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가 퍽 따뜻해 졌다. 제주도는 보리와 마늘 양파 수확이 모두 끝났다. 진도는 에제 보리 수확이 시작되고 마늘 양파는 하지 무렵에 수확한다.
토란은 무두 올라와 잘 자라고 단호박도 순치기에 들어갔다. 울금은 아직도 올라오지 않는다.
이 현필 스승을 기리며
1981.04.16. 김준호 선생
이사야 57장 15절 말씀 제가 봉독하겠습니다. 지존무상하며 영원히 거하며 거룩하다 이름 하는 자가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거하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자와 함께 거하나니 이는 겸손한자의 영을 소생케 하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생케 하려함이라. 그 말씀 따라 똑같은 뜻으로 시편 51편 17절 말씀. 앞으로 조금씩 당겨주시랍니다. 앞으로 당겨주십시오. 예, 다시 말씀 드립니다. 시편 51편 17절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 하시리이다. 연속해서 봅니다. 이사야 57장 15절 말씀. 지존무상하며 영원히 거하며 거룩하다 이름 하는 자가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거하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자와 함께 거하나니 이는 겸손한자의 영을 소생케 하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생케 하려 함이라.
제가 이 시간에는 이 선생님 말씀을 혹은 같이 읽어보고 또 그분이 걸어가신 길을 한 토막 상고해 보겠습니다. 아울러서 그분이 바로 가셨는지 여러 한 분, 한 분 성인말씀을 더 인용하면서 성인 프란치스코의 경우 또 성 소화 테레사의 경우 그분들의 자서전이랄지 말씀에서 상고해 보겠습니다. 제가 오늘 이 시간에 꼭 이 말씀은 해도 그만, 다 되는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이 현필 선생님을 오해했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우리 선생님이 예수님을 어떻게 믿으셨는가? 어떻게 해서 예수님의 참된 제자가 되었던가하는 면목을 다른 각도에서 다시 이 선생님을 이제 배워야겠다. 그런 말씀을 드리고 싶은 것입니다. 한말로 말해서 우리가 이 선생님 알기를 정절을 잘 지킨 스승이었다. 그런 표본을 보고 따라왔습니다. 그러나 따라온 사람들의 마음에 평화가 없어요. 또 예수님을 아직 만난사람이 없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오해하지 않았느냐? 스승이 만난 예수님을 왜 우리는 못 만날까? 이것은 우리가 착각을 일으키고 있다. 그런 점에서 어떠한 핵을 바꾸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이 말씀을 안 해도 좋고 이 말씀 할라고 하는 것은 이현필 선생님은 참회하는 분이었다. 정절을 지키고 구원받은 분이 아니었고, 회개하시고 구원받은 선생이었다. 그 점이 하늘과 땅같이 그 핵이 바꿔지는 것입니다.
우리 이 선생님이 죄인이었고 죄를 회개하시고 구원받으시고 그 은총에 감격하여 임종할 때에도 기뻐서 감격하고 돌아가셨습니다. 그러신 선생님을 우리가 몰라보고 자꾸 다른 선생님으로 오해했기 때문에 우리에게 예수그리스도의 성령이 안 오신다는 그런 진단을 하는 것입니다. 다시 선생님을 알아보고 선생님이 받으신 성령을 받으려면 우리도 회개를 하면 성령을 받겠다. 그런 희망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 한말에 제가 우리를 지도하던 스승은 죄인으로서 회개하던 발자취, 그분이 죄인이었기 때문에 통회하던 발자취, 그걸 다른 각도에서 생각해봅니다. 한 일례로 엄 목사님께서 써주신 전기에 그 임종하신 장면이지요. 사람이 죽을 때에는 다 슬프거늘 그분은 기쁨이 충만해서 ‘기쁘다, 기쁘다. 오, 기쁘다. 나는 이 기쁨을 못 참겠네, 못 참겠네.’ 그리고 숨이 막히면서도 ‘오, 기쁘다’ 그 해설을 목사님 만날 즈음에 십년 쯤 전에 우리가 정절을 지켰기 때문에 자기가 기뻐서 죽었다. 그렇게 우리가 말했으므로 그 각도에서 전부 전기를 쓰셨습니다. 그러면 오늘 다시 선생님을 다시 소개하고 다시 각도를 달리해서 선생님을 보고 싶은 것은 그 분이 기쁘다는 노래는 은총을 강조했다. 그 점입니다. 그렇게 바야흐로 눈이 떠지면서 저의 소망이 생기고 여러분도 소망이 생긴 것이다. 그런 거예요. 그런 과연 은총의 기쁜 소식을 다시 들어야 된다고 하는 그런 말씀입니다. 설명을 잘해놓으면 모두 좋아요. 제가 아무리 설명을 잘못해도 그런 심정으로 제가 이 시간을 설명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의미에서 근본적으로 계획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한 사람 한사람 신앙이 핵이 달라져요. 시각이 달라집니다. 그렇게 되면 맞습니다. 그러면 그분이 그 참회하시고 회개하시던 때의 이야기지요. 한 대목 여러분들이 잘 아시는 대목을 똑같은 이야기지만 그 뜻을 달리하는 것입니다. 달리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서리내서 회개하실 때 서리내산에서 그분은 금식이 아니라 밥을 못 먹었지요. 죄인이니까, 가슴이 터질듯이 괴롭고 아프시고 통곡하시고 아무리 밥을 먹을 레야 밥이 안 넘어가고 왜 그랬냐? 자기의 스승 이세종 선생의 교훈을 받을 때 깨끗하게 살아라. 그런 교훈을 받은 수제자로서 시험이 들었던지 자기가 궁지에 몰렸던지 자기가 결혼을 하셨거든요. 결혼할 때는 그것이 하나님 뜻인 줄 알고 결혼했지만 부인이 임신을 했는데 아이를 못 낳고 사경에 이르렀을 때 배는 불러 아이는 못 낳고 이제 죽게 되었을 때 병원에 가서 이제 수술을 하게 되는데 제가 사모님 말씀 들었어요. 그 아버지 되신 이 선생 아버지 되시는 이는 한약으로 해야 한다. 수술하지 마라. 그렇게 해서, 아버지 말씀을 지키기 위해서 수술이 늦어져 버렸어요. 다시 말하면 자궁외임신이라고 그래요. 여자가 아이를 못 낳고 다 죽게 되서 이제는 죽게 되니까 아버지가 허락했다는 거예요. 이왕 죽을 바에는 병원에 데리고 가라.
