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이 가고 4월이 왔다. 아직도 무서리가 내린다. 요즘 밭뚝과 배수로를 정리한다. 진달네와 수선화는 활짝 피었다 수선화 몇종은 아직도 피지 않았다. 동광원 정한나 어머의 흔적을 소개하고 싶다.
정한나 동광원 어머니(1900년 2월 8일~1984년 9월 14일)
동광원에서 호칭은 한나 어머니인데 성씨는 정(鄭)씨고 이름은 애돌(愛乭)이며 부(父)정동현 모(母)하동 변씨다. 성년이 되어 능주 전천영(全天英)씨와 혼인하여 호적에는 2남 3녀가 등재되어 있으나 남매 전병규씨와 전화봉씨 두 분만 알고 있다.
필자가 한나 어머니를 처음 만난 일을 생각해 보면 1965년경 임실 산중에 들어가 개간하여 살 때이고 부천군 오정면 도당리 원경선 선생 풀무원에서 오북환 장로님을 처음 뵙고 그때 계명산 수녀원에서는 떡번지 개간할 때인데 공통점이 있어 반가워하시며 계명산을 보러 가자고 말씀하셨다. 풀무원에서 조반을 먹고 소사역에서 기차를 타고 녹번리에서 내려 대자리를 지나 계명산까지 걸어갔다. 점심 먹을 때가 지났는데도 물도 먹지 않고 3시간 넘게 걸어가 오후 2시 넘어 한나 어머니 움막에 들어간 듯하다. 껍질째 씻은 무 한 개를 둘이서 나눠 먹은 후 뒤에 밥을 먹고 떡번지에 다녀와서 계명산을 떠나 서울역에 가서 밤 기차를 타고 임실에 내려왔다. 지금 생각해 보면 잠시나마 동광원 순례를 체험한듯하다. 그 시절에는 보통 20여리는 걸어 다닐 때였다. 그럼 이제 정한나 어머니께서 동광원과 연관된 이야기를 제 나름대로 정리해 본다.
1). 1942년 정한나 어머니 43세 이현필 선생(30세) 만남. (필자 추측임)
2). 1947년 출가전 걸어서 서울 유영모 선생 만나고 오다,
1946년 김준호 선생이 해남에서 처음 만나고 1947년 이현필 선생을 찾아 광주에 올라와 있을 때 YMCA에서 들은 이야기입니다. 수레기 어머니(손임순:1893~1963) 정 한나 어머니(1900~1984) 두 분이 이현필 선생(1913~1963)과 걸어서 서울을 다녀왔는데 육 개월 걸린 거예요. 그런데 어디를 찾아갔냐면 삼각산 밑에 유 영모선생(1890~1981) 집을 찾아 가셨더라 그래요.
정한나 어머니 수레기 어머니와 세 분이 걸어서 서울 삼각산 아래 유영모 선생댁에 다녀오다. 아래 글은 김준호 증언 3권 ‘순교자’에서 일부입니다.
저는 이 선생님이 해남교회에서 하루아침 잠깐 봤지요. 정이 들어가지고 광주로 찾아왔어요. 육 개월 되도록 행방이 묘연해요. 어디계신지 아는 사람이 없더라고요. 육 개월 동안 광주에 제가 있었는데 한나 어머님이 돌아오셨어요. 한나 어머니라는 분이 옛날 집사지요. 능주 교회 집사님인데 그러면 이야기 사연을 들어보니까 이 세종선생님의 여자제자가 수레기 어머니란 분이 계세요. 수레기어머니는 직분이 없어요. 수레기 어머니지. 수레기 어머님과 정 집사 정 한나 어머님 두 분이 이 선생님을 모시고 걸어서 서울을 갔는데 걸어갔다 오니까 육 개월 걸린 거예요. 갔다 오니까. 그런데 어디를 찾아갔냐하면 삼각산 밑에 유 영모선생님 집을 찾아 가셨더라 그래요. 그러니까 어머니 두 분이 뒤 따라 가지만 어떻게 선생님을 목욕을 시킵니까? 세수를 하게 합니까? 머리를 감겨드릴 수도 없어요. 그러니까 죽 따라 가다보니 이 선생님 옷이 없지요. 흰옷인데 까맣게 때가 묻었어요. 땀을 흘려가지고 머리도 미친 사람모양 덥수룩하지, 몇 달 못 감고 누가 봐도 거지고 어머니가 보기에도 민망하고 그랬는데 유 선생님 댁에 찾아갔더니 막 뛰어와서 맨발로 한나 어머니가 보니까 맨발로 뛰어나와 이 선생님을 꼭 안아 아버지가 아들 안듯이 그리고 손목을 잡고 방으로 들어가시더니 곧 옷 벗으라고 유 선생님이 친히 입었던 옷을 장롱에서 내주시고 어서 바꿔 입으라고 어서 바꿔 입으라고 그리고 사모님한테 옷 빨라고 내놓고 목욕도 시키고 꼭 길가에서 거지 안아다가 목욕시키듯이 목욕도 시키시고 목욕 시키는 건 추상이지요. 어머니가 보지 못했으니까 그런데 머리를 감기시더라고 그래요. 그분이 친히 쓰시던 걸 가지고 이 선생님 머리도 깎아주시고 머리를 감도록 하시고 새 옷 갈아입히시고 그렇게, 그 옷을 빨아서 말려서 입으니까 일주일 걸리더라고 그래요. 유 선생님 댁에서 그리고 떠날 때 선생님 가겠습니다. 그러니까 신문지를 옛날 화폐개혁 전 돈이니까 백 원짜리 아니지요? 십 원짜리 뭉치가 커다란 뭉치인데 이걸 가지고가서 쓰십시오. 그러시더래요. 이 선생 이것 가지고가 쓰세요. 걸어가지 말고 차타고 가라는 뜻도 되겠지요? 그러니까 사모님한테 물어보니까 몇 십 년 모은 십일조에요. 한 삼십년 모았던지 그 모은 총재산을 유 선생님이 내주시면서 이 선생 이것 좀 쓰십시오. 그러니까 걸어가지 말고 차타고 가라는 뜻도 있겠지요. 그러니까 끌러보지 않았어요. 끌러보지 않고 걸어서 대전쯤 내려왔는데 어머니 그 속에 뭣이 들었는가 보셔서 이집에 조금 나눠주고 가십시다. 그러시더래요. 뭐인지 몰랐는데 돈이더래요. 돈입니다. 그러면 거기서 좀 떼어가지고 이 댁에 드리십시오. 그때 돌아다녔다면 신사참배 관계로 몸을 조심했겠지요. 그때 은혜 받은 집이에요. 거기 돈 좀 떼어주고 목포까지 가셔서 목포 유달산 뒤에 집에 가서 그 집도 은혜 받던 집인가 봐요. 이 댁에 좀 떼어주십시오. 세어보지 않아요. 듬뻑 집어 가지고 주고 부산 가서 이 댁에 좀 드리십시오. 뚝 떼어주고 이래서 다 떼어주고 어머니는 일전도 못쓰셨대요. 밥 한 끼 사먹지 않았어요. 기차타지 않았어요. 그 돈 다 나눠주고 가십시다. 그래서 광주로 오셨답니다. 그래 몇 달 걸린 거지요. 그렇게 어머니가 보고 하시더라고요. 말이 아니에요. 유 선생님과 이 선생님은 말이 없는 분들이에요. 실제 한 몸이에요. 몸이 하나에요. 사랑이 떨어지잖아요? 만나면 복잡한 말 안하지요. 있으면 주고 만나면 옷 주고 머리 감겨주고 그리고 종일 앉아서 말을 안 하세요. 한방에 앉아있어도 말을 안 하세요. 언어 아닌 말이 있겠지요. 마음으로 사랑이겠지요. 그렇게 지내시던 분이라는 것을 저만 들었으니까 한나 어머니가 세상 떠나시기 전에 그 말하시더라고요. 그때 이렇게, 이렇게 해서 이렇게, 이렇게 광주 돌아왔다. 그럼 광주는 동광원 없었고요. 등광리에 돌아왔다. 그 이야기를 제가 들었습니다
3). 1947년 능주교회 정한나 종치기 집사, 교회당 빌려 성경공부, 이때 김준호 선생도 참석.
이글은 1990년 1월6일 김준호 선생 증언입니다.
한나 어머니께서 능주 교회 종을 치던 과부 집사님이시거든요. 옛날에 그 댁이 교회당 3일 동안 빌려가지고 우리가 말하면 성경공부 했어요. 해방 막 그 이듬해요. 그때도 한번 참석해 봤습니다. 그때는 개인 개인 공동생활 아니니까요. 개인 개인이 소문 듣고 찾아가서 만나면 성경공부 할 때 옆에 앉아있었지요. 그런데 광주에서 가신다. 그래서 돌아가신 박공님하고 이 선생님을 찾아갔지요.
