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금농사

오일째 울금 캐기 : 나는 참 포도나무

mamuli0 2021. 12. 5. 08:24

 두번째 서리가 내렸다. 오일째 울금 수확을 한다. 손일 시려 모닥불을 피고 힘들게 일을 한다. 길도 만들고 무청 덕장 아래 풀을벤다. 농촌일은 쉼이 없다.

 

 

나는 참 포도나무

1989.05.14. 김준호 선생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나의 아버지는 농부시라 나에게 붙어있으면서 열매를 맺지 못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모조리 쳐내시고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많은 열매를 맺도록 하실 것입니다. 너희는 내 교훈을 받아 이미 잘 가꾸어진 가지들이다. 너희는 내 교훈을 받아 이미 잘 가꾸어진 가지들이다. 너희는 나를 떠나지 말라. 나도 너희를 떠나지 않겠다. 이 말씀이 바로하신 말씀이고 그 다음 부터는 포도나무에 붙어있지 않은 가지가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처럼 비유니까, 포도나무에 붙어있지 않은 가지가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처럼 너희도 나에게 붙어있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요새 초월적 사랑이라는 것을 참 사랑은 우리에게는 없는 것이고 창조주께 절대자에게 붙어있을 때에만 가능하다. 받아서 하는 사랑은 가능하지만 받지 않고는 스스로 전무하다. 그런 말씀이에요. 너희는 내 교훈을 받아 이미 잘 가꾸어진 가지들이다. 주님의 교훈은 사랑입니다. 그렇지요.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교훈은 사랑입니다. 12절에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이것이 나의 교훈이다.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너희는 내 교훈을 받아 이미 잘 가꾸어진 가지들이다. 이 말씀은 어쩌면 지금 여기계신 분들을 두고 하신 오늘 주신 주님의 말씀입니다. 다른 사람 들으라는 말씀이 아니에요. 옛날 누구에게 했던 말씀이 아니고 이 시간에 직접 하신 말씀입니다. 너희는 내 교훈을 받아 사랑 때문이면 희생도하고 일생을 포기도 하고 희생제물이 되라. 하시던 내 교훈을 받아 이미 잘 가꾸어진 가지들이다. 저는 집집마다 개를 키우는데 개를 키운다는 것보다 개에게서 나타나는 사랑입니다. 새끼를 배면 낳아서 키우는 것을 볼 때 새끼가 젖을 빨아먹을 때 그 엄마는 어떻게 그렇게 거칠어지는지 바짝 말라들고 털은 꺼칠해지고 털이 빠지기도 하고 아주 참 보기가 불쌍해요. 여기 앉은 여러분들을 쳐다볼 때 꼭 새끼 딸린 암캐 같아요. 너무 많은 환자들 거느리고 돌보다 보니까 추리하니 얼굴은 노래지고 꺼칠하고 참 고개가 숙여져요. 황송하고 존경이 되요.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에요.

 

 

