고 보니까 자기평생에 원했던 것이 다 무너지고 하나님 뜻이 어디가 있을까? 이제 아무 속없는 사람들 아주 젊은 사람들한테 살림이 다 떨어지는데 이 장차 이 일을 누가 감당할까? 그리고 세상을 떠나셨지요. 그래서 그 말입니다. 오늘 한 자매가 이렇게 평안한 세상을 떠나게 되었는데 어른들이 떠날 때는 이렇게 사람이 많기를 원치 않았어요. 이 선생님이 원하는 것은 18명 20명 생각 했습니다. 이 귀일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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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아들아! 사랑하는 아들아!

지은이 : 아나타시아


나의 아들아! 사랑하는 아들아!


널 기다린지 얼마, 오늘도 기다린다.


천 년을 하루같이, 만 년을 일순 같이,


난 기다린다.


네게 전부 주었어, 온 땅이 네것이야,


너는 완전 자유야. 네 길을 가거라.


나의 아들아, 사랑하는 아들아, 하나만 부탁하마,


부디, 행복하거라.


날 못 보는 너.


날 못 듣는 너.


의심과 침울에 거하는 너의 의식.


떠나는구나. 어디로?


애쓰는구나. 뭐 하러?


누군가에 엎드려 절하는 너.


네게 손을 내민다.


나의 아들아, 사랑하는 아들아,


행복하거라, 부디.


다시 떠나는구나. 그 길은 막다른 길,


그 길로 가다간 지구가 깨지고 말아.


너는 완전 자유야, 세상은 터지고 있어.


네 운명은 부서지고 말아.


너는 완전 자유야, 내가 견디마.


마지막 풀 한 포기로 너를 다시 세우마.


세상은 환히 밝을 거야.


딱 하나만, 행복하거라, 부디.


성화(聖畵)속의 준엄한 얼굴들,


지옥으로, 심판으로 너를 겁주지,


네게들 말하지-내가 심판을 보낼거라고.


내 기도는 하나란다.


너와 내가 하나되는 시간.


난 믿어-돌아올 거야.


다시 너를 품에 안으마.


계부가 아니야! 계부가 아니야! 난 너의,


난 너의 아바 아버지,


넌 나의 혈육이야!


사랑하는 아들아,


우린 다시 행복할 수 있어!


2011/11/5 연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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