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사년 울금 수화을 시작했다. 라오스 청년 두사람 베트남 한사람 모두 네사람이 일했으나 다 마치지 못했다. 새로 지은 비닐하우스에 임시 저장 했다.

생명으로 가는 길
1991. 6. 6
성경 시편 119편 25절~32절
내 영혼이 진토에 붙었사오니 주의 말씀대로 나를 소성케 하소서. 내가 나의 행위를 고하매 주께서 내게 응답하셨으니 주의 율례를 내게 가르치소서. 나로 주의 법도의 길을 깨닫게 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주의 기사를 묵상 하리이다. 나의 영혼이 눌림을 인하여 녹사오니 주의 말씀대로 나를 세우소서. 거짓 행위를 내게서 떠나게 하시고 주의 법을 내게 은혜로이 베푸소서. 내가 성실한 길을 택하고 주의 규례를 내 앞에 두었나이다. 내가 주의 증거에 밀접하였사오니 여호와여 나로 수치를 당케 마소서. 주께서 내 마음을 넓히시오면 내가 주의 계명의 길로 달려 가리이다.
'내 영혼이 먼지 속에 처박혔사오니 말씀하신대로 이 몸을 살려주소서. 내가 살아온 길, 열어 보임에 응답 하셨사오니. 자기 살아온 길을 하늘 앞에 열어 보일 때 하느님께서 응답을 해주셨다.' 고 했습니다.
신앙에는 고백이 있죠, 고백. 자기 나온 길이 자기 힘으로는 견딜 수 없는 그런 처참한 것을 깨달은 영혼이 자기 길을 하느님 앞에 고백할 것 아닙니까?
그래 더 평탄한 길을, 내가 수월하게 갈 수 있는 길을 주십시오, 하고 요구 할 테죠.
그런데 여기 살아온 길을 열어 보임에 응답하셨다. 아, 그 길은 네가 이렇게, 이렇게 가는 길이다, 지금 그렇게 견딜 수 없는 길은, 앞으로 더 행복한 길을 지시해주는 길이다. 그러니까 내게 지금 닥쳐있는 길, 환경을 이 감정, 정화되지 못한 감정으로는 견딜 수 없죠. 그렇지만 거기서 타락한 성품이 정화를 받으라는 시련이거든요? 그러니까 평탄한 길이 아니에요. 육으로는 신앙에는 항상 역경입니다, 역경. 그러니까 신앙으로 극복해가고 깨달아가는 겁니다. 이 감정으로는 그렇게 순탄한 길이 아니에요. 받아들일 수 없는 길이죠. 다시 봐요.
'내 영혼이 먼지 속에 처박혔사오니, 말씀하신대로 이 몸을 살려주소서. 내가 살아온 길, 열어 보임에 응답 하셨사오니, 당신 뜻을 가르쳐 주소서.‘
‘누구든지 주여! 주여! 한다고 다 하늘나라 가는 것이 아니고,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뜻대로 하는 자라야 하늘나라 간다.’ 이렇게 말씀하신대로. 이게 여기서 하느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내 뜻은 지금 막혀버렸는데. 내 뜻은 막혀야 되지요? 그래야 하느님 뜻을 찾지. 내 뜻대로 이뤄지면 하느님 뜻은 멀어집니다. 생각도 안하거든요. 그러니까 이 감정적인 욕망은, 그 뜻은 막히기 마련입니다, 신앙인에게는.
27절. ‘당신 계명 따르는 길, 깨우쳐 주소서. 주의 이웃인 기적들을 되새기리라. 나의 영혼이 괴로워 잠 못 이루오니, 말씀하신대로 나를 일으켜 주소서.’ 다시는 거짓된 길로 가지 않게 하시고,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길은 신앙계 에서 볼 때는 불행의 길이에요. 정 반대입니다. 세상에서 보는 행복과 천국에서 보는 행복과는 정반대가 돼요. 그렇기 때문에 이건 영적인 길, 영이 갈 길, 그 길을 우리 믿는 사람은 가는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생명으로 가는 길은 험하고, 좁고, 가는 사람이 별로 없고. 거의 없단 말입니다. 사망으로 가는 길은 넓고 수월하고 누구든지 갈 수 있는 길이고. 그렇기 때문에 수가 많다. 사망으로 가는 길은 뭐냐? 영이 사망으로 가는 길입니다. 육은 지금 현재는 행복 된 길이라고 사람들이 받아들인 길이죠?
그럼 하나, 성경의 예를 들면. 누가복음 16장에 부자와 나사로 비유가 있습니다. 부자는 살아있을 동안에 자기감정에 맞는 길인데, 아주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부자죠. 행복한 길이죠. 그러나 결과는 숨 끊어진 뒤로는 사망으로 갔습니다. 근데 나사로는 일평생 고난은 독차지한, 고난을 겪었는데 숨 끊어지니까 어디로 갔느냐? 천국으로 갔습니다. 아주 좁고 험한 길이야. 아무나 또 못가요. 신앙인만 간단 말입니다. 바로 믿는, 그러고도 깨닫는 영혼만 간단 말입니다. 영적인 길을 찾았어요. 그러니까 세상으로 볼 때는 나사로같이 불행한 사람 어디 또 있습니까? 부모 친척도 없고, 형제도 없고 말입니다. 단신인데 단신마저 의지할 곳도 없고. 부잣집 대문간에서, 또 식구대접도 못 받고. 한 집에 있기는 있어도 대문간에, 부자는 방에. 그렇게 틀려요. 그렇게 살았습니다. 식구대접을 안했어요. 개는 식구로 대했어요. 끼니가 되면 밥을 챙겨줬지만은 나사로는 그렇게는 대접 못 받았어요. 멸시만 받았죠. 사람취급을 안 받았습니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됐느냐? 정반대로 되죠. 죽은 뒤로는 반대로 된다고요.
