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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열매들 : 십자가 해설

mamuli0 2025. 4. 27. 10:39

 꽃이지고 맺힌 작은 열매들을 담아보았다.  기장이 예쁘게 올라오고 있다. 울금을 심을 때가 되었다. 파종 준비를 하고 있다. 금년에는 깊이 갈이와 도랑 손질등 포장 준비에 공을 많이 들였다.

 다석 선생이 동광원에서 강의한 십자가 해설을 올려본다.

 

 

십자가 해설

 

1971.08.14. 유영모 선생

 

일어나서 십자가 하나 걸고 그렇게, 나는 한문자 열십자로 일으켜 세운 막대기라면 그걸 인제 떼어버리고 우리말로 뭣이라고 할까? ㅡ, ㅣ, ㅏㅜ, 인제 그렇게 할 날이 있을 거라. 꼭 이것이 이걸로만 쓰여 질지 그건 몰라요. 어찌되었든지 십자가라는 그 말 떼어두고, 우리말로 이름 석 자 지은 것도, 저녁 석(夕)자 컴컴한 때, 말해서 서로 알자고 지은거란 말이에요. 그런데 적십자사에서 무슨 말할 일이 있어서 말들을 하는데 거기서 역시 십자라는 거, 한문 글자 열십자 글자지요. 그거 그만두고 우리말로 혹 할 수 없을까? 그런 의문이 나는데, 거기 그날 연사로 온 사람이 근원이 나니까, 고추 가루라고 하면 어떻겠냐? 그 무슨 소리냐? 십자라는 건 꼿꼿이 일으켜 세우고 가로지르고 그러니까, 고추 가루, 그래 십자라는 걸 고추 가루 로 하면 어떻겠냐? 이 사람 십자가를 갖다가 ㅡ, ㅣ, 이렇게 가운데 뭐이라고 전(田)이 되겠지요? ㅡ ㅣ 앞 이렇게 하면 어떨까? 그런 생각이 있는데 적십자사 에 가서 이야기를 하는데 거기 간사니까, 내 말 들었는지, 그 어떤 분이 적십자사에 와서 말 하는데 우리말로 고추 가루 하면 어떻겠냐? 십자가 기둥은 고추 올라가서 또 가로 건너가서 가로지른 거니까 고추 가루, 그거 좋지 않아요? 그 즉흥적으로 나와. 이 뒤에 또 뭐 이 나올 런지 모르지. 나올 대로 나와 가지고 그 중에 여럿이 공론해서 그 중에 하나를 뽑아서 쓰는 거지. 고추 가루가 뽑힐 려는지? ㅡ ㅣ ㅏㅜ가 될 라는지, 또 그 후에 좋은 게 나와서 그게 당선이 될라는지. 어제는 세 사람이 나와서 고쳐야 할 데는 고쳐야 해요. 그게 궁리하고 생각하면 별게 나오지요? 실상으로 이 두 가지는 즉흥적으로 나온 겁니다. 그럼 즉흥적으로 나오거나 아주 머리를 짜고 마음을 다해서 만들어 쓰거나 종당 고쳐지는 게 세상일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름이 애초에 왜 생겼냐하니 저녁에 말할 필요가 있어서 생겼어. 그래서 저녁 석(夕) 밑에 입구(口)를 해 가지고 이름 명 (名)자 라는 게 된 거예요. 세상 모든 게 까닭이 있어. 생각해서 만들어서 쓰는 거지. 까닭 없이 생각 없이 된 건 하나도 없어요. 그런 게 그 갖고 쓰는 대로, 왜? 그렇게 말이 그렇게 되었나? 글자가 왜 그렇게 되었나? 그 생각해서 써야지 바로 써져요.

이게 뭡니까? 우리는 기도 시간이라는데 기도 해야지요. 고요하게 생각하고 고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이것이 다 생각 해가지고 일어난 겁니다. 옛날에 다 생각해서 말 한마디라도 만들어 써져 내려온 거예요. 그럼 사는 게 뭐냐? 생각이 사는 겁니다. 생각이, 생각이 떡 나가고 없으면, 멀쩡하게 사는데 사상이라는 게 생각이라는 게 그대로 한다면 생각이 바로 안 되어요. 그러면 그건 성하게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이 사람은 십자가에 대해서 ㅡㅣㅏㅜ 하자고 그런 생각이, 그렇게 고쳐가지고 쓰자는 게 아닙니다. 나부 터 십자가, 그거 모양, 우리 생각이 우러나서 그것을 말하는 게, ㅡ ㅣ ㅏㅜ 이렇게 하면 좋겠다. 으 이 아우, 그러면 저절로 하면 어찌 되지? 거기 점찍은 걸, 아래 아자(ᄋᆞ) 이렇게 둥(ㅇ) 그리고 점(·)하나 찍은 거, 그것은 무슨 자냐? 아(ᄋᆞ) 자에요. 아 자인데 그건 ᄋᆞ, 아 아자는 아니에요. 아래 아자는 ᄋᆞ자 이지, 그렇게 된 건데, 그걸 여기서 우리나라말 연구하신 이가 아 자가 왜 둘씩이냐? 그 둘씩 할 것 없다. 하나만두고 하나만 쓰자. 지금 그러고 나왔어요. 아래 점찍는 거, 다 필요 없다고, 실상 그게 어머니입니다. 모음에 어머니, 어머니에요. 그 어머니를 모시지 않고 무엇을 어떻게 한다는 말입니까? ᄋᆞ 는 이건 어머니고, 아는 그건 아들이에요. 어머니가 낳은 아들이에요. 그런데 아들이 어머니보고 둘씩이라고 그래요? 뭐가 두 개야? 어머니가 먼저 낳았어. 아들 딸 다 낳아야지요? 둘이 어디가든 둘입니다. 그래 한글 연구 대단히 좋아요. 그러나 그걸 모르고 어머니를 가두어 놨어요. 일전에도 잠깐 이야기 했었지만 어머니를 가두어 놓고, 어떻게 살림이 됩니까? 황천에 가기 전에는 어머니 안 만나겠소? 맹세한 까닭에, 할 수 없어. 서러워 하니까, 나가서 내가 어머니 모시도록 한다. 황천에 가서 만나서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파가지고 누런 진흙물이 보이도록 팠어. 그렇게 해놓고 어머니 모셔다가 요렇게 황천, 그 옆에다가 모시고 아들 된 임이 거기 들어갔어. 어머니, 이제 모시고 산다고 그 맹세하고 그대로 했지. 하나도 맹세한 걸 저버리지 않았어. 그러니까 우리 십자가도 으 이 아 우로해서 우리에게 깊은 느낌을 더 얻게 될 런지 몰라요. 그렇다고 으 이 아 우만이 꼭 옳다. 그런 건 아닙니다. 더 나은 것이 나올 런지 몰라. 그런데 아닌 게 아니라 적십자에 가서 무슨 말 하는 때가 있는데 거기서 내가 으 이 아우를 이야기 했더니 거기 일 보는 이가 나더러 이야기가 여기 어떤 분이 이야기하다 우리 적십자를 다른 말로 한다면 담 박에 고춧가루가 어떠냐고? 고추 올라가서 가로 또 한 선이, 그래도 나 적십자 이야기니까, 그럼 우리 적십자 못쓰지 않아요? 적십자 독점되었는데 그런데 십자가를 희게도 그리고 푸르게도 그리고 그런데 이제 적십자는 적십자사에서 독점 했어. 거기 알맞은 빨간 십자가를 쓰니까. 그러니까 거기 어떤 이가 고추 세우고 가로 획이 건너가는데 그래 고추 가루인데, 또 적(赤)이니까 빨간 익은 고추, 매운 고추, 그것을 인제 적십자사에서 독차지해서 고추 가루가 돼. 어떤 의미든, 이런 생각하고 이런 말하는 건 장난하는 거 같습니다. 우리가 기도하자는 거 장난하자는 거 같습니다. 정말 제대로 된 때는 아버지 앞에 나아가 뭘 생각하고 말씀하고 아버지 우러러보고 장로님 80되었지요? 눈치코치 뭘 봐? 아버지가 보시고 옳다. 놀아라. 잘 놀아라. 그렇습니다. 본디 음악도 춤도 아버지 앞에서, 아버지 기쁘시라고 손짓 발짓 팔짓 배 짓 이렇게 나온 겁니다. 그래 으쓱으쓱하고 흥이 나오는 거고. 그거다 어린애들이 어른 앞에서 노는 거예요. 그렇게 그대로 하는 겁니다. 으쓱으쓱 좋아요. 장로회도 해가지요. 감리교에서는 그런 거 도무지 없어. 그러나 구세군 이라든지 성결교회도 얼마큼 이게 있지요. 그게 있는 게 좋습니다. 잇잇 잇 하는 건 수(手)짓 자지, 손 수(手)자, 춤추는 모양 무도 하는 건 도(蹈)자지. 바를 도(蹈)자, 이거 조금은 무도지 이렇게 하면 무(舞)야. 발도 이렇게, 이렇게 뛰는 것, 벌쩍벌쩍 뛰는 게 무도(舞蹈)[야. 수(手) 짓, 손짓, 무(舞)지 족 짓, 발짓, 그렇다면 바를 도(蹈)지. 수(手)지 족(足)지 무(舞)지 도(蹈)지. 산 사람은 그것이 나와야 하는데, 우리가 잘못된 것은 너무 얌전해서 점잖아서 손가락질 하나 까딱 안 하는 거야. 그러면 모두 재주들, 그런 거야.

