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일

기독교동광원수도회 소라니 답사보고서

mamuli0 2024. 10. 13. 09:46

 지난 10월 8일 기독교동광원수도회 남원지역 답사 중 빠진 대강면 소라니 순교지역을 다녀왔다.

 

 

소라니 순교지 답사 보고서

 

정리 : 김종북

참 가 자 : 방순녀 원장, 오세휘 장로, 복태경 집사, 류미자 수녀, 김종북

답사지역 : 전남 남원시 대강면 송대리 송내마을 일대

이 동 : 동광원 승용차 복태경 집사 운전

일 정 : 2024년 10월 8일(화) 13: 20~16: 00

13:20 대산면 운교리 동광원 동산 출발

13:30 운교리 마을 오세휘 장로댁

13:50 주생초등학교 도착

13:58 지당리를 바라보며 지나가다

14:40 대강면 송대리 송내마을 도착(길을 몰라 도중에 길을 묻느라 시간이 걸림)

15:10 송내마을 출발

15:40 운교리 도착

 

소라니 순교지 개요

 

1950년 6.25 당시 맥아더 장군 9.28 인천 상륙작전으로 전세가 역전되어 공산군이 후퇴하고 UN군이 북진 하던 10월 중순경 화학산에 피신해 있던 이현필 선생이 광주 시내로 나왔다는 소식을 듣고 남원에 있던 사진관댁, 이발소댁, 홈실댁 세분이 홈실 김공의 만류에도 서둘러 주생 지당리에서 하루 밤을 보내고 새벽에 일어나 대강면 소라니 황공댁을 찾아갔다. 필자가 도보로 지당리에서 소라니를 검색해 보니 3시간 40분이 소요되었다. 그때 소라니에는 패잔병 공비들이 있었는데 국군인줄 알고 사실을 말하니 대창으로 살육을 당했다고 한다. 그 후 황공과 지당 어머니가 시신을 수습해서 장례를 치렀다고 한다. 지금은 남원 동광원 묘역에 계신다.

 

 

소라니 순교지 답사기

 

10월 7일 곡성에 사는 큰아들이 진도에 왔기에 남원 동광원 묘역에 계신 분들의 내력을 정리해 보고 싶어 곡성에 따라왔다. 다음날(8일) 대산 운교리 에서 오전 오후 두 차례 방원장님 말씀을 듣고 시간이 남아 지당리와 소라니를 찾아보기로 했다.

운교리를 나와 지당으로 가는 길에 13:40경 대산면 대붕리를 지날 때 복 집사님이 ‘대실은 반촌인데 정인세 원장님이 전도하다가 과부댁에 들렸다고 뺨을 맞았다’는 일화를 들려주었다. 지당 어머니 조경신은 방원장님 모친으로 순교자들이 지당리 집에서 하루 밤을 보내고 다음 날 새벽에 떠나신 후 순교 소식을 듣고 소라니에 가서 시신을 거두어 장례를 치렀다고 한다. 13:50 즈음 방 원장께서 다니셨다는 주생초등학교와 학교 앞들에 있었다는 논들, 그리고 집은+지금 교회당 뒤쪽으로 가서 산자락 밑에 있었다고 한다. 그리 멀지 않은 거리였다고 한다. 학교 건물은 변했지만 오래된 소나무가 있어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소라니를 찾아갔다. 청송리 3거리에서 좌회전 하여 비홍로를 달려 비홍재를 넘어 순창쪽으로 가다가 물어보니 모른다하여 뒤돌아 수홍 3거리에서 물어물어 섬진로로 달리다가 평촌 3거리에서 직진하여 송내 교차로에서 우회전 하여 송강 소류지에서 굴다리 지나 14:30 경 송내마을에 도착했다. 지금은 ‘소라니’를 모르는 사람들이 많았고 아는 사람이 적었다. 지금 주소는 남원시 대강면 송대리 송내 158-1 마을회관 주소다. 마을을 돌아보고 주민들의 이야기를 듣고 15:10 송내 마을을 출발하여 16:00 경 운교리에 돌아왔다.

