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가리에서 버스로 한림에서 차를 갈아 타고 해수욕장과 수목원을 보고 마중 나온 승용차로 가서 예은이와 이레와 함께 제주 4.3 항쟁 기념관을 보았다. 마침 수학여행 온 대학생들과 영상과 기념관을 보고 나와 아이들과 주변 정원을 보고 돌아왔다.
동광원 초창기, 헌신짝.
1982.08.11. 김준호 선생
이 선생님께서 하신 말씀을 어느 분이신지 속기를 하셨는지, 이렇게 종이에 써놓은 말씀을 어제 밤에 형제를 시켜서 찾아오라 해서 한마디 읽겠습니다. 누구나 자기마음에 스스로 선생이라는 생각을 하지 말 것입니다. 모든 대중들은 겸손하시어 자기를 선생으로 봐주는 것뿐입니다. 선생이라고 불러지는 뜻마저도 품었다면 그 마음도 버려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말씀하신 다음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들이여, 성령의 눈으로 보시고 이 저의 과장된 점을 지적하여 주십시오. 저는 모든 사람에게 선생이라고 선생이 아니라고 역설하옵니다. 저는 죄인의 한사람으로서 구원을 갈급하며 애걸하면서 살려고 합니다. 저는 허울 좋은 선생이라는 너울을 벗어버리고 싶습니다. 길가에 벗어던져진 헌신짝이 부럽습니다. 저는 이 몸을 떨어진 짚신같이 아무데나 끌고 다니던 도적이요, 음란자요, 간음자임으로 헌신짝으로 알아주시는 것은 사랑이십니다. 그만큼 누가 속기를 했는지 말씀이 남아있습니다. 그 말씀에 준해서 본인이 말씀했는지 들리는 말씀인지 이런 설화가 있습니다.
해방이 된 후에 삼등열차하면 대개 아실 것입니다. 콩나물같이 서울을 그렇게 기차를 타고 가던 시절이라고 생각합니다. 광주에서 타셨던지 대전까지 가시면 자리를 양보하시다. 양보하시다 급기야 승강구까지 밀려나오셨다 합니다. 볼품은 초라하시고 땔나무꾼인지 옆에 신사가 와서 ‘저만큼 비켜요, 저만큼 비켜서요.’하면 앉아계시던 자리에서 밀려나오기 시작하면 승강구까지 밀려나와서 거기 앉아계셨다고 합니다. 그 대전에서 누가 올라오셨는지 농부 한분이 승강구에 걸쳐 앉았다가 우리 인사합시다. 저는 ‘아무 개올시다.’ 저쪽에서 그러셨답니다. ‘댁의 성명은 무어요? 왜, 말이 없습니까? 성이 뭐요?’ ‘헌 가올시다.’ ‘이름은?’ ‘신짝이오.’ ‘헌신짝? 에끼, 여보시오.’ 본인이 항상 쓰시던 말씀은 저는 헌신짝이다. 나는 헌신짝이다. 그렇게 참회의 눈물을 흘리시던 분이다. 고 우리는 옆에서 보고 있었습니다.
그 선생님 말씀을 옆에서 들었던 것 봤던 것을 어제 밤에 조금 생각난 대로 지금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처음 뵙기는 한 23살 무렵에 광주에 YMCA강당에 노숙, 그냥 돈이 없기 때문에 찾아들었습니다. 하루 밤을 잦는데 청년들을 가르치는 새벽 기도회가 있었습니다. 청년이 7-8명 모 인 기도회시간인데요. 누구신지 아마 그때 처음 이 선생님께서 그 방에 오셔서 청년들에게 새벽 성경말씀을 가르치신 시간인 듯합니다. 누가복음 1장 읽으세요. 그러시더만요. 청년들이 나누어서 읽었습니다. 성경말씀은 한마디도 말씀안하시고 시간이 그쳤습니다. 제가 이곳에 오다보니까 길가에 나무를 패 때시고 도치를 내버렸는데 그 도끼를 다른 사람이 밞으면 발이 상합니다. 성경을 배우시려는 여러분이 자기가 땔 나무 자기가 쓰는 도끼하나도 제자리에 두지 못하는 사람에게 성경은 무엇 합니까? 마치 봄비와 같아서 성경말씀은 봄비와 같습니다. 이 봄비가 산 나무에 떨어지면 생명을 키우지만 썩은 나무에 떨어지면 고목은 더욱 썩습니다. 그렇게 아주 잔잔하고 목소리가 안 들릴 만큼 가슴에 쿡쿡 울리는 것은 처음 들었습니다. 그리고 일체 성경 한절도 해설 안하시고 마음가짐을 바로 하라는 말씀으로 한 30분간 말씀하시고 끊으신 것을 들었습니다. 처음 인상, 처음말씀이 꽉 박혀있습니다. 성경 말씀을 배우는 태도를 마음에서부터 바로 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성경을 배워서 어디에다 쓰시겠습니까? 성경은 바른 사람 바른 마음을 가진 사람에게 필요하지, 그릇된 마음을 가진 사람은 성경을 배우므로 더욱 그릇된 사람이 됩니다.