공자의 제자가 3천인데 일곱까지 재주를 통하는 선비는 70명이 있었다. 70명, 그래 우리나라 선비들이 아주 유교 그대로 한다고 공자의 제자가 70이라. 70제자 되어야 할 텐데 우리나라 사람 그게 없어요. 혹 지방에는 조금 있었어. 서울 장안에 있는 사람은 점잖지 만하지, 노래나 춤 불러다가 하라고 하면 구경하고 앉아있어. 자기는 하지 않아요. 점잖지 못하다고 아니 하니 그러지. 그러니 정말 유교 도는 실제로 했습니까? 걱정입니다. 그렇게 얌전히만 하다가는 예수 믿는데도 아마 그런 것이 생길지 몰라요. 그렇다고 뛰고 소리하고 그걸 굉장히 하는 사람이 또 있어요. 그런 교파가 있지 않아요? 다른 거는 발달이 안 되도 그런 쪽은 발달이 되는 가 봅니다. 이 사람 다른 거 문제가 아니야. 열여섯 살부터 이때까지 성경보고 믿는 거 생각하고 이렇게 하는데 전에는 어디가 그런 게 있어? 요즘에 말씀 방언, 이런 게 있어. 사도시대에는 방언이라는 게 있었거든. 그러나 사도바울은 분명히 이야기합니다. 방언은 할 게 아니라고는 그렇게는 안 해요. 그 방언 예언이라는 건 고요하게 해라. 사람 많이 있을 때는 그렇지 않아. 하다가도 사람이 많이 있을 때는 그쳐라. 그렇게 하는 거예요. 기도를 긴 기도는 골방에 들어가 혼자 하는 거지. 그 외에 손뼉을 친다든지 뛴다든지 춤을 춘다든지 그럼 자기 따로 혼자 할 거지, 왜 사람 많은데서 뭐하는 거야. 그래 사도바울은 똑똑히 이야기 하지 않습니까? 그 방언을 하다가도 다른 사람에게 여러 사람에게 같이 터놓고 생각할 수 있는 일을 하겠거든 먼저 방언하던 일을 그쳐라.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까? 지금 이때는 어떻게 된 건지 누가 방언을 하던지 그것만 하거든. 또 그걸 하고, 으이아우 라는 것이 그것이 제일 적당한 우리말로 십자가를 정하는 게 그게 아닐 런지 몰라요. 이 후에 그거보다 더 좋은 뜻으로 되는 말로 정해질 런지 몰라요. 이 세상에 모든 것이 세상 사물에 물론 그렇고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모시고 가는 길은 이건 울이 있어서 올에 맞도록 하는 생각과 올에 맞는 생각을 발표하는 말씀과 이런 걸로 되어야 합니다. 일찍이 ㅡㅣㅏㅜ를 십자가라고 하는 뜻으로 나 혼자는 그렇게 많이 해요. 으이아우, 우리 글로 으이아우, 이게 나와서 십자가가 되고 보니 으이아우 이게 나옵니다. 아래 점찍은 거 아래 아자에요. 아, 그건 동그라미하고 내려 긋고 점찍고 그건 아 에요. 그런데 그 자는 아 지, ᄋᆞ가 아니에요. 그럼 아래 점찍은 데가 아 그랬으면 그것도 아니에요. 그 관계가 있으니까 세종대왕이 할 적에 두 가지를 한 거지. 두 자를 만든 게 아니에요. 제일 아까운 것이 아아, 참 하나님 앞에 우리가 말 할 수 있게 은혜를 받아서 우리가 말 하려고 할 적에 맨 먼저 나오는 은혜. 입 벌리고 막아요. 맨 먼저 나오는 게 ᄋᆞ, 조금 벌리고 김나고 ᄋᆞ, 그걸 ᄋᆞ 는 아니에요. 아 그겁니다. 그래 그 어머니 그래서 어머니의 어머니가 나와서 이렇게 ᄋᆞ 그러고 나 앉았어. 그럼 ᄋᆞ 는 대개 맨 먼저 입을 벌리는 둥 마는 둥 하고 나오는 의미 ᄋᆞ, 아 는 그게 아니에요. 입을 조금 벌리는 게 아닙니다. 큼직하게 벌리고 아아 길게 나오는 음은, 한글 나온 차례가 ᄋᆞ자 먼저 나왔어요. 세종대왕이 ᄋᆞ 자 먼저 만든 거예요. 어느 나라 말이거나 글이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점찍는 거 맨 먼저 나오는 게 이치에요. 또 우리가 생각건대 맨 먼저 나오는 게 알자는 거야. 알자는 거니까 ᄋᆞ 가 먼저 나와요. 그래 어머니에요. 어머니 나오는 데는 어머니 만일 먼저 그러니까 어머니가 생명시대에 어머니가 근원이니 중대한데 땅이 중대할 수가 없다. 땅은 글자에요. 나와서 보니까 이건 하늘을 보니까 동그라미가 동그랗게 했다는데 그 다음에 세상을, 땅을 세상으로 해요. 내다 마주 건너다보면 얼마 못 봐요. 내다보면 환하게 보이는데 시원해. 이쪽도 시원해. 확 뚫리는 게 그게 부족해요. 그럴 때 마음이 이렇게 고요하게 널찍하게 가라앉는 게 으 인데 으라는 뜻을 발표할 때 음이 나올 때 으 으 입이 어떻게? 벌어지는데 많이 벌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그 음이 나오는 걸 그리니까 한 일자를 그어가지고 으 한 거예요. 하나님이 이렇게 나타나신 걸 그대로 그렇게 한 거예요. 아 으 그래 동그라미가 적어도 동그라미가 하늘이야. 이쪽, 이쪽 환히 뚫렸어. 그래 으 인제 하늘이 생기고 땅이 생겼습니다. 사람, 사람이 났어요. 사람은 어떻게 하늘이 먼저고 땅도 있고 선 게 사람이야. 그러니까, 이 라는 건 뭐야? 이 생명 이라는 말이야. 이 생명 맨 먼저 생명을 가진 사람이 떡 서야지. 그게 이 이게 생명이지. 이다 머리는 하늘을 보고 발은 땅으로 섰다. 이다 그 이 라는 것이 항상 생명을 붙잡아 가지고 이다. 이것이 산 생명이다. 그런데 산 생명인데 우리말 아니요? 한문 자 생명 이라는 글자를 보기 전에 우리도 살았고 우리도 생각했고 우리도 말했어. 우리는 글이 없이 지내왔다. 글이 생기는 데는 하늘 뚫었고 세상이 이리 환해. 저리 환해. 넒은 세상에 생겼고, 그 다음 세 생명이 있고 셋째 번으로 나오지요? 나오니까 세종대왕도 저것만 만든 거 아니에요. 하늘이 나오도록 해 놓은 거야. 아 으 이, 요 그런데 말을 더 하려니까 이렇게 생명을 이 자를 써놓고 하늘이 맨 처음에 나온 어머니가 여기와 이렇게 해요. 그럼 아, 온종일해도 괜찮은 아 어머니가 지시한대로 소리가 나오는 겁니다. 이 에다가 점을 찍어. 아 또 어머니가 이쪽으로 가서 해요. 대개 이것은 북쪽이요. 뒤쪽이요. 이것은 앞이요. 남쪽이에요.

