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해년 마지막 달에 들어섰다. 새벽 부터 겨울비가 촉촉히 내렸다. 비닐 멀칭하고 이식한 월동무에게 좋을듯 하다.
십자가 해설 2
1971.08.14. 유영모 선생
양력으로 12월 그믐날 31일, 그 해에 이 통일수가 어떻게 되느냐 하면 이백사십삼만 팔천칠백예순 하루가 되어요. 그래 그까짓 거 쓸데없는 소리. 한번 외워야 그때 당대에 들어도 알 수 없고 어려운건데 그런데 이거보세요. 이거 대단히 이상한 거예요. 이 사 삼 팔 삼 이 팔 그런 숫자에요. 그래도 그거 지꺼분한 소리지. 그거 뭣에 쓰나? 그러나 가만히 보세요. 이네삼팔, 이네삼팔 칠육일, 이네가 삼팔을 치워야 해요. 이 많은 사람들이 삼팔을 치워야 되요. 삼팔선을 그어가지고 삼팔선 북쪽과 삼팔선 남쪽 사람이 서로 통째로 쪼개지고 이상한 겁니다. 왜 어째 육십사 년 일월 일일이 유엔 데이 통일 숫자로 이네삼팔칠육일 그런 숫자로 어째 되는가?
이네가 삼팔선을 당해가지고 남북이 이렇게 쪼개져 버렸어. 오도 못하고 가도 못하고 그 일이 치룰 일이야. 칠육일 이니까 치룰 일 이라고. 그래, 이내삼팔칠육일 이건 좀 더 기억하기 쉽자고 해 본건데 해 보는데도 그렇게 안 되는걸 어떻게 해? 그대로 되 이네가 삼팔을 치워야 한다는 거야. 삼팔이라는 병이 들었어. 거기에 요새 얼음이 더러 녹는다니까 혹 아주 풀리면 그 삼팔 다 이제 치웠다. 그렇게 되는 거야. 이것은 역시 내가 이렇게 한 다음에 ‘아버지여 이 삼팔 치워주시옵소서.’를 비는 겁니다. 비로소 그걸 이루기 전에는 ‘이네삼팔칠울일’ 그것은 잊을 수가 없어요. 그런데 ‘이네삼팔칠육일’을 1월 1일되던 64년 1월 1일, 그걸 지낸 뒤에 3월 달에 가서, 열여드렛 날 가서, 3월 열여드렛 날 가서, 계명산에 한 땅에 구멍이 났어요. 계명 산 땅 한군데 구멍이 났어요.
열렸어. 땅이 열렸어요. 계명산이 열려, 제2세 이 공이 이 세상에 입고 나왔던 옷을 벗어버렸어요. 그 제2세 이공 이 옷 벗어버린 걸, 왜 하필 계명산에 벗어버렸는지? 계명산에 벗었어. 그래 그걸 담으라고 계명산에 땅이 열렸어. 그 열린 땅에 들어갔어. 그래 폭 묻어놨어요. 하, 이공이 살아있었으면 여기 있었으면 나더러 그 옆에 천하게 뭐 걱정이 있어요? 그거 한번 외워보라고 그럴 거예요. 그런데 지금 계명산에 가서 계시니까, 원 계시기는 계명산에 계시겠소? 옷을 벗어 거기다 두었지. 어디 계시오? 어디 계셔서? 몰라요. 그 지극한 이치를 어찌 알아? 요새 사모회를 열고 여러 사람들이 모이는구나. 그렇게 되는 이치가 있는지 모르겠소. 그래 이건 여기도 현 동완씨가 없으면 여기 알지도 못해. 내가 이렇게 여기도 알지 못해. 그 양반이 여기도 잘 알았어. 그러기 때문에 그 이렇게 여기를 그런데 왜 모두 다 갑니까? 모두 다 가요. 여기 와서 이 현필씨를 만났어. 오늘 만났으면 밤 자고 밥 먹고 내일 일어나 앉아서 기도도하고 찬미도 하고 생각도 하고 성경도 보다가, 성경의 뜻이 이렇다. 저렇다. 하다 충돌도 됐습니다. 내가 생각하는 거 옳지 않은가? 서로 그런 생각이 있어 충돌이지요. 이게 어떤 의미에서는 기적입니다. 내가 한 30년 되는지 모르겠는데 여기 다닌 지가 그랬는데 처음 여기 동광원을 내가 왔어요.
