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범 김구 선생 각종 자료 소개>
1. 주요 사진 자료 소개
1)묘소 (서울시 용산구 효창공원 내)
<김구선생 묘소>(2003. 3. 9. 발용(군) 제공)
2)동상 (남산공원 내) (2003. 8. 17. 안사연 탐방. 발용(군) 촬영 제공)
*대통령 <박정희> 글씨가 누군가에 의해 지워져 있음.
3) 백범 관련 서적
<백범일지>(2002. 12. 19. 한국고미술 네트워크. 경매 완료된 친필서적)
< 金九先生血鬪史 >(嚴恒燮(엄항섭) 著 .국제문화협회/1948년.3판)
(2002. 12. 25. 발용(군) 제공)
내용 : 백범 김구
선생의 항일운동을 기록한 책으로 백범선생의 비서를 지낸 엄항섭이 펴냄. '김구선생소전'과 이봉창의거, 윤봉길의거, 최근식. 유상근의거 그리고
항일운동을 함께한 한 동포들과 중국의 풍경 등을 수록하고 있다.
<백범일지><상해 대한민국 임시청사의 발자취><백범일대기> (2001. 항용(제) 제공)
<백범연구 자료집>(2001. 항용(제) 제공)
<백범과 민족운동 연구 제1집>(2003. 6. 1. 백범학술원 간. 태인(안.대종회장 제공)
<아 경교장>(2003. 1. 백범사상실천운동연합회 간. 2003. 8. 17. 항용(제) 제공)
4) 백범회관
<백범 김구선생 기념관 준공식>(2002. 10.22. 효창공원 내. 만길(익) 사진 제공)
5)<상해 임시정부 청사> (2001. 2. 20. 항용(제) 현지 답사 촬영 제공)
<구 상해 임시정부 청사앞에서>(필자 뒷편 푯말이 보이는 건물 안 쪽의 1,2층)
<입구의 안내판> <입구의 푯말>
<건물 내의 백범 흉상>
6) <백범 관련 사진 자료 소개>
<가족사진>
<모친 곽낙원 여사 동상>(2002. 영환(문) 제공)
<부인 비석> (2002. 영환(문) 제공)
*위 사진 관련 기사 소개 (2004. 10. 19. 윤만(문) 제공)
왼쪽 : 신 · 백범 선생 · 곽낙원 · 인
회포를 돕는 비석 /
동아일보. 1924. 2. 18. 월
이 사진은 항자 보도한 바와 가치 사회를 위하야 무한한 고초와 분투하는 남편을
맛나서 남이 격지 못한 고생으로 간장을 녹이다가 몇천리 밖인 다른 나라에서 이 세상을 떠난 김구(金九) 씨의 부인 최준례(崔遵禮) 녀사의 무덤에
세운 빗돌이다. 이 비는 상해에 잇는 동포들이 그의 사십 평생의 고적하고 간난한 경우를 불상히 녁이여 넉넉지 못한 주머니를 여러 돈을 모아서
세운 것인대 조선어학자 김두봉(朝鮮語學者 金枓奉) 씨의 지은 순 조선문의 비문으로 짓고 이 빗돌 위에 잇는 늙은 부인은 그의 싀어머니 곽 씨(郭
氏.66)이요, 모자 쓴 남자는 그 남편 김구(金九.49) 씨요, 오른편에 있는 아해는 큰 아들 김인(金仁.5)이요, 왼편에 잇는 아해는 그
두째 아들 김신(金信.2)이다. 늙은 싀모, 어린 자손, 더욱 뜻을 이루지 못하고 표랑하는 남편을 두고 죽을 때에 그 부인의 눈이 엇지 참아
감기엇스랴 ! 쓸쓸한 타향에 가족을 두고 외로히 누은 그에게 이 빗돌만이 쓸쓸한 회포를 더욱 도울 뿐이다.