(끊김)

 

그러면 어떤 때 그 소리가 나오느냐? 합한 거예요. 나 혼자 있을 때에 어머니가 이 앞에 나타나요. 어, 어 오세요. 그래 종당 부르는데도 어머니하고 그럼 점이야 앞으로 와요. 어, 아무씨 오십니까? 어, 반가울 때, 어, 어버이 어머니, 그이를 만나서 어, 그래 어머니라. 어머니라는 글자를 쓰게 되는 거예요. 어 는 반가울 때 나오는 소리고, 아는 출발입니다. 출발할 때 아, 그래 말이란 생각할 때 쓰자는 거니까 그러니까 알자는 거예요. 아는 게 맨 먼저 필요하니까 아 하는 건 알자고 하고, 나오는 거예요. 그래, 그 다음에 가서 으 하니 땅, 거기에 대해서 어머니가 지시를 해요. 으 으, 그거 할 적에 오, 온다. 이 말이에요. 또 아래다가 이렇게 땅 아래 어머니가 계시대요. 우 그래요. 그럼 그 우에 땅 우에, 이걸 가르켜요. 땅 위를 가르키는데 이상하게, 옛날에는 땅이 둥근 거 모르고 땅은 어디가 달라붙은 줄 알았어요. 어떻게 이 사상이 나왔습니까? 세상 아래 가서 어머니가 계셔서 떠받듭니다. 이게 한문자는 이렇게 하면 아래 하(下)자입니다. 간략하게 아래하자 쓸 때 이렇게 하면 되요. 그런데 모든 게 한문에서 우러난 것 같아요.. 그런데 그를 세종대왕이 볼 때는 한문에 끌려가지 않았어요. 그 아래 하자는 언문이에요. 세종대왕이 우를 또 자세히 땅이라고 그러는데 밑에 어머니가 가서 바쳐, 그 놀라운 일입니다. 천은 지붕이요. 땅이 둥그렇게 움직이는 줄 모른 거예요. 땅은 평면이 붙은 건 줄 알았지, 움직이는 걸 모른 게 그 시대에 어떻게 이게 이렇게 되었습니까? 이거 하나님의 계시에요. 계시를 그대로 받은 거예요. 오늘날 이거 알아듣게 아주 쉽지 않아요? 지구가 공중에 떠있다. 둥둥 떠 있다. 이 떠있는 건 밑에도 하늘이 떠 바치고 있는 거예요. 이 아 우 는 하늘인데 하늘이 이렇게 우에다 모든 게 하늘로부터 오는 걸 가지고 우리가 사는 거예요. 그래 우리가 이렇게 우리 세상 밑에 하늘이 이게 우야. 중상천하사대 걱정 하더니 세상이 어디가 있는지도 몰라요. 천원지가 꼼짝 안하는 세상에 나라도 배포에요. 그런데 우리는 같은 거 같은데 우리는 세상이야. 우리 사는 이 세상은 어디가 들러붙어있는 거 아니야. 공중에 있는 줄도 몰랐는데 공중에 떠서 돌아가는 것도 몰랐는데 그때는 직감적으로 어떻게 하다 보니 세상이라. 무슨 꼭대기에 가서 있는 세상이야. 지극히 묘한 겁니다. 그런데 이 글이 만들어졌거든. 하늘 천, 이 으라는 땅, 밑에서 바치고 있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 가 됐어. 이 위에 생명이 나타나라고 이렇게 된 거라고, 한문자는 아래 하 자에요. 천지와 사람의 관계를 중국 사람의 생각하는 것과 우리가 생각하는 게 다르게 되어있어요. 그럼 지금 어떤 게 옳은가? 우리가 옳지 가로 건너가고 점찍는 게 우 라고 생각하는 게 우리 것이 옳은 거야. 이걸 아래 하자로 중국 사람은 썼어. 무슨 아래야? 무엇이 아래야? 아주 안 된 겁니다. 우 자를 본다는 거는 온다는 거 모든 것이 하늘 위에서 온다는 거예요. 오기를 바래요. 오너라. 오라고 한마디 했더니 뭉텅이, 뭉텅이 아주 사방에서 모두들 집단 몰려와요. 또 아래서도 사방에서 몰려와요. 몰려온 펴게 미음(ㅁ)인데 있을게 다 있는 게 미음인데 오라고 하니까 아래 위서 죄다 몰려와요. 다 모였어 몸통이 하나가 되요. 그래 우리말로 몸통이가 된 거지. 저게 오묘하게 성신이 임하시는 그 길이 그려진 것 아닙니까? 그래 생명이 되요. 생명이 앉을 성전으로 마련된 이 몸통이가 된 거 아니에요? 그렇게 해서 해석을, 지극히 묘한 거야. 하늘 진리가 세종대왕의 손을 써서 이렇게 되도록 나타나게 된 것이 한글이에요. 이 못난 게 어떻게 귀합니까? 이걸 이식으로 보면 참 재미난 게 많습니다. 모든 게 모여서 몸통이가 되었는데 거기 변화가 생기면 여기도 위에 펴져요. 그럼 복을 드린다. 그리고 사는데 겨울에 춥던 거 다가고 또 봄이에요. 그때가 봄이야. 그건 왜 봄이야. 잠자고 쉬던 눈을 떠가지고 양지바른 곳에서 내다보라는 거야. 봄이라는 말에 그렇게 거기 죄다 나타납니다. 걸 깨달으라는 그게 사는 거 아닙니까? 올되고 주인 되고 거기 생명이 약동을 합니다. 그게 사람이야. 이렇게 다 오묘한 거야. 몸이 하는 게 따뜻해지면 봐요. 봄, 그런데 한글 연구하는 이가 참 뜯어도 보고 맞춰도 보고 굉장하게 수고를 많이 해가지고 참 밝혀 둔 게, 해 놓은 게 많지요. 그러나 이렇게 각각 음 나온 거부터 가지고 해서 생각을 고루 고루 하는 그건 아니 했어요. 그걸 할 거 같으면 철학하는 겁니다. 음이 나오는 거, 글자 조직 되는 거, 그걸 생각을 엎치락뒤치락해서 골고루 그렇게 하는 게, 생각을 그렇게 하는 거, 그걸 소위 철학이라 그래. 지금 한글 학자 되는 친구 한분 있는데 내가 이렇게 하면, 껄껄 웃습니다. 당신네 그 맞춤법은 그렇게, 그렇게 하지만 이렇게 철학을 하지 않지 않우? 그 한시를 짓는데 아 한시는 왜 남의 것 가지고 짓는 거고. 내 것 가지고 노래하고 춤추고 하지 못하냐? 이 철학이다. 당신네 문법 맞추는 그거하고 달라. 당신네 바쁜 거, 세어서 우리글에 문법까지 딱 정해서 출판해야 한시를 잘 읽는 이니까 우리글을 가지고 생각을 많이 해 철학으로 하시오. 내가 하는 이 혼자 우스운 생각이지, 내가 철학은 무슨 철학을 해? 더더구나 우리글을 가지고 철학은 무슨 사실 이건 철학이라고 생각을 할거 다 해서 엎치락뒤치락 뜯어보고 다시 맞춰보고 그것이 철학이니까 그래서 그 어머니가 다니며 죄다 지시한다면 그렇게 되요. 열한자지만 아 야 어 여 오 요 우 유 으 이. (ᄋᆞ) 그렇게 많은 것 아니에요. 아 으 이 그 석자 밖에 안 돼. 그 어머니가 이리 다니고 저리 다니고 지시해. 그 외의 모두 나온 거야. 그럼 하늘이 나타나고 그걸 죄다 스케치하고 간단히 한 거야. 그렇게 된 거니까 그러게 기가 막혀요. 그때 제자학에 보면 신하들이 열한 명 신하가 모여서 그 해석을 했는데 그 제자학이라는 책인데 정인지라는 이가 그 연구를 해서 그 글을 갖다가 쓴 것도 사진판으로 한 건데 그래 정인지의 글씨로 되어졌다는 겁니다. 제자학이라는 책이, 그런데 그 들이 아주 자세히 안거에요. 그래서 아주 시 들을 쓰고 자세한 거예요. 그래 종당에는 어림없는 일이 생겼습니다. 이제 한글 우리의 옛글이 된 게 그때 정음이라 그랬어요. 바른 소리, 이 정음이 만들어 진건 머리를 죄 짜서 이렇게 할까 저렇게 할까 그리고 힘을 들여서 땀을 빼가지고 찾아낸 거라. 아주 어려워요. 이게 무슨 소리입니까? 어려운 말 한 겁니다. 임금이 한 걸 신하가 한다는데 이걸 왜 안 쓰고 힘 안 쓰고 중국말이 쑥 나오는 거 어떻게 합니까? 이게 눈앞에 나타난 하나님께 나온 진리를 고대로 스케치해서 잡은 거지 결코 지어낸 역사가 아니야. 지혜를 쥐어짜고 신기한 걸 찾아낸 게 아니야. 보통 친구가 한 거도 그렇게 했다고 친구를 오해할 테지. 그렇게 할 만한 게 그렇게 해 놓고, 하늘이 나타나신 음성을 따라서 올이 이치가 나타났는데 하나님이 나타난 이치를 그대로 붙잡았다는 겁니다. 붙잡아서 나타내 쓴 것 뿐 이니까 애를 쓰고 궁리궁리를 해서 한 게 아니라는 거예요. 그런 말이 어떻게 나옵니까? 이상한 말이 그럼 결론은 맨 끝에 이것은 사람이 만든 거지만 하나 만들었는데 모두 신통해. 너무도 신통하니까 이것은 하느님이 이 임금의 마음을 흔들어서 이 나타난 이것을 하늘 둥그런 것도 보고 양쪽이 다 뚫린 이 세상도 보게 하고 사람이 하늘로 머리 두고 땅 딛고 선 것도 있게 하고 그래서 그걸 다른 사람이 이렇게 다 간단히 하는데 이 이는 그걸 속히 취했다고 그래서 맨 끝에 뭐라고 하는 고 하니 이것은 세종대왕의 눈을 끌어다가 이걸 보게 하고 세종대왕의 팔을 끌어다가 쓰게 하고 그럼 성경은 성신이 그를 끌어다가 이렇게 쓰게 했다는 말과 똑같아요. 그럼 유교사상에 성신을 믿을 만 한 게 뭐 그런 무엇이 있습니까? 하늘을 알기는 알 어? 아는데 죄의 문제란 말이야. 동정은 하는데 모두 떨어져가는데 그거 이상한 겁니다. 세상에 글이 많이 있지만 우리나라 세종대왕만은 글을 내는데도 그대로 하늘이 나타나는 그대로 간단하게 집어서 나타내요. 그게 그때 사람들이 어떻게 언제 이게 머리를 쥐어짜서 그렇게 한 게 아니라, 이건 하늘이 이 손을 끌어잡아당겨서 이렇게 받아쓰게 한 거라. 이런 소리가 어떻게 나와? 그 된 걸 보면 꼭 그렇거든. 그렇지 않다고 할 수가 없거든. 그럼 이건 정말 감사하며 쓸 사람은 성경 본사람 참 하나님을 믿는 사람 창조주를 제일 꼭대기로 모시는 사람, 그 사람들이 이걸 환히 풀어야 합니다. 종당 그걸 해석도 못하는 그들이 이걸 보고, 이건 사람의 지식으로 한 것이 아니에요. 하늘이 이 마음을 열어서 이렇게 그걸 보게 했다. 그리고 손을 끌어서 이걸 쓰게 했다. 이런 소리가 나오게 했거든요. 그래 그렇게 써 놓은걸 봤을 텐데. 많이 그걸 봤을 텐데 예수 믿는 사람도 봤을 텐데.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는가? 나는 그렇게 해도 다른 사람이 말하는 걸 들은 적이 없어요. 나는 역설을 하려고 합니다. 우리 한글은 이렇게 된 거요. 하고 역설을 하려고, 어떤 의미로 우리에게 한글이 있는 건 하늘이 계시를 한 겁니다. 이 계시를 우리가 전에 민족이 받은 건데 이 계시 받은걸 이야기 하는데 그 자세히 안 들어 두었습니다. 자식이 들어야 부모의 참여를 바로하는거지.

