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금농사

울금 캐는 날 : 이발소 부인 이야기

mamuli0 2021. 11. 29. 10:15

 울금 수확 첫날 굴삭기 쇠시랑 등 기구가 총 동원되었다. 이것 저것 이용해 보다 손쉽게 해보려고 한다. 금년 마춤 일군 차질로 멀리서 도우러 왔다.

 

 

 

이발소 부인 이야기

1989.05.04. 김준호 선생

 나는 네가 한 일과 네 수고와 인내를 잘 알고 있다. 또 네가 악한 자들을 용납할 수 없었으며 사도가 아니면서 사도를 사칭하는 자들을 시험하여 그들의 허위를 가려낸 일도 잘 알고 있다. 너는 잘 참고 내 이름을 위해서 견디어 냈으며 낙심하는 일이 없었다. 그러나 너에게 나무랄 것이 한 가지 있다. 그것은 네가 처음에 지녔던 사랑을 버린 것이다. 그러므로  네가 어디에서 빗나갔는지 생각하여 뉘우치고 처음에 하던 일들을 다시 하여라. 처음에 하던 일을 다시해라. 만일 그렇지 않고 뉘우치지 않으면 내가 가서 너희 등경을 그 자리에서 치워버리겠다. 처음에 지녔던 사랑을 버린 것이다. 그러므로 네가 어디에서 빗나갔는지를 생각하여 뉘우치라. 처음에 하던 일들을 다시 하여라. 만일 그렇지 않고 뉘우치지 않으면 내가 가서 너희 등경을 그 자리에서 치워버리겠다. 
 이 세종 선생님의 무덤을 말로만 듣고 항상 가뵙지 못했다가 이번에 장로님 모시고 장흥군 유치면 화학산에 묻히신 무덤을 가서 다녀왔습니다. 또 일전에는 육이오 동란 때 유아래 여사께서 숨어계시던 물론 마지막 한 십 여일 숨어계시던 박자골 그 깊은 산중 또 이 선생님께서 마지막 한 달, 약 사십일 숨어계시던 도구박골 깊은 산속이지요. 또 여기 지금 김 원장님이 숨어계시던 각수바위 일대를 다녀왔습니다. 그래서 모든 옛날 생각을 더듬어 보면서 일 년에 한번씩 이 모든 특별히 이 선생님을 아시는 분들, 또 아직은 보시지는 못했지만 말씀을 듣던 분들이 이스라엘까지도 다녀온 사람들이 많은데 우리들의 발상지 우리들이 옛날에 믿고 살았던 고향 그런 발자국을 순회하고 오셨으면 얼마나 좋을까? 금년에 시작하지 않았습니까? 지금 가보시지 않았더라도 정 원장님은 마음뿐이시지, 못 다녀오시겠지요? 업고나 다니신다면 몰라도, 다행이 지금 오 장로님은 다리 힘이 강건하시니까 실상 5월 달에 장로님 모시고 도구박골 또 이 선생님을 만나가지고 오 장로님이 처음으로 출가하시고 정착하셨던 그 박자골 이지만 마을사람들한테 물어보니까 절골 이라고 합디다. 절골, 옛날 쑥 캐 잡수시고 지내시던 그런 영적 고향을 한 번씩 다녀오셨으면 얼마나 좋을까? 참 생각이 간절했습니다.  

 


