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에서 동해로 가는중 철암탄광촌에 들려 간식을 하고 주변과 역사기념관을 보았다. 이어 백두대간을 넘어 스위치백 하이추추공원을 보고 동해에가니 하루해가 졌다.
지난번 다석 유영모 선생 주기도문 풀이를 올렸는데 관심있는 이들을 위해 강의 전문을 올려본다.
주기도 강의
1971.08.12. 유영모 선생
편안하게 쉬고 다시 일어났으니까 감사 하다는 겁니다. 그러나 얼마간 우리가 세상을 잊어버리고 없어졌었어요. 어떻게 그 세상을 잊어버리고 그렇게 없어졌었습니까? 얼마동안이나 그랬습니까? 어제께 아홉시에 시작을 해 잦더라도 아홉시 열시 열한시 열두시 한시 두시 세시에 깨어났다고 하더라도 일곱 시 동안을 잊어버렸습니다. 일곱 시 동안 그런데 시간이라는 속곡에 다다랐지요. 나중에 일곱 시 또한 보내려면 지루합니다. 대단히 깁니다. 그런데 그런 긴 시간이 어째 없는 것 같이 하다가 껌뻑하고 그러니까 벌써 종소리가 나요. 그 어떻게 그렇게 허무하게 나모르게 그렇게 없어졌어. 일곱 시간이나. 그러니까 잔다는 건 세상 잊어버리는 겁니다. 낑낑하고 잠이 안 들고 낑낑하고 자리에서 잠이 안 오고 이렇게 되는 거 그건 세상 길게 사는 겁니다. 그러나 세상 잊어버리고 자는 게 잘 자는 겁니다. 좀 잘 자는 게 싫다고 세상을 내버리고 없어졌던 겁니다. 우리가 목숨이 끊어져가지고 죽었다고 할 때에 어떻게 될 겁니까? 지금 죽음을 아주 싫어해요. 싱거운 거 죽음밖에 없는데 그 싱거운 죽음을 왜 그렇게 싫어합니까? 가령 죽어서 아무것도 없이 없어진다고 그래. 그렇게 정말 없어만 진다면 나는 감사하겠어요. 없어질 것 같지가 않아서 종교도 생기고 철학도 나오거든. 지난밤 없어지는 거 모양, 그렇게 없어지면 걱정이란 없습니다. 억만년이 지나보시오. 무슨 걱정이 있겠어. 그 어떠한 의미로 인생으로 나왔다가 돌아가는 것이 전쟁에 나온 겁니다. 싸우는 겁니다. 그럼 지난밤에 세상을 잊고 잘 일곱 시 동안을 잤다 그거 참 은혜입니다. 걱정 고생 이라는 건 다 있었어요. 만일 그게 그렇다면 참 복된 겁니다. 전쟁이 없어진 겁니다. 어떻게 세상을 모르게 잡니까? 은혜지요. 근심 걱정이란 도무지 없는 까닭에, 그 어떻게 이 세상 근심세상 걱정 세상을 어떻게 그렇게 잊어버립니까? 하나님께서 옆에 계셔서, 마음 놓고 다 내버리고 잊어버리고 아주 죽은 거와 같이 세상을 잊어버리고 쉬게 하신다. 그런 걸 자리에 누워 쉬는 거 믿음입니다. 잠 잘 드는 사람 믿음입니다. 아주 큰 믿음이야. 지금 세상에 잠 못 자는 사람이 많은데 그건 믿음이 없어 그럽니다. 믿음이 없어 멸망을 당합니다. 믿음이 뭔지를 모릅니다. 멸망을 당합니다. 우리가 기도하러 올 때에 감사 하다는 생각이 먼저 나와야 하는데 어째 나옵니까? 어째 나와요? 세상을 잊어버리고 자는 것은 그건 마지막에 숨이 지고 마는 때도 꼭 그렇거든. 일곱 시간 동안 도무지 우리들이 없었어요. 온 세상을 내버리고 온 세상이 없는 거와같이 잊어버리고 세상을 잊었었는데 다시 깨서 일어나는데 이거 왜 우리 기도하려고 일어나서 이 자리에까지 나와 앉았다는 겁니다. 그럼 기도할 때 맨 먼저 무엇을 기도할까요? 이거야말로 감사하는 마음이 솟구쳐 올라와야 합니다. 무얼 로 해 감사하겠습니까? 내가 세상을 안 잊어버리지 않았어요. 그냥 일어나졌어요. 깨어졌어요. 일어섰어요. 어떻게 일곱 시간 동안을 세상을 잊어버리고 없는 거와 같이 그렇게 있던 이것이 어떻게 깨고 어떻게 일어나고 어제까지 우리가 정신 차리고 어쩌고 하던 그것이 그대로 새벽 네 시에는 함께 모여서 또 기도해야겠다고 그런 생각을 가지고 어저께 사는 거와 같이 세상을 잊어버리고 하나님 속에 들어갔다가 일곱 시간 아주 잊어버렸어요. 그 다음에 깨었어요. 말하자면 일곱 시간 죽은 겁니다. 세상하고 나하고 상관없게 되요. 그랬는데 어떻게 깨고 어떻게 일어났습니까? 다시 살았어요. 이 세상에 다시 태어났어요. 그렇게 잊어버리고 자다가 이 몸통이 가지고 벌떡 일어서게 그렇게 속히 일어섭니까? 일곱 시간 동안 세상을 잊어버린 그 죽음에서는 깨보니까 벌떡 어저께 그대로 세상 잊어버리지 않았던 거 모양으로 익숙하게 여기까지 나와서 서있어 이 어떻게 된 거야? 그 살아있는 걸 모릅니다. 죽었다가 살아나. 다시 살았는가? 이렇게 새 세상 나타났다는 거 즐겁고 가만히 있을 수가 없을 거예요. 이거역시 일곱 시간을 긴 시간입니다. 시간 공간을 합해서 우리를 허락해 준거 그것이 하루 사는 건데 어저께도 하루살고 그 다음에 왜 일곱 시간씩 아주 없는 거와 같이 잊어버리고 세상을 잊고 어떻게 있었어요? 깨어보니까 잠깐인거 같아. 도리어 어떤 이는 좀 더 잊어버렸으면 좋을 걸, 벌써 또 깨어지네. 아 이거 낮에 오늘 고단하겠다. 이런 걱정이 되시는지 몰라요. 이 사람 서있어요. 이거 분명히 다시 살아난 겁니다. 다시 일어나면 다시 살아났어. 다시 이렇게 만나면 다시 볼게야. 하나님을 생각하는 거 이게 새로운 감사를 드리세요. 감사로 일어서는 거예요. 그리고 혼자 따로 일어서야, 이게 정말 사는 거야. 일어서지 못하면 아직, 바로 한 사람으로 살기 시작한 거 아닙니다. 턱 일어서야 이게 정말 일어서야 나라만 독립해야만 아닙니다. 나라에 한 무엇입니까? 우리말로 그런 게 없어요. 어려워요. 한 멤버가 되어서 한 백성 한 백성으로 일어설 수 있는 거, 그것이 정말 자격이 있는 산 백성입니다. 하늘나라 백성으로 오늘 또 새로이 깨어나서 일어서게 되었어요. 맨 먼저 우리 아버지 우러러보고 오늘 하루를 어떻게 아버님 떠나지 않고 아버님 뜻 속에서 지내지리이다. 하고, 하는 거 이걸 빌기 위해 이렇게 여기 나와 앉은 거예요. 맨 먼저 이거 감사해요. 감사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정신 차려야 하는 건데, 일어서는 거 늘 일어설 수 있는 거 그게 감사입니다. 또 그다음에는 뭔고 하니 글씨 쓸 수 있습니다. 무엇이든지, 자기 생각을 쓸 수가 있어. 눈을 떠서 볼 수가 있어. 귀를 떠서 뭘 잘 들을 수가 있어. 손을 써요. 발을 써요. 말을 할 수 있어. 말을 다 들을 수 있어. 들어가지고 생각할 수도 있어. 어떤 게 정말 옳은 건지 분간할 수가 있어. 그래요. 산다는 건 고이 생각하고 생각이 살아 있어야 해. 그럼 그걸 다 누가 해야 해요? 내가 해야 해요. 내가, 우리가 해야 합니다. 그럼 그거 뭡니까? 모두가 이걸 써야 해요. 가진 걸 쓰지 못하면 사는 거 아닙니다. 가진 걸 써야 해요. 그 가진 걸 써야 한다는 게 자유라는 겁니다. 일어선다는 건 독립이고 가진 걸 잘 쓰는 건 자유입니다. 그럼 독립자유를 하는 게 나라는 독립자유 해야 하는 거 그건 우리가 너무 잘 압니다. 나라라는 건 독립자유 하는 나라라야 정말 나라다. 잘 알아요. 그런데 나라의 일원되는 이 한 몸뚱어리가 세상을 잊을 때 잊기도 하지만 잊었다가 다시 깨어나서 땀 흘려서 쓰는 때 자기가 따로 또 일어나서 쓰는 때, 자기가 자기를 쓰는 때, 그것이 감사인데 그 자기가 자기를 부려서 쓸 수 있는 그게 자유인데 그 자유라는 말이 어디서 나왔는지 나는 모릅니다. 