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제 대부도 광주 곡성에 다녀왔다. 동광원 형제들의 증언3 초안을 마련했다. 코로나가 다시 감염자 수를 높이고 있다. 가뭄이 오래 이어지더니 폭우로 곳곳에 피해가 있다는 소식이다.
오 북환 장로님 회고담
계명산에서 연산 기록, 1996/03/14
지리산 노고단 퇴행골은 일본 삼개대학(구주, 경도, 동경) 연구팀이 있었다. 그때 그곳에 죽은 나무가 모두 썩고 있어 재목으로 이용하고자 서 집사와 들어갔으나 산 나무까지 피해 입을 가 봐 관리인이 허락지 않아 못하고 나와 남원에서 큰 형님이 자본대고 서 집사, 배 집사와 네 사람이 가게(목공소)를 차리게 되었다.
그때 부산으로 가져가려던 문제가 된 목재(3만 사이정도)가 있어 그 나무를 샀다. 일미전쟁 중이였으므로 나무가 귀할 때였다. 나무가 전혀 수입이 아니 될 때다. 단단한 나무여서 그 나무로 의자 등을 만들어 팔았는데 아주 잘 나가 광주뿐 아니라 중국 도문에서까지 주문이 쇄도했다. 만일 기계를 이용했더라면 큰돈을 벌었을 것이다.
나는 애초 목장이나 과수원을 해보고 싶었다. 그래서 한때 장수 팔공산등지를 땅 보러 찾아다닌 적도 있었다. 19살에 보통학교 졸업하고, 세계 무전여행이 꿈 이여서 기술 배워야겠다고 목수 일을 배우게 되었다. 부산 초량에 가서 그 목적이 이루어져 살게 되었는데 어머니께서 찾아오셨을 때다. 그때 3친구와 소녀가극단을 보러갔다. 가극단은 그 시절 일본인들 위주였고 조선극단은 거의 없을 때다. 가극을 보고 친구들 성화에 못 이겨 술집에 들어가 술을 마셨다. 비가 많이 내려 친구들이 자고 가자했지만 어머니 핑계 대고 나오려고 일어서는데 무릎이 아파왔다. 무릎은 째고 치료해서 낳았으나 또 전신에 종기가 나서 비누와 설탕을 밀가루와 개어 부치면서 치료했다. 그렇게 되니 일을 못하게 되어 고향에서 돈을 부쳐와 쓰고 살게 되었다. 또 이런 일도 있었다. 일본사람 주인이 공임을 제대로 주지 않았다. 그는 동경 출신으로 기술이 좋아 다른 집에서도 주문이 들어 올 정도였는데 술과 도박이 심해서 돈을 탕진하고 돈을 주지 않았다. 돈을 받지 못하니 집세도 못 내게 되어 조선 사람 집으로 옮기게 되었다. 돈 때문에 사제의 의를 저버린다 하니 슬퍼서 밤새 울었다. 옮긴 후 종기는 낳았으나 위장병이 생겨 십리 도보 출퇴근 하면서도 도시락 싸가지고 가서도 못 먹고 도로 가져올 정도였다. 그때 인생의 허무를 느끼게 되었다. 하루는 주인집 형이 경영하는 목욕탕에 갔는데 거기서 옛 주인 일본인을 만나게 되어 등도 밀어주었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드니 그가 거기에 올 필요가 없었다. 자기 집에도 목욕탕이 있고 또 다른 목욕탕들이 많이 있는데 말이다. 이것도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되어 더욱 인생이 무엇인가? 왜 사는가? 회의가 나기 시작했다. 세계 여행의 희망이 이뤄지기 직전 허물어졌다. 모든 게 다 이렇게 될 것이라 생각되니 인생이란 허무하게만 생각 되었다.
