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휴가차 현이네가 김제에 내려왔다. 다음 날 곡성 길농원에 들려 벌교 우리원을 방문했다. 거기서 30 여년 만에 만나 옛 추억을 다시 더듬기도 했고 점심과 과일을 들고 다시 순천으로 갔다. 벌교 마동에서 보리양이 건내준 민이 돌날 기념사진을 올려본다. 1998년 길농원에서 고 강대인 선생 작품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됨
1980.02.24. 정인세 원장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또 23절에도 완전히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어째서 이렇게 거듭거듭 이렇게 말씀 하신 것을 보면 그 기도도 간절하시거니와 예수님의 심정을 우리가 헤아려 살필 수 있어요. 대단히 이걸 원하고 하고 계시구나. 아마 그때도 그러셨고 지금도 그러시고 예수님이 가장 원하시는 것이 우리들이 하나가 되는 거 그걸 참 원하시고 계신 것 같아요. 또 그걸 위해서 오셨다고 그랬지요. 그런데 바울사도께서 거기에 대해서 말씀 하신 데를 우리 조금 살펴볼까요? 에베소 4장에 1절서부터 읽었으면 좋지만 3절 이하만 읽읍시다.
음행이나 온갖 더러운 행위나 탐욕 따위의 말은 여러분의 입에 담지도 마십시오. 그래야 성도로서 부끄럽지 않을 것입니다. 조금 잘못되었습니다. 4장입니다. 성령께서, 성령께서 평화의 줄로 여러분을 묶어 하나가 되게 해 주신 것을 그대로 보전토록 노력 하십시오. 성령께서 여러분을 평화의 줄로 묶어서 하나가 되게 해 주신 것을 그대로 보전토록 노력 하십시오. 그리스도의 몸도 하나이며 성령도 하나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당신의 백성으로 부르셔서 안겨주시는 희망도 하나입니다. 주님도 한분이시고 믿음도 하나이고 세례도 하나이며 만인의 아버지이신 하나님도 한분이십니다. 이렇게 말씀을 하셨어요. 그리고 그 아래 가보면 하나님의 은총을 우리에게 주신 것은 다르다고 그랬어요. 그렇지만 그 은총이 다르다고 해서 이렇게 하나가 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분은 10절 하반 절을 봅니다.
그분은 이 모든 것을 완성 하시려고 올라가셨는데 그 여러 가지 은총을 이렇게 주셨지요. 거기 보면 어떤 사람에게는 사도로 어떤 사람은 예언하는 사람으로 어떤 사람은 전도자로 어떤 사람은 목자와 교사로 이렇게 했는데 그것은 성도들로 하여금 봉사활동을 할 수 있도록 그래서 그렇게 여러 가지로 주셨다. 어떤 사람은 선생이 되고 어떤 사람은 목사가 되고 모두 그랬지요. 그렇게 어떤 사람은 구제 사업을 하고 이렇게 여러 가지를 하게 했는데 그건 봉사활동을 할 수 있도록 그들을 그렇게 하신 것인데 준비 시키셔서 그리스도의 몸을 자라게 하시려는 거라. 결국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아드님에 대한 신앙과 지식으로 하나가 되어 활동은 그렇게 여러 가지로 각각 하지만 그게 다 주님을 위해서 봉사하는 것인데 결국은 그리스도의 몸을 자라게 하려는 것인데 모두가 하나님의 아드님에 대한 신앙과 지식으로 하나가되고 믿음으로 하나가 되고 예수님을 아는 지식이 같아야하고 그래서 하나가 되어 성숙한 인간으로 그래서 인제 어른스럽게 성숙한 인간으로서 그리스도의 완전성에 도달하려는 것입니다. 이렇게 여기도 말하고 있어요.
그래서 이제 성숙하다 완전성이라 거기 도달하면 결국은 예수님처럼 되고 하나가 됩니다. 모두가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렇게 거기도 말씀 하시고 있어요. 그리고 또 그 아래 5절에 가보면 도리어 우리는 사랑가운데서 진리대로 살면서 여러 면에서 자라나서 거기 그 고린도서에는 지체라고 비유를 하셨는데 어떤 사람은 팔의 역할을 하고 어떤 사람은 다리의 역할 모두 눈의 역할 입의 역할 그 모두 하는 건 다르지만 사랑가운데서 진리대로 살면서 여러 면에서 자라나서 결국은 머리는 그리스도 야.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몸은 각 부분이 자기 구실을 다함으로서 각 마디로 서로 연결되고 얽혀서 영양분을 받아 자라납니다. 그리스도에게서 예수님의 사랑을 영양분으로 해서 우리가 자라납니다.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교회도 이와 같이 하여 사랑으로 자체를 완성해 나가는 것입니다.
여기 교회는 모든 교회 어떤 교회든지 예수의 이름으로 모이고 하나님을 공경하고 성령을 의지하는 교회라면 모든 교회 또 예수님의 십자가를 섬기는 교회라면 모든 교회는 다 하나요. 그리스도를 머리로 이렇게 지체가 되고 그건 하나로 완성 되어야 한다. 이렇게 주장하고 있어요. 그래도 우리가 성경 어디를 찾아보든지 그런 말씀들이 나오지 않습니까? 그런데 또 이런 말씀이 있지요? 고린도전서 1장에 보면요, 조금 반대되는 입장에서 말씀 하신 데가 나오지요. 1장 10절 이하를 봅니다. 그런데 하나가 되어야 하는데 말이지요. 교회는 또 신자는 하나가 되어야 하는데요. 형제 여러분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여러분에게 호소합니다. 여러분은 모두 갈라지지 말고 그랬어요. 갈라지지 말고 서로 일치 하십시오. 하나가 되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의 생각과 뜻을 같이하여 뜻을 같이하여 굳게 단합하십시오. 굳게 단합하십시오. 내 형제여 나는 사람들에게 들어서 여러분이 서로 다투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여러분들이 고린도 교회 안에 분쟁이 있어, 그래가지고 서로 다툰다는 말을 듣고 대단히 괴로우셨던 모양이에요. 그런데 무얼 가지고 다투는가 하니 나는 바울 파다. 나는 아폴로 파다. 나는 베드로 파다. 나는 그리스도 파다. 그러니까 오늘과 똑같은 모양이 야요. 나는 칼빈 파다. 나는 무슨 루터 파다. 나는 무슨 파다. 이런 식으로 그때나 이때나 하며 떠들고 다닌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가 갈라졌다는 말입니까? 여러분을 위하여 십자가에 달린 것이 바울입니까? 자기 자신까지 바울사도가 위대한 점은 이거야. 자기에게 절을 하면 막 옷을 찢고 이거 무슨 짓이냐? 그러고 내가 너희들을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 죽었단 말이냐? 어째 바울파라는 소리들을 하느냐? 세상 사람들은 그거 좋아하지요.
