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무렵 꿀벌이 동면에 들어가기전 진드기 구제를 해준다. 한낮 기온이 17도c 이상 되는 날 오전 10 시에서 오후 2 시 사이에 벌이 붙은 소비에 뿌려주어 꿀벌에서 기생충을 구제하는 년중 마지막 중요한 돌봄이다.
죄를 깨달음
1981.8.23 오북환 장로
이사야 40장, ‘위로하여라. 나의 백성을 위로하여라. 너희의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예루살렘 시민에게 다정스레 일러라. 이제 복역기간이 끝났다고,’ 복역의 시간이 끝났다는 말은 율법이 마쳤다는 말이야. 복역 기간이 끝나버렸다고 위로만 남았어요. 이제 무엇 해라. 무엇해라. 짐을 지울 필요가 없어. 다 끝났어. 율법적인 행동은 그만해도 된다. 더 해봤던들 죄가 못 깨달으면 무엇 하겠냐? 죄 깨달았으면 그만이지, 깨달았으면 바쳐버리면 그만이지, 자기가 뭐 잘해보려고 할 필요 없다고요. 그러면 그럴수록 못살겠는데 어떻게 해? 그러니까 그런 쓸데없는 자책하지 말고 근심 하지 말고 죄 깨달았으니 죄인인줄 알았으면 바쳐버리면 되요. ‘그만하면 벌을 받을 만큼 받았다고’ ‘야훼의 손에서 죄벌을 곱절이나 받았다고 외쳐라 한소리 있어 외친다. 야훼께서 오신다. 사막에 길을 내어라. 우리의 하나님께서 오신다. 벌판에 길을 환히 닦아라.’ 하나님께서 오시는데 무슨 걱정이냐? ‘모든 골짜기를 메우고 산과 언덕을 깎아 내려라.’ 골짜기를 메운다는 말이 무슨 말이야? 골짜기 있지 않아? 사람 얼굴도 골짜기에요. 골짝 곡(谷)자 위에다 갓머리 면(宀)자한 것이 얼굴 용(容)자에요. 한번 써 봐요. 글씨고 골짝, 골짝 이건 갈무리를 해. 얼굴이 어쩌고 있어요? 울고 찡그리고 울고 있어. 사나운건 모두 자기가 모두 자기를 울게 해놓고는 매 맞아. 내외간에 싸움만 한다고 골짜기가 평평하게 된다.
평안이 온다. 마음속에 평화가 또 봐요. ‘절벽은 평지를 만들고 비탈진 산골길은 넓혀라. 야훼의 영광이 나타나리니 모든 사람이 그 영화를 뵈리라. 야훼께서 친히 이렇게 약속하셨다. 한 소리 있어 명하신다. 외쳐라. 무엇을 외칠까요? 하고 나는 물었다. 모든 인생은 한낱 풀포기 그 영화는 들에 핀 꽃과 같다. 풀은 시들고 꽃은 진다. 스쳐가는 야훼의 입김에 백성이란 실로 풀과 같은 존재이다. 풀은 시들고 꽃은 지지만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 있으리라. 너 시온아 높은 산에 올라 이 기쁜 소식을 전하여라. 너 예루살렘아 힘껏 외쳐 기쁜 소식을 전하여라. 두려워 말고 소리를 질러라. 유다의 모든 도시에 알려라. 너희의 하나님께서 저기 오신다. 주 야훼께서 저기 권능을 떨치시며 오신다. 팔을 휘둘러 정복하시고 승리하신 보람으로 찾은 백성을 데리고 오신다. 수고하신 값으로 얻은 백성을 앞세우고 오신다. 목자처럼 당신의 양떼에게 풀을 뜯기시며 새끼 양들을 두 팔로 안아 가슴에 품으시고 젖먹이 딸린 어미 양을 곱게 몰고 오신다.’ 인제 29절 30절 읽어요. ‘힘이 빠진 사람에게 힘을 주시고 기진한 사람에게 기력을 주시는 분이시다.’ 힘이 빠진 사람에게 힘을 주신다. 힘을 도로 빼지도 육적인 자기 힘 타락한 인성 위에서 주시는 은혜의 힘 은총으로 주신다. ‘기진한 사람에게 기력을 주시는 분이시다.’ 또 기진한 사람 기운이 다 빠져버린 사람에게 기운을 주신다고 ‘청년들도 힘이 빠져 허덕이겠고 장정들도 비틀거리겠지만 야훼를 믿고 바라는 사람은 새 힘이 솟아나리라.’ 새 힘을 주려니까 베드로 장담이 무슨 힘이야? 혈기에요. 혈기에서 나온 힘은 다 빠져버린 사람에게 인제 새 힘을 주셔 회개 아닙니까? ‘회개 날개 쳐 솟아오르는 독수리처럼 아무리 뛰어도 고단하지 아니하고 아무리 걸어도 지치지 아니하리라.’ 새 희망이에요. 위에서 주는 힘이니까 그전에 이 공께서 그랬답니다. 