동양에서 났으니 동양의 말일 텐데. 한문에 자유라는 게 어디 쓰인 데가 없습니다. 그러면 자유의 근원은 이 사람알기에는 유기입니다. 자유라는 유(由)자, 말미암은 유(由)자, 몸 기(己)자, 그게 뭡니까? 자기 몸으로만 하면서 모든 걸 한다. 그 말이야. 내가 내손을 쓰고 내 발을 쓰고 내 눈을 쓰고 내 귀를 쓰고 모두 내 것을 써가지고 할 것을 한다는 거, 그게 자유의 근본입니다. 그럼 그것은 자유가 아닙니다. 자유란 유(由)자 하고 자기라는 기(己)자하고 유기(由己)입니다. 유기(由己), 자기로 말미암아서 모든 걸 시작 되는데 비로소 유기(由己)입니다. 그럼 자유를 정말 아는 사람은 유기(由己)라고 합니다. 내가 내 몸뚱이로 말미암아서 모든 걸 한다는 거 그걸 알아야지요. 아이고, 세상에 사람이 뭘 할 수가 있나? 해 주지는 않는 건데 그래 너무해서 행할 수가 없다. 이런 해석까지 합니다. 그래 믿음으로만 구원 얻어. 행할 수 없다. 이런 심한 직역까지 가지를 않습니까? 그래 말이 됩니까?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는다고 하고 싶어. 자유 없이 믿음으로만 구원 얻는다고 해 보세요. 안 되는 겁니다. 왜 안 돼? 믿는 건 누가 믿어요? 내가 믿지요. 내가 믿지 않으면 안 됩니다. 믿어야 구원을 얻지. 누가 믿어? 내가 믿어야해. 내가 믿어야 내가 구원을 얻지, 믿기만 해야 하는데 누가 믿기만 해? 내가 믿기만 해야 해요. 믿지 않는 사람도 구원해 준다. 하는 말씀은 성경 말씀에 없어요. 믿어야 구원이야. 누가 믿어? 내가 믿지. 그 믿음에 들어가는 시작도 내가 하는 거예요. 자기로 말미암아 하는 거예요. 자기를 내버리고 자기가 없이 무슨 믿음 이니 구원이니, 뭔 어림도 없다고. 믿는 것도 내가 믿는 거야. 행할 수 없는 거는 내가 행할 수 없는 게 걱정이지. 그럼 전 책임은 나라는데 있습니다. 그럼 누구를 해? 생명의 근원되는 아버지를 대해서 하는 상대에요. 아버지를 대해서 하는 일은 다 내가 하는 거예요. 내가, 내가 믿음으로 나는 멸망하지 않고 영생에 들어가 세상에 행한다면 뭘 얼마나 행합니까? 얼마나 행하는 거예요? 행한다는 거 실상은 웃으운 겁니다. 웃으운 거니까 그러니까 행함은 쓸데없어. 그런 소리가 나오는 거예요. 행함 없다고 미리 작정 할 때도 내가 믿어야 한다. 회개를 해도 내가 회개를 해야 한다. 전 책임이 내게 있는 겁니다. 생명의 시작은 내게 있어요. 우리가 하나님이 모두 나를 창조 안했으면 세상에 내지 않았으면 내 라는 게 어디 있겠습니까? 물론 모든 게 하나님께서 하신 것이지. 그렇지만 이 세상에 보내서 이렇게 한번 온 이상에 말이에요. 나 에요. 믿어도 내가 믿어야 내가 구원을 얻는 거야. 구원이라는 건 내 생명을 완전히 이룬다는 겁니다. 그럼 세상에서 아버지와 아들 나 그 것뿐입니다. 그 외는 없습니다. 그러면 독립자유를 해요. 딱 내가 할 거는 해야 해요. 80객이 되어도 할 거는 해야 해요. 나 기도하는 것 가운데 내 손 하늘 일에 잘해야지 세상일에 잘했으면 이 손을 갖다 세상일만 이렇게 하늘에 있다면 하늘의 일 붙잡아서 하고 싶다고, 내 발이 하늘 길을 가는데 이 발 가지고 하늘에 길이 있다면 하늘을 이렇게 걸어서 디뎌서 가겠다. 내 속으로는 그거에요. 그 정말 마음이 그거에요. 땅을 암만 디뎌도 하늘 길 가는 데 디디는 겁니다. 나는 하늘 길 가려고 딛고 가는 거예요. 내 손을 갖다 이 세상일을 위해서 먹을 거 입을 거를 위해 손으로 쓰지만 이 길이 하늘로 통해야지. 영생 길 까지 통해야지. 그런 길을 위해 길을 닦는 거라. 겉은 땅을 딛지만 하늘 길을 거닌다. 똑 같아요. 그러나 영원한 영생길이 되어서 이 몸뚱이를 내버린 뒤에도 속에 정신 생명이 영생에 들어가고야 마는 이것이 크리스챤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세상의 걱정은 깨어서 일어나면, 글쎄 새벽기도 시간에 또 말씀을 하라고 하시니 이제는 무슨 말씀을 할까? 늘 그게 망설임입니다. 그래 암만 망설여도 쓸데없습니다. 그래 여기와 앉아서도 입을 열면 또 오늘도 무슨 말이 나올까? 그래 입을 열어 말을 시작하면 이때까지 이 말을 하지요. 이제는 걱정이 없어지고 자꾸 나와요. 쏟아져요. 그렇게 하고 날마다 이렇게 이 사람 사는 겁니다. 오늘도 말을 얼마나 하려는지 몰라. 그리고 이렇게 입이 열려서 시작 했으니까 여기 이렇게 더덕더덕 퍼져 자라서 맺혀서 열리는 거 모양 여기서도 말씀이 연속해서 나오는 겁니다. 아멘. ‘아버지여, 이렇게 열어주시니 이제는 이 속에서 나오는 말씀이 계속해서 아버지의 뜻의 무엇에 떨어지지 않는 말씀이 나와 지이다.’ 이걸 내가 간절히 비는 겁니다. 그러는 거지요. 육이라는 원자가 말미암는 거지 그렇게 쓰는 걸 말미암는다고 그래요. 그런데 한문이 없어지는 거고 또 없어져야 하는 겁니다. 한문 같이 그렇게 그림을 그려서 되는 글은 한문처럼 그렇게 오래 동안 있지 않는 건데, 그 써먹을 수 없으니까 되기가 너무도 더디니까 그래 없어지는데 이상합니다. 한문은 너무 오래 지나가는데 상형문자가 쓰다가 없어지는 건데, 한문은 너무 지루하게 없어지지 않아요. 그럼 말미암는다는 게 유(由)자, 이렇게 쓰는데 우리말로 말미암는다는 게 말이 어떻게 되는 건가? 말미, 뭐 하는걸 마는 것이 말입니다. 마는 것이 그만 마는 것이 말미, 암아 라는 건 뭔고 하니 암, 암 이라는 건 우리말로 암 그렇지요? 그런 말입니다. 한글로 옳다는 말입니다. 한글을 세 개가 통하지, 옳다고 하는 말 암이라는 겁니다. 뭐에요? 우리말로 암 그렇지만 세계로 가면 아멘이 뭡니까? 아멘이 우리 암 하고 얼마나 다릅니까? 자음을 모두 맞춰보면 똑같은 겁니다. 다른 거 없어. 아멘 암 똑같은 겁니다. 그럼 그런 뜻으로 쓰는 말에 인도라든지 불교에서 쓰는 글에 오음이라는 글이 있어요. 그건 또 달라요. 같습니다. 오음 그러든지 아멘 그러든지 우리말로 암 그러든지 아멘 그러든지 똑 같은 겁니다. 우리말로 제일 간단하게 암 그렇지요. 암은요. 암 이겁니다. 정말 아멘도 우리가 잘 하려면 암 그렇지, 이겁니다. 암 그렇지 하면 그런 거예요. 아멘, 아멘. 암 그렇지요. 암 그렇지요. 이 소리에요. 그래 정말 요긴한 거 시작과 끝나는 건 세계가 공통으로 되는 게 많습니다. 그런데 암 그렇지요. 그 암이 아무렴요. 옳습니다. 그 말씀 하실 때 그 말씀이 옳습니다. 옳고 또 옳습니다. 암 아무렴요. 그 아무렴요. 이렇게 하면 아멘 한번하지 않고 아멘, 아멘. 이러는 거와 같습니다. 인도 사람은 오 오음, 오음. 그게 하도 좋아서 이 사람은 오음 이라는 글자도 인도사람이 쓰는 글자를 좀 알아보려고 아멘 이라는 글자도 좀 알파벳자 유태 나라의 알파벳자 그거 쓴 거 그것도 알아보고, 오음 이라고 쓴 글자, 중들이 곳간에도 오음 자를 의례 써가지고 다니는데 그것도 알아보고 그것도 다 모양이 좋습니다. 아주 재미있어. 한문에는 말미암음으로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배울 건, 이 세상에 하는 것마다 그저 내쳐낼게 하나도 없습니다. 