그러니까, 누가복음 6장에도 있습니다. '세상의 행복, 행복과 불행'이 있잖습니까? 한번 봐요. 그 반대란 것, 누가복음 6장입니다. 20절서부터인데, 행복한 사람과 불행한 사람 그러지 않습니까? 20절서부터 보겠습니다. "그때 예수께서 자기들을 바라보시며 말씀하셨다. ‘가난한 사람들아, 너희는 행복하다. 하느님 나라가 너희 것이다.’" 하느님은 공평하신 하느님이거든요. 육적으로는, 외모로는 가난했는데 영적인 나라, 세상에서는 아주 막장으로 생활, 비참한 생활을 했는데 영적으로는 행복하단 말이야. 하늘나라는 그 사람들의 것이니까. '하느님 나라가 너희의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의 것이에요.' 굶주린 사람들아 너희는 행복하다. 너희가 배부르게 될 것이다.' 영적으로 배부르죠. '지금 우는 사람들아 너희는 행복하다. 너희가 웃게 될 것이다. 사람의 아들 때문에 사람들에게 미움을 사고, 매일 쫓기고, 욕을 먹고, 누명을 쓰면 너희는 행복하다. 그럴 때에 너희는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하늘에서 너희가 받을 상이 클 것이다. 그들의 조상들도 예언자들을 그렇게 대하였다.'
그러나 부요한 사람들아, 부요가 무엇이냐? 부요는? 가난과 부요는 어떻게 볼 수 있냐? 꼭 물질로만이 아닙니다. 가난은 겸손한 사람이고 부요는 교만한 사람입니다. 물질은 가난해도 교만한 사람이 있잖아요? 교만할 수가 있고. 또 물질은 풍부해도 겸손한 사람도 있겠죠. 믿음은. 왜 그러냐? 그 물질이 자기가 아니니까. 그러니 그 물질이 많고 적고에 있는 게 아니라, 거기에만 있는 게 아니라 마음문제란 말입니다. 가난은 겸손이라 볼 수 있는 것은 구약 이사야 61장 1절을 보시고, 밑에 란에 보시면 가난에 대해서 한번 읽어보십시오. 그리고 거기 밑에 란에 가난을 뭐라고 했는가? 읽어보십시오.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 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
그 가난이란 건 밑에 란에 뭐라고 했죠? 겸비라고 했죠? 겸비. 그러니까 가난은 꼭 물질만 가난이 없다는 것이 아니고, 겸손하다. 아주 마음속에 겸손한 생각. 그러니 겸손은 다른 사람을 높이기 위한 겸손입니다. 다른 사람을 받들어 섬기는 겸손이니까. 그러니까 부자는 교만한, 교만한 마음이에요. 나는 하느님 의지 안 해도 잘 산다. 내 힘으로 산다. 그게 교만이에요. 하느님 없어도 산다. 그렇게. '그러나 부요한 사람들아, 너희는 불행하다.' 교만이란 말이야. '너희는 이미 받을 위로를 다 받았다. 지금 배불리 먹고 지내는 사람들아, 너희는 불행하다. 너희가 굶주릴 날이 올 것이다. 지금 웃고 지내는 사람들아, 너희는 불행하다. 너희가 슬퍼하며 울 날이 올 것이다. 모든 사람에게 칭찬을 받고, 칭찬을 받는 사람들아. 세상은 이걸 원한 건데. 모든 사람에게 칭찬을 받는 사람들아, 너희는 불행하다. 그들의 조상들도 거짓 예언자들을 그렇게 대하였다.' 26절과 22절. 사람의 아들 때문에, 믿는다는 조건 때문에. 사람의 아들 때문에 사람들에게 미움을 산다. 또 내어 쫓기고, 욕을 먹고, 누명을 써요. 나쁜 놈들이라고. 도적놈들이라고. 누명을 쓰면 너희는 행복하다. 나는 양심껏 성령의 지시대로 살았는데, 하느님의 뜻대로 살았는데. 사람으로만 살았는데, 겸손하게 살았는데 욕을 해요. 아 그러면 하늘의 상이 크다. 그런 누명을 쓴다. 그러니 이렇게 안 다릅니까? 세상의 행복과 천국에서 보는 행복과는 정반대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반대. 아까 시편 돌아가요. 27절 찾아봐요. '당신 계명 따르는 길 깨우쳐 주소서. 주의 이루신 기적들을 되새기리다. 나의 영혼이 괴로워 잠 못 이루오니 말씀하신대로 나를 일으켜 주소서.' 다시는 거짓된 길, 아까 세상의 행복 된 길은 거짓된 길이에요. 영적으로는. 거짓된 길은 허망한 것이니까. '다시는 거짓된 길로 가지 않게 하시고, 당신의 법의 은총을 나에게 베푸소서. 은총. 당신의 법의 은총을 나에게 베푸소서. 