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일

제주도에 가는 날 : 가 난

mamuli0 2022. 4. 7. 15:42

 자두와 벗꽃이 활짝 피고 수선화가 지고피고 꽃이 많은 봄날, 멀리 떨어져 만나지 못한 팔순 중반이 되어 불편한 몸으로 대면하고자 어려운 길에 부름 받고 갑자기 우수영에서 배편으로 추자도를 경유하여 제주에 갔다.

 

 

가   난  

마태복음 5장. 정인세 원장 

 마태복음 5장 1절서부터, 예수께서 군중을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셨을 때에 제자들이 그 곁으로 왔다. 예수께서는 그들을 가르치시려고 말씀을 시작하셨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니,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으리니,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그들은 땅을 차지하리니,
행복하여라.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그들은 만족하리니, 
행복하여라. 자비를 베푸는 사람들 그들은 자비를 받으리니,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나님을 뵈오리니, 
행복하여라.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들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이 되리니,
행복하여라. 옳은 일을 하다가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니 나 때문에 모욕을 당하고 박해를 받고 터무니없는 말로 갖은 비난을 받을 때에 여러분은 행복 합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시오. 여러분이 받을 큰 상이 하늘에 마련되어 있습니다. 옛 예언자도 여러분보다 앞서 같은 박해를 받았습니다. 12절까지 말씀 낭독 했습니다.  
 찬송가 364장 부르겠습니다.  

 


 지금 산상보훈 가운데서 팔복을 읽어 드렸습니다. 예수님께서 말한 여덟 가지 복은 무엇이냐? 행복하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행복이 무엇이냐? 하는 것을 읽었습니다. 그중에서 오늘은 시간이 허락 되는대로 첫째 복, 둘째 복,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누가복음에는 가난한자는 복이 있다. 그렇게 말씀을 했지요? 마태복음에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은 행복하다. 왜 가난한 사람이 복이 있느냐? 무슨 뜻인가? 둘째로는 애통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슬퍼하는 사람은 복이 있다. 또는 너희 이제 우는 사람은 복이 있다. 그랬는데 그건 무슨 뜻일까? 그것을 이 시간에 생각해 보려고 그럽니다. 우선 이 두 가지 말씀만 우리가 생각을 해도 이건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행복과는 반대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가난한 걸 불행하다고, 그러고 또 애통하고 슬퍼하고 눈물 흘리는 사람을 불행한 사람이라고 그러지 도저히 그런 데서는 행복을 찾지 못한다고 이렇게 말 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이 지금 여기 하신 이 말씀, 이것은 진리인데 진리 안에서 볼 적에는 모든 것이 거꾸로 보여 진다. 그래서 가치의 전도라고 이렇게 말 합니다. 오늘 세상 사람들은 부자만이 복이 있다. 잘사는 사람이 복이 있다. 그렇게 보는데 여기는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 그러니까 세상 사람들이 보는 것을 거꾸로 보는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전도라고 이렇게 마치 세상을 거꾸로 서서 보는 거와 같이 보는 거라고 이렇게 말 합니다. 그러나 이 가난 이라는 것이 무엇이냐? 우리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가난이라는 것은 마음이 가난하다. 하는 것은 보통 겸허한 것이 곧 가난한 것이다. 이렇게 생각들 하고 또 가르치기도 합니다. 겸허한 것 겸손한 것 자기를 몹시 낮추고 마음을 낮추는 것 그것이 가난한 마음이다. 가난한 마음이라는 것은 겸손한 마음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도 생각을 합니다. 그것도 어느 정도 이치에 맞는 말씀이라고 생각 됩니다. 또 가난이라는 것은 관능에서의 해탈이다. 이렇게도 말 합니다. 사람은 정욕이라는 관능을 가지고 있고 물욕이라는 관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물욕이라는 거, 소유욕 이라는 거, 물질을 갖고 싶어 하는 거, 부자가 되려고 한다든지, 또 먹을 것을 많이 먹고자 하는 것이라든지, 좋은 집을 갖고 싶어 하는 것이라든지 또 좋은 옷을 많이 장만 하려고 하는 것이라든지, 그게 다 소유욕이고, 인생으로서는 당연하고, 마땅한 일로들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런 것은 관능이라고도 말 합니다. 본성적으로 사람은 그걸 욕구하기 때문에 그래서 욕이라는 거, 갖고자 하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라. 본성이라. 관능이라. 이렇게 말을 합니다. 그런데 가난이라는 것은 그것을 거부하는 태도입니다. 재산을 다 없애버려야 가난이 되고 내가 갖고자 하는 욕심을 다 버려버려야 가난이 됩니다. 그러니까 그 관능에서 해탈하는 것이 곧 가난이다. 이렇게 말을 하지요.

 


