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산

만남: 이충무공 전첩비 답사

mamuli0 2006. 11. 29. 12:25

 진도 미술관장 조병록님이 문화해설반에서 낭송해주신 글이 너무좋아 양해를 구해(11월 29일) 다시 <벽파>를 찾아 그 옛날을 회상하면서 사진에 담아 소개 합니다.

 

만남

조병록          

 

 땀으로 짭짤하게 푹푹 찌던 여름을 벗고 카랑카랑 마른 햇살이 오곡 백과를 추스린다.

금년 추석은 9월 그믐말부터 징검다리 이틀을 거쳐 9일 동안 축제다. 외국여행 티켓은 몇 개월 전에 이미 매진되었다고 하는가하면 장바구니 물가가 천정부지라 돈이 제일 싸다는 말까지 나왔다.

이렇게 주변이 설레면 고즈넉하니 서성이는 버릇이 있는 나는 남편과 같이 벽파 항으로 향했다.

가뭄으로 철 이르게 잎을 떨군 감이 루미에르 달아놓은 듯 곤고한 시골마을을  호화롭게 밝힌다.

진도는 도로가 잘 되어있다. 해안도로는 물론 포장된 농로가 마을을 돌아 들과 산을 안내한다. 마을 안팎 깨끗한 도로에 콩 단이 즐비하고 벼를 말리느라 부산스럽다. 젊은 사람이 드문 시골 마을에서 고부레질을 하는 청년은 아무래도 명절을 쇠러온 손자인지 흰 피부하며 염색한 머리가 도회지 풍이다.

마을을 벗어나 비탈길을 오른다. 들국화 흐드러지게 만발해 봄보다 더 곱다.

시야가 확 트이는 넓은 들에는 추수 때가 된 벼가 황금융단 불결치듯 출렁이고 협골에는 손바닥만한 고래 논이 차곡차곡 계단을 이루며 가을걷이를 기다린다. 이골짜기 다랭이 천수답에서 알곡이 얼마나 나올까.

도시 근교는 대로변일수록 놀고 있는 땅이 수월찮은데 한뼘의 농토를 아끼는 촌부의 마음을 읽는다.

여느 때 벽파 항은 폐 항인가 싶도록 쓸쓸한데 명절 끝이라 승용차와 버스까지 즐비하다. 제주도에서 들어오는 배를 기다린다고 한다. 이것저것 궁금해 하는 나에게 주민은 철선(여객선)이 다닐 때 이 동네는 돈을 삼태기로 긁었다면서 지금 젊은이는 다 떠나고 남은 노인들이 농사일에 힘겹다고 한다. 진도대교가 생기기 전의 번화했던 시절을 그리며 "좋았지라"하는 말소리를 들으며 바위산을 오른다.

 

 

<충부공벽파진전첩비>는 명량해협을 굽어보는 진도군 벽파마을을 정남방 산기슭 안석바지에 자리하고 있다. 동양최대 11m 높이의 장엄한 비석이 대마도를 굽어보며 오늘도 이순신장군의 충혼이 나라를 지킨다.

 

전첩비의 주추는 보통의 경우처럼 다른 곳에서 제작한 석물을 가져다 설치한 것이 아니다.

태초부터 있던 거대한 맥반석 한 덩어리가 산등성을 이룬다. 귀부는 이산 정상이 바탕돌이 되어 거북선에 비견할 만한 거대한 거북이(길이 272cm, 폭 333cm, 높이 181cm)로 조각되었다. 둘레에 바다를 상징하는 물이 있어 전첩비를 등에 지고 네 발로 유유히 헤업치는 형상이다. 맷돌 짝 같은 머리 양옆에는 손바닥만한 큰 누낭울에서 안광이 번들이는 듯 하다. 수염애 넓2은 이마에 얹혀 나부끼고 압은 깊숙이 다물어 조국애와 인간애에 고심하는 장군의 풍모를 연상케하며 체구에 비해 빠꼼한 두 콧구멍은 담배 한대 생각나게 하는 해학적인 모습이다.

 

 

이 코를 만지면 나라에 충성하고 부모에게 효도하는 아들을 낳는다는 전설이 있어서 반질반질윤이난다.

비신은 애석이 쓰였으며 꿈틀대는 쌍용의 머리가 양쪽에서 바다를 주시하는 15000근의 이수를 머리에 얹고 바다를 향했다.

 

비문은 제호 9자, 낙관사 85자를 포함해서 888자의 국한 혼합체로 쓰였다.

 

 

<나는 삼가 꿇어 엎드려 대강 그때 사적을 적고 이어노래를 붙이노니 열두척 남은 배를 거두어 거느리고 벽파진 찾아들어 바다목을 지키실제 그 심정 아는 이없어 눈물 혼자 지우시다 300척 적의 배를 산같이 깔렸더니 울돌목 센 물결에 거품같이 다 꺼지고 북소리 울리는 속에 저님 우뚝 서 계시다 거룩한 님의 은공 어디다 비기오리 피 흘린 의사 혼백 어느 적에 사라지리 이바다 지나는 이들 이마 숙이옵소서,>

 

비문의 마무리 부분이다. 단기 4288년(1955년) 9월 16일 노산 이은상 짓고 소전 손재형 쓰고 진도 군민의 성금으로 세웠다는 낙관사가 말하듯이 충무공 이순신을 사랑하는 마음이 절절하다.

나는 세 번째 여기서서 처음처럼 가슴이 뛴다

내가 충무공 이순신장군을 처음 만남 것은 6.25직후 초등학교 5학년 때였다. 선생님은 전쟁시기였기 때문에 더욱 우리들에게 임진왜란과 이순신 장군을 열성껏 가르치셨다을 것이다.

"죽고자하면 살고 살고자하면 죽는다."

우리는 주먹을 불끈 쥐고 이 말의 뜻을 배웠고

"싸움이 한창 급하다. 내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 말아라."

죽음에 이르러서도 조국의 안위를 걱정했던 장군을 가슴으로 부르며 우리들은 울었다.

내가 선생님이 되어서 이순신 장군의 전기나 시, 난중일기를 가르칠때 열과 성을 다했으며 세계전쟁사에서 이순신 제독의 23전 23승의 전술이 가장 많은 분량으로 기록되어 연구되고 있다는 사실도 자랑스럽게 역설했다.

비문의 888자가 모두 제몫의 꼴을 갖추고 생동한다. 단아한 기품의 궁체의 아름다움과는달리 소전체의 변화무쌍한 자형과 거침없는 필세가 전통을 깨고 전통을 수립하는 자유로운 예술 혼에 감동한다.

또한 빗물도 스미지 못한다는 단단한 애석위에 붓의 호 한 가닥의 흐름까지 놓치지 않은 깊고 유연한 서각을 할 수 있는 명장의 함자를 찾지 못하여 섭섭하다.

"여보, 그만 가지."

들려오는 남편의 말에 끄덕여 답하면서 잘생긴 거북이 머리를 안고 바다를 향한다.

대장기 높이 들리고 학익진이 발동항다. 진군의 북소리가 누리를 덮는다.

고난 앞에서 하나 된 민족혼이여 사랑이여.

 

 

< 바닷가에서 올려다본 전첩비 전경>

 

 

 읽어 주신 모든 분께 감사를 드립니다.

 

2006년 11월29일       연산 올려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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