 너희는 나의 교훈을 받아 이미 잘 가꾸어진 가지들이다. 이 말씀은 틀림없는 말씀입니다. 너희는 나를 떠나지 말라. 한걸음 두 걸음 그렇게 멀리 보이던 길이 거의 들어오지 않았습니까? 나이가 40, 50 아마 50년 전 같으면 60세가 참 살기 힘들었지요. 근년에 와서 70, 80까지 살지 않아요? 잠깐이면 끝날 길을 다 갈 텐데 너희는 나를 따라 오지 말라. 주님께 의지했을 때는 피곤치 않지만 주님을 떠나서는 참 피곤하지요. 참 길이 터덕거려요 피곤합니다. 너희는 나를 따라오지 말라. 나도 너희를 따르지 않겠다. 이 약속 얼마나 감사해요? 나도 너희를 떠나지 않겠다. 저는 지금 기라성 같은 모든 윗사람들 신부님 웃어른들이 백여 명이 모인 곳에 다녀왔거든요. 거길 다녀와 보니까 우리는 얼마나 초라한 사람들 입니까? 못난 사람들이 모였네. 그러나 저는 자부심이 있어요. 참 감사해요. 소화 테레사가 하시던 말씀이 생각납니다. 어린나이에는 항상 불만이었어요. 왜? 이건 뭔 꽃이야?  이것이 장미인가요? 장미를 볼 때마다 하나님께 대해서 참 불평했었어요. 왜 장미만 이렇게 영광을 받게 하시는지? 장미만 사랑을 받게 하시는지 백합만 사람들이 좋아하게 하셨는지? 그리고 어린 꽃 어떤 못난 꽃들 소외하게 하셨는지? 그게 조금 불만스러웠어요. 어린나이에, 그러다가 수녀원에 들어가셔서 어느 날은 소위 말하는 풀밭이 있었기 때문에 풀밭에 소풍을 하고 계셨어요. 다리도 아팠는지 풀밭에 무심코 앉았습니다. 이렇게 무심히 안을 들여다보니 풀 속에 밥 티만큼 잔잔한 꽃이 피었는데 이렇게 내려다보니까 어떻게 그렇게 아름답고 그렇게도 보기 좋고 신기한지 그때 하나님께 대해서 오해가 풀렸다고 그래요. 아 큰 꽃만 향기 나는 꽃만 좋은 것이 아니다. 이렇게 작은 꽃도 영광을 받으시도록 창조하셨구나.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작은 꽃이나 큰 꽃이나 다 똑같이 사랑하시고 가치를 같이 보시는 것이지, 사람 눈에 보이듯이 장미나 백합만 좋아하고 이름 없는 꽃에 대해서는 냉대하는 것이 아니시다. 하나님께서는 큰 꽃과 작은 꽃이 참 자연히 아름다운 것이다. 영혼도 그렇게 굵은 영혼 성직자 뭐 판사 변호사 국회의원 굵직굵직한 사람만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름도 성도 없이 이렇게 소리 없이 숨어서 불쌍한 환자 돌보고 그런 무명한 사람도 하나님은 똑같이 사랑하시고 자비를 베푸신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나님은 평등하시고 하나님의 자비는 공의하시다. 공평되시다. 그래서 불평이 없어졌다. 따라 읽으십시다. ‘너희는 내 교훈을 받아 이미 잘 가꾸어진 가지들이다. 너희는 나를 떠나지 말라. 나도 너희를 떠나지 않겠다.’ 참 얼마나 이 약속이 위로가 되고 감사한지. 지금은 조금 뒤에 여호와께서 정신적 말씀 주시겠습니다만 거의 들어보면 사람이 참기 어려울만한 시련들을 겪고 난 뒤에 풍파가 지나간 뒤에 따뜻한 해 빛이 비치듯이 한고비 두 고비 참 인생고락이랄까 인생 심해랄까 거친 황야랄까 사막이랄까? 여러 가지 인생 사막을 걸어온 분의 지금 그 자태랄까 모습을 보기 때문에 참 위로가 되어요. 이미 지나간 고생이 이미 겪었던 고생이 참 사지를 달리는 것 같지요? 죽을 고비를 얼마나 거쳐 왔어요?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께서 쪼금 봄빛을 주시고 따뜻한 분위기를 주신 것을 생각할 때 하나님이 살아계시다. 우리를 하나님이 지도하고 계시다. 어느 때는 하나님이 안 계신 것 같지요? 그렇게 적적하고 쓸쓸했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그런 영적 감응을 느낍니다. 정신적 위로가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했기 때문에 제 나름대로 스쳐가지요. 뭔 말 들어두면, 많은 말 들었는데 회상이 되는 생각이 나요. 회상 옛날에 들었던 말이 회상이 되는데 종합해서 곧 잊어버리지요? 회상이 되니까 다시 이야기 드리겠는데요. 구도자의 설화지요. 한사람이 출가를 했습니다. 대개 고전적인 이야기는 현대판 수녀원 수도원이 아니에요. 고대 판 수도원이니까요. 몇 천 년 전 이야기이고 대개는 입산수도 합니다. 그렇게 알아두세요. 깊은 산에 들어가서 찾고, 찾고 또 찾고 그렇게 해서 참 스승을 만나게 됩니다. 참 성인을 만나지요. 그럼 이건 가짜 스승이 아니에요. 예수님은 아닙니다.  고대 참스승님을 만나게 되요. 그래 스승이 그 제자를 가르칩니다. 그런데 그 스승의 밑에는 문하생이 제자가 세 사람입니다. 그런데 깊은 산속에서 학문도 닦았고 수련도 다 받았기 때문에 이제는 세상을 한번 구경하기로 이 세상에 대해서 훈련을 시킨다 할까? 그런데 가을 끝이 아득한 김제평야 같은 곳이지요. 나락이 누렇게 익어가지고 전부 고개를 숙였어요. 그런 빈들 판을 지나갑니다. 제자 3사람을 데리고 그런데 제자 한분이 길을 가다가 방심했어요. 그렇게 해서 나락이 손에 탁 걸쳐가지고 나락 목아지가 나락이 투투툭 떨어졌어. 나락 몇 알이, 선생님이 그걸 보시고 얘야 이 농부가 피땀 흘리고 농사지어 논 나락을 그렇게 방심하고 나락이 떨어지도록 해야겠니? 너는 마땅히 소가되어서 그 농부 집에 가서 3년 봉사하고 다시 찾아 오거라. 

