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일

초여름 하루 : 절대자비

mamuli0 2019. 5. 25. 09:25

 오월 하순인데 기온이 34도 까지 오르고 밤 기온이 24도 머물러 열대아 현상이 있다고 한다. 이게 기상 이변이 아니겠는가? 김제에서 삼일을 보내고 진도에 내려왔다. 사랑초와 창포꽃이 활작 피었다. 사람은 갔지만 그의 손길은 곳곳에 남아 있다. 저녁에 국악원에 가서 국립국악원에서 '꼭두이야기'라는 필름영상을 보고 왔다. 우리나라 장례 문화 망인을 상여에 태워 저승 길에 보낼 때 상여 양면에 있는 꼭두를 노래와 춤으로 보여주는데 거의 효과음을 국악으로 연주했다.


  


 절대의 자비


 1981.01.03  김준호 선생


 20장 11절 말씀부터 18절 말씀 봉독하겠습니다. 요한복음 20장 11절부터 제가 봉독하겠습니다. 한편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던 마리아가 몸을 굽혀 무덤 속을 들여다보니 흰옷을 입은 두 천사가 앉아있었다. 한 천사는 예수의 시체를 모셨던 자리 머리맡에 있었고 또한 천사는 발치에 있었다. (끊김) 울고 있느냐 하고 물었다. 누군가가 제 주님을 꺼내갔습니다. 어디에다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마리아가 이렇게 대답하고 나서 뒤를 돌아다보았더니 예수께서 거기에 서 계셨다. 그러나 그 분이 예수인줄은 미처 몰랐다. 예수께서 마리아에게 왜 울고 있느냐? 누구를 찾고 있느냐? 하고 물으셨다. 마리아는 그 분이 동산지기인줄 알고 여보세요, 당신이 그 분을 옮겼거든 어디에다 모셨는지 알려주세요. 내가 모셔가겠습니다.  라고 말하였다.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고 부르시자 마리아는 예수께 돌아서서 히브리말로 랍오니여 하고 불렀다. 이 말은 선생님이여 하는 뜻이다. 예수께서는 마리아에게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않았으니 나를 붙잡지 말고 어서 내 형제들을 찾아 가거라. 그리고 나는 내 아버지이며 너희 아버지 곧 내 하나님이며 너희의 하나님이신 분께 올라간다고 전하여라. 하고 일러주셨다. 막달라 여자 마리아는 제자들에게 가서 자기가 주님을 만나 뵌 일과 주님께서 자기에게 일러주신 말씀을 전하였다. 한번 같이 따라 읽을 말씀 제가 먼저 읽겠습니다. ‘나는 내 아버지이며 너희의 아버지 곧 내 하나님이며 너희의 하나님이신 분께 올라간다.’ 목사님 설교 하실 때 수도에 관한 많은 권고를 하셨습니다. 이 문헌을 훌터 보면 제일먼저 예수님이 하늘나라 가신 후에 제일 처음에 수도를 시작하신 분이 막달라 마리아였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상식과 지혜를 전혀 알 수없이 예수님께는 우발적인 어떠한 유언을 가장 죄 많은 여인에게 하신 것입니다.


 


 내 아버지가 네 아버지이다. 내 하나님에 네 하나님이다. 유대사람들이나 현재 우리들도 어쩌면 예수께서 그런 죄인에게 그 같은 하나님의 상속 천국의 상속을 해줬느냐 하는 것은 이 상식으로는 알 수 없습니다. 그것은 한마디로 말해서 자비의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이 막달라 마리아에게 예수님이 내 아버지가 네 아버지라는 그 평화를 인격의 존엄성 생명의 존엄성 너는 하나님의 딸이다. 하고 인정하신 말씀은 그 인류로 태어난 사람가운데 한사람도 다 구원을 받지 못할 사람이 없다는 그런 선언이 되는 것입니다. 이 감격적인 예수님의 사랑을 그 참 약속받은 마리아는 성모님과 더불어 혹은 사도들과 더불어 많이 의논해 보시고 이 같은 죄인을 사랑하신 예수님의 그 자비에 대해서 내가 여러분을 같이 시종 드리면서 전도 하는 것이 더 예수님께 더 사랑을 갚아 드리는 길일까? 차라리 감격과 이 사랑을 가슴에 안고 사막에 들어가서 기도를 하는 것이  옳을까? 생각해보고 많이 생각해 본 끝에 아무래도 자기는 사막에 들어가서 그 뜨거운 예수님의 사랑을 노래하고 찬송하고 그 영광을 주님께 기도로 올리는 것이 좋겠다고 결정하고  자기 홀로 사막으로 들어가서 한 70년 까지 살았다는 기록이 있다고 십자가 요한께서 증언했습니다.


 


그러면 요새 그 수도 개념이랄지 대개 일러주신 말씀은 어떠한 뜻으로는 여간 빗나간 해석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수도를 하는 것은 깨끗해지려고 하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인류의 구령을 위해서 비는 것이 목적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찬미하며 감격하고  아울러서 자기가 이미 지었던 자기 죄의 통회입니다. 그러므로 수도자는 통회하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자기가 깨끗하니까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는 너무나 죄가 많이 있으니까 자기 영혼의 구원을 위해서 일평생 눈물을 흘리고 우는 생활입니다. 죄가 없으니까 수녀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죄가 너무나 많이 있기 때문에 그 구원에 감격해서 일평생 주님을 찬송하며 자기 죄를 통회하는 것입니다. 수도의 목적은 자기 죄를 통회하는 것입니다.


 


아울러서 주님의 그 구원을 노래하는 것입니다. 물론 처음에는 다 입산수도를 하던지 은둔 할 때의 심정은 자기가 자기에게 속고 또한 자기가 자기 이론에 속아가지고 세상이 더러우니까 세속이 더러우니까 나 홀로 깨끗하기 때문에 백이숙제(伯夷叔齊)와 같이 그 자기 청벽한 생활을 지키기 위해서 숨는 것으로 착각합니다. 그러나 한 가지 경험을 이야기 해 드린다면 요 누구든지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아주 청순하고 깨끗한 생각을 품은 사람이 세속을 바라볼 때 모두 죄로 보입니다. 모두 죄입니다. 그래 상처를 받은 영혼은 해도 더럽고 달도 더럽고 세상이 다 더럽고 사람이 더럽고 길거리가 더러우니까 가장 때 묻지 않은 자연 깊은 산에 숨습니다. 일 년이 가고 십년이 지나가는 동안에 어느 정도 자기 마음이 안정을 받습니다. 그 어제 밤과 같이 오늘 같이 눈이 옵니다. 가만히 눈 속에 갇혀서 자기를 살펴봅니다. 그러면 자기가 세상이 더럽고 천지가 더러워서 여기까지 찾아왔다고 생각하는 생각이 뒤바뀝니다. 눈이 오는 밤 달뜨는 밤, 눈이 오는 날에 천지가 희어집니다. 산도 희어지고 나무도 희어지고 땅도 희어지고 그 황홀경에 들어가겠지요? 산천이 희고 만물이 희고 그렇게 보면 옛날에 원망스럽던 해도 희고 바람도 흽니다. 자기 마음에 안정이 들어오면 만물이 소생해요. 마음에서 천지가 깨끗해요. 그러면 옛날에 생각했던 생각이 다 깨끗하게 비춰옵니다. 다 선한 사람뿐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상하게 숨길 수 없는 사실은 자기 홀로 더럽다는 임 죄의식에 들어갑니다. 자기 홀로 자기만 더럽다. 나 홀로 죄인이다. 그러면 그때부터 발심 예수님의 은혜를 사모하게 되고 은총을 사모하게 되고 진실로 하나님의 전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사모하게 되고 사랑에 대한 발심이 시작된다는 말씀입니다.