30년을 두고 줄 곳 여기 있어서 본건 아닌데 어떤 해는 못 오는 해도 있지만 오는 해는 한번씩 보고 가고, 가고 하는데 요전에 언제 왔을 때, 여기 전등이 켜있는걸 보고 하 여기 전등이 켜졌어. 그런데 여기 전등이 켜질 때 까지도 우리 집에 전등을 안 켰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여기를 쫒아할라고 그랬는지 우리 전등 켰어. 세상이라는 게 변하는 거야. 참말이지. 여기 처음에 와서 볼 때, 답답했습니다. 그래 원 이렇게 사는 게 옳다. 마치 세례요한이 사는 듯 했지. 보통 먹는 거 보통 입는 게 아니에요. 그래 내가 어림이나 있습니까? 그럼 그런가보다. 그리고 아 말들이 별소리 다 많아요. 이건 약을 안 잡숴요. 요새는 달걀도 잡수세요. 아마 그때는 달걀도 안 했을 거야. 그건 여러분이 더 잘 아실 겁니다. 변한 것이 그 차차 왜 이렇게 변합니까? 자꾸 변합니다. 세상이라는 건 그런 거예요. 그러고 보니까 그럼 변하는 게 그럼 좋으냐? 다 변하는 데는 차례차례 차례가 있어요. 차례가 있어서 변해야지. 차례가 안 됐는데 그럼 그러는 거, 그건 못써요. 안 변한다. 우리는 안변한다고 이렇게 결심 하기는 쉬운데 그건 그럴 듯해요. 안 변하는 건 없습니다. 안 변하는 건 없어요.
그때 나는 보고 앉아있으니까 여기서 이를 잡지 않는다. 그럼 이에 물어뜯기면 어떻게 해? 그래 잡기는 잡어. 잡지만 죽이지는 않아. 이런 말씀, 별말씀을, 다 약을 도무지 안 잡숫는다. 별말씀이다. 그러니까 나는 그건 다 시인해. 나는 그렇게 하는 거 아니야. 그러나 그게 전수 그르다고만 하는 또 사람이 아니에요. 그러는 가운데 차차 차차 변해가는 거, 그걸 차차 변화 할 때 변해지면 그것이 자라는 겁니다. 이 세상은 전부 자라는 겁니다. 자라는데 너무 진하게 난하게 베어지지 않고 일찍 자라겠다. 그거 아니에요. 그것도 진리가 아닙니다. 또 우리는 변하지 않는다고 하는 거 같은 생각이 있는 듯이 꼭 일정하게 이렇게 하는 거 그건 고집이에요. 한 고집은 있어야 세상에 가기는 가요. 이것도 괴상한 고집 피웁니다. 고집 없이는 결코 정말 뭐로 붙잡고 나가지 못합니다. 그럼 내가 동광원 살림만 못하고 지내오는 건 고집이 작아서 그렇지요. 그러나 오늘 말씀이 딸려 오는 건 고집이 꽤 있으니까 딸려오지, 여기까지 따라오는 거지. 고집이 부족했으면 여기 따라오지 않습니다. 그래 한 고집은 있어야 해요. 예수 믿고 설랑 꾹 하게 자기 남은 생애를 지내는 사람은 큰 고집이 있는 겁니다.
이 세상 한 고집 없으면 온전히 살지 못합니다. 산대도 온전히 커지지 못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요. 첫째가는 고집입니다. 석가모니 요? 고집통이지요. 고집불통이라면 숨이 막히는 일이나 그렇다고 고집이 없으면 숨이 풀어집니다. 풀어져, 풀어지면 결단 나는 거예요. 어저께 이 이야기를 몇 분 앞에서 더러 했습니다. 이 사람이 어저께 몇 분 앞에서 이 소리를 했어. 이 사람이 양력으로 3월 열사흣 날이 이 사람이 난 날이에요. 삼월 열사흣 날, 우리는 열셋이란 숫자를 좋아하지만 서양 사람은 열셋이라는 걸 싫어해요. 그럼 어째서인고 하니 예수의 사도가 열둘인데 가룟 유다 하나가 나중에 정신이 돌아가지고 예수의 제자가 아니고 예수를 따라가지 않고 예수 따라가는 게 오히려 실패로 알고 예수를 배반하지 않았습니까? 예수 배반이 잘못이 아닙니다. 자기 생명이 떨러졌어요. 생명이 끊어졌어요. 그것이 잘못인데 열둘이 온전히 있지 못하고 끊어졌어. 그런데 어저께도 말했습니다만 사도들이 복음전하는 것만 전하지 않고 왜 열둘 사도하나가 이가 빠져서 보기 싫다고 그걸 채워놔야 좋겠다고, 그럼 성신의 지시가 어떻게 있든지 하는데 다른 일은 성신이 지시를 하시는데 그 일에 대해서는 도무지 할 수가 없어. 그래 할 수없이 우리끼리 뽑자. 그랬지, 또 사람의 생각으로 사도 될 만한 이를 갖다가 천거 하려고해. 그런데 하나만 하지. 둘이 천거가 되었어.
