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강을 지나고 입동을 바라 보고 있다. 세차례 태풍 폭우로 망가진 밭에 이식한 월동무가 잘 자라고 있다. 계속 물을 주고 있다. 토란은 오늘에야 골짝 밭에 심은 것 수확이 끝날지 모르겠다. 엽밭에 쌈채 채종포에 모종을 하고 있다. 행랑채 공사는 미뤄지고 있다. 벼 수확은 모두 끝났다.
맹자, 중용
1971.08.12. 유영모 선생
지금은 참 이라는 거 진리라는 거 이 돌아가는 겁니다. 원만하게 돌아가는 게 진리인데 지금 우리 처지는 돌아가려고 들면, 돌아가려고만 들면 안 됩니다. 돌아가게 되는 건 이다음에, 이다음에 돌아갑니다. 지금 돌아가게 되면 널찍하게 돌지를 못합니다. 지금 돌려거하면 바늘구멍만큼 돌려놓을 런지 모릅니다. 너그럽게 넓게 돌지를 못합니다. 그럼 정말 돌아가는 거 그건 언제 할 것 인고 하니 우리가 영생에 들어가 아버님 모시고 사는 그때야 원만하게 돌 겁니다. 그럼 지금은 돌아간다는 보다도 올라가는 겁니다. 올라가고 올라가야합니다. 지금 찬미하는데 올라가, 올라가. 그 아마 이 말씀을 읽히게 하시는 건가 보다. 지금 우리가 자꾸 애써서 일깨어서 할 것은 올라가, 올라가 입니다.
나 무던히 올라갔지, 아니요. 더, 더 올라가, 올라가 입니다. 그런데 그것도 하나님의 아들 되는 지경까지 올라가야 하는데 여기도 올라간다고 하면 우습 씁니다. 금메달이나 타게 되면 이쯤밖에 더 올라갈 사람 없습니다. 은메달 타는 건 안타는 거 보다는 나아. 그렇지만 아직 멀었어. 동메달 타는 거, 그건 아직도 멀고, 멀었어. 그러나 안 탄 거보다는 좋아. 이 그따위로 올라가는 게 아닙니다. 올라가 올라가는 우리 아버지 모시게 되어야 과연 올라간 거야. 그럼 아버지를 모시고 있을 때 그때에 돌아가면 아버지가 얼마나 크게 벌려놓으신 우주 속이나 우주 밖이나 그만큼 우리들도 돌아갈 겁니다. 그건 진리로 돌아가는 생명입니다. 그때는 돌아가, 돌아가 이렇게 할 겁니다. 지금은 올라가, 올라가, 올라가 지이다.
이 맹자라는 책을 가져왔는데 이거 뭐 나도 왜 가져왔는지 몰라요. 이 떠나려고 하던 그날, 가방에다 뭐 옷가지 집어넣었는데 옆에 이 책이 있어요. 문득 생각하고 그저 집어서 넣었습니다. 그래 여기까지 나를 따라 왔어요. 그런데 아까 기도하는데 이 책의 말씀을 하게 되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아까 그 말씀 그거 왜했나? 그랬는데 지금은 내가 말씀 할 줄로 생각 안 했어요. 나는 말씀을 할 생각이 없이 듣겠다는 생각으로 이렇게 올라왔어요. 그래 장로님이 말씀 하라고 그래. 장로님 왜 그렇게 작정했는지 모릅니다. 여기에 와 앉고 보니까 오, 이거 시작할까? 이러고 이야기 했는데 이걸 좀 더 해라. 하시는 이렇게 되는 건가 보다. 짐에다 집어넣기도 그저 무심히 집어넣은 거야. 아까 말씀 무심히 이걸 한 겁니다. 지금 앉아 보니까 앞에 이 책이 있는데 아 이거 아까 말씀을 시작한 게 헛되이 시작한 거 아니다. 무슨 까닭이 있다.
그럼 이 말을 하다가 어떤 말에 가서 우리 아버지의 뜻이 여러분 속으로 들어가, 그럴 뜻이 계신 가? 아버지여, 아버지 뜻 이 이루어 지이다. 아멘. 아까 말씀과 같이 맹자를 내가 안다고, 맹자를 우리가 연구하자고 그리고 이거 가져온 게 아니에요. 나도 왜인지 모르게 집어 넣어가지고 오게 되었어. 진심편인데 우리 마음을 다하자는 말씀인데 이왕 마음을 가졌으니 그 마음을 다해서 써보자. 그 말씀인데 맹자라는 사람을 시켜서 이렇게 말씀이 이렇게 지킨 것을 이 사람이 이걸 들고 나와서 이 말씀을 시작하게 됐어요. 그래요. 기도한다는 시간에 이 말씀을 시작하게 되었어요. 그런데 지금 이렇게 보아하니 시간이 되는 것은 이 말씀을 계속해라. 이런 말씀인 것 같습니다. 아멘.