‘하느님 계 계셔서 날 내셨으니 내 날 가져 계 받들어 섬기시도록 이제 내 속 알과 삶의 목숨과 내 나위 힘과 얼 되 받들어 들어 하느님 뜻 맞고 하느님 말 숨 쉬어 나와 모든 사람 속 알라 외 이 내 더욱 되기만 가장 비나이다. 하느님 우리 주위 살에 조임이 크고 몬지 무거워 모아 드리지 못되오나 되 불쌍히 바라며 제 섬기 울 기대어 비오니 나들이 되게 비나이다. 아멘’

이 사람의 기도라는 거. 이 기도를 많이 합니다. 또 이 기도에 한 구절에 똑 나오면 그럼 나는 그걸 기도라고 해요. 주기도문에 뜻이 된 것도 그렇게 되고 이 사람 기도 그렇게 합니다. 무슨 기도이든지 이 정신이 연결되어 가지고 간단하거나 길게 하거나 하는 것뿐입니다. 그건 그 임께서 그렇게 하라고 하는 거예요. 중언부언 하지 말라고 하셨어요. 기도를 한없이 끝없이 하라고는 하셨는데 중언부언 하지 말라는 거예요.

하늘 계신 아바께 이름만 거룩 힐 참 말씀 임이니이다. 이에 숨 쉬는 우리 밝는 속 알에 더욱 나라 찾음 이어 지이다. 우리의 삶이 힘씀으로 새 힘 솟는 샘이 되었고 진 짐에 짓눌림을 되지 말아 지이다. 사람이 서로 바꿔 생각을 깊이 할 수 있게 하옵시며 고루 사랑을 깊이 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와 임께서 하나이 되사 늘 삶에 계신 것처럼 우리도 모다 하나이 될 수 있는 언어를 가지고 참말 삶에 들어 갈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거룩하신 뜻이 위에서 된 것과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 지이다. 아멘.

이런 말씀 하나 써 놓은걸 읽습니다. 육이오 말씀. 육이오 사변 그걸 생각하지요. 육이오 말씀. 6월 스무 닷샛날, 우리가 우리를 쳐오는걸 받아서 서울 사람들이 죄다 남쪽으로 쫓겨 가고 부산까지 쫓겨 갔던 그걸, 그걸 생각하니까 육이오 말씀을 그럼 육이오는 언제 된 거냐? 20세기 정 한가 온 이요. 20세기 정 한가운데야. 1세기는 백년인데 1900년 지내고 1900 일 년, 이년해서 50년 1950년에 6월 스무 닷샛날, 육이오 말씀인데 20세기 한 가온이야. 아주 한 가운데야. 세기라는 건 백년인데 한 가운데니까 50년 아닙니까? 19세기 다 지난 후에 1900 가운데니까, 세기라는 것은 100년이니 50년은 가운데, 그 1950년은 20세기 한 가운데, 그런데 가운데 중에도 가운데라. 1년에 6월 이라는 거, 한 가운데 아닙니까? 속에 속이 있다는 식으로, 한 가운데 한 가운데 에요. 그럼 그렇게 한번 생각해 봐요. 그럼 육이오 사변은 20세기 한 가운데 된 거라. 그런데 그렇게 되었는데 그 후에 다시 열세해가 지나갑니다. 1950년 뒤에 13년, 13해가 다시 지나갑니다. 이 사람은 열셋을 세면, 이 사람 생일이 열 사흣 날 이에요. 그럼 13이 서양 사람은 싫다고 하는 수 에요. 그 난 생일이 그렇게 되었으니까 나는 13을 좋다고 나는 생각을 해요. 13해를 지났습니다. 13해를 지나면 20세기 한 가운데가 1950년 인데, 거기 13해가 되면 63년 아닙니까? 13해를 지내서 10월 달에 갑니다. 또 십 월을 갖다가 시월 이라고 하는데, 시월 달에 가서 동양 사람은 우리나라 사람은 시 월 상달이에요. 아주 시월 상 달이예요. 그럼 왜 그렇게 되었냐? 옛날에 하늘을 섬기고 부모 조상을 섬기는 게 10월 상달이에요. 그래 상달 이라고 그래요. 열째달이 왜 상이 됩니까? 부모조상 생각하고 하느님을 생각 하니까 상달 이라고 합니다. 다시 13해 가서, 10월이요. 10월에 가서 거기 시월이요. 그래, 육이오 그래, 이오가 스무닷새에요. 그 시월 스무닷새 날 가운데, 가운데 이 사람 아는 친구가 세상 떠났어요. 그럼 살다가 죽는데 어느 해 어느 달 죽었든가? 그걸 알고 싶으면 육이오를 생각하지요. 육이오는 20세기 한 가운데 50년 6월 스무닷새 날, 서울서 당한 거, 그 다음, 열세 해를 지나 지난 뒤에 10월 달에 가서 또 25날, 거기서 세상을 떠나 아는 사람은 그게 현 동완 이야. 이듬해, 그 이듬해, 현 동완이 세상 떠난 그 이듬해 88이 64, 현 동완이 가던 해는 63년이야. 그 이듬해, 이듬해면 88이 64, 64년 1월 1일이 어떤 날 인고 하니 이백사십삼만 팔천칠백예순 하루 되던 날이야. 이 땅 숫자가 한데 이렇게 엮어놓고 외워 놓으면 뭐하냐? 쓸데없는 일 아닙니까? 그런데 자세히 보세요. 육이오 사변 당한 날이 통일로 육십사 년.