 그러기 때문에 옛날이나 오늘이나 성인들 깨달은 사람들은 모든 죄악의 뿌리가 거기서 생긴다. 하는걸 알기 때문에 그놈의 욕심 때문에 죄를 짓는다. 야고보서에서 말씀 하셨듯이 욕심이 잉태한즉 죄악을 낳고 죄악이 장성한즉 사망을 낳는다. 이렇게 야고보 사도는 가르치고 계시지요. 모든 죄의 뿌리를 찾아 들어가면 전부 욕심 때문에 생기니까 그 욕심만 뽑아 버리면 죄지을 이유가 없어진다. 그래서 이 지금 가난에서 생기는 욕심만 하나 추켜들면  물질이지요. 가난에 반대되는 것 부자, 부자는 보통으로 물질적으로 풍성한 걸 가르치니까 그 물질적으로 풍성한 것을 거부하는 거 그걸 혹은 청빈이라 또 동양의 옛날 성인들은 안빈낙도한다. 그렇게 가르쳐 왔지요. 그걸 깨달은 사람들, 그 물질이 얼마나 더럽고 헛되고 예수님도 네가 재물을 하늘에 쌓아라. 부자가 하늘나라로 들어가기는 약대가 바늘구멍으로 나가기보다 어렵다. 하는 그런 말씀들을 보면 그 부자가 되려고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악한 일을 많이 해야 되고 죄를 많이 지어야 되고 그놈의 재물 때문에 얼마나 인간사회에 비극이 눈물 나는 일이 처참하고 잔인한 일이, 그놈의 돈 때문에 얼마나 많이 생기는가? 쪼금만 있으면 굶주리지 않아도 될 사람이 돈이 조금 없어서 굶주려서 죽게 되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돈을 많이 갖으려고 엄청난 죄를 저지르는 사람이 있고, 돈이 조금만 있으면 병원에 가서 부모나 자식의 병을 고쳐야 할 사람이 돈이 조금이 없어서 그것 못하기 때문에 얼마나 안달을 하고 눈물을 짜내는 사람이  많은가? 그런 걸 생각 할 때에 이놈의 돈이 무엇이냐? 이놈의 돈을 미워 할 수도 없고, 이놈의 돈을 저주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마음대로 될 것 같은데 되지 않는 게 돈이고, 그래 사람들은 이래저래 없는 사람들은 없는 사람대로, 있는 사람은 있는 사람대로 그 돈 때문에 정신을 전부 팔아먹고, 거기 그것에 종노릇을 하고, 그것 때문에 살고, 그것 때문에 죽는 형편이 아닌가? 인생이 이렇게 값어치가 없는 것인가? 이런 생각에 깨달은 사람은 아니다. 여기서 해탈이 되어야한다. 어떤지 물질에서 떠나야 한다. 그리고 해탈하는데 그것이 관능에서 해탈이라. 또 청빈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은 그걸 깨달은 사람들이 그렇게 들어가는 것이지요. 그러면 가난이라는 건 그런 것인가? 여기 오 경웅 박사가 말씀 한 대로 청빈의 자진 감수를 가난이라고도 한다. 이렇게 말을 했는데 자진해서, 자진해서 내가 재물을 버리고 재산을 버리고 차라리 굶어죽을 지언 정 가난하게 살자. 그런 것을 깨달은 사람 자진해서 감수 달게 가난을 받아들이는 그걸 가난을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말하느냐? 그러나 이것도 한 모양은 되지요. 설명은 되지만 그렇지 않다. 

 


 정말 가난이라는 것은 무엇이냐? 가난을 참으로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을 가르치는 것이냐? 그것은 비참의 심연이 자혜의 심연을 향해 자체를 전량의 자혜를 채워달라고 외치는 형상을 상기케 한다. 이렇게 어려운 결론을 내렸는데 가난에 대해서 이건 ‘내심낙원’에서 내린 결론 이지요. 한 마디로 하면, 사람은 이 물질 때문에 육신 때문에 비참하게 살다가 비참하게 지옥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이렇게 인생의 전부라고 오늘 볼 수가 있는데 거기서 어떻게 하면 헤어날까? 이 물질이나 이 육체에 빠져서 깊은, 깊은 비참의 심연이라고 그랬어요. 아주 깊은 수렁, 밑도 없고 끝도 없는 밑창으로 빠져 들어가는 이 영혼이 어떻게 하면 여기서 헤어날까?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그것들을 느낍니다. 어렸을 적에는 차라리 모르다가 나이가 먹고 세상 쓴맛 단맛을 보게 되고 경험을 많이 쌓으면 쌓을수록 아 이 육의 물질의 얼마나 비참한 심연에 우리가 빠져 들어가고 거기서 우리가 허덕거리고 거기서 헤어 나오려고 재물, 먹는 거, 입는 거, 거기서 헤어 나오려고 내 육신 여기서 헤어나려고 일생 동안을 허덕이다가 그대로 영원한 지옥 밑창으로 빠져 들어가는 게 인간이 아닌가? 그걸 비참의 심연으로 빠져들어간다. 이렇게 말 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거기서 자혜의 심연이라. 하나님의 사랑 자비 하나님의 무한하신 그 사랑을 깨닫고 하나님의 깊은 연못으로 헤어 나오려고 하는, 그래서 자체 전량을 자혜로 채워달라고 그 비참의 굴에서 나를 건지셔서 그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으로 나를 채워주시라고 안달을 하는 그거를 간절히 바라는 그것이 참 가난이라고, 이렇게 정의를 내렸어요.

 


