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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이제는 다시 못뵐 백남준 선생

mamuli0 2006. 2. 3. 0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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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이제는 다시 못 뵐 백남준 선생께
조회 | 2,373 작성일 | 2006.02.01

1984년 1월1일 새해 꼭두새벽(정확하게는 1월2일 새벽2시. 미국 뉴욕시간이 1월1일 낮 12시이다) 우리나라에는 한 낯선 예술가가 위성전파를 타고 세배를 했다. KBS 제1텔리비젼을 통해 1월1일 새벽에 생방송으로 전해진 그의 위성예술쇼는 '굿모닝, 미스터 오웰'이란 다소 특이한 제목이었다 영국의 유명한 소설가인 조지 오웰이 그의 대표작인 '1984'에서 독재자가 텔레비전을 통해서 지배하는 암울한 미래사회를 묘사해 놓았었는데,

이제 1984년이 된 만큼 과연 조지 오웰이 예언한 대로 텔레비전이 인간의 행동을 감시하는 독재의 도구이던가? 아니다. 보라. 텔레비전은 이처럼 인류의 미래를 밝혀주는 새로운 테크놀로지이다

라는 메시지를 보여주는 위성쇼였다. 당시 세계 문화계의 중심인 뉴욕과 파리, 그리고 샌프란시스코를 연결하는 이 쇼를 KBS가 미국, 프랑스, 독일과 동시에 라이브로 중계해서 시청자들에게 보여주었다. 이 방송은 과연 충격이었다. 도대체 첨단예술을 사전 녹화도 아니고, 미리 내용을 본 것도 아닌데 라이브로 중계를 하다니(당시는 정말 모험이었다. 그러나 이원홍 KBS사장은 만약에 누드나 음란한 장면이 나오더라도 어쩔 수 없다. 나중에 책임은 내가 질 테이니 추진하라는 강력한 소신을 보이셨다). 그러나 결과는 성공이었다. 도하 각 신문이 연일 이 방송프로그램에 대해서 소개하면서 이 프로그램에 처음 보여진 비디오아트와* 이 프로그램의 기획, 연출자인 한국 출신의 한 전위예술가를 소개하느라 분주했다. *비디오 아트는 영어로는 VIDEO ART, 당시의 발음 개념대로 하자면 비데오 아트였다. 그런데 필자가 이 프로를 사전에 각 언론사에 홍보하는 자료를 돌리고 예고방송을 하면서, 시간이 바쁜 나머지 정확한 발음을 챙기지 못하고 '비데오 아트'가 아닌 '비디오 아트'라 해서 내 보냈다. '오디오'라는 말과 헷갈린 것이다. 그 다음부터 언론들이 '비디오아트'라는 용어를 쓰기 시작했고, 그러다가 '비디오 아트'란 용어로 정착된 것 같다. 비데오 아트하면 비데오방에서 빌려볼 수 있는 것이라는 정도의 느낌이 드는 대신, 비디오아트하면 좀 더 고상한 그 무엇처럼 느껴진다. 지금 생각하면 그 때 비디오라 한 것이 사실은 약간의 착각에 의한 실수이지만 결과적으로는 오히려 잘 된 느낌이다.

 *사진작가 임용균씨가 촬영한 백남준씨*

이 프로그램을 제작, 지휘한 사람은 스무 살 전에 우리나라를 떠난 뒤 30년이 넘도록 우리에게 한번도 제대로 얼굴을 비치지 않았다. 그는 정경화나 김영욱처럼 외모로 보나 음악적 예술세계로 보나 사람들을 고상하게 휘어잡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그 해 6월에 우리나라를 34년 만에 찾으면서도 그 누구보다도 많은 관심과 흥미를 불러 일으켰다. 언론들은 그의 일거수 일투족을 추적했으며, 그의 행적은 그와 관련이 있는 예술영역이라고 할 미술이나 음악, 또는 행위예술계에 한정되지 않고 많은 일반국민들의 촉각까지를 곤두세우게 했다.

그가 바로 백남준이다!

백남준! 한 때는 우리 국민들에게 아주 생소한 한 예술가의 이름이었다. 몇몇 해외 예술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만이 그의 높은(?) 이름을 듣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이름은 그 이후 결코 생소한 이름이 아니었다. 예술가들, 그 중에는 음악가도 있고, 미술가도 있고, 연극인도 있겠는데, 예술가들 대부분이 그를 알고 있을 뿐 아니라 일반인들도 그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이다.

그러나 그의 정체에 대해서는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확실히 알지 못하고 있다. 그가 피아노를 다루는 솜씨가 남다른데서 그를 음악가로 볼 수도 있지만 그러나 그가 바이올린을 길거리에서 끌고 다니고, 그가 치는 피아노를 때려부수고, 명곡이 담긴 레코드판을 사정없이 깨어 부수는 모습을 보면 그를 음악가라고 정의하기가 어려움을 알게 된다. 왜냐하면 적어도 음악가라면 그들에게 소중한 악기를 그렇게 매몰차게 깨부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의 작품을 보려면 어떻든 화랑이나 무슨무슨 미술관에 가야만 한다. 이런 면에서 보면 그는 미술가라고 불리어져야 한다. 그러나 그가 물감으로 그림을 그리는 것을 보면 제대로 된 미술가라고 할 수가 없다. 그가 그리는 그림은 우리들이 늘 보아오던 미끈한 손놀림에 의한 쉽게 알아볼 수 있는 그림이 아니라 이것저것 아무데나 마구 뿌리는 단순한 행위, 아니 우리말로 하자면 몸짓예술일 뿐임을 누구나 알 수 있다. 일반적으로 부르는 비디오 아티스트라는 말 때문에 그가 아마 촬영기사가 아닌가 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84년 6월 30일, 30여 년 만에 처음으로 서울로 들어오던 날, 공항에서 처음으로 만난 그의 모습은 사진에서 보던 모습 그대로였다. 언제나 반쯤 풀어헤친 와이셔츠, 그것도 두 겹으로 입었다. 곧 흘러내릴 듯한 멜빵, 졸린 듯한 눈초리, 계면쩍은 듯, 그러나 누구에게나 빙긋 웃어주는 천진스러운 웃음......

그를 보려고 많은 기자들이 김포공항에 몰렸다. 공항 귀빈실이 임시 기자회견장이 되어버렸다. 백남준씨를 KBS가 처음 소개한 것을 아는 신문사기자들이 백남준씨의 옆자리를 자연스럽게 비워주어 내가 그 옆에 앉게 되었다. 그 자리에서 많은 질문이 쏟아졌지만 그는 간단하게 대답해버렸다. 질문가운데 자신의 예술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이 있었다. 백선생은 이렇게 답을 했다;

"예술은 사기예요. 예술가는 고등사기꾼이지! 그러니까 나도 사기를 하는 사람이지 뭐!"

아무도 들어보지 못하던, 예상도 못하던 말이었다. 예술이 사기, 그것도 고등사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백남준의 말! 이 말은 정말로 우리 문화계에 큰 충격을 준 폭력적인 말이었다. 그 때까지 예술이라는 것은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고상하게 이끌어주는 가장 좋은 수단이라고만 생각해 온 문화예술인들, 예술이라는 것이 기존에 있던 것의 파괴를 통해서 새로운 영역을 여는 것이라는 데는 전혀 생각이 미치지 못했던 당시의 우리 문화예술계 인사들에게는 정말로 충격이었을 것이다.