뭐하는 걸 내칠게 하는 게 없어. 하다가만 말, 또 말다가는 또 하고 자꾸 이러는 거예요. 자다가 깨고 또 일하다가 자고 이러고 그러나 하다가 말고 하다가 말고 이러는데 말 때 말아야하고 다시 할 때 해야 하는 게 이제 말미암는 건데. 그 말미암는 다는 말이 뭐 하다가 마는 것이 그 뜻입니다. 마는 것이 말미, 그만하고 말면 어떻습니까? 할 때 이제 그만 해야지요. 그 말미, 그만 합시다. 해야 하는 데 그만하지요. 하는데 암 그래요. 그만 해요. 하는데 암 그래요. 말미 어떻습니까? 암 말아야지요. 말미 암. 이제 그만하고 말아야지요. 말미 암. 여기 원장님이 참, 우리 요새 잔치를 벌여놓고 아주 마음이 바쁘게 원장님의 마음을 말미암아 가지고 여기 모든 게 되는데 어저께 이 사람 찾아온 김 선생도 너무 이야기 길게 되니까 이제 아홉시가 넘어 가련지도 몰라요. 그러니 이제 그만 말면 어떠겠오? 가셨으면 좋겠다. 그 말린 게 그 손님도 암요. 그만 나가야지요. 가겠습니다. 그 말미암아, 이리 차례차례 착착 되어가는 게 그게 이 세상의 일이에요. 그 말미암아 그런 소리가 말이 그런 말이에요. 그런 걸로 되어 진 거예요. 남의 말로 쓰던지 우리말로 쓰던지 말을 자세히 알고 써야 합니다. 그 말미암아, 한문으로 자유라는 말도 자세히 알고 해야 되요. 이제 오늘 하루도 우리가 살 때에 차례차례 하다가 말고, 말게 될 때 말미암아 그래 쉬고, 또 시간되면 우리 걸음 걷는 거, 그겁니다. 그러니까 걸음 걸은 거, 디디고 띄고 디디고 띄고 이게 걸음인데 그것도 말미암아 아닙니까? 디딜 때 영 디디고 그냥 디디고 있으면 어디 걸음 걸어 집니까? 이 발 또 떼어야겠다. 이것이 양쪽이 서로 말미암아, 말미암아 이러고 걸어 나가는 거 아닙니까? 그렇게 하는 게 말미암는 거예요. 지가 제대로 그렇게 하는 게 말미암아 눈 귀 코가 다 말미암아 먹다가 그만 숟가락 놔. 말미암아 하고 놓는 거예요. 다리 쓰고 발 쓰고 다 그렇게 그거예요. 뭐든지 다 말미암아 되는 건데 그러니까 정말 생각이 사는데, 우리가 쓰는 말도, 말 한마디가 말이 어째 그렇게 되었나? 글자가 어떻게 그렇게 되었나? 그걸 죄다 따져놔야 쓰기가 정말 잘 씁니다. 꼭 쓸데다 쓰게 되는 겁니다. 모든 게 그와 같은 겁니다. 그게 쓰는 겁니다. 쓸데다 꼭꼭 써야 모든 일이 우리 마음에 맞게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게 되어갑니다. 그럼 말고, 말고 말 것 말 때 말 것이라는 게 단단히 우리에게 알아져야 합니다. 모든 게 말고 ,말고 마는 것 가지고 되는 겁니다. 그렇게 되는 게 암, 암 하고 따라가는 게 말미암아서 가는 겁니다.
‘우리 울어 우리 울어도 다시 계시고 홀로 사리 워 지이다.’ 세상 잊어버리고 일곱 시간씩 있는지 없는지 모르고 지내 있다가 다시 깨어서 일어나서 이렇게 나와 일어서서 이렇게 입을 열어서 아버지의 뜻이 이 속에 생각나는 대로 열어서 말씀을 하게 되는 거, 이게 오늘 새 세상을 사는 비록 필요한 겁니다. 하나님, 하나님 계신 데가 계 에요. 하나님 계 계셔 나를 내셨으니 오늘 날 나를 깨셨으니 내 나를 가져 이 내 나를 가지고 계 받들어 섬김 싶음으로 그 곳, 아버지께 다시 받들어서 아버지를 받들어 섬김 그게 싶어. 오늘 하루 온종일 이 세상 일로 말을 한다든지 듣는다든지 이 세상일을 하지만 그렇지만 그 아버지 받들어 섬기는 일입니다. 아버지 받들어 섬기자고 아버지 뜻을 그대로 실행되게 하려고 모든 것은 하는 겁니다. 말을 해도 아버지 뜻을 이루어 지이다. 말을 들어도 아버지 뜻을 이루어 지이다. 그걸 빌면서 하는 겁니다. 하늘 계신 아바께 자, 이것은 주기도문의 뜻과 같은 기도가 나옵니다. 그럼 합시다. 하늘계신 아바께 이름만 거기까지 닿는 것만 하늘계신 아바께 이름만 거룩히 참 말씀이니 이다. 그게 거룩한 일이고 우리가 갈 길이고 거기가 진리야. 그게 참이야. 그게 말씀이야. 그겁니다. 이건 하늘계신 아바께 이름만 거룩한 것이 참이고 길이고 진리고 말씀입니다. 하늘계신 아바께 이름만 거룩 힐 참 말씀이니 이다. 이에 숨 쉬는 우리, 깨어나서 우리 여기나와 있지 않아요? 우리 숨 쉬고 사는 걸 깨어나서 다시 느끼고 있지 않습니까? 이에 숨 쉬는 우리 밝는 속 알에 자꾸 밝아지고 밝아지는 속 알에 우리 영혼이 있는 그 속 알에 생명이 일어나 자라는데 자라나가면 한 국민이 됩니다. 한 백성이 됩니다. 한 씨알이 되는 것입니다. 이에 숨 쉬는 우리 밝는 속 알에 더욱 나라 찾음 이어 지이다. 나라를 가져야 합니다. 나라를 잊어버리기도 많이 하니까 그거 찾아야 되요. 나라 찾자는 거예요. 우리가 망국이 안 되었어도 길게 옛날부터 독립국이라 하더라도 그러나 이 나라만 가지고는 안 돼. 영생의 나라, 아버지의 나라, 그것까지 가져야 해요. 그래 나라 찾고 찾아야 하는 겁니다. 밝는 속 알에 더욱 나라 찾음 이어지 이다. 그 속 알이라는 그것은 영혼인데 영혼도 속 알인데 그것이 자꾸 길러져가지고 그게 자유 독립을 하는 생명이 되는 거 거든. 그래 하늘나라를 차지하는 겁니다. 그래 더욱 나라 찾음 그거거든. 우리의 삶이 힘씀으로 새 힘 솟는 샘이 되었고 진 짐에 짓눌림을 되지 말아 지이다. 그건 설명을 냅다 하면 그건 시간만 가니까 이제 설명은 안하겠습니다. 우리의 삶이 힘씀으로 새 힘이 솟아나요. 새 힘이 솟는 샘이 되고 진 짐에 짓눌림은 되지 말아야지. 이 짐을 억지로 지고가고 있어. 그거 뭐 억지로 짐도 많이 지면 허리도 부러져 망하지 않습니까? 그러면 우리가 숨 쉬고 사는데 한번 쉴수록 더 기운이 북 바쳐 나오는 기운의 샘 이 되어 지이다. 이겁니다. 우리의 삶이 힘씀으로 새 힘 솟는 샘이 되었고 진 짐에 짓눌림을 되지 말아 지이다. 이거 하나님께 구해야할 일이에요. 사람이 서로 바꾸어 생각을 깊이 할 수 있게 하여 주옵시며, 고루 사랑을 널리 할 줄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와 임께서 하나이 되사 늘 삶에 계신 것처럼 우리도 모두 하나이 될 수 있는 죄다 하나이 될 수 있는 전에는 내가 처음에 사랑을 가지라고 그랬었다. 사랑이 제일이니까 그 사랑만 가지면 모든 것이 하나가 될 수 있어요. 35억 인구라도 한사람과 같이 될 수 있다는 거예요. 사람이 서로 바꾸어 생각을 깊이 할 수 있게 하옵시고 고루 사랑을 널리 할 줄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사랑이 제일입니다. 그러나 사랑을 자꾸 더 깊이 더 깊이 더 뜨겁게 더 뜨겁게 이것만 구하면, 그럼 그 사람의 끝은 멸망입니다. 그 사랑을 잘못하면 멸망하게 되요. 사랑이 제일이지만 그거 잘못하면 멸망해요. 그래 나는 사랑 소리를 피하려고 그래요. 싫어요. 그 사랑 애(愛)자가 나는 싫어요. 그럼 무슨 자가 좋으냐? 차라리 어질 인(仁)자 어질 인(仁)자 그건 사랑과 같은 겁니다. 그런데 그건 사랑 인(仁)해서는 나는 못쓴다는 겁니다. 그건 사랑 아닙니다. 