 


옛날에는 다 세상이 더럽고 세속이 더럽고 모두 죄인이고 그런 생각이 뒤바뀌면서 모든 천하가 아름다워져요. 세상도 깨끗하고 부모도 깨끗하고 친구도 깨끗하고 교회도 깨끗하고 단지 더러운 것은 내 마음 뿐이다. 자성, 자기를 안다는 말씀이야. 성령이 오시면 죄를 가르쳐 줍니다. 진실로 성령이 오시면 과연 나는 죄인이다. 그걸 가르쳐 주십니다. 그러므로 모든 천지만물이 성화가 되요. 단지 자기를 누가 좋게 봐 준다면 그건 은총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자비심입니다. 초자연의 은총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마음을 닦으면 닦을수록 은혜를 받으면 받을수록 자기만은 초라한 죄인으로 쳐지고 모든 영광은 예수님의 것만으로 돌아갑니다. 자기 홀로 깨끗했다는 생각은 아무것도 없어지고 만일 내가 깨끗함이 있다면 이것은 특은이다. 은총이다. 빌려주신 것이다. 예수님의 것이다. 창조주의 것이다. 초자연의 능력이다 하고 사양을 합니다. 그렇게 마음이 새로워 질 때는 세상에는 아무도 미운 사람이 없습니다. 나보다 다 선해요. 나보다 다 거룩해요. 나보다 다 깨끗해요.


 


그러므로 자기가 만 분지 일이라도 희생이 될 수만 있다면 전 인류에게 자기를 주고 싶습니다. 바른 제물이 되어서 바치고 싶습니다. 그 마음뿐이에요. 사랑이 폭발해서 사랑을 주고 싶은 마음뿐이지. 그것도 자기 사랑은 아니고 거저 받은 주님의 은총에 의해서 몸과 마음을 다 제물로 바치고 싶은 마음뿐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모든 인류는 만일 죄가 있다면 하나님이 보시기에 죄가 있지 자기가 봐서는 죄가 없는 것입니다. 자기보다는 다 선한 사람뿐이야. 창녀라도 그 눈에는 천지만물이 거룩해요. 그렇게 마음이 변화를 받는다던지 영혼이 변화를 받는다는 경지는 역시 은총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중생 새사람 새 마음 새 관찰 새 판단 모든 것이 다 거룩해 진다고 예수님도 그런 말씀 한바가 있어요. 더러운 자는 영원히 더럽게 내버려 두라고 거듭나지 못한 눈에는 천지만물이 더러워요. 인류가 더러워요. 그러나 거듭난 영혼은 천지만물이 하나님의 동산이고 죄 많은 인류가 다 사랑하는 하나님의 아들딸입니다. 불쌍한 동생이요. 가엾은 동생이요. 철없는 동생이요. 속없는 동생이요. 모르고 그러는 것뿐이지 아무 잘못이 없는 동생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마리아 막달라를 볼 때는 죄인이 아니었습니다. 가장 가엾은 동생이었어요. 가장 불쌍한 동생이었습니다. 인류가운데 가장 동생을 자기가 구원했다는 기쁨은 영광스러운 것이었습니다. 아버지를 제일 먼저 가르쳐 주고 싶었던 분이 죄 많은 동생이었습니다. 죄가 보이지 않았어요. 사람들이 말하는 죄인이지 예수님의 눈에는 잃어버린 양이었습니다. 진실로 사랑하고 싶은 동생 이었습니다. 그 동생을 찾았을 때 바로 내 아버지가 네 아버지다. 바로 내 하나님이 네 하나님이다. 천국을 상속하는 것이고 아버지를 양보 했습니다. 이건 전 인류에게 주고 싶은 예수의 사랑입니다. 교회를 다니던지 안다니던지 사창가에 있든지 상관없습니다. 예수의 심정은 전 인류를 향하는 자비심입니다. 베드로 선생의 말과 같이 아무리 심판하고 싶어도 못하십니다. 모두 내 자식인데 한 자식인들 어떻게 내버리겠습니까?


 


그러므로 이사야 선생님을 생각했습니다. 아무리 이 세상에 죄가 많이 있다 하더라도 한 인격이 오시면 이새의 뿌리에서 한 분이 오신다면 전 인류는 그 품안에 사랑으로 포옹되겠다. 다 사랑해 주러 온다고 희망을 품었습니다. 그 분이 예수였습니다. 예수가 오심으로 전 인류는 사랑을 받게 되었습니다. 모든 선지자들이 율법자들이 판단했던 죄인이지만 하나님의 아들 큰아들 예수의 눈에는 모두 잃어버린 동생들입니다. 그러므로 그분은 기어이 다 찾고 마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아닌 부처도 자기가 성불한 것은 중생을 제속 고자 했다고 합니다. 모든 중생을 구원코자 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대자대비입니다. 그런 뜻으로 막달라 마리아께서 처음으로 수녀가 되었다면 그것은 자기의 그 죄를 용서해주신 그 감격을 노래함이요. 이미 자기가 죄지은 것에 대해서 더 통회하자니 그리고 가장 밑의 여자의 몸으로서 차라리 전도하다가 죄를 다시 짓는 것 보다는 자기가 그 감격을 예수님께 바쳐서 예수님께 사랑의 노래를 불러 드리는 것이 예수께 대접을 하는 것이었다는 겁니다. 헌신하는 거지요,.