 너희들이 첫사랑을 기억하라는 말씀도 있고, 처음에 하던 일을 다시 시작하라. 그런 말씀도 있고 생각만 이 세종선생님이 이 세상을 떠나시기 전에 물만 잡수시던 세월이 있었고 한 달이든지 두 달이든지, 또 물도 초월해서 공기만 잡수신다고 엄동설한에 문을 열어놓고 한 달이든지 두 달이든지 사셨다는 그런 이야기도 들어보고, 방이 쪼그마한 방인데 거기서 칸을 막아 놓으시고 방이 두 개가 되는데 사셨다는 말씀도 들어봤는데, 이 세종선생님이 사셨던 집터는 참 부끄럽고 또 부끄럽게도 가시가 많이 나 있었고 집터에, 이것이 참 부끄러운 일이 아닌가? 참 돌아볼 수만 있다면 앞으로 주무시고 임종했던 자리라도 가시밭도 좀 치우고 그렇게 해야 옳지 않은가? 그런 부끄럽고 참 부끄러운 생각을 품었습니다. 그럼 성경은 왜 봅니까? 이건 어떠한 뜻으로는 예수님의 무덤인데 예수님이 지나가신 흔적 발자국으로 쓴 말씀들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의 고향을 다녀온 사람도 있지요? 예수님이 기도하시던 겟세마네 동산,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걸어가시던 십사 척 기념할만한 곳에 전부 거기 무슨 푯말이 붙어 있답니다. 거길 걸어가 보시고 예수님이 피땀 흘리며 기도하시던 그런 곳도 다녀오시고 그렇게도 한다하는데, 우리들을 지도하시고 우리들을 영적으로 먹이시던 그런 우리들의 성지, 우리들의 고향이 분명히 있는데 우리들의 고향이 쑥대밭이 되고 가시밭이 되어도 아직도 돌보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이 무엇인지 잘못된 것이 아닌가? 이제라도 늦지 않았다면 춘추로 바쁘시니까 다 함께 갈수도 없고, 한 몇 분씩 쭈욱 봄부터 가을까지 시간을 다 짜서 몇 분 몇 분 다녀오시고 이렇게 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생각이 납디다. 봄에 도암면 들어갔더니 그 말씀을 누가 했어요. 선생님께서 기도 소에 계실 때 업고 여름철인데 업고 또 모기가 많아서 모기향을 가지고 화학산을 가셔서 거기서 차마 떠나지 못하시고 하룻밤을 주무신 것을 봤노라고. 왜 그랬을까? 몸은 쇠해서 생명이 왔다 갔다 할 때 왜 걸어가지도 못하시는데 업혀서 그렇게 다녀가셨을까? 그럼 선생님이 가시던 발자취인데 선생님이 하시던 거동인데 그 모양이라도 본을 받아서 그런 정신적 고향을 찾아보는 운동을 하는 것이 얼마나 좋을까? 그런 느낌을 가졌습니다. 또 그럴 필요가 있다.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한번 충청도에 있는 처음에, 처음에 이조시대 박해할 때 천주교가 한국에 들어오기 전에 유교학자들이 깊은 절 뒷방에서 성경을 처음으로 번역하고 봤던 자리에요. 발상지 이지요. 천주교의 발상지를 가봤습니다. 옛날의 절이 있고 깊은 산속인데 거기를 전부 구입했어요. 산을 사가지고 기념관을 짓고 비석을 세우고  이제 성지이지요. 아스팔트까지 깔아가지고 아주 인산인해에요. 하루에도 구름 떼 같은 사람들이 거기에 와서 답사합디다. 그걸 봤어요. 만일 동광원의 운동이 하나님께서 나온 것이고 사람의 뜻이 아니라면 흔적을 다 돌아볼 자손들이 나올 것으로 압니다. 흔적을, 그럼 어디서 선생님이 기도하시며 말씀을 같이 배우고 노래를 불렀을까? 근데 화학산 같이 많은 발자취가 있는 곳이 없습니다. 골짜기, 골짜기 마다 피가 어린 곳이고 눈물이 떨어진 곳이에요. 땀이 떨어진 곳이고, 그럼 우리가 막 처음에 몇 분 같이 갔어요. 이 달에, 문바위를 지나서 도구박골, 거기도 가시가 나가지고 발을 디딜 수가 없어요. 거기는 집터가 있는데 수레기 어머니가 한 칠팔 년 사셨든가 그랬던지 육이오 동란까지 여기 동광원에 출가하실 때까지 그 집에 사셨지요. 제일 처음에 이 선생님께서 금란자매를 만나시고 출가시키실 때 처녀가 혼자 있을 수 없다고 해서 화순씨 어머니를 짬매서 두 분이 첫 출가했던 막이 거기 있어요. 거기가 동광원의 발상지입니다. 저도 고향을 떠나가지고 정착하였을 때 그 곳으로 저를 데려다 놓으셨습니다. 방이 하나인지라 식구가 거기 5,6명 되셨지요. 밥은 얻어먹을 수 있지만 잠잘 곳이 없어요. 잠은 사무엘씨 지금은 전도삽니다. 이 사무엘 전도사님 방이 둘이기 때문에 잠은 거기서 자도록 하고 밥은 장로님 집에서 얻어먹도록 그렇게 해 주셨어요. 근데 거기 문공님 사랑씨 어머니 또 서울어머니가 순교 당하신 곳이에요. 참 방울, 방울 눈물방울 참 핏방울이 떨어지던 곳입니다. 그 얼마나 거룩하시고 사형선고를 받으시고 두 어머니께서 사내기를 잡고 노끈을 잡고 산으로 끌려갈 때에 ‘우리들의 신이 아직은 성하니까 산사람이 주워 다 신으라고 벗어놓고 갑시다.’ ‘아이구, 그럽시다.’ 두 분이 고무신을 나란히 길가 바위에 두시고 걸어올라 가셨다는 거예요. 

