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0일 김제에 올라가 다음 날 전주 치과에서 치료 받고 11월 1일 해남에 들려 연산에 왔다. 일교차가 심해 안개가 도착 하기 까지 개지 않았다. 아직도 토란 수확이 끝나지 않았다. 무 밭에는 물을 주고 있다. 은행나무 아래 그물망을 깔아 보았다.
옷을 벗고
1971.08.15. 유영모 선생
마음이 청춘이 되어가지고 푸른 거예요. 그럼 하루를 지내는 건 하나님이 주신 힘을 가지고 그 힘을 써서 힘을 들여서 하나님 뜻에 맞는 하루 종일 볼 일을 보는 건데 그 몸을 풀지를 않고 준비를 안 하고 하다가는 바쁘다는 핑계하고 하나님만 섬기면 그만이지. 오히려 그리고 뭐 육신에게 세상일을 위해서 내가 하나 더더군다나 오늘은 가령 주일날인데 주일날은 더더군다나 육체에 당한 일을 할까? 이런 생각 저런 생각으로 핑계 핑계를 하고 몸을 풀지를 않아요. 준비 운동을 안 하고 하다가는 헤엄치는 사람, 헤엄을 잘 치는 사람 더더군다나 원체 헤엄을 잘 치는 사람은 준비운동을 해. 의례해야 하는 걸로 되어있지요? 그런데 자기가 아주 선수가 되어서 여간 거리를 안 해도 될 거라고 이쯤 생각을 하고 튀어들어요. 아무리 잘하는 사람 있어도 준비운동 없이 튀어들었다가 물속에서 들어가 나와 버리면 마는 거지요? 그러면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는 하나님은 영이시니까 내 마음에 깊고 넓은 영만 가지고 모셨으면 좋지요. 그러나 담아놓은 이 영도 이 살이라는 몸통 이에 담아놓은 영이에요. 그건 왜 살에 담아 놓으셨을까? 그건 나 몰라요. 왜 우리 아버지 뜻이 그렇게 되는지 이 한동안을 살에다가 담아가지고 영을 키워라. 그래 일생동안 살 화로 속에다 영불을 피워가지고 우리 아버지 앞에 영 피워가지고 우리 힘을 써서 이렇게 하면 참 수증기 올라가는 모양으로 올라갑니다. 이 세상도 신을 위하는 사람 자기 소원한 걸 갔다가 써 가지고 그걸 읽고 해가지고 그것을 나중에 어떻게 하느냐 불살라서 그 물건은 불살라서 다 재가되 나중에 가서 썩든 그건 정신이지요. 그건 없애 버리는 거고 정신만이 자기가 구하는 그쪽으로 올라가는 비슷하게 생각을 따라서 그려 올라가고 마는 거예요. 그래 옛날부터 그을려 올리는 그런 것이 생긴 거예요.
맨 먼저 일어난 이 사람 봐야 합니다. 다 제대로 있는가? 성한가? 어디가 걸리지 않나 어디가 막히지 않나 봐야 합니다. 아무리 바빠도 아무리 바빠도 하나님 제일이야. 일어나서 몸 풀고 그 다음에 씻고 닦고 그리고 옷도 털어서 입고 그리고 나서 온전히 이렇게 손질한 거. 먼지 턴 거. 깨끗이 닦은 거 그렇게 하는 동안에 속에 정신 따라서 온전히 풀었던 정신, 한 테 모아서 조그만 콩알만 한 조그마하게 모은 그런 정신 되어서 그때부터 정신적으로 우리로 말하면 아버지께 만 그렇게 모은 정신을 가지고 아버지께로 들어가 그리고 아버지 구하고, 아버지의 소리 없는 아버지의 뜻이지. 그것이 내려오기를 기다립니다. 그러면 그 내려온데 뭡니까? 생각이에요. 내가 생각을 모아가지고 이렇게 아버지하고 그 다음에 생각이 무슨 생각이 결정한 걸 내가 혼자 내 생각을 내가 뭉치는 게 아니에요. 거기야말로 분명히 아버지 연결이 되어서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오르내린다. 왜 기운이 오르내려요. 성신이 오르내려요. 우리 기운이라는 건 김이라고 하자 그래요. 우리말로 김이라고 해야 해요. 