이 선생님을 고맙게 봐버리고 꼭 애기 같아요. 그때는 법도 없고 엄하지도 않고 그렇게 천진난만하게 그러십디다. 그래 손님이 오신다고 하니까 무서워요. 무릎을 꿇고 아주 무섭대요. 그렇게 짱짱하게 하실 때가 있지만 마음을 놓고 허물이 없는 사이에는 애기 같아요. 아주 애기 같아요. 부드럽고, 그것도 목격했어요. 그러니까 몸가짐이 그렇더라 그 말씀입니다. 성경도 그때는 몰라요. 성경이 무슨 말씀인지도 모르겠고 이 선생님이 어떻게 밥 먹는가 보자. 그것도 봤고 어디가면 무릎 꿇는가 보자. 그것도 봤고 어디가 무릎 어떻게 풀어버리는가 보자. 그걸 주목할 때거든요. 그렇게 인격적으로 사신 분은 그렇게 지내신 것이 지금 회상이 됩니다. 그래서 아까 하신 말씀이 모든 좋은 것이 넘치도록 쌓입니다. 다시 말하면 절제하면 아껴 쓰면 얼마나 절제의 생활 모든 것이 풍부해도 자기는 아무것도 갖지 못한 것처럼 거지처럼 아무것도 없는 사람처럼 아껴 쓰고 절약해 쓰고 아끼는 생활 그것은 모든 것에 풍부를 불러일으킵니다. 아껴 쓰는 이에게 모든 좋은 것이 넘치도록 쌓입니다. 없는 것이 없고 부족된 것도 없습니다. 물 한 방울을 아껴 쓰고 나무 한 부스러기를 아껴 때는 그 모습은 그대로가 바로 풍부와 만족한 생활이 아니고 무엇이겠는지요? 존귀보다 겸손이 먼저 있고 풍부가 있기 전에 절약이 먼저 있습니다. 빈핍이 있기 전에 낭비가 있습니다. 가난했다 그 말은 낭비 했다. 그런 결론이라는 말이에요. 패망이 오기 전에 천박한 인생관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망했다. 그 집안이 망했다. 평소에 천박하게 살았다. 이 말이에요. 사람이나 짐승이나 풀이나 나무나 돌이나 무엇이든지 천하게 여긴 만큼 자기가 천해집니다. 돌 하나 풀 한포기 채소 한 가닥을 천히 보면 자기 자신이 천해 진다. 저는 그렇게 생각 됩디다. 제가 또 한 번은 아침 해가 뜰 때부터 해가 툭 뜰 때까지 남원에서요. 몇 집 어머니들이 갈 때 따라간 일이 있어요. 그런데 어떻게 어머니는 그 이튼 날 선생님이 오신다는 기별이 오셨던가 봐요. 그러니까 밤새도록 잠을 안자고요. 이렇게 큰상에, 자기 평생에 못 먹은 거 다 차려 놨어요. 식혜도 해놓고 떡도 해놓고 과일도 깎아놓고 고기는 안 잡수시니까 나물 해놓고 밥을 해놓고 국 끓이고 미역국 끓이고 김이 뭉게뭉게 나요. 그럼 딱 일어서요. 식사 하실까보다 안심하고 부엌에 어머니가 계신데 딱 일어나 나가버리면, 울어요. 울어, 아 밤새도록 지성을 다했는데 입을 안대고 나오시면요. 그럼 그 다음 집에 가지요. 조금 거리 있으면 인제 거기서도 알고요. 또 밥상이 나와요. 그럼 저기서 먹어버렸으면 이 집은 얼마나 섭섭할까요? 또 들어가 조금 앉아 있다가 그냥 나와 버려요. 그 어머니 또 울어요. 참 살과 같이 피와 같이 정성을 다해 차려 놓은 음식인데 안 잡수세요. 그러니까 한 세집이 네 집이 가면 이제 해가 낯 되어버리지요. 한집에서도 밥은 안 잡수셨지만 배가 불러요. 영적으로 배불러요. 그럼 누구 집에서든지 음식은 입에 안 댔어요. 그래서 지금 생각해 보면 그걸 보고 잡수시고 가시면 육적으로 만족하셨겠지요? 그러나 안 잡수시고 갈 때 영으로 그 천상의 위로를 받았지요? 천상의 위로를 받아가지고 생명도 자식도 재산도 아깝지 않아요. 모든 재산 모든 자녀를 이 선생님 뜻대로 해 달라고 던져버린 거예요. 이 선생님 앞에 던져버려. 애기가 한 살 먹어서 주고 두 살 먹어서 주고 내가 키운 것 보다 당신은 내 자식을 맡을 만한 인격이 있다. 믿음직하다. 내 자식을 맡아 주시오. 그런 애기들이 모인 곳이 양육원 애기들, 그런 소년이 모인 곳이 고아원, 그런 어머니 할머니가 모인 곳이 양로원 그랬지요. 처음에 절대 양녀도 아니고 고아도 그 집 어린 애기들 유치만 그 집 조금 큰 애기들 고아 반 그 집 시어머니는 할머니 반 그 집 시아버지는 할아버지만 그렇게, 그렇게 나중에 형성이 되었지요. 그 식구들이 그러니까 집집이 가서 맛이라도 보고 냉수를 마셨어요. 네 것 내 것 따로 있고 내 재산 내가 지키고 내 자식 내가 키우고 그럼 이 공동체 형성이 안 되어요. 동광원이라는 울타리 형성이 안 되어요. 울타리 그 생명을 줘도 아깝지 않은 것을 이 선생님의 생활에서 감화를 받았다고요. 생활에서, 뭐 성경말씀은 그 분은 별로 말 안했지요. 신령한 말도 별로 안하고 기적도 없고 그 인격적인 그 사랑 그 무엇인지 모르게 먹는 것도 아니고 입는 것도 아니고 영적으로 느껴지는 평화, 영성으로 느껴지는 감화 영성적으로 느껴지는 그 어떠한 인력 끄는 힘이 있었어요. 그러니까 자기 부모형제 친척 고향 모든 것을 이 선생님께 위탁하고는 일체 의심을 안했지요. 조금도 의심 안 해버렸어요.
그렇게 생각해 보고 아까 글을 다시 읽어보고 들어보세요. 자기 길을 먼저 잊으시기 바랍니다. 내가 배고픈 것만 생각하면 한 3일 굶고 쑥떡 찰떡이 김이 뭉게뭉게 나는 게 그렇게 기도하고 딱 그럴 수 없어요. 자기를 생각했다면 자기는 죽어도 좋고 살아도 좋고 다른 영혼 그 영혼들을 사랑하는 자비가 가슴에 꽉 찼었지요. 그러면 아까 그 후실이라는 부잣집 부인은요. 그 떡을 안 먹고 갔다고 얼마나 대성통곡을 하고 울고 내가 죄를 지어서 안 잡수시고 가셨다. 싶어서 못내 대성통곡 하다가 후실이라는 가문에서 뛰어나와 버렸거든 살수가 없어 불안해서, 그래 광주에 와서 양림교회 앞에 집짓고 사신다는 말 들었어요. 독립해 가지고, 그때 떡을 먹어버렸으면 안심하고 살 텐데요. 소실로 그렇지 않아요? 만나가지고 말로 후실로 있어서는 안 됩니다. 회개하시오. 그러지 않았거든, 마음으로 영으로 하셨지, 자기를 먼저 잊으시기 바랍니다. 얌전타는 생각 잊으셔야 합니다. 양반 생각이 너무 짙으면 고기 장사 비린내 모르듯이 모릅니다. 허례허식 양반 껍질로 얌전한 것 천국의 사람이 되려면 다시 새로워져야 합니다. 하여간 다른 일마시고 죄 찾는 일 해야 합니다. 자기에게 자비 베풀려 마시고 그리스도의 사랑이 자기에게 넘쳐흐름을 깨닫는 일을 해야 합니다. 자기 선을 베풀려 마시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베풀어야 합니다. 자기가 지혜롭고 의로운 사람 되려 마시고 하나님의 거룩한 의의 옷 입으심을 깨달아 알려해야 합니다. 그것이 곧 믿는 일입니다. 복종하는 길은 행복스런 이들의 택하신 길이라는 것을 발견하시기 바랍니다. 조금도 마음에 불만이나 부족 없는 순종, 어린양과 같은 온순한 심령으로 부족한 것이 참 행복이라고 복종하는 것이 참 행복이라고 몸소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자유 방종 않는 일은 참 자유 얻는 방도입니다. 자유 없는 생활 주를 생각하는 시간 아 그 얼마나 자유와 참 자유와 참 만족과 참 위안이 마음속에 새겨들어 오는 것인지요? 물 한 그릇을 자유로 못 마시고 먹을 것을 하나 못 먹고 입고 싶은 옷을 못해 입고 살고 싶은데서 못살고 잠도 제대로 못자는 부자유, 그를 불러서 참 행복은 이 사람들의 참 자유라 하겠습니다. 그렇게 사는 사람들이 참 자유라 하겠습니다. 주님을 기억하시고 갈 데도 못가고 보고 싶은 것도 못보고 듣고 싶은 것도 못 듣고 마음대로 못하는 생활이야 말로 아 얼마나 참 자유로운 행복 된 생활인지요? 그렇게 말씀하시던 정경은 생활로 우리가 더듬어볼 때 이 말씀의 흐름이 어느 정도 짐작이 됩니다. 여기 복종하는 길은 행복스러운 이들의 택하신 길이라는 것을 발견하시기 바랍니다. 이 부끄러운 이야기입니다만 육이오가 나기 전 전해 이지요. 서울 어머니가 살던 문바위 집터가 비어있었습니다. 그해는 금남 언니도 해방 후에 한 일 년 있다 내려가 버리고 동구씨도 내려가 버리고 서울 어머니도 하산해 버리고 집이 텅텅 비어 있습디다요. ‘준호,’ 그러니까 ‘예’ ‘오늘 문바위에 가봅시다.’ ‘예,’ 따라갔어요. 방에 들어 가 보니 해는 집니다. ‘준호, 준호는 여기 남으시오.’ 그리고 혼자 내려가 버리세요. 참 그때 지금제가 복 있는 것을 느껴요. 그때 어떻게 믿었을까? 이 선생님의 말을 믿었을까? 무조건이에요. 이불이 있을까? 요가 있을까? 밥이 있을까? 옷이 있을까? 가사 나무가 있을까? 성냥이 있을까? 해만지면 추운 때거든요. 그러니까 혼자 내려가 버리시는데 해가 지니까 쓸쓸하고 처량 합디다요. 더듬어 보니까 성냥 하나가 있어요. 불을 탁 피워가지고 뒷산에 가 낙엽이 많지요. 가져다 불 때고 자고 그 이튼 날 어린 소년 둘이 그때 귀주 어머니가 어머니고요. 어린 소년 제가 5-6명 데리고 있었지요. 담요 하나 단지 하나 뭐 김치 조금하고 쌀 한 되하고 그냥 쭉 성냥 한 곽 하고 딱 부쳐줍디다. 그리고 애기들 가버렸지요. 이유는 없어요. 설명도 없어요. 거기 있으라. 하고는 양식이 와버리니 이제 오지 말라는 기별이거든, 짐작했지요. 오지 말라나보다. 거기서 한 일주일 있으니까 애기 하나를 보내줍디다. 혼자 있으면 적적하다고 애기 하고 둘이 살지요. 한 달이나, 그냥 한 달 후에는 어머니하고 애기들 다시 다 올라와 버려요. 청소 집에 있는 애기들이, 그래서 소문을 들으니까 광주에서 그때 무슨 라디오도 없고 깊은 산에 있으니까 육이오가 일어났든가 동광원이 출발 했던가 보지요. 동광원 식구 백 명이 왔다고 거기 있던 애기들은 전부 산으로 올려 보냈어요. 얼마나 명철하세요? 거기 살던 사람이 하나만 남아도 안 되어요. 거기 그때는 밤손님 와서 물어보고 낮에는 순경이 와서 물어보고 거기 모든 일을 아는 사람이 남으면 안 되거든요. 유화래 여사가 오기 위해서 길을 닦는 거예요. 