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남 마한리에 있는 미세마을에 가서 예쁜 화원을 보고 돌집 이층에서 하루밤을 자고 곡성을 경유하여 함양에 다녀왔다. 이틀 사이에 많은 것을 보고 사람을 만났다. 인생은 아름답고 신비하다.
사탄도 피조물
1986. 8. 15
그 하나다. 그 외에 다른 건 볼 것 없어. 지금 생활도 볼 것 없고. 경제 경제를 아무리 한다고 해도 볼 것 없고. 그거 그 때 그 때 지금 또 이 다른 일해도 뭐 잘 했으면 그 때 하느님이 쓰신 것뿐이지. 사탄도 하느님이 쓰시긴 쓰시니까 악령도 악령 뭐하라고 내셨겠습니까? 악령을.
사탄도 피조물이에요. 하느님이 내셨어요. 쓰셨어요. 그 쓰임 받은 것만 다행인줄 알아서는 안 된다. 악마도 쓰시는데 뭐. 쓰이면 된다는 말이야. 다 쓰고 버리려면 버려버리는데 빗자루 다 닳으면 내버릴 것 아닙니까? 못 쓰게 되면. 참 요걸 쪼금 좀 보고 해야 하는데 인자 그만.
14절
‘우리가 아는 대로 율법자체는 영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나는 육정을 따라 사는 사람으로서 죄의 종으로 팔린 겁니다.’
여기서 선 할 수 있겠어요? 없겠어요? 대답만 해요. 업죠? 왜 없죠? 죄의 종으로 팔렸으니까. 그 자유가 없어요. 죄의 종인데 인자 뭘 한다면 죄 짓는 것 밖에 더 있겠어요? 죄의 종이니까 죄에 꽉 매여 있으니까. 그 죄에서 풀려나야 자유해방이에요. 죄의 종인데 그러면 이때가 바울사도가 율법에 모른 사람이죠? 흠도 점도 없는 율법으로 아주 정통했고 엄격한 시련을 겪은 사람이다. 율법을 통해버렸어요.
그러나 그런데 그 율법의 결과는 죽겠다. 죄의 종으로 팔렸다. 도무지 그걸 모르니까 아 그대로 해라. 해라. 해라. 하자. 하자. 이렇게 하여 되는가? 왜 더 한 것일까? 그렇게 하면 뭐하냐? 인제 율법을 깨달아서 뭐하냐? 나는 죄인이 됐고, 역할입니다. 나도 죄인이다. 나는 죄인이다. 나는 못 합니다. 나는 죄의 종입니다. 나는 늘 죄의 정복을 당하고 있는 존재입니다.
나는 이제 그 두 가지 육적인 존재, 죄의 종으로 팔린 자기, 또
15절은
‘나는 내가 하는 일을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내가 해야 하겠다고 생각하는 일은 하지 않고 도리어 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뭐 이 일을 해야 하는가? 안해야 하는가? 아니 내가 해야지. 내가 해야지, 해놓고 나니까, 원치 않은 것만 결과가 딱 나타나고 만다. 아 내가 이걸 원치 않는데 왜 여기저기 이렇게 됐는가 말이야.
오늘 만은 내가 아 혈기를 한 번 부려 보지 않으려고 꼭 마음먹었는데, 아침부터 마음먹었는데 아 언제 버릇이 나와 버렸어. 버릇이 탁 나와 버렸다 말이야. 어찌 이럴까? 왜 그러니까 우리 경험 많죠? 왜 그럴까? 장담할 때, 오늘만은 내가 혈기 안 부려야 되겠다. 화 안 내야겠다. 그러면 생각해 보니까 아 몇 번 냈다 말이여. 왜 그래요? 왜 그냐고요? 결심을 안 해서? 결심을 했는데도 아주 이를 악물고 했는데, 그런데도 했거든. 왜 그러겠어요? 아 죄의 종이니까. 아하 죄가 명령하니까 얘기 했겠죠. 죄가 나타났어요. 아 대장이 계신 대장이 명령하는데 거절해요? 대장이 명령했어요. 아니 안했죠. 아 상관이 명령한데 주인이 명령한데 종이 반대해요? 아이고 그러죠. 반대하면 자기 손해날 텐데. 또 쫓겨날 텐데. 아 예예 그래요. 아 저 배 째고 만져라 할 테니까 아 있는 거 다 주시오.
