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동 무 이야기

새덕장에 무청 널기 : 이현필선생 소평전

mamuli0 2023. 12. 28. 11:09

 농장 북향에  새덕장을 여름에 설치했는데 처음으로 무청을 설계와 시공을 한 큰아들이 와서 지도해 주고 있다.

 <이현필 선생 소평전>을 남원 동광원에서 가져왔는데 저자를 확실히 몰라 밝히지 못해 죄송합니다.

 

이현필선생 소평전

 

이현필 생애 해 간추림

1913년( 1세) 2월3일(음1912년 12월 28일) 출생

1018년( 6세) 서당에서 학어집 추구 등 한문교육

1923년(11세) 소학교 입학

1928년(16세) 소학교 5년 중퇴

1929년(17세) 영산포로 이사

1930년(18세) 영산포의 관파 교회 출석

1932년(20세) 광주농업실수학교, 확장주일학교, 독신전도단

1933년(21세) 신안 압해도 교사

1934년(22세) 서울Y 영어학교

1935년(23세) 중촌 귀향 사립학교 교사, 이세종선생을 만남

1937년(25세) 신안교회 시무

1938년(26세) 결혼, 귀향 농촌활동

1940년(28세) 부인의 사산과 수술

1941년(29세) 화학산 청소골 수도

1943년(31세) 남원 삼일목공소(오북환)방문 강남순, 지당어머니, 밤실어머니

1944년(32세) 남원 서리내 갈보리, 화순 우치리

1945년(33세) 해방, 광주방문

1947년(35세) 지리산 갈보리 소녀반 제자훈련

1948년(36세) 남원 공동체 광주진출, 청소골 고아원, 전국순회전도 여순사건, 능곡

1950년(38세) 동광원 고아원운영(정인세원장), 6.25와 화학산 피란생활(유화례)

1954년(42세) 동광원 폐쇄

1955년(43세) 광주신안교회 시무, 백춘성, 김준

1956년(44세) 육식금지 복약금지의 파계 - 제중원 입원(카딩톤 원장)

1958년(46세) 송등원 설립과 운영

1961년(49세) 수도단체 총회 조직, 귀일운동

1964년(52세) 계명산에서 소천

 

 

1.1 출생과 성장

이현필 선생은 1913년 2월 3일(음력1912년 12월 28일) 전남 화순군 도암면 권동부락(용하리)에서 출생했다. 아버지 이승로와 어머니는 김오산 사이에서 태어난 막내아들이었다. 여섯 살 무렵 동네 서당에서 학어집 추구 명심보감 등 한문을 배웠다. 집안일을 돕다가 열 살 무렵에 천태의숙이라는 사립학교가 문을 열어 입학했다가 나중에 공립학교로 전환 되었으나 졸업은 하지 모하고 5학년 2학기에 그만 두었다. 가세가 기울어 학교에 학비를 납부하기 힘들었던 것이다.

공립학교로 전환되면서 교장은 일본인이었다. 그래도 이현필의 기억에 그 일본인 교장은 교육적으로 훌륭한 분이었다. 일본인 학생과 조선인 학생을 차별하지 않고 평등하게 대하려 했던 좋은 인상으로 남았던 것이다. 이현필은 공부를 잘했기에 선생님들에게 칭찬을 받고 인정을 받으며 행복하게 지냈던 것 같다. 그렇지만 가난하여 공부를 할 수 없다는 사실에 실의에 빠졌지만 어떻게든 돈을 벌어서 학업을 계속해야겠다는 결심을 하였다.

학교를 그만 두고 잠시 형님과 집안일을 돕다가 이내 어머니와 함께 나주로 이사를 하였다. 이현필이 아버지에 대하여 언급한 것은 찾아보기 어려운데 아마도 당신의 일반적인 아버지들처럼 유교적인 가부장적 분위기에서 자녀들에 대해 무심하거나 방임하던 태도를 지니지 않았을까 추측된다. 이에 비하여 어머니는 자녀들을 위하여 밤낮으로 고생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고생하는 노모를 모시고 돌보려면 결혼을 해야 되지 않을까 염려할 만큼 어머니에 대한 효심은 극진하였다. 형님을 고향에 두고 형님대신에 어머니를 모시고 나주 영산포로 가서 여러 허드렛일을 하면서 지냈다. 닭장사를 해보기도 하고 일본인 급사로 들어가 심부름도 해보고 여러 일을 했지만 돈을 버는 일이 쉽지 않았다. 세상 사람들은 너무나도 거짓에 익숙하고 온갖 속임수로 살고 있었다. 마음이 순수하였던 이현필에게 세상에 적응한다는 게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이현필은 영산포에서 처음으로 교회를 알게 되었다. 어느 날 사람들이 몰려가기에 무슨 구경이 있나 하고 찾아가보니 무교회로 알려진 내촌의 영향을 받은 관파라는 사람이 운영하는 교회의 부흥회였다. 설교를 들어보니 보통 지식인이 아니라 무척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이었다. 내촌감삼의 특징이 성경을 원어로 공부하며 깊은 지식으로 예수의 복음을 이해하고 그 복음으로 나라와 인류를 구원하자는 것이다. 그래서 아마도 관파가 운영하는 교회의 말씀도 굉장히 지적인 설교로 이뤄졌을 것이다.

그래서 이현필은 관파교회에서 첫 충격을 받았다. 첫째는 저렇게 학문과 지적 수준이 높은 사람도 종교를 갖는구나 하는 점이었다. 그동안 이현필의 생각으로 종교는 지적 수준이 모자란 사람들을 미혹하고 착취하는 것으로 여겼던 것이다. 학교에 들어가 현대 학문을 배우면서 종교가 미신이라는 것을 배웠던 것이다. 당시에 시골 마을에서 병이 나면 무당을 불러서 굿을 하곤 하였는데 무당의 굿으로 병이 낫는다는 것은 미신이라고 배웠다. 또 당시 도암 중촌에는 운주사라는 큰 절이 있어서 많은 승려들의 왕래가 있었다. 그래서 중들이 모이는 시장이라 하여 중촌이 된 것이다. 중촌에서 중들이 필요한 물품을 사고파는 시장이 열린 것이다. 유교집안에서 태어난 이현필에게 불교는 미신에 불과하였다. 조선왕조 5백년 내내 불교를 박해하던 전통이 굳어졌던 당시 스님은 거지와 다름없는 중이요 하층민으로 멸시를 받고 있었다.

둘째는 내촌이 교회를 운영하면서 돈벌이를 목적으로 하지 않는 것이었다. 내촌은 대서소를 하면서 번 돈을 가지고 교회를 운영하고 있었다. 물론 일요 예배에서 사람들의 헌금을 받았다. 일요예배를 보면서 중간에 잠자리채 같은 주머니에 헌금을 넣어야 했다. 이현필은 처음 당하는 생소한 일이요 돈이 없었던 터라 무척 당황스러웠다. 공개적으로 헌금을 요구하는 것 같아 내심 불편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내촌처럼 학식이 많은 사람이 자기의 돈을 들여서 교회를 운영한다는 사실을 알고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이렇듯 처음 출석한 관파교회의 영향은 이현필 마음에 깊이 각인되어 남게 되었다.

기독교를 접하고 새벽마다 참석하면서 그 목적이 처음에는 인격과 학문을 넓히고자 하는 것이었다. 차츰 기독교 신앙에 익숙해질 무렵 다른 사람의 전도로 장로교회에 다니고 있었는데, 광주에서 사경회가 열렸다. 광주로 가서 사경회에 참석하면서 여러 사람들을 알게 되었다.

 

 

1.2 방황하던 청년시절

어느덧 이현필은 20세가 되었고 그 때가 1932년 무렵으로 일제의 강포는 점점 심해지고 조선의 사회와 문화 풍속은 더욱 피폐해지고 있었다. 당시 조혼의 풍습이 있어서 15세만 넘으면 여자들은 결혼하는 시기였다. 청년 이현필에게도 여기저기서 혼담이 왔다. 이현필은 결혼보다도 공부에 더 관심이 많았다. 어떻게 하면 좀더 공부를 계속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밤낮 가득하였다. 그런데 어느 처녀에게 혼담이 와서 그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집안으로 미뤘더니 집에서 승낙이 이뤄져 양가 집안이 만나게 되었다. 뜻하지 않게 맞선 자리가 이뤄지자 이현필은 고민하다가 신앙의 핑계를 대고 결혼을 미루게 된다. 즉 처녀가 신앙이 없으니 우선 이일성경학교에 들어가고 자기는 농업실수학교에 들어가 공부를 마치고 결혼하자는 제안이었다. 이 제안에 따라 처녀는 이일성경학교에 들어가고 이현필은 농업실수학교에 들어갔다. 그러나 그 처녀는 이내 학교를 그만 두고 다른 곳으로 시집을 가고 말았다.

농업실수학교는 구한말에 제도화된 교육기관으로 나중에 조선총독부가 각 도에 공립실업학교와 간이실업학교로 나눠 관리하였다. 2년제인 실업학교에서 가르치는 과목은 농작물과 토양, 산림, 양잠을 비롯 축산과 측량 등 기술과목과 수신, 체육, 일본어, 한문, 조선어, 경제 법률, 그리고 수학 물리 화학 생물 등 거의 모든 학문을 망라하는 교육이었다.

농업실수학교에 들어간 이현필은 많은 친구를 알게 된다.

독신전도단을 창설하였던 강순명목사가 광주로 와서 농업실수학교의 교사로 활동하며 독신전도단을 재조직하여 활동하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이현필도 또한 독신전도단의 활동에 참여하게 되었다.

본래 독신전도단은 1928년 7월에 전주지역에서 설립되었는데 창립위원으로 강순명 배은희목사 등이 주도하고 단원으로 임완식, 문남칠, 이춘식, 최동훈, 백용기, 윤남하, 이남철 등의 남자 단원과 임영자, 정순영, 백신애, 이준례 등의 여자 단원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강순명은 대원을 이끌고 익산군 춘포면으로 가서 교회를 세우고 활동하였지만 많은 이들이 이들의 활동에 주목하고 칭찬을 하자 전북노회에서 이단성의 시비를 걸어 2년여 만에 중단되고 말았다.

농업실수학교는 에비슨(Gordon W. Avison) 백운동에 세운 농업학교로서 전남일대의 교회에서 일하는 지도자들을 초청하여 양계, 양잠, 양돈과 더불어 소와 염소 사육도 가르쳤다. 이렇게 농촌의 부흥을 위하여 농업실수학교에서 교사로 일하기 시작한 강순명은 1932년에 광주에서 독신전도단을 재조직하였다. 광주 독신전도단의 단원은 문남칠을 훈련단장으로 하고 이준묵, 윤남하, 고영노, 김석진, 이현필, 서화식, 박율룡, 문학영, 이남철, 최요섭, 성왕(), 이성일, 김영환, 조선구, 박철웅, 이현필, 차남진, 여성 단원으로는 정봉은, 이정옥... 20으로 이뤄져 있었다. 그러나 광주의 운동도 또한 여의치 않았으며 곧바로 기성 교단의 반대에 부딪히게 되었다.