길을 가시다가 어떤 때는 힘을 다 빼버리신대요. 하나님이 꼼짝도 못하게 그러면 앉았거나 길에 누웠거나 그럴 때가 있지요? 가만히 기도를 하면서 늘 기도하니까 그러면 또 힘을 주셔. 그러면 가, 그래 인간의 힘을 싹 빼버려. 그 힘을 잃어버려야 새 힘이야. 이 선생님도 그랬지요? 준비가 한 달 동안 한답니다. 이쪽 거기서 업혀 다녔거든요. 그 자리 말씀 하는 자리에 앉으면 부축할 필요도 없고 서서들을 사람만 있으면 얼른 가서 하셨다고, 그래 말씀 마치면 업어가요. 못 걸어 힘이 다 빠져 사람 힘은 없어. 그때는 말씀이 붙들어,
들을 사람이 없어서 못하지 물을 사람이 물줄도 모르고 그때 제가 무슨 말을 들었냐하면 원장님께서 고린도서인가 에베소서인가 무슨 말씀을 하시는데 골방에 들어가 보시오. 그러면 일어나서 나와서 말씀을 하셔. 그런데 고린도전서 3장이에요. 3장 11절 불로 시험할 때 다 타져버렸는데 불에서 다 타져버렸는데 구원이 아니라고 몸만이야. 몸만이지 다 타져버렸거든. 앞으로 다시 그리스도를 기초로 하느냐? 않느냐? 그것만 시간만 허락된 것이지 서로 짚이나 풀이나 나무로 지으면 불에 타버려 율법적인 성공은 아까처럼 세례요한이 율법의 마지막이니까 율법으로는 제일 나중 사람이란 말이야. 크단 말이야. 그러나 천국에서는 제일 작은 자 보다 작다. 그건 크다고도 한도가 있지 않아? 헤롯왕은 명성은 얻었어. 그렇게 너그럽기는 자기는 그것이 사명이니까 아니면 아니라고 목이 달아나도 바른 소리 했지만 예수님은 헤롯왕이라도 누구나 죄는 용서해 버리지 않아요? 그러니 더 크지 않아요? 죄인이면 좋거든. 죄인은 안 돼. 독사라도 죄인은 죄인이라도 살아버렸어. 용납 되는 거, 자기는 빈들에서 있었으니까 혼자 있는 거 아니야? 광야에서 빈들이지 사람도 없는데서 소리만 외쳤어요. 사람들은 다 빈들이지, 못 알아들으니까 외치는 소리라 그랬지, 예수님은 다 용납하시고 사랑하시고 용서를 한단 말이야. 죄인 스스로 큰일이 있어. 더 크게 암만 키워도 안 크는 것이지만 다음 보지요. 힘이 다 빠진 사람에게 새 힘을 주신다. 독수리가 새 중에는 용맹스러운 것 아니요? 독수리같이 솟아올라.
또 베드로전서 3장 21절이에요. ‘그것은 오늘날 여러분에게 구원을 가져다주는 세례를 미리 보여준 것입니다. 세례는 몸에서 더러운 때를 벗기는 것이 아니라 깨끗한 양심으로 살겠다고 하나님께 서약을 하는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써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아까 잠깐 들은 이야기인데 목사님이 이웃교회 부흥집회를 청해서 가셨다. 가셨는데 가시면서 당신 말씀이 믿기만 하면 된다. 그 말은 말라고 당신이 사람이 구원을 이어가야지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는다고 말라고 그러니까 어떤 장로님이 그 말을 듣고 벌떡 일어났어요. 믿기만 하면 다 됩니다. 여러분 믿기만 하면 다됩니다. 그 말은 알아듣고 제대로 알아듣고 한 말이 아니거든. 반발이야. 그러니까 목사님이 책보를 탁 싸가지고 장로님 당신이 인도하시오. 그러고는 가버렸다고 그러면 그건 누가 잘한 거예요? 둘 다 잘했지요? 그러면 그이도 안전할 텐데 귀찮아서 몇이나 했는지 모르지만 젊은 사람들은 어쩔 거야? 집회보고 전도해야 하는데 두 분은 잘했다고 하는데 다 잘했겠지만 듣는 사람들은 어쩌겠어요? 안 듣는 것도 잘했지만 우리 같으면 시간 얼른 마치면 자야 되는데 어쩌겠어요? 복음이냐? 율법이냐? 그 말이에요. 그러니까 믿으면 된다는 말을 이해도 못하고 반발한 거야. 피차 복음이 무엇을 용납하느냐? 그러면 나 상대 안한다. 율법이지 복음은 아니야. 복음은 누구나가 오는 것이거든요. 사랑뿐인데 사실은 복음이 들어가면 강사다. 목사다. 그런 것이 있겠어요? 그 문제는 아까 전에 양심으로 말하니까 양심은 뭐에요?