그러시고 또 한 번 모임이 있어서 참석했었습니다. 선생님은 성경을 읽기만 하시지 해석을 하신 시간은 얼마 없었다고 생각이 듭니다. 이렇게 서론을 말씀하시기 시작했습니다. 일정시대에 우리 한국에 부잣집 아들들이 약 7명이 동경제국대학 의학과에 입학을 했었습니다. 그런데 7명이 다 졸업반이 되어서 고향 여름방학에 왔을 때 우리 한강에 목욕을 가자. 그렇게 마음을 정하고 7사람이 한강에 목욕을 갔었습니다. 그런데 때마침 인천에서 서울로 오는 똑딱선 배가 다가 왔습니다. 그런데 물이 적었던지 여울에 고물이 걸려가지고 전복이 되었습니다. 그때 장정들은 헤엄쳐 나왔지만 부인들 애기들은 물에 떠내려가고 있었습니다. 그 때 그 졸업 금년 12월이면 졸업할 의학생이 옷을 벗어던지고 물속에 들어가서 사람을 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한사람 두 사람 건질 때마다 여섯 친구는 쫒아가서 그만하라. 자네는 앞으로 의사가 될 몸이야, 죽으면 개죽음이네. 여섯 사람은 굿만 보았다고 합니다. 나 붙잡지 말아요. 나 붙잡지 말아요. 이렇게 친구들 손을 뿌리치고 일곱 번째 들어갔다. 여섯 사람은 건져냈지만 일곱 번째 사람을 건질 무렵에는 자기가 힘이 진해가지고 애기를 밖으로 밀어내고 애기를 마지막 건져내고 자기는 물살에 떠내려갔다고 그럽니다.
그래 여섯 친구들이 밧줄을 던지고 동원해서 겨우 물밑에서 건져냈을 때 이미 정신이 나갔다고 그럽니다. 인공호흡을 시키고 의학생들이니까 살렸습니다. 숨을 몰아쉬면서 눈을 떠볼 때 어떻게 그 얼굴이 평안한지 천사와 같이 숨을 몰아쉬면서 내가 기쁘게 내가 기쁘게 사람을 건지던가? 그렇게 질문을 하더라, 그래요. 아, 자네는 기쁘게 최후의 한순간까지 자네 힘을 다하고 사람을 건졌다네. 아주 기뻐서 빙그레 웃으면서 심장이 탁 멎으면서 다시는 깨어나지 않았다고 그 말씀하시면서 여섯 친구들이 내 친구는 개죽음했네. 이 내 친구는 개죽음했네. 이러고 친구들이 공동묘지에 묻어 주고 결의하기를 우리는 좋은 의사가 되세. 이런 개죽음 말고 의사가 되어서 불쌍한 사람 쪄눌린 사람들에게 우리는 좋은 일 하세. 이렇게 갈렸답니다. 십년 후에 다시 모임이 있어서 한강 뚝에 모였을 때 여섯 사람이 그때는 개죽음이라 하던 자기 친구에 대해서 그는 성인이었어. 그는 참 죽음을 했네. 우리는 십년동안 돈 벌어서 자선을 하자했지만, 내 양심상 나는 한 병자에게도 내 눈물을 주어본 일이 없네. 그러니까 여섯 사람이 다 같이 자복하기를 나는 한 번도 불쌍한 사람을 내 몸같이 약한 번을 줘본 일이 없다고, 그러고 참회의 눈물을 흘리면서 자기 친구의 이름을 찬미했다. 그런 말씀을 하시면서 사람이라는 것이 일평생 예수님을 믿고 일도하고 하겠지만 제일 귀한 것은 순수한 사랑이다. 요새 드린 말씀이 순수한 사랑을 하라는 것으로 들었고요. 믿음도 순수한 믿음을 가지라. 그런 말씀으로 들었습니다.
이렇게 말씀을 덧붙였습니다. 일을 많이 하고 무작정한 것보다 이렇게 최후의 일각을 다해서 생명을 바친 청년처럼 일을 적게 해도 질적으로 하라. 진실하게 하라. 생명을 바쳐서 사랑하라. 그렇게 교훈하셨습니다. 인제 그런 말씀은 초기에 제 나이 23세 무렵에 들은 말씀입니다. 그리고 작년에 선생님 슬하에서 지내다가 결혼하시고 자녀를 낳으시고 엄마가 되어서 참 서로 떨어졌다가 옛날 같은 선생님 밑에 공부하던 자매님이 근년 잠깐 말씀해줬어요. 제가 8세에 어머니 따라 선생님을 처음 봤었을 때 여기 구름다리였다고 그럽니다. 요 밑에 마을 운교리, 그런데 ‘아, 예수 믿고 싶어요?’ ‘예수 믿고 싶지?.’ ‘예’ 아, 좋은 사람이라고 칭찬한 다음에 ‘예수 잘 믿고 싶지? ’예.‘ 그러니까 ’그러면 오늘 아침에 밥을 얻어오세요.‘ 그게 처음으로 선생님의 교훈이라고 여덟 살 먹은 소녀에게 전도사로서 처음만나 가지고 예수 잘 믿고 싶어요? 네, 그러면 오늘 아침 밥 얻어 오세요. 그래서 어린 소녀의 마음에 선생님 말씀에 순종을하고 밥을 얻으러 갔다고 그럽니다. 밥을 얻어왔을 때의 기쁜 마음 어린마음에 그때 학교 다니다 왔는데 부끄러움도 없이 선생님의 말씀대로 밥을 얻어오니까 어떻게 이렇게 마음이 기쁠까? 어린마음에 하늘을 나를 것같이 해방감을 느꼈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바른 선생님의 마음이 무슨 뜻인지 모르고 제가 결혼하고 이렇게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지금도 그리운 것은 여덟 살 먹어서 구름다리에서 선생님을 만났을 때 밥을 얻어오세요. 하시던 그 음성이 귀에 쟁쟁합니다.