<친필 암각문>(2002. 영환(문) 제공)
<한국 애국가(1945. 10. 18)> (2003. 6. 19. 태서(익) 제공)
<백범 선생과 아들 신(信)>(2003. 1. 28. 은회(익) 제공)
[평양 대보산 영천암에서의 백범] 남북 평화통일을 위해 38선을 넘고 평양에 도착하여 50년 만에 다시 찾은 평양 대보산 영천암에서의 백범선생과 아들 신. 이 곳은 백범 선생이 승려 행세로 숨어 계시던 곳 [1947. 4. 26]
[덕수궁에서의 망중한](2003. 1. 28. 은회(익) 제공)--이 사진은 백범이 이승만의 노선을 반대하는 입장에 있을 때 이상만 목사와 찍은 것인데,모당의 기관지 구실을 하던 모일간지는 이상만의 얼굴을 이승만으로 바꾸어 양 영수가 합의한 것처럼 기사를 써 민심을 호도했다. (1947년)
[휘호에 열중하는 백범] (2003. 1. 28. 은회(익) 제공)
백범의
글씨는 심하게 떨림체이다. 이는 1938년5월 장사에서 저격받아 심장아래 박힌 총알이오른쪽아래로 이동하여 수전증이 심해진탓이다. 그래서
백범자신은 자신의 서체를'총알체'라고 농담하기도
했다.
<1946. 5.18. 유해를 봉환하기 위해 부산에 내려가신 백범 선생>(2003. 1. 28.영환(문) 제공)
'...한국인이 걸어온 험난한 길을 세상에 호소하여, 정당한 공론을 구하려 함과 아울러 우리는 이른바 폭행을 찬양하는 자가 아니며, 혁명의 사선을 넘나든 우리에게는 이 길이 최소의 역량을 가지고 가장 위대한 효과를 거둘 수 있는 길이라는 확고한 인식에서 출발되었다.' 『도왜실기』중에서
왼쪽 : 선우진. 백범 선생. ○. ○. 방응모. 정인보. 안낙생. 김명동. 안우생.
<백범선생 시찰기념. 4282년(1949). 5. 23.(1949. 6. 26. 서거 1개월 전의 사진)> (2003. 11. 2. 용주(안) 자료 제공. 사진 소장자-태준(안. 화산군 휘 澍 후손))
<중경을 떠나기 앞서 연화지 '임정' 청사 앞에서의 한국독립당 요인들과 김구선생>(2004. 5. 항용(제) 제공)
(앞줄 중앙)
<1946. 7. 6. 8.15후 첫 사회장으로 효창원에 천장되는 3의사의 유해 운구 광경> (2003. 1. 28. 영환(문) 제공)
'그리고 나는 일본 동경에 있는 박열 동지에게 부탁하여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세 분 열사의 유골을 본국으로 모셔오게 하고...내가 친히 잡아 놓은 효창원 안에 있는 자리에 매장하기로 하였다. 제일 위에 안중근 의사의 유골을 봉안할 자리를 남기고, 그 다음에 세 분의 유골을 차례로 모시기로 하였다.' 『백범일지』중에서
<의암묘소 참배시 쓴 백범의 고유문(告由文)> (2004. 10. 19. 윤만(문) 제공)
<백범의 판화(24.5x18cm) > (2004. 10. 19. 윤만(문) 제공)
사방(四方)에 태극(太極)문양에 "平安" 의 글자는 나라의 태평을 기원하는 백범의 정신이요,
산과 해를 상징함은 조국강산의 안일과
발전을 바람하는 형상. 요즈음처럼
핵문제 등으로 어수선할 때 더욱 생각나는 작품이다.
도장은 백범의 白文과 金九之印의 朱文을
사용하였다. 등사용 잉크로 제작함.
<현재의 삼의사 묘역 모습>(2003. 1. 28. 영환(문) 제공)
(사진 왼쪽의 비어있는 곳은 안중근의사의 봉환을 위해 남겨 두었다.)