그럼 열두제자를 하나만 뽑자는 건데 둘이 됐으니 어쩝니까? 그것도 성신이 어떻게 결정해 주시면 어떻게 할 건데 성신이 결정을 안 해주시니 그래 별 수 없이 제비 뽑았지요. 제비 뽑는 거는 점치는 셈과 같습니다. 제비 뽑아서 하나를 그렇게 열둘을 채웠다고. 그 의례해야 되는 것으로 그렇게 했어. 그걸 임이 보시든지 아버지께서 보시든지 그 꼭 할거 했다고 그렇게 보시나요? 보실까요? 거기에 대해서 이 사람 모양으로 말하는 사람 있는 거 같지 않습니다. 그거 다 하나님 뜻에 맡기고 한 거라. 이렇게 보는 것 같은데 글쎄 나는 안할 걱정 한 거라. 난 그래요. 그래 정말 그 쯤 되서 열두 사도가 온전히 되지못해서 하나가 이가 빠졌다고 그걸 보태겠다고 뽑으려고 하는데 쌍알이 되어서 두 사람이 이렇게 되니까 제비 뽑아서 결정을 한 거, 땜을 때우는데 더벅더벅 지저분하게 땜이 때 졌어. 그게, 그게 하나님의 뜻에 그게 꼭 맞는 뜻으로 된 일이라. 나는 그렇게 알 수 없어. 그건 안 해도 좋은 걱정을 한 거라. 그럽니다. 그걸 왜 그렇게 됐는가? 이 세상일은 말끔 그런 거라. 그걸 우리에게 알게 하려고 그런 실례를 둔거예요 아무리 진실한 그 때에도 헛걱정들을 잘 합니다. 더 좋게 만드는데 더 옳게 한다는데 헛걱정을 더덕더덕 겹쳐서 그걸 갔다가 땜을 하려고 하는 거예요. 그 사도들도 역시 이 몸뚱어리를 가졌으니 그렇게 되요. 우리 할 수 있는 대로 안 해도 좋은 건 안하는 게 좋아요.
어떤 의미로 우리 동광원이요. 남들이 한다고 따라서 우리도 비슷하게 해야 되겠다. 그렇게 안 해요. 안 하는 게 좋아요. 차차 아까 말 모양 이게 변하게 되니까 모릅니다. 우리 사람의 생각으로 안하는 것 같은데 차차 차차 안하던 거 하게 되는 게 세상의 일이니까 이거 혹시라도 지금도 급진으로 어떤 것이 급진이 된다면 이때까지 온 거 모양으로 이렇게 협동으로 온 것만큼 이 앞에도 내내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건데, 변하기는 변해요. 변하는 법이 있어서 아 글쎄 봄철이 될 때에 남긴 눈을 털지. 여름철이 될 만한 때에 모두 문을 열어 저치고 밭을 갈아요. 가을이 될 때에 타작을 해. 거두어들이고 베고 타작을 해 그래요. 그 철에 맞춰서 꼭꼭 해요. 그러니까 철이라는 게 변하는 거 변하고, 그래 사람들이 변해야 해요. 변할 때가 돼서 때가 되서 변할 때가 되서 철이 돼서 이렇게 해서 변해야 되요. 그래야 가장 건강하게 지나가는 건데 우리 영혼이 이 물질세계에서 지나가는 것도 꼭 그렇게 해야 된다. 그 고집이 꼭 있어야 한다는 거, 그 철 그 철 그 만큼 되어가지고 넘어가야 되요. 그 고집이 부족하고 그 철과 맞지 못하는 게 있어요. 그것도 순전히 자기 가는 것 너무 지나쳐 지나쳐버려요. 그 다른 짓이 되요. 그래서 어떻게 됩니까? 춘하추동이 없지 않아요? 가을에 겨울에 할 걸, 봄에도 있고 여름에도 있고 뭐라는 겁니까? 사철이래요. 참외도 수박도 사철이지요. 그 뭐라고 해? 그 아닙니다. 자연히 되는 때 되어서 되는 때 먹어야 해요. 이런 일에 대해서 이놈 고집 피웁니다. 온상재배 한 거 때 아닌 때 먹으라는 거 아주 싫습니다. 제때 되어서 먹어야지요.