그 무렵 김 인서 장로의 특별부흥집회가 있었다. 그 때는 부흥회라 하지 않고 추계 종교 대 강연회라 했다. 10월 보름쯤 된듯하다. 나는 종교란 미신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므로 가느냐? 마느냐? 내가 죽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으나 어머니 앞에 가는 것이 불효라 여기며 살고 있었다. 어머니는 그 전에 전도 받았다하여 초량 본 교회는 아니고 산꼭대기에 분소가 있어 집에서 얼마 되지 않은 곳에 있었기에 나가시도록 했더니 다음 날 옆집에서 문병도 오고 어머니 친구가 생겨 기쁘게 생각되고 예수 믿으면 친절하구나 생각되어 강연회 들으러갔다. 그때는 셋방을 초량 본 동네(시내) 쪽으로 옮기고 난 후였다. 동생(오목사)도 와서 3이 살고 있을 때다. 교회 가자고 하니 동생은 반가워했다. 가까운 거리에 있어 가게 되었는데 찬송 소리가 천사 노래로 들려 사람에게서도 저런 노래가 나올 가하여 그들의 생활을 보고 싶었다. 그 시절 교회당은 버금아(亞)자 집이였다. 앞자리는 노인 뒷자리는 젊은이들 왼쪽은 남반 오른쪽은 여반이었다. 부끄러워서 고개 숙이고 들어가 강연이 시작되어 들으려고 쳐다보게 되었다. 허술한 한복 차림의 강사가 들어왔다. 저런 사람이 강사일까? 놀라웠다. 성경 말씀은 빌립보 1:11, 과 시편 119:92이었고 제목은 ‘인생의 목적은 무엇인가?’였다. 결론은 하나님을 영화롭게였다. 예화로 고구마 순을 흙에 묻어주면 가을에 고구마 알을 만들어 주듯이 흙은 천사다. 사람도 목적이 있다. 성령으로 의의 열매를 준다 했다. 이 말을 듣고 이제는 자살할 필요가 없어졌다. 이제 부터는 그 길을 찾아 나서기로 했다. 그때 김 용하 장로를 만나게 되었는데 그는 탐아 선교사 밑에서 일하고 있었다. 탐 선교사는 자신이 짐도 지고 무거운 짐도 들고 다니기도 하고 차도 타고 다녔다. 김 장로는 신비적 체험도 있었고 그의 둘째 아들이 김동길 광주 그리스도 교회 목사다. 그 김 장로와 함께 장수 목야지 답사 차 자전거 뒤에 태우고 화개 악양 등을 돌아보았는데 그때 봄 가뭄이 극심해서 채소도 없었다. 바위틈에 뭘 심어 먹는 것을 보고 사는 게 어렵게 여겨져 포기하고 청학동도 못 보고 돌아오다가 지리산이나 올라가보자 하여 가게 되었다. 그때 그곳에는 남원 윤 장로라는 사람이 있었다.
남원에서 공장 시작 한 후 광주 수금 차 다녀오는데 오 목사와 이 선생과 4살차이 손위 백 년흠 목사 그때는 전도사였는데 그가 선교사 밑에서 일하고 있었고 김 용하 장로 밑에서 10여명이 무등산 원효사에서 성경 공부를 하게 되었다. 9월 첫 주 월요일부터 10일 간 했다. 남원에서도 오시면 말씀 듣게 되었다. 두해 째 주지에게 빌려 또 성경 공부를 했다. 주지도 기독교 집회에 참석 했다. 나는 동생이 그와 더 친했기에 권유에 못 이겨 무등산 집회에 왔다. 그런데 타선교사 밑에서 일 했던 허 목사와 불화가 있어 그가 불법집회라고 신고하여 선교사가 곤란케 되고 박 동하 장로와 김 용하 장로는 2년씩 형과 동생은 1년형 서 집사와 나는 조사 대상이었다. 배 장로도 있었는데 순창에서 조사 받게 되었을 때 그 경찰서에 배 형사가 있어 봐주게 되었다. 다른 사람들도 자기 지역에서 조사를 받게 되었다. 또 남원 경찰서에 불려가 무슨 공부 했는가? 