 


특별히 이 단체는 깨끗함을 하나님께서 주신 은총을 받은 단체인데요. 밖에 나간 형제에 대해서 예수님의 눈에는 안에 있는 양들을 눈물을 흘리지 않습니다. 밖에 흩어진 양들을 위해서는 더욱 사랑하시고 눈물을 흘리십니다. 그러므로 기어이 찾고 마십니다. 그것은 소망입니다. 사랑의 소망입니다. 낙심이 없습니다. 기어이 찾고 마시리라는 소망이 있을 뿐이십니다. 그런 뜻으로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신 겁니다. 나는 다 찾고 말겠다. 제일 끝머리 제일 타락한 여자가 내 동생으로서 아버지를 상속 받는다면 덜 타락한 형제자매들이야. 덜 타락한 인류들이야. 다 구원받지 않겠냐는 희망을 주신 겁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생각이 그랬어요. 더러운 자는 영원히 더럽도록 내버려 두어라. 그 사람들의 생각은 그렇게 먹을 테니까 그러나 만일 나와 더불어 자비에 불이난다면 사랑에 불이 난다면 거룩한 사람은 영원히 거룩 되게 하여라. 그러므로 모든 사람들이 스스로 더러움으로 스스로 헤매는 것뿐입니다. 아버지의 자비에 깨어나지 못한 것뿐입니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오신 것은 용서와 자비로 오신 것입니다. 판단이 아닙니다. 판단을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번 모임에도 많은 판단을 들었는데 귀가 더러워진 것입니다. 그것은 모세가 왔다고 하려는지 그것은 예수님의 본심이 아닙니다. 만일 정죄해서 더러운 사람이 있다면 예수님은 그 사람들 때문에 다시 피를 흘리십니다. 다시 눈물을 흘리십니다. 소망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자비 안에는 다 구원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그렇게 깊은 산에 들어가서 나만 홀로 깨끗하다고 명상하는 동안에 자기가 스스로 폭발탄을 맞아가지고 정죄를 받을 것입니다. 전 인류가 깨끗하고 모든 교회가 깨끗한데 나 홀로 더러운 야심가였다. 나는 거짓말로 말을 팔아먹고 자식을 키우고 대학을 보내고 다 피를 빨아먹고 내 자식은 배부른데 내 교인들은 파리하여 다 굶어죽어 가는구나. 내가 제일 흡혈귀였다. 그리고 통회한 겁니다. 그러기위해 하나님은 부르신 겁니다.


 


그때 진실한 마음을 알 것입니다. 과연 나 홀로 죄인이었소. 자복을 하면 모든 교인들이 감화를 받아가지고 돌아올 것입니다. 이제야 당신이 참말 하시오. 우리가 구원 받는 것은 예수님의 은총입니다. 예수님의 자비입니다. 수도의 목적은 예수님을 사랑해 드리는 것입니다. 사랑이 목적입니다. 모든 수도원의 개념은 정의는 그렇습니다. 우리가 수도하는 것은 완덕을 이룬다. 완덕을 이룬다는 말은 예수님과 나하고 사랑의 연을 맺겠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과 나와의 사랑의 일치를 수도원의 목적입니다. 수도자의 목적은 예수님과 나와의 사랑을 하나로 하겠다. 요새 쉽게 말하면 혼인식입니다. 처녀로서 예수님을 신랑삼고 혼인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러므로 에베소에도 성교회 그 안연을 위해서 신랑인 예수가 희생했다는 거예요. 그것은 혼인의 비결이다. 혼인의 신비다. 예수님의 눈에는 혼인을 정죄한 일이 없습니다. 헤매는 동생들입니다. 불쌍한 동생들일 뿐입니다. 어디가 머물러 있던지 아버지의 자비에 깨어나도록 기다리는 것뿐입니다. 그러니까 수도의 목적은 꼭 남녀가 혼인 하듯이 영과 영이 사랑으로 하나 되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 사랑이 이루어진다면 예수님을 남편으로 했다면 아니 예수님의 사랑을 받았다면 전 인류를 품어주는 엄마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수도의 목적은 거기에 있어요. 전 인류를 품으로 품어주는 어머니가 되겠습니다. 그러므로 성인 성녀가 되었다는 소화 테레사의 희망은 저는 깨달았습니다. 저는 성 교회의 심장이 되겠습니다. 나는 이 성자의 어머니가 되겠습니다. 성 교회의 영혼을 품어주는 자비의 엄마가 되겠다고 선언 하셨습니다. 그러나 자기는 한낱 벌레요. 죄인인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 자기의 본보기는 막달라 마리아입니다. 가장 티 없는 소녀 성녀 테레사의 희망은 막달라 마리아 언니를 본받는 것입니다. 첫 번 수녀 막달라 마리아는 사람들한테 들킨 죄인이지만 성녀자신은 하나님께 들킨 죄인입니다. 사람은 본래 죄인입니다. 그러므로 본질상 막달라 마리아 언니보다는 나는 더 큰 중죄인 인 것을 깨달았습니다. 정죄를 받은 것입니다. 나는 예수님이 미리 용서한 죄인이요. 막달라 마리아는 현장에 잡혀서 용서한 죄인이지만 자기 개성으로 말하면 본성으로 말하면 막달라 마리아 보다는 소질로 봐서 백배나 더 타락할 여성 이라고 자기는 깨달았습니다. 그러므로 내 죄는 미리 용서한 것뿐이고 나는 깨끗한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아무리 동정녀라도 본인이 깨끗한 것이 없어요. 나는 미리 사랑을 받은 사람이고 나는 미리 용서를 받은 것뿐이야. 나는 모두 용서를 받았다고 선언했어요. 그래서 나는 미치도록 예수가 사랑스럽다고 미치게 사랑스럽다고 다른 언니들은 그렇게 들켜가지고 용서를 했는데 나는 들키기 전에 미리 용서해준 그 사랑에 녹아난다고 그랬어요. 그래 착각을 일으키게 하지 않습니까? 요새 수도한다고 잘못 생각하면 착각을 일으켜요. 아무리 성녀들도 자기가 죄인이었기 때문에 그 용서받은 사랑에 감격하고 그 사랑에 불나있는데 천지만물이 더럽고 교회가 더러우니까 나 혼자 깨끗하게 살련다. 그건 자기가 자기한테 속은 것이란 말입니다. 자기가 자기 이론에 속고 자기가 자기 성령에 속고 자기가 자기 심장에 속은 것이란 말입니다. 그렇게 생각 할 수 있어요.


