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간 못다한 수선화와 석산 분얼 작업을 조금씩 해보려고 한다.
부 활 절
1981. 04. 08. 정인세 원장
17절서부터 봅니다. 요한복음 11장 17절 이하
부활과 생명이신 예수. 예수께서 그곳에 이르렀을 때에 나사로가 무덤에 묻힌 지 이미 나흘이나 된 것을 알게 되셨다. 베다니는 예루살렘으로부터 5리 밖에 안 되는 곳이어서 많은 유대인들이 오빠의 죽음을 슬퍼하고 있는 마르다와 마리아를 위로하러 와 있었다. 예수께서 오신다는 소문을 듣고 마르다는 마중을 나갔다. 그 동안 마리아는 집에 있었다. 마르다는 예수께 이렇게 말씀 드렸다. ‘주님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제 오빠는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이라도 주님께서 구하시는 것은 무엇이든지 하나님께서 다 이루어 주시리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예수께서 당신 오빠는 다시 살아날 것입니다. 하고 마르다 에게 말씀 하시자 마지막 날 부활 때에 그가 다시 살아나는 것은 저도 알고 있습니다. 하고 마르다는 예수께 말씀하셨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 하셨다. ‘나는 부활이며, 또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겠고, 또 살아서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은 이것을 믿습니까?’ ‘예, 주님께서 는 이 세상에 오시기로 약속된 그리스도시며 하나님의 아들 이신 것을 저는 믿습니다.’ 하고 마르다는 대답 하였다. 25절 말씀 다시 읽겠습니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 하셨다. 나는 부활이며 또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겠고 26절, 또 살아서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은 이것을 믿습니까?
오늘은 전 세계 기도교회가 부활절로 지키는 날입니다. 새벽부터 연합적으로 부활절만이라도 우리 한 자리에서 한 마음으로 예배를 보자고 연합적으로 서울서도 부산서도 광주서도 부활 주일 예배를 드린 줄 압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은 대충 지금 알기로는 주후 30년 4월 7일로 삼는 게 아마 가장 유력한 학설 들일 것입니다. 4월 7일 날 주님의 날이지요. 일요일이지요. 새벽에 부활하신 것으로 이렇게 알고 있습니다. 제가 어제 크리스챤 신문에 신학대학 총장으로 계신 이 종성 박사님이 쓰신 부활에 대한 글을 읽고 근자에 보기드믄 훌륭하신 설교 말씀이라 그렇게 생각이 되었어요. 그 분이 이렇게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서 이야기 한 것을 줄거리를 잡아보면 그럽디다. 첫째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그 역사적 사실 그것에는 반드시 선행 조건이 있게 되는데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게 선행 조건이다. 그건 여러분도 잘 아시는 겁니다. 죽음이 없으면 부활이 없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죽는다는 그 절대적인 사실, 그걸 우리는 잠깐만 생각하고 지나가야 되요. 동양이나 서양이나 아주 철칙으로 사람들이 믿고 있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생자필멸의 원칙입니다. 산 것은 반드시 죽는다. 하는 그 원칙을 믿고 있어요. 사람들이, 저런 식물도 언제든지 한번은 죽지 않습니까? 또 조그만 버러지로부터 새 짐승으로부터 사람까지 목숨이 붙어서 살았다 하는 것은 반드시 죽는 날이 있다. 생자, 산 자는 반드시 죽는다. 멸한다. 그래서 생자필멸의 원칙을 믿고, 거기서 벗어나는 재주가 없어요. 그런데 그것으로 끝나는 거지요. 그러니까 우리가 예수님의 부활이 되었든, 무슨 부활이라는 말을 쓸 적에는 부활이라는 것이 있기 전에 반드시 죽음이라는 게 있었다는 절대적인 조건이 되거든요. 그런데 오늘은 우리가 짧은 시간에 그 죽음과 부활이 직결되는 가장 중요한 요소만을 우리가 붙들고 나가면 되는 것이에요. 그 지금 우리가 죽음이라는 것을 기독교에서 말할 때는 가장 철저한 죽음, 뜻있는 죽음을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표준으로 잡습니다. 그러면 그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것은 사실은 비참한 것이고, 증오의 대상이었지요. 그게 죽음입니다. 그러면 십자가의 죽음은 두드러지게 그렇지만 그 외에 죽음이라는 것은 다 눈물거리고 사람들이 싫어하는 게 죽음입니다. 그런데 특별히 십자가의 죽음은 그 저주스럽다는 것을 잘 알고 있거든요. 그러던 그 십자가 그 십자가, 모든 인류의 죽음을 전부 이렇게 똘똘 몰아서 책임지고, 예수님이 달리신 그 십자가, 그것이 어째서 그렇게 오늘 영광스러운 십자가가 되었느냐?
그것이 지금 문제에요. 그걸 이렇게 말하고 있지요? 고린도전서 1장 18절에 보면 십자가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이렇게 말했고. 갈라디아 6장 14절에서 보면 십자가는 우리의 자랑거리라. 그랬지요. 사도 바울은 항상 그걸 말 했지요. 어째서 그럴까? 그 저주스럽고 가증스러운 십자가가 어째 자랑거리가 되고, 능력이 되고, 또 에베소 2장 16절 말씀에 보면 화목의 상징이고, 그렇게 되어있어요.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화목, 이방인과 유대인 사이의 화목, 또 사람과 사람 사이의 화목, 화목의 상징이 되고 있어요. 십자가를 통해서 모든 막혔던 담이 무너져 버리고, 나와 네가 화목 할 수 있고, 민족과 민족이 화목 할 수 있고, 신자와 불신자 까지가 하나로 될 수 있고, 하나님과 사람이 원수 되었던 담을 무너뜨리고 하나가 될 수 있고, 그게 십자가가 그렇게 한 것이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화목의 상징이 되어졌다. 또 고린도 전서 1장 24절 부터 2장 처음까지 내려오면서 십자가는 하나님의 지혜라고 그러지 않았어요? 말을 알지 못했던 하나님의 비밀이고, 신비이고, 지혜라고 그렇게 말해. 뭐 어째서 그렇게 되었냐? 저주스럽고 가증스럽던 십자가가 어째서 그렇게 능력이요, 지혜요, 또 거기다 더 말하면 하나님의 사랑의 상징이다. 영원한 섭리의 표현이다. 여러 가지로 말 할 수 있겠지요. 그 십자가를, 그런데 그 십자가는 예수님의 죽음이지요? 거기에는 몇 가지 원인이 있다고 그걸 그전에 여러 번 우리가 설명 한 것 같아요. 그건 크게 세 개로 쪼갤 수가 있어요. 이 종성 박사님도 이걸 셋으로 분류 하셨습디다. 하나는 먼 원인인데 그건 죄 이지요. 죄 때문에 십자가가 생겼지요. 그 다음에 가까운 근인이라는 것이 있지요. 이유가 하나 있는데 그건 유대인, 유대인의 불신이지요? 불신이라는 것 보다는 제 생각에는 오신이에요. 잘못 믿었어. 예수를 잘못 알았어. 메시야인데 메시야인줄 알지 못했고, 도리어 자기들의 종교에 대한 예수님을 반역자, 훼방자로 몰았거든요. 그것 때문에 그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게 생겼고. 또 로마 정치 입장에서 볼 때에는 민중을 교란시키고, 시끄럽게 하는 무리야. 그러니까 이 사람은 죽여야겠다. 그저 형식적으로는 그렇게 되었어.
