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일

현이네 휴가 보내기 2 : 부활

mamuli0 2019. 8. 15. 16:49

 벌교 우리원에서 순천만 습지로 가서 자전거 타고 순천만 간척지와 갈대밭 습지를 멀리 바라보고 펄에 사는 망둥어와 게를 보고 돌아나와 다리 위에서 사방을 돌아보고 휴게실에서 짐간 쉬고 나와 생태과학관에 들러가 동영상과 새조류와 펄 생물을 보고 국가정원으로 갔다.


 



 부   활 


1980.4.6. 정인세 원장


 12사도에게 나타나시고 또 한 번에 5백 명의 넘치는 교우들에게 나타났다. 이 5백 명에게 넘치는 교우들에게 나타났다는 말은 고린도전서 15장에 뿐입니다. 그렇지요? 사도행전이나 4복음에는 없지요. 또 그중에 더러는 이렇게 세상을 떠났지만 대다수는 아직도 살아있습니다. 그럼 그 다음에 야고보에게 나타나시고 시간이 없어서 지금 4복음 대조를 제가 이 시간에 못해요. 그런데 야고보에게만 나타났다는 게 4복음에는 없지 않습니까? 그래 이건 바울사도의 말만 보면 이렇게 야고보에게만 나타나셨던 게 계셨던 거 같아. 또 모든 사도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팔삭 동이 같은 나에게도 나타났다. 이건 무엇을 말하는 걸까?


 



그 사도행전에 보면 다메섹 성문 밖에서 예수님 만난 이야기가 있지요. 그때를 말한다고들 그럽니다. 그것도 그냥 지나갑시다. 그렇게 말하고 있어요. 중간은 생략해요. 9절 10절은 11절로 가봅시다. 내가 전하던지 다른 사도들이 전하던지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전하는 것이고 이거 못 박은 대목이 인상적이에요. 왜 예수님에 대해서 전할게 많지 않소? 얼마나 그분 말씀 한마디 한마디가 또 그런데 죽으심과 부활을 전한다고 결국 그거에요. 아까 로마서 6장에서도 우리가 조금 이야기하고 지나갔지만 우리들의 신앙도 중심은 여기에 가 있어야한다. 그 말이지 않아요? 예수님과 함께 죽고 예수님과 함께 산다. 그게 우리 신앙에도 중심 생활에도 중심 기독교에도 중심 죽으심과 부활을 전하는 것이고  그 외의 것은 사실 부차적인 것이지요. 거기서 나오는 거지요.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와 함께 살면 다 풀어지는 거지요. 우리가 덕의 온유와 겸손과 절제와 인내와 양선도 나오고 또 믿음도 말하고 사랑도 말하고 여러 가지를 말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사실은 우리가 그건 참 거듭 이야기하기가 어려운 대목이지만 믿음도 그렇고 사랑도 그렇고 소망도 그렇고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와 함께 살고 그거 없으면 그게 다 껍데기지요. 쭉정이가 돼. 죽으심과 부활을 전하는 것이고 여러분은 그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부활을 이야기 하면서 17절로 뛰어가 봅시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시지 않았다면 여러분의 믿음은 헛된 것이 되고 여러분은 여전히 여러분의 죄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을 것이라고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은 항상 죄가 있을 거라, 또 그 믿는다는 건 부활 생활을 말하는 것이지요.


 


그러면서 19절에 만일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가 단순히 이 세상에만 희망을 두고 있다면 우리는 모든 인간 중에서 가장 가련한 존재일 것입니다. 예수 믿는 그런데 이 말은 예수 믿는 사람이 세상재미 다보고 있는 사람에게는 해당이 안 되어요. 아 먹을 것 다 먹고 입을 것 다 입고 뭐 저 입을 것 다 입고 그리고 이것저것 다 하고나면 세상재미 다 봤는데 뭐 불쌍하기는 뭐가 불쌍해? 여기는 참 믿는 사람을 가리킨 거지요. 참 믿는 사람은 세상재미 싹 끓어버렸어야 해. 세상 재미는 하나도 안 봤어야 돼. 그러니까 믿는 사람이 이 세상만 사는 것이라면 참 불쌍하지 않느냐? 그 말이야. 세상재미 아무것도 모르고 사니 그게 믿는 사람입니다.