원해진 원하는 것은 진짜 원하는 것은 되어 지지 않고요. 원치 안했던 결과만 나타내버려요. 그런 일을 하면서도 그것을 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곧 율법이 좋은 것이란 것을 인정합니다. 자꾸 안 될 때 해야겠다는 것이 안 되질 때 일이 좋다는 것을 인정한다.
내 생각대로는 안 되어야만 예수를 믿을 길이 나타난다. 그 말입니다. 그런 게 좋아요. 완전히 자기를 부정하게 되니까. 그래서 그리스도를 갈망하게 되니깐 좋다는 것입니다. 율법이. 율법을 소개받은 그리스도를 소개받으니까 율법은 그리스도의 안내자거든요. 그리스도에게 율법은 안내자, 넘어서는 것이 율법이거든. 어떻게 해서 안내자하냐? 못 한다고 손들게 하니까 안 되니까. 제가 저는 죄인입니다. 그럴 때 그럴 때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그렇게 되니까 그렇게 예수님 믿음이 적은자여 왜 그러신 걸까? 손을 잡아 주시고 안내자 노릇을 안 시키고 또 율법은 손들게 하는 것이에요. 모든 죄를 깨닫게 하는 것이여. 죄를 더 많게 하는 것이여. 율법은 많이 드러나게 하는 죄가 많이 드러나게 그래서 그냥 아니고 나는 죄인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율법이라니까요. 주여 나 살려주십시오. 주님만을 애원하게 주님만을 갈망하게 하려면 주를 믿게 하려는 거야. 그 안내자 아닙니까? 그러니 내가 했다. 지켰다 한 게 교만만 자꾸 해지지, 예수 하고는 거리가 멀어진다는 거여. 예수하고는 상관없는 존재가 된다 말입니다. 율법을 행하므로 그리스도와 올바른 관계를 맺으려고 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와의 관계가 끊어졌고 은총에서도 벗어났다.
17절
‘그렇다면 그런 일을 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내 속에 도사리고 있는 죄입니다.’ 이것입니다. 죄에요 죄, 사람은 둘이에요. 죄인인 나, 그리스도의 속성은 조금 희미한 거 있다 말입니다. 하느님이 복이 있어요. 양심 있어요. 양심 있어요. 이건 아주 무능해요. 양심은, 자유가 없거든요. 양심은 정욕에게 끌려 당겨요. 매여 살아요. 그래 자유가 없어요. 양심대로 정욕을 치료 못해요. 양심이 정욕을 치료해야 하는데 정욕이 끌고 다닌다니까 양심이, 그런 게 죽겠죠. 그렇게 자유가 없죠.
‘그런 일을 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내 속에 도사리고 있는 죄입니다. 내 속에 곧, 내 육체 속에는 선한 것이 하나도 들어있지 않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습니다.’
모두 또 발견했죠. 선한 것이 없다. 여기 몇 짼가 모르겠습니다. 선한 것이 없다 선한 것이 없다. 또 마음으로는 선을 행하려고 하면서도 선을 하고 싶은 그 의미는 있어요. 저 같은 사람은 원도 없지만은 있다 하더라도 말입니다. 있지만 원하면서도 행하려고 하면서도 나에게는 그것을 실천할 힘이 없습니다. 아까 요한복음 14장31절의 말씀같이 끝 절입니다.
그거는 실천할 수 있었고 세상이 내게 와도 나하고는 상관이 없다. 여기서 예수님이 내 안에 오시면 실천이 되고 인자 악마에 사로잡혀서 죄가 주장할 때는 전연 실천할 힘은 없습니다. 선도 없고 선을 행할 힘도 없고 선도 없어요. 선이 있으면 힘도 있을 텐데 선이 없어요. 선은 하느님뿐인데 하느님이 계시면 하느님이 주장하시면 전능하신 게 하실 텐데 힘이 없단 말입니다. 은혜는 힘 아니요? 힘.