백남준은 왜 예술은 사기라고 말했는가?

사기도 그냥 사기가 아니라 고등사기라고 했는데, 고등사기는 무엇인가? 이 말은 1984년 당시 우리 문화예술계의 화두가 되었다. 사람들에게 이 화두를 내걸고 깊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많은 논란을 일으킨 것이다.

                  *1986년 KBS를 방문했을 때의 백남준*

 

"응, 당신이 이동식씨야? 만나서 반갑습니다. 내 작품을 위해서 방송을 준비하고 진행해 주었으니, 고맙구만."

백남준씨의 그 이상한(?) 프로그램이 KBS전파를 탈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사장이셨던 이원홍씨가 계셨기 때문이다. 문화예술에 대해 남다른 식견과 안목이 있었던 이원홍사장은 일본에 문화담당 공사로 재직할 때부터 백남준씨를 주목했으며, 귀국해서는 뉴욕뮨화원장이었던 천호선씨로부터 그의 활동을 죽 전해듣고 있었다. 사장이 되신 후에 아무도 모르던 백남준씨를 갑자기 끌고 들어와서는 그의 쇼를 중계하자, 그것도 생중계하자고 해서 우리를 놀라게 했다. 당시 보도본부장이던 강용식씨, 문화부장인 이태행씨를 통해서 가장 말단 실무자인 나에게 그 작업을 맡으라는 임무가 부여됐다. 그러므로 1984년의 백남준쇼는 한국에서는 기획 이원홍, CP가 이태행, 그리고 실무연출이 이동식이었다. 백남준씨는 방한 이튿날 곧바로 KBS를 방문해서 이원홍 사장, 강용식 보도본부장, 이태행 문화부장 등에게 감사의 뜻을 표하였다. 그리고는 사장실에서 내려와 나와 대뜸 첫 대면을 했다. 당시까지 백선생의 작품을 가장 많이 보고 만지고 이를 신문사에 선전도 해 준 사람이라서 그런지 상당히 편하게 느끼며 솔직하게 가슴속에 담긴 말을 많이 털어놓았다.

집안이 부자였던 백남준씨네, 일제시대 때에 공장을 한 부친덕택에 그 때 벌써 촬영기로 그 공장을 찍어둘 정도였으니까, 상당히 부르조아지였던 것으로 보이는데, 1949년 홍콩에 건너가서 살던 아버지 백락승씨 일가는 1950년 한국으로 돌아왔다가 6 25전쟁을 맞아 부산에서부터 배를 타고 고베를 통해 일본에 건너가 살게 된다. 백남준은 1952년 일본의 수재들만이 들어갈 수 있다는 최고의 명문 동경대학의 문학부에 입학을 한다. 이 점만을 보아도 그는 머리, 북한식으로 말하면 골이 좋았던 것만은 사실인 것 같다. 동경대학 문학부 미학과에서 음악에 관심을 갖고 있던 백남준, 1956년 졸업을 한 뒤 곧바로 독일로 건너간다. 뮌헨대학, 프라이부르크 고등음악원, 쾰른 대학(1958~1962)을 차례로 거쳐가면서도 당시 스톡하우젠 등에 의해 주도된 전자음악을 연구한다. 1959년 뒤셀도르프에서 열린 '존 케이지에 바친다'라는 이름의 연주회에 출연해서 피아노를 때려부숨으로서 전위적인 행동음악가로서의 첫발을 내딛는 백남준군!(실례, 당시는 아직 20대였음) 그가 독일에서 선택한 것이 바로 사기의 일환이라는 점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음악공부를 진짜 제대로 해보자고 독일로 건너간 건데, 작곡가들이라는 게 모두 엉터리에요. 그러나 이미 인정받고 있는 음악가들은 너무나 까마득하고. 이런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서려면 기존의 것을 따라만 해서는 안되겠다. 무언가 주목을 끌 수 있는 행동을 해야겠다 하는 결론을 얻었지."

1960년에는 쾰른에서 당시 현대음악의 거장으로 이름을 날리고 있던 존 케이지의 넥타이를 가위로 자르고 무대 위에서 샴푸로 머리를 감는 등의 행동을 시작으로 기성화된 모든 것을 깨고 부수는 전위적인 예술가로 차츰 두각을 나타내는 백남준, 예를 들어서 뒤셀도르프의 카마 극장에서 열린 바이올린 독주. 엄숙한 표정으로 무대에 등장해서 바이올린을 아주 천천히 머리위로 들어 올렸다가 갑자기 밑으로 내려치며 부수는 것이다. 또는 무대 위에서 피아노를 쓰러트리고 피아노를 해머로 부수어 버린다. 파리의 에펠탑에서는 '관객이 없는 높은 탑을 위한 음악'이름 아래 이러한 과감한 음악을 연주(?)한다. 1961년 전후 독일의 가장 중요한 행동예술가 그룹인 플럭서스 그룹의 창시자인 조지 마츄너스를 만난 뒤 이 운동의 중요한 멤버로서 많은 새로운 퍼포먼스 활동을 계속한다.

이러한 종류를 행동음악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백남준은 당시 행동음악을 통해서 모종의 사기를 획책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모종의 사기는 "기존의 것을 따라만 가서는 영원히 남을 앞설 수 없다, 그러므로 남이 하지 않은, 생각하지 않은 새로운 것을 해야한다"는 것이다. 새로운 것은 곧 기존의 것을 깨트리는데서 나온다. 그것을 겉으로 보면 파괴(破壞)라 할 것이지만 속으로 보면 (기존의 것에 대한) 해체(解體)이다.

"아무래도 그 때 유행하던 전자음악을 보니까 한정된 전자음에는 내가 구하던 음이 없었지. 개인이 스튜디오를 만들어 간단한 전자음악을 하는데, 아무리해도 클라이막스에 도달이 안 되는 거야. 그래서 생각한 것이 역시 즉흥적, 일회성 해프닝을 해야겠다는 것이야. 그래서 피아노 쓰러트리기를 한 것인데, 이것으로 평판이 나기 시작했지. 그 때가 26살이야"

그러나 그 사기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여기에도 정확한 안목과 과감한 발상이 필요했다. 백남준의 사기는 백남준이라는 한 천재가 이 두 가지 점을 동시에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사기는 점점 성공을 거두고 있었다.

이 때에 독일에서 만난 두 명의 예술가는 이후 그의 예술세계의 중요한 이해자였고, 또 지지자였다. 하나는 86년 초 타계한 독일의 요셉 보이스이고, 또 하나는 92년으로 92년 80살에 타계한 전위음악가 존 케이지이다.