 

 

십자가 해설 2

 

1971.08.14. 유영모 선생

 

양력으로 12월 그믐날 31일, 그 해에 이 통일수가 어떻게 되느냐 하면 이백사십삼만 팔천칠백예순 하루가 되어요. 그래 그까짓 거 쓸데없는 소리. 한번 외워야 그때 당대에 들어도 알 수 없고 어려운건데 그런데 이거보세요. 이거 대단히 이상한 거예요. 이 사 삼 팔 삼 이 팔 그런 숫자에요. 그래도 그거 지꺼분한 소리지. 그거 뭣에 쓰나? 그러나 가만히 보세요. 이네삼팔, 이네삼팔 칠육일, 이네가 삼팔을 치워야 해요. 이 많은 사람들이 삼팔을 치워야 되요. 삼팔선을 그어가지고 삼팔선 북쪽과 삼팔선 남쪽 사람이 서로 통째로 쪼개지고 이상한 겁니다. 왜 어째 육십사 년 일월 일일이 유엔 데이 통일 숫자로 이네삼팔칠육일 그런 숫자로 어째 되는가? 이네가 삼팔선을 당해가지고 남북이 이렇게 쪼개져 버렸어. 오도 못하고 가도 못하고 그 일이 치룰 일이야. 칠육일 이니까 치룰 일 이라고. 그래, 이내삼팔칠육일 이건 좀 더 기억하기 쉽자고 해 본건데 해 보는데도 그렇게 안 되는걸 어떻게 해? 그대로 되 이네가 삼팔을 치워야 한다는 거야. 삼팔이라는 병이 들었어. 거기에 요새 얼음이 더러 녹는다니까 혹 아주 풀리면 그 삼팔 다 이제 치웠다. 그렇게 되는 거야. 이것은 역시 내가 이렇게 한 다음에 ‘아버지여 이 삼팔 치워주시옵소서.’를 비는 겁니다. 비로소 그걸 이루기 전에는 ‘이네삼팔칠울일’ 그것은 잊을 수가 없어요. 그런데 ‘이네삼팔칠육일’을 1월 1일되던 64년 1월 1일, 그걸 지낸 뒤에 3월 달에 가서, 열여드렛 날 가서, 3월 열여드렛 날 가서, 계명산에 한 땅에 구멍이 났어요. 계명 산 땅 한군데 구멍이 났어요. 열렸어. 땅이 열렸어요. 계명산이 열려, 제2세 이 공이 이 세상에 입고 나왔던 옷을 벗어버렸어요. 그 제2세 이공 이 옷 벗어버린 걸, 왜 하필 계명산에 벗어버렸는지? 계명산에 벗었어. 그래 그걸 담으라고 계명산에 땅이 열렸어. 그 열린 땅에 들어갔어. 그래 폭 묻어놨어요. 하, 이공이 살아있었으면 여기 있었으면 나더러 그 옆에 천하게 뭐 걱정이 있어요? 그거 한번 외워보라고 그럴 거예요. 그런데 지금 계명산에 가서 계시니까, 원 계시기는 계명산에 계시겠소? 옷을 벗어 거기다 두었지. 어디 계시오? 어디 계셔서? 몰라요. 그 지극한 이치를 어찌 알아? 요새 사모회를 열고 여러 사람들이 모이는구나. 그렇게 되는 이치가 있는지 모르겠소. 그래 이건 여기도 현 동완씨가 없으면 여기 알지도 못해. 내가 이렇게 여기도 알지 못해. 그 양반이 여기도 잘 알았어. 그러기 때문에 그 이렇게 여기를 그런데 왜 모두 다 갑니까? 모두 다 가요. 여기 와서 이 현필씨를 만났어. 오늘 만났으면 밤 자고 밥 먹고 내일 일어나 앉아서 기도도하고 찬미도 하고 생각도 하고 성경도 보다가, 성경의 뜻이 이렇다. 저렇다. 하다 충돌도 됐습니다. 내가 생각하는 거 옳지 않은가? 서로 그런 생각이 있어 충돌이지요. 이게 어떤 의미에서는 기적입니다. 내가 한 30년 되는지 모르겠는데 여기 다닌 지가 그랬는데 처음 여기 동광원을 내가 왔어요. 30년을 두고 줄 곳 여기 있어서 본건 아닌데 어떤 해는 못 오는 해도 있지만 오는 해는 한번씩 보고 가고, 가고 하는데 요전에 언제 왔을 때, 여기 전등이 켜있는걸 보고 하 여기 전등이 켜졌어. 그런데 여기 전등이 켜질 때 까지도 우리 집에 전등을 안 켰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여기를 쫒아할라고 그랬는지 우리 전등 켰어. 세상이라는 게 변하는 거야. 참말이지. 여기 처음에 와서 볼 때, 답답했습니다. 그래 원 이렇게 사는 게 옳다. 마치 세례요한이 사는 듯 했지. 보통 먹는 거 보통 입는 게 아니에요. 그래 내가 어림이나 있습니까? 그럼 그런가보다. 그리고 아 말들이 별소리 다 많아요. 이건 약을 안 잡숴요. 요새는 달걀도 잡수세요. 아마 그때는 달걀도 안 했을 거야. 그건 여러분이 더 잘 아실 겁니다. 변한 것이 그 차차 왜 이렇게 변합니까? 자꾸 변합니다. 세상이라는 건 그런 거예요. 그러고 보니까 그럼 변하는 게 그럼 좋으냐? 다 변하는 데는 차례차례 차례가 있어요. 차례가 있어서 변해야지. 차례가 안 됐는데 그럼 그러는 거, 그건 못써요. 안 변한다. 우리는 안변한다고 이렇게 결심 하기는 쉬운데 그건 그럴 듯해요. 안 변하는 건 없습니다. 안 변하는 건 없어요. 그때 나는 보고 앉아있으니까 여기서 이를 잡지 않는다. 그럼 이에 물어뜯기면 어떻게 해? 그래 잡기는 잡어. 잡지만 죽이지는 않아. 이런 말씀, 별말씀을, 다 약을 도무지 안 잡숫는다. 별말씀이다. 그러니까 나는 그건 다 시인해. 나는 그렇게 하는 거 아니야. 그러나 그게 전수 그르다고만 하는 또 사람이 아니에요. 그러는 가운데 차차 차차 변해가는 거, 그걸 차차 변화 할 때 변해지면 그것이 자라는 겁니다. 이 세상은 전부 자라는 겁니다. 자라는데 너무 진하게 난하게 베어지지 않고 일찍 자라겠다. 그거 아니에요. 그것도 진리가 아닙니다. 또 우리는 변하지 않는다고 하는 거 같은 생각이 있는 듯이 꼭 일정하게 이렇게 하는 거 그건 고집이에요. 한 고집은 있어야 세상에 가기는 가요. 이것도 괴상한 고집 피웁니다. 고집 없이는 결코 정말 뭐로 붙잡고 나가지 못합니다. 그럼 내가 동광원 살림만 못하고 지내오는 건 고집이 작아서 그렇지요. 그러나 오늘 말씀이 딸려 오는 건 고집이 꽤 있으니까 딸려오지, 여기까지 따라오는 거지. 고집이 부족했으면 여기 따라오지 않습니다. 그래 한 고집은 있어야 해요. 예수 믿고 설랑 꾹 하게 자기 남은 생애를 지내는 사람은 큰 고집이 있는 겁니다. 이 세상 한 고집 없으면 온전히 살지 못합니다. 산대도 온전히 커지지 못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요. 첫째가는 고집입니다. 석가모니 요? 고집통이지요. 고집불통이라면 숨이 막히는 일이나 그렇다고 고집이 없으면 숨이 풀어집니다. 풀어져, 풀어지면 결단 나는 거예요. 어저께 이 이야기를 몇 분 앞에서 더러 했습니다. 이 사람이 어저께 몇 분 앞에서 이 소리를 했어. 이 사람이 양력으로 3월 열사흣 날이 이 사람이 난 날이에요. 삼월 열사흣 날, 우리는 열셋이란 숫자를 좋아하지만 서양 사람은 열셋이라는 걸 싫어해요. 그럼 어째서인고 하니 예수의 사도가 열둘인데 가룟 유다 하나가 나중에 정신이 돌아가지고 예수의 제자가 아니고 예수를 따라가지 않고 예수 따라가는 게 오히려 실패로 알고 예수를 배반하지 않았습니까? 예수 배반이 잘못이 아닙니다. 자기 생명이 떨러졌어요. 생명이 끊어졌어요. 그것이 잘못인데 열둘이 온전히 있지 못하고 끊어졌어. 그런데 어저께도 말했습니다만 사도들이 복음전하는 것만 전하지 않고 왜 열둘 사도하나가 이가 빠져서 보기 싫다고 그걸 채워놔야 좋겠다고, 그럼 성신의 지시가 어떻게 있든지 하는데 다른 일은 성신이 지시를 하시는데 그 일에 대해서는 도무지 할 수가 없어. 그래 할 수없이 우리끼리 뽑자. 그랬지, 또 사람의 생각으로 사도 될 만한 이를 갖다가 천거 하려고해. 그런데 하나만 하지. 둘이 천거가 되었어. 그럼 열두제자를 하나만 뽑자는 건데 둘이 됐으니 어쩝니까? 그것도 성신이 어떻게 결정해 주시면 어떻게 할 건데 성신이 결정을 안 해주시니 그래 별 수 없이 제비 뽑았지요. 제비 뽑는 거는 점치는 셈과 같습니다. 제비 뽑아서 하나를 그렇게 열둘을 채웠다고. 그 의례해야 되는 것으로 그렇게 했어. 그걸 임이 보시든지 아버지께서 보시든지 그 꼭 할거 했다고 그렇게 보시나요? 보실까요? 거기에 대해서 이 사람 모양으로 말하는 사람 있는 거 같지 않습니다. 그거 다 하나님 뜻에 맡기고 한 거라. 이렇게 보는 것 같은데 글쎄 나는 안할 걱정 한 거라. 난 그래요. 그래 정말 그 쯤 되서 열두 사도가 온전히 되지못해서 하나가 이가 빠졌다고 그걸 보태겠다고 뽑으려고 하는데 쌍알이 되어서 두 사람이 이렇게 되니까 제비 뽑아서 결정을 한 거, 땜을 때우는데 더벅더벅 지저분하게 땜이 때 졌어. 그게, 그게 하나님의 뜻에 그게 꼭 맞는 뜻으로 된 일이라. 나는 그렇게 알 수 없어. 그건 안 해도 좋은 걱정을 한 거라. 그럽니다. 그걸 왜 그렇게 됐는가? 이 세상일은 말끔 그런 거라. 그걸 우리에게 알게 하려고 그런 실례를 둔거예요 아무리 진실한 그 때에도 헛걱정들을 잘 합니다. 더 좋게 만드는데 더 옳게 한다는데 헛걱정을 더덕더덕 겹쳐서 그걸 갔다가 땜을 하려고 하는 거예요. 그 사도들도 역시 이 몸뚱어리를 가졌으니 그렇게 되요. 우리 할 수 있는 대로 안 해도 좋은 건 안하는 게 좋아요. 어떤 의미로 우리 동광원이요. 남들이 한다고 따라서 우리도 비슷하게 해야 되겠다. 그렇게 안 해요. 안 하는 게 좋아요. 차차 아까 말 모양 이게 변하게 되니까 모릅니다. 우리 사람의 생각으로 안하는 것 같은데 차차 차차 안하던 거 하게 되는 게 세상의 일이니까 이거 혹시라도 지금도 급진으로 어떤 것이 급진이 된다면 이때까지 온 거 모양으로 이렇게 협동으로 온 것만큼 이 앞에도 내내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건데, 변하기는 변해요. 변하는 법이 있어서 아 글쎄 봄철이 될 때에 남긴 눈을 털지. 여름철이 될 만한 때에 모두 문을 열어 저치고 밭을 갈아요. 가을이 될 때에 타작을 해. 거두어들이고 베고 타작을 해 그래요. 그 철에 맞춰서 꼭꼭 해요. 그러니까 철이라는 게 변하는 거 변하고, 그래 사람들이 변해야 해요. 변할 때가 돼서 때가 되서 변할 때가 되서 철이 돼서 이렇게 해서 변해야 되요. 그래야 가장 건강하게 지나가는 건데 우리 영혼이 이 물질세계에서 지나가는 것도 꼭 그렇게 해야 된다. 그 고집이 꼭 있어야 한다는 거, 그 철 그 철 그 만큼 되어가지고 넘어가야 되요. 그 고집이 부족하고 그 철과 맞지 못하는 게 있어요. 그것도 순전히 자기 가는 것 너무 지나쳐 지나쳐버려요. 그 다른 짓이 되요. 그래서 어떻게 됩니까? 춘하추동이 없지 않아요? 가을에 겨울에 할 걸, 봄에도 있고 여름에도 있고 뭐라는 겁니까? 사철이래요. 참외도 수박도 사철이지요. 그 뭐라고 해? 그 아닙니다. 자연히 되는 때 되어서 되는 때 먹어야 해요. 이런 일에 대해서 이놈 고집 피웁니다. 온상재배 한 거 때 아닌 때 먹으라는 거 아주 싫습니다. 제때 되어서 먹어야지요.