그럼 어질 인(仁)자 어질 현(賢)자 또 있는데 무얼 어질, 그건 틀렸어요. 그 번역인데 한자어를 우리말로 번역을 해서 사랑이라 어질다. 이렇게 하는데 어질 인(仁)자 번역을 착할 인(仁)에 착하다고 번역을 해도 못 쓰는 거고, 또 사랑이라고 해도 못써요. 그럼 뭐야? 성하다고 성하다. 아주 성한 겁니다. 오늘 이제 세상 잊어버리고 자던 사람도 이렇게 성하게 일어난 거 일어나서 사는 거예요. 이 생생하게 어떻게 성하게 이렇게 이것도 우리 새로 일어나 모여서 하나님께 새 말씀으로 빌자고 하는 건데 요거 산뜻하게 같이 하나님께 새로 살아야겠다고 여기와 앉아있어요. 어저께 한 사람이 꽃을 꺾어다 놓는데 나 예배 보는데 가깝게 꽃을 꺾어다 놓지 않는 게 좋겠소. 그런 말씀을 어떤 분 뵙고 한번 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그걸 싫어하는 줄 알고 산 난걸 이렇게 고대로 올려주셨습니다. 우리들이 다시 살아나서 영생까지 들어갔으면 좋겠다고 하는데 이것도 영생하겠다고 이렇게 새파랗게 어저께 이야기 하다가 푸를 청(靑)자가 나중에 내놓겠다는 거 생각이라는 거 말하지 않았습니까? 이건 어저께 그것도 복습을 시키셨고 정말 기도 잘 합니다. 이 꽃도 함께 우리들을 위해서 기도를 돕습니다. 내가 이렇게 하나님이 생긴데 마땅하다고 하나님께서 옳다. 유 영모 말이 옳다 그러시는지 모릅니다. 우리 똑똑 꺾어다가 꽃아 놔요. 그거 뭐라고? 아버지와 임께서 하나이 되사 늘 삶에 계신 것처럼 우리도 모다 하나이 될 수 있는 성언을 가지고 그럽니다. 처음에는 사랑을 가지고 그랬는데 사랑 떼어버렸어요. 그럼 그 대신 성언입니다. 성언 어질 인(仁)자 아니에요. 사랑 인(仁)자 아니에요. 성언 인(仁)자에요. 성언 인(仁), 꽃이 꺾어지고 똑 하고 부러질 때 숨이 넘어 갔어요. 죽은 거예요. 성언이라는 뜻 이겁니다. 오늘 우리 아침에 성하게 이렇게 일어났는데 요. 난, 게 성하게 이렇게 있습니다. 이렇게 성한 것이 어질 인(仁)자입니다. 성언이에요. 어째 거북해. 밤에 잠을 잘못 잤는지 고개가 거북해. 이럴 때 이전에 한문 많이 쓸 때 아니 부(不)자 어질 인(仁)자 씁니다. 불인(不仁) 했어. 언 이 불(不)이래. 손이 성치를 못해. 그래 불인이라 그럽니다. 어질지 않다는 겁니다. 성하지 않다. 성치 않다. 그럼 성하자는 노릇인데 그럼 성하자는 노릇이니까 성할 인이 좋아요. 성할 인 그럼 성인데 언을 붙여요. 언 이라는 말도 무언지 모르는데 실상 우리가 언니 따라가지 않습니까? 언니 형 할 때 한문자 형이 불 화 변써요. 아무리 우리가 말이 부족해도 형이라 아우라 말이 없어요. 공연히 한문자를 형, 형 붙일 까닭이 없어요. 언니가 본디, 언니가 늙어 꼬부라져도 언니는 언니에요. 젊어서 어려서 언니, 언니 하다가 좀 자란 뒤에 형님, 이래야지. 언니 하면 점잖지 못 하다. 고 요새는 점잖으면 미스터 미스 이래야지. 그걸 못하면 그건 말이라고 통이 모르는 사람이라고 하는데, 일본 시대에 사마라든지 상이라는지 김 상, 이상 그리고 날뛰더니 그것이 물리쳐 나간 뒤에는 요새 미스타 미스 미세스 무슨 놈의 소리 입니까? 아직도 멀었습니다. 아직도 멀었습니다. 내거 남의 거 분간 못하는 거 옳은 거 그른 거 분간 못하는 겁니다. 그럼 언니는 늙도록 언니, 언니 해야 이게 바로 되는 겁니다. 우리 집에 언니께서는 이렇다. 이렇게 말하면 되는데, 형님은 무슨 놈의 형님, 이 소리 할 적마다 내가 생각이 나는데 감정을 빼앗긴 거 이게 망한 겁니다. 자기 정은 빼앗기지 않은 게 이게 망하지 않은 겁니다. 감정을 빼앗겼습니다. 그러면 남의 세력에 밀려서 남의 말이 내 말 이상 더 좋게 여겨서 그걸 죄다 쓰면 그 감정까지 빼앗긴 겁니다. 우리에게 감정이 안 빼앗긴 게 있어요. 너희 어머니 너희 아버지 하면 그것이 아주 대접하는 것으로 듣지 않습니다. 그러나 너희 부(父) 너희 모(母) 애비 부(父)하는 부(父)자 에미 모(母)하는 모(母)자 너희 부(父) 너희 모(母) 그거는 기쁘게 합니다. 그 아버지 어머니 하면 되지 부(父) 모(母) 무슨 소리야. 그건 한문에 부(父) 모(母) 하는 것은 아버지 어머니 내어 던지고 부(父) 모(母)하는 게 싫단 말이야. 그럼 우리 감정이 거기 빼앗기지 않은 거. 자식, 자식 이라는 거 중국말로 좋은 말이에요. 좋은 말인데 우리는 듣기 싫은 게 자식이야. 그래 아들 이면 아들, 딸이면 딸 우리 아이면 아이지, 자식이라는 소리 대접하는데 당신 댁 자식님 이라면 어때 대접 이라고 듣겠습니까? 그럼 중국에서는 그렇게 쓰는데 자식님, 그 일본 사람이 사마라고, 남의 아들에게도 시쇼쿠 이라고 남의 점잖은 오시쇼쿠사마 라고 남의 점잖은 아이들 자식님이라고 그래, 그래. 일본 사람 감정까지 빼앗겼는데 우리는 거기에 감정 빼앗기지 않았어요. 부모와 자식사이에 쓰는 감정을 빼앗기지 않았습니다. 저 소리가 듣기 싫어서 자식이라고 못난 자식이라고 할 때 그게 나와요. 개자식이라고 합니다. 개자식이라고 할 때 자식 이라고 해요. 개아들이라고 안 해요. 사람의 아들이 대접이지 개아들 거기 붙이기 싫다고 에이 그 오랑캐 놈의 자식이라는 말 붙이지요. 개자식 못난 자식 이렇게 됩니다. 세상 문제는 감정 문제입니다. 감정까지 빼앗기면 아주 망하는 겁니다. 그래 영어도 배울 때 우리 감정을 다 빼앗기고 다음에 영어 배워서 무엇에 영생에 들어갈 겁니까? 미스타 미스 미세스 그거 없어져야 해요.
아버지와 임께서 하나이 되사 늘 삶에 계신 것처럼 우리도 모다 하나이 될 수 있는 성언을 가지고 사랑이라는 것 대신에 성언입니다. 성한 거 언니라는 언, 그래 성언 정말로 인 우리말로는 성언 유교에서는 인을 찾습니다. 인을 찾아서 인을 완성하려고 하는 게 유교입니다. 그거 우리말로 하면 성언을 찾아야 해요. 성언을 찾아서 그 성언을 완전히 이루는 게 참 생명에 들어가는 겁니다. 아버지와 임께서 하나이 되사 늘 삶에 계신 것처럼 우리도 모두 하나이 될 수 있는 성언을 가지고 참 말 삶에 들어 갈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거룩하신 뜻이 위에서 된 것과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 지이다. 아멘. 이것은 주기도문처럼 합니다. 주기도문 뜻에 도무지 벗어지지 않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걸 순전히 우리말로 옮겨 가지고 하자고 하는 겁니다. 그럼 순전히 우리말로 감정이 거기 가득 차가지고 기도가 되는 겁니다. 우리의 감정까지 거기에 가득 찼어요. 원 주기도문 그 말을 그대로 하나님 공경 하는 건 되지만 우리의 감정까지 푹 거기에 잠겨가지고 그대로 영원히 우리의 생명이 누웠다는 게, 숨이 통하고 이래야 영생이나 이상이나 정말 살아가는 겁니다. 먼저 예수 믿기 시작하더니 이런 일을 위해서는 지금 그 방식대로 하는 거 그거 해내 그렇게만 가는 거 아니에요. 목숨 생명을 기르자는 거지. 어디 뻣뻣하게 가오리 바짝 말라붙은 거 모양 그렇게 되자는 거 아닙니다. 살자는 겁니다. 살아집니다.