   * 요젭 보이스의 집에서 백남준씨와 함께, 1984.9.*

 

요젭 보이스는 모든 존재하는 것을 미술, 또는 예술의 영역으로 포함시켜 예술의 영역을 확대시켰으며, 녹색운동, 곧 오늘날의 환경운동의 주동자였다. 존 케이지는 일상생활의 모든 소리도 음악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 현대음악을 해방시킨 예술가로 평가받는다. 1952년 미국 우드스톡 음악회에서 무대에 올라가 4분33초 동안 아무 연주도 하지 않고 피아노 앞에 앉아 있다가 그냥 내려온 전설적인 음악가다. 음악은 소리가 꼭 나야하는 것이 아니다. 아무 소리도 안들리는 것도 곧 음악이다. 그의 사상의 바탕은 동양의 주역으로서, '서구전통에서 음을 이루는 피치나 듀레이션의 기하학적인 구성을 파괴하고 음의 완전한 자유를 추구한'(김용옥씨의 표현) 것이다(백남준씨는 세계를 흔든 두 대가가 아직 그렇게 유명해지기 전에 교우로 맺어진 것이 나중에 그의 예술활동에 크게 도움이 되었다고 회고한 바 있다).

플럭서스 그룹의 일원으로 활동하면서 그의 사기는 이제 세계적인 수준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그리고는 점점 독보적인 사기꾼의 경지로 접어들었다. 텔레비전 수상기, 전기가 들어오면 그림이 나오고 소리가 나오는 이 괴상한 현대의 사생아도 무언가 예술이라는 형태로 팔아먹을 게 있지 않을까? 이러한 생각이 미치자 1963년부터 고물 텔레비전을 괴롭히기 시작한다(당시는 돈이 없으니까 새 수상기는 쓸 엄두도 못 내던 형편이었다). 전류가 흐르는 브라운관 가까이에 강한 자석을 붙여보는 것이다. 텔레비전 화면은 전류와 전압과 자기라는 전기의 3요소를 가지고 형성되어 있는 만큼 당연히 자석의 영향으로 일그러지면서 전혀 새로운 영상을 만들어내었다. 비뚤어지고 휘어지고 구부러지고 휘감긴, 그러면서 작가의 손놀림에 따라 전혀 예상치 못한 세계를 그려내고 있음을 발견한 것이다. 그렇게 해서 그 해 3월 인류사상 최초로 텔레비전 수상기를 예술작품의 소재로 쓴 비디오아트가 발표되었다. 부퍼탈의 파르나스화랑에서였다.

이 전시회는 그때까지 음악가였던 백남준씨를 본인 자신도 모르게 미술가로 변신시키는 계기였다. 그것은 또한 현대기술문명을 대표하는 텔레비전을 예술의 소재로 쓴다는, 전혀 새롭고 엉뚱한, 그러나 현대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예술장르인 비디오예술의 창시라는 예술사적인 사건이었다. 무언가 남과 달라야한다고 하는 것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같이 시작한 화가들은 돈 많이 벌었지. 그들은 사유재산으로 일종의 위조지폐를 만들어 낸 것이거든. 1958년부터 컴퓨터, 레이더로도 예술에 응용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이왕 하려면 기상천외한 것을 하자는 생각이 들어서서, 텔레비전 수상기를 시작하게 된 거지."

1963년 일본인 전자기술자인 아베 슈와와 함께 노래하며 걸어가는 로봇을 만들어낸 것도 바로 그의 무언가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자, 무언가 남과는 다른 것을 해야한다, 남이 안하던 것을 하자.....이러한 그의 남다른 의식과 모험정신, 실험정신이 빚어낸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K-456으로 명명된 이 로봇이 처음 길거리에 나와 섰을 때에 사람들은 정말 신기한 것을 본다는 듯 몰려들었다. 물론 이 로봇은 오늘날의 그것처럼 능수능란한 몸 동작이나 걸음걸이를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뒤뚱거리며, 입으로는 음악이 흘러나오는 로봇이 이미 60년대 초에 백남준과 일본인친구에 의해 시도됐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라. 예술가가 만든 최초의 로봇이다. 그의 천재가 빛나는 순간이었다.

바이올린은 어깨 위에 올려놓고 연주하는 악기라는 고정관념은 백남준에 의해 깨어졌다. 그는 바이올린을 끌고 다니다가 분수에 버려버린다. 텔레비전도 그에게는 단순히 바라만 보는 기계로 끝나지 않는다. 텔레비전을 자기 마음대로 갖고 즐겁게 놀라고 가르치고 있다. 그냥 남들이 만들어주는 프로그램을 시청만 한다면 기계에 복속되는 것이라고 백남준은 말하고 있었다.

60년대로 넘어서면서 새로운 것을 찾아내고 시험하는 기회는 구대륙보다는 신대륙이 많았고, 그것도 세계 제일의 부국인 미국의 경제중심지인 뉴욕이 최고였다. 따라서 예술적 아이디어와 변신의 천재인 백남준씨가 이 사실을 놓칠 리가 없었다. 1964년 독일에서 뉴욕으로 건너온 백남준은 첼로연주가인 샤롯 무어맨을 만난다. 백남준은 이 젊은 여자 첼리스트를 상대로 해서 그 때까지 누구도 감히 엄두 내지 못하던 음악과 섹스의 결합을 과감하게 시도한다. 그리고는 이번에는 미국에서 사기를 시작한다.

1965년 1월 미국에서의 첫 전시회에서 샤롯 무어맨은 백남준의 기획에 따라 '성인만을 위한 첼로소나타 1번'을 연주하면서 차례로 상의를 하나씩 벗어 완전누드가 된다.'생상의 주제에 의한 변주곡'에서는 얇은 가운을 입고 생상의 작품 '백조'를 연주하다가 옆에 있는 물통에 들어가 젖은 몸이 된다. 1967년 2월 뉴욕에서 상의를 모두 벗은 채로 '오페라 섹스트로니크'란 작품을 연주하던 무어맨이 하의까지 벗으려 하다가 경찰에 의해 중지당한다. 이런 일련의 작업도 좋게 보면 끊임없이 새 것을 찾아내는 백남준의 예술적 창작정신의 소산이지만, 뒤를 뒤집어보면 무언가 센세이셔날한 것을 통해 갓 입문한 뉴욕문화계에 빨리 이름을 알리려는 고도의 계산이 깔려있기도 했다. 그 뒷면에 영주권이라는 게 있다니.....

"나는 당시 영주권이 없어 체포되면 큰 일이야. 여자는 계속해 체포될 것이고....예술은 어차피 난봉꾼이니깐 어느 정도 놀아나야 사회적 물의를 일으켜 고십이 되는 거고, 그렇게 해야 유명인 인물 속에 들어가는 거지. 유명 인물 속에 들어가야 추방당하지도 않잖아?"

그가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이런 식이다. 남들이 생각하지 못했던 기상천외한 사기를 치는 것이다. 순진한 미국인들이 어찌 그의 사기를 알아챌 것인가? 그러나 이런 와중에서 백남준의 관심은 텔레비전에 쏠리고 있었다. 그의 텔레비전 작업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TV를 소재로 써서 조각작품처럼 세우거나 눕히는 등 진열하고 전시하는 일이었다. 또 하나는 TV의 화면자체를 변형시키거나 화면에 이미지를 첨가시켜 새로운, 예술성이 강한 화면을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서 백남준은 예술가이면서도 기술적으로 중요한 공헌이 되는 비디오합성기를 세계최초로 개발해 낸다. 앞에서 로봇을 함께 만들어 낸 그의 일본인 친구인 전자기술자 아베 슈와와 몇 년 동안 함께 연구한 결과다.