그런데 이왕 아까 한글을 말씀한 게 있으니까 가만히 그 일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주세요. ‘기니디리미비시이지치키티피히’ 년 전에 그걸 말씀을 하고 그걸 제가 말하지 않았습니까? 일본 사람 자기네 글을 ‘이로하니오에도’ 라고 ‘아이우에가갸거겨’ 원 글이지만 그 글자 해가지고 ‘이로하니오에도’ 이거 외우는 거 아닙니까? 우리글에도 그거 있어요. 그럼 우리글에도 그런 게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 이런 생각이 있어. 그러나 도무지 있는 걸 못 봤어. 소위 음문풀이 한다고 하는 소리 더러 있는데 그게 그렇게 아름답지 않아요? 그런 생각을 많이 하던 끝에 한번은 ‘기니디리미비시이지치키티피히’ 이 읽어봐. 그게 뜻이 있는 글이라. 이 말이에요. 그런데 이전에 들으면 너무도 많이 들었으니까 혹시 여기 안 들으신 이가 있으면 좀 생각해 보시오. ‘기니’ 내가 찾는 그 이가 있어요. 그게 기니입니다. 기니 이거는 제일 다른데 사람 잘 못씁니다. 여기에 기다 굳다. 하는 말이 있는데 여기에 자필이 있어요. 그럼 기다 굳다 하는 것을 자세히 알려면 여기서 제일 잘 알아들어요. ‘기니’ 그거 어떻게든 무얼 기려요. 기도를 드리든지 제사를 드리든지 드립니다. 그가 드려, 드리니 드리고 있는데 기도드리고 있는데 제사 드리고 있는데 빛이 보여. 그리고 제사 드리고 있는데 보인다고, 그 보이는데 거기 존경사가 거기 들어가 보이신다. 이 말이야. 그래요. ‘비시이지’ 보인다. 비시 인제 그 다음은 보던 사람이 가만있지 못해요. 그래 일어서 보던 사람이 일어서요. 키가 올라가니까 키가 커져요. ‘치키’ 그럼 나가든게 흐렸던지 구름이 터져요. ‘치키티’에요. 피 나가던 게 히에요. ‘히’는 까정 이예요. 까정 그 까정이라는 게 히라고 하는 게 한문 읽을 적에 토라는데 있어. 자 천자로 쓰여서 인지 그렇게 읽는데 히 라는 토를 까정, 저 임금부터 저 뭇 백성 까정, 그런데 히 그래, ‘키치티피히’ 이렇게 되거든. 그게 온전히 뜻이 박힌 글이 아니냐? 내가 그러거든. 일본사람이 ‘이로하니오에도’ 그와 같이 훌륭한 글이 되었어. ‘이로하니오에도’는 불경의 진리가 거기 죄다 들어있어. 불법의 진리가 거기 죄다 들어있어요. ‘기니디리미비시이지치키티피히’ 그것은 하나님이 예수 믿고 하나님께 아버지께 까지 가서 완전한 우리 목숨을 이루자 하는 그 뜻이 거기 꼭 들었습니다. 지혜 지가 누구야? 우리 님이야. 예수야, 예수가 보이는데 기도를 드리고 계세요. 기도드리는 것이 길이니 빛이니 변화산에 따라 올라간 사도 중에 한 사람인줄 모르지만 그게 보인다. ‘기리니 비시지’ 그걸 발견하면 그냥 못 있어. 키, 키가 있는 대로 커. 그럼 키 튀어나가야 해. 티 피 히 갈 데 다가요. 그런 뜻이 거기 실려 있다고. ‘기니디리미비시이지치키티피히’ 하는 게 글이야. 그것만 그러면 ‘아야어여오요우유으이야’ 거기 어떤 뜻이 아주 들어있는 글이에요. 나는 이건 어떤 의미로는 나는 장로님 계시는데 용서하고 들으시오. 왜 하든기도 자꾸 하고 하던 찬미 자꾸 해요? 그런데 이것은 한번만 듣고 말아야 옳은 겁니까? 일본 사람은 ‘이로하니’ 하듯이 우리 ‘기니디리미비시이지치키티피히’ ‘아야어여오요우유으이야’ 해도 그 거기서 하는 건 그건 모음이에요. 어머니소리, 그 아야 어린애 찾는 겁니다. 내 아이야 아이야 어린애 어서어서 하지 않지, ‘어여, 어여’ 어린애 부를 때 개 부를 때도 어여, 어여, 그래. 그 아야 어여, 그런데 어머니 소리가 나니까 아이가 불러 봐. 어머니가 위에 계셔서 아래 있는 어린애를 찾아. 그래, 어머니가 우유 위에 있다. 우유 그래 위에서 소리가 나. 어린애 찾는데 으이야, 가로막혀

(끊김)

 