그러나 그것 보다는 더 근본적인 문제가 있지요? 세 번째 이유는 하나님의 큰 섭리이지요. 예수님을 꼭 죽이지 않으면 안 되는 하나님의 계획이 그렇게 되어버렸거든요. 그건 거기에 대해서는 이유가 많이 있어요. 왜 예수님을 꼭 죽이지 않으면 안 되게 그렇게 되었느냐? 예, 거기서 몇 가지만 우리 잠깐 생각해 봅시다. 그 배상 설이라는 게 있지요? 사람들이 죄를 지었는데 하나님이 또 죄를 지으면 죽는다고 선언 해 놓으셨어. 그런데 이제 마귀는 그걸 붙들고 물고 늘어졌지요? 그래서 자자손손이 사람을 죄에다 몰아넣어서 멸망시키게 했어. 그래 그 죄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거야. 누구에게? 보통은 마귀에게 값을 치러야 한다. 그걸 배상 설이라고 그러는데, 마귀에다가 손해 배상을 해주는 거야. 그건 그 역할을 했거든요?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것을. 그렇게도 말해요. 또 만족 설이라는 게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이 명예가 굉장히 훼손이 되었거든요. 그 죄 때문에 죽음 이라는 것 때문에, 그러니까 그걸 없애 버려야겠어. 하나님의 명예를 회복해야겠어.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명예를 회복해야해. 그 꼭 십자가를 통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어. 그 이유를 성경을 찾아가면서 하면 구약에서부터 나오는 것이니까 참 많은 시간을 잡아야지요. 그래 지금 똘똘 뭉쳐서 중요한 대목만 이렇게 지적하고 지나가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그래서 하나님의 입장에서 볼 적에는 어찌되었든지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죄의 문제를 해결해야만 명예가 회복이 되시겠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걸 만족 설이라고도 그러고. 또 감화 설이라는 게 하나 있는데 그것은 무엇인 고하니 사람들이 예수님의 사랑 그 죽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큰 사랑을 알게 되었어. 아 하나님이 이처럼 우리를 사랑해서 십자가에서 죽음을 하셨구나. 그래서 모든 죄인들이 눈물을 흘리고, 가슴을 치고, 회개를 하고,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게 되는 거야. 감동을 받고 감화를 받는다. 그게 그 역할을 하는 게 십자가라고. 물론 예수님 말씀만 갖고도 감화를 받고, 생활을 보고도 감화를 받지만, 가장 사람의 마음을 자극한건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이거든요. 그러니깐 그 죽음을 통해서 인생들을 감화를 시켜서 자기 품으로 돌아오게 하셨다. 그래서 십자가라는 건 필요하게 되었어.
또 하나 있지요. 공의 설이라고 그러는데, 하나님의 공의가 한번 죽는다고 선언해 놨으니 무조건 용서해 줄 수가 없이 생겨 버렸어. 무엇이든지 거기에 대한 대가를 꼭 치러야만 하게 생겼어. 그러니까, 너희들이 죽을 것을 살리기 위해서 내가 죽어야겠다. 너희들이 죽는 걸 총 책임을 지고 내가 죽는다. 그래서 하나님의 공의를 세우신거야. 그렇지 않소? 우리들은 말 했다가 얼마든지 그 약조를 어겨도 괜찮지만 하나님은 그러실 수가 없어. 하나님으로서는 죽는다고 선언해 놓으신 그 말을 취소해 버리기 위해서는 자기가 한번 죽음을 치러 버리지 않으면 안 되게 생겼다. 그 말이에요.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었다. 공의설이라고 그러든지 그렇게도 말들을 하지요. 그 외에 많아요. 신인 대결이니 신권과 죄권에 대한 투쟁이라니, 또 그런 걸 모두 그걸 한 번에 똘똘 뭉쳐서 고전 설이라고도 그럽니다. 싸움, 고전 설 십자가상에서 예수님이 나의 아버지여 나의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그런 거라든지, 겟세마네 동산에서 그렇게 이 잔을 떠나게 해 주십시오. 그런 거라든지, 굉장히 싸움, 참 우리 사람은 상상도 할 수 없는 고통스러운 싸움을 한 거, 그것이 십자가의 고난을 치루시던 광경인데 그런 거. 그런 모든 여러 가지 이유가 십자가에 전부 뭉쳐져 있었거든요. 그걸 전제로 한다는 거예요. 그것을 반드시 생각하지 않고는 부활이라는 걸 생각해서 는 안 되는 거예요. 그걸 떼어놓고는 생각 할 수가 없는 거예요. 그러면 부활이라는 게 있기 전에 반드시 죽음이 있어야 되지요? 그래서 하나님은 그걸 그리스도를 통해서 또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그 죽음 이라는 것을 철저하게 정리하시고 또 다른 말로 하면 죄라는 걸 깨끗하게 없애버리시고 그런 뒤에야 부활이라는 건 이런 것이다. 하고 보여주신 거야. 그게 참 부활이에요. 그런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게 없는 부활은 그건 부활이 아니야. 그럴 수 도 없고.