김 이 중요한 김은 살김 뼈 김만이 아니에요. 우리 영혼의 김이 한데 뭉친 겁니다. 그렇게 쯤 준비 해가지고 하나님, 나 왔습니다. 오늘 아침도 깨어났습니다. 일어났습니다. 아버지, 저희 귀가 직접적으로 아버지의 소리를 듣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 때 가서는 오직 아버지를 우러러 삽니다. 아버지, 아버지 뜻이 지금 이렇게 이쯤 중대한 이 속에 내리어 주시옵소서. 하는 그런 마음으로 나선 거니까, 그쯤 하고 그 다음에 생각에 연결해서 나오는 것은 혹시라도 지극히 높으신 우리의 아버지의 뜻이 들어와 주시는 듯이 내 마음이, 내 생각이 그렇게 나옵니다. 이쯤하면 나와요. 그쯤하면 나오는데 그 나오는 것이 온전히 아버지 뜻 만인가? 거기 내 사사 욕심이 서려있지 않나? 그건 주의해야지요. 그거 주의해야해. 내 사사욕심만 붙은걸 이건, 이건 아버지의 뜻이라고 아버지의 말씀이라고 그리고 날뛰다가는 섣불리 성신, 성신하고 나만 성신 받아. 내가 기도하는 모든 사람은 죄다 성신 받게 하겠다고 그따위로 날치다가는 망합니다. 남을 죄다 망치는데 저는 성 할까요? 멸망할 자식이 되고 맙니다. 성신을 떠나서는 성신을 떠나서는 거룩한 참 말씀을 참 정신을 근처도 갈수 없는 겁니다. 오직 성신이지요. 시끄럽게 짓 바꾸는 성신 나 몰라요. 성신이 있는 사람 오순절에 내린 성신 그때는 야단이 났지요. 그 이외에 그 시끄러운 성신이 어디 나타난다고, 못된 말입니다. 그럼 이 말씀만 요쯤만 하고 가지요.
날이 덥습니다. 더워요. 날이 더우니까, 요만큼만 운동을 해도 이렇게 지금 몸통 이 운동인데 연속해서 정신이 운동을 해야 해. 지금도 몸통 이가 쉬는 게 아닙니다. 그 운동 그대로 해 여전히 대단히 피가 여전히 돕니다. 여전히 덥습니다. 끈기가 없어요. 마음과 내 몸통이가 하나 되었어요. 그럼 이렇게 된 이걸 그대로 가지고 살면 하루를 거룩하게 하나님 모시고 우리 아버지 모시고 사는 거지요. 여러분 이렇게 만나 같이 지냅니다. 또 새새 틈틈이 기침 나오면 기침 해야겠고 땀이 흐르면 땀 씻어야겠고 오줌 마려우면 오줌 눠야겠고 육이 있으니까 온전히 정신으로만 이렇게 사시는 건 아닙니다. 오줌 눠요. 똥 눠요. 이런 일 있을 때 먹고 마시는 것 좀 덜해. 그럼 훨씬 오줌 누는 수효가 번수가 작게 지낼 수 있어요. 뒤는 그건 자기 생활방식에 따라 다르겠지만 뒤는 하루건너 한 번씩 보면 그쯤 되면 좀 일이 적습니다. 몸이 가볍고 이렇게 됩니다. 그러니까 보통으로 세끼니 잡숫고 지내면 되요. 만이 봐야 뒤를 하루 한번 보는 게 좋아요. 또 그렇게 하루 한번 보는 건 봐야지. 봐야 합니다. 바빠도 봐야해. 보지 않고 가면 그건 또 안 돼. 그러니까 하루 한번 보면 한번보고 또 하루건너 보면 하루건너 보고 꼭 볼 건 봐야해. 그러니까 이 세상에 땅위에 내 발바닥이 땅바닥에 닿아가지고 사는 동안에는 흙을 떠나지 못합니다. 흙에 얹혀가지고 흙에 담아 가지고 이것 벗어버리고 아버지께로만 올라가게 되는 그 마지막 그때만 이것이 다 벗어지는 거지. 지금은 여기 끝까지 갇혀가지고 있는 겁니다. 그럼 갇혀 사는 게 더러운 건가? 아니, 하나님이 그렇게 하라고 하셔 이 속에 담겨가지고 있다가 속 알을 이 속에서 길러가지고 속 알이 온전하게 한 뒤에 확 벗어지면 솟구쳐, 아버지 계신 곳으로 가는 겁니다. 그렇게 되는 게 꼭 그렇다 날마다 그렇다. 그러고 살면 나중에는 자기도 모를 겁니다. 스르르 벗어지고 속에 정말 나만 정말 속 알을 길러가지고 아들이 된 뒤에 그렇게만 있으면 그럼 어디를 갈 거야? 