이듬해 농업실수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수업료를 요구하자 돈이 없던 이현필은 학교를 그만두고 신안의 압해도의 교사로 떠나게 되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다시 서울로 올라가 YMCA 영어반에 들어가 생활하였다. 서울에서는 김현봉목사가 시무하던 신촌의 아현동 교회를 다녔던 듯하다. 서울에서 고학하는 생활은 너무 힘들었다. 그런 와중에 또 혼담이 들어왔지만 결혼할 준비가 되지 않았기에 집안의 핑계를 대고 물러나서 이내 고향으로 낙향하게 되었다.

 

 

1.3 새로운 스승을 만나다

1935년 무렵 고향에 돌아온 이현필은 교사로 활동하기 위해 이곳저곳을 알아보았으나 당시 농촌은 피폐하여 자녀들을 학교에 보낼만큼의 여유가 별로 없었다. 그리고 부모들이 자녀들의 신식 교육에 대해서도 별로 관심이 없었다. 광주에서 알게 된 강순명목사는 1898년생으로 이현필보다 15살이나 어른이었다. 강순명목사도 1934년에 광주에서 독신전도단 활동을 접고 서울로 올라가 협성신학을 다니다 평양신학교에 편입하였다. 강순명은 방학이면 광주로 내려와 지냈는데 1935년 여름방학에는 특별히 화순의 이세종 산막에서 집회를 갖게 되었다. 이때 강순명이 윤남하 등에서 집회에 참석할 것을 부탁하였는데 이미 고향에 내려와 있던 이현필도 그 모임에 당연히 참석하였을 것이다.

다시 말하여 이현필이 이공 이세종을 만나게 된 때는 서울에서 내려와 고향에서 지내던 중이었으며 이때 이공을 처음 만나게 된 것이다. 이현필은 이공 이세종선생을 처음 만날 때 그다지 호감을 갖지 않았다. 이현필은 그래도 초등학교를 다니고 농업실수학교를 다녔으며 전도사와 교사로서 여기저기 활동 경험도 이미 많았던 터였다. 서울에 가서 영어를 공부할 만큼 학구열이 크고 견문지식을 널리 쌓았던 당시로서는 매우 앞선 지식인이 되었다. 학식과 견문이 많은 이현필이 이공을 볼 때 얼마나 볼품도 없고 배움도 없는 초라한 시골 노인으로 보았을 것인가. 아마 그 노인에게 배울만한 게 뭐가 있을까 생각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이공을 만나면 만날수록 이현필은 알 수 없는 그의 매력에 빠지게 되었다. 갈수록 성령의 은혜로 충만하던 이공의 감화력과 지혜와 명철한 통찰력은 꽃향기처럼 소리 없이 멀리 퍼져 나가기 시작하였다. 예수를 믿으려면 도암의 이세종처럼 믿어야 된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하였다. 이런 풍문이 당시 감신대 교수였던 정경옥 박사에게까지 이르렀다. 정경옥박사는 유학을 다녀와서 학생들에게 인기 많은 명강사가 되었다. 그러나 수많은 학생들이 강의에 몰려들 만큼 인기가 많아도 정작 자신의 마음은 갈수록 공허하기만 할 뿐이었다. 머리 속에 수 많은 지식이 있다지만 그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지식은 다만 지식으로 끝날 뿐이지 자기 자신의 생명력에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지식이나 명예나 재산이나 모두 나 밖에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근원적 생명에 힘을 주는 성령의 충만이 아니면 채울 수 없는 공허함에 빠지게 된 것이다. 이런 영혼의 메마른 밤을 겪으며 괴로워하던 정경옥 교수는 결국 모든 것을 버리고 시골 고향으로 내려와 고요한 묵상의 시간을 갖고 있었다. 그때 화순 도암에 예수를 잘 믿는 분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이공을 찾아가게 되었다. 정경옥 박사가 이공을 만나 어떤 감화를 받았는지 그 내용이 1937년 신학 잡지 <새사람>에 실리게 되었다. 정경옥 교수가 이세종을 만난 소감을 ‘도암의 숨은 성자를 찾아서’라는 제목으로 잡지에 발표한 것이다.

이세종이 복음을 알게 된 때가 3.1독립만세 운동이 일어났던 무렵으로 추정된다. 예수를 믿게 된 계기는 확실치 않지만 시골에서 지나가는 전도자의 쪽 복음을 얻어서 읽고 하나님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즉 이세종은 성경말씀을 혼자 터득하는 가운데 하나님을 알고 예수를 믿게 된 것이었다. 그가 예수를 믿고 나서 자기의 모든 것을 버리고 오직 하나님만 섬기는 사람이 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자기라는 것, 자아를 온전히 부정하는 길을 택하여 자신의 이름도 버리고 스스로를 공空이라 하였다. 피리는 텅 비어 있지만 숨이 지날 때마다 아름다운 소리를 내듯이 공이 된 이공의 마음에 하나님의 사랑이 흘러 나왔다. 그가 예수를 믿고 나서는 마을 사람들이 자기에게 빚진 것을 모조리 탕감해주고, 재산의 절반을 희사했다. 좁은 문에 토담집을 짓고 살며, 나물을 뜯어 먹고, 살생을 하지 않아서 독사나 쥐도 죽이지 않았다. 칡넝쿨이라도 밟지 않고 길에서 개미 한마리라도 밟혀 죽어가는 것을 보면 눈물을 흘렸다. 이공은 또한 절대 순결 생활을 강조하며, 부부 생활을 않고, 아내를 누님이라 부르던 기인이었다.

이현필은 26세 때 백영흠전도사의 처제 황홍윤을 만나 결혼하였다. 스승 이세종은 이현필에게 결혼하지 말고 살 것을 누누이 강조하였다. 그러나 이현필은 늙은 어머니를 돌보아야 되고 또 전도사를 하려면 결혼 하는 일이 더 좋겠다고 생각하여 결혼을 하였다. 결혼 후 부인과 함께 이공을 찾아갔을 때 스승은 매우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고 한다. 그리고 부부를 향하여 다만 ‘깨끗하게 사시오.’라는 한 마디 뿐이었다. 결혼생활을 시작하고 이현필은 이내 후회하기 시작하였다. 결혼하면 여러 문제가 풀리리라 생각했지만 오히려 더 많은 문제들이 나타났던 것이다. 약 2년간이나 부부생활을 하다가 마침내 커다란 시련이 닥쳐왔다. 1940년 여름 어렵게 임신한 부인이 복통이 심하여 광주로 가서 보니 자궁외 임신이었다. 결국 당시로서 큰 수술을 하게 되었고 부인의 목숨은 살렸지만 뱃속의 아이는 살릴 수 없었다. 이현필에게 이는 큰 충격이었다. 죄 없는 어린 생명을 죽였다는 죄책감이 몰려왔다. 이럴 줄 알고 스승은 결혼을 반대하신 게 아닐까.

이때부터 이현필은 몸이 약하다는 핑계로 부부생활을 하지 않고 날마다 산에 올라가 기도를 시작했다. 그리고 아내를 누님이라 부르며 남매처럼 살자고 해혼(解婚)을 부탁했다. 그러나 아내가 이 뜻을 알아줄 리 없었다. 자기를 떠나지 못하도록 붙잡고자 애를 썼지만 이현필은 자꾸 피하기만 하였다. 그래서 아내의 애정은 차츰 증오의 모습이 되어갔다. 나중에는 보기만 하면 해치려 하였다. 원수같은 남편을 죽이고 자기도 죽겠다는 결심을 한 것이다. 이러한 아내가 앞문으로 들어오면 이현필은 뒷문으로 빠져 도망을 쳤다.

가정을 떠난 이현필이 그때부터 도암의 화학산에 들어가서 기도 생활을 하면서, 이세종 선생과 같은 수도자의 모습이 되어갔다.

 

 

1.4 갈보리 산의 십자가

3년여에 이르는 산중 기도생활을 마치고 여러 곳으로 전도활동을 가기도 하였는데 특히 남원을 찾아가서 그 남원지방에서 교회 다니는 교인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남원을 처음 방문하던 해가 1943년 무렵이었다. 그때 서재선 배영진과 함께 삼일 목공소를 하던 오북환 장로를 만나 평생의 동지가 되었다. 그 밖에 김금남의 모친 강남순을 비롯한 강씨 자매들과 방순갑 방순녀의 모친인 지당어머니 그리고 복은순 복태경의 모친 응실어머니 등이 삼일 목공소에 모여 예배를 드렸다.

오북환장로는 삼일 목공소를 닫고 이현필을 따라 화순 도암으로 떠나자 남원에서 김금남과 모친 강남순은 지리산의 갈보리나 서리내(仙人來)에서 깊은 기도를 했다. 서리내는 남원 수지면에서 지리산을 등산하는 도중에 있는 선경(仙境)으로 화전민 몇 사람만이 있을 뿐인 곳인데, 이현필은 우거진 솔밭, 갈대밭 속에 한번 엎드리면 꿈쩍도 않고 언제까지나 일어날 줄 몰랐다. 산에 사는 까마귀는 송장인 줄 알고 곁에 와서 까악 까악 울다가, 그래도 움직이지 않으니 부리로 쿡쿡 찍었다고 한다. 그런 모양으로 밤을 지내고 새벽에 잔등에는 서리가 하얗게 내리고, 수염에는 고드름이 달린 채 가슴에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의 사랑이 밀려와 감격과 통곡으로 「갈보리 산」이라는 가사를 지어 불렀다.

 

1. 갈보리 산에서 십자가를 지시고

예수는 귀중하신 보배피를 흘리사

구원받을 참 길을 열어 놓으셨느니라

갈보리 십자가는 저를 위함이요

(후렴) 아~ 십자가 아~ 십자가

갈보리 십자가는 저를 위함이요

2. 그와 같은 끝없는 사랑을 알고서는

영과육을 아울러 산제물로 바치며

주님 기뻐하시는 종이 될 뿐입니다.

3. 예수님 보배 피를 저에게 부어주사

지금으로 이 몸을 거룩한 성전 삼아

영원무궁 하도록 살아주심 빕니다.

 

눈물을 흘리며 이 노래를 부르며, 무명으로 지은 바지저고리에 맨발로 산을 내려오는 이현필을 보고, 젊은 남녀는 감격하여 자기들도 함께 부르며 울었다. 이현필의 모습은 청빈한 탁발 수도자였고, 자비와 겸손이 넘치는 성인의 모습이었다.

이 기간에 남원 지방의 기독교 교회 신자들이 이현필 주위에 모여 들었다. 그들은 일본의 신사참배에 굴복한 교회를 버리고, 핍박하는 가정을 버리고, 지리산 밑에 있는 “갈보리”(갈벌)라는 산골에 모여 함께 예배하고 기도하며 살았다. 이것이 뒷날 동광원 공동체의 모체가 되었다.

