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살다보니 오른쪽 어금니를 심으러 목포치과에 다녀왔다. 가뭄에 시달리다 비를 맞고 기장이 제대로 커서 익어간다. 비가 그쳐 초여름 꽃들을 돌아 보았다.
이 국자 언님
일시: 2015. 10. 06. 장소: 화순 도암 중촌 방문자 :김종북 최종은 복태경
‘맨 처음 이현필 선생님 만나신 것 또 이 현필 선생님 만나셔서 지내오신 것 이런 것 말씀해 주시면 좋겠어요.’
‘일본에서 사신 기억부터 어머니 아버지에 대한 성함이라든가 이야기 해주시고 그 다음에 해방되고 나오셨지요?’
‘저는 해방 안 되고 나왔어요.’
‘그 과정 쭉 이야기 하시고 그 다음에 동광원, 그 이야기 보다 일본에서 나오신 이야기부터 해주시면 더 좋을 것 같아요. 어머니하고는 언제 헤어지시고 아버지는 여기까지 나오셨다고 김 준호 선생님의 이야기에는 아버님하고 나오시고 친구 분 대개 그 이야기는 있거든요. 그 이야기도 다를 수도 있고, 그러니까 일본에서부터 한 열 살 되셨지요? 그 이전에 기억도 일본에서 어디에서 사셨고 부모님은 어떤 분이셨고 쭉 살아오신 이야기를 해주시면 좋겠어요.’
‘부모님은 두 분이 한 분은 아버지는 평양 사람이고 어머니는 서울 사람이에요. 그런데 일본에서 두 분이 학교에 다니면서 만나가지고 결혼을 한 것 같습디다. 그래가지고 살다가 결핵이 생겼지요. 제 짐작으로는 다섯 살, 여섯 살 그럴 때에 어머니가 폐병이 들었대요. 그 뒤로는 계속해서 병원 생활만 하시는 거예요. 계속해서 병원 생활만 하시니까 아버지하고 저하고 둘이 살지요. 그러나 아버지가 일본에서 무슨 사업을 하시데요. 그때로서는 나라가 위험할 때이니까 어디 땅속에다가 굴을 굉장히 크게 파가지고 그렇게 무슨 사업을 하시더라고요. 기계 같은 것도 많고 사업을 하시는데 그러다가 전쟁 때 굉장히 심했지요. 일본 전쟁 때 거기에 계셨나요?’
‘아니 저는 96년에 갔다가 작년에 돌아왔어요.’
‘굉장히 심했어요. 굉장히 심하고 이리저리 피해 다니다가 아버지하고 저하고 피해 다니다가 아버지가 이웃에 일본 사람을, 대단한 가정인데 그 일본사람을 잘 친하게 알아서 도움을 많이 받았어요. 일본에서 신사참배 안하면 큰일 나거든요. 그런데 거기도 많이 빼주시고 그 사람이 그리고 인제 그때는 또 빵 배급 같은 것도 주시대요. 타러 오라고 아버지가 빵 배급타기 위해서 나란히 서있는데 저를 세워놨어요. 뒤에 세워놓고 아버지는 회사에 가셔버렸는데 그 일본 사람이 그 사람이 와서는 언제나 빵을 배급을 주다가 이렇게 모자라면 일본 사람들만 딱 주고는 더 안줘버려요. 그때 시대에 그런데 그분이 일본 사람 아는 사람 그분이 저를 일본 사람들 서있는 줄에 세워 놔둬요. 그러면 빵을 주지요. 그래서 타다가 먹고 아버지하고 그렇게 살다가 전쟁이 하도 심하니까 날마다 피해 다니느라고 한번은 인제 방공호 속에서 어느 가정하나하고 아버지하고 저하고 그 안에 들어가서 숨어 있거든요. 숨어있는데 어린 애들은 이불을 둘러씌워놓고 가만히 있으라고 어른들은 자꾸 망을 보시고 그러시데요. 그러시는데 어른들은 미리알고 나갔는지 그것은 모르겠는데 바로 방공호 뒤에다가 폭격을 했어요. 폭격을 해서 그때 기적이라고 나는 봐요. 왜 그러냐하면 그 폭격 소리에 울려가지고 제가 어른들이 안 계셔서 문 앞에 나가서 이렇게 보고 있으니까 폭탄 떨어지는 그 바람에 제가 저리 날아가 떨어져 버렸어요. 그래가지고 그때 죽을 뻔 했거든요. 그대로 거기에 쓰러져있는데 조금 늦게 아버지가 오셔서 나를 데리고 가더라고요. 그래가지고 참 어떻게 그렇게 살았는데 그때 귀가 조금 먹었었어요. 그 소리에, 그래가지고 항상 젊었을 때부터 저보고 식구들이 가는 귀 먹었다고 그런 말을 많이 들었는데, 그렇게 살다가 너무 전쟁이 심하니까 아버지가 딸 하나있는 것 마저 죽이겠다. 싶어서 아버지가 한국사람 몇 사람하고 짜가지고 한국으로 도둑 배를 타고 건너왔어요. 도둑 배를 타고 건너오다가 또 잡혔어요. 잡혀가지고 하루 저녁 감옥 생활 했어요. 감옥생활 하고는 거기 있는 사람들 거기가 어디인가 몰라도 한국 사람이 많이 있습디다. 그래가지고 도로 하루저녁 자고 그날 아침밥 줘서 먹고 도로 배를 태워서 보내주시데요. 그래가지고 부산까지 왔지요. 부산까지 와서 부산에서 내려가지고 아버지는 회사 때문에 도로 가셔야 되어요, 가셔야 되는데 나를 안 죽이고 살리려고 한국으로 피난을 시켜놓은 거예요. 그랬는데 어디다 맡길 데가 없으니까 같이 오는 아버지 친구가 있었어요. 친구보고 우리 딸을 조금 데리고 있어라. 그러면 내가 일본에 가서 회사를 정리하고 들어와서 찾아 가마. 