한 길밖에 없어 올라갈 뿐이지. 올라갈 뿐이지. 다른 데로 움직일 수가 없지. 아 시원하지요. 지금 말씀을 그것만 따라 이렇게 해서 올라가자. 올라가자. 시원합니다. 정말 그 시원한 정신이 되어가지고 이거 벗은 거 땅에서 나온 거니 땅에 벗어서 그리고 갈 겁니다. 여기 기른 이것만 빠져서 나가, 나가요. 그럼 다 편안하게 고요하게 올라갈 거 올라가지요. 이렇게 하면 이 사람 신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는 다른 신조가 없어요
이 생명이 여기 담겨 있다가 종당 속 알 기를 거 다 기르면 이건 스르르 벗어나서 흙에서 났으니 흙으로 돌아가요. 그럼 우리 옷 벗어야 할 때는 스르르 벗어서 빨려고, 빨려고 빨래 그릇으로 집어넣어야해. 일생을 이렇게 살다가 일생 산 옷에 몸통 이라고, 일생 입고 살던 거 여기서 주워 입은 거 여기서 벗어요. 그리고 이 속에 기른 속 알 그것이 나에요. 그 나가 그날 저절로 올라간답니다. 올라가면 되 주저앉으려야 주저앉을 몸통 이 다 벗어 버려져서 없어요. 올라가야만 돼. 올라가, 올라가, 올라가, 올라가, 그것뿐입니다. 말하자면 간단명료해. 준비가 잘 되었으면 사실 말이지 어떠면 자기도 모르게 옷을 벗어버리고 올라만 가는 영혼도 있을는지 모릅니다. 그럼 가족이 보면, 아 이 어른 주무신다고, 돌아가셨는데 다른 때 같으면 이맘때 일어났을 텐데, 어째 오늘은 아무 기척이 없어. 그래 기다리고 기다리다. 날이 밝아지던지 하면 그냥 있을 수 없어. 가만히 문을 열고 들어가 그대로 주무시는 얼굴인데 가까이 가서 보니 코에다 손을 가까이 가봐. 숨이 없어요. 그럼 어떻겠습니까? 정말 잠에 들어갔어. 정말 주무셔. 그럼 우리가 보면 주무시는 겁니다. 곱게 벗어서 놓은 대로 그대로 거기 있어요. 그러나 암만 가까이 가야 숨이 들어갔다 나갔다 없어요. 없어, 잠만 들었으면 숨이 들어갔다 나갔다 하는 거야. 숨이 없어요. 그럼 세상 떠나요. 그렇게 세상 떠나는 이는 무슨 시 몇 분에 운명했다는 거 도무지 알 수 없어요. 어느 때 꼭 끝을 봤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게 대단히 좋은 거예요. 그래 이 사람도 할 수 있는 대로 할 수 있는 대로 욕심은 안 갖는 게 좋다 하는 게 이 사람인데, 그러나 이 옷 벗어놓을 때는 어지럽게 벗지 말고 곱게 벗어서 벗은 그 자리에 고스란히 그대로 있어. 그리고 나만, 죽지 않는 나만, 오르고, 오르고, 오르고 오른 위에 올라만 가는 옷에 걸쳐 있었지 옷을 다 벗어버리면 제절로 올라가는 거야. 오름길 밖에 없어요. 올라가, 올라가 오르고 맙니다. 정말 올라간다면 별수 없어요. 올라가고 마는 거야. 믿고서 아버지께 만 오르고 또 오르려고 하는 그래서 맨 끝에는 그거입니다. 곱게 벗어놓고 곱게 올라갈 곳에 올라가요. 오르고 또 올라가요. 그때 내가 애를 써서 오르고 또 올라가야겠다. 하는 거 아닙니다. 저절로 평생에 정신을 갖고 오르고 또 올라 오르고 또 올라 이러고 산 사람이 이거 턱 벗어지는 때는 아주 쉽게 올라가는 거지요. 오르고 또 올라 오르고 또 올라. 그런데 지금 이런 말씀만 해도 이것이 대단히 피까지 더운 겁니다. 더워요. 땀이나. 그러니까 전에는 몰랐는데 이제는 이 앞으로 점점 믿음이 있는 사람, 오르고, 오르고 올라 하는 그 정신으로 사는 사람, 그 사람에게는 반드시 운동이라는 게 저마다 날마다 운동이라는 거 가지고 가는 줄 압니다.