그런데 이왕 아까 한글을 말씀한 게 있으니까 가만히 그 일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주세요. ‘기니디리미비시이지치키티피히’ 년 전에 그걸 말씀을 하고 그걸 제가 말하지 않았습니까? 일본 사람 자기네 글을 ‘이로하니오에도’ 라고 ‘아이우에가갸거겨’ 원 글이지만 그 글자 해가지고 ‘이로하니오에도’ 이거 외우는 거 아닙니까? 우리글에도 그거 있어요. 그럼 우리글에도 그런 게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 이런 생각이 있어. 그러나 도무지 있는 걸 못 봤어. 소위 음문풀이 한다고 하는 소리 더러 있는데 그게 그렇게 아름답지 않아요? 그런 생각을 많이 하던 끝에 한번은 ‘기니디리미비시이지치키티피히’ 이 읽어봐. 그게 뜻이 있는 글이라. 이 말이에요. 그런데 이전에 들으면 너무도 많이 들었으니까 혹시 여기 안 들으신 이가 있으면 좀 생각해 보시오. ‘기니’ 내가 찾는 그 이가 있어요. 그게 기니입니다. 기니 이거는 제일 다른데 사람 잘 못씁니다. 여기에 기다 굳다. 하는 말이 있는데 여기에 자필이 있어요. 그럼 기다 굳다 하는 것을 자세히 알려면 여기서 제일 잘 알아들어요. ‘기니’ 그거 어떻게든 무얼 기려요. 기도를 드리든지 제사를 드리든지 드립니다. 그가 드려, 드리니 드리고 있는데 기도드리고 있는데 제사 드리고 있는데 빛이 보여.
그리고 제사 드리고 있는데 보인다고, 그 보이는데 거기 존경사가 거기 들어가 보이신다. 이 말이야. 그래요. ‘비시이지’ 보인다. 비시 인제 그 다음은 보던 사람이 가만있지 못해요. 그래 일어서 보던 사람이 일어서요. 키가 올라가니까 키가 커져요. ‘치키’ 그럼 나가든게 흐렸던지 구름이 터져요. ‘치키티’에요. 피 나가던 게 히에요. ‘히’는 까정 이예요. 까정 그 까정이라는 게 히라고 하는 게 한문 읽을 적에 토라는데 있어. 자 천자로 쓰여서 인지 그렇게 읽는데 히 라는 토를 까정, 저 임금부터 저 뭇 백성 까정, 그런데 히 그래, ‘키치티피히’ 이렇게 되거든. 그게 온전히 뜻이 박힌 글이 아니냐? 내가 그러거든. 일본사람이 ‘이로하니오에도’ 그와 같이 훌륭한 글이 되었어. ‘이로하니오에도’는 불경의 진리가 거기 죄다 들어있어. 불법의 진리가 거기 죄다 들어있어요. ‘기니디리미비시이지치키티피히’ 그것은 하나님이 예수 믿고 하나님께 아버지께 까지 가서 완전한 우리 목숨을 이루자 하는 그 뜻이 거기 꼭 들었습니다. 지혜 지가 누구야? 우리 님이야. 예수야, 예수가 보이는데 기도를 드리고 계세요. 기도드리는 것이 길이니 빛이니 변화산에 따라 올라간 사도 중에 한 사람인줄 모르지만 그게 보인다.