 

 

얼마나 거룩하시고 성스러우시며 사랑이 많으신가? 문공님은 두 여자가 사형을 당하러 끌려간다는 말을 들으시고 ‘나도 예수 믿소.’ ‘네 이놈 빨리 오너라.’ ‘같이 가자.’ 그리고 뒤따라 가셔서 장도칼에 가슴을 찔려서 다 돌아가셨다는, 그런데 실제 옛날이야기가 아니고 우리들의 영적인 부모요. 아버지요. 어머니들이 순교 당하신 골짜기지요. 그런데 40년이 가도 이공님 무덤을 저는 첨 가봤어요. 또 육이오 후에 저는 첨 가봤습니다. 그렇게 어째서 뒤를 돌아보지 않았었을까? 생각해 보니까 너무 불효자식 같은 또 너무 은혜를 망각했구나. 너무 첫사랑을 너무 기억하지 않고 살았다는 그런 부끄러운 생각이 참 많습디다. 그래서 어떤 뜻으로는 모든 사람들이 그런 곳을 일 년에 한 번씩 쭈욱 다녀오신다면 영적 부흥이 되겠다. 정신적 힘을 얻겠다. 아무리 고달프고 일이 어렵더라도 그 발자국 마다 피가 흐르고 참 아까 노래 불렀어요. 가시를 밟고 다니던 길, 그 태산을 넘어가던 길, 그 노래를 이 선생님이 거기서 지으셨는데 선생님이 왜 그런 글을 지어서 노래를 불렀을까? 직접 화학산을 가보신다면 실감이 있어. 그 느낌이, 소재로 해서 또 그 깊은 밤중에 현재 살아계신 정 원장님 이 현필 선생님 유아래 여사 잡히면 죽는데 깊은 밤중에 앞서고 뒤서고 잡히면 같이 죽어서는 안 되니까 앞사람이 잡혀가면 한사람이라도 살아나기 위해서 멀리 떨어져서 같이 가지 못하고 띄엄, 띄엄 가마테라는 마을을 지나서 소재라는 마을을 지나서 큰골이라고 박작골로 들어가시던 그런 발자국, 소반바위에서 떠나가지고 박작골로 들어갔지요. 그런데 문제는 발자욱이 소리 안 나게 갈수 있지만 그때는 개들을 많이 키우지 않아요? 개들이 짖으면 그 길을 지키던 유격대들, 그런 분들이 밤중에 잠들었다가 깨겠지요. 깨서 나와서 살피면 붙잡히지 않아요? 제일로 걱정이 개가 나오면 어쩌나 그럴 테지요. 그럼 청년들이 모두 업고 앞서고 뒤서고 또 어른들이 앞서고 뒤서고 가는데 개가 나와 가지고 지금 살아계신 정 원장님 그냥 몸으로 갈수 없으니까 검정 홑이불 같은 거 쓰고 가지요. 안보이도록 홑이불을 쓰고 가시는데 홑이불을 뒤에 끌리기 때문에 자꾸 원장님 뒤를 따라오면서 냄새를 자꾸 냄새를 맡으면서 따라오면서 짖지를 않았대요. 얼마나 땀이 났으며 얼마나 공포에 떨었겠어요? 나만 잡히면 괜찮지만 선교사가 잡히잖아요? 그 감사한 말씀을 하시데요. 어쩌면 개가 짖지 않는지? 어쩌면 하나님이 개의 입을 막으시고 냄새만 맞고 졸졸 따라오더라고요. 꽁꽁 짖으면 거 누구요? 쫒아 나올 텐데. 그런데 가마테라는 마을을 지날 때는 집이 세집인데 윗집 두 가구 길이 집 사이로 났습니다. 그때는 그 어른들을 붙잡기 위해서 조석으로 15명, 30명, 많으면 어느 때는 백 명이 이렇게 포위를 하고 잡으려고 다니던 곳이거든요. 전쟁 시 그 사람들을 잡으려고 그런 곳이 남의 이야기가 아니고 우리이야기이고, 우리 어른들이 지내오신 발자국인데 한 번도 안 가봤단 말이에요. 이상하다. 어떻게 그렇게 잠들었을까? 생각하니 어떻게 부끄러운지요? 천 리 만 리 밖에도 아니고 전라남도 안 이구요. 아침에 버스타고 나가면 종일 돌아보고 집에까지 올 수도 있는 거리인데 이렇게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런 부끄러움이 가슴을 메었습니다. 어제 밤에 생각했습니다. 사진관 어머니 이발소 어머니 또 홈실 댁 세분이 순교를 당하시는 곳은 소란이 골짜기이지요. 거기도 작년도에 거기 김승명 장로님 모시고 다녀왔어요. 피가 흐른 발자국 무덤에 뼈가 묻혔다는 골짜기도 다녀 온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돌아가시기는 그쪽에서 돌아가셨지만 득도하시기는 도를 닦으시는 사진관 어머니에 대해서는 제가 들은 적이 있습니다. 소반바위에 계셨습니다. 그 상황은 제가 동광원 창설되기 전에, 일 년 전에 거기와 계셨던 것을 기억을 더듬어 내었습니다. 이 선생님께서 고향을 와보니 형님이 중촌 길가에다가 주막을 차려놓고 술을 팔고 계신 것을 보시고 너무 안타까웠든지 ‘형님 그 주막을 나한테 파십시오.’ ‘왜 그러는가?’ ‘참 보기가 딱합니다.’ 그래서 그 주막을 사가지고 길가인데 해방이 막 되신 후 이듬해지요. 삼년 뒤인지 여순 반란이 일어나기 전 약 12개월 한 20개월 전이겠지요. 귀주 어머니가 그때 처음 출가하셨습니다. 모든 가산을 다 정리하시고 팔아버리고 집은 팔지 못하니까 두시고 점포어머니께서 집을 지키고 계셨고 점포 어머니와 귀주 어머니 두 분이 사셨던 집이 있었지요. 우리들이 오다가다 가면 꼭 방이 둘이니까 두 집이 합하시고 한방을 빌려주시면 장로님께서나 저 같은 사람이 꼭 그 집에서 자고 다니던 집이에요. 그런데 처음에 옷 보따리를 짊어지시고 출가하시던 집이 이 선생님의 형님이 술 팔던 주막집입니다. 그 주막집을 사가지고 귀주어머니를 출가하시도록 말씀해서 바야흐로 집을 떠나시고 그 집으로 오신 것을 제가 봤습니다. 그렇게 하시고, 일대 부모 없는 어린 소년 소녀를 처음에 한사람 데려오시고, 일대 부모 없는 소년들을 둘 셋 다섯 여섯 한 일곱 소년들을 고아들을 거기 와있도록 했습니다. 그래서 초대 보모가 되셨습니다. 밤에는 밤손님 이라고 여순 반란 후에는 적어도 한 십 명 오십 명 그런 많은 구두 발자국소리, 산에서 초저녁 밤중이 되면 마을로들 가지요. 왜 양식들 털러가지요. 어떤 때는 소를 잡아가지고 끌고 가지요. 쿵쿵 소리가 나지요. 낮에는 국군이 백 명 삼백 명 오백 명이 들어 올라오지요. 잡으러, 해가지면 다 내려가고 밤이 되면 밤손님, 여순 반란군이 거기와 있었지요. 그 사람들이 소 끌어가고 양식 털러가고 밤에는 그 사람들 소위 말하는 인민군세상 낮에는 한국세상 그런 곳이지요. 그런데 거기 우리를 살게 하셨어요.  (끊김)