그래 인제 다 죽은 시체를 병원에다 눕혀놓고 이현필 선생님이 자기의 스승 이세종선생의 말씀에 순결하게 살아라. 했는데 결혼한 다음에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고 생각했는데 자기 아내가 아이를 배가지고 아이를 못 낳고 죽어갈 때 아마 사모님말씀 들어보면 그래요. 생명이 얻은 것이지, 그때 죽었답니다. 그래서인데 산다는 것은 기적이고 한 달인지 보름인지 철야를 하시더라. 그래요. 병원에 오셔서요. 곧 사람이 죽어가니까 하루 이틀 사흘 닷새 엿새 철야를 하시면서 울어쌌더라 그래요. 그러니 사랑하는 아내가 아이를 못 낳고 자궁이 썩어가고 애기가 썩어가고 수술을 하고 죽어 가는데 나는 우리 선생님 말을 못 지키고 이렇게 파계한자로서 내 아내가 죽어가는구나. 나는 어찌 할고? 거기서 놀래가지고 어찌 통회를 안 했겠습니까? 어찌 그분이 놀래지 않았겠어요? 그 뼈아픈 그 가슴 절절이 그 뼈가 빠개지는 고통 말씀입니다. 그러니 거기서 하나님과 무슨 소원을 했겠습니까? 내 아내가 다시 살아나기만 한다면 다시는 손을 안대겠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뜯어봐야겠어요. 죄인이 되어가지고 하늘도 부끄럽고 땅도 부끄럽고 선생님도 부끄럽고 친구도 부끄럽고 화학산이나 서리내산에서 숨어가지고 아무리 통곡해도 죄가 없어지지 않지요.
그러기 때문에 자기 죄를 용서해주실 예수님을 만났지요. 그래서 예수님이 용서하셨다는 그 은총을 받은 후에 너무나 그 기뻐서 그 죄 사함이 너무나 황홀해서 너무나 감격해서 내가 이렇게 당한 인생고민을 어린 소년소녀들에게 가르쳐준다면 나와 같이는 안 될 것이다. 그런 필연적인 성소를 받은 것이 사실입니다. 나같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어린 소년소녀를 뽑아가지고 가르쳐줘야겠다. 그렇게 해서 소녀10명 소년 한 10명 뽑아가지고 너희들만은 나같이 되지 마라. 나같이 되지 말라. 그렇게 교육한 것이 이 동광원이 된 것이 아니냐? 그렇게 추리를 해본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선생님을 만났을 때에는 깨끗이 살 때 만나버렸기 때문에 자기가 죄를 짓고 통회하고 참회하던 것 우리가 못 봤어요. 그걸 딱 그것은 본받지 않고 회개를 한 다음에 생활만 본받았기 때문에 우리들이 너무 막연하게 선생님을 오해했다. 그 점입니다. 순서를 거꾸로 잘 못 짚어가지고 회개를 안배우고 은총에 감격하고 기쁘게 산 것만 배워가지고 억지로 은총을 받아 살라니까 안 된다. 그거에요. 그래서 회개는 하나님이 시켜주신다. 하십니다마는 어제 밤에 제가 말씀 듣고 이 말씀을 할 필요를 느꼈습니다. 엄 목사님이 전기까지 쓰시고 십년을 동광원을 배웠지만 이 모양이다. 아직 성령을 못 받는다. 그런데 결론은 나는 속았다. 그런 결론은 왜 나왔냐? 십년 전에 우리가 이 선생님을 그는 통회하는 죄인이었소. 이렇게 가르쳐드렸더라면 지금쯤은 목사님이 통회하시고 성인이 되었을 것 아니냐? 처음부터 구도자에게 그릇된 길을 우리가 가르쳐 주었다. 우리가 동시에 잘못 그릇된 길을 걸어온 것이다. 이제부터 참회를 한다면 희망이 있다. 그런 아주 희망을 품고 이 시간에 나왔습니다. 이제라도 늦지 않으니까 이 선생님을 이왕 배울 바에는 자기가 성소를 받은 사람으로서는 결혼을 하면 무슨 죄가 되냐? 하면 하나님을 배반한 죄가 됩니다. 독성죄를 서원한 사람이 결혼하면 독성죄를 범해요. 그래 아무 체제도 없고 그런 교회도 없는 사람들이지만 진실로 그 가슴은 보통 사람이 진 죄가 아닙니다. 독성죄를 지었다는 것은 얼마나 무서운 죕니까? 하나님을 모독한 죄, 그 영혼이 얼마나 피나는 투쟁과 결사적인 통회를 한 흔적이 많아요. 자 그러면 그분이 통회하던 때의 이야기를 한두 가지 설명해볼까 싶어요.