마음은 사람에게 신명이다. 아까 말씀 못 보신 이는 안 돼지만 아까 말씀 들으신 이는 신명이라는 말이 무슨 소리인지 대강 아까 말했어요. 동양 사람은 가장 점잖은 사람이 또 공평한 사람이 지극히 꼭대기에 신명이라는 걸 계시다고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럼 신명 제일이라고 생각하는 게 하나님이 계시다고 유신론으로 나간 생각인지 또 하나님이 계신지 안계신지 모른다. 그리고 무신론으로 유물사상으로 나가는 생각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동양에서 신명이라는 사상은 대단히 귀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런 속에서 우리 마음은 우리 마음은 사람의 신명이다. 사람도 신명 없이는 못살아요. 그 내 속에 있는 신명은 곧 내 마음이다. 그럼 맹자한테 우리가 배울 것이 내 마음은 곧 신명이다.
우주를 지배하시는 신명은 아닐 런지 모릅니다. 이 마음이라는 거 하늘에서 얻어가지고 온 마음인데 얻어가지고 와서 내 사는 동안에 줄 곳 속에 있는 마음인데 그 속에 있는 마음을 다해서 찾아볼 것 같으면 천성이라는 걸 안다. 천성을 알면 하늘을 안다. 이게 원 말씀이에요. 무슨 말씀인가 하면 이왕 마음을 가졌는데 그 마음을 다 알 것 같으면 천성을 안다. 천성을 알 것 같으면 하늘을 안다. 그럼 하늘을 알면 알았지, 하늘을 알면 우주를 안다. 이런 소리 쯤 밖에 안 되는데 신을 안다는 말은 아닌지 몰라요. 그렇지만 여기 마음이라는 게 신명이라. 그랬다. 이 말이야.
신명이 신은 아니에요. 그러나 신에 가깝습니다. 해나 달이 신은 아닙니다. 밝은 게 신이 아니에요. 그러나 어두운거 보다는 밝은 해 달 거기에 신에 가깝습니다. 그래 내 마음은 곧 사람 몸뚱이를 가진 이 몸뚱이 속에 신명이다. 대단히 귀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 신명은 뭐냐 우리에게 무엇에 필요한 거냐? 어째서 필요한 거냐? 그것가지고 어떻게 써야겠느냐? 그 이야기가 여기 있습니다. 그것은 모든 제의를 모든 이치를 우리말로 정말 하면 이치라는 건 올입니다. 올, 또 올 중에 무슨 올이 우리가 제일로 실올입니다. 실올, 우리는 면을 심어서 실도 뽑을 줄 알고 실을 갖고 천을 짤 줄도 알고, 그 올이라는 걸 정말 아는 건 길쌈을 하고 바느질 하는 아낙네가 제일 잘 알리라고 나는 그래요.
또 남자로서는 목수 미장이 노릇 하는 양반들, 수평가지고 연줄을 띄워가지고 아무거로든지 꼭 바로 세우고 아주 반듯하게 세우는 그 양반들이 올을 바로 알아요. 이 사람이 올을 바르게 해야만 삽니다. 올바로 못하면 살수가 없어요. 아무리 적은 거라도 올바로 세우지 않으면 바느질 하나 할 수가 없고, 올바로 안하면 숟가락질 하나 바로 할 수가 없어요. 젓가락질도 할 수가 없어요. 올 바라야만 합니다. 그 올바로 해야 된다. 진리를 찾아서 진리를 갖고 나가야 한다. 똑 같은 말입니다. 이 세상에 크나 적으나 똑같은 말이에요. 절대로 높은 거 큰 거 이거만을 자꾸 말하는 거 아닙니다. 올바로 하자. 올바로 하면 올을 잘 풀어나가고 올을 반드시 쓸 줄을 알아야해. 그러기에 모든 진리가 굵직하게 말하면 줄입니다.