그런데 그러면 이 십자가의 사건과 이 부활의 사건, 이것은 다 틀림없는 이야기가 좀 까다로운 거 같지만 용서하고 들으시오. 역사적인 사건이요, 불가불리의 사건입니다. 이 둘은요, 이건 지금 요것만은 우리가 머리에다가 아무리 못 알아듣는 분도 알아들어야겠어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것과, 예수님이 그 죽었던 몸이 무덤에 사흘을 갇혀 있다가 부활 했다는 것과, 이건 도저히 뗄 수가 없는 거예요. 뗄 수 있겠어요? 그렇지요? 세상 사람들은 그렇게 할 수가 없어. 이건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만이 할 수 있는 거야. 그렇지요? 우리는 예수님과 같은 죽음도 할 수 없고. 우리 인간들의 죽음은 나쁘게 말하면 다 개죽음이야. 그래 예수님의 죽음은 참 값있는 죽음인데, 그 예수님의 값있는 죽음과 예수님만이 부활 하실 수 있지, 우리들은 예수님의 부활 없이는 부활은 없어. 부활 할 수가 없는 거야. 그러니까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예수님의 부활하신 둘은 도저히 떼려야 뗄 수가 없어. 십자가 없는 부활은 생각 할 수 없고 그렇지요? 이걸 아주 명심해야 되요. 왜냐하면 그 다음 이야기를 하려면 이걸 머리에다 못을 박고 지나가야 되요. 십자가가 없는 부활을 생각 할 수 없고. 또 부활이 없다면, 십자가는 뜻이 없어져요. 가만히 생각해보시오. 아무리 훌륭한 죽음을 하셨다 해도 죽고 말아버렸다면, 부활이 없었다면, 십자가는 의미가 없어져 버린다니까요. 하나님의 사업은 실패하는 거야. 요새 문선명이라는 사람이 떠들듯이 십자가는 실패한 것이다. 그러듯이 만일 부활이라는 게 없었다면 십자가는 완전히 하나님의 사업에 끝장이고, 실패에요. 그러니까 십자가가 참으로 뜻이 있고 값이 있는 것은 그 부활이라는 게 뒤에 따라야 되는 거예요. 그러기 때문에 십자가와 부활 둘은 떼어놓을 수가 없는 겁니다. 그걸 우리가 먼저 알아야 되요. 왜 그러냐 하면, 지금 우리는 오늘 부활주일을 지키는 사람들입니다. 오늘은 여러분이 부활주일인줄 알지 못하고 온 이들이 여기 꽤 많을 겁니다. 그러나 어찌되었든지 오늘 이 지구 덩어리 위에서 부활주일을 지키는 기독교인들은 반드시 그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걸 뗄 수가 없다. 그러니까, 내가 부활을 믿고, 부활의 신앙을 갖으려면 십자가를 먼저 지나와야 하고 또 내가 십자가의 죽음을 자꾸 애쓰고 노력하고 참 바울의 말씀대로 내가 날마다 죽노라, 날마다 죽노라 하면서 예수 안에서 죽으려고 애쓰는 사람은 반드시 부활을 내다보고 죽어야지, 부활을 내다보고 죽어야지, 죽어버리고만 말면 다한 게 아니야. 아무리 희생을 해도 오늘 국가나 민족을 위해서 자기주의나 사상을 위해서 죽는 사람들이 많이 있어요. 그러나 그건 부활을 전제로 하지 않았기 때문에 종교적으로는 의미가 없는 거예요. 반드시 우리가 생각하는 것은 그 십자가의 고상하고 깨끗한 그 죽음, 그것을 통해서 우리는 부활로 앞을 향해서 나가는 사람이다. 그 신념이 지금 이 시간에 우리 마음가운데 딱 박혀야 한다니까요. 이게 신앙에 아주 주춧돌이고 중심이니까 우리가 예수를 믿는데 이 신앙이 없이 믿는다면 아무런 신학박사가 되고 신구약 성경을 통달해도 다 헛일이야. 그거 알아야 되요. 여러분이 예수를 수십 년 믿었다고 해도 또 저까지, 우리들 안에서 예수님의 죽음이라는 사실을 체험하고, 또 예수님의 부활까지 들어가는 신앙에 도달하지 못했다면 우리는 예수를 잘못 믿는 것이라니까요. 헛 믿는 거야. 그걸 지금 알자는 거예요. 그런데 그 다음으로 인제 우리가 시간을 남은 시간을 다 바쳐서 생각해볼 문제들이 있습니다. 이건 꼭 하십시다. 그 십자가의 죽음과 예수님의 부활은 불가불이다. 떼어놓을 수 없는 것이다. 동시에 그건 역사적인 사실이다.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그건 하도 여러 번 이야기 했으니 이 시간 생략 합시다. 예수님이 그 부활 한 것에 대해서는 역사적 사실이라는 걸 로마의 역사를 보거나 성경을 보거나 어디를 보거나 예수님은 틀림없이 부활 하셨다는 것도 역사적 사실이고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것도 역사적 사실 이라는 건 여러 번 우리가 증거 했으니 이 시간은 역사적 사실이다.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것만 우리는 기억하고 지나가요. 그런데 인제 문제는요, 문제는 그걸 그럼 역사적 사실이라면 2천 년 전 골고다 언덕에서 되고 말아진 것뿐이냐? 그렇지 않다. 그 십자가는 항상 우리에게도 있다. 오늘까지 있고 또 인류가 이 땅위에 사람들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그 십자가라는 건 계속적으로 있다. 그것을 생각해 보는 것이에요.