진리의 길을 나는 택하였사오니 참된 길,' 생명의 길, 영생의 길, 영원히 살 수 있는 길. 영생의 길이죠. '진리의 길을 나는 택하였사오니 당신 결정을 내 앞에 내리소서.' 야훼여, 당신 언약에 내 마음을 붙이오니 부끄러운 일 당하지 않게 하소서. 당신 계명 내 마음 흡족하오니 그 길을 따라 내달리리다.' 이 길을 보여주셨어요. 또 44편에 가서, 시편 44편. 19절로 뛰겠습니다. 19절. '당신께서는 여우의 소굴에서 여우의 소굴에서 우리를 부수시었고, 죽음의 그늘로 덮으셨습니다. 아무려니 우리 하느님의 이름을 부르지 아니 하였겠으며, 다른 신에게 머리를 조아렸으리까? 마음의 비밀을 다 아시는 하느님께서 어찌 그걸 알아차리지 못하시리까? 당신 때문에 우리가 날마다 죽음을 당하며, 당신 때문에 우리가 날마다 죽임을 당하며.' 그 어떻게 그럽니까? 하느님 때문에 죽임을 당합니까? 그러니까 내 영을 살리기 위해서, 살리시려고 육적인 것을 죽이는 것이죠. '도수장의 양처럼 찢기 우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나의 주여 일어나소서. 어찌하여 잠들어 계십니까? 깨어나소서. 우리를 영원히 버리시렵니까? 어찌하여 외면하십니까? 억눌려 고생하는 이 몸을 잊으시렵니까? 우리의 마음은 먼지 속에 파묻혔고, 우리의 배는 땅바닥에 붙었습니다. 일어나셔서 도와주소서. 당신의 사랑으로 우리를 구해주소서.' 예 봤습니다.

여기 계신 분들은 이 책을 두세 번 봤답니다. 저는 한번을 아직 다 못 봤는데, 그러니까 이 책을 볼 때마다 저는 제게 지금 보는 거예요. 제게 하는 말씀으로 듣고 보는 건데 하도 좋으니까. 또 이 시간을 이용해서 이미 본 말씀인데 또 보는 것인데. 아침에 본 말씀인데 아주 그, 지나기가 아까우니까. 다시 한 번 반복. 아침에 안들은 분도 계실 테니까. 76페이지 하반에서 봅니다. 아침에 제목은 무엇이었던가? 제목이 인격적 자유인이라. 인격적 자유인. 그 반대는 비인격적 자유. 인격적 자유와 비인격적 자유는 반대에요. 육적 자유는 비인격적 자유다. 성령에 이끌린 양심적 자유는 인격적 자유죠. 그럼 그것을 성경에서 대조를 보고 갑시다. 비인격적 자유와 성령에 이끌린 양심적 자유와 조금 대조해 본다면. 먼저 성령에 이끌린 자유 볼까요?
로마서 9장 1절서 3절을 봐주시죠.
'나는 그대의 사람으로서 진실을 말하고 거짓을 말하지 않습니다. 성령으로 움직이는 내 양심도 그것이 사실이라고 말해줍니다. 성령으로 움직이는 내 양심도 그것이 사실이라고 말해줍니다. 나에게는 큰 슬픔이 있습니다. 그리고 마음으로 끊임없이 번민하고 있습니다. 나는 혈육을 같이 하는 내 동족을 위해서라면 나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떨어져 나갈 지라도 조금도 한이 없겠습니다. '이것이 성령의 이끌리는 양심의 자유, 참 인격적인 자유. 다른 영혼을 위해서 자기가 그리스도의 저주를 받고 떨어져 나가는 한이 있더라도 다른 영혼을 생각하고 사랑하는 그 마음이란 말이에요. 그게 자유에요. 근데 비인격적 자유는 이기주의, 자기 몸만 생각하는 것. 저 같은 사람. 자기 몸, 자기 기분, 자기 마음만 따라서 자유 하는 그것을 정욕적인 자유란 말입니다. 그것을 비인격적이라. 그래서 아침에 자유, 갈라디아 5장 13절 하나만 봅니다.' 형제여러분 하느님께서는 자유를 주시려고 여러분을 부르셨습니다. 그러나 그 자유를 여러분의 육적을 만족시키는 기회로 삼지 마십시오.' 육적 기회로 삼는 것. 그 비인격적 자유란 말이에요. 오히려 여러분은 사랑으로 서로 종이 되십시오. 이것이 인격적인 자유. 서로 종이 되는 것, 낮아지는 것, 겸손 하는 것, 남을 섬기는 것, 다른 영혼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종. 종이 되십시오.' 모든 율법은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 하신 한 마디 말씀으로 요약됩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서로 물고 뜯고 삼키고 하면 피차 다 멸망할 터이니 조심하십시오. '교리에 빠지고 판단하고, 자기는 옳다고 하는 그런 것은 피차 망할 것 뿐 이다.