 

 

그거 동화라는 게 다 그럽니다. 네 순종하고 네 그러니 청년이 소가 되요. 풀밭에 툭 들어 눕지요. 주인이 와서 끌고 가요. 그 소는 제자는 소가 되어서 농부 집에 가서 몇 년 동안 봉사하게 되요. 이제 제자 두 사람을 데리고 길을 떠납니다. 산이 높은 산을 올라갑니다. 때는 가을이 아니지요. 여름이던가 봐요. 거리가 시간이 많이 흘러간 뒤에 산을 올라가고 재를 넘어가는데 목이 말라요. 땀이 나고 물이 먹고 싶지요. 갈증이 나니까 제자 한분이 선생님 제가 우물에 가서 물을 먹고 오겠습니다. 그래라. 그리고 선생님은 제자를 데리고 재를 넘어가 버렸어요. 먼저 재를 넘어가서 스승과 제자가 아무리 기다려도 해가 지도록 기다려도 오지를 않아요. 잠깐 먹고 왔어도 십분 이십분 걸릴 텐데 몇 시간이 걸려도 오지를 않아요. 그러니까 제자 한분이 친구가 오지 않으니까 다시 가봐야 하겠습니다. 내버려둬라. 기다려라. 그래도 안 오니까 선생님께 황송하지 않아요? 제가 빨리 가서 가보고 오겠습니다. 그럼 가보렴. 그 우물에 가서 봤더니 호랑이가 다 잡아먹어버렸어요. 뼈만 남아있어요. 그래서 막 울고 왔지요. 친구가 죽었으니까, 선생님께 품했습니다. 선생님, 사부님 애석하게도 친구는 호랑이의 식이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선생님이 ‘거기 앉아라. 너 우물위에 누가 앉아있던 것 못 봤니?’ ‘선생님 제가 본바 없어요.’ ‘아 그 어여쁜 큰 애기 하나 앉아있지 않았더냐? 우물가에 그놈이 물먹으러 간 놈이냐? 여자한테 미혹 받아 가지고 찾아간 놈이지.’ 그 이야기에요. 그러니까 도인이 남녀가 정이 들면 호랑이한테 물려 죽는가 봐요. 호식이 되는가 봐요. 다시 말하면 어떠한 상징적인 이야기지요. 비사니까. 옛날이야기, 구도자가 정신이 흘러가버리면 그 영혼이 이제는 빠져버리지요. 세속에 다시 말하면 호식당한 꼴이 되어버려요. 희생이 되어버려요. 희생이, 그리고 제자 한사람을 데리고 떠나버리니까 이게 시간 간격이 없어요. 일 년 후인지 알 수 없어요. 그때 가을철입니다. 제자 둘을 잃어버리시고 스승은 쓸쓸하게 제자 한분을 데리고 길을 가요. 길을 간다는 뜻도 인생길이지요. 세상길이 아니고서야 가고, 가고 얼마나 수천 길을 걸어가시다가 강이 나옵니다. 그때는 들이 나오고 산이 나오고 이제는 강이 나와요. 그게 인생시험이요.

 

 

예수님도 40일 동안 시험을 당하시고 배가고파서 시험을 당하시지요? 강이 하나 나오는데 어떻게 큰 강이던지 넓은 강이야. 강 까마득한 저쪽에 섬이 하나 보여요. 강을 바라보고 선생님과 제자가 바라보고 앉아있지요. 선생님이 이야기를 해요. 너 저 섬에 뭔가 보이지 않니? 안보입니다. 거기 천도복숭아가 열렸구나. 여기 꽃을 보세요. 이만큼 열렸어요. 천도복숭아 그 제자는 믿지요. 눈은 안보여도 보인다고 하니까 선생님 말씀이지요. 얘야, 배가 고프다. 너 강을 건너가서 저 섬에 천도복숭아를 좀 따오너라. 네 순종해요. 그리고 헤엄을 쳐 갑니다. 헤엄을 쳐 간다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에요. 구사일생이랄까? 아홉 번을 죽을 번, 잡고 한 번 살아나는 겁니다. 참 생명을 다해서 계명도 있지 않아요?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생명을 다해서 헤엄을 쳐서 가요. 인생길이 헤엄을 쳐가는 고행이 아니겠어요? 이 고생길을 선생님 말씀에 순종하고 생명을 다해서 스승께 봉사한다는 것은 사랑입니다. 다른 것 아니에요? 사랑입니다. 어찌되었든지 힘이 다하지 않고 섬에 상륙해가지고 천도복숭아를 두 개를 땁니다. 욕심도 없어요. 우리 같으면 다 딸 텐데 선생님하나 자기 하나 두 개 땄어요. 허리에다 과실을 묶어서 짬매고 다시 물을 건너와야지요.