그 말씀을 거슬러 올라가지고 작년도에 들은 말씀입니다. 그러면 그 소녀도 여덟 살 먹어서 처음에 만났을 때 예수 믿으란 말씀 안하시고 예수 잘 믿고 싶지? 그러면 밥을 얻어오세요. 그렇게 교훈하시던 선생님 이십니다. 또 제게 대해서 이제 예수님 믿고 싶습니다. 라고 찾아왔을 때 그럼 잘 믿는 분 한분 소개하지, 그래 지금 오 장로님을 소개하시고 나는 믿음이 없지만 이분은 잘 믿어요. 나 본받지 말고 이분을 본받으시오. 그렇게 소개하는데 제 마음에 이 선생님은 선생님 같은데 오 장로님은 예수 믿는 것 같지 않아요. 왜? 목수니까 목수를 따라가서 목수일 배우라는데 아무존경심 없었습니다. 이분은 목수인데 예수를 믿고 싶은데 나를 목수한테 쫌매 놓으셨을까? 이러고 한해이태 여름을 장롱을 짜는 곳으로 일을 가셨습니다. 선생님을 선생님이라 했지 정신을 지도하시기 위해서 일 년이면 3일 5일이나 옆에 있었지 같이 있지를 못했습니다. 그러니까 한 일주일후에 찾아오셨습니다. 저는 오늘 장흥에 계신 친한 목사님이 계세요. 장흥까지 다녀올까 합니다. 그럼 장흥으로 넘어가는 큰 재가 거기 있습니다. 그런데 하루 세 때 밥을 목수일이니까 고깔 밥을 가져옵니다. 선생님은 종일 밥을 안 잡수시지요. 옆에 앉아계셔서 침을 늘 삼키세요. 침을 늘 삼키고 굶고 계신데 오 장로님은 염치가 있으시니까 세수 저 잡수시고 딱 수저를 놓으세요. 저는 젊은 청년이니까 배가 고프니까 꿀떡꿀떡 삼키면 당체 더 먹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그 밥을 세끼 여섯 그릇 아닙니까? 여섯 그릇을 싸가지고 도구박 골에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계십니다. 수레기 아버지 수레기어머니 그런 분들 그걸 싸가지고 가시고 또 오시고 매일 밥을 싸가지고 주시고 오시고 그런데 비는 많이 오는데 밥상이 막 들어와요.
수저를 들고 밥을 막 먹으려고 하니까 ’준호, 밥을 얻어오세요.‘ 청천벼락 같습니다. 밥을 얻어오라고 그래 당황해가지고 우물쭈물하다가 배는 고픈데 밥은 먹어야겠는데 밥을 얻어오라니 불안해서 밥을 얻으러갈려면 무언가 가져가야 할 텐데 빈손에 푹 뛰어나가, 나가니까 저 집으로 가라고 집까지 가르쳐줘요. 장롱 짜는 집의 작은집입니다. 거길 갔어요. 비가 막 쏟아지는데 마당에서서 밥 얻으러 왔습니다. 이거 목구멍에 걸려서 안 나와서 개미만한 소리로 밥 얻으러 왔습니다. 하고 서있으니 영문을 모르지 않아요? 그런데 갓 시집온 그 집 며느리인데요. 깨끗한 젊은 부인이 놋그릇에 뚜껑을 덮은 무엇을 하나 가지고 오는데 가지고가세요. 그래서 밥을 안줄 줄 알다가 주니까 너무 감사해서 감사합니다. 그 부인이 엄숙하게 왜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고 사람보고 감사해요? 청천벼락같이 부인이 말씀해서 쏜살같이 가지고 왔습니다. 성공을 하고 오니까 선생님이 기뻐서 처음으로 얻어온 밥은 내가 먹어야지. 이리 주라고 보니까 쌀죽이었어요. 그 집은 작은집은 가난하던가보지요. 그걸 맛있게 잡수세요. 그래서 왜 이렇게 나를 예수 믿으러왔는데 목수일이나 시키고 밥을 얻으러 보내는가? 참 의심스러웠어요. 그러니 제가 오랜 된 것도 아니고 반 강제로 갔기 때문에 항상 마음이 괴로웠습니다. 그렇게 왜 밥을 얻으러 보낼까?
