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 가신지 12년이 지났으니 아이들이 많이 자랐다. 자기 일들이 있으니 큰아이들은 참석 못하고 작은 아들들만 참석했다. 멀리 동해에서 진도에서 다녀갔고 길농원에도 유치원 학생들이 체험 학습 다녀가는 날이다. 공무원 아들이 있어 추모일도 유동적이다.
진도에서 오전에 출발 무안고속도로를 이용해 광주 시가지를 통과해 곡성에 갔다가 내려올 때는 주암 송광사 보성 ㄱ장흥 강진 해남을 지나 진도에 돌아왔다.
아래에 이열 시인이 할머니께 쓴 편지를 올려본다.
자매님 보십시오…
두 차례 씩이나 글월을 받고 본의 아니게 무심했습니다. 얼결에 답장 올릴 기회가 지났었고 또한 답장을 바라는 사연이 아니기에 마음속에 접어두었습니다.
용서를 비옵니다.
두 번째 글월은 양주생각을 간절하게 했습니다. 그 밋밋한 산이며 개성이 없는 들판, 무서운 정적이 감도는 그 곳이 지금은 풍성한 가을에 무르익어가는 모습도 상상해 봅니다.
자매님의 時情에 넘치는 양주의 가을 묘사는 더욱 그리움에 사무치게 합니다.
나는 楊洲를 ‘원경선의 詩’라고 생각합니다.
오직 사랑의 올과 날로 짜여 져가는 아름다운 견직물 같이 비기게 됩니다. 적어도 詩는 그렇게 엮어져야 생명과 영원을 담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또한 풀무원의 가족들은 그 시를 이루는 韻律(리듬)이라고 생각합니다.
거기에 꼭 어울리는 韻이 없이는 詩는 이루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시 자체보다는 시를 빛내는 것은 운율이라고 믿습니다.
자연의 아름다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우주의 조화, 불변의 00의 순종… 그 모든 것은 하느님의 詩를 이루는 운율로써 존재한다고 볼 때, 지금 우리가 겪는 육체적인 고통, 정신적인 번뇌, 실망과 좌절, 허무감은 그 시를 이루는 진통이 아니겠읍니까
이에 그리수도의 수난은 완벽한 모범으로서 이 사실을 보여주며 날마다 우리와 産苦의 기쁨과 슬픔을 함께 한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양주골은 내 영혼의 고향이기에 이 모든 말은 그 鄕愁心에서 울어 나온 솔직한 내 심경입니다.
소상한 집회 소식도 즐거움을 안겨주었습니다. 또 미순에게 때 아닌 토마토를 담뿍 보내 주셔서 오래오래 먹었습니다.
내 道傍을 ‘恩寵館’이라고 命名 하신다면 더 없는 기쁨이 되겠습니다. 버린돌이 모퉁이 돌이 된다는 詩評의 말씀처럼 쫓겨난 사람의(다른 뜻입니다) 내 거처가 그렇게 귀한 집으로 쓰인다면 원형님의 내게 향한 사랑이 결코 헛되지 않았다는 결과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자매님.
이는 편지가 아닙니다.
부담 없이 읽어주시고 자매님의 사색에 도움이 되었으면 만족합니다.
여기에 작년이맘 때 양주에 들어가기 전에 지은 시를 적어봅니다. 지금의 나의 정신적인 상황을 이 시가 정확하게 표현해 주기 때문입니다.
가을기도(追悼)
내 영혼에도 소슬바람이 붑니다
가을볕에 영그는 철이 온 듯 마음
속이 잔잔해집니다
한 알의 능금도 당신의 뜨거운 입술에 타서 붉게 익습니다
임이여…
초저녁의 쓸쓸한 땅거미를
바라보는 헐벗은 내 영혼도
당신의 뜨거운 입술에 붉게
타오르게 하소서…
갈 길이 끊어진 허무한 벌판
한 가운데서도 멈추지
않고 홀로 걸어가는 것은
저 지평선 너머에 당신이
서서 미소로 나를 맞고
있기 때문이옵니다.
편지가 길어졌습니다.
풀무원 가족들에게 안부를 두루 전해 주십시오. 그리운 고향 사람들입니다. 그 후 ‘受難曲’은 녹음해서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들려줍니다. 그러나 그날 밤과 같은 감격은 다시 경험하지 못합니다. 나는 그 시를 그날 밤, 낭독하고 밤새 미열 속에서 앓았습니다.
그러나 영혼이 앓는 고통이었습니다.
그 후 원형님의 수술 뒤 건강은 어떠하신지요!
오영환씨한테는 오히려 내가 무관심 했었습니다.
이만 줄이겠습니다.
주인님께 특별히 안부를 전해 주십시오. 그분의 모습은 마음에 남습니다. 박효서자매님의 건강도 염려 됩니다. 엄봉준형님과 자매님, 이근영 형님과 자매님, 이근영 형님과 자매님, 금복씨, 그 밖에 식구들도 생각합니다.
Y.77.9.2
수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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