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산

바다가 우는 길목

mamuli0 2008. 7. 4. 17:36

바다가 우는 길목

명량해협과 이순신

발표자: 연 산

◆만남과 인사-진도대교

안녕 하십니까? 저는 여기서 4km 떨어진 진도터널 앞마을인 평무덤에 사는 연 산 입니다. 마을 이름이 평무덤 입니다. 이름이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평무덤은 본래 지명 이었는데 간척지가 만들어지고 사방에서 이주민이 오게 되어 형성된 마을이 지명 따라 평무덤이 된 것입니다. 전해 오는 이야기로 평무덤은 1597년 정유재란 때 많은 사람들이 죽어 시신들을 수습해 한꺼번에 평장해서 만들어진 무덤이 있던 곳이란 데서 부쳐진 이름이라고 합니다. 지금은 바다에서 멀리 떨어진 곳이지만 그때는 동서 바다를 볼 수 있을 정도로 바다와 인접한 곳이며 녹진 에서 벽파진에 이르는 가장 큰 만 안쪽이기도 합니다. 그때 명량해협 해상과 녹진 벽파진에서 희생된 전사자들의 시신이 많이 떠밀려 들어와 그곳 해안에 평 매장 했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들어가는 말

 

여러분 저 바다를 보십시오! 장마철 큰 강물이 흐르듯 빠른 속도로 거품을 일으키며 거세게 요동치고 있습니다. 저 물길은 6시간 후에는 반대 방향으로 흐르게 됩니다. 하루에 4번 물길이 바뀌고 물 흐름은 차이가 있습니다. 가장 빠를 때가 시속 40km이고 느릴 때가 10km입니다. 이 바다는 1597년 조선 수군의 삶과 죽음이 교차하던 바다입니다. 충무공 이순신의 함대는 이 길목에서 12척의 전함으로 일본 수군 330여척과 싸웠습니다. 이순신 함대의 병력은 약 2천여 명, 그리고 적군의 병력은 12만여 명으로 추산되고 있습니다. 이순신 함대는 이 싸움에서 적선 31척을 격침시키고 적 2만7천여 명을 수장시켰고 나머지 일본 함대는 순천 쪽으로 달아났습니다. 서해안을 돌아서 서울로 진공하려는 일본 수군의 전략은 여기서 좌절되었던 것입니다. 충무공 이순신은 이 물목을 지켜냄으로써 왜란을 종식 시킬 수 있는 큰 공을 이루어냈습니다. 이 이야기와 녹진 에서 벽파에 이르는 주변 설명을 해 드리려고 합니다. 그럼 버스에 오르셔서 주변 전 해역을 볼 수 있는 망금산 으로 가겠습니다.

◆대교에서 전망대로 가는 길에..

1597년 4월 1일 감옥에서 풀려나 도원수 권율 밑에서 백의종군하던 충무공 이순신은 7월 18일 그러니까 원균의 함대가 전멸당한 이틀 후 조선 수군의 전멸소식을 듣게 되고 7월 23일자로 된 삼도수군통제사 임명장을 8월 3일 받게 됩니다. 이때부터 충무공은 기민하게 경상 우수사 배설이 가지고 온 전선 12척을 수리 보강하여 병력을 충원하고 무방비 상태로 버려진 병기와 군량미등 병참품들을 왜군을 앞서 가까스로 한발 빠르게 확보하였습니다.

8월 20일 드디어 12척의 군함으로 함대를 구성하고 직접 지휘하여 노량진을 출발하여 이진으로 이동합니다.

8월 26일 기다리고 있던 왜군의 척후선 8척이 이진의 24km 거리까지 접근해 왔습니다. 왜선의 추격을 발견한 충무공은 슬그머니 함대를 어란진 으로 옮겨 갔습니다.

 

8월 28일 오전 6시 마침 일본 척후선 8척이 공격해 왔습니다. 이에 맞서 조선 수군 괴멸 이후 처음으로 적을 공격하니 적은 놀라 도망치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갈두까지 추격하다가 장도에 들려 야음을 타고 벽파진에 옮겨 진을 쳤습니다.

왜군 55척의 대 함대가 조선 함대가 어란진에 있는줄 알고 몰려갔으나 조선 함대가 없음으로 12척의 별동대를 조직해 인근 섬들을 수색 했습니다.