그러나 믿는 사람들은 괴로워, 도리어 그거 참 괴로운 거야. 그래 여러분은 바울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단 말입니까? 그 무슨 소리를, 더군다나 17절에 가보면 그리스도께서는 세례를 베풀라고 나를 보내시지 않았는데 세례가 지난번에 제가 여기서 말을 한다고 조금 잘못한 것 같은데 제가 이런 뜻으로 말을 하려고 한 거지요. 신교에서는 세례만 받아야 한다고 하고 천주교에서는 영세가 더 옳다고 하고 침례교에서는 물속에 쑥 들어갔다 나오는 침례를 해야 한다고 그 세례도 형식이 여러 가지인데 자기 교파에서 주장하는 그 예 만이 옳다고 이래서 다른 교파에서 받은걸 무시해요. 그래서 다시 이렇게 침례를 준다는 둥 이렇게 하는 게 있거든요.
그런데 여기 보면 그렇지가 않아요. 성경이나 바울사도의 말씀 보면 세례를 베풀라고 나를 보내신 것이 아니고 기쁜 소식 복음을 전 하는 게 더 문제인데 그렇게 말하는 거지요. 그런데 만일 그런 것만 이렇게 한다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뜻은 희미해진다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은 그런 정신이 아니었다고 강조하고 그건 우리가 나중에 이야기 합시다. 이렇게 자꾸 갈라지는 문제가 생겨, 그런데 왜 그럼 그때뿐입니까? 왜 이렇게 무슨 파다. 어쨌다. 이런 문제가 생기느냐? 한 하나님 한 예수님 한 성령님인데 예수님도 원하지 않고 사도들도 원하지 않고 그런 거 같은데 또 현실적으로 우리가 생각해 볼 때 여기 앉아있는 우리들 중에 단 두 사람이 마음이 하나가 되는 걸 찾기가 힘들 겁니다. 한국 기독교인이 지금 700만 명이라고 700만 명이 하나가 되자. 하나가 되자.
아주 요새 열심히들 부르짖는데 700만 명 가운데 단 두 사람이 완전한 일치 완전한 일치를 볼 수 있을까? 가장 잘 믿는 다는 이 더군다나 이렇게 수도한다는 이들 중에서는 일체를 모두 버리고 예수 안에 참 신인일화가 되어보려는 이들 까지도 완전한 일치라는 것이 대단히 어려운 것 같은데 어째 그럴까? 지금우리가 여기서 첫째로 생각해 보려고 하는 문제에요. 그런데 또 이런 말씀이 있지요.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 죽으심으로서 둘을 한 몸으로 만드셔서 하나님과 화해시키시고 그걸 고린도서에도 그 말씀을 했는데 그렇게 하셨는데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고 죽으신 것은 물론 하나님과 사람을 화해시키시고 또 이방인과 유대인을 화해시키시고 또 모든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화해시키시려고 그래서 피를 흘리셨는데 그 말 이지요. 그런데 어째서 하나가 못되느냐? 그러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그런데 가만히 보니까 처음부터 벌써 초대교회에서부터 그런 징조요, 사실은 예수님 생전에서부터 그런 징조가 있었지요? 우리 몇 군데 보십시다. 그 마태복음 18장 1절에서 5절 근처에 가보면 마가복음 누가복음에도 있지만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라서 지금 예루살렘 상경을 하고 있는데 예수님은 지금 내가 이번에 가면 죽는다고 참 심각한 말씀을 하고 있는데 예수님을 따라오던 제자들 중에서 네가 높으냐? 내가 높으냐? 그 문제가 나지 않았었어요? 그래가지고 인제 그 야고보하고 요한하고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그러니까 또 다른 제자들은 그게 불평이 나가지고 그래, 그것이 분열의 징조거든, 그런 것 때문에 갈라지는 거거든요. 언제든지 예수님을 따라 다니던 제자들 가운데도 분열이 있었다. 이렇게 볼 수 있지 않아요? 벌써 그런 것이 있지 않아요? 또 그거보다 더한 것 보시오. 열두제자 가운데 가룟 유다는 철저히 개밥의 도토리 모양으로 외톨이였어요. 사실은 우리가 그런 걸 4복음서를 읽어보면서 이렇게 느껴요. 아마 그때에 성경에는 노골로 드러나지 않았지만 제자들 가운데 특별히 성질 급하신 베드로 사도 같은 양반은 가룟 유다가 참 보기 싫었을 거야. 사사건건 하는 짓이 나쁜 짓만 하는데 왜 안보였겠소? 돈 주머니를 맡아가지고 돈도 몰래 썼다는 전설도 있는데 그런 거 저런 거 모두 그러니 어떤 의미로 봐서 열둘이 하나가 못 되었다는 증거 아니야? 벌써 내부에 가서 분열의 징조가 있지 않았소? 또 그거보다 더한 게 있지요?
여러분이 이렇게 그 마가복음 14장 50절에도 그 말이 나와 있는데 아주 거기 노골로 나와 있어.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서 돌아가셨는데 그때 제자들이 모두 예수님을 버리고 떠나갔다. 그 말이 있어. 뿔뿔이 헤어졌어요. 모르겠어요. 무슨 마음으로 갈라졌는지 몰라도 뿔뿔이 헤어졌어요. 그 증거를 보면 몇 사람들은 갈릴리 바다에 가서 다시 고기잡이 하고 있지 않았어요? 그러면 어디 가서 완전한 일치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12제자의 완전한 일치라는 모습이 그때 어디 보여 지지 않았지 않았냐 그 말이지요. 이야기 하는 것이 그럼 그때도 그런 것이 또 부활하신 뒤에도 그렇지요. 부활하신 뒤에도 그 완전한 일치라는 게 잘 안 보이는 거 같아요. 특히 심지어는 그 예루살렘 다락방에 가서 모여 있는데 그때 도마가 하나 없지 않았습니까? 도마가 돌아와서 그 모든 형제들이 주님을 우리는 만났다고 그걸 곧이 안 들었거든. 말이 이렇게 갈라져 있었어요. 보았다고 형제들이 그러는데도 그 무슨 소리냐고 내가 못 자국이나 옆구리 창 자국에 손가락을 넣어보기 전에는 믿지 못하겠다.
이게 모두 분열의 원인이 되었어요. 그때도 그렇게 되었는데 뭐 그 후에 많아요. 그보다 더 노골적이고 구체적인 이야기가 있지요. 오순절 뒤에 성신을 받고 제자들이 굉장히 많아졌습니다. 많아지니까 무슨 분쟁이 생겼다고 그랬지요? 무엇 때문에 구제물자 때문에 물건 나눠주는 것 때문에 그렇지 않아요? 헬라 파 사람하고 그래가지고 어떤 쪽은 더 주느냐? 물건을 덜 주느냐? 그때는 요새말로 하면 배급문제 가지고 또 그렇게 벌써 내부에 가서 싸움이 일어나 그래가지고 베드로가 이래가지고는 안 되겠다. 우리가 밤낮 이것만 해도 이렇게 불평만 나오고 그러니 언제까지 이것만 매달릴 수가 있느냐? 우리들은 전도하는 일에다 힘쓰고 일곱 집사들을 택해가지고 이런 일은 하도록 하자. 그래서 그런 집사를 택하는 문제가 나왔었거든요.