베드로전서 3장 21절, 세례는 몸에서 더러운 때를 벗기는 것이 아니라 깨끗한 양심으로 살겠다고 하나님께 서약을 하는 것이며 깨끗한 양심대로 살겠다고 하나님께 서약했다하면 깨끗한 양심은 무엇을 말하는 거예요? 무엇이 깨끗한 양심이겠냐 말이야. 내가 그런 일을 목적은 깨끗한 마음과 양심으로 순수한 믿음 진짜 깨끗한 양심이면 순수한 믿음이 있지 않아요? 거짓 없는 믿음이 있어야 돼. 거기서만 사랑이 나오지요? 믿음이 있으면서 사랑이 없다는 것은 믿음이 아니지 않냐? 그 말이야. 실행이 없는 믿음은 믿음이 아니다. 죽은 믿음이다. 그랬지 실행은 무엇이야? 사랑하는 것 아니겠소? 실행은 사랑이야. 사랑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 믿지 않는 것이라. 그 말이에요. 자기가 살아있다. 그 말이에요. 예수가 살아있지 않고 자기 속에 살아계신 예수님만 역사하지 않고 자기가 역사하니까 예수님은 오셨다가 가셔버리든지 잠을 주무시든지 그러지 예수님이 역사를 안 하셔. 자유를 주셨으니까 인간에게 역사 안하셔. 우리들이 그 이야기를 듣고 배운 것은 잘 했어요. 또 그때도 그것을 계속 했더라도 해결 안 돼. 마치지 않고 계속 했더라도 그런 일은 드러난 것이 괜찮아. 교인들이 원인을 알아버리니까 그 집회는 그것으로 마친 거예요.
그대로 되요. 생각해 보라. 믿기만 하면 된다. 성경에 어디에 있어요?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한 것이 없다. 그랬고 예수님도 믿기만 하라 그랬지요. 누가복음 8장 50절 봅시다. 여호와께서는 이 말을 들으시고 야이로에게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시오. 그러면 딸이 살아나게 될 것입니다. 하고 말씀하셨으나 개역으로 보면 예수께서 들으시고 가라사대 두려워말고 믿기만 하라. 예수님의 말씀이에요. 그러니까 그 장로님 말은 제대로 잘한 것이에요. 믿기만 하면 된다. 믿기만 하면 된다고 말하라. 반대로 믿기만 하라. 그랬다고, 예수님의 말씀대로 믿음이 무엇인지 모른 거야. 피차 그러면 딸이 구원을 얻으리라. 믿고 죄인이 구원을 얻는다. 그 다음에는 믿지 않은 자는 정죄를 받는다. 아까 11절하고 부활을 증거 하는 여자의 말을 믿지 않고 마가복음 11장 11절에 있고 두 번 있었지요? 14절에 있고 예수 부활을 봤다고 예수 만나봤다고 그랬는데 안 믿어. 그러니까 믿음이라는 것은 자기들이 실제 체험해봐야 믿어지지, 사람들의 말해가지고는 안 믿는다고 사마리아 여인에게도 가서 증거 했는데 가서 봤거든. 보고 와서 믿고는 또 예수님을 청했어요. 그런 뒤로는 당신의 말만 듣고는 아니고 우리가 친히 직접 보고 보는 가운데 참 메시야라. 일단 증거는 할 수 있어요. 성령의 지시대로 증거를 해도 믿어지는 것은 자기들이 예수를 만나버리는 거야.