18절
‘내 속에는 곧 내 육에 속에는 선한 것이 하나도 들어있지 않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습니다. 마음으로는 선을 행하려고 하면서도 나에게는 그것을 실천할 힘이 없습니다. 나는 내가 해야 하겠다고 생각하는 선은 행하지 않고 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는 악을 하고 있습니다.’
자꾸 악만 해져요. 말이야. 이거 참 기막힌 일 아닙니까? 아 선을 했는데 왜 그 모르게 그냥 할일을 안 보려는데 척 나와 버렸다 말이여. 긍게 악인이 자기에게서 아직 해방을 못하고 있다 말입니다. 예? 예? 죄의 종살이에서 못 벗어나서 그런다고 봐요. 악인 내가 아직 살아있다 말이여. 악인 내가 죄인인 나가 살아 있단 거여. 그런 일을 하면서도 그것을 해서는, 20절입니다. 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고 있으니 결국 그런 일을 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내 속에 들어 있는 죄입니다. 여기에서 나는 한 법칙을 발견했습니다. 혹 내가 선을 행하려 할 때에는 언제나 바로 곁에 악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죄를 발견했습니다. 선을 막 하려고 나는 절대로 혈기를 안 부려야겠다. 오늘 만은 또 오늘도 요 한 시간만은, 한 시간도 못가, 어떤 사건이 부닥치면 곧 나와.
악이 바로 곁에 도사리고 있다는 거요. 선을 하려고 마음 딱 먹으면 그때 악이 곁에서 ‘오, 네가 선해?’ 그렇게 말해요. ‘네까짓 꺼 뭣이냐?’ 자 악이 인자 악이 ‘장담해봐’ 죄가 장담하고 있어. ‘네까지 것’ 해요. ‘해봐, 해봐라.’ 네 얌전히 이겨 보겠어? 내가 지금 얼마까지 얌전하다고 해봐요? 그러면 아이고 인자 그럴 때 장담할 때마다 악은 곁에서 ‘응, 됐다. 인자 장담했다. 됐다.’고 말 한다.
약한 사람은 아무도 못 이기지요. 약해서 예수만 의지한 사람, 예수만 의지한 사람은 악한 악마는 손도 못 대죠. 예수님이 딱 지키고 계시니까 지켜주시니까 그냥 자기가 가보니까 예수님은 가만 보고만 계셔. 자기가 강하니깐 그러니깐 벌써 강한 고 자체가 악마의 종이에요. 여 스스로 섰다는 것은 벌써 넘어졌다는 증거라.
‘나는 내 마음속으로는 하느님의 이름을 반기지만 내 몸 속에는 내 이성의 법과 대결하여 싸우고 있는 다른 법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자꾸 불가능의 의미를 발견합니다. 선을 하려고 할 때 악이 곁에서 도사리고 있고, 그 뿐만 아니라 늘 싸우고 있고, 그 뿐만 아니라 악의 세력에 늘 정복당하고 있는 사실, 그 법은 나를 사로잡아 죄의 법이 말입니다.
나를 사로잡아 내 몸속에 있는 죄의 법이 종이 되게 합니다. 아무리 종살이에서 벗어나려고 해도 안돼요. 예, 이거요. 아 우리다 소원하는 일이지요. 언제나 이 죄의 짐을 벗어 버립니까? 그 선을 행하려고 하면 자기가 하려고 할수록 무장, 무장 끌려갑니다. 끌려가요. 악마가 끼워도 여기까지는 발견 못해요. 이것이 성령의 역사라 말이요. 이거이 성령의 역사요. 죄를 자꾸 발견하는 거. 죄의 종으로 하여금 항상 죄인 됨을 기억케 하소서.
‘죄인 됨을 깨닫는 시간이 제게는 가장 행복된 것은 주께서 그 분께서 가까이 오셨기 로소이다. 죄는 항상 죄의 약함을 깨닫는 시간이 제게 가장 복된 것은 훨씬 본능이 물밀듯이 찾아 주시는 까닭이로소이다.’