 


그러면 어찌할 것이냐? 그러니까 수도를 해야 한다. 그 말씀입니다. 정죄를 받기 위해서 참말로 죄를 깨닫고 회개하기 위해서 참말로 은총을 받기 위해서 참말로 하나님의 자식이 되고 싶어서 인제 그렇게 생각을 했다는 것입니다. 제 말씀이 아닙니다. 그럼 이제 본보기로 제 말씀은 그 어른들 하신 말씀을 이렇게 여러분들에게 전하는 말씀이고요. 특별히 이 단체가 존경하는 이 선생님은 날마다 예수님께 감격의 노래를 부른 것은 어쩌자고 이 죄인을 이처럼 사랑 하십니까? 어쩌자고 이 죄인을 이토록 사랑 하십니까? 자기가 죄인 인 것을 항상 자각하시고 그 은총의 사랑에 감격했던 분이시지요. 그 분 일기에는 주님 형제들이 죄가 있다면 저는 죄의 못 자리올시다. 그렇게 자기 자신을 말하고 있어요. 죄의 못자리를 아시는가? 모르겠습니다. 죄의 배급소다. 그렇게 사랑에 녹아난 분이 이 현필 선생님이었습니다만 성인 프란치스코에 대한 이야기 잠깐 드리겠습니다. 사랑하는 제자가 같이 전도 길을 나갔습니다.


 


방방곡곡 어디를 가나 인산인해 많은 군중이 자기 선생님을 옹위하고 사랑했습니다. 영광을 돌렸습니다. 아버지, 아버지 하고 그래 돌아오면서 사부님 어찌하여 인민들이 선생님을 그토록 존경합니까? 좀 비밀을 가르쳐 주십시오. 어쩌면 저렇게 마을 사람들이 선생님을 그토록 존경합니까? 좀 알고 싶습니다. 그래 자기가 생각 했어. 제가 보기에는 불학무식하고 볼품도 없는데 대체 그 비밀이 무엇입니까? 그렇게 물어볼 때는 선생님이 자기는 깨끗하다고 말씀 할 것으로 생각했어요. 그런데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오 형제여 눈물을 흘리면서 그 사람들이 저를 그렇게 사랑하고 아끼는 까닭을 말씀 해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이 인류를 굽어보실 때 전 인류 가운데서 이놈이 제일 죄가 많아서 그러신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보시기에 이놈이 제일 못나서 그러십니다. 아무데도 쓸데없어 그러십니다. 그랬어요. 하나님이 보시기에 이놈이 제일 쓸모가 없고 제일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고 제일 죄가 많아서 그토록 자비를 내리셨답니다. 자기가 땅위에서 존경을 받는 것은 은총이지, 자기 자신이 아닌 것을 깨달았습니다.


 


아니 그것은 그냥 겸손의 말씀이 아닙니다. 자기는 본질상 진노 받을 자식이고 죄인인데도 예수님의 자비가 하나님의 은총이 초자연의 능력이 자기를 그렇게 해 주신 것뿐이라고 그러므로 구도로 깨달은 수도자들은 자기의 순결만 보전되어 있다면 선물이기 때문에 겸손합니다. 두렵고 떨려 했답니다. 결코 자기재산이 아닙니다. 은총이 떠나가 버리면 3초가 못가. 만일 자기 재산을 그렇게 자랑한다면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가장 더러운 것이지만 또 하나님이 보시기에 가장 교만한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아무 쓸모없는 것이라 했어요. 예수님의 복음을 말하는데 예수님의 자비를 나타내는데 아무 쓸데없는 소금, 아니 맛 잃은 소금 사람이 보기에 좋지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무 쓸데없다. 그러므로 겸손한 자에게는 은총을 내리시지만 교만한 자에게는 하나님이 미워하신다. 그렇게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성인 성녀 되는 사람들은 은총에 의한 선물이지 그 개인은 더러운 죄인일 뿐이지요. 그렇게 깨달았다고 그래서 성인이라고 그랬어요. 왜 거룩하다는 것은 하나님께만 있는 것이기 때문에 거룩하신 그 은총이 그 몸에 접했다. 그 영이 접했다. 은총을 힘입었다. 그런 대접으로 성인이라 성녀라 그랬다고 요새 바꿔 말하면 수녀가  수도사가 된다는 목적은 성녀가 되려고 수도를 하는 것입니다. 성인이 되려고 수도를 하는 것입니다. 심지어 불교도 출가를 하는 목적은 부처가 되려고 하는 것입니다. 최고의 목적을 두는 것입니다. 수도의 목적은 가장 완덕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화라는 것은 은총입니다. 예수님의 작품입니다. 하나님의 초자연의 능력입니다. 사람이 그렇게 원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힘써 될 일이 아닙니다. 욕심내 가지고 될 일이 아닙니다. 탐해서 될 일이 아닙니다. 고생해 될 일이 아닙니다. 울어도 될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특은입니다. 여러분들이 다 받았는데 어째 받지 않은 것처럼 자랑하십니까? 그렇게 바울 선생이 말씀했어요. 섰다하면 넘어집니다. 눈이 오는 날 봉사가 되어요. 앞에 가는 사람이 자빠질 때 웃으면 자기가 자빠집니다. 제일 무서운 것이 이 수도자가 함정입니다. 교만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역시불로 사람을 욕심을 하늘나라 못 가게 하십니다. 아무리 수도를 백년 천년 했어요. 교만하도록 하십니다. 왜 자기 힘으로는 못가니까 은총에 의해서만 하시고자 하시는 주님의 섭리가 있어서 그럽니다. 오래 수절하다 보면 교만한 마귀가 듭니다. 은총 없이 오래 수도하다 보면 교만의 왕이 됩니다. 교파를 만듭니다. 당파를 만듭니다. 하나님의 원수가 됩니다. 은총 없이 기도 많이 하다보면 또 교만해집니다. 거기도 함정이 있어요. 은총 없이 금식을 많이 하면 또 교만해 집니다. 거기도 함정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공자는 이런 말씀 했어요. 군자는 중용이라. 소인은 과부길이라. 모든 사람들이 치우칩니다. 수도원에 가서 타락할 바에야 아니 타락이 아닙니다. 교만해 진다면 타락한 영혼보다 더 구원받기 힘들지 않습니까? 사실이 그렇습니다.