한 5일 계시다가 비가 그쳤습니다. 저는 장흥의 목사님한테 가볼까 합니다. 그분은 아침 굶고 점심 굶고 밤에는 수레기어머니 찾아가시고 콩 쪼금 까 잡수시고 빼빼말르셨지요. 나이가 한 설 흔 한 설흔 이세인가 삼세인가 될 때인 것 같은데요. 가시면 오후에 돌아왔어요. 그냥 가다가 돌아왔습니다. 그러시며 가다가 보니까 뱀이 한 마리 죽어있고 구데기가 득실득실하고 쪼금 더 가니까 멧돼지가 한 마리가 모가지가 덫에 걸려 올무에 걸려가지고 썩었는데 아주 구데기가 득실득실한 걸 봤습니다. 가다가 곰곰이 생각해봤습니다. 뱀아, 어디가다 사람 발에 밟혀 죽었니? 물어보니까 제가 개구리를 잡아먹으러 가다가 이렇게 죽었습니다. 돼지야, 무엇 때문에 내려와 덧에 걸렸니? 제가 먹을 것을 찾다가 덫에 올무에 걸렸습니다. 그러는 것 같습디다. 그러면 현필아, 너는 뭐하러가니? 밥 얻어먹으러 갑니다. 내가 이 밥을 얻어먹으러가는 꼴이 나도 돼지같이 되겠다 싶어서 부끄러워서 다시 돌아왔습니다. 그러시고 또 굶고 앉아계시고 침은 덜 삼키시고요. 그러면 밥을 옆에서 먹을 수도 없고 참 젊은 사람으로서는 선생님이 안계시면 좋겠다. 어서 가버렸으면 좋겠다. 그 생각뿐이에요. 종일 굶고 앉아계시고 둘이 부엌에서 일하는데 내다봅니다. 이렇게 아침부터 오후 한 세시까지 이러고 앉아계신데 들어와서 자꾸 대패 손이 작은 대패 덜덜덜 떠니까 무서워서 선생님이 무섭게 보여요. 그렇게 그래 대패질을 못하고 대패 발이 푹푹 빠져버려요. 그래 불안한 그런 때를 지내는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끊김)
지구가 끼우뚱 하겠습니다. 종일 그 말씀 하나 뿐이세요. 의인이 지구 한 자락에 앉아있으면 지구가 끼우뚱 하겠습니다. 저는 그만큼 선생님이 무겁게 보였어요. 그때 그 말씀하실 때 지구가 끼우뚱 하는 것 같았어요. 거기가 무거워서요. 그게 처음 뵈었을 때 인상이고요. 이제 살아가면서 그런 무렵을 거치고 바야흐로 8월 달이 접어드는데 기독청년 YMCA주최로 여수에서 하련회 8월 1일부터 연다는 것을 듣고 그러니까 깊은 산중에 있는지가 오래 되어서 옷은 해어지고 허리끈도 없고 신도 없고 머리도 못 깎고 그런데 날씨로 봐서 초하루가 가까워서 그냥 불이 난 듯 거기를 가고팠어요. 가고 보니까 송 창근 박사님 또 김 재준 목사님이 강사로 와계시고 사회자가 지금 여기 원장님 정 인세씨, 처음 본 분들이지요. 그러니까 일주일 동안 말씀을 들어도 처량해요. 영혼에 아무 도움이 안 되어요. 그런데 그때 무전여행이니까요. 처음으로 옛날 선생님이 강제로 밥을 얻으라 했지만 처음으로 배가 고프니까 밥을 얻으려고 생각할 때 보성 가서 아침부터 걸어가니까 일곱시 여덟시 아홉시까지 마을을 다섯 번 여섯 일곱을 지나갈 때 자꾸 들어가서 밥을 얻어먹어야겠는데 부끄러우니까 못 가고 못가고 이제는 영영 굶겠다 싶어서 한집을 들어갔습니다. 밥 좀 주십시오. 그랬는데 아무 소리가 없어요.
나중에 부인이 상에 바쳐가지고 김치 하나에 수저하나 보리밥 한 그릇 가지고 나오셔서 그걸 먹을 데가 있어야지요. 그 사랑채 앞에서 처음으로 앉아서 거지는 어떻게 밥 먹더라 연상을 하면서 밥을 먹고 나니까 훌훌 날 것 같아요. 어디가 취직할까? 어떻게 살까? 생애에 대한 불안 처음으로 자원해서 밥을 얻어먹고 나서는 이 몸이 공중에 둥둥 뜹디다. 해방된 기분이에요. 그게 처음이에요. 그래 선생님과의 오해는 풀렸지요. 아 이래서 밥을 얻어먹으라 했구나. 배고프면 한술 얻어먹고 사는 길이 있구나. 그렇게 자원해서 자기 마음에서 우러나서 밥을 얻어먹었을 때는 진실로 생의 먹는다는 공포심 불안에서 해방된다는 그 희열을 맛보게 되었습니다. 이왕 먹는 일에 대해서 한 번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지금 살아계신 수레기어머니 돌아가신 수레기어머니 한나 어머니 두 분이서 전도여행을 떠나신 것 같아요. 그런데 최흥종 목사님이 살아계신 때 목사님 사택을 찾아가서 여기 이 선생님 안 오셨습니까? 아, 어제 무등산 넘어갔습니다. 그렇게 해서 선생님을 찾아서 청단이라는 마을서 만나 뵙고 곡성을 가시는 때인지 걸어가시는 데를 동참했었습니다. 대개 아시지만 사람이 볼 때는 신을 딱 신으십니다. 사람이 보지 않을 때는 신을 벗으시지요. 대개 여행을 새벽 두시에 일어나십니다. 세시 해가 뜰 때까지 걸어가십니다. 그러게 일정시대부터 방문하시는 게 습관이신지, 꼭 새벽에 일어나서 맨발벗고 사람이 안 보일 때 빠져나가시고 사람이 없는 들판에서는 낮에도 가시고 그렇게 가시고는 곡성을 한 3일 만에 가셨는가 봐요.