그러고 가셨어요. 그리고 가셔가지고는 살다가 1년 2년 살아도 아무 소식이 없고, 그래가지고 사는데 기다리고 살고 있는데 일주일 만엔가 이주일 만엔가 확실히 모르겠어요. 편지가 왔어요. 그 친구한테로, 저 맡은 친구한테 편지가 와가지고는 그 친구 하는 소리가 편지를 보면서 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그러더라고요. 그래서 깜짝 놀랐어요. 어떻게 해서 돌아가셨냐고 그때 원자폭탄 때렸지 않아요? 그래가지고 일본 사람들이 손들었지 않아요? 그때 돌아가셨답니다. 그 원자폭탄, 그때 돌아가셨다고 제가 그 돌아가셨다는 것을 곧이 안 들었어요. 그래서는 날마다 아버지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살고 있는데 기다리고 날마다 눈물로 살면서 아버지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살고 있는데 하루 저녁에는 꿈을 꿔요. 꿈을 꾸는데 그때는 저 예수 이름도 몰랐어요. 예수 이름도 몰라요. 교회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그래가지고 꿈을 꾸는데 너 아버지 보고 싶다고 그랬지? 누가 그러시더라고요. ‘보고 싶어요. 우리 아버지 어디에 살고 계시면 저 좀 데려다 주세요.’ 막 꿈에 울면서 그랬어요. 그러니까 저기 가면 아버지 있으니까 가서 보라고 그래요. 꿈에 어디로, 어디로 가니까 아주 집도 무엇도 나무하나도 없는 허허 벌판이데요. 허허벌판이야. 그 허허벌판 가운데 조그만 오두막집이 있더라고요. 저 안에 아버지가 계신다고 그래서 갔어요. 가서는 인제 문을 열고 이렇게 서서 들어가지도 못하고 엎드려서 들어가서 보니까 아버지가 바짝 말라가지고 누워계시더라고, 움직이지도 않고 바싹 말라가지고 누워계시니까 내가 아버지 다리를 이렇게 문지르면서 막 울었어요. 울다 보니까 꿈을 꾸었는데 꿈에 울었는데 진짜로 눈물이 나왔더라고요. 베게가 젖고 진짜로 눈물이 나왔어요. 그래서 아 인제 진짜 아버지가 돌아가셨는가 보다. 그 허허 벌판이라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원자탄 떨어진 데가 나중에 알고 보니까 나무하나가 서있는 데가 없더래요. 전봇대 하나가 서 있는 데가 없고 아주 허허벌판이 되었더래요. 아 그때 돌아가셨구나. 그런 생각을 했어요. 그래도 내가 그 생각에 제가 우울증이 걸려버렸어요. 우울증이 걸려가지고는 그저 하늘만 쳐다보고 앉아있는 거예요. 낮이나 밤이나 밤에는 밖에 나가서 하늘만 쳐다보고 앉아있고 그렇게 앉아있는데 앉아서 고민을 하고 있는데 우울증이 걸려놓으니까 그때 내가 열일곱 살, 우울증 걸려놓으니까 이제 그 아버지 친구 부인이랑 아버지 친구가 이 사람을 짝을 맺어주면 저것이 풀어져 가지고 거기에다가 정을 들여 살지 않을까? 그래서 그러려고 그랬거든요. 그러려고 하는데 제가 절대 마다했어요. 제가 절대 저는 마다고, 아버지 만나기 전에는 마다고, 아버지 돌아가셨으니까 포기 하라고 그러자 인제 그러고 살고 있는데 얼마 안가서 그 친구네 부인 친정집에서 저를 달라고 그러는 것 갔습디다. 자녀가 귀하니까 수양딸 하게 달라고 그래가지고 이만저만해서 어머니 될 사람이 너를 좀 키우고 싶다고 하니까 가거라. 그래가지고 광주가 그 집이 있는데 광주로 왔어요. 광주에서 살면서 도저히 아버지가 안계시니까 내가 이 땅위에 살 필요가 없다. 나도 형제간이나 있다면 몰라도 형제간도 없고 나 혼자니까 어머니는 물론 병원에서 돌아가셨는지 소식도 모르니까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이제 나 혼자만 죽으면 깨끗하게 끝나니까 이제 나 하나 죽어야겠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는 그 집에서 살면서 그 어머니 집에서 살면서 그래도 어머니라고 그러고 양 어머니로 삼고 그 집이 자녀가 귀하니까 그렇게 사는데 그 어머니가 또 지금으로 보자면 그때는 몰랐는데 지금으로 보자면 아마 위암이었던가 봐요. 위가 아주 나빠 가지고 얼마 못살고 병원에서 돌아가셨어요. 그래서 그 뒤로 인제 제가 죽으려고 그랬지요. 나하나 끝내자. 이제는 끝내자. 그래가지고는 참 그때 시대는 농약도 없고 아무것도 없었어요. 아무것도 없어서 어떻게 죽을 방법이 없어서 어떻게 죽느냐? 그러면 물에 빠져죽자. 깨끗하게 물에 빠져죽자. 그러고는 밤중에 달밤에 밤중에 몰래 나왔어요.