 


 그때 귀주어머니가 50대니까 이렇게 자기들의 몸과 눈물과 사랑을 바쳐서 애기들을 키우는 광경이며 또 먹고 사는 것이 최저생활이지요. 쑥 죽이나 먹고 사는 생활이 며, 또 조석으로 찬송소리가 나지요. 바로 그냥 그 집 처마 밑으로 길이 나있어요. 발자국 소리가 나고 그 생활 다 알지요. 그렇게 했으므로 밤손님들이 감화를 받던 곳이고 국군들도 다녀갈 때 함부로 못했지요. 왜 그랬을까? 밤손님들이 평하기를 우리들은 공산주의자인데 저 사람들은 우리 공산주의 이상 가는 사람들이다. 우리들은 강제로 이렇게 지내지만 저 사람들은 자원해서 남남인데 남의 자식을 키워주며 살아간다. 참 우리가 고개가 숙여진다. 전도하기 위해서 그렇게 사신 거예요. 복음을 전도하기 위해서 총칼이 왔다 갔다 하는, 밤에는 국군과 저 밤손님이 막 총알을 놀 때가 있어요. 마당 앞에 툭툭 떨어집니다. 총알이 이거 동란 전입니다. 동란 전 일 년 전 이야기에요. 밤에는 어린아이들을 부엌 바닥 낮은 데 있는 부엌 바닥에 눕혀놓고 이불을 덮고 거기서 피신을 했어요. 그렇게 살면서도 이 선생님이 그걸 목격했어도 ‘이사하라.’ 그 말씀 안 해. 거기 살라는 거예요. 왜 그랬을까? 고아들인데, 가서 내 나라 내 조국이 불화를 하고 싸우는데 화목 시키려고 그래요. 복음으로, 예수님의 복음으로 화목 시키기 위해서, 참 지금 그렇게 지도할 수 있으려나 모르겠어요. 무서운 곳이면 피신을 시켜야지. 무서운 곳인데 생명이 왔다 갔다 하는 곳인데 계획적으로 거기 살라고 우리를 거기에 보냈어요. 그렇게 거기서 신용을 얻었던 골짜기이기 때문에 약 1년 반 후에 동광원이 거기 창설되었고 또 육이오가 일어났기 때문에 동광원 사람이 한 백 명 선교사를 모시고 그 집으로 갔지요. 고아원 술집이지요? 화학산 올라가는 문턱 아니겠습니까? 거기서 하루 밤씩 주무시고 또 올라가시고 쉬시고 그럼 적어도 한 이년 앞을 내다보시고 하신 것 같아요. 참 투시력이 계셨던지 예언력이 계셨던지 앞을 내다보는 그런 능력이 계신 분이셨다. 그런 생각이 듭디다요. 그때는 뜻을 몰랐는데 지금 알고 보면 착 착 착 그 선교사 한분이 피신할 수 있도록 미리서 지방에 대해서 사랑을 심으시고 신용을 심으시고 사랑을 심어놓고 누구하나 해코지 하는 사람 없었어요. 너무나 바른 거울을 보였기 때문에, 그런데 귀주어머니의 보모, 부 보모 한분이 오셨는데 거기 오신분이 사진관 어머니라는 분입니다. 아시는 분은 아실라나 모르겠어요. 사진관 어머니께서 귀주 어머니 밑에 그 공동생활을 훈련 받으러 오신 것입니다. 부 보모로 애기들 밥해주러 오신 거예요. 조금 있으니까 그 고아들이 쪼개가지고 반쯤을 소반바위에다 애기들을 있게 했습니다. 화학산이요. 소반바위 아랫집이 고아원도 아니에요. 그냥 고아들이지요. 거기 5-6명 고아들이 있고 또 소반바위라는 곳에 고아들을 4-5명 있도록 하셨어요. 아랫집에서 고아들을 키우는 요령, 보모 노릇하는 것을 배워가지고 견습해서 배워가지고 사진관 어머니께서 이제는 소반바위 보모로 올라가셨어요. 그렇게 된 것입니다. 아랫집에서 귀주어머니한테 살림을 배워가지고 인제 고아들을 데리고 소반바위라는 곳에 거리가 4키로 되지요. 6키로가 되려는지요. 깊은 산속에 있게 했습니다. 소반바위가 결국은 지금 정 원장님 이 현필 선생님  유아래 여사님 거기 같이 보모로 모시고 있던 금남자매 네 분이 소반바위에 한 달 동안 숨어계셨지요. 뒤에 알고 보면 전부 그렇게 되어요. 미리 미리 한 일 년, 일 년 반전에 소반바위에 애기들이 살았었다. 고아들이 살 수 있는 터전을 닦은 것이다. 그 지방이나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것을 미리 알게 하고 의심을 받지 않도록 터를 닦아놓은 곳입니다. 