며칠 전에 남원에 아주 열성 있는 전도 인들이 왔어요. 처음에는 아주 우리 사는 데가 천국같이 좋다고 그러고 맘을 끈단 말이에요. 그러면서 아 이 산에서 이렇게 사는 것이 구약에 산에서 산다는 그 말씀이 있는데 꼭 구약 성경대로 산다는 거라고 말이야. 야, 이리 칭찬했어. 성경에서 그런 데는 보지도 못 했는데 어디에 그런 데가 있을까? 그래서 이제 무척 저당적이(저희끼리?) 좋다고 해서 어디서 오셨느냐고. 저기 충남, 충남서 왔다고. 여기 소식을, 잘 믿는다는 소식을 듣고 왔다. 그래서 그럼 어느 교파에 속해있냐고, 어느 교파에 속해있지는 않다고 하니까 자기들도 그렇다고. 똑같다고, 좋다고. 장로교, 성결교. 그렇게만 같이 했어요. 그래가지고 지금 현재 교회는 타락했기 때문에 자기들은 특별히 나와서 이렇게 개인 살림을 하지마는 정신적으로 예배는 같이 보고 그런다고. 그래서 이렇게 산다는 소식을 듣고 아! 우리도 여기 살 수 있냐고, 받아 주냐고 했지. 어째야 받아 주냐고. 그래서 저는 그렇게 대답을 했죠. 여기 받아주는 방법은 다른 게 없고 무조건 하느님한테 아무 뒷자락 없고 끝없이 자기 몸을 바친 사람은 같이 살 수 있다. 그러나 뒤 돌아볼 것이 있는 사람은 같이 살라 해도 못 살 것이다. 근데 하룻밤 자고 그 이튼 날 말을 들으니까 이제 안식교인이라 그래요. 안식교인들이 뭐이냐 하면, 주일을 지키는 것을 아주 큰 죄악으로 알고 안식일만 지켜갖고만 된다는 거지. 결국 나중에 가서는 그렇게 몰아가버려. 그런 얘기는 별로 안하다가. 그러고는 무엇을 지키고 무엇을 지키고 무엇을 한다는 그런 것을 말해요. 안식교회 같으면 우리 이 얘기 그만하자고 말이야. 변론은 안 된 것이니까. 할 거 없고 나도 많이 알아봤는데. 도리가 예수는 안식일의 주인이라, 예수님도 안식일을 지켰다. 그렇게 말한다 말이여. 그 해석이 다르지 않았어요? 예수님은 안식일의 주인이라, 그 말은 그 예수 따라가면 그 안식이 다 거가 있단 그 말인데. 안식을 전했단 말인데. 날짜에 매인다. 그래서 별 말을 해도 이제 그이랑 안 되겠길 레 끊어버렸어요. 그래도 주소를, 내 주소 적고 이름 적고 편지 하겠다고. 아 편지 말라고. 편지 했자 내가 편지에 뭐라 대답하겠냐? 내가 듣지도 않을 터인데. 전도를 하겠다는 열성은 좋은데, 저는, 자기 것만 옳다고 하는 것은 이거 문제란 말이야.
이 동광원도. 우리 여기 동광원만이 여기만 구원 받는다, 이런 단체로는 이건 이단입니다. 이단. 누구든지 교회를 오던지 안 오던지, 겉으로는 예수를 믿었던지 안 믿었던지. 사람이 알기는. 자기 죄를 깨닫고 회개하면 구원이 되는 거예요. 어느 교파에 있는 것도 아니고, 어느 단체에 있는 것도 아니라고. 그러나 이런 단체가 있다면 그 안에서 자기 믿는 훈련을 해보는 과정은 될지언정 그것만이 구원이다, 그렇게 주장하고 자기만 옳다고 하는 것은 그거는 이단이라고 볼 수 있죠.
여기 아까 76페이지 하반, 그걸 봅니다. '오묘 하도다, 사람이 자기 일이 완전히 실패되었다고 성령이 깨우쳐 주실 때, 이시는 참된 자비와 축복이여. 베드로전서 3장 8, 9절.' 여기도 한번 보고 가죠. 아침에 성경 다 안 봤으니까.

정의를 위한 수난.