<삼의사 묘소 아래에 있는 '遺芳百世' 마지막 글자에 있는 백범 관련 글>
"戊子 春日 金九 題" (2003. 3. 9. 발용(군) 사진 제공)
<서거 당시의 사진 자료>(2003. 5. 9. 영환(문) 제공)
<서거 당시의 사진 자료>(2003. 5. 9. (영환 제공)
<서거 당시의 사진 자료>(2003. 5. 9)
<백범 데드 마스크>(2004. 10. 19. 윤만(문) 제공)
김구_데드마스크/1996/208 x 170/수묵채색/작가소장
2.<백범 친필 모음> (2002. 3--6. 영환(문), 태서(익). 항용(제) 자료 제공)
* <백범 친필 및 해설> (2003. 1. 28. 은회(익) 제공)
[남이장군의 시 '북정(北征)']--1933년 이봉창, 윤봉길 두 의사의 의거 직후에 이 휘호를 즐겨 썼으며 해방후 신탁통치를 거론하던 미소공동위원회가 무산되던 1947년에 다시 그가 좋아하는 남이장군의 시를 휘호로 많이 남겼다.
<독립만세, 독립자유, 독립정신>--반탁운동이 계속되던 1947년 정초부터 백범은독립정신이란 휘호를 남긴 이래로 독립만세독립자유란 휘호를 즐겨 썼다. 백범이 선호한독립이란 곧 반탁 반좌익을 의미하며 모스크바결정을 재식민지에로의 길로 보는 정세관을반영한 것이다 (1947년)
<고려말 충신 정몽주의 절개를 기리는 휘호>--1948년 남북한은 각각 단독정부 수립으로 치닫고 경교장에 쇄도하던 정치인들의 발길이 뜸해지던 시절 백범은 단독정부 수립에 협력하지않겠다는 의지를 이렇게 다졌다(1948년 8월)
<死於大義名分>--'대의명분에 죽고 민족정기에 산다'는 자신의 사생관을 표현한 휘호. 생명의 위협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던 일생을 통해 백범은 거역할 수 없는 역사의 흐름을 확신했다 (1949)
<경천애인>--하늘을 공경하고 사람을 사랑함(1947년
6월)
<애국> (2003. 11. 12. 은회(익) 제공)
<백범작 8폭 병풍 (32×130)지본> (2004. 10. 19. 윤만(문) 제공)
시해(詩解)
이나라 독립과 통일에의 염원을 몸소 실천하신 민족의 거성 백범 김구선생의 파란만장한 생애를
회고하여 볼때 선생의 고매하신 애국혼은 천주만방에 길이 국민의 마음속에 새겨지리라 믿는다
이에 본
작품은 안두희에게 살해 당하시기 월여전의 작품으로 그 내용이 자주독립과 조국통일을 그 얼마나 간절히 희구하시었나를 엿볼 수
있는 애국시로써 이 유묵을 접함에 있어 재삼 옷깃을 여미고 숙연히 자기 성찰의 기회가 마련되리라 믿어 의침치 않는다.
梅花能紅李花白 春心何處無顔色 (매화능홍이화백 춘심하처무안색).
不應尙有一梅枝 可是東君若留客 (불응상유일매지 가시동군약유객)
向來開處當嚴冬 白者未白紅未紅 (향내개처당엄동 백자미백홍미홍)
至今已時丈人行 肯與年少爭春風 (지금이시장인행 긍여년소쟁춘풍)
매화꽃은 붉고 배꽃은
흰데 깊은 봄 어느곳인들 아름답지 않으리
오리려 한 매화가지가 응치않음은 봄이 오면 손님을 머룰게 하려함인가
지난번 꽃필적엔
엄동이었지 흰 것은 희지않고 붉은 것도 붉지 못했네
지금은 이제 어른의 대오에 끼었으니 젊은이와 함께 봄바람을 다투어보리
1982년 4월 23일
鑑證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
대한민국
임시정부 기념사업회장 백강(白岡 ) 조경한 趙驚韓
解意 한학및서예가 (kbs 진품명품 감정위원) 매산(梅山) 김선원金善源
<백범 휘호> (2004. 10. 20. 발용(군) 제공)
人能以 待兒女之心 待父母 乃是眞孝子
可見待父母之心 萬萬不及 待兒女之心也
不亦大可歎哉
사람이 아녀를 대하는 마음으로 부모를 대할 수 있다면
그가 바로 진정한 효자다. 그러나 부모를 대하는
마음이 전혀 아녀자를 대하는 마음에는 미치지 못함을
알 수 있으니, 또한 크게 탄식할 일이 아니겠는가?