 

 

그러나 건너오다가 이제 힘이 진해버려요. 참 최선을 다했습니다. 이제는 떠내려갑니다. 물로 둥둥 떠내려갑니다. 바람이 부니까 물살이 이리 밀려요. 이쪽 가에 밀려서 저 하류에 가서 건졌어요. 시체를, 시체를 건져놓고 선생이 인공호흡을 했던지 살아났어요. 기적이지요. 그리고 정신이 돌아왔을 때 둘이 강가에 앉아서 천도복숭아를 선생님도하나 나하나 둘이서 잡수셨어요. 복숭아를 먹으면서 하는 말씀이 그 말이 우리가 들을 말인데요. 얘야, 너 강을 건너오다가 뭐 본 일이 없니? 물어봤어요. 제자 말이 네 사부님 본 것이 있습니다. 무엇을 봤니? 자기 소자의 시체가 둥둥 떠내려가는 것이 보였습니다. 그는 죽었다. 그 말이에요. 이미 죽었어요. 자기 영혼이 강에서 보니까 자기 시체가 떠내려가는 것을 봤다는 거예요. 그랬는데 이제는 다시 영혼이 돌아왔지요. 자기 육체로 그 체험을 사선을 넘어서라는 고백을 했습니다. 죽음의 산을 넘었다. 그 사람도 결핵으로 각혈하고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입니다. 빈민굴에서 봉사하시다가 불쌍한 버림당한 사람들을 위해서 봉사하시다가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이에요. 그 사선을 넘어서 살아난 것이니까 산거지. 그때 죽었으면 죽은 거지요.

 

 

이 제자는 사선을 넘어서 선생님을 사랑한 것입니다. 선생님께 봉사한 것이지요. 그래 이론적으로 사랑을 공부해가지고 급기야 현실에서 사랑 때문에 죽는 것입니다. 제자는, 그렇게 해서 살아난 것은 특은이지요. 은총이에요. 하나님께서 살려주신 것이고 이미 죽었어요. 그렇게 스승과 제자는 천도복숭아를 먹었다는 것은 불사약이에요. 그것 먹으면 안 죽지요. 그것도 상징적인 이야기에요. 상징적인 이야기, 심청전에 심청이가 죽지요. 물에서 그렇지요? 연꽃 속에다가 딱 숨어가지고 살아났다고 하지만 그것도 상징적인 거예요. 한번 죽었지 어떻게 살아났겠습니까? 죽은 후에 이야기를 상징적으로 풀어서 쓴 것이지요. 그런 동화가 있었는데 한 30년 전 20년 전에 우리가 어려서부터 하던 이야기에요. 그 소란은 아무래도 이 선생님 입에서부터 나온 거 같아요. 한 20대에 제가 들었는데 그런 사랑은 한 2천년 3천년 내려온 한국에 있는 전설입니다. 알아두십시오. 외국 이야기가 아니에요. 그래 불교 유교 기독교를 거쳐 오는데 이 이야기는 종파를 초월합니다. 원리원칙이거든, 이 진리는 파벌이 없어요. 뭔 종교 뭔 종교 이론이 없습니다. 진리는 하나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쉽게 이야기해요.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썩어야 한다. 이거에요. 안 썩으면 생명이 나지를 않아요. 새 씨가 반듯이 땅에 떨어져 죽어야 합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지만 안 죽으면 생명이 나지를 않지요. 그런 예화의 이치와 같이 예수님도 죽었으므로 새끼가 난 것이지, 우리가 예수님 새끼들 아닙니까? 죽음에서 사랑이 꽃피는 것이지 안 죽고 사랑이 열릴 리가 만무해요. 사랑의 원리는 그래요. 그런데 안 죽고 어떻게 사랑하겠어요? 제가 10년 전에도 한번 그런 생각을 조금 비쳤는데요. 다른 수녀원 수녀들을 보면 얼굴이 복실 복실 예뻐요. 우리들의 동정들을 보면 얼굴이 왜 그러느냐? 그때 이유를 몰랐어요. 그런데 애기를 키워도 건성건성 키우면 엄마가 살이 쪄요. 그러나 자기 젖을 먹여봐. 실제로 엄마가 바짝 말라요. 그러니까 건성건성 봉사하는 것과 생명을 다해서 약자를 봉사하는 것은 달라요. 생명을 자기 양심과 힘을 다해서 봉사하다보면 봉사자는 수척해져. 눈이 쑤욱 들어 가버려. 아무 얼굴이 기름기가 없습니다요.