그런데 우리가 소설을 쓸 때에 나오는 용어로 「의도의 오류(Intentional fallacy)」라는 용어가 있는데, 글을 써 내려가다 보면 자신도 모르는 글이 나온다는 것이다. 백남준씨도 그런 경우일까? 의도의 오류적인 결과라고나 설명할 만한 현상이 생겨난다. 비디오예술이 본격화하면서 백남준이 보여주는 비디오작품이 그의 특기인 음악뿐 아니라 무용, 종교 등이 포함된 종합예술로 확대, 발전되며, 단순한 화면장난에 머무르지를 않고 현대문명을 역설적으로 비판하는 메시지를 담아내기 시작한 것이다(말이 그렇지, 어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런 메시지가 나왔겠는가? 미리 다 계획하고 준비해서 나온 것이겠지).

예를 들어보자.「Suite 212」(조곡 212)라는 비디오작품에 포함된 '뉴욕 팔아먹기(Selling of New York)'를 보자. 배경화면은 고층건물이 즐비한 뉴욕의 밤거리, 알 카포네의 똘만이를 연상시키는 검은 모자를 쓴 세 명의 괴한이 걸어나온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이들은 괴한(怪漢)이 아니라 미녀다(중국한자에서 漢은 남자의 뜻을 갖고 있다). 그들은 알 카포네의 부하들처럼 능숙한 동작으로 기관단총을 들어올리며 관중들을 향해 발사한다. 그런데 거기서 나오는 것은 총알이 아니라 아름다운 꽃이다. 그 전에는 여성의 미끈한 다리 사이로 텔레비전 화면에 성적으로 좌절한 남자의 독백이 계속 나온다. 섹스와 돈, 폭력에 얼룩진 현대문명 속에서 황폐화해 가는 인간성을 되찾기를 강력히 희구하는 패러디이다.

70년대 후반에 접어들면서 시작된 이른바 비디오조각 또는 비디오 인스탈레이션 방면에서 그는 다시 천재성을 유감 없이 발휘한다. 75년 뉴욕의 르네 블록화랑에 처음 등장한 TV-붓다가 그것이다. 앉은 자세의 부처가 그 앞에 놓인 텔레비전에 비쳐진 자기모습(폐쇄회로 카메라로 잡아서 부처 앞의 텔레비전 수상기에 집어넣은 것)을 말없이 바라보는 조각이다. 여기에는 동양과 서양, 전통과 현대가 절묘하게 결합돼 있어서 격찬을 받았다.

76년에 발표한 작품'달은 가장 오래된 TV'라는 작품은 어두운 공간에 있는 12대의 텔레비전이 수상기조작에 의해 각기 차례로 커지는 달의 형상을 재현해 놓은 것이다. 텔레비전이 동양적 명상과 신비로움의 세계를 표현할 수 있는 훌륭한 조각 소재임을 입증했다. 78년에는 프랑스의 퐁피두 문화센터에서 수많은 나무와 풀 사이에 텔레비전 수상기를 눕혀 늘어놓는 TV-정원을 발표해 또다시 갈채를 받는다.

의도의 오류가 있었던 것은 아닌가? 뉴욕의 작업실을 찾아갔을 때에 나는 백남준씨에게 물었다: 당신 작품에 동양사상이 깊게 나오는 것은 어떻게 된 연유인가?

"자연히 나온 것도 있고 또 서양에는 없는 것이니까 그 편견에 맞추기도 하고. 전시장에 가 보았더니 벽이 비어있어 그림도 쑥스럽고 그래서 생각하다가 문득 부처님이 자기를 보면 되겠구나 라고 생각이 들었지.. 그런데 골동품가게를 지나다보니 부처가 눈에 띄었지. 그게 400불밖에 안 준 거야. 아주 훌륭한 골동품인데. 아 나중에 그걸로 2만 불을 받았걸랑. 두고두고 기분이 좋아!"

드디어 그는 미국인들, 아니 뉴욕에 모여있는 세계인들을 사기 칠 수가 있었다. 1982년 미국의 대표적 미술관인 휘트니 미술관에서 대규모 회고전을 열어준 것이다. 휘트니 미술관이 그의 회고전을 열어준다는 것은 그의 일거수일투족, 그가 만들 작품들, 그의 기발한 행동들이 이미 예술적으로 상당한 경지에 올라서 있으므로, 그를 되돌아보고 그 의미를 되새겨봐야 한다는 뜻일 게다.

그 이후 그는 이제 굳이 사기를 치려고 하지를 않아도 저절로 유명해졌다. 프랑스가 초청하고 독일이 그를 초청한 것이다. 82년 말부터 이듬해 부활절까지 반년동안 프랑스의 퐁피두 문화센터에 384대의 수상기를 눕혀놓고 전시한 '삼색비디오'전은 TV를 이용한 인스탈레이션작업의 분수령을 이루었다. 프랑스국기를 상징하듯 삼색의 색조로 나누어진 텔레비전이 퐁피두센터의 넓은 전시장을 채우며 휘황하게 빛났다. 프랑스뿐만 아니라 유럽의 화제를 몰고 온 문화적 사건이었다.

관객들은 황홀하다는 반응, 잘 모르겠다는 반응, 이게 예술인가? 라는 반응 등 다양했다. 그러한 반응에 대해서 백선생 왈:

"이것은 물론 예술이지. 그것도 고등예술이야. 사람들을 이끌어 올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사기는 이제 지상에만 머물 수가 없었다. 퐁피두센터의 성공에 뒤이어, 미국과 프랑스, 독일, 일본 등에서 인정을 받기 시작한 그 순간부터 그는 서로 떨어진 각 나라를 잇는 사상 최대의 예술작품을 만들어 팔아먹자는 아주 기발한 착상을 하게 된다. 그것은 곧 막 실용화되기 시작한 위성을 이용한 아트, 곧 새틀라이트 아트라는 것이다.

그 첫 작품이 이 글 맨 앞에서 언급한 『굿모닝 미스터 오웰』이다. 미국 뉴욕과 프랑스 파리 등을 위성으로 연결해 양쪽의 대표적인 전위예술가들이 벌인 첨단예술쇼다.

조지 오웰이 예언했던 전체주의가 도래하는 새해, 그가 예언한대로 텔레비전은 과연 인류의 생활을 감시하는 나쁜 도구인가? 텔레비전을 일찍부터 예술의 도구로서 긍정적인 면에서 제일먼저 활용해 온 백남준씨로서는 결코 인정할 수 없는 잘못된 전제였다. 그것을 메시지로 해서 전 세계에 신TV문명의 도래를 알리는 지구대축제였다.

이 위성쇼는 사실 위성사용료 등 15만 달러(22년 전의 가격이다)라는 많은 돈이 드는 잔치로서 미국의 공영방송에게 백남준이 돈을 모아 대어주는 방식으로 해서 어렵게 성사된, 그러나 그때까지 겨우 기술적으로만 태동한 상태였던 위성방송을 최초로 예술적으로 활용시킨 기념비적인 행사였다.

"84년에 대해서 조지오웰은 나쁘게만 봤지. 실제로 그런가? 나는 텔레비전으로 그의 예언이 이미 틀렸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어. 막상 위성방송에 들어가니까 중간에 새틀라이트가 깜빡거리는 거야. 그 때 정말 아슬아슬했지. 그러나 어쨌든 대성공을 거둔 거야. 정말 기분이 좋았어. 지금 생각해도 일생의 쾌거라고 할 만해.."