그래 맨발벗고 따라가는 처음길이라 어떻게 발이 아프고 불이 나는지 절뚝절뚝하며 따라가요. 그렇게 따라가서 종일 굶고 한 3일 굶다시피 하고 돌아가신 서 집사님 부인 여기 오셨습니다. 서 집사님 댁이 깊은 산중에 일정시대 신사참배 반대로 숨어계신 분이니까 그 막에 당도한 거 같아요. 밤중입니다. 밤에 굶고 서집사님 부인이 손님들이 네 분 아닙니까? 저까지 밥 네 그릇을 이렇게 담아왔어요. 어머니 두 분 옆에 계시고 선생님 옆에 계시고 저 있고 세분은 본래 안 잡수십니다. 저 혼자 밥을 먹으려고 수저를 딱 들려고 한 수저 입으로 들어가려고 하는데 준호 밥 먹고 싶으면 여기서 오리나 내려가면 마을이 있어요. 밥을 얻어오세요. 그때는 3일이나 굶고 밥은 김이 나는데 눈물 떨치고 먹어버렸습니다. 아주 귀를 딱 막고 그리고 남원을 가신다고 서 집사님도 따라나섰습니다. 저도 따라가겠습니다. 가십시다.
준호는 밥 먹었으니까 이 밭을 파요. 밭이 한 3백 평 되어요. 그래 따라 갈 길을 못 따라가고 삼백 평 밭을 팔라니 막 울었습니다. 서러워 죽겠어요. 따라가지도 못하고 이 밭을 파기 싫으면 광주로 가요. 광주로 갈라니 여비도 없어요. 맨발벗고 걸어갈 일을 생각하니 참 까마득해요. 그렇게 세수를 하면서 울었습니다. 눈물인지 세수를 하는지 울었습니다. 처음으로 삽을 들고 삼백 평 밭을 파는데 죽을힘을 다 썼지요. 서 집사님 부인이 유난씨신데 이제는 들깨 씨를 가지고 오세요. 고사리 필 때에요. 그러니까 들깨를 다 뿌리시고 한주먹 남기시고 이걸 자셔보세요. 들깨 한주먹을 먹을 때 참 어떻게 꿀같이 단지요? 배가 고프니까, 그런데 선생님이 따라오라고 안했기 때문에 여기 밭 파고 살라는 뜻이지요.
한 오일동안 양식을 가져다 주셔서 끓여먹고 있는데 참 앞길이 캄캄해. 그런데 사무엘이라는 소년을 보냈어요. 열두 살 먹은 소년을, 형님 오라합디다. 어떻게 감사한지 그래 남원에 가서 뵈었지요. 여기 서리내산 서리내산에서 뵈었는데요. 서로 인사도 없지요. 그냥 서로 교제를 하고 왜 왔느냐는 말도 안하고 참 냉담해요. 그런 교제를 하는 때에요. 종일 회개하라는 성경말씀 보셨으니까 제가 회개가 됩니다. 학교 다니다 선생님 돈을 삼천 원 빌려서 썼거든요. 선생님 돈도 갚아야겠고. 옷 해 입다가 옷감도 갚아야겠고 고향에 청산하고 돌아올 생각으로 밤중인데 선생님 고향에 다녀오겠습니다. 그랬어요. 해남 놈은 간삽다(간사하다). 억울하기도 하고 무섭기도 하고 갈라면 지금 가시오. 깊은 서리내 아십니까? 깊은 산중에서 해는 다 졌는데 갈라면 지금가라. 그래 안가고 배기겠습니까? 있으면 좋겠는데 순진한 사람이 가고 싶으니까 나서버렸습니다. 선생님 따라다녀 봐야 매일 굶기나하고 회계하려고 고향에 간다는데 이제는 간삽다(간사하다). 그러는데 저를 인도하신 목사님 음성이 들려요. 이 현필씨도 사람이다. 너는 예수를 믿는 사람이니까 선생님의 장점만 참고하고 단점은 본받지 말라. 그걸 최후에 목사님이 일러주셨거든요. 아 선생님의 단점이다. 알고 내가 저 선생 용서해야겠다. 선생님 용서합니다하고 나섰지요.
달이 떴습니다. 15야 달밤 달을 한 오리길이나 달을 보고 내려오다가 처량하기도 하고 눈물도 나기도하고 달을 쳐다보다가 선생님이 잘못했어. 제 생각에 나는 회계하러 간다고 하는데 ‘간삽다’ 고 하는 건 잘못이야. 내가 선생님을 용서해야지. 입을 벌리고 달을 꿀떡 삼키고 나니까 어떻게 마음이 편한지 그렇게 하고 내려와서 고향을 다녀왔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쯤 여러분들이 이 선생님을 오늘 만난다면 저같이 합격하려면 아직 멀었어요. 인정사정없어요. 나중에 한 10년 후에 저 보고 그래요. ‘준호, 내가 너무했지?’ 그 말씀뿐이에요. 내가 너무 했다고 그게 엊저녁에 생각났고요. 어제 밤에 생각났습니다. 또 그리고 하나요. 인제 서울서 현 동완 선생님이 그때는 동광원이 아니지요. 이름도 없는 때니까요. 지금 YMCA관계로 정 총무를 찾아오셨는데 접촉은 정 원장님이 이 선생님을 소개해서 서로 서먹서먹하시지 않습니까? 그런 때인데 이 선생님은 누구신지 모르지 않습니까? 감나무 밭을 나무 농장으로 가꾸는데 꼭 내 전답이상 감나무뿌리를 파고파고 새벽에 잠이 들지요.