말씀을 이해해요. 예수 믿으라고 소개는 할 수 있어도 말씀에서 예수를 발견해. 예수를 만나봐야지 그래야 믿지요. 증거 하는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듣겠습니까? 들어야 믿어지는데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말을 들어야 믿어지는데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고, 무엇을 증거 하는 무엇을 들어야 해?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말을 들어야 믿어요. ‘여자들의 이야기가 부질없는 헛소리려니 하고 믿지 않았다.’ 사도행전 28장 24절, 바울로의 말을 듣고 믿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끝내 믿으려 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니까 같이 한자리에서 말씀을 들었건만 우리가 말해 버린 것도 다 들어 자기 신앙에 들어서 달리 알아듣지 똑같이 알아듣겠어요? 또 베드로전서 2장 7절, 그러므로 이 돌이 믿는 여러분에게는 귀한 것입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집짓는 자들에게 버림을 받았다가 모퉁이의 머릿돌이 된 돌이며 그들을 걸려 넘어지게 하는 돌이요. 장애물이 된 바위입니다. 예, 장애물입니다. 우리 육적으로 사는 사람에게는 예수님같이 장애물이 없어요. 그들이 걸려 넘어진 것은 말씀을 순종하지 않은 탓이며 또한 그것이 그들의 은명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선택된 민족이고 왕의 사제들이며 거룩한 겨레이고 하나님의 소유가 된 백성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어두운데서 여러분을 불러내어 그 놀라운 빛 가운데로 인도해 주신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널리 찬양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복음은 감정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까? 반대에요. 역설이에요. 감정으로는 안 되어요. 무엇을 나 따라오려면 어떻게 하라고 버리라고 했으니까 여기 맞아요? 싫지, 그러니까 못 믿는 거예요. 우리 믿음은 선물이니까 믿게 해주셔야 믿어지지, 그 마음을 믿고 싶은 마음을 주셔야 믿는 거지, 예수를 따라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한 것은 그 주신 마음이야. 은혜에요. 믿음은 주셔야 되요. 또 하나님이 믿게 하셔야 되고 어디 한번 찾아봐요. 우리가 먼저 본 공동번역은 로마서 1장 8절 믿음은 누가 주는가? 어디에서 오는가? ‘나는 먼저 여러분의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었다는 사실에 대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의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예, 믿음은 누가 주셨어요? 하나님이 주셨어요. 그 소문이 온 세계에 퍼졌어요.
또 에베소 1장 11절, ‘모든 것을 뜻하신 대로 이루시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계획을 따라 우리를 미리 정하시고 택하셔서 그리스도를 믿게 하셨습니다.’ 그리스도를 믿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믿게 하셨단 말이야. 믿게 안하실 때 내 스스로는 믿을 수가 없어요. 믿어지지가 않아요. 그러니까 은혜입니다. 또 살 후 2장 12절, ‘결국 진리를 믿지 않고 악을 좋아하는 사람은 모두 단죄를 받게 될 것입니다.’ 진리를 믿지도 않고 사랑하지도 않고 받아들이지도 않고 10절에 보면 그렇지요? 진리를 받아들이지도 않아, 믿지도 않아, 사랑하지도 않아, 그러니까 11절에는 무엇을? ‘그리고 온갖 악랄한 속임수를 다 써서 사람들을 멸망시킬 것입니다. 그 사람들은 진리를 받아들이지도 않고 사랑하지도 않기 때문에’ 예, 받아들이지도 않고 사랑하지도 않아. ‘진리를 입으로는 쓰니까 구원을 얻지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자들에게 혼미한 마음을 주시어 거짓된 것을 믿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도 조금 그럴 때는 하나님답지 않아요. 거짓된 것은 혼미한 것을 넘어지게 혼미한 것을 보내가지고 흔들리게 하신다고 그러니까 거기에 근심이 오지 않겠어요? 혼미한 신을 보냈어요. 거짓된 것을 믿게 하셔요. 그런 것은 무자비하지 않아요? 하나님답지 않아요. 왜 그럴까? 12절 봐요. ‘결국 진리를 믿지 않고 악을 좋아하는 사람은 모두 단죄를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사람에게 그 혼미한 것을 보냈어요.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 악을 좋아하는 사람 악을 좋아하는 자기 구하는 대로 주시는 거예요. 구하는 대로 악을 좋아하니까 그러면 인제 유혹의 신을 혼미의 신을 보냈어. 악을 좋아하니까 그러니까 구하는 대로 안 주세요. 그러면 그것이 목적은 아니야. 또 12절 그러니까 그런 사람들에게 악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주되 어떻게 하느냐? 결국은 어떻게 되느냐? 정죄를 받게 돼. 그러니까 자기가 자기 잘못을 뉘우치게 해요. 벌을 내려 매를 때려 재난이 왔어요. 욥에게는 무엇이 매야? 몸에 전신 1장에 살림 다 없어지고 2장에 몸까지 자기 몸까지 전부 종기가 나가지고 꼭 나사로같이 개가 와서 핥는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사탄에게 그 영혼은 손대지 못하게 했습니다. 몸만 만져라. 그래도 (끊김)