벽파

어란

9월 7일 오후 4시쯤 12척의 별동대가 벽파진에 가까이 오자 충무공은 앞장서서 공격해 앞으로 나가니 적들은 또 도망쳤습니다. 이에 충무공 이순신은 적들의 야습을 예상하고 12척의 군함들을 강력한 지자총통으로 무장해서 바위 곁 어두운 곳에 매복해 두고, 대신 적의 눈에 잘 띄는 곳에 작은 배들을 묶어 놓아 그 위에 불을 밝혀 적의 표적이 되게 하였습니다. 예상한 대로 저녁 10시경 과연 20여척의 왜군 함대가 소리 없이 벽파진 안으로 작은 배들을 향해 기세 좋게 달려들 때 숨어있던 조선함대가 불시에 튀어 나오면서 함포를 발사하자 선봉에 있던 적함들은 모두 격침되고 일부 탈출한 함선들도 참혹한 피해를 입고 도망쳤습니다. 여기까지가 이순신 장군이 감옥에서 풀려 난지 5개월, 수군통제사 임명장을 제수한지 불과 한 달 남짓 만에 있었던 개요입니다.

이로써 숙명의 명량해전이 시작 된 것입니다. 벽파진 야습에 실패하고 돌아온 함대를 보고 일본 해군의 수뇌부는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괴멸된 줄 알았던 조선 수군이 건재해 있을 뿐 아니라 그 조선 함대의 지휘관이 이순신일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일본군에 있어서 이순신은 공포의 대상이 되어 있었습니다. 수적, 전력 차이는 아랑곳없이 단 한 번도 이겨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수륙병진 작전상 남해를 돌아 서해로 북상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명량해협을 통과해야 하였으므로 일본 전투함들을 모두 벽파진에서 70리(28km) 떨어진 어란진에 집결하도록 했습니다.

벌써 망금산에 도착했습니다. 다음 이야기는 차에서 내려 전망대에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망금산에서..

 

먼저 주변 지리부터 설명 해 드리겠습니다. 이곳은 명량해협을 한눈으로 살펴 볼 수 있는 감시 초소로 적격입니다. 명량 해전 시 아군 세를 과시하기 위해 여자들을 남장시켜 강강수월래를 했다는 곳이기도 합니다. 먼저 진도대교를 봐주십시오. 길이 484m의 국내 최초의 쌍둥이 사장교로 제1교는 1984년에, 제2교는 2005년 12월 15일에 복합 사장교로 (1등급,총중량 43,2톤까지) 조명시설을 갖춰 화려한 자태를 뽐내게 되었으며 장흥 땜을 수원으로 한 광역상수도관(450m/m)이 내부로 통과합니다. 다리 밑 해협은 300m 가 못되고, 명량해협 평균치는 500m입니다. 서울 한강 폭 정도입니다. 그러나 양쪽으로 암초가 널려 있고, 물살이 빠르니 배가 이용할 수 있는 곳은 불과 130m정도 뿐 입니다. 전설에 대교 교각 아래에 쇠줄을 연결하여 적선이 올 때 쇠줄을 감아 적함을 쓰러트렸다고 합니다.

 

 대교 멀리 보이는 마을이 우수영입니다. 바다 건너가 곧 바로 전라 우수영인 셈이지요. 물길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저 멀리 보이는 섬이 왜군 함대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임하도입니다. 그 건너편에 조선소가 있습니다. 조선소 뒤쪽 여기서 서북방향으로 노적봉 같은 덕굴산이 보이지요. 많은 군대가 있음을 보여주려고 군량미 노적으로 위장해서 군졸들로 돌면서 지키도록 하고, 해협 바닷물에 백회를 풀어 쌀 씻은 물처럼 보이게 했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그때는 지금 보이는 주위 넓은 들도 다 바다였고, 서남쪽 넓은 들도 모두 바다입니다. 금골산 자락 끝이 제가 온 평무덤 자리입니다. 저 멀리 보이는 산자락 뒤가 용장산성이고 그 앞쪽에 벽파진이 있습니다. 이 아래 큰 섬이 피섬 이라고 하는데 명량해전 시 많은 사람들이 죽어 피가 흥건히 섬 주변에 배어 지어진 것이라고 합니다. 벽파에 있는 이충무공 대첩비문을 보아도 수많은 백성들이 다 함께 이 전쟁에 참여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고장 백성들 모두가 나서서 울돌목을 지켜내었던 것이지요. 이제 차에 오르셔서 산 아래로 내려가 충무공 기념 공원을 둘러보시면서 10분간 자유 시간으로 휴식을 취 한 후 그 당시 주 전함인 판옥선을 유람선으로 개조한 배편으로 울돌목 바다물결 위에 몸을 실어 벽파로 가겠습니다.

