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일

계묘년 마지막 달력 : 맨발의 성자 이현필

mamuli0 2023. 12. 1. 15:20

 금년 마지막 달력이 걸렸다. 벌써 한해가 다가고 있다. 대설 주의보가 내린 오늘 진도에는 비가  내렸다.  아직도 수확을 못한 울금을 수확하고 있다.

 

 최근에 소개받은 오래된 기사를 올려본다.

 

 

 

‘맨발의 성자’ 이현필

 

조연현 기자

한겨레신문 2007. 2. 17.

 

맨발로 눈길 걸으며 탁발 / 고아·환자 거둔 ‘사랑의 빛’

 

 

 

전북 남원 지리산 서리내. 원래 이름은 선인래(仙人來)로 신선이 온다는 산골짜기였다. 이곳을 찾아온 이현필(1913~1964)은 기도하러 숲속에 들어가면 그대로 나무가 되고, 바위가 되어버렸다. 다 떨어진 옷을 입은 채 꽁꽁 언 그의 머리 위 하얀 서리에서 아침 햇살을 받아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면, 새가 날아와 목석인 듯 쪼아댔다.

 

배고픈 그 시절 그는 “내가 먹으면 다른 사람 먹을 몫이 줄어든다”며 굶기를 밥 먹듯 했다. 뱃가죽이 늘 등에 붙어 있어 차마 눈을 뜨고 볼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런 그가 눈이 가슴까지 쌓인 어느 날 새벽 남몰래 길을 나섰다. 3일 동안 먹은 것이라곤 없는 상태였다.

 

 

이세종 선생에 감화해 수도 신분 불문 누구나 귀히 여겨

“장돌뱅이 중에도 의인 있다”자신도 폐병에 감염돼 ‘귀천’

 

당시 다른 수도자들과 함께 기도하던 여성수도자 금남은 행여 이 선생이 눈밭에 쓰러지지나 않을까 염려가 되어 다른 동료 한명과 몰래 뒤를 밟았다. 눈이 너무도 많이 와 어디가 땅이고 어디가 벼랑 끝인지 구분도 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현필은 사뿐사뿐 날듯이 나아갔다. 둘은 선생의 발자국만을 밟으며 따라갔다. 이현필은 그렇게 오감산까지 무려 40리를 걸었다. 오감산 산막에서 홀로 수도 중인 제자가 눈 속에서 얼어 죽지 않았을까 밤낮으로 기도하다가 몸소 눈밭을 헤치고 그를 찾아 나선 것이었다.

 

전북 남원시 대산면 운교리 남원동광원에서 이현필을 따르는 30여명의 수도자들과 함께 살아가는 김금남(79)원장은 스승을 회고하다 그의 사랑이 다시 느껴지는 듯 한동안 입술을 떤 채 말을 잊지 못한다.

 

이현필은 대중설교를 하지 않았다. 오직 한 사람, 한 사람의 영혼을 예수처럼 대했다. 그는 광주와 무등산 일대에서 여순반란사건과 6.25 후 거리를 떠돌던 수많은 고아들과 폐병 환자들을 거두었다. 그는 맨발로 눈길을 걸으며 탁발을 해서 고아와 환자들을 먹이면서 돌보다 결국 자신도 폐병에 걸려 51살에 귀천했다.

 

 

예수 그리스도 이후 최고의 성인으로 추앙받는 프란체스코와 이현필을 평생 탐구해온 은성수도원 창립자 엄두섭 목사는 “이현필은 프란체스코와 비교해 봐도 누가 더 우월하다고 할 수 없을 정도의 인물”이라고 평했다. 또 함석헌의 스승 유영모는 아들뻘인 그한테서 빛을 본 뒤 광주(光州)를 빛고을이라고 부르기 시작했고, 이를 들은 함석헌에 의해 빛고을이란 말이 널리 쓰이기 시작했다.

이현필은 전남 화순군 도암면에서 태어났다. 10대부터 기독교를 접해 전도사 생활을 하며 평범한 목회자가 될 수 있었던 그의 삶이 송두리째 바뀐 것은 ‘도암의 성자’ 이세종을 만난 뒤였다. 이세종은 “나 같은 사람이 또 하나 나올 것”이라고 예언했는데, 그가 바로 이현필이었다. 이현필은 스승처럼 아내와 육적인 관계를 단절하고 정절의 수도자가 되었다. 그는 화순 화학산에서 4년, 지리산에서 3년간 기도하던 중 신비체험을 통해 거듭났다. 그때부터 그의 눈은 육안에서 영안으로 바뀌었다. 광주에서 600여명의 고아들을 돌볼 때 그를 따르는 동광원 식구들은 자기 자식들을 고아들 속에 넣어 똑같이 길렀다. 걸인이나 창녀를 대할 때도 그는 천사처럼 귀히 대했다. 높고 낮고, 더럽고 깨끗한 육안의 시비 분별을 벗어난 영의 눈이었다. 그는 어떤 사람이든 어떤 물건이든 천히 여기면 자기도 천해진다고 했고, 사랑과 생명은 하나요, 사랑과 빛은 하나이며 십자가의 피는 사랑이요, 생명이라고 했다.

 

 

그에겐 기도 시간이 따로 없었다. 삶이 곧 기도요. 일이 곧 기도였다. 모든 것은 자급자족이었다. 그는 배부를 때 배고픔을 대비하라고 했고, 살아있을 때 죽음을 생각하라고 했다. 이처럼 철저히 미래를 준비하게 했고, 실내로 들어갈 때도 언제든 나올 때를 대비해 바깥쪽을 향해 신발을 가지런히 벗어놓고 들어가는 준비성이 몸에 배도록 했다. 또 밥을 먹을 때 한 숟가락씩 덜어 굶주리는 사람을 돕자는 일작(一 勺)운동을 펼쳤다. 이런 동광원의 훈련은 박정희에 의해 새마을운동 초대 연수원장으로 초빙된 그의 제자 김준에 의해 새마을지도자 훈련으로 이어졌다.

 

결핵환자를 돌보다 결핵에 감염돼 피골이 상접한 그를 업고 다녔던 한영우(78) 장로는 “선생님은 의인은 교회 안만이 아니라 장돌뱅이 가운데도 있다고 했다”며 “그의 사랑은 어떤 틀에도 갇히지 않는 우주적 사랑이었다”고 말했다. 지금도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광주 귀일원에서 중증장애인을 돌보고, 전북 남원, 장수, 경기도 벽제, 광주 무등산, 전남 화순, 함평, 진도 등에서 노동수도공동체를 일구어 호의호식과 출세와 성공과 승리의 대로가 아니라 절제와 양보와 헌신의 좁은 길을 말없이 걷고 있다.

 

이 기사는 <한국기독교 120년 숨은 영성가를 찾아…> 연재의 세 번째 글로 조연현(조현) 종교전문기자가 작성한 것이며, 자세한 내용은 『울림 – 우리가 몰랐던 이땅의 예수들』(한겨레출판 펴냄)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