조금 틀린 것 있어요. 하나님은 자기가 완전히 깨닫게 되어서 유혹된 것을 보냈지만 사석에서 광주에서 무슨 이야기 하다가 이런 말이 ‘아, 나는 성경에서 안보이거든.’ 참 믿으면 된다. 그런 것만 보이지 그런 것은 안 보여. 어째 하나님이 유혹된 혼미한 신을 보냈을까? 그런데 보냈거든. 그러면 안 믿으니까 그러니까 왜 그것을 모르느냐? 왜 몰라요? 사람이 정신이상 된 사람이 자기가 정신이상 되었다는 것을 알겠어요? 다른 사람은 알지요. 본인은 모를 거라고 그러니까 정신 이상 되었다고 자랑하지 말라고 본인은 모르는 거야. 당연히 자기가 할 것을 한 거야. 누구를 때린다거나 그러니까 현재 실제로 혼미한 상태로 있으니까 몰라요. 혼미한 신을 보냈다는 것이 이제야 보이는 거야. 그러니까 모두 속아 사는 거야. 사람은 다른 사람한테 속고 자기한테 속고 자기가 자기한테 속고 있다는 거예요. 결국은 자기가 자기한테 속아요. 거짓 자기한테 속고 있다고, 겉 사람이 속사람한테 속여 버려. 17절에 진짜 공부할 것이 나와요. 17절 18절, (끊김)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남편도 또한 자기 몸에 대하여 처리권이 없고 오직 그 아내에게 있느니라. 오직 그 아내에게 있다. 아내가 딱 지키고 있는데 남의 아내를 볼 수 있냐 말이야. 남의 아내와 교제할 수 없지요. 접촉할 수 없지요? 침범할 수 없지요. 남의 아내를 자기 아내가 지키고 있다. 그리고 자기 양심이 지키고 있다. 양심이 있는데 그 양심도 되고 실제 아내도 된단 말입니다. 한 남편이 일부일처인데 몸에 대한 것입니다. 몸, 아내에게 있다는 말은 실제 아내도 되고 아내가 버젓이 있는데 남의 아내 볼 수 있냐 그거야. 또 자기 양심이 있다. 그 말이고 5절은 오직 그 아내에게 있습니다. 서로 상대자의 권리를 침범하지 말지니라. 너희는 오직 기구에 전심하기에 전념 기도에 기도는 어느 때만 하라고 했습니까? 항상 계속적으로 항상 하라. 그러면 잘 때는 어떻게 합니까? 잘 때는 자버리는데 어떻게 해요? 항상 하라는 말이 성경에 닿지 않지요? 그 말이 닿지 않지요? 이유가 안 되지요? 실현 못 될 것을 뭐하려고 해요? 항상 못하는데 왜 하라고 했냐 말이야.
사람은 못하지요. 성령은 하시지요? 성령이 삼위가 하시지요? 예수님이 하시지요? 쉬지 말고 기도하라. 항상 기도하라. 항상 깨어서 기도하라. 염려를 하니까 예수님이 뭐라고 하셨어요? 그 염려하지 말라. 내가 네 영혼 안에서 기도하니까 너는 나만 사랑하면 된다. 사람이 잘 때도 해야 하는데 잘 때 어떻게 합니까? 그러니까 항상 사랑하는 마음만 갖으라는 거야. 예수를 사랑하면 거기에 다 있다. 예수님의 기도한 거예요. 그것을 먼저 믿어야지요. 그것 믿을 것뿐입니다.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는 빌 바를 모르지만 대신 기도해 주신다. 또 자기감정으로도 의식해서 항상 기도하는 사람들은 성인 성녀들은 다 그렇게 하는 것이지요. 이 공께서도 그러시고 이 선생님도 그러시고 지금 김 선생님도 그러시고 계속 하는 거예요. 영으로서 사람이 보면 자는 것 같지만 실상은 영혼은 깨어있단 말이야. 오직 항상 기도하라는 것인데 어느 때만 기도하라는 것 아니에요. 그러면 그런 훈련을 해야 하거든. 조금 떨어져서 해보고 누구든지 기도해 봐라. 서울서도 누구든지 와서 기도해 봐라. 장소 비는 안 받을 테니까 우리도 좋습니다. 기도 생활하고 그렇게 조금씩, 조금씩 연습을 해야 하지 않습니까? 그래야 바로 깨닫고 힘을 얻지요.
오직 기도에 전심하기 위하여 상오 간에 동의로서만 서로 동의해요. 동의 반대하는 데는 안 되거든. 기도가 막혀요. 동의로서만 서로 얼마동안 별거하는 것은 좋으나 후에 다시 동거할지니 또 실제 인제 신앙이 강한 편을 지도자로 보고 신앙이 약한 편을 피지도자, 지도를 받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이것도 고린도후서 1장 24절 같이 신앙은 이래라 저래라 지배하는 것 아니니까 또 요한복음 11장 예수님이 그 마리아의 나사로와 마리아의 가정을 사랑했지요? 그래 조금 잠깐 떠났지요? 떠난 동안에 죽었지요? 나사로가 그러니까 누이들이 누이동생들이 주님이 여기 계셨더라면 우리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을 그러나 죽게 됨으로서 모든 사람이 믿게 되는 역사가 일어나지 않습니까? 죽게 됨으로서 그래 있지 않은 것이 좋다. 있지 않음으로서 잠깐 분방을 함으로서 몸만 마음이야. 분방이 됩니까? 몸은 잠깐 분방을 함으로서 그런 역사가 일어났다. 나사로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것으로 모든 사람이 거기 심방 온 사람들, 조문 온 사람들이 모두 믿게 되었다. 유대인들이 그 전도를 하시려는 역사입니다. 우리 개인에게 있어서도 죽을 것은 죽어야 된다고 죄의 성품은 죽어야 한다. 아담의 성품 독사의 성품은 죽어야 한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야 한다. 얼마동안 저희가 하는 것은 좋으나 후에 다시 동거 합해야 한다. 지도하는 편이 떨어져서 훈련을 해봐야 한단 말이야.