그리고 물 찾으러 방 앞에 신이 있어야 내가 있다는 것을 식구들이 아니까 신은 놔두고 맨발로 그대로 그야말로 손수건 하나도 안 갖고 죽을 사람이 뭐 그런 것 필요 있겠어요? 손수건 하나도 안 갖고 그대로 몸만 빠져나와서 물 찾으러 다닌 거예요. 광주 그때 어디서 살았냐 하면 광주 극장 앞에 시내 복판에서 살았어요. 그래가지고는 시내 복판에서 물을 어디로 찾으러 다니겠어요? 그래도 어디로 가면 외진 데로 가면 물이 나오겠지 그러고 물을 찾으러 저녁내 헤매고 다닌 거예요. 헤매고 다니다 보니까 너무 피곤하더라고요. 그래서 어디 높은데 산위에는 아닌 데 그래도 지대가 높은 데가 있어서 거기를 보니까 딸각 다리가 있더라고요. 그 딸각 다리에 앉아있었어요. 나를 내가 죽으려니까 참 물도 허락을 안 하구나. 그런 생각을 하고 거기 앉아있었지요. 그때 열여덟 살에 물도 허락을 않는구나 하고 앉아있는데 이렇게 보니까 저 밑에 동네가 있는데 큰 집들이 세 채가 있더라고요. 아주 궁정 같은 집들이 세 채가 있어요. 가만히 저녁에 그 높은데 딸각 다리에 앉아서 보니까 그 전기불이 환하게 있기 때문에 남아있는 데가 여자들이 왔다 갔다 하더라고요. 그런데 가만히 보니까 보통 여자들하고 다르더라고요. 무엇이 다르냐? 흰 저고리에다가 검정치마 입고 머리도 긴 사람이 하나도 없고 그런데 그때 밤이라서 한사람씩 왔다 갔다 하더라고요. 저기는 참 다른 세계다. 어떤 사람이 살길 레 저렇게 검소하게 사는가? 저기는 다른 세계구나. 그런 생각이 들어서 구경삼아서 밖에서라도 보게 가볼까? 하고 갔었지요. 그런데 제 생각에는 한 밤 열시나 아홉시나 된 것 같아요. 아주 쭉 가시나무로 울타리가 되어있습디다. 탱자나무로, 그 가시나무를 돌아서 가니까 큰 대문이 되어있어요. 대문에 이렇게 고개를 갸웃갸웃하고 있으니까 조금 있으니까 하얀 옷을 입고 할머니가 한분 나오셔서 내가 이렇게 서있으니까 이렇게 보고는 깜짝 놀라면서 밤중에 무슨 큰 애기가 이렇게 서 있냐고 그러면서 처음 본 사람을 무조건 손목을 꽉 잡고 들어가자고 그래요. 무조건, 이상하다. 그러면서 따라 들어갔지요. 따라 갔는데 그때 거기가 동광원이에요. YMCA 살던데 들어가는데 어머니들이 살고 계시더라고요. 어머니들이 그때 금남 언니도 계시고 영현이 아저씨도 계시고 춘일 언니도 계시고 그래 거기 들어가서 어머니들이나 언니들이나 제 이야기를 해보라고 그래요. 어떻게 해서 이렇게 밤에 돌아다니느냐고 통 말이 안 나와요. 말이 안 나오고 오로지 아버지 생각만 있지, 도무지 말이 안 나와서 울고만 있는데 저녁이 너무 늦었으니까 오늘은 자고 내일 이 선생님이라는 분이 계신데 그분 앞에서는 거짓말도 요만큼도 못하고 다른 생각도 요만큼도 못하고 바른대로 다 이야기를 해야 된다고 그분은 말 안 해도 사람 속을 다 알고 계신다고 그렇게 말씀하시대요. 마음으로 어떤 사람이 관대 사람 속을 알까? 그런 생각을 가지고 그날 밤을 지내고 새벽에 저를 데리고 들어가신 어머니가 저를 데리고 이 선생님한테로 가데요. 아주 이른 새벽에, 가서 이 선생님 계신 방에 문을 딱 여니까 문을 여니까 그 어머니가 먼저 들어가시고 그 다음에 내가 들어갔는데 이 선생님 쳐다보니까 이 선생님도 저를 보셨어요. 보시니까 이 선생님 눈하고 내 눈하고 마주 부닥쳐버렸지요. 그런데 이 선생님 눈을 딱 볼 적에 그 눈에서 어디서 그런 것을 본적도 없고 생각도 못한 그런 환상을 봤거든요. 눈에서 빛이 반짝반짝 난거에요. 그런데 그 빛이 내 눈으로 비친 거예요. 그래서 그때 한번 보고는 다시 두 번도 못 보겠어요. 그 빛을, 어떻게 빛이 그냥 참 뭐라고 말로 형용할 수가 없어요. 그 빛이 그때 이 선생님 눈을 볼 때 그 빛이 너무 참 아름답고 너무 참 그래서 저도 모르게 이 선생님 앞에 가서 무릎을 꿇고 막 울었어요. 막 울었어요. 그러니까 이 선생님이 울지 말라고 울지 말라고 어디 가지 말고 여기서 삽시다. 여기서 삽시다. 그래서 여기는 어떠한 곳이 길래 살자고 하시는고? 말만 듣고 있는데 그래가지고 인제 그 방을, 옆에 방이 하나 있는데 그 방에 어린애들 환자들이 몇 사람 있습디다. 그래서 그 어린애들 환자들 있는데 가서 같이 저보고 자라고 그러더라고요. 잠이 와요? 안 오지, 거기 있다가 인제 아침에 식사시간이 되었으니까 가자고 그래요. 언니가 데리러 오셨더라고요. 어떤 언니인가 그때는 모르겠는데 들어오셔서 식사 시간에 갔어요. 가서 보니까 식당에는 사람들이 한 200명은 될 것 같아요. 사람들이 그 큰 식당에 하나 가득 앉았는데 그래서 저는 이제 왔다고 다른 방으로 인도하데요. 부엌을 지나서 그 방으로 들어가게 되었는데 부엌을 지나가면서 보니까 큰 가마솥이 있데요. 가마솥이 있는데 무슨 풀 같은 것을 끓여요. 그래서 제가 들어가면서 속으로만 이 집은 소가 얼마나 많아서 이렇게 이런 풀을 솥으로 하나 끓이는가 하고 들어가서 앉아있으니까 그것을 한 그릇 준거예요. 그것 먹으라고 아침밥이라 고 그런데 저도 모르게 눈물이 줄줄 흐르는 거예요. 마음으로 죽으려고 나온 사람이 그 죽 한 그릇을 두고 눈물을 빼느냐? 그러고는 있는데 그대로 차마 못 먹겠어요.