"존 케이지와 요젭 보이스는 친구였지만 한 번도 둘이 함께 공연한 적은 없었어. 요젭 보이스와 알렌 긴스버그도 적극적인 정치참가, 뜨거운 퍼포먼스, 철저한 반핵ㆍ자연주의, 거의 동연대의 로만티스트라는 공통점이 많은 예술가들이었지만 한번도 만나지 않았지. 하늘의 스타들, 예를 들어 화성이라든가 토성, 견우나 직녀들은 주기적으로 만나지만 지상의 스타들은 좀처럼 만나지 않는다. 이것은 인류에게 있어서는 큰 손실이 아닐 수 없어. 이 스타들이 위성이라는 새로운 문명의 이기를 통해서 만나게 했다는 거야. "

위성예술쇼 '굿모닝 미스터 오웰'이 성공한 이후 백 선생은 84년 6월 30일 한국에 와서 우리 국민들과의 만남의 시간을 가졌다. 그는 가는 데마다 화제의 연속이었다. 백 선생은 KBS 본관 4스튜디오에서 문화예술인, 시민들과 대화를 가졌는데, 사람들의 관심은 '예술이 사기다'라고 한 그 말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에 쏠려 있었다. 백 선생의 대답은 당시까지만 해도 예술의 순수혈통주의에 머물러 있던 국내 예술계에 폭탄과 같은 효과를 주었다. 그와의 대화는 90분 짜리로 편집돼 나갔는데, 높은 관심 때문인 듯 90분이 오히려 짧았다는 느낌이었다. 그 해 가을 마침 독일 뒤셀도르프에서는 당시 세계를 막 흔들기 시작한 독일 중심의 신표현주의 작가들이 대거 초청된 현대미술제가 열렸고 여기에 백 선생이 초청된 것은 당연했다. 백 선생은 여기에 본격적인 비디오 조각을 선보였는데, 튼튼한 철근으로 갈때기 모양을 만들고 거기에 텔레비전 수상기를 차례로 올려 일종의 비디오 깔때기를 만든 것이었다. '메쎄'라고 불리는 거대한 전시장 한 가운데에 달려있는 그 작품은 수상기에서 번쩍거리며 돌아가는 비디오 화면들로 해서 전시장을 압도하고 있었다. 그 때 이 전시회를 취재하고 또 당시 세계를 흔들던 행위예술의 대가 요젭 보이스를 만나 인터뷰한 것들이 합쳐져서 그 해 연말에 '굿바이 미스터 오웰'이란 프로그램으로 KBS 1TV에서 방송되었다.

84년의 성공이후 86년에는 뉴욕, 도쿄, 서울을 잇는 위성쇼 '바이바이키플링'을 만들어 방송했다. 인도출신으로 영국에서 활동한 소설가이며 시인인 루드야드 키플링(Kipling, Joseph Rudyard, 1865.~1936)의 시,

"동은 동, 서는 서, 그들은 결코 만나지 못하리..."

에 대해 위성을 이용한 댓귀(對句)를 쓴 것이다. 아시안 게임의 마라톤 경기를 축으로 해서 그 속에 동과 서의 모든 사상과 문화를 꿰어 넣음으로서 이번에는 동과 서가 서로의 마음을 열고 만나도록 한다는 뜻이었다. 다시 내가 연출을 맡은 이 프로그램은 아시안 게임 마라톤 경기를 직접 쓰는 것이어서 마라톤 경기와 동시간에 진행되었는데, 국내에서는 마라톤 게임이 끝난 뒤에 녹화로 방송을 하였다(이 때에 국내 반응은 그리 좋지는 않았다. 마라톤의 우승을 일본 선수가 했다는 것도 있었을 것이요, 마라톤이란 행사를 축으로 하다보니 거기에 삽입된 것들이 84년 초의 '굿모닝 미스터 오웰' 때보다 꽉 짜여져 있다는 느낌이 덜했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84년의 것이 미국과 프랑스만을 연결하는 것이었다면 이번에는 연결하는 나라들이 우리나라, 일본, 미국, 유럽 등으로 다변화돼 최초로 글자 그대로의 전 세계 예술제를 시도한 것이어서, 백 선생으로서는, 그것이 무사히 나간 것만으로도 크게 만족하고 자부심을 표시하였다).

다시 88년에는 서울 올림픽을 기념해서 "wrap around the world"라는 위성잔치를 열었다. 우리말로 지구를 싸는 보자기라는 뜻, 한국, 미국, 일본뿐 아니라 소련, 독일, 중국, 그리고 이스라엘까지를 연결하는, 그야말로 지구전체를 문화예술의 보자기로 둘러싸는 가장 큰 지구문화잔치를 직접 지휘함으로서 역사상 가장 넓은 지역에 예술작업을 펼친 예술가로 기록되게 됐다. 그의 예술은 이때 비로소 새틀라이트아트, 곧 인공위성을 이용한 예술, 나아가서는 스페이스 아트, 곧 時空藝術이란 가장 높고 넓은 차원의 예술이름을 부여받게 된다. 그야말로 그의 말대로 "새로운 콘택트가 새로운 콘텐트를 부르고 새로운 콘텐트가 새로운 콘택트를 부르는 문명의 피드백"이 그에 의해서 실현되어 가는 것이다. 이쯤 되면 더 이상 그를 사기꾼이라고 비난 할 수가 없게 되었다. 그의 사기는 너무나 완벽했고 너무나 앞서갔고 너무나 기상천외해서 보통사람들이 생각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84년의 쇼가 그를 둘러싼 많은 전위예술가들의 잔치라는 비교적 제한된 성격의 쇼였다면, 88년의 지구축제는 당시 이미 시작된 이념의 해체에 따른 국경과 장벽의 와해를 텔레비전이라는 강력하고도 광범위한 매체로 촉진시켰다는 점에서 보다 넓고 보편적인, 그러면서 동시에 정치사적인 의미도 많았던 행사였다. 그의 예술은 이미 인류전체의 비전을 제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지금까지 아무도 시도하지 못했던 전 인류의 예술잔치였다. 그 이후 지금까지 아무도 그런 기획을 다시 꿈꾸지 않고 있는 것만 봐도 백 선생의 기획과 실행력은 대단한 것이었다.

이러한 그의 성공은 그의 재능과 노력에 의한 당연한 결과이지만, 그가 일찍부터 그의 예술적 야망을 성취하기 위해 서울을 떠나 일본, 독일, 미국 등으로 차례로 옮겨온 과정을 더듬어 보면 옛날 유라시아의 광대한 벌판을 누비던 우리 선조들의 피가 몸 속에 흐르고 있기 때문은 아닌가? 그는 그 자신이 부인하던 말던 세계의 예술계를 흔들고 일반 시민들을 예술이라는 영역 속으로 쉽게 불러들인 예술의 영매, 곧 무당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동안 우리에게 비춰진 백남준의 모습만 보느라 그의 본 모습을 보지 못했다.

