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에 있는 풀무학교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김제 성산공원 전망대와 공원을 돌아보았다. 지척이 천리라는 말 처럼 김제에 와서 15년을 살면서도 이제야 돌아보았다.
인 사
1971.08.15. 유영모 선생
그러니 정말 이 세상에 오직 한번 한사람, 한사람이 참으로 만나 그건 극적이 안 될 겁니다. 극적이 되면 그건 마귀의 짓이 나오는 거지. 결코 귀한 짝을 구해서 적어도 일생을 같이 살겠다는 그런 사람끼리 만난 게 아닙니다. 그럼 그렇게 되면 연애도 뭐도 다 거짓말이 되어요. 사랑이 무슨 놈의 사랑이야? 그러니까 한정이 없는데 그런데 그게 서양에서는 어때요? 입맞춤으로 인사한다고 해. 참 어려운 겁니다. 동양 사람들은 그거 알아듣기가 대단히 어려워. 그러니까 살과 살이 우리 마음과 마음에 간절한 걸 표시하는데 살과 살까지도 한데 닿아버리고, 대어서 비비고 이렇게 까지 가는데 그것이 정말 아주 죽다가 살아나고 오래 죽어서 없어진 거 같이 있다가 또 다시 만나게 되고 이때에는 죄다 그렇게 되는 거예요. 부자 형제 어른 아이 사내 계집애 다 그렇게 되요. 그건 가장 당연한 거니까 그 때 그렇게 되는 거지, 거룩하게 되는 겁니다. 그 다 수가 있어요. 그러니까 평상시에 인사가 세계에 한가지로 통일이 되서 악수로 되겠느냐? 그렇지 않으면 입까지 맞추는 거로 되겠느냐? 그렇지 않으면 합장이 되겠느냐? 동양에서는요, 중국에서는 맨날 오다가다 만나면 그 중 좋은 것은 의지라는 겁니다. 손이 맞닿아 가지고 이렇게 무엇입니까? 이것도 그때 정도가 있지요. 이쯤하고 그치는 겁니다. 이쯤해가지고 이렇게 긋습니다.
몇 가지 있지요. 그러니까 이거는 문제에요. 그래 아까도 말했지만 목사하고 목사 나와, 그리고 나서 말 시작하면 아주 순해요. 난 악수 죄다 퍼지지를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럼 또 이게 이렇게 하고 싶은데 이걸 이렇게 했다가 그거 중인가? 저게 어째 좀 변했나? 예수교 그만두고 염불하나? 이럴 런지 모릅니다. 이 세상 거북해요. 딱 맞아야 하는데 그 맞기가 대단히 어렵습니다. 그래 마음으로는 악수가 전 세계에 인사가 되느냐? 합장이 전 세계에 인사가 되느냐? 그건 이다음에 두고 보자는 거예요. 그런데 이거보세요. 절 하는데도 다 거수기가 있고 악수하는데도 다 거수기가 있는데 악수하는 속에 여러 가지가 있답니다. 어떠한 정도로 할까? 그건 우리 알바 모릅니다. 그 교회에서도 교회 분들이 많이 악수하는데 여든여섯에 돌아간 이가, 목사가 어느 교회 원로목사인데 편치 않아 누웠어요. 그런데 정신이 좋은 이가 되어서 내일 모레 돌아가는데도 오늘 정신이 아주 총명해. 그래 원로목사가 그렇게 편치 않으니까 교인들이 남녀노소 없이 위문하러 가지 않습니까? 그 정신이 좋아요. 누가 들어오든지 들어오는데 들어오면 이 양반이 손이 이렇게 나가요. 손 나가니 모두 악수해요. 그래 손을 악수 하는 사람은 지금 누구를 찾아보러 갈 때 인사를 하는데 청년이 나를 찾아보러 왔는데, 더더욱 밖에 길에서 만났는데 만나고 이야기 하고 갈 적에도 그렇고, 손이 쑥 나와요. 나오는 손 안 받을 수 없어 내 손도 나가요. 나중에 떠나간다고 할 적에 의례 그 젊은이가 손이 나와요. 그 급할 때는 어떤 때는 받아서 악수해서 보내지만 그 틀린 거예요. 젊은이가 나이 많은 이한테 먼저 손을 내 밀수가 없어. 안 되어요.