처음으로 본 음식이라 못 먹고 앉아있는데 거기서 처음에 금남 언니가 이야기 하시고 이 선생님이 그러셨나 봐요. 그것은 다른 사람한테서 말을 들어놔서 모르겠는데 춘일언니보고 이렇게 그때도 우울증이 완전히 낫지를 않았었어요. 이 사람을 좀 맡아서 잘 지도를 하라고 그런 것 같아요. 이 선생님이 춘일언니한테, 그렇지만 밤만 되면 저는 밖으로 나가는 거예요. 밖으로 나가는데 그때도 그때까지 죽고 싶은 마음이 안 없어져요. 죽고 싶은 마음이 한 2-3년 가더라고요. 그렇게, 그런데 얼른 이렇게 죽어지지 않는 것은 저지르지 못한 것은 춘일언니가 저를 자꾸 곁에다 앉혀놓고 찬송을 부르고 성경을 읽어주시고 이야기를 해주시고 그러시데요. 그런데 자살하는 것도 죄라고, 그 언니가 그 말씀을 자살하는 것도 죄라고 그러니까 자살하면 그만큼 대가를 받는다고 그러니까 자살하지 말고 생각을 다 버리고 예수 믿고 잘 살자고 자꾸 권면을 하고 그래서 참 하루하루 살다가 정이 들고 그래서 살았지요. 그래서 살았는데 한 1년 사니까 그 뒤로는 이제 저희들 또래가 들어가니까 저희들 또래가 23명 입디다. 그 반에서 한 1년 사니까 그 뒤로는 저도 무슨 책임을 주더 만요. 그때는 아무리 식구가 많아도 옷도 다 공동으로 입었어요. 옷도 공동으로 놓고 입었기 때문에 제가 그 옷을 맡으라고 그래서 제가 맡았어요. 빨래는 다 같이 하고 옷을 공동으로 가지고 오면 거기서 나눠주지요. 그중에서 많이 떨어져가지고 아주, 그런데 그 옷을 차마 누구를 줄 수도 없고 그런다고 해서 그 옷을 내가 옷을 맡은 이상 내가 입어야 맞을 것 같은데 차마 입을 수도 없더라고요. 입어지지가 않아요. 차마 입을 수가 없어요. 내가 죽으려고 하던 사람인데 그것하나를 못 하느냐 마음에 그런 소리가 나요. 그래요. 그때부터 그렇게 살았습니다.
‘이것은 동광원에 사신 것과는 다른 이야기인데요. 그러면 어머님 성함이랑 나중에 찾으셨어요?’
“어머니 성함도 못 찾고 그때는 어려 놔서 못 찾고, 그저 아버지에 대해서도 몰라요. 잊어버려서 모르고, 그저 어려서 들어보면 아버지 친구들이 아버지한테 일본말로 만 ‘하야시, 하야시’ 그러더라고요.”
‘그러면 성이 임(林) 씨였나요? 일본말로 하야시를 임(林) 씨라고 하거든요.’
‘모르겠어요.’
‘나중에라도 안 물어 보셨어요? 물어볼 방법이 없었어요?’
‘아버지에 대해서요? 그 이름을요? 모르겠어요, 나중에 아버지 친구한테 물어봤어요. 그랬더니 이 씨라고 하더라고요. 이 씨라고.
‘그러면 하야시는 임(林)이에요. 임(林).’
‘그러면 내 성이 이 씨면 그러면 이름은 한국말로 뭐냐고 했더니 그건 알아봐야 알지, 모르겠다고 그래요. 그렇게 일본말로는 이름을 알아도 한국말로는 모르니까 누가 물어보면.’
‘일본말로는 이름이 뭔데요?’
‘ 키쿠코’
‘그게 국자(菊子)에요.’
‘그런다고 하더라고요.’
‘왜? 그러냐하면 그때 원자폭탄으로 나가사키나 히로시마 그쪽에 있었던 것 같은데 그러면 그때는 그런 분들은 다 일본에서 보상을 했어요. 지금도 연세 드신 분들이 당신 부모님이 그때 그렇게 돌아가셨다고 하면 그 이름을 대면 일본은 그 호적등본을 그대로 갖고 있어서 정부가 그래서 그 나라에서 그 당시에 사셨는지 그 이름을 갖고 찾으면 그대로 보상을 하더라고요.’
‘교포도 그 당시에 추적을 해보면 다 날아가 버렸을 것인데 그 자료가 그거 한번 알아보십시다. 그러면 근거를 알 수가 있지 않아요?’
‘그러면 어머니는 어느 병원에 계시다가 돌아가셨는지? 어떻게 되었는지, 그런 자료들을,’
‘그런데 동광원 식구들은 그 족보 찾지 말라고 그랬지요? 성경에도, 동광원 수도자들은 그런 것은 관심이 없으셔요. 그런데 역사적인 자료로는, 사실은 그것이 무의미한 일은 아니니까, 지금 이야기 들어보면 임 씨지 않아요? 이 씨가 아니고 하야시가 임이라고.’
‘그러니까 제가 어려서 들어서 그것도 확실한지도 몰라요. 아버지 친구한테 물어보니까 이 씨다. 그러더라고요.’
‘친구 분은 같이 살았던 친구 분이에요? 또 다른 친구도 많았을 것 아니에요? 그 이야기 해준 친구 분이 의탁하고 계셨던 친구네 집 나올 때 친구도 있고?’
‘친구네 집에서 광주로 인제 어머니 수양어머니한테로 와버려서 모르지요. 그저 누구 알음으로 소식은 돌아가셨다는 말은 들었어도 생전 가보지도 않고 내가 그 친구 분에 대해서 오해가 조금 있었어요. 무슨 오해가 있었냐 하면 그러니까 그 친구 분 잘못이 아닌데 어떻게 해서라도 아버지 찾도록 해주면 할 텐데 그렇게 그야말로 송장이라도 찾도록 해주면 하는데 이렇게 나를 만들어 버렸다 하는 오해가 있었어요. 어려서, 그렇기 때문에 통 아버지 친구를 보려고 하지를 않았어요.’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나는 모르겠는데 그 여러 해를 줄여서 이야기 해주신 것 아니에요? 일본에서 나오실 때는 해방 전에 한 참 전쟁 중에 그때 열 살 때 나오셨다고 그랬지요?’
‘일본서 내가 2학년 까지 학교 다니다가’
‘그러니까 한 10살 되었을 것이고 친구한테 맡기고 아버지 가셔서 돌아가셨다는 이야기 듣고 그 친구 분 집에서 몇 년 정도 사셨어요? 맡겨진 집에서,’
‘내 짐작으로는 한 1년 밖에 안 살았어요.’
‘1년 그때는 시절이 어려운 때니까 수양어머니 집으로 오신 거예요? 그 이야기를 잘 몰라서,’
‘수양어머니 집에 올 때도 열다섯 살인가요?’
‘열 살 때 나오셨는데 열다섯 살이면 그 어간에는 어디 다른데서 사셨어요?’