예수님이 오기 전에 세례요한이 길을 닦듯이 유화래 여사가 지나갈 길목에 있는 사람은 옛날에 살던 사람은 전부 비켜 버린 거예요. 미리서, 그리고 아무도 모르는 사람이 있도록 하고 그 길목으로 올라가실 수 있게 그렇게 하신 것 같아요. 그 길목에 우리 아기들이 살았거든요. 우리 아기들을 전부 산으로 올려버려. 그 아기들은 동광원 애기들이 아니에요. 동광원보다 일 년 전에 살던 애기들 이지요. 그래 이 조금 있으니까 짐작이 가요. 뭔 난리가 일어났나보다. 그러면 육이오가 일어나기 전 몇 달 전에 왜 무슨 직감이 있냐? 그거에요. 예언적으로 아신 건 아닌 것 같아요. 그 어쩐 직감이 있어서 저를 미리 산으로 올려보내고 그 다음에 애기들이 다 올라오게 그렇게 착 착 착 됩디다요. 지금 생각해 보면 그래요. 그럼 그때 저도 어린 애기들을 밤낮으로 데리고 살던 선생인데 애기들하고 저를 딱 분리했거든. 한 달 이상 애기들 옆에 못 가게하고 그런데 그 담에 보니까 육이오가 일어나고 애기들은 제가 데리고 산에 피신했거든요. 죽 광주서 온 애기들도요. 이왕 거기서 사는 애기들은 못 만나봤어요. 육이오가 끝나도록, 서로 왕래가 없어요. 서로 이쪽저쪽 비밀을 말할 수 없지 않아요? 과거에 있던 사람과 새로운 사람이 왔다갔다 못하니까 서로 비밀이 보장되어요. 지리 모든 사정이요. 지금 보면 얼마나 참 지혜롭고 바로 된 것인지요? 그러면 그때 저도 청년 아닙니까? 어떻게 그 말씀에 무조건 순종 했을까? 그게 참 은혜롭고 복 있어요. 제가 순종한 것 아니지요. 하나님이 그렇게 시켰지요. 말이 쉽지, 산속에 들어가기도, 보러 갑시다. 그리고는 ‘준호, 여기 남으십시오.’ 그러면 밤에 도망가 버린다고요. 화가 나서 이해가 안 되면요. 그렇게 안 됐어요. 무조건 산에 있으시오. 하니까 ‘예,’ 그만큼 이 선생님이 영력이 있었지요. 아무 설명 안 해도 산에 남으시오. 그러면 예, 그래도 아무 마음에 부담이 없어요. 이 선생님께 대해서 아무 의심이 없어 좋게 해 주시려고 그러시지 믿어버리는 거예요. 그랬어요. 지금도 그러란 뜻이에요. 우리 원장님이 어느 보모더러 이렇게 하시오. 그러면 무조건 예, 하는 것이지. 왜 날 이래할까? 그래서는 안 된다는 거지요. 이것이 곧 믿는 것입니다. 복종하는 행복스런 이들의 택할 길이라는 것을 발견하시기 바랍니다. 복종 한다는 것 복종하는 길은 행복스런 이들의 택하신 길이란 것을 발견하시기 바랍니다. 조금도 마음에 불만이나 부족을 느끼지 않는 순종 어린양과 같은 순수한 순종, 어린 아기와 같이 순수한 심령으로 복종하는 것이 참 행복이라고 몸소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저는 체험 했다는 보고 아닙니까? 지금 여러분도 꼭 언니가 위에 보모님이 이렇게 이것 하십시오. 가사 오늘 금식 하십시오. 찬물 잡수시오. 예, 그러고 먹고 그렇게 살아요. 왜 날 찬물 먹으라할까? 그러지 말라는 거지요. 자 따라 읽으십시오. 복종하는 길은 행복스런 이들이 택하신 길이라는 것을 발견하시기 바랍니다. 조금도 마음에 불만을 하거나 불평을 하지 말고 어린 양과 같이 순결한 마음으로 복종하는 것이 참 행복이라고 몸소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김준호 선생이 이현필 스승과 수레기(손임순) 어머니 따라 남원, 곡성, 화순등 지역 전도 순례길 참여하다.
오북환 장로 화순 도암 우치(소재)에서 목수일 하실 때 이현필 스승이 김준호 선생을 제자로 맡기고 탁발을 지시하다.
4). 정한나 어머니 지리산 서리내에서 남원 지역 전도 참가.
이 선생님 정한나 어머니 수레기 어머니(손임순) 3분이 서리내에 계시면서 각 가정방문 전도하심. 운교 지당 응실 술미 대실 수홍 이때부터 주일이면 갈보리로 모이기 시작했다.
김광석 장로 조동록 2분이 오감산으로 입산하셔서 기도하시려고 자리 잡으심.
정한채(한천) 송성근(동산교회) 예수 할머님 남원 다녀가심.
소년 소녀반 구성. 성경 공부 시작. 1주일씩 교대하며, 겨울까지 계속했다.
남반 : 신지호 이인경 황의순 복태평 조성춘 정성식
여반 : 김정순 신옥순 방순녀 조정은 정귀식 복질례
(복질례 도중 하차)
2월 수레기 어머님 오셔서 금남양과 동행, 전남 화순군 도암면 문바위 도 구박골로 떠남.
3월 18일, 남원 기독교 신앙공동체 광주에 진출하여 해방 후 재건된 광주YMCA 구내에 머무르면서 Y총무 정인세 선생과 사귐을 가지게 됐다. 그 후 여러 해 동안 YMCA를 중심으로 설교와 생활지도를 하면서 여러 층의 사람들과 사귀게 됐다. 광주Y회장 최홍종 목사, 총무 정인세 선생과의 교제는 이때부터 시작하여 그 후 사업적으로나 신앙적으로 긴밀히 서로 협조했고, 이 교제는 일생을 지속하다.
여름에 여반은 강남순 어머니 김금남 신옥순 방순녀 조정은 김정순 김순남 김은남이었다. 여름에 순교자 박선행 어머님이 자녀 4남매를 데리고 식구 전체가 들어오셨다. 정인세 Y총무님은 양복을 벗어버리고 3남매와 같이 들어오셨다.
이 선생의 교훈은 믿음과 사랑의 실천이었으며 그 영향은 광주를 중심으로 호남 일대에 널리 그리고 깊은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봄에 서울 삼각산의 철인 유영모 선생과 서울YMCA총무 현동완 선생이 광주로 이 선생을 방문하여 여러 날 묵으면서 집회도 가지고 서로 담화하며 교제했다. 이때부터 세분의 사귐은 서로 아끼고 존경하면서 일을 계속했고 많은 영향을 주고 받았다.
5). 정한나 어머니 출가.
여름 정한나 어머니 쌀1말 가지고 도구박골로 출가하여 수레기 어머니와 사시다. 그때 김준호 선생도 도구박골에 사시다.
아래 글은 2001년 1월4일 김준호 선생 증언입니다. 정한나 어머니 출가 이야기입니다.
‘나라는 놈을 죽여라.’ 그게 수레기 어머니 철학이에요. 제가 이야기 하지요. 한나 어머니가 가정살림을 다 마을사람에게 나누어줘 버리고 다 집에 있는 것을 다 없애버리고 소유는 쌀 한말이에요. 쌀 한말이면 일 년 먹을 수 있다고 생각 하셨습니다. 쌀 한말을 머리에 이고 도구박 골로 들어가셨어요. 그때 제가 거기 살았거든요. 그날 그때, 수레기 어머니 부엌 쪽에다 방 한 칸 들였어요. 허락받고, 저도 조금 흙을 이겨 발라 드렸는데 그렇게 기뻐하더라고, 그런데 그 막을 치고 방이 되어가지고 사세요. 그런데 가슴아피가 일어났어요. 한나 어머니가 참 과부로서 자식을 다 키우고 보내버리고 홀 홀 단신 출가해 가지고 이제는 마음을 닦고 있는데 그 옛날 독이 있지요. 몸속에, 옛날 살아가던 흔적도 있고 또 옛날에 가슴 아팠던 흔적도 있지 않아요? 그래 가슴아피가 일어나요. 그러니까 며칠을 끙끙 앓고 누워있는 거예요. 식사를 못하시고, 그러니까 약이 없지요. 그때는 약도 안 먹을 때니까, 사람이 죽어가는 거지요. 죽어가요. 그러니까 수레기 어머니가 문을 탁 열어보고 ‘아이고 걸렸고만, 걸렸어. 고놈만 없으면 살 텐데.’ 그래 수레기 어머니의 철학은 ‘나란 놈이요,’ 나란 놈이 있어서 며느리 섭섭한 마음 아들 섭섭한 마음, 그것 갖고 있다는 거예요. 그러니 가슴이 아파. 그걸 초월해야 가슴이 안 아프다는 거지요. ‘나라는 놈이 있고만,’ 왜 아프냐는 거예요. 마음이 평안하면 병이 없을 텐데 마음이 불안하니까 병이 있다는 뜻이거든요. 고향 떠나고 살림 다 없애고 자식 다 떠나보내고 몸만 와있지, 마음이 지금 걱정하고 있어요. 자녀들이 다 밖에 있고, 아이고, 그놈만 던져버리면 그만 벌떡 일어날 텐데. 그놈 그놈만 쫓아내면 될 텐데. 그래서 저는 어느 정도 알아들었어요. 처음에 출가하시고 비가 많이 오던 날 조금만 말해도 뒷방에서 다 들려요. 앞방에서 어머니들이 이야기 하는 거 다 들려요. 비가 오니까 두 분이 밭에 못나가요. 종일 한나 어머니가 살아온 이야기 하는 거예요. 예배당 이야기, 과거 이야기, 그러니까 손으로 뭔 일 하고 계시지요? 무슨 삼을 삼는지 알 수 없어요. 종일 둘이 방에서 일하고 계시더라고요. 말이 안 끝나. 밤새도록 잠을 안자고 이야기 하세요. 한나 어머니 혼자 이야기 하는 거지요. 다 들어주신 거예요. 밤에도 이야기, 낮에도 이야기, 과부의 설움이지요. 그 청춘과부가 되어갖고 살아온 이야기를 한도 끝도 없이 하는 거예요. 다 들어주세요. 결론은 그거에요. 다 들어주고 ‘아갸갸 아갸갸 나란 놈이 안 죽었구먼, 지가 지숭 보네.’ 결론이 그거에요. 일주일 동안 한스러운 이야기 했는데 ‘니가 니숭 봤다.’ 그러고 말아 버려요. 며느리 흉도 아니고 아들 흉도 아니고 남편 흉도 아니고 ‘지가 지숭 보구만. 아이고, 나란 놈이 죽어야 제.’ ‘나란 놈, 나란 놈이 안 죽어서 저렇게 가슴 아파 가슴앓이를 하는 거야.’ 자기 번뇌 자기 욕망 자기 미련 자기 미숙, 익지를 않아 자기가 건지가 있어. 건지 자꾸 뒤를 돌아봐. 그래 가슴이 아프다는 거예요. 그래 밥을 못 먹고 누워 계세요. 그래 뿌리를 빼는 거지요. 뿌리를 빼. 그러니까 무식한 어른들이 철학가들이지요. 철학이에요. 나라는 놈, 예수를 믿으려면 자기를 부인하고 평화를 얻고 싶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나같이 나를 따라오려거든 나같이 영적 사람이 되려거든 자기를 죽여라. 십자가를 져라. 껍질을 죽여라. 라는 거예요. 껍질을 깨라. 그럼 자유롭게 날아라. 눈을 뜨라. 태양이 보이지 않느냐? 별이 보이지 않느냐? 그거에요. 다시 말하면 해탈하라. 해탈, 껍질을 벗어라. 그러니까 동광원이라는 말은 껍질을 벗은 사람들의 공동체다. 그 뜻이거든요. 깨어난 사람들이다. 눈 뜬 사람들이다. 그러니까 훌훌 나는 사람들이야.