무슨 운동 무슨 운동 날마다 해야 한다. 이거지. 하는 사람은 몇 천 년 전부터 하고 지냈어요. 그렇지 않은 사람 없었어요. 소위 예전에서부터 동양에서도 하던 거 그거 양생이라고 합니다. 양생, 그리고 동양에도 유도적금 한다는 게 다 기초 밑에는 양생법으로 나온 거예요. 그리고 인도에서는 요가 라고해서 전에 더러 글 볼 적에 인도 글 보면 요가경전 이라는 게 있어. 요가경전을 보았고 그럼 그때는 요가라는 게 뭐냐? 정신통일인가보다. 이쯤 짐작하고 글 보는 겁니다. 사실 인도의 요가가 세계적으로 퍼졌는데 세상 사람은 죄다 그걸 이용을 하는데, 요가를 하면 요가가 운동인줄 압니다. 그런데 정신이 중심이 돼서 운동인데 세계에서 퍼진 걸 가지고 이용하는 사람은 그 정신 조금이나마 그렇게 생각을 안 하고 시작을 하는 사람이 있을는지 모릅니다. 요가를 이용하는 사람들 굉장 굉장합니다. 부인네들이 많이 하는데, 부인네 미를 위하여 건강도 미를 위하여 그건 미도 건강미가 첫째라. 건강미가 첫째라. 그런 식입니다. 그리고 지금 요가 하는 구미에 요가 하는 여자들, 건강미를 얻자고 하는 겁니다. 그런 세상이 되었는데, 요가를 이용해 비행가도 우주 여행하는 비행가도 어떤 것이 필요한지 이 사람은 모릅니다. 꼭 요가 법으로 운동을 해야 거기 소용되는 일을 할 수 있게 된다고 하는 게 신문에 나더군요. 이제야말로 물질과 정신 위로 올라만 가야하는 영혼과 이 땅에서 성하게 지내야만 하는 몸통 이 살, 물건 그것도 쓰는 날 까지는 써야, 가지고 가는 날 동안에 가지고 가야, 그게 우리 아버지의 뜻이고 생명의 근원의 뜻이에요. 우리는 순종하는 것뿐입니다. 이 몸통 이 귀찮다고 이 세상 귀찮다고 내 마음대로 내 버리고 싶다고 어서 내버리고 싶다고 그것은 우리 아버지의 뜻이 아마 아닐 겁니다. 내 버릴 때 벗어지게 될 때 제절로 벗어지는 거지. 무얼 그리 급해? 없었으면 좋겠다. 그 망상을 할 까닭이 없어. 제절로 벗어질 때 벗어지는 거야. 그럼 어떻게 이런 정신으로 사나? 그냥 지난밤에 잠잘 때, 어이구, 세상 잊고 어떻게 자나? 어떻게 자나? 이런 마음 일어나면 잠 못 자요. 그건 아버지의 뜻에 어긋나. 자야해. 숨진다는 것도 자는 겁니다. 그런데 가령 이 사람이 세상을 떠난다면 이백여 번만 더 자면 삼만 번을 자는 겁니다. 한 삼만 번 자고, 마지막 자요. 마지막 자면 영자는 거지. 다시 깨지 않는다. 그딴 잠을 자요. 그거 모르고 자면 괜찮지요? 알면 아무리 잠을 자는 사람도 잠이 달아나고 잠을 잘 수 없게 되려는지 몰라요. 그럼 저주 받았어. 그럼 때는 되었으니까 떠나기는 떠나야 돼. 그 저주 받아서 헤맬 거 같아. 탕자가 마지막 괴롭고 시끄럽고 아프고 그럼 그 옆에 있는 사람들이 아주 어쩔 줄 모르고 송구하게 걱정 뭉텅이로 해가지고 아픈가보다. 병이 났나보다. 다른 사람한테 물어보고 약이 없는가? 의원이 없는가? 모두 그러고 야단스럽게 하다가 아 인제 돌아가야겠다. 운명해야겠다. 그러지요. 그 짝으로 정리 썩 잘되는 사람은 이 만 번 또 구천 번, 또 몇 백 번 몇 십 번 잠드는 거예요. 곱게 들어가지고 깰 때 깨는 거예요. 그래 곱게 또 일어나 그렇게 해 보고는 이제는 잠이 푹 들어가지고 다시 깰 때 없어. 무엇이 깰 때 없어요. 몸통 이 옷이 싹 벗어 놓는 거, 그대로 가만히 있는 거, 자는 거지요. 옷도 곱게 자는 거 같이 있더니 옷을 다시 일으킬 까닭이 없어요. 일으킬 까닭이 없으면 이 몸통 이도 (끊김)