지금 살아계신 곡성계신 김광석 장로님이 들려준 말씀입니다. 그분도 참 죄인으로서 참회의 길을 떠났을 때 자기 문전옥답이 있고 모를 심을 때도 너무 마음이 벅차고 터질 것 같이 아프면 처자를 버리고 농사를 집어 던져버리고 지리산 속에 숨어가지고 울고 또 울었답니다. 그게 통회의 불이지요. 회개의 불이지요. 사랑하는 처자를 내버리고 누가 가고 싶었겠어요? 마음이 괴로우니까 그랬지요. 그러니까 이 선생님도 회개하는 사람으로서 회개하는 친구가 있던 곳이 얼마나 되느냐고 어제 물어봤어요. 몇 리나 떨어져있냐? 그러니까 서리내에서 오감산이 사십리는 떨어졌다. 그러시더만요. 오십 리란 말이 있지만, 사십 리가 정확하겠다. 4x4=16km. 그 겨울에 눈이 많이 와서 무릎이 빠진 겨울이었답니다. 여기아마 어머니들 와계실거에요. 선생님이 아무것도 안 잡수시니까 쑥떡을 해다 드리면 잡수시려나 생각해가지고 어느 교인들이 쑥떡을 해가지고 음력설이나 될라는지 알 수 없어요. 그걸 갖다가 식구대로 나누니 한 사람 앞에 세 개씩 똑같이 분배하신 것 같아요. 선생님 쑥떡이지만 잡수세요. 갖다드리니까 서리내산에서 혼자 통회하시고 자복하시던 분이 자기와 똑같은 처지에 있는 사십 리밖에 김광석 장로님을 생각했던지 불끈 일어나서 그걸 가지고 사십 리 길을 나설 때 초저녁 사십 리 길을 눈길을 가다보니까 새벽인지 장장 사십 리길을 길도 없는 산 능선을 따라가지고 사십 리를 갔다는 것은 살아계신 김 장로님께 물어보시면 아십니다. 그것은 발자국마다 눈물이요. 통회요. 항아리입니다. 사람이 잘못했다고 통회 자복할 때 기쁨이 충만한 것입니다. 그래서 은총의 감격 없이는 어떻게 사십 리길을 친구를 찾아보자고 갈 수 있냐 그겁니다. 선을 하자고 친구를 사랑하는 정신으로는 못 갈 줄 압니다. 가슴에 벅찬 그 은총의 감격 죄 사함을 받았다는 그 기쁜 마음 내 친구가 회개하고 있다. 나는 그 친구를 찾아봐야겠다. 나 어찌 이 쑥떡을 나 혼자 먹으랴. 그분께 갖다드려야겠다는 그 불타는 정열, 그 은총이 아니고는 불가능하다. 그 말씀입니다. 지금도 살아계신다 그래요. 한두 명인지, 세 명인지 젊은 자매들이 선생님이 따라오면 꾸지람할까봐 몰래 뒤 쫒아갔다고 그러니까요.
그런데 그 전전기대를 들어보면 자꾸 그 눈이 신속에 들어가면 걸어갈 수 없으니까 쪼끔 가시다가 눈 속에서 신을 벗으시더라 그래요. 그래야 가기가 쉬우니까 맨발벗고 눈길 누가 걸어보셨어요? 얼마나 발이 아리고 쓰리고 아픕니까? 한 걸음 한 걸음 사십 리길을 걸어가던 그 광경이 눈에 보여요. 그것을 그 피 흘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나를 위해 돌아가신 예수님 감사합니다. 그 사랑의 감격, 죄 사함의 감격, 한 발자국 한 발자국 그거는 피가 뭍은 발자국 같아요. 사랑과 감사와 감격과 죄 사함과 평안과 기쁨, 그 기쁨을 그 친구한테 나눠주려고 그렇게 가는 길이 아니었던가? 그렇지 않고는 도저히 갈 길이 못된다. 그 말씀이에요. 구원의 감격이 아니고 우리가 말하는 선행 때문에는 갈수가 없습니다. 발이 얼어붙어요. 피가 얼어붇습니다. 그러니까 거기를 갔을 때는 새벽인지, 벌써 그 김 장로님은 새벽에 깨어 있는데 새벽마다 그 젊은 나이에 삼십대 두 분 다 삼십대에요. 젊은 청춘에 깊은 산중에 있는 분들인데 아무리 엄동설한이라도 꼭 목욕재개해요. 찬물로 얼음물을 깨고 하세요. 김 장로님이 새벽에 목욕을 하려고 얼음을 깨려고 할 무렵 어디선지 모르게 그 찬송소리가 산꼭대기서 들렸을 때는 그야 참말로 천산 줄 알았다고 합니다. 이렇게 적설이 만곤곤 한데 사람이 올 수 없다. 이건 천사다. 퍽퍽 울었다 그래요. 감격해서, 이 천사가 나 같은 죄인을 찾아오시다니 아 천사가 나 같은 죄인을 위해서 노래를 부르시다니 감격하셨다. 그래요. 초막에는 죄인의 막이니까 눈이 와도 눈이 새들어와 눈이 쌓이더랍니다. 먹을 것은 그 호밀 무 토란을 한꺼번에 찧어가지고 지붕위에 널어놓았는데 얼었는데 언 것을 한바가지 물에 풀면 그 뜬 물이 되고 그것을 마시고 계셨어요. 거기 새벽에 찬송소리가 났을 때 문득 이 선생님이 나타났는데 천사는 아니었다. 그 점이에요.