하늘 계신 아바께 이름만 거룩 힐 참 말씀이니 이다. 하느님 계 계셔서 날 내셨으니 내 날 가져 계 받들어 섬기시도록 이제 내 속 알과 삶의 목숨과 내 나위 힘과 얼 되 받들어 들어 하느님 뜻 맞고 하느님 말 숨 쉬어 나와 모든 사람 속 알라 외 이 내 더욱 되기만 가장 비나이다. 하느님 우리 조임 살에 조임이 크고 몬지 무거워 모아 드리지 못되오나 되 불쌍히 바라며 제 섬기 울 기대어 비오니 나들이 되게 비나이다. 암. 아까 주기도문의 뜻과 같은 그런 기도를 그렇게 해서 외우고 이건 봉헌 기도는 카톨릭에서 하나님께 모든 걸 바친다는 기도 그 기도가 대단히 좋기 때문에 이걸 우리말로 고쳐가지고 우리의 감정 까지도 그 속에 폭 죄다 쏟아서 하나님께 비는 겁니다. 나는 주기도문의 뜻과 이 모든 걸 하나님께 바친다는 뜻과 그게 참 과연 기도하기로 합니다. 기도 그거면 족합니다. 그거 외 더 보탤게 없는 겁니다. 간절히, 간절히 한다고 잔소리 너무 많이 하지 말아요. 혼자 골방에 들어 가 기도 할 때는 잔소리를 하거나 굵은 소리를 하거나 그건 마음대로 좋아요. 여럿이한테 모여 할 때는 잔소리 너무 많이 하는 거 쓸데없지요. 잔소리를 그렇게 하려면 거기에 공상이 섞이지 않게 못합니다. 살아야 합니다. 조금 살아도 살아야 하는데 영생 살자는 거기에 그 하늘나라 백성이 되려고 하는데 살고 또 살아야지요. 그거 죽어가지고는 안됩니다. 꺾어다 놓은 꽃이 되어가지고는 안 됩니다.힘 있게 살아야 됩니다. 사람이 깨어 일어나서 여기 올라올 때 오늘은 무슨 말씀을 이래도 저래도 안 되어요. 그래서 책을 하나 가지고 혹 이것을 볼 수가 있지 않나? 그리고 이 책은 무슨 책인가 하니 맹자 책이에요. 맹자 책, 그럼 맹자를 보고 싶다고 이런 생각을 하니, 맹자를 왜 보고 싶습니까? 이 사람은 공자 맹자가 하는 사서삼경도 구약과 같이 알아요. 도 에도 공자 맹자가 없고 한문에도 실상 없으면 하나님 말씀 깨닫고 알기도 힘듭니다. 공맹이 말해준 그 가운데 진리가 많이 있어서 그 진리를 우리가 우리 조상 적부터 알아내려고 했으니까 성경을 봐도 얼핏얼핏 틀립니다. 그래 구약 대접은 꼭 해야 합니다. 맹자 할 때도 구약 대접을 해야 해요. 이 놀라운 말이 아닙니까? 맹자 말이 사람 마음은 다 같지요. 이 마음을 가진 사람은 그 마음을 다 그대로 쓸 줄 알아야 해요. 마음을 갖고도 마음을 쓰지를 않아요. 그, 바로 살지를 못합니다. 가진 마음을 바로 써야 해요. 마음 생김은 세간에 떨어지지만 마음으로 들어가야 한다. 자기 마음속에 자기가 들어가야 한다. 어제 그 소리 했어요. 그러면 이 마음을 쓴다는 건 마음을 다해서 써야 해요. 남기지 말고 내 마음을 다 써야 합니다. 마음을 다 썼으면 자기 바탕 자기 천성 그게 뭔지 안답니다. 마음을 제가 다 쓰지 않아.
주기도 강의 2
1971.08.12. 유영모 선생
마음을 제가 다 쓰지 않은 거 같이 타고난 마음을 죄다 꺼내 쓰면 거기 하늘이 주신 천성(天性)이 다 거기 들어 있다는 거예요. 이게 성경말씀 아닙니까? 타고난 마음을 죄다 바치면 종당 하나님이 주신 천성(天性) 내 원 바탕 그것을 안다는 거예요. 놀라운 말씀 아닙니까? 구약에 천성이라는 말씀이 오늘날 시대에는 어떻게 되는 고 하니 성(性) 이라는 자를 여편네 사내 암컷 수컷 이라는 말로 알아요. 이놈의 세상 미친 세상이에요. 성(性) 문제라 암컷이라 수컷이라 여성이라 남성이라 이 망하려고 그래요. 그보다 먼저 아버지와 아들이라. 머리와 팔 다리다. 그러기 전에는 그 사람이 미쳤다는데 요새는 돌았다고 하는데, 이 천성(天性)을 잃어버렸다. 망할 놈이야. 그런데 아주 성(性)을 잃어버렸어. 맨 끝에 암컷 수컷이라고 그게 아주 붙어있어. 성전(性典)에 한자로 전(典)자, 요새 법전이라고 하지요? 모든 법률을 죄다 기록한 책 좋은 책 좋은 책을 전(典)이라 합니다. 성품 성(性)자에 성전(性典)이라고, 사내의 여편네 이야기를 죄다 한데 모아다 써놓고 그걸 성전(性典)이라. 이렇게 내 팔아요. 그거 왜 그래요? 천성(天性)은 타고난 천성(天性)은 다 돌아서 없어졌으니까 성(性)자 떡 보면 여성이냐 남성이냐 성(性)문제라고 하고들 있는 세상이야. 그럼 천성 하늘로 올라가는 성(性)이야. 그걸 잊어버렸어요. 그래 이 성(性)자 문제 그리기가 대단히 어렵습니다. 들으려고 하는 사람은 아주 박아앉아 들으려는지 모르겠습니다. 오늘은 이 암컷 수컷 이야기를 죄다 한다더라. 좀 들어가 들어야겠다. 이렇게 덤빌는지 몰라요. 이 실성한 것들이 본바탕의 그것을, 들을 런지 모르겠다. 그래 들어와 앉았다가 졸고 말겠지. 암컷이란 수컷이랑 이야기 조금도 안하면 어떻게 될 거에요? 그 전(典)이라는 글자가 그렇게 귀한 글자이지만 그 성 문제를 갔다가 말끔, 책상위에 높이 올려놓은 거예요. 그냥 전(典)이라는 글자는 책상위에 높이 차고 올려놓은 겁니다. 책 이라는 건 두 책상을 아래 긋고 올려놓은 거예요. 건너긋고 이런 게 책상이야. 거기다가 책을 척척 올려놓은 거예요. 암컷 수컷 이야기만 죄다 이렇게 써 놓은 거 그걸 떡 올려놓았단 말입니다. 그건 왜 그렇게 귀하게 올려놓나요? 전당 잡은 거예요. 전당이란 뭐야? 볼모 잡은 거예요. 이걸 잡고 돈을 돌려주거든. 이거 없어지면 돈 찾지를 못해요. 그러니까 잘 붙잡아 둬야하거든. 그래 올려놓은 겁니다. 이렇게 실성한 놈의 그것들이 다 죽게 되었는데 저 냄비구멍에 달라붙어 아직 할딱할딱 하고 있어. 나는 남성이라. 나는 여성이라 이러면서 거기 붙어있다고. 성(性)문제라면 그것만 캐려고 해요. 과연 말이에요. 이 사람 생각하는 사람이에요. 성(性)문제 더 알고 싶으면 이 사람더러 와보세요. 나도 거기 꽤 아니, 내 가르쳐 줄게. 맹자의 진심 편을 보겠습니다. 그리고는 맹자의 말씀이 마음에 가진 걸 다하면 천성(天性) 타고난 걸 안다. 좋은 말씀 아닙니까? 자기 천성을 알면 천성은 어디서 받았는데 하늘에서 받았어. 자기 천성을 알면 하늘을 안다. 하늘을 알아. 공자 맹자 가르치는 게 그겁니다. 그래 마음을 다한다는 것을 진심편이라고 그래요. 맹자 진심편에 열고 보니까 그 마음을 다 쓰는 사람은 그 천성을 안다. 그 천성을 알게 되면 천성 받은 하늘을 알게 된다. 이게 진리지요. 이게 진리 아니라고 하겠습니까? 성경 66권에 든 게 아니니까 진리 아니라고 하겠습니까? 내가 원하는 게 있습니다. 내가 준하는 거, 마음은, 마음은 사람의 신명이라. 마음 이라는 건 뭐야? 사람이 가진 건데, 사람이 뭐야? 신명(神明) 이라합니다. 귀신 신(神)자하고 밝을 명(明)이라. 신명(神明)이라고 해. 그 신명이라는 소리는 뭔지 잘 모릅니다. 유신론으로 해서 신이 계신다. 그런 거 같으면 귀신 신(神)자 하나만 쓸 터인데 그 밝을 명(明)자 왜 붙여놨나? 신명(神明)을 믿어요. 천하 백성이 하나님 믿는 걸 믿는지 안 믿는지 나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신명(神明)은, 신명(神明)은 아주 무지합니다. 제일 꼭대기가 신명(神明)이라고 하니까 우리말이라는 건 우리 사람 몸뚱이 속에 있는 게 신명(神明)이라는 거예요. 자기 속에 있는 신명(神明)이다. 이거에요. 주역에 괘를 열어서 좋은가 어떤가? 그걸 판단하는데도 새벽 일어나서 소세 죄다 하고 옷 정하게 입고 그리고 나서 책상을 잘 놓고 향불을 피운다. 