 

*[참조: A.해상 관광. B.육로 관광-해안 도로로도 갈 수 있고, 기존도로를 이용해서 금골산 해언사와 용장산성을 들려 갈수도 있다.]*공원(선착장 대기실):동영상 상영

◆망금산 에서 벽파까지

잘 구경들 하셨습니까? 이제 우리 모두는 410년 전으로 돌아가서 조선 수군이 되었습니다. 동력선이니 노 저을 필요 없고 적군이 없으니 싸울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나 이곳은 물길이 세고, 수심도 깊고, 소용돌이 쳐 흐르기 때문에 아주 위험합니다. 한분도 빠짐없이 구명조끼를 착용해 주시고 제자리에 착석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제 지난 이야기를 이어 해 드리겠습니다.

9월 9일 왜군은 전함 200여척과 한강 마포에 상륙을 준비하던 10만군이 어란진 으로 집결한 후 척후 선 2척을 벽파진 으로 보냈고 이를 목격한 충무공 이순신은 아무런 대책도 세우지 않고 관망 자세로 일관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적을 벽파진 으로 유도하려는 계책 이였습니다.

 

9월 14일 어란진을 감시하던 척후 군관 임준영이 적의 침입이 가까웠음을 알려왔습니다.

9월 15일 적의 총 공세가 임박하자 충무공 이순신은 해가 떨어지기를 기다렸다가 순류를 타고 전 함대를 몰아 명량해협을 통과하여 벽파진에서 임하도로 이동시켰습니다. 명량해전의 하루 전입니다. 충무공 이순신이 적 함대를 넓은 바다에서 맞기로 각오한 것입니다. 이 넓은 바다에서 교전을 개시해서 울돌목의 좁고 급한 물살 속으로 적을 밀어붙이는 작전 이였습니다.

 

임하도 앞 바다는 썰물 때는 명량해협 쪽의 조수가 합쳐 저서 보름날의 최고 유속은 시속 40km에 이르고 밀물과 썰물은 6시간 만에 바뀌는데 물의 흐름이 바뀐 지 3시간이 지나면 유속은 최대치를 이룹니다. 물길이 거꾸로 돌아서는 사이마다 바다는 문득 잔물결 한 점 없이 거울처럼 고요해지고 질풍노도를 예비하는 이 적막의 순간에 바다는 더욱 무섭습니다. 여기는 한반도 전 해역에서 가장 사나운 물길입니다. 밀물과 썰물이 바뀌는 사이에 유속이 10km 이하인 시간은 1시간 남짓입니다. 이 1시간이 싸움의 승패가 좌우되는 운명의 시간입니다. 유속이 40km에 이르면 아무리 배가 많다 해도 배는 제어능력을 상실하고 물살에 휘말리고 맙니다. 명량해전은 이 바닷물의 시간표에 따라서 진행되었습니다. 이순신의 함대는 바닷물의 호흡 위에 실려 있었고 전투는 보름 다음날인 9월 16일(양력 10월 26일)아침에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바다가 가장 거친 날이었는데 이날은 우리 조선에 천행의 날이었던 것입니다.