1949년 2월 1일 화순 도암 청소에서 고아 8명 돌보다. 김준호 선생 지도 보모 정규주 어머니. 그 후 소반바위 고아들을 사진관 댁이 돌보다가 배석희 언님도 돌본 적이 있다. 이런 일들이 6.25 피난 초석이 되었다.
6). 1949년 3월 정한나 어머니 해남 따님 전화봉씨댁으로 소녀반 인솔.
소녀반 1반(최명순 신옥순 복은순 김은남 복은남 성금숙)은 한나 어머님이 데리고 해남 따님 화봉씨댁으로 가셨다. 이른 봄인 것 같다. 거기서 6.25를 보내고 목포 오복렬 장로님 댁에서 몇 개월 보내다가 광주 동광원(고아원)에 합류했다. 해남에 있을 때 김은남(김금남 동생)은 채독으로 소천했으며 성금숙은 목포로 나올 때 배에서 소천했고 김순태(김승명 장로 동생)도 함께 해남에서 살았다고 복은순 원장은 전한다.
10월 19일 여순사건으로 고아들이 많아지다. 초겨울 YMCA 이사 중 반대자들이 있어 동광원 식구들 Y회관에서 나와 하천에서 움막 생활하다.
이해 봄, 현동완 총무의 초청으로 이 선생 제자의 일부는 서울로 진출, 삼각산과 능곡 등지에 머물게 된다. 그때 서울 YMCA의 후원으로 경기도 능곡에 오원(吳園)을 창설하고 남녀 청년들이 수도 생활을 시작했다. 이것이 이 선생 운동의 서울 및 경기도 고양지방의 복음 전도의 기지가 되었고, 후에 계명산 수도원의 모체가 되었다. 그때 학생들은 농사를 짓고 때때로 탁발을 하며, 항상 기도하고 성경을 읽는데 주력하게 했다. 이해 여름 전도대를 조직하여 남원, 순천, 여수, 완도, 강진, 해남, 광주 등지를 순회 전도했다. 전도단은 헌 옷에 맨발로 걸식탁발전도를 했고, 때로는 교회 중심의 전도 집회도 가졌다.
이때 순천의 김정기 장로, 완도의 김주환 목사, 강진의 장성철 목사, 해남의 이준묵 목사 등이 협조해주었다. 이때의 전도 여행은 제자들의 훈련과 실천 교육을 겸한 것이었고 이 경험이 후일에까지 많은 영향을 끼쳤다.
서울Y총무로 계신 현동완 총무님의 알선으로 능곡 오원 집으로 삼각산에서 이주했다.
7월 여반 강남순 김금남 김정순 신옥순 조정은 방순녀 김순남 김은남. 거기서 얻은 수확은 황옥파 자매 내외의 출가였으니 동광원으로 가정이 들어오심. 남반은 김준호 원정 삼용 인수(걸인 소년)
가을부터 오북환 장로님의 지도하에 능곡의 소년소녀반이 살다가 6.25를 당하였다. 남반은 이인옥 복태현 황의순 복태평 최명호 최명진 박경수 오세휘, 여반은 수레기 어머니 전양선 박금님 이공순 김순금.
8월에 식구 일부가 정 원장의 인솔로 서울 자아문밖 유영모 선생댁 근처로 이주. 서울 YMCA 직원으로 오북환 장로님 신지호 장로는 종로에, 삼각산에는 유영모 선생의 알선으로 김 장로 댁에서 방 한 칸을 주셔서 여반이 있게 되었다. 정 총무께서는 지하 방에 가 계셨다. 광주 대식구는 지산동 무등산 증심사 골에서(최흥종 목사 별장 100m 위쪽 헌집) 생활하였다. 오장로님 소년반 지도하심.
9월 현동완 총무댁에서 김정순 방순녀 머물면서 낮에는 세브란스병원에서 일함. 밤에 중앙신학교 야학 시도했으나 어머니들 반대로 무산되다.
10월에는 삼각산의 식구 일동이 여수 순천 고흥 소록도 강진 등을 순회하는 전도 여행을 나섰다. 순천 여수 고흥 녹동 소록도 완도 평일도 강진 해남으로 순회하는 도중에 강진에서 여순사건의 소식을 접했다. 광주로 들어와 서울로 상경.
김성수 전도사 소개로 함평군 대동면 금산리 김병섭씨 묶은 과목장(과수원)을 매입하여 한영우 장로님과 오우식 장판동 제씨 들어가다. 그후 함평 동광원은 거기서 6.25 동란을 보내면서 인공 관리들에게도 칭송받으며 보호받았다.
1950년 1월 광주 시청에서 지산동 적산가옥을 내주어 살게 되다. 여순 사건으로 인한 많은 고아와 과부가 생겨, 광주 YMCA를 중심으로 각계 유지들이 모여 대책을 찾은 결과 사회사업 동광원을 창설하게 되매, 이 선생은 제자들과 함께 이 운동에 투신하여 직접 그 지도에 전력을 다했고, 그러는 틈틈이 자주 화학산에 들어가 극도의 금욕 절제를 하면서 기도를 했다. 목포 공생원(고아원) 설립자 윤치호 원장을 초청, 광주 유지 70여 명이 모여 동광원 고아원 초대원장으로 정인세 원장(동광원)을 추대하다. 이때 정 원장은 이 선생의 뜻을 묻고 야고보서 1장 27절을 받아 승낙했다고 한다.
지산동 방림동은 동광원(고아원)이 시작된 곳이다.
7). 정한나 어머니 소년 소녀반 인솔 장성 소룡리 가을걷이 해주다.
장성 소룡리 사건으로 많은 사람이 죽어 한나 어머니 인솔로 소녀 소년반이 들어가 가을걷이를 해주었다. 그리고 광주에서 방순갑 수녀 총책으로 걸인잔치를 했다.
6.25 사변이 일어나, 인민군들이 남침해 옴으로 이 선생은 동광원 식구들을 인솔하고 화순군 도암면 청소와 화학산으로 피난을 갔다. 수백 명의 피난민 중에는 유화례 선교사와 전도사 몇 사람, 교계의 유지, 여순경 등이 끼어 있었다. 그들의 식량 문제, 생명 보호, 신앙지도에 이르기까지 일일이 지도 했으며 위급한 일이 있을 경우는 자신의 생명을 아끼지 않고 솔선해서 담당했다. 그의 비상한 신앙과 놀라운 사랑, 그리고 능력과 지혜는 모든 사람을 감동하게 했다.
이해 겨울까지 산중에서 보내면서 심각한 어려움을 겪었는데, 이때 김준호 선생이 끝까지 이 선생 곁을 떠나지 않았다. 이 피난 생활을 통해 유화례 선교사와 생사를 같이하면서 사귐을 가졌다.
일부 식구들은 남원으로 들어갔으며, 소녀반 1반(최명순 신옥순 복은순 김은남 복은남 성금숙)은 한나 어머님이 데리고 해남 화봉씨댁으로 갔다. 이른 봄인 것 같다.
화학산 피난시 양봉여(사진관 댁), 박정화(이발소 댁), 김순례(홈실 어머니)가 10월 4일 순교하시고, 강차남(김금남 이모), 서울 어머니(이름 모름), 문재현(문해곤 아버지)이 11월경 순교하심.
6.25 동란으로 능곡에 살던 오북환 장로님과 여반들은 피란하다 길이 막혀 능곡으로 되돌아가 살다가 수복 후 1951년 초에 내려 오다.
증심사골 최흥종 목사님 별장과 뒤편 움막에서 살 때 수녀착복식이 최목사님 반대로 무산되었다. 이때 강화도 배석희 수녀도 살았다.김준호 선생 화학산에서 나와 이현필 스승의 지시로 광주 천변 다리 밑에서 거지들과 살다.
정인세 원장님이 화학산 소반바위에서 묵언 수도 하시던 이 선생을 찾아가 필담으로 귀일원 이름과 일작운동을 시작하다.
•3월 8일 오북환 장로, 방안식 집사 요청으로 진도 고아들을 돌보기 위해 진도로 가시다.
•능곡에서 살던 소년들과 철원에서 온 소녀들이 진도에 들어가다. 남반은 오북환 장로님(이어서 서재선 집사님)이 지도, 여반은 정한나 어머니가 지도. 김금남 원장님도 사시다.
이 선생은 결핵환자를 간호하다가 자신도 폐병에 걸려 일생 이 병을 앓다가 결국은 세상을 떠나게 됐으나, 이 병에 늘 감사하고 심지어 결핵균에게도 사랑을 고백하고 병약한 몸으로도 여전히 엄격한 수도 생활을 계속하며 많은 내방자의 영적 지도와 제자들의 훈련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이런 중에 그의 감화는 널리 퍼져 그 교훈과 사업이 확대되고 그의 지도를 받는 수도단체(修道團體)가 전국 10여 곳에 생기기에 이르렀다. 이 수도단체는 공동생활을 하며, 순결 청빈 순명 사랑 봉사 노동을 서원하고, 농업으로 자립생활을 하며, 기도 성경공부 구제 사업에 힘썼다.
동광원은 해마다 두 차례씩 총회를 하게 되니, 그럴 때는 이 선생은 병약한 몸으로도 종일 설교를 계속했고, 수도 생활의 세밀한 부분까지 일일이 지도했다.
1952년 1월 정청촌 집사 백춘성 장로는 전답과 가옥을 포함한 재산 일체를 동광원에 기증하다.
8). 1952년 정한나 어머니 진도에 가시다.
1952년 초에 이현필은 주로 남반에 속한 서재선 집사, 이인옥, 오세휘, 황의용, 복태현, 조성춘 등 몇 사람과 여자반에서는 정한나 어머니와 김금남 등 소녀 7, 8명을 방안식 집사의 장모(한옥금) 씨 초청으로 진도군 읍내리로 이동시켰다. 이들은 진도읍에서 1개월간 생활하였다.
1953년 광주 남반은 지산동 여반은 양림동에서 살았다. 광주 양림교 하천변에 이인경 소년반 1, 김정순 방순녀 소녀반 2가 살다가 김정순 소녀반은 고아원이 폐지되자 남원으로, 방순녀 소녀반은 진도로, 이인경 소년반은 진도 돈지로 갔다. 돈지 어머니(곽칠금)가 진도 연산에 논 1,000평을 헌납, 본래 있던 주막집과 토지를 매입하여 터를 잡고 정규주 어머니가 들어가시다. 광주 양림교회 부흥회에서 부흥사 원경선 선생과 재회하다. 8월에 고아원이 폐지되다. 1954년까지 광주 남원 진도 함평 서울 능곡 등지에 있었다. 뒷동산 선교사 주택에도 살았다.