그리고 지금 여기 우리가 읽은 고린도서에 나오는 고린도교회처럼 나는 바울파라 나는 아볼로파라 나는 베드로파라. 그러면 초대교회도 벌써 그런 징조가 있었어. 그 외에도 많습니다. 지금 우리가 짧은 시간에 그걸 다 찾아볼 수가 없지만 갈라디아서 3장에 보면 그 율법 문제로 상당히 분쟁이 있었던 거 같고 로마서 3장이나 또 그런 게 있고 또 야고보서 4장 11절에 보면 너희들 서로 헐뜯지 말라고 노골로이야기 했습니다. 그럼 벌써 헐뜯고 싸움들을 했던 모양이야. 고린도전서 그런데 보면 음행 문제 때문에 문제가 생겼고 더군다나 가짜 그리스도 문제 때문에 많은 고통을 앓은 거 같아요. 처음부터 그래가지고 심지어는 벌써 그 할례문제는 없어졌는데 모두 유대에서 내려온 사람들이 와서 할례를 받아야 한다. 예수 믿는 사람보고 심지어 또 모세 율법을 지켜야 한다. 그런 문제가 자꾸 생기기 때문에 데살로니가 후서 2장 1절 디모데전서 4장 1절 베드로후서 2장 그 근처에 가보면 그런 문제 때문에 그런 문제 거기는 특별히 가짜문제 가짜 그리스도의 출현 문제를 가지고 이렇게 경고를 했거든요. 그런 것도 있고 또 모두 생활문제 절제문제 별 문제 가지고 또 디모데전서나 야고보서에 보면 돈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 간에 또 문제가 생겼던 모양이야. 그래서 교회 안에서도 부자는 대접을 더 받고 가난한 사람은 천대를 받고 그래가지고 사이가 요새로 말하면 요새 세상과 같이 이렇게 갈라지는 문제가 생겼던 모양이야,
다시 말하면 야고보서 2장에 보면 노골로 차별대우 한다고 그럴 수가 있느냐? 그렇게 하고 또 그 외에 많지 않아요? 서로 심판들 하지 마라. 그런 거 보면 상당히 복잡했던 거 같아요. 그런데 그때뿐 아니라 기독교 2천년 역사를 내려오면서 죽 그 싸움이 같은 신자들끼리 아주 어떤 때는 심하게 심지어 이쪽 집단하고 저쪽 집단하고 서로 싸우다가 특별히 교권문제로도 많이 그러지 않았소? 그래가지고 서로 죽이기까지 하고 피를 흘리고 계속 이랬어. 어째 그럴까? 예수님이 그렇게 하나가 되라고 원하셨는데 왜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렇게 싸워도 이만저만 싸우지 않고 갈라져도 이만저만 갈라지지 않고 어째서 그럴까? 그 사람들이 성경은 다 같은 하나님의 말씀 이라고 하는데 어째 그랬을까? 그러니까 우리가 가만 몇 가지로 먼저 조금 분석을 해보는 것이지요. 그 싸움에는 이단에 대한 정당한 싸움도 없지 않았었어요. 없지 않았었어요. 그러나 그 대부분의 싸움에 무엇들이 많이 끼여 있는가 하니 그 물질 문제나 이해관계가 그 옛날부터 오늘까지 물질문제나 이해문제 또 사심에서 생기는 거 정욕 음란 또 우상관계 정실관계 명예관계 이런 사심에서 생기는 거 또 교리해석이 다른 거 오늘 제일 교파가 지금 분열되는 문제 중에 하나가 교리문제 아닙니까?
또 그걸 좀 더 말하면 성경 해석이 달라 똑같은 성경을 놓고 보면서도 한쪽에서는 이렇다고 아니라고 그건 그런 뜻이 아니고 이렇다고 이 문제 그래가지고 또 갈라지는 거야. 그래 모두 교리나 성서 해석이 이렇게 다른 거 또 요새말로하면 신학 사상이 모두 달라지는 거 그런데 또 정말 이단사상이라는 게 있지요. 이세벨무리라든지 니콜라 당이라든지 초대 휩쓸고 나왔던 아리안파라든지 모든 이런 거 오늘도 많지 않아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건 실패라고 그건 기독교도 아니지만 어떤지 모두 그런 것들 그런 거 아니라도 단순한 교권싸움이야. 교권싸움이라는 것도 한마디로 하면 우리가 다투는 내용들을 보면 진리를 옹호하는 사람과 진리를 반대하는 비 진리 적인 행위와의 분쟁이야. 그건 있을 수밖에 없다고 바울사도도 인정했어요. 그러면 우리가 기독교 아닌 것과의 다투는 것이라든지 그건 별문제로 하고 그걸 말하는 게 아니니까 순수한 그리스도 안에서 꼭 하나가 되지 않으면 안 될 텐데 못되는걸 보면 어떤 이유로 보던지 사탄의 역사가 있다. 확실히 마귀가 틈타 들어온 거야. 다시 말하면 예수님 앞에서 하나님 앞에서 성령 안에서 십자가 앞에서는 이유가 되지 않는 싸움 도저히 변명할 수 없는 이건 분명히 사탄의 역사다. 그런 싸움은 성경에서는 근본적으로 배격하고 그렇게 해서 갈라지지 마라. 그걸 말하는 거 아닙니까?
그러니까 예수님 중심으로 특별히 십자가 중심으로 순전히 또 그 예수님이 죄인을 위해서 죽으셨다는 그 복음, 복음을 중심으로 또 성령 안에서 그 안에서는 반드시 하나가 되어야겠는데 하나가 되어야겠는데 그 말이지요. 도저히 그 다투는 것을 그건 이해도 되지 않거니와 용서도 할 수 없고 어떻게 그 변명 할 수가 없어 다투는 것이 옳다고 다시 말하면 같은 하나님을 갖고도 제각기 생각을 하게 돼. 신관이 달라요. 요새 좀 어려운 말을 쓰자면 하나님에 대한 것도 여러 가지로 심지어 요새는 하나님이 죽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지 않소? 아주 그 하나님에 대해서 신관이 여러 가지로 달라요. 또 예수님에 대해서도 같은 예수님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로 생각들을 하거든요. 또 성신 받았다는 것도 그러지 않아요? 제가끔 성신 받았다고 그러는데 성신 받은 사람끼리 치고받고 그래 굉장히 싸움을 하거든요. 그건 성신이 다툴 리가 없는데 같은 성신이 다툴 리가 없는데 어째 그럴까? 그 모든 이런 문제들이 많이 있어요. 갈라지는 원인을 보면 무엇 때문에 갈라지는가? 어려운 문제들이 나옵니다. 그래 우리가 싸운다고 덮어놓고 흉볼 수도 없고 또 우리 안에 그런 싸움이 없다고도 단정할 수도 없고 우리가 먼저 찾아봐요. 우리가 하나가 되지 못했다면 무엇 때문에 하나가 되지 못했느냐?