그래서 선교사님이 거기에 가서 한달 숨어계신 것이지요. 그러면 아까 이 선생님의 형님 술집에서는 결국 사람이 못살게 되어버렸다. 소개해 버렸으니까, 왜 거기 와서 밤손님들이 의지하고 터전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전부 민가는 못 살게 해서 소개시킬 때 우리는 방산으로 갔습니다. 방산이란 곳 아시는 분들은 다 아시지요? 청소에서 방산까지 한 3키로 되지요? 십리 4키로 되려는지? 거기는 왜 갔냐하면 귀주어머니의 남동생이 그때 면장입니다. 면장 집을 습격해 가지고 밤손님들이 들락거리고 양식을 털어가고 면장은 살 수 없고 집이 비어있었어요. 그 집이 비어있기 때문에 고아들을 데리고 거리 들어갔습니다. 기와집에 아주 좋은 기와집이었지요. 거기 가서 우리들이 좀 살았지요. 거기서 예배를 보기 때문에 주일날 사진관 어머니께서 소반바위에서 거기까지 약 이 십리 되지요. 예배 보러 오셨습니다. 주일날, 주일보고 월요일 날 아침 일찍 소반바위라는 곳으로 올라가시지요. 주일을 보고 오전예배를 보고 오후에 가시기전에 사진관 어머니께서 이야기 해 준신 걸 들었어요. 고 이야기를 지금 하기 위해서 배경이야기를 드렸습니다. 

 


 저를 보고 ‘부끄럽습니다. 나는 큰 죄를 지었어요.’ 낙루를 하시면서 소반바위의 광경을 이야기하세요. 어떻게 지냈냐하면 그 사연이지요. 그러면 사진관 어머니의 남편이 군수로 부임하게 되지요. 그 중간에 육이오 전이니까요. 그럼 군수로 부임하는데 부임하는 날이라도 나와 함께 가주라. 천국도 좋고 예수도 좋지만 남편이 군수 발령이 되서 부임하는 들어가는 첫날이라도 나와 같이 가주라고 어떻게 애원해서 뿌리치지 못하고 다녀왔습니다. 그 이야기에요. 아마 저한테 처음 이야기 하신 것 같아요. 누구한테 말 못하고, 그때 남편을 찾아간다든지 돌아본다는 건 아마 죄악시 되었을 거예요. 부부가 부부라도 갈리고 찾아본다. 그것을 이해하기가 아마 환경에 답이 없어요. 그럼 남원교회 풍금을 치는 여자 집사님으로서 이 현필 선생님을 갈보리 산에서 거기 서리네 계시다는 말을 듣고 한번 찾아보시고 첫날에 왜 비단옷 입으셨소?  예수님 따라가는 제자로서 어찌 비단옷 입을 수 있소? 소탈하게 무명저고리를 입던지 삼베옷을 입던지 그렇게 하시라는 말씀 아니었겠지요? 첫눈에 가서보니 쑥 죽 잡수시고 모두 그렇게 사시는 것 보고 부끄러우니까 돌아 오셔서 옷을 벗어서 그 자기 비단옷을 벗고 금가락지를 빼고 무명베를 구해가지고 옷을 해 입으니 갑자기 남편이 젊으시니까요. 그 곱고 아름답고 미인이 화장을 하지 않고 그것을 보기 싫으니까 왜 그러는가? 비단옷 입어라. 보기 싫다. 나는 예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 좋은 옷을 못 입겠습니다. 그 말로 권면했지만 자꾸 무명옷을 안 벗기 때문에 매를 때리기 시작했다고 그래요. 남편이 부인을 매 좀 맞아보라고 그러면 죽으면 죽어도 무명옷을 안 벗고 비단옷을 안 입었다. 매를 맞고 비단옷을 벗은 것입니다. 화장을 하라고 매를 때려도 기어이 화장을 안 했어요. 그게 동광원이 시작되는 발자국이지요. 쌀밥을 먹으라고 매를 때리면 꼭 쑥이나 보리를 섞어먹고 그게 발자국이에요. 첫사랑이요.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를 따라가는 제자로서 어찌 쌀밥을 먹으랴. 어찌 비단옷을 입으랴. 어찌 화장을 하랴. 이 선생님을 가서 찾아보니 그렇게 믿어야 하겠습니다. 그렇게 자각을 했단 말이에요. 자각, 선생님이 명령한 것이 아니지요. 한번보고 두 번보고 자각을 하셨어요. 