   


이 평민 가운데 죄라는 것은 작은 죄이지만 수도자들의 교만 병이라는 것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죄 아닙니까? 하나님을 대적하던 천사가 지옥가지 않았습니까? 교만이라, 그러므로 문제야. 만일 수도를 원하는 사람이 있다면  수도 한 사람이 있다면 참말로 자기가 어떠한 뜻이 있다면 자기가 무엇이든지 잘해 놓으면 교만해져. 왜 은총이 아니니까 자작이니까 가짜니까 사람을 속이는 거니까 자기도 속고 남을 속이는 것이기 때문에 평화가 없습니다. 울분합니다. 남을 미워합니다. 섭섭합니다. 단죄합니다. 판단합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자비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용서가 아닙니다. 은총이 아닙니다. 자기 것입니다. 스스로 교만에 빠져 스스로 고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수도원에 간다고 해서 구원이 있는 거 아닙니다. 수사나 수녀가 되어서도 아닙니다. 구원은 역시 예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자비하신 예수님의 은총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일은 역시 자비와 사랑입니다. 어떠한 사람은 군인같이 부름을 받아가지고 하나님이 특별히 쓰기위해서 수도를 시키겠지요. 그러나 그것은 욕심 낼 것이 아닙니다. 어디가 있던지 하나님의 은혜로 회개하고 구원 받습니다. 어디가 머물던지 하나님의 은총이 같이 하시면 회개를 하게 되고  거룩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피로 거룩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안심할 것입니다. 수도원에 갔던지 안 갔던지 그건 해방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수도를 하든지 안하던지 그건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군인은 특별히 부름을 받았기 때문에 가사를 다 등지고 국경을 지키는 일은 잘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수도자의 위치라는 것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전 인류를 대표해서 제물로 골라온 사람들인데 그건 하나님의 특은이에요. 그 사람이 죄가 있다거나 없다거나 깨끗하거나 그것은 아무 관계없어요. 하나님의 작품 이니까 하나님이 원해서 그렇게 된 것이니까 고층건물을 벼락이 때리면 맞지 않도록 내어놓은 철사 하나에요. 철사하나 피뢰침 이라고 수도자의 위치라는 것은 전 인류에게 내리실 하나님의 화를 제게 내려 주십시오. 예수님이 그런 분이었으니까 예수님이 남의 짐을 지기 위해서 하나님이 뽑아놓은 사람이요. 모든 인류의 죄를 위해서 내게 보복 하십시오. 저를 처벌 하십시오. 저를 죽여주십시오. 하고 그런 위치에 자기가 부름을 받았다고 그럽니다. 그런 위치에 자기가 성소를 받았다고 그럽니다. 거룩한 성(聖) 부를 소(召) 너는 이 일을 해다오. 그건 하나님이 맡기신 일에 불과하다. 그렇다고 그 사람이 죄가 없거나 무슨 잘났거나 똑똑하거나 그렇지 않습니다. 지지리 못난 것 불학무식한 것, 아버지 감사합니다. 옳습니다. 이런 직분을 어린 나에게 나타내 감사합니다. 학자가 아닙니다. 아버지의 뜻입니다. 지혜 있고 통달한 사람에게 숨기시고 철부지 어린아이에게 이 사명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지혜요. 무궁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그 직분을 사람은 온유하고 겸손해야 합니다. 두렵고 떨려야 합니다. 너무나 막중한 직분을 맡았습니다. 결코 자기가 처녀여서 맡은 것이 아닙니다. 정절을 지켜서 맡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특은입니다. 하나님의 권능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고 싶어서 하신 것뿐입니다. 그렇게 본을 보이신 분이 예수님 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서 예수님의 남은 짐을 대신지라고 그렇게 선택하는 것입니다. 대개 어머니 뱃속에서 부르시고 세 살 때 부르시고 열두 살 때 부르시고 열다섯 살 때 부르시고 그렇게 특별히 골라가지고 쓰신 겁니다. 그렇다고 자기가 그 받는 것을 자기 것인 양 내 것이라고 자랑하는 날에는 꺾어버립니다. 쓸모없습니다. 사랑이 없습니다. 그 사람 하나님의 은혜가 떠난 그 처녀의 눈에는 모든 세상이 더럽습니다. 모든 사람이 밉습니다. 모든 세상이 가까이 하기 싫어합니다. 저주를 합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 쓰 잘 데 없는 모델입니다. 자비의 폭탄이 되라고 인류의죄를 대신 지라고 보낸 것이 아무것도 사랑이 없는 빈 무덤이 되는 것입니다. 그럼 버림을 당합니다. 언제 버릴 것이냐? 스스로 버림을 당해 괴로워합니다. 세상이 밉다는 것은 버림을 당했다는 증거입니다.  본인 가슴에 자비가 떠났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스스로 저주를 받아가지고 빼빼 말라죽어요. 남 보기에 거룩하지 스스로 그것은 마귀입니다. 미움뿐입니다. 왜 하나님이 주신 특은을 자기 것으로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생각이 듭니다. 그렇게 생각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아니 그렇게 모든 분들이 보았다고 하겠습니다. 그렇게 생각 한번 해보고요.


 


아까 처음에 그렇게 이야기 했어요. 깊은 산속에 들어가서 수도자들이 자기만 깨끗하다고 했지만 나중에 깨닫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후에는 자기만 더럽다. 자기만 벌레다. 자기만 추하다. 이 더러운 자기에게 어찌하여 주님 오십니까? 황홀해서 감격해서 기뻐서 너무 미안해서 주님께 영광을 돌려드리고 이것은 주님의 사랑입니다. 주님의 자비입니다. 이 사랑을 어찌 갚아 드릴까요? 그래 사랑에 불붙으면 뛰어 넘는다고요. 세상도 미친 사람마냥 그래 예수님의 사랑을 전하는 것입니다. 자비를 전하는 것입니다. 나 같은 죄인도 구원받았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예수님은 당신위해 돌아가셨습니다. 예수님 앞으로 갑시다. 이 그 사랑 불붙는 기쁨 사랑은 평화 그걸 전하러 나온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역시 전도서 아니겠습니까? 복음을 전하는 사도겠지요. 그러므로 인제 수도원이 많이 있다면 수도사가 많이 있다면 참말로 성령을 받아버렸다면 수도원은 이미 온 겁니다. 아무도 모를 것입니다. 어디가 거지가 되어있던지 어디가 남의 머슴이 되어있던지 어디가 남의 집 식모가 되었던지 숨어살 것입니다. 흔적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수도원이 많이 있다면 죄인들을 모아놓고 훈련시키는 곳입니다. 죄가 벗겨 질 때까지 결코 의인들의 모임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어디에 쓰시려고 회개시키려고 잠시 머무는 곳이라 그겁니다. 그래 이 수도사들의 소원은 속죄자랍니다. 자기는 죄를 이렇게 자꾸 회개하고 예수님의 은혜를 갈망해서 있는 거라고 스스로 나는 속죄자라고 부릅니다.


