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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도석성

mamuli0 2007. 11. 8. 11:48
[스크랩] 남도석성
글쓴이: 덕산방 번호 : 15조회수 : 242007.02.17 12:14

 

해안에 인접해 있고 지형적으로 바다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 요새에 자리잡고 있는 진도 남도석성(南桃石城)

남도석성은 ‘진도에서 제주도 방면으로 이어지는 항로의 기점이 되는 임회면 남동리에 있는 석축 성으로, 본래는 둘레가 1천2백33척으로 성벽의 높이가 8척에 우물과 샘이 하나씩 있는 조선시대 전라우수영 관하의 수군(水軍) 진영이었다. 고려 원종 때 배중손(裵仲孫)이 삼별초를 이끌고 진도로 남하하여 대몽항쟁의 근거지로 삼으면서 쌓은 성이라고 전한다. 그러나 진도군에는 백제시대에 이미 3개의 고을이 있었는데, 그 중에 진도군에 속한 것이 도산현(徒山縣 : 지금의 가흥)과 매구리현(買九里縣 : 지금의 임회)으로, 매구리현의 중심이 구도포(九桃浦)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이러한 고을들이 통일 신라를 거쳐 고려시대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으로 보면, 삼국시대에 이미 축성되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남도석성은 고려시대 몽골군에게 최후까지 저항했던 배중손을 비롯한 삼별초군이 최후를 마친 곳으로 알려져 있다.
1270년, 고려 조정이 몽골에게 항복하고 개경 환도를 단행하자, 무신정권의 구심점을 잃은 삼별초 지휘관들은 강화도를 오래 지킬 수 없다고 판단, 해전에 약한 몽골군에 대비하여 진도로 남하한다. 조정에서는 김방경을 역적추포사로 삼아 몽골군 1천 명과 함께 삼별초를 추격한다.

삼별초군은 배 1천 척에 재물과 군사와 가족을 싣고 진도 벽파진에 도착, 현재의 진도읍 북쪽 용장산에 터를 잡은 후 산성을 개축하고 궁궐을 지은 후 독립국을 선포한다. 삼별초군은 창원, 김해, 마산, 동래와 황해를 석권하고, 인천에도 출몰하면서 주변의 30여 개의 섬을 차지한다.

 

 이러한 활동은 ‘진도에 있는 임금이 진짜다’라는 소문이 퍼져 진도로 이목이 집중된다. 이에 고려·몽골 연합군 6천여 명을 중심으로 토벌군을 구성하고, 전함 4백여 척을 동원하여 진도로 진군한다. 삼별초군은 승리를 거듭하자 긴장이 풀려 방비를 소홀히 한 탓으로 갑자기 밀려든 토벌군에 패배하게 된다.

 토벌군은 어렵지 않게 진도에 상륙, 1년 남짓 왕노릇을 한 승화후를 찾아내 죽인다. 배중손도 전투 과정에서 죽은 것으로 보인다. 김통정은 남은 삼별초를 이끌고 탐라로 들어가 대몽항쟁을 거듭하나 1273년(원종 14) 4월, 삼별초의 종말을 고하게 된다.
삼별초의 대몽항전은 몽골에 반감과 원한을 지닌 민중들의 호응을 받아 세력 범위를 넓혔으나, 무신정권 비호를 위해 조직되어 그 하수인으로 특권과 혜택을 누렸던 삼별초가 새로운 무신정권이 등장하지 않음으로써 구심점을 잃게 되는데서 발생한 저항인 만큼 그 의미 또한 새겨볼 필요가 있다.


 

1994년 남도석성 서문지 주변성곽과 옹성 보수공사 보고서에도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1481년 발간)」에는 ‘둘레 1천2백33척, 높이 8척, 샘이 하나, 우물이 하나’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여지도서(與地圖書)(1759년 발간)」에는 ‘둘레 1천4백척, 높이 12척, 치첩 43개, 샘이 2개’라고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남도만호(南桃萬戶)의 설치시기가 조선 세종 20년(1438)임을 미루어 그후에 축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영조대에는 치첩(雉堞) 등 부대시설을 완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현재의 성곽은 길이 6백10m, 높이 5.3m로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보다 이른 1990년의 서문주위 보수공사 보고서에는 성벽의 길이가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동쪽 성벽은 82m, 서쪽 성벽은 1백14m, 남쪽 성벽은 1백65m로, 동벽(東壁)이 서벽(西壁)에 비해 약간 짧은 구형이며, 성벽은 1.1m 내외의 장대석으로 하단부를 구축한 다음 위로 올라갈수록 작은 석재를 사용하였다. 석재는 사각형 혹은 직사각형으로 대체로 큰 석재 사이에 작은 석재를 끼워 고임돌로 사용하여 축조하였다.


지형적 특수성으로 인해 남도석성은 지속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게 되는데, 1895년에 만들어진 「남도진지(南桃鎭誌)」에 따르면 당시 이곳에는 군관장교 10명과 기패관 10명, 진무관 13명, 주사군 3백20명이 주둔하고 있었으며, 성 안의 민가는 31호였다. 「우수영지」의 기록에는 한때 이곳에 5백66명의 수군이 주둔하고 있었다고 한다.
성 안 관아로는 객사, 동헌, 군관청, 진무청이 있었으며, 격량고, 보군고, 군기고가 있었고 남문 밖에 선창고가 있었다. 성에는 동문과 서문, 남문 등 세 개의 문이 있고 성을 타고 오르는 적을 쏘기 위해 만든 옹성은 7개, 성 위에 쌓은 치첩(雉諜)은 43개란 기록도 보인다. 조선 시대 수군 진영의 전형적인 진보(鎭堡) 성으로서의 특징을 간직하고 있어 성문과 옹성 등이 그 보존 가치가 매우 클 뿐만 아니라 국내에서 이만큼 원형이 잘 보존된 성도 드물다.

 

남도석성은 높이 4~6m, 폭은 2.5∼3m 가량 되는 성으로 둘레가 610m이다. 둥그런 성벽과 동.서.남문이 거의 그대로 있으며, 서문 양옆에 밖으로 튀어나온 치가 남아 있다. 성 안에는 민가가 수십호 들어서 있고, 마을 사람들은 이 옛성문을 통해 출입한다.

 



남도석성 남문앞으로 흘러가는 가느다란 개울 위에는 쌍홍교와 단홍교 두 개의 홍교가 놓여있다. 두 개 모두 편마암질의 판석을 겹쳐 세워 만든 것으로 규모는 작지만 전국적으로 유례를 찾기 힘든 특이한 양식이다.

출처 :박물관 자원봉사단 원문보기 글쓴이 : 자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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