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산

[스크랩] 순장을 당한 중국의 조선 출신 궁녀 청주 한씨

mamuli0 2007. 12. 14. 05:01

'순장'이 '고대'의 문화인 줄로만 알고 있었는데, 그리 멀지 않은 과거까지도 순장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좀 충격이었습죠.

 

다음의 글은 <궁녀>(신명호 지음, 시공사:2004) 61~67쪽을 옮겨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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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조선 출신 궁녀―청주 한씨

 

궁녀는 한국뿐 아니라 중국과 일본에도 있었다. 중국에는 황실이 있고 일본에는 천황과 장군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중에서 한국의 궁녀는 역할이나 성의 금지라는 측면에서 중국의 궁녀와 아주 유사했다.


 

그러나 중국의 궁녀는 그 규모에서 상상을 불허할 정도였다. 명나라의 경우 궁녀가 1만 명이나 되었다. 조선시대의 궁녀가 대체로 500~600명을 헤아렸던 사실에 비교한다면 입이 딱 벌어질 정도의 규모다. 이렇게 많다 보니 궁녀를 출궁시킬 때 한번에 3000명이나 내보내는 황제도 있었다.


 

중국에서는 수많은 궁녀들을 충당하기 위해 중국 자체에서 궁녀를 뽑을 뿐만 아니라 주변 여러 나라에서도 궁녀를 공급받았다. 중국이 다른 나라에서 받아들이는 궁녀가 이른바 공녀(貢女)였다.


 

삼국시대 이래로 조선시대까지 우리나라도 중국에 공녀를 보냈다. 기록에 나타난 것만 해도 고려시대 170명, 조선시대 146명이니, 실제는 이보다 훨씬 많았을 것이다.


 

이렇게 우리나라에서 적지 않은 공녀들이 중국에 들어가다 보니 중국의 역사를 뒤흔든 공녀들도 등장했다. 고려의 공녀로 원나라에 갔다가 황후까지 오른 기황후 같은 경우다.


 

조선시대에 중국에 건너간 공녀는 두 가지로 구분되었다. 첫 번째는 명나라로 간 공녀이고, 두 번째는 명나라 멸망 이후 청나라로 간 공녀였다. 이중에서 명나라로 간 공녀는 114명이고, 청나라로 간 공녀는 32명이었다. 명나라로 보내는 공녀는 양반 사대부 가문에서 골랐는데, 청나라로 보내는 공녀는 공노비 중에서 골랐다.


 

조선시대의 공녀 중에서 가장 극적인 삶을 산 경우는 명나라 3대 황제인 영락제 때 들어간 청주 한씨였다. 좋은 양반 가문에서 태어났지만 공녀로 뽑혀 명나라 황제의 사랑을 받고 최후에는 순장을 당한 비극적인 인생이 너무나도 파란만장하다.


 

조선이 명나라에 공녀를 보내기 시작한 것은 태종 때부터였다. 이후 세종 때까지 모두 일곱 차례에 걸쳐 보냈는데, 한씨는 3차 때 보낸 공녀였다.


 

한씨는 한영정(韓永矴)의 큰딸이며 한확(韓確)의 여동생이었다. 당시 한씨는 황씨 처녀와 함께 공녀로 선발되었는데, 한씨는 고고한 아름다움이 있었고 황씨는 수려한 아름다움이 있었다고 한다.


 

명나라 황제의 궁녀로 선발된 한씨와 황씨는 유모와 몸종을 데리고 갈 수 있었다. 이에 한씨는 유모 김흑(金黑)과 몸종 다섯을 데리고 태종 17년(1417년) 8월 6일 한양을 떠나 명나라로 향했다. 이때 한씨의 오빠 한확도 여동생을 돌보기 위해 명나라까지 따라갔다.


 

한씨와 황씨를 궁녀로 들인 명나라 황제는 3대 영락제였다. 영락제는 한씨와 황씨 중에서 특히 한씨를 마음에 들어 했다. 조선으로 귀국하는 사신에게 “한씨 여아는 대단히 총명하고 영리하다”는 말을 꼭 전하라고 했을 정도였다.


 

반면에 황씨는 영 못마땅해 했다. 무엇보다도 황씨가 처녀가 아니라는 사실에 실망했으리라. 황제인 자신에게 숫처녀가 아닌 공녀를 바쳤다며 태종에게 항의문서까지 보내려고 했을 정도로 분개했다. 이것을 막은 사람이 한씨였다. 다음의 기록을 보자.