‘으이’ 그럼 가운데 아 실제로 어머니보고 반가울 때 아 이러는 거야. 으 이 아 하게 돼. 어머니가 아기를 만났어. 이제 미친년이 되어가. 써 놓은걸 갔다가 그런 뜻이 있다고 부쳐서 주장하는 거라고 할런지 몰라. 그러나 이 ‘기니디리미비시이지치키티피히’ ‘아야어여오요우유으이야’. 그렇게 하는 거야. 그래 내가 이 궁금한 거는 내가 이렇게 하는데 혼자 있다가도 내가 이렇게 생각해 할 수가 있나? 없나? 그거 내가 궁금한 거야. 난 다른 거 몰라도 한글이라는 거 있는 동안에 ‘기니디리미비시이지치키티피히’ 그게 끊어지는 게 없고 ‘아야어여오요우유으이야’ 없어질 리가 없어. 그러니까 그거 일본사람이 ‘이로하니’ 하는 거 모양으로 우리나라 동포들이 다 그거 그렇게 읽다가 마땅히 부를 찬미를 부르는 겁니다. 그런 거고 그걸 도무지 안하고 글을 쓴다. 그건 하나님이 주신 이 계시를 갖다가 온전히 받아 가지고 사는 게 아닙니다. 이건 분명히 계시입니다. 그럼 이상합니다. 인류밖에 모르는 사람들로 하여금 어떻게 이렇게 이 계시라고 할 수밖에 없는 이걸로 우리말로 적을 수 있는 글이 어째 생겼느냐? 이겁니다. 이상한 겁니다. 그래 올이라는 건 언제든지 어디 있든지 그걸 건져서 내가 가져야 합니다. 진리는 내가 가지고 살아야 해요. 이 한글 나타내는 건 진리입니다. 그럼 이걸로 오늘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 앞에서 비는 것이 비는 데는 감사하는 생각이 늘 함께 해야 합니다. 이것은 이쯤 해가지고 오늘 새로 깨서 일어나서, 하나님 주님 앞에 여러분과 함께 하나님이 사뭇 하나님이 나타내주신 모든 계시 그것을 생각함으로 이만큼 이것이 요만큼 일어나는 데는 이 시간까지 우선 사는 것뿐입니다. 나사는 것뿐이에요. 요것 사는 데는 여러분과 꼭 같이 요렇게 살아야만 아주 하나님 작정하시니까 이렇게 되어가지고 마칩니다.