그러면 그 이유는 간단하지요. 죄가 있으니까. 죄가 있거든요. 그런데 이것이 지금 문제들이 되고 있는 거지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그 시간에 마귀의 머리빡은 깨어지고 뱀의 머리빡은 깨어지고 죄는 이미 없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지금 무슨 죄가 또 있느냐? 그렇게 말을 하는 사람이 있지요. 그러나 실제로 그렇습니까? 그렇지 않은 건 여러분들도 잘 아실 거예요. 시기 질투 모두 분쟁 살인 악독 그 모든 탐욕 음란 모두 그런 아주 그 죄라는 게 지금 이 지구 덩어리 위에 가득 차있지 않습니까? 우리 머리카락에서 발바닥까지 아주 그 죄악성 이라는 게 여전히 있지 않아요? 그럼 십자가에 예수님이 죽으신 것과 내 현재 우리들 속에 있는 죄와 어떻게 관련을 시키느냐? 이걸 하나 해결해야 부활을 이야기 할 수 있게 되요. 그렇지 않겠나 생각을 해요. 예수님에게는 의미가 있어. 다 해결이 됐어. 죄 때문에 죽으셨고, 부활을 했으니까 해결이 됐어. 그런데 우리에게는 아직 죄 문제가 아직 해결이 안됐다면, 죄가 아직 있다면, 그러면 부활이라는 것이 우리와 상관이 없지를 않냐? 예수님의 부활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어? 우리가 죄 안에 그대로 있다면 옛 사람이 죽지 않았다면 부활이 무슨 상관이 있냐? 그대로 부활로 들어 갈 수 있느냐? 그 문제가 중요한 문제 아니야? 큰 문제 아니야? 다시 말하면 내가 죄에서 죽지 않고 죄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암만 새벽에 나가서 할렐루야 우리 예수님 부활하셨다고 떠들어 봤자 무슨 유익이 있느냐 그 말이야. 부활할 자격을 구비하지도 못한 사람이 죽지도 않은 사람이 어떻게 부활을 말 할 수 있냐? 그 말이야. 꿈과 같이, 하늘에 구름장과 같이, 건너다 볼 수 있어도 그 부활을 내가 만들지 않냐 그 말이야. 그러니까 오늘 부활주일을 뜻있게 지내느냐 뜻이 그냥 그대로 행사에 그쳐버리느냐 문제가 되는 거야. 그러니까 이 종성 박사는 그 대목을 그렇게 설명을 했습디다. 아직도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던 그 원인은 생존하고 있다. 생존이라는 말을 강조하고 있어요. 생존하고 있다. 우리에게 아직도 그 원인이 있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던 그 죄악성이 우리에게 남아있어. 그대로 있다. 우리에게 있다. 그 문제가 크지 않소? 그러면 이 문제는 바울사도가 인제 그 문제에 대해서 여러 가지로 이야기를 했는데, 거기에 대한 성경은 여러분도 잘 아실 거예요. 그런데 바울 사도가 보면 그 부활을 대단히 강조 하셨는데 바울 사도 뿐 아니지요. 베드로도 그랬지요. 베드로가 맨 먼저 설교 할 적에 이런 말을 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하실 일을 내다보고 그리스도의 부활에 관하여 미리 이렇게 말 하였습니다. 이렇게 구약을 인용해 가면서 예수님이 부활 하실 것을 이미 다윗왕도 말 했다고. 그렇게 말을 했지요. 그러면서 이렇게 또 그 다음에 말을 했어요. 두 사도가 사람들을 가르치며, 예수의 부활하신 사실을 들어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난다고 선전하기 때문에 그들은 격분하여, 그러니까 베드로가 군중 앞에서 설교 하는데 중심이 예수님의 부활 이었던 것 같아. 이렇게 부활했다고 그러니까 군중이 선동 되었다고 그래가지고 베드로를 잡아다 가두었지요. 그 다음에 이 사도 바울도 하나님께서는 예수를 다시 살리셔서 자손 된 우리에게 그 약속을 이루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시편 제 2편에도 ‘너는 내 아들이다. 내가 오늘 너를 낳았으니’라고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예수를 죽음으로부터 살리시고 다시는 썩지 않게 하셨습니다.
이건 사도행전 13장에 그렇게 말씀을 해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설교 할 적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다시 살리셨다는 그런 말씀을 해나옵니다. 해 나오는데 마지막으로도 그 말을 했지요. 바울은 거기서 큰 소리로 외쳤다. 형제 여러분 나는 바리사이파 사람 중에서도 진짜 바리사이파 사람입니다. 내가 이렇게 재판을 받고 있는 것은 우리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믿는 대로 나도 죽은 자 들의 부활에 대한 희망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죽은 자들의 부활에 대한 희망을 갖고 있기 때문에 내가 이렇게 재판을 받고 있다. 고생을 하고 있다. 또 내가 말 하는 것은 예수님이 부활했다고 말하는 것 때문에 이 사람들이 이렇게 나를 괴롭힙니다. 항상 그러니까 사도바울도 예수님의 부활을 항상 이야기 하신 것 같아요. 그런데 여기서 이 베드로라든지 사도바울 같은 이는 부활을 말할 자격이 있느냐? 그 말 이지요? 그들의 설교가 중심이 그렇게 되어있는데 그들은 말할 자격이 있어요. 거기서 우리 하나 찾아봐야 해요. 베드로는 예수님 생전부터 실패를 거듭했던 사람입니다. 그리고 철저하게 자기 죄를 회개 했지요. 그리고 오순절 날 다락방에서 성신을 받았습니다. 성신 충만해 가지고 나와서 이때 베드로 앞에는 죽음이라는 게 두렵지 않습니다. 죄 문제를 해결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때는 자기 자신이 이제는 예수님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봤지요? 부활하신 예수님하고 이야기도 하고 그랬지요. 무엇으로 보던지 베드로는 내적으로 보나 외적으로 보나 예수님의 부활을 의심 할 수가 없이 되어버렸어. 