 

 

김준호 선생의 순교자들의 이야기: 순교자들:사진관댁(양봉여), 이발소댁(박정화), 홈실 어머니(김순례:춘자) 사연

 

동광원의 정신과 혹은 내부에 일어나는 한 사건을 말씀 올리겠습니다. 지금 여기 강당 뒤에 가보면 무덤이 있고 그 무덤 비석에 ‘순교 사진관 댁의 묘.’ 그렇게 써있는 팻말이 있습니다. ‘주후 1950년 10월 4일 소천’ 그런 비문을 지금 읽어보고 내려왔습니다. 그럼 사진관 댁의 사연을 지금 말씀드리면 한 말씀이 첫 말씀이라고, 동광원 초창시기의 정신과 그 모습을 그렇게 직감하시리라고 생각되었습니다. 저는 육이오를 중심으로 전후니까 육이오 전으로 어느 날, 주일날이올시다. 그럼 사진관부인은 화학산 소반바위에서 보모 직을 하고 계셨습니다. 그럼 학생들은 한 5명, 선생님은 김 수혜 선생, 그런데 주일날이면 저는 방산이라는 곳에 있었습니다. 그때는 마을 사람들이 다 소개를 당해버리고 거기에 정 면장 이라고 정규주의 어머니의 남동생이 면장인데 밤에는 밤손님들이 습격을 하고 사람을 죽이기 때문에 모두 집을 내어버리고 떠나버렸습니다. 그래서 고아들 한 그때 10명, 저, 귀주 어머니 그렇게 자기 남동생의 집이니까 화순군 도암면 중촌에 머물고 있다가 결국은 더 안전지대로 방산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거기서 주일을 보고 있는데 사진관 어머니가 오셔서 주일예배를 같이 봤었습니다. 오후에 이제 다시 돌아가기 전에 선생님 조금 뵙시다. 그래서 제가 면담을 했습니다. 그때는 보릿고갭니다. 보리가 아랫마을에는 익어서 누렇고 그 소반바위는 아직도 파랗습니다. 등고선이 아마 칠백고지는 될 것입니다. 아마, 어제 된 일을 설명하세요. 선생님 제가 어저께 이렇게, 이렇게 지냈어요. 그 사연 그 아이들 선생님은 양식이 떨어졌다고 그제 하산하시고 아무리 해가지도록 기다려도 선생님은 아니 오시고 아이들은 배가고파 하기 때문에 그제 선생님은 떠나시고 어제 일이지요. 너무 아이들이 배가 고프겠다 싶어서 자기 평생에 처음으로 그 풋보리를 땄답니다. 아이들 5명 어머니까지 6명 밥인데 눈으로만 어려서 봤던 것을 처음으로 실천해 봤는데 보리를 따놓고 생각해 보니까 이걸 어떻게 해서 아이들 밥을 만드나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이걸 빨리 말려야 쓰겠다 싶어서, 솥에다 불을 때고 그 보리 파란송아리를 볶아가지고 손으로 비비니까 속안에 빠지지 않습니까? 해보신 분들은 아실 겁니다. 그런데 너무 적어요. 식구가 6사람인데 6홉이나 되어야 밥을 할 텐데 이것이 반 홉 거리나 될 것인데 이것을 가루로 만들어야 쓰겠다. 두 번만 경험이 있어도 알 텐데 처음이기 때문에 맷돌이 있어요. 거기 소반바위에, 그럼 맷돌질을 해야 하는데 물이 퉁퉁 불어있기 때문에 다시 솥에다 넣고 말리지요. 