‘아니 다른데서 안 살고 그 양 어머니가 어떻게 되느냐 하면 딸이 있는데 큰딸이 하나 있어요. 큰 딸이 하나 있는데 그 딸이 저희 아버지 친구 그 아버지 친구 집 큰집이 그 딸 시가집이거든요. 그런데 굉장히 부자 집이에요. 거기는 고흥이거든요. 고흥인데 그 시가집으로 유 씨에요. 그 시가집에서 조금 산 것 같아요. 육이오 때 거기서 살았어요.’
‘그럼 그 집에 사실 때는 몸종, 김준호 선생님이 몸종도 두고 사는 부자 집이 었나요?’
‘예.’
‘그러면 고흥에 사셨는데 일본에서 막 나와 가지고는 어디서 사셨어요?’
‘일본에서 나와 부산에서 아버지하고 갈라섰지요. 나는 그 친구 따라서 가라고 하고.’
‘친구 따라서 어디로 가셨어요?’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어요. 동네 이름을 몰라요. 따라가기만 했지, 농촌이더라고요. 농촌인데 어딘지 몰라요. 아마 거기가 고흥하고 가까운 것 같아요. 아마 내 생각으로는 그 친구네 집에 가려면 벌교에 가서 내려서 어디 산 중에 있는 집으로 들어갑디다.’
‘고흥은 벌교에서 들어가요.’
‘벌교에서 내려서 어디 산중으로 들어가요.’
‘이제 조금 궁금한 게 이해가 되네요. 그러니까 한 열여덟 살에 시집보내려고 하니까 죽으려고 나오신 거예요?’
‘예.’
‘그러니까 7,8년을 사신 거네요. 친구 분 집에서 1년 사시고 그 다음에 수양어머니 따님이 시집이 아버님하고 친구 그 집에 사셨고 그러면 광주는 어떻게 오신 거예요?’
‘그러니까 광주는 수양어머니가 원래 광주분이에요. 딸이 고흥으로 시집을 갔지요.’
‘그러면 고흥에서 사셨다고 안 그랬어요? 광주에 사시고, 그 이야기가 정리가 안 되어서요.’
‘친구 분한테 맡겼는데 고흥에 갔다가 광주에 가신거지요? 그렇지요?’
‘예.’
‘역사적인, 부모님 역사라던가 모르시지 않아요? 세상일이니까 믿음에 관계된 것 아니니까 그런 것은 있어도 없어도, 또 알아도 몰라도 상관이 없는데 지금 동광원 이야기들이 있으니까 그 역사 이야기를 만들어 놓으려면 그런 것들이 필요하니까 물어보는 거예요. 최 권사님이 일본에서 한 20년 사시면서 보셨대요. 전후에 그런 보상 처음에는 그런 것 저런 것도 없었지요. 그 나라도 어려웠고 그런데 지금은 그런 것 저런 것 그 나라도 다 밝혀지고 그러니까 그런 것을 아셔서 일본에는 그런 기록물이 다 있다는 거예요.’
‘어디 시골 경상도 어디에서 징병이 돼서 어느 군대에 가서 어느 전투에 가서 그 사람이 죽었다는 걸 다 가지고 있어요. 그러니까 여기에서 연락을 못 받은 사람이 우리 아버지가 부산에 있다가 징용 당해서 필리핀에 가서 있다가 죽었다. 그러면 가서 물어보면 네 아버지는 필리핀 어느 전투에서 죽었다는 그런 것 갖고 있어요. 그 사람들이 너무 기록을 다 갖고 있는 사람들이라서 그 전쟁 통에 그것을 다 가지고 있어요. 그러니까 한국 사람들이 자기 부모를 못 찾고 있는 것을 그 사람들은 갖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더군다나 원폭 투하된 그 당시에 그 동네에서 사업을 하셨다고 그러면 그 사업 어느 사업체인데 그 사장이 누군데 그것이 어떻게 된 것을 가지고 있을 거라는 이야기에요.’
‘그 사업을 한 것은 무슨 사업인지 몰라요. 모르는데 아버지께서 내가 사는 집에 아무도 없으니까 나 혼자니까 가끔 나를 데리고 다녔거든요. 데리고 어느 집에다 맡겨놓고 당신은 사업으로 가시고 어떤 때는 데리고도 가시고 그런데 어디 땅속으로 들어가면 기계도 있고 어려서 봤으니까 기계도 있고 모두 그럽디다. 그런데서 일을 하시는가? 그런 걸 봤어요.’
‘군대 관련된 공장을 하셨나요?’
‘전시니까 그렇게도 추측을 할 수도 있겠지요. 그런데 지금 말씀 하신 것은 유학 가셔서 두 분이 만나서 결혼을 하셨다고 하면 한국에서도 유학을 보낼 정도면 외가나 친가나 다 그러니까 잘 사는 분들이었고, 그러니까 사업도 전시에 징용 당하지 않고 사업할 수 있었으니까 그 당시야 군수산업 했다고 하면 보호가 되는 것이고 그 정도 이야기 하고 또 그러면 그 이후에 광주에서 지내시다가, 지내실 때는 옷 그 일을 맡으셨고 그 다음에 광주에서 어디어디 옮겨 다니신 이야기 해주세요. 기억나시는 대로, 그 이후에 아까 그 이후의 이야기를,’