줄, 실올이 매서 홑실이 되고 홑실이 약해서 겹실을 해야 하니까 이겹실을 하던지 삼겹실을 해 겹실을 해. 또 겹실을 굵게 동아줄까지 만들도록 만드는 거, 그 종당 줄이 되는 거지. 그럼 줄이 되거나 아주 홑실이 되거나 다 올입니다. 올 가지고야 하지, 올 안 가지고 되는 게 없습니다. 올 안가지고 되는 게 없어. 그러면 올바르다고 하는데 옳게 하는 겁니다. 옳게 하는 거 올라가는 거 옳게 하는 거 그게 다 같은 올로 되는 거예요. 옳게 하는 거 옳게 하는 거 또 그걸 판단할 때 옳다. 되었다. 옳다. 하는 거 그건 진리를 깨닫는 다는 건 올을 깨닫는 건데, 올을 깨닫는다는 거 아주 보이지 않는 거기서부터 동아줄 이상으로 굵게 된 거. 영원무궁하게 영원한 목숨 줄이 되는 그런 동아줄, 목숨이 매달린 줄, 그것을 가져야 하는데 그걸 써야 하는데 올라가, 올라가 그 줄을 붙잡은 줄을 타고 올라가, 올라가,
그럼 나중에는 분명하게 그 굵은 우리 잡은 줄이 돌아갑니다. 이 모든 부족한건 벗어버리고 우리 깨달은 속 알 만이 영혼만이 우리 정신만이 올라갈 데 다 올라가면 돌아가, 돌아가, 영생한다면 가만히 졸고 앉아 있을 거야? 어떻게? 이 생명이 나타난 데는 이렇게 잠깐도 쉴 수 없는 이러한 것이 생명 세계인데 정말 지극히 높은데 올라가, 영원히 돌아가는 본향에 돌아갈 적에 거기야말로 길이란 게 애초에 어디 생길 리가 없는 겁니다. 영원히 돌고, 돌고, 돌고 또 돌고, 또 돌고 그렇게 될 겁니다. 마음은 사람에게 신명이다. 그 신명은 뭘 할까? 그것가지고 이렇게 한다. 그 말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것 가지고 어떻게 하는 고 하니 모든 올을 다쳤다는 겁니다. 모든 올을 다쳤다. 그 시간에 모든 올이 되었다. 모든 올이 다쳤는데 그 일을 하면 올바른 거 올 잡지 못하면 올을 바로 잡지 못하면 일을 못해요. 일을 못 봐요. 올은 열 가지 백가지 천 가지 만 가지 만사, 만 가지 일을 우리가 볼 때에 모든 올을 가졌으면 그 올을 가지고 만 가지 일을 처리할 수가 있어요. 자 처리란 말이 별소리가 아닙니다. 처할 처(處)자에 올 리(理)가 아닙니까? 다스릴 리(理)자라 그랬지요? 그 만사를 다스리게 되요. 이 엄청나게 큰 말 아닙니까? 마음은 우리의 심령이라 우리의 심령이 올 안에 죄다 갇혀있어. 그러나 만사를 우리가 해야 나가는데 만 가지 일을 다 해서 올을 가지고 쓸 수가 있다는 거야. 내가 가진 올을 가지고, 이 말씀이 진리의 말씀 아닐까요? 성경속의 말씀이 아니라고 진리 아니라고 할까요?
우리나라 사람들 대강 이런 것을 배워, 해왔기 때문에 성경말씀 그대로 알아듣는 겁니다. 이게 통이 없으면 못 알아들어요. 그 쉽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공자 맹자의 사서삼경 칠서는 구약 대접을 꼭 해야 합니다. 신약이 제일이지 구약이 쓸데없다. 그거 다 망령의 말입니다. 구약 모르면 신약 모릅니다. 동양 사람도 사서삼경 모르면 성경도 몰라요. 그렇게 나오고 그 다음에 나오는 게 무슨 말인 고하니 성품입니다. 이 마음 다하면 천성이라는 성품, 그것을 안다고 하는데 성품, 그런데 이 사람 성품, 성품 하지 말고 바탈, 이라고 하고 싶다는 거야. 우리 본 바탈, 바탈이라는 뜻은 그걸 받아가지고 고대로 하겠다는 겁니다. 실상 나올 때 그걸 받아가지고 나왔어요. 그 받아가지고 나온 게 우리 바탈이야.
올 가지고 올바로 사는걸 아는 그 바탈, 그 바탈을 가지고 그대로 나가는 거야. 그럼 그 바탈을 가지고 사는 게 노정기에요. 노정기, 신약전서 구약전서 다 어떤 의미에서는 노정기에요. 신약 구약 그 말씀 그대로 쫒다보면 하늘나라 들어가는 노정기에요. 그 노정기, 그럼 바탈 이것이 노정기에요. 우리 갈 길을 다 걷기 전에는 그걸 내버려서는 안 되어요. 나올 때 가지고 나온 거기 있는 그대로 거기 있는 이름 그대로 전진해 나가야합니다. 종당 목적지에 다다르도록 그걸 가지고 가야해요. 이 천성 탄 건 그걸 하자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천성 바탈 우리 가진 바탈, 그럼 그 바탈, 그것이 무언고하니 그 성품 그것이 무언고하니 우리 마음속에 우리가 자라는 대로 모든 올이라는 올이 다 들어가서 쌓이는데 우리가 배운 학문이 지식이 쌓이는 겁니다.