임하도로 함대를 이동시켜서 전투 배치를 끝낸 저녁에 이순신은 휘하의 장졸들을 불러 모아 놓고 다짐했습니다. “‘병법에 이르기를 죽으려 하면 반드시 살고 살려 하면 죽는다.’ 고 하였다.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명도 능히 당해 낼 수 있다. 하였는데, 오늘 우리를 두고 이른 말이다. 너희들은 추호도 살려는 생각을 품지 마라라. 조금이라도 명령을 어긴다면 반드시 군법으로 처단하되 결코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1597년 9월 16일의 명량해협 바다는 상오 7시께 큰 사리의 만조를 이루었습니다. 왜군의 연합함대는 구루시마 미치후사를 선봉으로 하여 도도 다카토라와 가토 요시아키등이 합세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이 만조의 앞자락을 타고 해남반도의 서쪽 연안인 어란진 포구에서 발진했습니다. 왜군 함대는 이날 정오 무렵에 명량해협을 통과하여 임하도 앞 바다로 진출했습니다. 330여척의 대 함대였습니다. 두 함대는 밀물 위에서 대치했습니다. 도망친 줄로만 알았던 조선 수군이 가로 막고 있는데 기함에 오른 장기는 분명 수군통제사 이순신으로 되어있었음으로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기함이 선봉에 서서 일본 함대를 기다리고 있는데 그 뒤로 11척의 전함이 포진하여 결사항전의 의지를 불태우고 있었으며 또 그 뒤 멀리 한 무리의 선박들이 있었으나 큰 전선으로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날 이순신의 싸움은 일인 대 만인의 싸움이었습니다. 적은 330여척에 올라탄 12만 여명의 일본 수군 전체였으며 이쪽은 전투 초기부터 겁에 질려 달아날 기회만 찾는 2천여명에 불과합니다. 아군 정찰병들은 바다를 뒤덮은 적선의 수를 보고하지 못하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적선들이 명량으로 몰려온다.’는 제보였습니다. 또 이 바다가 아군에게는 유리하고 적군에게 불리한 바다라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사지는 피아간에 공통된 사지일 뿐입니다. 양쪽 지휘관이 이 바다의 특징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다만 바다의 물결 위에 올라타서 바다의 거대한 힘에 편승한 쪽에게 승리의 기회는 크다 할 수 있습니다. 바다 위에서 적과 싸울 수는 있지만 뒤척이는 바다 위에서 바다와 싸울 수는 없습니다. 이순신은 절망을 절망으로서 긍정하는 죽음의 힘으로 이 아수라를 돌파합니다.

‘죽으려는 자는 반드시 살고 살려는 자는 반드시 죽는다.’는 자신의 말을 그대로 실천했고 그리고 입증했습니다. 삶의 길은 죽음 속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죽음 앞에서 대안을 설정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달아나거나 머뭇거리는 부하들을 붙잡아 놓고 그 대안 없음을 가르칩니다. 이 아수라 속에서 살길은 애초부터 없는 것이고 혹시 죽음 안에서만 살길이 있다. 싸우다 죽든지 달아나다 죽든지 군율에 죽든지 죽음의 방식만이 선택의 길이였습니다. 전투 초기에 이순신의 작전 명령은 해풍에 씻기는 공허한 메아리만 울렸을 뿐 함대는 장수의 명령에 따르지 않았습니다. 후미의 군관들은 먼 뒤로 물러나서 눈치만 볼 뿐 나아오지 않았습니다. 이순신의 대장선 한척만이 적선을 좌충우돌하며 총통을 쏘아대고 있었습니다. 이순신은 이 겁 많고 말 안 듣는 부하들을 목 베어 죽이려 했으나 이동할 시간이 없었습니다. 북을 치고 공격 깃발을 세우자 후미의 지휘관들은 비로소 배를 저어 좌우 옆으로 나왔습니다.

 

거제 현령 안위(1563-1636)는 용맹한 지휘관이었습니다. 그는 1594년 당항포 해전때 큰 공을 세웠고 1597년에는 부산의 왜군 화약고에 불을 질러 일본군이 장악하고 있던 부산 성을 전소시킨 일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안위도 명량해전 초기에는 함대의 후미에서 머뭇거렸습니다. ‘안위야, 군법에 죽고 싶으냐? 네가 군법에 죽고 싶으냐? 도망간다고 어디 가서 살 수 있을 것 같으냐?’라고 이순신은 머뭇거리는 안위를 꾸짖었습니다. 안위는 적선 속으로 돌격했고 적선에 의해 겹겹이 포위당한 상태에서 용전분투했습니다. 안위의 싸움에는 그야말로 죽음 속에서 살길을 찾으려는 자의 단말마적 비장함이 있었던 것입니다.

미조항 첨사 김응함도 전투 초기에 후미에서 머뭇거렸습니다. 그러나 그는 비겁한 군인이 아니었지요. 이순신의 꾸중에 의해 그의 군인다운 용기는 되살아났습니다. ‘너는 중군장 으로써 멀리 피하고 대장의 위급을 구하지 않으니 그 죄를 어찌 면할 것이냐? 마땅히 즉각 베일 것이로되 적세가 급함으로 우선 공을 세우게 한다.’ 김응함은 즉각 돌진했습니다. 안위와 김응함은 이날 해전에서 큰 공을 세웠고 이 두 군관의 배들이 돌격해 들어가자 다른 군관들의 배들도 돌격 대열에 가세해서 일본 함대는 조선 수군의 공격으로 전투 대열이 완전히 교란되었고 썰물에 밀려 명량해협 쪽으로 쏠려들면서 저희들 끼리 서로 부딪치며 수장 되었고 일부는 도주했습니다.