크신 은총의 권능이 물밀듯이 막 넘친다 그거야. 그럴수록 약함을 느끼니까 약하니까 예수님한테 딱 쓸어 맡겨버린다 그거야. 신뢰, 신뢰 딱 의지해 버려. 걱정할 것 없어. 송두리째 맡겨버려. 백 장로님 같이 송두리째 맡겨 버린다. 걱정할 것 없다. 은총의 역사가 물밀듯이.
누가 이 죽음의 나를 구해줄 수 있겠습니까? 절대로 없습니다. 자기 자신도 그렇게 죄에서 지키지 못 하는데, 누가 감히 사람을 지켜주겠습니까? 누가 거기서 나를 해방시켜줄 사람은 없어요. 여기가 손들 때 아닙니까?
자기 자신은 율법으로 흠도 없고 자기 같이 양심껏 정통으로 해본 사람도 깨어서 해보려고 한 사람도 자기만한 사람도 없을 것이죠. 아마 바울사도같이 열심히 한 사람은 별로 없을 것 아닙니까? 성자들도 성녀들도 더 했는지 덜 했는지 모르겠지만 바울사도 만치 열심히 한 사람도 없겠죠. 선하고 또 선해왔고 양심껏 해왔고 인륜상으로는 도덕상으로는, 죄인 중에 괴수라니까 도덕상 죄인 줄 아세요? 정신적인 면이죠. 예수님 앞에 있죠. 자기가 제일 잘한 것이 도적이죠? 교만이죠? 그것이지. 무슨 다른 것입니까? 그렁게 다른 사람 많이 유혹시켰죠? 예수께 자기가 제일 잘했으니까. 예수님에게 못 대해줬죠? 죄인이 지요. 바다로 육지로 다니다가 겨우 하나를 만난 즉 배나 지옥자식을 만들어 버렸죠?
25절
고맙게도 하느님께서 25절입니다. 요것이 인자 로마서7장은 율법의 극치에요. 율법 마지막이야. 율법으로서는 다 인자 그게 끝이에요. 다 깨달았어요. 인자 25절에 가서는 복음으로 들어가는 다리에요. 다리, 징검다리 25절을 통해야만 복음으로 들어간다. 여기는 그러니까 어제 발표하는 거 설교를 들어보니까 그전에 선생님에게 그 김용옥 장로님의 선생 그분의 설교 들은 것이 인자 조금 새로워 질 거예요. 아 그 때 그 거시기 한 거 조금 배운 것이 남아 있구나. 그에 그 때로서는 최고의 제게 지도자였습니다. 그 분이, 그 장로님이 지금도 그분이 최고의 지도자겠죠.
이현필 선생을 만난 뒤로는 이 현필 선생의 대까지 대줄 지도자는 됐어도 이 선생의 더 앞을 지도하는 지도자는 못된다. 지금도 이 현필 선생보다 더 바른 길을 가르치는 스승이 내 눈에 발견된다면 난 그분께 가겠습니다.
아직까지는 그 이상 발견이 안 되니까 여기서 족하다. 난 그것만으로 그런 지도자를 만난 것 만 행복한 것뿐이지. 다른 거 없어.
마음으로는 하느님의 법을 따르지만 육체로는 죄의 법을 따르는 인간입니다. 이건 미래사요? 과거사요? 현대사입니까? 현대사요? 그러면은 감사가 뭔 필요합니까? 도로 죄를 따라 갈 바에야 예수 뭐할라 믿어요? 도로 죄의 종살이 할 바에야 뭐할라고 예수를 믿냐 말이요. 안 믿으면 더 잘하고 기쁘기나 하죠. 믿고 보니까 양심에 거리끼기만 하죠? 그거 거리끼면 여서 똑같이 따라가죠. 꺼리기만 보이지 않습니까? 차라리 예수 몰랐으면 기쁜 마음으로 하죠? 충성이나 하죠? 그러다가 깨달을 텐데 뭐 충성 더 많이 해. 마지못해 따라가. 아쉬운 게 안 따라가면 현재 굶어죽겠으니까.