그랬다가 도로 합했다. 우리는 말씀을 늘 지도자는 성령이시고 그리스도시고 또 말씀이니까 말씀을 떠나서는 안 된다. 말씀대로 실현을 해봐야 된다. 실제 생활이 생활을 해보고 또 실력 부족이 나면 말씀을 듣고 보고 그런 뜻이고, 그런데 나의 말하는 것은 이것은 계명이 아니라 6절, 이 말은 명령이 아니라 충고입니다. 충고 권면, 명령이라면 절대적인 겁니다. 하나님의 명령 그것은 아니에요. 아니나 이론입니다. 나는 모든 사람이 다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하나 바울사도와 같이 독신으로 사는 것이 좋으나 그러나 사람은 각각 다른 은혜를 천주께 받았나니 어떤 이에게는 이러하고 어떤 이에게는 저러하다. 우리를 부르시는 방법도 다르고 그 성격에 따라서 이 사람은 어떻게 부를까? 이건 꾀가 많은 놈이니까 자기 꾀에 자기가 걸려가지고 죽었습니다. 손들어야 하겠다. 이것은 말 잘 들으니까 고생 안 시키고 이렇게 인도해야 되겠다. 그렇게 자기 성격에 따라서요. 고집이 센 놈은 자기 고집에 한번 버려버리고 혹독히 매를 맞아보고 아이고 잘못했습니다. 절대로 안 그러겠습니다. 내버려 두시기도 하고 각각 성격 따라서 인도하신다는 겁니다. 부르시는 모양도 여러 가지에요. 제 경험상으로는 절망이 전도하라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행여나 해도 없단 말이야.
저번에 남원에서 은실 씨가 28년 동안 생활을 해보니까 안 된다고 조금씩 하는 걸 느껴요. 그만큼이라도 믿게 하니까 가지요. 모든 사람이 다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하나 그러나 사람은 각각 다른 은혜를 천주께 받았나니 어떤 이에게는 이러하고 어떤 이에게는 저러하니라. 우리를 인도하시는 방법도 여러 가지 있어요. 처음에 수도원에 들어와서 못살고 해결 안 될 사람 같으면 혼인한대도 내버려두고 자녀가 많이 낳아가지고 죽게 고생을 합니다. 그래가지고 철저히 깨닫고 회개시키는 방법이 있지 않아요? 그래 죄를 많이 의식하도록 죄를 모르니까 혼인 안하면 죄를 모르니까 혼인 안 해도 죄를 깨달을 사람은 그대로 죽어버리도록 두시고 소화 테레사같이 그리고 그 못 깨달을 사람은 죄를 많이 짓도록 하신단 말이야. 유혹의 신을 보낸단 말이야. 이러므로 혼인하지 않은 이들과 과부들에게 말하노니 저들이 나와 같이 그대로 있으면 이는 잘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될 수 있으면 잘 하자는 것 아닙니까? 잘 하자는 것 해도 무방 안 해도 무방 아니라 될 수 있으면 잘하자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만일 스스로 정욕을 제어하지 못할 때는 제어할 수 없으면 혼인하는 것이 좋으니 대저 혼인하는 것이 정욕으로 타는 것보다 나음이라. 정욕으로 불타는 것보다 혼인하는 것이 낫다. 왜 그러냐? 정욕이 혼인 안하면 정욕으로 불타니까 이 사람도 찍 접, 저 사람도 찍 접 모두 더럽혀 놔. 법으로 딱 정해놓아야지, 1남1처에다가 묶어 놓아야지, 그것만도 비밀로 하는 거야. 세상에 안 걸리지요.