‘기리니 비시지’ 그걸 발견하면 그냥 못 있어. 키, 키가 있는 대로 커. 그럼 키 튀어나가야 해. 티 피 히 갈 데 다가요. 그런 뜻이 거기 실려 있다고. ‘기니디리미비시이지치키티피히’ 하는 게 글이야. 그것만 그러면 ‘아야어여오요우유으이야’ 거기 어떤 뜻이 아주 들어있는 글이에요. 나는 이건 어떤 의미로는 나는 장로님 계시는데 용서하고 들으시오. 왜 하든기도 자꾸 하고 하던 찬미 자꾸 해요? 그런데 이것은 한번만 듣고 말아야 옳은 겁니까? 일본 사람은 ‘이로하니’ 하듯이 우리 ‘기니디리미비시이지치키티피히’ ‘아야어여오요우유으이야’ 해도 그 거기서 하는 건 그건 모음이에요. 어머니소리, 그 아야 어린애 찾는 겁니다. 내 아이야 아이야 어린애 어서어서 하지 않지, ‘어여, 어여’ 어린애 부를 때 개 부를 때도 어여, 어여, 그래. 그 아야 어여, 그런데 어머니 소리가 나니까 아이가 불러 봐. 어머니가 위에 계셔서 아래 있는 어린애를 찾아. 그래, 어머니가 우유 위에 있다. 우유 그래 위에서 소리가 나. 어린애 찾는데 으이야, 가로막혀 (끊김)
‘으이’ 그럼 가운데 아 실제로 어머니보고 반가울 때 아 이러는 거야. 으 이 아 하게 돼. 어머니가 아기를 만났어. 이제 미친년이 되어가. 써 놓은걸 갔다가 그런 뜻이 있다고 부쳐서 주장하는 거라고 할런지 몰라. 그러나 이 ‘기니디리미비시이지치키티피히’ ‘아야어여오요우유으이야’. 그렇게 하는 거야. 그래 내가 이 궁금한 거는 내가 이렇게 하는데 혼자 있다가도 내가 이렇게 생각해 할 수가 있나? 없나? 그거 내가 궁금한 거야. 난 다른 거 몰라도 한글이라는 거 있는 동안에 ‘기니디리미비시이지치키티피히’ 그게 끊어지는 게 없고 ‘아야어여오요우유으이야’ 없어질 리가 없어. 그러니까 그거 일본사람이 ‘이로하니’ 하는 거 모양으로 우리나라 동포들이 다 그거 그렇게 읽다가 마땅히 부를 찬미를 부르는 겁니다. 그런 거고 그걸 도무지 안하고 글을 쓴다. 그건 하나님이 주신 이 계시를 갖다가 온전히 받아 가지고 사는 게 아닙니다. 이건 분명히 계시입니다.
그럼 이상합니다. 인류밖에 모르는 사람들로 하여금 어떻게 이렇게 이 계시라고 할 수밖에 없는 이걸로 우리말로 적을 수 있는 글이 어째 생겼느냐? 이겁니다. 이상한 겁니다. 그래 올이라는 건 언제든지 어디 있든지 그걸 건져서 내가 가져야 합니다. 진리는 내가 가지고 살아야 해요. 이 한글 나타내는 건 진리입니다. 그럼 이걸로 오늘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 앞에서 비는 것이 비는 데는 감사하는 생각이 늘 함께 해야 합니다. 이것은 이쯤 해가지고 오늘 새로 깨서 일어나서, 하나님 주님 앞에 여러분과 함께 하나님이 사뭇 하나님이 나타내주신 모든 계시 그것을 생각함으로 이만큼 이것이 요만큼 일어나는 데는 이 시간까지 우선 사는 것뿐입니다. 나사는 것뿐이에요. 요것 사는 데는 여러분과 꼭 같이 요렇게 살아야만 아주 하나님 작정하시니까 이렇게 되어가지고 마칩니다.
-진달래 찬양-
소리를 우리 쓰지 않습니다. 아래 아자 ᄋᆞ 그것은 울리지 않아요. 울리는 건 길게 내는 소리가 울립니다. 아- 하는 건 소리 성자, 아- 이건 소리성자야. ᄋᆞ 이건 음이에요. 소리 음자를 쓰지, 소리 성자가 아니에요. 소리 성자는 아- 이겁니다. ᄋᆞ는 그건 울리지 않아요. 소리는 뜻을 집어넣은걸 발표하려고 나오는 건데 거기는 울림소리만 있어. 거기는 소리만 컸지. 뜻이 빠지는 일이 많습니다. 그럼 소리는 아직 있는둥 마는둥 하는데 뜻이 꼭 들어있는걸 그건 은혜에요. 그래 음악이라는 게 소리 음(音)자입니다. 그것도 높은 음을 가지고 좋은 목소리를 가지고 크게 음을 내서 그렇게 되면 성악가라. 그러지 않아요? 너무 크게 여럿이 좋다고 자꾸 할 때 음악가지 그냥 그건 떠드는 거지, 원 바른 뜻은 들어있는 깊은 소리가 못됩니다. 울린다는 거는 쓸데없는 겁니다. 속에 뜻이 온전히 들어있어야 되요. 그러게 소리 음자라는 건 복된 소리입니다. 요란하게 짓빠굽는 게 아닙니다. 그것만 보면 방언이라는 거 날뛰는 거, 그거 다 마귀가 틈타기 쉬운 것뿐이지, 성신이 감화하실 성신만 거기 계실수가 없어요. 그래 좋은 설교라. 꼭 바른 소리로 설교라는 건, 그 하나님의 가르치신 교훈을 설명하는 겁니다.