그래서 감격스러워서 아 선생님 이건 웬일입니까? 그러니까 발이 뻣뻣해 가지고 퍽 쓰러지면서 아 뜨건 물 뜨건 물 그러시더라고, 사람이 얼어 죽어 가는데 뜨건 물 마셔야 되지 않겠어요? 그래서 그 얼어붙은 별미지요. 그걸 한바가지 꺼내가지고 드리니까 마시시면서 퍽퍽 우시면서 감격하시더라. 그래요. 너무 감사해서, 그러면서, 그때는 공이지요. 김 공, 내가 쑥떡을 얻었는데 갖다드리려고 왔습니다. 눈물 없는 찬양이고 통곡이지요. 찬송이고, 두 분이 쑥떡 세 개를 갖다 친구를 줄 량으로 사십 리 얼음길을 맨발로 찾아왔다. 그 다리는 뻣뻣해가지고 죽어가고 있다. 그 시체같이 된 사람을 보듬고 그걸 먹을 수가 있겠습니까? 살이요, 피지. 그래 친구사이가 그렇게 밀접한 관계로서 친구를 얻었답니다. 그래서 그 지금은 김 장로님이지만 그 젊은 삼십대 청년이지만, 다시는 세속을 돌아볼 수 없게 되었답니다. 그 친구 사랑에 감격해서 피차간 참여하는 동기지요. 피차간 죄인으로서의 회개하는 정으로 만난 친구들이에요. 이건 정절을 지키는 분들이 아닙니다. 정절을 지키는 친구였다면 어떻게 됩니까? 사사건건 정죄요. 판단이요. 경계하고 의심하고 그럽니다. 불신하고 그건 법이니까요. 그렇게 두 분이 지낸 일을 이왕에는 두 분이 다 정절을 지킨 사람들이 만났으니까 동지애로 그랬다. 그렇게만 풀었고 그렇게만 전했기 때문에 그 전기를 쓰신 분이 그런 식으로만 전부 써놓았거든. 그래 그 책을 보면 누가 따라갈 사람이 없어요. 무서운 법보다 무서워 신기하기는 하지만 소설이나 되는가보다. 그 따라갈 수 없다. 우리와는 관계없는 소린가보다. 이렇게 되어버려요. 전해지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렇게 하실 수 있겠는가 모르지만, 만일 엄 목사님이 성신을 받으시고요. 오늘부터 통회하시고 죄인이 되어가지고 회개하신다면 이현필 선생의 전기는 다시 나오리라고 생각합니다. 누가 보던지 감격하고 처녀도 과부도 가정주부도 창녀도 감격하고 그냥 위로가 되고 평안해서 기쁨이 충만해질 수 있는 각도에서 성총에 의지한 이 선생, 은총에 가득한 이 선생, 죄 사함의 기쁨의 황홀한 이 선생님을 다시 기리시고 세상을 떠날 것 같아요.
만일 목사님이 그걸 못쓰고 세상 떠난다면 다른 사람이 그 작업을 하지 않고는 예수님의 제자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상한 사람이 되어버렸어요. 그 전기를 보면, 또 우리가 그렇게 소개했던 것은 잘못이고요. 그렇기 때문에 나무를 보면 실과를 알고 실과를 보면 나무를 알지 않아요? 온 식구가 십년을 찾아오시는데 기와집만 짓고 빌딩 이렇게 집만 좋게 하고 피아노 갖다놓고 전혀 평화가 없답니다. 와서 보니까 이것은 잘못 된길을 걸어온 게 사실입니다. 이제라도 희망 있는 것은 회개입니다. 다시 길을 다시 잡아가지고 통회하시던 회개하시던 이 선생님을 본받고 우리고 회개하고 예수님의 은총을 받아들일 때는 이 선생마냥 친구를 찾아갈 때도 생명을 내놓고 생명을 줘도 아깝지 않을만한 그런 그 자기 것이 아닌 예수님의 사랑으로 형제를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을 갖는 것입니다. 이번에 그렇게 권면을 들었습니다. 어느 목사님이 말씀해 주셨어요. 이 예수교는 한마디로 말해서 두 마디로 말할 수 있다. 그것은 은총과 감사다. 은총은 삼위일체이신 하나님 예수님 성신께서 사람에게 베푸신 것이고 감사는 구원받은 영혼들이 일평생 감사하며 노래 부르는 것이다. 그러니까 신앙은 다른 것 아니다. 구원받은 영혼들이 죽도록 감사하며 노래하는 것이다. 만일 그것이 아닌 신자라면 예수의 제자가 아니다. 그런 말씀 해주셨어요.