가령 요새 나를 예수님이라고 그러는 사람이 많지 않소? 또 아까도 이야기 했지만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죽으신 것은 완전히 실패라고 그건 기독교가 아니라고 아까도 그랬어요. 우리가 바쁜 시간에 그런 이야기까지 할 필요는 없지만 자기가 예수님이 하던 일 미완성한 일을 한다고 그런 엄청나게 세계적으로 뻗고 있는 교단이 있지 않아? 자기들이 기독교라고 그러고 굉장히 많은 사람이 쏠리고 그런 것이 있지 않아요? 어저께도 크리스챤 신문에 보니까 그런 이야기가 나왔습디다. 요새 목사들이나 뭐한 이들을 미국이나 서양 같은데서 자꾸 청해간데 그러니까 한번 자기돈 안들이고 모두 여행도 하게 되고 외국 구졍도 하게 되니까 호기심으로 한번 가보면 엉뚱한데서 청한 데가 있다는 거야. 그래서 함부로 청한다고 가지 마라. 그런 말을 했습디다. 그런데 다 예수이름으로 예수 이름으로 목사들을 청해 가는데도 마귀의 손이 뻗쳐있다. 그 말이지요. 그런데 사실은 이것이 제가 오늘 문제가 되고 원로들이 하나가 되자 하는 이유가 왜 그렇게 되는가 하니 점점 더 심해지니까 점점 더 분열이 심해지고 아주 싸움도 점점 더 복잡해지고 성스럽지 못한 싸움들이 많이 생기고 이러니까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인데 다 자기들이 옳다고 그러거든. 다 성경 가지고 우리가 옳다고 이렇게 나오거든요. 싸우면서도 옳다고 그러니까 여기 문제가 되는 거야.
그런데 우리가 생각할 문제는, 반대는 이런 운동도 많이 일어나지요. 지금 합동문제 연합문제 일치문제 화해문제 이런 문제가 일어나요. 가령 로마 교황 되시는 분은 저 영국으로 희랍으로 이런 나라로 가서 희랍정교니 영국성공회니 그것도 하나로 만들려고 하고 한국 기독교계에서도 자꾸 계속적으로 자꾸 모임이 일어나 하나 되자. 하나 되자. 또 이렇게 가령 어떤 교단이 크게 감리교가 갈라졌다가 다시 합치는 운동을 맹렬히 해서 다시 합쳐놓지 않았습니까? 또 장로교도 두 쪽 세 쪽이 난걸 다시 합치자고 기도들을 하고 금식 기도를 하고 이런 합치는 운동도 굉장히 일어나요. 사방에, 또 미국 같은데 가면 천주교하고 루터교가 합치자고 그래가지고 굉장히 지도자들이 모여서 아마 의논들을 하고 그러는 모양이거든요. 한편으로 그런 운동도 일어나요. 일어나는데 그런데 그게 지금 우리가 생각 할 적에 이 시간에 생각 하려는 문제로 갑시다. 그게 가능한가? 하기는 해야지요. 그렇게라도 해야지요.
그런데 그게 될까? 이 바울사도가 하신 말씀 가운데 이런 말씀이 하나 나오는데 사람들이 이렇게 모두 갈라져서 서로 다투게 되고 또 모두 그렇게 이방인과 유대인이 갈라지고 인제 그 원수 된 상태인데 사람이 하나님과 화목하지 못하는데 이유가 있지요. 죄이지요. 모두 사람과 사람 사이에 하나가 되지 못하는 이유가 있지요. 신자들 가운데 그걸 한마디로 이렇게 표현했어요. 원수 되었던 요소라는 말로 했다. 원수 되었던 요소, 그걸 예수님이 십자가에 피를 흘리심으로서 제거 하셨어. 제가 지금 분쟁을 여러 가지로 조금 증거 하는 건 다 그 무슨 원수 될 수밖에 없는 갈라질 수밖에 없는 요소가 있다. 그 말이지요. 아까 그 말한 몇 가지 예를 들었는데 그 요소를 한마디로 말하면 죄인데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가 되지 못한다면 하나가 되지 못하는 그 무엇이 그러느냐 그 요소가 무엇이냐? 그 말하자면 죄인데 죄라는 게 있기 때문에 꼭 하나가 될 것이 하나가 못된다고 이렇게 봐야지요. 한마디로 하면 그게 죄에요.
그런데 그것을 없애는 게 예수라고 그것을 위해서 원수 되었던 요소를 제거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오셨다. 이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이 오셔서 하신일은 십자가에 자기 몸을 죽이신 일인데 다시 말하면 육에서 나온 거야. 모두가 죄에서 나온 거야. 그걸 죽이셨어. 그걸 죽이시고 피를 흘리심으로서 화해를 시키셨다고 그걸 말하지 않았어요? 고린도서에 화해에 대한 걸 이야기 하시는 데서 그 이야기가 나왔거든요. 그 화해이치를 우리에게 전하게 하시려고 그랬다고 여기는 좀 봐야겠습니다. 에베소서 2장 13절 이하입니다. 이렇게 여러분이 전에는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이제는 그리스도께서 피를 흘리심으로서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살게 되어 하나님과 더 가까워졌습니다. 그리스도야말로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분은 유대인과 이방인을 갈라놓았던 담을 그분 자신을 희생하심으로서 헐러버리시고 서로 원수가 되었던 그것을 화해시켜 하나로 만드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율법의 조문과 규정을 다 폐지하시고 당신 자신을 희생하여 유대인과 이방인을 하나로 새 민족으로 만드시고 평화를 이룩하셨습니다. 그리고 16절에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서 둘을 한 몸으로 만드셔서 하나님과 화해시키시고 원수 되었던 모든 요소를 제거하셨습니다. 이렇게 나와 있어요.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서 둘을 한 몸으로 만드셔서 하나님과 화해시키시고 원수 되었던 모든 요소를 제거하셨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에 오셔서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있던 여러분에게와 가까이 있던 유대인들에게 평화의 기쁜 소식을 전하게 되었다. 이렇게 말씀을 하고 계시지요.