'끝으로 말합니다. 여러분은 모두 한 마음을 품고 서로 동정하고 서로 형제처럼 사랑하며 자비심을 가지고 겸손한 사람들이 되십시오. 악을 악으로 받거나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축복해주십시오. 누가 욕을 하는 사람이 있으면 축복해주십시오. 왜. 상을 받게 해주신 은혜 될 테니까. 그러기 위해서 여러분이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뭘 하려고 부르셨나? 자유를 주시려고 부르신 건 사실인데, 사랑으로 종이 될 때 자유지.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축복해 주십시오. 그러기 위해서 욕을 욕으로 갚지 말라고. 더 축복해 주라고. 욕한 사람을 축복해 주라고 우리를 부르셨다. 여러분이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렇게 하면 여러분은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축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성서에도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생명을 사랑하고 행복한 나를 보려는 사람은 모름지기 혀를 다스려 악한 말을 못하게 하고 입술을 다물고 거짓말을 못하게 해야 한다. 또 여러 가지 있습니다마는 그건 만 보고. '참사랑으로 은총을 받는 인격한테는 가시는 자기의 살이, 살이 되고. 가시. 자기의 살이 되고. 처음부터 원수란 있을 수 없지만 은인을 몰라보고, 설령 원수라고 오해하였더라도 실상을 깨닫고 보면 원수도 자기 은인이 되고. '실상을. 원수가 깨닫고 보면 은인이라 그 말입니다. 실상을 깨닫고 보면 원수가. 못 깨달을 때는 원수였는데 깨닫고 보니까 은인이야. 그 원수 때문에 내가 깨닫게 됐어. 길을 찾게 됐다. 핍박이 있기 때문에 내가 더 열성을 가졌고, 더 길을 바로 찾았던 거야. '실상을 깨닫고 보면 원수도 자기 은인이 되고 고통도 자기 영혼을 키우는 양식이 되고.' 우리의 닥치는 고통을 안 받으려고, 없애려고 할 것이 아니에요. 영혼을 깨우치는 양식이니까 달게 받아야 한단 말이에요.' 양식이 되고. 십자가도 자기 영혼의 부활이 되고. '십자가 없이, 죽음 없이 부활이 어디 있겠습니까? 죽었으니까 부활이라는 말이 생기지. 죽지 않은데 부활이 있어요? 영혼의 부활이 되고, 십자가도. 죽음도 자기 영혼을 천국에 계신 예수님 품으로 보내준 천사입니다.'
'그래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모든 것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자비의 사랑 앞에 그것이 곧 자비의 능력이요, 비밀이요, 신비요 진리요 복음, 복음이다. 자비의 사랑을 완성하신 예수 그리스도야 말로 하느님이요, 살아계신 하느님 아버지의 참 아들이요, 우리들의 영혼을 구원하러 오신 구주로소이다.'
'깨닫고 보니 천지 만물과 인생과 사업의 실패와 장애, 여러 가지 장애가 있어요. 장애와 위험과 갈등과 괴로움과 허무감과 절망감과 그 모든 영적 고통과, 가난이나 배고픔이나 슬픔이나 고독이나 그 모든 제 일평생에 부딪힌 그 모든 일들은 결국 제 영혼 하나를 구원하시려고 역사하신 하느님의 은총의 섭리였나이다. 모든 주위 환경은 내 영혼을 구원하는 역사였다. 하느님의 섭리였다.' 빌립보서가 전부 그런 뜻으로 되어 있어요. 모든 내게 닥친 주위 환경은 내 영혼을 깨우치는 좋은 교사가 된다. 영혼을 구원하는 하느님의 섭리였다. 그렇게 보는 거죠. 자 오늘, 시간이 좀 길 란가 모르겠습니다.
8장에 보는데요. 요건 좀 보지 말고 말씀만 하라는 권유를 들었으나... 이 말이 그 말이고 이 말이 이 사람에겐 없으니까, 저는. 저기에서는 혼자만 보기 아까우니까. 또 보고, 또 보고, 또 보고. ‘한번 봐도 됩니까?’ 어떤 형제는 남아서 그러대요. ‘자기 혼자 보면 쉭 지나가버렸는데 이렇게 집회에서 읽으니까 더 실감이 가더라.’ 그런 말 들어서 읽어요. 안 좋아요? 봤어도 그래요. 성경도 늘 본 것이지만 또 봐도 시간에 따라 다르거든요. 은혜의 감동이 아주 그 은혜가 역사할 때는 그 때 말씀과 아무 은총의 역사가 없을 때 보는 말하고는 아주 안 다르겠어요? 그러니 말씀을 듣는 다는 것, 시간에 따라 자기 마음 상태에 따라 다릅니다. 또 장소에 따라서 다 달라요. 똑같은 말이라도. ‘곤솔라따의 사랑’의 책에 예수께서 한 마디 한 절, 성경 한 절을 종일 풀이해도 시간이 모자랐단 말이에요. 왜 그렇습니까. 한 절인데. 예수님은 똑같은 말씀 한 마디를 가지고 무진장으로 그 의미를 설명한단 말입니다. 시간이 모자란단 말이에요. 많은 성경을 보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봤다 하더라도 지금 처음으로 성경 한 마디 거기에 걸렸으면 성경은 고기 잡는 그물과 같습니다. 한 코에 걸리는 거예요. 한 코에. 한 절에, 어디 있는 한 절에 걸린 거예요. 그러면 전체의 그 그물 안에 잡히는 고기가 되지. 고기가 아무리 큰 고기라도, 큰 고래 같은 고기라도 그 긴 그물이 어디 다 떼이겠습니까? 그러니까 몇 코에 걸린단 말이에요. 좀 크면 이제 여러 코에 좀 걸리기는 하지마는. 많이 그렇게 걸리는 거 아니에요. 한 말씀 깨달으면 전 성경이 다 통하는 것입니다. 강령이라 그래요. 강령. 원줄거리. 그물은 원줄 하나 땡기면 전부 따라오잖아요. 성경 어디든지 한 마디 말씀이 탁 걸리면 전 성경이 다 연결이 되어 있는 겁니다. 이 많은 말을 들어야 되는 것이 아니에요. 오히려 많은 말을 들었다는 것이 병이 되지 않습니까? ‘우리 다 들었다! 들었다!’