처음으로 그 말씀이 귀에 들어와요. 아 역시 그거다. 구원은 예수님의 은총이고 은총을 받은 우리는 감사, 감사 찬송, 감사 찬송, 감사 그것뿐이지 더 다른 것이 있다면 그것은 헤매는 것이다. 그렇게 받아들여졌습니다. 또 이 선생님이 어린 제자들을 어린 애기들이니까, 갈보리 산이라는 곳에 갈보리 어머니라는 분이 계시고 모두 별명이지요. 갈보리 어머니의 딸 조카 동생 그런 분들이 와 계시고 어린 소년 소녀들을 데려다 놓으시고 같이 있지 않으시고 물어보니까 3키로 떨어졌다. 그럽디다. 서리내 산에서 밤새도록 기도하시고 눈물 흘리시고 통회하시고 참회하시고 새 힘을 얻으시면 반듯이 새벽에 내려와 가지고 아이들에게 예배를 인도하시는데 어린것들이 밤에 늦게 잤던지 종도 없고 시계도 없는 그런 깊은 산속이니까 선생님 오신지 모르고 자고 있으면 노크를 하지 않고 10분 20분 30분 40분 벌벌 떨고 항상 굶고 계시니까 몸은 파리하시고 엄동설한에 눈길을 꼭 올 때마다 (끊김)
찾아왔지만 어린것들이 공부하다 늦잠 잤으니까 자고 있으면 차마 문을 못 여시고 1분 2분 3분 10분 20분 30분 덜덜덜 떨고 서계시지, ‘나 왔소.’ 그렇게 안 하시더라 그래요. 그러면 그 발걸음이 어디서 그렇게 나오신 것인가? 그것은 예수와 흡사한 사랑이에요. 몰아의 사랑, 무아의 사랑아라고, 이 선생님 이야기를 듣고 어느 수녀님이 떠나시면서 그랬어요. 아 그분은 무아의 사랑을 하신 선생님 이셨다. 그걸 제가 처음으로 듣는 말이였는데 아 그분은 무아의 사랑을 하시는 분이셨다. 그런 말 들은 다음에 아 그분이 무아의 사랑을 하신 분이었나 보다. 그렇게 이해를 하고 있어요. 뭔 설교를 많이 해서도 아니고 성경을 잘 가르치신 것도 아니고 발자국마다 피가 묻고 눈물이 묻고 그 감격이에요. 그러니 어린것들이 늦게 자서 선생님이 벌벌 떨고 있으면 항상 미안해요. 미안하고 부끄러워서 쩔쩔매고 선생님이라도 불러보지도 못하고 항상, 부끄러워서 고개를 숙이고 울고, 너무 감격해서 너무 감사해서 그 사랑이 너무나 피가 맺혀서요. 그렇게 어린 애기들을 키우셨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정절을 지키기 때문에 그런 그렇게 해갖고는 도저히 그 능력이 나오지 않아요. 밤 새 우시고 자기아내를 애기 배게 하시고 아이를 못 낳고 개복수술을 하게하시고 아내가 다 죽어가는 사경을 헤매며 하루 이틀 빌고, 빌고 또 빌고 한번만 용서해 주세요. 내 아내를 살려주세요. 다시는 내가 이런 죄를 범치 않겠어요. 그리고 그 발자국마다 눈물 흘리신 그 초성은혜 통회의 은혜, 자기의 범죄 자기의 뼈아픈 과거 자기의 죄상 나는 이렇게 되었지만 너희들은 이렇게 살지 마라라. 그걸 가르쳐 주고 죽으려고 했지요. 끝까지 그러나 사람, 사람이 원죄가 있기 때문에 사람, 사람이 자기도 한번 죄를 범하고 자기도 다시 회개한다는 이 참 슬픈 운명이에요. 선생님이 그렇게 가르쳐 주셨지만 그 말 알아들을 수가 없어요. 자기가 죄를 범하고 회개하고 통회를 안 해봤기 때문에 선생님이 괜히 이러신다. 그 뜻을 알 수 없으니까, 그러니 자기도 헤매며 결혼하며 아이를 낳고 죄를 지어보고 이제는 회개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이 모임은 특별히 아시는 분은 아십니다. 동광원에 계시다가 결혼하신 분들이 너무나 서울에서 먼 거리에서 이 고향이 그리워서 우신단 말 들으시고 선생님 계실 때에요. 흩어진 형제들을 찾기 위해서 한 번 더 모여주자. 결혼한 분들 오라고해서 위로를 해주자. 그래 인제 본원에서 모이려고 했어요.
그런데 우리가 어찌 죄인으로서 본원에 가냐? 우리는 못가겠으니 곡성 산중에 모이게 해달라고 그래서 제일 처음에 곡성 산중에서 모이게 되었습니다. 그때 한 30명이 모였어요. 이 선생님이 거기 사람들에게 오셨는데 아마 10년 30년 만에 처음 오는 폭우가 내렸습니다. 그래서 강 건너에서 어느 주막집에서 물이 빠지기를 기다리시고 거기서 주무시고 그때 같이 동행했던 자매님 살아계십니다. 강 건너 사랑하는 제자들이 초야에 묻혔다 다시 일어났다는 이야기를 듣고 멀리서 바라보고 눈물을 흘리세요. 그럼 가보지도 못하시고 돌아오셨어요. 길이 막혔으니까요. 차츰, 차츰 나중에는 그럴 것 있냐? 그냥 본원에서 모이자. 찾아가자. 오지를 않아요. 미안하다고 부끄럽다고 황송하다고 그러니까 여름집회는 이것이 동기는 결혼하신 형제자매들을 오시라 해서 예수님 말씀으로 위로하고 희망, 누구든지 회개하면 구원을 받는다. 우리는 똑같이 죄인이다. 다 같이 회개하자. 그리고 우리는 하늘나라 가자. 그렇게 위로하는 모임이었어요. 그러니까 이 특별히 여름모임은 결혼하시고 흩어진 분들이 찾아오셔서 하나님 말씀으로 서로 말씀을 듣고 말씀을 읽고 갈리자는 그런 처음 그 운동의 연장이라고 그런답니다. 그렇게 기도해서 그런지 오늘도 여러분이 찾아오지 않았습니까? 십년 전만해도 여기가 텅텅 비어요. 누가 찾아오질 않아서요. 이 선생님을 오해한 거지요. 우리 이 선생님이 예수님의 제자인데도 예수님의 제자인 것을 몰라봤어요. 예수님은 죄인을 부르러 오신 선생님이신데 그런 것을 우리가 이제는 다시 눈을 뜨고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픈 것입니다. 그렇게 상고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낱낱이 이 선생님이 걸어가신 길이 통회하는 죄인의 발걸음이요. 은총을 받고 감격해서 찬송과 감사하는 그런 발걸음 이었다. 그 점입니다. 그런 뜻으로 임종할 때도 은총의 그 너무나 그 사랑에 감격해서 기쁘다고 소리 지르고 죽으셨는데도 그걸 우리가 속도 모르고 저분이 이제는 아 정절을 지키고 죽으니까 이렇게 하나보다. 그렇게만 잘못 짚었으니까 이 선생님을 배우러 오신 목사님에게도 그렇게만 가르쳐 드렸기 때문에 목사님이 이렇게 헤매지 않습니까? 회개를 못하시고 그 회개를 본받지 못해요. 이제라도 소망이 있다 이겁니다.