 저는 이 말씀이 참 좋았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철학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여러 가지로 그 재물이 죄다 그런 것이 다 헛되다. 암만 설교를 해봤자 소용이 있습니까? 우선 눈을 뜨면 배가고프면 먹어야하는 인간들이 암만 거기서 해탈을 하라고 그래도 그럴 수 없는 것이 우리의 실정인데 여기는 그렇게 가난이라는 걸 추구하라고 하지 말고 무조건 버리라고 하지 말고 진리 하나님, 예수님, 사랑, 그 무한한 사랑 그래서 그걸 자혜의 심연이라고 그래 지옥이 깊은 거와 같이 하나님의 사랑의 세계도 무한이 깊은 것이니까 그 무한한 사랑의 세계를 향해서 내가 그 사랑을 추구하는 마음 또 그 사랑으로서 내 영혼을 채워주시라는 간절히 구하는 그 마음을 참 가난이라고 이렇게 말을 했어요. 다시 말하면 썩어질 가난을, 썩어질 부를 버리고, 영원한 부를 바꿔 넣는 것이지요. 그래 이걸 가치의 전도라고 말을 한 것이지요. 깨달은 사람들은, 우리가 어려운 술어를 다 기억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너무나 많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사랑을 맛본 사람은 참 드뭅니다. 다시 말하면 그 사랑을 맛보려고 마치 목마른 사람이 물 한 모금 마시려고 안달을 하듯이 배고픈 사람이 밥 한 그릇을 얻어먹으려고 갈급을 하듯이 하나님의 사랑을 맛보려고 애쓰는 그 마음이 곧 가난이다. 이렇게 생각을 해보면 좋을 것입니다. 그러면 거기까지만 우리가 생각을 해도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 하는 말씀이 이해가 되지 않습니까? 여기 예수님께서 팔복 산에서 산상보훈을 말씀 하실 적 에는 로마의 정치에 압박을 받고 또 특별히 가난한 대중들이 모여 있는데 예수님이 보시니까 그들은 너무나 비참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들을 불쌍히 보시면서 예수님은 무한한 의미를 지니고 하신 말씀이지만 아마 듣는 사람들에게는 예수님이 이렇게 대중 만 여명이나 모인 대중을 향해서 너희 지금 참 비참 하구나, 불쌍하구나, 정치적으로 압박을 받아 경제적으로 착취를 당해 너희들은 지금 참 거지같은 옷을 입고, 모두 영양부족으로 얼굴빛이 누렇게 말라서 시들어져 있는 것도 모르는 너희들은 과연 비참하구나. 그러나 너희들 지금 이 비참한 광경에 놓여있는 가난한 너희들은 차라리 복이 있다. 이렇게 말씀 한 거예요. 그러니까 이 말씀은 깜짝 놀라게 하는 말씀이지요. 아마 누가 보던지 그 사람들은 참으로 불쌍한 사람들이다. 불행한 사람들이다. 이렇게 말해야 할 그들을 향해서 예수님은 이제 너희 가난한 사람들은 복이 있도다. 이러시니 언뜻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 아닙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왜 하늘나라는 너희들의 것이다. 그러시는 거야. 그러면 반대로 지금 고층 누각에서 잘 입고 잘 먹고 그냥 기름이 주르르 흘러가지고 다니는 부자들은 앙화로다. 그래서 그걸 잘 설명한 것이 누가복음이거든요. 누가복음은 그 점을 아주 노골로 이야기 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을 바라보시며 말씀 하셨다. 가난한 여러분은 행복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여러분의 것입니다.’ 왜? 왜 하나님의 나라는 그런 사람들의 것인가? 아까 그 마지막 결론을 들으면 이해가 되요. 그렇게 하나님의 사랑을 아주 목마르고 굶주린 자가 먹을 것과 물을 사모하듯이 그렇게 사모 하는걸 가난이라고 그런다면 하나님의 나라는 반드시 그런 사람들의 소유가 될 것 아닙니까? 그런데 이 말씀을 보면 그 부자들이나 그런 사람들은 그런 마음을 갖기가 어렵다는 걸 알게 되요. 지금 굶주린 여러분은 행복 합니다. 여러분은 배부르게 될 것입니다. 지금 우는 여러분은 행복 합니다. 여러분은 웃게 될 것입니다. 그랬지요?

 

 