*<백범 관련 자료 및 휘호 모음> (2003. 6. 19. 태서(익) 자료 제공)
1)<백범 서명 태극기>
2)백범 편지
3) 백범일지
4)서한과 명함
5) <한 시>
6) 각종 휘호
*<백범 아드님이신 金信께서 소청평에게 보낸 편지>
<백범의 글씨가 새겨져 있는 곳 사진 소개> (2004. 10. 19. 윤만(문) 제공)
청구일월 대한건곤 김구
靑丘日月 大韓乾坤 金九
백범 김구 선생의 친필 휘호가 마이산 이산묘 맞은편 우측 암벽의 높은
곳에 새겨져 있다.
3.<각종 유물 유품 및 관련 자료 소개>
1) <손민석 소장 백범 휘호> (2003. 3. 4. 은회(익) 제공)
2)<대한민국(1986.6.10)과 북한(1993.8.15)에서 발행한 백범 우표>(2002. 5. 31. 태서(익) 제공)
3)<백범 휘호> (2003. 3. 13. 발용(군) 제공)
4) <백범 암살 사건 배후세력 진상조사 청원서> (2003. 3. 13. 발용(군) 제공)
1967년 목포시민 16,088명이 백범 김구 선생 피살사건 배후 세력의 진상조사를 요구하면 제출한 청원서
이 청원서에 따르면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967년 치러진 6.8총선에서 신민당 공천으로 목포에서 출마한 김대중 후보가 정견발표회 및 개인 연설회를 통해
상대후보이자,박정희 대통령이 공천한 공화당 입후보자 아무개씨는 백범 선생을 살해한 안두희의 배후 조정 인물이라고 폭로하자, 목포시민 김상성 님
등 16,088
명이 백범 김구 선생 암살사건의 철저한 진상조사를 요구하며 국회에 낸 청원서의 원본. 청원서를 제출한 날짜는 1967년
6월16일. 청원서를 제출한 사람은 목포시민 김삼성 외 16,088명이다.
5) <옥과 미술관의 백범 휘호>
1)발견일시 : 2003. 4. 16.
2)소장처 : <옥과미술관>(전남 곡성군 옥과면 옥과리 산 1-3번지 ☏ 061-363-7278~9, Fax: 061-363-7279 ) http://www.asan.or.kr/
3)촬영일시 : 2003. 4. 16. 안사연 6명 현지 방문. 열람 및 촬영.
6) <안사연 백범 친필 암각문 답사>
(1)일시 : 2003. 8. 16. 09:00-. (2)장소 : 경기도 의정부시 산 89 <석굴암>일대 (3)답사자 : 6명-상석(제),상하(제),윤만(문),발용(군),항용(제),윤식(문) (4)답사내용 : 백범 김구선생의 친필 암각문 답사
<석굴암 앞 안내판>(향토유적 제8호. 백범께서 상해로 망명하기 전에 일시 피신 했던 곳이며, 해방후 이곳을 자주 방문하셨고 1949년 3월부터 백범의 친필을 받아 3개월간 조각하여 세운 것이라 기록하고 있음)
7)백범 간찰 소개 (2003. 12. 15. 발용(군) 제공)
8) 백범 필적 (2004. 1. 12. 태영(군) 제공)
<필적 해설>
1)연대 : 1946. 5.
2)소장처 : 국회의사당
3)집필 과정 : 이 글은 백범 김구선생이 1946년 5월에 진해시 방문기념으로 충무공 이순신장군의 한시 ’진중음(陳中吟)’중에서 쓴 것을 진해시 해군사관학교입구 남원로타리에 시비로 세운 것임.
4)내용 :
誓海魚龍動 (서해어룡동) -- 바다에
맹세하니 물고기와 용도 감동하고
盟山草木知
(맹산초목지) -- 산이 맹세하니 초목도
알아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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