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최북단 섬 백령도에 갔다가 안개주의보로 두시간 반 출항이 늦어져 인천에 오후 1시 50분에 도착하여 점심을 먹고 내려왔다. 백령도는 친구가 공군으로 휴전후 근무했고 얘기만 듣다가 손자가 근무하게 되어 면회차 더녀올수 있었다.
오장로님의 걸어오신 길 (김춘일 언니 증언))
1942년 사부님의 거룩한 사랑의 향기는 성령의 바람을 따라 사방으로 퍼지고 있었다. 그때 남원에 계시는 오북환 집사님이 이 향기의 소식을 들으셨다.
장로님의 고향은 전북 순창이시다. 조혼을 하셨는데 부인이 부끄러워 얼굴을 들어 쳐다보지도 못하고 3년간 남매같이 지냈다. 이런 아들을 보는 아버지는 너무 답답하게 생각되어 객지로 내보내기로 했다. 때마침 부산에 사는 아들의 친구 삼촌이 와서 딸려 보냈다. 공책이나 연필살돈도 제대로 안주시던 아버지가 그때 돈 300원을 주워 사람 되어오라고 객지로 내몰았다. 장로님은 그때 19세 때였다. 친구 삼촌은 리어카를 사서 숯장사를 하게했다. 참숯 2섬을 사서 3섬으로 만들어 주면서 팔아오라고 했다. 농촌에서 아무것도 모르고 자라온 순진한 장로님은 타향 부산에서 낯 설은 골목길을 누비며 ‘숯 사시요’를 외쳤다. 간혹 일본여자가 나와 숯섬을 들어보고는 근이 부족하다고 하면서 조선사람 나쁘다고 핀잔을 주면서 사주지를 않았다. 그때마다 숯장사는 부끄럽고 괴로웠다. 아버지는 사람 되라고 그 큰돈까지 주워서 내보냈는데 언제나 사람이 될 것인가 땅이 꺼지도록 한숨만 나오고 리어카를 끄는 발걸음은 천근이나 되게 무거웠다. 그렇게 떠돌이 생활을 하던 어느 날 아는 사람소개로 일본 목수 밑에서 목수 일을 배우게 되었다. 바보 아닌 바보는 식모살이를 하면서도 기쁘고 즐거웠다. 밤 12시가 넘도록 충성을 다해 열심히 배워서 3년 만에 졸업장을 받았다. 열심히 돈을 벌어 세계 일주를 하는 것이 큰 꿈이었다. 목공소를 내기 위해 어머니를 모셔왔다. 고향에 남겨둔 부인은 시집과 친정집을 왕래하다가 결혼 한지 6년 만에 친정집에서 “에이 무정한 사람” 이 한마디를 남기고 세상을 떴다. 처녀의 몸으로 깨끗이 세상을 떴다. 하루는 친구와 함께 극장에서 영화를 보고 일어서는데 갑자기 무릎이 꾸뻑했다. 종기와 관절이 전신으로 퍼져 자리에 눕고 말았다. 세상은 캄캄해지고 아름답던 꿈들은 수포로 돌아갔다. 절망만 쌓이고 죽고만 싶었지만 어머니 앞에서 죽을 수도 없었다. 그러나 어머니의 지극한 정성으로 6개월 만에 겨우 일어나 출입을 할 수 있었다. 하루는 밖에 나갔다가 벽에 붙어 있는 광고를 보고 부산초한교회를 찾아가셨다. 부흥회가 열리고 강사는 김 인서 장로님이였다. 설교제목은 인생의 목적이 무엇인가였다. 장로님도 늘 궁금했던 문제였다. 인생의 제일 큰 목적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그날 밤 그 설교의 말씀이 옥토에 떨어진 씨가 되어 아버지의 은총으로 100배의 결실을 맺게 된 것이다. 그때 장로님은 25세 때였다. 그때부터 예수를 믿게 되어 26세 때 교인들의 지시에 따라 열심 한 처녀와 결혼을 했다. 그리고 6년간 교회에 충성을 다했다. 그러나 영혼 깊은 곳에 도사리고 있는 인생문제 즉 불안과 초조와 고독과 두려움은 날이 갈수록 더해만 가고 평화는 없었다.
처음에는 목사로부터 모든 교인들까지 깨끗한 천사로 보였는데 말씀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고멀게 보였다. 그래서 고민 끝에 교회 나가는 종교 생활을 그만 두고 집에서 말씀보고 기도하시면서 살기로 했다. 그동안 삼남매를 낳아 기르면서 대외 적으로는 행복한 생활이었다. 3.1목공소라는 간판을 붙이고 배 장로님 서 집사님 세 사람이 함께 목공소 일을 했다. 그러나 영혼의 문제는 계속되었다. 영혼의 평화와 기쁨은 없었다. 교회에 나가나 안 나가나 마찬가지였다. 목구멍에 붙어있는 가래와 같이 불안과 허무는 여전했다. 그렇게 방황하던 어느 날 이 현필 선생의 거룩한 순결의 향기의 소식을 듣게 되었다. 목이 탄 영혼에게 큰 기쁨의 복음적 희소식이었다. 며칠 후 뵙고 싶다는 연락을 받으신 하나님의 종은 남원 3.1목공소를 찾으셨다. 하나님의 크신 은총과 섭리가 함께 역사하셨다. 두 분의 맛남은 천재일우의 만남이었다. 장로님은 하나님의 종을 뵙자 지금까지 입에만 물고 있던 큰 질문을 무겁게 던지셨다.