88년 위성예술쇼 이후 백남준씨는 텔리비젼 로봇이라는 새 작품시리즈를 꾸준히 발표하고 있는데, 이 작품들은 미국과 유럽의 주요 미술관에서 수없이 소장하고 있다. 뉴욕에 있는, 세계에서 두 번째, 미국에서 첫 번째로 지은 영상박물관의 입구에 백남준씨가 만든 판화와 텔레비전 자동차가 장식하고 있다. 뉴욕이 자랑하는 세계금융센터 내 미술관에도 백남준씨의 작품이 있다. '파티씨페이션 티비(participation TV)' 곧 참여하는 텔레비전이란 제목으로 관객이 마이크에 대고 소리를 내면 TV화면이 바뀌는, 그래서 자기 목소리를 눈으로 볼 수 있는 비디오조각이다. 워싱턴의 스미소니안 박물관도 백남준의 가장 최근의 레이저작품을 1997년 여름부터 넉 달 동안 전시해주었다.

또한 70년대 백남준씨가 비디오작업을 할 때 미국과 독일 방송국이 그의 작품을 방송한 것과는 별도로 90년대 이후에는 그의 예술세계를 본격 조명하는 특집방송이 미국, 프랑스, 독일, 벨기에, 이탈리아, 일본 등에서 잇달아 방송되고 있다. 그를 더 이상 사기꾼으로만 치부해버릴 수 없는 그 무엇이 그의 예술세계에는 있는 것이다.

현대의 매스커뮤니케이션은 인간을 획일화하며 독자적인 사고를 제약하고 행동이나 의욕, 또는 창의력을 상실케 했기 때문에 이른바 틀에 박힌, 획일화된 인간을 만들었다. 예술은 비인간화된 기술 때문에 고갈된 생명력과 에너지를 다시 한번 부활시켜야 한다. 현대의 대표적인 사회학자인 루이스 멈포드는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우리가 예술가를 존경하고 우대하는 것은 그들이 우리 범인들이 갖지 못한 창조의 에너지를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멈포드가 말한 그러한 창조의 에너지가 백남준에게 있었던 것이다.

64년 독일에서 미국 뉴욕으로 건너온 이후 백남준은 뉴욕에서도 예술가의 거리로 알려진 소호에 30여 년 동안 살았다. 소호의 허름한 창고식 건물 4층이 백남준씨가 작업실로 쓰고 있는 곳이었다. 1992년 7월 나는 텔레비전 기자로는 처음으로 그의 작업실을 방문할 수 있는 특권을 받았다.

실내는 예상대로 어지러웠다.

벽 쪽으로 텔레비전 몇 대가 무언가를 비추고 있고, 어항이 있어서 금붕어가 텔레비전 앞에서 놀고 있었다. 벽에는 물감을 덕지덕지 바른 화판들이 서 있었다. 그 화판에는 장난감처럼 만든 조그만 텔레비전이 장식으로 붙여져 있었다. 마치 어린아이들 소꿉장난을 하는 것 같았다.

백남준씨는 우리에게 피아노 연주를 해주었다. 그런데 곡명도 없는 제멋대로의 즉흥적인 연주였다. 피아노를 치는 것은 손이 아니라 조그만 비디오카메라다. 카메라로, 건반을 마구 때리는 장면이 피아노 위에 있는 텔레비전에 비치도록 되어 있다. 피아노의 건반은 제대로 남아 있는게 없을 정도이지만, 이 피아노는 백남준이란 한 엉뚱한 예술가에 의해서 그의 본래 갖고 있던 제한을 벗어나서 소리만 내는 것이 아니라 볼 수도 있는 희귀한 피아노가 되어버린 것이다..

" 이거 음악사에 남을 거야. 잘 하면 틀림없이 음악사에 남겠지...."

그러나 실제로 백남준은 피아노를 아주 잘 치고 있었다. 방송에서 클래식 음악을 설명해주는 유명한 디스크자키인 김세원씨의 아버지 김순남 작곡의 초혼을 연주하는 그의 손을 빨랐다. 그의 손은 피아노 건반의 까만 쪽을 능숙하게 타면서 12음계에 바탕을 둔 묘한 화성과 멜로디를 재현해내고 있었다.

백남준은 1940년 대 후반 김순남, 이건우 등의 음악가들로부터 당시로서는 첨단음악가인 쇤베르크를 배우게 되고 이를 작곡에 응용했을 정도로 일찍부터 세계에 눈을 돌리고 있었다. 그는 특히 김순남씨의 음악세계를 높이 평가하면서, 그가 이북으로 끌려가 그의 재능이 꽃피지 못한 것을 한국 문화계의 큰 손실이라고 아쉬워하고 있다.

"날 자꾸만 서양에서 다 배운 사람인 줄 아는데, 난 사실 내 인생을 결정지은 사상이나 예술의 바탕은 이미 내가 한국을 떠나기 전에 한국에서 모두 흡수한 거거덩. 우리나라 일제시대 때에 한국 예술가들의 수준이 서구라파나 일본의 아방가르드적 수준에 조금도 뒤지지 않았단 말이지. 난 쇤베르크나 스트라빈스키도 이건우 선생한테서 유학 가기 이전에 다 배운 거구, 신재덕 선생이나 이건우 선생 같은 분이 가르쳐주신 수준이나 내가 김순남 선생을 사사한 수준이 내가 독일 가서 작곡가 노릇을 할 수 있었던 바탕을 다 만들어 주셨던 거거덩. 역사는 자꾸 단절적으로 보면 안 돼. 우리는 일제시대 때 문화도 전통문화고 서양문화고 다 높은 수준으로 그대로 가지고 있었거덩. 난 그걸 흡수한 거야. 그리고 내가 내 속에 가지고 있었던 전통문화하고 서양의 아방가르드가 결국 비슷한 거라는 것을 나중에 발견한 것 뿐이지."

나는 백선생과의 인터뷰를 마감하면서 보통의 기자들이 그렇듯이 좀 멋있어 보이는 말로 질문을 했다. 시대가 바뀌면 예술가의 역할도 바뀌는데 여기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루벤스 시대의 뛰어난 화가는 임금 얼굴을 잘 그리는 것이고 현대에 오면 사람들에게 재미를 주는 거지. 결국 예술은 엔터테이너라고 할 수 있겠지. 지루한 일상에 재미를 던져주는 것, 사람들에게 무언가 할 거리, 볼거리를 만들어주는 거야. 요즈음을 보라고. 우리 주위에 어디하나 부족한 게 있냐고. 21세기는 살 물건이 없는 시대야. 뭐든지 다 있거든. 그러니까 무언가 할 것을 만들어 줘야 하는 거야. 예술가는 욕망의 창조자가 돼야 하는 거지."

백남준은 나와 만난 지 한달 뒤인 1992년 8월 국립현대미술관이 그의 회갑을 기념해서 마련한 전시회를 위해 한국을 방문해서 철학자이며 한의학자인 도올 김용옥선생과 얘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국립현대미술관에는 '다다익선'이라는 조각작품이 있지 않은가? 개천절을 기념해서 10월 3일을 상징하는 1,003대의 텔레비전 수상기가 설치돼 있는 곳이다. 그 설치작품의 설계도 중요한 데 건축가 김원씨가 미국 구겐하임 미술관의 나선형 계단을 살린 국립현대미술관의 구조를 감안해서 멋지게 설계했다. 그 자리에서도 같은 내용을 이야기했다.