또 서양 법에는 여자하고 남자 만날 때, 여자의 손이 내민데, 남자의 손이 내미는 거지. 여자 앞에서 만났는데 남자의 손이 쑥 나가는 법은 없어요. 그건 우리가 할 때는 인사는 가장 정성스럽게 하는 인사가 먼저 하게 되는 거예요. 먼저 하겠다는 그게 아니야. 만나면 쑥 인사가 벌써 시작이 돼. 되어야 하는 건데, 그럼 여자하고 남자하고 하는 건데 의례히 여자가 먼저 나가는 거지요. 그러면 남자도 나가지요. 그러나 여자의 손이 나오지 않는다면 남자는 악수할 염도 안하는 거예요. 그게 원 하는 거예요. 다른 인사를 먼저 하는 게 옳다느니 여자와 인사니까 의례 먼저 나갈 런지 몰라요. 그러나 우리나라는 뒤집혀서 점잖은 이 앞에 나가서 여자로서 손이 쑥 나갈 수 없어요. 그러면 일이 이렇게 어떻게 바로 꼭 될 겁니까? 의례하는 그 나라에서 여자가 손이 먼저 나와야만 남자가 거기 답을 하는 건데 인사를 먼저 해야 정성이라고, 불쑥 나가면 그 일만 이 쑥쑥 나가요. 인사를 먼저 하는 것이 가장 좋은 거라고, 그래 쑥쑥 나가요. 그게 맞지 않는 거야. 맞지 않으면 보기가 싫어. 그러니까 이 세상일이 아주 의례히 하기 쉬운 것이 바로 하기가 어려운겁니다.
하느님 계 계셔 나를 내셨으니 내 날 받들어 계 받들어 섬기어 이제 내 속 알과 삶의 목숨과 내 날의 힘과를 계 받들어 드려 하느님 뜻 맡고 하나님 말씀 쉬어 나와 모든 사람 속 알 나 의인에 더욱 되기만을 가장 비나이다. 하나님 우리 조인 살에 조임이 몬 진 몸 짐이 무거워 드린바 못되오나 불쌍히 바라오나 내 소원을 기대어 비오니 나를 이제 계 든 마음에 아멘. 기도의 시간이라고 역시 나왔는데 이때 기도를 아니 했어요. 그렇지만 지금 요건 한번 이렇게 한 게 비로소 기도의 시간에 비로소 기도를 한번 한 겁니다. 그런데 원 사실은 첫 부터 운동 그거 기도입니다 이때까지 이야기한 거 기도입니다. 기도에 무슨 형식이 있는 거 아닙니다. 뜻입니다. 뜻, 참 뜻, 바른 뜻, 아버지 뜻 그것이 속에 있으면 일어나는 거, 사는 거, 먹는 거, 쓰는 거, 글을 보는 거, 생각하는 거, 그 죄다 기도. 죄다 노래, 찬송, 죄다 배우는 거, 죄다 외우는 거, 다 하나입니다. 다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하늘계신 아바께 이름만 거룩 힐 참 말씀이니 이다. 이에 숨 쉬는 우리 밝는 속 알에 더욱 나라 찾음이어 지이다. 우리에 삶이 힘씀으로 새 힘 솟는 샘이 되었고 진심에 짓눌림은 되지 말아 지이다. 사람이 서로 바꾸어 생각을 깊이 할 수 있게 하옵시고 고루 사랑을 널리 할 줄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와 임께서 하나이 되사 늘 삶에 계신 것처럼 우리도 모다 하나이 될 수 있는 성언을 가지고 참말 삶에 들어갈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거룩하신 뜻이 위에서 된 것과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암. 