 


그게 인제 만일 수사가 있다면 수녀가 있다면 수녀의 심정은 그렇다 이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밖에서 보는 것과는 다르다 이겁니다. 밖에서 보는 것도 바로 봐야 되겠다는 겁니다. 그렇게 봐야 바른 인재가 나오지 세상에서 쓸모 있는 사람이 나오지 그렇지 아니하면 이단이 아니겠습니까? 그릇된 지도가 아니겠습니까? 그릇된 기대가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생각하는 분들이 옛날 성인 성녀라고 그런 말씀을 저도 듣고 전한 것입니다. 조금 시간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지만 제가 실상은 여기 계화도에서 차를 타고 올 때 저는 저대로 참 희망이 부풀어 있어 희망이 있어 이 단체에 대해 특별히 단체에 희망이 있어 밖에서 오신 목사님들이 말하는 그런 희망이 아닙니다. 그건 목사님도 속고 스스로 속고 세상을 속여먹은 죄인들입니다. 그리고 그건 완전히 오해고 희망이 있는데 아 부푼 희망이 있다. 이 단체는 소망이 있다. 그런 희망이 있는데 어떻게 희망을 잘 알려드릴지 알 수 없습니다. 성령이 같이 하시기를 빕니다. 만일 이 단체가 땅위에 이 인류에게 봉헌 한다든지 제물이 된다든지 참 꽃 한 송이가 되어서라도 이 주위에 필수 있는 길이 있다면 한 가지 소망이 있다. 그런데 어제 밤인가 원장님이 인사하실 때 하신 말씀이 있지요. 우리가 앉은 자리는 겸허해야 하는 자리다. 겸손해야 할 자리다. 겸손만 한다면 이 인류에게  봉사하는 희망이 있다. 부푼 꿈을 안게 됐어요. 겸손만 할 수 있다면 만일 여기 모인 사람들이 인제 회개만 할 수 있다면 이 모임은 앞으로 희망이 있다. 그래서 특별히 이 단체의 이름이 무엇인지 모르겠어요. 이름도 없지만 여기 모인 사람들의 소망은 하나뿐인데 나사로와 더불어 대 인류의 대문간에 거적을 깔고 통곡하는 길이다. 그 길 뿐이다. 그런 영감을 줘요. 만일 이 모임이 땅위에서 뭔가 있어 지려면 나사로의 이야기만 듣지 말고 실제 나사로의 그 은혜를 받아가지고 인류의 대문간에 거적을 깔고 누워서 아니 무릎을 꿇고 (끊김)


   


 그런 희망이 생겼어요. 아까 여기 오기 전에 뭔 말씀을 드릴까하고 생각했어요. 개가 나사로의 헌데를 핧다주었다. 왜 그럴까? 이 성경 상 교훈이나 모든 사람들이 개돼지 같은 놈이라고 내가 돼지는 우리들이 길가에서 보면 교미를 해요. 그러니까 더럽다고 해요.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해요. 하나님이 보기에는 깨끗해요. 사람들 자기들의 생각으로 그렇게 보지요. 그럼 나사로는 어떤 마음을 품었을까? 이 부정한 개가 이 더러운 개가 이 나를 핧는다. 적어도 나사로의 눈에는 개가 천사로 보이고 사랑스러웠을 거예요. 너는 나보다 깨끗하다. 내 속에는 더러운 뱀이 있고 개가 수백 마리 들었는데 과연 너는 진실로 깨끗하다. 호세아가 그랬던가? 천지만물이 깨끗한데 나 홀로 더럽다. 나사로의 겸허 겸손한 마음 개를 얼마나 부러워했는지 알 수 없어요. 그러기 때문에 자기 상처를 핧다줄 때 천사가 와서 애무하는 양 얼마나 감격했던지 얼마나 울었을까? 개가 부러워서 차라리 개는 길거리에서 음란하고 천지만물이 보는데 아니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데 나는 사람을 속이고 천사를 속이고 하나님을 속여 먹은 더러운 죄인입니다. 나 같은 죄인을 천사이신 개가 이렇게 사랑해 주시니 이 은혜를 어찌할까요? 아마 나사로쯤 되는 사람은 그 개의 행위에 얼마나 존경을 했겠지요. 나사로쯤 되는 사람의 눈에는 천지만물이 깨끗해요. 개들이 깨끗하고 돼지가 깨끗하고 모든 교인들이 깨끗하고 모든 인류가 깨끗하고 나 하나만 회개한다면 하나님은 이 성을 용서할 것이다. 이 인류를 용서할 것이다. 희망 아래에서 그렇게 하고 앉아있었겠구나. 그렇게 생각이 들어요.


 


나사로가 만일 참말로 대문간에 앉았다면 예레미야 5장 1절. 예루살렘 거리를 돌아다니며 너희 눈으로 찾아보아라. 장마당 마다 찾아다녀 보아라. 바르게 살며 신용을 지키며 사는 사람이 하나라도 있으면 나는 예루살렘을 용서하리라. 나는 두고 맹세 하면서도 속에는 생각밖에 없구나. 그렇게 말했어요. 어찌되었든지 바르게 살며 신용을 지키는 사람이 하나라도 있으면 나는 예루살렘을 용서하리라 했어요. 과연 속죄 받은 사람 과연 예수님의 은혜로 죄를 다 용서 받은 사람 참 나사로마냥  인류를 위해서 참으로 겸손히 빌어줄 수만 있다면 전 인류의 죄는 다 용서 받을 것으로 믿어집니다. 제 말씀이 어디로 빗나갔는지 알 수 없어요. 제가 말씀 하고 싶은 말씀은 전혀 안되는데 어찌되었든지 인류의 구원은 예수님의 용서와 대용서와 대 사랑이 있을 뿐입니다. 판단을 한다 던지 정죄를 한다 던지 다른 길이 없습니다. 우리들도 예수님의 제자라면 전 인류를 향해서 사랑이 있을 뿐입니다. 잘못하면 용서하고 덮어주고 희생해줄 뿐입니다. 적어도 나사로가 앉았던 자리는 전 인류를 향해서 복을 빌어주고 눈물을 흘리며 나만 더럽다고 겸손하던 자리가 아닌가? 그렇게 소감을 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차로 오는데요. 어떻게 그 마음에 희망이 부풀든 지요? 그 말을 잊어버릴까봐 편지봉투를 내주면서 적으라 했어요. 우리의 앉을 자리는 나사로와 더불어 거적을 깔고 대 인류 대문 앞에 나사로와 더불어 겸손히 거적을 깔고 앉아서 하나님께 비는 자리입니다. 예수님과 더불어 겸손히 대 인류를 섬기는 가장 끝 사랑이 되는 것입니다. 모든 종교나 종파나 종파에 희생제물이 되어 화목을 위하여 한 알의 밀알이 되는 것입니다. 이름도 성도 없는 소녀 마리아가 성모가 되듯이 성모님과 더불어 대 인류를 안아주는 자비의 어머니가 되는 길, 평화의 시녀가 되는 길입니다. 대 의사이신 예수님의 보조간호원이 되는 길입니다. 예수님이 심장이 되어 우주를 안아주고 인류를 품어주는 암탉이 되는 것입니다. 아무런 말이 없이 한 떨기 진달래가 되어 피었다가 지는 것입니다. 대사제이신 예수님의 피를 의지하여 성인과 죄인을 차별 없이 가슴에 품어주는 상대적인 사랑을 초월하여 절대의 사랑을 품은 자비의 어머니가 되는 길입니다. 정절을 지킨 사람도 못 지킨 사람도 다 똑같이 하와 할머니가 잃어버린 불쌍한 동생들이요. 잃어버린 어린양이고 보면 차별 없이 온유하고 겸손하게 안아주는 길입니다. 인류는 한바탕 모두 잃어버린 어린양이요. 홀로 찾아오신 대 목자 예수님을 받들기 위하여 예수 강보에 싸인 예수와 더불어 마구간으로 내려가서 이름 없는 목동이 되는 것입니다.