"컴퓨터문화가 점점 증대되면 인간의 할 일이 없어진다. 생산은 많아지는데, 소비는 한정된다. 여태까지는 이런 잉여를 처리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전쟁이었다. 그런데 이젠 전쟁도 쉽게 할 수가 없다. 그러면 인간의 삶에 있어서 삶의 이기의 모든 것이 포화되어 버린다. 냉장고도 다 사버리고 ,자동차도 다 사버리고, 이제 이런 건 20년이면 끝난다. 피시도 얼마 못 가서 다 팔아먹고 새로 팔아먹기가 어렵게 된다. 무슨 지랄을 해 본들 인간의 소유는 한정이 있다. 그럼 이런 상황에서 예술이란 뭐냐? 폭력적 결과를 초래하지 않는 소비를 조장시키는 일이다. 전쟁이나 공해로 연결되지 않는 인간의 소비를 돋아주는 일이다. 다시 말해서 예술가의 임무는 어떻게 하면 소비를 창안하느냐? 하는 것이다." -김용옥 『석도화론& 도올이 백남준을 만난 이야기』253페이지. 1992년 통나무

백남준, 그는 누구인가?

적어도 그는 시대가 낳은 천재적인 사기꾼임에 틀림이 없는 것 같다. 그렇지 않다면 그가 결코 우연이나 요행으로 이처럼 세계정상급 예술가로 결코 올라설 수 없을 것이다. 그는 예술을 너무 심각하게만 보기보다는 인생의 양념이라고 보고, 갖가지 양념을 뿌려주는 사람이었다. 그러면서 역사에 대한 통찰과 반성, 그리고 현대문명에 대한 비판과 풍자도 담아내고 있었다. 그의 사기는 멋지게 성공했다.

그의 사기는 지칠 줄 모르는 사기꾼의 기질에 의해 무한대로 뻗어나갔다. 좁은 무대나 전시장에서부터 나라를 건너 우주로 올라갔고, 다시 빛의 궁극적인 형태인 레이저를 예술에 도입해서 새로운 재미를 주는 영역으로 들어가고 있다. 그렇게 재미를 주는 예술가로서 그는 그에게 맡겨진 임무를 누구보다도 잘 수행했다는 것이다. 그는 사기를 치되, 남에게 해를 주는 사기를 치지 않았다. 그의 사기는 결과적으로 사람들에게 새로운 볼거리, 들을 거리를 주고 사람들을 즐겁게 한 사기였다. 그는 결국 이로운 사기꾼이었다. 또한 아무도 모방하지 못할, 아무도 추종하지 못할 기상천외한 사기를 계속 터뜨려 왔다. 그런 사기꾼도 쉽지는 않을 것이다. 그의 재능을 현실화시켜준 탐구와 모험심, 그의 꿈은 30년이 훌쩍 지난 요즈음 가라오케와 뮤직TV, 광고 등 3차 산업과 컴퓨터 산업에까지 현실로 활짝 꽃피고 있다. 그런 그의 사기의 바탕에 바로 우리들이 지켜온 한국어, 한국적 사상, 한국적인 자연관이 바탕에 깔려 있기에 우리들을 더욱 재미있게 하는 것이다.

세계 정상의 예술인으로서 현대 세계미술사에 유일하게 등재된 한국인예술가인 백남준,그가 회갑을 넘고 고희를 넘어서면서 과거를 때려부수는 문화의 테러리스트로서가 아니라 인간에게 꿈과 희망을 주는 긍정적 예술가로 재평가 받았고, 동시에 그런 작품세계를 보여주었다. 그는 평생동안 결코 가만히 앉아있지 않는 예술가였기 때문이다.

뉴욕의 그의 아파트는 저택이 아니었다. 단순히 몸만 누이는 잠자리일 뿐이다. 그는 자고 일어나면 뉴욕타임즈를 들고 작업실로 나와서 숙독을 한다. 그 속에는 지구와 세상이 돌아가는 온갖 이야기가 다 들어있다는 것이다. 그 속에는 예술과 문화전반에 대한 수준 높은 비판이 다 들어있다는 것이다. 그를 사기꾼이라고 말했지만 그 사기는 자신의 배를 불리기 위해서 친 것이 아니다. 어쩌면 사기꾼의 기본은 사기를 치지 않으면 좀이 쑤셔서 못사는 사람들일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백남준씨도 그의 몸 속에 들어있는 그 재능과 통찰력과 창조적인 아이디어가 그를 가만히 놔두지 않아서 일생동안 그 많은 변신과 창조를 해내고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다. 그가 자녀를 두지 않은 까닭에 다른 예술가들처럼 재산을 축적할 필요가 없다. 남겨주어야 할 대상이 없기 때문이다. 그의 창조적인 아이디어를 받쳐 줄 만한 돈이면 족했다. 사실 백선생을 그처럼 여러 번 만났지만 식사한번 제대로 변변하게 얻어먹은 적이 없다는 점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는 돈을 모르는 사람이다. 그 점이 백남준을 더욱 순수하게 만들고 그것이 그의 아이디어를 계속 샘솟게 해 주는 지도 모를 일이다.

"인생의 베타막스에는 REWIND(되감기)의 단추가 없다" (1984년 도쿄도립미술관에서 열린 백남준비디오전 카탈로그의 자필서문)"

라는 말로 인생에 있어서의 매 순간의 의미, 매 순간의 최선의 노력의 중요성을 강조해 온 백남준. 남들이 하지 못한 비디오아트뿐이 아니라 새틀라이트 아트, 스페이스 아트를 해 내고 레이저를 통한 새로운 세계까지 열어간 백남준, 그에게 일본인들이 주는 노벨상이라는 교토상이 주어졌다. 상이라는 것은 평생 그가 해 온, 하려고 해 온 작업들이 상을 받을 의미가 있다는 점을 확인시켜주는 것 정도일 것이다. 그러나 그 상을 받기가 쉽지 않은 터에, 그만한 상을 받기 위해서는 인류에 기여하는 바가 있어야한다는 당연한 현실 앞에서, 백선생의 수상은 더욱 값지다고 하겠다. 그는 진즉부터 한국인이 아니라 세계인인 것이다.

내가 북경에 특파원으로 가 있을 때에 백남준씨는 쓰러졌다. 마음대로 다니지를 못하고 꼭 휠체어를 타고 다녀야 했다. 다행히 많이 회복이 된 1997년 10월 24일 워싱턴에 있는 스미소니언박물관이 그를 위해서 조그만 자리를 마련했을 때에 휠체어를 타고 나와 우리를 안심시켰다. 젊을 때와 달리 그는 말년에 무척 나이 들어 보였다. 수염이 덥수룩한 그의 모습은 가장 친하고 존경했던 예술적인 동반자 존 케이지의 만년의 모습과 비슷했다. 그가 60을 넘기며 주역의 한 바퀴를 몸으로 살아서 그런지 얼굴에는 예전에 보던 혈기가 덜 느껴졌다. 그러나 눈은 더욱 빛나고 있었다.

그러한 그가 이제 이 세상을 하직하고 하늘로 올라가셨다. 그의 맑은 눈은 창공에 두 개의 쌍둥이별을 더해주었다. 그 별을 타고 그는 꿈에도 묻히고 싶어하던 그리운 조국으로 돌아온다.