없을 때는 믿지요. 예수를 믿는 사람은 악마의 종노릇을 하는데 억지로 하고 있어. 억지로 믿지를 안 하면은 활발하기나 하지. 아 그러지 않겠어요? 양심의 가책을 받으니까. 바로 깨달아 버린 거여. 아 뭐 가책 받을 것도 없다. 인자 에이 죽어라. 죽어라. 그래 놓고는 나와 버리면 돼버린다. 거여. 아 언제 죽어도 죽을 몸이니 말이야. 아 그 막 가족 막 어디론 가족은 어째 여? 지금까지 자기가 가족을 봤는가? 장로님도 지금 자기 힘으로 갔는가? 하느님이 다 지켜주셨지. 아 차라리 가족 다 나와 버리면 하느님이 더 잘 지켜줘. 고아원으로 보내든지 가족들이 없으면 더 잘되게 할 텐데. 하느님이 고아의 아버지 아닙니까? 과부의 재판장 아니십니까? 고아에게도 과부의 기도를 들어주지 않습니까? 과부 많은데 지금 응답도 못 받고 모두 같아. 과부는 몸은 과부인데 아직 과부가 아니요. 모두 세상과 짜고 있으니까. 몸은 과부여. 마음은 과부가 안됐어. 뭣이 모두 은혜를 빚지고 있다. 반달 이 년 전에 딱 끊어버려야지. 무엇이나 끌리고 살잖아요? 끌리고, 뭐 자식 것 다 받아봤으면 거기다 쪼금 어째볼라고 뭣에다 의지해? 과부는 뭣이야? 아무 의지 없는 것이 과부여. 오롯이 주야로 주님만 사랑하는 것이 과부여. 그런 과부에게 기도를 들어주어. 아무 세상 의지가 없어요. 남편도 죽어버렸어. 자식도 없는데 있어도 필요 없어. 오직 주님만 있어요. 요 인자 다른 성경 보면.
죄의 법을 따른다고 되어있어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을 인하여 나 하느님께 감사하노라’
왜 감사하냐? 예상으로는 마음으로는 깨달음으로는 내 자신을 하느님께 마음은 하느님께 바치고 육체는 죄의 법에 바쳐라. 그렇게 되어 있어. 6장 끝 절의 말씀입니다.
죄의 대가는 죽음이지만 하느님께서 그저 주시는 은총은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사는 영원한 예수와 함께 사는 영원한 생명입니다. 은총은, 죄의 대가는 죽음이여. 죽음이에요. 그런 것을 죽음에다 내놔야죠. 십자가에 내놔요.
‘나는 십자가밖에 자랑할 것이 없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 십자가 날마다 죽으니까 겉 사람은 날마다 죽으니까 겉 사람은 날로 부패하니까 속사람은 날로 새롭다. 그거에요. 그 십자가, 뭐 성전 꼭대기에만 십자가 단 게 아니고 또 몸에다 붙이고 다니는 것이 아니고 실지 등에 짐을 진다 말이야. 예수 죽음을 자신이 짊어지니까 상대편에는 예수의 생명이 ‘약동한다.’ 그러지 않습니까? 오직 복음을 전하고 이런데 와 수양만 하고 있을 거냐? 예? 한국 제일 번화한 도시에 가서 외치라고, 아 서울 중앙에 가서 외치려고 이 현필 선생 일주일 만에 가서 가버렸지 않습니까? 아 저 오목사님 외치지 않습니까? 서울 가서도 외쳐요. 오늘 저녁 가서 외치러 가셨거든요. 교역자들한테. 영적으로는 지금도 외치시고 일하시겠죠? 그러지만 소리는 사람을 통해서 하신다.
죄의 법에 갇힌다. 죄의 대가는 죽음이에요. 죽음, 죽음을 내놓아라 말이여. 예수의 죽음을 십자가에 몸에 짊어진다 말이여. 그러면 전도를 받은 사람 그 감화를 받은 사람 백 장로님의 그 가족. 이 현필 선생님의 몸에 짊어지니까 그 감화 막 외치고 생명이 약동했으니까 버리지. 뭐 어떻게 해. 어떻게 그 아까운 재산을 가난 하다가 어떻게 앵겼는데 어찌 그리 버릴 수 있습니까? 내 놓을 수 있습니까? 아까워서, 그것은 은총이에요. 은총 생명이 약동하는 것이에요.