젊은 청춘에 예수 믿고 나온 사람들 첫날부터 똥구루마를 끌고 시내로 가라고 아주 스물한 살 스물두 살 젊은 처자들 보고 시내 가서 똥푸러 가라. 반듯이 새벽에 가가지고 똥푸고 오지요. 그것이 일 년 열두 달 일과, 자기 집에서는 그렇게 금싸라기같이 키우던 딸일 텐데 선생님한테 와 버리면 떨어진 옷 입고 똥 펐습니다. 그러니까 그것을 볼 줄 아는 눈이 현동완 선생님 눈입니다. 저것은 똥 수레가 아니다 이 민족이 썩지 않기 위해서 뿌려진 소금이다. 저 소금 섬이 저 소금 섬이 저 소금이 녹는 날에는 우리나라도 희망이 있다. 그래서 그 똥 수레를 끌고 다니던 젊은 처자들을 보시고 현 동완 선생님이 미쳐버린 겁니다. 아주 희망이 있다. 그건 선생님이 그렇게 아주 인정사정없는 분이시니까 고운 옷 입고 오면 탁 벗고 누더기입고 똥 푸라고 하면 아무 말도 안하고 펐어요. 그게 선생님의 정신이었지요. 이 선생님은 몰라봤지만 똥 수레를 보시고 아주 감탄하셨어요. 시를 지어서 읊었는데 이 시간에 못 찾았어요. 그건 그런 생각이 하나 났고요.
다 잊어버렸는데 어제 선생님께 대해서 본대로 말해보라. 그러신다고 하길 레 어제 밤에 생각이 난겁니다. 또 하나 이런 생각이 납디다. 갈보리 갈보리산 노래있지 않습니까? 서리내 그 월칙인가 해방 전 일정 말 그 무렵에 오북환 장로님 만나시고 거기서 동광원 초창기지요. 발상지 아니겠습니까? 서리내 계신데 그 여세를 몰아가지고 30대 젊은 청춘에 곡성 김광석 지금 장로님입니다. 김 공님 이시지요. 김 공님이 30청춘에 출가를 한 겁니다. 그러니까 오감산이라고 지리산 오감산에 막을 치고 계셨습니다. 그때 상황을 들어보면 밭을 파가지고 콩과 옥수수와 밀 호밀을 갈아버리면 꿩이 다 먹어버리고 호밀만 조금 지었답니다. 무 조금되고 그러면 절구통도 없고 그래서 해먹는 법을 발견했는데 무 또 무 잎 호밀 이것을 삶아가지고 얼려버린답니다. 한번 언 것을 돌로 쿵쿵 찧으면 잘 풀어진답니다. 그걸 하루에 한 끼씩 잡수시고 계실 때였는데 눈이 얼마나 왔는지 허리가 빠지도록 눈이 쌓였답니다. 그 겨울에 그러니까 젊은 청춘에 자기를 닦는 법이 있지요. 새벽 4시에 냉수마찰 꼭 눈길을 치우고 냉수마찰을 하기위해서 새벽 한시나 두시에 깨어서 냉수마찰하고 이렇게 막에 들어오면 막 속에 눈이 쏟아진다고 막이 새서요. 막 속에서 이불을 덮어야 이불로 몸을 가리고 앉아서 그렇게 져놓은 막이하나 있었답니다.
그런데 새벽냉수마찰을 끝내고 와서 기도를 하고 있으니까 산꼭대기에서 찬송소리가 들렸답니다. 이 눈이 이렇게 허리 닿게 무릎 팍이 차도록 눈이 왔는데 깊은 그 산중에 사람이 올리는 만무하다. 그래서 자기 같은 죄인 나 같은 죄인을 위해서 천사를 보내서 찬송을 불러준다 싶어서 퍽퍽 울었다는 겁니다. 감격해서, 세상에 나 같은 죄인을 위해서 찬송을 불러주시다니. 그리고 엎드려서 울고 있는데 노크, 문이 있는지 없는지 ‘김 공, 계시오?’ 문 열어 보니까 이 선생입니다. 그런데 다리가 벌써 얼어가지고 뻣뻣했는지 턱 걸터앉으면서 ‘따슨 물 좀 주세요.’ 목이 맥히더라 그래요. 속이 얼었든지, ‘네’하고 빨리나가서 불을 때고 아까 참에 자기가 먹던 지붕위에 얹어놓았던 시래기 하고 호밀 찧어놓은 걸 한주먹 넣고 푹푹 쪄가지고 가져다 드리니까 마시고 ‘아이고 이젠 살겠소.’ 그런데 이 품속에서 부스럭 부스럭 소리가 나는데 쑥떡 두 개, 세 개인지 개수는 알 수 없어요. 오늘 초저녁에 저를 이걸 먹으라고 가져다줘서 서리내 산중이지요. 깊은 산막에서 이걸 먹으려고 생각하니 김 공 생각이 나서 가져다주려고 왔습니다. 그렇게 해서 김 공님이 직접 말하니 감개무량하지요. 목이 맺히지요. 그게 쑥떡이겠습니까?