어느 것은 타고 어느 것은 안 마르고 그렇게 해서 억지로, 억지로 불을 때가지고 손으로 비빈보리를 말렸습니다. 그래가지고 맷돌에 넣어 갈았습니다. 그러고 보니 너무 양이 적어요. 그래 물을 많이 붓고 보리죽을 쑤었습니다. 아이들도 한 그릇 주고 어머니도 한 그릇 잡수셨다는 말을 하십니다. 그 말할 때 이 세상에 태어나서 부자 집에 시집가서 종을 부리고 살던 생활인데 갑자기 이 선생님을 산에서 만나가지고 감화를 받고 비단옷 벗으십시오. 벗고 면 베옷을 입었을 때 남편은 그 젊은 30대 청년인데 갑자기 부인이 화장을 않고 무명옷을 입은걸 보고 미쳤다고 얼마나 두들겨 패는지 참 온몸이 헌 누덕지가 되도록 맞으시고 매일 때리고 또 때리고 어제까지 고 피아노 쳐주고 비단옷 입고 화장하던 아내가 갑자기 화장을 걷어버리고 누더기 옷을 입고 그러니까 그것을 강제로 항복을 받을 량으로 그러니까 하루 이틀 한 달 두 달 석 달 반년 얼마나 매일매일 매를 맞고 그래도 비단옷을 안 입기 때문에 결국은 나가라. 그래서 가정에서 추방을 당해가지고 그러고 이 선생님을 찾아서 거기 이 선생님 고향 화성군 도암면 그 산중을 찾아왔는데 선생님이 하시는 말씀이 지금 소반바위에 어린 아이들이 있으니까 가서 어머니가 되십시오. 그래 보모가 되어가지고 산에 오신지 불과 한 몇 달 되었어요. 그런데 육이오 전이지만 해방 후에 양식이 참 귀한 때입니다. 그러니까 선생님은 양식을 구하러 가서 오시지 않고 아이들은 배가고프기 때문에 그 풋보리를 따가지고 처음으로 해본 것이지요. 두 번만 해봐도 요령이 생겼을 텐데 처음으로 해봤기 때문에 양이 부족하고 그래서 그때 왜 그 이야기를 하시냐하면 아, 이 못난 자식은 내가 선생님을 원망 했어요. 왜 어제 죽을 쑤기 위해서 물이 없는데 그 소반바위에 가보시면 압니다. 물 나오는 곳이 부엌에서 한 백 미터 내려갑니다. 절벽입니다. 애들도 배가고프지만 어머니도 배가 고파가지고 그 물을 양동이에 떠가지고 올라오는데 어떻게 다리가 떨리던지 우리 선생님이 어린 아이들 가리킬 때 어머니가 밥하면 물 좀 떠다줘라. 이렇게 지도했다면 이 어려운 때 아이들이 물을 길러다 주면 좋으련만 너무 애기들을 생활을 안 가르치고 그렇게 해서 아이들이 종일 먼 산만 보고 앉아있으니 이건 교육이 부족하다. 나는 이렇게 선생님을 원망한 죄인이다. 그 말을 하시기 위해서 그 말을 하세요. 다른 이야기가 아니고 고생했다는 이야기가 아니고 이건 내가 고생을 감당해야 할 텐데 애기들이 물 좀 떠다주면 내가 밥하기 쉬우련만, 어쩌면 저 아기들을 먼 산만 보고 앉았을까? 그 마음에 시험이 컸기 때문에 내가 자복을 하지 않고는 못 올라가겠고 고 사연을 이야기 하시는 겁니다. 그러면 그 사연을 들어보면 그때 그 상황이 얼마나 곤란했으며 배고픈 생활을 했으며 또 고난이 막심했으며 그 상황이 짐작이 가실 겁니다. 그렇게 올라가시고 그날은 세월이 또 한세월 흐릅니다. 