고아원 해산 후 각 고아원으로 보내졌던 고아들이 돌아옴으로써 식량이 곤란했다.
이때부터 감동산(광주시 봉선동) 농사를 위해 광주 시내에서 인분을 손수레에 실어 나르던 일을 인력으로 하다가 소달구지를 이용하기 시작했다.
신촌역에서 가까운 산꼭대기(일명 아현동 산7번지)에 서울시장도 지냈던 김상돈 장로님 새가정교회에 정인세 원장님이 시무했고, 강남순 어머니 등 동광원 식구들이 살기도 했으며, 근처 굴다리에는 한영우 장로님이 살았다.
9). 1954년 이현필 선생 파계 정한나 어머니 목격
그 굴다리에서 한영우 김준호 정한나 오장로님이 파계 증인이다.
※ 파계
여기서 동광원 담을 허신 큰 역사가 일어났다. (고기 문제) 아무거나 ‘고기를 사오라’고 하셔서 조기 한 마리를 제자 한삼채(=한영우=셋째, 동일인)가 사다가 끓여 국물을 떠 넣어드리니 그 물이 넘어갔다. 정 원장님이 오시니 ‘나는 고기를 먹은 놈입니다. 저를 동광원에서 책벌해 주십시오.’ 오신 분들께 모두 ‘나는 고기를 먹었습니다.’라고 자복하시고 약도 이때까지 드시지 않던 분이 ‘광주로 가자.’하셔서 제중병원(결핵병원)으로 가셨다. 결핵으로 같이 고생하고 있는 제자 김준호를 같이 데리고 가셨다. 입원시켜 달라셨다. 병원 측에서 선생님만 입원하라고 하시니 그러면 당신도 하지 않겠다고 극구 마다하시므로 별관에 없는 자리를 마련하여 입원시키고 치료를 하는 중, ‘선생님 6개월만 병원에서 치료하시면 낳겠다.’라고 했는데도 극구 퇴원하셨다. 선행으로는 구원을 얻지 못한다는 자기선의 벽을 허무셨던 대역사였음을 깨닫게 하시였다. 고기를 먹고 약을 썼다는 것을 일부러 공표, 소문을 냄으로써, 율법으로는 구원을 얻지 못한다는, ‘절대로 자기 선행으로는 구원이 없고, 예수님의 보혈이 뚝뚝 떨어지는 것이 보여지고 믿어져야 한다.’라고 하셨다.
1955년 5월부터 광주 신안교회에서 정인세 원장은 목회자로 시무(1955. 5. ~ 1959. 11.), 오복희 전도사 협력했다. 이때 김준 원장(당시 전남대 교수)이 정인세 원장을 통해 동광원 영성에 매료되다.
7월에 한천 천변에 소녀반 3(김정순 방순녀 조정은)이 살다가 10월에 한천 정이채 씨 집으로 들어갔다.
1956년 병으로 마침내 제중병원(현 광주기독병원)에 입원하다. 원장 고허빈 선교사의 정성 어린 치료를 받았고, 두 사람 사이의 영적 교제는 날로 깊어져서, 병원 운영, 환자 지도의 문제에까지 선생은 협조했다.
이때 동광원은 사회사업을 중시하는 순수한 수도 기관이었는데, 선생은 누워있으면서도 식구들의 지도 및 제자들을 시켜 전도와 구제 사업에 힘쓰게 했다. 병원 안에서는 간호원, 미화부, 매점, 청소부 일까지도 제자들을 동원해 협력하도록 했다. 이 봉사는 그 후 10여 년의 세월이 지날 때까지 계속되었다. 제중원과 동광원의 연락은 오늘까지도 사랑 안에서 계속되어 오고 있다.
아현동 굴다리에서 파계할 때, 함평에는 방순남 보모와 소녀반이, 능주에는 수레기 어머니, 물 어머니(혜신언니 어머니)가 사셨다.
사회 각계각층의 많은 저명인사가 찾아오게 되니 그중에는 목사, 국회의원, 관리들도 있었다. 선생은 그들을 일일이 친절과 사랑으로 대하고 믿음으로 살라고 부탁했다.
비록 몸은 약해도 틈만 있으면 서울, 능곡, 고양, 계명산을 비롯하여 남원 각지와 곡성, 광주, 화순, 함평, 진도, 해남지방에 흩어져 있는 신자들과 동광원 분원을 계속 심방하며, 제자들이 수도정진(修道精進)할 것과 사랑으로 합심하고 모든 일을 믿음으로 할 것을 격려하다.
이 무렵 광주 방림동에서 최흥종, 현동완, 고허빈, 정인세, 김준호 제씨가 모여 결핵환자 요양사업으로 <송등원(松燈園)>을 설립했는데 이 선생은 전적으로 그 모든 계획과 운영, 인사 문제까지 지도했다. 송등원은 후에 <무등원(無等園)>으로 발전됐는데 한동안은 백여 명의 요우(療友)를 수용하게까지 되다.
송등원은 제자들이 제중병원 간호 보조와 미화부 매점 운영을 하여 번 돈과 서울Y 현동완 총무의 후원을 받아 산수동 골짜기에 설립되었다. 이때 제중병원장 고허빈 선교사 도움이 많았고 김준호 선생에게 운영을 맡겼다.
3월 16일 광주시 북구 화암동에 무등원 설립. 김준호 선생이 김은자․김천자 수녀 자매와 결핵환자들을 돌보기 시작하다.
이 시절에 또한 협동조합을 조직해서 가난한 사람끼리 공동생활로 협력할 것을 권장했다. 산에 나무 심기를 장려해서 밤나무 등을 심게 하고 이를 위하여 회비를 모으게 했다(무화과회, 포도회 등이 생김).
도암면 용강리로 수레기 어머님 김은연 언님 들어가심.
7월에 소녀반 3반이 오북환 장로님을 모시고 한천 천변 돈들메로 이주하였음. 여자 청년반 유녀반은 도암면 용강리로 이동. 방순갑 김은자 남애주 임여님 가장 어린 유녀반이었음.
서울 난지도 고아원 이주지 답사 차 현동완 총무님과 정 원장님이 계명산을 생각해보았는데 미8군단에서는 일선에 가깝다고 취소되었고 홀트양자회는 녹번리에 자리를 잡았다.
10). 1957년 3월 5일 정한나 어머니 계명산에 입산하시다.
현동완 총무와 정인세 원장이 난지도 고아원 일로 계명산 답사 가는 길에 정한나 어머니 따라가 보고 입산 결심하시다. 그때 한나 어머니는 능곡에서 할머니 한 분과 도토리 줍고 동냥으로 2달 살다가 그후 서울 어머니(이희옥)와 천막에서 살았다.
1957년 3월 5일 정한나 어머니 이희옥 어머니 박공순 언님 능곡에서 계명산에 입산하심.
무등산 결핵환자 요양소 송등원(무등원) 김준호 선생과 김은자 김천자 수녀 등이 일하다.
소녀반 3반이 한천에서 광주로 이주, 다시 도암 천변으로 들어갔다가 가을에 도암 중촌에 집을 짓고 들어가다.
도암 대포리 천변, 김정순 방순녀 방순남 등 21명
큰 수해가 나서 막이 다 떠내려가 버렸다.
3월 5일 정한나 어머니 이희옥 어머니 박공순 언님 능곡에서 계명산에 입산하심.
1958년 소녀반이 계명산에 들어가 오북환 장로님을 모시고 산을 개간하여 자립하다.
11). 이현필 선생 1964년 3월 12일 계명산 수녀원에 도착하여 3월 18일 소천 향년 52세 정한나 어머니는 65세.
1964년 전은행 어머니 유봉주 6월 17일 소천.
1971년 계명산 수녀원 떡번지 큰 밭 개간 2,000여 평 고구마 수확 (150가마). 서울 서대문 아현교회 이분세(이 장로님 누님)씨 소개로 이재갑 장로님 오북환 장로님 만나다.
계명산 수녀원에서 경기도 장흥면 석현리(계명산 수녀원 앵무봉 넘어)에 땅을 구하여 남반 수도처를 마련했는데, 오북환 장로, 이재갑 장로, 동광원 남반 청년들이 한동안 살았다. 나중에 임락경, 김용래, 김공만 씨 등이 살았고, 최창익 씨는 따로 움막을 치고 살았다.
1972년 1월, 계명산에서 양성반 조직. 오북환 장로님 지도로 성경 공부 시작하다.
1977년 12월 25일 양성반 계명산에서 성경 공부 마침.
※ 오북환 장로님 성경공부반 명단
1회반 | 김금남 남애주 조정은 신옥순 조사연 복질남 방순남 박금님 |
2회반 | 김금남 이국자 복은순 김용숙(글라라수녀) 김교매 이맹순 이숙자 나숙자 김옥선 조성애 박옥순 오혜자 이오순 박정순 |
3회반 | 김춘일 방순녀 최순녀 남애주 나화자 강남예 박양금 이영희(엠마누엘라수녀) 이영선(로사수녀) 김순화(아녜스수녀) 전경애(마르타 언니) 박원순(데레사수녀) 김순덕(소화자매원 언니) |
4회반 | 이채영 최명순 임선임 허갑남 이연남 최호님 김민자 이영희(엠마누엘라수녀) 김금예(소화 자매원 언니) |
5회반 | 유조례 김교님 양병님 박강덕 심숙 조순남 김귀례 김순녀(안나 언니) 이영희(엠마누엘라수녀) 류미자(11월부터~) |
6회반 | (진도) 홍미숙 노종순 김순예 옥과모 복단모 방순녀 조사연 박정순 이봉애 이영희(엠마누엘라수녀) 류미자 |
7회반 | (계화도) 홍미숙 노종순 김순예 옥과모 복단모 방순녀 조사연 박정순 이영희(엠마누엘라수녀) 류미자 이재갑 장로님 이분쇄(이장로님 누님) |
12). 한나 어머니 계명산에서 내려오시다.
( )년 계명산에서 광주로 내려오시다.
1984년 8월 광주에서 남원으로 오시다.
다음 글은 1984년 8월 20일 남원 동산에서 하신 말씀입니다.