신사 참배 문제는 어떻게 가르쳤는가? 성경 가르치는 사람이 그것 말하지 않았다 하여 걸려 넘어지지 않았다. 광주 유치장도 구경하게 됐다. 순창 유치장에서 하루 밤 자고 15일 광주 유치장 생활을 하게 되었다. 고등계 형사가 시국과 천황 천조대신 신사 참배 등을 물어 왔다. ‘천황이 지옥 가겠는가?’ ‘사람으로 정치 잘 하면 신(神)자 붙였을지라도 죄가 있으면 임금일지라도 지옥에 간다.’ 하니 뺨을 두 차례 때리더라. 보름 후 재판 없이 형무소 미결수로 있었다. 유치장도 천국과 지옥이 있었다. 식사 전에는 서로 이도 잡아주고 천국 이였다. 식사 때는 지옥, 몇 개씩 훔쳐 놓고 먼저 들어온 자가 고참이라고 더 먹는다. 내가 고참으로 있을 때 추워서 누워 있었는데 그들이 미안 했던지 더 준 것 한 숟가락 더 얻어먹고 얹혀서 15일 동안 못 먹게 되었다. 억지 금식 체험을 했다. 광주 유치장에서 동생이 간수들에게 신용을 얻어 아침마다 몸수색 점검했으나 면제 되었고 간수 통해 사과 두 개 얻어먹게 되었다. 형무소에서 두세 번 재판소 다닐 때 용수 쓰고 엮여 끌려가는데 힘이 없어 힘들었다. 일본인 검사가 안 걸리게끔 조서 대신 써주고 시말서도 자기가 손을 잡고 써주고 동정심으로 방면 해 주었다. 동생과 3이 갔는데 임시 방면으로 신사로 데리고 가서 절 하도록 했다. 탐심이 우상이라고 깨닫고 마귀는 무섭게 할 때보다 좋게 해 줄 때 넘어가게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창세기 3장처럼...
광주에서 수금 할 때 백 전도사 친척 되는 윤 장로 보러 노고단 올라가 보니 고사목(썩은 나무)가 많아 의자 만들려고 광주 정리하고 들어갔으나 일본 관리인이 아니 된다 하여 남원에서 장소 잡았다. 백 년흠 전도사 만나 성경공부 하다 걸려 들어갔다가 나와 병들어 있었다. 동생 집에서 잠자고 있을 때 문병 차 들려 이 현필 소식 듣게 되고 남원 부근에 오실 때 좀 들려달라고 했더니 어느 날 석양에 들렸더라. 영으로 통하는 듯 했다. 그때 모습은 사진에도 그렇듯이 국방색 양복 머리 기르고 구두 신었더라. 의자 공장에서다. 자립적 신앙 하려면 산중 훈련 필요성을 느껴 서리내로 갔는데 처음으로 나무집 배 집으로 지어 주었다.
그 후에 목공소 형님 자본으로 했기에 형님께 양도하고 2원 드려 주천면에 홀아비 살던 작은 집을 사서 8개월 살았다. 그때 식구는 내외 아들 2 딸 1 였다. 돈이 떨어져 둘은 수레기 어머니 살던 곳으로 가서 배워 오도록 하고 셋이서 산에 가서 버섯 따고 가을에는 도토리 까서 울리지 않고 풋 호박과 큰 솥에 넣고 쌀물 갈아 뜬물 풀어 불 때서 진한 죽 되면 먹을 만큼 떠서 먹었다.
목공소에서는 특별집회가 있을 때는 교회에 갔고 10여명이 모여 예배드리고 있었다. 목공소 이름도 3.1목공소라 했다. 이 선생은 며칠 동안 말씀 아니 했다. 목공소 안에 있는 빈집에 있을 때 일이다. 내가 ‘예수를 잘 믿으려면?’ 물으니 ‘오장치 차시오’했다. 걸인 되라는 뜻이다. 어떤 자매가 말씀 부탁을 드렸다. 말씀을 듣고 나서 넷째 이모가 무릎을 치면서 ‘이젠 살았다’했다. 얼마 후 불신자였던 남편이 부인을 찾으러 왔다. 그때는 아들이 없었는데 부남씨는 머리채여 가고 그 뒤에 아들을 낳았다. 이 선생은 미리 피한 후였다. 그 뒤에 남원 대산에 4명이 와 있어 교회가 옮겨 온 기분이 들더라.