저는 그 사진관부인이 저를 고맙게 보시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 세상 말로하면 비밀 된 자기 영성을 고백 하십디다 요. ‘선생님 나 부끄러워요.’ 어제 옛 남편 따라서 그 직장에 다녀오셨다고. 왜? 자기 남편이 군수 발령을 받아가지고 초임을 하는데 나와 자기는 관계가 없지만 그래도 우리가 부부지간이 아니오? 내가 명색 남편이고 이 세상에 태어나서 군수가 되어가지고 발령한 이 마당에 당신은 내 아내가 아니오? 내 소원이니 나하고 살림을 안 해줘도 좋으니까 부임할 때 거기만 함께 같이 갑시다. 얼마나 진실한 소원하기 때문에 이 죄녀(罪女)가 그걸 거절 못하고 남편을 따라서 부임지에 다녀왔어요. 그 고백을 하시는 거예요. 그건 전 식구는 모르지요. 그 부부가 얼마나 사랑이 깊고 완전하던지 누구든지 부러워했던 부부지간입니다. 가서 보니 두 번째 결혼해 가지고 젊은 아내가 사택에 계시더랍니다. 벌써 미리 와서 그런데 친정어머니가 따라와서 모녀가 방에 계신데 인사합시다. 그래 큰어머니 작은어머니의 친정어머니 세 명이 인사하실 때 친정어머니 다시 말하면 그 어머니가 얼굴이 파래가지고 공포를 느끼더랍니다. 자기 딸을 말리려니 참 불행하게 될 성하니까 아 큰 부인 나타났구나. 내 어린 딸은 장래가 어찌될 것인가? 그래서 어머니 염려 마세요. 어머니 행여 라도 마음 놓으세요. 나는 절대 여기 와서 살 여자가 아닙니다. 나는 예수 앞에 가버리고 나는 이 남편과는 관계없습니다. 절대 딸 걱정 마세요. 안심을 시키니까 얼굴이 좀 훤해지시더라고 아주 젊은 동생을 보고 동생 이 결혼 살이라는 것이 그렇게 쉽지를 않소. 내가 이 짐을 못 지고 나는 버렸는데 내 대신 이짐을 와서 져 준다니 내가 당신을 존경하고 흠모합니다. 그러나 고생을 할 텐데 나는 참 감사하고 미안할 것뿐이지 나는 절대 이 짓을 안 돌아봅니다. 행여 라도 의심마세요. 그러니까 그 젊은 부인이 아주 눈물을 빠치면서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이러시더라고 그래요. 그래서 더 있어서는 안 되겠다. 내가 안 올 곳에 왔다 싶어서 내 갑니다. 그리고 떠나왔습니다. 그래요. 그 후의 일을 아주 눈물겹게 이야기하시더라고요. 그게 자랑이 아니에요. 이 공동체에는 옛 남편을 만나본다. 가정을 돌보는 일이 절대 없기 때문에 내가 비밀리 다녀왔으니 선생님 내가 이런, 이런 잘 못을 했습니다. 고해하는 거예요. 그야말로 이 못난 것을 붙잡고 골방에서 제가 이 이야기를 들어도 좋습니다. 그런데 여기 뒷산에 그 무덤이 있고 그 비석을 제가 보고 왔습니다. 아, 그분이 여기 묻혔구나. 그런데 그분은 비석을 쓰자니 고향도 모르고 생년월일도 모르고 전혀 알 길이 없습니다. 이 선생님 전기에 나와 있어요. 사진관 부인 댁, 옛날 자기 남편이 군수되기 전에 사진관을 하셨던가 보지요. 그러니까 사진관 부인 댁 그 말밖에 우리가 아는 사람이 없어요.