그리고 24절에 가보면 누가 6장, 그러나 부요한 여러분은 부요한 여러분은 불행 합니다. 이렇게 노골로 지적을 했거든요. 반대되는 그러면 물질적으로 가난한 사람이라는 것을 여기 지적한 것이 되지 않아요? 너희의 부자들은 불행하다. 왜? 여러분은 이미 받을 위로를 다 받았습니다.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와 같이 부자 집 대문간에 있던 나사로는 밥상에서 밥상을 쓸어버리는 찌꺼기만 주워 먹었지만 같은 시간에 부자는 대청에 가서 많은 친구들과 앉아서 그냥 산해진미를 늘어놓고 배를 두들겨 가면서 아마 목구멍을 뚫어가면서 쳐 넣었을 거야. 그러니까 너희의 배부른 자는 불행 하도다. 또 그전 개역성경으로 보면 앙화로다. 그랬지요? 앙화로다. 너희의 이제 배불리 먹고 배를 두드리는 너희들은 앙화로다. 세상 사람들은 그게 복이 있다. 오늘 내 재수가 터져서 이 집에 잔치 집에 가서 막걸리 얻어먹고 저 집에 잔칫상 얻어먹고 와서 아 오늘은 내가 재수가 터졌다. 그러는데 배부른 너희들은 앙화로다. 이렇게 말하는 거예요. 예수님은 지금 배불리 먹고 지내는 여러분은 불행하다. 여러분이 굶주릴 날이 올 것이다. 이건 역사적으로도 그랬지요. 6.25때 부자들이 얼마나 유치장에 들어가서 새파란 자기 손자뻘이나 되는 것 같은데 그저 나리, 나리 내게 밥 한 그릇만 달라고 할 적에 그런 것을 곁에서 본 사람들이 아 어저께 저 부자 광주에서도 가장 큰 임금이 사는 대궐 같은 집에서 그냥 청동화로에다가 구리 주전자에다가 인삼차를 설설 끓여가면서 때 없이 마시던 부자가 저 빨갱이들 저 손주새끼들 같은 것한테 ‘나리, 나리 나 밥 한 그릇만 주십시오.’ 그러다니 아마 이런 것 도 생각을 하고 그랬는지 몰라. 나는 지금 그런 사람을 요렇게 되라고 저주 하는 게 아니야. 지금 이 말씀에는 그런 뜻이 포함되어 있지 않느냐 말이야. 배불리 먹고 지내는 여러분은 불행합니다. 여러분이 굶주릴 날이 올 것입니다. 옛날이나 오늘이나 앞으로도 항상 역사는 되풀이 합니다. 역사는 똑같은 사실이 되풀이 되요. 그런데 인간들은 미련해서 어저께 당한 것 오늘 잊어버려, 내일 당할 것을 오늘 생각하지 못해. 현재에만 눈이 어두워져 있는 것이 사람입니다. 그런 걸 범인이라고 그러지요. 그런 걸 깨달아서 초월한 사람을 성인이라고 하고. 하나님의 자녀들은 여기서 생각을 하자 그 말이야. 여러분이 굶주릴 날이 올 것 입니다. 지금 웃는 여러분은 불행합니다. 여러분이 슬퍼하며 울 날이 올 것 입니다. 그냥 왼쪽 바른쪽에다가 기생을 끌고 노래를 부르면서 춤을 추고 막 요새들은 젊은것들도 들어가서 그러지만, 너희들은 불행하다. 크게 통곡을 하고 가슴을 칠 날이 올 것이다. 이렇게 말씀 한 거예요. 그러면 여기서 예수님이 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 무엇을 뜻하는가? 하는 것을 희미하게나마 우리는 조금씩 깨달아야 합니다. 물론 겸허한 마음도 가난에 속하는 것입니다. 또 모든 것을 포기하고 버리는 거 재산도 버리고, 욕심도 버리고, 다 버리는 거 그래야 가난이 되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걸 무시하고 마음에 가난만 찾는 것은 어리석습니다. 물질을 가지고 어떻게 마음에 가난이 될 것입니까? 다 버려야 참 가난으로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 깨끗하게, 아무것도 없는 완전히 아무것도 없는 빈 마음이 되는 것이 가난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비우기만 해가지고는 완전한 가난이 되지 못하는 것이고, 영원한 그 진리 무한한 하나님의 사랑을 갈급 하는 목마른 사람이 물 한 모금을 마시려고 갈급 하는 거와 같은 그것이 참 가난이다. 이걸 우리는 여기서 기억하고 지나가면 됩니다. 그렇게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진리를 갈급하고, 청빈을 누리는 그런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나라는 그들의 것이다. 그건 제가 설명을 하지 않아도 여러분이 언뜻 이해가 될 겁니다. 하늘나라는 그런 사람의 것이다. 하늘나라는 그런 곳이기 때문에 하늘나라는 욕심이 조금이라도 있거나, 그 무엇 세상 것이 가득 차 있는 곳에는 도저히 임재 할 수 없는 것이 하늘나라이기 때문에 그러기 때문에 하늘나라는 가난한 심령에 임한다. 가난을 사랑하고, 가난한 마음을 갖은 사람에게 하늘나라는 임한다. 이것을 위해서 수천 년 동안 많은 선지자 성인들이 외쳤고, 부르짖었고, 또 일생동안 이 가난을 추구하고 애를 썼습니다. 그런 실 예를 보려면 우리가 지금 그렇게 시간이 많지 못하지만 프란치스 교단 하나만 보아도 알 수 있지 않습니까? 프란치스코 성인은 엄청난 부자의 자식으로서 도저히 세상 사람이 흉내 내지 못할 사치와 호강을 하던 사람 아닙니까? 끼니때마다 수십 명씩 친구들을 놓고, 그 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음식을 늘어놓고, 하루에 비단 옷을 열 번씩 갈아입으면서, 그 음식상을 대하던 프란치스가 예수님을 사랑하게 되면서 부터는 그걸 다 던져버리지 않았습니까? 그 옷도 버리고, 잔치 상도 버리고, 그리고 나중에는 자기 집 재산까지 죄다 버리고 또 프란치스코뿐 아니라 그를  따라다니던 제자들도 그 모아놓았던 아꼈던 재산을 전부 길거리에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움켜줘 버리고 다 흩어져 버리고 그리고 자기 몸통어리에는 좋은 옷도 입기가 황송스러워서 다 떨어진 마다리 같은 베옷을 뒤집어쓰고, 그리고 새끼 같은 걸로 허리를 동이고, 신발도 신는 게 황송스러워서 맨발로, 깡통을 들고, 그러고 대문간마다  쫒아 다니면서 내버리는 찌꺼기 밥을 얻어먹지 않았습니까? 어떻든지 최대한으로 가난하려고 애썼습니다. 그때 아시스 거리에는 그런 부자 집 자식들이 수천 명이 몰려 다녔기 때문에 모든 사람의 눈을 둥그렇게 만들었던 것 아닙니까? 왜 그랬을까? 무엇 때문에 그들은 그랬을까? 그 부라는 거 잘 먹고 잘 입고 그것이 얼마나 허망한 것이고, 얼마나 내 영혼을 타락시켰고 내 영혼을 소경으로 만들었고 하나님과 나 사이를 그놈들이 그것들이 가로막았던가? 하는 걸 깨달은 뒤부터 그런 것을 모두 내어버렸거든. 모두 내어버렸거든. 그래가지고 오늘까지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 하는 말씀을 이해하는 자들입니다. 그런 사람들만이 예수님을 따를 수 있는 것입니다. 가난이 복인 줄 모르는 사람은 예수를 믿는다고 그래도 다 쭉정이 신자들입니다. 그건 다 엉뚱한 것 붙들고 있는 신자들입니다. 속히 말아야 합니다. 들어가면서도 복을 받고, 나가면서도 복을 받는다. 부자가 돈 많은 것 가지고 전도사업도 예배당도 크게 짓고 좋은 일도 많이 하면 되지 않느냐? 해서 감언이설로 꼬이는 건 거짓 선지자들이야. 우리가 그건 분명히 알아야 해요. 왜 그런 고 하니 예수님 말씀이 그런 말이 없기 때문에 이건 내 이야기가 아니고 예수님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 하셨습니다.( 끊김 ) 