 

 

그때는 부끄럽습디다. 왜 우리식구들은 꺼칠한가? 지금은 아주 긍지가 있어요. 자랑스러워요. 자신이 있어요. 참 사랑하다보면 희생이 되는 것은 이것은 기정사실이며 옳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이 들어요. 부끄럽지가 않아요. 그런 뜻으로 아까 그 동화는 설명을 하면 뜻이 없어집니다. 그대로 좋아요. 원전 그대로 제 나름대로 이야기는 했지만 뜻은 이제 알겠어요. 60이 70에 가까우니까 아 그 뜻이다. 그거에요. 예수님의 교훈을 알기 때문에 확실해요. 예수님이 그랬잖아요? 나를 따라오려거든 죽어라. 그거에요. 십자가를 지고 죽어라. 박절하지요.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너라. 죽어 사선을 넘어서 오라. 이거거든요. 그저 얼굴 번질번질 살쪄가지고는 올 수 없다. 이거에요. 얼굴이 수척해지고 살 좀 빠지고 고생을 겪어야 된다. 유 영모 선생님은 그때 20년 전에 살아계실 때 광주 와서 보고 얼굴들이 여름에는 밭을 매니까 꺼멓지요? 식구들이 분을 안 바르니까 꺼칠하지요? 그러니까 꼴이 빠졌다는 거예요. 그래 시를 읊었어요. 꼴이 빠져야 얼이 영근다. 그분의 격언이에요. 꼴이 빠져야 얼이 영글어. 그러니까 육신의 살이 조금 빠져야 영혼이 익어요. 그러니까 나는 그 말이에요. 살이 통통 쪄 가지고 봉사한다. 저건 가짜 아닌가? 그럴 수 없어요. 어차피 가짜야. 이리 아끼고 저리 아끼고 몸을 아끼니까 살이 쪘지 진짜 우리 여기 새끼난 개처럼 젖을 빨렸으면 살이 뚱뚱 찔 리가 만무해요. 확실히 그래요. 살 찐 사람 부끄러워하라고 이 말하는 것은 아니고 그렇게 생각되더라. 그 말이에요. 제자가 최고학부를 졸업했거든. 구도자가 입산해서 나이가 30이 넘도록 학문을 다 마치고 실습을 나온 거예요. 이 세상에 그런데 선생님은 강 건너가서 천도복숭아를 따오라. 그 시험에 합격했는데 죽어요. 죽어, 안 죽고는 안 되어요. 사랑의 완성은 죽음을 통해서라는 거예요. 이제는 알겠더라고요. 이제는 알겠어. 왜? 여러분들 생활을 봄으로 확증이 되요. 사실이 그렇다. 그리고 아까 이야기 했지요. 한 제자는 이 농부가 농사하는 들판을 가다가 경솔해가지고 방심하다가 나락을 몇 개 떨어지게 했지요. 그런데 그 집소가 되어서 봉사했다. 그럼직한 이야기에요. 과장된 이야기는 아니에요. 구도자가 농사해서 나를 밥 주고 길쌈해서 내 옷을 입혀준 다른 사람의 사랑을 깨닫지 못한다면 구도자가 아니지요. 내가 하는 일도 귀하지만 남이 하는 일도 성스럽거든, 나만 귀한 것이 아니에요. 남도 귀해. 우리가 환자 봉사한다. 이것만 봉사하는 것이 아니에요. 살림하시고 농사하시고 운전하시고, (끊김)

 

 