 


 세상 재미도 봐가면서 예수 믿는 거는 가짜에요. 그 지금 이 말 가지고 증거 하는 거예요. 제 이야기 아니에요. 만일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가 단순히 이 세상에만 희망을 두고 있다면 우리는 모든 인간 중에서 가장 가련한 존재일 것입니다. 그러면 믿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가장 비참하고 참 헐벗고 굶주리고 매 맞고 그리고 이렇게 참 눈물을 흘리고 그런 것으로 일관성 있게 산 사람이 되요. 육체적으로나 세상 적으로는 그러니까 이제 그런 사람은 부활을 바라보고 살기 때문에 그 말 이지요? 부활에다 소망을 두고 그리고 그런 걸 모두 감내해 나가기 때문에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죽음으로부터 다시 살아나셔서 죽음의 잠으로부터 부활하신 첫 사람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해서 이제 예수님이 부활의 문을 여시고 첫 사람이 되어가지고 우리들도 그렇게 되어 진다. 23절로 뛰어가 봅니다. 그러나 각 사람이 차이가 있습니다. 먼저 그리스도께서 살아나셨고 그 다음에는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에 살아나게 된다. 여기 성도의 부활에도 첫째부활 둘째 부활 그렇게들 말하지 않아요? 여기는 이렇게 순서가 되어있어요. 예수님께서 오실 때 오실 때에 살아나게 될 것입니다. 그럼 그 다음에는 마지막이 올 것인데 그 때에는 그리스도께서 권세와 능력과 천신들을 물리치시고 인제 오실 때에 된다. 그랬지요. 그리고 저 29절로 뛰어가서 보십시다.


 


그런데 죽은 이들을 대신해서 세례를 받는 사람들의 의도는 무엇이겠습니까? 만일 죽은 이들이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다면 무엇 때문에 그들을 대신해서 세례를 받습니까? 이거는 교파마다 다르고 달라요. 죽은 사람을 위해서 세례 받는 풍속에 대해서 하는 소리지요. 죽은 사람이 부활이 없다면 무엇 때문에 이런 짓을 하겠냐? 그랬지요. 그리고 또 우리는 무엇 때문에 시시각각으로 위험을 무릅쓰고 있겠습니까? 거기서 34절까지는 그 성도들의 고난, 고난 그것을 지금 말하는 거지요. 부활의 신앙 때문에 이런 어려움을 다 겪는 것이 아니냐? 그래서 그걸 강조한 대목이 32절 아니에요?


 


그 바울사도는 에베소에서 이런 일을 당한 모양인데 내가 설혹 에베소에서 맹수의 형을 받은 것 같은 경험을 겪었다 하더라도 그것이 인간적인 동기에서 당한 것이라면 내가 얻은 것이 무엇이겠느냐? 그 말이지요. 그렇다면 이건 굉장한 이야기가 됩니다. 아무리 예수의 이름으로 감옥에 갇히고 이렇게 짐승에게 물릴 위험을 겪고 그랬다 하더라도 그게 인간적인 것이라면 가치가 없다. 그 말이에요.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다면 내일이면 죽을 테니 먹고 마시자. 이 말도 시험에 걸리는 말이에요. 그럼 예수 믿지 않는 사람은 도덕도 지키지 말고 양심도 없이 살아라. 그 말처럼 들리지 않소? 만일 우리에게 부활이 없다면 막 먹고 막 마시고 진탕치고 놀아도 괜찮다. 그 말이 되는데 우리가 부활이 있으니까 그렇게 못하지 않느냐? 그 말이 되지 않소?


 


그 정도야 그 강조한 정신을 우리가 알아야 되요. 내일 죽을 테니 먹고 마시자. 그러지 않겠느냐? 그렇게까지 말하지요, 이건 오해받기 쉬운 말이나 아마 여러분들은 그런 오해는 안하실 겁니다. 그러면서 그 다음에는 이 부활에 대한걸 아주 친절하게 설명을 하고 있어요. 35절 이하에 가보면 죽은 사람이 어떻게 다시 살아나고 어떤 몸으로 다시 살아 나냐? 이런 궁금증을 조금만 풀고 지나가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 씨앗에다 비유를 했지요. 모든 식물의 씨앗을 심으면 한번 썩어야 새싹이 나지 않느냐? 우리도 그런다. 알아먹게 하려고 어떻게 해서 부활을 하냐? 어떻게 해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걸 설명하려고 이렇게 애를 쓰고 계시는 거예요.