이현필은 1947년 가을에 소년 소녀들을 모집하여 서리내에서 신앙훈련을 시켰다. 성경 공부와 사랑의 실천, 양심과 생활 훈련이었다. 양식이 없어서 하루 한 끼를 때우며 주로 쑥과 나물만 뜯어 먹으며 살았다. 날마다 거의 굶주린다 싶을 만큼 못 먹고 못 입다가 누군가 양식을 구해서 가져오니 오래간만에 쌀밥을 지어 먹을 수 있었다. 그런데 오랜만에 배불리 먹은 모든 훈련생들이 그만 술에 취한 듯 취해서 쓰러졌다. 그때 이현필은 “그것 봐라, 쌀의 독(毒)이 얼마나 무서운지 알겠지?” 하고 말했다. 아무리 밥이 좋아도 밥에 빠지면 그것도 독이 되고 병이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엄격한 생활과 신앙 훈련을 마친 소년 소녀를 인솔하고 1948년 봄에 이현필은 광주로 진출했다. 36세 때였다. 해방이 되었지만 나라는 조용하지 못했다. 38선을 기준으로 이북은 소련군이 진주하고 이남은 미군이 진주하여 나라가 분열되었다. 나라의 분열을 막고자 지도자들이 노력했지만 저마다 다른 주장을 하며 서로 다투고 있었다. 결국 1948년에 38선 이남에서는 8월 15일에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이북에서는 9월 9일에 조선인민 민주주의공화국이 선포되었다. 정식 명칭은 대한민국과 조선공화국이었지만 이남 백성들은 이북을 인공 또는 북한이라 하고 이남을 한국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이때 어떻게든 서로 통일을 이뤄야 된다는 주장이 강하였지만 사태는 오히려 극심한 혼란을 부추길 뿐이었다. 즉 1948년 4월 3일에 제주도에서 폭동이 일어났고 10월에는 여순반란사건이 일어났다.

이러한 시기에 광주로 진출한 이현필은 해방 후 재건된 YMCA 구내에 방을 얻어서 거기에 기거했다. 그리고 몇 식구들을 데리고 전국을 순회하면서 전도활동을 하였다. 당시의 민심과 시국을 살펴볼 때 이현필의 마음은 나라의 앞날에 대한 걱정이 가득하였다. 머지않아 피를 흘리는 일이 많을 것 같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미리 준비를 하자고 하였다.

남원 서리내에서 훈련을 받고 광주에서 생활하는 이현필의 제자들은 그야말로 모든 일에 모범이었다. 도시였던 광주사람들의 눈에는 산 속에서 훈련받고 나온 어린 청년들이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 같았다. 그들의 모습은 보기만 해도 감동과 놀라움의 대상이었다. 나이 어린 그들이지만 언제나 겸손한 예의와, 남녀간의 엄격한 순결생활, 그리고 예배를 볼 때면 무릎 꿇고 앉아서 조용하고 질서정연한 모습으로 기도하고 찬양하였다. 그들의 사랑스런 겸손함과 공손한 태도 그리고 그들이 부르는 애잔하고 그윽한 영혼의 노래들은 듣는 이 보는 이들에게 크나큰 감동을 주었다.

이처럼 신기한 감격을 목도한 YMCA 총무 정인세는 유도 2단에 덴마크 체조 교사이기도 했던 인물이었다. 그가 이현필과 그들의 신앙을 존경하여 YMCA를 사임하고 동광원 식구가 되었다. 그는 양복을 벗어버리고, 넥타이를 풀어 버리고, 이현필 운동에 투신하기로 결심했다.

이현필은 신학대학도 다니지 못한 사람이었다. 그는 목사도 아니고 정식으로 신학교육이나 교회에서 활동 경험이 많은 사람도 아니었다. 그러나 도인(道人)같은 이공 이세종 선생을 만나 그의 영성에 감화를 받아 스스로 말씀을 파고들어 기도하고 기도하여 성령이 충만한 이공의 제자가 되었다. 이현필은 스승의 영향으로 화학산 기도 3년, 지리산 기도 4년, 도합 7년의 산중 기도 훈련생활 속에서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사랑에 불타는 사랑의 성인이 되었다. 그의 청빈한 수도자의 모습은 마치 서양의 성 프란치스코 같은 모습을 닮아 아무 욕심도 없이 가난하고 자비롭고 겸손하고 고요한 성자가 되어갔다.

그래서 엄두섭목사는 그를 한국의 프란치스코라 부른다. 그는 일생동안 성 프란치스코와 이현필을 연구하면서 이현필의 유적과 그의 제자들을 만나 이현필의 추억을 들어보았고, 또한 이탈리아를 여행하며 프란치스코의 고향 아씨시 및 그와 관계된 유적지를 빼지 않고 답사해 보았고, 그가 성흔(聖痕)을 받은 베르나 산에 올라가 답사해보면서 한국의 이현필과 이탈리아의 프란치스코를 비교해 보았다. 엄목사가 보기에 두 성인은 많은 점에서 서로 닮았다. 누가 더 우월하다고 말할 수 없이 막상막하였다.

본래 엄두섭목사가 이현필을 알게 된 것은 탁명환씨가 이현필과 동광원을 이단이라고 발표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평양에서 신학을 마치고 목사가 된 엄두섭은 나주에 내려가 목회를 했지만 동광원을 알지 못했다. 그러던 중 이단이라는 소식에 어떤 이단이 있는가 하고 알아보려고 동광원을 찾았다. 그런데 그가 동광원을 찾았을 때는 이미 이현필은 세상을 떠난 뒤였다. 그렇지만 이현필의 영적 감화력은 제자들에게 남아있었다. 그들을 만나면서 엄두섭은 차츰 감동을 받기 시작하였다. 이들이 이단이 아니라 진정한 예수의 제자들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참된 믿음의 이 길이다, 하고 외치며 동광원과 이현필을 알리는 데 일생을 보내게 되었다. 이현필과 프란치스코를 흠모하여 그도 또한 은성교회와 은성수도원을 세워 수도생활을 하였다. 2007년부터 세상을 떠날 때까지 엄두섭목사는 동광원 벽제분원의 장소인 계명산에서 백남철목사 최흥욱목사 등 그를 따르는 목사님들과 함께 예수영성수련회를 정기적으로 가졌다. 아직도 그 수련회는 계절마다 동광원 벽제분원에서 정기모임으로 이어져 매회 2박3일 일정으로 진행되고 있다.

이현필은 36세 때 제자들을 거느리고 광주에 진출하면서부터 이현필 운동은 많은 사람들의 주목과 화제 거리가 되었다. 가톨릭의 천주교회 측에서는 그를 흡수해 넣으려 하였지만, 개신교의 기성 교회 지도자는 그를 “산중파”라고 경계하며 멀리했다. 이현필은 어느 교파에도 속하지 않고 개종하려고도 하지 않았고 개종할 필요도 없었다. 동광원은 종파나 교파를 초월하여 본래적인 예수의 모습으로 예수의 정신과 예수의 믿음을 가지고 살려하였다. 기독교 교도로서 처음 예수를 믿던 그 마음 그 자리에 그대로 서서 다만 예수만을 본받아 살려고 애썼다.

그의 주위에는 여러 유능한 인물들과 명사들이 몰려들었다. 처녀들은 결혼을 단념하고 절대 순결을 주님께 바치며 그리스도의 정배로서 일생을 보냈다. 18세 때 이현필을 따라 나섰던 김금남 원장의 경우처럼 많은 수녀들이 깨끗한 처녀의 모습 그대로 곱게 늙어 이제는 호호 노인들이 됐다.

호남의 명사요, 도지사의 고문도 한 일이 있는 최흥종 목사는 이현필을 아들처럼 사랑했다. 서울의 YMCA 총무요, 평화주의자로 유명한 현동완 선생도 이현필을 방문하고, 그의 집회에 참석했다. 한국의 석학이요, 막대기 철학자로 소문난 삼각산의 철인 유영모 선생은 이현필을 사랑하여 일생 계속 이현필과 동광원 수양회 강사로 자진 봉사했다. 1946년 동광원 수양회 강사로 초빙되어 광주에 내려온 것을 계기로 1971년 여름수양회까지 매년 연초와 광복절 전후에 동광원을 찾아와 말씀을 전했다. 1971년 여름 수양회에서 강의한 말씀이 책으로 엮어져 <다석 유영모의 마지막 강의>로 출간 되었다. 그해 여름 동광원에서 강의한 것이 다석으로서는 공개적으로는 마지막이었던 것이다.

1949년에는 현동완 총무가 이현필과 그의 제자 일부를 서울로 초청하여 삼각산과 능곡 등지에 머물게 했다. 능곡에는 ‘오원(吳園)’을 창설하고 남녀 청년들이 수도생활을 시작했다. 이현필은 탁발 수도단을 만들고자 하여 능곡에서 그 해 정초 개최된 총회를 계기로 전원이 탁발 수행에 나섰다.

추운 겨울날 이현필은 남녀 제자들을 두 사람씩 짝을 지어 마을에 탁발을 내보냈다. 추운 겨울인데도 신발도 신지 않고 맨발로 나섰다. 처녀들이 탁발하고 떠난 집에 뒤이어 남자들이 또 들이닥쳐 탁발을 청하니 마을 사람들은 놀라서 “요즘은 무슨 거지들이 이렇게 많아졌지?” 했다.

이현필도 병들고 머리가 조금 모자란 고아의 손을 잡고 탁발에 나섰다. 신발도 신지 않고 맨발로 천천히 다니며 탁발을 했다. 그 무렵 이현필의 풍모는 완전한 거지였다. 긴 머리는 목에까지 닿았고, 옷은 다 찢어진 옷이었다. 바보 소년과 이현필은 둘이 함께 바보스러웠다. 잘 걷지 못하는 소년을 따라 이현필도 뒤따라 천천히 걸었다. 아침에 떠나서 오후 세시 경에야 숙소를 돌아왔는데, 겨우 밥 한 술을 얻어 가지고 왔다. 이현필이 제자들에게 요구한 탁발은 얼마나 자기를 죽이는가를 공부하는 수행의 수단이었다.

 

 

1.5 주님 계신 곳

 

1949년 가을부터 50년 봄까지 여순 반란 사건이 일기 전까지 경기도에서는 능곡을 중심해서 이현필의 젊은 전도대는 농사도 지으며 때때로 탁발로 나가고 모여서는 항상 기도하고 성경 읽는데 주력했다. 한편 여름에는 전도대를 조직하여 남원, 순천, 여수, 강진, 해남, 광주 등지로 순회하며 전도했다. 거지 차림의 헌 옷에 신발도 신지 않고 맨발에 걸식 탁발을 하며 전도했다. 해남의 이준묵 목사도 적극 나서서 협조했고, 자기 교회에 이현필을 청해 집회를 가지기도 하였다.

경기도 능곡의 오원에 살던 식구들은 구사일생으로 6.25를 겪고 얼마 후 폐쇄되면서 능곡에 살던 수녀들이 고양으로 이주하였는데, 이것이 후에 고양 벽제동의 깊은 산중 계명산 수도원이 모체가 됐다.

해방 후 해남 교회에 김준호라는 청년이 고시 준비를 하면서 교회 안에서 먹고 자면서 교회 청소와 심부름을 도맡아했다. 교회에서 안내하기를 얼마 있으면 “예수 잘 믿는 선생이 와서 특별 집회를 한다”해서 기뻐 기다렸다. 어느 날 교회 대문 앞에 트럭 한 대가 와서 섰는데 그 트럭에서 두 사람이 뛰어 내리고 있었다. 두 사람 모두 바지저고리에 삭발한 머리였는데, 한 사람은 걸망을 메고 있었다. 훗날 알고 보니 그 두 사람이 바로 이현필과 오북환이었다. 오북환장로는 늘 목수의 연장을 걸망에 넣어 매고 다녔던 것이다.