이제라도 예수님의 성령을 받는다면 예수님이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이제라도 회개하면 되지 않겠어요? 그럼 이렇게 회개하시러 목사님이 오신다. 그렇게 보고할지 몰라요. 근년 나는 속았다. 라는 결론을 내렸지만 나는 죄인입니다. 내 죄를 용서하소서. 감사합니다. 찬송 부릅시다. 내가 세상을 속였습니다. 나는 죄인이었습니다. 나는 목사로서 모든 인류를 속여먹던 죄인이었습니다. 저를 용서해 주세요. 나는 이제 이현필 선생님을 다시 만났습니다. 그렇게 기쁨이 충만해가지고 펄 펄 펄 뛰는 것 같아요. 감사나 찬송은 은총입니다. 죄인 가슴에서 나올 이치는 없지 않습니까? 타력, 하나님의 능력 예수님의 성령을 받기 전에는 감사는 없어요. 그런 뜻으로 우리가 이 선생님을 이제 선생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많이 모였기 때문에 이 본원에 있는 사람들이 그렇게 회개하는 이 선생님을 본받기만 한다면 우리에게도 다시 희망이 있고 회개하기 시작하면 피아노도 던져버릴 것 아니에요? 저 쓰레기통에다 누가 주워가라고 이런 집도 다 남 줘버리고 다 망하고 나갈 것 아니에요? 회개하면 다시 찾아들어갈 수도 있고 회개하신 선생님을 본받게 되니까요. 그런 희망을 갖는 것입니다. 너무 제가 설명을 많이 해버리고 시간이 가 죄송합니다. 선생님이 직접 항복해서 죄를 자복하시던 그 글을 하나 얻었어요. 등하불명이라고 이 원에 살고 선생님의 말씀을 저는 한 번도 읽어보지도 않고 듣지도 보지도 않고 무관심했어요. 이번에 처음 올 참 우연한 기적 같습니다. 누가 노트를 내버렸는데 주워봤어요. 휴지인데 근데 이 선생님의 자복서다. 그렇게 써놓았어요. 하도 신기해 읽어보니까 분명 이선생의 글이거든요. 읽었어요. 들어보세요. 아버지 진정 자복하옵니다. 이렇게 서론을 말씀하신 이선생의 자복서인데 아버지 진정 자복하옵나이다. 이 말로 한 것 같지 않아요. 피와 눈물이지요. 참인 줄 알면서 거짓을 행하였나이다. 이건 돌아가시기 전 그해에요. 자기가 정절을 지키면 참말로 예수전한 줄 알고 잘못 가르쳤다는 겁니다. 자기 제자가 한 사람도 선생님 말 듣지를 않아요. 개를 잡아다 놓은 것 같이 다 뿔뿔이 다 뛰어나가. 내가 예수님의 은총을 전하지 않고 잘못 전 했구나. 아 내가 잘못했습니다. 저는 죄인입니다. 이 자복서입니다. 아마 우리 엄 목사님도 이렇게 자복하실 수 있다면 아마 성인이 될 것 같아요.
참인 줄 알아서 거짓을 가르쳤나이다. 아버지 뜻 모르고 제 뜻대로 한 무익한 아들이었나이다. 욕심 아닌 줄 알아서 물질을 도모했나이다. 이것이 이 선생님이 회개하고 간 흔적입니다. 이 선생이 이것을 아니라고 그랬거든요. 나는 욕심 아니라고 그랬다는 겁니다. 무덤을 붙잡고 울고 있지 않아요. 부활하신 영을 못 만나보고 참으로 사랑이 없었사오며 가식이었나이다. 이게 피가 맺힌 그분의 아주 피를 토하는 자복 서에요. 임종하시기 전에 한 달 전에 그러니 같이 산다는 제가 이 글을 처음 봤다는 거 여러분이 곧이들어져요? 이상한 일이여. 여기 오기 전 한 5일전에 이 낙서를 발견했어요. 먼지가 묻어 가지고 거미가 집을 짓고 냄새가 나는 노트조각인데 이런 글이 쓰여 있거든요. 누가 베껴놨는지 알 수 없어요. 이 대목 보십시오. 주님 저는 음흉하게 지냈나이다. 이점입니다. 이분이 누가 들으라고 한말도 아니고 혼자 골방에서 자복서인데 주여, 저는 음흉하게 지냈나이다. 아버님의 기관과 사람들의 기관을 분리해 주시옵소서. 수양하는 분들과 생활이 어려워서 지내시는 분들과 구분케 하시옵소서. 지금 요새도 어느 목사님이 와서 보니까 혼동이 되어가지고 동광원인지 요양소인지 모르겠다는 거예요. 이것 참 이상하다. 변해버렸다는 거예요. 그래 그냥 원장님이 부끄러워 해명하지 않아요? 직원들은 여기 참석하지 않고. 그 말도 어떠한 뜻으로 거짓말인지 알 수 없어 참말입니다. 미안하니까 물욕을 온전히 떠나게 하옵소서. 아버지만을 의지하옵고 세상과 사람과 물질을 의뢰하지 않게 하여주시옵소서. 자기는 완전히 실패했다고 자복합니다. 죽기 한 달 전에요. 자기는 일평생 제가 지도를 잘 못했습니다. 그렇게 자복하는 거예요.