 


 둘째 번 것 생각해 보기로 하십시다. 그러면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다. 이 애통하는 이라는 법은 슬퍼한다. 아주 슬퍼해도 아프도록 슬퍼한다. 하는 것은 이건 극기라고 보통 말 하지요. 우리가 쉽게 가난해서 그 다음 단계로 들어가 보려고 하면 가난이 얼마나 어려운 것이라는 걸 알겁니다. 가난해 진다는 게. 성신 충만 받아가지고 충만히 성신을 받아가지고  프란치스코와 그 제자들은 그 재물이 모두 똥과 같이 보이고 쓰레기같이 보여서 바울 사도도 그랬지요. 그게 아주 다 뜯어먹은 뼈다귀와 같이 보여서 그냥 그것은 내던져 버리게 되면 문제는 간단합니다. 욕심을 버리기는 버려야겠는데 물욕도 버려야 되고 정욕도 버려야겠는데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가하는 것을 아는 기독교인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사도요한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마라라. 그러면 하나님의 사랑이 네 속에 없다. 그래서 세상 사랑을 끊어 버리려고 하면 참 내 살을 찢는 게 낫지 예수님이 말씀 한 대로 부모를 형제를 처자를 재산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않다. 누구든지 부모를 버리고, 형제를 버리고, 처자를 버리고, 부부를 아내는 남편을 버리고 남편은 아내를 버리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않다. 예수님은 그렇게 말씀 했는데 그렇게 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차라리 내 생명을 죽이는 게 낫지, 부모가 내 애정을 어떻게 끊겠어요? 예수님은 끊고 따르라고 그러시는데 어머니가 사랑을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을 자기 생명보다 더 짙은데 예수님은 자식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않다. 그러셨는데 그 갓난 애기 품에 안긴 갓난 애기보다 나를 더 사랑하라고 예수님은 그러시는데 그 사랑하는 어린애기를 내 마음에서 끊어버리기는 차라리 내 팔을 하나 잘라 버리는 게 낫지, 자식을 길러보지 않은 사람은 그걸 모르는 거야. 얼마나 그 애정이라는 게 끊기가 어려운가? 부부간의 애정을 모자간의 부자간의 그 애정을, 그것을 그러나 성경의 지상명령은 그걸 버리라는 거야. 끊으라는 거야. 끊지 않는 자는 합당치 않다. 그걸 끊는 자는 땅에서도 백배를 얻고 하늘나라 들어가지 못할 자가 없다고 이렇게 말씀했는데 그러면 하늘나라 들어가려면 다 끊고 들어가는 거야. 제가 여러 번 이야기 했지만 쥐가 뱀에게 쫓겨서 도망가는 걸 한번 구경을 했더니 젖꼭지마다 새끼를 줄줄이 달고 도망을 해. 그냥 새끼들은 죽어라하고 어미 젖꼭지를 물고 늘어졌는데 어미는 죽어라하고 도망을 가. 그 뒤에는 뱀이 고개를 들고 쫒아 오는데 꼭 그와 같이 이 세상 사람들은 줄줄이 모두 이것저것 재산도 갖고, 자식도 갖고, 아내도 갖고, 남편도 갖고, 부모도 갖고, 살림살이도 갖고, 장독대도 갖고, 그냥 비단옷 그거 죄다 갖고, 하늘나라로 들어가려고 그런다고, 그리고 그 달음박질쳐 가는 꼬락서니라는 건  쥐가 젖꼭지에다가 새끼를 달고 도망치는 것과 같아. 그러면 하늘나라로 가겠다는 거야. 줄줄이 달고 그렇지 않아요? 우리가 그런 광경을 상상해 본 일이 있습니까? 내 자신이 무엇을 주렁주렁 손에다 들고 여러분이 장에 나가다 장 봐가지고 가는 사람을 봤지요? 욕심 많은 여자는 한 짐 사서이고 두 손에다 들고 그래도 모자라서 등에다 짊어지고, 아마 할 수만 있으면 입에도 사과라도 하나 물고 가려고 그럴 거야. 욕심 많은 여자 장 봐가지고 가는 거 보면 아참 저렇게 욕심 많게 살려고 눈물이 날 지경이고 불쌍할 지경이지요. 그게 사람들의 마음이야. 그런데 그걸 버리라고 그러니 이게 쉬운 일이야? 그러니까 애통하는 자, 애통이 나온다고 끊으려고 하는데서 슬픔이 오는 거야. 그래 그건 극기라고 이렇게 말을 했지요. 그런데 이렇게 말씀을 하고 있어요. 자기 구아(久我)에는 회개하지 못한 옛 나에게는 악한 성향과 악한 습관이 많이 있다는 거지요. 그렇지요? 우리는 언제부터 그런 나쁜 습관을 많이 배웠는지? 가졌는지? 모두 거짓과 욕심과 시기와 질투와 모든 정욕과 음란과 모든 아주 그런 나쁜 습관을 모조리 가지고 있어. 그건 어느 때 제일 많이 보는 고 하니 어머니나 여기들 지금 어린애 둘을 기르는데 어린애 기르는 거 보면 가관이거든. 어린애에게 가만히 보면 저는 눈이 어두운 사람이에요. 영적으로 말이에요. 그런 사람인데 내 눈으로 보기에도 어린애 에게 자꾸 독한 주사를 넣는 거와 같은 짓거리를 하고 있어. 아첨을 가르치고, 간사를 가르치고, 모두 나를 따르라. 하는 그런 서로들 끌어 셋이 졸 졸한 큰 애기들이 서서  내게로 오라고 그럼 어린애 마음은 그때 어떨까? 헤아려본 일 있어요? 어린애는 그 다음에 뭘 배울 거야. 아첨하는 법을 배울 거예요. 또 이기주의를 배우지요. 자기를 더 예뻐해 주고 사랑해 주는 그러면 또 큰사람들은 경쟁을 하지, 어린애에게 더 자기를 따르게 만들려고 그게 어린애 비틀거리다 독약을 먹이는 거야. 그런 짓거리들을 하고 있어. 가정에 가 봐도 맨 어린애 기르는 거 보면 순전히 어린애 영혼을 죽이고들 있어. 그러니까 사람이 자라나면서 맨 거짓, 간사, 아첨, 시기, 질투, 조그만 어린애 때부터 시기를 가르쳐놓고 있어. 질투를 가르쳐놓고. 그래서 아주 이악하고 독한 성향을 가지고 있다는 거예요. 극기라는 건 거기서 해탈 하는 거 거든. 그걸 이기는 거야. 그래서 구아에 속한 악한 성향과 습관에 대해서 계속해서 전쟁이 필요하다. 그러니까 이 전쟁을 하려니까 눈물이 나는 거지요. 우리가 이런 걸 일일이 예화는 들지 않아도 알 것이에요.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그 악한 습관에서 이제 극기를 하고 이겨나가려면 거기도 인제 시간이 짧으니까 대개 결론이 먼저 이렇게 앞서게 되요. 이런 이야기가 하나 예화로 나와 있군요. 