한나 어머니 살아계셔서 앉아 계시지 않습니까? 이 어머니는 복음을 완성하신 것 같아요. 40살 먹었을 때 어머니 여기 와서 앉아계시면요. 오늘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에끼 말하는 거 아니야. 에끼 지금도 그러지 않아요? 확실히 거듭났어요. 성령이 계세요. 이 한나 어머니는 확실히, 그러니까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복음을 완성하시기 위해서 꼭 손자 하나 있는 손녀 결혼해 버리지 않았어요? 그 왜 그것만은 안 된다. 하나님의 멧세지거든요. 하나님의 편지거든요. 손자도 구원받아야 하는 세상이다. 이렇게 가정을 넓혀 버렸어. 오늘 동광원 사람만 구원받는다. 그 주장이 무너져버려 우리 손자도 구원 받는다. 그러니 가정이 확 넓어져가지고 전 인류가 구원받는다고 하는 그 복음을 펴신 것입니다. 지금은 동광원이요. 전 인류에 대하여 공헌할 수 있는 그런 그 사명을 받게 되어요. 옛날에는 정절을 지킨 사람이 구원받는 공로자였지요. 지금은 누구든지 구원받는 다고 하는 그 대 복음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계획이십니다. 하나님의 계획 그렇게 돼요. 어디 좋습니까? 좋지요. 아버지가 둘째 아들 낳을 때 불행해요. 그러나 둘째 아들이 구원을 받았다는 것이 복음입니다. 이 성경 말씀에 둘째 아들을 용납했다는 대목이 빠져버리면 이 성경이 아니라는 겁니다. 도로 구약이 되어버려요. 도로 구약이야. 그러니까 구약으로 만족해서는 안 되겠다. 이제는 복음을 받아들여야 해요. 이 역사적으로 동광원이 복음을 받아들이는 때에 우리가 살고 있어요. 그래 받아 들였어요. 어머니가, 한나 어머니께서, 옛날 교회라 면요, 손자가 결혼했으면 죽었습니다. 죽었어, 못살아요. 가슴이 아려 와서 이제는 가슴을 넓혀버렸어. 용서해 버렸어. 그래 마음속에도 자비심이 에라 그것 불쌍하다. 아이고, 불쌍하다. 그 마음뿐이라고 미운마음이 없어요. 지금 옛날 마음 같으면 밉지요. 그러나 지금은 미운 마음이 없어요. 왜 복음이야, 복음 무조건이야. 아 그거 불쌍한 자식 불쌍하다. 아버지 저것을 불쌍히 봐 주십시오. 축복도 하거든 지금은 그래 이 어머니가 오래 사신 것이 참 동광원의 완성이에요. 어머니의 영혼이 평화를 얻고 돌아가시는 것이 곧 동광원의 구원이거든. 거기 계시니까 그렇지 않아요? 그래 이것은 역사적인 구원의 성취라고요. 또 한분 계세요. 여기, 배주 어머니, 일이년 전만 해도요, 딸 하나 둔 것 결혼해가지고 얼마나 가슴이 타들어 가고 절망하고 울고 눈물이 아마 다섯 동이는 더 나왔을 거야. 아홉 동하고 닷 되는 나왔어. 그런데 그년 봄에 장로님이 탁 마음을 넓혀 버렸어. 구원 있다. 다 구원한다. 다 용서한다. 그래가지고 어휴 한숨을 쉬고는 아이고 이제 살겠소. 이제 살겠다고 아휴 내 딸도 구원받는다니 이제는 다리를 쭉 펴고 잠을 자겠습니다. 이제는 희망을 갖겠어요. 배주 어머니가요. 이것이 복음이에요. 이제는 복음을 받아 들였어요. 동광원이 이제는 세례 줘도 부끄럽지 않아요. 지금 부끄럽지 않다고, 그러니까 모든 영혼을 구원하신 예수님의 은총을 받아들이신 우리 장로님께서는 모두 회개하면 구원을 받는다고 하는 복음을 말씀하고 계신다. 복음, 옛날에는 에덴복귀 교리를 주장하셨어요. 에덴에 복귀하자하는 교리에 집착하셨지요. 그건 두려운 사상입니다. 지금은 에덴 복귀를 주장하시지 않아요. 이미 에덴을 떠난 인류가 다 구원받자. 다 예수의 피로 구원받는다고 하는 근본적인 복음을 설하고 계세요. 그래 우리가 그 점을 이렇게 같이 인정하고 같이 가셔야지요. 누구든지 다 보냅니다. 아까 그리 가서요. 불행한 자식치고 어찌 깨끗한 사람이 있으랴. 다 버려. 다 그러면 누구든지 예수님의 피로 구원을 받는다. 예수님의 피로 죄 씻음을 받고 거듭난다. 새 사람이 된다. 거기에 누가 죄가 더 있고 덜 있냐? 따질 것이 무엇이냐? 판단할 것이 없다. 다 판단해봐야 다 죄인 아니냐? 그러니 용서뿐이다. 사랑뿐이다. 불쌍히 보는 마음뿐이다. 불쌍히 보자. 그 성령을 우리가 받았습니다요. 그 성령대로 사는 것이 유토피아다. 그 사랑으로 사는 것이 천국이다. 그런 결론을 내리신분이 이 사막에서 편지를 쓰신 분이에요. 이런 동지가 있기 때문에 확실해요. 장로님 말씀이 전혀 헛소리 아니에요. 회개의 길 복음주의라고 그럴까 일치를 본 것이에요. 이거 주장이 사막에서 편지한 분과 베드로 성인의 말씀과 장로님 말씀과 일치를 봤다는 것은 이건 세계적인 종교화 돼요. 종파 파벌 아니겠습니까? 우리 주장이 없어져 버렸어요. 이제는 특별한 은혜를 받는 사람은 깨끗하게 사는 사람은 특은이고 참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은 사람이고 아침부터 밤까지 일한 사람이지요. 애써서 피 흘려 일한 사람이고 대다수는 오후에 한 시간 일하고 구원받지 않습니까? 회개해야 구원받지 않습니까? 다 구원받게 하겠다. 다 구원이 있다. 예수님이 다 불쌍히 보신다. 다 용서하신다. 그러니 모두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니 아침부터 밤까지 일했다고 해서 그걸 섭섭히 생각해서는 안 되겠다. 그걸 동감하고 감사해야겠다. 그런 비유가 있지 않습니까? 몇 장에 있습니까? 찾아 읽어 보세요. 마태복음 20장 1절로 16절
하늘나라는 이렇게 비유할 수 있다. 어떤 포도원 주인이 포도원에서 일할 일꾼을 얻으려고 이른 아침에 나갔다. 그는 일꾼들과 하루 품삯을 돈 한 데나리온으로 정하고 그들을 포도원으로 보냈다. 아홉 시쯤에 다시 나가서 장터에 할일없이 서 있는 사람들을 보고 당신들도 내 포도원에 가서 일하시오. 그러면 일한 만큼 품삯을 주겠소. 하고 말하니 그들도 일하러 갔다. 주인은 열두 시와 오후 세 시쯤에도 나가서 그와 같이 하였다. 오후 다섯 시쯤에 다시 나가 보니 할 일 없이 서 있는 사람들이 또 있어서 왜 당신들은 하루 종일 이렇게 빈둥거리며 서 있기만 하오? 하고 물었다. 그들은 아무도 우리에게 일을 시키지 않아서 이러고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래서 주인은 당신들도 내 포도원으로 가서 일하시오. 하고 말하였다. 날이 저물자 포도원 주인은 자기 관리인에게 일꾼들을 불러 맨 나중에 온 사람들부터 시작하여 맨 먼저 온 사람들에게까지 차례로 품삯을 치르시오 하고 일렀다. 오후 다섯 시쯤부터 일한 일꾼들이 와서 한 데나리온씩을 받았다. 그런데 맨 처음부터 일한 사람들은 품삯을 더 많이 받으려니 했지만 그들도 한 데나리온씩 밖에 받지 못하였다. 그들은 돈을 받아 들고 주인에게 투덜거리며 막판에 와서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않은 저 사람들을 온종일 뙤약볕 밑에서 수고한 우리들과 똑같이 대우하십니까? 하고 따졌다. 그러자 주인은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을 보고 내가 당신에게 잘못한 것이 무엇이오? 당신은 나와 품삯을 한 데나리온으로 정하지 않았소? 당신의 품삯이나 가지고 가시오. 나는 이 마지막 사람에게도 당신에게 준만큼의 삯을 주기로 한 것이오. 내 것을 내 마음대로 처리하는 것이 잘못이란 말이오? 내 후한 처사가 비위에 거슬린단 말이오? 하고 말하였다. 이와 같이 꼴찌가 첫째가 되고 첫째가 꼴찌가 될 것이다.
따라 읽으십시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이것이 나의 계명이니라. 찬송 부르십시다.