 

 

황제가 왜 처녀가 아닌지 꾸짖으며 연유를 묻자, 황씨는 “형부 김덕장의 이웃에 있는 조례(皁?: 남자 관노비)와 간통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황제가 성을 내어 우리나라를 문책하려고 칙서까지 작성했는데, 당시 황제의 총애를 받고 있던 양씨가 이 사실을 한씨에게 알렸다.
한씨가 울면서 황제에게 애걸하기를 “황씨는 집에 있는 사사 사람인데 우리 임금이 어떻게 그것을 알겠습니까?”고 했다.
황제가 감동하여 한씨에게 벌을 주라고 명령하자, 한씨는 황씨의 뺨을 때렸다.
―『세종실록』 26, 6년 10월 무오조

 

 

영락제는 한씨의 인품과 미모 모두에 반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으로 칙사를 보낼 때마다 한씨의 친정집에 각종 선물을 보내곤 할 정도였다. 심지어 한씨의 오빠 한확을 사위로 삼아 옆에 두려고까지 했다. 한확의 거절로 성사되지는 않았지만.


 

비록 고국을 떠나 명나라 황제의 궁녀가 되었지만 한씨는 나름대로 행복했다. 무엇보다 황제의 지극한 사랑이 있었다. 이런 후광으로 한씨의 친정 오빠 한확은 조선에서 승승장구할 수 있었다. 훗날 한확은 수양대군을 도운 정난 공신으로서 당대를 주름잡는 거물이 되었다.


 

그러나 한씨의 행복은 잠깐이었다. 명나라에 간지 7년 만에 한씨를 사랑하던 영락제가 세상을 떠나고 말았던 것이다. 어린 나이에 명나라로 갔으니 한씨는 아직 20대 초반의 젊은 나이였음이 분명하다. 불행하게도 이렇듯 꽃다운 나이에 영락제를 따라 순장(殉葬)을 당하고 말았다.


 

믿어지지 않겠지만, 당시 명나라에서는 황제가 죽으면 황제를 가까이 모시던 궁녀들을 순장시켰다고 한다. 명나라 궁중에는 동양 각국에서 온 수많은 궁녀들이 있었는데, 비밀을 누설할까 봐 이들을 순장시켰다는 것이다. 한씨도 이국땅 명나라의 자금성에서 순장을 당했다. 한씨가 자금성에서 순장당할 당시의 모습을 『실록』은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황제가 죽자 순장된 궁녀가 30여 명이었다. 죽기 전에 모두 뜰에 모아놓고 음식을 먹인 다음 함께 마루로 끌어올리니 울음소리가 전각을 진동시켰다. 마루에 작은 나무평상을 놓아 그 위에 세워놓고 머리를 올가미에 넣은 다음 평상을 떼어버리니 모두 목이 매여 죽었다. 한씨가 죽을 때 유모 김흑에게 말하기를 “낭(娘)아, 나는 갑니다. 낭아, 나는 갑니다”라고 했다. 그 말을 마치기 전에 곁에 있던 내시가 평상을 빼자 최씨와 함께 죽었다.
―『세종실록』 26, 6년 10월 무오조

 

 

이 기록은 한씨의 유모 김흑이 훗날 조선에 살아 돌아와서 세종에게 전한 내용이다. 한씨는 죽으면서 자신의 유모 김흑만은 꼭 살려달라고 간청하여 황제의 허락을 받았다. 이에 김흑은 간신히 살아남았다가 몇 년 후에 조선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세종은 천신만고 끝에 살아돌아온 김흑을 만나 그간의 사정을 자세히 들었다. 이로써 한씨 이야기가 『실록』에 자세하게 실릴 수 있었다.


 

한씨의 일생은 약소국 여성의 비애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좋은 양반 가문의 딸로 태어나 잘 살 수도 있었는데, 조국의 힘이 약해 공녀로 끌려갔다가 순장까지 당했던 것이다. 자신의 희생으로 조국이 편안하고 또 친정이 잘 되었다는 점이 청주 한씨에게 위안이라면 위안일 것이다.

출처 : 전남대평생교육원문화유산지도자
글쓴이 : 구름아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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