 


 어떤 옛날에 어떤 귀공자가 하나 있는데. 귀공자가 어떤 같은 부잣집 규수를 처녀를 사랑했어. 어떻게 사랑을 했는지, 잠을 자지 못하고 밥을 먹지 못하도록 사모 했어. 그런데 도저히 그 처녀를 만날 길이 없어. 그래서 궁리궁리 하다가 그 큰 애기 처녀 있는 집에 종으로 들어갔어. 종으로 귀공자가, 왜냐하면 종으로 들어가서 그 집 마당이나 쓸면서 대청마루 큰 애기를 가끔 쳐다보기라도 하려고. 눈요기라도 하려고. 그래서 그 집종으로 들어갔어. 그 여성의 미를 사랑하는 정도가 이렇게 강력해서, 강력했기 때문에 그렇게 그 부잣집 귀공자가 남의 집 종살이로 들어가도록 이렇게 사모했다. 그런 이야기를 하면서 이런 말을 하고 있어요. 그런 예화는 많이 있지요. 야곱이가 외가 집에 가서 종살이를 하지 않았어? 그때 라헬을 무척 사랑했기 때문에 일곱 해 동안을 종살이를 했는데 하루같이 지냈다고 그랬어. 일곱 해를 그 라헬을, 내 딸 라헬을 너에게 줄 테니 너 우리 집에서 외삼촌이 그랬지요. 종살이 하라고. 그런데 일곱 해 동안을 그 고된 종살이를 하면서도 어떻게 그 라헬을 사랑했기 때문에 세월 가는 줄을 모르고 지냈다. 그런 이야기가 있는데, 왜 이 이야기를 하는 겁니까?  우리가 이 극기를 하는 데는 그것을 이길만한 뚜렷한 목표가 하나 있어야 한다. 그러기 전에는 이겨지지 않는다. 그게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이에요.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 강렬하기 때문에 모든 걸 끊어버리고 이길 수 있기 전에는  못 끊는다. 그걸 말하려고 하거든. 그런데 거기서 눈물이 나는 거지요. 눈물이 나는 거야. 아- 참 그 사랑하는 자식, 그 사랑하는 아내, 또 그 아끼고 아끼는  모아놨던 그 많은 재물, 그것과 이별을 하려니 눈물이 나지 않우? 그걸 애통이라고 말하는 거예요. 너희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다는 말은 그 애통을 말하는 거예요. 괜히 억울한 소리 들었다고 눈물을 흘린다든지, 세상 것이 마음대로 안 된다고. 또 재물을 조금 잃어버려서, 사업에 실패를 해서, 자식이 죽어서 눈물을 흘리는 그런 눈물을 말 하는 게 아니고 여기는 그걸 말 하는 거야. 주님을 더 사랑했기 때문에 그러기 때문에 자기가 가졌던 모든 것을 이별 하면서 이별하는 그 이별의 눈물이야. 세상과의 이별 세상과의 이별, 그것이 꼭 필요 한 거야. 