-진달래 찬양-

소리를 우리 쓰지 않습니다. 아래 아자 ᄋᆞ 그것은 울리지 않아요. 울리는 건 길게 내는 소리가 울립니다. 아- 하는 건 소리 성자, 아- 이건 소리성자야. ᄋᆞ 이건 음이에요. 소리 음자를 쓰지, 소리 성자가 아니에요. 소리 성자는 아- 이겁니다. ᄋᆞ는 그건 울리지 않아요. 소리는 뜻을 집어넣은걸 발표하려고 나오는 건데 거기는 울림소리만 있어. 거기는 소리만 컸지. 뜻이 빠지는 일이 많습니다. 그럼 소리는 아직 있는둥 마는둥 하는데 뜻이 꼭 들어있는걸 그건 은혜에요. 그래 음악이라는 게 소리 음(音)자입니다. 그것도 높은 음을 가지고 좋은 목소리를 가지고 크게 음을 내서 그렇게 되면 성악가라. 그러지 않아요? 너무 크게 여럿이 좋다고 자꾸 할 때 음악가지 그냥 그건 떠드는 거지, 원 바른 뜻은 들어있는 깊은 소리가 못됩니다. 울린다는 거는 쓸데없는 겁니다. 속에 뜻이 온전히 들어있어야 되요. 그러게 소리 음자라는 건 복된 소리입니다. 요란하게 짓빠굽는 게 아닙니다. 그것만 보면 방언이라는 거 날뛰는 거, 그거 다 마귀가 틈타기 쉬운 것뿐이지, 성신이 감화하실 성신만 거기 계실수가 없어요. 그래 좋은 설교라. 꼭 바른 소리로 설교라는 건, 그 하나님의 가르치신 교훈을 설명하는 겁니다. 그럼 바른 소리 설교하는데 하필 종이냐? 이건 무슨 종지라. 이건 무슨 신조라. 있어야지요. 신조가 있어야지, 그때 뭘 하면 탁 내걸어요. 그거 뒤 떠드는 거뿐입니다. 사도신경 이라는 거 사실은 말이지. 그렇게 더덕더덕 주워 모아 놓은 것뿐이지. 정 요긴한 게 아닙니다. 그래 내 접데 처음 봤는데 소위 내촌감사님이 종질이 좋다고 해서 거시기 하는 분이 무교회의 뭐라고 하지 않습니까? 무교회 거시기에 어따가 내촌 감사 그이는 물론 신앙을 잘 하는 이 인데 그 이는 이단자라. 이단자라고 그렇게 글 쓴 사람이 돼서 그걸 어떤 잡지에 어떤 이가 냈어요. 그런데 그렇게 하고 보면요, 나는 내천감사를 그걸 여기 우리나라처럼 여섯 자로 해서 내촌이 복음전하는 길 자기네도 하겠다고 해서 성서 조선이라고 하고 한 백 수십 호 까지 잡지가 나고 그 잡지를 주필하던 이가 그만 죽어서 끝이 났는데 죽은 이가 김교신 이라는 이 아닙니까? 그거를 여섯 사람 다 아는 건 아닙니다. 그중에 몇 사람은 압니다. 그래서 성서조선 그거 하는데도 그 잡지 나는 대로 이 사람 가져다 읽었어요. 안 읽지 않았어요. 그런 사람인데 거기 글을 도무지 안 썼어요. 그럼 왜 안 썼냐? 나는 그때부터도 꼭 믿는 신조 그대로 내가 믿는다고 그렇지 않아요. 그리고 사도 신조를 내가 외우지 않았어요. 왜 그런고 하니 나는 사도 신조를 보니까 내리 읽는 거 그거 주섬주섬 모아서 엮어놓은 것뿐이지. 그 생명이 통하지 않아요. 그러니까 그거 외우기까지 해서 할 필요가 없어. 그 토막토막 내가 알고 있어. 생각 날 때마다 그 생각이 날만한 자리에서 그거 믿는 거지요. 믿는 거 조르르 외우는데서 무슨 소용이 있어. 외우고 그렇게 하면 거죽만 입만 외우지 정신없는 거예요. 그러면 만날 그래야 이 불교가 왜 이지경이 되었는데 거저 외우기만 해요. 생각이 다 해보지를 못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 모양이 된 거예요. 헛되고 헛된 겁니다. 그러니까 원불교가 그깟 부처 만들고 어쩌고 하는 거예요. 쓸데없다. 둥그렇게 그 방향 해가 뜨는 방향으로 둥그렇게 그것도 자기 마음속에서 둥그렇게 해가지고 구하면 되지. 그래 우상 안 만드는 거야. 그럼 백성의 마음이라는 건 이렇게 모으면 그쪽으로 향하며 모은다는 거야. 그래 그걸 제가 치워버렸다면 또 만들어 가지고 오늘날 만들어 가지고 그저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게 전부 거죽으로만 그렇지, 속에 생명 속에, 그 심성이 상관이 되는 거예요. 그럼 설교라 하는데 설교라는 건 가르친 것을 이렇게, 이렇게 가르쳐라 하는 그거, 그것을 주석을 내서 알도록 설명을 하는 거예요. 진리가 들은 말씀을 설명을 하게 되요. 그런데 바른 소리를 설명을 해야 해요. 그럼 바른 소리를 설명을 하는데 무슨 소리냐? 그럼 신조가 뭐냐? 사도신경을 조르르 외워야만 된다고 그 한마디 한마디가 그때 사람이 사는데 생명의 신조로 사는 거야. 나는 그렇게 사는데 그걸 또 외우고, 외우고 자기 생이 커져요. 그거 일없어. 그래 난 안 외워요. 그래 내촌은 꼭 그 교회 조직하는 거 노회나 조직하는 거, 그게 부자연하다. 그게 하나님 뜻 아니다. 그걸 부정하는 거야. 교회한다하면 그 제도 그거 하니까 그래 무교회주의지, 모이지 않는다는 말 아닙니다. 그런데 신앙 꼿꼿해요. 그런데 사도신경 외우지 않아. 그도 외우지 않지만 사도신경 죄다 읽고 안 읽는다는 거 아니에요. 그런데 내촌 이를 이단이라 그랬어. 그럼 나도 내촌이만큼 이단이지, 나도 이단이야. 이렇게 되는 거니까 동기가 무슨 동기냐 말이야. 우리의 하는 건 동기가 여기 있다. 동기가 뭐라고 내 세우는 것도 이것도 우상입니다. 우상입니다. 우상인줄 아는 종파를 자꾸 종파를 만드는 거야. 모두 꼭 바른 소리만 먼저 나타난 그것은 설명만 하고 서로 알아야 해요. 그리고는 고만, 그러니까 바른 소리로 가르치는 걸 설명하는데 용마루, 마루, 마루가 무슨 말이야? 마루 일없어. 그럼 종당에는 가르치는 세상인데 가르치는 것 만 그 가르치는 용마루야. 용마루, 그래요. 하필 용마루는 무얼 하느냐? 그럼 정말 가르치는 건 뭡니까? 가르치는 건 원래 나타나는 건 뭐야? 그것은 본인데 본뜻인데, 본뜻은 뭡니까? 본이라는 건 내 밑 둥이지, 밑 둥은 어딥니까? 밑 둥은 나무뿌리가 밑 둥입니다. 부득이해서 나무뿌리라 했지, 생각의 뿌리는 지극히 높은 우리 아버지 계신 데가 뿌리에요. 그래 본뜻인데 기관의 뜻 기관의 뜻에서 나오는 소견 의견이야. 의식이 사는데 의식은 의견이 나오는 뜻이에요. 의견을 가지고 이 세상 사는데 그런데 기본의 의견이야. 하나님으로 조차 하나님 뜻으로 볼 수 있는 그 의견, 그게 기본이야. 본이 되어 나오는데, 본 의견이 나오는 데는, 본뜻이 나오는 데는, 아버지 뜻이 나오는 데는 하나님 뜻이 나오는 말이 나오는 데는, 그 하나님의 뜻에 그 알맹이를 요거라, 그걸 나타내려고 하는데, 사도신경 그런 게 다 알찬 용어라 하고 나타내는 거예요. 거기에는 맛을 맛있다. 그 맛이 새큼하다든지 달콤하다든지 그 소리 필요 없다. 새콤 달콤 그 소리 가지고 나타날 수 있는 게 아니야. 그래 거기는 그 맛을 뜻을 그걸 말할 수 없어요. 그건 원 의견은 진실해요. 그럴 거 같으면 사도신경 같은 거, 쪼르르 외우고, 외우고, 어떨 때 처음에 어려서 자랄 때 더러 외우겠지. 외웠다고 쪼르르 외우는 게 재주가 아닙니다. 그러니까 그거 잊어버려도 그만이야. 그 외우는 거 잊어버렸다고 그 생명 속에 들어가는 게 없어지는 게 아니에요. 어제 들어가서 그러면 그것을 그대로 살아서 맨날 힘 있게 살면 그게 진리이지, 조르륵 외우는 게 영생에 들어가는 게 아닙니다. 그런 뜻이에요. 본이면 밑 둥의 의견이 나오는 데는 불원지라. 맛은 망하지 않습니다. 그래 정말 항상 먹어야 하는 것은 달고 고소하고 그따위가 아닙니다. 달고 고소하고 새큼한 거 이건 잠깐 이야. 그거 먹고 사는 거 아니에요. 그건 기본으로 먹는 거는 맑은 물, 싱싱하고 깨끗한 밥, 또 과실로 말하면 뭐 그렇게 괴상한 거 말고 과실도 시원하고 점잖고 그런 것을 찾아요. 날짜가 지나가면 해가 되요. 한 살 먹고 두 살 먹고 해마다 해를 넘기는데서 우리 생명이 사는데 날짜가 지나간 대로 해를 이루어요. 또 날짜라는 건 지나가는 거야. 날짜가 지나가면 해가 되는데 그러는 동안에 자기도 모르게 눈이 밝아집니다. 이 껍데기 눈은 늙을수록 늙어요. 흐려요. 돋보기를 쓰게 되요. 그러나 속 본 정신은 눈이 흐려질수록 정신은 맑아져요. 종당 보는 것도 속에 많이 깨달아지도록 봐야 하는데 제일 잘 보는 건 장님이 더 잘 봅니다. 그러니까 너희가 본다고 함으로 볼 걸 못 봤다. 너희가 일찍이 보지 못하는 장님이 되었다면 지금 이 장님이 눈 뜬것 모양으로 환히 떴을 거다. 이 그렇게 가르치지 않습니까? 본다고 하다고 못보고 캄캄해 나는 볼 수 없다고 하던 그 사람이 깨닫고, 이 세상은 그런 이치가 거기 있어요. 너희가 본다고 함으로 볼 것을 못 본다. 일찌감치 못 보게 되었다면 오늘 이 장님이 눈 뜬것 모양으로 밝아질걸 그랬다. ‘일과상세 목련일이라’ 날이 지나갈수록 시간이 지나갈수록 해가 이르는데 그 해가 이러야 뭘 해? 한 살 늙었고 두 살 늙었고 여든 번 늙었고 여든 한번 늙었고 여든 두 번 늙었지, 뭐 거기 더 한 게 어디가 있어? 그러니까 날이지나 해가 이르는데 눈이 밝아야 한다. 이 눈은 아니에요. 눈은 아니 보여도, 보는 속에 있는 눈 그 밝아, 속에 있는 눈이 밝아지는 게 종당 그 절 그 하나, 그거 하나 때문에 들어가자는 거야. 날이 지면 해가 뜨는데 눈이 밝은 거 하나 꼭꼭 지난밤도 꼭 잘 잤어요. 오늘 새벽에도 밤 꼭 잘 때 깨었으면 일어나야 해요. 일어났어. 일어났으면 여기 나와야 해요. 그래 나왔어. 그렇게 꼭 그런 거지. 그러니까 꼭꼭 할 거를 하면 꼭꼭 할 거를 하면 참 말씀에 가 닿는 겁니다. 종당 목적은 지성이야 지성이면 감천이야. 우리가 염불을 하는 사람은 적지만 지성감천이라는 말은 죄다 해요. 옳지요. 지성감천이야. 그럼 지성을 하려면 지성을 해야 한다. 그래, 지성은 마음으로 드려야지. 이건 지성을 드려야 한다. 그래 지성을 쌀을 많이 가지고 가서 돈을 많이 가지고가서 지성이라고? 이게 무슨 도깨비 노릇입니까? 무슨 절을 지성을 간다고 그걸로 됩니까? 이놈의 세상이 망할 세상이야. 돈 가지고 쌀 가지고 지성 드리러 간다. 그래 거기서 무엇을 볼 겁니까? 무엇을 해? 거기서 떡에 밥에, 그게 지성이야? 과필지성 꼭꼭해서 감천하는 지성이 되어야 되요. 참 말씀이 그런데 이거 뭐야 처음에 자기 말 듣는 귀, 거죽 귀를 찾아 잘 안 들리니 속에 귀를 찾아 그걸 점점 더 거룩하게 됩니다. 그게 거룩한 거야. 그러니까 귀가 거룩하게 우리나라 글 점하나 꼭 찍어놔. 하늘 천이야. 그 점이 사람은 산다는 거 생각을 하기 시작하며 사는 겁니다. 숨이 졌다. 생각할 수 없다는 게 숨이 진거야. 그럼 숨을 쉰다는 건 생각할 수 있다는 거야. 그러니까 귀가 거룩하게 아, 알아지는 거 그래, 아 라는 것이 알자고하는 거라고, 그래 생각이 사는 거니까 생각이 출발해, 살기 시작하는 게 먼저 말이라고 하는 게 시작이에요. 그래 아 자가 맨 먼저야. 아 또 그 다음에 물질세계라 물질이니까 알아야 하니까 봐야하니까 그럼 보는 거예요. 아는 보는 겁니다. 아를 보는데 그러게 아, 봐. 그래 아, 봐라는 게 아버지를 먼저 찾게 되요. 먼저 봐야 하는 게 아 봐. 아버지를 먼저 봐요. 아버지를 알게 보자는 거야. 그래 우리말로도 아바 인데 히브리말로도 아바야. 이게 나는 숨 쉬는 거예요. 이 때 이랬어요. 며칠이 이랬어요. 숨 쉬는 거뿐이에요. 우리다 숨 쉬는 거뿐이에요. 말이 나가고 말이 들어오고 그런데 재미있는 게 있어요. 죄다 뚜껑이 있지 않습니까? 뚜껑이 있어. 그런데 콧구멍 하고 귀구 멍은 열어놨어. 숨 쉬는 거 하고 말 듣는 거하고는 기도도 하고, 어느 때 한때가 아니고 낮에도 하고 밤에도 하고 그러니까 그렇게 환히 뚫어놓고 자도 뚫어놓고 깨도 뚫어놓고 뭐든지 코도 환히 뚫렸어. 잠깐도 쉬느라고 못 쉬는 게 숨 쉬는 겁니다. 쉬느라고 못 쉬는 게 뭐냐? 숨이요. 그래 쉰다고 잘 때는 코를 더 골지 않아요? 어제 내가 혼자 생각해도 이렇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