그러면 그분이 어떻게 세상을 떠나셨는가? 그 이야기입니다. 물론 저도 듣고 여러분도 들었겠지만 예수님을 믿기 위해서 부모 형제 일가친척고향 남편 자식을 다 버리고 혈혈단신 예수님을 찾아왔지요. 그러나 그 지도자는 이 현필 선생이십니다. 그러면 서리내에서 이 선생님 말씀을 듣고 소위 말하면 일체 세상을 버리고 출가하신 어머님이신데 그분이 음악을 전공하셨던가 보지요. 찬양도 하시고 피아노도 잘 치시고 여기 도암면 현실이란 마을이 있습니다. 거기 오셔서 선교하셨어요. 마을 사람들 찬송 가르치시고 또 주일예배도 인도하시고 그렇게 지내신 일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물론 가정에 계실 때에도 서로 이해가 안 되가지고 매를 맞았다는 거지 그때가 순교입니다. 전혀 이해를 못한 남편이 힘으로 항복을 시키려고 방에다 가둬놓고 얼마나 구타해 때렸어도 고개를 딱 숙이고 말 한자리 대꾸하지 않고 매를 맞고 그 일을 오래하시다 나오셨기 때문에 육이오가 끝났지요.

 

 

그 때 같이 계셨던 사진관 어머니 이발소 어머니 비문을 보니까 이름을 알겠는데 김순예 자매 그때 세분이 육이오가 끝났기 때문에 광주에 이 선생님이 계신단 말씀을 듣고 걸어 가셨지요. 그길 다녀보신 분들은 아실 겁니다. 여러분 잘 아시는 홈실, 광주 무등산을 거쳐서 광주 갈 양으로 소라니에 들어갔을 때 거기에 인민군이 후퇴하다가 거기에서 집결하고 있던 것을 몰라보고 딱 들어섰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인민군도 자기들이 살 양으로 밖에서 들어온 사람은 전부 살피는 것이거든요. 보따리를 까보고 보따리를 까보니까 수상한 사람이거든요. 성경이 나왔단 말입니다. 그럼 이 사람들은 우리 원수들이다. 잡아라. 묶어라. 사지를 틀어라. 세 사람이 묶여서 뒷산으로 올라갔다는 겁니다. 짐에서 성경이 나왔기 때문에 이 사람들은 우리의 원수다. 이 사람들을 직결 처벌하라. 그래서 이 사람들을 뒷산으로 끌고 갔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때 우리가 짐작하건대 총살은 못해요. 왜? 국군이 쫒아오니까 총알을 아껴서 죽창으로 세분을 찔러서 살해한 거지요. 군인들 인민군들이 그렇게 무참히 순교를 당하신 것이 구전이지요. 우리가 들어서 아는 것이니까 그 확실한 사건은 전기에 나와 있어요. 그러면 평소생활을 우리가 알고 있기 때문에 아 사진관부인이 이런 모습으로 거기서 순교를 당하셨다. 그 남편한테 그 무제한으로 매를 맞고 하루 이틀이 아니고 그 몇 달 근 일 년 이년 그렇게 매를 맞고 웃음으로 그를 대하고 떠났던 그러신 분이니까 거기서 순교를 당할 때도 그렇게 축복을 하시며 눈물을 머금고 기도하시며 순교 하셨겠다. 그건 짐작이 있을 뿐이지 실제로 확실한 것은 우리가 모릅니다. 그리고 순교하신 무덤이 세 분 계시더만요. 아까 가보니까 순교 박정화의 묘라. 이분이 소위 말하면 이발소 부인이란 말씀입니다. 이발소 어머니 그때 나이가 30대고 20 조금 넘으셨지요. 아주 젊은 부인들이지요. 쪽만 안 쪘으면 처녀와 같이 젊은 분이셨는데 그분도 사진관 댁과 똑같이 이 선생님의 감화를 받아가지고 출가하신 분이시지요. 그 어머니 일이야 전기에도 조금 나와 있지만 더 확실한 구전이 있다고요. 세분을 다 똑같이 대나무 꼬챙이로 살해를 했는데 쪼끔 급소를 안 맞아서 안상했던지 이발소 어머니는 딱 정신을 차리고 보니 살았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그때 본 사람이 목격하기를 창자가 배 밖으로 나왔답니다. 창자를 정신이 왔으니까 자기 손으로 이렇게 잡고 딱 배를 움키고 기어간단 말입니다. 안 죽었으니까 지혜가 있잖아요? 거기 집이 한 채 있는데 그 농촌 집이라는 것이 울타리는 없지요. 마당 겸 울타리 거기 솔잎을 긁어가지고 놓은데 밤중이니까 그 속으로 들어갔답니다. 이 모진 생명이 안 죽으니까 숨었단 말입니다. 그 이튿날 시체 셋을 확인하러 와서 보니 하나가 없다. 놀래가지고 그 사이에 살아가지고 국군한테 고발해버리면 자기들이 죽거든요. 자기들이 살 소위 말하면 지혜지요. 이 사람이 어디 갔나? 피 자국을 따라가 보니 그 산골짜기에서 집으로 들어가 거기서 피가 끊어졌단 말이지요. 총을 들이대면서 여기 어제 밤에 사람이 숨지 않았느냐? 내놓아라. 그럼 주인은 모르지요. 절대 모르는 사람들이 우리는 모르오. 거짓말 마라. 죽인다. 총 놓는다. 그러니까 가만히 이발소 어머니가 상황을 보니까 내가 만일 이 이입을 열지 아니하면 이 무죄한 주인들이 죽겠다 싶어서 ‘나 여기 있소.’ 하고 기어 나왔단 말입니다. ‘나 여기 숨었소. 그 사람들은 모르요.’ 그 주인들이 해꼬지 당하니까 자기가 푹 뛰어나왔단 말입니다. 가자. 이년 그래 끌고 갔단 말입니다. 그래 두 분이 죽은 무덤 시체가 따로 있고 여기 집사님이 보니까 그 분은 따로 딴 데서 죽고 있단 말입니다. 두 번 살해를 받은 것입니다. 두 번째 죽음을 당하신 거지요. 순교를 했어요.