적장 미치후사는 이날 전투에서 전사했습니다. 이순신은 물에 뜬 미치후사의 시체를 갈고리로 건져 올려 토막을 내서 적에게 내보이니 왜군은 혼비백산하여 멀리 순천 앞 바다 까지 모두 도망쳤습니다. 그렇게 해서 명량해전은 이순신 함대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전투가 끝났을 때 저녁 바다는 물결이 높았습니다. 이순신은 지치고 배고픈 함대를 수습해서 당사도로 진을 옮겼습니다. 9월 17일 새벽이었습니다.

명량해전은 수장시킨 적선과 적병의 수도 크지만 그 전략적 의미는 더 큽니다. 정유재란 때 일본군은 중군 좌군 우군의 세 방면으로 공격해 들어왔습니다. 우군은 육로를 따라 내륙을 진공해서 서울로 향했고 중군과 좌군은 수군과 합류하여 남해안을 돌아서 서해를 따라 북상하여 한강 어귀에서 서울로 진공, 우군과 합치는 것이 일본의 종합 전략이었습니다. 그런데 명량에서의 참패로 남해를 우회해서 서울을 기습하려는 일본의 전략은 수포로 돌아갔습니다. 전략의 기초가 무너진 것입니다. 명량에서의 승리는 7년 전쟁을 끝내는 결정적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이 참패의 결과로 조선으로 진공할 수도 없었고 이미 조선 반도에 상륙시킨 군대를 철수할 수도 없게 되었습니다. 그는 명량에서의 참패 이후 ‘조선에서 군대를 철수 시킨다’는 유언을 남겨 놓고 죽었습니다. 자 이제 벽파항에 내려 충무공 전첩비를 보겠습니다.

◆이충무공 전첩비에서.

 

여기서 진도읍은 서편으로 12km 떨어져 있습니다. 이곳은 진도에 들어오는 항구요 명량해협의 길목이기도 합니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 된지 8년이 되던 1956년 초겨울 날 우렁찬 해군 군악대의 주악과 함께 세워졌습니다.

진도군 고군면 벽파리 산 682-4 번지입니다. 보시는 대로 정남향이며 진도 군민의 성금으로 가로 14m, 세로 18m의 넓이로 암석을 다듬고 석축을 쌓아 이충무공의 넋을 담은 동양 최대의 11m 높이의 비석이 왜구들의 땅 대마도를 굽어보며 장엄하게 버티고 서있습니다.

비석의 주추는 272cm의 길이에 333cm의 폭으로 181cm의 높이를 한 거북이를 돌로 만들어 그 등 어리에 가볍게 비석을 세웠습니다. 화강암으로 된 비석은 높이가 666cm, 폭이 121cm, 두께가 61cm나 됩니다. 머리에는 쌍용이 휘감다 못해 양편으로 머리를 내놓고 있는데 높이가 121cm, 가로가 212cm, 세로 121cm이며 무게는 15,000근이나 됩니다.

아침이면 햇살이 부디 쳐 눈이 부시고 석양이면 비석의 그림자가 찰랑이는 바닷물까지 와 닿습니다. 서기 1597년(선조30년) 정유재란 당시 이순신 장군이 이곳에서 12척의 적은 배로 330척의 왜선을 통쾌하게 격파한 지역입니다.

7년간의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던 결정적인 계기도 되었지만 일찍이 세계사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대승전지 이기도 합니다. 1904년(광무2년) 러일 전쟁을 승리로 이끈 일본장수 도고해 이하찌로를 일본 명치천황이 칭찬을 거듭하고 영국의 넬슨 제독을 비유하면서 세계 제일의 명장이라고 추겨 세우자 일본 장수가 말하기를 넬슨 제독에 비하는 것은 달게 받을 수 있으나 세계 제일은 조선에 이순신 제독이 있기 때문에 자기는 될 수 없다. 하면서 저는 우수한 군함과 용감한 군대 충분한 군수 보급을 받고서도 이기지 못하면 말이 되겠습니까만 이순신 장군은 명량해협에서 함선, 장졸, 군수품 보급 하나 없이도 12척의 적은 배로 333척의 일본 배를 전멸 시켰으니 어찌 감히 신이 이 제독의 우위에 서겠습니까? 하였다는 것입니다.