 너도 소가되어서 수고해봐라. 그 은혜를 깨달아라. 내가 간 길만 성스러운 것은 아니다. 나 이외 모든 사람들이 다 하늘나라 가는 길이다. 남의 생활을 깨닫고 사랑하고 깨달은 보람이 아니겠습니다. 그리고 물먹으러가서 호랑이에게 잡혀먹었다. 갈증도 부처님이 이렇게 말했어요. 갈증이 부처님이 부인을 떼어놓고 와서 그런가? 이런 표현을 했습디다. 갈증이 애갈이라고 사랑 애(愛)자 목마를 갈(渴)자 부처님이 목마름을 애갈이라 그랬어요. 부처님은 사랑 애(愛)자를 죄 애자로 봐요. 인간적인 사랑은 죄다 그거에요. 부처님이 볼 때 인생은 사랑에 목말라요. 그것이 애갈인데 죄를 목말라한다고 봤어요. 애정에 목말라하니까 이 남자가 여자가 있기 때문에 물먹으러 간다는 미명으로 거기 빠져버린 것입니다. 참말로 호랑이가 있었겠습니까? 여자하고 내빼버렸겠지요? 참 이게 살다보면 이상합디다. 결핵환자끼리 우리가 살았거든요. 20년 전에 한10년 그런데 결핵환자 남자 반 여자 반 따로 있습니다. 그런데 숨을 헐떡거리고요. 곳 죽어가요. 그러니까 나이가 청춘이지만 20대니까 그러나 죽어가는 남자끼리 어쩔라냐고 가까이두면 업고 내뺍니다. 가다 죽어요. 서로 업고가다 피 흘리고 죽어버리고 결사적이에요. 그 사랑은 아주 절대적이요. 애갈이에요. 사랑의 갈증이 얼마나 심한지, 무슨 도가 상관있어요? 예수가 상관있어요. 갈증이 나면 업고 내뛰어버립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다 보셨어요. 결혼을 했던지 거기 가서도 잘 믿게 해주십디다. 그것도 하나님이 참 신비해요. 애갈 사랑의 갈증 때문에 한 청년은 구도심을 포기했다는 거예요. 그게 우리 이야기에요. 남의 이야기도 똑같아요. 수도사의 소명을 받은 사람들이 신학교에 가면 졸업반이 되면 10명이 시작했는데 2-3명 서품 받고 7-8명은 다 여자에 빠져버린다고, 수녀원도 대개 그런가 봐요. 수녀가 7-8명이 서원했다가 동정 서원하는 사람이 2-3명이고 다 내빼버린다고, 옛날이나 지금이나 똑같아. 경제 돈에 걸려서 타락하는 사람들을 건너가다가 나락을 보고 방심한 것은 돈을 보고 방심한 것이거든. 경제 돈은 일만 악의 뿌리라고 돈을 사랑하면 빠져버리지요. 이 구도자가 세상에 빠져버려요. 진리를 찾아가다가 또 구도자가 남녀를 조심 않다보면 빠져버리지요? 그게 참 다시 말하면 희생이지요? 희생이 되어야해요. 최후에 가다보면 그게 시련 인생고에 부닥치게 되지요. 가도 가도 인생고는 뒤따라요. 아무리 믿음이 좋아도 아프거든, 시련이 오거든요. 고해 고해의 물결이 와요 강을 건넌다는 시련이 와요. 합격하기까지 물을 건너가서 천도복숭아를 딴다는 것은 그 보통 큰 은총이 아닙니까? 특은이지요. 특별히 그리스도의 보호하심이 아니고야 어떻게 사랑의 은사가 오겠습니까? 이 동화거든. 예수교 이전에 있던 동화거든요. 한국에 있는 설화거든. 

 

 