그런데 그러니까는 그 요소를 없애는 십자가는 어째서 그 십자가가 그 원수 되었던 요소를 제거했느냐? 그걸 먼저 생각해봐야겠어요. 그 십자가는 우리가 잘 알지만 하나님의 사랑이시지요. 그래서 또 그 하나님의 사랑은 절대적으로 무조건적인 사랑이지요. 그러니까 이 분쟁을 없애려면 십자가가 십자가의 정신이 들어가야 하는데 사랑이 근본적으로 들어가기 전에는 이 분쟁 문제가 해결이 되지 않아요. 이거 다른 말로 하면 그래요. 오늘 이유를 무엇이라고 들었던지 기독교가 또 기독교인이 우리 믿는 사람들이 하나가 되지 못하는 건 사랑의 결핍이다. 예수님의 사랑 진정한 그 하나님의 사랑 그 사랑이 없기 때문에 분쟁이 일어난다. 아마 이건 여러분들도 다 알거에요. 우리가 누구하고 다툴 적에 사랑이 없어 다툰다고들 하지 않소? 또 하나는 십자가에는 희생의 정신이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 그 십자가로서 그 요소를 분쟁의 요소를 제거했다. 그 말은 분열의 요소가 제거됐다. 그 말은 반대로 희생정신이 들어가야 화해가 된다. 그 말이 되요. 희생이 없이는 화해가 되지 않는다. 이것도 우리가 알 것입니다. 뭐 이유를 무엇이라고 들던 무조건 서로 희생으로만 하나가되지 하나가 안 될 리가 없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희생의 정신이 없으면 분열이 되고 없으면 분열이 되고 희생의 정신이 있으면 화해가 된다. 그것도 되요. 또 우리가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렇게 화해를 이루신다는 것을 생각 할 때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생각해봐야 되요. 그래야 그 분열의 요소가 없어지고 화해가 될 테니까, 이게 지금 우리가 오늘 이야기하는 문제이니까 그 그리스도 안에는 모든 덕이 구비되어 있다고 그 이야기도 우리가 많이 해왔어요. 가령 겸손이니 온유니 절제니 인내니 관용이니 이해니 친절이니 양선이니 모두 이런 문제가 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아까 그 몇 번 들썩인 거기도 보면 그런 말이 나오지 않아요?
그 에베소 4장에도 주님을 위해서 일하다가 감옥에 갇힌 나는 여러분에게 권고합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불러주셨으니 그 불러주신 목적에 합당하게 살라고. 예수님이 우리를 왜 불러주셨냐? 그 목적은 그러면서 겸손과 온유와 인내를 다하며 서로 사랑을 가지고 서로 너그럽게 대하십시오. 그렇게 말씀을 했거든. 이게 덕 들이야. 이게 있어. 다시 말하면 서로 교만하려고 할 적에 분열이 생기지요. 서로 자기 자랑 그런데 서로 겸손하려고 그러면 하나가 되지요. 서로 낮아지려고 그러면 하나가 안 될 리가 없지 않습니까? 그러면 겸손의 덕이 없기 때문에 분열이 된다. 그건 그리스도 안에 가 있었거든요. 그러니까 그리스도야말로 이 화해의 그 참 그 이치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고 또 그 사명을 우리에게 맡기셨다고 그랬는데 나중에 우리가 고린도서에서 읽어보지만 그렇게 나오셨다고 그랬는데 그리스도 안에는 참 겸손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거거든요. 그래서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우리를 화해시킬 수 있고 또 우리끼리의 화해를 이룩하실 수 있고. 에베소서에 보면 너그럽게 대하십시오. 서로 너그럽게 대하면 화해가 될 거 아니오? 그런데 막 그냥 마음을 좁게 먹고 그저 자기 의만 생각하고 자기 의견만 옳다고 그러고 자기 고집만 세우면 화해 될 거야. 두 사람도 화해가 안 되지 그게 문제 아니오? 그걸 덕이 없다고 여기는 이렇게 지적을 해 놓은 거거든요. 덕이 없어 모두 교계가 이렇게 분열이 생긴다. 우리 믿는 사람들이 이렇게 단체를 구성하고 산다는데 그 원인 가운데 하나는 덕이 없어서 그렇다. 말하자면 그 온유라는 걸 그렇지요? 서로 혈기로 그 싸우고 그러니 하나가 되겠소? 서로 온유하면 화해가 되는 것이지 서로 참으면 되는 것이지 참지 못하면 분열하는 것이고 또 서로 이해하면 화해가 되는 거지. 이해가 없으면 분열이 생기는 거지. 서로 친절히 하면 하나가 되는 것이지, 그래 친절이 없으면 분열이 되는 거고 이렇게 말이요. 모든 덕이 하나만 완전하게 그 안에 있어도 이루어져.
그래 이 말은 이 모든 덕은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예수님을 배우고 예수님을 닮고 그러는 데만 전력을 한다면 모든 생각이 거기 집중을 한다면 반드시 그렇게 되고 또 예수님을 중심으로 저절로 하나가 될 것 아닙니까? 그런데 그게 그 덕에 대한 문제는 어려워요. 어려운 게 이 덕 중에 하나만 없어도 깨져버려요. 만들어 놨던 게 가령 상당히 겸손도 하려고 그러고 온유도 하려고 그러고 참 꽤 했어. 그런데 어쩌다가 말 한마디를 실수를 해서 참지를 못하고 그냥 말 한마디 크게 잘 못했어. 여태 애쓴 게 죄 깨져버리지 않아? 이 만들어 놓은 게 말 한마디 해가지고 다 무너지는 수가 있어요. 거기는 그 덕이 모자랐던 거지. 이렇게 해서 또 말 한마디 물론 뿌리가 깊은 사람들이야. 말 한 두 마디 들었다고 원수가 되든지 갈라지던지 또 오해가 생기겠소? 원체가 겨우 간들간들 이렇게 모두 서로 엉겨서 모여 사는 데는 말 한마디만 뭘 해도 그것가지고 아주 갈라져버리고 싸움이 나고 나가버리고 모두 그렇게 되는 것이 있거든요. 그러니까 이 덕 문제는 우리가 적은 일에서 적은 덕에서부터 큰 덕에 이르기까지 아주 완전해 지는 것만큼씩 화해하는 데는 대단히 중요한 것이 되요. 또 더 인제 우리가 문제를 생각을 하면 하나가 되지 못하는 데는 반드시 순수한 의미에서 진정한 의미에서 성령의 역사가 오는 겁니다. 뭐라고, 뭐라고 변명을 해도 성령의 역사가 있으면 싸움이 없어요. 그리고 하나가 되지 않을 리가 없지요. 성신 받았다고 그러고 싸우는 건 그건 성신이 아니에요. 마귀지, 사귀가 들려가지고 그걸 성신이라고 그러는 거지 성신 받은 사람들 끼리 싸울 리가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성령의 역사가 있어야 화해가 되는 것이고 성령의 역사 없이 암만 우리가 덕을 닦는다고 해도 인간의 무슨 윤리적인 표준을 가지고 사람들이 서로 이렇게 좀 겸손하려고 그러고 껍데기만 맞춰 봐도 그것 가지고는 오래 가지도 못하고 완전하게 하나가 되지도 못해. 반드시 성령의 역사가 있어야 하는 거야. 그래야 덕도 완전히 이루어지는 것이고 또 이걸 더 나아가서 말하면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하나님의 은총을 의지할 적에 하나님의 은총을 의지할 적에 이 일치가 이루어지는 것이고 내 생각이나 내가 애쓰고 노력함으로서 하나가 되어보려고 하는 그것만 가지고는 안할 수 없어요. 또 그렇게 해야 하고 그렇지만 완전한 일치는 되지 않아요. 하나님의 은총을 내가 의지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이렇게 되고 그 말은 그 말은 하나님의 은혜로 되어 진다. 그 말은 믿음으로 할 때 그 말이 되요. 믿음 이라는 건 내 힘으로 하는 게 아니니까 역시 똑같은 말이 되요.