많이 지식을 배워서 넣었다 하는 거 저사람 많이 배웠으니까 석사다. 박사다. 하는 것은 많은 올을 배워 쌓아 가졌다는 겁니다. 우리 바탈 이라는 거 올이라는 올을 죄다 갖춰 가졌다는 거예요. 이제 올을 생각할 때 우리 마음이라는 것이 사람의 심령이라는 것이 모든 올이란 올은 진리라는 것을 모두 갖췄다 그건데 그 진리라는 것을 생각할 때 마음 그것만이 모두 올을 가지고 있느냐? 하면 올의 근원이 마음은 아닙니다. 다른데 있는 올을 받아서 집어넣었지, 그 올의 원 근원은 어디인데 하늘입니다. 그러니까 하늘 아래 해 에요. 하늘은 뭐에요? 알아 뭘 해요? 올의 근원은 하늘이니까 지금 올을 더 받으려면 하늘의 올을 더 받아야 하거든.
그래 하늘아래 그 하늘 할 때 여기다. 하늘은 또 올이 좇아 나온 데야. 올이 좇아 나온 데입니다. 우리에게는 올이 필요하니까 올이 어디에서 왔나 하늘에서 왔다. 하늘도 올이 좇아 나온 데를 알지 못해요. 하늘에 또한 올이 좇아 나온 것이라 이겁니다. 그러니까 모든 올을 담아 가지고 우리 마음이라는 거 그것은 그 마음속에 올의 전체가 들었을까? 어떤 부분만 들었을까? 그거 문제에요. 그런데 사람이 이 마음을 가졌으면 올이라는 올을 전체가 아닐 리가 없어. 올이라는 걸 죄다가 전체로서 오늘날의 올을 전체가 아닐 수가 없어. 종당 전체 까지 연결을 해서 전체 올을 가져다 죄다 쓸데 있어. 쓰면 한없이 쓸 거야. 전체 아닐게 없어요.
그러나 올을 풀어 쓸 때에 다 잘 풀어 쓰지 않으면, 실이 많고 필목이 많고 해도, 그걸 잘 엉키지 말고 잘 순전하게 둬두지 못하면 다 엉켜서 버리게 되요. 다 망쳐버리게 됩니다. 그래 학문이 많고도 멸망하는 생명이 있어요. 얻어둔 실을 아깝게 덜어 놓고 엉켜놓고 잘 풀자니 풀래야 풀 수가 없게 만들어 놓고 이러한 현실, 이러한 사정이 여간 많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이맘을 가졌으면 그 진리의 전체를 아니 가진 게 아니야. 그러나 그 올을 갖다가 고루하지 않으면 잘 보존해서 엉키지 않게 더럽히지 않게 그렇게 잘 두지 못하면 말이에요. 잘 두지 못하면 그건 뭐 다른 욕심 같은데 여기에 가리게 되요. 점점 컴컴해져요. 점점 어지러워져요.
가리 운 바가 되어서 그래서 이 마음에는 한량없이 하늘에 있는 올을 죄다 가져다 깨닫기만 하면 그걸 받을 마음인데 마음이 그 지경이 되면 그 마음의 분량을 다 할 수가 없어요. 그 마음의 분량을 다 하도록 해야 한다는 그 말이 진심편이야. 우리 마음을 다하도록 하자는 말씀이에요. 진심편 이라는 편이 되도록 말씀한 거예요. 그리고 나서 다시 사람이 마음을 다하면 천성을 다 안다. 천성을 다 알면 하늘을 안다. 그 말 얼마나 귀한 말인 줄 이렇게 설명을 듣고 보면 확실히 그렇지 않습니까? 그다음에 또 하는 말이 그러니까 능히 그 갖은 마음을 극진히 다 하는 사람은 극진히 다하는 사람은 자기가 깨달은 거 받은 거 그 올바른 거 그거를 다하지 않을 리가 없어. 다 할 테지. 다하지 않을 리가 없다. 그 지경이 된다면 그런 사람은 꼭 능히 그 진리를 다할 것이니 그 진리를 다하는 걸 가지고 그대로 살면 알지 못 하는 게 없으리라는 겁니다. 그럼 그 당시에 알지 못하는 게 없는 거 아닙니다. 평생을 자기가 죄다 살도록 가보면 종당 올에 그런데는 하늘나라에 들어가고 만다는 겁니다. 마음을 다하면 천성을 안다. 천성을 아는 사람은 하늘을 안다. (끊김)
구약 선지서(先知書)에 있는 말씀 아닙니까? 그럼 성경에 대해서도 동양사람 으로서는 맹자 공자의 말씀을 일찍 봤으면 구약 아는 사람이니까 신약 말씀을 깨닫기가 쉽지요. 진리라고 하는 이상에 여기 있는데 저기 상관이 없는 진리가 어디 있겠습니까? 올이라는 건 다 같은 올이라는 겁니다. 그 근원은 다 하나님이 되고 맙니다. 그래 이 설명하는 사람이 이만큼 이야기를 해놓고 이제는 올을 알았으니까 그 올이 어디서 나왔는지 조차 나온 데도 알아요. 하나님까지 안단 말이에요. 조금 더 안다고 하나님까지 안다고 안 되겠습니까? 그렇게 나온 거 다 알아. 난 그런 식으로 된다고 본다는 겁니다. 요거 한구 절 보건대 이제 아까부터 지금까지 요대로 하면 오늘 맹자가 와서 여기서 말씀을 해요. 그 말씀을 듣는데 그만큼 들으면 속이 시원해져. 우리 올을 엉켜져있는 올을 풀어놨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일찍이 맹자라는 선지자를 우리에게 주셔서 이만큼 오늘날 우리 올을 이렇게 바로잡게 이렇게 되었습니다. 오늘 맹자를 모셔서 좋은 말씀을 들었습니다. 우리 올이 많이 풀렸습니다. 아멘. 감사합니다. 그런데 이 만일 공부를 하면 존심양성이라는 대단히 요긴한 요절입니다. 마음을 보전해야한다. 마음을 보전해야 한다는 게 있을 존(存)자에 마음 심(心)자 존심해야 해요. 이 마음을 보전해야 합니다.