자기 자신이 부활을 체험했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생생하게 만났고, 그러니까 베드로는 예수님의 부활을 말 할 수 있어요. 그럴 자격이 있습니다. 또 사도바울도 다메섹 성문 밖에서 거꾸러지기 전까지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지를 못했지요. 알지도 못했고. 그런데 성문 밖에서 만났거든요. 당신이 누구십니까? 그러니까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 예수님이 말씀을 해. 그러니까 사도바울이 참 눈이 어두워져 가지고 다메섹 성으로 끌려들어가지 않았소? 그래가지고 눈이 뜬 뒤에도 그래서 갈라디아서에 그걸 강조 했지요. 만삭되지 못한 내게 예수님이 나타났었다. 가끔 만난 체험을 기록을 하고 있어요. 사도바울의 기록에 보면. 그래서 사도바울에게도 두 가지 요소가 이루어졌다니까요. 하나는 자기 죄에 대한 깊은 명칭과 (끊김)
증거 할 수 있는 자격이 있다. 여기 두 사람의 예만 들어봐도 두 가지 조건이 꼭 따라야지요. 죄를 회개하는 거, 완전히 중생을 체험하는 거. 그리고 예수님을 만나는 거. 이 두 가지를 체험 한 사람만이 예수님의 부활을 말 할 자격이 있다니까요. 그렇게 되요. 그렇다면 이제 우리에게도 그렇습니다. 아까 이 박사가 그 십자가에 예수님이 못 박히게 한 죄 그 십자가가 생기게 된 원인, 그걸 상견하고 있다. 이 문제를 해결해야 돼. 우리에게 아직도 예수님을 못 박게 하는 악 죄악성 믿지 않는 것 한마디로 하면 불신, 모든 나쁜 마음씨 예수님을 열 번이라도 죽일 수 있는 시기 질투 분쟁 모두 그런 욕심 거짓 모두 그런 것들, 이것은 한번 참살을 해야 되는 거야. 오늘 우리는 부활주일을 떠들기 전에 먼저 내 그 십자가의 죽음을 한번 골똘히 생각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을 하나 이야기해야 하겠고요. 그래서 사도바울도 그랬지요. 바울사도 같은 이는 그런 체험을 하고난 뒤에도 내가 날마다 죽노라. 내가 날마다 죽노라. 내가 십자가 외에는 다른 건 아주 생각 하지 않기로 결심을 했다. 아 바울사도 같은 이도 그러지 않았소? 그래서 저는 가끔 그런 생각을 해요. 이렇게 바쁘게 집을 짓는다. 무엇을 한다. 하고 그렇게 우리들이 바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것과 십자가가 무슨 상관이 있는가? 그런 생각을 자꾸 하게 돼요. 우리가 물질, 저는 요새 더 우스운 게 하나 있어요. 혼자 무엇을 하는 게 있는데. 지금 내일이 세계 유엔에서 정한 장애자의 날입니다. 장애자는 정신 장애 신체장애자가 있는데 정신병자 세상 막말로 하자면 용서 하시오. 미쳤다고 하는 거 그게 정신 장애자요. 또 이렇게 병신 절름발이 앉은뱅이 곰배팔이 모두 이런 걸 그걸 신체장애자라고 그래요. 그 말이 조금 점잖고 좋지요. 장애가 있다. 그래서 신체장애자 정신장애자를 전부 합쳐가지고 장애자라고 부릅니다. 그래가지고 그 세계적으로 이게 자꾸 늘어나고 있어요. 우리 한국만 이백팔만명이 있다고 그랬지요? 전라남도만 팔구만 명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 장애자들을 위해서 유엔에서 세계적으로 관심을 갖게 하고, 정신적으로 경제적으로 기술적 의학이라든지 모든 기술적으로 이 장애자의 문제를 해결해 줘야겠다. 고칠 수 있는 사람은 고치고. 직업을 줄 수 있는 사람은 직업을 주고 그래서 사회에서 버림받고 소외당한 사람들을 사회에서 받아들여 가지고 될 수 있으면 그 사람이 앉은뱅이면 앉아서 못해도 손으로는 일을 할 수 있지 않겠느냐? 손으로 일 할 수 있게 해주고 결혼 할 수 있는 사람은 짝을 지어주고 가정을 이루어 주고 생활 보장을 해주자. 그런 운동이에요. 그래가지고 그걸 해, 내일도 그 날이에요. 그래서 여기도 시청에서 사방에서 공문이 오고 전화가 오고 내일 버스가 모시러 온답니다. 여러분들 한번 대접하러 그래 모시러오면 가서 저기 가서 회의를 하고 또 그중에 모범이 되는 사람은 표창을 하고 또 빵도 줄라는 가 모르겠어. 그리고 또 동물원에 가서 구경도 시키고 그러니까 모두 보내라 그런 공문이 왔어요. 그리고 또 서울서도 와서 장애자들을 위해서 우리가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하는 걸 연구를 할 테니 오라, 오라하고 사방에서 모두 오고 그래요. 그래서 우리도 누구 하나를 내세워야 할 거 아니에요? 형제 왔는지 모르겠어. 안온 것 같네. 그래서 수고한 사람이 하나 있어요. 아주 죽게 된 사람 똥도 많이 치우고 참 아주 애 많이 쓴 사람이 하나 있어요. 그럼 그 사람을 표창을 시킬까? 그리고 이름을 적어 내놨지요. 그리고 내일 가고 싶은 사람은 다 가자. 그래 말은 해야겠어. 그래서 아침에 건너갔었어요. 건너가서 어째 아무개를 표창하는데 이름을 적어 보냈는데 아닙니다. 나 정말 그렇게 하면 나 다른 데로 가렵니다. 절대로 안 가렵니다. 표창도 하지 말고, 먹을 것도 주지 말고 가만 두었으면 좋겠대. 그래 인제 장애자의 해, 여기 앉아 있는 이들 다 의견이 같을 거예요. 나도 그런 생각이 들어. 병신 병신이라고 모든 사람이 와서 구경하면 좋소? 여러분들 기분이 좋겠소? 구경도 와서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사실은 그렇거든. 그게 좋은 줄 아시오? 모두 와서 빙 둘러보고 동물원에 원숭이 구경 하듯이 하고서는 그리고 사탕이나 하나 아주 자비심 베푸는 듯이 하나 나눠주고 안하는 사람보다 기특합니다. 안 하는 사람보다야 기특해. 그걸 모른다니까. 이 장애자들의 심리를 몰라. 그럼 왜 그러냐? 저희들이 병신이 안 돼봐서 그래요. 같은 소리에요. 저희들이 병신 돼봐야 나도 병신 안 돼. 봤지만 병신이 돼봐야 그런 사람들은 상관도 하지 말고, 도와줘도 감쪽같이 도와줬으면 좋겠어. 감쪽같이 떠들고 도와주지 말고 시끄럽게 라디오로 신문으로 떠들지 말고 그리고 사실은요, 어저께 내가 어떤 사람에게 전화 할 일이 있어. 전화로 한마디 했어요.