그런데 따라간 분이 자매님이 한두 분 절대 남녀 분별하니까 옆에 가도 못하는 선생님이지만 깊은 산중에 눈길을 가니까 몰래 따라간 사람이 있었다고 그래요. 멀리서 혹 쓰러지시면 구원하려고 그런데 눈이 그렇게 많이 온 겨울 엄동설한 밤중이지만 신을 딱 벗으시더라 그래요. 눈 속에서 평상시와 같이 신을 벗고 맨발로 가는데 물론 자매들도 벗고 갔겠지요? 안 물어봤지만, 그러니까 물론 처음에는 아프지만 죽어버리지요. 발이 그러니까 나무덩어리가 되어가지고 턱 쓰러지더라고 지금으로 물어보면 30리 더된다는데요. 그 거리가 이 능선을 넘어 가는 길입니다. 서리내 산 능선에서 오감산 능선까지 가는 게 능선 길은 대개 사람이 다닌 흔적은 있지요. 눈 온데니까 그러니 초저녁에 나서서 새벽 2시 3시경에 거기에 오셨겠지요. 지금도 김 장로님은 그 일을 생각하면 우십니다. 감격해서, 그래 나는 그런 사랑을 받은 이후에는 한 번도 뒤돌아볼 마음을 생각해보지 않았답니다. 내가 어떠한 사랑을 받은 사람이냐? 그리고 한 번도 뒤돌아본 일이 없다는 그런 말씀을 서울서 오신 수녀 한분이 들으시고요. 아, 나 이제 여러분들의 생활을 알겠다. ‘이 현필 선생님은 무아의 삶을 살은 분이다.’ 라고 정의를 내렸다. 그랬어요. 나는 우리는 무엇인지 모릅니다. 아 이 현필 선생님은 무아의 사랑을 하신 분이었다. 그래 우리 선생님은 무아의 사랑을 하신 분이었구나. 그쯤만 이해하고 있습니다. 또 그런 생각이 엊저녁에 생각이 나서 그런 말씀 드렸습니다.
눈 이야기가 나왔으니까 한 말씀 더 드리겠어요. 육이오 때 다른 사람들은 다 광주로 나가기도 하고 최후에 혼자 계시지요. 산속에 그 막도 눈이 새요. 막 속에도 이불을 덮어야 눈을 안 맞는 막인데 저는 옆에서 고집을 부리고 광주로 가라해도 안가고 옆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랬습니다. 저는 배고픈 걸 못 참으니까. ‘준호, 소원이 무엇이오?’ ‘밥 한번 먹고 죽고 싶어요.’ 그러니까 너무 굶은 지가 오래되니까 동정심이 가기는 가지만 나는 굶어 죽는 것이 행복해요. 나는 총 맞아 못 죽어. 나는 병들어 못 죽어. 굶어 죽는 게 제일 좋아. 굶어보니까 아무 생각 안 나지 않아? 밥 생각뿐이고, 아무 잡념 없고 좋다고, 나는 굶어죽고 싶다고 또 뭔 소원이 나는 밥 한 그릇 먹고 죽고 싶어요. 자꾸 선생님 마음을 동요시켜가지고 나올 맘 없지만 그래봤습니다. 나는 광주로 못가. 내가 사람들을 죽이고 죄인이요. 나는 광주로 못갑니다. 그래요. 나는 여기서 굶어 죽는 게 좋아요. 그래 올수 갈수 없어요. 화학산 일대 전라남북도 인민군이 다 몰려들었습니다. 최후에요. 빠져 나갈 길은 없지요. 거리에 다 보초가 서있고 다 불 질러요. 그러니까 꼭 그 막에 숨어서 굶어죽는 길 밖에 없지요.
이 총 맞아 죽으면 저 사람 죄짓고 나 괴롭고, 총 맞아죽기 싫다고 그래요. 나는 죄인이야, 나는 광주 못갈 사람이야, 나 광주 못가. 그래 나는 광주 갈 욕심으로 하루 밤 꾀를 냈습니다. 선생님 광주가 부끄러우면 저 바람은 안 부끄럽습니까? 저 새소리는 안 부끄러워요? 대체 그렇고만. 그러십디다. 그래도 광주는 안가시겠다고 합니다. 내가 무슨 염치로 광주 가냐고 이왕 여기서 가는 거 면 지리산으로 가고 싶다고 소리 없는 곳으로가 굶어죽겠다는 것입니다. 제가 시끄러워서 그랬던지 그러니까 자꾸 제가 밥 먹고 싶다고 충동하는 바람에 크리스마스 전에 눈이 많이 왔어요. 크리스마스 한 일주일 남기고 12월 달에 그렇게 눈이 많이 왔어요. 그런데 빠져나갈 길은 없습니다. 그때 소재 일대로 등광리 일대로 있지요. 그러니 가면 죽는 겁니다. 그러나 하도 이렇게 밥 먹고 싶다고 그러니까 이제 양보하신 겁니다. 초저녁에 전부 그 유격대에 쫒기 던 이가 와서 신을 주어버렸기 때문에 신도 없어요. 그러니까 그 청년이 벗어 놓고 간 짚신이 있는데 그 짚신을 신어도 안 되어요. 걸레뿐인데 걸레요. 두 발을 쌓았지요. 저는 신이 있으니까. 여자 고무신 한 짝 남자 고무신 한 짝 신고 저는 발이 안 시럽지요. 선생님이 퍽 나섰어요. 초저녁에 나설려고 하는데 모진 잠이 숨어 있으려니 곤했던지 일어나서 보니까 새벽이에요.