저, 대구에 친구 장로가 하나 있는데 저번에 갔어요. 바쁜데. 저희가 이제 그 원로 목사들이. 목사, 장로들이 교직을 다 떠나서 나이가 많으니까 교직 떠나서 할 일이 없거든요. 그러니까 자기들끼리 모여서 한 일주일에 두어 번이나 이렇게 모여서 얘기도 하고 그런가 봐요. 근데 이 친구 장로도 거기 한 사람인데, 돌아가면서 설교를 한 15분간 약간 하라고 해서 자기 차례가 되었다. 그래서 준비를 하고 있어요. 그러면서 하는 말이 그래요. 너무 너무 자기들이 다 교육을 해왔고, 그런데 그들에게 뭔 말이 들어가겠냐 이거야. 이게 시간 따지기로 그냥 이렇게 한번 하는 것, 그래도 그냥 뭔 말을 했거니 안 들어줬지마는 이해가 안 되고 별 것도 아니지마는 자기들이 더 이상도 알고 있지마는, 거 참 말씀 잘했다고 참 은혜 받았다고 그렇게 인사를 한단 말이에요. 서로 그래줘야 되죠. 그런데 뭔 말을 하겠습니까? 누가 하겠습니까? 그들 중에서 해야 할 텐데, 그들 중에. 그럼 다른 지금 교회 맡은 목사들이 와서 할 수 있는가? 누구 말도 안 들어가는 자립니다. 그런 자리가. 왜 그러냐면 너무 말도 많이 했고, 너무 말을 많이 들었고 그렇기 때문에 들을 말이 없어요. 생활이 돼야지. 나도 참, 나도 좀 그 나이인데 말이에요. 그 나이가 됐는데, 나야 동광원이니까 용납해주니까 그렇지. 이거 동광원 나가버리라 하면 어디 가서 어쩔까? 이 뭣을 할까? 그것은 내 문제란 말이에요. 심심 허다.
근데 저는 아직 뭐 지금 할 말이 없습니다. 사실은 부끄러워서 할 말이 없어요. 왜 그러냐면, 자신을 생각할 때 뭔 말을 하냐? 다 듣는 사람들이 앞서가는데, 저는 말만 하지 실행도 안한 사람이 뭔 말을 하냐? 그러니 하라는 대로 하는 게. 그래서 꼭 듣고 싶어 하라는지 그건 모르겠습니다만, 자기들이 안 할랑게 하라는지 그건 모르겠습니다만. 저보고 하라는 거예요. 그러니 제가 스스로 속는 거죠. 뭔 말이 있느냐? 근데 문제는 뭐냐? 여기 제목이요. 가장 급한 것이 무엇이냐? 아무리 수십 년, 수십 년 전도를 하고 예수를 믿어왔다 하더라도 가장 급한 일은 빼놓고 있지 않았냐? 그걸 안하고 지나갔단 거야. 그럼 급한 일이 뭐냐?
영혼의 병을 치료하는, 회개하는 일입니다. 회개하는 일. 모든 걸 버리고 나를 따라오라. 근데 안 버려요. 못 버립니다. 이 단체 안에 사람은 모두 버린 것 같이 보이죠. 보였죠? 자기 사유재산이 없으니까 우선 버린 것 같지. 그러나 무엇을 못 버렸냐? 몸은 바치고 사니까 버린 것 같은데, 말하는 것은 안 돼. 내 뜻, 내 지혜, 내 고집은 안 버린다고. 그러니까 복음삼덕이라고 하는 세 가지 원칙이 무엇이냐? 청빈입니다 청빈. 자기 재산이야 재산을 하느님께 바칩니다. 하느님의 것이에요 이제. 자기 게 아니고. 하늘에 바쳤다. 그 다음에 이제 동정입니다. 순결입니다 순결. 순결은 뭐냐? 이 몸을 바친 거예요. 예수님의 몸으로, 예수님의 것으로 바쳐버렸다. 그러니 자기 것이 없어요. 몸이 자기 몸이 아니야, 이제. 그러니까 그 사람에게는 아무 문제도 없어. 왜 그러냐면 자기 몸이 없는데 뭔 문제가 있어. 몸이 있어야 뭔 문제가 있는데 몸이 없거든. 그러니 그냥 고통이나 뭣이나 다 주님이 주신 은혜로 받지. 그게 주님의 것이야. 그러니까 자기 것이 없어. 그런 게 내 몸이라 하는 때부터 문제가 있고 고통이 있고 걱정이 있고 근심이 있단 거야. 자유가 없어.