첫날 저녁 집회에서 이현필은 두루마기도 입지 않은 채, 바지저고리에 맨발 차림으로 나서는 것이었다. 높은 강대 위에는 올라가지도 않고 강대 밑에 가만히 서서 책상 위 꽃병을 바라보았다. 꽃병에 꽂아 놓은 국화를 불쌍한 듯 바라보고는 처량한 목소리고 “여러분, 꽃을 이처럼 함부로 꺾지 마시오”라는 말로 시작했다. 학생 김준호는 처음 보는 이상한 차림의 이현필의 풍모와 화병에 꽂혀있는 국화꽃을 바라보고 하는 그 첫 마디에 그만 감격하고 말았다. 꽃 한 송이가 꺾이는 것을 저렇게 안타까워하시는 저런 분의 마음이라면 정말 믿을 수 있는 분이 아닐까. 그리하여 청년 김준호는 “나는 이런 선생님을 따라 나서야겠다.” 하고 결심하였다. 그 후 선생님이 그리워 무작정 광주로 나가서 이현필을 찾았다. 그렇게 이현필을 만나 좇으면서 일생 이현필이 가장 사랑하는 제자가 됐다.

경기도 능곡에서 떠난 순회전도단은 다도해 지방으로 다녔는데, 수녀들은 집회 시간이면 특별 찬양을 하였다. 으레 부르는 찬송은 ‘갈보리 산에서 십자가를 지시고’ 하는 노래였다.

순결과 청빈을 수도하는 처녀들의 목소리는 참으로 고요하고 맑았다. 결혼한 여성들의 목소리나 교회 성가대의 일반 합창이나 찬송하고도 달랐다. 수녀들의 노래는 구슬처럼 맑고 슬픈 노래처럼 애처로왔다. 완도에 갔을 때도 수녀들의 합창에 모두가 감동받았다. 집회를 끝내고 쉬는 시간에 교회 청년들이 수녀들에게 찾아와 그 노래를 한 번 더 들려달라고 간청했다. 순진한 수녀들은 청하는 대로 다시 그 노래를 불러주었다. 이 소문이 이현필 귀에 들어갔다. 이현필은 펄쩍 뛰면서 몹시 야단을 했다.

“어찌 이럴 수 있느냐. 수녀들이 술파는 작부냐? 남자들이 불러달라고 하여 남자들 앞에서 노래를 불러준다는 게 말이 되느냐. 다시는 그렇게 하지 말라!” 하고 엄명을 하였다.

이현필은 전도와 제자훈련과 생활실천 교육을 겸해 전도대를 결성하고 순례를 계속했다. 이현필은 한 마리 잃은 양을 찾기 위해서는 30리 50리 머나먼 산길을 신발도 신지 않은 채 맨발로 걸어 다녔다. 지리산 줄기, 섬진강 여울을 건너 다니며, 어느 산 깊은 구석이거나 외딴 집이라도 한 영혼을 구하려 찾아다녔다. 화순의ㅣ 한종식이란 농부도 그렇게 해서 이현필의 전도를 받은 사람이다. 이현필이 화학산 너머 깊은 산골짜기에 사는 그를 찾아 30리 길을 걸어가서 그 날 그 집에서 자면서 전도했다.

“예수 믿는 사람이 밭에 담배를 재배를 하는 일은 좋지 않습니다.”라고 타일러주니, 한종식은 즉시 나가서 담배 밭을 갈아 버렸다. 그리고 “사람은 착한 일을 해야 합니다”라고 가르치니, 그는 달밤에 밖에 나가서 마을의 가난한 과부댁 밭을 갈아주기도 했다.

이현필은 이런 한종식씨 집에서 14일간 금식기도를 한 적도 있었다. 이렇게 이현필의 전도를 한번 받은 사람은 대부분 그 믿음이 변하지 않았고, 이현필을 닮아서 희생정신이 철저했다.

1950년 6. 25사변이 일어나 인민군이 삼팔선을 넘어 서울에 침입했다. 그런데 방송국의 방송은 우리 국군이 삼팔선 이북으로 진격하고 있다며 거짓 방송을 했다. 그러나 서울에서 천리 거리인 전남 광주의 목사들은 누구보다도 그 정보를 먼저 알았다. 그 까닭은 교회에 출석하고 있는 상무대 장교들의 어머니나 아내들이 남편에게서 그 소식을 듣고 교회에 뛰어와 목사들에게 알려주었기 때문이다.

장교들의 가족들이 군 트럭에 이삿짐을 싣고 부산으로 피난 갈 때 목사들도 이삿짐과 가족을 데리고 어느 교인보다 먼저 부산으로 피난 갔다. 시찰에게 예배당을 잘 지키라고 명령하고 피란을 간 것이다.

파죽지세로 남한을 진격해 내려오던 공산 인민군이 마침내 광주를 향하여 장성까지 쳐들어오게 되었다는 소식이 들렸다. 1950년 7월 23일 주일날이었다. 그 때 광주에 여자 선교사 한 분이 피란가라는 명령에도 불구하고 교인들을 두고 어떻게 혼자만 피란을 가겠느냐며 버티다가 이제는 더 이상 버틸 수 없을 만큼 위험하게 되었다. 그 사람이 미국 선교사인 유화례(柳花禮, 플로렌스 루트)였다. 교회 전도사로 있던 옥과 출신 조용택이 이현필을 찾아와 도움을 구했다. 그 소식을 듣고 이현필은 당연히 그 선교사를 보호해 살려주어야 된다며 정인세원장과 피란을 의론했다. 그는 정인세 원장과 의논 끝에 지게꾼을 얻어 유선교사를 지게에 싣고 짐짝으로 위장해서 70리 길을 모시고 가서 화순군 화학산 굴에 숨겨주었다.

화학산에는 여순사건의 여파로 아직 공산 빨치산들이 득실거리고 있었다. 이현필은 목숨을 걸고 그 산에서 국군이 잃은 땅을 수복할 때까지 약 3개월 동안이나 선교사를 지켜주었다. 매일 매일이 생사의 갈림길이었다. 빨치산들에게 발각될 뻔한 일이 여러번 있었다. 그렇지만 그때마다 특별한 지헤로, 또는 천운이나 하나님의 은혜와 도우심으로 살아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때 무엇보다 먹을 것이 문제가 되었다. 이현필과 그의 제자들은 몰래 동리에서 먹을 것을 가져다주는 동지들에 의지하거나 먹을 것이 없을 때는 산에서 익어가는 다래 열매를 따 먹으며 겨우겨우 살아갔다.

그러나 유화례 선교사가 숨어 있던 동굴 절벽 밑으로 내려가면 바로 한종식의 외딴 집이 있었다. 이현필의 전도를 받고 예수 믿은 한종식은 충직한 성격의 사람으로 매일 밤 지게에 밥과 반찬을 숨겨서 유선교사가 지내는 동굴에까지 목숨 걸고 운반했다.

3개월의 은둔과 피란 생활이 끝나 산을 떠날 때 유선교사는 한종식이 너무 고마워 금일봉을 사례로 주었으나 한종식은 돈 봉투를 땅에 던지며, “내가 이것을 받으려고 그 일을 한 줄 압니까?” 하며 받지 않았다. 유선교사는 그 태도에 감격하여, “한국 사람을 새로 보게 되었다”고 말했다.

광주에 공산군이 물러가고 국군이 진주했다는 소식이 있기에 이현필은 유화례 선교사를 정인세에게 맡겨 먼저 광주로 보내었다. 그러나 이현필과 제자 김준호는 갈 수 없어서 크리스마스 때까지 산에 머물러 있었다. 유선교사를 지키느라 세 분의 직접적인 희생이 있었고 동광원과 관련되어 여러 사람이 희생되었던 것이다. 그런 분들의 희생을 생각할 때 이현필은 차마 산을 떠나갈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공산 빨치산들에게 붙잡혀 죽을 수도 없었다. 왜냐면 자기가 죽는 것은 두렵지 않지만 그 영혼을 생각할 때 붙잡히는 일도 지헤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나를 잡아 죽이는 그이는 곧 살인자가 되어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될 터인데 어찌 나로 인하여 한 사람이라도 죄인을 만들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산에서 지내다가 굶어죽기를 바랄 만큼 괴로워하였다.

그런데 김준호는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자꾸 산을 내려가자고 하였다. 밥을 지어 먹어본 지가 너무도 오래되었던지라 김준호가 “선생님 배고픕니다. 제발 밥 한술만 먹었으면...”하고 말하니, 이현필은 “혼자 광주에 가시오”라고 대꾸했다.

이현필선생과 함께 산에 들어와 숨어있던 여제자 강차남, ‘서울 어머니’, 그리고 문공이란 분은 산에서 빨치산에게 끌려가 순교했다. 남원에서 사진관 부인(군수 부인), 이발소집 부인, 홈실댁 등 세 여자는 남원에서 광주로 나오다가 ‘소라니’에서 인민군과 유격대에게 붙잡혀 대창과 꼬챙이에 찔려 참혹하게 순교 당했다.

이때 이현필은 본래 체질이 약한데다가 산속에서 잠자리도 없고 먹을 것도 없고 날마다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도 동지들과 함께 기도하고 찬송하며 주님의 사랑을 나눴다. 그러면서 저절로 노랫말이 지어져서 함께 부르게 되었다. ‘주님 가신 곳’ 이라는 노래가 이때 만들어진 것이다.

 

주님 가신 곳

1. 주님 가신 길이라면 태산준령 험치 않소

방울방울 땀방울만 보고 따라 가오리다.

후렴 (오 주 예수 주님이여 천한 맘에 오시어서

밝히 갈쳐 주옵시길 끓어 엎디어 비나이다.)

2. 주님 가신 길이라면 가시밭도 싫지 않소.

방울방울 핏방울만 보고 따라 가오리다.

3. 주님 계신 곳이라면 바다 끝도 멀지 않소.

물결물결 헤엄쳐서 건너가서 뵈오리다.

4. 주님 계신 곳이라면 하늘 끝도 높지 않소.

믿음 날개 훨훨 쳐서 올라가서 뵈오리다.

 

김준호는 선생님의 이 시를 받아 읽으면서 콧노래로 곡조를 달아 불렀다. 피란생활을 하면서 유화례 김금남 등과 함께 다같이 이 노래를 부르며 은혜 가운데 위로를 받았다.

화학산 산중에 눈이 내리기 시작하자 더 견딜 수가 없고 김준호의 간청에 못 이겨 이현필은 광주로 돌아왔다. 광주로 향하는 이현필의 발걸음은 한없이 무거웠다. 같은 민족 같은 동포라 하면서 총부리를 겨누고 서로를 죽이는 이런 비극적인 일이 어찌 일어나는가. 모든 생명을 낳고 살려주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손톱만큼이라도 안다면 어찌 이렇게 사람의 귀한 목숨을 죽일 수 있을까. 좌우의 대결장이 된 화학산 전선의 한 복판에 들어가 주님의 자비와 사랑으로 평화를 간구하며 기도했지만 많은 희생자를 냈을 뿐 싸움은 그쳐지지 않았다. 모든 것을 온전히 주님께 의탁하며 하루하루 살면서 하나님이 주신 귀한 생명을 죽이는 죄악이 그쳐지기를 기도하고 또 기도하며 괴로워했다.