내 힘으로 하는 게 아니고 절대적인 하나님의 힘만 의지하는 것이기 때문에 내가 믿음으로 한다는 말은 나를 부인한다 그 말 아닙니까? 그 말은 우리가 너무 많이 생각했던 문제들이지요. 나를 부인하고 나는 죽고 내가 살아있기 때문에 믿어지지 않는 것이고 내가 살아있기 때문에 성신 못 받는 것이고 내가 살아있기 때문에 은혜를 저버리는 것이고 그런 것이기 때문에 그러기 때문에 그 믿음으로 되어야 한다. 그 말은 나를 부인하는 자리에 들어가야 한다. 그 말이 되거든요. 그래서 그 나라는 거 무엇이든지 나를 중심으로 되어 진 거 아까 그 여러 가지를 들었지만 사사로운 이기심이나 모두 그런 것들이 전부 나에게서 나오는 것들이거든요. 죽지 않은 나에게서 그래서 그것이 완전히 죽어져 버려야 그것이 죽어져 버려야해. 다시 말하면 믿는 자 정말로 순수한 신앙을 가지고 믿는 사람들 그런 사람 그런 사람들이라야 그 일치하는데 성공을 하고 또 일치가 되고 신앙 안에서 일치가 되는 거지,
이걸 거꾸로 말하면 이렇게 됩니다. 믿음이 없기 때문에 분열이 생긴다. 믿어야 일치가 된다. 믿으면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니까 사람의 뜻으로 이렇게 모두 껍데기로 모여서 연합 합시다. 연합 합시다. 이러는 게 아니라 은혜로 그럼 거기 성신의 역사가 계시게 된다. 성신의 역사가 계신 동시에 하나님의 모든 덕을 구비하게 된다. 또 거기는 십자가의 정신 또 사랑이 깃들게 된다. 그래서 그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거예요. 그럼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 볼 때 그러면 다시 거듭 말합니다. 참 일치가 못되는 것은 참 믿음이 없기 때문이고 참 사랑이 없어서이고 십자가의 정신이 없어서이고 옛사람이 살아있어서 그렇기 때문에 옛사람이 살아있어서 그렇다. 그 말은 교만이 그대로 있고 혈기가 있고 사욕이 있고 무지가 있고 모두 이런 거 고집이 그대로 있고 오해가 있고 편견이 있고 시기가 있고 이런 모든 죄악의 씨가 그대로 있어서 그렇게 되는 것이다. 물론 이런 말을 하면 교리나 신조 또 성서관이나 신학을 가지고 꼭 이렇게 싸워야 할 경우가 있지 않느냐? 진리를 옹호하기 위해서 이런 말을 하지만 그건 별문제라고 그랬지요? 그건 특수한 문제이기 때문에 저는 짧은 시간에 그걸 가지고 옳고 그른 걸 분간하려고 그러는 게 아니라 일반적인 분열 상태를 놓고 이야기 하는 것인데 그러나 심지어 그런 것 까지도 그런 것 까지도 예수님 안에서 순수하게 참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서 피를 흘리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 그 예수님 안에서는 훨씬 그 이유가 적어질 것 같아 그러지 않소? 아무런 신학자라도 아무런 훌륭한 교리를 갖은 단체라도 그리스도 안에서는 훨씬 말이 적어지지 않을까? 싸우는 이유가 적어지지 않을까? 또 같은 예수라도 우리가 지금 결론으로 들어가는 겁니다. 같은 예수라도 십자가 안에서 그래 인제 십자가를 부인하든지 십자가의 정신이 없든지 하는 건 기독교도 아니고 그러니까 말 할 것도 없고 같은 기독교 안에서도 같은 기독교 안에서도 십자가 앞에서 생각하는 것과 십자가 없이 생각 하는 건 다릅니다.
그러니까 십자가 앞에서는 이유가 훨씬 적어지지요. 예수님의 죽음 또 십자가나 예수님의 피에 대해서도 주관과 말이 어려워지는데 주관과 객관적인 입장에 따라서 다른 것도 있어요. 다시 말하면 이렇게 예수님의 십자가의 정신을 객관적으로 생각 하는 것과 내가 주관적 입장으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정신을 체험하는 것과는 조금 그 다른 것도 있어요. 그러나 어찌되었든지 십자가 앞에서 생각 하는 거 또 그 자기부인 고난 예수님의 그 자기부인에서부터 들어가서 예수님의 고난에 참여하고 자기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걸 체험하고 그리고 참 성령으로 거듭나고 부활을 체험하고 또 바울사도와 같이 내가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이렇게 살아온다고 그렇게 할 때까지 거기까지 들어갔다. 거기까지 들어가지 않으면 말이에요. 거기가지 들어가지 않으면 진정한 의미에서 통합이니 일치니 하나가된다 하는 말을 할 자격이 없어져요. 실제는 근본문제는 거기서부터 출발해야 하지 않냐? 그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 거예요. 내 자신이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이 정말로 하나가 된다는 말을 할 수 있고 또 그래야 하나가 되는 것이고 또 이 말을 우리가 다른 말로 하자면 내가 먼저 예수님과 하나가 되고 하나님과 하나가 되고 그러려면 내가 성신을 받고 죄를 회개하고 은혜 안에 살고 참 십자가의 정신을 가지고 희생과 봉사의 생활을 하고 완전히 사욕이 다 끊어져 버리고 모든 덕이 내 안에 구비하고 이래서 하나님과 나 예수님과 내가 하나가 되고 출발은 거기서부터 나오는 거야. 그렇게 되기 전에는 하나가 안 된다. 그러면 이 기독교가 하나가 안 된다는 문제가 아니라 내가 먼저 하나가 되는 문제 앞에 서지요. 그러니까 이 말이 왜 여기 와서 또 닿느냐 하면 지금 맹렬하게 아주 굉장하게 일치운동을 합니다. 세계적으로, 그 꼭 해야 한다니까요.