남원 세탁소에 가서 극장 소개해 주던 친한 친구에게 전도하여 만주 봉천 가서 처음 장로가 되었다. 하루 차이로 믿게 되었다. 도토리 죽 먹을 때 와서 보고 ‘무섭지 않은가? 너무 한다.’ ‘돈이 없는 데 무엇이 무서운가?’ 답 했다. 나는 별미로 먹는다 했는데 그는 눈물이 그렁그렁 하면서 먹지 못했다. 둘도 없는 친구였는데 말년에는 시인하고 죽었다.
화순에서 오라고 하여 따라가게 되었다. 이 선생 만나니 ‘어떻게 살 것인가?’ ‘할 수 없으면 얻어먹지요.’ ‘그러면 됐다.’했다. 이 선생 친구 집 방 얻어 주었는데 갓 집이였다. 사연양 부친이 면서기였다. 3년 후 능주 오게 되어 일감 얻어 일 하다가 보국대 가게 되어 그일 맡아 벌어먹었다. 사연양 부친 도움을 받았다. 몇 개월 살다가 이 선생 산에 해 논 나무를 짐져 주는 일이 있었다. 직행로인 남의 논으로 오려다가 ‘성경 보아야지!’하면서 삼갔다.
그 후 문바위 입구 빈집 빌려 몇 달 동안 살았는데 일거리 있을 때 일해 끼니를 때우는데 벼룩이 심했다. 방에 가마니 깔고 살 때다. 첫 날은 몰랐으나 저녁마다 초악을 앓게 되었다. 하루건너 밤마다 앓게 되어 이불 뒤집어쓰고 누르라 했다. 삼일 째 되는 날 또 기다려졌는데 아니 왔다. 산에 들어오기 오래 전 일이다. 남원에 가끔씩 들리다가 끊어져 찾아가 뵌 적이 있다. 그 때 정 원장이 Y총무로 있을 때다. 일본 사람 잠실을 Y에서 얻어 농업실습학교를 했다. 남원 오지 않은 이유는 정 원장 낚으려고 했다. 그 무렵 목공소는 큰집이 하고 있었지만 한동안 또 했다. 이런 일도 있었다. 남원에 물 노인 등이 와서 합숙 절제 생활을 한 적이 있었는데 한 달 동안 하루에 한 홉도 안 들었다. 그 때에도 학질이 걸렸다. 푸성귀를 먹고 공장에서 잘 때인데 또 하루건너 올 것으로 알고 다음 날 오는 이유를 알고 싶어 성경으로 점을 쳐 보았다. 성경을 펴니 누가복음 6장 46절이 나왔다. ‘너희는 나를 불러 주 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나의 말하는 것을 행치 아니하느냐?’ 깨닫고 기다렸는데 열이 안 올라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오랜 후에 곡성에서 유 선생 오신다하여 집회 참석하러 광주에서 곡성까지 걸어갔다. 육지에서는 언제나 걸어보려 했고 또 그 고장에서 나온 음식 먹어보려고 했다. 그런데 감기 걸려 집회 참석 했으나 말씀 듣지 못하여 자리 비켜주기 위해 삼산이란 곳 기도처 빌려 ‘내가 내려갈 때 까지 올라오지 마시오.’했다. 김치 우거지 국을 끓여주어 잘 먹으니 열이 많이 나고 무엇과 싸워 계속 지니 할 수 없이 내가 지겠다고 맡겨버리니 열이 모두 내렸다. 열이 가시고 가래와 기침이 나왔다. 보통 때와 달리 가래침 냄새가 심했다. 그 때 비로소 깨달았다. 죄는 그 때만 뉘우쳐 되지 않고 살과 뼈 속에까지 사무쳐 있어 내 힘으로는 빼내지 못하고 성령의 힘으로 만 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 때 승명장로 부친이 올라와서 함께 지내게 되었다. 내 힘이 지칠 때 맡겨 버리면 해 주심을 알게 되었다. 그 경험으로 80부터 다시 계산해서 88이 되었다. 사(厶):나를 버리라는 깨칠 팔(八)이다. 문바위 입구에서 살다가 큰골 산집이 비어 그 곳에 들어가 2-3년 살다가 여순 반란 때 무등산에 들어가 소년들과 함께 살았다. 소년들은 10여명 어머니들은 많았다.