그럼 바른 소리 설교하는데 하필 종이냐? 이건 무슨 종지라. 이건 무슨 신조라. 있어야지요. 신조가 있어야지, 그때 뭘 하면 탁 내걸어요. 그거 뒤 떠드는 거뿐입니다. 사도신경 이라는 거 사실은 말이지. 그렇게 더덕더덕 주워 모아 놓은 것뿐이지. 정 요긴한 게 아닙니다. 그래 내 접데 처음 봤는데 소위 내촌감사님이 종질이 좋다고 해서 거시기 하는 분이 무교회의 뭐라고 하지 않습니까? 무교회 거시기에 어따가 내촌 감사 그이는 물론 신앙을 잘 하는 이 인데 그 이는 이단자라. 이단자라고 그렇게 글 쓴 사람이 돼서 그걸 어떤 잡지에 어떤 이가 냈어요. 그런데 그렇게 하고 보면요, 나는 내천감사를 그걸 여기 우리나라처럼 여섯 자로 해서 내촌이 복음전하는 길 자기네도 하겠다고 해서 성서 조선이라고 하고 한 백 수십 호 까지 잡지가 나고 그 잡지를 주필하던 이가 그만 죽어서 끝이 났는데 죽은 이가 김교신 이라는 이 아닙니까? 그거를 여섯 사람 다 아는 건 아닙니다. 그중에 몇 사람은 압니다. 그래서 성서조선 그거 하는데도 그 잡지 나는 대로 이 사람 가져다 읽었어요. 안 읽지 않았어요.
그런 사람인데 거기 글을 도무지 안 썼어요. 그럼 왜 안 썼냐? 나는 그때부터도 꼭 믿는 신조 그대로 내가 믿는다고 그렇지 않아요. 그리고 사도 신조를 내가 외우지 않았어요. 왜 그런고 하니 나는 사도 신조를 보니까 내리 읽는 거 그거 주섬주섬 모아서 엮어놓은 것뿐이지. 그 생명이 통하지 않아요. 그러니까 그거 외우기까지 해서 할 필요가 없어. 그 토막토막 내가 알고 있어. 생각 날 때마다 그 생각이 날만한 자리에서 그거 믿는 거지요. 믿는 거 조르르 외우는데서 무슨 소용이 있어. 외우고 그렇게 하면 거죽만 입만 외우지 정신없는 거예요. 그러면 만날 그래야 이 불교가 왜 이지경이 되었는데 거저 외우기만 해요. 생각이 다 해보지를 못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 모양이 된 거예요. 헛되고 헛된 겁니다. 그러니까 원불교가 그깟 부처 만들고 어쩌고 하는 거예요. 쓸데없다. 둥그렇게 그 방향 해가 뜨는 방향으로 둥그렇게 그것도 자기 마음속에서 둥그렇게 해가지고 구하면 되지. 그래 우상 안 만드는 거야. 그럼 백성의 마음이라는 건 이렇게 모으면 그쪽으로 향하며 모은다는 거야.
그래 그걸 제가 치워버렸다면 또 만들어 가지고 오늘날 만들어 가지고 그저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게 전부 거죽으로만 그렇지, 속에 생명 속에, 그 심성이 상관이 되는 거예요. 그럼 설교라 하는데 설교라는 건 가르친 것을 이렇게, 이렇게 가르쳐라 하는 그거, 그것을 주석을 내서 알도록 설명을 하는 거예요. 진리가 들은 말씀을 설명을 하게 되요. 그런데 바른 소리를 설명을 해야 해요. 그럼 바른 소리를 설명을 하는데 무슨 소리냐? 그럼 신조가 뭐냐? 사도신경을 조르르 외워야만 된다고 그 한마디 한마디가 그때 사람이 사는데 생명의 신조로 사는 거야. 나는 그렇게 사는데 그걸 또 외우고, 외우고 자기 생이 커져요. 그거 일없어. 그래 난 안 외워요. 그래 내촌은 꼭 그 교회 조직하는 거 노회나 조직하는 거, 그게 부자연하다. 그게 하나님 뜻 아니다. 그걸 부정하는 거야. 교회한다하면 그 제도 그거 하니까 그래 무교회주의지, 모이지 않는다는 말 아닙니다. 그런데 신앙 꼿꼿해요. 그런데 사도신경 외우지 않아. 그도 외우지 않지만 사도신경 죄다 읽고 안 읽는다는 거 아니에요.