 


절대의 자비를 완성하기 위하여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성스럽게 흘리신 보혈을 힘입어서 구원의 은총에 감격하여 또 한사람의 나인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죄 묻은 피일망정 바쳐드리는 것입니다. 찬미의 제사를 부르면서 예수님이 걸어가신 자비의 길을 따라가는 길입니다. 은총으로 순종하신 가장 그 계집종이었던 성모님을 본받아 자기도 성령께 순종하고 능히 못할 것이 없으신 성령을 잉태하는 길입니다. 은총으로 예수를 낳으신 성모님과 더불어 성령으로 인류평화와 자비와 기쁨의 아이를 출산하는 길입니다. 우리에게는 이와 같은 소망과 믿음과 사랑의 길만이 내 영혼의 완성과 더불어 한 인격의 완성 또한 전 인류의 완성 전 우주완성이 가능함을 주님께서 일깨워 주셨습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은총을 의지하고 사는 사람에게는 소망이 있는 길입니다. 우리들이 앉을 자리 우리들이 앉을 자리는 마지막 끝자리 우리의 소망은 가장 낮은 자리 부잣집 대문간에 앉아있는 자리가 되고 우리의 믿는바 그 자리를 소망을 품는 자리이고요. 가장 낮은 자리가 우리에게 소망을 주는 자리, 또 우리가 예수님의 은총을 바라는 것은 우리와 예수님과의 사랑의 일치를 원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경 목적은 영혼이 완성하고 영혼이 구원을 받는 길입니다. 은총으로 예수님의 사랑을 받아서 절대 자비의 예수님과 하나가 되어서 그 자비의 사랑을 찾아가는 길입니다. 아니 가장 잃어버린 동생 죄 많은 사람을 찾아가는 길입니다. 그렇게 써놨군요. 그렇게 차를 타고 올 때에 아 이제 우리 단체에 앞으로 살길이 있다. 희망 하나뿐이다. 스스로 자기가 죄인인 것을 자각하고 통회 눈물을 흘리면서 거적을 깔고 비는 자리다. 인류가 부자라면 대문간에 거적을 깔고 앉은 나사로를 우리들이 산다면 나도 살고 남도 산다는 희망이 있다. 그런 참 영감을 주십디다요. 그래 인제 그 뒷받침으로 성경을 보고 싶은 데는 참 많아요. 그런데 제가 뭐 성경안보고 가르쳐 주지 않습니까? 제가 지금 인용하고 싶은 성경을 보겠습니다. 첫째 누가복음 18장 9절로 14절. 세리의 기도. 큰소리로 한번 읽어주시고요. 또 두 번째 마태복음 21장 28절로 32절. 두 아들의 비유. 누구든지 한번 읽어 주십시오. 찾으셨으면 읽어주세요. 누가복음 18장 9절로 14절 마태복음 21장 28절로 31절.


 


믿고 남을 업신여기는 사람들에게 예수께서는 이런 비유를 말씀하셨다.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는데 하나는 바리새파 사람이었고 또 하나는 세리였습니다. 바리새파 사람은 잘하는 것이 있어서 이렇게 기도하였습니다. 오 하나님 저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욕심이 많거나 부정직하거나 음탕하지 않고 또 이 세리와 같지 않은 것을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저는 일주일에 두 번이나 단식하고 모든 수입의 십분의 일을 바칩니다. 한편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하늘을 우러러볼 생각도 못하고 자기 가슴을 치며 오 하나님 죄 많은 저를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기도를 하였습니다. 명심해서 들으시오. 하나님에게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받고 집으로 돌아간 사람은 바리새파 사람이 아니라 바로 그 세리였습니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면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면 높아질 것입니다. 네 여기서 본 그 비유신데 대문간에 앉은 나사로는 세리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그 심정을 살펴보면 또 부잣집 그 잔치하는 부자 영감은 부자 주인은 역시 인제 그 높은 사람들 그 심정을 비추어 본다고 그랬습니다.


 


그래 우리의 희망은 어디에 있습니까? 한번 따라 읽읍시다. 저는 이 대목이 참 우리의 신앙은 이 마음을 품은데 있다 그런 뜻입니다.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가슴을 치며 오 하나님 죄 많은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이 말이 내 기도가 된다면 아니 이 말이 특별이 단체여, 이 단체 이런 인격으로 봐서 이 단체가 사람이라면 만일 이 모임이 땅위에서 필요한 단체가 될 수 있다면 희망은 그것뿐이야. 여기 모인 사람이 가장 죄 많은 사람이 모인 것으로만 그렇게 성령을 비춤을 받아가지고 겸손해 질수 있다면 자기도 복 받고 인류에 보응할 수 있지만 만일 목사님의 칭찬대로 속고 있다면 목사님도 불쌍하고 여러분도 불쌍하고 하나님의 뜻은 영원히 그 축복을 못 내리지 않으시겠느냐? 그런 생각이 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제 개인 심정은 그렇습니다. 죄 많은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그러면 마음이 시원하고 희망이 있어요. 영혼의 앞길이 훤히 보여요. 이 밤은 초생 달이요. 이 밤은 삼일 밤 이지만 아무 때고 보름달이 되리라는 그 희망이 있습니다.