능곡에는 서울 Y총무 현 선생이 광주에서 유 선생과 이 현필 만나게 하고 교제 시작 한 후 목공기술 있다 하여 목공부에 별 일도 없는데 직원으로 와 있어 달라고 해서 호혜원 신 진호 장로와 있게 되었다. 능곡 청년 수련 장소가 있으니 가서 살라고 했다. 선교사 오를 따서 오원(吳園)이라 했다. 6.25가 되어 피란길에 이 대영씨 처남댁 까지 22식구가 평택까지 수레에 지게 싣고 따라가다가 6개월 떠돌다 다시 들어왔다. 이 대영씨 소까지 온 사람 모두가 일 해주면서 얻어먹고 살았다. 인천 속새우치에서 살 때 바다 가에 가서 나물 뜯어다 삶아 먹었다. 초상집에 가서는 관 짜주고 얻어먹었다. 평택에 미군이 지키고 있었는데 식구들이 반쯤 건너가고 마차와 수레기 어머니가 못 건너가서 이 대영씨와 나도 못 갔다. 보호 처녀 4식구가 있었다. 그날 밤 눈이 많이 내렸다. 오두막에 피란민이 꽉 차 있었다. 밤을 꼬박 서서 보냈는데 죽은 사람은 없었다. 다음 날 강을 건너 식구들을 만나게 되었다. 그 때 미군들의 행패가 심했다. 그때가 대한(大寒)추위로 한창 추울 때인데 덕석을 처마 끝에 치고 사람들은 앉아있고 소는 집 안에 넣어 두었다. 저녁에 남자가 여반 바깓 쪽에 있자 하였으나 하나님께 맡기자고 했으며 정신 이상자가 들어 왔는데 일부는 내 쫒자고 했으나 그대로 받아 들였다. 보호는 하나님께 맡길 때 해결 잘 되더라.
그 후에 이 선생이 올라와 보국대 모집이 있었다. 집마다 1사람씩 소집해서 내가 가겠다고 하여 가게 되었다. 먹는 것 때문에 다툼이 심했다. 아담이 먹는 것으로 타락 했기에 절제하기 위해서 내게 오는 것도 양보하고 아니 먹었다. 먹지 않으니 힘이 없어 곡괭이질은 하나 삽질은 던지지 못 했다. 단장이 3일 지나서 말하기를 ‘보기에 도인 같은데 시국이 어떻게 될 것 같소?’물어 보더라. 칠일 후에 단장이 노약자 고르라 할 때 ‘당신은 가라.’고 보내 주어서 증명 없이 밤이면 알 수 없어 자고 능곡을 찾아왔다. 능곡 가는 길을 사리재를 물으면 된다하여 물어 오다가 나무사이에 버섯이 오복이 있어 여름옷이라 샤쓰 벗어 버섯을 따 담았다. 그 순간 사리사욕 못 벗어 자유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귀한 손님 주겠다고 가져 갔는데 이 선생이 올라와 계셨다. 내가 좀 일찍 왔으면 아니 갈 것인데 좀 더 깨달으라고 늦게 온 것이라고 했다. 버섯은 벗으라는 뜻이다. 두 번째 보국대 갔을 때는 수가 차서 가버렸다고 보내줘서 오게 되었다.