‘광주에서 옮겨 다닌 것은 동광원에 들어와서 광주에서 바로 동광원에 들어와 가지고 동광원에 살다가 처음에는 몇 년 동안 동광원 안에서 살았지요. 그 뒤로는 이 선생님이 어디로 가서 살아라. 그러면 그저 그때로서는 죽으라면 죽는 시늉 까지 할 그런 순종심이 있어야 되요. 그런 순종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어디 가서 살아라. 그러면 예, 그리고 가서 살고 또 거기서 어느 정도 살만큼 되면 또 나오너라. 그러면 나오고 또 어디 가서 살아라. 그러면 살고 그러기 때문에 참 많이 돌아다니면서 산 것 같아요. 처음에는 광주에서 살다가 저 지산동이라고 거기 이 선생님 이모님이 계시거든요. 그런데 이 선생님 이모님한테 가서 이렇게 일도 해주고 시중도 들고 거기 가서 좀 살라고 그러더라고요. 그래가지고 저만 간 것이 아니라 제 또래하고 저하고 그때 남자아기들 이만 씩 한 애들이 여러 명이 있었어요. 한 열 명 넘는가? 여러 명이 있었는데 그 애들을 거기로 보내면서 거기서 살라고 그러시더라고요. 그래서 거기서 살고 한 1년 살고 그 다음에 제 또래가 거기서 바람이 났어요. 남자를 사귄 것이에요. 그러니까 전혀 저는 몰랐었거든요. 전혀 몰랐어요. 그저 날마다 일만하고 살았기 때문에 한번은 수레기 어머니가 갑자기 오셨더라고요. 그러자 그 전에 애기들은 다 데려갔어요. 데려가고 그 친구하고 나하고 또 할머니인가 하고 이 선생님 이모님하고 그렇게 사는데 수레기 어머니가 갑자기 오셔서 저는 그 오신다는 소식도 모르고 오신다는 말도 안 들었는데 마당에서 무슨 일을 보고 있는데 갑자기 수레기 어머니가 들어오셔 들어오셔서는 내 팔목을 꽉 잡더니 방에도 못 들어가게 손수건 하나도 못 꺼내게 그대로 막 강제로 가자고 끌고 나가는 거예요. 그래서 어머니 나 소지품이라고 가지고 가야지, 아니 다 소용없다고 그러면서 나를 막 끌고 가는 거예요. 그래서 이상하다. 참 이상하다. 그리고는 끌고 가고 그때 지산동에서 살 때인데 여기 양림 YMCA회관에 살다가 지산동으로 이사 갔거든요. 거기서 사는데 끌고 와서는 이 선생님한테 데리고 가데요. 그래가지고 이 선생님이 무슨 말씀을 하신지도 모르겠어요. 그저 왔느냐 고만 하시지, 그대로 그냥 그렇게 살았는데 뭐라고 하시냐 하면 그 남자분이 제 친구 이름이 순덕이에요. 순덕, 그 남자분이 순덕이를 꼬인 것이 아니라 국자 양을 꼬이려고 했는데 국자양이 안 넘어올 것 같으니까 순덕이를 꼬인 것이다. 그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나는 그 소리가 무슨 소린가 했어요. 그 소리도 하고는 그냥 물어보지도 못하고 그냥 듣고만 나왔어요. 나왔는데 나와서 살다가 몇 년 가니까 순덕이가 그 남자하고 결혼 했다는 말이 있어요. 수레기 어머니는 어떻게 내가 거기서 그렇게 사는 줄 알고 오셔가지고 말도 없이 그냥 무조건 가자고 끌고 갔는가? 그걸 좀 궁금합디다. 궁금해서 언제 한번 물어보니까 이 선생님이 가라고 그러셨다는 거예요. 이 선생님이 가서 빨리 국자 양 데리고 나오라고 그러셨다는 거예요. 누가 뭐 전해주지도 어째도 안했는데도, 빨리 데리고 나오라고 그래서는 아 그러셨구나. 그러고 나왔는데 그 뒤로도 순덕이가 인제 그 남자하고 결혼하고 살면서 광주 우리가 지금 귀일원이 있는 자리, 거기에 집에 또 있어서 거기에 우리가 살게 되어서 그 감나무 밭 있는데 그 동산을 땅을 벌기 위해서 거기 와서 사는데 그때 순덕이라는 사람이 그 남자하고 남자는 안 오고 순덕이가 와서 나한테 뭐라고 하는가 하면 남자가 밤낮 싸운다는 것이야. 기왕에 그렇게 갔으니까 잘 살지 왜 싸우느냐? 그러니까 싸우면서 그 남자가 뭐라고 그러는 줄 아느냐고 내가 너를 좋아한 줄 아냐? 내가 국자를 좋아했지, 그런다는 거예요. 국자를 좋아하지 내가 너를 좋아한 줄 아냐? 그러니까 가서 한마디라도 해주라는 거예요. 나보고 그래서 나는 절대 못한다. 그리고 이 선생님 허락 없이는 그런데 못 간다. 허락 없이는 못가고 절대 나는 그런 말하기 싫다. 그러고 안 가버렸어요. 안가고 나중에 소식을 알아보니까 그 남자는 그 순덕이는 인제 제주도로 도망가 버렸다고 합디다. 제주도로 도망가 버리고 그 남자는 고향에 가서 혼자 살다가 뭐 감옥에도 갔다 나오고 뭐 어쨌다고 아마 자살한 것 같다고 그래요. 그렇게 되어버렸어요. 그러니까 그 뒤로는 제가 기도가 나오더라고요. 내가 큰 죄인이구나. 무엇을 보고 나를 저기해 가지고 그렇게 여자나 남자나 그렇게 못살게 되고 그렇게 되었는가 싶어서 참 회개할 마음을 주시더라고요. 기도가 다 나오고 참 안 됐습디다. 마음이, 그래도 나는 요만큼 마음이 없는데 어쩔 거예요? 그대로, 그대로 살았어요.’
‘그 다음에 계명산으로 가셨나요?’