당신들 ‘장애자의 해’라고 밤낮 떠드는데 우리는 멸치꼬리 하나 못 받았어요. 누구를 위해서 떠드는 거냐고 그랬어. 대체 너희들 나발들 불고 떠들고 신문에 내고 그리고 돈을 몇 백만 원씩 씁니다. 회의한다고, 그리고 환자들 입에는 멸치꼬리 하나 안 들어간다니까. 우습지 않소? 참 나쁜 사람들이라고 그랬어. 호텔에서 회의하고. 그거 우스워요. 왜 이 이야기 하는지 아시오?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에 옛 사람들 그대로 있다니까. 밤낮 새롭게 한다. 새롭게 한다 하지만 하나도 새롭게 되지 않았어. 누구를 위해서 하는 거야? 언젠가 한번 거지잔치 했는데 거지는 하나인가 둘인가 하고 성한 놈 들이 앉아서 잔치 먹는 거 내가 봤어. 거지 잔치인데. 거지 잔치라고 차려놓고 성한 사람들이 죄다 먹어 버립디다. 저희들이 그냥 거지 되려는가 몰라. 세상이 이렇다니까요? 우리도 항상 속는 거야 부활주일, 부활주일 대체 누구를 위한 부활주일이야? 누구? 어째요? 여러분 중에 부활한 사람 있어요? 여기? 그럼 누구를 위한 부활주일이야? 누구를 위한 부활 주일이에요? 부활을 체험한 사람이라야 부활의 기쁨이 있지. 그렇지 않소? 그러지 않은 사람이 떠들어 봤자 꼭 장애자 해라고 떠들고 저희들끼리 모두 요리 집에 가서 음식 먹고 돈 써버리는 거와 무엇이 달라? 엉뚱한 짓들 한다니까? 엉뚱한 짓들 해. 적어도 우리가 부활주일을 뜻있게 참 뜻있게 부활주일을 맞으려면 내가 죽음을 체험해야 돼. 죽고 산 사람만이 부활주일을 기념할 자격이 있지. 그렇지 않소? 죽지도 않고 옛 사람이 다시 말하면 회개하지 않은 사람은 지금 그대로는 지옥 갈 거 밖에 없는데 부활이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이야? 그 말 알아들으시겠소? 죄가 그대로 있는 사람, 회개를 하지 않은 사람, 중생을 체험하지 않은 사람은 부활이 상관이 없다니까요. 그 사람들은 지옥으로 직행을 해요. 지옥으로 떨어질 자리밖에 없어. 위로 올라갈 자격은 없다니까요. 그래서 이 대목이 가장 중요한 대목이에요. 이 걸림돌을 없애 버려야 없애 버려야 그때 가서 인제 부활이 무엇이냐? 부활이야 참 생각 할수록 좋지요? 그런데 우리가 지금 기독교인으로서 중요한 문제는 기독교는 부활이 없으면 기독교는 없어요. 생각을 해보시오.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것은 영생을 누리자는 건데 그 영혼을 구원시키자.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한다. 그러지 않으면 기독교는 한 푼어치 값어치 없는 종교야. 아무리 도덕적으로 훌륭하고 너희들이 서로 사랑해라. 자비해라 온유해라 겸손해라 그래도 그것만 가지고는 기독교가 그런저런 종교야.
그럼 뭐냐? 유교에서 하던지 다 있으니까. 그리고 이제 정말 기독교의 중요한건 영생을 주기 때문에 필요한 거야. 하늘나라를 주고 영생. 왜냐하면, 인간자체는 하늘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의 소유자가 영생을 누릴 수 있도록 하나님이 창조하신 인간들이 죄 때문에 영생을 잃어버렸거든. 그리고는 전부 지옥으로 떨어지게 생겼거든. 그것을 회복시켜 주려고 예수님이 우리를 영생으로 끌고 가시니 이 영생이라는 게 가장 중요한데 영생으로 들어가는데 제일 큰 문제 못 들어가게 하는 게 죄 아니야? 죽음 아니야? 죄의 값은 죽음, 그 죽음 때문에 우리는 영생으로 들어가는 길이 꽉 막혀 버렸거든. 그놈을 터놓지 않으면 우리 기독교는 실패한 종교야. 아무것도 아니야. 무슨 신학이니 이론이니 다 필요가 없는 거예요. 알고 보면 우리가 영생만 붙들면 되는 거야. 그런데 그것을 영생을 붙들라면 죽음을 치루지 않으면 안 돼. 그게 성경이라고 그게 기독교 아닙니까? 그래서 사도바울은 내가 어찌하던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걸 아주 강조하지 않았어요? 죽고 다시 산다. 죽고 산다. 그걸 우리가 공부하는데 가장 중심을 둔 것 아닙니까? 죽고 다시 사는 문제가 가장 중요한다는 것 그래서 그리스도를 믿는 내 믿음 보시고 하나님께서 나를 당신과 올바른 관계에 놓아 주시는 것입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알고,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을 깨닫고, 그리스도와 고난을 같이 나누고 그리스도와 같이 죽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같이 죽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죽음으로부터 다시 살아나기를 바랍니다. 이런 거 거든. 우리의 신앙 골자는 이거야.