광주로 내려온 후 진도에 처가가 있는 방 한식씨(선교사 운전수)가 진도에 고아가 많은데 돌 볼 사람이 없다고 이 선생 보고 말 해 진도 책임자로 내가 3월 8일 내려가게 되었다. 도착은 9일 이었다. 3.8선은 내 마음에도 생긴다 했다. 9일 주일 날 방 한식씨 차로 고아 데리고 세등 동네로 왔다.
이 현필 선생은 하나님 말만 듣지 사람 말 안 들었다. 어느 닐 김 준호씨가 ‘이 선생이 오시래요.’해서 걸어갔다. CAC 운전수 방안식씨가 진도 처가에 가보니 그 곳에 고아가 많은데 돌볼 사람이 필요한데 동광원에 부탁하면 해결 될 것 같아 얘기 했다고 했다. 몇 년도인지는 모르겠으나 날자 만은 확실히 기억한다. 3월 8일이였기 때문이다. 3.8선은 우리들 마음속에도 있기 때문이다. 9일 주일 날 고아를 모집했는데 세등에서 맏딸이 5세인 5명의 고아를 차에 싣고 군청에 가서 5명분 식량을 타가지고 향교로 갔다. 그 후 방씨 오두막에 있다가 고향에서 면장도 한 춘일씨 아버지 목사 소개로 군청에도 말해주고 연산리 사토를 소개해 주어 이곳에 오게 되었다. 광주 누문동교회 시무하실 때 춘일양은 12세였고 그 때도 친절하게 지냈다. 이곳에는 주막집이 있었는데 사게 되었다. 돈지 어머니 집에 살다가 세등(친정집) 가까이 오게 되었다. 인원이 많아져 군청에서 고아들 데려가고 본 식구만 남게 되었다. 모두 3개월가량 살았다.
그 뒤에 이 선생이 ‘무엇을 깨달았습니까?’ 질문해 왔으나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때는 추운 겨울이였는데 칠금씨 노인과 같이 내려오다가 초상집 앞에 신용으로 만들어 놓은 신울 주서 신고 능주로 해서 오다가 장흥에 들렸다. 밤이 되어 삼일인지 저녁 교회에 들어가 설교 듣고 누더기 입고 강당에서 자려고 한다 하니 추워서 안 된다고 해서 난처했는데 집사 한 사람이 헌 칸 방에 자고 노인은 안방에 자라고 하여 고맙게 자고 나와 강진으로 갔다.
강진에는 아는 목사 한 분이 있었는데 그는 6.25 때 장흥에서 목회 할 때인데 지게꾼이 잘 변호해 주어서 살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함평 장흥 몇 군데 옮겨 다니다가 그 때 강진에 있을 때 였다. 그가 목사 된 이유는 발언권을 얻기 위함 이였는데 목사 고시 때 한사람씩 기도를 했는 데 ‘아멘’을 얻어 합격했다고 한다. 그런데 아는 그가 없어 교회에는 못 가고 고아들에게 얘기해 주려고 고아원을 찾아갔다. 고아원 원장은 이 선생을 존경하는 이 였다. 다음 날 해남 이준묵 목사를 찾아갔다. 마침 성경토론회가 있어 누더기 벗고 한복 입고 방청했다. 토론회가 끝나고 다과회에서 말하라 해서 히브리서 11장 1-3을 읽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다음 날 아침 누더기 입고 거리에 나오니 다른이들은 아는 척 하는 데 토론회 진행한 집사는 모른 척 하드라. 이 선생이 ‘무엇을 깨달았는가?’ 질문했다. 돌아본 소감으로 ‘이 목사는 이 선생 친구이나 서로 모르는 것 같소. 그러나 부인은 이 선생 이해가 빠르는 것 갔소. 다 지상(물질계) 이야기 이지 영계는 모릅디다.’ 사도행전 10장에 고넬료의 이야기가 있다. 그는 세상 사람들 모두가 존경하는 자 였는데 왜 베드로 초대가 필요한가? 이는 준비된 자에게 한한 이야기다. 허물을 깨달은 자 준비된 자만이 받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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