그 존심 양성 마음은 먼저 바탈을 써라 하는데 바탈은 마음을 이리 하늘에서 받은 그 바탈은 이 마음이라고 갖은 이 속에 있는데 거기서 천성이라는 건 하늘에서 탔으니까 바탈이니까 영 그거 그대로 처음에 나올 때 받아서 나온 걸로 착각하기 쉬운데 그것만이 아닙니다. 바로 속 알입니다. 이 그대로 속 알이에요. 우리 천성이라는 게 우리 속 알이라. 그래 속 알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길러야 합니다. 길러야해요. 그래서 마음을 존심인데 마음을 조인다는데 보전한다. 있을 존(存)하는데 있게 되는 건데 그 있다는 말이 공부하기가 어려운데 있는 것도 세 가지가 있어요. 한문자에 있을 유(有)자가 있고 있을 재(在)자가 있고 있을 존(存)자가 있어요. 다 있는 건데 있을 자는 뭡니까? 가졌다는 겁니다. 그래 소유라는 거 내가 가진 바 그게 소유에요. 이 세상사람, 산 사람이 나는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놈이라, 무산자라, 이따위 소리해. 아니, 절대 이 세상에 무산자는 없어요. 왜? 몸뚱이 가졌지. 몸뚱이 가졌는데 가진 게 없다니 그런 거짓말이 어디 있어? 몸뚱이 가진 거 그 몸뚱이 다 가졌으니까 다 소유권 갖은 존재이지. 이 사람 코로 숨 쉬는 사람이 소유권 없다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럼 있을 유(有)자 소유했다는 겁니다.
우리의 공동재산은 하늘도 우리 공동재산이고 해도 달도 공동재산이고 땅도 죄다 공동재산이야. 부분, 부분 사는 데라든지 요거 농사짓는 밭이라든지 사는 데가 다른 거지. 전 세계가 땅이라는 거지. 김 씨의 것도 아니고 이 씨의 것도 아니고 또 사람만의 것도 아닙니다. 버러지 곰팡이 이거 죄다 공동 소유자입니다. 하늘에 권리가 있고 땅 가질 권리가 있고 이렇게 다 하는데 그걸 갔다가 내 것이니까 내 집안에 내속에 내 곳간에 집어넣는다면 그건 참 걱정인 것입니다. 그 공동소유니까 안 집어넣는 것인데 죄다 지금 어디다 두고 있는 겁니까? 하늘은 공중에도 없고 땅은 공중 일부분에 이 태양계라는데 돌아가고 이 턱턱 온 밖에다가 죄다 두고 있는 겁니다. 그럼 밖에 두고 나는 상관이 공동소유니까 단단히 있어요. 이렇게 됩니다. 아니야? 좀 어렵습니다. 그래 나 역시 좋은 게 있어요. 우리 인사도 우리가 할 수 있게 굿모닝 하던지 곤니치와 하던지 이렇게 되었으면 좋겠다. 하는데 그게 도무지 나오지 않아요. 그런데 요새 하나 좋은 게 하나 있어. 어린애 인사같이 안녕. 손님 가신다. 안녕 됐습니다. 좋아요. 안녕 지금 너무 높이 쓰는데 어린애가 안녕, 안녕 높이 쓰는 게 아닙니다. 그 정도로 씁니다. 안녕, 안녕 어른이 같이 안녕, 안녕히 지내십시오. 뭐 그렇게 안 가르치려고 해. 이게 좋은 일입니다.