오 옴. 아멘. 지금 이 사람 어떻게 됩니까? 이 사람 노는 겁니다. 어린애에요. 아버지 앞에서 어린애가 깨어가지고 일어나 놉니다. 늙어서 늙은이 노릇하는 게 이 세상에 옳아요. 또 일어나서 세수하고 반듯이 옷 입고 예배자리에 나가서 하나님 이름 부르는 게 옳아요. 부를 때에는 기도하고 찬미하고 성경보고 말씀 듣고, 혹 말씀하고 그 차례차례 그거 다 옳은 거예요. 그러나 온통 그 속에는 말씀이 늘 함께합니다. 말씀이 늘 함께 해요. 그건 통이 생각을 담는 거니까 생각을 담아 말씀이 옳은 게 늘 함께 합니다. 그걸로 만 되면 그게 참 예배에요. 참 아버지 앞에 아들이 나와서는 아버지를 모시고 인사를 하는 겁니다. 나만 이렇게 사는 발표를 이렇게 하고 긴 시간을 이렇게 살았습니다. 그리고 여러분도 이제는 발표하셔야지. 아까 찬미는 하셨으니 또 한 번 하시고 싶은 대로 여기 발표해 주세요. 나는 이제 앉아 여러분 이렇게 하시는 거 구경 할 테니 마음에 나오시는 대로 발표를 해요. 찬미로 나오시던지.
찬송가
찬미할 때 성경 이렇게 놓으시고 이렇게 보시는 이가 많습니다. 지금도 찬미 책 이렇게 하고 이렇게 해야 좋습니다. 늘 펴야합니다. 구부리지 말아야해. 이 찬미 부를 적에 구부리고 해서, 그래서 지금 근시가 점점 많아. 근시 안경을 죄다 쓰는 아이들부터 많아요. 안됩니다. 뭐든지 늘 해야 해. 쉬어서는 안 됩니다. 운동 정신이 늘 있는 겁니다. 앉아도 있고 드러누워도 있고 있어요. 구부리고 수그리고 접치고 하는 건 다 죽는 법이에요. 사는 법이 아니에요. 가만히 있어도 운동이 그저 계속하고 책보는 것도 그래요. 신문 한 장을 봐도 들고 그래요. 책은 무거워서 그러면 신문은 무거워서 이렇게 아닙니다. 그래 점점 근시가 많아요. 소학교 아이들이 말끔 돋보기를 쓰고야 봐요. 그럼 안 되어요. 그런 일은 항상 운동도 항상 하는 거지. 그런데 왜 그런지 집에서도 아이들 하는 거 꼭 그렇게 하거든. 그걸 번 번히 말해. 그럼 옆의 할머니 되는 사람은 그럼 번 번히 그렇게 잔소리를 하냐는 거야. 저희 편하게 그냥 내버려두지. 죄다 근시 만들어요? 나는 그거 참을 수 없다는 거야. 또 언제든지 적은 책은 들고 봐요. 펴고, 이거 이 시간에는 주자가 주시는, 이게 주자가 썼어요. 어디 끝을 마쳐주시면 마쳐주시고 그 사람은 힘이 있어야 힘이 있어야하는데 그 힘은 어디서 생기는 고 하니, 힘 또 능, 그래 능력 능력으로 생기는데 능력은 어디서 생기는 고 하니 위로부터 주시는 거예요. 능력은 위로부터 주시는 거예요. 그 위에서 주시는 능력을 받아가지고 그걸 우리가 힘을 가지는 건데 그 힘이 있어야만 아름다워요.