물질과 수양을 뒤섞이지 말게 하시옵소서. 진실로 죄인인 저를 사용 하시옵고. 두 기관을 아버님 뜻대로 처분 하시옵소서. 이 수양기관하고 자선기관, 이 유언 받들어서 원장님이 세상 떠나시기 전에 하신다고 지금 남원에 저렇게 하신답니다. 내가 혹 죽기 전에 이선생의 소원을 들어드려야겠다. 우리 원장님같이 참말로 충성스러운 제자가 또 있겠습니까? 카이사의 것은 카이사에게, 아버님 것은 아버님께 돌리도록 역사하심을 빕니다. 주님 물질보다 먼저 사랑을 주시옵소서. 또 사랑을 사람들에게 주게 하여 주시옵소서. 물질도 주님께서 은혜로 주셔서 씁니다만 사랑과 믿음은 놀라운 크고 아름다운 은사이오며 긴급히 요구하는 초자연의 은사로소이다. 그 이것은 자랑도 아니고 참 이 선생님의 이야기를 하자니까 떼 낼 수 없는 복을 다시 여러분 들으셔야 합니다. 백 장로님 여기 와계시지 않아요? 살아계신 증인들입니다. 아무도 모르는 것을 제가 이침에 말씀했어요. 부끄럽다고, 나는 결혼한 사람이여. 여러분한테 아주 부끄럽다고 해서 그건 직분이 다르지 않습니까? 혹은 밭을 사고 혹은 씨를 심고 혹은 물을 주고 다 각 직분이 다르신데 이 예배당이 이 강당이 서있는 이 땅은 이현필 선생님 사랑에 감격해서 백 장로님 어머니가 무조건 재산을 다 내주신 것 아닙니까? 사랑에 감격해서요. 아들로서 어머니말씀에 효자니까 순종하기위해서 무조건 다 드려버렸다 이거에요. 자식들에게 미안하니까 어머님이 내가 죽기까지 작은방 하나만 우리가 쓰자. 너희들에게 미안하다. 그러니까 아들 된 장로님이 그랬다는 거예요. 어머니, 이왕 드릴 바에는 다 드립시다. 한 달만 한두 달만 셋방살이하면 우리가 곧 집 짓지 않소? 그러니 깨끗이 이 선생을 사랑해 귀의한 분이었어요.
그래서 밭을 팔아가지고 제가 이현필 선생님 사실 때 알아요. 그러면 아무도 몰라요. 이제는 보은해야 쓰겠어요. 감사하니까, 감사가 보은이에요. 이분은 물질을 탐하지 않고 물질을 탐하지 않기 위해서 기도하고 있어요. 그런데 그 어머니와 장로님은 모자간이 그냥 곁방을 얻어서 가면서라도 집 한 칸도 없이 싹 이 선생님 드려버렸단 말이에요. 여기 이 성당을 지으시고 예배를 드리시고 이 아래 불쌍한 애기들을 키우시고 그러는데 이건 장로님이 해 오신 일 아니요? 그러니까 이건 백 장로님이 하신 게 아니에요. 이현필 선생님이 예수님의 아들로서 은총으로 역사했다는 증거에요. 그러니까 이런 것들이 다 합해져서 이런 모임이 아닙니까? 왜 오신분이 부끄럽게 생각하시오? 안 오시면 어떻게 되시겠습니까? 그렇게 이야기 했어요. 결코 우리 이 선생님은 물질을 탐하는 분이 아니었어요. 사랑을 주게 하시옵소서. 물질도 은혜로 주심으로 씁니다만 사랑과 믿음은 놀라운 크고 아름다운 사랑 없는 물질은 생명이 없습니다. 생명과 은혜 없는 죽은 썩은 물질은 무엇 하겠습니까? 주여 굽어 보서서 제게는 사랑이 없습니다. 아버님께 은혜와 생명으로 주신 물질을 사랑이 없으므로 생명으로 은혜롭게 묻습니다. 오, 주여 불쌍히 여기시옵소서. 이 마음이 너무나 좁습니다. 주님 한탄하시는 주님 실로 황송하고 망극하옵니다. 이 좁은 마음이 애태웁니다.
주여 다시 생각해 주시옵소서. 새것으로 만들어 주시옵소서. 주님 것으로 만들어 주시옵소서. 주님 보시기에 합당한 것이 되도록 만들어 주시옵소서. 주님께서 쓰시기에 적합하시게 만들어 주시옵소서. 진정 소원하옵나이다. 주님 말씀대로 뜻대로 살다가 이 땅에서 떠나지기 소원하옵나이다. 성령이시여 역사하심을 빕니다. 말씀대로 살기를 원하옵나이다. 그러나 주님 앞에 가기를 소원하옵나이다. 좋지 못한 제 성품을 다 고침 받고 완전한 생활하다 가고 싶습니다. 주여 주님의 씨 자녀들을 다 찾으소서. 잃은 양 다 찾으소서. 이 종이 다 이겼으니 주여 사자를 급속히 파송하셔서 시급히 죄에 빠지지 않게 어린양들을 구원해 주시옵소서. 이 종은 잃기도 하고 잃기는 하였지만 찾을 줄 모르는 종이옵나이다. 잃기는 하였지만 찾을 줄 모르는 종이오니 답답하옵나이다. 주여 이종은 눈이 사람외모를 취치 않게 하소서. 오직 아버지 뜻에 달려 있사옵나이다. 사람사람이 다른 것은 오직 쓰시기에 합당하게 하시기 위함이오며 귀히 천히 쓰심도 아버지의 쓰심 따라 되옵는 것을 확실히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멘. 이렇게 말씀이 끝나고 있어요.