그러니까 도구박 골에서 동구마을로 내려섰지요. 아시는 분은 아십니다. 신악골로 넘어가서 산으로 넘어가고 길을 피해가지요. 선생님은 길을 잘 아시니까 길을 따라 돌아가시려고 하십니다. 저는 청년이라 급한 대로 길을 모르니까 눈에 보이는 이렇게 넘어가면 한일자로 꺾었거든요. 선생님은 앞서시고 저는 뒤따라갑니다. 뒤에서 선생님 가까운데 이리갑시다. 앞서세요. 숨을 죽이고 가는데 앞서라고 제 소원대로 눈만 보고 가까운 데로 나서면 길이 없지요. 한발자국도 못갑니다. 눈이 와서 눈이 무릎 까지 차버렸습니다. 그러니까 선생님이 원하는 대로 갈라면 이제는 늦었습니다. 이제는 인민군이 보초가 눈에 보여요. 그러면 선생님 말씀 듣고 순종했으면 빠져나왔지요. 보초 앞을 그런데 제가 고집부리고 선생님 이리로 갑시다. 하는 바람에 길은 막혔고 꽉 막혀가지고 오도가도 못 합니다. 그래 제 심중에 어떻게 원망스럽던 지요? 선생님이 제가 모르고 그니까 이리 갑시다. 하면 아시거든 길이 막힐 거를 아셨으니 선생님 주장대로 갔으면 우리가 살 텐데 괜히 저한테 져가지고 이제 둘이 다 죽는다. 그럼 저는 죽어도 좋지만 내 고집으로 선생님이 죽게 되니까 어떻게 부끄럽고 황송한지 딱 몸이 땅에 붙어요. 아주 절망이에요. 절망 그때 그래요. 길이 막히면 산길이 길이 막히면 가면 안 된다. 올라와야 한다. 충고하세요. 길이 없더라도 올라와야 한다. 올라와야 살지 내려가면 죽는다. 길이 없지만 막 눈에 미끄러지면서 줄을 타고 올라가니까 시내골이 나왔지요.
그래 인제 그때 너무 놀래가지고 한 십년 후에 물어봤어요. 선생님 그날 그때 선생님 가시는 대로 갔어야 우리가 사는데 제가 ‘이리 갑시다.’ 했을 때 왜 양보 하셨냐고? 그때 죽냐사냐 보다는 그것이 옳다고, 우리가 죽을 때 죽더라도 네가 원하는 대로 양보하다가 죽더라도 그게 좋지 않느냐고 그게 사랑이다. 네가 원하는데 내가 어떻게 거절하느냐? 서로 어떻게 여기를 빠져나가느냐? 생사가 맺어있는데 네가 가고 싶다는데 내가 어떻게 양보해야지, 그러니까 또 가다 길이 막히므로 본인이 깨닫고 반성하는 것은 좋은 일이라고 내가 스승이라는 놈이 이리가자고 어떻게 이야기 하겠냐? 그러세요. 죽냐 사냐하는 마당에 어떻게 서로 주장을 하겠느냐는 겁니다. 양보해야지, 양보해야한다. 그러세요. 그 면목이에요. 어제 밤에 그 생각이 납디다요. 그 선생님을 접한 것은 일 년 열두 달 두 시간 세 시간 일주 일 뿐입니다. 같이 살지 못했거든요. 잠깐 사이에 만났다가 헤어질 때 그분 심정에 흐르는 것은 무아의 사랑입니다. 절대 자기가 없어요.
우리가 볼 줄 몰랐던 것뿐이고 옆에 계실 때 무서우니까 같이 안 있지요. 선생님 어서 가버렸으면 좋겠다. 옆에 있으면 굶게 되어요. 당체 배가고파서 선생님 언제 가려는 가 눈치보고 그러게 선생님을 무서워했지 같이 있지를 못했습니다. 대체 뭘 잡수시는지요. 그렇게 펄펄 날아가시도록 길을 잘 가시지만 우리가 밥 먹는걸 못 봤어요. 그러니까 존경 안 할래야 안 할 수 없지요. 한 번도 둘이 앉아서 밥을 먹어 본일 없어요. 숨어서 먹는지 몰래 먹는지 알 수 없어요. 그러나 대체로 김 공님이 그러세요. 저분이 무엇을 먹는가 보자고 몰래요. 가만히 몰래 들어가서 보니까 3일전에 갖다놓은 보리 가루 물에 타놓고 안 먹었어요. 푹푹 쉬어있더라 그래요. 몰래 먹으면 먹을 테지, 몰래 가만히 떠들어 보니까 가루가 쉬어있더라고 그 말씀 들었어요.
돌아올때 배에서
그러니까 어찌되었든지 굶는 것도 은총이지요. 그러니까 정신이 아주, 아주 살아계셨지요. 사랑이 꽃이 피었어요. 그분 생애는요. 제 다른 사람은 안 물어 봤지만 다 그랬을 거예요. 당최 옆에 두려워서 같이 있을 수가 없어요. 그랬다가 돌아가실 무렵 한 4년 전에는 어떻게 그렇게 또 사랑스러우신지요? 절대 꾸지람도 안하시고 부드러우시고 양보하시고 돌아가시기 전 몇 년 전에는 꼭 친구 같았습니다. 그런데 그분 일생에 기적이 두 번 있었습니다. 엄격한 수련이 있었고요. 원만한 사탕보다 더 단 데가 있었어요. 아주 웃어 싸시고 기쁘게 살라고 기쁘게 살라고 춤도 추라고 하셨어요. 자매들 춤도 추라고 그냥 아무렇게나 추는 건 아닙니다. 명랑하게 살라고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또 이런 생각이 났습니다. 그 무렵인데요. 눈에 얽힌 사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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