 


그리고 또 그 부활한 뒤에 그 형체를 말하면서 형체가 여러 가지로 다르다는걸 말하려고 하신 게 39절 이하입니다. 모든 육체가 다 같은 것이 아닙니다. 사람의 육체가 다르고 동물의 육체가 다르고 새의 육체가 다르고 모든 물고기의 육체가 다른 것 모양으로 하늘에 존재하는 것들이 있고 땅에 존재하는 것들이 있다. 그런데 이건 한마디로 말하면 41절에 이렇게 되어있어요. 해의 영광이 다르고 달의 영광이 다르고 별의 영광이 다르며 또 별과 별사이의 그 영광이 다릅니다. 그러면서 죽은 자들의 부활도 이와 같습니다. 몸은 묻히면 썩지만 썩지 않는 몸으로 다시 살아납니다. 이건 우리가 알아두어야 할 거예요. 상식적으로도 알고 지식적으로도 알아두어야 합니다.


 


 썩지 않는 몸이 무엇인가? 썩지 않는 몸으로 다시 살아납니다. 묻힐 때에는 치욕을 받고 묻히지만 영광스럽게 다시 살아납니다. 묻힐 때는 약한 자로 묻히지만 강한자로 살아나고 육체적인 것으로 묻히지만 영적인 것으로 살아나고 육적인 것이 있으면 영적인 것이 있다. 그래 부활한 몸이 어떤 것이 됩니까? 그걸 다른 말로 영광 체라고도 말합니다. 영광 체라고 말해요. 그래 성서에 기록된 대로 첫 인간인 아담은 생명을 받아 목숨을 이어가는 존재가 되었지만 나중 아담은 생명을 주는 영적인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 위에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죄가 한 사람 아담으로 말미암아서 들어오고 그리고 인제 사망의 권세를 이기는 생명의 길 그것은 둘째 아담 예수로 말미암아서 생명의 길이 열렸다. 죽음이 아담을 통해서 들어오고 생명은 예수를 통해서 이렇게 열렸다. 그 대목을 말하는 것인데 첫째 아담은 생명을 받아 목숨을 이어가는 존재가 되었지만 나중 아담은 생명을 주는 영적 존재가 되셨습니다. 그러나 영적인 것이 먼저가 아니고 육체적인 것이 먼저이고 영적인 것은 그 다음입니다. 첫째인간은 땅에서 온 흙의 인간이었지만 둘째 인간은 하늘에서 왔습니다. 흙의 인간들은 그 흙의 인간과 같고 하늘의 인간들은 하늘의 인간과 같습니다. 이 시간에 우리가 꼭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서 이것이 이해가 되었으면 하는 생각이 간절히 듭니다.


 


저부터 그러면 조금 우리 생활이 더 좀 육적인 것에서 탈피하지 않을까? 더 좀 영적으로 정신적인 생활을 하지 않을까 더 좀 능력 있게 지혜 있게 살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나서요. 다시 읽습니다. 47절 이하입니다. 첫째인간은 땅에서 온 흙의 인간이었지만 둘째 인간은 하늘에서 왔습니다. 흙의 인간들은 그 흙의 인간과 같고 하늘의 인간 우리는 하늘의 인간이에요. 이걸 믿어야 해요. 억지로라도 믿어야겠습니다. 억지로라도 믿지 않는다면 우리는 참 실패한 인간들이야. 그런 큰 낭패가 없어. 하늘의 인간이라는 하늘의 인간 하늘의 인간과 같습니다. 우리가 그 흙의 인간의 형상을 지녔듯이 그렇지요?