그런데 그럼 그런 신령한 뜻으로 생각할 때 진선미라는 건 아름답다고 성신하고 일치해요. 삼위일체에도 성신이 가장 아름다움을 나타내는, 그런데 말씀 다른 게 아니고 이 사람이 능력이라는 게 좋은 말인데 우리말이 아니에요. 능력, 그러는 게 우리말이 아닙니다. 그럼 어떻게 하면 우리말로 된 능력을 좀 표시해볼까 하고 퍽 오래 걸린 건데, 이제는 능이라는 걸 나위라고 합니다. 나위, 나위라고 했는데 어저께 그 말씀 들을 때, 어! 턱, 이러고 치고 싶어 옳습니다. 능력은 위로부터 오는 겁니다. 능력은 위로부터 오는 거예요. 능이란 뭐냐? 나위란 말이야. 나 이상이라는 말입니다. 내가 능력을 가져야 하지만 그것은 내게 있는 것이 아니에요. 위에서부터 내려온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말에 생으로 없는 말, 왜 만드느냐? 아주 없는 걸 만드는 건 아니에요. 뭐야? 이래 뭐 되었는데 잘 되었습니다. 더할 나위 없이 되었습니다. 더할 나위 없이 되었다. 아주 십상으로 되었다. 그거 나위 아니에요? 나 이상 위에 하는데, 위에서 내려오는 거 그거야. 그걸로 더할 나위 없이 되게 살수가 있는 우리의 힘을 갖는 거야. 그게 능력이야. 어떻게 그렇게 들어맞습니까? 그래 나 속으로 아주 감사해요. 아주 다른 사람에게 옳소. 그 능력이라는 말, 나위라고 하는 게 좋겠소. 이렇게 되면 설정을 하고 한 게 아니라 그건 나 혼자 하는 건데, 어제 그 말씀 가만히 힘이 있어야 사는데 얼마나 오묘합니까? 우리말에 능이라는 게 도무지 없는 겁니다. 나위에, 나위에, 그래 이 사람이 어제 그 말했어요.
어디까지 이건 내가 생각해서 내가 궁리를 해서 내 뇌를 쥐어짜서 내 마음을 졸여서 무슨 결정을 하는 거 같아요? 아니야, 성신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겁니다. 더군다나 결정이 되는 것이 자기 혼자 결정이 되는 거예요. 아니에요. 모든 이치에 맞아가지고 애초부터 모두다 위로부터 내려주시는 그거지. 그렇게 아니 되면 되는 게 하나도 없어. 그러니까 능이라는 말이 우리말에 그렇게 없다는 말이냐? 나위, 그런데 그건 어디서 생겨요? 더할 나위 없이 귀했다는 거기서 벌써 그랬어. 더할 나위 없다는데 그 더할 나위가 뭡니까? 더할 나위 없다는 게 뭐야? 우리가 쓰지 않아요? 더 할 나위 없다. 더 할 나위 없이 되었다. 그동안 우리가 아주 잘 된걸 아주 십상 이라고 하지 않아요? 십상 좋다. 금을 하더라도 우리가 순금, 순금을 시금석에다 봐서 순금을 보지 않아요. 여기 조금 더, 여기 돌이 섞였나보다. 여기 돌맹이가 섞였나? 그걸 시금석이라는 그겁니다. 돌맹이를 보는 사람이 그럼 이렇게 십상이라. 참 거기 십상이라. 십은 완전한 거예요. 십상이라 잘 됐다. 그래 이런 말을 다 쓰지만 그 말을 깨물어서 어떻게든 그렇게 맛을 보게 깨물어서 삼킬 줄을 몰라요. 깨물어서 삼켜서 꼭 그걸 알아서 그 맛을 알아서 그걸 맞춰서 그렇게 자기에 살이 되어서 자기의 힘이 되어서 그렇게 써야 정말 틀림없이 말들을 쓸 텐데, 대강대강 쓸 줄 알고 그냥 안다 내보내요.