그런데 내촌 이를 이단이라 그랬어. 그럼 나도 내촌이만큼 이단이지, 나도 이단이야. 이렇게 되는 거니까 동기가 무슨 동기냐 말이야. 우리의 하는 건 동기가 여기 있다. 동기가 뭐라고 내 세우는 것도 이것도 우상입니다. 우상입니다. 우상인줄 아는 종파를 자꾸 종파를 만드는 거야. 모두 꼭 바른 소리만 먼저 나타난 그것은 설명만 하고 서로 알아야 해요. 그리고는 고만, 그러니까 바른 소리로 가르치는 걸 설명하는데 용마루, 마루, 마루가 무슨 말이야? 마루 일없어. 그럼 종당에는 가르치는 세상인데 가르치는 것 만 그 가르치는 용마루야. 용마루, 그래요. 하필 용마루는 무얼 하느냐? 그럼 정말 가르치는 건 뭡니까? 가르치는 건 원래 나타나는 건 뭐야? 그것은 본인데 본뜻인데, 본뜻은 뭡니까? 본이라는 건 내 밑 둥이지, 밑 둥은 어딥니까? 밑 둥은 나무뿌리가 밑 둥입니다. 부득이해서 나무뿌리라 했지, 생각의 뿌리는 지극히 높은 우리 아버지 계신 데가 뿌리에요. 그래 본뜻인데 기관의 뜻 기관의 뜻에서 나오는 소견 의견이야. 의식이 사는데 의식은 의견이 나오는 뜻이에요.
의견을 가지고 이 세상 사는데 그런데 기본의 의견이야. 하나님으로 조차 하나님 뜻으로 볼 수 있는 그 의견, 그게 기본이야. 본이 되어 나오는데, 본 의견이 나오는 데는, 본뜻이 나오는 데는, 아버지 뜻이 나오는 데는 하나님 뜻이 나오는 말이 나오는 데는, 그 하나님의 뜻에 그 알맹이를 요거라, 그걸 나타내려고 하는데, 사도신경 그런 게 다 알찬 용어라 하고 나타내는 거예요. 거기에는 맛을 맛있다. 그 맛이 새큼하다든지 달콤하다든지 그 소리 필요 없다. 새콤 달콤 그 소리 가지고 나타날 수 있는 게 아니야. 그래 거기는 그 맛을 뜻을 그걸 말할 수 없어요. 그건 원 의견은 진실해요. 그럴 거 같으면 사도신경 같은 거, 쪼르르 외우고, 외우고, 어떨 때 처음에 어려서 자랄 때 더러 외우겠지. 외웠다고 쪼르르 외우는 게 재주가 아닙니다. 그러니까 그거 잊어버려도 그만이야. 그 외우는 거 잊어버렸다고 그 생명 속에 들어가는 게 없어지는 게 아니에요. 어제 들어가서 그러면 그것을 그대로 살아서 맨날 힘 있게 살면 그게 진리이지, 조르륵 외우는 게 영생에 들어가는 게 아닙니다. 그런 뜻이에요.
본이면 밑 둥의 의견이 나오는 데는 불원지라. 맛은 망하지 않습니다. 그래 정말 항상 먹어야 하는 것은 달고 고소하고 그따위가 아닙니다. 달고 고소하고 새큼한 거 이건 잠깐 이야. 그거 먹고 사는 거 아니에요. 그건 기본으로 먹는 거는 맑은 물, 싱싱하고 깨끗한 밥, 또 과실로 말하면 뭐 그렇게 괴상한 거 말고 과실도 시원하고 점잖고 그런 것을 찾아요. 날짜가 지나가면 해가 되요. 한 살 먹고 두 살 먹고 해마다 해를 넘기는데서 우리 생명이 사는데 날짜가 지나간 대로 해를 이루어요. 또 날짜라는 건 지나가는 거야. 날짜가 지나가면 해가 되는데 그러는 동안에 자기도 모르게 눈이 밝아집니다. 이 껍데기 눈은 늙을수록 늙어요. 흐려요. 돋보기를 쓰게 되요. 그러나 속 본 정신은 눈이 흐려질수록 정신은 맑아져요. 종당 보는 것도 속에 많이 깨달아지도록 봐야 하는데 제일 잘 보는 건 장님이 더 잘 봅니다. 그러니까 너희가 본다고 함으로 볼 걸 못 봤다. 너희가 일찍이 보지 못하는 장님이 되었다면 지금 이 장님이 눈 뜬것 모양으로 환히 떴을 거다. 이 그렇게 가르치지 않습니까?