그리스도와 같이 내가 죽는 것입니다. 먼저 죽어야지, 죽는 척이라도 해야지. 죽는 척이라도 해야지. 맨 살 궁리만 하는 거야. 어떻게 하면 돈 많이 벌까? 어떻게 하면 자식 많이 낳을까? 어떻게 하면 자식 성공 시킬까? 맨 어떻게 하면 땅위에서 잘 살 궁리만 하는 사람들이 부활 주일을 무엇 때문에 지킨다고? 죽을 궁리를 해야지. 어떻게 하면 죽을 까? 어떻게 하면 버릴까? 죽을 궁리를 해야지. 그러니까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와 고난을 같이 나누고 그리스도와 같이 죽는 것입니다. 그런 뒤에 나는 죽음으로부터 다시 살아나기를 바랍니다. 아까 말했지만 우리가 부활을 바라보고 죽지 않는 거, 영생을 바라보고 죽지 않는 것은 죽음의 뜻이 없지요. 죽기만 한다고 잘하는 거 아니야. 무엇 때문에 죽느냐가 목적이 분명해 가지고 죽어야지, 그러지 않소? 그렇다면 우리가 그 부활이니 영생이라는 걸 목적을 하면 그렇게 말하지 않았어요? 부활의 능력을 깨닫고 그 부활이라는 것은 얼마나 위대하고 값있는 것인가? 그걸 바라보고 그러기 때문에 죽는 것이고, 그러기 때문에 죽는 것이야. 그래 하나님이 그러기 때문에 죽는 것인데 그 죽음 이라는 것은 아주 완전한 죽음을 가르친 것이야. 완전한 죽음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제 이 말은 우리 일상생활에다가 많이 적용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 아까 읽은 본문으로 가보십시다. 요한복음 11장에 그 예수님이 마리아하고 마르다하고 응답하던 대목이 나오지요?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 하셨다. 나는 부활이며 또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겠고 또 살아서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은 이것을 믿습니까? 이거 지금 나사로라는 송장을 앞에 놓고 나사로가 죽었지요. 지금 마리아하고 마르다는 부활은 그래도 믿었던 모양이야. 그래도 이다음에 마지막 날 다시 살 것입니다. 이정도만 믿었어. 예수님은 아니다. 내가 부활이다. 내가 부활이야. 예수, 나를 받아들이면 지금 부활하는 것이다. 이다음에 부활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부활하는 것이다. 그걸 강조하는 것이에요. 믿느냐? 그걸 거기에도 확실히 대답을 안했어. 그런데 예수님이 무덤 앞에 가서 나사로야 일어나라 하니까 이다음에 부활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부활했거든요. 예수님 자신에 부활의 능력이 있다는 걸 보여주신 거야. 그럼 우리의 부활도 똑같다는 거지요. 우리가 지금 예수님 맞아들이면 우리도 부활하는 거야. 부활하는 건데 예수님을 맞아들이면 옛사람은 죽고 새 사람이 나오거든. 그래서 그런 대목을 여러 군데 강조 했지요? 여러분이 요절로 외우는데 거기는 어떻게 말이 되었지요? 갈라디아서 이는 이미 율법의 손에서 율법의 지배에서 벗어나 하나님을 위해서 살게 되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달려 죽었습니다. 바울사도가 갈라디아 교회에 편지 할 적에 어째서 이런 말을 했을 까?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달려 죽었습니다. 자기는 죽음을 완전히 체험한 사람으로 이야기 했어요. 죽었습니다. 이제는 그런데 지금 살아있거든. 그럼 지금 살아있는 건 무엇이냐?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사시는 것입니다. 이제는 내가 숨 쉬고 말하고 살고 있는 건 옛날 나가 아니야. 옛날 사울이 아니야. 지금은 그리스도가 예수가, 예수가 내 안에 들어와서 이렇게 나를 숨 쉬게 하고 말하게 하고 생각하게 하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을 하는 거예요.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사시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것은 나를 사랑하시고 또 나를 위해서 당신의 몸을 내어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그 예수님을 내 안에 받아들여서 옛 사람인 나, 그 추하고 악한 옛 사람인 나를 죽음을 당하고, 매장당해서 송장으로 묻어버리고 그리고 새 사람 그 죄에 갇혀있고 가려져 있던 새 생명, 그것이 예수님의 새 생명과 접해가지고 그래가지고 다른 나가 되는 거예요. 어려운 말로 하면 역사관이 달라지고, 세계관이 달라지고, 인생관이 달라지고, 모든 게 달라져. 지금가지 내가 세상 것을 좋아하던 게 세상 것이 싫어지고 그리고 세상에서 싫어하던 게 좋아지고 반대가 되어버려. 그걸 성경에 여러 군데 말하지 않았소? 그렇게 변해진다. 그러니 예수님이 들어와서 변해. 그래서 미워하던 사람 원수 까지도 사랑하게 되고, 진리와 함께 기뻐하기 때문에 거짓이 싫어지고, 거짓말 할 줄 모르고, 그렇게 변해져가. 내가 사는 것은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그래서 모든 사람을 모든 사람을 미워하고 저주하고 흉보고 그러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볼 적에 죄인을 봐도 불쌍하고, 악한 사람을 봐도 불쌍하고 이렇게 모두 예수님이 십자가상에서 모든 사람의 죄를 용서 하듯이 그렇게 너그러운 마음 관용 하는 마음 불쌍한 마음으로 보여 지도록 그렇게 변화를 받는 거야. 변화를 받는 거야. 그래서 지금은 내 안에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그래서 그 그리스도를 믿는 그 믿음이라는 것 그때부터가 믿는 거야. 변화 받은 그 자리가 믿는 거야. 변화를 받지 못하고 믿는다는 건 죽은 믿음이야. 거짓믿음이야. 그건 거짓 믿음이야. 관념적인 신앙이라고. 그래서 그런 믿음 그건 기독교가 아니야. 그런 기독교인이 많으면 기독교는 저 니콜라이 황제와 함께 정치가 공산주의자에게 쫓겨나듯이 쫓겨나야 마땅한 일이야. 마땅한 일이거든. 그래서 그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은총을 헛되게 하지는 않습니다. 만일 사람이 율법을 통해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을 수 있다면 그리스도의 죽음은 무의미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법으로 교회에서 굉장한 법을 만들어놓고 영세만 받아야 구원을 얻는다. 뭐 어쩐 다 그러고 철통같이 짜놓는 것이 아무 의미가 없다고. 다 율법이야. 그것으로는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만일 그런 형식이나 의식을 지켜가지고 구원을 얻는다면 예수님은 헛되게 죽었다. 누구 때문에 죽었냐? 그때 오늘 교회들이 아무 훌륭하게 법을 만들고, 제도를 만들고, 그래도 그때 바리새교인이 만들어 놓은 것만은 못하지 않을까? 잘 몰라도. 그것 가지고는 구원을 얻지 못합니다. 그것은 도리어 잘못하면 성인을 죽였지요? 기독교 역사를 보면 만국공인회가 성인을 사형선고 하던 공인회도 있었는데 한국 기독교는 신사참배를 결의도 했고 그게 장한 게 아니거든. 잘못하면 도리어 이때에 예루살렘 교회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기로 결의하지 않았소? 죽여 버리기로, 잘못하면 그렇게 되는 거지. 그러니까 정말로 우리가 부활의 종교인 그리스도교를 믿는 사람들은 이 십자가의 고난이라는 것이 반드시 부활 앞에 선행해야 한다. 이것을 참 깊이 생각해야 돼. 그래서 그 문제에 대해서 우리가 진심으로 깊은 산 체험을 하기 전에는 정말 부활의 맛을 모른다. 그거야. 부활이라는 게 얼마나 자유롭고 영광스럽고 훌륭한 것인지 참 훌륭하지요? 그야말로 노래를 실컷 천지가 진동하도록 불러도 부족한 것이지요? 그러나 반드시 그 전에 죽음이라는 걸 체험하지 않으면 참 기쁨은 맛보지 못한다는 것을 이 시간에 이야기 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래서 부활 사건은 반드시 현대화 되어야 한다. 이 부활 사건이라는 것은 이 박사는 끝머리에 이렇게 말 했습디다. 만일 이 부활 사건이라는 것이 현대화 되지 못하면 인류는 세계는 망한다. 참 좋은 말이에요. 우리 기독교가 예수님의 부활을 우리의 생활화 시키지 못하고, 현대화 시키지 못하면, 기독교가 인류의 파멸을 막지 못해요. 이거 적은 문제가 아니에요. 그러니까 이 부활의 신앙이라는 건 자기 신앙으로서 이걸 받아들일 적에 내가 구원을 얻고, 영생을 누릴 수 있고, 또 이것이 한 민족이 부활을 체험할 적에는 그 민족이 살수가 있는 길이 열리는 거예요.