그러나 어디서부터 시작이냐? 그 껍데기부터 갖다 합쳐놓는다고 되는 것이냐? 근본적으로 내가 하나님과 하나가 안 된다는 데서 그 하나가 될 수 있느냐? 그럼 그러니까 인제 이렇게 우리가 생각해 들어갈 때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아까 그 몇 군데 성경을 읽지 않았어요? 하나가 되라. 하나가 되라. 또 예수님께서 하나가 되기를 그렇게 간절히 기도하셨다고, 진정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된다. 그것은 지금 예수님이 요한복음 17장에서 기도한 것도 우리들을 하나가되게 저들을 하나가 되게 해 주시라고 그 이런 뜻일 거야. 이런 뜻이에요. 우리들이 먼저 완전히 그리스도와 내가 하나가 되고 그리스도와 내가 하나가 되는 사람들이 하나가 되고 그걸 요구하시는 기도야. 결국, 그래서 거기 그렇게 되지 않았어요?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처럼 저들도 모두 우리 안에 있어서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예수님과 하나님이 하나가 된 것처럼 저들도 하나가 되게 해달라고 했으니 이것 참 우리가 보통 육신을 갖은 인간으로서 감히 생각할 수 있는 문제입니까? 그러니까 우리가 인제 지금 여기까지 이야기가 온 것은 이것이 목표지요. 기도의 제목을 잡자고 아까 처음에 말했어요. 이것이 우리의 기도의 제목이 되어야 해요. 그러면 내가 먼저 거기 그 기도의 제목을 잡고 그 목표를 가지고 죽어라하고 애쓰는 거예요. 애쓰는 동시에 내가 그렇게 됨으로서 그렇게 되는 사람과 하나가 되는 것인데 이상적으로는, 그래야 내가 저 사람과 하나가 된다면 나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하나 예수님과 하나가 되고 또 저 사람도 예수님과 완전히 하나가 되고 그런 사람끼리 하나가 되어야 정말 하나지요. 그렇지 않아요?
그런 사람 막상 내가 예수님과 완전히 하나가 되었다고 합시다. 그런데 저 사람은 예수님과 하나가 되지 않았으면 하나가 될 수 있겠소? 이치로 봐서는 하나가 안 되지요. 그럼 어떻게 한다는 말이냐? 그럼 이 땅위에 예수님과 완전히 하나가 된 사람이 하나밖에 없다면 그럼 기독교는 영구히 이렇게 쌈들만 하고 갈라지고 쪼개지고 그러고 말게 아니냐? 그럼 일치운동이라는 걸 하지도 말아야지 않냐? 이렇게 되지 않아요? 이야기가 어려워져요. 실제로, 그러나 지금 우리가 내가 먼저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와 하나가 된다는 이 순서를 비켜놓고 껍데기만 암만 해봤자 그게 무슨 소용이 있어요? 여기 예수님의 기도나 사도바울의 일치라는 게 그런 뜻일 겁니까? 껍데기만 갖다 맞춰놓는 하나가되라 그 뜻일 거예요? 그건 아니거든요. 그럼 문제가 커집니다. 그러나 이건 우리가 하기는 해야 하는 거야. 예수님이 원하시는 거고 모든 선지자 사도바울 참 하나님 천상천하에서 모두 원하는 거니까 또 성경의 뜻으로 봐서 반드시 그렇게 되고 말아. 만물을 그리스도 안에서 동일하게 하시려는 것이라. 그게 하나님의 계획이라고 그러는데 반드시 그렇게 되고 마는 거야. 그러니까 인제 우리가 시간이 거반 다 되가니까 이야기를 다 못할 것 같은데요. 내가 먼저 예수님 안에서 하나가되는 일을 한다고 그럽시다. 그러면요. 내가 이루어진 것만큼씩 내 안에서 그 하나님의 계획이 이루어졌어. 성숙한 사람이 되라고 그랬는데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도 사랑도 소망도 제법 내가 어른이 되서 성숙한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어떤 사람이 그럼 그 사람은 하나님하고 하나가 되어가지고 어느 정도 이루어졌는데 그 사람이 된 것 만큼씩 일치운동이 하나님의 일치시키려고 하는 사업이 시작되는 거야. 그렇게 이루어지는 거야. 그러면 그렇게 되지 못하는 사람은 어떻게 되느냐? 그걸 구심점으로 해서 이렇게 노력들을 해. 합쳐서 노력들을 해. 자꾸 그러면 자꾸 분열을 시키는 마귀의 계획을 물리쳐야 되는 거야. 그래서 단체와 단체끼리도 어쨌든지 분쟁이나 분열의 요소를 될 수 있으면 제거하는데 협력들을 해야 해. 이러니까 할 수 없지 않느냐? 우리는 갈라져 살수밖에 없지 않느냐? 이러지 말고 저 사람과 나하고는 근본적으로 입장이 다르니까 그저 나는 나대로 믿고 너는 너대로 믿어라. 이러지 말고 이게 문제야. 그러니까 영구히 마귀만 기쁘게 하는 거야.
그러지 말고 단체도 단체끼리 어떻게 하든지 이 원수 된 이렇게 담이 쌓이고 원수 되는 요소를 제거하려고 노력을 해야 하지 않느냐? 주님이 오실 날이 가깝다는걸 말로만 하지 말고 그전에 그걸 노력을 해. 그래가지고 하나가 되도록 자꾸 노력을 해야 되고 기도하고 애써야하고 또 형제들끼리 신자들끼리도, 신자들끼리도 서로 어찌되었든지 그 원수 되었던 요소를 제거하고 그리고 일치를 시키려고 노력을 해야 돼. 이게 주님이 원하시는 거야. 이렇게 요한복음 17장을 거듭거듭 봐도 이렇게까지 주님은 원하셨는데 왜 우리들은 이렇게 밤낮 쌈들만 하고 모두 이렇게 울타리들을 쌓고 담을 높이 쌓고 왜 이러 고들만 살아야 하느냐? 그런 생각이 자꾸 나요. 그러면 주님께서는 어떻게 하셨냐? 주님은 그 분쟁의 아주 중심으로 뛰어 드셨거든. 그 싸우고 죽이고 물고 뜯고 하는 세상 가운데로 들어오셔서 그 모든 사람에게 크신 사랑을 나타내시면서 자기가 그 모든 사람의 분쟁의 원인을 자기가 다 짊어지시지 않아? 짊어지고 자기가 희생을 하시지 않아? 그 자세가 필요하다 그 말이야.