 


한쪽에는 흙의 인간을 지니고 있는데 어찌되었든지 이놈은 죽어져버리고 그 하늘의 인간의 형상을 지녀야 합니다. 이게 부활을 체험한 사람들을 말하는 거예요. 형제여러분, 형제여러분 여기서부터는 같이 봐요. 성경 갖은 이들은 결론이 되요. 시간도 다 되었고. 50절 형제여러분 이 말을 잘 들어 두십시오. 살과 피는 하나님의 나라를 이어받을 수 없고 또 썩어 없어질 것은 불멸의 것을 이어 받을 수 없습니다. 내가 인제 심오한 진리 하나를 말씀 드리겠습니다. 마지막 나팔소리가 울릴 때에는 우리는 죽지 않고 모두 변화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두 가지이지요. 이미 죽은 사람은 나팔 소리에 일어나고 예수님 오실 때 일어나고 그때 영광 체의 새 몸을 입고 일어나고 여기 말하는 뜻이 그거에요. 그때까지 육으로 살아있는 사람들은 홀연히 변화한다. 이거 믿어야 해요. 그대로 그러지 않으면 이놈의 병 덩어리 욕심덩어리 음란 덩어리 몸둥이가 하늘나라로 그대로 올라갔다가는 하늘나라가 망해버리지 않겠소? 변화 시켜야지, 예수님이 그냥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신 거와 같이 그렇게 저 말하자면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지 않는 영광체로 변화를 받는다. 그거야. 이건 믿어야 합니다. 홀연히 변화할 것입니다. 그 나팔소리와 함께 삽시간 눈 깜박할 사이에 죽은 이들은 불멸의 몸으로 살아나고 우리는 모두 변화할 것입니다. 그런데 뭘 자꾸 물어보고 힘들어 하고 저 신학자 안 된 걸 감사해요.


 


아주 여기에 대한 신학설이 분분합니다. 시간낭비 하는 거야. 이거 한마디만 믿으면 될 텐데. 그래서 삽시간에 눈 깜박할 사이에 변하는 거야. 거기에 대한 요새 핵무기니 원자탄 이야기가 많이 나오지요. 그런데 요새는 살인광선 문제가 나와서 더 이게 두드러지게 해요. 지금은요 전쟁이 나면 그 살인 광선이라는 거 한번 번쩍하면 광주가 뭐에요? 한국바닥이 다 사람이 자전거 타고가다가도 죽고 앉았다가도 죽고 밥 먹다가도 죽고 그대로 죽어버려. 그런 살인광선이 번쩍하는 사이에 순간에 그런데 이상하게 그 광선을 맞으면 집은 그대로 있어 물질은 하나도 안 죽고 생명 있는 것만 죽어. 그런 것이 생겼어. 그런데 아 죽이는 것도 그렇게 깜박할 사이에 몇 만 명 몇 백만 명을 죽이는데 깜박할 사이에 변화 못시키겠소? 하나님이,


 


참 실감이 나더라니까, 이걸 읽어보면, 그 나팔소리와 함께 삽시간 눈 깜박할 사이에 죽은 이들은 불멸의 몸으로 살아나고 우리는 모두 변화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썩을 몸은 불멸의 옷을 입어야하고 입어야하지 않겠냔 그 말이지요. 지긋지긋한 몸둥어리들, 왜 불구자 수용소가 모두 생기고 아주 날마다 졸려요. 아주 하루 한사람씩 꼭 받아달라고 졸리는데 참 눈물이 나고 다 받아줘야겠어. 사정이 그런데 무슨 재주로 받아? 지금 저는 그러니까 한국에 불구자 수가 30만 명이라고 그랬더니 어저께 서울서온 어떤 잡지를 보니까 백만 명이래, 백만 명. 왜 이렇게 병신은 많은지? 한국에 그럼 엄청난 거 아니요?


 


삼천오백만 인구에 백만 명이 장애자니 정신장애자 지체장애자 그래서 내년에 1981년 전 세계적으로 불구자의 해가 됩니다. 불구자 건지자고 이건 적은 문제가 아니에요. 그런데 걱정 마시오. 다 변화시켜요. 앉은뱅이도 절름발이도 드러누워서 대소변 받아내는 사람도 홀연히 변화시키신다. 영광 체로 영광체로 입히신다. 아 그 죄스러운 몸도 마음도 이 썩을 몸은 불멸의 옷을 입어야하고 이 죽을 몸은 불사의 옷을 입어야하기 때문입니다. 이 썩을 몸이 불멸의 옷을 입고 이 죽을 몸이 불사의 옷을 입게 될 때에는 승리가 죽음을 삼켜버렸다. 승리가 죽음을 삼켜버렸다. 이거 어디 있는 말씀 입니까? 이사야서에 있는 말씀 아닙니까?