 

 

그러기 때문에 이 극기와 사랑을 분리시킬 수 없다.  극기와 사랑을 분리를 시킬 수가 없는 거야. 이렇게 말을 했어요. 바꿔 말하면 그 영은 그 육체의 방자한 욕망 때문에 마비가 되어있는데, 우리의 영혼은 이 육체 때문에 그냥 마비가 되어가지고 힘을 잃어버리고 있어. 여기에 어떠한 그 수단으로 그 극기를 해서 이 방자한 욕망에서 해방이 되어야겠는데 그리스도 안에서 내가 변화를 받음으로서 토마스 아캠피스가 말한 거와 같이 사악에서 나를 해방하사 절제 없는 편견에 병든 내 생각을 낫게 하소서. 절제 없는 편견, 그냥 자꾸 육정으로만 기울어지려고 하는 거기서 나를 해방시켜 주소서. 그리하여 내 안에 이 사악한 병이 낫고, 내 안에 정화가 잘 되어서 사랑할 자격이 있게 되고, 그리스도의 수난에 용감하게 참여할 수 있게 되고, 강인한 정신으로 함구하게 이 선한 싸움을 싸울 수 있게 해 주소서. 이건 준수성범에 있는 말씀인데, 그렇게 해 주시라고 이 기도를 하면서 극기의 생활을 하는 것 이지요? 그런데 이거는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이 없이는 도저히 되어 질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그 극기를 하는 방법을 냉수마찰을 하기도 하고, 금식을 하고, 나는 오늘 아침에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저 지금 경상남도에 경주 땅에 한 30명인가 몇 명이 생식만 하는 이 가 있다고 그럽디다. 한 20년 째 생식만 해 생식을 7년 동안을 하면 정욕이 없어진답니다. 그래서 여자는 남자 생각이 안 나고, 남자는  여자 생각이 안 나고. 그래 그들은 이북에서 황해도 사람들인데 이북에서부터 동정을 지키면서 이남까지 내려온 사람들이야. 그래서 우리가 대포리 강변에서 움막을 치고 있을 때  그이가 왔는데. 에덴동산에서 선악과 따 먹은 거는 음란이라고. 그걸 깨닫고 우리는 동정을 지키고 산다. 하고 왔던 그이가, 그 다음에 제주도 가서 그런 이가 있지요. 그래 제주도를 갔더니 거기 가서 산 밑에 가서 그렇게 살고 있다고 그러는데. 그게 경상남도에 와서 한 동네를 이루고 소문은 생식 촌이라고 났대. 생식만 한 대. 그런데, 생식만 하니까 여자가 필요 없게 됩디다. 우리 동광원도 이거 참 큰 문제인데. 동광원 사람들도 생식을 해야 하는가? 여자가 밥 안 지어 주니까 남자들이 전부 푸성귀만 한 주먹씩 먹으면 된대. 염소나 소처럼. 그렇게 하고 몇 십 년 을 사는데 아주 정신이 맑고 나이가 70, 나하고 동갑 입디다. 73살 먹은 노인이 펄펄하게 다닌대. 나 그 말 듣고 나도 이거 과식을 해서 이렇게 다리가 무겁고, 조금만 뭘 하면 비틀비틀하고 꼴 보기 싫은가? 나도 지금이라도 생식을 해볼까?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애들을 써요. 뭘 모두 잊어버리려고. 그러니까 굉장하대요. 서울서도 모두 박사들도 연구를 하러 오고 생식을 하는 게 저렇게 몸을 가볍게 하고 좋다면 또 사실은 생활비도 훨씬 덜 들고 요만한 땅 조각 하나씩만 가지면 자립이 된다. 하네요. 늙은이나 젊은이나 아 그까짓 거 푸성귀 몇 뿌리 산에 가서 따먹어도 되고 어째요? 해볼 마음들 없으시오? 그런데 다른 거 생각도 안 난대. 생각 안나는 게 아니라 그 사람들 지금 고기 먹으면 배병이 나고 몸에 뭣이 나고 그래서 견디지를 못한대. 그래 먹이려고 해도 먹일 수도 없이 변해져 버렸대. 그렇게 애들을 쓴단 말이지요. 어떻게든지 극기를 해 보려고. 그러나 그것도 필요한지 몰라. 

 

 

그러나 그들의 깊은 속은 몰라. 내가 직접 만나본 게 아니고, 보고 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은 것이니까. 그러나 그들이 만일 참으로, 참으로 성공을 하려면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 때문에 그렇게 되면 그건 완전하게 되는 거지. 완전하게 되는 거야. 그래서 여기 이렇게 말하고 있어요. 사랑만이, 사랑만이 이 세상의 유혹을 피할 수 있도록. 사랑만이 이 세상의 이건 그리스도에 사랑, 하나님에 대한 사랑, 사랑만이 이 세상의 모든 유혹을 피할 수 있도록 그 전에는 어떻게 그 유혹을 피할 거야? 또 사랑만이 쾌락을 짓밟아 누를 수 있도록 참 우리 본성적으로 육으로 습관적으로 나오는 쾌락을 사랑 하는 거. 눈을 즐겁게 하고. 혀를 즐겁게 하고 미원이라도 쳐야만 이놈의 혓바닥이 굴복을 하는 그걸 이길 수 있도록 짓밟아 버릴 수 있도록 또 육신의 사욕을 제어할 수 있도록 또 사랑만이 탐욕을 물리칠 수 있도록 탐욕을 물리칠 수 있도록 또 사람의 욕심 가운데 가장 큰 욕심의 하나는  명예욕 아닙니까? 칭찬 들으려고 하는 거. 다른 사람보다 내가 낫다. 조그만 어린애들 까지도 그래서 옷을 조금이라도 더 잘 입으려고, 얼굴을 조금이라도 예쁘게 하려고, 그런 모든 그것 칭찬 들으려고 그 명예 욕, 그것이 예수님에 대한 사랑만이 그것을 유린할 수 있도록 짓밟아 버려. 그러기 때문에 그 성녀 중에는 일부러 자기 얼굴이 너무 예쁜 것을 저주하고 곰보를 만들어 버린 성녀가 있지 않아요? 막 약을 문지르고 그래가지고, 예쁜 것이 저주가 되어서. 그럼 세상과 반대지요. 그야말로 가치의 전도지요. 거꾸로 사는 거야. 그래서 영예를 천시할 수 있도록 처음부터 항상 사랑만이 하나님의 종이 되라고 우리를 설복한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만이 이 모든 것을 넉넉히 이기고 극복할 수 있도록. 한마디로 말하면 현 존재의 모든 꼬임을, 유혹을, 박차게 하고 영원한 생명을 위하여 용감히 죽게 한다. 용감히 살다가 용감히 죽게 한다. 사랑만이 우리를 주님만을 위해서 기쁘게 살다가 기쁘게 죽게 한다. 그 말 이지요. 이 극기에 대한 건 우리가 이야기를 하려면 참 끝이 없지요. 예수님의 생활도 첫 발자국은 40일을 광야에서 금식기도 하시는 것으로 시작하지 않으셨습니까? 그게 극기 아닙니까? 그래서 명예욕도 이기고 권세욕도 이기고 식욕도 이기고 모든 물질에 대한 것을 또 세상 모든 욕망을 여지없이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 하셨다. 진리로서 극복하는 그 길을 우리에게 모범으로 보여주셨거든. 그러니까 주님을 따르는 사람은 반드시 이것을 해야 하는 겁니다. 