요한복음 23장 39절부터 43절까지 보십시다. 또 한 번 마태복음 24장 41절부터 44절까지
한 사람이 두 가지로 풀어서 말하는데 여기 보십시오. 고린도후서 12장 7절에 공동번역이지요. 내가 굉장한 계시를 받았다. 해서 잔뜩 교만해 질까봐 하나님께서 내 몸에 가시로 찌르는 것 같은 병을 하나 주셨습니다. 이건 분명히 하나님이 주셨다. 이렇게 말씀을 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 몸에 가시로 찌르는 것 같은 병을 하나 주셨습니다. 왜 잔뜩 교만해 질까봐 똑같은 사실인데 다시 설명한 것은 그것은 사탄의 하수인으로서 나를 줄곧 괴롭혀 왔습니다. 그럼 병은 똑같은 병을 두고 설명은 두 가지 말을 하셨어요. 잔뜩 교만해 질까봐 병을 하나 주셨는데 하나님께서 내 몸에 가시를 찌르는 것 같은 것을 주셨다. 그렇게 설명하심과 동시에 그것은 그 말은 똑같은 병입니다. 그 병은 사탄의 하수인으로서 나를 줄곧 괴롭혀 왔습니다. 그 효과는 대단히 좋았어요. 그래서 나는 교만에 빠지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래 잔뜩 교만해 질까봐 병을 하나 주셨는데 두 가지 해석을 했어요. 하나님께서 주셨다. 또 하나는 사탄의 하수인으로서 나를 괴롭혔다. 그래 이 병이 둘은 아니거든요. 몸도 하나요. 병도 하나인데 그 자기 체험을 두 가지로 설명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 점을 지금 유의하고 봅니다. 그런데 우리가 자꾸 이렇게 여러 가지 헤매는 시험이 있다면요. 두 가지로 보지 않고 한쪽으로 치우치는 것이지요. 하나님께서만 주셨다. 이렇게만 봐버리면 교만해 진다할까 자랑이 되지 않겠어요? 사탄이 주었다고만 풀어버리면 낙망하고 낙심하고 절망하지요. 한쪽에 치우치기 때문에 똑같은 생활을 하면서 한사람은 교만해지기 쉽고 한사람은 절망해지기 쉽다. 그 두 폐단이 있습니다. 그러니 똑같은 사실을 하나님이 주셨다고 은혜를 받는 동시에 이것은 내가 교만하니까 사탄이 나를 이렇게 했다. 그렇게 자기가 정죄를 받는 것이지요. 그 두 가지, 두 가지 은혜가 받아질 때 그 사람의 영혼이 건전하겠다. 그렇게 생각을 해봤습니다. 그러면서 그 대조적인 말을 찾아보느라고 똑같은 십자가에 달린 죄수 두 명을 예를 들어 봤어요. 거의 똑같은 시간에 십자가에 못 박혔지요. 같이 아프지요. 거의 같이 죽지요. 그런데 한 사람은 어떤 태도를 품습니까?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달린 죄수중 하나도 예수를 모욕했다. 당신은 그리스도가 아니요. 당신도 살리고 우리도 살려보시오. 똑같은 사람인 데요. 똑같은 십자가인데 똑같이 아플 텐데 그런 마음을 왜 먹었냐? 그 말이에요. 그 사람은 삽시간입니다. 인생의 시험인데 똑같이 아프고 똑같이 죽어가는 마당에 한 사람은 이상하지 않아요? 또 다른 죄수는 너도 저분과 같은 사형선고를 받은 주제에 하나님이 두렵지도 않느냐? 우리가 한 짓을 보아서 우리는 이런 벌을 받아 마땅하지만 저분이야 무슨 잘못이 있다는 말이냐 하고 꾸짖고는 예수님 예수님께서 왕이 되어 오실 때에 저를 꼭 기억하여 주십시오. 하고 간청하였다. 예수께서는 오늘 네가 정녕 나와 함께 낙원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하고 대답하셨다. 그럼 고생이라는 건 똑같이 고생했어요. 두 사람이 슬프다면 똑같이 슬픈 일을 당했습니다. 억울하다면 똑같이 억울한 십자가를 지었을 것이고 또 아프다면 똑같이 아팠을 텐데 한 사람은 어떤 마음을 품었기에 예수님을 모욕할까? 죄수중 하나는 예수를 모욕했다. 또 똑같은 마음인데 또 한 죄수는 어쩌면 이렇게 겸손해요. 그 죄수를 꾸짖으시면서 예수님 예수님께서 왕이 되어 오실 때 저를 꼭 기억해 주십시오. 어쩌면 어린양같이 그렇게 유순할까? 그 점이, 점이 남의 일이 아닙니다. 우리 식구들 이야기에요. 이 방에 모인 사람들 이야기에요. 똑같이 짠 김치에 밥 한술 똑같이 보리밥 먹었는데 어째 한사람은 교만한지 모르겠어요. 어째 한사람은 그렇게도 겸손한지 똑같이 살면서 똑같이 잠자고 똑같이 밥 먹고 똑같이 일하고 똑같이 성경을 배웠는데 어째 한사람은 거만해지고 왜 한사람은 겸손해지냐? 그 이치, 이치를 상고해 보는 겁니다. 또 아까 보셨지요. 마태복음 24장에서 40절 이하의 말씀, 또 두 여자가 맷돌질을 하고 맷돌을 갈고 있다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그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다면 거기부터 봐야겠어요. 그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다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아까 강도 두 사람 이야기와 거의 같은 이야기에요. 또 두 여자가 맷돌을 갈고 있다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그 점, 그 점에 대해서 우리가 공부, 성경말씀 공부도 하시니까 이 두 가지 사람 똑같은 사실인데 왜 두 가지 사람이 나타나느냐? 가라지는 주인이 뿌렸는데 왜 밤사이에 주인이 씨앗을 뿌렸는데 왜 밤사이에 가라지가 나왔느냐? 그것은 주인이 뿌린 것이 아니라고도 설명했고 그것은 마귀가 뿌렸다고도 설명한 바가 있기는 있어요. 그건 똑같은 성경말씀을 배웠는데 왜 한사람은 자꾸 자꾸 교만해지고 어째 한 사람은 자꾸자꾸 겸손해 질까? 똑같은 말씀을 배우고 이 현필 선생님은 한번은 이렇게 설명을 하십디다요. 그 말씀 전에 했지요. 성경을 가르쳐 주신다고 해놓고 석 달을 안 가르쳐주시고 아침마다 성경 말씀에 관한 준비 말씀을 해요. 여러분 봄비가 옵니다. 저 봄비가 오면 산 나무는 저 비를 맞고 생기가 돋아 무럭무럭 자라지만 고목이 저 비를 맞으면 더욱 썩습니다. 성경도 이와 같아서 겸손한 사람이 배우면 날로, 날로 은혜가 많아지지만 교만한 사람이 이 글을 배우면 날로, 날로 더 교만해 집니다. 그러니까 성경을 그렇게 꼭 배우는 마음자리가 필요하다. 무조건 배워서는 안 된다 성경을 배울 마음자리가 있은 다음에 배워야한다. 그렇게 설명하시고 또 성경 안 가르쳐 주시고 시간이 끝나버렸다고요. 누가복음 1장을 놓고 석 달을 공부하셨는데 앞으로 전진을 안 하셔요. 또 마음을 준비시키고 또 한 시간 참석했는데 여러분 성경공부 하려고 모였지요? 내가 저 방에서 이방으로 오면서 봤습니다. 나무를 패 때고 도끼를 마당에다 내버렸는데 도끼를 썼으면 마당에 둬야 되겠습니까? 제자리에 두고 왔어야지요. 그 도끼가 거기 있으면 사람이 걸려 다치고 큰일이 나지 않겠습니까? 나무가 자기가 아쉬우니까 해서 때고 도끼는 휙 던져버리고 그 마음을 갖은 사람이 성경을 배우면 되겠어요? 그 마음 가지고는 성경 못 배웁니다. 또 그렇게 설명하시다가 그냥 나가버리고 안 가르쳐 주시고요. 그런 광경을 봤습니다. 제가 이 선생님 말씀을 생각이 나서 드리겠습니다. 육이오 사변 화학 산에 계실 때 모든 식구들은 거의 흩어졌고 막도 이제 곧 들어가려고 막을 다시 치기 전에 한 보름동안 노숙을 하셨는데요. 매일 장소를 바꿔서 주무셔야 합니다. 자꾸 찾아오는 사람이 김이라고 찾아올까봐 오늘 여기서 자고 내일 저 등성을 넘어가서 자고 갖은것은 이불은 있어야지요. 밤에 자려니까 이불이 두둑한 한 서너 명이 덮던 이불인데 밤에 몸을 빈 몸으로 이불을 가지고 다녔으니까 밤에는 이불속에 들어가 자지요. 아침에 보면 이불이 요에 흥건해요. 이슬이 적셔가지고 이불이 한 가닥 우기가 척척하니 짜면 물이 나올 만큼 이불이 젖었습니다요. 이불 속이니까 괜찮지요. 이슬 안 맞지요. 머리는 한 석 달 감지를 않았으니까 이렇게 뒤로 넘어가시고 그럼 숲속에서 종일 기도를 하십니다. 아주 번민을 하시고 괴로워 해 싸요. 가만히 뒤에서 기도하는 소리를 들어봤어요. 아버지 저는 그분과 그 맺힌 그 오해를 풀지 못하고 죽을 것 같습니다. 어찌할까요? 어찌할까요? 어떤 분하고 무엇이 맺혀있나 봐요. 곧 죽을 성 싶은가봐. 곧 아마 체포하면 죽을 것 같으니까 그분과 맺힌 것을 못 풀고 죽을 성 싶다. 그것을 그렇게 해요. 그런데 만나더라도 안 풀어졌나 봐요. 직접 찾아가서 얼굴을 뵙더라도 그 도저히 속사람 마음을 풀길이 없었던가 봐요. 그분과 자기가 맺힌 것이 있는데 이 선생님 문하에서 공부하던 사람들 끼리 오기는 있는 것 같아요. 지금 보면 누가 더 잘 믿느냐 그것이 있어가지고 서로 양보를 안 해줘요. 내가 잘 믿는다. 이 마음이 있어가지고 아무리 이 선생님이 그렇게 사과를 하고 잘못했다고 빌어도 용서를 안 해주는가 봐요. 그런데 그 마음을 서로 풀지 못하고 이제 죽을 성 부르기 때문에 이것을 어찌 할까요? 어찌 할까요? 그러면서 기도를 하셨어요. 닷새 엿새 그렇게 하시는데 하루는 아주 기뻐하세요. 해가지고 캄캄해야 둘이 만나서 이야기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해질 무렵까지 고민하던 분이 그날은 기뻐하시고 얼굴이 환히 평안하세요. 저녁에 그렇게 설명하세요. 아이고, 이제 안심이 됩니다. 내가 진 빚을 못 갚고 죽을까봐 벌벌 떨었는데 이제는 해결 났다고 왜 진작 몰랐는가 모르겠다고 예수님께 부탁하고 죽으면 될 것을 그걸 몰랐다고 저하고 그 사람하고 만나서 오해를 풀지 못하고 죽을까봐 벌벌 떨었는데 제가 예수님께 기도 올리면 예수님이 찾아가서 우리 둘 사이에 막힌 담이 헐어져버릴 것이 믿어졌다고 우리 둘이 풀지 못한 그 피차간 괴로움을 예수님이 대리자로서 찾아가서 그 풀어 주실 것이 믿어지니까 이제는 안심이 됩니다. 예수님 저는 평생 죄만 짓고 못 풀고 갑니다. 예수님이 대신 다 풀어주십시오. 