1983년 연말, 이원홍 사장의 '느닷없는 명령'에 의해 생판 모르던 백남준을 국내에 처음 소개하기 위해 당시 보도국 문화부 기자들이 했던 고생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우선은 백남준이 누구인가를 알리는 프로그램을 만들어야 했는데, 아무런 비디오도, 뚜렷한 작품도 국내에는 없지 않은가? 사람들에게 수소문하고 특파원들을 동원해서 구름 속에서 하나의 인물을 꺼내어 땅으로 내려놓는 작업이었다. 지금은 다 유명인사로 활동하시거나 활동하셨던 당시 박성범 파리 특파원(현 국회의원)과 김기덕 뉴욕특파원들이 애를 쓰셨다. 뉴욕 출장 중이던 강대영(전 KBS부사장) 선배는 뉴욕 WNET에 가서 프로그램 진행 대본을 받아왔는데, 팩시밀리도 없는 시대가 아니던가, 할 수 없이 텔레타이프로 그것을 모두 쳐서 보내었다. 여기서 받아보니 의미를 알 수 없는 용어들이 나온다. 중간에 'BREAK DANCE'라고 표시돼 있는데, 이게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누구에게 물어볼 수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멋대로 '아 우리 방송 용어로 말하는 스테이션 브레이크, 곧 프로그램과 프로그램 사이를 메우고 연결해주는 댄스인가 보지"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것이 바로 당시 국내에는 소개가 되지 않았던 브레이크 댄스였다. 나중에 이 이야기를 백 선생께 하니까 정말로 배꼽을 잡고 웃는다. 그것도 문화적 차이에 의한 충격이라면 충격이었다.

특파원만이 아니라 당시 문화과학부에 근무하던 기자들이 한 코너씩을 맡아 그의 예술세계를 다각적으로 조명해 주었다. 이동근, 김청원, 강갑출 등 지금은 다 중견언론인이 된 기자들이 주인공들이다. 모두 '없는 그림'(관련된 화면이 없다는 뜻)이지만 최선을 다해서 만들었다. 타이틀을 어떻게 할까? 지금은 음악효과를 담당하시는 분들에게 작곡을 의뢰하면 되지만 당시는 그런 개념이 없었다. 고심 끝에 화면은 불꽃놀이하는 화면과 전자파같은 화면을 합성했다. 타이틀 음악도 헨델의 음악 왕궁의 불꽃놀이와 전자음악을 믹싱했다. 화면과 음악 모두가 같은 개념의 믹싱이었다.

위성생방송 한 시간 전부터 한 시간동안 진행되는 이 프로그램을 누가 이끌어 갈 것인가? 고민 끝에 조각가인 최효주 씨를 선정했다. 최효주 씨도 갑자기 맡다보니 그 내용이 궁금했다. 당시 연말이라 초를 다투는 싸움이 연일 계속됐고 일주일 전부터는 나는 아예 집에도 가지 못하고 회사에서 밤을 새며 다른 사람들이 읽고 만들어준 내용들을 다시 손보며 자막이랑 내용정리를 해야 했다. 그 때 그 작업을 옆에서 지켜보던 최효주 씨가 안타까운 듯 매우 미안한 표정으로 졸고 있는 나를 깨워주던 정경들이 눈에 아직도 선하다. 그리고는 드디어 2시간 생방송 제1부 '백남준은 누구인가' 제2부 '굿모닝 미스터 오웰', 정신 없이 두 시간을 진행하고 나서 허탈한 가운데 1984년이 밝았다. 그리고 그 이후는 이미 알려진 그대로이다. 그 모든 것이 이제 과거라는 시간속으로 묻히고 있다.

1984년 초에 맺어진 백 선생과의 인연은 6월 말의 귀국, 그리고 그 해 여름 미술가 이우환 씨를 취재하러 일본에 갔다가 우연히 아침에 호텔에서 만나는 것으로 이어졌다. 그리고는 가을에 뒤셀도르프에 가서 만났고, 86년 아시안 게임의 '위성쇼 '바이바이키플링'을 만드는 것으로 해서 대강 끝난 것으로 알았다. 그 이후부터는 제작PD쪽에서 이런 작업들을 받아가서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다시 백남준 선생이 회갑이 된 1992년 그의 예술세계를 조명하자는 이야기가 회사에서 나왔는데, 백 선생의 제의로 내가 다시 뽑혀 뉴욕에 갔다. 당시 문화부 차장으로서 바쁜 일정 때문에 뉴욕에는 불과 사흘동안 머물면서 백 선생의 스튜디오에 처음으로 들어가 볼 수 있었다. 그 때의 취재물이 그 해 여름 한 시간 짜리 프로그램으로 방송되었다.

선생을 마지막으로 만난 것은 2000년 여름이었다. 뉴욕을 들를 기회가 있어서 무턱대고 그 스튜디오를 찾아갔다. 그 때 휠체어에 앉아있는 상태로 백 선생을 만났다. 부인인 구보타 시게코 씨도 좋아했다. 그것이 벌써 6년 전의 일이다. 이제 선생은 갔지만 선생이 남긴 작품은 세계 곳곳에 퍼져있다. 고인의 부음 소리를 듣고 집안 서재에 보관중인 당시 '굿모인 미스터 오웰'의 텔렉스 원고와 진행원고를 꺼내어 본다. 간간히 보내주었던 스케치 성 작품들을 꺼내본다. 22년의 시간이 지났지만 모든 것은 바로 어제의 일처럼 느껴진다. 시간이라는 것은, 일단 과거로 들어가면 모두가 평면에 박히는 것인가? 왜 시간적인 거리감은 없어지고 모든 것이 다 어제 일처럼 느껴지는 것일까?

선생님! 긴 여행이 끝나셨군요. 긴 여행이지만 누가 표현대로 짧은 소풍이었지요? 그동안 힘드셨지요? 그러나 당신은 예술계에서 한국이란 이름을 비로소 세계에 알렸습니다. 한국인이 갖고 있는 많은 사상적인 깊이와 폭을 세상에 전해주었습니다. 인류에게는 새로운 예술을 통해 보다 새로운 재미를 선사했습니다. 다 그동안 무언가 만들려고 애를 쓴 덕분입니다. 사람들이 기존의 재료에 붙들려 있을 때에 그 재료를 뛰어넘었고 사람들이 지상에 머물러 있을 때에 선생님은 우주로 올라갔습니다. 사람들이 현재라는 시간에 매어 있을 때에 선생은 미래를 연결하는 시공 속으로 뛰어들었습니다. 그것이 당신을 현대의 가장 특이한 예술가로 자리매김하게 했고 세계가 당신에게 찬사를 보내도록 했고 세계가 당신을 기리도록 했습니다.

이제 피곤했던 영혼을 누이고 편히 좀 쉬시지요!

2006.2.1. 서울에서 이동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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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진(cou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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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보기에 백남준씨는 영혼이 열린분이라구 봅니다 영혼이 열리지 않고서는 세상을 앞서가는 작품을 만들수 없으니까요 근데 동산님 마지막구절은 영혼의 존제을 인정해서 말한건가요 동산님도 영혼이 열렸으면 합니다
(2006/02/02 14:20:28)
[이동식] 東窓을 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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