다시 한 번 생각하고 맙시다. 왜 예수님이 부활 하셨나? 그전에 먼저 생각 할 거는 왜 죽으셨나? 죄 때문에 죽으셨다. 하나님의 공의 때문에 죽으셨다.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죽으셨다. 하나님의 영원한 속죄사업, 영원한 계획 때문에 죽으셨다. 이것을 생각 했어요. 그러니까 하나님은 그러니까는 다시 예수님은 살리실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신 거예요. 예수님이, 그런데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심으로서 하나님의 능력이 증거 되었고, 하나님의 명예가 회복 되었고, 하나님의 영광이 완성 되었고, 하나님의 지혜, 하나님의 승리, 그래서 결국은 이 부활이라는 건 하나님의 최후의 승리를 이렇게 보여준 것이지요. 부활의 신앙이라는 거 이것을 우리가 가질 적에는 세상에 무서울 것이 없지요. 죽음도 이긴 부활 이니까 정말로 부활을 체험했다면 그까짓 병 같은 거 무서울 리가 없어요. 저도 모르겠어요. 큰소리 못해요. 병이 무서운 게 아니지요. 부활을 체험 한 사람이라는 건 내가 문둥이가 되어도 찬송을 하면서 기쁨으로 자리에서 아침에 저 윗 층에 계신 노인을 잠깐 뵈었더니 이제는 자기를 이렇게 잘 먹이려고 애쓰지 말고 수족 꾼 붙여서 대접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고, 요새 같아서는 이제는 육과 영이 갈 날이 가까운 것 같으니까 훨씬 마음이 가벼워지고 그렇다고. 세상 뜰 때가 되면요, 육신이 짐을 벗어버리니까 기뻐지지요. 구렁이 허물 벗듯이 참 괴로운 영은 갈 날이 가까워지니까. 그때는 몇 가지 여러분이 짐작 할 수 있는 게 있어. 첫째 먹는 게 귀찮아 집니다. 먹어라먹어라 하는 소리가 귀찮아 지고, 이제 갈 텐데 영혼이 날라 가야 할 텐데 먹는 걸 변소에 내보내는 게 귀찮지 않아요? 남수고 시키고 배에 들어가면 꾸럭꾸럭 하고 참 지저분하고 먹는 것도 귀찮고 심지어 누가 만나서 세상 이야기 하는 것도 듣기가 싫고 다 싫어요. 영혼이 훨훨 날라 갈 준비만 하는 거지요. 그런 사람이 무엇이 무섭겠소? 순교자가 한 말 같이 불에다가 끄슬린다고 해도 기쁘기만 하다고. 아 가면 되는 건데 어차피 이거 태워버릴 건데 나 지금 그렇게 될까 몰라요. 되려는가 모르지만 한번 공상은 해보는 것이에요. 그럴 것이다. 아무리 내 육신 누가 와서 죽여도 찔러도 상관이 없게 되는 것이지요. 사실로 부활을 체험 했다면 말이에요. 정말로 부활의 기쁨을 맛본 사람이라면 다 문제가 없는데 그냥 벗어버리는 건데, 그러니까 그런 사람이라면 말이에요. 만일 우리 한국 기독교인 가운데 정말 그렇게 부활을 체험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기독교는 참으로 새로워져서 무슨 불의니, 정의니, 그런 말을 할 필요도 없이 사회는 참 사회정의가 구현될 것이요. 또 정말 부활을 체험한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사랑 그대로 실천 할 것이니 이 세상에서 그렇게 무슨 범죄니 죄악이니 그런 게 있을 수도 없을 것이고, 거기는 법도 필요가 없고 그렇게 될 것 아니요? 정말로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 질것 아닙니까? 나 개인도 자유를 얻고 모든 영혼들이 자유를 얻는 그런 참 천국이 이루어지는 것이지요. 부활의 세계는 거기는 아까도 봤지요 거기는 눈물도 없고, 거긴 아무 근심도 없고, 질병도 없고 고통도 없고, 그런 것도 아무 문제도 없어요. 부활이라는 거 바라봅니다. 그 신앙을 닮아요. 우리 안에서 꼭 이루어져요. 그래서 어떤 물질적인 거나 육신적인 거 세상적인 것을 우리 마음가운데 고통의 조건이 없어져 버린 게 부활 아닌가 말이야. 그럼 그때는 예수님이 그러셨듯이 마음대로 다니지 않아? 금방 예루살렘 문 닫아 놓아도 쑥쑥 들어오신 게 예수님 아니야? 갈릴리 바다에 가있다가 어디가 있다가 올라가고 싶으면 올라가고 가고 싶으면 가고 그게 영혼의 자유야. 그게 영혼의 자유지요. 부활의 신앙이라는 것은 우리가 체험만 하면 참 영적 자유를 느껴. 무한이 능력이 있고. 무한이 지혜롭고 그렇게 세상을 지나가요. 한국 기독교인이 또 내가 모두 여기 앉아있는 우리가 정말로 부활의 신앙을 체험 한다면 얼마나 이로울까? 이걸 꼭 우리가 믿고 바라고 나가야지요. 찬송 하나 부릅시다. 132장 찬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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