중략

 

 

그런데 순교한 것은 영광이지요. 그러나 그 사진관 어머니는 하늘나라에 가서보면 면류관이 두 개 일거에요. 절대 자기생명을 아끼지 않기를 두 번했다고, 그 주인집 식구를 살리기 위해서 나 여기 있소. 나요. 그 자원해서 뛰어나온다는 것은 그것은 사랑완성이지요. 절대 완덕을 성취하신 거지요. 절대 사랑완성 그렇게 해서 두 번 순교를 당하신 것이 지금 들어나 있어요. 목격한 사람이 있고 우리가 귀로 듣고 있어요. 그리고 세분이 똑같이 순교를 당하셨는데 김 순예 자매님은 청춘과부로 이름만 결혼했지 그때 육이오 전후에 청년들이 많이 암살당했어요. 죽었어요. 그러니까 쪽은 쪄서 비녀는 질렀지만 처녀의 몸으로 아주 젊은 청춘이었지요. 같이 이 선생님의 제자이니까 어머니를 모시고 있기 때문에 어머니를 모시고 같이 길을 가다가 같이 살해당했다는 말만 있을 뿐 구체적인 이야기는 우리한테 전해진 것이 없지요. 그런데 그분 언니가 살아계시지요. 지금 죽곡면 동계리에 다행히 생년월일을 알았고요. 1927년생이에요. 5월 20일 생인데 지금으로부터 42년 전 이야기이니까요. 참 젊었지요. 이렇게 해서 동광원이 뭐요? 누군가 그래요. 어떻게 삽니까? 정신은 뭐요? 그러면 이 선생님 이야기를 듣고 알고 있지만 그 이 선생님이 가장 사랑하던 제자 유별나게 사랑하던 제자가 이세분이신데 선생님께 문안가기 위해서 순교를 당했던 요 이야기만 들어봐도 한말을 천말을 알아듣더라고 이것이 동광원의 내력이다 말씀입니다. 이것이 동광원의 사건이고 동광원의 거동의 모습이라 그 말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