그 때만은 지금은 모르겠습니다. 지금은 모르지만은 그 때 그 순간 그 때만은 만장일치 전 식구가 옳습니다. 좋습니다. 그렇게 되는 것이 은총 생명이 약동 한다 요. 그러니 뭐 자기 있는 위치에서 자기 진짜 밥을 사먹은 제대로 하면 모든 사람이 주께서 날마다 구원 받는 영혼을 모아 주신답니다. 사도행전2장 하반에 그러지 않습니까?
그것이 전도여. 날마다 성전에 모이면서 서로 떡을 떼면서 마을 집집마다 다니면서 떨어뜨린 나무, 사람이 ‘아무개 오시오’ 안했어요. 주께서 전도는 주께서 하십니다. 하시되 사람을 통해서 해요. 믿는 사람 통해서 날마다 자기 충성을 다하니까 자기 받은바 사명에서 충성하니까 저는 그랬어요. 수도원에 안 들어가도 있는 자리에서 말씀을 깨달으면 그 자리서 수도, 예수의 보배를 한 몸에 내 마음에 떨어지면 그것으로서 이제 생명을 받았다. 그것으로서 점이 희생을 할 수 있는 원동력이다. 그것으로 그걸 신앙으로 준비한다.
여기 25절이 그 이해 잘 못 된데서 큰 폐단이다.
죄의 법을 섬긴다. 따라서 간다가 아니라 죄의 법에다 바친다. 바친다. 마음과 몸을 십자가에 내놓은 거여. 십자가를 진다.
8장 2절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생명을 누리게 하는 성령의 법이 나를 죄와 죽음의 법에서 해방시켜 주셨기 때문입니다.’
10절
‘비록 여러분의 몸은 죄 때문에 죽었을지라도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면 여러분은 이미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에 있기 때문에 여러분의 영혼은 살아있습니다.’
먼저 공동번역에는 생명이 있습니다. 그런데 죄의 법에서는 해방 8장2절 해방이요.
만 해방 받은 것으로는 또 자유로 하고 보면 또 매이고 죄의 종살이에서는 못 벗어났습니다. 완전한 자유와 완전한 해방은 죄의 몸에서 해방을 받아야 된다. 그 죄의 몸에서 누가 해방을 시켜 주냐?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해방을 시켜 줍니다.
어떤 사람을 해방시켜 줍니까? 몸과 마음을 십자가에 내놓은 사람에 한해서입니다.
하느님께 송두리째 바친 사람에게 하는 거야. 그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시켜준다. 그 뿐만이 아니라 생명까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까지 안겨줍니다. 그러면 인자 진짜 자유요. 진짜 해방이요. 진짜 평화, 평화, 천국입니다. 그것이 죄에서 해방 받으니까 진짜 구원입니다.
우리는 죽은 뒤에 구원은 받아도 좋고 안 받아도 좋지만은 그건 문제가 아닙니다. 죽어서 구원될 지 안 될지는 우리가 모르지 않습니까? 현재 구원이 제일 요긴합니다. 현재, 과거 구원은 2000년 전에 예수님께서 구속사업 구원의 도리를 우리에게 나타나 보여주신, 죽으면 산다는 것을 십자가상에서 탁 부활의 도리까지 보여주셨습니다. 부활한데 까지 믿을 수 있는 길을 보여 주셨으니까 그 사실을 믿고 현재 죄에서 해방을 되는 것이 구원이라 말입니다.
현재 죄악에서 구원을 받지 못 하고는 미래 내세의 구원을 기대할 수가 없습니다.
그 암만 구원된다고 믿어 봤던들 현재 죄에서 종살이 아니냐 말이야. 회개 안 되면,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했잖습니까?
이제 이 책을 봐요
해방된 지가 36년입니다. 그런데 일제강점시대 때 내사는 압박과 설움 속에서 산 횟수가 36년이고. 해방 전 해방 후 72년이라 말입니다. 저는 좀 더 여기를 볼 때 제가 지금 72세거든요. 그래서 제가 어느 때 낳은 것을 알 수가 있나? 난 통 생일도 어떤 때는 잊어버리지만은 몇 해 때에 낳았는지 모르거든요. 해방 36년 전에 제가 나왔구나. 알 수 있다 이거야.