 

 

그렇게 지내시다가 남편은 바야흐로 출세를 해서 군수부인이 되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가정에 있던 부인이 남편이 말씀을 하면 듣지를 않고 그렇게 집안이 불이나지요. 집안이 불화가 생겨났다는 거예요. 부인은 출가를 하시고 혼자살수 없어서 그동안에 그 남편이 남편 되시는 군수 되시는 분이 재혼했지요. 그런데 부임지 어느 군에 군수 관사로 들어갔는데 아주 꽃다운 젊은 둘째부인이 계시고 그 부인의 친정어머니 와계시고 참 가서보니 딱하단 말이에요. 딱해, 내 남편이고 같이 가자. 그런데 부임하는데 군수 관사 까지만 따라가자고 해서 따라왔는데 가서보니 부인이 둘째부인이 와계시고 그 어머니가 와계신데 얼굴이 파래지더라. 그래요 공포심을 느끼고 그럴 것 아닙니까? 그래서 그 자기대신 오신 젊은 부인을 붙잡고 세상에 내가 질 짐 내 짐을 대신 진 사랑하는 사람아, 행여 라도 놀래지 말고 걱정하지 마십시오. 나는 예수님을 따라갔습니다. 다시는 오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옛날 너무 서로 사랑하던 사이니까 옛 부인이라 해서 한번만 오늘만 기념하라고 오자해서 따라왔으니까 염려마시라고 내 이무거운 짐을 대신 졌으니 내 은인이라고, 그러니까 언니, 언니 형님, 형님 하면서 울고 그러시더라 그래요. 하도 감사해서, 그런데 그 친정어머니가 그걸 마음에 놓지 않아서 걱정 하시더라 그래요. 자기 친딸 쫓겨나고 큰 부인 오시면 어쩌나 해서 그러니까 그 할머니 모시고 밤새도록 이야기 했다고 그래요. 나는  예수님 따라 나갔는데 다시는 안돌아옵니다. 행여 라도 염려 마시라고 내 대신 집의 딸이 고생하러 들어오셨는데 이 은혜를 내가 어찌 갚겠습니까? 행여 라도 걱정 마십시오. 그렇게 안심 시키고 하루 밤 자고 그 이튼  날 돌아오셨다고요. 그런 이야기하며 그럼 소반바위 현재 이야기를 하세요. 살림 그때가 6월 달입니다. 7월에 가까운 때니까 이 마을에는 보리가 익었어요. 보리타작을 해버렸는데 거기는 추운 곳 아닙니까? 추운 곳이니까 보리가 늦게 익어요. 보리를 한 얼마 갈아놓은 것이 있지요. 한 얼마 되는데 양식이 떨어졌습니다. 한 일주일전 이야기에요. 어린아이들과 같이 사시는데 마을에서 본대로 처음으로 보리를 따셨답니다. 보리를 딸 때 아침 끓일 양식이 없기 때문에 아침을 먹기 위해서 푸른 보리를 따서 어린 고아들하고 손으로 비벼가지고 먹으려다가 이것을 볶아가지고 가루로 만들어서 먹어야겠다. 그때 밥 먹는 것은 죄로 생각했어요. 쑥 죽 아니면 죽을 먹던 시절이라 아 밥을 비벼가지고 먹어버리면 얼마 안 되니까 애기들 하고 비벼가지고 입으로 불어가지고 모아가지고 속히 말리려고 솥에 넣고 저으면서 말려서 맷돌에 갈아 가루가 됐지요. 죽을쑤다보니 아침밥이 오후 한시나 두시된 거예요. 그런데 그것을 애기들하고 손으로 비벼가지고 했기 때문에 한 홉이 못 되어요. 그래 물을 많이 붓고 쑥을 떠넣고 죽을 쒀가지고 보니 아 집에서야 부잣집 부인으로서 그런 고생을 처음 해보셨답니다. 그래 눈물이 났다. 그 고백이에요. 