자기를 살리기 위해 목숨을 바친 형제자매들의 모습이 눈에 아른거렸다. 좀더 기도하고 좀더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여 보다 잘 대처했더라면 그들의 희생을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이런저런 생각을 할 때면 괴롭고 죄스러워 잠을 잘 수 없었다. 하나님은 왜 우리 민족 우리나라에게 이런 고난과 고통을 주시는 것일까. 이 고난과 고통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그렇다, 이 민족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자. 하나님의 뜻을 찾고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사람이라면 이런 죄악을 그치게 될 것이 아닌가. 모든 비극은 이념과 사상에 눈이 멀어 하나님이 주신 생명을 보지 못하고, 나아가 사물과 사건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허깨비를 보는 정신 나간 이, 얼빠진 이들 때문이 아니겠는가. 하나님과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하는 죄인들에게 구원의 빛을 알려주자. 그것뿐이다. 우리가 살아나는 길은 이념이나 사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깊은 사랑에 눈을 뜨는 것이다. 이념이나 사상은 순간순간 변화되는 현실의 허물일 뿐인데 그것을 붙잡고 절대화 하는 순간 현실을 왜곡하는 편견이 되고, 편견과 아집에 집착하는 자아가 커지면 거짓된 구원자의 모습으로 나타나 사람들을 속이고 권력을 잡아 억압과 살생을 일삼으며 세상을 어지럽히는 악마가 되는 것이다.

광주로 돌아오자 온 나라는 곧 다시 1.4후퇴로 야단이었다. 중국 공산군이 인해전술로 밀려오자 북진했던 국군이 다시 밀려 내려와 모두가 남으로 피란을 간다는 것이다. 광주에서도 피란 명령이 내려 부산으로 피란을 갈 준비를 하였다. 그러나 곧 연합군이 38선 부근에서 저지하고 더 이상 밀리지 않게 되자 피란의 소동은 그치게 되었다.

6.25의 여파로 수많은 고아들이 발생하였다. 광주는 마침 이현필의 선견지명으로 6.25가 일어나기 전에 여러 광주의 유지들이 뜻을 모아 동광원이라는 고아원을 세웠다. 그리고 그 고아원의 원장으로 정인세를 세우고 이현필 제자들이 동광원을 운영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한 때는 고아들이 6백여명에 이르기도 하였다.

이를 계기로 이현필과 그의 동지들의 활동을 동광원(東光園)운동이라고 부르는데, 동광원은 이처럼 본래는 고아원의 이름이었다. 1949년 가을에서 50년 봄에 여순반란 사건의 여파로 많은 과부와 고아가 생겨나서 그 대책으로 동광원을 설립하여 이현필과 그 제자들이 이 일에 헌신했었던 것이다.

그런데 4년여가 지나자 여러 시기 질투가 일어나서 동광원을 모함하는 사람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그 빌미도 없지는 않았다. 고아들에게 고기를 먹이지 않고 병이 나도 약도 주지 않고 학교에 보내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일면으로 맞는 말일 수도 있지만 과장되게 모함하여 1954년 여름에 동광원을 폐쇄시켰다. 그래서 고아들이 다른 기관으로 뿔뿔이 흩어졌는데 그만 동광원 수녀들의 정성과 친절에 정이 든 고아들이 하나 둘 되돌아옴으로써 이현필 제자들은 그들을 돌보지 않을 수 없었다. 이때 모두가 극심하게 가난하던 시절이라 먹는 문제를 해결하는 일이 큰 난제였다. 못 먹고 헐 벗고 살면서도 고아들을 돌보고 병자들을 보살피고 돌보며 살아야 했다.

이현필도 본래 몸이 약한데다가 산중생활과 부실한 영양으로 자꾸 허약해졌다. 그리고 제자의 병을 간호하며 지내다가 자신도 폐병에 걸렸다. 그래서 폐결핵과 후두결핵 등 일생 병에 시달리다가 세상 떠났는데, 병원에 입원해 있으면서도 병원 안의 간호원, 미화부, 매점, 청소부일까지 제자들을 동원해 도왔다. 병원 원장은 너무도 감격하여 병원 운영, 환자 지도의 문제까지 이현필과 의논했다.

이현필이 병원에 입원하게 된 경위는 제자 김준호의 치료를 위한 목적이었다. 1956년 김준호의 병이 위독하다는 것을 알게 된 이현필은 우선 그간의 불문율로 여겨지던 불복약의 전통을 깨뜨려야겠다고 생각하였다. 다시 말하여 동광원 안에서 이공의 가르침에 따라 육식을 금하고 병이 나도 약을 쓰지 않고 지내는 불문율이 생겨나게 되었는데 이런 것들이 율법처럼 굳어지면 안 된다고 하여 깨뜨린 것이다. 그는 제자들을 불러 모아 그들이 보는 앞에서 고기를 사오라 하여 함께 끓여 먹었다. 육식을 금지하던 규율이 엄격하여 모두 큰 죄나 짓는 듯 벌벌 떨면서 먹었다. 이현필은 그때 말하길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은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의 은혜로 되는 것이지 우리의 선행이나 덕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렇게 파계를 하고 이현필은 광주 제중원으로 가자고 하였다. 그렇게 해서 제자 김준호와 함께 제중원에 입원하게 된 것이다.

한 때 이현필이 무등산 「삼밭실」에서 병을 요양하며 지내는 동안(50세 무렵) 각혈이 심했다. 한번 각혈을 하게 되면 깡통에 절반이나 피를 토했다. 한때는 임종이 가까운 줄로 자타가 짐작했다. 각혈을 할 때는 이현필은 일어나 무릎을 꿇고 앉아 두 손을 합장하고 앉아 각혈을 했다. 겁에 질린 수녀들이 곁에서 울면 “기도하시오. 기도하시오” 하고 연방 말했다. “주여, 내 피를 다 쏟게 해 주옵소서” 하면서. 두려움도 고통의 표정도 없었다.

수녀가 “선생님 힘드신데 누우십시오.”하면, 이현필은 “눕다니요, 눕다니요. 지금 내 더러운 피가 나가는데. 내 피는 다 빠지고 예수님의 피가 내게 들어와야 합니다. 지금 이 순간이 내 신랑을 영접하는 이 기쁜 순간인데 눕다니요...” 하면서 평화스러운 얼굴로 기뻐했다. 그리고 “내게 병을 주 신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운 선물”이라고 했다. 자기는 폐병으로 일생 시달리면서도 다른 사람에게 전염될까봐 곁에서 간호하는 수녀들이 접근하지 못하게 여간 경계하지 않았다.

이현필은 각혈이 심해서 사경을 헤매면서도 여전히 생명의 세계, 은총이 세계, 평화의 세계에 대해 눈으로 보는 듯이 역설해서 가르쳤고, 제자들 중에 마음이 흔들리는 이가 있으면 심혈을 기울여 권면하고 훈계했다. 특히 순결 생활에 대해서“동정을 지키는 것이 복이다”. “가난이 복이다”, “고통이 복이다”라고 가르쳤다.

말년에는 후두결핵으로 말까지 못하게 되어 필담(筆談)으로 의사소통을 하였는데, 잘 아는 김 장로가 찾아오니 누가 갖다 준 팥 넣은 떡 열 개를 손님 앞에 내놓으면서 필담으로 “김공! 잡수시오!”했다. 권면에 못 이겨 한 개 집어 먹고 나니. 이현필은 다시 필담으로 “또 잡수시오!”했다. 이렇게 하여 결국 열 개를 다 먹고 나니, 필담으로 쓰기를 “김 공이 그 떡을 다 잡수시니 내 배가 부릅니다.”하면서 웃었다.

손님이 오면 무 한 개라도 꼭 내놓고 대접하는 습관이었다. 이현필은 무 껍질을 벗기지 않고, 깨끗이 씻기만 하여 털도 버리지 않고 그대로 잡수셨다.

기차나 버스를 탈 때는 제자들을 타일러 “우리는 제일 나중에 타자”하여 다른 사람에게 자리를 다 빼앗기고 문간에 서서 다니기가 일쑤였다. 한번은 기차를 타고 용케 자리를 잡았는데, 누가 앞에 와서 자리를 못 잡고 서 있으니 그에게 자리를 양보하고, 다른 데 가서 자리를 잡고 있다가 또 양보하고는 밀리고 밀려, 열차의 출입문 밖에까지 밀려나가 엉거주춤하고 앉아 있었다. 마침 험상궂게 생긴 한 사람도 자리를 못 잡고 밀려나와 바닥에 앉아 있었는데, 이현필을 보더니 곁에 와서 말을 건넸다.

“형씨, 우리 통성명 합시다”

“예”

“형씨 성이 뭡니까?”

이현필은 시침을 떼고, “예, 저는 ‘헌’가입니다.”

“헌가요? 그래 이름은 뭐라 합니까?”

“예, 신짝이올시다.”

험상궂게 생긴 그 사나이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눈이 둥그레져서 “헌신짝, 헌신짝? 예끼, 여보! 그런 이름이 어디 있소?” 했다.

사실 이현필은 자기를 늘 “헌신짝”이라고 불렀다. 제자들이 이현필을 부를 때 말끝마다 ‘선생님, 선생님’ 하는 것을 보고 “나보고 선생이라 말고 헌신짝이라 하시오”라고 부탁했다.

초기에 동광원에서 호칭으로 김양, 이양 또는 김공, 이공 하고 불렀다. 공은 공公이 아니라 이공선생님의 호를 따라서 빌 공空이라 한 것이다. 다석은 동광원에서 강의하면서 이런 호칭 문제를 거론하였다. 일제강점기에는 김상, 이상, 이렇게 상을 붙이더니 미국이 오자 이제는 미스 리, 미스터 김 하는데 이게 주체성이 없는 짓이 아니냐, 우리는 순 우리말의 호칭을 찾아보자 했다. 그래서 제안한 것이 언과 눈이었다. 남성에게는 언, 여성에게는 눈이라 하자고 했다. 언은 ‘어진 이’라는 뜻이고 눈은 ‘순결하고 깨끗하다’는 뜻이었다. 그래서 이현필은 일기에 눈과 언을 사용하며 그렇게 따르자 했지만 이현필선생이 세상을 떠나자 눈이란 호칭은 사라지고 언님이란 호칭만 남았다. 그리고 남성들에게 적용한 것이 아니라 수녀들을 호칭하면서 언님으로 불렀다.

 

 

1.6 사랑으로 살다가

 

김광석은 전남 곡성 사람으로서 이현필의 제자였으나 나이는 이현필보다 위였다. 유순한 눈에 긴 수염을 기르고 있었다. 기도를 많이 하는 분으로 어떤 때는 보리쌀 미숫가루 한 포대를 만들어 메고 광주 무등산에 들어가 미숫가루를 물에 타 마시면서 몇 달씩 보내기도 하는 분이었다.

김광석이 한번은 지리산 오감산이라는 절벽 위에 초막을 지어 놓고 3개월 동안 특별기도 중에 있었다. 어느 해 정월 보름날이었다. 서리내에 거처하며 제자들을 지도하고 있던 이현필에게 누가 찹쌀로 지은 인절미 쑥떡 몇 개를 가져다주며 잡수시라고 했다. 이때 이현필은 오감산 속에서 기도하고 있는 제자 김광석의 생각이 났다. 차가운 겨울 눈 속에 갇혀 얼마나 시장할까? 이현필은 떡을 수건에 싸서 옆구리에 끼고 맨발로 산속 길을 따라 40리를 걸었다.