그러니까 영원히 내가 진 빚은 못 갚고 가지만 예수님이 대신 갚아 주시라고 이렇게 미뤄지니까 기도를 올리게 되었으니 이렇게 해결이 났다고 기뻐하십디다. 그 점이지요. 그 점이에요. 그런 점이 사람과 사람끼리는 영영 안 되는 일이 많이 있어요. 돈 같은 건 갚으면 되지만 돈도 아니고 쌀 같은 건 갚아버리면 되는데 그것도 아니야. 누가 잘 믿느냐? 이 시샘이 생겨가지고 두 사람 사이에 말로서는 도저히 화목이 안 되어요. 사람끼리 풀어지지가 않아요. 그러니 실상은 이것이 답답하지요. 꼭 둘이 화목하고 죽고 싶은데 화목이 안 돼. 그렇다면 걱정이 되지 않을까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피를 흘리시고 화목을 시켜주시리라. 그렇게 믿어지니까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어주시고 피를 흘려주셨으니 예수님께서만 우리 두 사람의 오해를 풀어주실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 제 빚을 대신 갚아 주십시오. 그길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이 대신 그 빚을 갚아줄 것이 믿어지니까 마음이 평안하다. 그렇게 해석하십디다. 그러고 평안하시더라고 덕이 안 되니까 아무개라고는 지명할 수 없어요. 선생님이 누구하고 걸려서 그랬다. 그 말 할 수 없지요. 본인이 그렇게 되려고 된 거는 아니에요. 아주 조심하고 깨끗하게 모시고 존경을 하고 섬기고 그랬건만 오해가 걸리니까 이 한나 어머니 살림하실 때 거기 부흥회 할 때 한번 가봤어요. 그러니 그 어른들이 몇 명 있지 않습니까? 이 세종 선생님 문하에 몇 분 살아계신데 이 방에 들어가면 서로 못 들어가요. 서로 양보하느라고 그렇게 서로 조심해요. 들어가십시오. 아니 들어가십시오. 들어가십시오. 서로 앞에 안 들어가려고 이렇게 서로 그러니 답답해서 옆에서 보기에는 저는 쑥 들어 가버려요. 속이 없으니까 함부로 들어오지요. 그런데 그 분들은 서로 먼저 안 들어가요. 그렇게 서로 윗자리를 양보해요. 그 말씀 하나 하면 서로 안 해요. 말씀 하십시오. 말씀 하십시오. 말씀 하십시오. 하룻밤에 한분이 없어져 버렸어. 안계셨어. 말을 시켜놓고 말을 하는 거 그 꼴은 못 봅디다. 서로 그러니까 말을 하시오. 먼저 하시오. 말을 하면 삐치니까 나가버리고 먼저 하시라면 않고 먼저 말씀 하시지요. 하지도 않고 겸손한 사람이 먼저 말을 해버리면 그 사람은 나가버리고 그렇게 서로 희생합디다. 그것이 열두제자 아니었을까요? 이 세종 선생님 제자들도 그랬어요. 그것이 인간 아니겠어요? 그것이 인간이야. 누구 잘못이 아니라고요. 성령을 받기 전에는 다 그런가 봐요. 그렇게 됩디다요. 그러니 걸려서 된 일 같아서 그것이 죽을 성 부르니까 그렇게 황송하게 생각하시고 어떻게 했으면 마음에 평안을 드리고 가야겠는데 도저히 가능성이 없다. 아무리 제가 잘못했다고 빌어도 풀어지지 않으니 그렇게 걸려있기 때문에 예수의 피가 아니고는 도저히 화목이 안 되겠다. 그래서 예수님의 피에 대한 그 은총과 그 능력을 믿기 때문에 예수님께 부탁 하고나니 이렇게 마음이 평안합니다. 그런 말씀을 제가 들어본 일이 있어요. 자 그런데 오전에는 제가 실덕했지요. 안계시니까 이야기 한 것 같지만 그렇지 않아요. 귀주 어머니하고는 제가 몇 번 이야기 했어요. 어머니 단점에 대해서 제가 혹시 제 삼자하고 예배 석상에서 말씀 하더라도 제가 어머니 흉이 아니지요. 아이고, 그렇지, 아무 오해 없다고 그러십디다. 이것이 남의일이 아니라 되는 거거든요. 남의 일이 아니야. 모두 우리 앞에 떨어진 문제거든요. 그래 이것이 말이 아니에요. 실제 문제거든요. 실제 문제인데요. 이 시간에는 배주 어머니 여기 와계시니까 흉내 낸다고 삐치지 마세요. 나오셨어요. 안 나오셨어요. 배주 어머니 괜찮아요. 내가 쳐다보면 아니까 지금 이 시간에 혹시 섭섭하더라도 그 뜻은 아세요. 저를 성인같이 존경한 분이 배주 어머니라고, 또 저는 배주 어머니가 아니고는 어머니가 없다고 할 만큼 어머니를 존경하지요. 두 사람이 이렇게 왔어요. 이번에 한번 둘이 걸렸어요. 그래 그저께 풀었어요. 여기서 불효자식입니다. 어머니 용서해 주십시오. 뭘 그러냐고 내가 잘못했소. 그래 어머니가 나가버렸어. 그러면 화목하지 않았소. 어떻게 걸렸냐? 이것이 남의 일이 아니라고 배주 엄마하고 저하고 둘이 걸린 것이 남의 일이 아니에요. 여러분 일이에요. 그러니까 한 가지 일을 봐서 열일을 치료할 수 있어요. 한 가지 일을 봐서 열 가지 일을 미리 깨달을 수 있다. 그 말씀입니다. 간단히 설명하면 그래요. 제가 오랜만에 개화도로 들어갔어요. 제가 제일 아끼고 사랑하는 우리 어머니 배주 어머니가 가만 눈치를 보니까 말을 안 들어도 눈치가 있거든. 아 우리 어머니는 고아가 되어있어요. 이 방으로 가서 주무시다가 저 방으로 가서 주무시다가 어머니 방이 없어요. 아 그래서 어머니 편이 되지요. 마음이 그래서 우리 어머니를 편케 모셔야겠다. 그런 생각이 들어서 장로님 세휘자 같이 제일 온순하고 사람이 덕이 있고 말이 없으니 이 배주 어머니 앞으로 모시면 어떨까요? 아 그거 좋지. 그러시더라고요. 설명을 서로 안하지. 아무 설명 없이 그 이튼 날 명령을 했나 봐요. 배주 어머니 세휘자 한 테로 가시오. 장로님도 설명 안 하시는 분 아니에요? 앞도 뒤도 없이 이래 버리시니 어머니 혼자 생각 했겠지요. 내가 어디가 미워서 그곳으로 가라고 하는가? 나는 여기서 못 사는가? 나는 왜 이렇게 싫어하는가? 그래 억지로 가셨는가봐. 이해가 안 되시고 가서 생각하니 참 기가 막힐 것 아니요? 나는 개화도 에서 못살게 하고 이리로 보내버렸다고 생각했다. 합시다. 그러면 섭섭하지 않으시겠어요? 그래서 좌우간 무슨 영문인지 이유를 모르니까 저를 만나가지고 한번 이야기를 해야 쓰겠다. 하고 생각을 하셨던가 봐요. 그러자 본원에서 저하고 둘이 마주쳤어요. 저는 이제 본원을 석 달 만에 한번 가지 않습니까? 갔는데 저녁 예배시간에 종을 쳐요. 예배시간에 참 본원에서는 한 사람도 와서 성경말씀을 하라고 하시던지 예배 인도하라는 말 한사람도 없어요. 본원에서 오신 분 몇 사람 계시지요. 그러니까 인제 무색하지 않아요? 객지에서 있다가 왔으니까 아 예배 인도 하시오. 이래야 되는데 가야 옳은지 안가야 옳은지 안가도 못쓰겠고 가도 못쓰겠고 인제 자꾸 눈치를 보지 않겠어요? 예배 인도하시오. 하는 말도 없고 그러다가 나가봐야 할 텐데 모처럼 왔는데 안 가 봐도 못쓰겠다. 하고 이러고 있는데 어머니가 들어오셨어요. 인제 어머니는 오래 참았던 이야기니까 종치는 소리 안 들어. 어떻게 나를 개화도 에서 곡성으로 가라고 했소? 들어앉자 따진단 말이야. 아 종칩니다. 그 나중에 말하시오. 종치니까 간다고, 아 나하고 이야기 하지 어디로 가냐고 아 종친단 말이요. 아 나하고 말하지 내 마음도 안 풀어주고 누구하고 뭔 말을 하냐고 그래서 아주 당황이 되어가지고 언제까지나 죽을 잡술라 그래요. 밥 먹어야지, 그러고 그냥 예배 보러 가버렸어요. 그래 예배 인도를 하고 그 다음에 사람이라는 것이 영이 있으니까 부끄럽습디다. 내가 어머니 마음에 섭섭하게 해드렸구나 싶어서 전은 이렇고 후는 이렇습니다. 하고 설명을 못하고는, 들어앉자 언제까지 죽을 잡수려고 그래요? 밥을 먹어야지. 하고 홱 나가버렸으니 어머니가 얼마나 섭섭할까? 그러고 눈치를 보지요. 살살, 그래 곡성을 갔거든요. 예배를 다 보고 소감을 이야기 하십시오. 하니까 어머니가 이렇게 말씀 하십디다. 내가 준호를 성인인줄 알았더니 이번에 보니까 얼굴이 빨개 지그만. 아갸갸, 내가 몰라 봤구나. 깜짝 놀랐어. 그러면 그렇지. 그때 실덕을 했는데 내가 부끄럼을 타는데 내가 미안해 죽겠는데 금방 아십디다. 어머니 마음에 그랬구나. 내가 성인으로 봤는데 말 좀 하자니까 얼굴이 빨개 얼굴빛이 변하더라고 세상에 저렇게 속에 있는가 모르겠다. 그런 심정을 풀었다고 꼭 그런 심정을 말을 안 해요. 그렇게 이야기를 하신 것이라 그 말이에요.
1984년 3월 14일, 진도 분원(곽칠금 김춘일 이국자 윤수진) 철수. 풀무원 총무에게 맡기고 남원으로.
13). 1984년 9월 14일 동광원 어머니 정한나 소천 향년 85세.
삼각산(동광원 성가) 작사 정한나
1. 삼각산에 큰돌이 많다하여도
다윗왕의 물맷돌을 못당하리라
한강물이 아무리 많다하여도
생명수의 한줄기를 못비하리라
2. 계명산의 참나무 많다하여도
주님믿는 기쁨만은 못비하리라
왕궁집이 아무리 크다하여도
일천이백 정보집은 못비하리라
3. 일천이백 정보집 어디일까요
계명산의 석자반의 오막살이요
한문지식 아무리 좋다하여도
참이치의 한말씀을 어이당하리
4. 김제벌판 아무리 넓다하여도
자수개간 일정보에 못비하리라
우주안이 아무리 크다하여도
자아심경 한치거리 못당하리라
5. 수평선이 아무리 넓고 길어도
자체안의 지평선을 못비하리라
저하늘의 햇빛이 밝다하여도
내몸속의 어둠을 못밝혀주니
6. 이세상은 영자요 우리는 과객
회개하며 지나가는 나그네로다
슬프도다 나그네 사막같은 길
어찌할수 없어서 주님 찾으나
7. 절위하여 귀한 몸 버리신 은혜
잊어버린 큰죄로써 응답이 없네
자비하신 성수를 기다리오니
부정한몸 주보혈로 씻어줍소서
8. 어둔귀눈 틔우사 우주만물에
계시된뜻 볼 수 있고 듣게하시고
주님자취 따라서 아버지뜻에
순종만해 영광되게 하시옵소서
'그때 그일'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낭도를 보고오다 : 인지학/생명역동농법 (3) | 2025.04.06 |
---|---|
벌교 우리원에 오다 : 동광원 정규주 어머니 (2) | 2025.04.05 |
복숭아 자두 꽃이 피다 : 정규주 어머니 (0) | 2025.03.30 |
꽃들의 인사 : 겸손과 교만 (0) | 2025.03.25 |
진달네가 피다 : 완전 포기와 완전 승리 (0) | 2025.03.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