자요. 그런데 한 몸이 없어져. 코고는 것도 없어 코 안고는 사람도 약하게 쉬는 숨이 없다는 말이야. 오래사니 자다가 일어나는 거 같이 떠나는 이 참 운명 복입니다. 그 아들 베개 맡에 꼭 있어도 언제 숨 졌는지 몰라요. 그건 불가불 할 수 없지. 그저 짐작해서 종당 아는 건 손으로 만져보고 그 몸에 온기가 있을 때 도무지 모르거든 몸에 온기가 있을 때 아직 이렇게 차차 식어서 차차 식어 차디차게 되요. 그제 가서 돌아가셨다. 그래 무슨 시간 몇 분에 돌아간 건 모르게 되요. 곱게 숨지고 곱게 옷을 벗어놓은 그대로 입고 오래 살다. 그렇게 곱게 가시는 이가 있습니다. 그게 나는 가장 복된 일로 알아요. 그것도 자손들은 집안 식구들은 다소 섭섭하게 생각이 같은지 몰라요. 아니에요. 섭섭하다면 그 사람들도 살아야 걱정이야. 그 걱정하던 사람도 종당 곱게 벗어놓고 나가서 올라가야만 하는 목적을 가지고 가는 그건데 먼저 가신이가 곱게 옆에 사람이 떠나는 줄도 모르게 떠나는 거, 그게 큰 복이지요. 한쪽으로는 섭섭하면서도 큰 복을 타고 오신 우리 아버지 되든지, 우리 어머니가 그렇게 돌아가시는구나. 한쪽으로 남은 눈물이 솟아서 나오지요. 그렇지만 과히 야단스럽게 슬퍼할 거 없습니다. 그리고는 꼭 그대로 자기도 꼭꼭 잘 때 자고 깰 때 곱게 깨서 일어나고 그러고 살다가 나중 떠나는 날 떠나기 전날 드러누워 잘 때에 깨지 않아 집안 식구가 보면 깨지 않아. 나도 그렇게 떠났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살던 마음 정해보는 것도 좋아요. 그러게 이런 생각 하다가는 나는 눈물이 있으면 살아생전에 죄다 쓰자. 눈물 같이 귀한 게 없습니다. 귀한 눈물 아껴 쓰지 말고 여기서 눈물 불가불 내야할 때 아끼지 말고 내세요. 아끼지 말고 내세요. 그래 눈물 있거든 설설 흘리시오. 설설 흘려. 그래 다 쓰고는 내가 떠날 때는 결코 눈물이 남지 않아서 한 방울 눈물이 나오지 않고 떠났으면 좋겠어. 눈물은 흘리라고 있는 건데, 가엽은 걱정 이런 거 볼 때 눈물이 나오면 좀 시원하지요 좋은 겁니다. 또 정말 진정으로 옆에 사람이 어려운 고생 이런데 보다가 눈물이 있는 이가 눈물이 쫙 쏟아지면서 이렇게 들여다 봐주면 그게 눈물이 있으면 눈물을 쓰는 겁니다. 그렇게 쓰라고 눈물이 있는 거예요. 그런 게 살적에 눈물이 나올 때 안 나오고 하다가 급기야 죽게 될 때 어디서 눈물 남겨 뒀다가 그렇게 해? 나도 이제 일어나지 못해. 눈물 흘리고 그거 왜 남겨뒀다가 왜 그렇게 왜 남겨뒀다가 그걸 거기서 쏟아. 그럼 옆에 있는 사람도 물론 옆에 있는 사람이 눈물이 흘러나오지요. 옆에 있는 사람을 위해서 되는지도 모릅니다. 어떤 연관으로는 그것도 그렇지요. 눈물이란 옆에 있는 따라서 나오고 나오다가 그렇게 작별하는 거 괜찮아요. 그러나 눈물이 아주 없어. 눈물 다 쓸데 써. 그리고 곱게 잠들었다가 그거 벗어서 옷을 그대로 입고 정말 곁에 있는 사람이 몰라요. 언제 떠났는지 몰라요. 그렇게 곱게 떠나. 나는 그게 큰 복으로 알아. 이 세상에 그런 일이 혹간 있어 나는 그거 복 받은 사람으로 알아요. 그 집안은 복 받은 집안으로 알아요. 오늘 아침 운동을 하는 걸 말씀 하는 겁니다. 이거 하나 있습니다.