당시 향토 출신인 김수생을 비롯하여 많은 사람들이 싸우다가 명량 수중에 호국의 영으로 사라졌습니다. 전쟁준비를 이 고장에서 하였고 전투가 바로 이곳에서 전개되었으니 그 형편인들 오죽했겠으며 더욱이 박후령, 박인복 부자간, 양응지와 양계현 같이 숙질간, 조응량과 조명신과 같은 부자간이 전쟁에 출전한 것을 보더라도 가가호호 장정은 모두 자진해서 전쟁터에 나갔을 것입니다.

1957년 11월 29일에 제막식을 한 이 비석은 노산 이은상 선생이 비문을 지었고 진도 출신의 소전 손재형 선생이 걸작을 남겼습니다.

비문을 한번 읽어보십시다.

 

◆충무공 벽파진 전첩비

벽파진 푸른 바다여 너는 영광스런 역사를 가졌도다 민족의 성웅 충무공이 가장 외롭고 어려운 고비에 고작 빛나고 우뚝한 공을 세우신 곳이 여기더니라 옥에서 풀려나와 삼도수군통제사의 무거운 짐을 다시 지고서 병든 몸을 이끌고 남은 배 12척을 겨우 거두어 일찍 군수로 임명되었던 진도 땅 벽파진에 이르니 때는 공이 53세 되던 정유년 8월 29일, 이때 조정에서는 공에게 육전을 명령했으나 공은 이에 대답하되 신에게 상기도 12척의 전선이 남아 있삽고 또 신이 죽지 않았으며 적이 우리를 업수이여기지 못 하리이다 하고 그대로 여기 이 바다 목을 지키셨나니 예서 머무신 16일 동안 사흘은 비 내리고 나흘은 바람 불고 맏아들 회와 함께 배위에 앉아 눈물도 지으셨고 9월초 7일 적선 13척이 들어옴을 물리쳤으며 초 9일에도 적선 2척이 감포도 까지 들어와 우리를 엿살피다 �겨 갔는데 공이 다시 생각한 바 있어 15일에 우수영으로 진을 옮기자 바로 다음날 큰 싸움이 터져 12척 적은 배로서 330척의 적선을 모조리 무찌르니 어허 통쾌할사 만고에 길이 빛날 명량대첩이여

그날 진도백성들은 모두 달려 나와 군사들에게 옷과 식량을 나누었으며 이천구, 김수생, 김성진, 하수평, 박헌, 박희령, 박후령과 그의 아들 명신 등 많은 의사들은 목숨까지 바치어 천추에 호국신이 되었나니 이는 진실로 진도민의 자랑이로다 이 고장 민속 강강술래 구슬픈 춤과 노래는 의병전술을 일러주는 양 가슴마다 눈물어리고 녹진 명량 두 언덕 철쇄 걸었던 깊은 자욱엔 옛 어른들의 전설이 고였거니와 이제 다시 이곳 동포들이 공의 은공과 정기를 영세에 드높이고자 벽파진두에 한 덩이 돌을 세움에 및여나는 삼가 꿇어 엎들여 대강 그때 사적을 적고 이어 노래를 붙이노니 열두척 남은 배를 거두어 거느리고 벽파진 찾아들어 바다 목을 지키실제 그 심정 아는 이 없어 눈물 혼자 지우시다 300척 적의 배를 산같이 깔렸더니 울두목 센 물결에 거품같이 다 꺼지고 북소리 울리는 속에 저님 우뚝 서 계시다 거룩한 님의 은공 어디다 비기오리 피 흘린 의사 혼백 어는 적에 사라지리 이 바다 지나는 이들 이마 숙이옵소서

단기 4288년 9월 16일 노산 이은상 글을 짓고 소전 손제형은 글씨를 쓰고 진도교육구 교육감 곽충로는 구내 교직원 생도들을 비롯한 모든 군민과 도내 교육 동지들의 성력을 모아 이 비를 세우다

◆작별 인사

오늘 정든 여러분! 명량해전과 충무공 이순신으로 맞춤한 관광을 여기서 마치렵니다. 불편한 점도 많았을 터이고 안내와 설명도 성에 차지 못했을 지라도 너그러이 이해해 주시고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애국 충정 하나만 마음속에 간직하시고 평안히 돌아가십시오. 항상 행복하시길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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