본다고 하다고 못보고 캄캄해 나는 볼 수 없다고 하던 그 사람이 깨닫고, 이 세상은 그런 이치가 거기 있어요. 너희가 본다고 함으로 볼 것을 못 본다. 일찌감치 못 보게 되었다면 오늘 이 장님이 눈 뜬것 모양으로 밝아질걸 그랬다. ‘일과상세 목련일이라’ 날이 지나갈수록 시간이 지나갈수록 해가 이르는데 그 해가 이러야 뭘 해? 한 살 늙었고 두 살 늙었고 여든 번 늙었고 여든 한번 늙었고 여든 두 번 늙었지, 뭐 거기 더 한 게 어디가 있어? 그러니까 날이지나 해가 이르는데 눈이 밝아야 한다. 이 눈은 아니에요. 눈은 아니 보여도, 보는 속에 있는 눈 그 밝아, 속에 있는 눈이 밝아지는 게 종당 그 절 그 하나, 그거 하나 때문에 들어가자는 거야. 날이 지면 해가 뜨는데 눈이 밝은 거 하나 꼭꼭 지난밤도 꼭 잘 잤어요. 오늘 새벽에도 밤 꼭 잘 때 깨었으면 일어나야 해요. 일어났어. 일어났으면 여기 나와야 해요. 그래 나왔어. 그렇게 꼭 그런 거지. 그러니까 꼭꼭 할 거를 하면 꼭꼭 할 거를 하면 참 말씀에 가 닿는 겁니다.
종당 목적은 지성이야 지성이면 감천이야. 우리가 염불을 하는 사람은 적지만 지성감천이라는 말은 죄다 해요. 옳지요. 지성감천이야. 그럼 지성을 하려면 지성을 해야 한다. 그래, 지성은 마음으로 드려야지. 이건 지성을 드려야 한다. 그래 지성을 쌀을 많이 가지고 가서 돈을 많이 가지고가서 지성이라고? 이게 무슨 도깨비 노릇입니까? 무슨 절을 지성을 간다고 그걸로 됩니까? 이놈의 세상이 망할 세상이야. 돈 가지고 쌀 가지고 지성 드리러 간다. 그래 거기서 무엇을 볼 겁니까? 무엇을 해? 거기서 떡에 밥에, 그게 지성이야? 과필지성 꼭꼭해서 감천하는 지성이 되어야 되요. 참 말씀이 그런데 이거 뭐야 처음에 자기 말 듣는 귀, 거죽 귀를 찾아 잘 안 들리니 속에 귀를 찾아 그걸 점점 더 거룩하게 됩니다. 그게 거룩한 거야. 그러니까 귀가 거룩하게 우리나라 글 점하나 꼭 찍어놔. 하늘 천이야. 그 점이 사람은 산다는 거 생각을 하기 시작하며 사는 겁니다. 숨이 졌다. 생각할 수 없다는 게 숨이 진거야. 그럼 숨을 쉰다는 건 생각할 수 있다는 거야.
그러니까 귀가 거룩하게 아, 알아지는 거 그래, 아 라는 것이 알자고하는 거라고, 그래 생각이 사는 거니까 생각이 출발해, 살기 시작하는 게 먼저 말이라고 하는 게 시작이에요. 그래 아 자가 맨 먼저야. 아 또 그 다음에 물질세계라 물질이니까 알아야 하니까 봐야하니까 그럼 보는 거예요. 아는 보는 겁니다. 아를 보는데 그러게 아, 봐. 그래 아, 봐라는 게 아버지를 먼저 찾게 되요. 먼저 봐야 하는 게 아 봐. 아버지를 먼저 봐요. 아버지를 알게 보자는 거야. 그래 우리말로도 아바 인데 히브리말로도 아바야. 이게 나는 숨 쉬는 거예요. 이 때 이랬어요. 며칠이 이랬어요. 숨 쉬는 거뿐이에요. 우리다 숨 쉬는 거뿐이에요. 말이 나가고 말이 들어오고 그런데 재미있는 게 있어요. 죄다 뚜껑이 있지 않습니까? 뚜껑이 있어. 그런데 콧구멍 하고 귀구 멍은 열어놨어. 숨 쉬는 거 하고 말 듣는 거하고는 기도도 하고, 어느 때 한때가 아니고 낮에도 하고 밤에도 하고 그러니까 그렇게 환히 뚫어놓고 자도 뚫어놓고 깨도 뚫어놓고 뭐든지 코도 환히 뚫렸어. 잠깐도 쉬느라고 못 쉬는 게 숨 쉬는 겁니다. 쉬느라고 못 쉬는 게 뭐냐? 숨이요. 그래 쉰다고 잘 때는 코를 더 골지 않아요? 어제 내가 혼자 생각해도 이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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