압박과 설움에서 해방 된지 올해 36년째다. 이 36년이라는 숫자는 억압받았던 36년 동안과 그 숫자가 맞아 떨어지는 숫자다. 그래서 금년 8·15는 우리에게 더욱 깊은 감회를 가져다 준다. 압박36년 해방36년 합72년은 수명이 길어졌다 해도 인간의 한 평생에 해당하는 세월이다. 그 한 평생을 받은 억눌림 속에서 나머지 받은 억눌림을 벗어난 상태에서 산 셈이다. 그 36년 동안 살아온 거 뭔 시원한 것 있습니까? 무장 마음이 더 매이죠. 자유롭지.
해방은 자유를 견지한다. 우리는 자유란 것을 이러한 자유의 개념을 염두에 두고 맞은 것이다.
‘가네다상’ 이런 말 있죠? ‘가네다상’ 누구요? 김씨들 다 손들어요. 가네다 상이 김 서방으로 불러지는 변한 게 아니라 그런 해방 그런 자유가 아니라, 아 성을 고쳐버렸지 않소? 자기의 생각을 마음대로 입으로 말할 수 있고 손짓 발짓 나타낼 수 있는 즉 마음대로 목을 놀릴 수 있는 자유, 자유가 있을 때 해방된 것이라고 알고 있었다.
또 그것이 일반적인 세속적인 해방 전위이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인간에게 해방이란 없다. 없어요. 해방36년이 되어도 지금 해방 안 받았거든요. 죄의 종살이 하고 있거든. 자유까지도 마찬가지다. 자유도 없다. 무엇인가에 눌러 있는 게 인간이고 다 단속되어 있고 떠들고 자기 몸뚱아리에 매여 살아요. 먹어야 죄인 되죠. 자유 없어요. 무엇인가에 눌려 사는 인간이고 어떤 것인가에 걸려 있는 게 사람이다. 걸려있어요.
마치 물고기 물에 걸려있는 것과 같다. 물속에서만 자유로운 물고기이듯이 인간도 여러 제한된 울타리 안에서의 해방, 그러면 지금 자기 있는 주위에서 자기는 방에서 자유지. 방에서 벗어나면 어떻게 자기 허락된 그 범위 안에서의 그 방이지. 방 벗어나면 또 뭐 사방 걸리지 않겠어요? 자유이다. 그것은 참된 해방이랄 수가 없다. 참된 자유도 아니다.
불교에는 해탈이란 말이 있다. 해탈. 진정한 해방은 이 해탈이다. 해탈은 걸림이 없는 상태다. 제한을 받지도 않는 걸리거나 제한을 받지 않는 게 아니라 그 모든 것에서 뛰어나 버린다. 초월인 것이다. 모든 것은 자유로 보상할 수 있다. 초월, 물에서 살 수도 있지만 물을 떠나서도 아무 상관없다. 세상임금이 내게 오라. 나하고는 상관없는 존재다. 예수님이 아까 요한복음 나하고는 상관없다. 나하고는 상관이 없이 살아갈 수 있는 고비인 것이다. 생사를 초월한 것이다. 죽으면 더 좋다.
아까 사형수 중국여자 일 분 일초도 빨리 죽으면 된다. 어서 가면 된다. 생사를 초월한 것이다. 그러한 삶이 진정한 해방이고 그러한 삶이 진정한 해방이고 자유와 해탈이라는 것이다. 해탈은 집착을 떠나는 데서부터 시작 한다. 집착은 걸려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걸려있는 데를 모아 버려야 해탈은 가능하다. 걸린 데가 있으면 부자연스럽다. 불편하다. 마음도 몸도 편치가 않다. 그렇죠? 법 한 주먹에 손발이 꼼짝도 못한다. 법 안에, 지금도 법에 걸려 있지만 지금 꼼짝 못하고 계시죠? 가시면 가요. 갈 테면, 아이구 어서 가서 뭐 밥 차려야 할 텐데, 손발이 꼼짝 못하고 구령에 소리에 구령에 명령에 구령 한 마디에 걸려서 그 많은 일이 수천 근이나 된 것같이 무겁다. 무겁게 밤으로 지고. 가슴은 새가슴, 새가슴이 되어 아주 쪼그라져, 되어 항상 떨고 있다. 부들부들 떨고 있다. 옛날 우리 압박받던 때는 그랬다. 싸이렌이 호호 싸이렌 소리가 나면 호호 깜짝 놀래, 아이고 또 폭탄 떨어질라나? 어쩐가? 자동차 소리만 나도 놀래고 공중에 비행기 있으면 아 그 놀래고 압박받던 때는 그랬다. 그게 걸려있는 상태가 그것이 고통이다. 만날 여기 오는 것이 고통이야.