안다고 그러고 우물우물해서 삼키고, 삼키고 살아나가려니까 90년을 쓰고도 정말 그것이 어떻게 되어서 어떻게 쓰는지를 그걸 모르고 대답할게 없이 살아가는 겁니다. 그 꿀떡꿀떡 삼켜 버려요. 그래 몇 십년동안 아주 편안하게 지내지지를 않아요. 잘 씹어서 삼키면 소화불량도 있을 리가 없어. 다른 데 다 말끔 그럽니다. 우리가 말을 듣고 말을 하고 받아서 먹고 삭혀서 그것을 내 살을 만들고 내 뼈를 만들어서 그러고 이 세상을 가는 거 그리고 대강대강 마음이 하는 대로 다 알아들은 거 모양 이렇게 하고 써요. 그리고 그것을 80년을 써도 90년을 써도 그 맛을 바로 알기가 도무지 어렵습니다. 그럼 이거 역시 나위라고 나위 힘이라고 그 능력 이라는 걸 나위 힘 이라고 그랬으면 좋겠다고, 이름을 나 혼자 그렇게 사는 건데 아 어저께 그 말씀 들으니까 아 능력은 위로부터입니다. 나, 위에서 높은데서 위에서 땅의 꼭대기에서 그럼 능력이라는 건 우리말로 나위다, 나위 힘이다. 나위는 능이다. 나위 힘은 능력이다. 아멘. 먼저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나 즐겁다. 하는 거 찬미야. 내가 할 것은 하나님 앞에서 잘 번역하고 잘 깨달은 겁니다.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암.
합장하는 거 나왔어요. 이따금 하늘 쳐다봐. 이 순간에, 높이 우러러 보는 거야. 합장 또 구족(具足), 가출 구(具)자 발족(足)자, 우리 발이 달렸다는 거야. 구족(具足) 했다하면 완전한 그릇이란 말이야. 저 책상 발이 달려있으니까 책상이지. 하나라도 발이 빠지면 파기해요. 쓰지를 못해. 일어서지를 못해. 또 온전히 두 발이 서있는 거 땅위에 그래 족하다는 건 제일 발까지 있어야 족하고, 발이 없으면 다리가 다 있어도 발이 없으면 부족이 되요. 족하지 않아. 그럼 구족(具足)해야 해요. 그럼 온전한 제사를 구족(具足)제사라 그래. 발을 갖춘 제사라는 말이야. 그래 우리가 이거 부족한 이 생명을 건지고, 딱 디디고 버티고 딱 서는 거, 부족함을 갖춘 거야. 그럼 그 종일 관계가 죄다 간단한 말로 하는 거 아닙니까? 그만큼 훨씬 좋을 대로 좋아가지고 하루 한번 우리 아버지 앞에서 마음대로 들락날락하고 그렇게 하고 지내자는 거야. 실상 나 일어나서는 운동하고 생각하고 그 생각 꼭 한번해요.
이렇게 모인 몬지 몸, 그걸 껍데기가 되었어요. 그걸 속에가 빠져있으니 거기 갇혔으니 하는 수가 있어요? 그 살 성질이 으스스하면 조여들어 와서 바싹바싹 조여, 과민해서 살만 그렇지 나중에는 마음 정신 그게 조여들어와. 그럼 잠을 못자요. 이거 하나님께 빌어야 지요? 고쳐 말하면 모든 신경질이 되었으니 이거 하나님께 구해야 해요. 약 가지고 안 되어요. 하나님께 구해서 하나님 모시고 삶으로 이거를 스르르 조이던 것이 다 풀려야 해요. 그래 그게 풀려 지이다. 하는 겁니다. 조인 살에 조임이 크고 몬 진 몸, 짐이라는 거는 물건을 진, 이게 몸뚱이라는 게 물건을 짊어지는 몸이라는 거니까 그 몸을 몸뚱이가 아니에요. 몬을 가진 거야. 몬을 짊어지고 가는 거야. 몸뚱이 가지고 가는 거 몬을 짊어지고 가요. 몬진 그걸 짊어지고 온전히 가려고 하면 요 허리 아프고 요새는 더위가 뜨겁고 견딜 수가 없지요. 허리가 구부러지고 그렇지만 그 잘못하다가는 짐을 떨어뜨려요. 잘못 떨어뜨리다가는 허리가 부러져요. 그러니까 모자람을 가지고 가야 땀은 날대로 나 거라. 몬을 지고, 그리고 갈 데 다가면 그 짐을 성하게 가지고가서 내려놓을 데다 내려놓는 거야. 내려놓으면 고만 허리가 펴지지. 소원 했던 게 다 풀리지. 그럼 이것은 하나님께 구함으로 풀리도록 살아보자는 거야. 그래 이런 구절을 이런 말로 빌자는 겁니다.
