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이와 계묘 초겨울 안동과 동해 지역을 돌아보았다. 3박 4일의 일정을 마치고 돌아와 동영상을 만들었다.
이미 고인이 되신 광주 박석현 선생의 안학수 선생의 추모의 글을 올려본다.
안학수 선생을 추모함
나는 내 신앙인생에 있어서 내 머리와 가슴에서 일시(一時)도 떠나지 않는 선생과 친구가 있으니 그것은 안학수 선생과 신현중형이다. 두분이 다 천국에 계신다. 하나님 예수 안학수 신현중 박석현 이와 같은 계열이 늘 머리에 떠오른다. 나의 인생에서 안학수 선생과 신현중 친구를 갖게 된 것은 오직 하나님과 예수님의 은혜라고 생각한다. 또 하나님과 예수님을 알게 된 것은 안선생님과 신형의 덕택이다.
이 두분을 알지 못했다면 나는 영원히 하나님과 예수를 만나지 못했을 것이며 그랬다면 나는 일찍 이 세상에서 사라졌을 것이다.
지금부터 36년전인 1934년 12월 말경에 신형을 통하여 안선생의 존함을 듣게 되었고 동시에 놀란 것은 안선생님께서 예수를 믿는 신도라는 것이였다. 신형이 예수를 믿게된데 대해서 처음 놀랐고 현대의학을 전공하신 지성인인 안선생께서 예수신도라는 말에 대해 두 번 다시 놀랐었다. 더욱이 안선생님은 그 당시 전남의 군소재지로서 1 2위를 점하는 순천 나주의 군수를 지내시고 황해도의 참의관으로 영진 영전하신 안종철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을 알게 됨에 다시 한 번 놀랐었다.
내가 이렇게 놀랐다는 것은 내가 없이 어리석었다는 것을 말한 것 밖에는 없는 것이다. 그 때 까지의 나는 소학교만 졸업한 것으로도 소위 신학문을 맛본 신시대인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모든 종교는 미신이라고 했으며 종교를 믿는 것은 불학무식한 우부우부( 愚夫愚婦)들의 한사(閑事)라고만 알았던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아무리 자기 일이라고 고소(苦笑)를 금할수 없으며 말하는 것 좇아도 부끄럽기 짝이 없다. 더욱 종교중에도 예수교는 서양의 종교라는 점에서 한층 멸시했던 것이다.
이 예수를 머리가 영리한 신형이 열심히 믿고 또 당시 일군의 공의로서 신학문인 양의학을 닦은 안선생께서도 진실히 신봉하신데 대해 내심 놀랐었으며 따라서 예수교 그 자체에 대한 인식을 달리하게 되었다.
안선생님께서 전남 곡성군 공의로 계실 때 어느날 진료를 받으러온 신현중형 (당시 초등학교 선생) 에 대해 진찰을 한 다음 ‘당신은 몸에는 아무런 병이 없는데 신경과민으로 자신의 건강을 공연히 걱정하는 것 같다.’하시면서 내촌전집이란 책을 책장에서 꺼내더니 신씨를 대하여 ‘눈을 감고 앉아서 조용히 들으라’고 하시면서 소리를 내어 읽드란 것이다. 신씨가 귀를 기울이고 듣고 있으니까 얼마쯤 읽고 나서는 신형 보고 ‘들어보니까 기분이 어떠하냐’고 물었다는 것이다. 신형이 ‘처음 들어보는 귀한 말씀이며 기분이 좋다’고 대답을 하니까 안선생 왈 ‘당신에게 책을 빌려 줄 수는 없어도 매 토요일이면 오후부터 와서 일요일 오후까지 내 집에서 침식을 하고 그 책을 읽으라’고 권했다는 것이다. 그래 신씨는 안선생님이 초면임에도 불구하고 매우 친절하시고 사랑으로 대해주면서 자신의 애독한 장서를 읽도록 권하시는 태도에 대하여 진심으로 감복하였다. 과연 신형은 그대로 실행하여 내촌전집을 영문 두권만 제하고는 18권을 일독하는 동안에 자신도 모르게 예수를 믿게 되고 기독교의 타종교에 비교할수 없는 우수함을 발견함과 동시에 특별히 일반 기독교회의 제도적인 의식적인 신앙이 아니고 생명이 넘치는 무교회적 신앙에 접하게 되었다.
나는 신형과 일야(一夜)동숙(同宿)하면서 이상의 사실을 듣게 된 것이 기연이 되어서 기독교에 접했고 원치 않았던 기독교가 된 것이다.
그 후 1935년 가을 어느날 대면한 일도 없이 처음으로 서신을 한통 안선생에게 보내게 된 것이 선생과 나와의 주 안에서의 교제의 시작이었다. 수차에 걸쳐 서신의 왕래가 있었고 서로가 상면하기를 고대하다가 1938년 5월초에 당시 나의 고향인 화순군 공의로 전근하신 소식을 듣고 일부러 처음으로 방문하여 하루 밤을 지내게 될 때 서로가 10년지기를 만난 듯이 기뻐하고 반가워 했었다. 기독자의 사랑의 교제란 것이 이렇게도 형언할 수 없는 순결한 것이 하는 것을 느꼈었다. 또 이 때의 첫인상이 깊었던 것은 서로가 마주 앉아서 신앙담으로 꽃을 피우는 중 성서조선 101호의 사은기념회 증정문을 소리를 내어 읽으신 다음 ‘우리 조선에도 김교신과 같은 훌륭한 무교회 신앙가로서의 기독교가 있다는 것은 참 감사할 일이며 하나님께서 이 백성을 버리시지 않는 다는 것을 알수가 있다’면서 나에게 성서조선을 처음으로 소개하신 일 때문인 것 같다.