이현필 선생에게 이 산길은 익숙한 길이었다. 앞서 지난해에는 김금남의 이모 강차남이 오감산 초막에서 기도하고 있었는데 그때도 밤새 눈길을 헤치며 찾아간 일이 있었다. 그때는 눈이 너무 많이 와서 먹을 것도 없이 혼자 고립되어 무사하게 계시는지 염려가 되어 찾아 나선 것이다. 무릎까지 빠질 정도로 폭설이 내렸기에 먹을 것도 없이 혼자 떠나시고자 하였다. 그렇지만 오감산으로 떠나시려는 기색을 알아차린 다른 수녀 두 사람도 선생의 허락도 없이 멀찍이 떨어져 선생을 뒤 따라 나섰다. 그 두 수녀의 이름은 김금남과 방순갑이었다. 선생의 허락이 없이 나섰기 때문에 보이지 않을 만큼 뒤 떨어져 걸었는데 선생은 아는지 모르는지 앞만 보고 걸었다. 눈 덮인 지리산 고개고개를 넘으면서 앞서 가는 이현필도 뒤따라가는 두 수녀도 몇 번이나 눈에 미끄러져 구르고 옷깃에는 고드름이 주렁주렁 달렸다. 천신만고 끝에 강차남의 움막에 도달하였지만 안부를 여쭙고 곧 바로 돌아서야 했다. 함께 도착한 김금남 방순갑과 함께 네 사람은 힘찬 찬송을 불렀다. 감격스런 순간이었다. 오후 내내 걷고 걸어서 밤중에 도착했지만 비좁은 초막에 들어 앉아 쉬고 있을 수도 없었다. 그래서 그 길로 곧장 다시 밤새도록 걸어서 되돌아 온 일이 있었다.

이현필과 수녀들은 정월 대보름의 밝은 달빛을 받으며 밤새 산길을 걷고 걸어서 오감산 김광석의 기도처에 도달하였지만 아직 날이 새지 않았다. 이현필은 김공이 아직 자고 있을지 모르니 여기서 기다리자 하면서 함께 찬송을 불렀다.

산중에서 혼자 기도하고 있던 김광석은 갑자기 어디서 찬송가 소리가 들려오니 설마 사람이 와서 찬송하리라고 생각되지 않았다. 그래서 자기가 기도한 데 대한 하나님의 응답으로 천사가 온 줄 알았다.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하늘의 천사를 영접하려고 천막의 문을 열고 절을 계속하며 고개도 들지 못하고 걸어 나왔다. 그림자 앞에서 엎드리는데 익숙한 음성이 들렸다.

“김공, 얼마나 고생하시오.”

깜작 놀라 고개를 들어보니 이현필선생이 서 계셨다. “어서 들어갑시다.” 이현필은 제자를 재촉해 방에 들어가자마자 떡을 내놓으면서 “김공, 어떻게 지내시오?”하고 물었다. “네, 시래기에 고구마나 토란 등 먹고 지냅니다.” “그럼 시래기 국물 좀 끓이시지요.” 하며 끓인 시래기 국에 가지고 온 떡을 대접했다. 그리고 함께 간 제자들과 감격에 겨운 찬송을 불렀다. “아, 십자가. 아, 십자가. 갈보리 십자가는 저를 위함이오”라는 찬송가를 목청이 떠나가게 부르며 찬양했다.

이현필이 세상을 떠난 뒤 김광석 집사에게 엄두섭목사가 찾아가서 “장로님, 이현필 선생 이야기 좀 해주시오” 했더니, 김광석은 얼른 대답을 못하고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말했다.

“나는 예수를 보지 못했습니다. 나는 우리 선생님이야말로 예수님 같은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선생님을 볼 때 나는 예수님을 생각했습니다. 선생님의 사랑은 지극했습니다. 믿는 사람은 신(神)이라합니다. 성신이 같이 계신 사람이라야 그의 거짓 없고 끝없는 사랑이 계속 됩니다. 이 육신의 껍데기를 보고 사람이랄 수는 없습니다. 나사렛 예수는 아니더라도 예수님의 성신이 같이 계신 사람은 예수님 같은 참사람입니다.”

6.25전쟁이 끝난 직후 이현필과 동광원 가족은 광주 양림에 있는 외국 선교사들의 빈 주택과 동산 안에 빈 교사들을 임시 빌려 거처했다. 1950년대 중반의 그 무렵의 동광원 식구는 백 명을 훨씬 넘는 대가족이었다. 식량은 배급을 받을 때였는데 한 사람이 하루에 쌀 3홉씩 받았다. 그것으로는 배가 고팠다.

이현필과 제자 김준호는 신학교 기숙사로 사용하던 건물에 함께 살았는데 겨울인데도 온돌방에는 불을 때지 않아서 뼈저리게 차가왔다. 그렇게 살면서도 제자 김준호는 다 떨어진 헌 누더기 옷을 입고 깡통을 들고 하루 종일 집집으로 구걸 다니며 걸식탁발을 하였다. 저녁 늦게야 집이라 해서 돌아왔지만 누구 하나 반가이 영접해줄 사람도 없었고 하룻밤 따뜻하게 쉴 구석도 없었다. 밖에는 계속 눈이 내리는데 밤은 열시가 지났다. 그때까지 자리에 눕지 않고 방구석에 묵묵히 앉아 생각에 잠겨 있던 이현필의 눈치를 보니 눈 오는 이 밤에 배고프고 헐벗은 겨레들의 가련한 얼굴들이 자꾸 머리에 떠오르는 모양이었다. 이윽고 이현필은 제자 김준호를 나지막이 불렀다.

“준호, 이렇게 눈 오는 밤에 가장 헐벗고 굶주린 사람이 있을 것 아닌가.”

김준호는 선생의 눈치를 살피면서 말했다.

“오늘 종일 다니며 본 사람들 중에 양림 다리 밑에 누워 앓고 있는 거지가 있습니다. 덮을 것도 없이 이런 추위 속에 얼어 죽을지 모릅니다.”

제자의 말을 듣자 이현필은 방구석에 있던 단 하나 밖에 없는 이불을 김준호 쪽으로 밀어 보내면서, “준호, 이것을 가지고 가서 덮어주고 오시오”했다.

눈 오는 겨울밤 선생과 제자 둘이서 덮고 지내는 이불마저 남에게 주라는 것이었다. 김준호는 이내 후회가 되었다.

‘내가 어째서 주책없이 그런 대답을 했던가!’

김준호는 후회가 되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할 수 없이 선생이 시킨 대로 이불을 메고 눈에 미끄러지면서 다리 밑의 병든 거지에게 덮어주고 돌아왔다. 그러나 그 다음 날에 가서 보니 그 이불은 건강한 다른 거지가 와서 빼앗아 가버렸다. 그 시절의 이현필은 몰골이 참혹할 정도였다. 조끼도 없이 맨 저고리에 엷은 바지를 입고 불도 때지 않은 방에서 요도 없이 앉아 추위에 떨고 있었다. 바지가랑이가 헤어져 살이 드러나서 손으로 움켜쥐고 다녔다. 수염도 깎지 않고 흐르는 콧물은 손잔등으로 닦았다. 거지 중에도 상거지 모습이었다.

이현필은 자기 건강을 살펴볼 때 오래 못가서 세상을 떠날 줄 알고 모든 것을 버리고 어디 가서 혼자 죽고 싶었다. 이현필의 몸이 약하게 된 것은 산중의 기도생활로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자지도 못한 때문이겠지만 당시 홀로 농사를 짓고 있는 어머니들의 농삿일을 돕느라 너무 과로한 탓도 있었다. 한번은 응실 어머니의 추수를 돕다가 몸을 다친 일도 있었다. 즉 지게에 무거운 나락의 볏짐을 지고 가다가 구렁에 넘어져 갈비를 크게 다쳤는데 그게 늑막염이 되어 고생을 하게 되었다. 그 이후 제대로 치료도 받지 못하고 하여 건강이 계속 악화된 것이 아닐까 하는 의견도 있었다.

그 이후에도 쉬지 않고 뛰어다니며 전도하고 환우를 돌보며 자기를 돌볼 겨를도 없이 지내다 결핵에도 걸려 폐가 다 망가지고 후두 결핵으로 말도 제대로 못하며 지내기도 하였다. 이현필은 1954년 동광원의 폐쇄로 마음의 상처를 크게 받았다. 온 힘을 다하여 고아들을 돌보았지만 주위의 시선은 편견과 시기로 곱지 않았다. 이현필은 모든 것을 정리하고 소리 없이 사라지고 싶었다. 다시 화순의 도암으로, 화학산으로, 지리산으로 찾아가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기도에 전념하다가 떠나고 싶었다. 하나님의 은혜만을 전하고 싶었다. 우선 믿음은 은혜와 사랑의 세계라는 것을 전하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 힘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은혜로 되는 것임을 밝혀야 했다. 그래서 1956년 무렵에 서울에 올라가 제자들을 만나기로 하였다. 떠나기 전 모두에게 마지막처럼 작별하고 기차에 올랐다. 기차에 올라가서 가장 오랜 동지인 오북한 집사의 무릎을 베고 누워서 서울까지 갔다. 서울 신촌 부근에 일본인들이 방공호를 만든 것이 있어 막내제자 한영우가 거기서 살면서 넝마주이를 하고 있었는데 업혀서 거기로 갔다. 담요 한 장도 없는 거지들이었다. 한영우가 묘지에서 주워온 썩은 칠성판을 땅에 깔고 이현필을 그 위에 눕혔다.

이현필은 자기를 따라온 남녀 제자들을 모두 곁에서 떠나보냈다. 그날 밤 이현필은 송장같이 칠성판 위에 누워 그동안 금욕고행의 수행자로 살아온 자기의 일생을 정리하고 싶었다. 그리고 모든 제자들이 자기를 본받고 그렇게 수행해야 되는 줄 짐작하는 제자들에게 올바른 믿음의 신앙을 전하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진실하고 바른 태도가 무엇인지 정리하려 했다.

“주여, 저는 이 순간까지 예수님을 섬기는 데 있어서 선행위주(善行爲主)의 생활을 해왔습니다. 오늘 저는 그동안 잘못 믿어온 점을 자백합니다. 제게 있어서는 선행이 귀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 보혈의 사랑이 귀할 뿐입니다. 저는 앞으로 주님의 사랑을 의지하는 신앙으로 뛰어 들어갈 것입니다. 제가 오늘 이대로 죽는다면 저를 따르는 모든 사람들을 온통 철저한 율법주의자들을 만들어 버리는 결과가 됩니다. 이대로 죽으면 저는 천국에 가서 예수님께 대하여 역적 같은 놈이 되리라 느낍니다.”

“나는 위선자입니다. 나도 그리스도 십자가의 공로에 의지하여 구원을 얻을 사람이지 나의 선행이나 금욕고행으로 구원 얻으려는 사람은 아닙니다.”

그날 밤 이현필은 사경을 헤매면서도 이 모든 고백을 하면서 그의 고해(告解)를 받고 있는 일생의 동지 정인세에게 종이 그대로 기록케 했다. 새벽녘에 넝마주이 한영우를 부르더니, “무슨 고기든지 좋으니 먹을 고기를 사오라”고 했다. 막내제자 한영우는 선생님이 시키는 대로 굴비 한 마리를 사서 동냥 다닐 때 쓰는 때 묻은 깡통에 물을 붓고 끊여 가져왔다.

“수고했소, 그 국물을 내 입에 떠 넣어 주시오.”

제자는 시키는 대로 했다. 고기 국물은 후두결핵으로 말 못하는 이현필의 목으로 넘어갔다. 국물이 목을 넘어가는 이 파계(破戒)는 하나님의 뜻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멸치 한 마리 입에 넣은 적이 없는 선생의 이 파계를 놓고 곁에 있던 제자들은 의아하게 여겼다.