또 순명. 순명은 뭐냐? 절대적인 순종이기 때문에 자기 뜻을 버린다. 몸만 버린 게 아니라 뜻을 완전히 포기하고 죽든지 살든지 그리스도의 뜻만 다. 그리스도의 뜻, 하느님의 뜻이 자기 뜻이다. 자기 뜻은 없으니까. 그게 인제 천국 아니겠어요? 그렇게 바쳐야 하는데 그렇게 버려야 하는데 어떻게 그걸 버릴 수 있습니까? 왜 그러냐? 나를 안 버렸거든. 나를 안 버렸으니까 내 집이 있고 내 가정, 내 집안, 내 식구, 내 살림, 내 것이 있단 말이야. 그러나 자기를 버리는 사람은 가정이 있더라도 그건 다 하느님의 자녀야. 하느님의 자녀로서. 음~, 아까 전에도 조금 들었고 먼저도 조금 들었습니다마는, 그 어제 출상한 명주 사임양 어머니. 최후에는 형님들, 언니. 딸보고 언니라고 그랬다니까. 그러니까 아 너무 주사를 줘서 정신이 조금 흐렸구나. 아니 믿는 사람은 그렇게 본단 말이야. 다 형제, 자매로 깨달은 거야. 최후의 마지막엔 마음이 평안한, 평화스러운 얼굴로 다 마쳤단 말이야. 10개월인가 몇 개월 동안 별로 먹지 못하고 주사로만 살아왔어. 그렇게 부지해 왔다가 최근에는 물도 안마시고 한 보름 이상을 탁 그렇게 안정을 받고 다 해결하고 갔다. 그 동안에는 아주 고통이 심했죠. 심할 때 견딜 수 없으니까 어서 데려가십시오. 어서 날 살려 주십시오 가 아니고 어서 데려가십시오. 데려가십시오. 그랬죠. 자비. 오, 자비의 주님 가장 비천한 제 영혼을 불쌍히 보시옵소서. 제 영혼이 가장 비천한 병에 걸려 있음을 깨우쳐 주셨나이다. 비천한 병에 걸렸다. 제 영혼이 진토에 붙었사오니 주의 말씀대로 소성케 하소서. 아까 시편 119편 25절이에요. 또 시편 44편 19절, 26절. 가장 최급한 것은, 가장 급한 것은 대체 무엇이겠습니까? 스스로 자문자답을 하죠. 대체 무엇이겠습니까? 우리들 각자에게 물어봐야죠. 가장 급한 것이 무엇인가? 이때는 우주의 문제도, 인류의 문제도, 어느 단체의 문제도 어느 형제나 자매의 문제도 생각할 겨를이 없고, 다만 제 영혼이 다 죽게 된 이때에 가장 최급하게 할 일은 제 영혼의 치료입니다. 영혼의 치료. 영혼의 치료. 아들아 내 말을 들어보라. 예, 주님 말씀하소서. 듣겠나이다. 생각을 하여보라. 네가 탄 배의 돛대가 부서졌는데 너는 무엇을 생각하고 있느냐? 우리는 지금 다 지금 고해바다에서 배를 띄우고 항해하는 사람들이에요. 근데 돛대가 부러졌어요. 무엇을 생각하고 있느냐? 네가 탄 비행기의 엔진이 고장이 났는데 너는 또 무슨 한가한 생각을 하고 있을 때냐? 네가 탄 뱃바닥에 구멍이 나서 물이 들어오고 있는데 있는 이 최급한 이때, 다른 사람의 일을, 한가한 사람처럼 생각을 하고 있을 때냐? 누구 전도할 때냐? 누구를 권유할 때냐? 자기 영혼이 지금 어디에 있냐? 어디에 있느냐?
온 천하에다가 복음을 전하라고 하니까 이걸 지상명령이라고 해서 최급하다고 막 전도를 하는데, 그런 전도를 할 사람에게는 반드시 따라야 할 다섯 가지 기적이 있는데 다섯 가지 기적 중에 한 가지도 이루지 못하고 어떻게 전하냐? 자기가 죄에 빠져 있으면서 어떤 영혼을 건진단 말이야. 그런 건진다는 그 생각이 참 어리석은 생각이지. 누구를 지도한다는 그 생각이 참 교만스럽고 참담한 말이다. 주님이 그 영혼을 인도하시는데 내가 심부름이나 하냐? 주님의 몸이지 않냐? 그것이 문제지. 주님은 주님 따로 있고 나는 나대로 있는데 주님의 몸도 되지도 않고 뭔 일을 하느냔 말이야. 누구 영혼을 건지냐? 자기가 지금 사망에 흘러내려가는 존재가 돼 있는 것도 못 깨닫고 말이야.
한가한 사람처럼 생각을 하고 있을 때냐? 네 영혼의 뿌리에 든 병을 지금 고치지 못한다면 곧 죽을 텐데. 영생이냐? 영벌이냐? 하는 네 인생에 가장 중대한 일 막다른 날에. 영벌이냐? 한걸음 잘못 방향을 돌려놓으면 영벌로 가고, 한걸음 바로 하느님의 뜻대로 한걸음 바로 디디면 영생으로 간다. 이 기로에 영생이냐? 영벌이냐? 방향을 어디로 정하고 한발을 어디로 한발 딛느냐? 삶과 죽음의 사이에는 한 걸음이 있다. 일보에 있다. 그것이 어디인지 아세요?