 

 

내가 고향부모 내 집 살림을 다 버리고 온 여자가 그 보리 따서 볶아서 갈아서 죽을 쒀먹을 때 내가 이것을 못하고 왜 내가 눈물이 나냐? 내가 왜 이렇게 못된 사람이냐? 나는 왜 이렇게 고생을 못 이길까 부끄럽다고, 나는 그렇게 살림을 요새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자복이에요. 나는 이렇게 고생을 못 이기고 이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모든 아이들은 남자아기들입니다. 9살 10살 11살 12살, 12살 먹은 애기라면 가보신분은 알아요. 집터에서 물이 나는 곳이 한 5미터밖에 밑에 있습니다. 바케스에다 물을 질러 부엌까지 올라오면 여간 힘들어요. 경사도 있지요. 종일 굶고 밥을 하는 동안에 물이 떨어졌어요. 어린아이들이 가서 둘이 들고 오면 가져올 수 있어요. 바케스에다가 남자라고 나는 여자니까 밥을 해야 하고 남자아이들이라 나무를 하는데 물을 떠다줬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이 오드라 해요. 기운도 없고 배는 고픈데 이런 때 같으면 아이들이 물을 쫌 떠다줬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게 마음에 소원이 되면서 마음이 언잖아하더라 그래요 왜 물을 좀 안 떠다줄까? 이렇게 협력을 안 해줄까? 그럼 밥은 꼭 여자가 해야 할까? 같이 먹을 밥인데 애기들이 물 좀 떠다줬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게 마음에 불평을 하면서 밥을 했습니다. 고런 이야기를 쭉 이야기 하면서 잘 못 살았다고 언제는 내가 예수님 사랑해서 남편을 버리고 가정을 버리고 자식을 버리고 산중에 들어왔는데 생활이 가난하고 밥해먹기가 힘들다고 마음에서 그렇게 기쁨을 기쁘게 하지 못하고 애기들이 물 좀 떠다 줬으면 얼마나 좋을까? 애기들을 의지하고 이렇게 시험을 받고 요새 살고 있습니다. 참 나는 부끄럽습니다. 고 사연이야기를 쭉 하세요. 

 

 