대통령이 첩을 두어도 비밀로 하면 드러나지 않으면 세상 법에는 안 걸리거든. 관리들은 지금 첩이 있으면 관리들을 못 하는 건데 내용으로 비밀로 두고 드러나지 않으면 되요. 법에 안 걸리게 그러면 하나님 앞에는 그것은 안 되어요. 암만 일부일처라도 마음에 모두 다 침범을 했는데 그 마음만 품어도 벌써 범한 것이라고 했는데 하나님의 법에 안 걸릴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정욕으로 타는 것 보다 나으니라. 혼인 하는 것이 10절, 결혼에 불가해서 소송 절대로 결혼했으면 갈릴 수 없다는 겁니다. 갈리면 안 된다는 거야. 10절, 혼인한자들에게 명하노니 이는 나의 명령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의 명령이니라. 주의 명령, 절대적이라는 거야. 절대로 한번 혼인하면 갈릴 수 없다는 것이 하나님의 명령이에요. 충고 그것은 절대적이 아니에요. 그러면 여기 10절은 절대적이에요. 주님의 명령이에요. 나눌 수 없다. 그것은 육체상으로도 그렇게 나누지 않는 것이 좋고 또 예수와 우리 사이를 말한 거라고 본뜻은 예수와 나는 나눌 수 없어요. 또 우리 양심과 나는 나눌 수 없어요. 아내 참 아내는 양심이니까 영이니까 그건 말라기에 있지 않습니까? 많이 들어본 말씀, 심령 우리 심령을 더럽히지 말라. 아내 심령이라고 어려서 취한 아내 양심을 거슬려서 어떻게 사냐? 그 사람의 본분을 떠난다. 탈선했다. 양심을 지켜라. 양심대로 사는 것은 말씀대로 사는 것이 지키는 거야. 모세와 선지자를 통한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라. 한번 결혼했으면 갈릴 수 없다. 혼인 한 자들에게 명령하노니 이는 나의 명령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의 명하신 바니라. 아내 된 자는 그 남편을 떠나지 말지니라. 만약 이것은 실제 우리 부부생활 일지라도 만약 갈렸으면 다른 곳에 재가하지 말고 그대로 있던지 혹은 그 남편과 다시 화합할 것이요. 남편도 그 아내를 내어보내지 말지니라. 화합해요. 그대로 갈리게 되면 그대로 두라는 거야.
그러니 10절하고 11절하고 조금 차이가 있단 말이야. 10절에는 그리스도와 우리 사이 절대로 나눌 수 없다. 우리 양심과 나를 나눌 수 없다. 양심을 어떻게 버리고 사냐? 양심을 떠난 나가 무엇이냐? 그것은 마귀지 양심대로 양심에 있는 말씀대로 살라는 그 말의 뜻이고 11절에는 실제 부부간이라도 차라리 그대로 깨끗이 못살겠다고 나가는 것은 자유란 말이야. 그건 거기에 구애 받을 필요가 없단 말이야. 그냥 자유니까 아직 정도가 다르고 그건 우리 거울로서 이 세종 이 공님께서 보이지 않았습니까? 두 번이나 개가해가도 말라고 말하지 않았어요? 그건 안 된다고 말하지 않았어요? 가라고 짐까지 데려다 줬다고, 삯군을 사서 당신이 쓰던 것이니까 쓰시오. 그리고 한 달에 한번이나 간혹 가는 것은 무엇 하러 가시냐? 두 가지 권면하러 가요. 하나님 잊어버리지 마시오. 그렇게 살아도 하나님 잊어버리지 말라고 그것 권면하러 가셨다고
그리고 또 다른 데로 가게 될 바에는 나한테로 오시오. 또 그 남편한테 부탁해요. 임시 남편한테 다른 데로 보내지 말고 나한테로 보내주시오. 그 동안에 당신이 참 아내를 지켜주는 수고가 많겠소. 잘 보호해 주고 다른 데로 보내게 될 때는 갈라지게 될 때는 나한테 가라고 권면해 주시오. 그것이에요. 그 아래는 볼 것 없고 17절 구역이 17절하고 천주교 성경에는 3절하고 통한 것입니다. 본보기라고 말했어요. 구역에는 각자는 주께서 정해주신대로 정해주신 그대로 본분대로 말입니다. 우리 마음에 쓰여 진 말씀대로 하나님께서 부르신 그대로 걸릴지니라. 오늘날 교회에서나 교훈하는 바는 교훈한 바는 이것이니라. 할례를 받은 자로 불렸으면 이를 숨기지 말 것이오. 또 할례를 받지 않은 자로 불렸으면 할례를 받지 말지니라. 할례 받는 것이 가치 있는 것이 아니며 할례 받지 않은 것이 가치 있는 것도 아니니 오직 가치 있는 것은 천주의 계명을 준행 하는 것이니라. 오직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이니라. 사람의 본분대로 사는 것이니라. 말씀대로 사는 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 떨어져서 23-4절은 결론적인 말입니다. 너희는 비싼 값으로 구매, 비싼 값을 치루시고 아주 고가를 치루시고 사신 몸이니까 구매되었으니 사람의 노예가 되지 말지니라. 육적 노예가 되지 말지니라. 그 영혼을 인도하기 위해서 종이 될지언정 육을 섬기기 위해서 종 되지 말지니라. 그 영혼을 섬기기 위해서는 종이 될 수 있어도 영혼을 하나님께로 인도하기 위해서는 종이 될 수 있어요. 남의 식모살이, 목사의 식모살이 또 무슨 식모살이 할 수도 있다. 그 영혼을 인도하려니까. 어제 처음으로 그 말 들었어요. 식모살이 했다면서요. 수도복 안 입고 그런데 수도복 안 입어야 진짜 수녀라고 그러데요. 수도복 안 입은 수녀 하고 수도복 입은 수녀들하고 화친을 했지요.