그래 얼마 지나면요. 인사 간단하게 안녕, 그건 다음세대고 평안히 그건 다 그만두고 안녕, 안녕 이러면 간단한 겁니다. 그러면 지금 인사, 안녕, 안녕, 감사합니다. 좋아요. 어떻게 욕심이 생기는지, 한 십년이라도 더 살아서 십년 안에도 안녕, 안녕 이렇게 인사를 한다면 나 춤출 테야. 존일심 양일심 하는 거는 마음을 생존한다는 존자입니다. 생존한다는 존자이기 때문에 이 있을 유(有)자 있을 재(在)자해서 이 말이 다른 데로 가서 이렇게 시간이 갔지요. 그렇지만 소유한다는 이 몸뚱이 가진 그 소유, 이 아까워서 이렇게 다른 소리 자꾸 합니다. 소유가 뭔가? 카로리에요. 고기인 거예요. 살이에요. 또 건너가면 손입니다. 그리고 원 건너가고 비치지 않아요. 이 둥그렇게 하고 이렇게 합니다. 손이에요. 손을 가졌단 말입니다. 살이에요. 살을 가졌다는 말이에요. 살 몸뚱이를 소유했어요. 이건 내 몸뚱이다. 내가 가졌어. 확실히 소유한 거, 살 몸뚱이 가진 그겁니다. 있을 재(在)자는 그 재주 재(才)에 했는데 있을 재(在)를 손에다 하고 있을 재(在)에 재주 재(才)자입니다. 재주 재(才)자는 또 뭔고 하니 이 세상에 뭐 일이 일어나는 게 재주입니다.
그 난 게 씨가 있어서 뿌리가 있어서 자라서 기다랗게 나와서 살이 두꺼워져 가지가 척 이렇게 자라는 거 그럼 흙을 뚫고 나와서 가지가 뻗고 원 그 몸뚱이가 이렇게 서있고 그런데 아래쪽으로 뿌리가 뻗어서 든든하게 박혀있고 그것이 이렇게 가로 건너가는 게 있고 원 내리 땅에 박힌 게 있고 또 뿌리가 뻗어서 가로 뻗어 나간 게 있고 그것이 나무의 기초인데 그게 재주에요. 그 나무 그린 게 재주 재(才)자에요. 그러게 하늘이 재주고 땅이 재주고 그 중간에 사람 생긴 게 재주라는 겁니다. 그래 천지삼재라는 거야. 하늘 땅 사람 이게 세 재주가 맨 처음 나온 재주에요. 이게 다 모르고 사는 것이 재주인 걸 몰라요. 내가 산다는 거 하늘이 생겨나온 게 재주라는 걸 모릅니다. 땅이 생겨 나와서 이렇게 둥둥 떠 돌아가는데 이게 재주라는 걸 몰라요. 이렇게 몰라가지고 되겠습니까? 모르라고 마련 된 게 아니에요. 말과 글이라는 건 죄다 알라고 그렇게 된 건데 차곡차곡 말을 따져서 그걸 어째 그 말이 되었는지 따지지를 않아요. 가르쳐 주는 사람이 따지지 않고 배우는 사람도 따져서 배우지 않아요.
그 바쁜 세상이니까 그렇지만 그렇다고 바쁘다고 그렇다면 바쁘면 좀 돌아가. 껑충껑충 뛰어가지 말고 그래서 있을 재(在)자는 무엇 인고 하니 어디 있는가 할 때 쓰자는 겁니다. 어디 있는가? 그 재주는 재주인데 거기다가 살이라는 거 달 월(月)자 뚝 떼어버리고, 거기다 흙토(土)자 그거 둬 땅이라는 겁니다. 흙으로 된 땅위에 모두 사니까 뭘 어디다가 써도 어떤 땅이든지 두었지, 모두 땅 떠나가지고 어디다 두겠습니까? 그럼 땅 어디 있느냐? 할 때 땅바닥 거길 가리켜요. 아무데 있다. 그래 있을 재(在)자 그래 소재지. 그거 있는 곳 그겁니다. 어디 두었느냐? 어디쯤 있느냐? 그거 다 흙 위에서 되니까 흙토를 한 거예요. 그래 소재를 있을 재(在)자 된 거고. 그 다음에 생명이 살아있는 데는 살 이라는 살도 아니고 고기조각 하나만 있어야 그것이 있을 유(有)자지, 갔다 온전히 사는 것이 있는 데는 있을 유(有)자 가지고는 안 되어요. 있을 재(在)자 해야 돼. 있을 재(在)자에는 거기 두는 건 뭐에요? 적어도 덩어리 진겁니다. 체가 있는 거예요.