그렇다면 진리가 하나인 것 같아요. 아무리 예수교 아닌 종교에서도 참 진리를 찾다보면 이렇게, 이렇게 시험이 있더라. 깨달은 사람들이 그런 동화를 창설했지 않겠어요? 그렇고 또 하나 연상대목이 있어요. 계명을 주신 것이 15장에 안 있습니까?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들도 서로 사랑하라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이 계명이 완성하기 까지 구도자의 서론이거든 오다가다 남녀에 빠져버리고 오다가다 경제 이 돈에 눈독이나 빠져버리고 성공한다는 것은 이 죽음을 통과해 사선을 넘어야해. 그것은 무엇을 뜻 하냐? 사랑을 완성하기 까지는 죽음을 통과한다. 죽음과 방불한 희생이 동반한다. 우리가 경험으로 알 수 있지 않아요? 경험으로 아는 건데 히말라야 산 갔다 오신 분 있지요? 썬다싱이 구도자로 산을 넘어갈 때 거기는 갑자기 눈이 오면 폭설이 내려가지고 아무렇지 않던 곳이 이렇게 물팍이 차버린다고, 산을 대개 그분들은 기도하기 위해 산을 넘어가지요? 깊은 산으로 자기도 길이 바빠서 빨리 산을 넘어가야겠는데 벌써 눈이 차서 눈길에 쓰러져서 한사람이 죽어가고 있거든, 지쳐가지고 혼자가야 쓰겠는데 그래도 자기가 신자니까 예수의 제자니까 주님말씀에 순종하고 죽어도 같이 죽겠다 그 결심을 했다. 어떻게 나 혼자 살아 가냐? 싶어서 업었다. 업고 가니까 한 시간에 넘어갈 산을 두 시간 세 시간 걸리잖아요? 그렇게 해서 넘어갔어요. 그런데 썬다싱 보다 앞서 청년이 갔어요. 그 사람이 먼저 죽어가는 청년을 발견했어. 쓰러져갔고 그 사람은 생각을 했어요. 나 이 사람을 살려주려다 나죽겠다 그냥 가버렸어. 그 청년 먼저 앞에  썬다싱은 신자니까 예수의 제자이기 때문에 아 저 사람이야. 예수 안 믿는 사람이니까 그냥 포기하고 간 것은 이해가돼. 나는 예수를 믿는 제자로서 나까지 그냥 갈수 없단 말이에요. 

 

 

 

자기는 같이 죽을 각오를 하고 업었단 말이에요. 업고 산을 넘어가요. 그런데 그 산이 십리 이 십리는 되는가봅니다. 큰 산이니까 이번에 누가 그러데요. 이번에 4천 고지까지 돌아보고 왔다고 누가 한번 발표라고 해. 천고지 이천고지를 넘어가는 거니까 그렇게 이해가 됩디다. 썬다싱이 죽어가는 사람을 업고 다 넘어갔지요? 저 밑에 가다보니까 자기보다 3시간 먼저 간 청년은 얼어 죽었어요. 원체 기후가 영하 20도 내려가는가 보지요. 자기는 살았단 말이에요. 그 수기에 나왔습디다. 썬다싱 수기에 나와요. 그 이야기가 자기는 그렇게 생각한대요. 주님은 고마우시고 참 우리 주님은 얼마나 좋으신지 내게 손해되라고 사랑하라 한 것 아니다. 내가 손해 보라고 사랑하라고 한 것 아니다. 이었게요? 나를 유익하게 하시기 위해서 사랑하라 하셨다는 거예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자기도 그 환자를 업고오지 않았다면 자기도 얼어 죽었을 거예요. 무슨 소린지 알겠어요? 무거운 환자를 업고 넘어가니까 땀이 났거든 땀이 식지를 않아요. 왜 환자도 살아나니까 자기도 살아요. 둘이 따뜻하게 몸을 대니까 업고 업혔으니까 자기도 환자덕분에 살아났지요. 한 청년을 환자를 포기하고 가다가 얼어 죽었단 말이에요. 그 주님의 계명이 얼마나 참되고 성스럽고 오묘하냐 이거지요. 

 

 

혼자 살다보면 좋을 성 몰라도 혼자 살아가면 힘들지요. 살기가 그러나 힘들어도 둘이 살다보면 짐은 되지요. 그러나 같이 산다. 살아간다는 것은 나를 살려주시려는 것이다. 남을 사랑하라는 것은 곧 나를 사랑하는 것이다. 그것을 깨달았어요. 나를 살려주시고자 남을 사랑하라했지. 나를 손해 보라 남을 사랑하라하신 것이 아니다. 그것을 깨달았어요. 얼마나 주님은 좋은 선생님이신가? 또 잊은 이야기 하나를 잠깐 생각납니다. 두뇌가 좋은가봐. 요가를 해서 그런가? 잊어버렸는데 다 생각이 나요. 나이가 60 70되면 다 잊어버려요. 까마귀가 되서 장로님에게 물어봐. 아무것도 모른 답니다. 그때 이렇게 말씀하지 않으셨냐고 하면 아 모르겠다. 80이 가까우니까 다 모르겠다. 다 잊어버렸다. 생각이 난다면 영감이 오는 것은 요가 덕분이라고 보시지요. 그때 그 이야기를 듣고 힘을 얻었습니다. 몸이 아팠을 때 아주 힘이 났어요. 그 이야기 듣고 십자가를 지고가라. 예수 잘 믿으려면 십자가지고 죽어라. 그 말씀 들었거든 그런데 어떻게 죽어야 하냐? 그 이야기가 참 좋아요. 여순 반란 때 이야기에요. 갑자기 반란군이 국군인데 반란군 화했으니까 여수를 포위했거든. 시를, 그리고 전부 재벌을 잡아다 죽인 거예요. 돈 빼앗아 가고 재산 압수하고 재벌 인민재판해서 죽이지요. 그러니까 사형할만한 사람은 전부 체포했거든. 명단에 있는 사람 그래 목사도 잡혀 들어가 창고에다 그득 가둬났어. 다 재벌들이에요. 부잣집 사람들 목사도 잡혀갔으니까 같이 죽지요. 그날 밤에 이제 이건 전부 사형을 내릴 사람들인데 인제 새벽 한시나 두시 되면 전부 총살할거에요. 한 열두시나 되었는데 인민군 이지요. 그때는 인민군 아닙니다. 반란군 이지요. 국군이 갑자기 인민군으로 변했지요. 