예수님이 자기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고 피를 흘리심으로써 모든 그 분열과 분쟁의 원인을 아주 뿌리에서부터 파서 헤쳐 버리신 거와 같이 우리들의 생활 태도나 마음자세가 그렇게 되는 것이 필요하지 않느냐 말이야. 그걸 이야기해요. 우리가 성경을 마지막으로 한군데 읽어 보십시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서부터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누구든지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믿으면 새 인간이 됩니다. 낡은 것이 사라지고 새롭게 된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다 하나님께로부터 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를 당신과 화해하게 해 주셨고 이거 참 중심에서 간절히 원하는 마음으로 기도해야겠어요. 어떻든지 내가 부서지고 모든 그 사탄의 역사를 파괴시키기 위해서 말이지요.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를 당신과 화해하게 해 주셨고 사람들을 당신과 화해시키는 임무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우리가 먼저 하나님과 화목하고 그리고 모든 사람을 하나님과 화목 시키게 하는 그 임무, 우리가 그 책임들이 있다 말이지요. 여기 임무라는 데는 무서운 말이 있어요. 예수님이 우리를 화해시키기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피를 흘리신 거와 같이 이 임무를 완성하려면 우리도 나를 못 박고 피를 흘려야 한다 말이에요. 거저 되는 게 아니에요. 임무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곧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죄를 물으시지 않고 하나님이 조건을 따지셨다면 하나님과 화목 시킬 놈이 하나도 없는데 죄를 물으시지 않고 이 말은 우리에게도 적용이 되요. 우리에게도 무엇 때문에 너희들과 화목을 못 한다. 갈라서 살수밖에 없다. 요대로 네 것 파 내 것 파 고집하고 살자. 이런 거 아니다 그 말이에요. 물으시지 않았어. 이랬던지 저랬던지 강도도 절도도 예수님이 로마병정도 바리새교인도 무조건 저들을 용서해 주시라고 한 거와 같이 그 말이지요. 이루어진 사람일수록 이 마음 자세가 필요한 거예요. 저들의 죄를 인간의 죄를 물으시지 않고 그리스도를 통해서 인간과 화해를 하셨습니다. 인간들 하나님을 배역하고 지금도 예수님을 저주하고 있는 조롱하고 있는 그 인간들과 화해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화해의 이치 그 화해의 이치를 지금 이 시간에 생각해 보려고 하는데 제 설명이 이렇게 불완전 합니다. 그 화해의 이치를 전하는 일을 우리에게 맡겨주셨습니다. 왜 우리가 화해를 못하느냐? 하는 그 모든 화해하지 못하는 이유를 제거해 버리고 어떻게 하면 우리가 화해할 수 있느냐? 그걸 이야기 한 거 아니에요? 지금까지 이야기 한 게 어떻게 하면 화해할 수 있느냐? 어떻게 하면 화해하느냐? 또 왜 화해를 해야 되느냐? 어째서 화해하지 않으면 안 되느냐? 그 화해의 이치를 전하는 일을 우리에게 맡겨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자들입니다. 전도한다는 게 뭐 다른 거 아니야. 예수 믿어라. 그러면 전도하는 게 아니야. 그 이치를 우리에게 전하는 우리가 그 사절이야. 하나님과 화목 하는 형제들끼리 서로 사랑하고 하나가 되는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통하여 여러분에게 호소하시는 것입니다. 비장하지 않소? 하나님이 우리들을 이렇게 예수 믿으라고 여기다 갖다 놓은 건 서로 싸우라고 그러는 게 아니고 남 싸우는 거 구경만 하고 앉아있으라고 하는 거 아니고 귀찮다고 어디 골짜기에가 나 혼자만 피해가서 나만 조용하면 된다고 그러고 앉아있으라고 하는 게 아니라 그 말이에요. 우리들에게 그 일을 하라고 화해의 복음을 전하고 증거 하라고 여러분에게 호소하신다고 이 호소한다는 말이 얼마나 강한 말인지 아십니까? 아주 그냥 애절하게 부르짖고 계시다. 그 말이야. 여러분에게 호소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대신해서 여러분에게 간청합니다. 사도바울이 지금 바울사도가 더군다나 이 고린도서는 고린도교회가 아주 다투니까 바울 파다. 아볼로 파다. 요새도 보면 어찌 파가 많은가? 나는 칼빈의 제자다. 나는 어거스틴의 제자다. 누구의 제자다. 그러고들 아주 예수님 비켜놓고 그러니까 이거 하시는 거예요. 그리스도를 대신해서 여러분에게 간청합니다. 뭐를 하나님과 화해하십시오. 그런 소리들 말고 교파니 뭐니 네가 옳으니 내가 옳으니 그 가장 지저분한 문제들 가지고 그러지들 말고 하나님과 화해하십시오. 그렇게 하면 무슨 이유가 있겠느냐? 하나님과 화해하자. 다 그래서 인제 요새 원로님들이 한국 기독교 700만은 하나가 되어야 한다. 이거 마귀가 제일 무서워하는 거야.
공산주의자도 그걸 제일 무서워한답디다. 한국 기독교가 한 덩어리가 되면 참 무서운 거다. 그렇게 하나가 되는 거 하나가 된다. 우리를 위해서 하나님께서 죄를 모르시는 그리스도를 속죄 제물로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 놓이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야 내가 하나님 앞에 올바르게 선다. 이 말이에요. 또 한국 기독교가 하나님 앞에서 올바르게 되고 오늘 전 세계의 10억이나 되는 기독교인도 하나가 되어서 화목을 하고 그래야 이 세계의 전쟁을 막을 수 있고 세계의 평화를 이룩할 수 있지 않겠냐? 그 말이지요. 물론 성경에 보면 말세에 이런 아마겟돈 전쟁이 일어난다. 이런 분쟁이 있을 거다. 거짓 그리스도가 일어난다 하는 말이 너무 많지만 그걸 변명으로 그걸 이유로 해서 싸우고 당연히 싸우고 앉아있는 태도가 그게 말이 되요? 하나님의 자녀들이 그건 우리가 간섭할 문제가 아닌데 우리는 화해하는 임무를 맡았으니 우리는 화해만 하면 되는 거 아니야? 그러라고 우리를 보내셨고 우리를 구속하셨으니 우리는 화해임무를 다해야해. 먼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어야 한다. 하나가 되어야 한다. 거기는 조건이 없다. 그러니까 이것이 우리 생애 중심에서 우러나오는 호소인데 우리의 기도의 제목이 되고 한절 더 읽어 드리지요. 고린도 전서 12장 25절에 이것은 몸 안에 분열이 생기지 않고 모든 지체가 서로 도와 나갈 수 있도록 하시려는 것입니다. 한 지체가 고통을 당할 때 다른 모든 지체도 함께 아파하지 않겠습니까? 한 지체가 고통을 당할 때 다른 모든 지체도 아파하지 않겠습니까? 또 한 지체가 영광스럽게 되면 다른 모든 지체도 함께 기뻐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은 다 함께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고 있으며 한사람, 한사람은 그 지체가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이런 성경을 여러 군데 찾아보고 싶은데 다음에 기회가 있으면 더 생각해 보십시다. 찬송 부르십시다. 439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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