그래 처음 알았지요. 아 저분이 누구다 말씀하시므로 알았지요. 그날에야, 서로 모르지요. 어디서 오신 어머니가 계시고 얼굴만 알지. 그런 분인걸 제가 누가 알았겠습니까? 누가 아는 사람도 없고 아 저분 신분이 그런 분이구나. 그래 알았어요. 아 저분이 옛날에 예배당에 다닐 때 풍금을 치던 분이시고 교회 중견집사시고 남편은 군수시고 그렇게 아주 유복하신 분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생활이 양식이 떨어졌고 파란 보리를 따서 비벼서 잡수시고 그렇게 살고 계시구나. 지금 이야기는 동광원이 아니 동광원이 없는 때지요. 동광원이 있기 전 한 일 년 반전 이야기니까 그래 초창 이 선생님이 사랑의 운동 공동체 운동하시던 첫 번 제자들 이야기지요. 처음 출가한 제자들 이야기에요. 그런데 그런 어른들이 살던 곳이 소반바위, 눈물로 떨어지고 또 그분이 죽으신 곳은 요 소란이 남원 소란이 에서 죽으셨지요. 그런 발자국이 우리가 있는데 우리의 영적 고향이며 육체적 고향이 있어요. 그런데 한 번도 돌보지 않았다. 참 부끄럽다. 그런데 이 말씀을 내가 왜 합니까? 왜 그걸 부끄러워했단 말입니까? 우리의 자랑이요. 성스러운 이야기요. 우리들의 걸어갈 길인데 왜 그걸 부끄럽게 생각하고 말 안 했던가? 아는 사람이 말을 안 한 것이 잘못이지요. 이제라도 저도 잘못했단 말씀을 하는 겁니다. 이제라도 돌아보고 그 발자국을 더듬어 찾아가보고 돌아봐야 하겠다. 이제라도, 왜 그러냐? 예수님 따라가기 위해서 예수님의 생활을 배우기 위해서 그 예수님을 사랑했기 때문에 출가해서 지내시던 옛날 순교 당하신 분들의 발자국이고 핏자국이니까 우리가 돌봐야 하겠다. 왜 우리가 유익하기 위해서 그렇다면 말을 하라 그거에요. 어제 밤에 그런 생각을 했어요. 아침 예배시간에 내가 뭔 말씀을 해야 할까? 성경도 모르고 성경 해석도 할 수 없고 아 옛날 그 이야기 듣던 이야기를 하라. 그런 생각이 듭디다요. 옛날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돌아봤던 이야기를 하라. 이렇게 하므로 예수님의 사랑 또 예수님을 사랑하던 이 선생님의 사랑 또 이 선생님을 사랑하던 그 옛날 제자들 그런 이야기하라 그런 마음에 생각이 듭디다요. 그래 말씀드린 겁니다.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결론을 말씀드리면 만일 예수 믿으려면 어디가 못 믿겠습니까? 예배당이 있는데 그러나 이 선생님을 중심으로 이공님을 중심으로 하는 그 공동체 운동이지요. 모여서 사는 운동. 이렇게 예수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사는 운동을 그분들이 발견하시고 주춧돌을 놓으신 것 아니겠습니까? 공동체 운동, 요 운동을 하는 데는 분명히 그 역사가 있습니다. 발자국이 있고 뿌리가 있습니다. 이제라도 늦지 않으니까 모든 회원한테 식구들한테 그 뿌리를 알리고 또 발자국을 같이 걸어 가보고 현지답사지요. 가보고 전부 그 남의 땅이에요. 우리 땅은 한 평도 없어요. 지금 아까 말씀하는 중촌이라는 곳에 땅이 한 곳 있지요. 화학산 일대에 대해서야 우리가 아직 돌보지 못했지요. 어느 종교운동이고 정신운동이고 발상지에는 전부 갖고 있어요. 불교는 불교가 시작되는 절을 보호하고 있지요. 우리들의 발상지는 화학산 일대거든요. 우선 원장님 살아계시고 장로님 살아계시니까 상관없어요. 우리 어른들 세상 떠나시고 백 년 후에 오백 년 후에 천 년 후에 어디 가서 흔적을 찾아보겠어요? 아 이 선생님이 거기서 기도하시고 수레기 어머님이 거기서 기도하시고 또 귀주 어머님이 거기서 기도하시고 또 아까 사진관 어머님이 거기서 눈물 흘리시고 또 문공님 사랑채 어머니 서울 어머니 거기서 피 흘리시고 간 그 성지입니다. 와 우리의 고향이 여기구나. 그 마음이 든든해요. 우리 고향이 있다. 그러니까 문바위 도구박골 큰 골 박자골 이지요? 박자골,  오장로님 사셨던 절골 또 소재, 소재라는 골짜기가 있지요. 유치 그 일대가 전부 이 세종선생님 아니면 이 선생님 또 이 선생님 제자들 또 수레기 어머니 그 도를 닦던 골짜기에요. 피를 흘리시고 도를 닦으시고 출가하시고 그 전부 4키로 안쪽입니다. 그런데 거기가 거의 국유림이에요. 나라 땅입니다. 국유가 아니고 화순 군유림 이에요. 화순군의 땅, 하나님께서 허락하신다면 우리가 그것을 사서 백 평이든지 이백 평이든지 불하받으면 우리의 자산이지요. 하나님이 허락하시면 가능해요. 모든 종교운동의 발상지는 전부 구입해서 기념공원을 짓고 보호하고 있거든요. 만일 동광원이 정신운동이 될 바에는 그렇게 발상지를 구입해서 거기에 우리 고향 마을이 있어야 하겠습디다. 현재 있는 사람들이 다 죽은 다음 이야기지요. 살아있을 때 가보기 좋게 기억해요. 이 정신운동이 제자가 앞으로 많이 있을 바에는 이 구호사업 여기만은 뜻이 없습니다. 예수 믿고 불쌍한 사람 돌보는 것은 뜻이 없어요. 이 영성운동이 이 정신 운동이 어디서 발생했냐? 화순군 도암면 화학산 거기서 발생했다. 우리 정신적 부모 아브라함의 고향은 유대 땅 아니겠어요? 또 예수님의 고향은 이스라엘 나라가 아니겠어요? 그래 우리가 이스라엘 나라를 찾아가 보잖아요? 그럼 우리 자손들이 돌아보려면 화학산 일대를 우리 자산으로 우리 땅으로 해놓는 것이 좋겠다. 그런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제가 원장님한테 말씀 드렸어요. 막 웃으시면서 아 그래? 아 그래? 그래? 아주 흥미를 느끼세요. 아 하 우리 고향? 아니, 우리의 원장님도 막 출가하셔가지고 YMCA 그만두시고 거기로 출가하셨어요. 한복하나 지어 입으시고 양복 벗으시고 넥타이 끄르시고 머리 깎고 거기 화학산 기슭이지요. 거기 가서 할머니 5-6 명모시고 아들노릇 한다고 와서 계셨어요. 그 곳이 동광원 문안이라고요. 전부 동광원 초기에 출가하시고 부모 형제 버리시고 살던 도를 구하시던 발자국이 거기 있어요. 그래서 우리 고향이 있는 걸 발견하고 든든해 졌어요. 그런데 이상해요, 땅 금이 작년 봄 만해도 평당 20원 하던 것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