나는 1937년 10월 경에 복음적 신앙의 조선문 월간지로서 성서조선이 있다는 것을 듣고도 발행처를 알 길이 없어 구하지 못하던 차에 안선생님의 소개로 이를 구독케된 것을 일생을 통해 잊을 수 없는 하나의 은혜로 믿고 감사하며 기뻐하는 바이다. 이 때에또 선생님께서는 하나의 원고문을 낭독해 주신 것이다. 그것은 안선생님의 역서 신앙의 신비라는 책에 게재된 것인데 막달라 마리아에 대한 원고문이었다.
그 후 안선생님께서는 공의를 사퇴 상경후 서울로 가셔서 무슨 생명보험회사의 사의로 시무하셨다. 1940년 3월 13일 밤 성서조선사 주최로 경성 기독교 청년회관에서 일본의 그로사끼(黑崎莘吉) 선생을 초청하여 내촌감산 선생 10주년 기념강연회가 있으니 내참(來參)하라는 통지가 안선생님과 흑기선생으로부터 와서 나는 여백사하고 휴가를 얻어 참석한 때에 안선생님 댁에서 식숙의 후대를 받았었다. 이때에 비로소 안선생님의 믿음의 자당님도 인자하신 부인도 처음으로 대한 것이다. 초면이었으나 10년 구면이나 다름 없이 대해 주셨던 그 친절과 사랑의 태도에는 감복 아니할 수가 없었다. 그 때 서울역에 내리니 비가 와서 비를 맞고 안선생님 댁을 찾아갔는데 그 자당님과 부인께서 나의 비맞은 양복을 말려 대림질 까지 해 주시면서 꼭 친자식이나 친동생을 대하는 것처럼 대하시고 믿음의 영원한 식구 된 것을 고맙게 생각하신다면서 진심으로 기뻐하시던 그 천사와도 같은 모습이 지금 이 순간에도 눈 앞에 방불하게 나타나는 것을 느끼는 바이다.
생각할수록 나는 안선생님을 믿음의 복된 사람이라고 생각하였다. 신앙의 어머님과 부인으로 이루어진 신앙의 가정에서 신앙의 일생을 보내시는 것이니까 말이다. 안선생님은 허위를 철저히 배격하시고 진실을 좋아하신 성격이었다고 믿는다. 믿음만의 무교회신앙에 철저철저 하셨다고 믿는다. 선생의 신앙 태도는 고정적이 아니고 유동적이 아니었던가 생각된다. 식사 기도를 ‘감사합니다’하는 일언으로 간단히 하면 되는 것인데 기다랗게 하는 것은 불가하다고 하시는가 하면 어느 때는 자신이 소리 내서 기다랗게 감사기도를 하시기도 하였다. 나는 처음 대면하였을 때에는 성서조선지를 극구 찬양하면서 소개하신 분이 나중에는 시국에 추종한다고 구독중지하신 것이다. 즉 표지 이면에 황국신민서사를 게재한 것이 못마땅하셨단느 것이였다.
안선생님은 매우 동정심이 강하셨던 것으로 안다. 1942년 7월에 내가 상처와 실직을 당하였을 때 물심양면으로 동정을 하셨다. 나의 취직건에도 백방으로 염려를 해주셨다. 1943년 9월에 내가 황해도 사리원 동흥제약사에 취직하게 된 것도 선생님의 덕택이었다.
8.15 해방 후의 우리나라의 불신에서 기인한 모든 혼란 상태에 대해 진정으로 국가와 민족을 위해 걱정하셨다. 진정한 건국 진정한 독립 진정한 애국 애족의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복음을 굳게 믿고 살며 이를 전하는 데에만 있다고 편지를 주실 때마다 역설 강조하셨다. 선생님은 사랑의 실천을 하셨다고 믿는다. 내가 방문 할때마다 반드시 친히 대야에 물을 떠서 갖다 주시면서 세면 세수 세족 까지 하도록 하셨다. 어느때에는 공동욕탕에 까지 나를 데리고 가셔서 목욕을 하게도 하셨다. 언제나 사람을 대하실 때 쾌활하신 얼굴 쾌활하신 말씀 쾌활하신 태도로써 상대자를 극히 명랑케 하신 것이다.
안학수 선생님과 신형중 형의 두 분이 아니었다면 나는 이미 고인이 되었을 것이요, 살아있다 하더라도 전혀 무의미한 비참한 인생을 살게 되었을 것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안선생님에 대한 존경과 애모의 마음이 뜨거워짐을 새삼 느께게 되는 바이다. 안선생님의 귀한 점은 말할 것도 없이 무교회신앙이라고 믿는다. 신앙의 자유인이요, 평신도임에 있다고 믿는다.
끝으로 선생님께 대하여 하나 애도의 정을 금치 못하느니, 그 것은 그 부자연스러운 최후를 가지신 점이다. 후일 천국에서 대면하게 될 때는 반드시 그 점을 물어보고야 말 것이라는 생각이 언제나 나의 염두에서 떠나지 않는 바이다. 그 때에는 깔깔깔 한바탕 웃으시고 마실 것이라는 생각이 떠오르기도 한다. 그러나 천국에서 한층 더 선화되고 미화된 그 쾌할한 모습에 접하게 될 것을 유일의 즐거움으로 생각하면서 새삼 선생님을 추모하여 마지않는 바이다.
박석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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