하나님 우리 조임 살에 조임이 크고 몬진 모짐이 무거워 그 물질을 짊어진 조여들 땐 마음을 모질게 먹어야 해요. 그래야 그 짐을 떨어뜨리지 않아요. 그건 대단히 무겁다. 몬지 모짐을 쓰도록 무거워. 그래 우리가 따져본들 하나님께 죄다 바치라고 따져본들 이 물건의 형편이 이 모양이라. 이걸 갔다. 점잖은 이 앞에 어떻게 내어 놓느냐? 이걸 죄다 어떻게 받으시라고 어떻게 내어 놓느냐 말이야. 네가 가진 것 죄다 바쳐라. 그러는 호령에 좀 바쳐볼까 그랬는데 실상은 따지고 본즉 우리가 따져 봐도 이게 도무지 무겁고 이걸 어떻게 점잖은데 내놓고, 이걸 죄다 가져왔습니다. 어떻게 하나요? 그래 그 소리를, 하나님 우리 조임 살에 조임이 크고 몬진 모짐이 무거워, 그러니까 드린다고 볼 수가 없어요. 이걸 어떻게 구경 합시다. 하고 어떻게 할 수가 있습니까? 드린다고 못되오나 이걸 어따 드린다고 할 수가 없어요. 드린다. 못되오나 실상 아버지 찾는 거, 탕자가 회개하고 돌아오는데 이것저것이 없습니다. 아드님으로 알고 용납 합시다. 그게 아니에요. 머슴살이로 두시는데, 그건 머슴의 하나쯤 생각하셔서, 그쯤 대접을 하세요. 계약을 다스리지 마시고 그저 머슴하나 두신다고 이렇게 온 몸을 갖다가 받아 주십시오.
기도는 겨우 그래요. 하나님 우리 조임 살에 조임이 큽니다. 몬진 모짐이 무겁습니다. 우리가 봐도 이러니, 어떻게 이걸 드린다고 합니까? 감히 드릴 생각을 낼 수가 없어. 드린다. 못되오나 회개를 했어요. 그저 아버지 떼쓰는 겁니다. 갖다가 아버지께 빌 수가 없지만 그러나 이제는 아버지께 떼써야 하는 거야. 아버지께 불쌍히 여기심을 바라고 떼를 쓰는 거야. 그 다음에는 아버지 모시고 아버지 섬기는 거, 그것이 원 아버지의 뜻이니까. 이제는 참말이지 섬기려고 왔습니다. 그러면 도무지 이것가지고 감히 아버지 앞에 헤쳐 놓을 수도 없어. 그러나, 계 아버지께 불쌍히 여겨주시는 거 그걸 바래. 계 불쌍히 여길 바래. 섬김을 기대어 섬김을 기대는 거 무엇인 고 하니 아버지 모시려고 왔어. 아버지를 모시고 아버지를 섬기려고 왔어. 그런데 섬기는 걸기대요. 그게 그런 소리를 앞서서 쓰지 않았는데 이 무슨 소리야? 섬김을 기대어, 아버지를 모시고 아버지의 일을, 손을 쓰되 아버지의 일을 쓰고, 발을 쓰되 아버지의 길을 걸어요. 그게 섬기는 건데, 섬기는 그 일이 내가 섬기는 그 일을 기댄다는 게 말이 안 되는 거 같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섬김을 기대고 아들 노릇을 할 수 있는 겁니다.