종교를 가진 이가 운동을 하면 그 운동 속에는 종교 가진 이의 신조가 같이 발작을 합니다. 몸통이가 운동을 하는데 그 마음에 자기 신조가 생각 안 나지 못합니다. 그럼 그 운동 속에서 정신이 따라서 이렇게 운동을 하다가 거기서 무슨 말 문득 깨닫는 게 있습니다. 그래 요가 하는 분더러 또 진행하시는 이 더러 그 요가 하는 가운데 그 성경말씀 같은데 요긴한 요절에 깊은 뜻이 있는 그런 것이 요가 하는 가운데 문득 깨달아지는 거 그런 게 있습디까? 네 더러 있습니다. 있을 겁니다. 그래 요가만 하는 사람보다 그것은 신앙을 가진 이가 요가를 하면 반드시 그게 있을 겁니다. 예수 믿는 이는 자기 신조대로 하나님과 관계된 게 그 요가 하는 가운데 깨달아 지는 게 있을 겁니다. 또 불교 참선하는 사람이 그 요가를 할 것 같으면 그것도 거기 있을 겁니다. 그 요가 중에 법을 깨닫는 게 있을 겁니다. 또 서양 사람이 하면 서양 사람도 그 사람의 정신이 가졌던 깊은 정신을 가지고 가는 사람이 요가를 한다면, 요가 속에 자기 늘 가지고 연구하는 그 정신이 어떤 구비가 깨달아 질 겁니다. 요가 속에 그러면 이 몸통이 갖은걸 운동을 하면 정신통일 되어야 운동되는 겁니다. 정신통일이 되니까 정신 속에 무슨 운동이 일어나는 사람은 반드시 요가 하는 속에 깨달아지는 게 한마디 두 마디 있을 겁니다. 그래 그 요가 하는 사람들은 예수 믿는 이가 요가를 하는데 물어본 일이 있어요. 그런 일이 있다고 그래요. 그러니까 요가, 요가 했지만 속에 원 이치는 같으니까 그래요. 우리 동양에서는 양생이라 그랬어요. 양생 그럼 양생이라니까 이 몸통이가 건강하게 사는 것을 기른다는 것으로밖에 생각을 안 하겠지만 그것도 온전히 해서 잘하는 사람은 아마 여러 십 명 가운데 그 운동에서 양생, 양생 하는데서 정신이 바꿔져서 정신과 일치해가지고 그야말로 정신의 소리 없는 소리를 지어내기 쉽습니다. 통일만 되면 육신도 그렇고 정신도 육신에 담긴 정신이니까 육신부터 통일이 될 때 따라서 속 알 그것도 따라서 속 알을 키우는 건데 자라는 겁니다. 기르는 겁니다. 그럼 그 속에 그것도 현저히 자기가 자라는 것을 스스로 느끼는 것이 굽이굽이 있을 겁니다. 그걸 믿어야 돼. 그럼 어떤 의미로 정신을 가지고 통일, 통일 하겠다고 하는 그런 사람도 참선에 들어가도 우리는 눈감고 구푸리고 한다든지, 그리고 기도를 한다고 하지만 그거 보다는 날마다 하는 몸통 이를 몸통 이를 손질을 하는 건데 몸통이 손질을 날마다 해서 나가면 몸통이가 통일이 되는데 그 속에 들어있는 정신이 영혼이 역시 따라서 통일이 되요. 그럼 그게 길러져요. 그게 자라요. 그럼 거기서 문득 문득 깨닫는 거 오묘한 이치를 깨닫는 게 문득문득 있을 겁니다.
성경에 좋은 뜻을 읽는 성경을 구절을 많이 아는 사람도 문득 문득 깨닫는 거는 그 운동하는 가운데 양생법 하는 가운데 문득 문득 깨달아지는 게 있을 겁니다. 그러니까 기도는 대개 고요히 고개를 숙이고 몸을 반드시하고 그렇게 하는 게 원칙이에요. 좋아요. 그런데 어떤 때는 쭉 펴고 누워서 팔도 쳐들고 눈으로 하늘을 쳐다보고 이렇게 하는 기도도 꼭 필요한 겁니다. 처음에 회개하고 믿음에 들어가기 전에 나쁜 더러운, 더러운 죄악 구덩이에 빠져있었다 그대는 엎드려져서 볼 수 없어요. 눈 감고 화가 나면 몸을 뒹굴 겁니다. 그러면 서라도 기도해야겠지요. 그건 처음에 회개할 때 죄를 버릴 때에 죄의 삶을 내다 던질 때 그때 제절로 되요 법이 아니라 저절로 그렇게 되요. 처음에 그렇게 되요. 다 벗어버리고 처음에는 그렇게 되요. 방향이 전환 됐어. 이 바닥에만 뒹굴던 것이 이제는 한 테 묶여가지고 위로만 올라가, 올라가 길을 떠났는데 떠난 길에서 우리말로 하면 높은데 계신 아버지하고 교통을 하는데 뭐 눈을 감고 엎드리고 구부리고 꼭 그래야만 한다는 게 뭡니까? 그게 처음에 회개하고 이 세상을 좀 멀리하려고 그때 앞서서 읽은 고개를 들 줄 모르고 설 줄을 모르고 하늘을 우러러 이렇게 지낸 게 원통해서 엎드려져서 눈이 감기고 눈물이 쏟아지고 이런 거지 번번이 기도할적마다 눈감고 고개 숙이고 그럴 까닭이 어디가 있냐고 굴복대죄를 하는 건데 그건 처음에 그러고 우러러 쳐다봐 이것이 산 산사람의 동작입니다. 