“선생님이 지금 시험에 들었다.”

어떤 제자는 이렇게 말하며 선생의 입에 고기 국물을 떠 넣는 것을 저지하고자 했다.

그러자 이현필은 “당신이 하나님이요?”라고 책망하면서, 제자를 보고, “어서 고기 국물을 내 목에!”라고 재촉했다.

그 아침에 염려하여 찾아온 동지 정인세에게, “이 개 같은 것을 보려고 왔습니까? 원장님, 제가 고기를 먹었습니다. 동광원에서 저를 책벌(責罰)해 주십시오”했다. 정인세 원장은 평양신학교에도 다닌 분으로 지금 이현필의 파계에 대해 경의를 표했다. 이선생은 필담으로 “광주로 내려갑시다” 하고는, 제자들 보기에는 패잔병같이 광주로 돌아왔다. 평생 약을 쓰지 않고 제자가 병들어도 약을 쓰지 않던 그가 광주에 도착하자마자, “제중병원으로 가자!”고 했다.

이현필이 그 동지들과 일으킨 운동으로는 동광원에 이어 송등원(松燈園)을 세웠다. 광주에서 현동완 Y총무, 고허번선교사, 정인세, 최흥종 등과 협동하여 폐질환자 요양 사업으로 설립했다.

이현필이 김준호와 함께 제중원에 입원했지만 김준호만 남겨두고 얼마 후 퇴원을 하였다. 병원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이현필은 막무가내로 퇴원을 한 것이다. 이때 결핵환자는 수 없이 많은데 치료약은 턱없이 부족했다. 그래서 이현필은 자기를 위하여 비싼 치료약을 먹고 있을 수 없었던 것이다. 모든 사람이 다 치료받을 만큼 약이 넘치면 모를까 그렇지 않으면 자기는 맨 나중에 치료받겠다는 심정이었다. 말하자면 모든 사람이 천국에 들어가기까지 자기는 천국에 가지 않겠다는 보살의 심정이었다. 모든 사람들이 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을 보고서야 자기도 천국에 들어가야겠다고 하는 만인구원의 소망이요 사랑이었다.

당시 병원은 부족하고 환자들이 넘쳐나서 제중원에 입원하면 완치 여부와 상관없이 6개월 지나서 무조건 퇴원해야 되는 규정이 있었다. 아직 중환자로 치료 받지 않으면 죽게 되는 환자라 해도 병원에서 쫒겨 나야 되는 현실이었다.

이런 사정을 김준호가 알게 되어 이현필에게 보고했다. 이현필이 그 상황을 현동완 총무에게 알려서 이런 폐질환자들을 돌보는 기관을 만들자 하고 송등원을 만들게 된 것이다. 송등원과 관련된 모든 계획, 운영, 인사 문제까지 이현필이 직접 지도했는데, 이것이 후에 무등원(無等園)으로 발전되어 한 때는 요우(僚友)가 백여 명에 이르기도 했다.

 

 

 

1.7 아, 빛나는 대한

 

이현필은 생애 말년에 후두결핵 때문에 무척 고생했다. 성인들의 말년은 복되고 평안하리라 짐작하는 것은 타당한 견해가 못된다. 성 프란치스코의 말년이 비참했던 것처럼 이현필도 그랬다. 기침과 가래가 심하고 목이 아파서 말을 하지 못했다. 한 동안은 40여 일 동안이나 물도 삼키지 못했다. 얼음을 잘게 깨서 입에 한 개씩 넣고 수분을 빨며 지내기도 하고, 몸에 열이 심하고 갈증이 더할 때는 얼음을 손바닥에 쥐고 열을 식혀 보기도 했다.

1964년 52세 때 광주에서 한 달간의 신년총회를 마친 이현필은 다시 서울에 가기로 결심했다. “종로 거리에서 사람들에게 깨끗하게 살 것과 가난 한 생활을 사랑할 것을 전해야겠다.”고 했다.

이것이 이현필이 정든 광주와 동지와 제자 수 백 명과 마지막 이별하는 걸음이었다. 그의 몸은 극도로 쇠약하여 스스로 몸을 가누지 못했다. 마지막 고별집회를 열고 새벽, 낮, 밤 성경을 가르치러 집회소에 나갈 때는 제자들이 업고 나갔다. 한번은 강의 시간이 적어도 두세 시간씩 걸렸는데, 집회를 마치고 거실로 돌아와서는 송장같이 뻣뻣이 누워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래도 설교 시간만 되면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나는지 우스운 얘기도 하고 질문도 하며 “아, 기쁘다. 참 기쁘다”고 했다

이 마지막 집회 때 성경 본문은 누가복음 14:25-35였다.

무릇 내개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형제와 자매와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먼저 앉아 일만으로서 저 이만을 가지고 오는 자를 대적할 수 있을까 헤아리지 않겠느냐

마지막 집회 때에는 수도단체로서는 늘 상 엄격했던 격식을 깨뜨리고 춤도 추고 노래도 부르게 했다. 이현필 자신도 회중과 함께 어울려 기뻐하면서 그가 즐기는 농부가를 발을 맞추어 가며 불렀다. 모두 천국의 어린아이들 같았다.

농부가

1. 딩동 댕동 보슬비는 단비를 주고

철썩 철썩 거친 파도 집터를 닦네

둥실 둥실 밝은 달은 길을 밝히고

송이 송이 꽃송이는 힘을 주누나

(후렴) 빛나는 대한 빛나는 대한

아름다운 강산이라 얼싸 좋구나

2. 구불구불 힘찬 산맥 산애를 낳고

굽이굽이 시냇물은 집애를 낳네

산의 나무 다듬어서 집을 짓고요

들의 곡식 거두어서 밥을 짓고요

 

3. 억천만년 길이길이 살아지이다

자자손손 널리널리 퍼져지이다

손에 손에 괭이 들고 이 땅을 파서

싱글 싱글 웃으면서 힘차게 살자

 

빛나는 대한, 이 노래의 3절을 부를 때는 한층 더 신나는 표정이었다. “빛나는 대한, 빛나는 대한” 하고 소리 높여 부를 때 이현필의 몸은 둥실 둥실 춤을 추는 듯했다.

 

“아 아. 사랑으로 모여서 사랑으로 지내다가 사랑으로 헤어지라! 이번에 헤어지면 우리는 언제 또 만나질 모른다.”

“정절(貞節)을 지켜야 그리스도의 은혜를 갚는 일이 된다. 우리 몸이 성전이 되어야 빚을 갚아진다. 음란과 돈을 이기는 일이 곧 세상을 이기는 일이다.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셨으니 자기가 선택하여 좁은 문으로 들어갈 수 있다. 자기를 거룩하게 하는 일이 인생으로 해야 할 최대의 사업이다. 사람이 타락하는 일이 경각간이지만 그 영이 어두워지는 단계는 여러 해에 이른다. 이 세상은 악한 세상이지만 동남동녀를 보시고 용납하고 계신다. 물질이 없어도 살수 있다고 믿어졌으면 그것이 천국이다.”

 

이현필에 대해 엄두섭은 평가하기를 “한국 개신교 2백년사에서 이현필 같은 성인이 없다. 그는 이단자도 아니요, 사교의 교주도 아니다. 그는 한국 종교계에 자주 나타나는 자칭 재림주도 아니다. 그는 철두철미 자기가 죄인인 줄만 알고 참회자의 생활을 보내면서 예수님을 닮으려고 목술 걸고 정진했다. 그에겐 교파도 교회도 없었고 단독으로 섰다. 그러면서 그만치 그리스도 십자가 사랑에 자주 통곡한 사람은 없었다.”고 하였다.

엄두섭은 기성 교회나 종교계의 지도자들이 이현필 같은 이런 의인듥을 알아보지 못하고 오히려 핍박한다고 질타했다. “의인을 돌로 치는 한국 사회, 진정한 하나님의 종을 핍박하고 매장하는 기성 종교계. 순교자 주기철 목사는 평양노회에서 제명당했고, 열정의 부흥사 이용도도 제명당했다. 인정이 메마른 한국 땅에 태어나 예수처럼 살아보려고 무척 애쓰던 이현필도 기성종교계에서는 그를 알아주지 않았고, 돕는 이도 없었다.”

 

 

1.8 귀일원을 하시오

 

어느 날 정인세 원장이 이 산중을 찾아와 벙어리 도 닦는 이현필 선생의 산막을 찾았다. 고요한 밤 호롱불 하나 가운데 두고 희미한 불빛 아래 앉아 두 사람은 서로 종이에 필담을 했다. 이선생은 금식기도 중에 가슴에 무슨 지시를 받은 것이 있었던지 종이에다 귀일원(歸一院)이라고 썼다. 그리고 정선생에게 필담으로 권하기를 “곧 나가셔서 광주 역전에서 헤매는 사람들을 데려다 따뜻하게 대접하여 하룻밤씩 재워 보내는 운동을 하시오. 이 운동은 동광원 운동이 아닙니다. 귀일원입니다. 동광원 사람만 말고 누구나 역에 나가 비참하게 보이는 사람들을 보고는 하룻밤씩 재워 보내는 운동입니다. 곧 하십시오. 그리고 반드시 시행하십시오.”

이현필은 워낙 먹는 문제를 초월한 분이었기 때문에 그를 따르는 제자들이 가장 골탕 먹는 어려운 일은 선생처럼 음식을 초월해내지 못하는 일이었다. 벙어리 수도를 그냥 계속하다가 어느 날은 김준호에게 벙어리 짓으로 마당 한구석을 가리키면서 파보라고 했다. 파 보니 거기서 무가 나왔다. 손짓으로 자기에게 한 개 달라고 해서 받아들고는 와락와락 씹어 잡수지도 않고 밤새 주무시지도 않고 채근담 하듯 날이 새기까지 무를 빨기만 하면서 사색을 했다. 선생의 가슴 속을 누가 다 알까마는 아마 그때가 귀일원에대한 새로운 구상이 가슴 속에 태동할 때였던 것 같다.

이현필 선생이야 수도가 깊어서 밤새 무 한 개를 빨고만 있었지만 여기 딱한 문제 하나는 그 밤 같은 방에서 선생 곁에 누워있던 젊은이의 경우다. 하루에 겨우 쌀 한 홉으로 밥 지어 먹으며 연명해 가는데 배가 고프지 않을 수 없었다. 배는 고픈데 바로 곁에서 밤새 선생이 무 빠는 소리에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매일 금식하고 지내는 선생이 무 한 개를 얻어 들고 빨고 있는데 김준호는 그래도 하루 한 홉씩이래도 쌀밥 먹고 지내는 처지에 선생의 무를 좀 달라고 하는 말은 차마 못했다.

이현필은 김준호에게 “혼자 있고 싶으면 있고, 가고 싶으면 가라”고 했다. 그래도 무 때문에 안가고 기어이 땅을 파서 무 다섯 개를 캐냈다. 배고픈 김에 다 먹으려 했으나 막상 먹어보니 가슴이 쓰려 하나도 채 먹지 못하고 말았다. 그때 김준호의 눈에는 새삼 선생의 인격이 커 보였다. 철저히 자기 억제를 해내고 인간의 감정과 욕정을 초월한 선생과 자기와의 사이엔 너무도 엄청난 차이가 느껴졌다.