아버지 일을 부지런히 함으로 제절로 아버지의 아들로 온전히 되는 겁니다. 아버지일 하는 것이 섬기는 건데, 그것이 아버지 뜻을 받아서 사는 것이에요. 그건 그 사실을 기대요. 성경에 아버지 뜻대로 하라는걸 그대로 그걸 그대로 하자. 실행을 하자. 그런데 실행을 안 된다는 이야기가 많지를 않습니까? 실행을 할 수 없다. 하는 소리가 많지 않습니까? 그러나 섬긴다는 건 사실 아버지 일을 내가 하는 거예요. 아버지 일 하는데 실행이 안 된다. 안 되는 거 아니에요. 실행이 왜 안 되겠소? 손 발 가졌으면 내 일만 한다고 해서 일 하는 거 아니에요. 아버지 뜻에 맞는 일 붙잡고 해도 일 되는 거예요. 그건 성한 짐으로 아버지 일을 하면 그거 섬긴다. 하는 거예요. 일 하는 거예요. 그 일 사(事)자를 갔다가 제 일을 하면 일한다 하고 아버지가 시킨 일 하면 그걸 아버지 섬긴다. 그럼 사실은 아버지 모시고 사는데 섬기는 가운데 사는데, 섬기고 또 섬기고 또 섬기면 아버지 기대는 거지, 아버지 기대는 건 아버지 일 한 거를 기대는 거예요. 아버지 섬기는 걸기대는 거예요.
그일 잘못되면 그 일하면, 교만하게 아버지일 이만큼 해 놓았으니까 우리 아버지 좋아 하겠지 하고 그 값을 받아서 더 맛난 음식을 먹고 더 고운 옷을 입고 이렇게 되는 것 같이 생각이 갈라는지 모릅니다. 그거 아닙니다. 그저 아버지를 위해 손을 써, 아버지 길을 위해 발을 쓰고 그렇게 하고 모시고 지내는데 제절로 먹을 것 쓸 거는 제절로 충족하게 있어요. 그러니까 모든 걸 아버지께 바쳐서 아버지 바친 그 일로 섬기는 일로 이렇게 나가면 속 알이 점점 즐거워져 영혼이 점점 온전해져. 그럼 갈 거 다 가면 영생에 들어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 나중에 가면 아버지 안에 자기가 있는 예가 되는 거야. 그 예 속에 모두 같이 나와 똑같이 같이 기도도하고 찬송도 하고 우리 같이 모였던 그 사람들 다 함께 아버지 섬기는 속에 들어가서 인제는 걱정 도무지 없어요. 그럼 살다가 죽지도 않는 그런 말씀의 나라 속에 영원히 사는 그 나라 속에 가서 사는 거예요. 그걸 구원 얻었다고 하는 거야. 그 말을 하나님 우리 이 조임 살에 조임이 크고 실상은 뭔고 하니 계약이 크고 그러는 거예요.
본래 계약이 크고, 우리 계약이 크고 그것 가지고는 안 돼. 그러니까 이걸 다른 말을 갖다놓았는데 이런 다른 말이 나왔어요. 도무지 말 같지 않아요. 그러나 이렇게 씹어보면 말은 온전한 말이야. 하나님 우리 조임 살에 조임이 크고요. 몬진 모짐이 무거워요. 이런 걱정거리를 어디다가 드린다고 하겠소? 드린다고 하겠으나 그러나 불쌍히 여기심을 바라고 섬김을 기대어 이제는 아버지 섬기고 사는데 그 섬기는 그걸 기대서 비오니, 와서 아버님께 비니, 아들인 제게도 아버지를 떠나 나가지를 않았으니까 나갔다가 다시 돌아오니까 그들이에요. 나갔다 들어오는 게 나들이에요. 우리 남자들은 나들이가 무슨 소리인지 몰라요. 남자들은 출입을 했다. 그래야 알아듣지, 우리 아낙네는 감정을 빼앗기지 않았어. 오늘날에도 나들이한다고 해요. 출입한다고 안 해요. 나들이, 오늘 이 세상에 아버지를 떠나 나왔다가 이제 다시 나라로 돌아가는 거 돌아가는 거, 그 들이에요. 나왔다가 돌아가는 게 나들이에요. 세상 한번 나왔다가 이 세상에서는 숨졌다하고 아버지께 돌아가는 게, 들이야. 나들이, 실상은 굉장한 무슨 일이 있는 거 아닙니다.