감사 기도도 그렇게 하고 했으면 오늘 감사 기도하고 잊어버렸다고 왜 시작이 좀 맞아보고 더 잘보고 하다가 다 먹고 나서 아 그렇게 금강산에 가서 먹고 나서, 아 금강산을 구경, 보자고 왔는데 이렇게 앉아있으면 어찌 하냐고, 나가자고, 나가자고 그게 어떤 이는 나가지요. 그런데 조금 앉아 있다가 나갔으면 좋겠다. 한 숟가락이라도 더 들어가면 좋겠다. 그래. 조금 고단하니까 거기서 누웠어. 좀 쉬었으면 좋겠어. 아 밥을 먹을 데 없어서, 그래 금강산에가 앉아서 먹었는가? 밥을 먹는데도 아주 폭폭 식곤이 나도록 왜 먹어? 그래 나가 보자니까 잠깐 앉았다가, 앉았다가 나갔으면 좋겠다고. 그래 밥 먹을 데가 없어서 금강산에가 앉아 먹었나? 그건 그거보다도 내가 여러 번 말 하는데 우리도 다 그래요. 식기도 길게 하고 음식이 맛있으면 과히 먹어요. 과히 먹었으니 잠이 오지. 그럼 할 수 없이 금강산에 갔던 거 모양 나갑시다. 아 좀 앉았다 나갑시다. 그 식으로 사는 이가 많아요. 사람 만나면 우리 인사는 해요.
그러나 그게 인사는 내 이 깊은 속에 정말 깊은 속에 들어가면 그동안 참 안녕 했느냐고 그걸 물어야 인사인데, 그저 인사를 사람 만나 인사는 했나? 이러는 까닭에 마음이 인사는 안 했어요. 그 인사가 진실한 인사가 아니야. 그래 만나서 의논을 하면 의논이 맞지 않거든. 그런데 그게 무슨 인사야. 그래 하나님께 대해서도 우리가 그래 하나님이 주신 거면 하나님이 주신 거라. 생각만 일어나면 그만 기도한 거예요. 그래 자기가 알맞게 먹고 그리고 자기가 가만히 생각해 내가 이번에 알맞게 먹었나? 그 생각을 하면 어떻겠어요? 아이고 아마 두어 숟가락은 안 먹어도 좋은걸 먹었나보다 그럼 사실 몸이 무거워요. 고단해요. 좀 앉았다가 나가면 좀 누웠다가 나가면 이게 나와요. 그럼 밥이라는 건 결코 과식하라고 내가 배부르라고 먹는 게 아니에요. 한 숟가락이라도 과하게 먹으면 그건 병이 되는 거예요. 살이 되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병이 들면 살이 깎입니다. 그런즉 그렇게 아니하고 먹고 나서, 한 숟가락이라도 더 먹지 않았다. 오히려 그렇게 생각나. 한 숟가락쯤 더 먹을 수 있었는데 한 숟가락 덜 먹었다. 이렇게 되어야 그때야만 감사합니다. 오늘도 이렇게 양식을 줘서 저희를 살리시니 이렇게 살도록 주신 것 살도록 먹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밥을 먹었으니 감사합니다. 알맞게 먹었으니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그건 진정 감사가 나오는 거지. 그럼 그 영혼이 부쩍부쩍 자랄 겁니다. 그것이 과연 감사입니다. 그럼 그것이 원 인사이지 인사 잊어버리고 고만 잊어버리고 그만 딴 짓거리들을 하고 있어. 그건 인사 하나마나야. 그래 식 기도는 먹고 나서 자기를 시험해 보고나서 감사가 제절로 나와도 될 때 해요. 그리고 내가 어제저녁에 말씀을 좀 했으면 할 때, 김 선생, 그래가지고 말씀을 하자고 하는데 그것이 내가 그렇게 하기 어려워하지 말고 내가 벌떡 일어나서 목사님 내 손 내밀어요. 그럼 목사 손이 나올 겁니다. 그럼 악수해요. 악수하고 나서 목사님, 예, 오늘 말씀 참 감사합니다. 그러던지 어쩌던지 무슨 말 하면 되요. 그러면 되는데 그러면 내가 제일 쉽고 말하기가 쉽고 이렇게 되어있는데 이 사람 그런 거 있어요. 악수 하는 거, 저는 싫어해요. 악수하는 거 싫어합니다. 그래서 악수는 못해요. 그러나 지금 행세벌이 그거니까, 이 손이 내밀면 마주나와 꽉 붙잡고 참 감사합니다. 지금 말씀하신 거 참 감사합니다.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이렇게 하면 쉬워요. 그런데 그거 나는 싫어요. 아첨하는 거 싫어요.