이현필은 협동조합도 조직해서 가난한 사람들끼리의 공동생활을 권장하고 산에 나무심기 운동을 일으켜 밤나무 등을 심게 했고, ‘무화과회’, ‘포도회’ 등도 만들었다. 무의탁 장애인을 돕는 운동과 한 끼에 한 술씩 양식 모으는 ‘일작운동’(一勺運動)을 일으켜 남을 돕자고 했는데 이것이 오늘의 귀일원(歸一園)이 시작된 계기가 되었다.

60년대 초반에 경기도 모처에서 농촌 문제를 위한 전국적인 강연회가 개최되었다. 능곡에 사는 이현필의 제자가 보니 여러 쟁쟁한 강사들이 연단 위에 앉았는데 그 중에 이현필도 끼어 있었다. 다른 강사들은 양복을 입고 안경 쓰고 그럴 듯하게 앉아 있었는데, 이현필만은 괴상하고 형편이 없었다. 헌 무명의 바지저고리를 입고 앉았는데 저고리는 어찌 작은지 팔목이 나오고 바지도 무릎위로 올라가 있었다. 게다가 발은 맨발이었다. 그러나 당사자인 이현필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버젓이 신사들 속에 섞여 앉았다가 자기 강연 순서가 되니 버젓이 나가서 열변을 토했다.

제자가 사정을 알아보니 이현필은 지방에 있다가 서울에 강사로 초청되어 올라오는 도중에 기차에서 고아를 만나 자기가 입고 있던 옷을 벗어 고아에게 입히고 그 고아의 옷으로 바꿔 입고 그 중대한 모임의 강사로 나선 것이었다.

누군가 이현필에게 “어떻게 믿으면 잘 믿을 수 있습니까?”라고 물으니, “거지가 오장치를 짊어지고 나서듯 믿으라”고 대답한 적이 있었다. 오장치는 오쟁이라고도 부르는 것으로서 거지가 빌어먹으러 다닐 때 잔등에 지고 다니는 구걸망태다. 모든 것을 버리고 빈 몸과 빈 마음으로 예수를 따라 나서야 된다는 것이다. 이현필은 자기가 말한 그대로 그렇게 예수를 믿었다.

어느 때는 수녀 제자들이 이현필선생과 의논한 뒤 어떤 빈 집의 벽장 속에 누워 앓고 있는 거지를 가마니로 들것을 만들어 들어다 동광원에 옮겨 간호하기도 했다. 그 거지는 누운 채로 뒤를 보고 뭉개서 너무도 더럽고 냄새가 났지만 예배 처소에 눕혀 놓고 25일이나 간호하고 돌보았으나 끝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1.9 깨끗하게 살다 오시오

 

이현필은 1964년 신년 총회에서 마지막 고별집회로 여러 날 계속하여 말씀을 전하였다. 그리고 자기가 세상 떠날 시기가 임박한 것을 의식하고 급한 마음으로 서울로 상경했다. 신촌에서 능곡을 거쳐 생전에 그가 사랑하던 경기도 벽제 계명산으로 올라왔다. 계명산에는 일찌기 정한나 수녀가 이희옥 박공순과 함께 깊은 산 속에 굴을 파고 움막을 짓고 거처하며 개척한 동광원 분원이 있었다. 산수 좋은 앵무봉 골짜기에 흐르는 개울가 깊은 곳에 현동완 총무의 기도처가 있었는데 1956년 현총무를 따라왔던 정한나 수녀가 이곳이 수도처로 마음에 든다고 그 이듬해 이희옥 박공순과 함께 수도처로 개척한 것이다. 그 이후 차츰 여러 동광원 수녀들이 들어와 함께 살면서 벽제동 상곡의 마을 주민들에게 여러 선행을 베풀자 마을 사람들은 그 골짜기를 수녀들이 사는 골짜기라 하여 ‘수녀골’이라 부르기 시작하였다.

이현필이 광주 방림을 떠나는 날, 각처 분원에서도 떠나는 선생님을 한 번이라도 더 보려고 제자들이 달려와 울었다. 광주역에서 태극호 기차를 타고 가는 차중에서도 선생을 모시고 간 조정은 수녀에게 “끝까지 동정(童貞)을 지키시오. 깨끗이 사시오” “청빈생활을 사랑하시오. 음란은 죄입니다. 동정을 지키고 깨끗이 사시오” 하면서, 종로 거리에 나서서 이 부르짖지 못함이 한이라고 말했다.

계명산에 올라와 첫 날밤은 베틀집에서 지내며 예배를 인도했다. 베틀집이란 명칭은 훗날 박공순이 베틀을 갖다 놓고 밤낮 베를 짰던 집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날이 밝자 이현필은 1키로쯤 더 골짜기를 따라 올라가서 현동완총무의 기도처로 옮겼다. 인생의 마지막 자리를 잡고 며칠을 앓는 동안 이현필은 기도에 파묻혀 지냈다. 별세하기 전날 조정은 수녀가 밖에서 불을 때고 있는데 방안에서 이현필 선생이 누구하고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렸다. 밤새 그랬던 것 같다.

“예. 예. 저는 죄인입니다. ...예...”

조정은이 목욕물을 데워 들고 선생 방에 들어가서 물었다.

“선생님, 새벽에 누가 왔습니까?”

선생은 웃으면서 “주님께서 내일 새벽 3시에 오라고 하셨습니다.”고 했다. 3월 17일 저녁에는 동광원 계명산 분원에 있는 식구들을 모아 예배를 드리고, 그들을 위해 지극한 사랑의 기도를 드렸다. 3월 18일 산장의 새벽은 너무도 고요했고 엄숙했다. 남녀 제자들이 임종하려는 선생을 가운데 두고 둘러앉았다. 이현필은 그중에 가장 나이 어린 수녀 하나가 마음이 동요되는 것이 걱정되어 임종하면서도 그 수녀보고 계속해서 “생각해 보셨습니까? 어떻게 하시렵니까?”라고 물었다. 숨이 막혀가면서도 그 수녀의 대답을 기다렸다.

“나는 지금 곧 숨이 끊어져갑니다. 내 숨이 떨어지기 전에 대답해 주시오... 어떻게 하시렵니까?”

그러나 그 어린 수녀는 울기만 하고 대답을 못했다. 순결의 길은 초월의 길이다. 이현필은 일생 그것을 얼마나 강조했는지 모른다. 전신에서 땀이 비 오듯 흘리며 숨이 급해 헐떡이면서도 계속 말했다. “한 사람을 기쁘게 하려다가 많은 성인 성녀들께나 천군 천사들에게 눈물 드리지 마시오... 나, 곧 죽습니다. 대답하시오.” 그러나 그 수녀는 울기만 하고 끝내 시원한 대답을 못했다.

수녀들이 깨끗이 준비해 두었던 선생의 바지저고리를 수의로 입혀 드렸다. 그러나 이현필은 입자마자 그 옷을 벗어주면서, “이것은 내가 깨끗이 입은 것이니 내가 죽으면 이 옷을 없애 버리지 말고 헐벗은 사람에게 주어 입게 하시오.”했다. 그리고 자기의 입던 옷을 다시 입고는 죽은 다음에 시체에 수의를 입히지 말고 입던 채로 묻어줄 것을 부탁했다.

벽제 수녀원에는 누구를 위해 새로 준비해 둔 관(棺) 한 개가 있었는데 이현필이 운명하면 거기 모시려 했다. 이것을 안 이현필은 자기 시신에 관을 쓰지 말라면서 자기는 죄인이니까 거적대기에 싸서 그냥 아무나 밟고 다니는 길에다 묻어라 했다. 그리고 뫼분상을 만들지 말고 평토장을 해 달라고 유언했다. 뫼분상을 만들어 놓는 이는 화를 받을 것이라고 했다.

최후 순간이 가까워지면서 몸은 불덩이 같이 뜨거워지고 호흡은 금방 끊어질 듯했다. 그런 중에서도 그는 기도하면서, “주님, 저는 주님을 사랑하고파 무척 애썼습니다. 주님, 저는 지금 주님의 십자가를 지고 갑니다.”고 했다.

잠시 쉬었다가 이내 곧 뜨거운 열기가 더하여 숨이 금방 끊어질 듯 막혀 오는 중에서도, 이현필에게는 형언할 수 없는 이상한 기쁨, 희열의 파도가 밀려왔다.

“오매 기쁜 것! 오매 기쁜 것! 오 기뻐! 오매 기뻐 못 참겠네. 아이고 기뻐!” 이렇듯 숨이 끊어지는 듯싶다가 다시 돌아올 때면 “아이고 기뻐! 오매 기쁜 거. 오매 기뻐 못 참겠네.” 하였다. 이현필은 이런 기쁨을 종로 네거리에라도 나가서 전하고 싶다고 했다.

마지막을 떠나는 이현필에게 이런 환희의 물결이 터져 나왔던 것이다. 성령의 기쁨이, 희열이 올라온 것이다. 임종 수일 전부터 이런 기쁨이 밀려와서 어쩔 줄 모르더니 이제 절정에 이른 것이다.

마지막에 이현필은 주위에 둘러앉아 안타까이 지켜보고 있는 제자들을 바라보며 “제가 먼저 갑니다. 깨끗하게 살다가 다음에들 오시오!” 하며 고요히 눈을 감았다.

1964년 3월 18일 새벽 3시였다. 52세, 성인다운 임종이었다. 평소 무릎을 꿇고 앉은 채 얼굴은 하늘을 향해 쳐다보면서 기도했지만 마지막에는 고요히 누워서 임종했다. 이현필의 마지막을 시종 곁에서 지켜보던 이희옥 수녀는 선생님의 평소 모습이 마치 성화 속에 그려진 예수님의 모습,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던 예수님의 모습처럼 느껴졌다고 말했다. 박공순 수녀도 말하길 이선생님처럼 옷이나 침상에 오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마지막까지 그렇게 깨끗하게 살다 가신 분을 보지 못했다고 했다.

다석 유영모도 늘 깨끗하게 살 것을 강조하였다. 깨끗하다는 것은 깨서 끝을 낸다는 것이라 하였다. 깨어 기도하는 삶으로 끝까지 깨끗하게 살며 마무리할 것을 다 마치고 죽는 고종명考終命의 삶을 말하는 것이다. 다석이 계명산에 올라와서 김금남으로부터 이현필선생의 소천 소식을 듣고는 무릎을 탁 치며 “깨끗하게 시원히 잘 갔소.”하였다고 한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김금남 수녀의 마음도 똑 같은 마음이 들어서 “예, 잘 가셨습니다.”하는 소리가 저절로 나왔다고 한다. 존경하는 선생님이 육신으로는 떠났지만 부활의 영으로는 영원히 함께 계심을 느끼기에 슬픔이 아니라 기쁨으로 평안으로 장례를 치렀다는 것이다.

이렇게 이현필도 이 세상에 내려왔다가 다시 하늘로 올라간 사람이지 땅에서 나왔다가 땅으로 들어간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1981년에 떠난 다석 유영모도 그런 믿음의 사람이었고 2017년에 떠난 박공순도 또한 그런 믿음의 사람으로서 깨끗하게 생을 마치고 하늘로 올라가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시는 영생이 되신 분이다. 이처럼 이현필의 믿음은 오늘도 계속 이어지고 있으며 또한 그분을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성령의 은혜가 지금 이곳에서도 참을 찾아 기도하는 이들에게는 넘치도록 풍성한 오늘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