 

 

눈물을 흘려도 괴로워도 아파도 쓰라려도 그래도 이길 것은 이겨야 하는 거지요. 그러니까 너희 이제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너희들이 이제 하나님 앞에 가서 큰 위로를 받을 것이다. 세상에서 그것 버리는 것이 아까워서 끝내는 것이 아까워서 못 끊는 너희들은 앙화로다. 하늘나라에 가서 참 얼마나 그 벌을 받으려면 지옥의 그 괴로움을 그것이 그런 이야기도 우리가 많이들 알고 있지요? 그런 거 먹는 것만 탐을 해서 여기는 그런 사람이 없는 줄 압니다. 참 그 탐식이라든지 먹는 걸 탐하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건 아마 이 바깥 세상에 나가면 참 놀랄 정도로 많지요. 그런 사람은 지옥에 가서 몸둥어리는 커다랗게 만들고 이건 기독교 이야기는 아니에요. 입을 바늘구멍 만하게 만들고 앞에다가는 기가 막힌 산진해미 막 돼지도 삶아놓고 닭도 통으로 삶아놓고 그리고 앉아 먹으라고 그런다는 거야. 지옥에 가면, 아 입이 바늘구멍만하고 몸둥어리는 커다란데 먹을 것을 이렇게 놔주니 안달이 나서 죽을 거 아니야? 막 그냥 생각 같아서는 입이 이만해 가지고 돼지도 통으로 집어넣고 싶은데 아 입이 바늘 구멍만하니 영원토록 그 벌을 받는다는 거예요. 일 년 이년이 아니고 천년만년 지옥에 가서 영원토록 그 탐식하다가 받는 벌이라고 그래요. 탐식가들은 지옥에 가서 그런 벌을 받는다고. 그렇게 너희에게 배부른 자는 앙화로다. 나는 지금 꼭꼭 그렇다는 이야기는 아니에요. 지옥 이야기는 단테의 신곡에도 그런 이야기는 없으니까. 그러나 어떻든지 우리가 상상은 할 수 있어. 왜? 그런 고 하니 무엇을 봐서 그걸 증거 할 수 있냐? 부자가 지옥에 가서 당하는 거 부자가 지옥에 가서, ‘아이고 아브라함이여 아버지여 저 나사로 손가락에다가 물 한 방울만 칠해서 내 혀 바닥에 칠하게 해 주시오.’ 그런 거 아니야? 얼마나 그 뜨거운데 그냥 탔기 때문에 그걸 갈급한걸 봐서 그렇게 받는 거야. 이 세상에서 호강을 누리고 잘 그런 사람은 그렇게 된다. 왜 이것을 교회에서 똑바로 가르쳐 주지 않는가? 또 왜 이것을 아는 우리들은 이것을 싫어하는가? 은근히 이것을 기피하는가? 무엇이 우리를 이렇게 유혹하는가? 에덴동산에서 그 하와의 귀에다 대고 그 두 혀 바닥을 날름거리면서 꼬이던 뱀이 우리 귀에 와서 자꾸 속삭이는가? 그러지 않아도 된다. 그거 안 그래도 하늘나라 넉넉히 들어간다, 믿으면 된다. 믿으면 된다. 요새 우리 동광원에도 그런 사람이 와서 믿기만 하면 하늘나라 간다고 그리고 믿는 것이 무엇인가? 그런 걸 끊어버리는 게 믿는 겁니다. 믿으면 그게 끊어지는데 믿지 않으니까 그게 들러붙어 있는 거지. 믿지 않는 동안에는 그게 들러붙어 있는 것이야. 우리 몸둥어리에 영 떨어지지 않는 것이야. 또 믿지 않고 우리가 그것을 끊을 수가 있어요? 그런 큰 무서운 것을. 믿음 외에는 끊을 수가 없어. 그래서 요한은 그렇게 말하지 않았어요? 이 세상을 이기는 것은 오직 너희 믿음뿐이라고. 하나님의 자녀는 누구나 다 세상을 이겨냅니다. 세상을 이겨내는 승리의 길은 다름 아닌 우리의 믿음입니다. 세상을 이기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믿는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그리스도를 이 세상의 무엇보다도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그런 사람은 넉넉히 이기고 승리의 길을 갈수 있는 것이지요. 아마 이 두 대목만 이 시간에는 말씀하고 그만둬야겠습니다. 찬송가 381장  

한시에 오후 한시에 이 예배당에서 직원회의 모이겠습니다. 주기도 드리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