‘그래가지고 이 선생님이 저보고 그때 광주 거기가 어디지요? 농대 있는 쪽이 어디지요? 제매라는 데가 동광원 집이 또 있었어요. 그 동광원 집은 어떻게 생겼냐하면 백 장로님 아시지요? 백 장로님이 거기서 어머니하고 사시면서 그 집을 백 장로님이 손수 어머니하고 지어가지고 살다가 동광원 식구들한테 기부한다고 싹 바쳐버렸어요. 바쳐버리고 당신들은 당신들 있는 데로 나가고 또 집을 짓고 살고 그러니까 거기서 살면서 그 땅까지 그래서 이 선생님이 한번은 저를 오라고 하시더니 가니까 거기 가서 자립하고 살아라. 논도 있고 밭도 있고 집도 있으니까 자리 잡고 살라고 몇 사람을 정해 주데요. 그래서 제가 생전 선생님 말씀하시면 예 그러고 가야지. 그러지를 못하거든요. 그래서 마음으로 내가 농사를 손수 안 지어봤는데 어떻게 농사를 지을까? 걱정이 되어서 선생님 저 농사지을 줄 몰라요. 가서 하면 다 하고 또 가르쳐 주는 사람도 있고 그러니까 가서 해보라고 그래서 할 수없이 닥쳐보자. 그러고는 갔어요. 가서는 일 년 먹을 양식만 딱 정해주시고는 그 양식 먹는 동안에 농사지어서 먹고 그 일 년 동안 먹던 것도 농사지어서 갚아라. 그러시더라고요. 그래서 그렇게 했어요. 그렇게 하니까 조금이라도 빚을 덜 지려고 순 그 비지 있지 않아요? 두부하고 건더기 두부를 사다가 두부를 쪄서 그 비지만 먹고 살았어요. 그러니까 지금도 아무리 두부가 좋고 비지가 좋다고 해도 지금도 먹기가 싫어요. 옛날생각이 나서 먹기가 싫어요. 그때 어떻게 그것만 먹고 살았던지, 조금이라도 빚을 덜 지려고 그렇게 살다가 거기서 학생들이 지금으로 보자면 행자 있지 않아요? 행자보다 조금 큰 애들, 행자가 제일 어렸어요. 그 또래를 데리고 와서 데리고 있었지요. 데리고 있다가 그 애들 데리고 정 원장님이 오셔서 서울로 가거라. 그러시데요. 서울도 처음으로 가지만 안가고 싶어서 안가고 싶었는데 그래도 순종하느라고 갔지요. 서울 가서 아현동에서 원장님이 거기서 교편을 잡고 계시 더만, 거기에 가서 며칠 있다가 계명산으로 들어가자고 그래서 계명산에 안 들어가고 싶더라고요. 그래도 들어가자. 순종하고 들어가자 하고 가니까 그러자 그 학생들은 먼저 보냈어요. 그러니까 왜 보모는 안 오냐? 왜 학생들만 보내느냐? 빨리 보모랑 들어와라. 한나 어머니랑 혜옥씨 어머니랑 그렇게 말씀을 하시고 그래서 그러면 들어가야지 하고 들어갈 때는 저 혼자 들어갔어요. 들어가니까 그때만 해도 계명산이 지금 현재 사는 집이 있는 곳이 나무가 어떻게 큰 나무들이 많은지 하늘이 안보일정도로 우거져있어요. 그 속에 여기 저기 막을 쳐놓고 삽디다. 그래서 내가 들어가면서 제가 생각하기를 아 이런 산골에 내가 들어와서 살면 참 내가 갈멜 수녀원에 들어간다. 그런 마음으로 살아야겠다. 아무도 안 만나고 그래야 쓰겠다. 그런 마음으로 들어가 살았어요. 그런 마음으로 들어가서 살면서 식구도 많아지고 그러니까 그 큰 나무들을 베고 어쩌고 해가지고 논을 만들고 밭을 만들고 집을 제대로 조금 짓고 그러고 살았지요. 그리고 8년을 살고 보니까 몸이 너무 약해져서 이 선생님도 거기 오셔서 돌아가시는 것 다 보고 몸이 너무 약해져 가지고 있는데 정 원장님이 한번 오셨어요. 정 원장님이 보시고 몸이 너무 약하니까 광주로 내려가자고 그럽디다. 그래서는 차마 어머니들한테는 나 광주로 가겠다고 그 말을 못하겠어요. 말을 안 했어요. 못했지요. 그다음에는 정 원장님이 내려 가셔서 춘일 언니를 딱 보냈습디다. 춘일 언니를 보내가지고 팔목을 꽉 붙잡고 광주로 가자고 몸이 이렇게 약해가지고 쓰러져 죽으면 여기서 살아 뭐하겠냐고 막 가자고 막 끌고 갑디다. 끌고 가니까 혜옥 씨 어머니가 눈물바람으로 우시더라고. 그러니까 아이고 저 아이, 어머니 우시는 것 보고는 또 못가겠네. 그러고는 휙 끌고 나가더라고요. 아무것도 소지품도 못가지고 그냥 몸 그대로 끌고 나가서 그대로 내려왔어요. 그대로 내려와 가지고는 지금까지 안 갔지요.’
‘그래가지고 광주에서 얼마 계시다가 진도로 가신 거요?’
‘그래서 서울 어머니가 많이 편찮으시고 곧 돌아가시겠다고 해서 갔어요. 가서는 어머니 나 참 잘못했습니다. 그러니까 다 용서하시고 편안한 마음으로 가십시오. 그러니까 그러신다고 그러면서 나도 너무 고생을 많이 해서 그런다고 고생 많이 했다고 그러면서 공순 언니보고 국자 양 돈 좀 주라고 그러니까 공순 언니가 돈을 내러 가려고 그래서 어머니 절대 그런 소리 하지 마시오. 내가 돈 바라고 여기 산 것도 아니고 그런다면 내가 내 수고 값 주라고 한 것밖에 안된다고 나 절대 그런 말 하시지 말라고 내가 언제 돈 쓰더냐고 하시지 말라고 그러고는 그냥 와서 얼마 있다가 그런데 누워 계셔서 아파서 누워 계신데도 인제 이렇게 다른 사람 일한 것을 간섭을 좀 하시더라고 그래서 어머니, 어머니 성할 때는 참 책임이 되시니까 간섭을 하고 그러시지만 지금은 인제 이렇게 아파서 일어나지도 못하는 양반이 무슨 간섭을 하시냐고 다 잊어버리고 편안히 계시다가 가시라고 그리고는 그때 보고는 그냥 광주로 내려왔습니다.’
‘돌아가실 무렵이에요?’
‘예.’
‘그러니까 계명산에 사시다가 오셨다가 한 번도 안가시다가 돌아가실 무렵에 혜옥 씨 어머님 그때 올라갔다가 내려 오셨다는 이야기이고, 그때에는 그러면 남원에 계실 때 인 것 같은데?’
‘그때 광주에 있었어요.’
‘그때 광주에 있었어요? 진도에 계시다가 남원에 계시다가 광주에 계시다가?’
‘광주에 있다가 춘일 언니가 몸이 좀, 그 전에는 남원에 안 있었어요.’
‘아니 남원으로 이사 가셨어요. 제가 진도에 갈 때.’
‘진도에서 남원에서 남원으로는,’
‘며칠 안 계셨어도 남원으로 가신다고 갔어요, 이삿짐 싣고.’
‘저 진도에서 살다가 남원으로 갔지요. 광주에 있을 때.’
‘이야기가 지금 이희옥 씨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는 지금 어디에 계실 때냐 그 말이에요.’