“어떻게 믿어야 예수를 바로 믿을수 있을까요”했다. 하나님의 종은 망설이지 않으시고 간단하게 대답하셨다.“오장치 져야지요!” (깡통 차야지요.) 하셨다. 이 말씀을 듣는 순간 지금까지 답답하게 막혀있던 생수가 터져 나왔다. 그리고 두 생수는 합류되어 성령의 은총으로 힘차게 흐르기 시작했다.
“오장치 져야지요.” 이 말씀을 듣는 순간 목에 붙어있던 가래가 뚝 떨어지고 감격의 눈물이 흘렀다. 10년 전 인생의 목적을 알았을 때 얼마나 기쁘고 감격했던가. 그러나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드리는 진리의 길에서는 빗나간 길에서 방황하는 자신을 발견하신 것이다. [롬10: 2 - 공동번역]제 나름의
☉복음은 극악 극선이 하나 되는 것이다.
이제야 인생의 목적이 바로 보이고 말씀이 바로 보이고 십자가의 길이 진리요 생명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장로님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예’ 하고 순종하신 아브라함과 같이 고향과 친척 그리고 목공소를 뒤로하고 거지가 된 지도자를 따라 삼남매와 부인 5식구는 오장치를 지고 하늘가는 밝은 길, 거룩한 길, 구원의 길로 나선 것이다. 아멘.
1942년 장로님 34세 때 출가하셔서 60년을 한길만을 걸어오셨다. 부인이 시험에 들어 방황하다 나가도 하나님이 주신 진리의 사명의 길에서 충성을 다하셨다. 그리고 천지가 진동하는 큰 깨달음을 외치셨다.
“복음은 극악 극선이 하나 되는 것이다.”라고 극선이신 예수님을 만나는 길은 내가 극악이 되는 것이다. 예수님과 막달라 마리아.
사부님 생존 시 경기도 계명산 분원에 계신 장로님을 몇 달 후 방문하셨다.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냐고 물으시자 ‘저는 독사같이 살았습니다. 저는 독사입니다’ 하시자 사부님은 ‘나는 독사의 왕이요’라고 하셨다. 거룩한 화답이었다. 동광원의 믿음의 두 뿌리는 두 분 두 독사인 것이다. 극악이 되셔서 극선이신 예수님을 만나 하나가 되셨다.
☉심판과 구원이 긍정과 부정이 동시에 성취된 것이다. -아멘-
아버지, 성모님 감사합니다.
-사막에서 편지. 하나님을 만남-
두 독사의 만남 2003년 5월 도암에서
왕 독사 은총 받아 허물 벗고 나와서
순결이 구원이요 평화라고 외치고
가난이 복이라고 깡통을 울리니
숨어있던 작은 독사 같이 들고 나왔네.
두 독사 장단 맞춰 북치고 장구치니
굴속에서 방황하던 새끼들이 기어 나와
아버지의 은총 받아 아들딸이 되었네.
선악이 하나 되어 참 복음을 외치니
동광원이 꽃이 되고 앵무새가 노래하네.
날마다 새 하늘과 날마다 새 날일세.
천년이 하루같이 감사가 넘치네..
-아멘-
☉ 이 스승님과 장로님을 추모하면서 2003. 도암에서...
2003년 봄, 여름 2차례 광주 호남 신학 교수 차 종순 교수님이 한국 기독교 100년사를 써서 미국에다 책으로 내신다고 하시면서 도암에 오셨다. 한국 기독교 100년사에 위대한 순교자도 많았지만 이 세종 이 현필 두 성자가 나오셔서 보람을 느끼고 긍지를 가지고 기쁘게 쓰신다고 하셨다. 사부님 생존 시 무등산에서 나무 해다 땠는데, 사부님께서 무등산 나무하는데 오셔서 앞으로 몇 100년 후 깨끗하게 살던 성남성녀들이 나무하러 다니는 길이라고 말할 때가 온다고 하셨는데 100년도 못되어서 두 성인의 거룩한 인격이 온 세상에 알려지게 되어서 동광원이 꽃이 되고 앵무새가 노래한다고 느꼈습니다. 철인 플라톤의 말과 같이 이 시대 이 땅에 태어난 것을 늘 감사할 뿐입니다. 아버지께 영광되기를 빌 뿐입니다. 은총과 평화를 빕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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