사무엘상 20장인가 21장인가 모르겠네. 삶들이 있습니다마는. 가장 중대한 이 막다른 날에 너는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느냐? 지금은 은혜를 은혜 받을 때요, 지금은 구원의 날이라. 고린도후서 6장 1장 2절에 있는 말씀이에요. 지금은 은혜 받을 때요, 지금은 구원의 날이라. 주님 진정 옳은 말씀입니다. 제 영혼을 불쌍히 보시고 제 영혼의 심층에, 밑바닥에 든 치명상을 치료하여 주시옵소서. 독 묻은 화살을 맞은 사슴같이 제 영혼이 비참한 병에 든 것을 깨우쳐 주신 이 시간에. 이 깨우침을 받았어요, 영혼이 병들었다. 내 영혼이 병들었다.
그러니까 지금 10여 년 후에 이제, 엊저녁에도 병원에, 이 분이 지금 이 고백을 하신 분이 그때는 참 아주 고통 가운데 견딜 수 없는 그 시련을 겪어서 깨우침을 받았거든요. 이제는 그 회개의 단계는 지나갔기 때문에 이제 다른 영혼을 건지는 데 역사하는 것이 하느님의 섭리란 말이죠. 그래서 지금 수술하고 나와서 누워서 그런 말씀 들었어요. 엊저녁에 가보니까. 태어나서 부모 배에서 떨어져서 생전에 처음으로 이만큼 그 황홀한 경지에 들어간 경험은 처음이다. 함평서 그때 15년 전, 십 몇 년 전에 그때 고통 할 때는 그때는 약간 있다가도 평화를 얻었다가도 또 자기가 살아있는 만큼 또 다시 반복을 하고 늘 그렇게 계속 했거든요. 백여 일을. 그렇게 길게 싸웠지마는 요번에는 그렇게 싸울 건 없고. 아마 그 말을 안 했다면, 그 아편한 사람들이 아편을 못 끊은 것이 그런다고 해요. 아편을 끊기가 제일 어렵다면서. 그때 그 아편하고 난 뒤의 그 기쁨, 그 기분은 잊을 수가 없으니까. 그러니까 아무리 뭐 별일 있어도 그건 아편을 사서 살림이 다 없어지더라도, 그러다 죽는다 하더라도 그때 그 기쁨을 얻고자 하는 그 생각. 근데 이거는 그거와는 다르겠지마는 저하고는 생전 처음으로 호강을 받아봤다. 그런 그 은혜 속에 체험이 되어지는 것은 씨를 뿌려놓은 결과다. 근데 당신이 뿌렸다는 것보다도 다른 이들이 씨를 뿌려놓은 결과다. 구체적인 예를 들면 뭐냐?
그때는 폐병 환자 똥, 똥 처리 문제란 말이야. 이거를 어따 버릴 데가 없단 말이야. 알기만 하면 큰 문제가 되요. 그래서 밤을, 밤을 틈을 타서 사람들 모르게, 모르게 이 제중원에서 동광원으로 퍼다가 어따 깊이 묻어버리고 했단 말이에요. 그 뭐 품삯 한 푼 받은 일 없이 순수한 봉사로 했다. 그 말이야. 그 결과로 당신이 그런 은혜 속에 잠기게 됐다. 그런 말씀 하셨고.
지금 동광원 생활이 겉으로만 이렇게 볼 때 이건 동광원이 아닌데요. 아닌데. 그 처음 기초를 어떻게 해서 지금 규모가 이렇게 됐냐? 이건 외모지. 내용은 아니거든요. 깊은 어떤 뿌리에서 이렇게 이파리진 거죠. 이파리. 그래 너무도 이파리만 무성해졌지. 참 열매가 진짜 열매가 있어야 돼. 오, 주님 어서 빨리 독 묻은 이 화살을 제 머리 속에서 빼내어 주시옵소서. 막 두통이 심하고 견딜 수가 없어. 제 가슴에서 빼내어 주소서. 제 영혼에서 빼내어 주소서. 이 땅에는 영혼, 영혼 속에 든 병을 고칠 의사가 없나이다. 제 영혼 속에 든 병을 고칠 의사는 오직 주님 한 분 뿐이로소이다. 오, 병든 영혼을 고치러 오신 의사이기에 제 이 비참한 영혼의 병을 고쳐 주시옵소서. 어제 오후 5시에서 6시 사이에, 제 머리가 무겁고 우울하고 침울하고 마음이 무거워 함평 뒷산에 올라갔습니다. 사방을 둘러보자 마침 그 곳에는, 마치 겟세마네에서 주님께서 기도하실 때에 있던 바위 같은 조그마한 바위가 하나 있었습니다. 주님의 거동을 본을 삼아 바위 옆에 꿇어 앉아 주님의 생각을 하면서 감히 하늘을 우러러 볼 생각을 못하고 제 머리의 이마를 바위 위에 조아려 대고 저는 일생의 처음으로 기도를 올렸습니다.
'울금농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을사년 울금수확 막바지 작업 (1) | 2025.12.09 |
|---|---|
| 첫눈이 오다 : 계명산 초기 좌담 일부 (1) | 2025.12.04 |
| 상강 지나고 진도 울금 : 영혼문제와 육신 문제 (1) | 2025.10.26 |
| 울금 심는 날 (0) | 2025.05.05 |
| 울금밭 김매기와 북주기 : 이국자 언님 (2) | 2024.06.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