 


이 모임이 겸손해 질수만 있다면 앞으로 보름달이 되고 성화가 되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희망이 있지만 목사님들이 칭찬해 준대로 그 모양 그대로 속여먹고 있다면 자기들도 버림을 당하고 세상에 얼마나 많은 피해를 입힐 것인가 하는 두려움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만이 진실로 제 말이 아니고 하나님의 축복이 있다면 꼭 그래야 되어야 할 것으로 믿고 그래 질수 있으리라. 믿기 때문에 희망이 있는 것입니다. 반드시 회개하고 재를 쓰고 회개할 수 있는 희망이 있다.  또 마태복음 21장 28절 봐 주세요. 큰소리로 봐 주세요. 또 이런 것은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떤 사람이 송아지를 주었는데 먼저 맏아들에게 가서 얘야 너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 하여라 하고 일렀다. 맏아들은 처음에는 싫다고 하였지만 나중에 뉘우치고 일하러 갔다. 아버지는 둘째아들 에게 가서도 이 같은 말을 하였다. 둘째 아들은 가겠다는 대답만 하고 가지는 않았다. 이 둘 중에 아버지의 뜻을 받든 아들은 누구이겠느냐? 하고 예수께서 물으셨다. 그들이 맏아들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것이다. 네 이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지요. 나는 분명히 말한다. 이 시간에도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옛날 말이 아니에요.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고 있다. 이것은 현재사예요. 2천 년 전에 예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지만 오늘도 이에요. 오늘도 현재에요. 오늘 이 하나님 말씀을 듣는 이 많은 사람들 가운데 과연 자기가 겸손한 영혼이라면 아 세리와 창녀는 나보다는 깨끗합니다. 아버지 저를 용서해 주십시오. 그런 영혼이 많이 있다면 지금 하늘나라로 들어가고 있을 겁니다.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고 있다. 따라서 읽으십시오. ‘나는 분명히 말한다.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고 있다.’ 이것은 예수님의 말씀이지 비유가 아닙니다. 판단이 아닙니다. 축복입니다. 조금치도 꾸지람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사랑에 갈망 그 뜨거움이 여기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내가 땅위에 온 것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다. 과연 세리와 창녀는 누구냐? 내 동생들이다. 내 잃어버린 양이다. 나는 그 동생들 때문에 왔다. 나는 그들을 살리기 위해서는 피를 바치겠다. 생명을 바치겠다. 나는 아버지하고 그렇게 하기로 했다. 차라리 나를 죽여주시고 동생들을 살려줍시다.


 


십자가에서 임종하시기 전에 아버지, 아버지 내 동생들이 몰라서 이럽니다. 용서해 줍시다. 이것까지 용서해 주세요. 그 사랑은 불이 붙었어요. 행여 라도 동생들이 철몰라서 자기를 죽이려고 하는 것을 몰라서 하는 것뿐입니다. 용서해 주는 것이 예수님의 아니 체면 인사가 아닙니다. 용서 기어이 하지 않고는 자기가 못 배기는 것입니다. 왜 자비심이니까 절대의 자비니까 하나님의 아들이니까 지금은 그런 인격을 또 원하십니다. 이 시간에 절대의 자비를 가지고 전 인류의 모든 것을 품어 안을 수 있는 전 우주를 품어 안을 수 있는 인재가 필요한 것입니다. 인재를 구하고 있습니다. 인재를 부르시는 겁니다. 한 인격이 다시 태어나기를 갈망하십니다. 인격이 오시면 반드시 대문간에 나사로와 같이 대문간에 거적을 깔고 앉아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아니고는 인류를 구원할 수 없고 위로할 수도 없습니다. 그렇게 들린다는 말씀입니다. 그렇게 희망이 보인다는 말씀입니다.


 


만일 이 시간에 특별히 처녀들, 자기가 세리와 죄인이라고 창녀보다 더 죄인이라고 자각했다면 실제 사실이니까 하나님이나 천사가 사진을 찍어봤다면 사실 그런 죄인일 것이 사실이니까 본인이 스스로 자각만 해 준다면 아버지는 얼마나 사랑하시며 감격하실까? 찾았으니까 자기 자식을 찾았으니까 잔치를 하실 거야. 얼마나 감격해 손을 잡으실까 그러나 자신이 자기한테 속고 또 자기가 목사님들을 속여먹고 또 단체가 되어가지고 모두 신자들을 속여먹고 또 자기들이 합세되어가지고 인류를 속여먹고 자기들도 괴롭고 자기들도 위선이고 세상에는 아무 도움이 없는 맛 잃은 소금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사실이 그러니까 제 말이 아니니까 예수가 볼 때 그러니까 하나님이 볼 때 그러기 때문에 껍질은 반듯 한 처녀지만 속으로는 창녀보다 더 창녀 아니 하나님이 보실 때 그런단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을 하나님이 찾으러 왔다는 말씀입니다. 아니 예수님은 그 사람 때문에 피 흘렸다는 말씀입니다. 만일 자기가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면 예수님 하고는 아무 관계없는 사람이야. 예수님의 덕을 못 볼 사람이야. 예수님의 은혜를 못 받을 사람이기 때문에 불상한 영혼이 아니겠습니까? 그러기 때문에 자기가 하나님의 비췸을 받고 하나님의 그 사랑을 자기가 깨달을 수만 있다면 그 거짓을 항복하고 자기 위선을 항복하고 지금이라도 늦지 않으니까 ‘주님 자비하신 아버지 이 죄 녀를 불쌍히 보시옵소서.’ 그런다면 얼마나 하나님도 기쁘고 천군천사도 기쁘고 전 인류에게 소망이 되고 자기도 평안하고 남도 평안하고 인류에게 평화를 줄 수 있을까? 그런 희망이 있을 뿐입니다. 그렇게 희망이 보여 집니다. 그렇게 생각을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면 하신다고 생각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여러분들이 부르고 싶은 찬송도 좋고 성가도 좋고 찾아서 부르십시다. 



    동체대비(同體大悲) (동광원 영성)
절대자 하나님에 대한 사랑으로 무지무욕의 청빈 생활이 나오게 되었고, 일하는 것이 기도라 생각하여 모두 노동으로 협동하고 서로를 정직하고 진실하게 섬기면서 바른 농법으로 버려진 땅을 옥토로 되살려 자급자족하였으며, 세상에서 버림받은 고아들과 병자들을 형제자매로 받들어 돌보지 않을 수 없었기에 고아원을 운영하고 복지법인을 세우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와 같은 동광원의 영성을 한마디로 동체대비(同體大悲) 사랑의 영성이라 해봅니다. 진리의 사랑은 무아의 덕입니다. 욕망을 초월한 사랑은 무상입니다. 복음 삼덕 중 가난이란 태양의 빛같이 우주적 사랑의 계시입니다. 참된 가난은 우주와의 합일을 뜻합니다. 완전히 자기 의지의 이기심이 녹아져서 우주와 하나 될 때 하느님과 하나 됩니다.
이런 동광원의 모습을 두고 김흥호 선생은 다음과 같이 찬송했습니다. 기심청정여허공(其心淸淨如虛空) 기의부동여지리(其意不動如智異) 그들의 마음은 빈 하늘처럼 깨끗하고 그들의 뜻은 지리산의 반석처럼 굳세고 단단하여라
- 기심청정여허공(其心淸淨如虛空) 기의부동여지리(其意不動如智異)그들의 마음은 빈 하늘처럼 깨끗하고 그들의 뜻은 지리산의 반석처럼 굳세고 단단하여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