화친했는데 하나님 앞에서 어떤 것이 수녀냐? 이렇게 우리가 너희는 비싼 값으로 구매 되었으니 사람의 노예가 되지 말지니라. 형제들아 너희는 불릴 때의 그 처지에 각각 머물러 있을 지어다. 하나님과 함께 살라는 말이 조금 희미합니다. 너희 처지에 각각 너희는 그 불려 진 처지에 머물러 있을지어다. 하나님과 함께 살라는 말이 좀 희미한데 하나님과 함께 사는 사람이 무슨 법도 없고 사랑뿐이고 하나님의 빛 가운데 사니까 아무런 법의 제제도 받지 않고 깨끗하게 살 것 아닙니까? 이래야 한다는 누구의 판단도 없고 그 모든 생활을 빛만 비출 뿐이지 사랑만 할 것뿐이지 왜 그러냐고 할 것이 없어요. 캄캄한데 그럴 수밖에 없는 걸, 캄캄한데 넘어졌는데 왜 넘어졌냐고 말만 하면 어떻게 하냐고 자기가 빛이면 빛으로 인도할 것뿐이지, 왜 그러냐고 말이 없어요. 그것은 고요한 것이고 빛만 비춰줄 것뿐입니다. 빛의 사명은 왜 캄캄하냐? 왜 빛을 마다하냐? 그럴 수 없어요. 하나님이 자유를 주셨으니까 마다하고 가는데 자유지 어쩔 것이야? 또 빛이 쫓아갈 필요도 없어요. 자기가 빛이 필요해서 빛으로 와야지 빛이 어두움을 쫓아가지 않아요. 요구를 해야 비추지 여기 좀 비춰주시오. 그럴 때 비춰줘야지 30절, 우는 자는 울지 않는 것 같이 기뻐하는 자는 기뻐하지 않는 것 같이 무엇을 하는 자는 아무것도 갖지 않은 것 같이 할 것이며 세속과 관계있는 자는 아무 관계도 없는 것 같이 할지니라. 여기는 31절 세속과의 관계는 관계할 필요가 없지요. 여기 살면 그러다가 한번은 관계를 해야지요. 서울도 왔다갔다. 해야 한단 말이야. 버스비가 들더라도 할 수밖에 없단 말이야. 나물도 팔아야하고 고구마도 팔아야하고 바꿔야 하니까 그런데 어찌해야 하냐? 절대 관계할 수밖에 없단 말이야.
세상 세속과 접촉할 수밖에 없단 말이야. 세속이라면 조금 도회지란 말입니다. 산지와 도회지와 교류를 해야 할 필요도 있다는 말입니다. 절대 필요해요. 수도원에 가서 장도 담아주고 그딴 것 해야 한 단 말이에요. 교제를 해야 하니까 그러면 관계가 맺어지지 않아요? 하나씩 하나씩 이끌어야지요. 그게 전도방법이니까 그 처지 처지에 따라가야 한단 말이야. 그런데 가려면 여기도 수도복 입고 가야한단 말이야. 그렇지 않으면 안 입고 가도 좋고 그럴 상대가 되면 입어야지요. 이런 빌립보 2장 13절입니다. 세상과의 관계, 개역과 공동번역과 대조 해봐요.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나로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 거기 세상과의 관계되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삐뚤어지고 어지러운 세대에 생명의 말씀을 밝히려니까 빛의 사명을 하려니까 삐뚤어진 세대를 바로잡으려니까 어그러진 세대에 잘못 간다고 빛의 사명을 하려니까 접촉할 수밖에 없다. 가서 등불 노릇을 해야 한단 말이야. 어두움을 어두음은 캄캄해, 캄캄하니까 잘못 가니까 캄캄해서 전등 노릇을 하든지 전지 노릇을 하든지 가서 호롱불 노릇을 해야 하던지 가서 해야 한단 말입니다. 그것이 사명이에요. 세상과 접촉하는 것은 세속과 관계있는 자는 삐뚤어진 세대를 바로 잡아주려면 등불 노릇을 해줘야 한단 말입니다. 이 세속 어그러진 세대를 바로 삐뚤어지고 어그러진 세상을 바로잡아 주려면 세속과 관계있는 자는 아무 관계없는 것 같이 그러면 이 관계없는 것은 무엇이냐? 자기 자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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