그럼 덩어리, 뭉텅이, 한 체, 이 몸뚱이 그것을 어디다 두었느냐는 겁니다. 그래 있는 곳이 어디 있는지 알려고 할 때 흙토(土) 한 있을 재자(在)에요. 그런데 생명이 목숨이 할 때에 생명이 목숨이 어디 있느냐? 생명 목숨 이야기 할 적에 그 몸뚱이 어디 있느냐? 할 때는 아무데 몇 번지 있다고 하지만 그 소재를 말하느라고 생명을 가진 짐이 어디 있느냐? 할 때는 그 흙토(土)한 소재지 말하면 안 되어요. 그건 보전해서 있는 아주 보전해있는 그렇게 있는 겁니다. 생존해 있는 보전해 있는 그거, 그 나서서 이 몸뚱이 이 유한한 생명이 있는 것을 표시하려고 여기 있어요. 여기 있다는 유(有)도 아니고 재(在)도 아닙니다. 현(現), 존(存)에는 재주 재(才)속에 흙토(土) 지워버리고 거기 소유한다는 살 조각도 내버리고 뭣이 있어요? 아들이 있어요? 이 세상에 나온 사람 다 아들입니다. 그래 예수가 아들이 되셨다고 사람을 인도하시는 아들 노릇해라. 우리의 목숨의 근원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다. 우리는 말씀 하나님의 아들들이다.
자세히 들으세요. 여러분들은 따님인데 아들은 무슨 아들이요? 아니 아버지 앞에서는 그래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 앞에 나가면 딸은 없습니다. 하나님 딸 없어요. 말끔 아들만 두셔요. 그거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 생각하며 그거 확실히 모르면 안 됩니다. 그거 몰라요. 왜 몰라요? 몸뚱이는 모르지요. 예수 당시에 사두개 교인이 와서 예수께 묻기를 여기 사람이 있는데 여자가 하나 있는데 어디로 시집가 사는데 그 남편이 자식을 낳지 못하고 죽었어요. 거기 법이 큰아들이 자식 못 낳고 죽으면 둘째 아들하고 삽니다. 둘째아들하고 살았어. 왜 사느냐? 하면 손 없이 간 형님을 위해서 대신 살아서 아들을 낳으면 형님의 아들을 가져다 삼아요. 제가 낳더라도 제 아들 아닙니다. 형님의 대를 이어주는 아들이야. 그런 일이 있어요. 그럼 너 해라 하는데 싫어요. 나는 싫어요. 내 식솔 데리고 살겠소. 그러면 죄라고 합니다. 그럼 벌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 일이 있기 때문에 이 사두개인이 간사하게 예수를 시험하느라고 여기 사람이 있는데 혼인을 해 살았는데 아들을 못 낳고 남편이 죽었어. 그럼 둘째 시숙하고 자식을 낳아서 형님의 대를 이어야 할 텐데 안하겠다고 합니다. 그렇게 법이 되었으니까 둘째하고 살아, 살았는데 둘째도 자식 없이 죽어요.
그럼 어떻게 해? 그 다음 칠형제인데 일곱하고 다 살았어. 다 살았는데 자식 다 없이 죄다 죽었단 말이야. 그걸 예수 앞에 질문합니다. 이걸 어떻게 합니까? 사두개인은 실상 거죽으로는 죄다 믿습니다. 하나님 믿어요. 부활 영생 다 믿습니다. 거죽으로 믿어요. 속으로는 안 믿습니다. 아닌 걸 갖고 부활도 아니고 영생도 아닌 걸 부활 영생 하니까 그게 싫어서 그 정말 모르는 거예요. 그런데 만일 그런 사람이 부활해서 영생을 해. 그 칠형제가 누구하고 삽니까? 칠형제 거듭나면 댁네 된 사람이 일곱 사람하고 살다가 자식을 하나도 못 낳았으니 부활하는데 누구하고 사나요? 대답할 수 없는 거 같아서 그렇게 했어요. 예수가 그걸 대답하시는데 예수는 이사람 아닙니다. 뭐하는데 잔소리에 설명을 잘 안하십니다. 그런 어른인데 그 말씀에는 더더군다나 잔소리가 도무지 없습니다. 그건 왜? 사두개 교인은 성경 죄다 아는 사람입니다. 말 길게 할 게 없거든. 그러니까 거두절미하고 아무소리 안하고 얘 부활해서 영생하는 하늘나라에 가면 그때에 사는 건 몸뚱이라는 건 생명이라는 건 천사와 같다. 꼭 천사와 같은 거다.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천사와 같다. 천사가 여자천사 있다는 소리는 도무지 못 들었거든. 그럼 천사와 같다하면 그만이야.
여편네가 뭐고 사내가 뭐입니까? 영사는 영생하는 그 사람들은 그저 아들입니다. 처음부터 아버지 아들이고 영원한 나라에 가면 또 아버지 아들이에요. 그 안방에서 살 때처럼, 부활 영생하면 나는 꼭 여자노릇하고 싶고 남자 생활하는 건 나는 싫다. 이런 분이 계시다면 그건 좀 위로해 드리기가 대단히 어려운데, 부활을 생각하고 영생을 생각하고 죽으면 다시 만나본다고 해서 자꾸 위로를 하고 그러는데 그래 자꾸 사진들을 두고 너무 서러워하면 위로하는데 아 부활해서 영생하면 다 같이 살 텐데 뭘 그렇게 서러워 하냐고 그게 무슨 소용 있어? 여자 여편네 노릇도 하고 남편 노릇도 하고 싶은데 거 잘못하면 영영 거기서 짝이 만나서 거기 살 걸로 이렇게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 부분 그 말씀 설명을 안 해서 다른데 보는 것만큼 흥미가 없습니다.