나들이 한번 했다가 가는 거예요. 나들이하면 나들이 했던 게 제 집으로 가니까 제게로 가는 거야. 원 제게로 가는 거야. 밤낮 하늘계신 아버지 계신 데로 간다고 그렇게만 하지 말고 그거 제 길이야. 곧 아버지 모시게 되면, 제 길이야. 그래서 나들이가 제게로 들어오게 되는 거, 그게 아버지 앞에 어리광 부리는 소리입니다. 아버지 모시려고 돌아왔습니다. 그게 더 나은 거 같아요? 아니에요. 아버지 저 나들이 다녀왔습니다. 이 죄지은 것도 용서하시면 그거 뭐 나들이 한번 갔다 온 거 아니냐? 과히 너 지금까지 어설프게 그러지 마라. 이제 들어왔는데 뭘 그렇게 하냐? 그렇게 될 거니까 그걸 사함을 받는다. 그래요. 죄악을 용서 한다고 그러고. 하나님 우리 조임 살에 조임이 크고 몬진 모짐이 무거워 드린바 못되오나 계 불쌍히 바라며 계 섬김을 기대어 섬기는 것을 기대서 나들이 제게 들임, 제게 들어가요. 제게 들임을 아멘. 카톨릭에서 거기를 이렇게 가지고 온 것을 용서하시고 받아 줍시다. 그걸로 끝을 마쳐요.
나는 그렇게 인사조로 어떤 처음에는 하나님께 빌어야지. 그러나 빌고 나서는 인사조로 끝을 마칠 수 없다고, 그러니까 돌아왔으니까 이제는 제게, 제게 들어와 모시고 제 삶을 살자고 온 거니까, 그 제게 된 거에요. 제게 들어와서 제절로 모시고 살게 되는 겁니다. ‘하느님 계 계셔 날 내셨으니 내 날 가져 계 받들어 섬김 숨 쉼으로 이제 내 속 알과 삶의 목숨과 내 나위 힘과를 죄 받들어 드려 하나님 뜻 맡고 하나님 말씀 쉬어 나와 모든 사람 속 알 나위 인해 더욱 되기만을 가장 비나이다.’ 그것은 대강 뜻 아시지만 본 목적이 나나 남이나 모든 사람의 속 알 영혼 그거 기르자는 거예요. 하나님께 모든 걸 바쳐서 내 영혼 모든 사람의 영혼 그게 더 전진해서 길러지기를 그걸 바라는 겁니다. 하느님 뜻 맡고 하나님 말씀 쉬어 하나님이 준 말과 하나님이 준 목숨을 버려요. 그 버리는 걸 쉰다고 해요.
숨을 쉰다고, 숨만 쉬는 게 아니라 말도 돌아가는 게 쉬는 거야. 그럼 쉴 거 같으면 내 숨 모든 사람의 숨, 잘 돌아가. 속 알이 자꾸 길러져요. 속 알이 자꾸 길러지니 영혼이 점점 온전하게 되면 하늘나라 들어가고 마는 거야. ‘하느님 뜻 맡고 하느님 말씀 쉬어 나와 모든 사람 속 알, 속 알이 자꾸 길러서 영혼입니다. 속 알은, 영혼을 자꾸 길러서 완전히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되도록 자라가지고 제게로 돌아가서 아버님 모시고 살아요. 하느님 우리 조임 살에 조임이 크고 몬짐 모짐이 무거워 드린바 못 되오나 죄 불쌍히 바라며 계 섬김을 기대어 비오니 나들이 제게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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