그런데 이것은 아니하지요. 그런데 기독교에도 사람하고 사람끼리는 이렇게 안 해요. 사람끼리 이렇게 하고 이렇게 하고 기도하는 게 많습니다. 개신교 사람들이 지금은 하지만 이전에는 없었습니다. 카토릭에서 의례 기도할 때 많이 이렇게 해. 저절로 이렇게 해. 합장 그거도 대단히 좋은 겁니다. 참 하나님 앞에 합장 대단히 좋아요. 그러면 이 합장하는 거 인도인들이 하는 거니까 대단히 수효가 많아요. 영국나라가 또 많이 하니까 악수도 온 천하에서 공통으로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여기 합장하는 사람이 적은 데서는 악수가 죄다 하고 말텐데 인도 같은데 가면 나 모릅니다. 서양사람 오면 인도 사람도 쑥 쑥 손이 나가서 악수를 그렇게 하는지 안하는지 궁금해요. 이런 말해서 좋은 거 봤습니다. 서양 사람이 인도사람 만나서 손이 나와요. 악수 하자고 인도 사람은 어떤 사람은 이렇게 와서 만날 때 제절로 이렇게 그럼 거기 사람은 이렇게 하는 게 많은데 서양 사람은 악수하는 손이 인도에 가서 쑥쑥 나갈 리가 없습니다. 악수하고 나오는 주인이 많은데 어찌 손이 쑥쑥 나가? 저기서는 필연코 악수가 이길 겁니다. 악수가 아니 합장이 이길 겁니다. 악수는 쑥 들어가고 그렇지 않을까? 그래 이건 실제로 인도에 다녀온 어떻더냐고 물어가지고 이렇게 이야기해야 할 텐데 이건 내 성질이 급해서, 거기서는 필연코 악수 손이 쑥쑥 나가지 않을 거 같습니다. 합장이지. 그렇게 된 건 봤어요. 서양 사람이 악수가 나오는데 거기서는 먼저, 이러고 악수하자는데 나가지 않는 건 실례지만 저기서 합장이 먼저 나왔는데 손님도 따라서 먼저 나온 주인의 합장을 해야 그럼 이제 이 앞으로 두고 보자는 겁니다. 합장이 아주 없어질 거냐? 없어지지 않는다. 없어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악수 손이 나오더라도 합장 앞에서는 그게 안 나온다. 이렇게 될 런지도 몰라요. 그런데 제절로, 제절로 자기 혼자 있다가 누구를 만나면 제절로 이렇게 되고 정말 어린애가 앞에 오던지 참 오래 못보고 불가불 봐야할 텐데 못보고 만나야 할 텐데 만나지 못하던 사람이 만나게 된다면 거기는 동서양 할 거 없이 다 같은데 왈칵 뭐 손을 붙잡는 거 말고 그 정신이 없어가지고 뒹굴 겁니다. 눈물이 쏟아지고 그렇게 되는 겁니다. 의례 다 그렇고 또 우리가 오래 못 만나게 될 거 같으면 그 어머니가 자식이 만나도 형이나 동생이 만나도 곧바로 그렇게 하면 껴안고 뒹굴고 뭐 뺨을 비비고 이마를 비비고 야단날 거 아닙니까? 땀이 쏟아지고 눈물이 쏟아지고 뒹굴고 그럴 겁니다. 그건 가장 자연이에요. 자연히 그렇게 될 건데 그것이 자연히 나와서 인사하는 거 성경에도 그걸 입맞춤으로 인사를 한다. 입맞춤으로 문안을 한다. 그게 있지 않아요? 여기는 악수뿐만이 아니에요. 입맞춤으로 인사를 한다. 그럼 사실 우리가 입맞춤으로 인사 하는 게 될 거 같습니까?
https://youtu.be/nkz4CYe8A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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