아이고 어쩌꼬? 어쩌꼬? 그 고통을 헤어나는 길 마음과 몸이 생각대로 풀려나는 것 그것이 해방이다. 자유다 해탈이다. 이 해탈은 죽음을 초월한 삶이다. 삶까지도 뛰어난 생이다. 생. 삶까지도 뛰어난 생이에요 생이다. 해방은 그 때에 감격스러운 것이다.
눈을 마음대로 입을 마음대로 마음을 마음대로, 열고 닫을 수 있는 자유 열고 닫을 수 있는 자유, 그런 해방 그런 해탈이 아쉽다. 8·15는 그런 해방의 날이 되어야 한다. 해탈의 날이 되어야 한다.
자유 없는 이유는 무엇이냐? 요건 인자 다른 사람의 말입니다. 우리가 왜 자유가 없냐? 욕심에 속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욕심에, 요건 다른 이유입니다. 자기의 고정된 사상에 매여 있어서 그럽니다. 아주 자기가 생각한 것 가장 옳은 것 그이 외에는 없어. 그 예는 없어요. 속박 고정된 사상, 절대 그건 누가 고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이나 벼락을 막 때려서 호령하면 몰라도 그건 못 고칩니다.
자기의 고정된 사상 또 아주 짧고 짧은 습관 못 고칩니다. 그래서 천상천하 유아독존 왜 그런 소리 했을까? 무아경이라고 하면서 왜 그런 말을 했을까? 그건 해석이 나옵니다.
자유는 인간의 궁극적인 이상이다. 이상에는 이상이란 건 실현 되어 버리면 이상이 안 된답니다. 이뤄져 버렸으니까, 그 이상 뭐 없거든요 이상이란 건 표토만 둘 것입니다. 이 땅에서 이루어져 부리면 그 뭔 이상이 없거든요. 이상이 아니거든요. 항상 흠모해야만 되거든요 긍게 그리스도의 그 정신과 그리스도의 성품과 그리스도가 한 몸 된다는 것만 우리가 이상을 해야 돼요. 긍게 이뤄져 버렸으면 인자 다른 소원은 없겠죠? 그 이상은 긍게 그리스도 외의 다른 이상은 이뤄지면 이상이 아니에요. 인간의 자유란 것은 이건 천국에서 아까 이런 말도 나왔어요. 천국에서 에덴낙원 잃어 버렸지. 자녀의 특권 잃어 버렸지. 자유 잃어버렸습니다. 범죄 후로 에덴낙원 쫓겨났죠. 하느님의 자녀인자 아닌가? 마귀의 자녀 됐습니다. 거서부터 마귀의 자녀요. 자녀의 특권 잃어버렸죠. 자유 잃어버렸습니다. 믿으면 3대 특권을 얻고 안 믿으면 하느님을 떠나는 생활은 하느님의 지혜를 거스르는 생활은 3대 불행에 빠집니다.
인간의 궁극적인 이상은 자유인데 인간의 궁극적인 자유는 자유가 이상이라 참 자유를 그립니다. 인간이 지켜야 할 특권입니다. 이 자유는 이건 더 자유로워져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믿음은 자유입니다. 신이나 자유란 말은 안합니다. 그리스도를 믿었으면 죄에서 해방 받습니다. 그게 자유란 말이죠. 종교는 자유라니까 그저 반대로 하면 자유란 말 아닌가?
죄에서 해방 받는다 말입니다. 그리스도를 믿으면 자기는 율법에서는 죽고 성령의 능력으로 죄에서 해방을 받는다. 그리스도를 통해서 믿음을 통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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