그래 덮어둬두면 그래 부활해서 다시 만난다고 얘기들 하는데 이것들을 선생님 하나도 못 봤어요. 주님께서 꼭 그 말씀 했습니다. 부활해서 영생하는 나라에는 죄다 천사와 같다. 죽음이 없다. 천사와 같다. 혼인할 걱정이 없다. 딸은 연애할 걱정이 없다. 이게 참 사는 거 아닙니까? 참 올바로 사는 거 아닙니까? 참 성경의 귀한 말씀입니다. 아버지의 아들이다. 어머니 찾지 않는다. 영혼에 어미가 어디 있는 거 아니에요. 없어요. 이 세상에 나왔다가 잘못 중간에 너무 고적하니까 그리고 혼자 고독하게 살지 말고 쪼개서 둘이 되어가지고 마주보고 이야기 하면서 살라고 이것이 시험받는 거예요. 그 성가시게 내외 맞아서 짝이 맞아서 아들 딸 낳아 기르고 가르치고 하다가 다 늙어서 그만 꼬부라져 죽어버리고 할 텐데 죽어서도 살아난다. 다시 살아나면 영생한다. 영생하면 계속해 살 텐데 그거 누구 여편네가 되고 누구 사내가 또 되나? 그렇게 좋게만 생각하면 살만 큼 살았다고 합니다. 큰 마누라 있고 작은마누라 있고 남편 있고 처음에는 없어도 되는데 나중에는 죄다 회개해서 교인이 되고 세례 받고 간다고 합시다. 그 집안 식구가 다 구원 얻지. 다 부활하고 영생하지. 하나도 빠질게 없습니다.
그런데 그때 어떻게 되냐고? 그때 누구 여편네가 되냐고 묻지 않아야 될 텐데 또 삼각형으로 산다고 그걸 안해야 할 텐데 이걸 잘 못합니다. 그러니까 그 이야기 할 적에 주님이 하실지. 사두개인이 대답할지, 하나님이 사망의 하나님이냐? 생명의 하나님이냐? 그 말씀 보셨어. 아 생명의 하나님 산자의 하나님이지 죽은 거 걱정하는 하나님이요? 그래 사두개인이 할 수없이 생명의 하나님이다. 그럼 우리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다. 그랬어. 벌써 그 말씀하면 다시 또 반대할 수가 없어. 왜? 아브라함 죽었어도 영생할거예요. 부활해서 영생해. 이삭도 죽었어도 부활해서 영생할거야. 야곱도 죽었어도 부활해서 영생해.
그래 생명의 하나님이라고 하다가 죄다 부활해서 영생한단 말이야. 그래 설명이 길고 뭐 할게 없어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이라는데 아브라함 이삭 야곱 이 죽어 부활 영생한다는 말입니다. 그 꼼짝없어, 어떻게 할 수 있습니까? 그래 누구 여편네가 되요? 이게 부활하는데 천사와 같아. 천사가 여편네 있다는 소리 없어. 무슨 걱정하고 있냐는 거야. 그저 부활 영생만 믿으면 되는 줄 아는데 안 돼. 아버지 아들이 되어야 죽음이 없이 사는 겁니다. 그게 참 사는 거예요. 이건 사는 흉내 내는 거지. 이건 참 사는 거 아닙니다. 좋은 말씀입니다.
아버지 아들, 그럼 본디가 어머니가 없는 아들이에요. 어머니 없이 생긴 아들입니다. 그런데 어머니가 낳는 건 다 아니까 어머니 아들인거 아니까 이 동양에서는 아버지가 분명히 있어야지. 아버지가 나타나지 않으면 그것은 안 됩니다. 뉘 아들인지 알아야지. 그 낳은 어머니 아들이지 예수 태어날 때에 아버지를 알아야지, 아버지를 모르면 안 된다는 거야. 그 아버지가 누구냐? 그 어머니는 알고 그 아버지를 모르면 그건 짐승이라고 그랬어요. 그 아버지를 모르면 짐승이야. 낳기는 어머니가 낳았건만 아버지가 반드시 나서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어떻게 된 것이 지금 복지국가 소리를 듣는 북구의 대여섯 나라 그 나라 어머니가 낳아서 기르는 자녀는 많은데 아버지는 누군지 모르는 집이 많습니다. 동양 같으면 어머니는 알고 아버지를 모르면 금수다. 그랬는데 지금 문명하는 사람은 어머니가 낳아서 길러서 가르쳐서 지나가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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