 

 

인민군이 하나 반란군에게 총을 겨누고 창고에 가득 혀 여기 예수 믿는 놈 있냐? 소리 질러, 있으면 나와라. 아무도 안 나와? 있는가 없는가 모르겠는데 목사가 자기가 예수 믿는 사람 아니여? 자기가 알까봐 고개를 딱 숙여. 본능적으로 무서우니까 아무도 안 나오니까 개머리 총을 거꾸로 들고 쿡 찍어 이놈의 새끼 너 예수 안 믿어? 콱 찍어. 너 예수 안 믿어 여? 콱 찍어, 양심이 괴로워 죽겠다는 거예요. 나는 목사인데 내가 예수 믿는다고 손을 들고 내가 죽어야할 순서인데 내가 고개를 숙이고 있다니 양심이 터질 것 같아. 아 지옥이라. 목사를 쿡 찌르면서 이놈의 새끼 너 예수 안 믿어? 그러니까 나 예수, 예수 목사요. 소리 질러. 하도 죽겠으니까 숨기고 있다 보니, 이놈 빨리 와라. 확 잡아가지고 끌고나가. 어떻게 빨리 끌고나가는지 사람들 많은데 끌려 나가요. 그때 기쁘더라는 거예요. 나 예수, 예수 믿는 목사요. 이 개새끼 빨리나와. 끌려가는데 어찌 날을 것 같이 그렇게 변하더라는 거예요. 순간 전에 자기가 목사인데 숨어있을 때 지옥이라. 얼마나 정신고통이 심하던지, 에라 이 목사야 내가 이렇게 비겁하냐 싶어서 ‘나 예수 믿소. 목사요’ 그러고 끌려갈 때의 기쁨. 

 

 

여수시가지 가본사람은 알거에요. 얼마큼 끌려가서 고개를 딱 숙이고 무릎을 꿇고 목사님 잘못했습니다. 울 어머니가 집사요. 우리 어머니가 내게 네가 내 자식이라면 목사 살려라. 어떻게 어머니가 자기에게 우시면서 어머니 심부름하느라고 이놈 빨리 오라고 불경하게 말씀했습니다. 목사님 죽을죄를 지었어요. 어서 가십시오. 확 밀어버리더라고 그래 살아났노라고 그런 이야기에요. 그 말을 듣고 나 그때 아파있었어요. 아 내가 죽을 각오를 해야 살아나지 살 각오를 해야 못쓰겠다. 그래서 그 비방을 얻어가지고 그때 병이 나았어요. 살려고 살라고 살면 무장 죽지요. 죽을 라고 죽으려고 해야 살아나지 그게 참 심령의 법칙이라고 영계의 법칙이라고 사랑의 법칙이라고 사랑의 법칙 그래서 그 말이요. 요 이야기를 제가 그전에 다 외었는데 잊어버렸지요. 이렇게 다시 회상하는 것이 교문이형 인도라고요. 그렇지 않았으면 어디 다니면서 죽었어요. 호랑이 밥이 되었는지 몰라. 그 약한 여자가 깊은 산중으로 그렇게 모험을 했다니 살아있는 것이 특은이라고. 한국에 와서 있다는 것은 하나님이 보호했지 도저히 인간상식으로는 안되어요. 역시 하나님은 살아계시다. 우리를 사랑하셔서 이렇게 좋은 하나님의 딸을 보내주셔서 고 이야기를 들었으니까 말씀을 들어주세요. 자 따라 읽으세요. ‘내가 이 말을 한 것은 내 기쁨을 같이 나누어 너희 마음에 기쁨이 넘치게 하려는 것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벗을 위하여 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주기도 하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