‘광주에 있을 때예요.’
‘남원에 계시다가, 광주에 계시다가 ,이리(화순)로 오셨지요?’
‘예, 광주에 있다가 광주에서 춘일 언니가 먼저 진도로 가셨거든요. 그래가지고 저를 그리 오라고 연락이 왔어요. 인제 정 원장님한테 연락을 한 것 같습디다. 그러니까 정 원장님이 저더러 진도로 가라고 그러시더라고 그래서 갔어요. 광주서 살다가 광주서 짜잘한(어린) 애기들 데리고 살다가 그래서 진도로 갔어요. 진도 가서 8년 살았는지...’
‘그런데 희옥씨 어머니 돌아가신 것은 제가 생각할 때는 최근으로 생각 되는데, 우리 진도에 내려온 이후에 돌아가셨지요. 그전에는 안돌아가셨어요.’
‘그러니까 진도에 내려가 살다가 다시 올라가 가지고 남원에서 살면서 아마 어머니한테 갔을 거예요.’
‘그러니까 제가 이야기가 연결이 안 되어서 자꾸 그러는 거예요. 계명산에서 살다가 내려오셨지 않아요? 광주로, 광주로 내려오셨으면 지금 혜옥씨 어머니 돌아가신 것은 그 무렵이 아니에요. 훨씬 뒤입니다. 내가 생각할 때, 광주로 오셔가지고 춘일 씨 따라가지고 정 원장님하고 광주로 오셔가지고 광주에서 얼마 사셨어요?’
‘광주서는 얼마 안 살았어요.’
‘안사시고 광주에서는 진도로 가셨지요?’
‘예, 그랬지요.’
‘그러면 진도에 가서 8년 사시고 그 다음에 우리가 들어갈 때 남원으로 오셨지요?’
‘그랬지요.’
‘그래서 남원에서 얼마 안사시고 그러면 이리로 오신거지요? 광주로 나갔다가 오신 것이 아니라,’
‘남원에서 또 광주로 가가지고 광주 남반에서 또 살았어요. 남반 수종 꾼이 없으니까 저보고 가서 수종들 고 있어라. 환자들,’
‘그러니까 그러면 춘일 씨는 그때 어디 계시고요?’
‘그때 진도에서 남원으로 가셨다가 남원에서 여기로 오셨지요. 도암,’
‘같이 안 오시고 남반에 계시다가 여기로 오셨네요.’
‘예, 5년 남반에 가서 있다가 여기로 왔지요.’
‘또 남반에도 5년, 그렇게 기록이 연결이 되니까 7-8년 그러면 이야기가 다 정리되네요.
‘김 선생님이 오셔서 저보고 남반에 살 때 오셔서 너무 수고를 많이 하셨으니까 이제는 좀 쉬시지요. 그러니까 인제 저는 무등산에 가서 좀 쉬게 될지 지지리에 가서 좀 쉬게 되려나 그랬었거든요. 그런데 춘일 언니가 데리러 왔더라고요. 춘일 언니가 데리러 와서 도암으로 가자고 그러데요. 도암은 뻔할 뻔자인데 옛날부터는 고생스러운 곳인데 그래서 안가고 싶 길래 도암 나 안 간다고, 나 지지리로 가든지 무등산으로 가든지 쉴 거라고 그러니까 춘일 언니가 당신 말을 안 들으니까 김 선생님 한 테 무등산에 계신 김 선생님한테 가시는 거야. 그러니까 김 선생님 말씀이라면 순종할 것이라고 김 선생님한테 말씀을 다 하셨어요, 다 하니까 갑자기 저보고 무등산에서 오라고 연락이 와서 갔어요. 가니까 춘일 언니가 딱 계시더라고요. 그러니까 어째 그러냐고 하니까 모르겠다고 나도 모르겠다고 김 선생님께 가보라고 그러더라고요. 그래서는 김 선생님 한 테 가니까 그냥 도암으로 가서 좀 쉬시지요. 그러더라고요. 그래서는 언니가 또 일렀구나 생각했지요.’
‘지지리로 가셨으면 소화 수녀님이 되셨겠네요. 지금 소화 자매원 수녀님들은 장수 지지리 하고 무등원 쪽으로는 다 수녀들이 되었지요. 지금 연세가 공순 언니보다는 아래지요? 지금 몇 년생이세요?’
‘저요, 저 지금 몇 년생인 것은 확실히 모르겠고 지금 올해 80 들어가요. 인제.’
‘그래요? 더 많으신 줄 알았는데, 여든 되신다고 요?’
‘그러니까 그때 수녀님들이 여러 번 우리 집에 오셨었거든요. 다른, 그때 한창 수녀 이렇게 만들라고 할 적에 오셨는데 다른 수도원에서 원장님 오셨어요. 저보고 그래요. 지금이라도 오라고 그러면 두말도 않고 그냥 수녀 복을 입혀준다. 두말 않고 입혀줄 거니까 지금이라도 그리로 오라. 그런데 참 지금은 늦었다 싶고,’
‘가셨어도 거기도 힘들어요.’
‘예, 그러기도 하고.
‘이 양반이 목수 일을 배우셔 가지고 어지간한 일을 다 하셔요.’
‘목수 일을 계명산에 살적에 오 장로님이 거기서 사셨거든요. 그러니까 오 장로님이 저희들을 데리고 우리 식구들 중에서 목수 어지간한 것은 손수 고치고 어찌하고 살게 혼자 살려면 여자들끼리 살려면 그런 사람이 있어야 한다. 두 사람 뽑아 주라고 그랬대요. 그래서 한나 어머니가 저하고 옥순 언니 둘을 뽑아서 다니라고 하더라고요. 그래가지고 다니면서 조금 조금 배웠어요.’
‘더 궁금하신 것 있어요? 그 다음에는 내가 보충하면 되는데 여기에서는 지금 기차타고 대천 군산으로 가야 하거든요. 익산으로 가서,’
‘송정리역으로 가는 것이 제일 빠르지요.’
‘송정리역으로 가십시다. 이 양반은 대답은 하셨지만 사무엘 장로님은 안 오실 모양이네요.’
‘글쎄요. 그런가 봐요. 대답은 하셨지만 이야기를 안 하시는 분이라, 그분은 말씀을 잘 안하시는 분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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