향불을 피워놓고 고요하게 앉아서 괘를 내리는데 성경 읽는 거와 같은 겁니다. 괘를 내서, 이런가? 저런가? 생각을 하는데 그런데 왜 그렇게 정성껏 하는가? 신명(神明)께 그렇게 정성을 드려서 그 신명(神明) 앞에서 그 생각을 하는 거예요. 그렇게 하나님 앞에서 사는 건지. 하나님 이거나 신명(神明)뿐이지, 왜 그 밝을 명자 붙였는지 몰라요. 그거 알 수없는 겁니다. 그럼 또 신명(神明)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것이 여기 사람의 마음은 사람에게 있는 신명(神明)이다. 사람은 생각하는 거 갖고 사는데 생각은 신명(神明) 밑에서 생각하는 거다. 그럼 신명(神明)이 모두 되어서 모든 걸 생각하는 그것이 유신 생각입니까? 무신(無神) 생각입니까? 신이라는 건 있다는 생각입니까? 하나님이 계신다는 생각입니까? 하나님을 모르겠다는 생각입니까? 알 수없는 겁니다. 중국사람 고진명이란 사람이, 그래 어떻게 하면 유물론 같고 어떻게 하면 유신론 같습니다. 도인은 그렇게 말을 해요. 그렇지만 성령님이 나서면 분명히 신(神)자를 안 쓰고 상재(上帝)라고 씁니다. 상제, 아주 위에, 상재의 제(帝)자는 모든 걸 마련해서 단속한다는 뜻입니다. 저 위에 계셔서 모든 걸 단속해서 모든 걸 단속해서 단속한 법칙대로 되리라는 그런 글자입니다. 이게 정성은 지극한데 주역도 보고 하는 이 사람들이 지극히 일찍 일어나 그렇게 하는데 결단코 지금 세상에는 점을 치고 좋지 않으면 다른 사람한테 또 가서 점을 치고 이러고 야단들을 한단 말이야. 원은 그렇게 못하는 겁니다. 한번 식전에 그렇게 정성을 해서 그렇게 하는 것뿐이지 그 후에는 다시는 그렇게 안하는 거예요. 못하는 거야. 그러니까 그렇게 못한다는 것을 표시 할 적에 그림을 그려서 글자를 만든대요. 어떻게 이것을 그릴 수 없지 않습니까? 밖을 그리는데 어떻게 밖을 어떻게 그리겠습니까? 어떻게 그려야 밖을 나타내겠습니까? 그래 생각, 생각 하다못해 저녁 석(夕)변에다가 점복(卜)을 해요. 점복은 점치는 거지. 괘를 내는 거지. 저녁에 괘를 내버린다. 점을 쳐요. 그럼 다야. 그런 법은 도무지 없다. 저녁 점은 치는 게 아니다. 그걸로 아주 가외라. 아주 밖이야. 그렇게 만들었어. 이거 역시 하늘 땅 사이에 같이 사는 민족이야. 그럼 칠억만이 살 게 된다지 않아요? 중국 백성이 불과 수십 년 지나면 십억 된다는 거야. 중화민족의 수효가 십억 된다는 거야. 그래 점친다는 점 복(卜)자, 꼭 내리 긋는데 이걸 점을 하나 찍었어요. 그것이 요긴해서 무슨 물건이 요긴해서 사람이 꼭 이렇게 잡아 둔겁니다. 회초리 하나를 이렇게 쓸데가 있어. 회초리 하나를 이렇게 잡아뒀어. 내리긋고 이렇게 점을 찍은 거 붙잡은 겁니다. 이걸 갖고 그러게 이것이 무슨 자로 쓰이는가 하니 짐을 싣는다는 거, 말 한 테다 짐을 실어요. 짐이라는 글자를 복(卜)자를 쓰지 않습니까? 짐이라는 게 요긴하니까 꼭꼭 붙잡아서 갖다 모아서 묶어서 말 수레에 싣고 가는 거니까, 그 짐이라는 게 복 그래요. 그 약마복중이라, 약한 말에다가 짐이 너무 무겁다. 그걸 약 마 복중 이라고 써요. 그거 점 복(卜)자는 짐이라는 복 자에요. 요긴하길 레 꼭꼭 만들어다가 짐이라는 걸 싸서 말에게 싣고라도 가야지. 그거지. 별게 아니에요. 복 괘로 점을 보는 게 아닙니다. 요긴해서 꼭 붙잡는 거야. 그 점친다는 건 무슨 소리인 고 하니 사람의 의견으로는 결정할 수가 없는 일이 있어요. 이렇게 좋을 것도 없고 저렇게 좋을 것도 없는데 암만 온 백성들에게 물어도 결정을 못하겠어요. 그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사람이 어떻게 해요? 제비 뽑아야 합니다. 글자 써놓은 거 갖고 꽈서 툭 던지든지 해서 그거 뽑으라고 그 나오는 거 봐서 해. 안해서는 안 되는 겁니다. 사람의 의견 갖고는 결정할 수 없거든. 그래 제비 뽑아요. 그 제비뽑는 그 짓이에요. 다른 짓이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래 점친다는 거 다 이상한 거 같아요. 제비 뽑는 그거라. 사람의 사정에는 그래요. 아무리 성신을 받고 해도 사도들이 성신 받았다고 뭐든 궁금한 거 있을 때 그걸 물으면 성신이 대답해 줍니까? 그러지 않지 않아요? 뭐 하나님을 믿고서 성신을 받고 성신의 뜻대로 한다고 하는 사람도 갑갑할 때는 물어보는데 성신이 대답 해 주세요? 그렇게 안 되거든. 성신하고 연결이 된다 하더라도 전화하는 거 같이 말하고 싶을 때 하고 이렇게 되는 거 아니에요. 그래 어떤 때 갑갑하면 제비 뽑지 않을 수밖에 없어요. 그럼 제비뽑는 일도 점치는 것과 같지 아니랄 게 어디 있어? 가장 성신이 내리시고 모든 게 그렇게 될 때에도 우리 사람은 그런 생각이 나는지 모릅니다. 예수가 부활하신 뒤에 오순절에 성신을 받고 그리고 그 바쁘게 복음을 전해서 믿으라.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에 들어간다. 이렇게 할 때에 왜 그런 생각이 쓱 듭니까? 우리가 사도가 열두 사도가 있으니 그거 다 뜻이 있어. 그렇게 하신 걸, 열둘이 성하게 그때까지 있었으면 좋을 텐데 어떻게 가룟 유다 하나가 그걸 망쳐 버렸나? 어째 열두 개 이에서 한 개가 빠졌나? 그게 마음에 미흡해. 그걸 보충을 했으면 좋겠다는 거야. 그럼 이왕 이렇게 된 거 성신이 사도하나 새로 뽑아라. 어디 있는 아무개 사도로 해라. 이랬으면 시원할 텐데, 아까 오순절 성신을 받고 이런 사람들도 그 생각이 일어날 때 그 생각 일어나지 마라. 이랬으면 좋겠는데 그렇게 하는 성신 아니에요. 사람의 생각에 그 이하나 빠진 거 하나 해 박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자꾸 나거든. 그래 하자고 그래요. 물론 기도하고 해요. 기도하고 정하는 건 아니니까 대답을 얻을 수가 없어. 그런데 어떻게 하는데도 사람의 의견을 하든지, 그중 한사람 쓸 만하다고 이렇게 했으면 하는데 둘이 나왔어. 둘이, 둘이 나왔으니 이것도 절대 할 수 없다. 물을 데가 없으니 이것도 물을 수가 없으니 어떻게 합니까? 그때야말로 성신이 다시 오셔서 일러주시면 되는데, 그렇게 안 되어요. 그래 할 수없이 제비 뽑았지요. 그럼 그러한 일은 어떻게 되는지 나는 모릅니다. 주님이 그것을 생각하실 때 어떻다고 하실지 성신이 강림하실 때 그걸 어떻다고 하실 런지 할 수 없는지 그건 나로서는 안 할일을 공연히 한 거다. 성신 받은 제자들이라도 안할 걱정을 하고 있는 거다. 나는 이렇게 보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점은 안치겠다. 제비 뽑지 않겠다. 그렇습니다. 그건 편안한 세상에 사니까 그렇지 우리도 위태한 세상에 살면 우리도 제비뽑을 일이 생깁니다. 무지공천에 들어가서 어디가 어딘지 알 수가 없게 될 때 그때 거기 그 자리에 있자고 할 수도 없고 자기 가려는 데로 가자고도 할 수가 없어. 왜 동서남북을 모르는데 내가 어떤 방향으로 어디로 가야하는걸 방향을 알아야지요. 방향을 모르는데 어떻게 해? 그럼 그 자리에 있으면, 있으면 거기가 어떤지 알아야지. 그 자리가 어떤지 알아야지. 거기 무슨 짐승이 있는지 도적이 있는지 알 수 없어. 