 


 승리가 죽음을 삼켜버렸다. 라는 성경 말씀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이건 마지막으로 아주 승리의 노래야. 참 여기는 아주 그 바울사도의 마음에서 사랑의 불 믿음의 불이 막 활활 타는 것 같아요. 여기 보면 이렇게 되어있어요 죽음아 네 승리는 어디 갔느냐? 죽음아 네 독침이 어디 있느냐? 이게 개역성경에는 네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그랬지요. 아주 사람들을 지긋지긋하게 쏘고 들볶지 않소? 지금 정치를 통해서 경제를 통해서 그저 뭐 여러 가지 모양으로 사람들을 들이쏘지 않아요? 죽음아 네 승리는 어디 갔느냐? 죽음아 네 독침이 어디 있느냐? 죽음의 독침은 죄이고 죄의 힘은 율법입니다. 여기서 율법을 뭉둥그려 치워요. 그저 인위적으로 마귀가 역사를 통해서 계속적으로 사람을 괴롭히는데 그걸 여기서는 한마디로 율법으로 표현을 하고 있어요.


 

 


 오늘 우리에게는 율법이 없지 안하요. 왜요? 우리 안에도 지금 율법이 얼마든지 있지 않소? 도덕이니 모든 세상풍속이니 제도니 지금 교회는 이 교회 제도라는 걸 가지고 사람들을 죽이고 있어 독침으로 얼마나 거기 얽어매고 있어? 사람들을, 죄에 힘은 율법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승리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시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굳건히 서서 흔들리지 말며 이건 무엇에 이 믿음에 무슨 믿음 부활의 신앙 부활의 신앙에 굳건히 서서 흔들리지 말며 언제든지 주님의 일을 열심히 하십시오. 무슨 일 복음의 일. 죽고 사는 거 이게 죽고 사는 게 한마디로 말하면 복음입니다.


 

 


굳건히 서서 흔들리지 말며 언제든지 주님의 일을 열심히 하십시오. 주님을 위해서 하는 노력은 결코 헛되지 않는다는 것을 명심 하십시오. 이렇게 해서 고린도 교회의 부활을 강조했는데 특별히 여기 15장에서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이걸 강조했는데 오늘 한국교회나 우리는 이 신앙을 내 것으로 만들어야겠어. 그때 우리는 영적으로 자유롭고 더 좀 능력 있게 살 수 있지 않을까? 참 복음의 전파자들이 증인들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찬송 부릅시다. 145장입니다.


 

 

 

 


    생사일여生死一如
사는 것이 좋은 사람은 죽는 것도 좋아해야 한다. 여름이 좋으면 겨울도 좋다. 건강한 사람에게는 무엇이든 좋다. 영체를 가진 사람에게는 살아도 좋고 죽어도 좋다. .
대저 도는 형이상이기 때문에 실재한다는 진실성을 가지고 있지만 활동도 없고 형상도 없다. 그것은 이심전심으로 전해갈 수는 있지만 형체가 없기 때문에 손으로 받을 수는 없다. 그것을 체득할 수는 있지만 눈으로 볼 수는 없다. 그것은 자기 안에 존재의 근거를 가지고 자기 속에 생성의 뿌리를 가지고 있다. 천지가 시작되기 이전 부터 이미 존재한 것이다. 그것은 귀신이나 천제에게 영묘한 힘을 주어 천지를 만들어 내게 하였다. 하늘 꼭대기 태극에 있지만 높지도 않고, 우주의 밑바닥에 있어도 깊다고 느끼지도 않는다. 천지보다 앞서 있어도 오랜 것 같지도 않고, 태고 이전부터 있어도 늙지도 않는다. 도는 시간과 공간과 인간을 초월한 절대자이다 .
- 생사일여生死一如이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