그러면 지금 제2의 엄 목사님은 제2의 이현필 되려는가 알 수 없어요. 만일 그 소원을 못 이루면 어떻게 세상을 떠나겠습니까? 만일 참 존경하는 스승이라면 그런데 이 사연을 쪼금 더 제가 선생님 말씀을 제가 읽어드리겠어요. 그러면 이 등잔 밑이 어둡다는 격언대로 저는 참 이 선생을 몰랐어요. 연전에 제가 진도에 갔습니다. 말씀시간에 제가 그랬어요. 어느 교황이 80세에 임종할 때에 아버지 저는 죄인입니다. 저는 많은 죄를 지었습니다. 통회하시고 임종했다. 그럽디다. 그러니까 거기 춘일자매님이 그래요. 오마나 우리 이 선생님도 그런 기도했다 그래요. 아니 언제 나는 정절을 잘 지키면서 감사합니다. 그리고서 죽었지, 나는 죄인입니다. 라고 죽었냐고? 나 그 기도 있으면 베껴달라고 그랬어요. 아니 어디 선생님도 죄인이라고 자복했다고 기록 있다고 그래요. 들어보세요. 주님 저로 하여금 항상 죄인 됨을 기억하게 하시옵소서. 제가 죄인된 것을 깨닫는 그 시간만이 제게 가장 행복된 것은 주님과 제가 가까워지는 까닭이올시다. 주여 제가 저의 약함을 깨닫게 하시옵소서. 제가 저의 약함을 깨닫는 그 시간이 제게 가장 행복된 것은 주님의 크신 은총 권능이 물밀듯이 저를 찾아주시는 까닭이옵니다. 이 험한 세대에서 이 두 가지 위로가 제 자랑이 되나이다. 성령의 역사로 참으로 주를 우러러보는 형제자매들이 주님의 은총과 구원만을 바라게 하시옵소서. 주님의 은총만 어린자녀들이 바라게 하소서. 주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아니 이런 기도를 우리 이 선생님이 하셨읍니까? 그랬다. 라고 했어요. 아니 내가 제일 막둥이입니다. 모든 식구들은 선생님이 계실 때 적고 베끼고 저는 전혀 그걸 모르고 산 사람이에요. 그러니까 한 집에 살았어요. 이 선생님 말씀 안 듣고 산 사람들 뿐인데 밖에 계신분이 이 선생님 알 수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아울러서요. 선생님 말씀 조금 더 보겠어요. 선생님의 은총을 받지 않고는 안 된다는 말씀인데 그리스도의 은총 사랑에 접촉해야만 됩니다. 이건 아마 말을 못하실 때 말하면 옆에 사람이 적어놓은 말씀 같아요. 그리스도의 은총 사랑의 접촉해야만 됩니다. 은총의 접촉이 없이는 아무리 설명을 들어도 시원치가 않습니다. 이접입니다. 아무리 우리 엄 목사님이 목이 터지라고 눈물 흘리시고 콧물이 나도록 외쳐도 직접 은총을 못 받았으니까 시원치가 않아요. 물속에 잠기듯 은총의 사랑에 잠겨야 합니다. 그것이 곧 믿는 일입니다. 금식을 하고 절제를 하는 것도 은총에 잠겨야 합니다. 그 은총에 그 큰 사랑에 감격해서 해야지요. 여러분이 고생하는 것도 은총에 사랑에 못 이겨서 해야 하고요. 여러분이 고기를 안 먹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도 은총에 못 이겨서 해야 하고 그 은혜가 더 좋아서 안 먹어야 하고요. 여러분이 사치를 안 한다면 그 사치를 안 하는 것도 예수님의 은총에 감격이 되어서 하셔야 합니다.
여러분이 정욕을 떠나는 것도 그러합니다. 은총 없이 정욕을 지키는 것은 안 됩니다. 그 은혜 감격이 되어서 되는 일이고, 그 사랑에 끌리는 것이 아니면 모두가 억지 짓입니다. 억지 짓, 죄도 회개 않고 예수님의 성령도 안 받고 그냥 그렇게 은총 없이 짓는 것은 억지 짓이라. 은혜를 받으려고만 탐내지 말고 주님의 이미 받은 은혜를 잘 간직하시기를 힘써야 합니다. 은혜는 무시로 받지만 간직을 못해서 잊어버리고 삽니다. 여러분은 욕심을 부리지 말고 잘 간수하시길 바랍니다. 자기 할 일만 하고 있으면 욕심을 안내도 풍성히 주십니다. 많은 은사 말로다 할 수 없는 은혜 귀하신 사랑 너무 몰라서 지나치고 맙니다. 범사에 진실만 의지하면 위에서 보호하심으로 아무염려 없습니다. 적게 가져도 귀중히 여겨 잘 간직하면서 살면 자기를 이기고 남을 구원하고 나라와 겨레를 구원하는 곧은길로 모범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귀하게 땅위에서 살다가 세상을 떠날 것입니다. 은총을 귀하게 여기지 않으면 여러분은 빼앗기고 말 것입니다. 그런 사연을 적어놓은걸 한 5일전에 처음으로 얻은 쪽지올시다. 그렇다면 직접 이 선생님 밖에서 보던 이 선생님이 틀리지 않습니까? 이 선생님의 뜻을 어느 정도 한 말씀 한 말씀 알아듣는다면 먼저 우리들이 소화를 하고 선생님이 받은 은총을 우리들도 받고 그 은총에 감격해서 자선사업도 하고 이렇게 진행될 것을 희망을 품을 때 얼마나 소망이 있는지요? 이현필 선생의 길이 과연 복음적인가? 그런 점 그렇게 견주어봄으로 뜻을 확실하게 하기 위해서 성인 프란치스코와 성녀 소화 테레사가 했던 말을 다시 한 번 인용하고자 합니다. 성가 불러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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