있을 수도 없고 가자니 방향을 모르니 그럴 때는 어떻게 해? 그러니까 그때 제비뽑겠다는 생각이 나는 겁니다. 지팡이를 던져보던지, 연필을 하나 던져보던지, 던져보라. 던질 때 어떻게 하냐? 연필이라면 연필 뾰족한 데가 어떤 쪽으로 가르쳐 주는지? 연필 뾰족한 데가 가르쳐 주는 대로 그 방향으로 내가 나가보겠다. 이런 마음으로 던져 봐요. 그래 그게 나오면 그 방향으로 가는 거야. 가는 것은 그건 아주 점을 바로 친 거니까 고대로 가면 자기에게 좋게만 나오겠어? 아니야, 그게 아니에요. 안가지 못하는 데서든. 가야하거든. 그래 그리로 나가거든. 나가다가 정말 바로가면 그건 하나님의 은혜지 반대로 되었어. 점점 갈 데를 멀게 가지면 그거야. 어찌할 수 없지. 그 마귀의 장난이지 알 수 없다고 하는 수밖에. 우리 이 세상이라는 건 그런 거예요. 믿는 자는 아무 걱정을 도무지 안할 거 같지요? 이 세상은 그런 세상 아닙니다. 물론 주역하면 주역, 그것이 괘라는 게 비과학적이라면 비과학적입니다. 비과학적이지만 어떻게 놀라운 게 있는 게, 보통 지금 과학만 가지고 생각할 수 없는 게 거기 있어요. 그 괘라는 게 맨 처음에 여덟 가지를 괘라는 게 걸어놓는다는 글자, 그거와 같은 겁니다. 턱 내 걸어놔요. 여러분이 죄다 보고 생각하라고 걸 괘(掛)자와 같은 거예요. 걸어놓고 그 걸어놓고 생각해 거기에 64가지가 있다고, 맨 처음에는 여덟 가지를 그렇게 걸어놓게 생긴 건데 여덟 가지가 겹쳤어요. 위 아래로 겹쳤어. 여덟을 겹쳐서 자꾸 엇바꿔 놓으면 모두 예순네 가지가 되요. 그래 64괘라. 그래, 처음에는 예순네 가지가 이렇게 했었어요. 그건 아무것도 없었어요. 말도 없고 글도 글자 하나도 없어요. 그렇게 그려놨다는 거지요. 그 후에 사람들이 그것도 맨 처음에 누가 해놨는지 모릅니다. 말이 있어요. 이거 문황이 했나보다. 혹은 주공이 했나보다. 이러는 거예요. 말을 거기다 붙여놓는데 예순네 가지 걸어놓은 거기에다가 말을 붙여요. 말을 붙이는데 그거 단 이라는 글자를 씁니다. 절단해서 뭘 로 정한다는 뜻이겠지요. 단상이라고 그러는데 그 여덟 가지가 무엇인 고 하니 하늘하고 땅, 그 하늘을 어떤 거라고 걸고 생각해 가지고 걸어갈 수 있어. 하늘하고 땅, 그거 우리가 할 거예요. 불하고 물하고, 그것도 걸어놔요. 또 높은 산하고 깊은 바다하고, 그거도 걸어놔요. 또 바람하고 천둥 번개 하는 전기하고, 그걸 또 걸어놔요. 그럼 그중 큰 거, 그 여덟 가지를 택해서 그걸 걸어놨어. 그래 그림을 그리는데 획은 두 가지만 정해요. 힘찬 획하고 약한 획하고 획 두 개를 만들어요. 힘찬 획 하나 쭉 긋는 거, 하나 쭉 긋는 거, 그건 힘차게 긋는 거, 그렇게 하고. 약한 획은 반 잘라진 막대기 같은 거, 두 토막 벌려놨어요. 그건 약한 거, 그걸 뚝 뻗어서 강하게 한 게 그게 양이고, 잘라져서 토막이 나서 두 토막으로 표시하게 된 게, 그게 약한 거예요. 음이라고 그래요. 그 강한 획 약한 획을 해가지고 그거를 세 번만 써가지고 그려라. 여덟 가지를 그러고 그리라. 그랬어요. 약한 획 강한 획 두 획을 가지고 그려라. 하늘을 먼저 그려봐라. 잘라진 획하고 한 일자로 뻗친 획하고 그걸 갖고 하늘을 그려봐라. 꼭 세 번만 써가지고 그려봐라. 하늘을 가만 생각해 보면 하늘이라는 건 높을 거야. 클 거야. 기운이 셀 거야. 이렇게 생각이 들었거든. 그건 맨 처음 시작해. 아주 힘차지. 강하지. 그럼 하나를 뚝 긋지. 그 다음에는 또 힘차지. 뚝 긋지. 맨 나중에 그것도 힘차지. 그 강한 획 셋을 그 엇 거든. 이게 하늘이야. 그런 생각으로 해 놓았으니, 그거 오래 힘들여 자꾸 생각할거 없습니다. 강하고, 강하고 강하다. 그거 하늘이지, 뭐. 잘 그리지 않았어요? 거기대해서 땅을 그리면 땅
(끊김)
또 약하지 그럼 맨 나중에 끄트머리 또 약하지 별 수 없어. 세 번 다 약해. 그래 땅을 그렸지요. 그 다음에는 불을 하나 그리고 싶어요. 세 번 써가지고 그 불을 한번 그어봐라. 지금 사람들은 불을 어떻게 그렇게 잘 알았습니까? 불의 이치를 자세히 압니다. 불이 제일 어디가 뜨거운지 아세요? 사람이란 생각하기에 그중 많은 데가 뜨겁겠다. 또 그중 많은데 뜨거운 데는 그중 가운데겠다. 이렇게 생각되어요. 그런데 그때 사람들은 불의 성질을 제일 잘 알았어요. 불이 제일 어디가 뜨거우냐? 꼭대기가 뜨겁습니다. 거죽이 뜨겁고 꼭대기가 뜨거워요. 또 보기에 많은 데가 아닙니다. 끝에 뾰족한 데가 제일 뜨거워요. 그때 사람들은 그걸 알았어요. 꼭대기에 강한 획으로 긋습니다. 불을 그리는데 강한 획을 그었어 꼭대기거나 거죽이 제일 뜨거우니까 그 셋째 획도 강한 획으로 긋습니다. 그중 약한 데는 가운데가 약해요. 가운데가 약하니까 끊어 진 획으로 가운데를 그어요. 그래 옛날에 불이라고 가운데를 그려놨어요. 잘 그리지 않았습니까? 이 과학적 아니에요? 참 과학적이에요. 가령 우리가 불에다가 지금 전기 있어서 불을 저도 잘 안 씁니다. 불에다가 성냥까지를 하나 꺼내서 요기다 불을 붙이고 싶다. 그런데 마음에 얼핏 붙어야 하겠으니까 그중 두터운 맨 가운데 거기가 제일 뜨거울 거 같아서 성냥을 거기다 쑥 집어넣어 안 붙습니다. 또 몹시 뜨거우면 가운데 가서 나무 떼기 가운데 가서 거기 제일 약한 데인데, 약한데 어떻게 붙을 리가 있습니까? 약한 데는 거죽으로 통한 여기가 거죽에 닿았으니까 거기 굵은 데 얼핏 붙지 않아요. 그 끄트머리가 닿아야 얼핏 붙을 텐데 그 끄트머리가 닿아야 붙을 텐데 가운데가 쑥 들어가 여간 붙습니까? 안 붙어요. 정말 급하면 불의 성질을 알면 그중 꼭대기 뾰족한데 거기 대지. 암만 급해야 쑥 집어넣지 말고 꼭 성냥개비 끄트머리만 혹 붙어야 하는데. 그 성질을 알았기에 강한 획으로 긋고 가운데만 약한 획으로 긋고 밑에 또 강한 획으로 긋고 그래서 불을 그려놓은 거예요. 그 불 화(火)자를 써라. 그건 어려워요. 어떻게 쓰는 건지, 이건 이치가 있거든. 거죽은 강하고 속은 약하다. 그 이치대로 그렸으니까 그건 뭐 한번 하는데 잊어버리지 않아요. 또 그다음에 물을 그리는데 물을 어떻게 그릴까? 물이라는 건 아주 약한 놈입니다. 물은 거죽으로 봐서는 그것처럼 부드러운 게 없어요. 거죽으로는 죄다 부드럽습니다. 물 온통 덩어리가 져서 내 밀리는 데는 그걸 당할 수가 없습니다. 그럼 통으로 우리를 당할 수가 없어요. 강합니다. 그래 물을 그릴 때에 가운데는 강한 획을 그렸어요. 물 수(水)자내리 긋는 거, 그거 강한 획으로 긋는 겁니다. 가운데 강한 획을, 거죽은 약하니까 끊어진 획을 썼어요. 먼저 끊어진 획, 가운데 통자로 또 이쪽 가장자리 또 끊어진 획, 그렇게 그건 우리가 옛날부터 아주 잘 아는 게 뭔고 하니 물 수(水)자가 뭡니까? 가운데 획 내리긋고 양쪽은 구부러져 끊어졌어요. 그래 그 물 수자가 그대로 물을 그린 거예요. 그렇게 묘한 겁니다. 그리고 산하고 바다를 그려야 할 텐데. 산을 어떻게 그리느냐? 산은 밑에가 넓지 않습니까? 맨 밑에 가운데 크고 넓으니까 그 속에는 바위도 있겠지만 푸석푸석한 흙도 많고 또 골이 진데도 있을 거고 많이 약할 겁니다. 또 가운데도 약해요. 맨 꼭대기 거기는 뾰족하기는 한데 거기는 부서져 내리지는 않고 맨 꼭대기는 그거 몇 천 년이 되도 몇 만 년이 되도 그대로 있어. 그건 강한 획이 아니면 안 되거든. 그래 맨 꼭대기 강한 획으로 맨 꼭대기 강한 획으로 하고 그 다음으로 약한 획으로 한 게 그게 산이에요. 그러나 물은 말이지, 바다는 물이 으레 있으니까 그게 약한 거지. 그래 약한 획으로 긋고 그 다음에 들어갈수록 암만 가도 밑으로 새지 않는 아주 든든한 걸로 강한 걸로 바닥을 한 게 분명 하거든. 강한 획 강한 획 위에만 약한 획으로 한 게 그게 연못 깊은 연못 바다, 그렇게 되는 거예요. 그렇게 여덟 가지 그린 거예요. 그 여덟 가지 그린 것이 그것이 글도 나기 전이에요. 말을 거기다 붙이기를 계다. 불이다. 물이다. 산이다. 바다다. 바람이라. 우뢰라. 요즘 같으면 전기라고 그럴 텐데 우뢰니 번개니 그때 우뢰 뢰(雷)자를 썼습니다. 그걸 겹쳐서 예순 네 가지를 썼는데 겹친 게 놀라운 게 산을 올려놓고 밑에다가 연못을 그려요. 그렇게 그려놓은걸 보고 저게 어쩌느냐? 아 지금 사람들은 거기 집 하나를 지었으면 좋겠다. 이랬을지 몰라요. 그때 사람들이 거기다가 이름을 붙이는데 산이 있어. 그 앞에 깊은 못이 있어. 그럼 그 형을 어떻게 하냐? 그 위에 있는 산이 모래 한 알이 떨어져도 떨어지지요. 떨어지면 그 연못으로 들어갈 거 아닙니까? 그래 자꾸 벌려서 손해를 보게 되어요. 그 밑에 정자 지어서 있었으면 좋겠다. 이런 생각이 아니고 모래 한 알이 떨어져, 떨어져 내려가 별 수 없다. 그래 손 그래요. 벌릴 손자 손, 또 놀라운 게 있습니다. 땅을 하나 떡 갖다놓고 산을 땅 아래다 갖다 놓아. 위에 땅이 있고 아래 산이 있으니 그걸 어떤 경우로 생각을 해요? 대단히 어려울 겁니다. 어떤 양반이 거기다 이름을 붙여놨는지 모르지만 땅이 위에 있고 산이 아래 있다. 그런데 그걸 뭐라? 겸손 겸(兼)자입니다. 겸손, 겸손 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묘합니다. 그 어떻게 겸손이 됩니까? 이건참 이상한 일입니다. 그때는 세상이 이렇게 둥그런지도 모르고 땅이 이렇게 돌아가는 줄도 모르던 때인데 그런데 그걸 어째 그때 그렇게 했습니까? 그것참 놀랍지요. 산이야 기껏해야 태산이 높다 해도 하늘밑에 산이로다.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 이 없건 만은 사람이 제 아니 오르고 뫼를 높다 하더라. 이따위 시를 하지 않습니까? 태산이 높다. 높다. 태산을 넘으니 천하가 좋을 것 같더라. 이따위 시를 모두 하는데 태산이 높다하면 올라가면 올라가진다. 이 소리만 하는 건데 그것은 무엇인가 하는 고 하니 개미새끼가 하는 소리입니다. 태산 올라가면 자꾸 올라갈 수 있다. 하는 건 개미새끼가 하는 소리에요. 그럼 엄청나게 큼직한 사람이 하면 어떻게 되어요? 하늘을 그리는데 땅이 위에가 있고 산이 아래가 있다고 그건 뭐야? 옛날 사람이 그런 걸 생각하는데 참 놀라운 일이에요. 겸손하다. 그 겸손하다. 누가 한 말인데 산이 한 말입니다. 나는 겸손합니다. 나 어떤지 태산이 말을 한 거지. 이 개미 새끼 같은 사람이 태산이 높다 해도 오르고 오르면 못 오를 리가 없어. 그런데 사람이 제 아니 오르고 메를 높다 하더라. 이러고 아주 다 정말 시를 잘 지었다. 이러는 건데, 그래 지금도 등산가들이 많이 있지를 않습니까? 태산을 정복하면 자기가 태산보다 더 큰 줄 알고 오르다가 떨어져 죽지를 않습니까? 어떤 의미로 등산가 되는 것도 거만도 있다면 있습니다. 모험하고 등산을 하더라도 조심하고 조심을 끝까지 해야 합니다. 실족 낙상은 발이 미끄러져 떨어져 죽은 건 그건 경망한 일입니다. 그건 등산가의 자격이 없습니다. 모험한다고 모험만 하는 게 세상 어디 있습니까? 모험 속에는 절제하고 조심하는 게 겹쳐야 합니다. 그거 없으면 등산가 자격 없어. 그런데 이거보세요. 오늘 이거 깨닫기 쉬워요. 땅이 위에가 있고 산이 아래가 있는데 거기다 말을 붙이기가 겸손하다고 붙였어요. 오늘 사람 알기 쉽습니다. 왜? 땅이 돌아가는걸 알아 공중에 뜬걸 아니까. 공중에 떡 떠있으면 이렇게 아이들 거시기하는 무슨 공이 있다든지. 공이 있다든지. 요새 토마토라고 한 개가 있다하면 땅은, 땅은 지금 공 같은 거 아닙니까? 공은 떠있지 않습니까? 지금 사람은 이거 아주 알기가 쉽습니다. 공중에 떠 있으니까 그럼 산은 공중에 공이 떠있다든지 토마토가 한 개 떴다든지 귤이 한 개 떴다든지 오톨도톨 한 게 그게 산 아닙니까? 귤껍질에 오톨도톨한 게 그게 산이에요.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그 잔 개미새끼 같은 건 그 불쑥 올라간 데를 아이고, 저 산꼭대기 올라가면 힘이 든다. 할런지 몰라요. 그런데 그 산 귤의 껍질같이 오톨도톨 내민 거 그걸 뭣이 높다고 할 수가 있습니까? 땅 밑에 있는 산이 땅위에 있는 게 아니라 땅 밑에 있지를 않습니까? 오톨도톨 한 거 또 귤 덩어리 밑에 있어요. 그런데 있는 둥 마는 둥하지 높기는 뭣이 높아? 그래 자기 처지가 그러니까 그저 겸손합니다. 그럴 수밖에 없어요. 한문에도 겸손한 거를 정말 알려면 지옥에 가서 같이 앉아 생각을 해봐요. 과연 겸손이란 이렇다. 이 세상에 제일 높은 재상이 되었을 지라도 나는 맨 끄트머리에 조금 있는 둥 마는 둥 있는 겁니다. 이렇게 될 거니까 가장 겸손한 거 아닙니까? 그럼 바이블을 읽고 영생의 길을 가려고하는 크리스챤도 점괘만은 알아야 합니다. 신학자가 되고 사상가가 되어가지고 온 천하에 모든 사람들이 목말라 하는 것을 축여주고 가르쳐주고 하는 그 선생이 세상을 내려다보면 대단히 높이 올라앉은 거 같은데 그러나 온 세상이란 하늘나라란 거기에 대해서는 붙는 둥 마는 둥 하는 태산 같은 것이 붙은 둥 마는 둥 있는지 없는지 맨 밑구멍에 말석에 가서 어떻게 형용만 조금 이렇게, 겸손해야지 별수가 어디 있습니까? 그럼 점괘를 가지면 겸손을 참으로 배울 수가 있습니다. 바이블 읽는 사람이 주역도 함께 섞어서 보면 좋겠어. 성경처럼 겸손한 걸 가르치는 책이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그것을 밝혀 주는 것은 주역의 점괘가 아주 구체적으로 가르쳐 주는 거 아닙니까? 나는 오늘 아침에 이렇게 자기로 말미암아 가지고 이렇게 해서 지금 이 말씀 하는데 까지 왔어요. 지금 맨 끄트머리 나도 몰랐던 건데 겸손 겸(兼)자 한자를 갖다가서 끝을 마칩니다. 우리는 온 세상의 끄트머리에요. 한 점 찍힌 듯 만 듯한 겁니다. 있는 둥 마는 둥 하는 거예요. 학사 석사 박사 몇을 겹쳐서 모두 한 사람이 있더라도 우리나라 앞에는 하나님이 세우신 이 우주 거기에는 있는 둥 마는 둥 붙어있는 한 점입니다. 우리의 있는 존재는 있는 둥 마는 둥 하는 존재에요. 그러니까 겸손 겸(兼)자는 별수가 없는 겁니다. 겸손한 걸 바로 가르치는 거는 주역 점괘에 아주 소상하게 알려주는 겁니다. 적어도 점괘는 여호와 하나님이 걸어놓으신 겁니다. 동양사람 그 배우려고 할 때 겸손한 걸 배우려고 할 적에 점괘를 봐라. 그러고 하신 거예요. 그 이사람 이 모양입니다. 이제는 이것도 그만 말아야 하는데 암 말아야지요. 말미암아 나갈까요? 찬송 한 장 부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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